유광렬 (柳光烈)의 왕징웨이와의 회견 (1940.4.1)
최종 수정일: 2023년 7월 23일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언론인 유광렬의 보도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유광렬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유광렬 (柳光烈, 1899~1981) , 태평양전쟁 시기 친일 행위를 하여 지금까지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아있는 그는 1940년 3월,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편집국장으로 난징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왕징웨이 정권의 환도식전과 왕징웨이와 인터뷰를 하게된다.
유광렬 (柳光烈, 1899~1981) 은 파주에서 태어나 1919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每日新報) 에서 기자로서 언론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동아일보의 창간에 합류하여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1940년 그는 자신이 청음으로 기자활동을 하였던 매일신보로 돌아와 그곳의 편집부장이 되었고, 편집부장인 그는 1940년 3월 30일의 난징국민정부 환도식전에 참가하여 이를 취재하게 된다.
그는 이후 매일신보에 자신의 난징취재기를 연재하였는데, 이는 4월 3일자 매일신보 1면의
[重慶側의 迷夢打開 全面的和平에 邁進-南總督, 中村軍司令官 메시지에 感謝-柳本社特派員, 汪氏와 會見] (중경측의 미몽타개, 전면적화평에 만진 - 미나미 총독, 나카무라 군사령관 메시지에 감사- 유 본사 특파원, 왕씨와 회견)
이라는 기사에서 자신을 비롯한 기자단과 왕씨의 회견내용을 수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는 같은 날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다른 조선의 신문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는데, 이는 유광렬이 난징에 파견된 "유일한 조선인 기자" 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매일신보는 이러한 유광렬의 취재기를 단독으로 보도 할 수 있었다. (매일신보를 제외한 여러 조선의 언론이 이를 보도하러 난징에 왔지만, 이들은 유광렬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기자였다.)
또한 그는 1940년 4월 15일에 그는 태평통 부민관 (경성부민관을 의미) 에서 열리는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에 직접 참가하여 자신이 난징에서 취재한 바를 강연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임광렬의 《국민정부 환도식전 참관의 관상 》 이라는 강연제목을 볼 수 있다.
또한 4월 18~19일자 매일신보 1면에서 그는 자신의 환도식전 취재기록을 다시 한번 연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유일한 조선인 기자였던 임광렬이 난징에서 겪었던 일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조선인 기자의 임광렬의 취재기를 토대로 왕징웨이 정권 성립 당시를 묘사해보려 한다.
( 행사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제가 이전에 작성하신 글을 보고 오시면 더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B%82%A8%EA%B2%BD%ED%99%98%EB%8F%84%EA%B9%8C%EC%A7%80%EC%9D%98-%EC%9D%BC%EC%A3%BC%EC%9D%BC-%EB%AC%B4%EC%8A%A8%EC%9D%BC%EC%9D%B4-%EC%9E%88%EC%97%88%EB%82%98-1940-03-23~03-30 )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일행은 28일 이전에 난징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확한 도착날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27일 혹은 26일로 생각된다. 임광렬을 비롯한 일행은 난징의 수도반점(首都飯店) 을 숙소로 이용했다. 임광렬의 글에서 일본과 각국의 기자단들 또한 수도반점을 숙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아, 일본 혹은 왕징웨이정권측에서 수도반점을 일종의 프레스센터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8일 (木)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일행은 중산북로에 있는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도주의사항에 대해 들은후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를 회견하고 계림호(鷄林號)를 타고 이미 27일 난징에 도착했던 신용옥 (愼鏞鈺) 신항공사사업사장 과 함께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사장,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니시오 사령관은 이를 일일이 신중히 읽으면서 ,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미나미 지로 총독각하와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 각하로 부터 이런 간곡한 말씀을 주시다니 감사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또한 매일신보 사장으로부터 격려의 말씀을 주시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욱 반도민중의 총후봉공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라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이후 유광렬과 신용옥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후 신용옥의 계림호는 상하이로 향했다. 임광렬은 자신의 글에서 자신도 함께 상하이로 동행하고 싶었으나, 다음날 있을 국민정부환도식전의 취재준비가 미비할 것을 우려하여 함께 가지 않았다.
3월 29일 (金)
이 시점에서 이미 프레스센터 수도반점은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뿐만 아니라 중국 현지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기자단들이 대거 모여있었다. 이 시점에서 임광렬은 걱정을 했는데, 총사령부 보도국에서 왕징웨이의 환도식전에 참가할 인원을 300명으로 제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230명의 기자가 이를 보도할 수 있었다. 일본언론 (조선포함) 100명, 중국 60명, 기타국가 70명이 배정되었다.)
보도국에 따르면 각 언론사에서 1명정도는 대체로 수용이 될 것이라고 했으나, 문제는 보도국에서 3월 22일의 중앙정치위원회 회의를 참관한 언론에 우선권을 부여하기로 결정되었고 또한 100명으로 제한된 일본언론의 참가권의 대다수가 이미 일본 국내의 대형언론의 고정으로 할당됨에 따라 남아있는 참가권은 단 4장. 이로 인해 일본 국내기자들도 대다수가 참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라고 하니 조선에서 출발했으며 중앙정치위원회 회의 이후 난징에 도착한 임광렬을 포함한 매일신보 기자단은 이를 취재하지 못할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에서부터 모처럼 먼길을 오신 조선기자들에게 편의를 드리겠다"
다행히도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언론들의 사정을 들은, 특히 유광렬이라는 조선인 기자가 취재를 왔다는 이야기에 보도국에서는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언론의 기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고. 이로인해 유광렬과 다른 기자단은 무사히 내일 있을 환도식전을 참관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30일 (土), 국민정부 환도식전 당일날
보도국에서 8시 반까지 난징 계림사(鷄林寺) 안의 고시원 (考試院) 앞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임광렬과 기자단은 자동차를 몰아 계림사로 향했다. 이날 아침에는 봄비가 내렸는데,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미 계림사에는 수많은 기자단의 차량들이 모여있었다고 한다. 계림사 안에서는 친위대들이 도열을 하며 기자단들을 환영하고 있었고, 기자단들은 계림사의 "천하위공 (天下爲公)" 이라는 쑨원의 필체가 적힌 고시원 정문을 통과하여 행사장으로 향했다.
실제 계림사 고시원의 정문모습. 천하위공 (天下爲公) 이라는 쑨원의 필체가 세겨져 있다.
오전 9시가 되자 현장에서는 3발의 큰 폭죽이 터졌고, 군함 하이스이 (海綏) 에서 예포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왕징웨이가 고시원 정문 뒤 광장에 도착했다. 왕징웨이와 요인들은 새로운 왕징웨이의
화평반공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 (和平反共建國靑川白日萬地紅旗)의 국기게양식을 가지고, 임광렬을 비롯한 현장의 모두가 중화민국의 국가를 제창했다. (이때 어떤 버전의 노래가 사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에서는 기존의 괴뢰정부들이 사용하던 경운가 (卿雲歌) 가 울려퍼졌다고 서술했는데, 국민정부의 계승을 이야기했던 왕징웨이 정권이 이러한 경운가를 사용했다고는 생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정부의 국가 (삼민주의가) 혹은 국기게양시에 사용하는 (국기가) 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광렬은 이때 자신의 글에서 왕징웨이가 이때만 하더라도 긴장을 많이 했는 모양인지 왕징웨이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서술했다. 이후 쑨원의 묘가 있는 중산릉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왕징웨이 정권의 각 부원장의 임명식을 가졌다.
그리고 행사 일동은 바로옆의 신설된 난징 국민대회당의 중앙강당에서 오전 10시 연설을 시작했다. 이가 바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환도선언" 이었다.
그의 서술에 의하면 환도선언을 읽을 때 왕징웨이는 이전의 국기게양식을 비롯한 식전행사보다 더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인사들은 대회당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가졌다. 이때의 분위기를 임광렬은 "매화꽃이 만개했으며, 두마리의 비둘기가 화평을 환영하듯 날아갔다." 라고 묘사했다.
국민대회당에서의 환도선언 발표가 끝나고 11시부터 별관에서 왕징웨이와 기자단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때 200명의 기자가 기자회견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유광렬도 앞에서 이야기했듯 보도국의 배려로 이곳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통역은 저우포하이가 맡았다.)
왕징웨이는 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정부 경제정책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이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 중일 양국이 이로부터 협력하여 동아의 신기원(新紀元) 을 짓게 되었음은 (기자) 여러분들이 이미 본 바이며, 신중국의 탄생도 이미 여러분들이 본바이다. " - 왕징웨이와 기자단의 회견 中
임광렬은 이러한 기자회견에서 왕징웨이의 버릇을 하나 찾아냈는데, 환도식전을 읽을 때도 안경을 쓰지 않았던 왕징웨이가 기자회견에서는 안경을 쓰고 나와선 계속 말을 하는 중에 안경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임광렬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행동을 그의 버릇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임광렬과 기자단은 숙소로 돌아와 조선의 신문사 본부에 보낼 전보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서술에 따르면 이때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을 축하하는 거리행렬이 그의 숙소 근처를 지나갔다고 한다. 임광렬은 창문을 넘어 이러한 행렬을 봤는데, 이 행인들의 수가 실로 수만은 되는 것 같으며 끝이 없어 보인다고 서술했다.
4월 1일 (月)
임광렬과 매일신보 기자단은 4월 1일에 추가로 진행된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번 30일의 회견보다는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후 4시, 임광렬과 기자단은 30일 기자회견을 했던 별관에 도착했다. 건물안의 정원을 지나 방에 도착했는데, 이방에는 여러개의 그림이 있었고, 왕징웨이가 앉을 중앙의 테이블에는 아직 피지 않은 복숭아꽃이 도자기속에 있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기자대표가 기원 2600년 (1940년) 을 기념하는 축주를 전달했고, 이후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했다. 이후 여러 언론의 기자단이 모여있던 큰 방에서의 회견은 끝이나고 각각의 언론이 각각의 축전을 전달했고 이후 왕징웨이는 매일신보의 기자단을 조용히 별관의 식당으로 초대했다. 왕징웨이가 일본의 거대언론도 아닌 조선의 언론을 초대한데에는 매일신보 기자단이 먼 곳에서 온 것에 대한 감사인사로 생각된다. 또한 임광렬이라는 조선인 기자가 있었다는 특징도 있었다.
왕징웨이는 식당에서 임광렬을 포함한 매일신보 기자단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권했다. 임광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징웨이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의 왕징웨이를 세기적 위인(偉人) 이라 평가했고 이러한 위인 과 가까이 할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했다고 자신의 서술에서 밝혔다.
왕징웨이는 이자리에서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에 대한 감사를 기자단앞에서 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들께서 직접 보신바와 같이 국민정부의 환도는 선언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선언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전면 화평을 실현하여 중경측으로 하여금 용공항일 (容共抗日) 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
"나는 우선 우리의 노력이 미치는 구역에서 화평을 실현하여 "화평건국" 이 가능하다는 나의 굳센 신념을 보여주려 합니다. 우리의 화평건국과 중경측의 민족보전은 다른말같지만 사실 같은 말입니다. 이제부터 나와 정부직원들은 이를 위해 전력을 다해 집중할것입니다. "
"일본의 흥아론이 정당한 이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한것은 저의 일생에 있어 잊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국민정부의 환도에 대하여 정중한 축전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도 직원일동과 함께 일치협력 (一致協力) 하여 여러분들의 뜻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자리가 준비는 변변치 않지만 다같이 정답게 가슴속에 품어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왕징웨이는 기자단에게 이렇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기자단과 함께 만찬에 참가했던 신용옥을 소개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왕징웨이는 이렇게 물었다.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하자 신용옥은 편도로 비행할시 다섯시간 이면 갈 수 있다고 회답했다.
이후 유광렬이 직접 왕징웨이에게 직접 자신이 환도식전의 연설에서 감동받은 부분을 이야기했다.
"각하께서 삼민주의의 민생주의(民生主義) 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공자의 대동주의 (大同主義) 라는 말에 대하여 조선의 청년들은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이전부터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기에 각하의 말에 더더욱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노력에 힘입어 대동주의는 동양에 더더욱 확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에 왕징웨이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민생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동양에는 동양고유의 정신이 있습니다. 조선의 청년들이 이러한 옛 정신을 존중한다는 이야기에 기쁜 마음을 금할수가 없군요. 이러한 혼란의 세계 속에서 도의(道義) 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광렬은 자신의 서술에서 왕징웨이의 이런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왕징웨이를 눈빛은 총명하며, 목소리는 힘이있고, 열정이 있는 모습이 중국의 오억인구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다웠다고 평가했다.
그날의 점심 메뉴는 "샌드위치" 였다. 왕징웨이는 직접 큰 접시의 샌드위치들을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광렬은 이러한 샌드위치를 나누어주는 왕징웨이의 손을 보며 "몸은 그렇게 가는 사람이 손가락은 왜이리 굵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샌드위치를 먹고 차를 마시고 난후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를 직접 유광렬에게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광렬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식찬을 마무리 하면서 기자단의 마츠모토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선은 합병이후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조선과 일본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흥아정신에 불타고 있다"
라는 말에 왕징웨이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왕징웨이가 이러한 기자의 말에 답변이나 맞장구를 치지 않고 단순히 끄덕거린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이렇게 25분의 사실 다과회에 가까운 식사시간이 끝나면서 매일신보 기자단의 회견은 끝이 났다. 왕징웨이는 별관 정문 앞까지 나와 고개까지 숙이면서 친절히 기자단을 배웅하였다고 한다. 임광렬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친절을 높이 평가하고 왕징웨이와의 만남을 "일생 뼈속까지 감격한 일" 이라고 서술했다.
임광렬은 해방이후 자신의 과거 친일행적을 숨기기 위해 자신은 1940년 매일신보에서 미움을 보여 "해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일본기자들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면담시간을 가진 것에 대해 일본기자들의 미움을 샀고, 이로 인해 해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행적을 1면에 당당하게 특집으로 게재 했다는 점, 친일행각으로 보이는 행동이 오히려 1940년 매일신보를 떠난이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임광렬이 1940년 매일신보를 떠나야했던 것은 압박으로 인한 해임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사정, 더욱 발전된 친일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광렬의 이러한 취재와 면담은 일종의 친일행위였지만, 식민지 조선과 왕징웨이 정권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몇되지 않는 연결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광렬의 서술이 親日, 親 왕징웨이정권적으로 고의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광렬의 취재기가 다른 언론의 왕징웨이정권 환도식전을 다루는 기사와 크게 다른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신뢰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4월 3일자 / 4월 18~19일자
유광렬의 사진
계림사 정문의 사진 - Wang Jingwei and Lin Baisheng Photograph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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