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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제국의회 시정방침연설(施政方針演說) ② (1944~1945)
제84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44.1.21) / 도조 내각 (第84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도조 히데키 (米内光政) 제 40대 총리 (1941.10.18~1944.7.22) . (39대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내각 (3차) 때는 연설이 없었다.) 오늘 개원식에 즞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온 힘을 기울여 결전하의 중대한 직책을 수행하고 신속히 전쟁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돌아보면 대동아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 황군 장병은 폐하의 위광아래 더욱 뛰어난 계략으로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황군 장병의 건투에 마음 속 깊이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충렬한 전몰 장병에게 삼가의 애도의 마음을 표합니다. 유족에게도 마음으로부터 동정의 뜻을 표하며, 전 부상 장병들의 신속한 재기를 기원합니다. 또 저는 여러분께 함께 싸워나가는 국민 여러분의 역투에도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대동아전쟁의 전황을 바라보건대 적의 반항은 최근 더욱 치열하고 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막대한 손실을 연이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물량만을 믿고 차례로 기지를 전진시키고 우리 해상 교통선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운수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최전선 장병은 이러한 심각한 전황에 대처하여 서전(緖戰)에 획득한 전략적 우위를 활용하면서 계속 용전분투하여 적에게 심대한 손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솔로몬(Solomon) , 길버트 (Gilbert) 일대 (타라와 전투(1943.11.20) 를 의미.) , 중국 방면에서의 거둔 혁혁한 성과는 정말로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로지 지도자에 의해 눈이 가려진 미영의 일반 대중만이 이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그동안 적의 인적 전력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혔는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명이 열 명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황군 장병 앞에 무모하게 도전 미영군의 전도는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최후의 패배 뿐입니다. 이러한 최전선 장병의 용전감투(勇戰敢鬪)에 호응하여 1억 국민은 더욱 떨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학도병이 출진하고 징병적결이 낮아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교전국이 일찍이 실시한 것입니다만, 오늘 비로소 제국이 이를 단행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 적 미영에 대항하여 동원의 측면에서 제국이 가진 우위를 보여줌과 동시에 편으로 적 미영을 격퇴시키겠다는 단호한 제국의 결의를 내보이는 것입니다. 한편 전투력, 특히 항공전투력의 증강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비약적으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작년도에 비해 이미 두 배 이상에 달하고 있습니다. 작년 11월 1일에는 아시는 바와 같이 군수성(軍需省)이 신설되었고, 지난 15일에는 항공기 생산에 관한 업무가 육해군 당국으로부터 이관절차를 마쳤습니다. 이를 통해 군수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항공기 증산에 관한 태세는 더욱 강화되어 앞으로 항공기 생산은 현재의 몇 배에 달하는 약진을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전투력 증각은 격렬한 작전의 요구를 감안하여 여전히 많은 궁리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섬유공업은 일찍이 단시일 내에 세계수준을 돌파하여 세계 최고의 기능과 능률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1억의 탁월한 자질을 항공기 공업에 유감없이 발휘하여 항공기의 비약적 증산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확신 아래 국민 여러분과 함께 행정사찰등의 실적 등에도 비추어보면서 끝없는 궁리와 노력을 통해 기필코 최전선의 요망에 부응하여 항공전투력의 획기적 증강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저번 남태평양 방면에서 알 수 있듯이 적 미영, 특히 미국은 겉으로는 장기전을 주장하면서도 실은 내적으로 계속 단기전을 갈망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긴 보급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작전 상의 불리함은 물론, 그들 안팎에 걸친 심각한 고뇌와 불안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미국이 가장 믿는 군수생산도 이미 포화점에 달했고, 자재와 노동력 문제를 둘러싼 불안감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영국은 국력이 고갈되어 피폐도가 점점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제국에게 시간을 주어진다면 제국의 전략거점은 더욱 강고해져 남방의 군수자원은 전력화되고, 대동아민족의 결속도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들은 제국의 지위가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당연히 고려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자하게 무명의 군대를 일으켜 국민을 전쟁의 고뇌에 내몰고 있는 이들 미영의 지도자들은 해가 갈 수록 모집된 국민의 고뇌와 불안에 직면하여 무모한 폭거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국가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근본적인 모순이 감춰져있는 연합국 사이에는 당연히 이 문제가 표출되기 전에 신속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제 적은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적이 초조해하는 지금이야 말로 적을 철저히 몰아붙여 파국으로 내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에 제국은 끝까지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 기회를 포착하여 더욱 맹렬하게 적에게 타격을 가하고자 합니다. 여섯 차례에 걸친 부건빌 (Bougainville) 항공전, 네 차례에 걸친 길버트 (Gilbert) 제도에서의 항공전은 적에게 커대란 피해를 반복하여 입혔습니다. 이는 아무리 물량의 풍부함을 자랑하는 미국일지라도 결국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하물며 수만의 적 장병이 단시일 내에 남쪽 깊은 바다 속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적의 지도자가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앞에 두고 애써 이를 은폐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동안 적을 요격한 황군의 위력은 더욱 위대해졌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작전으로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1억 관민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 매진하고 있는 전투력, 특히 항공전력의 증강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물심양면에 걸쳐 항강 장기전을 견고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장기전에 준비한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릴 필요 없이 안으로는 강인하게 견딜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밖으로는 수시로 적지적소에 통렬한 공격을 가한다는 적극적 공격의 태세를 말합니다. 요컨대 앞으로 전쟁수행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적이 초조해하면서 총공격에 나서는 기회를 잘 포착하여 적 전투력을 격퇴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전투력, 특히 항공전투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키고 물심양면에 걸쳐 장기전에 대비하면서 적극 공세로 전환하여 적을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이상 전쟁수행의 요체에 의거하여 정부는 국내의 결전시책에 지장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정부는 작년 가을 이후 국내태세의 결전화에 따른 제반조치를 시행해왔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힘을 기울이려는 시책의 중점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전선에 신속히 우수한 항공기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바로 현지의 전황의 대세를 가늠하고 이번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일입니다. 때문에 수량과 시기는 항공 전투력 증강의 절대적 요구입니다. 이는 그리 쉬운일이 결코 아닙니다만, 필승을 위해선 이를 꼭 완수시켜야 합니다. 정부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국민여러분과 함께 확신을 가지고 이를 기필코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전투력의 증강, 특히 항공전투력의 증강을 위해서는 철, 경금속, 석탄 및 기타 중요군수물자의 증산과 더불어 국민근로의 강화와 해륙 수송력의 확보, 향상이 근본요건입니다. 정부는 중요군수물자의 증산을 위해 작전의 요구에 대응하면서 획기적 증산 계획 아래 그 실현에 아무런 차질이 없게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국민그로 강화에 대해 정부는 수량의 증가, 즉 인원을 증가시키는 것과 질의 향상, 즉 생산효율의 향상을 위해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자 합니다. 수량의 증가는 국민동원의 강화로 이어져 국민의 부담을 더욱 증대시키고 국민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만, 정부로서는 향후 격렬한 전황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히 이를 실행하고자 합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이 긴급한 국가의 요구에 대해 기꺼이 이에 응해줄 것으로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질의 향상은 각 방면에 걸쳐 여전히 많은 개선향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부는 이를 지도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각 방면의 당사자가 이 점에 관해 더욱 궁리하고 노력을 기울여 전혀 부족함이 생기지 않게 최선을 다할것입니다. 해륙수송력의 확보와 향상에 관련하여 현재 해상수송과정에서 입고 있는 손해는 결코 경시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이번에 바다와 하늘로부터 호위를 강화하여 선박의 손실을 극력 감소시킴과 동시에 수송선, 승무원, 적하율, 하역능률 등 제반 문제에 걸쳐 긴급대책을 강구하고자 합니다. 특히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박건조를 촉진시키고 나아가 육상수송을 강화하는 등 조합적으로 수송력의 확보, 향상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이상 여러 방책과 식량의 확보는 필승을 위해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요건입니다. 정부는 이전부터 식량의 자급태세를 강화하고자 신중한 계획 아래 노력해왔습니다. 지금 제국의 식량은 국민 여러분의 노력을 통해 미곡을 비롯해 특히 보리와 감자등을 획기적으로 증산해왔고, 만주국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앞으로 전쟁이 아무리 길어지더라도 아무런 불안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황국 농촌의 전통적인 미풍양속 아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기대고 도우면서 수많은 곤란을 돌파하고 부지런히 식량증산에 힘써온 농촌 여러분의 노력에 참으로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시하에서, 특히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식량의 확보가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는 전쟁사,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을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정부는 식량의 증산과 배급의 원활화에 앞으로 더욱 힘써서 식량자급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의 강력한 협조를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또 전황의 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조세와 국민저축의 증강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산업자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특히 절실합니다. 정부는 국민 여러분의 협력을 얻어 성과획득에 만전을 기하고자 합니다. 이상의 시책과 병행하여 관리 복무의 결전화는 모든 시책의 근본적 전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례 없는 중대 전황에 비추어 이제 우리 관리의 직책수행 여부는 곧바로 국민 사기에 반영되고 국민의 활동을 좌우하는 등 전쟁 수행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정부는 이번에 전시관리복무령(戰時官吏服務令, 1944.1.4) 를 논의, 공포함으로써 특히 전시하에서 관리가 보여야할 도리를 명시했습니다. 이번에 우리 관리들은 더욱 안으로는 성찰하고 서로 격려하고 노력하여 본 칙령에 제시된 바를 삼가 명심하여 지킴으로써 전시하의 복무에 아무런 차질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전쟁수행의 요체와 이에 의거한 정부의 국내시책의 요점은 이상과 같습니다.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1억 국민에게 일관되게 흐르는 필승의 신념입니다. 대동아전쟁 승리획득의 확신입니다. 전쟁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결국 의지와 의지의 싸움입니다. 지금 세계의 열강은 모두 모든 국력을 다해 수년간 싸우고 있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끝까지 최후의 승리를 굳게 믿고 계속 투지를 발휘한 자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최후 승패의 갈림길은 정말로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이번 싸움에도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고난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동시에 적은 당연히 우리의 맹공격 앞에 많은 아픔과 괴로움을 겪을 것입니다. 결국 적이나 우리나 모두 싸움에 지쳐 먼저 필승의 신념이 동요하고 투지를 먼저 잃는 쪽이 나올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볼 때 세계에서 으뜸가는 국체(國體) 를 가지고 절대 불패의 제국에 적대한 국가들이야말로 정말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3천년동안 번창해온 황실을 받드는 야마토(大和) 민족의 진충보국의 정신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 힘은 스스로 자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분기한 대동아전쟁에서 그 어떤 것도 불태워버리겠다는 기세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위험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곤란이 눈앞에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 1억 국민의 정신력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전의 애투 (Attu) 섬과 최근의 타라와 (Tarawa), 마킨 (Makin) 두 섬에서 우리 용사는 부족한 병력으로 수배, 아니 수십배의 적을 쓰러트리고 옥쇄(玉碎)했습니다. 이들 용사는 우리 1억 국민들 대표하여 야마토 민족의 정신력이 어떤 것인가를 엄숙히 적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용사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충렬 장병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귀신을 곡하게 만든 이런 위대한 정신력이야말로 우리 1억 국민에게 연면히 흘러내리는 저력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신력을 발휘한다면 끝내 이 정의의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적이 내심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이러한 정신력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정신력 위에서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방책의 실행을 통해 획기적으로 전투력을 증강했을 때 우리 앞에는 오직 최후의 승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대동아의 정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작년 11월에는 대동아회의 (大東亞會議) 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완성을 위해 성대하게 개최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책임있는 지도자가 친히 한자리에 모여 친목 명랑한 분위기 아래 거리낌 없이 대동아의 장래를 논의하고 공동의 결의에 도달했습니다. 즉, 대동아 각국은 공존공영(共存共榮), 독립친화(獨立親和), 문화양양(文化昂揚), 경제발전(經濟發展), 세계진운의 공헌(世界進運貢獻)이라는 5원칙 (대동아회의의 결과로 발표된 대동아공동선언의 내용) 아래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건설함으로써 세계평화의 확립에 기여하겠다는 것을 단단히 선언한 것입니다.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대동아회의에서 왕징웨이의 연설은 여기를 클릭 : ] [대동아회의에서 왕징웨이의 폐막사는 여기를 클릭 : ] 생각컨대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이야말로 우리나라 창건의 큰 이상이 바로 대동아 여러민족의 이상과 서로 합치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모든 동아인 공동의 마음을 가장 엄숙하게 세계에 천명한 것입니다. 이제 대동아 10억 민중은 더욱 긴밀한 제휴 아래 기필코 동아의 침략자이자 공동의 숙적인 미영을 완전히 물리쳐야 합니다. 도의에 의거한 대동아를 건설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대동아 여러 민족의 제국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협력에 감격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대동아 여러민족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지금 일본과 만주는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뭉쳐 유대감이 경고해졌습니다. 작년에는 일화동맹조약(日華同盟條約, 1943.10.30) 체결과 태국의 새로운 영토에 관한 조약 (1943.10) 을 비롯해 버마, 필리핀의 독립등이 연이어 이루어졌습니다. 또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지에서는 원주민의 정치참여도 점차 구현되어 원주민의 제국에 대한 협력은 더욱 각별해졌습니다. 대동아 여러 국가의 지도자는 적의 악랄한 모략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공갈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이에 저항하면서 정황을 잘 판단하고 국민 또한 솔선수범하여 모든 곤란을 참아내고 오직 최후의 승리를 향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들어와 미영은 대동아 각지역에서 도시의 비군사시설에 맹폭을 가하여 무고한 민중을 살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적의 비인도적 행위로 인해 목숨을 빼앗기고 집을 잃은 수많은 대동아 민중에 대해 마음속으로 동정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용감하게 어려움을 돌파하고 있는 대동아 민중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적의 천인공노할 폭거는 실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머지않이 제국은 이에 대해 단호한 보복과 응징의 철퇴를 내릴 것입니다. 미영의 대중은 이러한 제국의 단호한 결의를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대동아 10억 민족의 결속은 날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대동아 해방과 대동아 건설이라는 대사업은 이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최근에 들어와 적 미영은 충칭(重慶)을 유혹하여 카이로 에서 그들의 향우 방침을 논의했습니다만 (1943년 11월 22일의 카이로회담을 의미.) 이는 미영과 충칭의 정신적 연계의 파탄만을 폭로한 꼴이 되었습니다. 즉, 자주독립과 영구우호라는 일본과 중국사이의 본연관계로 복귀한 새로운 사태 에 직면한 적 미영은 이제 항일이라는 명목을 상실한 충칭정권 의 민중의 새로운 동향에도 눈을 감고 아직도 미몽으로부터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영은 종래의 낡은 관습에 얽매인 충칭 지도자를 회유하는 것 외에는 이제 아무런 술책이 없는 것입니다. 카이로에서의 회담을 통해 충칭정권의 민중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헛된 꿈과 같은 이야기와 내용없는 원조의 약속 뿐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닥쳐올 것은 이유 없는 전쟁에 따른 고뇌의 연장과 증대뿐입니다. 이전엔 버마에서의 대반격을 부르짖고, 지금도 충칭을 직접 원조하겠다 호언하는 미영은 장마가 그치고 건기가 이미 반정도 지난 지금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으며 다시 공허하게도 새로운 우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 인도(人道) 에 대해 적 미영이 말하는 것은 정말 공허하고 믿을 수 없습니다. 현재 영국인의 지배하에 있는 여러 민족과 미국인의 지배 아래 있는 흑인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아주 명백합니다. 원래 인종적 차별을 철폐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려는 것이 우리 아시아인의 오랜 숙망이고 영원한 이상입니다. 그런데 미영은 타민족의 노예화를 통해 오로지 자기만의 번영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동아에서 기도하려는 바는 현재 구축되고 있는 새로운 대동아를 다시 옛 모습으로 돌리고, 오로지 동아를 착취하고 학대하려는 것 뿐입니다. 이른 우리의 이상과 천지차이가 있는 것으로 우리 대동아 10억 민족은 결코 용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인도의 대중이 여전이 영미의 폭력앞에 도탄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에 정말 동정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인도의 해방은 우리 10억 민중의 억누르려고 해도 억누를 수 없는 열정입니다. 이미 수바스 찬드라 보스 (Subhas Chandra Bose) 씨를 수반으로 한 많은 인도의 뜻있는 사람들은 인도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났습니다. 제국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전에 자유인도 임시정부의 수장인 찬드라 보스씨를 대동아회의에 초청하고 그 석상에서 인도 독립의 제1단계로 황군 점령하에 있던 안다만 제도 (Andaman Islands) 와 니코바르 제도 (Nicobar Islands) 를 가까운 자래에 자유인도 임시정부에게 귀속시킬 용의가 있다는 뜻을 천명했습니다. 이후 수바스 찬드라 보스씨의 지도 아래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려는 세기의 대사업은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미영으로부터 벗어난 인도 4억 민중은 정의의 대운동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응하고 있습니다. 운동의 진전에 따라 인도 민중의 질곡이탈과 독립궐기의 기세는 바로 모든 인도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인도에서 자유인도 임시정부의 깃발이 휘날리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합니다. 이에 대해 제국은 대동아 여러 국가와 함께 인도해방을 위해 실력을 통해 적극적인 원조를 보낼 것을 이자리에서 다시한번 내외에 천명하는 바입니다. 유럽의 정세를 바라보면 우리의 맹방 독일은 많은 파란 속에서도 반석을 쌓고 오직 미여응 격퇴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맛본 고난의 정도는 우리가 미쳐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국가 전체가 이를 잘 극복하여 끝까지 궁극적인 승리를 믿고 계속 감투하고 있습니다. 이제 많은 시련을 겪으며 다가올 일대일전의 준비태세를 갖춘 독일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이 가장 자랑하는 육상전투에서 미영군에게 타격을 가해 적을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트릴 것입니다. 머지않아 일어날 독일군의 종횡에 걸친 괄목할만한 활약을 기다리는 바입니다. 일본과 독일 양국은 숭고한 도의(道義)에 의거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향해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상호신뢰와 공동의 적 미영과의 싸움에서 흐르는 장병의 피를 통해 불가분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본과 독일의 제휴, 특히 그 정신적 제휴는 전황이 가열됨에 따라 더욱 긴밀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솔리니 원수의 강력한 지도아래 재출발한 이탈리아는 차츰 태세를 정비하여 추축의 유대강화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자리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독일을 주축으로 한 유립 맹방 국가들의 건투에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더욱 제휴를 긴밀히 다지고 동서가 서로 호응하여 미영을 격퇴함으로써 공동의 사명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이상 중대 전황에 임하는 정부의 소신을 피력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께서 정부의 결의를 잘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이번에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과 법률안에 대해 신속한 심의를 통해 협조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84회 제국의회 통상회- 중대 전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소신연설 (1944.3.22) / 도조 내각 第84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重大戰局に對處する政府の所信に就ての演説 이번 기회에 현재의 중대 전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결의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한달 반 동안 전황은 더욱 긴박해졌습니다. 적은 태평양에서 전력을 기울여 마셜 제도 (Marshell Islands) 를 공격하고 마리아나 (Marianas) 에서도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우리 최전선 장병의 용전분투로 적을 잠시 격퇴시켰습니다만, 물량을 믿고 덤벼드는 교만한 적으로 다시 대규모 반격을 분명 계속해올 것입니다. 제국은 이제 정말로 황국의 성쇠를 결정해야 할 가장 심각한 결전의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전황은 참으로 중대합니다. 오늘날 최전선과 후방의 구별은 없어졌습니다. 전쟁에서는 종횡의 방략을 과감히 수행해야 합니다. 1억 국민이 가지고 있는 물자와 힘을 모두 남김없이 미영을 격퇴시키는 것 이것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필승의 비결입니다. 최전선의 장병이 아무 걱정없이 과감하게 웅혼(雄渾) 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하는 것이야 말로 정부의 책임이자 실로 1억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정부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전황의 추이에 대응하여 작년 9월말 현 정세하에서의 국정운영요강을 결정하고 이에 따른 긴급조치를 실행해왔습니다. 이후 관민이 하나가 되어 각별한 노력을 통해 전투력, 특히 항공전투력이 날로 증강된 것을 이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르 전황은 더욱 긴박해져 잠시라도 사태를 예단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에 정부는 한편으로는 통수(統帥)와 국무를 긴밀화하기 위해 새로운 조치를 내림과 동시에 긴급비상조치로 국내시책을 둘러싼 결전비상조치요강 (決戰非常措置要綱, 1944.2.25) 을 결정했습니다. 이번의 비상조치는 국민의 모든 힘을 남김없이 전투력 증강 하나에 집중시켜 필승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영향은 국민생활의 모든 부분에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정부는 국민 여러분이 직간접적으로 받을 고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동정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해 예전부터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만, 앞으로도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비상시국과 비상조치로 인해 국민 여러분의 노고가 가중되고 갖가지 불편도 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은 비상시국에 즈음하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모든 국토가 전쟁터이자 국민 모두가 전사라는 결의를 새로이 다지고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 어떠한 고생도 참아내고 스스로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국민 여러분의 기백과 노고에 무한의 감격과 든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스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백으로 겹겹이 쌓인 고난을 돌파함으로써 필승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정부는 이러한 신뢰 위에서 더욱 중대한 책임을 통감합니다. 승리를 위한 최선의 방도를 강구하면서 필승의 수단을 동원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전의함양(戰意昂揚), 생산증강, 식량확보와 국토방위를 위해 강력한 국민총궐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만, 정부는 이에 전폭적으로 협력함과 동시에 그 성과에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대동아 여러 국가 민족은 곤란을 극복하고 긴밀하게 제휴함으로써 미영의 동아침략에 대한 헛된 야망을 깨부수고 끝까지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대동아 여러 국가민족의 감투정신과 제국에 대한 진심어린 협력에 심심한 경의와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 수반이 지휘하는 인도국민군(インド國民軍) 은 황군의 협력 아래 대망의 조국 진군 을 개시했습니다. (1944.3.8 임팔작전 개시) 제국이 인도에 기대하는 바는 적의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를 완전히 인도인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군이 진격하는 조국 인도의 땅은 당연히 자유인도 임시정부의 행정하에 곧바로 놓일 것 입니다. 인도의 독립이 현실화된 모습으로 큰 걸음을 내디딘 것에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 4억 민중의 환희를 짐작하기에 충분합니다. 유럽에서는 맹방 독일 이 거듭되는 고난을 극복하고 지금은 전투력을 회복하여 사기왕성하게 미영에 대항하면서 과감한 공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뻐해마지 않으며 앞으로도 용전분투와 커다란 성공이 있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황은 실로 중대합니다. 그러나 적은 초조해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올 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적을 포획하여 섬멸시키고 제국 필승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1억 국민 모두가 최전선 장병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항상 전장에 있겠다고 결의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1억이 한마음으로 작전의 요구에 즉응하면서 오로지 전투력 증강에 매진한다면 최후의 승리는 분명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드릴 필요 없이 최후의 승리 를 획득할 때까지 많은 고난을 당연히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1억 국민이 어떠한 고난도 과감히 이를 물리치고 용감하게 전투력의 증강에 정진함으로써 전쟁에서 싸워 필히 이길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의함양, 생산증강 등 제반에 걸쳐 국민을 각계에서 지도하는 지위에 계신 여러분의 각별한 협력에 기대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께서 정부가 결의하는 사정을 잘 믿어주시고 앞으로도 더욱 협력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85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4.9.7) / 고이소 내각 ( 第85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 고이소 구니아키 (小磯国昭) 제 41대 총리 (1944.7.22~1945.4.7) . 제가 앞서 요나이 미츠마사 (米内光政) 해군 대장과 함께 생각지도 않게 조각(組閣) 의 대명을 받들어 국정 관리의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매우 중대한 시국하에서 혼신의 노력을 바쳐 폐하의 마음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 제85회 제국의회에 임하여 정부의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황송스럽게 천황 폐하께서는 오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뜻을 진심으로 받들고 충성을 다하고 결전하의 중대한 직무를 수행하여 신속히 전쟁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폐하의 마음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황국의 흥폐를 결정한 중대시국의 갈림길에 서서 황조황종 (皇祖皇宗) 의 신령이 이끄시는 세계로 비유되는 황국의 국체(國體)를 지키고 빛나는 유구한 역사를 더욱 현양(顯揚) 할 수 있기를 바지마라 않습니다. 1억 동포와 함께 굳건하고 확실한 필승의 신념을 갖고 야마토(大和)민족이 하나가 되고 총력을 결집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단호이 미영을 격멸하고자 분투하는 최전선 황군의 장도와 책응하여 어디까지나 전쟁목적의 완수를 국정 운영의 방침으로 삼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대동아전쟁은 선전의 조칙에 드러나듯이 황국의 자존(自存)과 자위(自衛) 를 위해 궐기할 수 밖에 없었고, 또 동시에 대동아 부흥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로 야마토 민족의 사활이 걸린 싸움일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10억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결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더욱 분기하는 우리 국민성의 장점은 이번 전쟁의 경과를 보더라도 잘 실증되고 있습니다. 우리 본토에 대한 적의 내습은 점차 빈번해졌고 점점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적의 본토 상륙 도 고려해야 할 현단계에서는 정말로 총력을 결집하여 모든 것을 바쳐 국체를 지키겠다는 일념을 불태워야 합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다지면서 몸과 마음을 재계 (齋戒) 하여 신께 빌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합니다. 이번 가을에 접어들어 머나먼 전선을 생각해봅시다. 우리 최전선의 장병들은 밤낮으로 용전역투하고 있습니다. 적의 물량공세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기가 더욱 왕성해져 정말로 귀신도 놀랄 정도로 끝까지 건투하여 여러 곳에서 적의 야망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황군 장병의 건투에 마음 속 깊이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불행히도 전몰한 용사의 충혼에 삼가 애도를 바칩니다. 또 부상 장병들과 유족에게도 마음으로부터 동정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저는 이 중대한 전황 아래에서 생산과 국토방위를 위해 밤낮으로 감투하고 있는 1억 동포 여러분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동포 여러분이 스스로 최전선 장병의 장렬한 분전에 호응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 전황은 정말로 위급하여 황국의 흥폐가 걸려있습니다. 이 위기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정운영의 기본을 대동아전쟁의 목적완수로 귀일(歸一) 시켜야 합니다. 당연히 문무(文武) 가 서로 협력하고 통수(統帥)와 군무가 밀접하게 하나가 됨으로써 강력한 전쟁 지도에 만에 하나라도 유감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저는 최고전쟁지도회의 (最高戰爭指導會議, 1944.8.19) 가 설치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 국정의 운영은 이 회의에서 통수와 군무를 종합하여 그 근본방침을 결정할 것이고, 제반 시책도 이에 근거하여 결전을 위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면한 정국에 증응한 결전시책의 첫 번째는 전의의 함양과 필승국가태세의 확립입니다. 전의의 함양에는 철저한 국체관념의 진작을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돌파하여 만방무비의 국체를 지키려는 작철(灼鐵) 과 같은 결심이 곧 필승신념의 원천입니다. 공고한 국체관념이야말로 단적으로 말해 가장 위대한 전투력입니다. 더구나 전의의 함양은 또 한편으로 민의의 창달(暢達) 없이는 제대로 도모할 수 없습니다. 이에 정부는 결전단계에 즈음하여 국내외의 실정을 국민에게 주지시켜 전쟁에 대한 공동의 책임감을 분기시키고 우국(憂國) 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또 동시에 국민의 충성심을 깊이 신뢰하여 그들의 공정한 언론을 청취하면서 명랑히 국난을 타개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내걸고 하늘과 땅처럼 끝이 없는 천양무궁(天壤無窮) 한 황운을 보필하겠다는 것이 1억 동포에게는 수천 년간 이어온 유구한 신앙으로써 1억 국민의 피와 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커다란 정신은 오랜 세월을 통해 변함없이 이어져 국민적 기백이 되어 외적의 사상모략을 분쇄했고, 내적으로는 멸상봉공의 저력이 되어 국내태세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필승국가태세의 확립을 위해 실시해야 할 시책은 매우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기한 것에 현혹되거나 예전 방식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생산을 가로막는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 유효적절한 조치는 조저 없이 단행하는 것입니다. 인심을 일신하여 동포의 전폭적인 협력을 구하면서 국민도의의 진작에 더욱 유의하고자 합니다. 동포의 전폭적인 협력을 요청함에 있어 조선(朝鮮)과 대만(臺灣)은 황국의 유력한 일부로써 각 지역이 가진 특질을 발휘하면서 황국의 흥륭과 전쟁목적 달성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저번에는 육해군특별지원병제도 (陸海軍特別志願兵, 1938) 로 성과를 거두었고 이제 징병제 (조선, 대만 징병제, 1944.4) 를 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다수의 동포가 성전에 앞장서 참가하고 있는 것은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에 대한 처우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중점시책은 전투력의 증강입니다. 즉시 전력화할 수 있는 모든 국력을 기울여 결전 전력으로 만들고 그 가운데서도 항공전투력의 급속한 증강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정국의 주동성(主動性) 을 파악하고 긴박한 결전을 유리하는 전개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은 군수생산에 종사하는 동포의 분발이 매우 필요합니다. 여러 시책의 중점을 여기에 두고 사람과 물자, 그리고 자금도 모두 여기에 투자하여 급속한 구현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면한 결전에 유효하게 전력화할 수 없는 여러 시설과 산업 활동은 정지시키고 중점산업을 지향하는 것이 절대적인 요구라고 믿어 이전부터 이미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투력의 증강, 특히 항공전투력의 증강을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증산이 물론 필요합니다. 해상과 육송 수송력의 확보충실 또한 중요한 요건입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장애를 극복하면서 이들의 향상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중점시책은 식량증산과 국민생활의 안정입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전쟁수행 동안 국민생활을의 최저한도를 보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날까지 동포들이 상당히 궁핍한 생활조건 아래에서도 잘 인내하면서 전쟁목적 수행에 정진해온 것은 무엇보다 건전한 우리 국민성에 따른 것으로 참으로 감격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는 가능한한 사태의 개선을 도모하고 적극적으로 민생의 안정향상에 노력하여 전의함양과 능률발휘의 근본을 이루는 국민사상을 명랑화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이엥 정부는 조각(組閣) 직후 도쿄(東京) 와 오사카 (大阪) 등 소비가 많은 대도시에 대한 응급식량대책을 강구했습니다. 특히 신선식량의 생산, 출하, 배급과 관련해 가격정책을 변경하는 등 임시조치를 실시했습니다. 현재 국내의 식량생산과 일본과 만주의 일체화로 생긴 식량의 절대분랴을 살펴보면 대체로 전시생활을 운영하기위한 식량의 부족은 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식량증산이 중요하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식량문제는 승리를 위한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기 때문에 안(案) 을 만들어 이번 의회에 추가 예산안을 제출했습니다. 중요시책의 네 번째는 노무(勞務)와 국민동원의 문제입니다. 중대 시국에 직면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내에 단 한명의 노는 사람이나 방관자가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1억 국민을 모두 승리에 위한 전투에 배치시키고 심혈을 기울여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에 매진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신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업가, 회사원, 기사, 공원, 농민, 어부 등은 모두 산어전사로서 국민 개병의 정신에 따라 군의 소집영장을 받지 않은 응소자의 마음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각자 일터에서 온 힘을 기울여 일하고 최고능률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생사를 걸고 싸우는 장병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황국신민이라는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징용제도와 노동력의 분배관리 등을 검토하여 이의 조정과 개선을 도모함과 동시에 모든 방책을 강구하여 국민근로역의 동원을 철저히 시행할 각오입니다. 중요시책의 다섯 번째는 국토방위의 강화입니다. 저번 수차례에 걸쳐 본토 서부지방에 적의 공습이 있었을 때, 관민이 하나가 되어 방위임무에 잘 대응함으로써 피해가 최소한도로 그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적기가 아무리 내습하더라도 관민은 더욱 치열한 투혼을 발휘하여 방위에 매진해야 합니다. 중요 산업시설의 방위와 중요도시의 대공방위를 철저히 강화하는 것이 작금의 급무입니다. 더욱 창의적으로 궁리하여 실정에 즉응할 수 있는 방위태세를 빨리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도시에서의 소개도 착착 정비되고 실행되고 있습니다만, 공습 시에 도시주민의 응급생활 확보, 방공조직과 방공훈련의 강화에 대해서도 모두 철저한 계획 아래 실시에 유감이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 밖에도 물론 국토방위에 노력해야 합니다. 정부는 이전에 국민의 총무장이 필요한 이유를 밝히면서 국내 경비태세 강화를 위한 구체적 방책을 결정하고 그 실시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요시책의 여섯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학기술의 동원과 활용입니다. 전쟁은 이제 완전히 과학전의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이번에 육해군에서의 과학기술운용의 일체화를 구현하고 전황에 즉응할 수 있는 일본적 과학기술의 즉시 전력화와 결전병기의 신속하고 원활한 다량생산을 도모하기 위해 특수 기구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또 민간에서의 신병기 등에 관한 창의적 고안을 장려하고 이를 이 기구에 반영, 주입하는 조치를 강구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과학기술이 급속히 전력화되고 과학기술적으로도 동포 전반의 기술이 전쟁에 협력할 수 있는 태세를 완벽히 구축할 것임으로 그 결과를 크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 말씀드린 국내시책과 호응하여 황국의 전시외교는 맹방 독일과의 제휴를 더욱 긴밀히 하면서 대동아 여러국가와 협력 일치하여 모든 힘을 다해 전쟁 수행에 매진할 것이고, 중립국 각국과도 앞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맹방 독일 은 형세 변화로 (1944.6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지만 최후의 승리를 믿으면서 계속 선전 감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경탄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난국에 처하여 더욱 저력을 발휘하여 곧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할 날도 머지 않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성공을 절실히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대동아 여러 국가와 민족은 현재 전황에도 불구하고 모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시국의 추이와 함께 대동아 부흥에 관한 사명달성의 필요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황국과 일치결속을 위해 용감히 싸워나가는 태세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만주국 과의 관계는 일억일심(一億一心) 으로 불가분하다는 것으로 새삼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중국 과의 양국 관계도 동생공사(同生共死)의 맹약아래 더욱 공고해지고 있습니다. 황군은 과거 7년에 걸쳐 대륙 남북에서 용전분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영 침략세력을 구축하여 백년에 걸친 그들의 압박으로 부터 중국을 해방시켰습니다. 서로 연계하여 도의에 의거한 대동아를 건설하려는 황국의 진의가 중국 민중 사이에 차츰 스며들면서 일화(日華)의 제휴는 더욱 긴밀해지고 있습니다. 태국 은 저번에 내각이 경질되었습니다만, 쿠앙 아파이윙 (Khuang Aphaiwong) 을 수반으로 하는 신 내각도 맹약에 의거한 공동의 전쟁목적수행에 매진하겠다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본래부터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동아의 결속이 공고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버마 는 이미 독립 1주년을 맞이했습니다만, 바모 (Ba Maw) 국가대표의 열성적인 지도 아래 모두가 하나가 되어 많은 곤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건전한 발달과 전쟁완수의 결의가 더욱 뜨거워지고 왕성해진 것에 정말 마음이 든든합니다. 필리핀 도 곧 독립 1주년을 맞이합니다. 호세 라우렐 (Jose P. Laurel) 대통령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시하 식량과 치안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잘 선처하면서 착착 전시태세를 정비하고 있음에 참으로 마음 든든한 우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유인도 임시정부 의 수바스 찬드라 보스 (Subhas Chandra Bose) 가 인도의 독립을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합니다. 황국은 앞으로도 이를 더욱 강력히 지원하여 독립 목적의 달성에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동인도 에 대해서입니다. 제국은 작년 원주민의 염원에 따라 정치참여에 관한 조치를 시행해왔습니다. 그동안 이들 각지의 원주민은 제국의 진의를 잘 이해하여 시종일관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현지 군정에 대해서도 계속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제국은 동인도 민족 의 영원한 복지를 확보하기 위해 장래에 그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것을 이자리에서 성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제국정부는 대동아 지역에 대한 종래의 정책을 장래에도 견지함은 물론, 앞으로도 더욱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의 정신을 강력하게 전개하여 대동아 여러 국가와 민족의 신뢰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황국을 중심으로 대동아가 확고한 필승의 신념아래 더욱 일치결속을 견고히 다지고 물심양면에 걸쳐 모든 총력을 결집해야 합니다. 대동아 부흥의 성전에 모두 매진할때, 필히 미영의 야망을 분쇄하고 만고불멸의 황국의 세계이념을 영원히 현양(顯揚)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상 중대한 전황을 감안하면서 1억 동포가 함께 결전에 매진하고자 정부의 소신을 피력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정부의 결의를 믿고 1억 국민의 선두에 서서 모두 하나가 되어 끝까지 전쟁완수를 향해 매진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정부는 긴박한 현재 전황에 대처하고 육해군 전비의 충실을 도모하고자 임시군사비 예산안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식량대책에 관한 예산안과 아무쪼록 신속한 심의를 통해 협조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86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45.1.21) / 고이소 내각 (第86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제가 이번 제86회 제국의회에 임하여 정부의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전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1억 동포의 모든 힘을 결집하고자 합니다. 더욱 전투력 증강에 매진하면서 모든 곤란을 배제, 극복하고 신속히 전쟁목적을 완수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전황이 더욱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황국은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가장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여 정말로 흥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작년 가을 적의 진공 기도에 대항하여 제국 육해군 부대는 대만(臺灣) 과 필리핀을 요격하여 혁혁한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대만항공전 1944.10.12을 의미.) 그러나 적은 이렇게 큰 손해를 입으면서도 풍부한 물자의 엄호 하에 레이테 (Leyte) 섬 에 상륙, 이어 민도로(Mindoro) 섬 을 습격하여 결국 오늘 루손(Luzon) 섬 에도 여러 사단이 상륙하는 등 중대한 형세에 이르렀습니다. 적의 필리핀 진공이후 황군 장병은 열렬한 국체호지(國體護持)의 기백을 떨치면서 전원 모두가 특별공격대가 되어 결연히 적 함선에 필사필중(必死必中) 의 맹격을 가하거나 적 비행장에 강행 돌입 하고 있습니다. 또 황군 장병은 적진에 앞장서 나가 필살의 각오로 뛰어드는 등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렬무비(壯烈無比) 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공격대 용사를 비롯해 황군 장병이 이렇게도 훌륭히 국체호수의 진수(眞髄) 를 철저히 실행하면서 칠생보국(七生保國) 과 순충(純忠) 의 기백을 발휘한 것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대동아 각지에서 용전분투하고 있는 황군 장병에게 심심한 경의와 사의를 표하고 장렬하게 호국의 꽃으로 산화한 많은 충령에 삼가 애도를 바칩니다. 또한 부상 장병과 유족들에게도 진심으로 동정의 마음을 전합니다. 군인원호사업(軍人援護事業)은 현재 전황을 고려하면서 이를 더욱 철저히 강화하는 방책을 단행하겠습니다. 전몰 충령의 유아(遺兒)에 대한 육영(育英)은 국가가 이를 부담하고 나아가 군사 부조의 강화와 기타 군인원호에 관한 제반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전선의 장병이 뒷일을 걱정하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현단계 전황을 대강 살펴보건대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세는 결코 낙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길게 펼쳐진 적의 보급로는 모두 우리의 공격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더불어 작년 여름 이후 중국대륙에서 전개한 황군의 작전은 중국 중남부의 적 주요거점을 소멸시켜 중국주둔 미 공군에게 준동의 여지를 주지 않았고, 더욱이 중국 남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육로 연결을 차단시켰습니다. ( 이치고 작전, 대륙타통작전 大陸打通作戰 을 의미, 1944.4) 한편 북부 버마 국경방면에서도 적의 버마 탈환 시도에 대항하여 황군 장병들은 용전감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북족을 지키는 황군 장병도 장엄하게 적 미영에게 침략의 여지를 주지 않는 위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동아 방위의 전략과 태세는 매우 공고합니다. 1억 동포는 지금이야말로 분격을 새로이 하여 특별공격대 용사의 뒤를 이어 생산현장에서 더욱 필승의 투혼을 발휘해야 합니다. 또 정부도 모든 힘을 기울여 신속히 필승 시책을 속행하고자 합니다. 관민이 하나가 되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오직 전투력의 증강에 매진해야 합니다. 바야흐로 전선 장병의 용전에 호응하는 후방의 책무를 다해야 할 시점입니다. 오늘날 1억 동포의 더할 바 없는 모든 노력의 성과는 필리핀 주변의 적을 격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라바울(Rabaul) 과 부건빌 (Bougainville) 등지의 황군 장병과 서로 연계하여 전황 전환의 기초를 다져 결전 전력으로 모여질 것으로 믿습니다. 이 중대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시행하려는 결전시책의 근본기조는 현재 보유한 국력의 급속한 발현을 통해 전투력의 비약적 향상에 그 중점을 두고자합니다. 전쟁완수를 위한 필승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제반 시책을 강력하고 과감히 실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결전에 임하는 국정운영의 근본적 태도는 쓸데없이 전황의 일이일장(一弛一張)에 기뻐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필승의 큰길로 힘차게 나아갈 강력한 정치를 구현하는 것에 있습니다. 정부는 행정운영의 철저한 결전화를 도모하기 위해 먼저 중앙과 지방을 더욱 서로 연결시키면서 행정의 종합운영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겠습니다. 또 지방행정협의회장과 지방 육해군 당국과의 연계를 긴밀히 하여 방위와 전투력 증강에 관한 군관시책(軍官施策)의 일체적 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적은 제국의 수도를 비롯해 본토의 요충지에 빈번히 공급을 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번에는 황공스럽게도 이세신궁(伊勢神域)을 공습하는 폭거가 있었고, 1억 동포는 이에 진정으로 통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피해는 극히 경미했으나 국민의 의지와 기개는 오히려 더욱 양양해져 방공과 생산에 눈부신 감투를 보여주는 것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앞으로 계속하여 집요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적의 공습에 대비하여 공장 등에 대한 방호시설의 급속한 강화완성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적의 공습아래 생산증강의 수행에 아무런 장애나 지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또 동시에 대도시에는 더욱 철저히 가옥과 사람들을 소개시키고 방공방호시설을 정비하여 앞으로 적기의 내습이 아무리 치열해지더라도 군관민이 하나가되어 결코 이에 굴하지 않는 방공태세의 완벽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우리 1억동포는 본토가 이미 국토방위의 전장으로 변한 오늘날, 모두 황국호지(皇國護持)의 투혼을 발휘하여 언제 어디서 적의 침략이 있더라도 단연코 국토방위의 중책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합니다. 전장즉응(戰場卽應)의 일상생활을 통해 생산, 방공에 명랑감투(明朗敢鬪)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군수생산의 증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선에서 용감히 싸우는 장병이 후방에 열망하는 것은 우수한 항공병기의 일대 증산입니다. 특별공격대의 필사필중에 의한 적 함선의 격멸도 항공병기의 일대 증산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정부는 항공병기 외에도 철강, 경금속, 액체연료 등의 생산증강을 도모하여 전투력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합니다. 대륙 방면의 생산증강을 지원 촉진함과 동시에 각종 결전병기를 만들고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학기술력의 동원강화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또 생산과 방위의 일체적 강화를 도모하고자 이번에 주도한 계획 아래 군수공장 등의 분산 소개와 지하시설건설을 신속히 속행하겠습니다. 더욱이 노무와 자재등을 철저히 전력화하기 위해 기업정비를 촉진할 계획입니다만, 이를 실시하기 위해 가능한 한 공장의 지방적, 종합적 자립을 도모할 생각입니다. 식량의 확보가 국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전투력의 증강을 위한 기초가 된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향후 식량수요의 증대와 수송력의 현황을 감안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각지의 실상에 따라 쌀과 보리는 물론 감자의 비상증산을 실행하며 국내자급의 비약적 증강에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국가 전투력 확보증강의 근본은 결국 국민의 노동력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국민을 빠짐없이 동원하고 근로능률을 최고도로 발휘시킴으로써 비로소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정부는 근로의 동원과 관리에 대한 일관적인 조정을 강화하고 능률적인 쇄신과 개선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지금의 생산을 완수함에 학도(學徒)는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국의 내일을 짊어저야 할 중요한 사명을 떠안고 있습니다. 이를 감안하여 근본적으로 행학일치(行學一致) 의 내실을 거두고 학도가 평안하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각조 필요한 노무는 현재로서는 우선 당해지방의 인적 총동원을 통해 충족시키고 특히 노동의 기동적 운용을 활발히 실행하면서 관민의 조직적 정신출로(挺身出勞)를 강력히 지도함으로써 국민이 모두 일하는 체제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해상수송력의 증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부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여 선박 건조의 촉진에 힘씀과 동시에 적어도 현재 보유한 선복(船腹) 량의 확보와 그 효율적 운영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또 적의 공습하에서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모든 것을 바쳐 분투하는 선원 여러분께 이번 기회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선원 여러분의 처우를 적절히 개선할 방침입니다. 또 해운화물의 육상수송으로의 전환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내지(內池)와 조선(朝鮮)의 간선철도시설을 강화하고 일만화(日滿華) 간의 대륙수송력 증강의 방도를 강구하겠습니다. 특히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육상수송 운영의 전시체제를 신속하게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전 의회에서 고려하기로 약속한 조선과 대만에 거주하는 동포에 대한 처우 개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부는 이미 내지로의 도항, 취학과 취직, 노무의 취급에 대해 각각 절절한 처우개선 조치를 강구하여 내지와 외지간의 장벽철폐를 위해 몇걸음 나아갔습니다. 앞으로 두 지역 동포의 오랜 염원인 정치적 처우의 개선에 대해서도 이번에 신속히 해결하여 진정으로 내지(內池) 와 외지(外地) 가 하나가 되는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 시국하 1억 결집이 중요한 국가적 요청이라 판단됩니다. 그 방법과 시기 등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고자 조사회를 설치하여 현재 그 구체적인 안(案) 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협력을 통해 신속히 실현하고자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제반 시책을 강력히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민 모두 현시국의 중대성을 깊이 직시해야합니다. 정부 스스로도 솔선수범과 관리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쇄신에 노력하여 동포가 평안하게 각자 일에 힘쓸 수 있는 시책의 구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1억 동포 또한 국체호지의 기맥을 일상적으로 철저히 실천하여 더욱 도의를 사회에 확립시켜야 합니다. 사기를 함양시켜 필승의 투혼을 발휘하고 책무의 완수에 매진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이번 전쟁의 본질은 이름바 죽느냐 사느냐 라는 매우 격렬한 것입니다. 황국의 국체를 무궁히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번 전쟁의 승패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관민의 노력의 성과가 모두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적은 함부로 전후의 국제기구안 등을 논의하는 한편, 제국에게 모든 타협을 배제하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제국의 말살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일몽은 그저 비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황국의 국체를 무궁히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관민이 단호하게 모든 장애를 꺠부수고 물심의 총력을 성전의 목적완수에 결집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정부는 이상 말씀드린 방침에 의거하여 작전에 즉응하면서 제반 결전시책을 강력하게 실행하겠습니다. 전승을 위한 필승체제를 확립하고 중앙과 지방을 묶는 행정의 강력한 기동적 운영을 통해 신속한 삼투실현(滲透實現)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평화라는 미명에 숨겨진 저들 미영 민족의 탐욕스러운 세계제패의 야망은 전쟁의 진전과 더불어 점차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획득물의 분배를 둘러싸고 심각한 상극과 대립이 폭로되어 점차 격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 동아의 여러 국가는 동아부흥이라는 공동의 이상 아래 적의 침공에 대항하여 더욱 결속을 견고히 다지고 있습니다. 끝까지 동아를 보위하겠다는 결의로 들고 일어나 총력을 결집하고 용감하게 전쟁의 완수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대동아공동선언으로 뭉쳐진 공존공영의 도의와 이념은 미영의 시커먼 침략적 전쟁적 목적과는 비유할 바가 아닙니다. 제국정부는 동아 여러 국가와 민족의 이러한 감투정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끝까지 대동아공동선언에 제시된 각국 공동의 신념과 결의에 의거하여 대동아의 해방, 부흥을 위해 공동의 전쟁을 완수하고 5원칙 (대동아공동선언의 5원칙을 이야기하는것.) 에 명시된 공동이념의 구현을 향해 매진하고자 합니다. 한편 우리의 맹방인 독일과 이탈리아 추축국 은 지금 자국 본토 에서 적을 맞이하여 사기를 더욱 드높이면서 적에게 필사적인 맹공을 가하여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 국민은 연일 대공습을 받아 일상생활이 매우 곤란한 실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단결을 통해 조국 방위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국력의 철저한 동원과 군수생산의 재건을 단행하여 작년 12월 중순 이후에는 서부전선에서 일대 공세로 전환하여 현재 수만에 이르는 미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1944년 12월의 벌지 전투를 의미.) 저는 히틀러 총통하의 독일 국민이 더욱 탄발력(彈發力) 을 발휘하여 적에게 커다란 통격을 가해 적이 재기불능할 날이 오길 기대하면서 진정으로 독일 국민의 건투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향토보위를 위해 궐기한 동아 여러 국가의 철석과 같은 단결과 맹방 독일의 눈부신 반격 앞에 적은 전투력을 동서 양 전선으로 분배할 수 밖에 없고 보급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량을 자랑하는 적 미국도 인적 자원의 핍박이 원인이 되어 기존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군수생산의 부족을 여실히 체험하고 있으며 국민에게 이제는 전황을 낙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증산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전쟁의 단기 종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고함과 동시에 새로 국민징용법(國民徴用法) 논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처럼 지금 정국은 정말로 피아의 지구력을 겨루는 결전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더욱 가증될 어떠한 고난도 결연히 참아내고, 어떠한 위험한 상황에 조우하더라도 결코 주저하지 않는 필승의 투혼을 지속시켜야 합니다. 최후까지 싸우는자가 최후의 승리를 성취할 것이라 믿습니다. 1억 동포는 전선 장병의 분전에 호응하여 끝까지 국체호지의 정신과 기백을 견지해야 합니다. 천신만고를 견뎌내고 오직 전투력의 증강과 국토의 방위에 분투하면서 신속히 성전의 목적을 완수하여 폐하의 마음을 평안케 만들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정부가 제출한 여러 의안에 대해 아무쪼록 신중히 심의하시고 신속히 협조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87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5.6.9) / 스즈키 내각 ( 第87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제 42대 총리 (1945.4.7~1945.8.17) . 오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롭고 두터운 칙어를 받들어 정말로 황송하고 감격게 겹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폐하의 근심을 헤아려 삼가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매진하고자 합니다. 이전 적의 공습으로 외람되게 궁성(宮城)과 오오미야고쇼 (大宮御所, 황태후의 거처) 가 화염에 휩싸여 정말로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세분의 폐하와 가이코도코로 (賢所, 야타노카가미의 모조품을 모시는곳) 는 안전 무사합니다. 천황 폐하께서 계속 궁성내 어좌소 (御座所) 에서 정무를 보실 수 있음에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제국은 정말로 건국 이래 중대하고 위태로운 국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개전 이후 육상과 해상, 그리고 하늘에서 황군 장병이 거둔 전과는 정말로 혁혁했습니다. 또 후방 1억 국민의 노력은 실로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노력에 불구하고, 전황은 점차 긴박해져 결국 본토 일각인 오키나와(沖繩) 가 노략질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45.3 오키나와 전투개시) , 오키나와에서 육해군의 용감한 전투와 이에 협력한 관민의 관투로 적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정충의열(精忠義烈) 과 불멸의 훈공은 영원히 청사(靑史) 에 기록될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오키나와의 전황은 참으로 우려됩니다. 지금의 정세로 바라보면 머지않아 본토의 다른 지점에도 적의 침략이 예상됩니다. 지금이야말로 1억 국민은 모두 이 사태를 직시하여 의연한 결의로 대처해야 합니다. 대동아전쟁은 원래 선전대조(宣戰大詔) 에도 명시되어있는 바와 같이 당시 미영 양국이 보인 포악한 태도와 야망이 제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제국은 자존자위(自存自衛) 를 지키고 동아의 안정을 위해 노력한 다년간의 성과를 유지하고자 어쩔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다년간 측근으로 봉사하며 매우 감격하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세계에서 우리 천황 폐하만큼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희구하신 분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황실의 건국 이래의 취지는 만방이 각각 독립하여 침략과 착취가 없는 실로 사해동포로서 인료의 도의를 밝히면서 문화를 증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영 양국의 무도한 처사는 끝내 고금(古今) 을 통해 내외에 베풀어진 국시의 수행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제국의 전쟁은 실로 인류 정의의 대도에 의거한 것으로 단호히 싸워나갈 뿐입니다. 이번 세계대전의 양상을 살펴보면 교전 제국이 각각 전쟁의 이유를 기묘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필경 인간의 약점으로서 참으로 열등한 감정인 질투와 증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저는 일찍히 다이쇼7년 (1918년) 연습함대사령관(練習艦隊司令官) 으로서 미국 서해안을 항해했을 떄 샌프란시스코의 환영회 석상에서 일본과 미국의 전쟁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 요지는 일본인은 결코 호전적인 국민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라는 것 을 역사적인 사실로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일본과 미국사이에는 전쟁을 할 이유가 없고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분명 끝이 없는 장기전에 빠져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것 이라고 역설했습니다. 태평양은 말 그대로 평화의 바도러 일미(日米) 간 의 교역을 위한 하늘이 내린 은혜이고 만약 이를 군대수송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분명 양국 모두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20여 년이 흘러 미국이 그 진의를 믿지 못하고 불행하게 양국이 서로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은 실로 유감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에게 무조건 항복 을 서슴없이 요구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러한 행위는 바로 우리의 국체를 파괴하고 우리의 민족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 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나아갈 유일한 길은 끝까지 싸움으로써 제국의 자존지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주국와 중화민국을 비롯해 대동아 여러나라는 제국과의 체맹을 더욱 견고히 하여 우리의 전쟁에 많이 기여하고 있습니다. 제국으로서는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전쟁은 필경 적국인 미영이 동아를 노예화하려는 것에 대한 동아해방전쟁 입니다. 이 싸움에 차질이 생기면 대동아 민족의 자유는 영원히 상실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의가 유린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국은 어디까지라도 체맹 여러나라와 하나가 되어 행동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대동아 나아가 세계질서에 관한 제국의 근본 방침은 정치평등(政治平等)、경제호혜(經濟互惠)、고유문화존중(固有文化尊重) 이라는 일반 원칙 아래 각국과 여러 민족의 공존공영(共存共榮) 을 확보하기 위해 불위협과 불침략을 취지로 하는 안전보장의 방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강국 본위의 이기적인 국제처리에 대항하여 제국은 끝까지 항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제국은 중화민국의 통일구국(統一救國)의 기운을 지원하고, 중립국과의 우호관계를 한층 촉진시키고자 합니다. 우리 국민의 시념은 칠생진충(七生盡忠) 입니다. 우리 국체를 떠난 우리 국민은 없습니다. 적이 함부로 말하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은 필경 우리 1억 국민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싸울 뿐입니다. 만약 본토가 전쟁터가 되면 지리적 이점과 국민의 화합 모두 적보다 뛰어납니다. 즉 우세한 대군을 중요한 지점에 집중하는 것도, 이에 대한 보급도 쉽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서(島嶼)에서의 전황과는 전혀달리 필히 적을 격퇴시키고 그들의 전의를 괴멸시킬 수 있습니다. 무릇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전쟁사에 비추어보아도 적의 전의를 꺾는 것에 있습니다. 더구나 적의 전의를 꺾는 것은 우리의 전의가 적을 압도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의 전의를 더욱 함양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현단계 국가사정은 결렬한 전쟁에 접어들었습니다. 앞으로 식량도 반드시 충분하지 못할 것이고 교통운수도 원할치 못할 염려가 있습니다. 더욱이 군수생산도 어려움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국민전체는 점점 투혼을 떨쳐 일으켜 각자의 직임에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여 이들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전쟁 완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제가 솔직히 느끼는 바로서는 지금 우리는 한층 더 노력해야 합니다. 적국의 국내정세 동향을 보더라도 우리가 끝까지 싸우는 것이 전쟁에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념에 의거하여 천황폐하의 대명을 받들어 내각을 조직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사태입니다만, 모든 국민 여러분의 협력을 얻어 이러한 신념아래 모든 힘을 쏟고자 합니다. 이번 임시의회의 소집을 주청하면서 제반 법안을 제출하고 여러분께 심의를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부는 별도로 이번에 지방총감부 (地方總監府, 1945.6) 를 설치했습니다. 전시에서의 유효적절한 행정을 실시하기 위해 , 국내태세의 정비확립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또 국민의용대 (國民義勇隊, 1945.3) 를 결성하고 이를 중추로 하여 생산과 방위의 일체적 강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사태가 급박한 경우에는 국방상 만전의 시책을 강구하고자 합니다. 이번 의용병역법안( 義勇兵役法案, 1945.6) 을 제출한 것도 이러한 취지에 따른 것입니다. 또 행정의 쇄신을 도모하기 위해 관리 등용의 길을 넓히겠습니다. 재야의 숨은 인재를 발굴하고 신상필벌을 통해 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다행히도 법안이 성립된다면 이들 여러 시책과 이를 함께 활용하여 결전단계에 직면한 오늘날의 전황에 즈음하여 실행할 것은 신속히 실행하고 버릴 것은 버리겠습니다. 이전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용단을 내림으로써 본토결전 태세의 정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최근 적기의 공습이 날로 치열해져 전국 각지에 커다란 피해가 생기고 사망자, 부상자도 적지않습니다. 참으로 동정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필연적으로 공습은 앞으로 더욱 격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그 지역은 지극히 국한되고 있습니다. 중요 생산시설의 소개와 복구도 상당히 진척되고 있습니다. 눈앞의 보이는 상황으로만 판단하면 잘못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왕성한 전의입니다. 저는 많은 전재자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부흥이라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든든한 다시 태어난 건설이라는 굳센 기백을 느낄 수 있어 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황토(皇土)를 보위하고 제국의 수도를 고수하여 적의 폭거에 반격할 시기의 도래를 기약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합니다. 일부 전황에 따라 실망하거나 낙담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천황 폐하의 깃발 아래 모든 것을 버리고 힘쓰는 것이야말로 일본 국민입니다. 저는 정치의 요체는 국체를 밝히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국체를 수호하고 황토를 보위하기 위해 모든 국민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는 스스로가 국가를 일으키겠다는 결의를 굳건히 하고 자신의 책임을 통해 자력으로 최대한 궁리하고 노력을 모아야 합니다. 목표를 전쟁 완수라는 하나로 응집시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결사 투쟁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국민도의가 확립되고 질서가 정연한 태세 아래 전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국민여러분을 믿습니다. 군관민이 정말 하나가되고 1억이 힘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태세를 정비하여 제일 앞에서 모든 생명을 바쳐 분투하고자 합니다. 지금 전황은 실로 중대한 단계에 직면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전선에서 헌신하는 많은 장병들을 생각하며 정말로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호국 영령에 삼가 애도를 바침과 동시에 그 유족에게 심심한 동정을 표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신속히 전세를 만회하여 맹세코 천황 폐하의 근심을 편안케 하고 이들 용사에게 보답하고자 합니다. 이상 저의 신념을 피력하면서 여러분의 협력을 마라바지 않습니다.
- 아시아 ·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제국의회 시정방침연설(施政方針演說) ① (1937~1943)
제72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37.9.5) / 제1차 고노에 내각 (第72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제 34대 총리 (1937.6.4~ 1939.1.5) . 어제 개원식에 즈음하여 시국에 관해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진심으로 황송스럽고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뜻을 받들어 오직 한마음으로 폐하의 마음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지난 7월 7일 북지(北支) 에서 사변이 발발한 이후, 제국 정부가 중국 (일문 본문에서는 지나 支那 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에 취해온 근본 방침은 어디까지나 중국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여 잘못된 배일정책을 포기시킴으로써 일중 양국의 국교를 근본적으로 조정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침은 지금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방침을 수행하는 수단으로서 본래 정부는 가능한 한 사건의 확대를 방지하고 국면을 한정시키어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중국측은 공정한 제국정부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국정부의 인내에 편승하여 오히려 배일과 항일의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국민감정을 통제할 수 없도록 자극하면서 사태를 급속하게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국면은 북지(北支) 뿐만 아니라 중지(中支), 남지(南支) 까지로 확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내를 거듭한 우리 정부는 이제는 이전과 같은 소극적이고 국지적인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단호하게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중국군에 대해 어쩔수 없이 일대 타격을 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본래 한 국가가 특정한 다른 국가를 배척하고 모멸하는 것을 국책으로 삼고 그러한 사상을 국민교육의 방침으로 삼아 어린 아이의 두뇌에까지 주입시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장래의 결과를 고려할때, 단지 일중 양국의 국교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노릇입니다. 제국정부는 이전부터 여러번에 걸쳐 중국 정부에게 이러한 태도의 변경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이를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아 결국 이번의 사변(事變) 이 야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한 국가에게 반성을 촉구하게 위해 제국이 단호하게 일격을 가하겠다고 결의한 것은, 단지 제국의 자위(自衛) 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의와 인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아도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굳게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왜냐면 동아의 화평(和平) 없이는 동아 국민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국이 타격하려는 목표는 어디까지나 잘못된 배외정책을 실행하고 있는 중국 정부와 군대일 뿐입니다. 제국은 결코 중국 국민을 적으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중국정부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앞으로 우리나라와 제휴하여 서로 동양문화의 발달과 동양평화의 확립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겠다는 성의를 보인다면, 제국은 이러한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국이 취해야 할 수단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중국군에게 철저한 타격을 가하여 그들의 진의를 상실시키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저항한다면 제국은 장기전을 불사할 것입니다. 생각컨대 동앙평화라는 커다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길에 여전히 많은 난관이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선 국민모두가 하나가 되어 굳게 참아내는 견인지구 (堅忍持久) 의 정신으로 매진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현재 우리의 충용한 장병들은 중국 전역에 걸쳐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당당하게 정의의 진을 치고 황군의 위력을 국내외에 선양하고 있습니다. 이에 국민 모두는 감사하고 감격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전국 방방곡곡에 이르기까지 총후의 열성이 용솟음쳐서 아름다운 거국일체의 결실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정말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전승에 취하지 않고 긴장을 지속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며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정부는 이에 시국의 급무(急務) 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예싼안과 법률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합니다. 정부는 이들 법률을 통해 비상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재정경제체계를 정비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재계에 필요없는 충격을 가능한 주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할 예정입니다. 또한 사변의 경과, 외교의 사정, 재정계획등에 대해서는 각각 주무대신이 보고하도록 할것입니다. 정부는 중대한 시국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함께 국가의 대업을 떠맡게 되어 정말로 영광스럽게 생각함과 동시에 중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무쪼록 정부의 의향을 잘 이해해주시고 신중한 심의와 협조를 해줄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제73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38.1.22) / 제1차 고노에 내각 (第73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사변 아래 신년을 맞이했습니다. 중대 시국에 직면한 제 73회 제국회의에 즈음하여 여러분과 함께 폐하의 성수무강과 황실의 번영을 축원(祝願) 해 마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서 정부의 소신을 말씀드릴 수 있게 된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번 의회 개원식에 즈음하여 특히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시국에 대한 폐하의 깊은 심려에 참으로 황송스럽고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제국의 변하지 않는 국책은 일만지 (日滿支, 일본과 만주국, 중국) 의 공고한 제휴를 주축으로 하여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여 세계평화에 공헌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반성이 없는 중국 국민정부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내린 것도 , 또 앞으로 타국과의 우호관계 증진에 부단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것도 모두 이러한 국책에 따른 것입니다. 특히 최근 방공(防共) 이라는 이상을 함께 하는 맹방 이탈리아가 참가하여 일독이 (日獨伊,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 사이에 방공협정이 성립된 것은 세계평화를 위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컨대 사변 발발이후 반년이 지났습니다. 전선은 북지(北支) 부터 중지(中支), 남지(南支) 로 확대되었고 황군의 용감하고 과감한 행동에 의해 연승을 이어가며 순식간에 수도 난징(南京) 을 공략하는 등 전황은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천황 폐하의 존엄한 위세 덕분입니다만, 황군 장병 여러분의 충용과 총후 국민 여러분의 열성에 참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 정부는 제국으로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신흥 중국 정권 의 성립과 발전을 기대하고 양국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 신중국 건설에 협력 함으로써 영구적인 동아 평화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합니다. 물론 제국이 중국의 영토와 주권, 그리고 중국에 대한 타국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한다는 방침 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 이러한 방침에 의해 발표된 제1차 고노에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생각컨대 동아의 안정세력인 제국의 사명은 더더욱 커졌고, 그 책임 또한 무거워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떠안고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희생을 지불할 수 있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러한 결의를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결국 장래의 불행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가 그 희생을 참아낸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음 세대 동포들에 대한 숭고한 의무를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견해에 의거하여 모든 힘을 기울여 중일전쟁 (일문 본문에서는 지나사변이라고 표현되어있다.) 에 대처하면서 그 목적의 달성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물심양면에 걸쳐 국가총동원 태세를 완성하고 이에 필요한 제반 시책을 실현해야 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방침에 따라 먼저 군비의 충실과 국비의 조달에 지장이 없게 하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고 믿고 재정과 경제 방면에도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쇼와 13년 (1938년) 의 예산안 편성은 사변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물자와 자금을 가능한 군사의 수요충족에 집중했고 군수와 관계있는 자재와 자금의 일반소비는 최대한 감소시킨다는 원칙 아래 편성했습니다. 산업방면에서는 일만지(日滿支) 를 연결하는 전체계획 아래 우리나라의 생산력 확충을 도모한다는 기조 아래 특히 국방상 긴급한 물자의 공급, 중요산업의 진흥, 수출무역의 신장에 힘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또한 후방의 국민(銃後) 들에 대해 최선을 다하여 출정한 장병들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하며 전사자 와 부상병, 그리고 유족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도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예정입니다. 생각컨대 사변의 앞날은 아직 요원합니다. 그 해결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각오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사변은 실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큰 사건입니다. 이러한 대업을 앞두고 국민 모두가 용감하게 어려움을 뛰어넘겠다는 정신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성과를 거둘수 없습니다. 정부는 굳게 참고 견딘다는 견인지구(堅忍持久) 와 불퇴전(不退轉) 의 결의로 사변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상과 같은 방침에 따라 정부는 필요한 법률과 예산안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정부의 의향을 잘 이해해주시고 협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74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39.1.21) / 히라누마 내각 (第74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히라누마 기이치로 (平沼騏一郎) 제 34대 총리 (1939.1.5~1939.8.30) . 사변 이후 다시 한번 신년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생각치도 못하게 시국이 더욱 중대한 지금, 대명(大命) 을 받들어 내각의 수반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생각컨대 미력(微力) 하고 재주가 없는 저로서는 참으로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이제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 건설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여 제 74회 제국회의에서 여러분과 함꼐 폐하의 만수무강과 황실의 융창(隆昌) 을 축하드리면서 정부의 소신을 피력하고 국가의 대업을 받들어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천황 폐하께서는 사변 이후 특별히 복잡한 정무와 군무(軍務)에 연일 밤낮으로 힘쓰고 계십니다. 또 이번 회기 의회 개원식 즈음에는 특히 은혜로운 칙어를 내리시어 시국에 대해 깊은 마음을 쓰셔서 심려하시니 참으로 황송스럽고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맹세컨대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뜻을 받들어 있는 힘을 다해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사변 발발 이후 1년 반에 걸쳐 중국 각지의 전투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빛나는 연승을 거둔 황군 출정 장병들에게 깊이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이역의 땅에 뼈를 묻은 영령들에 대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표하고 그 유지를 받들고자 합니다. 황송스럽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작년 10월 3일, 군인 원호(援護) 에 관한 은혜로운 칙어를 내리시고 거액의 하사금을 교부하셨습니다. 황은(皇恩)의 광대함에 참으로 황송스럽고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정부는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은사재단 군인원호회 (恩賜財團 軍人援護會) 를 창립하여 정부의 시설과 더불어 군인원호사업의 완벽을 도모하고 출정 장병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부와 민간이 거국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중일전쟁은 황송스러운 폐하의 성단을 받을어 확고부동한 방침이 정해졌고 이에 근거하여 필요한 제반 정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각에서도 이러한 근본방침에 의거하여 끝까지 소기의 목적달성을 위해 매진하고자 합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일만지 (日滿支) 3국이 충분한 이해속에서 서로 제휴하여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에서 서로 연결되어 돕는 호조연환 (互助連環) 과 우호선린의 결실을 거둠으로서 동아 흥륭(興隆) 의 기초로 삼는 것 은 우리나라 창건의 정신을 드러내는 길이자 부동의 국시입니다. 이는 우리가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시켜야 하고 세계의 평화에 기여해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아안정의 책임을 떠안은 일만지 3국이 모름지기 신속하게 이러한 공정한 목표를 향해 협동하고 구태를 벗어나 신질서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영원한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황송스럽게도 메이지 천황꼐서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누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의거해야 한다 (舊來の陋習を破り天地の公道に基くへし)"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정치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멀리 신화시대부터 황조황종 (皇祖皇宗) 의 유훈이 되었고, 역대 천황은 이를 받들어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천지의 황도는 만물이 그 자리를 얻는 것으로 귀착(歸着) 하는데, 정치의 요체 또한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동아신질서 건설또한 이러한 근본정신을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중국측에서 이러한 제국의 커다란 정신을 잘 양해하여 약간의 의구심도,오해도 품지 않고 신속하게 이에 협력하지 않으면 동아신질서 건설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약 오늘 이후에도 끝까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일을 계속하는 자 에 대해서는 이를 단호하게 궤멸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제국은 중국에서 안목과 식견이 있는 인사로서 제국의 국책에 잘 협력하고 신중국 건설의 초석이 되려는 자 에 대해서는 기꺼이 원조하고자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중국 민중을 도탄의 어려움에서 구원하고 낡은 편견에 얽매이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여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업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이전부터 임시정부(臨時政府), 유신정부(維新政府), 몽강정부 (蒙疆政府) 의 당국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대도(大道)에 각성한자들이 연이어 나타나 갱생과 건설을 향해 나아가려는 기운이 중국 전역에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동아의 안정을 위해 기쁜일이고 정의에 입각한 제국 국시의 수행 성과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공산주의가 중국대륙에 만연하여 결국에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진실의 길을 실행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이를 배제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3국의 이해를 증진시킴과 동시에 동일한 이익을 가진 제3국과 제휴하고 협조해 나가야합니다. 맹방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번 사변 당초부터 일관되게 우리나라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함과 동시에 제국과 방공협정(防共協定, 1936.11.25) 을 통해 맺어진 이들 양국과의 관계가 나날이 긴밀해 지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주국의 눈부신 발전은 흥아(興亞) 를 위해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일입니다. 일만불가분(日滿不可分) 의 방책은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다른 만주국과 제3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제국은 쓸데없이 이를 경제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배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에 협력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최근 이전 내각이 발표한 제국정부 성명에서는 (1938년 12월 22일 발표된 제 3차 고노에 성명을 의미) 에서는 사변처리의 근본방침에 따라 중국이 신질서 건설의 분담자로서의 직능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보장 하겠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방침이 중국 민중을 각성시키고 또한 타국을 계발(啓發) 시킴으로써 최근의 정세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지침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용감한 황군 장병들의 활동과 내지와 외지를 불문한 열성적인 후방의 국민들의 후원을 통해 무력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항일용공 (抗日容共) 이라는 헛된 꿈에 광분하고 있는 국민정부 는 벽지로 도주하여 이제 하나의 작은 지방정권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변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무력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갱생과 이에 따른 일만지의 상호제휴를 통한 동아신질서의 확립에 있습니다. [ 제 3차 고노에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최근에는 흥아원(興亞院) 을 설치함으로써 중국 관련 업무의 원활하고 적정한 진척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시국의 앞날에는 많은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 예상했고 이를 극복하고 빛나는 앞날을 열기 위해서는 우리 조상들이 온갖 국난을 극복해온 것처럼 우리 국민 전체가 하나로 협동하여 황실을 기꺼이 돕겠다는 만민보익 (萬民補翼) 의 정신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즉, 국가의 모든 힘을 목적 관철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는 국민의 결의 하나만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사변은 종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민보익 (萬民補翼) 은 폐하의 마음을 온몸으로 받들고 철저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떠나 농공상(農工商) 등 어떠한 산업에 조사하는지를 불문하고 모두가 그 책임을 떠안고 만물이 제자리를 얻게 한다는 인애(仁愛)의 정신을 온전히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업무를 여하를 불문하고 인애의 정신으로 국가를 받들겠다고 다짐함으로써 폐하의 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이번 의원 개원식에 내려진 칙어의 정신을 받들어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인 국민정신의 앙양과 국가총력의 발휘를 통해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커다란 사업의 완성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 사변과 앞으로의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머저 국민정신을 앙양시킴과 동시에 교육의 쇄신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이러한 교육방침과 국민정신 함양운동은 모두 만민보익의 정신을 기초함아 무엇보다 실천을 행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더욱이 국가총력 그 가운데서도 국방력의 급속한 확충, 즉 강력한 군비마련과 일만지를 연결하는 경제력의 충실한 발전을 신속하게 구현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당면한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군비의 충실과 경제건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시국의 의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거국일치의 결의를 통해 생산력의 확충, 무역의 진흥, 자금물자와 노무의 조정, 물가규제 등에 대해 앞으로 더욱 연구와 노력을 거듭하여 이를 수행하기 위해 매진해야 합니다. 특히 생산력의 확충은 필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종합적인 확충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앞으로의 실현을 도모해야겠습니다. 또한 동아의 신정세에 대응하여 운수, 교통, 통신등 전반에 걸쳐 그 확충과 강화를 도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기에 그 시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각종 통제경제는 종합적인 국력을 가장 고도로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한도에서 앞으로도 계속 실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 지금까지는 전투행위의 수행이라는 당면적 수요에 대응하는 경제정책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항구적이면서 건설적인 정책도 아울러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상의 견지에 대해 앞으로는 국가총동원 태세를 강화하고 국가총동원법 가운데 필요한 조항을 점차 발동시킴과 동시에 동시에 국내 개혁을 도모함으로써 만민보익의 정신에 의거하여 국가의 총력을 국책이 지향하는 곳에 집중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 믿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책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공업자의 휴업과 실업에 대한 조치, 건전한 농촌, 산촌, 어촌의 유지와 기타 후방의 국민생활의 진흥과 안정 및 시설 확보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관민이 협력하여 쓸데없는 인습에 메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시국에 적당한 시책을 실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반 정책수행에 있어 앞으로 관민이 서로 협력하여 많은 성과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정부는 이상과 같은 방침에서 시책을 수행하고자 예산안과 법률안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내각 조직 이후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 정부는 이전 내각이 작성한 예산안과 법률안을 기초로 연구를 거듭했습니다만, 현재의 정세를 감안해 적당하다 판단하여 이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영광스러운 국가의 대업을 떠받들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시국의 요구를 감안하여 정부의 뜻을 잘 헤아려주시고 신속한 심의와 협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75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40.2.1) / 요나이 내각 ( 第75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요나이 미츠마사 (米内光政) 제 37대 총리 (1940.1.16~1940.7.22) . (36대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내각때는 연설이 없었다.) 이번에 뜻밖의 대명(大命) 을 맡게 되어 참으로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미증유의 시국에 즈음하여 혼신의 노력을 바쳐 국정운영의 중책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 제75회 제국회의에 즈음하여 정부의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황송스럽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이번 의회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뜻을 받들고 모두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진무(神武) 천황 폐하 즉위 이후 2600년이 지난 지금 국가 창건이라는 보국의 충성을 다하고 더욱 하늘과 땅처럼 끝없는 천양무궁(天壤無窮) 한 황운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더욱 국체(國體) 관념을 명백히 밝히고 국가 창건의 정신을 함양하면서 국민적 자각을 견고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공고한 국체 관념이야 말로 제반 방책의 근저이자 이를 명백히 해야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기원 2600년에 즈음한 최근의 중대한 시국에 당면하여 이러한 생각은 더욱 더 깊습니다. 생각건대 중일전쟁 발발이후 벌써 두해 반이 지났습니다. 각지에서 분전하고 빛나는 전과를 거둔 황군 장병의 노고에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며 호국 영령들에게도 깊이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또한 이들 최전선 장병의 근심이나 걱정을 엎애기 위해 후방 국민들의 끝없는 열성과 노력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일전쟁 처리와 관련해 이미 결정된 제국의 근본방침은 확고부동합니다. 정부는 이 근본방침에 따라 공고한 결의 아래 국내외 정세도 고려하면서 모든 수단을 다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단연코 시국의 해결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사변의 진전에 따라 이전부터 화평과 구국의 기운은 중국 각 방면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왕징웨이 (汪精衛) 를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부 의 수립이 가까워졌습니다. 제국으로서는 이 신중앙정부가 순조로이 성립될 수 있게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국제정세를 바라보건대, 작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일문 본문에서는 구주대전 歐洲大戰 이라고 표현되었다.) 발발 이후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는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때문에 그 귀추는 쉽게 예단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제국정부는 이에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중일전쟁의 해결에 매진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습니다만, 이러한 방침은 앞으로도 계속 견지할 생각입니다. 여러 타국과의 관계에서 제국은 의연하고 자주적인 입장에 서서 국교의 조정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침에 따라 대처하고자 합니다. 제국의 소신에 의거한 동아신질서 건설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국가의 총력을 집중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현재 가장 긴급한 사안입니다. 그리고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서는 군비의 충실, 국민정신의 함양, 경제력의 발전과 전시국민의 생활의 확보를 빼놓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현재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군비의 충실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국민정신은 역사적으로 비상시에 항상 강력하게 발휘되어 국운(國運)을 신장시켰습니다. 후방에서도 충용(忠勇) 과 의열한 정신을 더욱 함양시켜 국력의 충실한 발휘에 빈틈이 없게 최신을 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신숭조 (敬神崇祖) 사상을 함양하며 국민교육을 쇄신하고 국민체력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국가의 요무에 대응하는 근저로서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를 달성하고자 합니다. 경제력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확충과 무역의 진흥에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일만지(日滿支) 를 아우르는 경제의 종합계획 실시를 촉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저물가 정책 아래 제반 정책을 강구하여 물자의 증산과 적절한 배급을 도모하는 것은 현재 전시경제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국일치와 노력이 더욱 필요함과 동시에 관민이 협력하여 통제경제를 강화하면서 이를 원활하게 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정부는 전시국민생활의 확보에 충분한 힘을 기울여 미곡과 기타 중요 생활 필수품에 대해 필요량의 생사늘 확보하고 적정한 배급을 통해 공급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자도 예전에 없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평시에 참기 어려운 것도 최대한 절약해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전시의식에 철저하며 전시의 경제도덕을 준수하고 생활을 긴축하는 등 이에 대응할 방도를 강구하며 불퇴전(不退轉) 의 각오로 이에 대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쇼와 15년 (1940년) 정부 예산은 이전 내각에서 편성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의회에 제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세제도는 장기적 건설단계에 있는 현재의 재정경제 사정에 대응하고자 그 정비확립을 중심으로 국세와 지방세 전반에 걸쳐 필요한 개정을 실시하려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제반 방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거국일치와 불굴의 신념에 의거한 국민의 이해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흥아(興亞)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국가 전체가 더욱 전시태세를 강화하고 나아가 의용한 자에게 바치는 제국 신민의 전통적 본령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번에 제출한 예산안과 제반 법률안은 현재의 긴급한 요무에 대응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께서 정부의 뜻을 잘 이해해주시고 신속한 심의와 협조를 해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제76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41.1.21) / 제2차 고노에 내각 ( 第76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제 38대 총리 (1940.7.22~ 1941.7.18) . 오늘 제76회 제국의회를 맞이하여 정부의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번 회기 의회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뜻을 받들고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비상시국에서 봉공에 부족함에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사변 발발 이후 많은 고초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폐하의 위광(威光) 아래 혁혁한 전과를 거둔 황군 장병들에게 깊이 감사를 표하며 동시에 호국 영령들에게도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지금 제국은 실로 유사 이래의 비상시국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최 근 국내외 정세를 바라보건대 안으로는 국가총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방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국시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충실할 필요가 있고, 밖으로는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근간으로 삼아 그 무게중심을 중일전쟁의 완수에 두어야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국제적인 대변환을 잘 꺠달아 임기응변의 적절한 시책을 강구하여 국운의 일대 진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내각 조직 직후 곧바로 기본국책요강(基本國策要綱) 을 결정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체결된 일독이(日獨伊) 삼국조약 (삼국동맹조약, 三國同盟조條約, 1940.9.27을 의미) 의 취지는 황공하옵게도 당시 폐하께서 내리신 조칙에도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국은 본 조약의 체결에 따라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대동아의 안정을 확립하겠다는 커다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제국은 본래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습니다만, 제국의 소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앞날이 요원합니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장애에 부딪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예전에 볼 수 없던 국난의 돌파도 각오해야할 시기가 다가올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국민의 분발과 노력이 절실합니다. 제국은 지난번에 중국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근본방침을 천명하여 (1938년 12월 22일 발표된 제 3차 고노에 성명을 의미) 중국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임무에 적극 가담해줄 것 을 제창했습니다. 우리의 제창에 공감하는 인사들이 수립한 신정부는 황군이 무위( 武威)를 선양함에 따라 차츰 앞으로 나아가 작년에 드디어 일만지(日滿支)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체맹을 성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40년 11월 30일 체결된 일만화공동선언과 일화기본조약을 의미) 그러나 중국에는 여전히 민족의 협화(協和) 라는 큰 길을 자각하지 못하고 구국의 대사를 항전에서 찾으려는 세력이 잔존해 있습니다. 최근 영미(英米) 등은 장제스 (蔣介石) 에 대한 노골적인 원조정책을 전개하면서 제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항전을 일삼는 자는 끝까지 격멸시킬 것이고, 우리에게 공감하는 자는 굳게 제휴하여 대동아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더욱 매진할 것입니다. [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일화기본조약 (중일기본조약) 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현재 내정의 급무는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정사를 일신함으로써 국방국가체제를 확립하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신숭조 (敬神崇祖) 의 함양에 힘씀과 동시에 국체의 본의에 투철한 교학(敎學) 을 쇄신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상을 배격하며 국가에 대한 봉사를 첫째로 삼는 국민도덕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책은 본래 정치의 전면과도 관계되는 것이지만, 그 근원은 무엇보다 교육의 힘에 달려있는 만큼 정부는 특히 교육의 진흥에 힘쓰고자 합니다. 정부는 지난번 국내신체제 (國内新體制) 의 기저를 이루고자 만민익찬(萬民翼贊) 의 국민조직을 확립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만, 최근 대정익찬회 (大政翼贊會) 가 설립되어 대정익찬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국내외의 실정은 실로 일억일심(一億一心) 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늘 모든 국민이 작은 차이를 버리고 모두 하나가 되고자 진정으로 일치(一致) 하여 천하의 정치를 받들려고 하는 기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정익찬운동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모든 국민이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헌법의 조규를 준수하고 밤낮으로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신하의 도리를 실천하겠다는 신도실천(神道實踐) 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됩니다. 정부는 대정익찬운동이 앞으로도 급속하게 전개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입니다. 이 운동의 성패는 국운성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모든 국민의 열렬한 협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얼마전 관계(官界)의 새로운 태세를 확립하고자 먼저 문관제도 개정의 필요성에 따라 문관의 신분보장제도를 철폐하고 문관의 전형임용의 길을 넓히는 등 제반사항을 개정했습니다. 이에 관한 칙령도 이미 공포되었고 정부는 이의 운용에 만전을 기하여 관계 기풍의 일신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또 시국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관청사무의 재편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굳게 다지고 검토하여 필요한 혁신을 감행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일만지를 근간으로 삼아 대동아를 포용하여 자급자족경제의 확립을 도모함과 동시에 관민의 협력아래 중요산업을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계획경제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생산력을 확충하고 군비충실의 기초를 견고히 다짐과 동시에 국민생활의 안정에 기여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익우선과 국가신체제 (國家新體制) 아래 국민이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직역봉공 (職域奉公) 의 취지에 의거하여 국민경제를 지도함과 동시에 경제신체제를 확립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의 발랄한 창의를 바탕으로 최고의 능률을 끌어내고 생산력을 증강시킴으로써 총력을 발휘하고자 합니다. 현재 경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일반산업, 특히 중소상공업은 상당히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중소상공업의 유지와 육성에 힘씀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전업할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이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강구함으로써 국책 수행에 따른 국민희생을 최소한 줄일 수 있게 마음을 굳게 다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국의 변화추이에 따른 주요 식량 확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써 생산의 확보, 배급의 적정과 소비의 규정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곡에 대해서는 국가관리 제도를 실시하고 기타 수급조정에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여 국민생활의 기초를 안정시키고자 합니다. 또 정부는 농가생활의 안정을 도모함과 동시에 농업생산의 확충과 발전을 위해 비료 및 기타 생산필수자재의 공급에 힘써 식량증산을 도모하는 데에 하나라도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국민생활 필수물자는 시국의 진전에 따라 일반적으로 윤택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물자의 공급과 확보에 노력함과 동시에 저물가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려 합니다. 국민 또한 시국의 중대성을 잘 인식하여 생활을 간소히 하고 지조를 견지함으로써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상 고도국방국가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시책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혼심의 힘을 다하여 이를 완수시키겠다고 다짐합니다. 국민 또한 일찍이 예전에 없던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우리 조국의 건국 이후 빛나는 국운의 진전을 항상 폐하의 위광아래 우리 조상들의 충용한 인고발분 (忍苦발분發奮) 을 통해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현재의 난관을 돌파하고 전진함으로써 비로소 혁작(赫灼) 하는 일대 광명(光明) 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거국적으로 모두가 서로를 믿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힘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견지해줄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정부의 뜻을 잘 이해해주시고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과 법률안에 대한 신속한 심의와 협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제77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1.11.17) / 도조 내각 ( 第77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도조 히데키 (米内光政) 제 40대 총리 (1941.10.18~1944.7.22) . (39대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내각 (3차) 때는 연설이 없었다.) 지금, 중대한 시국을 맞이하여 제 77회 제국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국책 수행에 관해 솔직하게 소신을 피력하여 여러분들의 협력을 바라며 거국일체로 철석(鐵石)과 같은 의지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국난을 극복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현재, 제국을 둘러싼 세계의 정세를 살펴보건대 중일전쟁은 폐하의 위광아래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병의 분투와 열성적이고 강인한 후방 국민들의 활동으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고 충칭 (重慶) 정권의 항전력은 나날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 또한 각 지역에서의 국민정부 (여기서 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의미) 의 건설은 점차 진척되어 이제는 다수의 우호 타국이 국민정부를 승인하는 등 사변의 해결은 최후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를 돕는 국가들의 경제적, 군사적 책동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칭정권의 항전력에 대한 최대의 유일한 버팀목으로서 제국의 사변해결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북방에서는 올해 6월 독일과 소련의 개전이후 사건이 점차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국으로서는 사태의 추이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북쪽 변경의 안정을 위해 유감없는 조치를 강구하고자 합니다. (1941년 7월의 관동군특별대연습 關東軍特別大演習 을 의미하는 것) 남방에서는 작년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황군이 진주했습니다. 이어서 일본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제협정, 태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분쟁조정 등 제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는 더욱 증진되어 남방에 대한 제국의 평화적 진전이 점차 결실을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영미(英米) 와 네덜란드 제국의 군사적 합작의 강화에 따라 네덜란드령 동인도와의 경제교섭은 불발로 끝나고, 나아가 남태평양에서의 제국의 지위에도 중대한 위협을 받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이 에 제국은 비시정부 (본문에서도 비시정부라고 표현하고 있다.) 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공동방위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이에 근거 하여 7월 말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증파했습니다. 그러나 영미와 네덜란드는 이러한 제국의 당연하고 자위적인 조치에 대해 의구심과 두려움을 품으면서 자산을 동결하는 등 사실상 전면적인 금수조치를 통해 제국을 목표로 경제 봉쇄를 실시함과 동시에 군사적인 위협을 급속도로 증가시켰습니다. 분명 교전관계에 있지 않은 국가 사이의 경제 봉쇄는 무력전에 비해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적성행위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제국이 기도하는 중일전쟁의 해결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제국의 존재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평화를 바라는 제국은 은인자중(隱忍自重) 하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참아내기 어려운 것을 인내하고 적극적인 외교교섭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노력했지만 그 목적은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제국은 이제 백년대계를 결정해야 할 중대한 국면에 서있습니다. 정부는 건국 이후의 국시인 평화애호의 정신에 의거하여 제국의 존립과 권위를 옹호하고 대동아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아직도 외교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에 제국이 바라는 바는 제3국은 제국이 기도하는 중일전쟁의 완수를 방해말 것. 제국을 에워싼 국가들이 제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 않음은 물론 경제봉쇄와 같은 적성행위를 해제하여 경제적인 정상관계를 회복할 것. 유럽에서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이 동아에 파급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지할 것. 이상 3항목에 걸친 목적이 외교 교섭을 통해 관철된다면 이는 단지 제국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감안하건대 교섭의 성패는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든 장애를 예견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태세 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제국이 이미 정한 국책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함으로써 제국의 존립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국은 실로 유구한 2600년의 역사속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던 국가성쇠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정부는 이를 깊이 받아들이고 모든 힘을 기울여 폐하를 보필하는 중책을 다하겠다는 각오입니다. 사태가 어떻게 발전되더라도 고도국방국가 체제의 완성이야 말로 정말로 매우 중대하고 긴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선 국민의 기개를 더욱 긴장시키고 산업경제의 능률을 최고도로 발휘할 필요가 이습니다. 정부는 이와 더불어 국민생활의 확보에 대해서도 만반의 대척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긴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모든 국민이 이제 커다란 비약의 시기를 맞이한 만큼 앞으로 전도양양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오늘날의 고통을 서로 나누고 국민이 하나가 되어 폐하의 업적을 다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정치경제의 운영에 대해 제반의 개혁과 정비를 실시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실시하는데 있어서는 쓸데없이 이상을 쫒지않고 사태에 따라 각각 전문적 기능의 유기적인 능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모든 국민이 이러한 정부의 뜻을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정부에 협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번에 제안한 예산안은 주로 긴박한 현재의 사태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계산한 것입니다. 또 제출한 법률안도 특히 현재 긴급한 사안에만 한정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정부의 뜻을 잘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신중한 심의와 협조도 바라마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만주제국(滿洲帝國) 과 중화민국 국민정부 (中華民國 國民政府) 가 제국에게 보여준 변함없는 협력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또 맹방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 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깊이 경축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제국과 함께 정의에 의거한 세계신질서 건설 에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본 대신은 이번 중대 시국에 처하여 여러분과 함께 서로 힘을 합해 천하를 다스리는 폐하의 정치를 받들어 모실 수 있게 된 것에 영광스럽고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난국의 돌파와 어려움의 극복은 모든 국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에 온힘으로 매진하고 국민의 총력을 결집시켜야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에게 앞으로의 더 많은 지원과 협력을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호국 영령에게 깊은 조의를 바치며 전선과 후방에서의 분투노력에 마음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제78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1.12.16) / 도조 내각 ( 第78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오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오직 한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중대 시국을 극복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지난 제77회 제국의회에서 저는 국책수행에 관한 정부의 소신을 솔찍히 피력하고 여러분께 협력을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정부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국에 대해 당시에도 밝힌 바와 같이 제3국은 제국이 기도하는 중일전쟁의 완수를 방해말고 제국을 둘러싼 여러 국가가 제국에 대해 직접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음은 물론, 경제봉쇄와 같은 적성행위를 해제하고 정상적인 경제관계를 회복할 것과 유럽에서의 전쟁이 확대되어 그 소란이 동아에 확대되는 것을 적극 방지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부는 외교 교섭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참기 어려운 것도 견뎌내면서 온갖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제국의 이러한 은인자중 (隱忍自重) 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국의 공정한 주장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그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그들 자신이 제안한 것 조차 배신하고 비밀리에 영국과 모의하여 난폭하고 오만한 새로운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가 발표한 바 있습니다만, 제국으로서 가장 참기 어려운 점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육해공 및 경찰을 포함한 모든 제국 부대를 철수시킬것. 충칭(重慶) 정부를 제외한 어떠한 정권에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하지 말것. 제3국과 체결한 어떠한 협정도 태평양지역의 평화확보에 모순되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동의할것. (이 내용은 1941년 11월 26일 미국이 일본에 전달한 이름바 헐 노트 (Hull Note) 의 제 2,3,4항, 9항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는 다른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제국의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전면 철병, 난징(南京) 정부의 부인, 삼국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의지는 경제적인 단교와 무력적 위협으로 우리에게 도전함으로써 제국을 굴종시키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우리가 미국의 요구에 굴종한다면 대동아의 안정을 위해 힘써온 제국의 다년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제국의 존립조차도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또 이는 세계평화의 확립에 협력하기로 한 맹방과의 맹세를 포기하고 제국의 신의를 실추시키기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국으로서 결코 참을 수 없습니다. 사태가 이미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평화애호의 마음에 불타는 제국이라고 할 지라도, 그 권위와 자존(自存) 을 옹호하게 단호하게 떨쳐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에 천황 폐하께서는 이번달 8일, 황송스럽게도 영미(英米) 에 대한 선전(宣戰)의 조칙을 내리시었고 우리는 폐하의 깊은 심려를 받들어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육해군 장병들은 일단 개전이 정해지자 대명을 받들어 (개전으로부터) 10일도 지나지 않은 지금, 순식간에 적의 요충지를 돌파했습니다. 하와이을 기지로 삼은 미국함대의 대부분을 괴멸시키고 영국 동양함대의 (일문 원문에서는 영국 '극동' 함대로 표현했다.) 주력을 괴멸시키는 등 적이 과장하여 선전하여 위협해온 대일 포위진도 여러 곳에서 격파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전과는 세계의 경이의 대상이 되었고 국위를 해외에 떨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오로지 폐하의 위광에 따른 것으로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묵묵하게 은인자중하면서 다년간 연마해온 노고를 오늘날 다시 한 번 정비하여 싸워나가고자 합니다. 천황 폐하와 국가에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생환을 기약하지 않는 우리 육해공군 용사들의 위대한 힘의 발휘에 대해 그저 가슴속 깊이 감사와 숭경의 마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또와 이와 더불어 후방의 관민들의 중대한 책임감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지금 제국의 흥망은 바로 이 전쟁에 걸려있습니다. 우리 동포는 과거의 역사가 명확히 보여주듯이 커다란 국난에 직면하게 되면 기필고 하나가 되어 순국의 정신을 발휘하고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면서 국위를 세계에 발양하고 국운을 융창시켜왔습니다. 무릇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승의 신념입니다. 저는 모든 국민이 우리 국체의 본의를 이어 받아 건국 2600년간 아직 싸워서 패배한 적이 없는 제국의 영광스러운 사적을 되돌아보면서 굳은 필승의 신념 아래 어떠한 어려움도 참아내며 각자 맡은 일에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하여 기필코 최종적으로는 승전의 영광을 가져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적은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자랑으로 내세워 세계 제패의 야망을 꿈꾸는 미영(米英) 입니다. 제국은 대동아의 재난과 변란을 평정시킴과 동시에 이 강대한 적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따라서 장기전은 처음부터 각오한 바입니다. 즉, 제국은 앞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적 병력의 섬멸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서전(緖戰)의 혁혁한 성과를 늘려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동시에 새롭게 참가한 남방일대를 포함하여 제반 분야에 걸친 거대한 건설을 통해 장기전에 견딜 수 있는 태세를 신속하게 정비해야 합니다. 싸움은 오히려 지금부터입니다. 우리 국민은 개개의 승전에 도취하거나 개개의 현상에 근심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바른 기운 확충하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안으로는 게으름을 경계하고, 밖으로는 사악한 사상의 침투를 막아 필승의 확신 아래 끝까지 현신순국(獻身殉國) 을 염원하며 맹세코 전쟁의 목적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최근 맹방 만주국과 중화민국 (본문에서는 滿 '華' 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양 국은 제국과의 일심동체의 관계를 더욱 다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제국에 대해 온갖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이자리를 빌어 마음으로 부터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또한 제국은 이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했고, 태국 과 공수동맹 (攻守同盟) 체결에 대해 서로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이들 양국이 더욱 제국과의 제휴를 강화하면서 서로 함께 신질서 건설에 매진하고 이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발표한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제국이 이번에 남방지역에 대해 새로운 행동을 개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미영의 폭정을 배제하여 대동아 여러 지역을 명랑(明朗) 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새로운 대동아를 건설하기 위함 입니다. 대동아 수억의 주민 또한 제국의 이러한 진의를 잘 이해하여 무익한 저항을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동지로서 신속하게 제국이 의도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의 건설이라는 성업(成業) 에 참가 하길 바랍니다. 최근 충칭 정권이 여전히 항전을 하고 있는 것은 유감입니다. 만약 그들이 앞으로도 여전히 항전을 계속한다면 제국은 앞으로 티끌만큼이라도 압박의 정도를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그 저항의 근원이 괴멸에 임박해있어 소란의 평정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최근 맹방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은 제국의 개전과 함께 참전했습니다. 이들은 제국과 더불어 확고부동한 결의를 통해 모든 강력한 수단을 다하여 세계 평화를 위해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승리할 때까지 결코 싸움을 그만두지 않겠다 약속했습니다. 또 우리는 서로 완전한 양해 없이 미영 양 누구와도 휴전 또는 강화를 하지 않을 것과 공정한 신질서의 도래를 위해 앞으로 더욱 긴밀히 협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일독이 (日獨伊) 삼각동맹이 더욱 견고해진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은 이자리에서 미영을 굴복시킬 때까지 결코 무기를 놓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또 저는 이번 기회에 개전 이후 국민의 열성에 넘쳐나는 진정한 애국의 정성에 마음으로 감격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과 법률안은 모두 전쟁수행에 있어 긴급한 사항에 한정된 것입니다. 아무쪼록 신속한 심의와 협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79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42.1.21) / 도조 내각 (第79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저번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을어 온 힘을 기울여 직책을 수행하고 신속히 전쟁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개시 이후 황군이 나가는 곳에는 상대할 적이 없고 가는 곳마다 혁혁한 전첩(戰捷) 을 거두어 단시일에 대동아에서의 적의 요충지 대부분을 이미 괴멸시켰습니다. 한편 충칭(重慶) 정권에 대해서도 더욱 압박을 강화하여 북녘을 지키는 반석을 구축함으로써 제국의 위풍당당함을 국외에 선양하고 있는 것에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오로지 폐하의 위광에 따른 것으로 감격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추위와 더위를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워나가면서 위대한 전과를 거두고 있는 우리 충용무비 (忠勇無比) 한 육해군 장병들의 노고와 무훈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국가의 영령에 대해서도 이자리에서 애도의 마음을 피력함과 동시에 그 유족과 부상 장병에게도 깊은 동정을 표하는 바입니다. 제국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대동아전쟁의 지도 요체는 대동아에서의 전략거점을 확보함과 동시에 중요 자원지역을 우리 관제하에 둠으로써 우리의 전투력을 확충하면서 독일-이탈리아 양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서로 호응하여 더욱 적극적인 작전을 전개하여 미영을 굴복시킬 때까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제패의 기초를 다지며 세계 최대 부강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서전(緖戰)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필히 집요하게 우리에게 항거하여 열세를 만회하고자 획책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갖가지 곤란한 일들이 발생할 것이고 전쟁이 장기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각오해야 합니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우리의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국민은 더욱 필승의 신념아래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도 참아내며 국가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하고 무예를 숭상하는 근검상무 (勤儉尙武) 와 헌신보국(獻身保國) 의 정신이야 말로 지금의 난관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장래 발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입니다. 제국은 지금 국가의 총력을 모아 오로지 웅대하고 광범위한 작전을 수행하며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근본방침은 사실상 건국의 정신에 그 연원을 두는 것으로, 대동아의 각 국가와 민족이 각각 독립하고 제국을 핵심으로 도의(道義) 에 의거한 공존공영(共存共榮) 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것 에 있습니다. 이러한 건설은 광대한 지역에 걸쳐 각조 민족과 서로 의지하고 제휴하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이 건설에 참가하려는 지역은 자원이 매우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백년간 미영 등의 극심하고 가혹한 착취를 받아와 문화의 발전이 지나칠 정도로 방해를 받은 지역입니다. 제국은 이 지역을 포함해 인류 역사상 하나의 신기원을 긋고자 새로운 구상 아래 대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고 나아가 맹방과 함께 세계신질서 건설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는 실로 전례가 없는 거대한 사업입니다. 또한 이 사업의 성공은 우리의 무력전을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기도 합니다. 건설에 즈음하여 대동아 방위를 위해 절대 필요한 지역은 제국 스스로 이를 파악하여 조치하고 기타 지역에 관해서는 각 민족의 전통과 문화 등에 따라 전황의 진전을 고려하며 각가 적당한 조치를 취하고자 합니다. 현재 제국 육해공군은 이미 홍콩(香港) 을 점령하고 필리핀의 대부분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말레이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제압했고 최근에 들어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요충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국은 이들 여러 지역 가운데 홍콩과 말레이반도는 다년간 영국의 영토이자 동아에서의 화란(禍亂) 의 기지였던 만큼 철저히 그 화근을 제거하려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들 지역을 대동아 방위의 거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제국은 필리핀이 앞으로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일익으로 협력할 경우에는 흔연하게 그들 민중에게 독립의 영광을 주고자 합니다. 버마(미얀마) 등에 대해서도 제국이 의도하는 바는 필리핀과 다르지 않습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호주에 대해서는 이들이 현재와 같이 제국에 대해 항전의 태도를 계속 보인다면 제국은 이를 결코 용서치 않고 격퇴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들 주민이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고 협력한다면 그들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 제국은 충분한 이해심으로 힘을 보태는 데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여전히 충칭정권이 무의미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제국은 이를 철저히 분쇄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이야 말로, (충칭정권이) 세계 정세의 대변환을 올바로 직시하면서 그동안 미영에 의존하던 구태 를 버리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커다란 사업에 동참해야 할 시기 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만주국과 중화민국 (물론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의미) , 태국 의 국민이 하나가 되어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한 이에 협력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편 맹방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은 제국과 함께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해 점차 전과를 올리고 있어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제국은 이들 맹방 사이에 군사, 외교, 경제등 전반에 걸쳐 앞으로도 더욱 그 결속을 견고히 하여 공동의 목적달성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제국이 도모하려는 건설은 처음에는 군정하에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것부터 착수하면서 장래의 대건설을 준비하고 방위와 치안의 확립에 따라 점차 민간참여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국이 도모하는대 대동아건설의 방책은 국가 백년지계를 충분히 감안하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는 널리 관민 각 방면의 인재를 동원하여 그들의 협력으로 대책을 수립하고 수행하는데 있어 하나라도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국의 오늘날의 책무는 이상의 정세에 대응하며 국운의 진전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오로지 무력전에서 적을 굴복시키는 전과를 확대시킴과 동시에 전쟁 수행력의 강화를 촉진시켜 필승의 태세를 확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정부는 제반 시책도 이에 집중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국정 각 부문에 걸쳐 전쟁 수행에 필요한 방책을 확정하고 신속히 이를 실행하고자 합니다. 즉, 전시생산력의 유지,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 특히 필요한 기업 가운데 우수 기업에 중점적으로 자재, 노동력, 전력, 자금을 집중하여 기존 설비의 최고도 활용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부는 이와 동시에 중요국방산업의 생산확충에 각별히 신경쓰고 국민생활의 확보를 위한 전시식량대책의 정비에 그릇됨이 없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중대한 문제는 자원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통운수의 정비 여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선박건조에 특히 힘을 쏟아 교통운수의 개선과 강화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또한 국책수행을 위해서는 민간자금의 축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에 정부는 국민저축의 증강을 위해 앞으로 더욱 노력하고자 합니다. 개전 이후 우리 국민의 활동범위는 현저하게 확대되었고 그 책임 또한 매우 무거워졌습니다. 이제 국민의 소질향상과 인구증가는 전쟁수행을 위해서도, 앞으로의 건설 완성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교육 전반의 쇄신강화에 힘을 쏟음과 동시에 국민보건시설과 의료제도를 근본적으로 정비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이상 말씀드린 취지에 의거하여 예산안과 법률안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신속한 협조를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방이 우리 제국에게 보여준 후의에 심심한 사의를 표명함과 동시에 국민 여러분이 서로 협력하여 각자 맡은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주는 지극한 애국의 정성에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79회 제국의회 통상회 - 대동아 경륜(徑輪)에 관한 제국 국책 천명연설 (1942.2.16) / 도조 내각 (第79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大東亞經綸に關する帝國國策闡明に就ての演説) 황군은 이미 대본영(大本營) 이 발표한 바와 같이 지난 15일 싱가포르를 점령했습니다. 육해군 당국도 전황에 대해 이미 보고 했습니다만, 저도 이기회에 소신을 피력할 수 있어 매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송스럽게도 선전(宣戰) 의 조칙이 내려지자마자 개전 벽두부터 순식간에 미영 함대의 주력을 무찌르고 불과 20일만에 홍콩 을, 30일만에 마닐라 를, 그리고 70일이 지나지 않아서 싱가포르 를 공략함에 따라 미영의 수십년에 걸친 동아 침략의 3대 거점 은 모두 우리가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보르네오, 셀레베스, 뉴브리튼 등의 요충지도 모두 우리의 수중에 떨어졌고, 황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주력을 격멸시켰습니다. 지금 황군은 넓고 광대한 지역을 제압하여 인류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혁혁한 전승은 다름아닌 폐하의 위엄아래 이루어진 황군 장병들의 용전분투 덕분입니다. 저는 집을 버리고 자기 몸도 버려 호국의 초석이 된 영령, 멀리 이국에서 부상당하거나 질병을 얻은 장병, 육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에서 견줄 수 없는 어려움과 위험을 극복하며 분투하고 있는 용사들, 그리고 남편과 자식형제를 전쟁터에 내보내고 그들을 유감없이 활약시키면서 집안을 지키고 도우며 온갖 곤란을 참아내며 총후봉공을 다하는 동포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동아전쟁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우리나라 건국의 위대한 이상에 근거하여 대동아 각 국가와 민족이 각자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황국을 확신하여 도의(道義) 에 의거한 공존공영(共存共榮) 의 신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으로서, 미영의 동아에 대한 태도와는 그 본질이 다릅니다. 현재 예전부터 미영의 동아 침략과 압제의 근거지였던 싱가포르와 기타 요충지는 대동아 여러민족을 위한 신질서 건설과 그 방위의 거점으로서 한없이 밝은 앞날의 희망과 영예아래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콩, 필리핀, 말레이 반도의 경우에는 이미 새로운 건설을 향해 견실한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획기적인 기회에 관계 여러 민족과 국가에게 제국의 진의를 다시 한번 피력하고자 합니다. 황군은 현재 버마(미얀마) 방면에서도 점차 공격을 강화하여 그 요충지를 차례로 우리 수중에 넣고 있습니다. 제국의 버마 침공의 진의는 영국의 군사거점을 괴멸시킴과 동시에 미영의 원장 (援蔣, 장제스를 원조하다) 루트를 차단시키는 것에 있으며 본디 버마의 민중을 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버마 민중은 이미 그 무력함을 폭로한 영국의 현상을 올바로 직시하고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협력하려는 것입니다. 제국은 흔연히 버마 민중의 다년간에 걸친 간절한 바람, 즉 버마인의 버마건설 에 적극적인 협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수천 년의 역사와 빛나는 문화의 전통을 가진 인도도 지금 영국의 포악한 압제에서 벗어나 대동아공영권에 참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국은 인도가 인도인의 인도로서 본래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 애국적인 노력에 대해 굳이 원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저는 만약 인도가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그 사명에 아직 눈뜨지 못해 영원히 영국의 감언과 미끼에 넘어가 그들의 지배에 복종한다면 인도민족이 영원히 재흥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심히 우려할 수 밖게 없습니다. 미영과 제휴하여 무모한 저항을 계속하는 네덜란드 군에 대해 제국은 철저히 이를 격멸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민족은 우리의 진의를 이해하여 대동아건설에 협력해오고 있습니다. 제국은 그들의 희망과 전통을 존중하여 인도네시아 민족 을 미영의 괴뢰인 네덜란드 망명정부의 압제로부터 해방 시키고 그 지역을 인도네시아인의 안주(安住)의 땅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호주 와 뉴질랜드 도 의지할 수 없는 미영의 원조를 기대한 전투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제 이들 민중의 복지는 이들 정부가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고 공정한 태도 나올것인가에 나오지 않을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유럽 (일문 원문에서는 구주 歐洲) 와 홍콩, 말레이반도에서 영국이 어떻게 호주군과 뉴질랜드군 장병을 이용했고 어떠한 처우를 받았는지는 호주와 뉴질랜드 민중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눈을 중국대륙으로 돌려보면, 싱가포르의 함락에 따라 미영이 호언하던 대일포위진의 일각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황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으로 이름바 버마루트가 차단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충칭(重慶) 정권은 완전히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제국은 단호하게 최후의 철퇴를 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러번 말씀드렸듯이 중화민국 국민에 대한 제국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그들을 형제로 생각하여 서로 기대고 도우면서 함께 대동아를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탐욕스러운 지도자 에게 현혹되어 대동아 융흥(隆興) 이라는 빛나는 이시기에 중화의 민중들이 여전히 도탄의 고통에 빠져있다는 것은 제국으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남미와 기타 중립국들이 분명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여 미영의 견제를 받아 남의 이익을 위해 위협을 무릅쓰는 어이없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 합니다. 더욱이, 저는 이 기회를 삼아 맹방 제국이 우리 제국에게 보여준 협력과 후의에 국민과 함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즉, 만주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中華民國 國民政府), 태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이 항상 제국과 동고동락 (同苦同樂) 의 정신으로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정진하고 있는 것에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맹방 제국이 우리 제국과 절실하게 협력하고 호응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더욱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에 정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그들이 용전분투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앞으로도 더욱 전과를 확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 싱가포르는 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동아전쟁 수행을 향한 하나의 계단을 쌓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번의 전승에 국민이 취해 긴장을 늦추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전쟁은 진짜 지금부터입니다. 제국은 이번의 전승을 계기로 더욱 맹방 제국과의 긴밀한 제휴를 통해 더욱더 적극적인 작전을 수행함으로서 미영과 그 추종세력을 철저히 격퇴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 싱가포르 함락 소식을 접하고 모든 국민과 함께 황군의 전승을 마음으로부터 경축함과 동시에 모두가 하나가 되고 관민이 한길로 나아가 국가 전체가 새로운 인식과 결의 아래 전쟁의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제79회 제국의회 통상회 - 호주와 인도에 대한 태도 천명 연설 (1942.3.12) / 도조 내각 (第79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豪洲、印度に對する態度闡明に就ての演説) 황군은 이미 대본영(大本營) 이 발표한 바와 같이 9일 자바(Java) 섬을 제압함으로써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영토를 제압했고 또한 버마 최대의 거점 랑군(Yangon) 도 8일 드디어 함락되었습니다. 육해군 당국도 전황에 대해 이미 보고했습니다만, 저도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소신을 피력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1월 21일과 2월 16일 본 의장에서 우리의 진의를 양해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무익한 저항을 하고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군을 철저히 격파하고 더욱이 버마 방면에서 영국의 군사거점을 전멸시켜 미영의 원장(援蔣) 루트를 차단하겠다는 제국의 굳은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이에 황군은 네덜란드 동인도의 최후 거점인 자바 섬에 3월 1일 상륙하여 5일에는 수도 바타비야 (Batavia) 에 이어 요충지 스라바야 (Surabaya) 를 함락시키고 드디어 9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무조건 우리군에 항복함으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평정을 끝마쳤습니다. 한편 버마 방면에서 황군은 멀고 험한 산을 넘어 버마 평야를 석권하고 드디어 8일 영국의 동아침략 주요거점이자 미영의 중국 (충칭정권) 원조를 위한 유일한 문호인 랑군을 함락시키면서 소 위 버마루트는 황군의 위력앞에 완전히 괴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국정부가 예전에 표명한 바가 불과 20일도 지나지 않은 오늘 대부분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단시일 내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제압하고 버마의 요충지대를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황폐하의 위엄아래 우리 충용무비한 황군 장병의 용전분투 덕분으로 참으로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현재 황군에 의해 미영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등 기타 요충지의 민중들은 황군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새로운 건설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어 참으로 대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저는 인도네시아인과 버마인이 오랜기간동안 영국과 네덜란드의 압정 아래 신음해온 고뇌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표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동아 건설의 일원으로서 다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앞으로도 더욱 번영하기를 염원합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랑군의 함락에 따라 호주와 인도는 바로 우리 무력의 앞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다시 한번 호주와 인도에 대한 제국의 소신을 밝혀 두겠습니다. 지역이 광대함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매우 희박하고 더구나 미영 본국과 거리가 먼 호주가 우리의 강력한 무력 앞에 스스로를 방위할 수 없다는 것은 호주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호주는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지금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할지는 명백합니다. 호주가 지금이라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오늘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운명이 곧 내일의 호주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호주가 정실과 인연에 구애받지 않고 진정으로 사태를 터득하여 천명(天命) 을 직시하고 신속하게 가장 중대한 조치를 결정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인도 민중에 대해 제국은 애당초 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국은 미영을 철저히 격파하겠다는 이전의 결의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이자리를 통해 밝혀두는 바입니다. 지금 '버마인의 버마' 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 4억 민중의 오랜 염원인 '인도인의 인도' 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영국은 다년간 인도를 업신여기고 계속해서 압제를 펼쳤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일문 원문에서는 이전의 대전 前大戰) 당시 영국이 말한 약속의 정체가 결과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의 인도인의 기억에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이제 또 영국은 다시 온갖 달콤한 말로 인도를 속이고 있습니다. 만약 인도의 지도자가 이러한 영국의 감언에 넘어가 인도 민중의 오랜 희망을 저버리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잃기라도 한다면 인도는 영원히 구제받을 기회가 없어지고 4억민중의 불행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지금 떨쳐 일어나 '인도인의 인도' 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을 떠맡을 것인지 , 영원한 미영의 질곡 아래 노예라는 이름을 후세에 전할 것인지 인도는 지금이야말로 과거를 청산하고 긴박한 새로운 사태를 직시하여 최종적 결의를 해야할 시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현재 랑군은 함락되어 미영과의 연락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충칭(重慶) 정권도 문자 그대로 고립상태에 빠졌습니다. 지금 미영이 충칭에 제공하려는 것은 가치가 없는 황금일 뿐이고, 그 대신 미영이 충칭이 요구하는 것은 중화민국 국민의 피와 몸입니다. 오늘날 미영은 온갖 기만과 감언으로 여러 민족을 농락하면서 다른 국가를 모두 자기방위의 희생물로 삼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일단 패배하면 헌신짝처럼 버려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참혹한 사실을 보면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충칭의 지도자 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눈부신 대동아의 여명기에 이들 지도자에 맹종(盲從) 하여 무익한 싸움을 지속하여 무익한 고통을 맛보고 있는 충칭 정권 하의 민중 에 대해 마음으로 부터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로써 대동아전쟁이 개시된지 불과 3달이 지났습니다. 지금 미영의 주력함대는 태평양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고, 서남태평양의 거점 또한 모두 우리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미영은 전쟁 개시 이전 제국의 국력을 경시하고 스스로 불패의 태세를 호언하면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거부하여 결국 제국이 어쩔수 없이 전쟁에 나설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지금은 싸움에 패배하여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폭로에 대해 미영의 위정자들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변명과 생각할 수도 없는 허구의 선전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정부 당국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대해 어떻게 비판해야할 지 말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미영의 정부당국은 쓸데없이 먼 장래의 어렴풋한 희망에 매달려 군비확장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태평양에서 그들을 대신한 우리의 전략적 우위를 고의적으로 경시하면서 황군의 다년간에 걸친 훈련, 절묘한 작전과 장병의 충용, 국내의 변하지 않는 결속에 눈을 감고 쓸데없는 계수를 내세워 스스로의 불안과 초조함을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갈 것임이 불보듯 뻔합니다. 저는 이러한 위정자들의 야심에 현혹되어 그 전통을 깨고 목표도 없는 전쟁을 감행하여 한 걸음씩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미영의 국민들은 이번 기회에 깊이 반성해야한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맹방제국이 우리의 작극적인 작전에 호응하여 점차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은 앞으로도 더욱 제휴하여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하고자 합니다. 또한 제국은 만주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中華民國 國民政府), 태국등의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은 대동아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는 이들 국가와 더욱 제휴를 긴밀히 다져 공동의 목적달성을 위해 매진하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이 영광스러운 전과는 폐하의 위엄아래 황군 장병의 선모용전 (善謀勇戰) 에 따른 것으로 이에 대해 우리 국민은 모두 감격해 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빛나는 승리 뒤에는 국민 여러분이 온갖 어려움을 참아내며 후방의 책임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은 이렇게 서전(緖戰) 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지금 제국은 혁혁한 전과를 확충하여 끝까지 적극적인 작전을 감행하여 미영을 철저히 격파함으로써 대동아신질서를 확립하고 세계평화의 도래를 추구해야 합니다. 전쟁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그리고 건설도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서전의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만주사변 (滿洲事變) 이래 묵묵히 이어온 불요불굴 (不撓不屈) 의 정신을 더욱 함양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관민이 서로 오직 빛나는 앞날의 희망에 불타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맹세하는 바입니다. 제80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2.5.27) / 도조 내각 ( 第80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오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어려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있는 힘을 다하여 충심으로 끝까지 전쟁 목적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 기회에 국민의 여망을 책임지고 진용(陣容) 을 새롭게 하신 중의원 의원 여러분에게 정부의 소신을 솔직하게 피력할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지 아직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황군은 단기간에 여러곳에서 적 병력을 격퇴하고 있습니다. 대동아의 요충지는 모두 황군이 점유하기에 이르렀고, 미영의 해상부대는 맥없이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에 폐하께서는 전승을 갸륵하게 여기시어 여덟 번이나 은혜로이 칙어를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연이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에 힘입어 국위를 세계에 선양한 것은 실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업적입니다.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전 연승과 더불어 각 방면에선느 성대한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대동아전쟁의 목적이 점차 달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방에서의 작전에 호응한 중국 주둔 황군의 활약으로 충칭(重慶) 의 세력은 더욱 감쇄되어 가고 있습니다. 황군은 북방을 지키는 보루로서의 반석을 굳게 다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천황 폐하의 위광 아래 베풀어주신 황군의 뛰어난 계략과 분전의 은혜입니다. 저는 모든 국민과 함께 황군 장병 여러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많은 충용 의열 영령에게 참가 애도의 마음을 바치는 바입니다. 이전까지 미영등의 질곡 아래 신음해온 대동아의 민족은 지금 팔굉위우 (八紘爲宇) 의 대정신을 끌어안고 각자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계신질서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새로이 태어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외 파병의 위업에 호응하여 국내방위의 대비도 더욱 충실 강화되고 있습니다. 1억 국민은 자기 몸을 바쳐서 모든 힘을 다하겠다는 의용봉공 (義勇奉公) 의 정신을 나날이 앙양시키고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에서 끝까지 싸워이기겠다는 불굴불요의 결의와 쓸데 없는 것은 배제하고 효과가 있는 것에 효과를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질실강전 (質實剛健) 의 이상이 실생활에서 구현되고 있어 진정으로 기뻐해 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 안팎이 모두 유리한 지금의 태세도 전쟁완수를 위한 승리의 단서를 타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미영과의 전쟁에서 승패의 갈림길은 바로 앞으로의 총력전의 결과에 달려있다는 것은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세계제패를 헛되이 꿈꾸는 미영을 근저로부터 붕괴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정의의 창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천황 폐하께서 황송스럽게 선전(宣戰)의 조칙을 내리신 개전 당초부터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일억 동포의 견고한 결의이자 부동의 신념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쟁지도의 요체는 세계에서도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육해군의 공동작전의 묘미를 더욱 발휘하여 끝까지 적을 찾아 기필고 격멸하면서 더욱 서전(緖戰) 의 전과를 확충하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장엄한 적극적 작전에 호응하여 웅대한 건설을 감행함으로써 국가총력의 비약적 향상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더욱 필승의 태세를 강화하는 것에 있습니다. 정부는 이를 위해 항상 의지가 굳어 흔들리지 않는 불발(不拔)의 신념과 부동의 결의로 1억 국민의 진두에 서서 밤낮으로 온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항상 주도면밀한 준비태세를 완전히 갖춤과 동시에 국가 안팍의 정세에 즉응하여 과감한 실행에 나섬으로써 보필의 중책을 다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고자 합니다. 저번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굳이 총선거의 시행을 주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42년 4월 30일의 제21회 중의원 선거를 의미) 이번 총선거를 계기로 국민의 끓어오르는 열의는 오로지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익찬정치체제 (翼贊政治體制) 의 확립을 추구하겠다는 팽배한 기운으로 변화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물결치고 이습니다. 이러한 국민의 진심어린 정치적 의욕은 드디어 결실을 맺어 익찬정치회 (翼贊政治會) 를 창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다년간에 걸친 모든 국민의 바람인 새롭고 왕성한 정치력의 결집을 볼 수 있게 되어 우리나라를 위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정부는 팽배해진 국민의 열의에 부응하여 각종 국민운동을 가능한 이를 진지한 국민들의 자발적 운동에 맡김으로써 건전한 발전을 기도하고자 대정익찬회 (大政翼贊會) 의 솔하에 두고자 합니다. 대정익찬회는 확충된 사명으로 그 기능을 쇄신하고 의지를 새로이 함으로써 만민익찬 (萬民翼贊), 신도실천 (臣道實踐) 의 국민운동 중핵체로서 대욱 매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이에 조응하여 행정 각 청의 사무를 가능한 간소화하고 강력한 조직으로 재편하여 우리 잉여 인원이 모두 대동아 전역에 걸쳐 활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일억 국민은 총진군의 국내태세를 갖추었고 모든 국민의 사기도 왕성합니다. 관민이 하나가 되어 미영을 격퇴시키기 위해 완벽한 진용으로 매진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자리에서 특히 제국의 경제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제국의 경제는 예저부터 미영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항상 미영에 의해 견제와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정부는 일찍이 이를 깨닫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이러한 제국의 경제적 약점을 적극적으로 수정하면서 중요국방물자의 자급태세를 확립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한편으로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4개년 계획 (1938년 7월 실시된 일만지 종합경제 생산확충 4개년 계획 日滿支綜合經濟 生産擴充四個年 計劃 을 의미) 을 세워 국방상 절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대동아전쟁 개시 직전에는 미영의 압박에 대처하여 대동아전쟁을 단행할 수 있는 경제력을 이미 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국민 여러분의 노력과 고생의 결실로서 그 노고에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대동아전쟁 개시 이후 황군의 혁혁한 전과는 남방지역의 석유, 고무등 기타 중요 국방자원을 모두 우리 손에 쥐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자주자급성은 이전부터의 노력에 힘입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즉, 제국 자급생산의 기초는 일만지(日滿支) 의 물자와 남방지역의 물자를 더하여 완전히 확립된 것입니다. 우리 전시경제는 무력전에 따른 소모를 완전히 보충하고 충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향후의 전투력 확충을 확고부동한 기초위에 세울 수 있게 제국 경제의 앞날은 실로 전도양양합니다. 더불어 이는 적국 측이 기존에 의존해온 중요국방자원의 공급을 차단하는 결과가 되어 적국측에 매우 중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상의 새로운 사태에 즉응하기 위해 대동아 모든 지역의 종합 경제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전쟁수행력을 급속히 증강시키는 것에 중심을 두고자 합니다. 본년도 물자동원게획과 생산력확충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수송, 노무 , 교역과 자금 등에 관한 여러 계획을 책정함과 동시에 그 실현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조치를 강구할 것입니다. 또 정부는 국민생활의 안정적 확보, 특히 식량의 확보가 총력전 수행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본질을 감안하여 대동아 전 지역의 물자를 활용하고 대동아 각 주민의 민생과도 서로 대조 확인하면서 만전을 기하려고 합니다. 즉, 금년도 부터는 새로이 생활필수품에 대한 물자동원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수행함에 있어 육해군으로부터도 각별한 협력을 받고 있습니다. 본래 전시경제의 본질은 국부적 혹은 단기적으로 바라볼 경우 불편과 부족은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대국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경우 앞으로 어떤 장기전이 될지라도 국민생활에 결코 불안이 없다고 분명히 말수 있어 정말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대외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만화 (日滿華) 및 태국 4국은 완전히 동일한 전쟁목적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호간의 국교는 더욱 긴밀해지고 있어 정말로 마음 든든하고 믿음직스럽습니다. 저번 만주국 건국 10주년 (1942.3.1) 에 즈음하여 황제 폐하의 깊고 두터운 생각을 받을어 사은 (謝恩) 특파대사 장징후이(張景惠) 씨 가 일본을 방문하여 친서를 봉정(捧呈) 하며 우리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피력했습니다. 더구나 천황 폐하께서는 황송스럽게도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高松宮宣仁) 친황 전하를 만주국에 파견하시어 만주 건국 10주년에 축의를 표명하시었습니다. 또한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中華民國 國民政府 主席) 왕징웨이 (汪精衛) 씨 는 민국(民國) 의 원수로서 만주국을 방문하여 (1942.5.4) 만주국과 중화민국 양국 본연의 우호관계를 더욱 긴밀히 다지고, 건국 10년이 지난 만주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친히 사찰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정부를 대표하여 방일특파대사로 추민이 (諸民誼) 씨가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왕징웨이의 1942년 만주국 방문에 맞추어 만주국에서 만든 노래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 : ] 또 태국에서는 일본과 태국의 동맹을 경축하는 특파사절 피아퐁 (Piyapong) 중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국서를 봉정하고 우리 국민의 각 방면과 친밀한 교류를 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일만화 및 태국등 4나라가 정치, 경제, 재정, 군사상으로 더욱 상보상조하고 서로 강인성을 더하여 함께 제휴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의 추진력이 되는 열렬한 동지의 기백을 표하는 것입니다. 이에 제국정부는 모든 국민과 함께 단결공고한 대동아의 정세에 마음으로부터 축복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유럽방면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여러 우방이 공동의 전쟁목적을 위해 제국과 더욱 협력하고 일치하여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더욱 불굴불요의 건투를 계속하면서 위대한 전과를 올리고 있는 것에 제국정부는 심심한 경의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제국은 대동아전쟁에서의 부단한 승리를 통해 맹방 독일과 이탈리아의 미영에 대한 선전 건투에 호응하면서 앞으로 더욱 모든 힘을 다하여 양자의 종합적인 전과를 확충하고자 합니다. 특히 필연적으로 작전상의 밀접한 연계를 도모하면서 맹방과 서로 제휴하여 세계신질서를 확립하고자 합니다. 미영의 연이은 패전과 향후의 불안에 초조하면서 이번 전쟁을 가리켜 소위 인종전 (人種戰) 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들이 항상 답습하는 모략적인 선전에 불과합니다.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 추축국 (樞軸國) 의 당당한 결속이 음험한 미영의 책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늘날 세계가 다 주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전부터 타민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자기발전과 안일을 도모하는 미영의 전통적인 악랄한 정책은 이미 세계에 널리 폭로되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황군의 과감한 전적에 따라 청소된 버마에서는 황군의 정의에 의거한 평화적 지도 아래 모든 지역의 버마인들이 혼연히 떨쳐 일어나 영광스러운 독립의 기운을 스스로 촉진시키고 있어 참으로 마음이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영국의 인도 방위를 위한 전진 근거지는 모두 황군의 점거하에 놓이여 인도인이 바라고 바라던 독립을 향한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 국왕의 국새를 관리하는 국새상서 (國璽尙書, Lord Keeper of the Privy Seal) 의 클립스 경 (Sir Stafford Cripps) 를 중심으로 한 영국과 인도의 회담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결렬된 것은 (1942년 3월의, 영국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후 인도의 자치를 조건으로 인도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던 시도, 이름바 '클립스 미션 (Cripps Mission)' 을 의미) 인도가 이미 정신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영국의 인도 영유의 정신적 기초는 이미 소멸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로써 인도는 독립을 향한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에는 여전히 영국 영유의 형해(形骸) 가 남아있습니다. 영국의 군사시설이 엄연히 아직 존재하고 있고 이들은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습니다. 제국은 미영의 병력이 인도에 잔존하는 한 이를 철저히 분쇄시키겠다는 견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무고한 인도민중에게 어쩔 수 없는 재난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는 인도민중이 더욱 용맹심을 발휘하여 들고 일어나 미영을 몰아내고 미영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조국독립의 결실이 완수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국의 버마 평정에 따라 충칭 정권은 결국 고립되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중국 주둔 황군의 노력을 통해 귀순 투항하여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더욱 많아져 충칭군의 전의는 나날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도 일부러 고치지 않은 자의 말로 는 정말로 가련할 뿐입니다. 제국은 충칭정권의 항전에 최후의 응징의 철퇴를 가하고자 합니다. 우리 육해군 정예부대의 긴밀한 공동작전으로 서남태평양은 완전히 우리에게 굴복하여 호주는 소위 태평양의 고아(孤兒) 가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에 호주 주변에서 전개된 산호해 (珊瑚海) 해전 (1942.5.4) 에 의해 호주를 방위하던 해상세력이 궤멸되었고 이제 황군 앞에 호주를 보호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호주 지도자에게 저번의 본 의장에서 밝힌 바를 잘 명심하라고 말해둡니다. 용단을 내려 국제적 정세를 살피고 그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면서 가장 중대한 조치를 결정하기를 다시 한번 요망하는 바입니다. 현재 인도는 동요하고 충칭은 몰락하고 있으며 호주는 고립되었습니다.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등 기타 요충지는 모두 치안과 질서의 회복에 따라 점차 신건설의 거점이 되기 위한 큰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또한 태평양과 인도양에서의 우리 해상권은 나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영국은 중요한 해외 영역을 잃고 자원 확보의 길을 빼앗겼습니다. 국내 정비도 생각만큼 진척되지 않아 이제 중대한 파국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연이어 패전한 미국도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타격을 쓸데없이 은폐하고 날조를 일삼는 선전 모략을 통해 국내에 들끓는 비난과 중립국의 이반을 방지하기 급급한 실정에 있습니다. 저 는 가련한 부하 장병을 전쟁터에 내버리고 도망간 지휘관을 다시 등용하거나 혹은 무익하고 하찮은 해상교란전을 과대하게 선전하여 패전을 호도하려는 지도자 아래 전쟁을 수행하는 미영 국민들에게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제국은 성전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세계에 유래가 없는 웅혼(雄渾) 하고 치밀한 작전을 더욱 과감하게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정부는 모든 국민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어 거국총력의 향상충실을 도모하면서 더욱 투구의 끈을 단단히 묶고 황군 전통의 희생보국(犧牲保國)의 정신을 더욱 발휘하여 신속히 이번 전쟁의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천황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제출한 의안은 계획적인 조선 (造船) 의 실시와 확보에 관한 것등 주로 시국에 관한 긴급한 사항으로 한정했습니다. 아무쪼록 신속한 심의를 통해 협조해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맹방 제국이 우리 제국에 보여준 기여와 협력에 심후한 사의를 표명함과 동시에 모든 국민 여러분이 헌신적으로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는 보국의 정성과 불굴의 노력에 다시한번 마음으로 부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81회 제국의회 통상회 시정방침연설 (1943.1.28) / 도조 내각 (第81回帝国議会(通常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저번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온 힘을 기울여 직책을 수행하고 신속히 전쟁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천황께서는 지난 12월 12일 황공스럽게도 고타이신궁 (皇大神宮, 이세신궁의 내궁,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모신다.) 을 친히 참배하셨습니다. 전쟁 수행 도중에 폐하꼐서 친히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참배하신 일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사 이래 아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폐하의 거룩한 뜻을 살펴 모시며 그저 황송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우리 1억 동포는 이에 결의를 새로이 다지며 끝까지 승리하여 폐하의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바 입니다. 돌아보건대 대동아전쟁이 개시된지 벌써 1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 제국은 폐하의 위광 아래 황군 장병의 선모용전과 후방 국민들의 총력 발휘를 통해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미영의 굴복을 목표로 보무(步武)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참으로 기쁨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최전선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결사적인 격투를 계속하고 있는 황군 장병들에게 가슴 속 깊이 경의를 표명함과 동시에 후방에서 수많은 곤란을 극복하며 오직 전투력의 증강을 위해 매진하는 전국의 동포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이 기회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쟁터의 꽃으로 산화한 많은 충용 의열 영령에게 삼가 애도의 마음을 바침과 동시에 부상 장병과 유족에게도 마음으로부터 동정의 뜻을 피력하는 바입니다. 현재 제국은 세계에서 부강을 자랑하는 미영을 상대로 세계제패라는 헛된 야망을 뒤엎고자 전례가 없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있습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만방이 각각 자신들의 자리를 얻고 만백성이 모두 안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제국 건국 이후의 커다란 이상입니다. 제국이 3천년간 걸어온 길은 다름 아닌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제국이 황송스럽게도 선전(宣戰) 의 조칙을 받들어 1억이 모두 하나가 되어 오로지 미영의 격파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제국과 목적이 같은 맹방과 서로 연계하면서 신속이 대동아를 안정시키고 도의(道義) 에 의거한 신질서를 건설하여 세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야 말로 대동아전쟁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 미영이 타국의 희생 위에서 자국의 번영만을 추구하고 타민족을 착취하여 세계를 농단하려는 전통적인 야망에 비한다면 완전히 그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 제국은 폐하의 위광 아래 전쟁 첫 해 만에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조칙이 내려지자 폐하의 위광아래 황군은 대동아에서 미영과 네덜란드 병력을 순식간에 일소하고 나아가 대동아의 전략적 요충지를 공략,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우위는 앞으로 육해군의 물샐틈 없는 협력 아래 이루어질 웅혼(雄渾) 한 공세작전과 이에 호응하는 전력의 증강을 통해 더욱 확층, 강화될 것입니다. 전략적 우위현상에 대해 항공기를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육상에 기지를 둔 항공기와 육상항공기지는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황군은 서전(緖戰) 의 혁혁한 전과를 통해 적절하게 배열된 유력한 항공기지를 획득하여 날로 이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전쟁수행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대동아 지역을 포옹하는 이들 다수의 항공기지는 나날이 증대되어 그 위력을 과감하게 발휘하고 있습니다. 현재 점령지역의 요충지와 중요 지점에는 이들 항공기지에 더하여 여러 곳에 유력한 작전거점이 점차 정비되고 있습니다. 또 요충지에는 비할 바 없이 강력한 육상과 해상병력을 배치시켜 공격과 방호를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제국이 전쟁 첫해에 필승의 기초를 확립할 수 있었다 말씀드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국은 대동아전쟁 개시이전에는 석유와 고무등 중요한 전쟁자원이 부족했습니다. 적 미영은 우리나라를 '갖지 못한 나라' 라고 업신여기고 이에 편승하여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제규제조치를 감행함으로써 제국을 일거에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이후 한해가 지난 오늘날, 세계 최대의 보고인 남방 여러 지역은 완전히 우리 손안에 확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쟁 이전에는 미영이 중요자원의 이용을 독점해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우리의 수중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제국은 어떠한 전쟁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반해 전쟁 이전에는 자원이 풍부하다 호언장담 해온 미영은 이제 전쟁수행에 필요한 중요 물자에 커다란 결함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예전에 서남태평양에서 획득해온 고무, 주석 키니네 (말라리아 치료제) 등은 이제 그들이 애써 초조함을 가리려하지만 감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략적 불리함을 무릅쓰고 그들이 결전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제국은 전략적 우위와 더불어 자원의 측면에서도 매우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들 자원이 정말로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물론 앞으로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대동아의 여명에 눈뜨기 시작한 근면한 10억의 민중이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는 만큼, 많은 자원은 잘 활용될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와 미영은 공업력에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으면서 열심히 전투력의 회복증진에 광분하여 이미 반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결코 방심할 수 없지만 반대로 틈을 타서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올해야말로 실로 과거 한해 동안 획득한 커다란 전과를 더욱 확충하고 우리의 필승을 위한 조건을 널리 확립해야 할 결전기입니다. 제국은 맹방과의 제휴를 더욱 긴밀하게 다지고 서로 호응하면서 미영을 향해 공세에 나설 것입니다. 미영의 전쟁수행능력을 상실시키고 결국 전쟁수행의지를 포기하게 만들어 신속히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최근 만주국 은 국가의 기초가 더욱 견고해져 국경보호의 소임을 제국과 분담함과 동시에 대동아건설의 선구자로서 특히 군수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만주국은 우리의 전투력 증강에 크게 공헌하면서 대동아의 병참기지로서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만주국의 충실한 발전은 곧 대동아 전역의 내일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중화민국은 왕징웨이 주석의 헌신적 지도아래 나날이 그 힘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중화민국 국민정부 (中華民國 國民政府) 는 미영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1943.1.9) 이로써 미영을 격퇴시키려는 대동아전쟁은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왕 주석 아래 일치단결하여 힘차게 들고 일어난 중화민국의 결의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선전포고에 따라 제국은 새로운 사태에 즉응할 수 있는 일본과 중화민국 간의 관계를 수립한다는 방침 아래 중화민국에서의 모든 제국전관조계의 반환, 상하이공동조계 (上海共同租界), 샤먼 (廈門) 공동조계와 베이징 (北京) 내의 공사관 구역 회수의 승인, 치외법권의 철폐, 중국의 적산(敵産) 처리 등 제반 사항에 걸쳐 곧바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려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조치에 궁지에 빠진 미영은 지난 11일 충칭 (重慶) 정권에게 허구의 조계환부를 약속하는 등 (물론 거짓은 아니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선언을 남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왕징웨이의 대영미선전포고문은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가 대영미선전포고 이후 일본과 체결한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가 대영미선전포고와 함께 일본과 발표한 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태국 은 피분송크람 (Phibunsongkhram) 수상의 훌륭한 통솔 아래 거국일체로 제국과 체결한 공수동맹(攻守同盟) 을 더욱 견고히 다지면서 분연히 미영의 격퇴를 위한 공동작전에 힘쓰고 있습니다. 태국은 온갖 곤란과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동아 건설이라는 공동목적의 달성에 성실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진정한 제국의 동지국이 되고 있습니다. 유럽방면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을 비롯한 우리의 맹방이 제국과의 더욱 견고한 결속을 바탕으로 갖가지 곤란을 극복하면서 여러군데에서 세계가 놀랄만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구축해온 확고한 불패의 발걸음을 더욱 확충하여 유리한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아프리가 대륙 북부의 사태 (제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2.10)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추축국의 패배) 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작은 파란에 불과할 뿐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번의 새로운 사태야 말로 미영에게 철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더욱 맹위를 떨침과 동시에 제국과의 공동작전에 그 위력을 발휘하면서 동서(東西)가 서로 호응하여 공동의 적 미영에게 타격을 가할 태세를 더욱 정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우인 동서의 맹방은 해가 갈수록 더욱 그 친밀도가 더해져 공동의 승리획득과 공동의 이상달성을 향해서 서로 이기심을 완전히 버리고 물샐틈 없는 협력의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미영은 자기들의 이해관계나 혹은 전후 문제와 관련해 한창 전쟁 중임에도 벌써 추한 싸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피아간의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 지름길은 과연 무엇이고, 결정적인 승리는 누구편에게 돌아갈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맹방 제국의 화려한 활약의 자취를 기리고 그 빛나는 앞날을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오늘날까지 이들 맹방 제국의 위대한 성과에 심심한 경의와 축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저는 이들 맹방 제국이 제국에 보내준 절대적인 협력에 감사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건투와 성공을 마음속에서 기원합니다. 현재 군정 지배를 받고 있는 남방지역의 각 주민은 폐하의 위광을 입어 벌써 새로운 건설을 향해 진정한 협력을 보이고 있어 참으로 경축스러운 일입니다. 본래 제국은 우리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 철저히 이를 응징하지만, 일단 우리의 치하에 들어온 자에 대해서는 진정 친아들처럼 대하고자 합니다.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지 에서는 황군의 지도 아래 치안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원주민은 즐겁게 생업에 복귀하여 일찍이 맛보지 못한 행복하고 희망에 넘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원주민의 오랜 요망에 부응하여 이곳을 안주할 수 있는 땅으로 정착시키고자 착실히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버마 에서는 치안이 이미 회복되어 제국의 변하지 않는 방침에 호응하여 강력한 지도자 바모 (Ba Maw) 장관을 중심으로 버마인 모두 현지 황군에 협력하면서 점차 '버마인의 버마' 를 건설함으로써 대동아 건설에 이바지 하려는 눈부신 노력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은 늦어도 금년 중에 현재 행정부가 관할하고 있는 구역을 중심으로 버마국의 건설을 인정 하고자 합니다. 예전 본 의장에서 제국이 내외에 천명한 버마인의 오랜 염원인 버마의 독립이 벌써 실현되려 하는 것입니다. 제국의 본디 소망은 이를 본 의장에서 밝히는 것으로, 버마를 위해, 그리고 새로운 대동아를 위해 모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작년 본 의장에서 필리핀 민중이 제국의 진의를 깨달아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일익으로서 협력할 경우, 제국은 흔연히 그들에게 독립의 영예를 부여하겠다는 것을 밝힌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를 명확하게 선포하는 바입니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새로운 지도자 조지 바르가스 (Jorge B. Vargas, 필리핀행정위원회 (フィリピン行政委員会, Komisyong Tagapagpaganap ng Pilipinas) 의 수장.) 장관의 지도하에 제국에 대한 성의있는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고 치안도 점차 회복되어 참으로 믿음직스럽습니다. 저는 필리핀이 더욱 적극 협력하여 필리핀의 독립이 가능한 빠른 시기에 실현되기 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버마와 필리핀의 희망이 넘치는 이 현상은 버마 옆 인도가 고통에 신음하는 상황과 비교해보면 정말로 감개무량합니다. 지난 본 의장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인도는 이미 영국에서 정신적으로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인도의 지도자와 우국지사들을 모두 체포, 감금하고 비등해지는 인도 민중을 잔혹한 폭력으로 유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영은 인도를 기지로 삼아 번번하게 신생 버마의 평화를 교란시키면서 미련의 마수를 떨치고 있습니다. 현재 황군은 이들 미영군에게 맹공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국의 진의를 파악한 인도의 일부 인사는 제국과 협력하여 실제로 전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신인도의 건설을 위해 인도 국내와 국외에서 뼈아픈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인도의 지도자와 민중에게 심심한 동정을 표함과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대사업이 머지않아 성취되기를 정말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제국은 이를 위한 전폭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 입니다. 중화민국이 이미 대동아전쟁에 참가하여 미영타도(米英打倒) 라는 대의명분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실과 인연에 속박되어 미영의 주구로서 자신들의 손으로 동포를 살해하거나 무익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는 충칭 정권은 정말로 중국 민중의 적이자 중화민국 전통에 대한 반역자입니다. 제국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응징의 철퇴를 내리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입니다. 호주에 대한 제국의 태도 또한 충칭에 대한 것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미영에 대한 의존이라는 헛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제국은 어쩔 수 없이 공격을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제국은 웅장하고 혼연한 구상아래 세계의 운명을 가늠하는 전쟁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책은 모든 것을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집중하고자 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선에서는 과감한 무력전을 더욱 강력하게 속행하여 적의 전쟁능력을 상실시켜야 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후방에서는 작전의 요구에 즉응하여 더욱 전투력을 증강시켜야 합니다. 국내의 시책은 모두 승리를 위해 전투력 증강 오직 이 하나에 집중시켜야 합니다. 전투력 증강에 관한 정부의 지도정신은 본래 1억 모두의 비등한 힘을 유감없이 발휘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일본 국민은 황실을 중심으로 거국일치하여 오로지 천황 폐하를 위해서는 자기 몸을 매우 가벼이 여겨 일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충의와 용기를 모두 바치겠다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하물며 황국의 흥폐를 가늠하는 이번 전쟁에서는 전선이나 후방을 불문하고 1억 동포는 오직 진충보국 (盡忠報國) 으로 폐하의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습니다. 저는 국민의 불타는 힘을 신뢰하면서 전투력의 증강을 위해 이를 전폭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부의 중대한 책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예전에 저는 본 의장에서 행정 각 청의 사무를 가능한 간소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이를 통해 남은 인원은 모두 대동아 전역에 걸쳐서 활약시키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정부는 이를 실행하여 상당수의 관리 정원을 감소시켰고 관청사무 수행의 방법도 전시에 적응하도록 열심히 궁리하여 개선하는 등 실효를 거두고 있습니다. 또 이미 다수의 인사가 스스로 나서 대동아 각 지역에서 그 건설경영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이 방침에 따라 더욱 실효를 거두고자 합니다. 또 정부는 시국의 진전에 적응하고자 내외 행정의 일원화를 단행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이 대동아성 (大東亞省) 을 설치하여 대동아 지역에서의 제국의 정무를 일원적 내지 포괄적으로 처리하고자 합니다. 이들 정부기구의 개정과 더불어 정부는 전시국내체제의 정비를 위해 공공단체 및 농공(農工) 등 다양한 방면에서 쇄신강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물적 전력의 확충은 종래의 중점주의를 더욱 철저히 시행하여 전투력의 증강에 필요한 철강, 석탄, 경금속, 선박, 항공기등 중요군수물자의 급속한 증산에 모든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또 모든 창의와 궁리를 동원하여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대처하고자 획기적인 증산대책을 실시할 방침이며 이미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부는 조선(造船) 에 대해 각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만, 이제 차츰 효고라르 거두어 앞날에 아무런 불안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철강 생산등도 동아의 모든 지역을 통해 종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구상으로 제반 수요에 대응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이번에 중요군수물자의 증산을 도모하고자 장애가 되는 기존의 법령과 제약을 배제할 수 있는 길을 강구함과 동시에 내각총리대신의 권한을 강화하여 진정으로 사태에 즉응하고 탄력성 있는 지도를 실행하도록 하려합니다. 또한 관청의 지도감독을 단일화하고 생산자의 생활 기반을 간명(簡明) 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정부는 전투력의 증강을 위해 널리 민간 유식자들의 중지(衆智)를 모으는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지난번에 대동아건설심의회 (大東亞建設審議會) 를 설치하여 많은 귀중한 의견을 접했습니다만, 앞으로도 가능한 민간의 유익한 의견의 청취에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재 전쟁의 전도(前途) 에는 아무런 불안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불편함과 부족함을 감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최후의 승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국민은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참아내야 합니다. 1억 국민의 노고가 축적되어 비로소 이번 전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정부는 본래부터 국민생활의 확보에 관해 만반의 조치를 강구해왔습니다. 우리 1억 국민은 앞으로도 더욱 철저한 생활의 쇄신, 소비의 절약, 저축의 증강을 통해 어떠한 사태에도 동요하지 않는 질실강건(質實剛健) 과 청신간소 (淸新簡素) 한 전시생활을 확립해야 합니다. 지금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한 중핵적인 인사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정부는 학제 개혁을 단행하여 재학 연한을 단축함과 동시에 전투력 증강에 직접 필요한 부문을 확충하고 강화함으로써 시국의요구에 대응하고자 합니다. 또 정부는 전시하에서 발랄한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제반 보건대책, 특히 결핵 대책에 대해 만반의 노력을 가하려합니다. 더불어 이번 전례가 없는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인구동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출산은 이전과 비슷한 수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망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할 수 있게 된데에 대해 참으로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정부는 이상 말씀드린 취지에 의거하여 예산안과 법률안을 이번 회기 의회에 제출합니다. 아무쪼록 신속히 협조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82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3.6.16) / 도조 내각 ( 第82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 오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온 힘을 기울여 전시하의 중대한 직책을 수행하고 신속히 전쟁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황군 장병은 폐하의 위광 아래 광대한 전투지역을 점령, 확보 하면서 적을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풍토병과 싸우며 추위와 더위를 무릎쓰고 풍랑에 맞서 온갖 곤란을 극복하면서 전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엇 여러분과 함께 머나먼 최전선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비할 바 없이 충용한 황군 장병이 겪는 고생과 선모용전(善謀勇戰) 에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전과를 거두기 위해 많은 용사는 폐하의 방패로서 전장의 꽃으로 산화하여 호국의 신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방 최전선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장렬한 전사와 야마자키 야스요(山崎保代) 부대장 이하의 장병들의 애투 (アッツ, Attu) 섬에서의 비장한 옥쇄(玉碎) 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습니다. 유구한 대의에 살다가 귀신을 곡하게 만든 수 많은 충성스럽고 용감한 장병들의 최후를 떠올리면서 일본 국민인 자는 모두 이들 용사의 뒤를 따르고자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적을 섬멸시키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다지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이들 용사가 있고 또 이들 용사 뒤를 잇는 용사가 있어 대동아전쟁은 기필코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야마모토 원수를 비롯해 충용한 전물 장병들의 위대한 훈공을 기리며 애도의 마음을 바침과 동시에 오로지 미영(米英)을 격퇴시키는 것 하나에 매진함으로써 용사의 충령에 보답하겠다 맹세하는 바입니다. 또 저는 이번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전상병 장병들의 신속한 재기의 날을 기원함과 동시에 유족에게도 마음으로부터 동정의 뜻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지금 폐하의 위광 아래 대동아에서 제국의 전략적 필승 태세는 나날이 강화되고 있으며 대동아의 거대한 자원은 급속히 전력화되고 있습니다. 대동아에서의 이러한 태세는 당연히 미영의 사활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미영은 이제와서 급속한 진전에 깜짝 놀라 이를 적극 저지, 방해하고자 유일하게 믿는 물질력을 바탕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책모를 동원하면서 계속하여 반격의 기세를 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제국은 이러한 상황을 당연히 예상했습니다. 황군은 적의 반격을 기회로 삼아 수시로 여러곳에서 적을 격퇴했음은 물론 나아가 적을 굴복시킬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황군은 중국 방면과 인도, 버마의 국경 방면, 그리고 태평양 등 각 방면에 걸쳐 웅장하고 혼연한 작전을 전개하면서 적에게 매우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전황은 더욱 증대해지고 반복되는 전투는 점차 가열되어 처참해지고 있습니다. 1억 국민은 이제 대동아에서의 필승 태세 위에서 국난이 더해질 때마다 더욱 불타오르는 필승의 신념을 품고 전통적인 충렬한 국민성의 진가를 발휘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상의 정세에 대처하여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적 미영 내부에 숨겨진 심각한 고뇌를 놓치지 않고 더욱 필승의 확신아래 끝까지 온 힘을 다하여 미영이 굴복하는 날까지 의지와 의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하고자 합니다. 현재 대동아의 동향을 살펴보건대 여러 국가와 민족의 제국에 대한 신뢰, 그리고 대동아전쟁 완수에 대한 진지하고 자발적인 협력은 날로 힘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중화민국과 만주국, 그리고 필리핀을 방문하여 (1943.3.13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방문 , 1943.4.1 만주국 방문, 1943.5.5 필리핀 방문) 몸소 현지의 실상을 살펴보면서 요로의 인사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고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기 이르렀습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대동아를 미영의 다년에 걸친 질곡으로부터 영구히 해방시키고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 제국 부동의 방침입니다. 제국의 시책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시종일관 변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후 1년 반이 지나면서 이제 대동아 10억 민중은 우리의 진의를 깨닫고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완승 없이는 대동아의 해방과 새로운 대동아의 건설, 나아가 대동아 민중의 복지를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동아를 위해서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상과 같은 정세에 대처하여 제국은 여러 국가 민족의 성의와 협력에 부응하기 위해 이번에 새로이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고자 합니다. 이제 그 주요한 것에 대한 정부의 소신을 솔찍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주국 은 제국을 친방(親邦)으로 바라보며 황공스럽게도 황제 폐하께서 몸소 솔선수범하시어 국민이 하나가 되어 제국에 대한 물심양면 협력을 지대하게 하고 있습니다. 양국의 교의는 정말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제국은 앞으로도 건절한 발달에 더욱 힘을 가하고자 합니다. 중화민국은 왕징웨이 (汪精衛) 주석 이하 관민 모두 이제 제국의 성의있는 태도에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일화공동선언 (日華共同宣言, 1943.1.9) 의 정신 아래 지금 서로 연계하여 더욱 공동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미영의 세계 제패 야망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도탄을 맛본 중화민국은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강의 길을 모색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서 제국과 함께 새로운 대동아 건설에 실력을 발휘하려 합니다. 중국 민중의 오랜 염원인 중국인의 중국 이라는 이상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펭빙쉰 (龐炳勳, 1943.5 전향) , 쑨뎬잉 (孫殿英, 1943.4 전향) , 롱즈헝 (榮子恒, 1943년초 전향) 등의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인사가 연이어 충칭(重慶) 정권의 솔하에서 벗어나 왕주석과 행동을 함께 하기에 이른 것도 중국 재생의 당연한 귀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국과 대동아, 나아가 세계 인류를 위해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제국은 중화민국의 흥륭(興隆) 을 진심으로 축복함과 동시에 앞으로 더욱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나아가 일본과 중화민국간의 조약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양국의 협력태세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일본과 중화민국간의 조약이 근본적으로 개정'되어 체결된 일화동맹조약(중일동맹조약) 은 여기를 클릭 : ] 태국 은 다년간 미영과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내던지고 분연히 제국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피분송크람 (Phibunsongkhram) 수상의 통솔 아래 많은 곤란과 장애를 극복하면서 오직 대동아전쟁의 완수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국은 태국과의 제휴를 앞으로 더욱 긴밀하게 다지고 태국의 군사,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더 한층 협력하고자 합니다. 태국 국민의 오랜 염원을 감안하여 태국의 발전을 위해 새롭게 협력해나갈 용의가 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표명하는 바입니다. 버마 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 3월 바모 (Ba Maw) 장관을 제국 수도로 불러 제국의 결의를 전달했습니다. 바모 장관 이하 각 지도자는 버마의 독립과 대동아전쟁의 완수를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납득하고 진지하게 결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버마는 이미 5월 8일 버마독립준비위원회 (ビルマ獨立準備委員會, 1943.5.8) 를 결성하여 독립준비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저는 빠른 시일 내에 그 준비를 완료하여 역사적인 영광의 날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필리핀 은 조지 바르가스 (Jorge B. Vargas, 필리핀행정위원회 (フィリピン行政委員会, Komisyong Tagapagpaganap ng Pilipinas) 의 수장.) 장관 이하 관민이 온 힘을 다하여 필리핀 재건과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일반민중도 점차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독립에 대한 제국의 태도는 여러번 성명을 통해 이미 밝힌 바가 있습니다. 제국은 이번 기회에 한걸음 더 나아가 금년 중에 필리핀에게 독립의 영예를 안겨주겠다는 것을 이 자리를 통해 국내외에 밝히는 바입니다. 미국의 신용할 수 없는 지배 아래 이루지 못할 독립의 환상을 쫓던 필리핀 민중은 대동아전쟁 발발 이후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다년간의 염원을 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필리핀 민중의 감격을 떠올리며 필리핀과 대동아를 위해 진심으로 경축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지의 원주민은 황군의 등장에 더욱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하에서도 현지 황군의 진심어린 지도를 통해 종래의 정신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실제로 교육과 각종 문화적 은혜를 입고 그동한 맛보지 못한 희망에 넘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민중에게 참으로 흔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국은 이번에 원주민의 염원에 의거하면서 각자의 민도에 따라 금년 중에 원주민의 정치참여에 관한 조치를 점차 시행하고자 합니다. 그중에서도 자바는 그 민도를 고려하여 민중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실현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는 당국이 복잡한 정세에서 선처하고 있습니다만, 제국은 공동방위에 관한 일불의정서 (仏領インドシナの共同防衛に関する日本国・フランス国間議定書, 1941.7.29 ) 의 정신에 의거하여 더욱 긴밀한 제휴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이상과 같이 만방이 각각 자신들의 자리를 얻고 만백성이 모두 안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우리나라 건국의 커다란 이상은 차츰 대동아의 천지(天地) 에 구현되여 오랜 기간 미영의 끊임없는 착취에 괴로워하던 동아 민중에게 빛나는 여명이 다가왔습니다. 대동아의 여러국가와 민족이 힘차게 발전하는 것에 비해 인도는 아직도 영국의 가혹한 탄압 아래 독립완성을 위해 커다란 고통을 맛보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동정의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은 인도민중의 적인 미영의 세력을 인도로부터 구축하고 진정한 독립 인도의 완성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팽배해진 인도 민중의 열망은 기필코 미영 세력을 구축함으로써 인도의 자유와 번영을 실현시킬 것입니다. 저는 그 날이 멀지 않다고 믿으며 하루라도 빨라지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유럽의 형세를 살펴보건데,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맹방은 제국과의 결속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면서 오직 최후의 승리만을 향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필승의 지위와 부동의 지도력 아래 이루어진 독일 및 이탈리아 등 유럽 매방의 웅장하고 혼연한 전쟁수행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국은 앞으로도 더욱 긴밀한 연계와 지원 아래 서로 협력하여 끝까지 미영을 격퇴시킬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지금 적 미영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곳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여러곳에 재앙을 확대시키면서 중립국을 불행한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광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국을 유혹하여 함꼐 싸움에 나서면서 자신들은 직접적인 참화를 피하기 위해 타국을 앞에 내세우고, 싸움이 일단 유리해지면 단지 헌신짝처럼 주저 없이 내던져 버립니다. 처음의 선언이나 약속같은 것은 그저 한 장의 못쓰게 된 조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나라를 위한 독립옹호를 부르짖다가 나중에는 손바닥을 뒤집어 큰 나라를 위한 전체지배를 주창합니다. 그동안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고 오로지 타국의 희생으로 자국의 안일만을 탐내며 이를 더구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포학하고 무참한 행동은 신은 물론 인간으로서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들의 책모에도 불구하고 그동한 중립을 견지해온 국가들에 대해 깊이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국은 이들 국가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친밀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지금 내외의 정세는 정말로 중대합니다. 이렇게 중대한 정세아래 1억 국민은 모든 힘을 바쳐 황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전의를 새롭게 다지고 있습니다. 전장 장병의 마음을 깊이 명심하면서 온 힘을 다하여 오직 전쟁의 완승을 향해 돌진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1억 국민의 진두에 앞장서서 이러한 새로운 다짐을 기필코 실천에 옮기고자 합니다. 작전에 필승하고, 필히 새로운 것을 이루어내겠습니다. 이번 전쟁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는 나라 안팎을 불문하고 어떠한 방해와 장애도 단호하게 이를 돌파하여 극복하고자 합니다. 다행히 생산의 현황은 국민 여러분의 열의와 노력으로 인해 작년 말보다 훨씬 개선 증강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앞으로 더욱 관민이 하나가 되어 결전태세를 강화하고 국가 총력을 오직 전투력 증강을 위해 집중시키고자 합니다. 정부가 이번에 임시로 제국의회의 개회를 주창한 것은 기업정비와 식량긴급증산 등에 관한 예산안과 법률안을 제출한 것은, 바로 이상의 취지를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의 기업정비는 결전하에서 직접 전투력을 급속히 증강시키기 위해 종래의 기업정비 취지를 확충하면서 산업 각 분야에 걸쳐 정비를 철저히 실시함으로써 모든 국민을 전투력 증강에 기여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를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충분히 정부의 의도를 이해하여 하루라도 빨리 적재적소에 각자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또한 이번 조치에 따라 수십 억의 금액이 방출될 것입니다. 정부는 이런 막대한 자금의 살포에 대처하기 위해 특히 기업설비자금조치 법안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본래 1억 국민은 저축의 증강과 소비절약에 노력해왔습니다만, 앞으로 부동구매력의 억제와 국가경제질서의 유지등에 한층 더 힘을 모아주기 바랍니다. 정부는 전시국민생활의 확보에 필요한 식량에 대해 예전부터 만반의 조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현단계에서는 항상 모든 사태를 고려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특단의 노력을 해야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취지에 의거하여 쌀과 보리 뿐만 아니라 감자등을 포함한 획기적인 증산을 도모하여 결전하의 식량문제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자 합니다. 정부는 더욱이 신속하고 과감한 행정의 운영을 도모함과 동시에 전쟁수행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은 모두 이를 중지시키거나 폐지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관민 모두를 생산에 동원시킴으로써 오로지 전쟁 승리를 위해 온힘을 바쳐 매진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정부가 부현의회 의원(府縣會議員) 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정부의 소신을 잘 이해해주시고 정부가 제출안 예산안과 법률안에 대해 아무쪼록 신속한 심의를 통해 협조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83회 제국의회 임시회 시정방침연설 (1943.10.26) / 도조 내각 ( 第83回帝国議会(臨時会)における施政方針演説 ) 오늘 개원식에 즈음하여 은혜로운 칙어를 받자와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가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온 힘을 기울여 전시하의 중대한 직책을 수행하고 신속히 전쟁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폐하의 근심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두 해가 다되어갑니다. 황군 장병은 모든 곤란을 극복하면서 폐하의 위광 아래 집요한 반격을 통해 적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황군 장병의 선모용전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노고에 마음 속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하며 호국의 꽃으로 산화한 용사에게 삼가 애도의 마음을 바칩니다. 또 저는 이 기회에 여러분들과 함께 전상병 장병들의 신속한 재기의 날을 기원하며 유족들에게도 마음으로부터 동정의 뜻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한편 후방에서 국민 여러분은 자기 아들을, 혹은 형제를 전선에 보내면서 온 힘을 다하여 오로지 전투력의 증강에 노력하여 장병이 아무런 걱정없이 종횡으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국민 여러분이 애써온 공적과 얼마나 어려운 고난을 겪었을지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국민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현재 전황을 살펴보건대 서전(緖戰) 에 참패를 당한 적 미영은 제국을 중핵으로 하는 대동아의 인적 결속과 풍부한 자원의 전력화를 통해 제국의 전투력이 급속히 확충되고 있는 사실에 직면하여 아연실색하여 제국에게 일대 반격을 가함으로써 제국을 신속히 압도하겠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적 미영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반격을 가해와 전투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저돌적으로 맹진(盲進) 을 감행하는 이 기회에 제국은 그들에게 맹격(猛擊) 을 가해 적의 전투력을 분쇄시키고 승리를 위한 길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여 우리 국민이 감당해야 할 책무는 오로지 하나, 전투력을 급속히 증강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적 미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필승의 전투력을 가장 빠르고 끊이지 않게 정비함으로써 차질 없이 최전선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 책무는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래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1억 국민 모두가 진정으로 온갖 타성(惰性)과 행각을 내던지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지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황의 추이는 우리에게 잠시의 유예도 주지 않습니다. 최근 정부가 '현정세하의 국정운영요강 (現情勢下ニ於ケル国政運営要綱, 1943.9.21) ' 을 결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의회의 소집을 주청하여 긴급한 시국에 관한 여러 사안의 심의를 요청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부가 이번에 시행하려는 국정운영쇄신의 중심은 통수(統帥) 와 국무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여 웅혼하고 활발한 전쟁지도의 수행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또 전쟁 완수의 일익으로서 기민하고 활기찬 대외시책을 실행함과 동시에 이에 즉응하여 국내 제반의 태세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국내태세의 강화가 목표한 것은 관민 모두 불굴불요의 군수생산의 급속증강, 특히 항공전투력의 비약적인 확충을 중심으로 제국의 필승태세를 철저히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1억 국민 모두가 총동원 전투배치에 대해 관민 한사람 한사람이 새로이 태어난 기백으로 문자 그대로 오직 완전한 승리만을 위해 총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념 아래 정부는 결심을 새로이 하여 본래 관청과 전통과 관례 등에 일절 얽매이지 않고 꼭 필요한 시책은 과감하고 강력하게 실행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실행할 기본적 조치로 더욱 민심의 작흥을 도모함과 동시에 국론통일을 위한 만반의 조치를 물론 실행할 것입니다. 이상의 취지에 의거하여 정부는 급속히 국내태세강화방책 (國内態勢強化方策) 의 실행에 착수했습니다. 정부는 먼저 행정운영의 결전화 방책으로 농상성(農商省), 군무성(軍需省), 운수통신성 (運輸通信省)의 설치를 비롯해 행정기구의 정비를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직원을 대폭 감축시키면서 관청사무의 쇄신을 도모함과 동시에 예산을 철저히 단순화시키겠다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국민동원의 확대는 학생 등에 대한 일반징집 유예의 정지, 징집징용 범위의 확대와 보편화 등에 대한 조치를 급속히 시행하고 이와 관련하여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를 결정했습니다. 국내방위태세의 강화는 국내방위행정의 통일적 운영을 도모하고자 새로 방공총본부 (防空總本部) 를 설치하고, 제국수도와 중요도시의 인원과 시설을 소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어떻게 국내태세의 철저강화를 가족 신속하게 강력하게 실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의 여부가 바로 대동아전쟁의 승패를 가늠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견지에 의거하여 이미 결정된 사항의 향후 운영과 새로이 착수할 몇몇 사항에 대해서도 끝까지 강인하고 과감한 태도로 임하면서 기필코 성과를 올려 작전상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정부는 일찍이 없던 중대한 전황하에서 더욱 국민 여러분의 진심어린 협력을 절실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국은 자존자위 (自存自衛)를 위해 어쩔수 없이 떨쳐 일어나 모든 장애를 깨부수고 신속히 화근을 제거함으로써 대동아를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정의의 대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개전 이후 작전의 경위를 살펴보거나 현재의 대동아 정세와 피아간 공방의 대세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건대 우리는 더욱 필승의 신념을 굳건히 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황의 현단계를 전환의 계기로 삼아 1억 관민을 모두 전투에 배치하고 결의를 새로 다지면서 모든 것을 천황 폐하를 위해 바치고 진정으로 총력을 미영 격퇴 하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길에는 오직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유럽의 형세를 보건대 이탈리아 피에트로 바돌리오 (Pietro Badoglio)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이어 총리가 된 그는 9월 연합국과의 협상을 통해 연합국과 휴전하고 추축국에 선전포고했다.) 일파의 몰염치한 배신 행위는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쓸데없이 이탈리아 국민이 나아갈 길을 그르쳐 단지 도탄의 괴로움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로 인한 추축국의 필승의 태세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히틀러 총통의 기민하고 적절한 조치에 따라 이제 무솔리니 원수는 다시 이탈리아인 동지를 규합하여 정부를 수립하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수립, 1943.9.3) 일본과 독일 양국과 더욱 힘을 합쳐 여전히 미영의 격퇴에 매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독 (日獨) 양국은 곧바로 신정부를 승인했습니다만, 저는 마음으로부터 무솔리니 원수의 재기를 축하함과 앞으로의 건투를 기원해 마지 않습니다. 지금 독일은 유럽 전황의 신 국면을 맞이하여 심상치 않은 결의 아래 빈틈없는 대규모 국내총동원을 감행하고 (1943.2 총력전 연설등) 유럽에서의 확고한 태세에 나서면서 새로운 종횡의 작전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맹방 독일이 이번의 새로운 작전에서 머지않아 소기의 성과를 얻고 제국과 서로 협조하여 미영을 굴복시킬 수 있는 날이 가까워지기를 기대함과 동시에 이를 확신하는 바입니다. 한편 대동아의 정세를 살펴보건대 오랜시간 미영의 야망으로 인해 도탄의 괴로움을 받아온 대동아의 여러국가와 민족을 숙적 미영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대사업은 매우 견실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그 기초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버마가 독립했고 (1943.8.11 버마국 수립) 최근에는 필리핀 공화국이 독립하기 이르렀습니다. (1943.10.14 필리핀 제2공화국 수립) 제국이 국제적인 신의로 약속한 사항은 언제나 실현되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팔굉위우 (八紘爲宇) 의 커다란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자 제국이 가장 소망하는 바입니다. 만주국 은 황공스럽게도 황제 폐하께서 몸소 솔선수범하시어 하나된 국민 아래 강력한 약진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제국과의 교의도 날로 두터워지고 제국에 대한 물심양면에 걸친 협력도 정말 지대합니다. 제국은 만주국의 변하지 않은 협력에 감사함과 동시에 건전한 발전에 더욱 힘을 기울이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중화민국 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금년 초 이후 제국이 정한 방침에 따라 조계의 반환을 비롯해 많은 안건에 대해 구체적인 조치를 급속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화기본조약 (日華基本條約) 의 근본적인 개정도 가까운 시일내에 현실화될 것입니다. 지난번 왕징웨이 (汪精衛) 주석 겸 행정원 원장이 일본을 방문했을때 (1943.9.22), 저는 무릎을 맞대고 일본과 중화민국 양국의 공동 전쟁 수행 방도에 대해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하고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왕 주석 이하 중국의 관민이 더욱 제국의 진의에 공감하여 '중국인의 중국' 이라는 이상의 달성과 앞으로 대동아 10억의 민중 해방을 위해 매진하려는 열렬한 기백에 대해 새삼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한편 형제간의 담장안에서 서로 싸우면서 중국 재생이라는 웅대한 계획에 참가하지 않고 나아가 대동아 민족공동의 대사업에도 함께 나아가지 않는 충칭 (重慶) 정권하의 민중에 대해서는 동정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국 은 저번 북부 말라이 (Si Rat Malai,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시아의 4개주, 1943년 10월 18일 합병 ) 의 4개 주와 샨 ( Saharat Thai Doem, 버마의 일부, 1943년 8월 합병 ) 두개 주를 타이로 편입하는 조치를 끝마쳤습니다. 일본과 태국의 양국 관계는 날로 돈독해져 태국의 제국에 대한 협력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앞으로도 제국은 태국의 흥륭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버마 는 지난 8월 1일 경사스럽게도 독립했습니다. 지금까지 영국의 야망때문에 공허하게 목숨을 빼앗긴 버마는 영국의 계속된 압제에 다년간 신음하면서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힘차게 떨쳐 일어나 제국에 전폭적으로 협력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버마 민중은 오랜 소원을 달성하고 독립을 실현하게 된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번기회에 다시 한번 미얀마의 독립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발랄한 발전을 기원함과 동시에 버마가 대동아 방위의 제1선에서 더욱 제국과 서로 연계하여 계속 건투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버마의 흥륭을 위해 더욱 협력과 원조를 다하고자 합니다. 필리핀 은 지난 10월 14일 필리핀 공화국 독립의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했습니다. 이로써 필리핀은 400년에 걸친 타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특히 40년에 걸친 미국의 기만과 압제로부터 해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1800만 필리핀 민중은 호세 라우렐 (Jose P. Laurel) 대통령의 늠름한 통솔 아래 필리핀의 필리핀을 건설함과 동시에 제국과 서로 결합하여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도의에 의거한 대동아 건설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필리핀 국민의 대사업이 순조로이 진전되기를 기원합니다. 동시에 그 완성을 위해 제국은 모든 협력을 다할 것입니다. 저는 본 의장에서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지의 원주민의 민도에 따른 정치참여에 대해 성명한 바가 있습니다만, 이후 구체적인 조치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들 민중은 대동아전쟁의 완수를 위해 제국에 더욱 실질적인 협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이들 민중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그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더욱 힘쓸 것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만방이 각각 자신들의 자리를 얻고 만백성이 모두 안심하고 살아야한다는 우리나라의 커다란 이상은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걸음씩 실현되고 있습니다. 다년간 미영과 네덜란드에 유린당하고 착취에 고통을 받아온 동아는 이제 대동아를 위한 대동아가 되어 도의에 의거한 세계신질서의 선구로서 강력하게 발족했습니다. 인도 의 4억 민중은 여전히 영국의 탄압은 놓여있고 또 최근에는 미국의 야망도 더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학정과 미영군의 폭거는 그들과 인도민중과의 알력과 괴리를 더욱 격화시켜 심각한 사회혼란을 야기한 결과 마침내 인도에서 공전의 기근을 초래시켰습니다. (벵골 대기근을 의미.) 그 참상이 나날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것은 영미(英米)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인도에서는 뜻이 있는자는 모두 감옥에 있고 무고한 민중은 모두 굶주림에 울고 있습니다. 바로 이야말로 세계의 비극이자 인류공동의 가슴아픈 일로 우리는 이를 결코 방치할 수 없습니다. 최근 인도의 지사 수바스 찬드라 보스 (Subhas Chandra Bose) 의 지도아래 나라를 걱정하는 인도인은 조국 해방을 위해 하나가 되어 떨쳐 일어나 지난 10월 21일 자유인도 임시정부 (Azad Hind) 를 수립하기 이르렀습니다. 이에 제국은 곧바로 23일 임시정부를 승인하겠다는 성명을 표명했습니다. 앞으로 제국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원하면서 인도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우리는 본 의장을 통해 이러한 결의를 국내외에 밝힐 수 있게 되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은 인도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 그리고 인도 4억 민중의 영원한 번영을 마음으로부터 염원하는 바입니다. 저는 제국이 추구하는 바가 대동아 모든 민족의 진심어린 협력을 얻는 것은 물론 나아가 모든 세계의 명망있는 인사들의 마음을 얻는 것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팽배해진 인도 해방의 기운과 늠름한 대동아 민족의 협력이 기필코 인도에게 독립과 자유, 그리고 번영을 마지않은 날에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상 중대 전황에 임하는 정부의 소신을 피력했습니다만 아무쪼록 여러분께서 정부의 결의를 잘 이해해주시고 진심어린 협력과 더불어 이번에 정부가 제출안 예산안과 법률안에 대해 신속한 심의를 통해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본 래 한 포스트로 끝내려 했으나 용량문제로 상하편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에 대해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훈장 -② 훈장(勳章) - 동광훈장 (同光勳章)
1943년 2월 25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중앙정치회의에서 난징국민정부의 훈장을 제안했고, 이것이 3월 3일 행정원 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동광훈장(同光勳章)이 제정되었다. 동광훈장은 난징국민정부의 최고 훈장으로, 특급(特級)에서 9급까지 있었다. 동광훈장은 착용시 다른 기념장보다 그 성격이 높은 만큼 가장 오른쪽에 패용해야 하며, 동광훈장의 왼쪽으로 다른 훈장들을 패용하게 했다. (종류가 다르거나 등의 이유로 호환되지 않는다면 분류해서 패용) 주요 수요자 목록을 보면 익숙한 이들의 이름을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왕징웨이 측 인사들과 일본측 인사 대다수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왕징웨이가 자신의 글에서 여러번 언급했던 쩡중밍의 경우, 1급 동광훈장을 사후수여받았다. 그외에도 왕징웨이의 부인이었던 천비쥔, 우리에게는 《 색. 계 》 로 유명한 딩모춘도 1급동광훈장을 수여받았다. [ 왕징웨이가 쩡중밍에 대해 쓴글은 여기를 클릭 : ] 특급동광훈장을 착용하고 있는 도조 히데키. (사진 오른쪽 가슴쪽의 훈장중 가장 오른쪽 아래있는 훈장이 특급동광훈장). 특급의 경우 난징국민정부 수립에 깊게 관여한 이나 이에 협력 &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되었다. 외국인의 경우 국가원수나 원수급 고위 군인들에게 수여되었다. (물론 나중에가면 이 원칙은 무너지긴 한다) 이 특급동광훈장의 경우 저우포하이, 천궁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왕커민,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등 왕징웨이의 측근 & 도조 히데키, 아베 주일대사를 비롯한 일본 측근이 수여받았지만, 왕징웨이 본인은 이 특급동광훈장을 자신에게 수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해 볼만한 수여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1943년 4월 18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1943년 5월 24일 야마모토에게 특급동광훈장을 수여했다. (야마모토의 사후 나치 독일의 철십자 훈장 수여를 제외한 타국의 훈장 수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동광훈장의 실물은 상위급의 일부만 온전하게 전해지는데, 이는 상위급 훈장 수여자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일본인이었고,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훈장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수여받은 중국인의 경우 극소수를 빼면 이 '한간'의 훈장을 은닉 &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현재는 소수만이 전해진다. 특히 등급이 낮은 하급 동광훈장은 수여자 대다수가 일본인이 아닌 실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에서 일했던 중국인들이었던 만큼 전후 왕징웨이 정권에서 일하는 것이 비판받는 시대가 되면서 생존을 위해 이러한 훈장을 폐기해버림에 따라 아주 적은 수가 전해진다. 때문에 동광훈장의 경우 하급훈장이 오히려 상급훈장보다 더 전해져 오는 수가 적은 편이다. 이렇게 동광훈장은 1944년 11월 왕징웨이가 사망하면서 왕징웨이의 서명이 적힌 수여서를 제공했던 동광훈장은 새로이 2000장의 수여서를 제작 (천궁보의 이름을 사용) 하여 계속 수여를 하였으나 1945년 4월 말부터는 자원 부족등의 이유로 수여작업이 중단되었고, 그 이후 왕징웨이 국민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수여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광훈장은 왕징웨이 국민정부의 해체되기 31,051명에게 수여되었다. 하지만 수여자 명단과 다르게 이러한 훈장의 수여를 모욕으로 인식하는 등 여러 이유로 실제로 수여된 훈장의 수는 그보다는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훈장 -① 기념장 (記念章)
난징국민정부의 기념장 (記念章) 목록. 1943년 4월 발표된 행정원 훈령에 의하면 난징국민정부는 '9개'의 기념장을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실물의 수는 6개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마저 불완전) 이는 많은 기념장들이 보존되어 남아있는 만주국의 기념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 광동군경열병예전 (奧軍警閱兵禮典 / 1940.11.1)
1940년 11월 1일, 광저우의 중산기념당 (中山紀念堂) 앞에 도열해있는 화평건국군을 비롯한 여러 장병들. 열병식은 근대시기 국가의 권위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이러한 열병식의 전통은 근대 이후 동아 국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중일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도 일본과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양측 모두 계속하여 열병식 행사를 이어나갔다. 1940년 수립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시기에도 열병식은 진행되었는데, 본 글에서는 1940년 11월 1일 광저우에서 개최된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첫번째 열병식을 다뤄보려 한다. (이후의 열병식도 다뤄보려 한다.) 1. 열병식의 개최제안 및 계획 1940년 3월 30일, 난징 국민대회당에서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환도선언 ( 보기 ) 을 발표함에 따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자신의 신정부 성립 과정에서 합의 끝에 옛 국민정부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와 중화민국 유신정부 (中華民國 維新政府) , 그리고 몽강연합자치정부 (蒙彊聯合自治政府) 영역을 포함하기로 결정되었고, 이에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위의 3정부를 포함하는 강역을 지배하는 정부로서 탄생하게 되었다. (난징국민정부의 설립 과정에 대해서는 여기 와 여기 를 클릭 : ) 하지만 이 과정에서 1938년 이래 일본군의 남부 점령지역이었던 광둥 지역은 이러한 신정부 설립과정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 (일화협의기록을 비롯한 일본-왕징웨이 간 협상과정에서도 이름바 화남(華南) 지방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편이다. 샤먼 (夏門) 과 하이난섬 일대를 특수행정구역으로 둔다는 논의는 있었지만, 광둥 지역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 때문에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는 1940년 3월의 시점에서도 광저우와 광둥성 일대는 중일전쟁 초기 점령지가 그러하였듯 유지회 (維持會) 와 같은 기초적인 협력자치 조직만 꾸려진 상태였고, 때문에 광둥성이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로 편입된 것은 정부 출범으로부터 2달가량이 지난 1940년 5월이 되서야 였다. 난징국민정부는 1940년 5월 10일, 광둥성정부 (廣東省政府) 를 설치함으로서 광둥성을 자신의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중일전쟁 시기 광둥성의 난징국민정부 편입과정은 이후에 더 자세히 다뤄보려 한다.) 왕징웨이와 그의 정부에게 있어 광둥성은 중요한 곳이었다. 광둥성은 왕징웨이 본인의 고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존경하던 지도자 쑨원의 고향이었으며, 동시에 국민혁명의 발원지이자 중국국민당의 탄생지였다. 때문에 정통 국민정부를 표방하던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게 있어 광둥 지역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광둥은 일본의 기존 점령지와는 거리가 존재했으며,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이전까지는 어떠한 대일 협력 세력도 명백한 지배를 하지못했던 지역이었다. 대일 협력세력에서 우위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던 왕징웨이는 때문에 광둥지역을 명확한 자신의 지역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광둥에 자신 치하의 군대를 건설하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하지만 광둥지역은 난징과 베이징을 비롯한 기존 강역과 분리된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만큼, 광둥 지역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굳고히 하기 위해서는 광둥성 일대에서 활동하는 별도의 군 부대를 설립할 필요가 있었다. 왕징웨이는 이 작업을 위해 광둥 지역에서 자신의 정권을 위한 군대를 창설하기 시작했고, 이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행사로 자신의 첫 열병식을 수도 난징이 아닌 광둥의 광저우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1940년 8월 5일, 광둥성정부는 열병식 개최에 관한 논의를 하였고, 이러한 논의 사항을 왕징웨이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기뻐한 왕징웨이는왕징웨이는 군사위원회 위원이었던 리어우이 (李謳一) 를 8월 13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광둥 판공처 주임 (國民政府軍事委員會委員長駐粵辦公處主任) 으로 임명하고 열병식 준비를 하게 했다. 리어우이는 8월 왕징웨이에게 전보를 보내어 열병식 계획에 대해 보고 했고, 왕징웨이가 이를 심의, 승인함으로서 열병식 준비는 공식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이어 리어우이는 9월 5일, 열병식 준비를 위한 계획과 예산안을 왕징웨이에게 제출하며 이를 위한 승인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내게 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광둥(粤) 판공처가 청원함 (國民政府軍事委員會委員長駐粵辦公處呈) 민국 29년 (1940) 9월 5일 본 처(處)는 올해 10월 중으로 광동성의 군경(軍警), 중앙육군군관학교 광저우분교, 중앙경찰학교 광저우분교 소속 학생들을 모아 광저우 시내에서 열병식을 거행할 계획으로, 지난달의 전보를 통해 귀하께 본 건에 대한 심의와 결정을 부탁하였고 귀하께서는 이를 승인한다는 회답을 주셨습니다. 본 처는 현재 열병계획에 대해 정부의 비준 단계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에 본처는 이번 열병식에 필요한 경비를 예산안을 작성하고 본 열병식을 위한 병력 동원 계획을 본 회(會)에 제출하여 심의 받으려 합니다. 이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왕(汪) 위원장께 금년 10월 상순에 거행할 열병식 계획서를 첨부하여 보내드립니다. 존경을 담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광동 판공처 주임 리어우이 (李謳一) 본 전보를 받은 왕징웨이는 16일, 리어우이의 계획안을 승인하였다. 이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광둥 판공처측은 17일 열병식 준비를 위한 조직인 열병예전주비처 (閱兵禮典籌備處) 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10월 2일 왕징웨이 측이 승인하면서 본격적인 열병식 행사 준비가 진행되게 된다. (전달과 승인과정에서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주비처의 처장이었던 량지엔지 (梁建持) 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원인에 대하여 광둥성과 난징이 있는 기존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지역은 거리도 먼데다 전쟁이라는 환경속 사실상 단절되어 있었고, 전보망이 당시만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보의 왕복에 오랜시간이 소요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때문에 행사의 준비에 있어 행사에 참가하는 부대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열병예전주비처는 광둥성(왕징웨이) 치하의 군경 및 군관학교에서 파견된 인원 약 130명 가량으로 구성되었으며, 판공처측은 이 열병예전주비처를 본 행사를 위한 임시적 기관으로 설정하여 해당 행사가 종료된 이후에는 자진해체하게 하였고, 판공처의 제2조 조장이었던 량지엔지를 열병예전주비처의 처장을 겸하게 했다. 열병예전주비처는 이후 열병예전주비처 제1차 회의 ( 閱兵禮典籌備處第一次會議) 를 개최하고, 열병식에 있어 수송, 급양, 위생, 의료, 선전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서 회의를 진행하였다. 회의에서 도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열병식에서의 수송 및 급양은 제3로군(第三路軍) & 제4로군(第四路軍)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두 부대는 열병식 참가인원을 위한 야영시설을 제공한다) 2) 열병식장에 존재하는 장애물 (나무, 돌등) 은 광둥성 보안사령부에서 제거한다. 3) 열병식에 참가하는 경찰들을 판별하기 위한 기(旗)를 별도로 제작한다. 4) 열병식의 연습을 위해 각 부대의 지휘관및 부관들을 모아 1~2회 예행연습을 한다, 행사에 참가하는 장병들의 연습은 각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다. 5) 열병식의 선전은 다양한 형태를 통해 실시한다. 6) 행사장의 경비는 행사에 참가하는 군경 및 학도들이 공동으로 실시한다. (다만 지휘는 광둥성 보안사령부가 실시한다) 7) 각 현의 경찰대는 10월 3일 본 행사를 위한 훈련을 진행한다. 8) 행사장의 경비병력은 공포탄만을 소지한다. 9) 행사장에서 장병들의 배열과 배치는 중국식으로 한다. ( * 일본식으로 할것인가 중국식으로 할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0) 경비병력은 열병식에 참가시키지 않는다. 11) 각 부대 지휘관은 말에 탑승하고 검을 휴대하게 한다. (이를 위한 훈련을 사전에 진행한다.) 12) 열병식에서 총을 휴대하지 않는 장병은 손을 들지 않는다. 13) 열병 & 분열과정에서 안내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측을 응시한다. 14) 구호(口號) 문제는 사전에 협의한다. 15) 본 열병식 진행을 위해 우군 (友軍, 일본을 의미) 와 협의한다. 16) 열병식 참가 부대 장병들은 탄띠를 휴대하지 않는다. 17) 열병식 참가 부대 장병들의 총기는 각 부대에서 검열 & 검사한다. 이어 열병예전주비처는 병식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웠는데, 그 계획은 다음과 같다. 본년10월상순거행열병예전계획 (本年十月上旬擧行閱兵禮典計劃) 1) 열병의 목적 ⓐ : 중화민국 국경 (쌍십절) 기념 ⓑ : 장병들의 친애단결(親愛團結)의 정신 확립 ⓒ : 장병들의 화평무력 (和平武力) 인식과 이를 위한 자신감 확립 ⓓ : 군대의 기강 확립 ⓔ : 장병들의 훈련과정 확인 / 검열, 이를 통한 군의 효율 증가 2) 열병 시기 및 시간, 장소 ⓐ : 시기 및 시간 금년 10월 상순, 오전 10시 (사열을 받는 부대는 지정된 날짜 오전 9시 이전에 미리 열병 장소에 도착해야) ⓑ : 장소 광저우시 (廣州市) (상세 장소 및 시간은 차후 별도로 결정한다) 3) 열병관장 (閱兵官長) 및 내빈 ⓐ : 열병관 ( 閱兵官) 리어우이(李謳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및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 광둥 판공처 주임 및 육군중좌 ⓑ : 부열병관 (副閱兵官) 천야오쭈(陳耀祖) 광둥성보안사령관(廣東省保安司令) 및 육군중좌 ⓒ : 부종관 (部從官) 셰자오(謝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 광둥 판공처 고급참모 및 육군소좌 리다오쉬안(李道軒) 광둥성 참모처장 자오구이장(招桂章) 광둥강방(江防)사령관 및 해군소좌 왕중하오(王仲豪) 중앙경찰학교 광저우 분교 교육장 ⓓ 내빈 1) 중앙과 지방의 군관 및 기관장 2) 각국 외교 주재 인원 3) 성시(省市) 당* 지도부 4) 민중 단체 및 언론 (세부적인 내빈 목록은 차후 결정하기로 한다) 4) 열병지휘관 (閱兵指揮官長) 및 지휘 인원 ⓐ : 열병지휘관 정광황(鄭洸黃) 광둥강방부사령관 및 소좌 ⓑ : 참모 쑹메이룬(孫美倫)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 광둥 판공처 과원 (科員) 및 소좌 샤오웨이양(簫維揚) 광둥성 보안사령부 참모 ⓒ 부관 장징안(張靖安)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주 광둥 판공처 과원 (科員) 황상팅(黃相亭) 경찰교련소 총무부원 관중칭(關鐘罄) 광둥성 보안사령부 부관 리창밍(黎昌明) 광둥강방사령부 부관 ⓓ 사호 (司號) (광둥성 보안사령부에서 파견하기로 한다.) 5) 열병식 과정 ⓐ : 집결 ⓑ : 열병관 입장 ⓒ : 열병식 [1] : 열병식 (閱兵式) [2] : 분열식 (分列式) ⓓ : 연설 ⓔ : 열병관 훈화 ⓕ : 내빈연설 ⓖ : 구호 제창 ⓗ : 열병관의 퇴장, 예전 종료 선언 ⓘ : 예포 발사 6) 열병의 대형(隊形) ⓐ : 열병식의 대형은 열병 장소가 세부적으로 결정되면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주광둥 판공처에서 임시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를 열병식 참가 부대에 참고용으로 전달한다. ⓑ : 열병식의 대형은 연종대( 連縱隊, 세로 열(列)을 지어서 늘어선 대형) 및 영종대(營縱隊, 뒤로 열을 지어서 늘어선 대형) 으로 한다. 7) 공연 항목 및 시간 분배 ⓐ : 단체공연 1) 깃발을 이용한 공연 2) 공을 이용한 공연 3) 기타 공연 ⓑ : 개인 공연 1) 총검술 공연 2) 대도(大刀) 공연 3) 국빈 공연 4) 기타 개인 공연 ⓒ 공연 규정 1) 각 공연프로그램은 기획안건을 상정하여 공연프로그램 시간을 배분할 수 있도록 사전에 군사위원회 주광둥 판공처에 보고하여야 한다. 2) 총 공연 시간은 2시간으로 한다. 3) 각 공연의 최대 시간은 45분으로 한다. 4) 공연은 열병장 안에서 진행한다. 5) 공연의 종목, 시간, 절차는 열병관의 명령에 의해 임의로 변경될 수 있다. 8) 기타 규정 사항 ⓐ : 열병식 내의 경비는 성 보안대 및 경찰이 담당한다. ⓑ : 열병식에 참가하는 부대의 급양은 각 부대, 부서가 자체적으로 준비한다. ⓒ : 열병식에 참가하는 부대의 장병들의 총은 모두 탄약을 장전해서는 안되며 (의장 사격용 제외) 이를 각 부대의 장은 열병식 참가전 이를 엄밀히 검사한다. ⓓ : 각 부대의 장병중 열병식 당시 근무일정을 보유한 장병은 행사에 참가하지 않는다. ⓔ : 각 부대의 위치를 나무표지판으로 표기한다 [추가설명] 본 대회는 본래 10월 상순 개최를 목표로 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준비가 부족해 날짜를 연기하여 실시한다. 본 계획안에서 개최 날짜와 시간은 차후 변경될 수 있으나, 그 외의 사항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유지한다. *1 : 중국국민당 (汪) 을 의미. 열병식에서 열병관(閱兵官) 을 맡게된 리어우이(李謳一)의 사진. 1) 과 2) 에서는 열병의 목적과 시기를 서술하였는데, 행사 계획 단계에서는 본 열병식을 중화민국 국경 (쌍십절, 10월 10일) 즈음으로 계획하여 본 행사로 하여금 국경절의 기념을 겸하게 하려 했으나 실제 열병식은 11월에 치뤄짐에 따라 그 목적이 희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주목해 볼 부분은 마지막 8)의 3항인데, 행사에 참가하는 장병들의 총을 점검하여 행사 도중 돌발적인 상황을 방지하려 했다는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행사 진행중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한 것이나,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주요 인사들이 항상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음을 생각해보면 본 항목이 단순히 행사의 안전을 생각한 규정이라고는 볼 수 없게 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열병예전주비처는 나아가 행사에 참가하는 장병, 부관 및 지휘관들의 행동 규정도 마련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열병관을 맞이하는 법 1) 열병관이 열병장에 도착시 지휘관은 차렷을 의미하는 나팔을 불고, 지휘검을 위로 치켜들고 나팔을 불며 장병들로 하여금 앞에 총을 하게 한다. (총을 보유하지 않은 장병은 거수 경례) 동시에 군악대는 영접 음악을 연주한다 2) 열병관이 열병장에서 떠날시 지휘관은 차렷을 의미하는 나팔을 불고, 지휘검을 통해 예를 표한다. 이후 군악대는 영접 음악을 연주한다. 열병 동작 규정 1) 열병관이 열병식 시작을 명하면, 지휘관은 열병대 (閱兵台) 로 가서 열병관에게 열병식에 대해 보고하고, "열병식 시작(閱兵式開始)" 을 외치며 열병식을 시작한다. (이때 지휘관은 열병관으로 부터 약 20보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2) 모든 병사들이 열병과정을 마치고 열병대로 복귀하면, 지휘관은 열병관에게 보고하고, "열병식종료 "(閱兵式完畢)" 를 외치며 열병식을 종료한다. 이후 군악대는 대형을 바꿀 준비를 하라는 예음을 연주하고, 분열식을 준비한다. 분열식의 준비가 완료되면, 지휘관은 열병대로 가 "분열식 시작(分列式開始)" 을 외치고 분열식을 시작한다. 이때 각 부대는 지휘관의 뒤를 따라 행진하며 (이때 약 말 반마리 가량의 간격을 둔다) 지휘관이 지정된 장소로 가 "좌로 어깨총" 을 지시하고 "발 맞추어 1분당 약 160보로 가" 라고 명령하면 행진을 시작한다. 3) 각 부대의 지휘관은 행사장의 제3표지에 도착하면 장병들에게 경례를 명령한다. (이때 장병들은 오른쪽을 바라보고 경례한다) 그리고 지휘관이 제4표지에 도착하면 경례를 중지한다. (이때 머리의 각도는 오른쪽으로 45도, 열병관을 바라보며 경례한다) 이외에도 대형을 바꿀 때는 동작이 신속해야 하며,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4-13항) 열병장은 절대 엄숙을 유지해야하며 잠시 쉬거나 대오를 동원할 때는 말을 하거나, 웃거나, 침을 뱉어서는 안된다. (4-14항) 중대장 이상은 검을 소지해야한다 (5-4항) , 복장과 무기는 열병예전주비처의 규정에 준하는 것으로 통일한다 (이가 불가능하다면 단위당 통일) (6-1항) 등 열병예전주비처는 열병식의 아주 세세한 내용까지 규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복장의 경우에도 열병예전주비처는 규정을 설정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휘관 및 부관 : 청색의 군복 / 흰장갑 착용 / 소교(少校) 이상은 검은 군화 부츠 / 그 이하는 검은 양말에 검은 신발 착용 일반 병사 : 청색의 군복 / 가죽 허리띠 착용 / 수통 착용 / 식량주머니 / 검은 양말 및 검은 신발 (군관학교 학생은 군화 부츠) / 등 뒤에는 금속 북(銅鼓) 경찰 : 경찰 복장 (하지만 일관성을 가질것) 공통 : 행사 기념 뱃지를 착용할 것 그 외에도 열병예전주비처는 흔들어야 하는 팔의 각도 (45도), 숙영시 지켜야할 사항 (금연, 침뱉기 금지등) 를 비롯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2. 열병식의 준비 과정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계획안을 세운 열병예전주비처는 10월초부터 행사의 홍보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선전은 민간선전의 경우 1) 중일합작의 중요성 2) 화평의 중요성 3) 신정부의 정당성 4) 신정부에서의 민중의 협력 중요성 5) 건군의 중요성 등에 중점을 둔 선전이 이루어졌으며, 군대를 상대로 한 선전에서는 1) 우리의 주적은 영미제국주의와 공산당에 있음을 인식 2) 중국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선 화평이 필요함을 인식 3) 중국을 위해선 화평반공건국의 정신에 의거한 높은 수준의 군대가 필요함을 인식 등에 중점을 둔 선전이 이루어졌다. 실제로 열병예전주비처의 선전부는 본 열병식의 선전및 홍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항전론자의 모든 종류의 감동적이고 비합리적인 논술, 예를 들어 "최후의 승리" , "옥이 되어 부서질지언정, 온전한 기와가 되어 오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 寧爲玉碎,不爲瓦全, 정의를 위하여 깨끗이 죽을망정, 너절하게 살지는 않는다.) " 와 같은 말을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선전은 신문, 잡지, 포스터등 광범위한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이과정에서는 물품의 제공도 이루어졌다. 열병예전주비처는 "민중에게 고하는 글 (民衆告書)" 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배포하기 시작했으며 (본 책자는 군인들을 위한 버전도 존재했다.) 광둥 내의 신문에 열병식을 홍보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표어(標語)를 관공서 내부 및 주요 거리에 설치함으로서 홍보활동을 진행하였다. 설치된 표어들은 다음과 같다. 열병식은 현대화된 국방군을 건설하기 위한것이다. 閱兵為的是要建設現代化的國防軍。 열병식은 화평의 무력을 유지하고 훈련하기 위한것이다. 閱兵為的是要訓練維持和平的武力。 정부의 열병식은 군대를 훈련시켜 공비를 척결하기 위한 것이다. 政府閱兵是要訓練軍隊來撲滅共匪。 정부의 열병식은 군대를 훈련시켜 화평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政府閱兵是要訓練軍隊來掃除和平的障碍。 열병식은 군대를 정비하여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閱兵是要整理軍隊來保護民衆。 열병식은 국방 역량을 강화하여 동아 화평유지의 책임을 지기 위한 것이다. 閱兵是要强化國防力量來担負維持東亞和平的責任。 건군(建軍)은 중국민족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建軍為的是保持中國民族的生存。 건군은 인민들이 공비들에게 유린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建軍是欲使人民不受共匪的蹂躪。 화평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부는 반드시 건군을 해야한다. 要掃除和平的障碍,政府必須建軍。 화평건국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정부는 반드시 건군을 해야한다! 要完成和平建國的使命,政府必須建軍! 화평반공의 실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정부는 반드시 건군을 해야한다! 想促成和平反共的實現,政府必須建軍! 공비의 유격전은 우리 민족을 멸망에 빠지게 할뿐이다. 共匪的游擊戰,足以淪我民族於滅亡。 정부의 건군은 공비를 박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政府建軍,為的是撲滅共匪。 (화평진영으로) 돌아오는것은, 통일화평의 선봉이 되는 것이다. 復員來歸,是統一和平的先聲。 우리의 진정한 적은 공산당이다. 我們的真正敵人是共產黨。 중일합작은 동하부흥의 중대사명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中日合作共同肩負復興東亞的重大使命! 군(軍)과 민(民) 이 힘을 합쳐서 화평건국,동아부흥의 중대사명을 짊어지자. 軍民合作,共同肩負和平建國復興東亞的重大使命 현대화된 중구국방군을 건설하자! 建設現代化的中國國防軍! 병사들의 지식을 확장시키는 것은 국방군 건설의 기초다. 灌輸士兵知識,是奠定國防軍的基礎。 사상주의화, 행동기율화! 思想主義化,行動紀律化! 한편 계획 수립 과정 당시 열병식 개최 장소를 확정하지 못했던 열병예전주비처는 준비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열병식 개최 장소로 광저우 중산기념당 (中山紀念堂) 을 선정하였는데 이에는 2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첫째로는 광저우 시에서 대규모의 인원이 열병식을 진행할 장소가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저우의 중산기념당 일대는 공원이 조성되어 환경만 정리한다면 대규모 열병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는 국부 쑨원과 그가 세운 국민정부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왕징웨이의 판단이 작용하였다. 앞에서 보았듯 수도 난징이 아닌 광둥성이 첫 열병식의 장소로 선정된 데에는 혁명의 고향 광둥성에서 자신의 지배를 굳고히 하여 국민혁명의 계승자로써 자신의 난징국민정부가 정통 국민정부로 인정받게 한다는 왕징웨이의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왕징웨이는 이 목표를 최대한 성립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혁명의 고향에서도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중산기념당을 행사 장소로 선정했다. 광저우 중산기념당의 모습. 중산기념당이 열병식 장소로 결정된 것은 모두 왕징웨이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또한 열병예전주비처는 계획안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이들은 시간 촉박속 제시간에 준비를 끝내지 못하여 10월 상순에 열병식을 개최한다는 본래의 계획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열병예전주비처는 행사를 연기, 11월 1일 에 개최하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한다. 또한 열병식에 참가할 열병관 및 지휘관에 대한 임명이 있었는데 계획안에서 결정되었던 인사 거의 대부분이 그대로 참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10월 24일, 광둥성정부는 열병식 행사장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해당 장소를 청소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행사와 관련된 인원들은 증서와 완장을 착용해야만 접근할 수 있었다.) 10월 26일에는 열병식에 참가하는 제3로군 (第三路軍) 이 행사 참가를 위해 주둔지에서 출발하였고 이후 타 부대들도 속속히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 열병식의 초대장이 여러 인사들에게 발부되었다. (초대장에는 참가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참가증을 행사장 정문에서 제시해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27일에는 위생 및 의료를 위해 광저우시와 일본에서 파견한 위생 요원들이 도착했으며 29일에는 열병식에 참가하는 모든 부대가 중산기념당 앞에 도착, 행사를 위한 연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행사장 (중산기념당) 에 도착한 부대들은 모두 중산기념당을 둘러싸고 아영을 시작하였으며, 제3로군(第三路軍) 과 제4로군(第四路軍) 은 이들의 급양을 책임졌다. 행사가 가까워지면서 중산기념당 주변의 경비도 강화되었는데, 중산기념당 근처에서 광저우시 경찰대는 일대를 통행하는 이들로 하여금 검문을 실시하였고 (해당 검문은 복장검사까지 이루어지는 등 엄중하게 이루어졌다.) 중산기념당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건물 옥상에는 경비 병력이 배치되었고 심지어 중산기념당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오수산( 粵秀山, 현재 중국대륙 광저우시 초수공원 越秀公園 일대) 에도 병력이 배치되었다. 3. 열병식의 진행 열병식 시작전 광저우 중산기념당 주변의 부대배치 모습. 부대들이 중산기념당을 둘러싼 모습을 보이고 있다. 11월 1일,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이 펼쳐진 가운데 오전 5시 새벽, 중산기념당 주변이 분주해졌다. 열병식에 참가하는 병사들은 기상하여 야영장을 정리하고 열병식에 참가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 열병예전주비처 직원들이 중산기념당에 도착하여 마찬가지로 행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7시 20분부터 야영장 정리를 끝낸 장병들은 위의 사진과 같이 열병식 시작을 위한 대열 갖추기에 들어갔다. 8시 쯤에는 속속히 내빈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고, 열병관을 비롯한 정부- 군 지휘부도 차차 도착하기 시작했다. 열병식 준비를 하며 대열을 정비한 장병들의 모습. 구도상으로는 중앙육군군관학교의 학도들, 광둥성 보안대 , 제2독립보병연대로 추측된다. (오른쪽의 병사들의 등에 앞에서 이야기한 복장규정에 적용되는 북이 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시 30분 가량에는 대열의 정비가 완료되었고, 현장의 마지막 점검이 있었다. (장애물 등) 8시 40분에는 장병들의 복장및 총기에 대한 최종 점검이 있었다. 그리고 9시, 열병식에 장병들과 내빈들까지 약 만 여명 이 참가한 가운데 국가제창 & 국기 게양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광황 광둥강방사령관이 리어우이에게 열병식에 대해 보고 하고 정광황이 "열병식 시작(閱兵式開始)" 을 외침으로서 열병식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말에 탑승한 채 열병대의 리어우이에게 열병식 시작을 보고하는 정광황 (鄭洸黃) 광둥성강방사령관. 말에 탑승한 채 장병들을 사열하는 리어우이 열병관. 열병대에는 리어우이를 중심으로 열병관장 인원들이 위치했고, 좌우로는 부열병관이자 광둥성정부주석대리였던 천야오쭈를 비롯한 광둥성정부 관원들과 난징의 중앙정부 인원들이 위치해 있었다. 내빈으로는 광둥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 인사들, 국민정부 인사들 및 중국국민당(汪)의 당원들이 참석했고 난징국민정부를 대표해서는 국민정부의 행정원장이었던 추민이(褚民誼) 가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참석하였다. 이렇듯 1940년 11월의, 난징국민정부의 첫 열병식에 왕징웨이는 참가하지 않았다. 열병-분열식 시작후 각 부대의 이동경로. (빨간 화살표 후 여러색의 화살표 , 검은색으로 된 숫자 참조) 예를 들어 흰색2번인 광둥성 보안대는 행진후 검은색 2번 자리로 이동한다. 열병식이 시작되고 오전 10시, 분열식이 시작되면서 그림과 같이 각 부대들은 순서대로 중산기념당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행진하면서 중산기념당 앞 광장을 순환한 뒤 지정된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행진하는 중앙육군군관학교 광저우분교 학도들. (①) 행진하는 광둥성 보안대 병력 (②) 행진하는 광둥성 경찰대 병력 (⑧) 모든 부대들이 행진을 마치고 연설과정이 된 후의 중산기념당 모습. 분열식이 끝나자 중산기념당은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모든 장병들이 훈화대 뒤로 집결하게 된다. (가장 맨위의 사진이 당시의 사진이다.) 분열식을 끝내고 훈화대 뒤로 집결한 장병들에게 지휘부는 훈시를 시작했다. 훈시의 순서는 국민정부를 대표하여 본 행사에 참석한 추민이 → 열병관이었던 리어우이 → 남지나파견군 광둥 특무기관장 야자키 칸죠 ( 矢崎勘十, 1893~1969, 난징국민정부의 군사고문을 맡기도 했다, 내빈) 순으로 이루어졌다. 연설하는 추민이 행정원장. 추민이의 연설 (1940.11.1) 정부 공직자 여러분, 장병 여러분, 오늘 나는 왕(汪) 위원장을 대표하여 광둥의 군경(軍警)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를 본인은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열병식에 참가한 부대들의 대오들을 바라보면서, 본인은 많은 장병들이 절도있는 걸음걸이를 보이고 매우 충만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몇몇 장병들은 아직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당연히 훈련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으로 더 훈련한다면 반드시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완벽한 군대가 있으면 자연스레 전면적인 화평의 실현은 가능해지고, 동아 화평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군인정신을 진작시키고 국방군을 다시 조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가 지금 건군(建軍)을 한다면 전 인민의 신뢰와 우방국 인사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투쟁해야 하며,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오늘 그대들의 정신과 노력을 보면서 나는 큰 기쁨을 느꼈으며, 나는 난징으로 돌아가 반드시 왕 위원장에게 이번 열병식의 성과를 보고할 것이다. 연설하는 리어우이. 리어우이의 연설 (1940.11.1) 이번 열병식을 위해 중앙정부(국민정부)의 위원 및 각 장관, 우방국의 장관 및 각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준비과정을 지도해 주었다. 이들의 극력 협조에 대해 대단히 감사를 표한다. 본인은 왕(汪) 위원장의 명을 받들어 광둥성의 군무(軍務)를 관장하여 장병들과 동고동락하며 구국의 책임을 받들어 수 개월동안 부지런히 훈련하였다. 그리고 각 부대의 감독하에 오늘의 열병식이라는 성과를 얻게 되어 매우 기쁘고 위안이 된다. 현재 훈련과 장비는 충분하지만, 아직 건군(建軍) 이라는 본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지금 중국에 벌어지고 있는 위기를 인식하고, 올바른 구국의 길을 선택하여, 화평반공건국의 기치 아래 함께 서서 나아가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동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어 기쁘다. 중일양국은 본래 순치상의 ( 唇齒相依, 서로 의지하다) 의 관계로써, 이 둘이 싸우는 것은 휼방상쟁 ( 鹬蚌相爭, 도요새와 조개가 싸우다가 둘다 어부에게 잡히는 상황) 이 되는것과 같다. 하지만 중일은 3년간 싸우면서 양국의 민생은 피폐해졌고 위원장이신 왕 선생께서는 차마 민생을 도탄에 이르게 하는 중일 양국의 전쟁이 결코 이대로 지속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이들이 이 사이에서 이익만을 쫓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의연하게 화평을 주장하여 양국의 유식한 인사들은 세계의 동향을 관찰하고 해결방안을 함께 검토하며 중일 양국은 올해 3월, 화평을 위한 견고한 초석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현재 우리 중앙정부 (국민정부) 는 난징으로 환도한 이래, 화평반공건국을 기본국책으로 삼고 있다. 화평반공건국의 의의에 대해 위원장이신 왕 선생꼐서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있다. "화평은 사상적으로는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행동은 경제제휴 (經濟提携) 를 의미한다. 반공은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타파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행동은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음모를 방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국은 사상적으로는 삼민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행동은 현대국가 중화민국의 건설을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은 말은 아주 간결한 말이지만, 이 짧은 말 속에서 이미 중국의 국책은 매우 명확하게 설명되었다. 전쟁의 참화를 없애고, 민중을 다시 삶으로 복귀시키고, 군대들 다시 재건하는 작은 일에서 시작해, 크게는 일본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자유롭고 독립적인 중국을 건설하고, 일본과 함께 동아신질서를 건설하는 책임의 부담을 져야 함을, 화평반공건국의 군인 장병및 경찰들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공산당의 행동은 살인, 방화, 강간, 노략질을 하는 폭도와 다를 바가 없다. 이번 항전 선동은 단지 자신들로 하여금 정권을 탈취하고 중국에 '붉은 제국주의' 를 실현하여 중국이라는 국가를 영원히 멸망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반공이 없으면 화평을 얻을 수 없고, 화평이 없으면 건국을 얻을수 없다." 라는 이치를 우리 군인 장병 및 경찰들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화평반공건국은 국민정부의 기본국책이며, 앞으로의 모든 정부의 조치는이 국책에 의거하여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국책의 신속한 추진을 위하여 전 인민들을 모아 일치단결시켜야 한다. 특히 화평의 장애물이자 화평을 방해하는 세력이 아직도 존재하기에 우리 군경은 국가보위와 치안유지라는 책임이외에도, 이러한 장애물의 제거라는 중대한 임무도 맡고 있는 것이다. 왕 위원장께서는 우리 군경에 대해 매우 간절한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군경 동지들은 이를 위해 출신이 어떠하든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회유에 휘말리지 않고, 희생도 마지 않으며, 오로지 구국만을 생각하고 있다. 다만 구국이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만큼, 우리는 스스로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역량을 충실히 키워나가야 그 막중한 책임을 질 수 있으며, 맡은 바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 나는 우리 군경들이 보국위민 (保國爲民) 의 무기를 움켜쥐고, 입으로는 큰소리로 화평건국의 구호를 외치며 발걸음을 맞추어 중일 친선의 길을 착실히 나아가기를 바란다. 야자키 칸죠의 연설 (1940.11.1) 이렇게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늠름한 제군들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며, 밤낮으로 일본군과 협력하여 치안을 유지해온 제군들에 진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소위 치안유지는 국가사회의 기초이다. 만약 치안이 좋지 않으면, 어떠한 위대한 이상과 선량한 정치가 있더라도,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위대한 선인(先人) 이시자 사상가, 정치가이시자 혁명가인 손중산 선생과 같은 위대한 인물께서 왜 초기 혁명과정에서 실패를 겪었는가? 이는 손중산 선생에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경지식이 없어도, 이 일에 대해서는 제군들은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제군들은 난징의 왕징웨이 선생이 그대들에게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왕 주석의 큰 이상은 바로 중일의 협력으로 동아민족을 해방시켜 동아의 공영을 실현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위대한 사명의 앞날은 바로 제군들의 두 어깨 위에 달려있는 것이며, 이는 절때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제군들이여, 그대들의 위대한 사명과 명예를 충분히 인식하고 일본군과 협력하여, 고향(광둥)을 떠나 혁명의 영웅이 되었던 손중산 선생과 왕징웨이 두 선생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길 바란다. 또한 제군들이 중국과 동아를 위해, 나아가 세계 전 인류를 위해 정진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다. 기관총 사격술 시범을 보이는 광둥성 보안대. 보(保) 라는 완장을 차고 있음을 알수 있다. (기관총은 체코슬로바키아제 Vz.26 기관총으로 추측된다.) 훈시가 끝난 이후 열병장에서는 예정대로 공연이 펼쳐졌다. 광둥성 보안대는 위의 사진과 같은 기관총 사격 시범술과 총검술 시범을 보였다. (다만 그외 공연이 진행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전해지는 사진도 위의 사격술과 총검술 장면을 제외하면 전해지지 않는다.) 공연 이후, 열병장의 모든 장병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제창하였다. 무장동지 (군경 등) 들이여 단결하라! 武裝同志團結起來! 현대화된 중국국방군을 건설하자! 建設現代化的中國國防軍! 국가와 민중의 재앙인 공산당을 무찌르자! 撲滅禍國殃民的共產黨! 화평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자! 掃除一切和平的障碍! 전면화평을 실현시키자! 實現全面和平! 중화민국을 부흥시키자! 復興中華民國! 중일합작으로 동아를 부흥시키자! 中日合作復興東亞! 중일합작만세! 中日合作萬歲! 왕 위원장 만세! 汪委員長萬歲! 중화민국 만세! 中華民國萬歲! 구호 제창 이후 정광황은 열병식의 종료를 보고하였고, 리어우이가 이에 열병식 종료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1940년 11월 1일의 열병식은 종료되었다. 리어우이의 종료 선언과 함께 예포가 발사되었고, 예포의 발사 이후 열병식에 참가했던 부대는 현장 정리 및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 철수는 늦어져 11월 3일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11월 10일, 열병예전주비처가 공식 해산됨에 따라 열병 과정은 완전히 끝이났다. 매일신보 1940년 11월 2일자에 보도된 광저우에서의 열병식 내용. 간단한 서술만이 이루어져 있다. 1940년 11월 1일의 열병식은 난징국민정부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개최되는 열병식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열병식이라는 이름과 달리 왕징웨이 본인도 직접 참가하지 않았으며, 중화일보를 비롯한 난징국민정부와 조선, 일본의 신문들도 이러한 소식을 단편적으로만 전하는 등 난징국민정부에서는 본 열병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열병식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 아직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은 광둥성과 난징국민정부의 관계 광둥성은 1940년 5월 이래 난징국민정부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지리, 거리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광둥 지역에서는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완전한 난징국민정부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던 지역이었다. 때문에 1940년 11월 열병식이 진행되던 시점에서는 난징국민정부의 광둥성 편입 이전에 설립되었던 기존의 조직과 체계들이 여전히 작동하며 난징국민정부의 완전한 통제력이 아직은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난징(중앙) 에게 있어 광둥지역은 아직까지 완전하지 않은 별도의 지배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측이 광둥 지역에서 더 명확한 지배력을 획득한 것은 그 이후이다.) 때문에 광둥에서 벌어지는 행사였으며 주최도 난징국민정부측이 아닌 대부분 광둥성과 기존 광둥성에 존재했던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개최된 본 열병식에 난징의 중앙정부는 본 행사가 자신이 설립한 정권의 첫 열병식임에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라면 왕징웨이 본인이 참가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될 수 있다. ② 아직 완전하게 정립되지 못한 난징국민정부의 군사체계 열병식이 개최되던 1940년 11월의 시점에서는 아직 난징의 중앙정부 입장에서도 본 열병식에서 계속 강조하였던 건군 (建軍) 과정이 아직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난징국민정부는 해당 시기 군관학교를 세우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군사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난징국민정부의 군사는 아직 통합되지 못했으며 화평건국군이라는 조직으로 명목적으로만 통합되었을 뿐으로 아직 여러 기존의 군사조직들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열병식에 참가하였던 광둥성 보안대와 같은 군사조직은 이러한 편입 이전의 조직이 아직 존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해당시기는 일본이 난징국민정부 측으로 막 군사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그 성과가 미약한 시점이었다. 때문에 열병식이 벌어질 시점에는 난징국민정부의 군대는 대부분 소총을 보유한 보병이었으며, 포병을 비롯한 전문 병과의 양성은 아직 부족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난징국민정부측에서는 아직 자신들이 성대한 열병식을 개최할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을 수 있으며 이 때문에 광둥에서 벌어졌던 소규모의 열병식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정권 초기 군사개혁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 : )
- 중화항공고분유한공사 (中華航空股份有限公司, 1938~1945)
중화항공의 탄생과정. 점령지의 많은 기업이 그러했듯이 중화항공 역시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한 중국자본과의 합작기업이었으며, 기업간의 통합과정을 통해 탄생한 기업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뿐만 아니라 베이징, 톈진, 우한, 광저우, 상하이 등 중국대륙의 주요 대도시들을 점령했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수 많은 시설들을 접수 하는 데 성공하였고, 철도, 해운, 차량을 비롯한 해당 지역의 교통 까지 대부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점령지에서 이러한 교통체계를 어떻게 운영했을까? 오늘은 일본의 점령지 교통체계 중 하나였던 항공 분야를 담당했던 중화항공 (中華航空) (현재 중화민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중화항공과는 명칭만 같을 뿐, 전혀 연관성이 없음) 과 그 전신이 되었던 후이퉁항공 (惠通航空) 이라는 회사를 살펴보려 한다. 1. 중화항공의 전신, 후이퉁항공(惠通航空) 의 설립 1936년 일본에서 작성된 《일본급만주국항공노선도 (日本及滿洲國航空路線圖 》. 만주국과 조선, 대만을 비롯한 영역 뿐만 아니라 산하이관, 톈진, 베이징, 장자커우를 비롯한 중국대륙의 도시들도 영역에 포함되어있다. 일본은 화북 진출을 비롯한 자신들의 이익 증대를 위해 중국에서의 항공사업의 필요성을 예전부터 인식해왔다. 일본은 1933년 탕구협정이 체결된 이래 베이핑을 비롯한 화북 지역에서의 항공 사업을 진행하길 원했으나,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는 일본측은 화북에서의 항공사업을 통해 ' 만주국'과 화북 지역을 연결하는 항공 교통망을 구축 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으로, 장제스에게 있어 이를 용인하는 것은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또한 항공협정을 통해 항공사업을 하게 된들 이득을 보는 것은 일본뿐이 될 것이라 생각해 중국의 산업 발전에 큰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당시 일본측과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던 장제스는 이러한 항공협정이 유사시 일본항공기가 중국에 위협을 가할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장제스는 일본과의 항공협정을 계속 거부해왔고 때문에 일본의 항공사업은 만주국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에 1935년 4월, 이름바 '자유비행' 이라는 명목으로 여러대의 항공기를 통해 중화민국 영공 내에서 허가되지 않은 비행을 하는 등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을 압박해왔고, 이에 1935년 7월부터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은 교통부(交通部) 로 하여금 일본과 직접 교섭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측의 교섭에서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1935년 8월 당시 일본측의 요구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자본 및 감독 부분에서 '일본' 이 지배할것. (2) 활동범위는 남만주 및 화북지역* 평진 (베이핑-톈진) 이남에서도 비행을 할것. 계획 노선 1. 진저우 - 산하이관 - 톈진 - 베이핑 2. 베이핑 - 창더 3. 베이핑 - 장자커우 4. 다롄 - 톈진 5. 다롄 - 칭다오 차후 확장 노선 1. 베이핑- 장자커우- 다퉁- 바오터우 2. 베이핑- 타이위안 3. 베이핑 - 지난 * 일본은 화북지역을 룽하이선 이북, 정저우 이북의 지역을 모두 화북으로 칭하였다. 1935년 8월 당시 일본측의 요구에 따른 신항공사 노선도. 화북 지역의 대부분 도시들에 취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이러한 일본측의 요구를 중국을 포산포해 (包山包海, 산과 바다에서 포위하려는) 하려는 속셈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국민정부측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시하였다. 1935년 8월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의 요구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자본 및 감독 부분에서 '중국' 이 지배할것. (2) 활동 노선은 화북 내에서 '2개'의 노선으로 한정. (3)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해당 항공사를 통해 항공우편을 개시할 권리를 가진다. 기술자, 관제체제등은 중국이 주도한다. 이렇게 양측의 입장차이가 명확하게 들어나게 되면서 교섭은 교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중국측이 노선의 수를 2개가 아닌 4개로 양보한 안을 제시하고, 일본측도 한쪽이 모든 지분을 가지는 형태로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아닌 중일 합작으로 회사를 설립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1935년 8월 당시 제시되었던 타협안 동방항공공사 설립에 관한 양해사항 (1935.8.17) (關於設立東方航空公司申合事項)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일본측 45%, 중국측 55% 지분으로 설립한다. (2) 활동 노선은 화북 내에서 '4개'의 노선으로 한정. 결정적으로 노선 문제에 있어서 일본은 "초기에는 중국측이 제시한대로 4개의 노선만을 가질 것이지만, 차후에는 칭다오, 바오터우, 지난 등 일대로 노선을 확장할것" 이라며 노선 확대를 계속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러한 교착 속에서 결국 교섭은 결렬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이러한 교섭 결렬에도 이후 1936년 3월, 4대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지나주둔군 (의화단의 난 이후 체결된 신축조약의 결과로 톈진에 주둔하게된 일본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일전쟁 이후 중국에 주둔했던 지나파견군과는 다른 존재이다.) 이 사용하던 비행장인 리밍좡(李明莊) 비행장을 통해 톈진 - 다롄 구간을 단독적으로 개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러한 노선 개설은 중화민국 정부와 전혀 논의되지 않은 불법적인 행위였다. 일본은 이러한 '자유비행' 행위를 통해 다시 한번 중화민국 측을 압박하고, 다시 국민정부로 하여금 협상테이블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국민정부 측은 '자유비행' 이라는 명목하의 불법 행위를 멈추어야만 협상을 재개할 수 있으며, 현재로서는 협상을 보류할 것이라고 명시하면서 일본측과 항공관련 협상을 재개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의 화북항공사업 진출은 또 한번 위기를 겪게 되었다. 쑹저위안 (宋哲元), 그는 기찰정무위원회의 수장으로서 일본과 경제제휴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화북 항공사업에 있어 위기를 겪었던 일본은 1935년 말 화북 일대에 기찰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 가 세워지면서 항공 사업에 관한 논의를 다시 진행할 수 있었다. 1935년 12월 18일,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기동사변(1935.11) 의 결과로 일본과의 마찰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허베이성 일대와 차하얼성 일대에 일종의 자치정부인 기찰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 를 수립한다. 기찰정무위원회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자치정부이자 일본-만주국-기동자치반공정부와 중화민국 사이의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중앙정부인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충성하였으나, 동시에 외교, 군사, 경제, 재정, 인사, 교통의 권한은 중앙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행사하였다. 때문에 기찰정무위원회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면서도, 행동은 국민정부와 별도로 행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측과 제휴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이러한 기찰정무위원회의 행동에 비판을 가했지만, 기찰정무위원회와 일본측은 지속하여 해당 지역에서 제휴를 이어나갔다. 1936년 10월, 지나주둔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취임한 다시로 간이치로(田代皖一郎)는 기찰정무위원회의 수장 쑹저위안 (宋哲元) 에게 경제제휴를 위한 4가지 원칙과 8가지 항목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기찰정무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쑹저위안은 이를 승인하였다. 화북경제제휴의 4원칙 - 8요항 (華北經濟提攜四原則-八要項) 4원칙 1. 공존공영의 원칙에 의거하여 중일 양국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 2. 중일제휴는 중일 양국 모두 평등한 위치에서 실시한다. 3. 각종 경제제휴 사업은 일본측에서 중국측에 차관을 제공하는 형태로, 중일합작 기업의 형태로 실시한다. 일본은 이를 위하여 자본과 기술을 지원한다. 4. 인민의 복리증진, 생활 개선을 경제제휴의 목적으로 한다. 8요항 1. 정기적 항공사업의 개시 2. 산업의 근간이 되는 철도 부설 3. 탄광 개발 4. 철광석 광산 탐사, 개발 5. 신 항구 건설 (탕구 일대) 6. 전력산업 확대, 수력발전 증대 7. 농어촌 진흥 (염업, 면화 수출 증대) 8. 기존 통신시설 보수 (일본이 자본 지원) 8요항의 1항에서는 장기적 항공사업의 개시를 명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일본은 기찰정무위원회의 천칵셩(陳覺生) 과 일본의 마츠무로 타카요시(松室孝良) 지나주둔군 베이핑특무기관장으로 하여금 기찰정무위원회 - 일본간의 항공 사업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게 했다. 1936년 10월 17일, 기찰정무위원회와 일본측은 중일통항협정(中日通航協定) 을 체결한다. 중일통합협정에서는 일본과 기찰정무위원회가 50%씩 출자하여 후이퉁항공 (惠通航空) 이라는 항공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일통항협정(中日通航協定)* 1 항공회사 설립에 관한 교환 문서 (關於設立航空會社交換文書)* 2 1. 일본과 기찰정무위원회는 합작하여 합작회사인 항공사 '후이퉁항공공사(惠通航空公司)' 를 설립한다. 2. 자본금은 450만엔으로, 중일이 각자 절반씩 부담한다. 3. 계획노선 (1) : 톈진 - 다롄 (2) : 톈진 - 베이핑 - 청더 (3) : 톈진 - 베이핑 - 장자커우 - 장베이 (4) : 베이핑 - 톈진 - 진저우 4. 계획 보유 기체 (1) : 포커(Fokker) F.VII 1기 (2): 포커(Fokker) 슈퍼 유니버셜 6기 (3) : 드 하빌랜드 (de Havilland) DH.80A 2기 *1 : 중국측 명칭 *2 : 일본측 명칭 후이퉁 항공의 엠블럼. 협정에서는 중일이 (여기서 중은 기찰정무위원회측을 의미) 함께 합작하여 후이퉁항공공사라는 항공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해당 항공사 설립을 위한 비용은 일본과 중국이 각각 절반씩을 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경우 남만주철도가, 중국의 경우 하북성은행, 이중담배공사(頤中煙草公司, 現 BAT (British American Tobacco) 가 중국에 설립했던 담배회사) 를 통해 주식을 발행 (1주 1,000엔) 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노선의 경우, 이전 1935년 8월 일본측이 제안했던 노선이 거의 모두 반영된 모습을 보였으며, 일본측은 톈진의 주둔군이 사용하던 비행장인 리밍좡(李明莊) 비행장에 보유하고 있던 비행기 9기를 후이퉁항공쪽에 제공하여 항공사업을 진행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찰정무위원회의 화북경제제휴의 4원칙 - 8요항은 당시 국민정부 중앙에서는 보류중인 사항이었으며, 이에 근거한 중일통항협정의 체결은 장제스를 비롯한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쑹저위안의 독단적인 행위였다. 장제스가 있던 난징중앙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안 것은 협정의 체결 이후였다. 협정이 체결된 이후 하루가 지나서야 난징 중앙정부는 협정에 관한 소문이 돌았고, 장제스는 협정 체결 이틀이 지난 19일, 장제스는 "중앙의 비준을 받지 않은 어떠한 대외협정도 체결하지 말라" 라고 쑹저위안에게 이러한 논란을 해명할 것, 협정을 체결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 이미 협정을 체결한 쑹저위안은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어 자신이 이미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러한 협정을 체결한 사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중일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할 것이다. 2.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순수한 상업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3.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 조직은 기존 국민정부의 항공사 조직의 모습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4. 노선의 범위는 기찰정무위원회 내로 한정된다. 5. 현재 이야기 되고 있는 경제제휴 문제는 원칙적인 논의일 뿐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우려할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보에도 장제스는 재차 쑹저위안으로 하여금 이러한 협정을 무효화할 것을 명령했으나 쑹저위안 측은 이를 사실상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정부의 고위 인사들도 이미 협정이 승인되어 일본 항공기들이 자유로이 운항을 시작한 상황에서 이러한 장제스의 조치가 일본과의 재충돌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미온한 조치들로 인해 결국 장제스는 중일통항협정의 내용을 사실상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이후 입장을 바꾸어 외교부와 기찰정무위원회 측에 "중일통항협정에서 규정한 내용을 잘 지키라" 라 이야기하며 이미 협정이 체결되어 이를 되돌리기 어려워진 이상, 협정의 내용이라도 잘 지키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선회하였다. 2. 후이퉁항공(惠通航空) 의 활동 후이퉁항공에서 발행한 항공권 (1937). 옆에는 비행시 유의해야할 사항을 서술하고 있는데, 비행시간이 긴 만큼 용변을 사전에 볼 것과 장거리 승객은 간식 혹은 도시락을 지참하면 편리하다는 내용, 기내에서의 흡연, 화기 사용을 금지하며 기내 촬영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수화물의 경우 10kg까지는 무료 이나, 그 이상은 요금을 부과함 등을 서술하고 있다. 1936년 10월 17일, 중일통항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후이퉁항공 (정식 명칭은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 恵通航空股份有限公司 ) 은 출범하게 된다. 후이퉁항공은 당시 만주국의 국영항공사였던 만주항공(滿洲航空)의 톈진 사무소를 개조한 것에서 시작하였고 (이후 본사는 베이핑에 두게 된다.) 출범 3일만인 10월 20일, 정식적으로 운항을 시작하였다. 사장은 기찰정무위원회의 장운롱(張允榮) 이 맡았고, 만주항공의 부사장이었던 코다마 츠네오 (兒玉常雄) 가 부사장을 맡았다. 후이퉁항공은 앞에서 보았듯 중일합작기업의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일본은 후이퉁항공의 출범 직후 후이퉁항공의 내부 장악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일통항협정에서는 회사를 중일합작으로 구성한다고만 규정하였지, 항공기, 항공관련 기술자, 관제등과 같은 부분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일간의 경제, 기술은 큰 격차를 가지고 있었고, 항공기도, 항공기 관련 기술도 일본에 비해 부족했던 기찰정무위원회는 후이퉁항공 경영에 있어 후이퉁항공을 위한 토지와 자본을 제공하는 역할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항공기, 항공기 정비, 관제를 비롯한 대부분은 모두 일본측에 의해 주도되었다. (심지어 조종사도 일본에서 파견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후이퉁항공은 중일합작기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사실상 주도권을 장악한 형태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1937년에는 사장이었던 장운롱도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대부분의 기업 경영권을 일본이 장악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후이퉁항공의 일본 기업화(化) 는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이전부터 우려했던 바였다. 쑹저위안도 이러한 일본측의 움직임에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쑹저위안도 결국 태도를 바꾸어 일본과 후이퉁항공의 행동을 규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후이퉁항공은 이를 무시하거나 다른 수단들을 통해 이러한 규제를 파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가장 단적인 예가 후이퉁항공의 비행장 & 공항 확대인데, 후이퉁항공은 출범 이후 노선 확대, 사업 확대라는 명목으로 베이핑과 톈진 일대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려 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사실상) 일본 주도의 비행장 건설이 유사시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비난하면서 새로운 비행장 건설을 반대했고, 쑹저위안도 이러한 취지에 동참하여 일본과 후이퉁항공이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지역에 외국인이 토지를 구매할 수 없게 조치를 취하여 이를 막았다. 하지만 일본과 후이퉁항공은 해당 지역의 농민들에게 비싼 가격을 처준다며 몰래 토지를 거래하였고, 톈진 등 지역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비행장 건설을 위한 허가를 받아내는 등 국민정부의 조치를 피해 비행장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제스가 우려했던 대로 일본이 건설한 비행장은 중일전쟁 시기 중국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되었다.) 후이퉁항공은 중일통합협정에서 규정되었던 9기의 비행기를 시작으로 항공여객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사업의 확장을 꾀하여 1937년 2월, 후이퉁항공은 일본 나카지마 사(社) 에서 만든 AT-2 여객기 3대를 추가로 구입하였다. 해당 AT-2 에는 북평(베이핑)호(北平號), 천진(톈진)호 (天津號), 상해(상하이)호 (上海號) 라는 이름이 붙였다. 후이퉁항공에서 발행한 나카지마 AT-2 도입 기념 엽서. 엽서에 묘사된 베이핑(북평) 호. 날개쪽과 후미 날개쪽에 후이퉁항공의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 후이퉁항공의 항공노선도. 일본은 후이퉁항공을 통해 1935년 희망하였던 만주국- 화북 항공연락망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고, 지난, 칭다오, 타이위안등 화북의 주요도시로 노선을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후이퉁항공은 신형 항공기의 구매와 더불어 노선의 확장을 꾀했다. 헤이퉁 항공은 기찰정무위원회 내에 6개의 비행장 & 공항을 통해 다퉁, 바오터우, 타이위안, 석거좡, 더저우, 지난, 칭다오 등으로 노선을 확장시키며 화북의 대부분 주요도시에 취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7년에는 하얼빈 행 (3월) , 도쿄행 (6월) 노선이 생기면서 국경지대만 연결하는 수준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국제선 노선도 형성하게 된다. 이는 만주국의 만주항공, 일본의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 (日本航空輸送株式會社) 와 제휴를 통해 형성한 것으로, 여행객들은 후이퉁항공을 통해 연락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후, 해당 장소에서 만주항공 혹은 일본항공으로의 환승을 통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연락편 형태의 장거리 비행노선은 큰 성공을 거두어 《北支那経済年鑑 昭和14年版 》 에서는 후이퉁항공이 일주일에 3번 운항하는 도쿄-톈진 노선이 톈진 행이든 도쿄 행이든 항상 매진되어 예약을 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일본은 이전부터 추구해왔던 항공우편사업도 후이퉁항공을 통해 개시했다. 이 항공우편은 무게에 따라 그 요금이 다르게 책정되었으며 후이퉁항공은 만주항공, 일본항공과 연계하여 일본 본토와 만주까지 항공편을 통해 우편과 소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후이퉁항공 항공우편 요금 (우편요금은 별도) 서장 (書狀) : 20g 당 10센(錢) 엽서 : 7센 (봉투가 있으면 10센) 소포 : 1kg 까지는 1엔(圓), 이후 500g 당 50센 물론 이러한 국제선의 확장과 항공우편 개시 또한 앞의 중일통합협정의 내용을 벗어난 것이며 국민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었기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7년 6월 10일, 전보를 보내어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고 멈추라고 명령하였지만, 일본은 이러한 장제스의 비난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며 이를 강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까지 발발하게 되면서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후이퉁항공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3. 중일전쟁의 발발과 중화항공(中華航空)의 설립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에 따라 수송에 있어 항공의 역할은 더욱 부각되었다. 후이퉁항공은 영업을 지속하는 한편, 일본군의 물자 수송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본군은 전쟁에 따라 늘어난 항공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민간 항공사들로부터 포커(Fokker) 슈퍼 유니버셜 5기 , 비치크래프트(Beechcraft) C17E 4기 를 비롯한 여러 항공기를 징용하였다. ( 때문에 국내선* (일본과 그 식민지 + 만주) 노선 일부가 영향을 받았다. ) 일본군은 이렇게 징용한 민간 항공기들과 자신이 보유한 항공기들을 통해 자체적인 항공노선을 구축하여 일본군의 병력과 물자를 운송하는데 사용했다. 또한 일본군 장병들의 군사우편 또한 이 항공노선을 통해 일본 본토로 전달되었다. 일본 육군이 중국대륙 내에 설치한 항공노선. 일본 육군 운영 대륙 항공 노선 [1937년 운영 개시 노선] (1) 후쿠오카 - 상하이 (1937.10.12 부터 / 주 3회) [1938년 운영 개시 노선] (2) 후쿠오카 - 베이징 (1938.1 부터 / 주 3회) (3) 후쿠오카 - 칭다오 (1938.1 부터 / 주 3회) (4) 난징 - 상하이 - 항저우 (1938.3~ 1938.8 / 주 3회) (5) 타이페이 - 광저우 (1938.11.15 부터) (6) 타이페이 - 상하이 (1938.11.15 부터) (7) 난징 - 우한(한커우) (1938.11.15부터) 일본 육군이 장거리 항공노선에서 주로 사용했던 DC-2. 일본군이 자체적으로 대륙에서의 항공노선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8월, 상하이 전투가 시작되면서였다. 상하이 전투가 격화되면서 일본은 1937년 10월부터 후쿠오카 - 상하이 노선을 DC-2 항공기를 통해 주 3회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 1월에는 후쿠오카 발 칭다오, 베이징 노선도 운영하면서 노선을 확장시켰다. 1938년 3월에는 난징 - 상하이 - 항저우 를 운항하는 군 정기 항공노선을 설립한 데 이어, 11월에는 새로이 점령한 우한과 난징을 연결하는 노선, 일본령 대만과 중국대륙을 연결하는 노선도 개통하게 되며 일본군은 중국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항공노선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일본군은 이러한 항공노선의 운영을 위해 난징을 비롯한 중국대륙 내의 운항 도시에 주재원을 파견하고 난징과 상하이에는 사무소를 운영하는 등 일본군은 자신들이 설치한 항공 노선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중일전쟁 초기 형성한 항공노선은 1938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바로 '민간화' 이다. 일본군은 이러한 중일전쟁 초기에 자체적으로 형성한 항공 노선을 초기에는 군 장병과 군용 화물을 수송하는 군 전용 노선으로 사용했으나, 1938년 중반 부터는 이를 민간에게도 개방, 군에서 운영하는 항공노선을 일반 민간인들도 요금을 내고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군용 화물이 아닌 민간 화물도 수송할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군용 노선으로 운용했던 항공노선을 민간에게도 개방했을까? 이는 바로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연관이 있다. 중일전쟁이 6개월이면 끝날 것이라던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우한, 충칭으로 이전하며 계속 항전을 계속해 중일전쟁이 장기전의 형세를 보이게 되면서 일본군은 지속하여 전쟁 관련 비용을 지출 해야 했고 이는 군 재정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일본은 재정 안정을 위해서라도 군 재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군은 이러한 전쟁 비용을 자신들이 만들어둔 항공 노선을 통해 충당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후이퉁항공, 만주항공과 일본 항공사들을 비롯한 기존 항공사들이 일본군이 경영하고 있던 항공노선과 대부분 중복되는 노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수익은 제한적이었고 때문에 일본은 장기전이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 일본군이 이러한 독자적인 항공 노선 경영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중국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항공사로 기존에 설립하였던 후이퉁항공을 확장, 개편하여 새로운 항공사를 설립하여 그 항공사로 하여금 이러한 항공노선을 경영하게 하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새로운 항공사로 하여금 중국 대륙 방면의 항공 사업을 일원화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38년 12월 16일, 일본은 내각 회의를 통하여 중국대륙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항공사 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기존의 후이퉁항공은 이 새로이 출범하는 항공사에 통합시키기로 결정한다. 쇼와 13년 (1938년) 12월 16일 각의결정 (* 원 문서에서는 지나(支那) 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이를 '중국' 이라는 단어으로 변화시켰다.) (1) 방침 중국에서의 항공사업을 우리 실권 하에서 일원화된 경영을 도모하여 정치, 경제 및 국방상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도모하는 것과 동시에 동아 항공 정책의 실현에 이바지하기 위해 본격적 일지(日支) 합작의 항공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현재의 긴박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신속하게 중화항공 (가칭) 을 설립한다.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 (恵通航空股份有限公司) 는 본 사에 통합한다. (2) 요령 1. 명칭 : 중화항공주식회사 (中華航空株式會社) (가칭) 2. 사업 목적 ①.여객과 우편물 또는 그 밖의 화물의 항공기에 의한 운송 ②.항공기 임대사업 ③.그 밖에 항공기로 하는 일체의 사업 ④.항공사업의 발전에 이바지할 사업 ⑤.전 각호 (①~④를 의미)에 부대하는 사업 ⑥.전 각호에 (①~④를 의미) 게제하는 사업에 대한 투자 (3) 자본 1. 자본 총합 600만 엔 2. 자본 할당 (예정) ①. 중화민국 임시정부 180만 엔 ②. 중화민국 유신정부 200만 엔 ③. 몽강연합자치정부 20만 엔 ④.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 100만 엔 (현물출자) ⑤. 대일본항공주식회사* 100만 엔 (현물출자) [주1] 후이퉁항공의 출자 100만 엔은 본사 설립후 임시정부에 50만 엔, 대일본항공에 50만엔으로 명의변경하는 것으로 한다. [주2] 출자금은 최초에 절반인 300만엔을 제출, 이후 본사 설립 6개월 후 잔액을 제출하는 것으로 한다. [주3] 현재 만주항공이 후이퉁항공 내에서 운용하고 있는 자금과 기재에 대해서는 자금은 본 회사가 그대로 인수하고, 기재는 본 회사에 매각하는 것으로 한다. 본 회사는 [주1]에 따라 명의변경이 이루어지면 대일본항공의 자금을 통해 해당 자금과 기재에 대한 금액을 만주항공측에 제공한다. (4) 법인 및 본사 소재지 본 사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특수법인으로서 3 정부에 모두 설립등기를 제출한다. 다만 본사는 당분간 베이징에 둔다. (5) 임원 사장 1명, 부사장 1명, 이사(정수 결정x), 감사(정수 결정x) (6) 특전 1. 중국에서의 항공사업 (항공사업 및 항공기제조사업을 포함한다) 의 독점권 향유 (단, 이미 국민정부의 허가를 받은 항공 수송 사업에 대해서는 장래 정리과정을 거치기로 하고, 대일본항공 및 만주항공을 비롯한 일본 내 항공 수송 사업에 대해서는 차후 별도로 결정한다.) 2. 국유비행장 사용에 대한 독점 특권 3. 필수품에 대한 수출입세의 면세 및 조세를 비롯한 기타 일체의 공과 면제 4. 토지 수용 및 기타 관영사업에 특전 부여 5. 사업상 필요한 통신, 관제 및 방송의 전용 운용권 부여 6. 3정부 (임시,유신,몽강) 및 기타 주체로부터 경영상 필요로 하는 보조금의 교부 (7) 특수의무 본 사는 공익상 필요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한다. (8) 감독 본 사의 감독에 관해서는 차후 따로 결정한다. [비고] (1) 본 사는 신속하게 설립하기 위해 우선은 주식 공모의 방법을 실시하지 않고 본사 발기 설립에 의한 성립 이후 장래에 적당한 시기에 실시하여 일반 국민이 본 회사의 주주가 될 수 있게 한다. 이때 (일본) 군인 및 그 가족, 중국인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한다. (2) 본 사의 인원 채용에 대해서는 (일본) 군인 및 그 가족, 중국인들에 대해 사정이 허락하는 한 우대한다. (3) 중국에서 제3국의 항공 권익에 대해서는 본 회사는 제3국의 기존 운항 노선을 유지하게 하되, 현 상황에 대한 분석 작성에 노력하여 제3국과의 상의에 즈음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준비한다. [양해사항] (1) 동아에서의 항공 사업 (항공 사업과 항공기 제조산업을 포함한다.) 의 확실한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 중국 현지의 항공 사업은 일본 정부가 실질적으로 일원적 통제를 유지할 수 있게 조치한다. (2) ①. 관세 및 기타 공과 면제에 관해서는 정부 보조금과 관련하여 별도로 설정한다. ②. 본 사에 대한 민간 기관의 보조금은 원칙적으로 대일본항공주식회사를 통해 지출하도록 조치한다. ③. 본 사는 적당한 수의 중국인 임원을 둔다. ④. 본사는 인원 및 자재의 제공, 비행장의 사용에 대해 육해군에서 필요한 원조를 제공한다. ⑤.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의 인원은 원칙적으로 본 사에 인계, 흡수 시킨다. ⑥. (1) 방침 에서 서술한 항공사 설립은 신속하게 설립시키기 위해 이의 설립에 관해서는 자본의 구성, 인정 관계, 본사의 소재지등을 잠정적으로 설립될 본 사를 구속하지 않는 견지에서 실시한다. ⑦. 본 사의 설립시에는 그 설립의 취지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방국의 자본 및 기술을 참가시키는 것을 고려한다. (3) 본 요강의 실시에 있어서 자금,물자의 관계는 다음을 따른다. 1. 본 사업 수행에 필요한 물자는 가능한 한 이를 일본에서 조달한다. 2. 일본에서 이미 적출된 화물의 결제도 이를 일본에서 조달한다. 3. 외국 자본 (이는 중국 자본을 포함한다.) 의 매수는 최소한으로 하고, 현물 출자의 방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매수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는 계약 체결 전에 일본정부와 협의한다. 4. 기업비, 운송자금의 송금 및 설비용 기계류에 수출에 관해서는 차후 환율과 물자 수급관계에 따라 계획을 수정한다. *(大日本航空, 위에서 보았던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 내 항공사들이 합병과정을 통해 설립한 새로운 항공사) 각의 결정에서는,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의 명칭을 '중화항공(中華航空)' 으로 결정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 3개의 정부가 공동으로 참가하며 대일본항공과 후이퉁항공이 출자 (후이퉁항공은 통합까지) 하여 중화항공을 출범시키기로 결정한다. 후이퉁항공의 인원은 그대로 중화항공에 흡수되었고 새로이 설립될 중화항공으로 하여금 중국 대륙 내에서의 독점적인 항공사업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를 일본 정부 통제하에 두려 하였으며, 전쟁 중 점령지에서 활동한다는 특징 속에서 자신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대부분의 기자재를 일본에서 조달하게 하고 외국자본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등 일본은 이전 후이퉁항공 때와 마찬가지로, 외양적으로는 중일합작의 형태로 항공사를 설립하려 했으나, 속으로는 완전한 '일본 주도'의 항공회사로 설립하려 했다. 또한 '독점적인 항공사업권' 이라는 말과는 달리 일본은 중화항공이 기존에 운행중인 만주항공, 대일본항공의 노선과 중복되는 노선은 이들로 하여금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하면서 (차후 논의한다라고 서술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점적인 항공사업권이라는 모습도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중화항공의 설립과정. (후이퉁항공의 100만엔은 이후 대일본항공 / 임시정부 명의로 처리된다) 이러한 각의결정에 따라, 1938년 12월 17일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왕인타이(王蔭泰),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대표 장훙제(江洪傑),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대표 두윈위(杜運宇)는 새로운 항공사로 중화항공을 설립한다는 내용의 중일합판항공공사설립협정 (中日合辦航空公司成立之協定) 에 서명하였고, 이에 따라 중화항공은 12월 18일 정식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회장은 후이퉁항공의 초대 부사장이었던 코다마 츠네오 (兒玉常雄) 이 맡았다. 중화항공의 활동 '중화항공주식회사' 라고 적힌 팜플렛. 중화민국의 항공사 팜블렛에 히노마루가 그려진 비행기가 그려진 모습이 중화항공의 현실을 직감하게 해준다. 중화항공의 로고. 난징국민정부 출범이후 중화(中華) 라는 글자를 형상화한 로고를 도입했다. 1938년 12월 18일 정식으로 운항을 시작한 중화항공은 기존의 후이퉁항공이 보유하고 있던 노선, 일본 육군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노선을 대부분 그대로 인수하여 운항하게 된다. 그리고 사세가 확장된 만큼 부족한 인원, 자원등은 모두 일본과 만주국에서 충당하여 사용했다. 일본은 중화항공쪽에 자신들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와 자신들이 제작한 항공기를 임대 등 여러형식으로 제공하였다. 일본은 기존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록히드(Lockheed) 모델 14를 비롯하여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L2D (DC-3의 쇼와-나카지마 라이센스판) , MC-20 (Ki-21의 민수판) 등의 항공기를 중화항공에 제공했다. 중화항공 항공기 목록 ~ 앞의 숫자 : 사진 자료등으로 확인되는 기체수 * 기체번호를 통한 총 기수 추정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 자료를 통해 사용이 된 것은 확인되나, 정확한 기체수는 파악불가 카와사키 Ki-56 (일본) : 3기 나카지마 AT-2 (일본) : 6~16기* 미쓰비시 MC-20 (일본) : 30기 쇼와 / 나카지마 L2D (일본) : 3기 타치카와 KKY2 (일본) : 1~2기* 만주 MT-1 (만주) : ⊙ 타치카와 Ki-54 (일본) : ⊙ 비치크래프트(Beechcraft) (미국) C17E : 4기 + ⊙ 포커(Fokker) F.VII (네덜란드) : 1기 포커(Fokker) 슈퍼 유니버셜 (네덜란드) : 9기~14기* 드 하빌랜드 (de Havilland) DH.80A (영국) : 2기 록히드(Lockheed) 모델 14 (미국) : 9기 더글러스 (Douglas) DC-2 (미국) : 3기 + ⊙ 중화항공의 항공기는 'C' 로 시작하는 기호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개체의 번호가 붙었다. 항공기 전면에는 중화항공의 로고가 붙었고 날개와 후미에는 히노마루문양 (난징국민정부 성립 이전과 초기) 과 청천백일문양 (난징국민정부수립 후기) 가 붙었다. 중화항공의 항공기 세부 보유갯수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파악이 쉽지 않은데, 이는 중화항공의 항공기가 대부분 일본으로 부터 임대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화항공 내에서 운영되는 항공기는 시기에 따라 다시 일본에 징용되어 사용되는 모습을 취하면서 때에 따라 주인이 바뀌는 모습을 취했고 때문에 정확한 기체수의 파악은 쉽지않다.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일본 내에서 중화항공에 관해 서술한 서적, 신문등 자료들도 세부적인 기체 보유 정보까지는 서술하지 않는 대부분인 경우가 많아 명확한 정보를 파악하긴 힘들다. 1942년 10월 5일자 매일신보.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중화항공에 항공기들을 전달하였다는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진작 전달한 기체의 수, 종류는 '○' 으로만 표기하여 어떠한 기체가 몇대 전달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1941년 왕징웨이의 방일 당시 사용되었던 중화항공의 푸저우호 (福州號) . 본 기체는 C-5105라는 코드를 부여받았다. (전면에 중화항공의 로고도 확인할 수 있다.) 중화항공은 기존 후이퉁항공, 일본 육군이 구축했던 노선을 넘어 더 넓은 범위로 노선의 확장을 시도했다. 이는 화북지역에 운항 노선이 집중되어있던 후이퉁항공과 주요 대도시만 연결하며 노선간 연결성이 떨어졌던 일본 육군의 항공노선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었다. 중화항공은 1939년 2월 록히드(Lockheed) 모델 14 을 이용하여 상하이-베이징 노선, 베이징-다퉁 노선을 운영하고, 1939년 말에는 상하이에서 타이페이를 경유하여 광저우까지 가는 노선도 운항하는 등 (1939년에는 타이페이까지만 개통되었고, 광저우까지 노선이 개통된 것은 1940년이었다.) 점령지 내 주요 도시들로 노선을 확장해 나간다. 특히 이러한 확장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크게 활성화되었다. 난징국민정부시기 중화항공은 운항 노선을 대폭 늘려 상하이, 베이징, 톈진, 난징, 우한과 같은 기존 대도시 뿐만 아니라 카이펑, 하이저우, 정저우, 타이위안, 안칭 등 지방도시들로도 노선을 확대하였고 점령지 내의 대부분의 주요도시들에 항공편을 취역시키는데 성공하며 중화항공은 1943년에 이르러서는 29곳 (만주국, 일본령 포함) 의 비행장& 공항에 취역하며 총 노선길이 12,000km 이상을 경영하는 항공사로 성장한다. 「日本航空史 昭和前期編」에 따른 1941년 6월 기준 중화항공의 노선도. 난징국민정부 지역 일대 대부분의 주요도시들에 취항한 모습을 보인다. 중화항공 항공노선도 (1941.6) (1) 베이징 - 바오터우선 (주3회) / 3시간 소요 사용기체 : 포커 슈퍼유니버셜 → 미쓰비시 MC-20 베이징 - 장자커우- 다퉁 - 바오터우 (2) 베이징 - 다롄선 (매일 1회) / 2시간 소요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이후 MC-20, L2D 추가) 베이징 - 톈진 - 다롄 (3) 베이징 - 상하이선 (주 6회) / 7시간 30분 소요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록히드(Lockheed) 모델 14 (이후 미쓰비시 MC-20 추가) 베이징 - 지난 - 쉬저우 - 난징 - 상하이 (4) 상하이 - 광저우 선 (매일 1회)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록히드(Lockheed) 모델 14, L2D 상하이 - 타이페이 - 산터우 - 광저우 - 하이커우* (5) 난징 - 우한 선 (매일 1회) / 3시간 소요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록히드(Lockheed) 모델 14 (이후 미쓰비시 MC-20 추가) 난징 - 안칭 - 주강 - 우한(한커우) (6) 다롄 - 상하이 선 사용기체 : 더글러스 DC-2 다롄 - 칭다오 - 상하이 (7) 칭다오 - 타이위안 선 사용기체 : 미쓰비시 MC-20 칭다오 - 지난 - 석가좡 - 타이위안 (8) 베이징 - 우한 선 사용기체 : 미쓰비시 MC-20 베이징 - 석가좡 - 정저우 - 우한(한커우) (9) 난징 - 상하이 선 사용기체 : 미쓰비시 MC-20 난징 - 쑤저우 - 상하이 (10) 다퉁 - 윈청 선 (주 3회) 다퉁 - 타이위안 - 린펑 - 윈청 (11) 베이징 - 쉬저우 선 (주 3회) 베이징 - 석가좡 - 장더 - 신샹 - 카이펑 - 구이더 - 쉬저우 (12) 칭다오 - 쉬저우 선 (주 3회) 칭다오 - 하이저우 - 쉬저우 (13) 장자커우 - 펑톈 선 (주 2회) 장자커우 - 창더 - 펑톈 (14) 난징 - 후쿠오카 선 [대일본항공 연락] 난징 - 상하이 - 후쿠오카 (15) 베이징 - 펑톈 선 [만주항공 연락] 베이징 - 펑톈 (16) 베이징 - 경성선 [대일본항공 연락] 베이징 - 톈진 - 다롄 - 경성 *는 1942년 추가 중화항공은 이러한 확장된 노선 운영을 위해 주요 도시마다 지부 혹은 영업소를 설치하여 여행객들이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게 했고 JTB (Japan Tourist Bureau) 를 비롯한 다른 장소에서도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중화항공은 탑승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승객들에게 항공우편과 소포는 물론, 기내식 제공 (베이징 - 바오터우 선, 베이징 - 상하이 선등) 까지 제공하면서 중화항공의 이런 항공 서비스는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특히 베이징-다롄 선, 난징- 우한 선의 경우 이용자가 많아 높은 가격을 자랑했음에도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탑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화항공은 독특한 서비스로 베이징 노선에 한하여 특별 관광비행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인당 5엔의 추가요금을 지불하면 착륙전에 10분간 베이징 일대를 순환비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어린이는 2엔) 나날히 성장하던 중화항공은 1939년 11월 5일, 중화항공 제1회 감독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대일본항공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인사들 모두가 참가하였고 해당 회의에서는 1)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 출범에 맞추어 본사를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이전 2) 노선 확대의 문제 (상하이-광저우 선등) 3) 상하이, 칭다오의 비행장에 무선시설 확충 4) 비행장 근처의 도로 포장 5) 상하이와 베이징에 항공기 수리공장 건설 / 일만지연결노선 설치 와 같은 사항이 논의, 결정되었으며 또한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항공수요에 맞추어 자본을 증자시켜 기존 600만 엔의 자본 규모에서 5천만엔 규모로 증자시키기로 결정하며 중화항공의 규모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1939년 11월의 증자 결과. 이후 중화항공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난징국민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이후로도 지속하여 항공 사업을 지속한다. 왕징웨이와 중화항공 중화항공의 MC-20 '푸저우호' 에 탑승하는 왕징웨이. (1941년 6월) 1938년 12월, 충칭을 탈출하여 일본과 신정권 수립을 논의하고 있던 왕징웨이에게도 중화항공은 중요한 존재였다. 물론 왕징웨이는 대외 방문에서 기차나 해운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 그의 대외 방문에서 비행기가 차지 하는 비중은 크진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 순간 중화항공은 그의 발이 되어주었다. 1940년 3월 18일 신정부 출범에 맞추어 왕징웨이는 중화항공의 특별편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 난징에 도착했으며 이는 왕징웨이에게 있어선 1937년 12월의 난징 함락 이후 처음으로 다시 난징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또한 1941년 6월, 정권 수립 이후의 첫 방일 과정에서도 왕징웨이는 중화항공의 특별편을 이용했다.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중화권에서는 이 DC-3이 바로 중화항공에서 운영했던 대붕(大鵬) 호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중화권에서는 왕징웨이가 1944년 11월 사망하였을 때, 나고야를 통해 난징으로 유해를 전달했던 L2D (DC-3) 이 중화항공이 운용했던 DC-3 2대중 한대인 대붕(大鵬) 호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이 진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 우선 왕징웨이의 유해를 L2D에 싣는 모습이 담긴 일본뉴스 233호, 236호에는 유해를 실은 기체 어디에도 중화항공의 로고, 중화항공의 기체분별코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233호에서는 유해를 실고 나고야 비행장을 떠나는 L2D의 모습도 보이는데, 중화항공 기체로 보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일본군 수송기의 모습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착한 유해를 다루는 236호에서는 근위병들이 왕징웨이의 유해를 들고 L2D 앞을 행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때도 중화항공에서 운용하던 L2D의 형상을 특정할 수 있는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 주장은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이전에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왕징웨이가 사용하던 전용기였던 해겸호를 사용했다는 서술도 있었으나, 영상에서 DC-3 (L2D) 가 명확하게 판명되었기에 이러한 주장은 반려되었다.) 중화항공에서 운영했던 DC-3. 중화항공의 사건사고 1939년 3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서술된 중화항공의 항공기 추락 사고. (해당 항공기는 톈진에서 다롄으로 향하던 록히드 모델 14 항공기로 뤼순 근처에 바다에 추락하였다. 승무원 3명, 승객 9명을 비롯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였고 승객 중 2명은 경성에서 온 조선인이었다.) 중화항공은 하지만 동시에 영업과정에서 여러번의 인명사고를 겪었다. 영업을 개시한지 얼마되지 않은 1939년 3월 24일, 중화항공의 록히드 모델 14 항공기는 톈진- 다롄 구간을 운항하던 도중 추락하여 12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1941년 6월 12일에는 또 한번 추락사고를 내어 승무원 2명, 승객 3명 탑승객 5명 모두가 사망하기도 했다. 1942년 2월 24일 상하이를 출발, 일본 후쿠오카로 향하던 중화항공의 구룡(九龍) 호는 도중 추락하여 탑승객 11명이 사망하였는데, 이중에는 도쿄에서 개최되는 동아인도인대회(東亞印度人大會) 에 참가하려는 인도인 대표 4명도 포함되어있었다. 신문기록에서 확인되는 중화항공 항공사고기록 1939.3.24 추락사고 기종 : 록히드 모델 14 탑승객 12명 전원 사망 (조선인 승객 2명 포함) 1941.1.15 추락사고 기종 : [불명] 탑승객 3명 전원 사망 1941.6.12 추락사고 기종 : 비치크래프트 C17 탑승객 5명 전원 사망 1941.9.10 추락사고 기종 : [불명, 비치크래프트 C17로 추측됨] 탑승객 5명 전원 사망 1941.12.1 추락사고 기종 : 더글러스 DC-3 탑승객 15명 사망 / 2명 생존 (독일인 승객 1명도 사망) 1942.2.24 추락사고 기종 : 미쓰비시 MC-20 탑승객 11명 전원 사망 (인도인 승객 4명 포함) 1944.1.18 추락사고 기종 : 미쓰비시 MC-20 탑승객 13명 사망 , 11명 생존 (생존자 11명은 충칭정부에 포로로 수용) 이렇듯 중화항공 시기에는 최소 7차례의 추락사고가 발생하는 등 여러차례 항공사고가 일어났다. (물론 이는 항공기 기술이 현대에 비해 발전되지 못했던 근대에는 이러한 항공기의 추락사고는 드문 것이 아니었다.) 일본과 난징국민정부측은 이러한 추락사고 발생이후 조사위원회를 설치, 기체 잔해의 발견에 나서서 실종자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위원회의 조사에도 탑승자의 유해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처음에 소개했던 조선인 승객이 탑승했던 추락사고의 경우에도 추락 기체 자체를 발견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탑승자의 유해는 발견하지 못했다. ) 물론 이러한 안타까운 결과는 현대에 비해 부족했던 수색 기술의 결과이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중화항공과 중화항공의 해체 태평양전쟁 시기 미국인을 상대로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잡지인 大東亜写真年報 의 1943년판에 보이는 중화항공이 서술된 조선여행 포스터. 중화항공의 발음을 일본식으로 표기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대일본항공과 중화항공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민간항공사들은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의 발발로 이들 항공사 노선 일부는 영향을 받아 운행이 중지되거나 노선이 축소, 폐쇄 되는 모습을 보였다. 중화항공 역시 영향을 받아 상하이-광저우(하이커우) 노선을 비롯한 일부 노선의 운영을 중지했다. 중화항공은 전쟁 발발에 따라 일본군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광저우의 중화항공 비행장 & 항공기들은 1941년 12월 홍콩 전투를 위해 징발되어 사용되었고 남지나방면군은 이러한 중화항공의 협조에 대해 공이 크다며 1942년 8월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는 태평양전쟁 시기 민간항공사로서는 첫 훈장이었으며 중화항공은 대일본항공과 함께 1944년 한번 더 훈장을 받는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의 전선은 이름바 남방 (南方) 이라는 태평양 일대로 크게 확대되었고, 일본에게 항공기는 이러한 광대한 전선에서의 전쟁 물자 수급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였다. 일본 육군은 남방항공수송부 (南方航空輸送部) 를 설치하여 타이완 섬 이남의 남방 지역에 항공기를 통해 보급하기 위한 부처를 설치하였고, 남방항공수송부에는 대일본항공, 중화항공, 만주항공의 인원들이 참가하게 되었고 이들 항공사의 항공기 일부도 징발되어 남방 보급을 위해 사용되게 된다. (해군 역시 대일본항공의 항공기를 징발하여 자신들의 보급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중화항공측은 이러한 전쟁의 진행속 자신들이 경영하고 있던 노선을 유지 - 강화하기 위해 1939년 11월 6백만 엔에서 5천만 엔으로 증액시켰던 자본액을 1942년 1억 엔까지 증액시키려 했으나, 전황의 악화로 이러한 계획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중화항공의 광고포스터. 치파오를 입은 승무원이 날개에 기대있고 밑에는 간략한 노선도가 표시되어있다. 중화항공은 1943년, 몽강 내의 서세네딘 (西蘇尼特), 시우주무친(西烏珠穆沁) 를 연결하는 신규 노선을 확장하고 전쟁의 개시로 중단되었던 상하이-광저우(하이커우) 노선을 복구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전황이 날로 악화되며 자원이 부족해지며 항공기의 유지 & 보수가 어려워지고 신규 항공기의 생산도 차질을 겪었고 때문에 중화항공은 소규모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은 운항을 중단하고 난징,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를 연결하는 노선 중심으로 노선 운영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944년부터 타이완을 비롯한 중국 남부가 연합국 공군의 작전 가능 범위에 포함되면서 중화항공은 다시 광저우 행 노선을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다.) 1943년 후반기부터 연합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일본의 중국대륙내 항공대들이 중국대륙에서의 제공권을 잃기 시작하며 하이난 (1944.3) 을 비롯한 중국 남부의 일본군 기지에도 폭격이 가해졌고, 8월에는 상하이 일대까지 폭격을 받기 시작하자 중화항공은 제대로 된 운항이 어려워졌다. 이에 중화항공은 대부분의 항공기를 지키기 위해 베이징의 시자오 (西郊, 현재는 군용으로만 사용) 비행장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고 항공기를 베이징으로 옮기기도 전인 1944년 8월 9일, 미군은 상하이를 공습했고 중화항공이 보유하고 있던 MC-20 10기가 순식간에 전소되는 등 중화항공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연합군의 공습은 더욱 광범위해지며 난징, 상하이, 심지어 베이징까지 난징국민정부의 대부분 도시들이 사정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수도인 난징 (1944.11), 우한 (1944.12) 등의 도시들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면서 중화항공은 이 시점에서는 사실상 개점휴업의 상태가 되어 대부분의 노선을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중화항공은 이렇게 전쟁 말기 사실상 제대로된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고, 이에 중화항공은 모든 영업을 중단하고 해체 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화항공은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를 총동원하여 중국 대륙내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후 비행장과 공항을 비롯한 시설과 잔존 항공기들, 직원들은 모두 국민혁명군 항공부대와 중앙항공 (中央航空運輸公司) 에 인수되었다. 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중앙항공은 중화항공이 운영하던 항공기를 지속하여 운영하였으나, 제 2차국공내전의 혼란속에서 이들 기체는 사실상 모두 소실되면서 현재는 중화항공에서 운영하였던 기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게 되었다. [출처] 『 変容する世界の航空界・その4 日本の航空100年(上) 』, 酒井正子, (2010) 『 七七事變之前的冀察政務委員會 』, 李君山, (2018) 『大東亞共榮圏の交通現勢』 (1942) 『 北支経済図説 昭和17年版 』 (1942) 『 旧南京国民政府の交通と通信事業 』 (1941) 『 大東亜写真年報 2603년年販 』 (1943) 각의결정 관련 자료 http://www.ndl.go.jp/horei_jp/kakugi/txt/txt00183.htm 중화항공 - 후이퉁항공 관련사진자료 http://minhangji.com/index.php/zhhk/ http://cwlam2000.epizy.com/new_page_2.htm?i=2#%E7%AB%8B%E5%B7%9D_%EF%BC%88%E7%9F%B3%E5%B7%9D%E5%B3%B6%EF%BC%89%E9%99%B8%E8%BB%8D%E5%B0%8F%E5%9E%8B%E8%BC%95%E6%82%A3%E8%80%85%E8%BC%B8%E9%80%81%E6%A9%9F(KKY)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6~1940년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2%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4%91%ED%99%94%ED%95%AD%EA%B3%B5%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2%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그 외 신문자료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그 외 사진자료 http://jbaaijbaci.xsrv.jp/planeChuka.html https://museumcollection.tokyo/works/6447101/
-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 / 1940.7~ 1946.4)
중일전쟁시기 국립중앙대학의 변천사. 중일전쟁이 계속되면서 당시 국립중앙정부를 비롯한 난징의 대학들은 모두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다른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경제, 산업, 모든 분야가 전쟁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고 교육계 또한 그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의 교육체제는 전쟁의 발발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아야 했고 이는 가장 고등교육이었던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대륙의 주요대학이었던 베이핑(징)의 칭화대, 베이징대만 하더라도 창사로 옮겨 난카이대학과 함께 창사연합대학 (長沙臨時大學)를 구성해야 했고, 이들은 1938년 쿤밍으로 또 한번 옮겨 국립서남연합대학 (國立西南聯合大學) 을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들의 피난은 오늘 이야기할 난징의 대학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발발 반년도 되지 않아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까지 위협을 받게되는 상황이 되자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의 대학들도 칭화대, 베이징대의 경우를 따라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충칭국민정부가 지배하는 서쪽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었다. 난징의 사립학교였던 진링대학 (金陵大學) 과 진링여자대학 (金陵女子大學)는 물론, 난징에 위치해 있었던 국민정부 최대 · 최고 대학이었던 국립중앙대학 (國立中央大學) 등 여러 난징의 대학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래 일본점령지에 있었던 대학들이 모두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서쪽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일본 점령지에는 대학 고등교육의 기회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일본과 중화민국 임시정부, 유신정부를 비롯한 협력정부들은 다시 대학을 만들어 민중들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다시 제공하는 것이 협력정부의 발전에 유리하다 판단, 해당 지역에 다시 다시 대학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다시 교원과 학생을 모집하고 일본군에 의해 접수되었던 옛 대학들의 건물들을 다시 활용하여 대학을 다시 열었다. 이들은 '복교 (復校)' 라는 명칭을 내걸며 새로이 대학이 세워지는 것이 아닌, 충칭을 비롯한 장제스의 국민정부 지역으로 옮겨졌던 대학들이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음을 주장했다. 대학의 명칭도 '베이징대' 와 '상하이대' 와 같이 충칭국민정부 지역으로 옮겨 엄연히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던 대학들의 명칭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물론 이런 '복교' 된 대학들을 보고 충칭국민정부와 원 대학들은 당연히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역 주민들도 이렇게 '복교' 를 거쳐 다시 문을 열게 된 대학들을 진짜 '복교'로 인정하지 않고 이를 괴뢰 대학, 가짜 대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복교' 된 대학들은 전쟁중이라는 상황과 점령지라는 한계 속 고등교육을 받을수 없었던 어떤 이들에게는 고등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 셈이기도 했다. 국립중앙대학의 '복교' 자오정핑 (趙正平, 1878~1945) . 그는 중화민국 건국 이후 교육계에 몸을 담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교육부 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된 이후에도 그대로 교육부 부장을 하게 된다. 그가 계속하여 교육부 부장을 할 수 있었 던것은 그가 교육계에 오래 몸을 담았다는 경험도 있지만, 여러 세력의 집합체였던 난징국민정부에서 모든 이들이 반대하지 않는 이름바 '무당무파 (無黨無派)' 였기 때문이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후, 구 유신정부의 교육부 부장이자 난징국민정부의 교육부 부장을 맡게 되었던 자오정핑은 왕징웨이에게 정통 국민정부를 표방하는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만큼, 국민정부의 최고대학이었던 국립중앙대학 또한 부활시키는 것을 건의했다. 자오정핑의 제안에 왕징웨이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에 1940년 4월 16일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에서 자오정핑의 국립중앙대학 복교계획은 정식으로 논의되게 된다. 본 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國民政府行政委員 第3次會義 (1940.4.16) 1. 웨이하이의 예속 문제 [汪, 화북정무위원회] 2. 동아운동대회참가주비위원회 (기원2600년봉축동아경기대회 참가를 위한것) 을 조직하고 이를 위한 경비 7만 위안을 사용하는 것 [교육부] 3. 전 유신정부의 강수순대사령부(江水巡隊司令部), 동녕정수순학교 (同綏靜水巡學校) 의 개편문제 [해군부] 4.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國立中央大學復興籌備委員會) 조직과 예산안 마련 [교육부] 5. 각 성의 사법기관 소송비용 관련 문제 [사법부] 회의에서는 자오정핑의 국립중앙대학 복교계획을 승인하고,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위한 준비위원회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國立中央大學復興籌備委員會) 를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이를 위한 예산안도 마련하기로 결정한다.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내용을 다루는 1940년 4월 17일자 중화일보 (中華日報) . 행정원회의로부터 4일이 지난 1940년 4월 20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를 공식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국립중앙대학의 복교계획을 처음 구상했던 교육부 부장인 자오정핑 을, 부위원장으로 교육부 차장이었던 판중윈 (樊仲雲, 1901-1990, 이후 판중윈은 국립중앙대학의 교장이된다) 와 다이잉푸 (戴英夫, 1897~1969)를 선출하고 첸웨이충 (錢慰忠)을 비서장으로 하고, 루이쥔(陸翊君), 우시티(吳煕悌), 카이푸추(蔡復初) 3명의 전임위원 , 7명의 겸임위원 , 대학교육위원회위원 탕요우량 (唐有樑) 을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에 포함시켰다. 난징의 국립중앙도서관 사진. 본래 이 국립중앙도서관은 1937년 확장계획을 세웠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충칭으로 이전하게 된다.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충칭으로 떠나고 비어버린 난징의 국립중앙도서관 터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 5월 8일, 처음으로 열린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회의에서는 국립중앙대학에 문과대학, 법학대학, 상과대학, 교육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약학대학 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에서 일할 교원을 전국 각지 (물론 여기서 전국 각지는 사실상 汪정권의 지배지역을 의미했다.) 에서 모집하는 한편, 5월 13일에는 초생위원회 (招生委員會) 를 구성, 난징 국부로 282호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베이핑,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우한, 광저우 7개의 주요 도시에서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할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에는 난징국민정부가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위해 임시비 40만 위안, 경상비 68만 위안 총 108만 위안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5월 29일에는 학교에 필요한 물품구매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5일에는 일본으로 부터 건물을 환원받아 농과대학 건물의 부지를 확보했다. 또한 6월 12일에는 일본 문부성이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대학은 점령지의 , 협력정부의 대학이라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입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였다. 우선 등록하는 이들에게 큰 혜택을 부여하였다. 4(5)년제 과정에 지원하는 학생의 경우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하였고, 2년제 과정의 경우에도 학생들의 식비, 실험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성적장학금제도를 많은 학생들이 편의를 볼 수 있도록 바꾸었으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별도의 장학금을 또 따로 지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근로장학생 제도도 만들어 50명 (개교 당시 기준 약 총 학생수의 7%)의 학생이 학교에서 규정한 시간동안 근로활동을 하면 월 10위안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다. 때문에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은 고등교육은 받고 싶으나 가정의 소득은 적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이 지원을 많이 하게 되었다. 6월 26일에는 난징의 국립정치대학 (國立政治大學) 부지를 새롭게 세워질 국립중앙대학 부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옛 국립중앙대학 부지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첫 째로는 난징에서 대학의 규모가 가장 큰 국립중앙대학 부지를 사용하기에는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은 그 규모가 본래의 국립중앙대학에 비하면 작았으며 또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가 화평에 응하여 난징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기에 '복교' 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옛 국립중앙대학 부지가 아닌 국립정치대학 부지를 학교 부지로 선정하였다. 부지가 선정된만큼 대학 시설의 준비가 시작되었고 (시설의 정비에만 3만 위안 가량이 들었다고.) 7월 3일에는 초생위원회의 각 지역에서 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초생위원회 측은 대학 지원의 요건을 (1) 공립 또는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자 (2) 고등학교와 동등한 학교를 졸업한 자 (3) 중학교 졸업 성적이 특히 우수한 자 (입학정원의 10%) 로 하였고 초생위원회 측은 학생들의 지원 독려를 위해 본래 7월 15일까지였던 등록기간을 2일 연장하여 7월 17일까지 지원할 수 있게 했고 그 결과 17세부터 31세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입학을 지원하게 된다. 초생위원회 측은 입학 시험을 8월 1일~3일에 걸쳐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학생들을 배려하여 해당기간동안1위안이라는 돈만 내면 시험기간동안의 모든 식사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2일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으로 판중원을 선출하였고 부총장으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비서장이었던 첸웨이충을 부총장으로 선출하며 입학과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복교 준비과정을 마쳤으며 7월 24일에는 일종의 준비위원회였던 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를 끝내고 정식으로 국립중앙대학 운영을 시작한다. (물론 대학본부만 운영을 시작한 것으로, 아직 정식 개교는 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대학의 정문. 이 문은 1927년 국립정치대학의 전신이었던 중앙당무학교의 교문으로 건설되었다. 국립중앙대학 (原 국립정치대학) 정문의 2011년 모습. 국립정치대학이 대만으로 천도하며 옛 국립정치대학자리는 중국공산당 강소성 당학교가 2011년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강소성의 여러 기관들이 사용) 7월 17일까지 기간을 연장하며 학생들을 계속 모집해왔던 국립중앙대학이었고, 8월 1일~3일에는 입학시험과정도 이루어졌지만, 국립중앙대학측은 학생들의 추가 모집을 위해 베이징 등 일대에서는 8월에도 학생모집과정을 실시하였다. 8월 1일에는 학과장들의 임명이 있었으며, 9월 11일에는 대학 도서관을 위한 서적 1만 여권을 구매하였고, 9월 20일에는 공과대학 실험교재를 구매하는 등 국립중앙대학 측은 계속하여 수업 시작을 위한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5일에는 난징 일대의 기자들50여 명을 초청하여 국립중앙대학 운영이 준비되었음을 홍보하기도 하였다. 9월 26일에는 부총장이었던 첸웨이중이 중앙정치회의에 의해 안후이성 정부위원 겸 교육감으로 임명됨에 따라 사표를 제출하며 국립중앙대학은 정식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총장 자리가 궐석이 되게 되었다. 1940년 9월 30일, 국립중앙대학은 드디어 정식으로 수업을 개시하였다. 국립중앙대학의 출범 1년을 기념하는 책자인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수업 첫날인 9월 30일 기준으로 674명의 학생이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국립중앙대학 제1회 입학 당시 통계 (1940.9.30 기준) 학생 남학생 : 533명 (79%) 여학생 : 144명 (21%) 학생 출신지 중화민국 : 670명 일본 : 3명 일본령 조선 : 2명 학생 구성 (단과대학별) 문과대학 : 50명 법학-상과대학 : 137명 교육대학 : 36명 이공대학 : 95명 농과대학 : 12명 의과대학 : 48명 약학대학 : 4명 사범전수교육과정 : 33인 농업전수교육과정 : 28인 교양반 : 92명 실무반 : 139명 학생 구성 (거주) 기숙사생 : 479명 통학생 : 195명 교수 및 강사 남성 : 71명 (99.87%) 여성 : 1명 (0.13%) 1회 입학자의 통계를 보면, 남학생이 533명으로 약 8할 가량을 차지했고, 여학생도 144명으로 2할 가량을 차지했다. 입학생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일본인도 3명 있었고 놀랍게도 조선인도 1명 존재했다. 다만 교원의 경우에는, 남성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72명의 교수 & 강사 중 여성은 쓰촨 출신의 鄭福地라는 31세의 여성 1명 뿐이었으며 심지어 그녀는 정식 교수도 아닌 강사직을 맡았다. 또한 교원 중에는 도쿄를 비롯한 일본에서 온 교수도 3명이 있었다. 이렇게 국립중앙대학에 참여한 교원진들은 새로이 임용된 사람들이거나, 기존 난징 혹은 점령지에 있던 대학 교원들이 참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國立中央大學要覽』의 재학생 일람 부분에 적혀 있는 28세의 문과대학 2학년 이규해 (李圭海) 씨. 그의 출신지는 '조선' 으로 표기 되어있다. 국립중앙대학 살펴보기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인 真知力行 (참된 지식으로 힘쓰다) . 왕징웨이가 직접 썼다. (1) 국립중앙대학의 개설학과 국립중앙대학은 개교 당시 (1940) 다음과 같은 학과를 가지고 있었다. 특정과 들은 과 안에서도 전공이 나뉘기도 했다. 가장 공급이 부족한 교사, 공급의 확대가 필요한 농업부분은 단기 과정을 설치했다. 문과대학 (文學院) / 4년제 - 중국문학과 (中國文學係) - 외국어문학과 (外國語文學係) - 역사사회학과 (歷史社會學係) 법학-상과대학 (法商學院) / 4년제 - 법률과 (法律係) - 정경학과 (政經學係) ● 경제전공 ● 정치전공 - 상학과 (商學係) ● 회계전공 ● 은행학전공 교육대학 (敎育學院) / 4년제 - 교육학과 (敎育學係) - 심리학과 (心理學係) 이공대학 (理工學院) / 4년제 - 수학과 (數理係) ● 물리전공 ● 수학전공 - 화학과 (化學係) - 토목공정과 (土木工程係) 농과대학 (農學院) / 4년제 - 농학과 (農學係) - 생물학과 (生物學係) 의과대학 (醫學院) / 5년제 (5학년은 실습) (계열 분류 x) 약학대학 (藥學院) / 4년제 (계열 분류 x) 사범전수교육과정 (師範專修科謨程) / 2년제 ■ 문학/역사/지리 과정 (文史地組) ■ 교육행정과정 (敎育行政組) 농업전수교육과정 (農業專修科謨程) / 2년제 ■ 원예과정 (園藝組) ■ 목축과정 (畜牧組) (2) 국립중앙대학의 수업관련 규정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대학 교육과정에 관한 규정을 서술하면서 졸업을 위한 요건과 학생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을 지정하고 있다. 또한 단과대학에 대한 규정도 서술하고 있다. 단과대학에 대한 규정에서는, 해당 단과대학이 어떤 과를 개설하는지, 해당 단과대학의 졸업요건은 무엇인지, 해당 과 학생은 1학년부터 4(5) 학년까지 어떠한 수업이 진행되는지, 선택과목으로 해당과 학생이 어떤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지를 규정하고 있다. (선택과목의 경우 문과의 경우 폭이 넓으나 이과의 경우 폭이 좁은 편이었다.) 전 학생 해당사항 (1940) - 졸업을 위해서는 최소 144학점 이상을 이수할 것. (사범전수교육과정, 농업전수교육과정은 90학점 이상) (1학년을 제외하면 한 학기 21학점 최대) - 부전공시 해당 학과의 필수학점 ⅓ 이상을 이수할 것. - 졸업 논문 필수 (4학점 취급) - 각 과의 공통필수과목의 비율은 해당 단과대학 졸업학점의 ¼ 이하로 할 것. (과마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이 다르나 이 비율은 지켜야) - 제2외국어 (독일어 혹은 프랑스어) 성적은 2년 이상 수강 & 합격해야 학점 인정 (해당 수업을 듣는경우) - 성적의 경우, 과목의 시험을 90점을 넘기면 갑(甲), 80점을 넘기면 을(乙), 70점을 넘기면 병(丙), 60점을 넘기면 정 (丁), 60점 미만 불합격으로 처리, 학기 전체 성적은 수강 과목의 평균을 통해 측정 - 해당 학기의 수강과목의 ⅓ 이상을 불합격하면 유급, 유급생은 재시험을 거쳐야 하며 유급이 2회를 넘어가면 퇴학 조치. - 출석의 경우, 수업 6분의 1이상을 결석하면 해당 학기의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 (불합격처리) 전 학생 공통필수과목 - 기본국문 (基本國文) / 6학점 - 기본영어 (基本英文) / 6학점 - 기초일어 (基本日文) / 6학점 - 중국통사 (中國通史) / 4학점 - 사회과학(社會科學) 혹은 자연과학 (自然科學) 과목 / 6학점 (선택 과목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서 이수하면 되었다.) 공통필수과목은 아니나 반드시 이수해야하는 과목 (공통필수과목 학점에 포함되지 않음) - 체육 (體育) / 8학점 - 군사훈련 (軍事訓練) / 8학점 각 학과 졸업학점 문과대학 - 144학점 법학-상과대학 - 144학점 교육대학 - 144학점 이공대학 - 160학점 농과대학 - 195학점 의과대학 - 212학점 약학대학 - 156학점 규정에서 주목해 볼만한 부분은, 국립중앙대학의 공통필수과목에 기초 '일어' 가 존재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생긴 이후 교육부에서 추가된 내용으로, 고등교육을 하는 대학 뿐만 아니라 초등-중등 교육을 하는 소학교, 중학교에도 공통으로 적용된 부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 : ) 또한 체육과 군사훈련이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 군사훈련의 경우 당대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꺼려지는 과목이었다. 군사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언제나 전선에 끌려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원하지 않는 이러한 군사훈련 과목을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했다. 때문에 군사훈련 과목의 존재는 재학생이 국립중앙대학을 포기하거나 신입생들이 국립중앙대학의 입학을 꺼려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3) 국립중앙대학의 시간표 / 학사일정 『國立中央大學要覽』에 묘사된 국립중앙대학의 시간표. 표에서는 표기하지 않았지만 원 자료에는 해당 시간표에 맞추어 종을 치는 방법까지 규정되어 있었다. (물론 본 시간표는 기숙사생 기준으로, 통학생의 경우 8시전까지만 등교하면 되었고 저녁식사 전에 귀가할 수 있었다.) 시간표에서 주목할 부분은 국기게양 - 국기하강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서 생긴 변화로, 난징국민정부는 중화민국 유신정부 - 임시정부시절에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교육 현장에서의 국기게양식을 부활시켰고, 이 과정에서 국가를 제창하게 하는 과정도 다시 부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 : ) 또한 국기게양식 행사 시간에는 일종의 아침 조례가 함께 이루어져 인원 점검과 체조가 이루어졌다. 1941년부터는 난징국민정부에서 국민체조도해(國民體操圖解)가 보급된 만큼, 해당 체조에 기반한 체조가 이루어졌다. 하루동안의 시간표를 살펴보았다면 1년 동안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1월 1일~ 3일 : 새해 휴가 1월 25일 ~ 2월 4일 : 겨울 방학 2월 8일 : 정식 수업 시작 3월 12일 : 국부손문서세기념일 (휴일) 3월 21일 ~ 3월 27일 : 중간고사 3월 29일 : 혁명선열기념일 (휴일) 3월 30일 : 국민정부환도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 대체) 4월 1일 ~ 4월 7일 : 봄 방학 4월 17일 : 복교기념일 5월 5일 : 혁명정부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대체) 5월 10일 ~ 5월 15일 : 기말고사 6월 25일 ~ 9월 13일 : 여름방학 8월 1일 ~ 8월 3일 : 신입생 입학고시 9월 14일 : 정식 수업 시작 10월 10일 : 중화민국 국경 (휴일) 10월 27일 ~ 11월 1일 : 중간고사 11월 12일 : 국부탄신기념일 (휴일) 11월 30일~ 12월 5일 : 기말고사 12월 25일 : 운남기의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 대체) 국립중앙대학의 학사일정 (1941년) . 많은 기념일 행사에 참가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학사 일정의 경우, 난징국민정부에서 정한 국경일 / 기념일을 따르되, 모든 기념일을 쉬지 않고 특정 기념일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기념행사 참가를 통해 수업을 대체하게 한 부분이 눈에 띈다. (국립중앙대학은 학생규정에서 이러한 기념행사를 애초부터 의무화하였다.) 또한 복교기념일을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의 결과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던 4월 17일을 복교기념일로 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본래의 국립중앙대학은 1927년 5월 5일을 개교기념일로 두었으나, 난징국민정부 아래의 국립중앙대학에서는 이 날은 기념하지 않고 오직 복교기념일만을 기념하였다.) (왕징웨이 정권의 연간기념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4) 국립중앙대학의 등록금 및 비용 국립중앙대학은 앞에서 보았듯 학생 유치를 위해 학생들에게 학비 면제, 기숙사비 면제를 내세웠다. 하지만 강의비라는 이름을 통해 학생들에게 돈을 받았으며 또한 필수활동인 체육을 하는데도 돈을 내야했다. 또한 제복을 구매하는 비용과 식비, 교재 비용도 별도로 지출해야 했다. 국립중앙대학 학생교비표 (學生繳費表) 중화민국 30년 (1941) * 환불불가 ◎ 신입생때만 학비 : 면제 기숙사비 : 면제 (단, 특수생의 경우 20위안을 지불) 교재-실험비 : 문과대학 / 법학-상과대학 / 교육대학 : 15위안* 이공대학 / 농과대학 / 의과대학 / 약학대학 / 사범전수교육과정 / 농업전수교육과정 : 20위안* (단, 사범전수교육과정의 경우 국비로 10위안을 지원) 강의비 : 5위안* 체육비 : 2위안* 기타 비용 (잡비) : 2위안 제복비 : 남학생 - 100 위안 ◎ (하복 2벌, 동복 1벌세트) 여학생 - 40위안 ◎ (하복 2벌, 동복 2벌세트) 식비 : 65위안 (한학기, 3끼를 다먹을때) (한 달의 식비를 36위안으로 계산, 그중에서 23위안을 학교측에서 지원, 따라서 학생은 나머지 13위안만을 지불하면 되는 구조) 35위안 (한학기, 3끼중 절반만 먹을때) (한달의 식비를 18위안으로 계산, 그중 11위안을 학교측에서 지원, 따라서 학생은 나머지 7위안만을 지불하면 되는 구조) (단, 위와 같은 학교측의 지원은 기숙사생에게만 제공, 통학생, 특수생에게는 학교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며 이 경우 식비는 180위안 / 90위안) 표에서는 일회성이긴 하나 가장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제복비가 눈에 띈다. 그렇다면 당대 100위안의 제복 가격은 어느정도였을까. 국민정부의 기관지 『中報』 에서는 국립중앙대학이 설립되기 직전이었던 1940년 9월 28일의 당시 난징국민정부 지역의 물가가 쌀 한가마니가 50위안 가량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대략 쌀 두마니 정도의 가격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으로 치자면 약 34만원 정도의 금액이 되는 것으로 (2024), 하복 2벌과 동복 1벌을 제공하는 구성이니 만큼 금액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금액은 아니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용은 당시 난징 지엔캉로 (建康路,건강로) 에 있는 농상은행(農商銀行)을 통해 납부하게 했다. 1940년 개교 당시에는 구 법폐도 취급했으나, 1941년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된 이후로는 저비권만 취급하게 되었다. (저비권과 중앙저비은행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 ) (5) 국립중앙대학의 장학금제도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은 많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난 장학금 제도를 내세웠다. 성적 장학금의 경우도 기준을 엄격하지 않게 하여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그 외에도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등 많은 장학금 제도가 존재했다 . 국립중앙대학 장학금제도 (1940) (1) 성적장학금 갑종장학금 (甲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갑(甲)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을종장학금 (乙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을(乙)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병종장학금 (丙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병(丙)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2) 기타장학금 청한학생보조금 (淸寒學生補助金) 최근 2학기의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병(丙) 등급 이상, 대학조사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지원이 필요하다 인정한 자 등급에 따라 월 20위안 / 15위안 / 10위안을 지원 독서회 장학금 (讀書會奬學金) 학생들의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방학기간에 독서대회를 개최, 성적이 우수한 이에게 장학금을 지급 1위 : 50위안 / 2위 : 20위안 / 3위 : 10위안 / 4위 : 5위안 근로장학금 (工讀生級工腋生奬學金) 교내에서 근로활동을 하거나, 대학생활을 영위하며 노동활동을 하는 자 10위안 / 5위안을 지급 그렇다면 당시 이러한 장학금 혜택을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얼마나 누릴 수 있었을까?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이러한 장학금을 받은 이들의 통계까지 모두 서술해 두었다. 성적장학금을 받은 학생 (갑,을,병 모두포함) : 120명 청한학생보조금을 받은 학생 : 50명 근로장학금을 받은 학생 : 24명 독서회장학금을 받은학생 (모든 등급 포함) : 64명 장학금을 받은 학생 (단순합계, 이중지급제외) = 258명 (전체 학생의 약 39%) 이중으로 장학금을 수령한 이들을 제외하지 않은 단순 합계상으로는 전체 학상의 약 4할 가량이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6) 국립중앙대학의 기숙사 국립중앙대학의 남자기숙사 (위) , 여자기숙사 (아래) . 여성 학생들이 남성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던 만큼 기숙사의 크기도 더 작았다. 국립중앙대학의 경우,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이 모집과정에서 기숙사생의 기숙사비를 전액 부담하기로 한 만큼, 기숙사 학생들은 기숙사 비를 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국립중앙대학은 기숙사에서의 생활을 원칙으로 하여 통학의 경우를 특별 사례로 취급하였으며, 통학도 학부모가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때문에 통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이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의 기숙사의 경우, 남녀기숙사가 분리되어있었고 남녀간의 기숙사왕래는 당연히 금지되었다. 기숙사생은 대학이 임의로 정해주는 자리를 사용해야 했으며 (특정 사유가 없으면 변경할 수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짐 검사등 여러 절차가 이루어졌다. 국립중앙대학측에서는 기숙사생에게 이불 하나를 지급하였는데, 기숙사 규정에 따라 이 이불은 바르게 정리되어야 했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했다. (기숙사 규정 2조의 내용) 이 뿐만 아니라 위생과 관련된 규정이 엄격하여 기숙사 학생들은 규정된 시간에 목욕과 세면을 실시해야 했다. 기숙사생은 기숙사생임을 증명하는 기숙증(寄宿證) 을 제시해야만 기숙사 건물에 출입할 수 있었으며, 기숙사 건물에는 허락되지 않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외부인의 접견을 허락받는다 할지라도 접견실에서만 만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접견실에서의 면회또한 시간을 제한받았다. 또한 기숙사생은 휴가를 비롯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외박할 수 없었다. 기숙사생은 규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취침하고 정해진 시간에 기상해야 했으며 기숙사 내부의 물품 반입도 자유롭지 않아 기숙사에는 고가의 귀중품을 들고 갈 수 없었다. (만약 들고온 경우 공동 창고에 보관해야만 했고 이 또한 함부로 가져가거나 사용할 수 없었다.) 기숙사 규정에서는 특이한 항목들을 볼 수 있었는데, 자기전에 서로 담소를 나누지말것 (8조), 소등 후에 함부로 촛불을 켜지 말것 (9조), 기숙사 내 조리 활동을 하지 말것 (13조), 겨울 시기에 기숙사 내부에 난방장치를 가져오지 말것 (14조) 와 같은 조항이 있었다. 13조와 14조의 내용은 화재위험등 여러 사유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8조와 9조와 같은 내용도 규정으로 명시 해둔 것은 특이한 점이다. (6) 국립중앙대학의 시설 국립중앙대학은 초기에 국립정치대학의 시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만큼, 많은 시설들을 초기 부터 운영할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기숙사는 물론, 여러 시설이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이었던 眞知力行에서 글자를 따온 진지당 (眞知堂), 역행당 (力行堂) 두 건물에서 주요 수업이 치뤄졌다. 도서관 건물의 모습과 안의 서적들. 1941년 기준으로 도서관에는 3만권이 넘는 서적이 있었고 일어, 영어 서적을 비롯한 외국서적들도 많이 보유 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입구에는 큰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민국 30년 (1941) 기준 국립중앙대학 도서관 보유목록 총 서적 : 31,611권 (중국어 서적 26,225권, 일본어 서적 1,047권, 영어 서적 4,321권, 기타 언어서적 18권) 분류 : 철학 803권 / 종교 204권 / 사회과학 8,700권 / 정치학 881권 / 자연과학 1,771권 / 응용과학 1,952권 / 미술 101권 / 언어학 2,710권 / 역사 3,189권 / 소설 2,012권 도서관 규정인 圖書館學生借書規則에 따르면 학생은 한번에 2권씩 책을 대출할 수 있으며, 기간은 14일로 하였다. (만약 대기자가 없다면 1회에 한하여 연장대출할 수 있었다. 또한 책을 분실시 책값의 8배를 배상해야한다는 내용과 도서관에서 떠들면 안된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국립중앙대학에는 이공대학 & 농과대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특히 농과대학의 경우 잡곡등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실험 농장이 존재했으며 목축과정을 위해 소, 오리, 돼지등 가축들을 실험적으로 기르는 축사도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은 또한 별도의 의료시설을 갖추고 일본인 의사가 진료를 하게 하여 학생들의 건강을 책임지게 했다. 이공대학생들과 화학과 학생들이 실험을 하던 실험실. 토목공정과 학생들이 실습을 하던 공간. 농과대학 농업전수교육과정 목축과정 학생들이 실습하던 축사. 국립중앙대학 안에는 부설 학교도 존재했다. 1942년 발간된 『國立中央大學一覽』 에서는 국립중앙대학 내부에 부설소학교, 부설중학교가 존재했으며 (정확히는 초등부, 중등부로 분류하여 같은 건물에서 함께 교육했다. ) 이곳에서 사범교육과정과 교육대학 학생들이 실습과정을 겪고, 대학 직원들의 자녀를 맡길 수 있게 하였다. 국립중앙대학에서는 이들 학교에 대해 국립중앙대학 부속실험학교 (國立中央大學 附屬實驗學校) 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국립중앙대학 부속실험학교의 소학생들. 국립중앙대학의 발전과 성장 이런 많은 요소들을 담은 국립중앙대학은 1940년 9월 30일 정식으로 수입을 시작했고, 수업의 개시와 동시에 교장이었던 판중윈은 교육대학 및 경양대학의 학장을 겸하게 된다. 10월 10일, 오전 8시 국립중앙대학의 대예당 건물에서는 쌍십절 기념 행사가 치뤄졌고, 동시에 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중대주간 (中大週刊) 의 발행을 발표하였다. 또한 17일에는 대학 복교 이후 처음으로 외부인의 특별강의가 진행되었다. 강의자로 나선것은 당시 상공부 장관이었던 메이쓰핑 (梅思平) 이었다. 이외에도 일본 규슈제국대학의 이마나카 자모 (今中次麼) 교수를 초청, 중국 민족운동과 그 방책 (中國民族運動及其方策) 과 같은 강의를 하며 그외에도 선전부의 린바이셩, 만주국 만주건국대학의 중산 교수등 여러 여러 외부 강사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이렇게 특강을 진행한 이는 국립중앙대학의 복교 직전에 안후이성으로 발령나 국립중앙대학의 부총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던 첸웨이충도 있었다. (1940년 11월 18일) 국립중앙대학은 난징에 위치해있었던 만큼, 주요 기자재들은 모두 상하이에서 반입되었다. 상하이를 통해 일본, 미국, 독일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기자재들은 국립중앙대학으로 옮겨졌다. 특히 일본을 통해 의학 기자재들이 많이 구매되었다. 일본측에서는 국립중앙대학의 양성을 위해 많은 지원을 가했다. 위에서 보았던 의료 기자재들만 하더라도 일본측의 구매에 있어서 지원을 가했고 그외에도 여러 물자를 지원해왔다. 주중화민국 일본대사관도 국립중앙대학측에 자료를 지원하거나 학생들에게 일본 문화 & 자연과 관련된 영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도 서적의 기부가 이어졌다. 물론 이런 서적들의 기부는 일본어 사전과 같은 일본어 교육과 관련된 도서이거나, 농업등 기초 산업과 관련된 기술서적들이 주를 이뤘다. 11월 28일에는 교내에서 여자농구팀이 발족되었고 이후 그외에도 축구, 크로스컨트리 등 여러 대학내 스포츠팀들이 결성되었다. (1941년 말에는 교직원 체육회도 생긴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회 영화상영을 실시했고, 1941년 1월 1일 새해에는 대학측에서 음악회를 마련, 학생들에게 무도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41년 3월 12일에는 국부손문서세기념일을 기념하여 학교가 휴교했다. 하지만 기숙사 생들은 학교에 나무를 심는 등의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바로 다음날인 3월 13일에는 첫 대학 체육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체육대회의 개최를 위하여 왕징웨이는 직접 1,000위안의 금액을 기부하였다. 이날 체육대회에서는 축구, 농구, 테니스 등 7개 종목의 경기가 개최되었다. 1941년 3월 30일, 국립중앙대학은 난징국민정부의 환도 1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했다. 학생들은 모두 왕징웨이의 연설을 경청해야 했고 환도식전과 관련된 강연을 들어야 했다. 또한 같은날 진행된 잡지사 화문오사카마이니치 (華文大阪每日) 이 국민대회당에서 진행한 동아보위의 노래 (保衛東亞之歌) 후보곡들의 경연을 관람했다. 1941년 3월 30일 진행된 동아보위의 노래 (保衛東亞之歌) 경연. 왕징웨이도 본 경연을 직접 참관했다. (동아보위의 노래 응모전에서 최종 채택된 동아민족진행곡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1941년 6월 교감과 비서실장직을 폐지하고 교무, 훈육, 비서, 총무 등 4개 부서를 교장의 직속으로 두었고 1941년 7월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난징시 보건소 건물을 다시 재건, 국립중앙대학에 신생당 (新生堂)으로 편입시켜 대학 시설의 확충을 꾀하는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2년에는, 늘어난 재학생과 늘어난 학생수요에 맞추어 교수진의 수를 늘렸다. 1940년 복교당시 72명이었던 교수 & 강사진을 두배가 넘는 149명으로 늘렸고 이렇게 새롭게 합류한 교원진에는 일본인 15명 , 독일인 교수 1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당대 유명작가인 저우쭈워런 (周作人)이 국립중앙대학을 방문, '중국 문학상 2가지 사상 (中國文學上的兩種思想)' 이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학생들의 출신이 더욱 다양해졌다. 1940년 복교 당시 2명에 불과했던 조선인 학생은 7명으로 크게 증가했고, 일본, 대만, 만주국 등 학생들의 출신이 다양해졌다. 1942년 8월, 국립중앙대학은 늘어나는 학생 수요와 부족한 시설 수요를 대체하기 위해 기존의 국립정치대학 부지에서 시설을 이전, 난징의 진링대학 부지로 이전하게 된다. (기존의 국립정치대학 부지중 일부는 이공대학, 농과대학 등의 실험실 , 실습실로 유지) 아쉽게도 국립중앙대학이 진링대학 부지로 옮긴 이후에는 국립중앙대학에 대한 사진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국립정치대학 부지 시절 국립중앙대학에서 발행한 여러 자료에서 학내 시설 사진을 구할 수 있으나 진링대학 부지 시절에는 국립중앙대학서 발행한 자료의 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화문오사카마이니치 (華文大阪每日) 의 1942년 제8권 6기에 서술된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의 모습. 해당 건물은 앞에서 보았던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에서 비롯된 건물중 하나인 진지당(眞知堂)의 모습이다.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국립중앙대학복교제1기졸업기념간) 에 서술되어 있는 진링대학 부지로 옮긴 이후의 대학 대예당과 기숙사의 모습. 국립중앙대학의 한계 난징국민정부는 국립중앙대학이 국민정부의 최고 대학중 하나로 작동했던 만큼, 자신의 정권에 이 국립중앙대학을 다시 세워 충칭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대학을 대체할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난징국민정부가 '국민정부'를 내세웠지만 충칭국민정부보다 완전하지 못했던 것처럼, 난징에 새롭게 '복교' 한 국립중앙대학 역시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다.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여러면에 있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1944년의 기준으로,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3,592명의 재학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94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940명이라는 수치는 충칭 국립중앙대학의 1학년 수 (1,248명) 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으로 이전했다는 한계점 속에서도 충칭국민정부 지역의 최대 - 최고 대학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이 충칭을 따라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개설되어 있는 학과와 전공, 수업의 수도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보다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문과 뿐만 아니라 기술, 과학 분야에서도 능통했지만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서 다루는 기술과학 분야는 기초적인 부분에 그쳤고 다루는 부분도 기술과학의 발전보다는 경제성장 기여라는 목적이 더욱 강했다. 난징국민정부가 제대로된 국민정부로 인정받지 못해 지역의 주민들이 완전한 참여를 가하지 않았던 것처럼, 난징국민정부 지역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국립중앙대학에 완전한 참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군사훈련 과목의 존재, 일본어 수업을 필수로 하였던 난징 국립중앙대학의 모습들은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도, 대학에 있는 학생들도 국립중앙대학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요소로 작동했다. 때문에 매년 10~15%의 학생들이 난징국립중앙대학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내 구성원의 경우에도 잦은 교체가 있었다. 의과대학 학과장의 경우 대학이 운영되는 5년동안 10번이나 바뀌었고 교육대학의 경우에도 7명이나 교체되는 등 잦은 인사교체가 있었다. 또한 '국립중앙대학' 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진작 이전 국립중앙대학의 부지를 사용하지 않고 국립정치대학-진링대학의 옛부지를 사용하며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던 국립중앙대학은 "대학 이름도, 대학자리도 훔쳐 대학 행세를 하는 것뿐" 이라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1941년 12월 7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전쟁이 장기화, 점점 일본측에 불리해지기 시작하면서 일본 뿐만 아니라 난징국민정부를 비롯한 중국대륙 마찬가지로 자원난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자원난은 난징의 국립중앙대학도 피할 수 없게되었다. 1943년부터 기자재 등 여러부분에서 부족을 겪기 시작했고, 이는 수업의 질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동했다. 게다가 왕징웨이의 국립중앙대학은,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실패를 거뒀다. 이는 바로 자신들 난징국민정부을 지지해줄, 화평운동에 참가하고 화평운동을 이끌어나갈 지식인 청년들을 양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는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자신의 난징국민정부를 지지해주길 바랬고 대학교육을 통해 이러한 청년들을 양성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왕징웨이 정권의 한계와 진실을 잘 알고 있었던 학생들은 앞에서 보았듯 대학 및 교육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해왔고 (일본어 필수화, 군사훈련 필수화 등) 오히려 대학에서 이탈하여 충칭, 혹은 연안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화평반공건국의 청년들을 양성하겠다던 왕징웨이의 목표와 달리, 학생들은 오히려 충칭, 혹은 공산당에 더욱 가까워지고 것이다. 이들은 대학 도서관에 걸려있는 왕징웨이의 초상화에 잉크로 먹칠을 하거나, 난징국민정부에서 만든 화평운동 노래를 바꾸어 부르는 등 왕징웨이 정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인 '동아민족진행곡' .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이노래의 탄생을 직접 지켜본 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이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며 일본과 왕징웨이에 저항했다. 기록에 따르면, 국립중앙대학에서 동아민족진행곡이 울려퍼지자, 한 학생이 이 노래의 가사를 大地湧起 和平 的呼聲 대지에서 화평 의 소리가 들려오니 에서 大地湧起 抗日 的呼聲 대지에서 항일 의 소리가 들려오니 로 바꿔부르기 시작하며 이후의 노래가사들도 항일, 항전에 어울리는 가사로 바꾸기 시작하니 다른 학생들도 이에 동참하며 왕징웨이의 노래로 왕징웨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것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노래들을 더 알고싶다면 여기를 클릭 : ) 또한 학생들은 비밀리에 항일 조직을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왕징웨이가 그토록 싫어했던 공산당과 점점 밀접해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학생들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학교 내에는 비밀리에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공산당과 연관된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대학 학생들과 청년구국사 (青年救國社, 공과대학생들 중심) , 민사 (民社, 교육대학생, 문과대학생들 중심, 이조직은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단결구국사 (團結救國社) 등의 조직을 구성, 중국공산당측과 제휴하며 항일운동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국립중앙대학의 교칙에 따르면, 학생들이 대학측의 허락없이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금지조항에도 굴하지 않고 비밀리에 조직을 구성,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공산당과 제휴하여 충칭의 항전방송 내용을 비밀리에 전파하거나, 항전과 관련된 인쇄물을 발행, 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여러 행동을 게시했다. 난징국민정부와 국립중앙대학측도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단결구국사를 이끌던 주웨이치안 (朱為捐, 공과대학의 여학생) 를 검거, 퇴학조치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비밀항일조직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다. 민사의 경우에는 다른 방향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했는데,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은 허가된 학생조직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내에 존재하는 조직들은 대부분은 정치적 색채를 띄지 않는, 스포츠조직과 같은 조직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선전부 장관 린바이셩의 주도로 학교내에서 난징국민정부의 노선을 지지하는 학생상호회 (學生互助會), 건자운동실재회 (乾字運動實踐會) 등이 구성되었는데, 민사는 이들의 지도부를 장악하여, 합법조직이었던 이들 조직의 이름을 빌려 합법의 틀에서 운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이들 조직의 이름을 빌려 잡지를 발행하여 학생들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게 했으며, 조직의 이름을 빌린 독서회등을 개최, 진보적인 학자들의 책을 읽게 했다. 교내 직원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규제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이들은 "우리는 학교의 합법조직이다" , "우리가 다루는 이론은 교회에서 배운것이다" 와 같은 말로 매번 직원들의 규제움직임을 피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 & 강사를 비롯한 교원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국립중앙대학에 참가한 교원진중에는 소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국립중앙대학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난징국민정부가 성공할 수 없다 보고 중국공산당, 혹은 충칭의 국민정부와 연락하면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대학의 조선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도 존재했으며, 1943년 시점에서는 그 숫자가 7명에 달했다. 이들 조선인 유학생들은 송지영 (宋志泳, 당시에는 야마모토 시에이 山本志泳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을 중심으로 한족동맹 (韓族同盟)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충칭당국과 제휴하며 국립중앙대학 내 항일운동을 하는 중국학생, 충칭당국과의 연조로 항일운동을 하고자하는 조선인들을 임시정부지역으로 후송하거나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점령지 내의 애국청년들을 규합하는 행동을 하는등 항일 운동을 이어나간다. 송지영 (宋志泳, 1916~1989) 그는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문학과) 그리고 그는 대학의 다른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한족동맹이라는 비밀항일조직을 결성, 항일운동을 이어나간다. 판중윈 총장 퇴진운동 이렇게 학생들 사이에서 진보주의, 항일운동이 점차 퍼지고 있는 사이, 1943년 5월에는 이들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이었던 판중윈이 업자와 짜고 학생들의 식비를 횡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국립중앙대학의 학생이었던 왕스홍 (王士弘)은 전후 자신의 글에서 "1943년은 고된 해였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세 끼 식사에 의존하는데, 이 식사가 학교 총장과 급식업체의 착취를 거쳐 식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학생들은 거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에 학생들의 불만은 커졌고, 청년구국사가 주축이 되어 1943년 5월 31일 새벽2시 학교식당에,거의 1,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였고, 이들은 난징 신화로의 왕징웨이 공관으로 향했다. (왕스홍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부터 가난했던 지방 학생들의 불만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난징의 왕징웨이 공관, (現 중국대륙 난징시 구러우구 신화로 38, 당시주소로 난징특별시 제4구 신화로 34호 ) 이 건물은 왕징웨이의 처남이었던 추민이 (褚民誼)가 기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우리는 부패한 교장은 필요없다! (“我們不要貪污分子當校長!") 라 구호를 외치며 왕징웨이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요구사항으로 부패한 판중윈 총장의 퇴진과 부실해진 식사의 개선등을 내걸었다. 학생들은 본 과정에 '탄원'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얼핏 잘못 받아드려져 유혈사태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이들은 사전에 탄원서도 작성하였고, 시위 과정도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했다. 또한 혹시 모를 유혈사태가 생길것을 우려하여 일본 국적의 한 학생을 통해 일본군 헌병대와 대화하여 헌병대의 동향을 파악하게 하고, 기숙사 주임도 학생들에게 불상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측에 연락을 가하여 본 시위의 목적이 건전한 것에 있음을 주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위대가 일본군 헌병대와 소통하게 했던 일본 국적의 한 학생은 바로 조선인이었다. ) 잠을 자던 왕징웨이는 깜짝 놀아 이 학생시위대를 직접 맞이, 학생들과 교섭할 것을 약속했고 학생시위대는 교섭 요구가 이루어지자 질서있게 자진 해산했다. 국립중앙대학은 그날 오후 3일간의 임시휴강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임시 교무위원회를 구성, 6월 4일 난징국민정부측의 협상자로 나온 당시 교육부 부장이었던 리셩우 (李聖五) 와 린바이셩과 협상을 개시, 총장 판중윈을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할 것이며, 부실했던 식사도 개선하겠다는 합의를 이뤄내는데 성공한다. 합의가 이루어진 6월 4일 정오를 기점으로 수업은 다시 재개되었고, 다음날 임시 교무위원회등 학생들이 만든 임시기구가 모두 해체를 선언하며 학교는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난징국민정부는 판중윈을 해임하고, 잠시 리셩우가 임시로 총장을 겸하게 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가 여름이 다가오고 시험기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후에 당시 문과대학 학과장이었던 천주 (陳柱)를 총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방식은 난징국민정부측이 '해임' 하는 방식이 아닌, 판중윈 스스로가 '사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판중윈 이후 임시로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직을 맡은 리셩우 당시 교육부 부장. 1943년 6월 5일자 신중국보 (新中國報)의 국립중앙대학 총장 판중윈이 '사임' 한다는 기사.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왕징웨이측이 학생들의 반발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이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타협과정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왕징웨이는 국립중앙대학의 '교풍 (校風)'이 잘못되었다 비판했고,학생들의 새벽 시위 이후 난징국민정부는 바로 공무원들을 보내 학생들의 행동을 훈계하였고 모든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자신이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법을 준수하고, 영도자 (왕징웨이)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회개서' 에 서명해야 했다. 또한 난징국민정부와 국립중앙대학은 판중윈의 해임이후 바로 교내의 학생단체들에 대해 해산을 명했고, 교내에서 비밀단체를 조직한 이들과 본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를 처벌하려 하는등 오히려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때문에 국립중앙대학에 재학하며 한족동맹과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있었던 조선인 학생들은 걱정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국립중앙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입대를 포섭하기 위해 파견된 김병호 (金柄豪, 현지에서는 고중민 高仲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 와 연락하며 임시정부에 협력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병호는 송지영에게 1943년 6월 한국독립당 난징-상하이 일대의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송지영은 이를 승낙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조선인 학생은 결국 일본에 송지영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 일부가 항일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임정과도 연관되었다는 밀고를 해버렸고 그 결과 송지영과 김병호는 모두 일본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이렇게 조선인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일본에 밝혀지면서 국립중앙대학 내의 모든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에 검거,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과정에서 일본과 협력을 선택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학생운동과 난징국민정부의 임시동맹 - 청해운동 ( 淸毒運動) 이러한 학생운동 탄압의 분위기는 1944년 초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1944년부터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국립중앙운동의 학생운동이 난징국민정부와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바로 아편 이었다. 당시 난징국민정부에서는 아편의 재배 & 판매 & 사용이 자유로웠다. 왕징웨이는 정권 초기 정부 재정수입을 위해 아편의 유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후기에는 이에 통제해야 한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왕징웨이가 아편 통제로 돌아서게 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난징국민정부 권역내에서 아편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그 수익을 난징국민정부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만큼,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아편유통권을 일본에서 가져와 아편을 자신이 직접 통제함으로서 그 수익을 얻어 부족한 정부재정을 매꾸려 했다. 왕징웨이가 기존의 국민정부에서 실시되고 있던 아편통제정책 (1936) 을 난징국민정부에서 실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편수입을 극대화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하여 아편의 유통권을 장악, 아편의 수익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고, 때문에 왕징웨이는 생각을 바꾸어 오히려 아편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권이 아편의 유통권을 장악하기를 바랬다. 또한 민중들의 지배를 얻기 위해서도, '아편을 자유로이 허용하고 있는 정권' 이라는 이미지는 아편전쟁을 겪었던 중국 민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져올 수 없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이 아편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왕징웨이가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되었던 난징조약 체결 100주년을 기념해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를 개최하고 아편의 해악을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차원이었다.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당시 난징국민정부의 린바이셩은, 이러한 아편 통제권을 일본에서부터 가져올 방법을 생각해낸다. 이는 바로 민중들의 '아편 반대' 여론을 부추겨 일본으로 하여금 아편의 통제권을 난징국민정부로 이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편 반대' 여론을 어떻게 부추길 것인가? 바로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도 함께했다. 당대의 아편 유통 상황 구조를 보면, 아편전쟁의 발발에서 100년이 넘게 지나며 아편의 해악이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계적으로 아편을 반대하는 여론도 커지게 되면서, 아편은 세계적으로 규제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세계 각국이 정부차원에서 점점 규제를 하고 있었고, 중국도 장제스의 국민정부 시기에는 1935년의 6개년 아편 금지 계획등 여러차례 아편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쳤다. 유신정부시기에도 유신정부는 아편의 판매를 신규 사용자에게는 제한하고 기존에 아편 사용자로 등록된 사람들에게만 판매하는 등 제한 정책이 점차 펼쳐지며 아편의 사용자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였다. 학생들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편이 인민에게 주는 해악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일반 민중들보다는 아편과는 거리가 더 멀었으며, 오히려 아편을 강력하게 통제해야한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인민의 해악인 아편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학생들과 민중들 '아편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정권의 지지와 정통성을 세우고 일본으로부터 아편 유통권을 받기를 원하는' 난징국민정부 는 대립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린바이셩은 학생들을 '동원'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아편 반대집회를 개최하게끔 하려 했다. 당시 난징국민정부서 신국민운동을 통해 중국청소년단 (보이스카우트 개념) 등 청소년단체를 지도하고 있었던 린바이셩은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에서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밝히며, 대학생들도 본 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이 아편 반대시위는 '아편 반대' 여론을 확대하기 위한 왕징웨이측의 고의적으로 일으킨 관변 시위의 모습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신국민운동과 이를 통해 탄생한 중국청소년단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이에 청년구국사를 비롯한 지하 학생조직들은 난징국민정부가 자신들의 오랜 주장인 아편 반대를 주장하는 것을 알고, 이 기회를 오히려 아편을 몰아내고 아편이라는 존재로 일본과 묶여있는, 아편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그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왕징웨이 정권의 모순성을 동시에 비판할 기회로 삼아 린바이셩이 시위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를 하기도 전에 아편 반대시위를 자진하여 개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3년 12월 7일, 이들은 린바이셩의 주장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편 반대 구호를 외치며 거리의 아편 판매상들을 공격, 아편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모습에 아편이라면 질머리가 나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린바이셩을 비롯한 난징국민정부는 시위를 규탄하기는 커녕 오히려 시위의 진행을 내버려 두며 암묵적으로 이러한 학생들의 자진적인 시위행동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시위에는 국립중앙대학의 공과대학 2학년이었던 한 학생도 참가했는데, 그 학생의 이름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장쩌민 (江澤民) 이었다. 중국대륙 제5대 주석이었던 장쩌민은 1943년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였다. 장쩌민은 당시 입학한 학생중 최연소였으며 장쩌민은 여러 동아리 활동과 문예활동에 참가했다. 장쩌민은 중국대륙 성립후 1998년 자신이 쓴 글 '憶厲恩虞同志' 에서 이날의 시위에 참가한 경험을 서술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12월 8일에는 난징 내 여러 대학의 학생조직들이 연합을 구성,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난징 국민대회당에 모인 후 이 과정에서 난징 민중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국민대회당 앞에서 난징 시내의 아편상인들로 부터 압수한 아편을 모아 불태우고 동시에 아편 흡입에 사용되는 담뱃대등 도구들도 같이 불태웠다. 일본 헌병대가 이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난징국민정부가 이 시위를 옹호하고 있는 이상 일본은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학생들은 아편 반대시위에서 일본 헌병대가 시위를 방해 & 해산시키려 하면 린바이셩의 이름을 내세워 헌병대를 철수 시켰고, 학생이 일본에 의해 체포되어도 린바이셩의 이름을 내세워 석방을 유도했다. 학생들의 아편반대 시위대는 공개적으로 항일구호를 내세우기 보다는 '아편 반대' 라는 구호에 집중하여 "아편을 피우면 일본, 왕징웨이가 이득을 본다" 라는 메시지를 민중들에게 완곡하게 전달하는데 노력했다. 이후 청년구국사는 난징에서 수도청년청독총회 (首都學生清毒總會) 를 구성했고 아편 반대운동은 이후 난징뿐만 아니라 상하이, 광저우, 베이징등 난징국민정부 구역 일대로 확산되었다.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차오위청(曹玉成) 이라는 난징의 아편왕을 잡아 난징의 신자커우 거리의 손중산 동상앞에 묶어두고 아편의 해악성을 알리고 이러한 아편을 판매한 차오위청의 악행을 이야기하며 난징국민정부로 하여금 차오위청을 처형하라는 모습도 보였다. 汪主席是復興中國的最高領袖 (왕주석은 중국부흥의 최고지도자시다!) 라는 플랜카드가 걸린 난징 시내의 신자커우 (新街口)의 손중산 동상. 이 동상은 중국대륙의 성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난징국민정부가 의도하지 않았던 열기를 가졌던 아편 반대 운동은 1944년 3월 난징국민정부의 아편 통제권을 인정하고 아편 유통권을 넘기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양보는 일본이 이러한 아편반대시위가 난징국민정부의 반일 시위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이러한 중국대륙 내에서의 아편유통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들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일본에게는 이 아편유통권 말고도 수익을 얻을 수단이 많았던 만큼, 아편 유통권을 포기해도 큰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일본은 난징국민정부쪽으로 아편 유통권을 이양하면서 아편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몽강자치연합정부 (명목상으로는 난징국민정부의 몽강자치구) 를 위해서도 쓰여야함을 명시했다. 이렇게 관변 시위까지 조직하며 아편 유통권을 획득한 왕징웨이는 이후 장제스 국민정부시기의 아편 통제정책을 다시 제정하는 등 아편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결국에는 다시 아편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민중들의 비난은 '아편을 파는 일본' 에서 '아편을 파는 왕징웨이' 로 구호가 바뀌었을 뿐, 아편 문제는 난징국민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1944년 왕징웨이의 아편통제정책은 여기를 클릭 : ) 국립중앙대학의 결말 임시총장이었던 리셩우를 이어 2대 총장으로 정식으로 선출된 천주 (陳柱).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국립중앙대학이었지만, 국립중앙대학의 운영은 지속되었다. 1944년에는 231명의 첫 졸업자를 배출했으며 학생의 수도 940명까지 증가하게 된다. (아쉽게도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1943년을 거치며 모두 체포됨에 따라 조선인 졸업자는 1명도 없었다.) 국립중앙대학 1기 졸업자 통계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1944) 문과대학 : 28명 (중국문학과 12명 / 역사학과 8명 / 외국어문학과 8명) 법학-상과대학 : 81명 (정경학과 28명 / 법률과 26명 / 상학과 27명) 교육대학 : 30명 (상세 구분되어 있지 않음) 이공대학 : 35명 (토목공정과 28명 / 화학과 7명) 농과대학 : 31명 (농학과 13명 / 생물학과 18명) 농업전수교육과정 : 13명 사범전수교육과정 : 13명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고 자원이 부족해지며 대학운영은 더더욱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교육의 질 또한 함께 떨어지는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1944년 4월에는 취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천주 총장이 내려오고 천창주 (陳昌祖) 가 총장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립중앙대학은 총장의 경우에도 4년동안 4번이나 교체를 겪게 되었다. (임시였던 리셩우를 포함하여) 천주 (陳柱)를 이어 3대 총장이 된 천창주 (陳昌祖) . 그는 국립중앙대학의 마지막 총장이었다. 난징국민정부의 말기였던 1945년 여름, 국립중앙대학은 238명의 제2회 졸업자를 배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대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조선인 학생 정영호 (의과대학) 가 졸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를 낸지 얼마되지 않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난징국민정부도 역시 해체가 선언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충칭의 국민정부가 다시 난징국민정부 지역을 지배하고 난징국민정부 시기 설립된 대학들을 모두 장악하면서 국립중앙대학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난징국민정부의 해체이후도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잠시 존속했으나, 1945년 9월, 쑹즈원 (宋子文) 내각은 교육부 부장 주자화 (朱家華)를 통해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기존 난징국민정부 점령지에 존재했던 대학들에 대해 '가짜 (僞)' 라는 명칭을 붙이고 해체를 명령하면서 국립중앙대학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하여 난징국민정부에서 만든 대학에 남아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국민정부는 '윤함구전과이상학교학생 급졸업생견심판법 (淪陷區專科以上學校學生及畢業生甄審辦法)' 을 발표하여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기존 난징국민정부 시기 형성된 대학에 다니는 재학생과 이 학교들을 졸업한 학생들로 하여금 1945년 10월, 난징과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임시로 설치되는 임시대학보습반 (臨時大學補習班) 을 통해 별도의 교육을 추가로 받고, 시험을 통하여 학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점령지 내의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구 점령지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반대 시위를 펼쳤다. 이 때문에 국민정부는 정책을 바꾸어 이들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루게 한다는 계획을 바꾸어 기존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생긴 대학을 '임시대학' 으로 바꾸어 그대로 학생들을 수용하게 했다. 이는 기존의 , 충칭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이전한 본래의 대학들이 아직까지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재학생, 졸업생들의 소속문제를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해결하게 했다. 난징국민정부 시기 설립된 대학 (국민정부의 분류에 의하면 '가짜' 대학들) → 임시대학으로 변환 (예: 국립중앙대학[난징] → 난징임시대학 ) -> 학생들은 기존의 대학시설 (난징등의) 에서 계속 대학과정을 진행 중일전쟁으로 타 지역으로 이전한 대학들 (본래의 대학들) → 정부가 안정되기 전까지 이전한 위치를 유지 (충칭 등) → 학생들은 기존의 (충칭등의) 대학시설에서 계속 대학과정을 진행 정부가 안정되어 기존의 대학이 본래의 위치로 '복교'할시 → 임시대학은 해산, 임시대학 졸업자 & 기존 졸업자들은 본래 대학의 학위 수여처리 (예 : 난징국민정부시기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 학생이어도 임시대학시기 졸업요건을 충족했다면 본래 국립중앙대학의 졸업장을 수여 / 난징국민정부시기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을 졸업했다면 본래 국립중앙대학의 학위를 받은 것으로 인정) → 임시대학 재학생들은 학과, 환경들은 고려하여 임시대학 해산후 주변 대학으로 분산 (예 :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생은 국립중앙대학, 교통대학 등으로 분산) 국립중앙대학은 '난징임시대학 (南京臨時大學)' 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문과대학, 법학-상과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이공대학 1~2학년 등 대부분의 구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이 새로이 바뀐 난징임시대학에 남았으나, 이공대학 3~4학년을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교사들의 부족으로 교통대학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1946년 4월 국민정부는 임시대학 제도를 폐지했고, 위와 같이 졸업자에게는 본래 학교의 학위를 인정하게 했고 재학생들은 주변의 대학으로 분산되게 함으로서 국립중앙대학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끝이 나게 된다. 이름바 '복교' 로부터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진링대학과 국립정치대학, 국립중앙대학이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며 본래 자신들의 부지를 다시 되찾게 되었고, 국립중앙대학 해체당시 대부분의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진링대학은 본래의 국립중앙대학과의 합의를 통해 부지 밑 서적은 진링대학교에 그대로 귀속시키고, 기자재들은 국립중앙대학에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의 짧은 역사는 끝이 나게 되었으나, 국립중앙대학 출신들은 이후로도 학문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활동을 지속하면서 중화권을 빛내는 인재들로 성장하게 된다. [출처] (난징 국립중앙대학 자료) 國立中央大學祕書處,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 1944. 國立中央大學祕書處, 「國立中央大學覆校第二屆畢業紀念刊 」, 1945. 國立中央大學, 「國立中央大學要覽 」, 1945. 國立中央大學, 「國立中央大學一覽」, 1942. (충칭 국립중앙대학 자료) 國立中央大學學生自治會, 「國立中央大學概況」, 1944. (그외 자료) 박강, 2003, 『중일전쟁기(1937-45) 화중점령지에서의 일본 아편정책』, 중국사연구 143, pp 241-267. 大阪每日日報, 「華文大阪每日 1942年 第8券 6期」, 1942 동아일보 1940년 4월 16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A%B5%AD%EB%A6%BD%EC%A4%91%EC%95%99%EB%8C%80%ED%95%99%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중화일보 1940년 4월 17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0.04.17 신중국보 1940년 6월 5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3.06.05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 난징대학 : https://historymuseum.nju.edu.cn/jypx/ndxs/ndxs/zydxjqqs19021949/dwzlxqdnjzydx19401945/sfragyd/index.html 국립중앙대학 정문 사진 / 장쩌민 사진 : 중문판 위키피디아 난징중앙도서관 사진 : https://www.ncl.edu.tw/content_267.html 주화인 관련정보 : http://www.chinawriter.com.cn/2013/2013-07-12/167214.html 1945년 이후 정보 : https://web.archive.org/web/20140201232823/http://sec.ncu.edu.tw/ncudhis/index_chs.php?years=4
- 대민회 (大民會, 1938~1940)
이글을 읽기전, 신민회 ( 여기를 클릭 ) 와 신국민운동 ( 여기를 클릭 ) 그리고 동아연맹운동 ( 여기를 클릭 ) 이전에 작성했던 3개의 포스트를 먼저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두 글중 특히 신민회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면 본글을 읽는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미리 적어둡니다. 擁護汪精衛先生 (왕징웨이 선생을 옹호하자) 라고 적힌 선전 문구벽화. 선전문구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야기해보려는 것은 이 선전구호 위에 보이는 이슬람 문양과도 같은 이 문양에 대해서다 . 이 사진은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왕징웨이 정권' 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사진이자. 동시에 영어로 'Wang jingwei Regime (왕징웨이정권)' 이라고 검색했을때 이미지 부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구글에 검색해보자, 이미지코너에서 쉽게 이 사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옹호왕정위선생(擁護汪精衛先生)" 이라는 구호가 가지는 의미또한 대단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통해 이 사진을 접했을때 질문하게 되었던 것은, 과연 사다리 근처에 있는 문양은 무엇인가? 에 대한것이었다 .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초승달과 별 문양과 같은 문양 (물론 이러한 것이 완전하지는 않다는것, 달의 방향은 반대방향을 하고 있지만 실제 초승달과 별은 북반부에서는 반대방향이라는 것... 과 같은 정보는 일단은 무시하고) 과 너무나도 유사한 이 문양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양이 이슬람의 문양과 닮은것으로 보아 혹시 중국대륙 내에서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있었던 지역에서 이러한 親 왕징웨이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었던 것이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回族) 과 같은 이슬람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이러한 행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이 중국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왕징웨이정권과 일본의 점령지 중 회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이러한 행동을 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러한 이슬람문양과 비슷한 문양의 정체는 바로 1938년 설립된 대민회 (大民會) 라는 조직의 문양이었다. 대민회의 깃발 (재현, 글씨체와 색채도에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한다.) 대민회의 문양. (재현) 심지어 색도 튀르키예와 비슷한 붉은색을 사용하면서 더더욱 이슬람문화권의 문양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깃발의 모습을 보면 앞의 사진에서 보았던 벽화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의 벽화가 대민회측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39년 작성된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 에서는 이 문양의 의미도 설명해두어 그 으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문양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는 이슬람문화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日 (태양, 붉은 동그라미) : 하늘에 빛나는 붉은 태양을 상징, 동아를 이끄는 일본 을 상징 月 (달, 초승달) : 갈고리처럼 하늘에서 빛나는 존재로서 중화민국 유신정부 를 상징 星 (별) :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처럼 유신정부와 중국인민의 빛나는 단결 을 상징 청색 (깃발의 배경) : 천지의 광대함, 밤의 순환, 우주의 맑음을 상징하며, 중일 협력이 동아의 평화와 번영을 건설하고 평화와 번영의 땅을 영원히 수호할 수 있다는 것 을 상징 본래라면 이제 대민회라는 조직에 대해 설명해야겠으나, 조직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이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더 이어나가려고 한다. 문양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계속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혼란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대민회측에서 사용되는 문양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이를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민회에서 만든 부채, 오색기와 함께 대민회기가 그려져있다. (여기서는 문양이 반대방향으로 그려져있다.) 이와 같이 문양이 반대로 그려진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반대된 문양이 등장하게 된것인가? 처음 추측으로는 두가지버전이 혼용되었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에서 발간한 서적들을 탐색해본 결과, 이 두가지버전은 혼용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반대로 문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민회가 창설된 1938년 이래 1938년 12월 대민회출판부에서 출판한 《大民會的任務 (대민회의 임무)》 를 비롯한 대민회가 창립되었던 1938년의 잡지와 출판물에서는 지금의 튀르키예의 월성과 같은 방향의 깃발이 사용되었다. 즉, 위의 부채에 사용되었던, 현재 튀르키예를 비롯한 이슬람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우리에게 친숙한 방향의 로고가 초기의 로고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러한 경향은 1939년에 와서도 이어졌다. 대민회가 1939년 2월 출판한 《大民會宣言 (대민회선언)》과 대민회가 1939년 2월부터 자신들의 라디오강연을 정리한 《播音演講集》 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거꾸로 사용되게 되었다. 1939년 6월 30일 에 대민회에서 발행되었던《中日同文同種考(중일동문동종고)》 에서는 문양이 본래대로 사용되었던 반면,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칠칠동아민족해방2주년집, 1939.7)》 를 비롯한 1939년 7월 부터 발간되는 출판물에서 문양이 거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대민회가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39년 6월과 7월에 대민회에서 출판한 서적의 문양차이. 중일동문동종고의 "6월 30일" 이라는 발행날짜는 더더욱 7월부터 문양이 바뀌었음에 확신을 주는 자료로 적용한다. 따라서 이번글을 읽으면서 두 문양을 다루는 자료가 등장할때 문양의 방향을 기준으로 1939년 7월 전인지 후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이번글을 읽으면서 이점에 미리 파악하고 읽는다면 본글을 읽으면서 무수히 등장하는 문양을 보고 시점을 파악할수 있음은 물론 본글을 이해하는데 더더욱 도움이 생각되리라 생각해 이러한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1939년 7월 이라는 날짜를 본격적으로 이글을 시작하기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대민회의 문양변화.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좌우가 반전되었다. 그렇다면 대민회라는 조직은 어떤조직인가?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초기 빠른속도로 점령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전쟁시작으로 부터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는 등 일본은 전쟁초기 고무적인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광대한 중국대륙이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점령지를 다스리기에 중국의 막대한 인구와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게릴라들은 일본의 강압적인 군사지배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괴뢰정부를 성립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법을 구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중일전쟁으로 부터 1년이 다되어가던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본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유신정부(中華民國 維新政府) 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성격을 가장 간단하게 규정하자면, 일본이 유신정부보다 3개월정도 앞서 설립한 1937년 12월 베이징에 세웠던 중화민국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의 2호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여기 를 클릭)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화북을 지배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 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화중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중지나방면군 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두개의 괴뢰정부의 형성과정에서는 동시에 특별한 과정을 하나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신정부의 운영과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친일이면서도, 신정부를 지지할 수 있는 범대중성 조직 의 구성이었다. 일본과 그들의 협력정부는 점령지 내의 민중들로 하여금 이전의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아닌, 자신들의 새로운 단체에 지지를 가하면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베이징의 임시정부에서는 신민회 (新民會) 라는 조직이 구성되었다. 신민회는 해당 신정부에서의 "유일선전조직" 으로 활동하고 여러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일종의 국민당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일본과 임시정부의 통치를 더더욱 용이하게 하는데에 기여했다. 유신정부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것이 대민회 (大民會) 라고 할 수 있겠다. 임시정부에는 신민회가, 유신정부에는 대민회라는 비슷한 선전조직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민회에 대해서는 여기 를 클릭)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해에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선전조직 이다.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도 신민회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데, 신민회는 본래 구성과정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또한 신민회를 구성한다라는 계획이 이미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부터 일본에 의해 계획되었다. 대민회 또한 구성과정에서 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다는 점에서는 특징을 공유하지만, 형성과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대민회의 성립과정. 초창기부터 일본이 개입했던 신민회와는 조금 다른 과정을 보인다. 대민회의 뿌리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직후 상하이공동조계(상해에서 성립된 동아회(東亞會) 라는 조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아회가 형성된 시점은 중일전쟁 직후로, 상하이공동조계라는 국민정부와는 분리된 환경이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아회를 만든 인물들은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친일가문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도움속에서' 동아회를 만들 수 있었다. 전쟁 직후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이후 화평파라고 불리는 인물들도 이때까지는 완전한 친일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동아회의 경우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이런 완전한 친일성향을 보이고 있다는데서 그 구성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중국과 악관계를 맺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상해공동조계측에서는 동아회에 탄압과 제재를 가하면서 상하이전투가 진행중이었던 1937년 10월시점에서 동아회는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다. 상하이가 일본에게 함락된 후, 1938년 1월, 동아회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다시한번 조직이 구성된다. 이름도 흥아회(興亞會) 로 바꾸고, 일본의 중지나방면군 특무부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를 비롯한 더더욱 많은 인원이 흥아회에 참가하게 된다. 1938년 4월의 시점에서 흥아회는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쑹장(松江) 을 중심으로 4천명 가까운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신정부측에서 흥아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동아회와 이를 계승한 흥아회 모두 친일조직이었으며, 일부 일본인들이 이에 참여하고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유신정부의 입장에서는 두 조직 모두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사(私) 조직이었다. 따라서 유신정부는 이러한 조직속에서 항일분자가 활동하거나, 일본과의 협력보다 단순한 기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활동하는 것을 경계했다 . 이런 차원에서 유신정부는 직접 이러한 조직 구성에 개입하여, 흥아회가 가지고 있었던 단점을 보완해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려 했다. 이가 바로 대민회였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대민회를 "유신정부의 유일선전조직" 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동아회에서 대민회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이제 완전한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이 된 것이다. 동아회에서 흥아회로 오면서 점점 조직은 확대되고, 더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신민회와 대민회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각자의 정부의 유일선전조직으로 성장했지만, 성립과정에서는 차이가 일정부분 존재했다. 신민회의 경우 결성전부터 일본과 북지나방면군 측에서 완전한 성립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대민회의 경우 기존의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이 이루어졌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성립 → 신민회 성립 (10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 대민회 성립 (65일) 두 조직을 구성하는데에 걸린 시간이 차이가 나는데에도 이러한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하이에서 결성되었고, 7월 15일에는 난징으로 이동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공식적인 대민회의 활동 시작은 7월 15일로 규정되었는데 , 이는 대민회의 활동 1주년을 기념하는 발행물이었던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에서 6월 1일이 아닌, 난징에서 활동을 시작한 7월 15일을 1주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존재했었다. 앞에서 보았듯, 일본은, 특히 화북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북지나방면군에서는 신민회를 화북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 이전의 국민당과 공산당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이유로 신민회는 많은 분야에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신민회의 활동예산은 임시정부의 행정위원회 조직보다 많은 책정을 받을 수 있었고, 신민회의 활동은 완전히 임시정부의 국고에서 수급이 되었다. 신민회는 선전활동을 위한 도서의 출판은 물론, 잡지의 출판, 신문의 출판과, 이를 보급하기 위한 보급망의 운영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전활동을 위한 교육시설과, 청소년들의 선전을 위한 청소년조직의 구성까지 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교류에서도, 예를 들어 스포츠와 같은 교류에서도 신민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직업들의 분회와 군사훈련을 위한 훈련소까지 존재했던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화북에서 유일한 선전단체이자 동시에 일종의 유일정체단체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화북에서는, 국민당의 나라 가 신민회의 나라 가 되었다고 봐도 무관했다. 大民會是我們民眾自己的集團 (대민회는 우리민중 스스로의 조직) 이라는 대민회의 구호, 대민회가 출판한 도서에서 이러한 구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 의 경우 신민회와 다르게 화중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물론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선전단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자적인 출판체계를 갖추고 발행물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대민회출판 (大民會出版) 에서 발행한 잡지 대중국(大中國). 1938년부터 발행되어 대민회가 사라지는 1940년 말까지 발행된다. 일본과 조선이 빨간색, 만주가 분홍색으로 칠해져 중국대륙과 분리되어 있다. 또한 신민회가 청소년조직을 운영했던 것 처럼 대민회 또한 대민청년단 (大民靑年團) 과 같은 청소년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민회의 행동은 이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신민회보다 큰 제약을 받아왔다. 이의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과 유신정부가 대민회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신정부와 일본은 대민회가 신민회처럼 수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아닌, '선전' 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다. 신민회가 단순한 선전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활동에도 매진하며 일종의 정당역할까지 했다면, 대민회는 정부차원에서 이러한 정치활동, 즉 대민회가 일종의 정당으로 보이게하는데에 반대를 표했다. 화중에서는 국민당의 나라 가 대민회의 나라 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본래부터 신민회가 구성전부터 어떠한 목적을 위해 구성된 단체였음이 분명했다면,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부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민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하고 신민회의 구성을 집행했던 북지나방면군과 달리 대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지나방면군은 군 내에서도 대민회를 어떠한 조직으로 구성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이 존재하지 않았다. 흥아회라는 조직을 대민회라는 조직으로 개편하면서 정부의 관리체제 안에 두고싶었던 것은 맞으나,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고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민회의 이전조직이었던 흥민회는 물론 대민회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 또한 대민회를 만드는 과정이 신민회의 형성과정처럼 연구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며 "(대민회는) 사실 졸속주의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実は拙速主義の下に始めたもの。)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부족한 준비과정, 부족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사실상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었다. 대민회는 더더욱 문제점이 있었는데, 앞에서 나는 조선일보를 인용하면서 대민회가 "유신정부의 유일한 선전조직"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중지나방면군의 정치반과 선전반 은 대민회와 별도로 선전활동을 진행했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신문사들도 또한 별도의 선전활동을 유신정부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에서는 임시정부와 다르게 선전조직이 일원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대민회와 유신정부의 모습을보면서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의 丸山静雄 (마루야마 시즈오) 기자는 '화북에서 신민회가 만들어졌으니까 화중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번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앞에서 언급한 와키 미즈오 소좌를 비롯한 인원들이 신민회의 영향을 받아 대민회를 만든것으로 보인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민회 와 신민회 는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고 일정부분 유사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구성과정이나 그 역할과 권한과 영역에 있어 차이가 존재했기에 대민회와 신민회를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오히려 대민회는 신민회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민회가 신민회의 영향을 받았음을, 대민회가 신민회와 유사점을 보이는 부분에는 단체를 지탱하는 사상에도 나타난다. 신민회 는 신민주의(新民主義 ) 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신민주의에 대해서는 신민회를 다루는 포스트에서 더더욱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본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만 서술하려한다. 신민주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 가 가지고 있는 삼민주의(三民主義) 를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신민회의 영향으로, 대민회 또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이가 바로 민덕주의(民德主義) 다. 민덕주의가 만들어진 이유 또한 화중에서 이전 국민정부의 삼민주의를 대체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민회강령(大民會綱領) 이라는 것으로, 이는 다음과 같다. 대민회의 "초대" 강령. 대민회의 성립부터 1940년 초까지 사용되었다. 대민회강령 ( 大民會綱領) 1. 민덕주의를 진흥하고 실천하여 신중국 국민정신을 확립한다. 振興實踐「民德主義」確立新中國國民精神 2. 정부의 가르침을 보급하고, 민중들의 정서를 상달(고양) 시킨다. 政敎普施,民情上達 3. 생활을 혁신하고, 민력 (국민들의 경제력)을 강화한다. 革新生活,強化民力 4. 중일제휴로 동아의 자주번영을 도모한다. 中日提攜, 以圖東亞之自主興隆 강령에서는 신민회의 강령과 유사한점도,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하는데, 우선 "경제의 중요성" 을 언급한다는 것, "중국과 일본의 협력(중일제휴)" 를 강조하는 부분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신민회의 강령과는 아주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바로 초공멸당 (剿共滅黨, 공산당을 금지하고, 국민당을 멸한다) 라는 反 국민당적 구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속에서 대민회의 강령은 신민회보다 강압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일정부분의 온건한 구호가 등장한 것은 당시의 상황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되는데 대민회는 앞에서 보았듯 신민회보다 완전한 장악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신민회처럼 대범한 움직임을 하기에 어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민회보다 조직도 미약하고, (신민회의 경우 조직이 기본 만명 단위였지만, 대민회의 경우 1939년 2월 기준으로 전체 7천명도 안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영향력도 약한 대민회가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하지 않았던 화북도 아닌, 2차북벌이후 완전한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던 화중지역에서 신민회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기는 어려움이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온건한 이유는 뒤에서도 서술할 유신정부 자체의 특징이 존재했다. 1939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대민회의 연등. "유신정부만세 (維新政府萬歲)" 라고 적혀있고 , 측면에는 민국28년 3월 28일 (1939년 3월 28일) 이라고 적혀있다. 대민회와 신민회의 모습은 달랐지만,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선전조직으로, 대민회는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대민회 역시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8년 12월 18일,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것이다. 정부 통합과정에서 이렇게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이미 이전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두 정부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교' 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두 정부는 통합과정을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통합논의가 1938년 후반기부터 진행되었음을 생각하면, 유신정부는 정부수립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통합논의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존재가 임시적이라는 것을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합된다면 베이징의 임시정부에게 흡수되는 모양새를 취할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저자세' 가 있었기에 두 정부의 통합과정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설득하기 위해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화평운동을 진행해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면 "신중앙정권 (新中央政權)" 을 건설해줄 것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임시정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신중앙정권' 이 만들어져야 화평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일본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이야기했었다. 이렇게 정부 통합과정에서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완전한 신중앙정권' 구상 하지만 이에 대해 임시정부측과 유신정부측은 표면적으로는 찬성하고 필요성에 동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를 표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신정권에서 왕징웨이가 주도권을 장악하는것에 반대를 표했고, 이로 인해 왕징웨이는 '통합신중앙정권' 이라는 구상을 량홍즈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구상을 일본측에서 찬성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왕징웨이의 구상에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극강한 반대가 존재했었기에, 새롭게 세워지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은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갖추게 되는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은 명목상으로는 통합되지만 독자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제 우리는 위의 표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왕징웨이의 구상에 반대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유신정부는 결국에는 통합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이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는데, 첫째로, 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던 지리적 조건이 있었다.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의 옛수도 난징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난징은 수도인만큼 이전의 국민당과 그의 이데올로기 삼민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했던 장소중 하나였다. 이러한 난징의 환경때문에 유신정부는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히 작동하지 않았던 화북지역과 다르게 국민정부에 반대하는 모습은 똑같이 보이지만, 임시정부에서 보였던 것 만큼 급진적인 반대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또한 이 지역은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쿠테타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자본가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기에 반공주의의 영향력도 다른지역보다 크게 작용했다. 둘째로 , 첫째 사유의 영향으로,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 또한 임시정부와 큰 차이를 보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이 완전한 反장제스 反 국민당 성격을 띄는 친일 주의자가 많았다면,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전부터 쑨원과, 국민당과, 국민정부와 함께 한자들이 많았다. 유신정부에는 국민당과 국민정부 자체에 실망하고 반대하기 보다는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의 독재는 싫어" "국민당은 좋은데 공산당이랑 합작하는 건 아니야" 라는 이유로 유신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충칭의 장제스 국민정부는 "본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데 잘못 굴러가고 있는 것" 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를 해왔지만 거꾸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원들의 입장에서는 왕징웨이의 국민당은 받아드릴 수 있는 대안이었던 것이다. 셋 째로 , 유신정부의 구상과 왕징웨이가 구상하는 신정권의 구상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신정부는 정부를 설립하면서 '화평(和平)' , '반공(反共)' , '공화(共和)' 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왕징웨이의 화평(和平), 반공(反共), 건국(建國) 이라는 구호와 오히려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신정부는 장제스의 행하는 일이 독재라면서 비판하면서, 중화민국이 장제스 독재 이전의 훈정(訓政) 정치를 복원하고 민국 초기의 민주정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고 비슷한 정권으로 생각되었지만, 속에서는 신민회 와 대민회 가 차이가 보였던 것처럼 임시정부 와 유신정부 또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신정부는 화평이라는 목적도, 반공이라는 목적도 일치하고,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또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상극이었던 임시정부나 몽강보다는 원활한 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민회의 발행물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 "중일제휴 (中日提携) " 와 대민회라는 글자를 적어뒀다. (사실 귀여워서 넣음) 넷 째로, 일본은 화북지역에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했으나, 화중지역은 이러한 논의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화북의 특수성' 같은 이유를 들며 화북의 이권만은 지키려고 했으나, 일본의 입장에서도 화중지역정도는, 특히 국민정부로의 정통성을 중요시했던 왕징웨이에게 옛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밑에서 통합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실무자들은 왕징웨이와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통합작업을 진행하던 유신정부의 陳牽(천친, 진견, 유신정부에서 내정부장을 맡음) 과 伍澄宇(우청위, 우등우, 유신정부의 정강을 작성) 의 경우 신해혁명 전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웠으며, 유학과정에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참가하고, 중화민국 수립 이후에는 쑨원의 혁명활동을 도왔으나, 장제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공산당에는 반대하고, 화평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이었다. 과연 이들이 왕징웨이와 엄청난 차이를 가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오히려 왕징웨이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이들에게 왕징웨이와 그의 주장은 충분히 받아드려질 수 있는 주장이었다. 또한 협상과정에서 유신정권 출신의 신정부에서도 지분이 약속되면서 유신정부측 인사들에게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된것이다. 이는 동시에 유신정부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던 대민회에게도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임을 의미했다. 이는 왕징웨이와 임시정부가,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신민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공존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견제와 경쟁, 반대를 일삼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와의 통합협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이 반대와 반대로 일본의 설득으로 '독자성을 지키는' 방법까지 동원함으로서 겨우겨우 합의를 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9년 7월 에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합의가 완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을 량홍즈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량홍즈 또한 초반에는 극한 반대를 표했지만, 협의가 7월부터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후 9월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완전찬성으로 의견이 돌아서게 된다. (신민회 포스트 참조) 대민회 이야기로 돌아와서, 통합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대민회와 신민회 모두 이제 왕징웨이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에 맞추어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삼민주의와 국민당이 다시 돌아오게 된 상황에서 삼민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두 단체의 사상과, 국민당에 반대하는 모습을 더이상은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민회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의 출범에 불만을 표하고 있었지만, 대민회는 그렇지 않았다. 신민회가 왕징웨이와의 공존에 불만을 표하고 공존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반면, 대민회는 이렇게 신정부 합의를 끝냄과 동시에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신정부는 이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대민회가 문양의 방향을 바꾼것은 놀랍게도 유신정부와 대민회가 왕징웨이의 구상에 동의하고 합의를 끝낸 시점과 일치한다. (둘다 1939년 7월) 대민회가 1939년 11월 발행한 "손중산선생탄생기념(孫中山先生誕生紀念) 발행물. 대민회는 문양이 좌우반전된 1939년 7월 부터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발행물의 주제가 기존의 주장에서 벗어나 쑨원, 왕징웨이에 대한 옹호가 시작되었고 , (이는 신민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1939년 7월 10일에는 왕징웨이의 라디오 방송에 축전을 보내는 등, 이 시점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을 이미 띄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선생의) "국가와 민중을 위한 분투정신은 감복할 수 밖에 없다.... (중략) 왕선생의 대성질타로 화평과 항전중 어느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충분히 명백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할 지를 충분히 알고있다. 일치협력하여 화평의 실현에 매진해야한다. 이것이 국가를 구하는 길이고 우리를 구하는 길이다. " - 1939년 7월 9일 왕징웨이가 한 라디오 방송에 대한 대민회 성명. 1939년 7월 (통합정부합의)~ 1940년 3월(왕징웨이정권수립) 이라는 이 6개월의 과정을 다루는 신문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등) 들을 분석해보면, 대민회 의 경우 이시점부터 왕징웨이에 대한 긍정적인 모양새를 많이 취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민회 의 경우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1939년 7월 15일, 대민회의 성립 1주년을 맞이하는 행사에서 대민회측은 왕징웨이에게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출마를 종용했고 동시에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수립에 동의한다는 통전(通電) 을 전달하기도 했다 . 대민회 성립 1주년 기념행사, 좌우반전된 신민회의 문양을 또한번 볼 수 있다. 이렇듯 대민회는 1939년 7월 이라는 이시점부터,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협상이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이시점을 기준으로 성향이 친 왕징웨이 성향으로 변화해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함께 왕징웨이를 지지하고 이를 선전하는 단체로 변모하게 된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민회 문양의 좌우반전 은, 대민회의 성격또한 완전히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민회 문양이 좌우반전되기 전과 된 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신정부의 확실하지도 않은 선전단체 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의 왕징웨이 선전단체 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좌우반전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40년이 되어서는 대민회는 완전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를 선전하는 단체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우선 1940년 1월 30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신정부 출범에 맞추어 조직의 새로운 방침을 발표한다. 대민회의 신방침 (大民會的新方針) 1.쑨원의 삼민주의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충하여 왕 선생의 화평건국 정신에 의거하여 동아신질서의 건설의 매진한다. 2. 정당으로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까운 시기에 열리게될 중앙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3. 사업의 중심을 사회사업과 경제선전에 둔다. 신방침의 1항에서 볼 수 있듯이, 대민회는 이시점에서 이전의 민덕주의에서 벗어나 완전한 삼민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또한 왕징웨이에 대한 찬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대민회라는 단체가 이제는 완전한 왕징웨이를 위한 단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항에서는, 정당으로서의 입장을 취하지 않음을 선언하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충돌하지 않겠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민회가 깃발을 국민정부속에서도 오색기로 굳이 바꾸는 행위를 저지르고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라면서 국민당을 견제해왔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0년 3월, 왕징웨이의 정권이 출범하기 한달전에 대민회는 신정부옹호운동(新政府擁護運動) 을 진행한다. 3월 3일부터 5일까지 난징의 회화로(淮海路) 중앙대무대 (中央大舞臺, 현재 난징 친화이구 회화로, 총통부에서 2km 정도 거리가 있음) 에서 학생들 12,000명을 동원한 가두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서는 영화상영, 연극, 연등행렬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난징환도를 위한 준비에 동참하기도 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성립을 기념하는 난징거리의 행진행사에서 대민회의 모습. "화평문(和平門)" 이라는 모형을 들고 전진하고 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대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대민회의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1939년 2월 7천명에 약간 못미치던 대민회의 회원수는 1940년 8월 시점에는 거의 15만명에 이르게 되면서 1년 반사이 20배가 넘는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1939년 말만 하더라도 회원수가 2만명이 되지 못해 대민회측에서 아쉬워 한걸 생각하면 더더욱 큰 성과였다.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성립이후 왕징웨이의 국민당쪽의 인사들이 무더기로 대민회에 가입한 결과였다.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을 선전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의 정책중 하나였던 청향운동 (淸鄕運動) 도 선전했다. 대민회에서 만든 청향운동 프로파간다. 철책을 경계로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휘날리는 마을은 평화속에서 살아가지만 철책밖은 굶주림과 죽임만이 보일 뿐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민회가 발행하던 잡지 《 대중국 (大中國) 》에도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대중국 잡지는 본래 1938년 발행될 때부터 이름을 유지했는데,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면서 잡지 이름을 《 대민 (大民) 》으로 바꾸게 되었다. 잡지 《 신중국 (新中國) 》의 변화. 여기서도 문양의 좌우반전을 함께 볼 수 있다. 我們應在正統國民黨領袖 汪先生領導下, (우리는 정통 국민당의 영수 왕징웨이 선생의 영도아래) 協力向和平建國大道邁進。 (협력하여 화평건국의 길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적힌 대민회의 프로파간다문구. 이렇게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 정권의 초기 대민회는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라는 칭호속에서 이룬 큰 성장속에서 일종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정기는 길지 않았다. 대민회 는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으로 부터 1년도 가지 못하고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흡수되며 사라지게 된다. 대민회는 1940년 10월 10일, 난징 환도이후 처음맞이하는 쌍십절 행사에도 대민회는 참가하는 등 여러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런 행보속에서도 대민회는 흡수과정을 피할수 없었다. 이렇게 거대해진 선전조직을 두지않고 흡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동아연맹운동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1940년부터 중국에서 확산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내에서도 (왕징웨이정권내에서도) 확산되었고, 여기에 왕징웨이 본인도 관심을 표하고 1940년 말부터는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 정권의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동아연맹운동을 왕징웨이 정권이 직접 실시하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이를 선전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서는 독립된 조직이아닌, 왕징웨이의 국민당으로 대민회를 비롯한 다른 선전, 정치조직이 통합되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이유로, 1940년 12월 17일, 대민회 를 비롯해 중국공화당 (中國共和黨), 중국흥건연맹 (中國興建聯盟) 라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내의 非 국민당 조직들이 국민당으로 통합하면서 "발전적 해소"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대민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대민회를 흡수하는 과정 (1940.12.17) 신민회라는 조직의 성격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듯, 대민회라는 조직의 성격 또한 단순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민회와 대민회 두조직은 비슷한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조직 모두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한 괴뢰정부의 괴뢰선전조직이었고,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가진 삼민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이를 선전하고, 왕징웨이가 새로운 정권을 수립함에 따라 두 조직 모두 변화를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두조직은 다른 모습도 보인다. 신민회 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유일하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여, 넓은 범위에서 행동하며 "일본"의 완전한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작동하게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대민회 는 성립과정도 치밀하지 못했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강력한 힘도 가질수 없었고, 행동의 범위도 제한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과 유신정부를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후에는 왕징웨이를 위해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두조직이 비슷한듯 다르게 작동한 이유로는, 화북과 화중이라는 지리적 환경의 차이 ,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라는 인물적, 사상적 차이, 왕징웨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의 차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의 차이 때문에,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시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유신정부 와 그의 선전단체 대민회 는 왕징웨이를 수용할 수 있었다 . 그렇기에 그들은 왕징웨이와 대립할 필요도, 왕징웨이를 반대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화북정무위원회) 와 신민회 는 그러지 못했다 . 그렇기에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왕징웨이와 대립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겉으로는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이번 4부작의 목표는 이표를 왕징웨이 정권을 알지못하는 이에게 이해시키는데에 목표가 있었다. (청향운동은 넣지않았다. 청향운동은 오히려 하나의 글로 정리할 수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 요소가 적기에) 어쩌다 보니 신국민운동-신민회-동아연맹운동-대민회 로 이어지는 긴글 4부가 되게 되었다. 본래 신국민운동에 관한 글을 쓸때는 이러한 4부작이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4부작을 마무리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 4부작의 요소들은 서로 얽혀있어 하나의 글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 속에는 엄청난 속사정들이 존재하며, 이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설명을 잘했다고 한들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민회, 대민회를 이야기하면서 신국민운동, 화북정무위원회, 임시정부, 유신정부, 동아연맹운동등 여러가지를 함께 서술했던 , 해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긴 글이지만 4개의 요소를 모두 설명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모습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장대한 과정을 거쳐서 서술했지만, 이 서술또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민회 에 관련된 연구는 앞에서 글을쓴 신민회 , 동아연맹운동 , 신국민운동 에 비해 너무나 적다. 국내에서도, 일본에서도 신민회에 대한 연구는 꽤 진행되었으나 대민회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앞으로 이에관한 자료가 더욱 만들어지고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나긴 4부작을 끝내고자 한다. [출처] 土屋光芳, 「中華民国維新政府はなぜ平穏に在精衛政権に吸収されたか?」, 『政経論叢第 83巻第 3・4号』, 2015 堀井弘 一郎, 「大民会の成立と中華民国維新政府」, 『現代中国 第71号』, 1997 堀井弘 一郎, 「汪精衛政権下, 総動員体制の構築と民衆」,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2009 関智英, 「袁殊と興亜建国運動: 汪精衛政権成立前後の対日和平陣営の動き」, 『東洋学報 第 94巻 』, 2012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大民會總本部, 『大民會初週紀念特刊』 大民會總本部, 『大民会宣言』 大民會總本部,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大民會宣傳部編, 『中日同文同種考』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B%8C%80%EB%AF%BC%ED%9A%8C%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조선신문 - 매일신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조선신문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125204931&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삼천리 제11권 제1호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a_016_0700_015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8C%80%EB%AF%BC%ED%9A%8C&searchKeywordConjunction=AND 대중국 1940년 1월-5월호 표지 : https://cotca.org/items/damin-cover-image-may-1940/ 손중산선생탄생기념 표지 : http://read.nlc.cn/advanceSearch/allRes?searchWord=%E5%A4%A7%E6%B0%91%E6%9C%83#hahaha 벽화사진 : 영문판 위키피디아 "Wang jingwei Regime" 문서 1938년판 신중국 표지, 프로파간다 문구, 청향운동 ,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 , 대민회 부채자료 : 중국 바이두 웹참고
- 왕징웨이의 죽음 (1944.11.10)
본 글에서는 왕징웨이의 '죽음' 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왕징웨이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이유, 건강이 악화되었던 1943년 말부터 사망에 이르게 되는 1943년 11월까지의 과정, 왕징웨이의 죽음 직후 있었던 일과 이에 따른 여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935년의 저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왕징웨이. 사진은 천궈치 (陳國琦) 가 촬영했다. (이후 천궈치는 왕징웨이정권에 참가하여 왕징웨이정권의 국영보도국인 중앙전신사의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1942년에는 난징국민정부 행정원 비서직을 맡게 된다. ) 1935년 (민국 24년) 11월 1일, 이날은 중국국민당 제 4기 6중전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본래 6중전회는 9월 중으로 개최되어야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11월 1일이 되서야 개최될 수 있었다. 오전 7시, 당시 외교부장이자 행정원장이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집행위원들은 중산릉을 방문하여 참배한 뒤, 오전 9시, 중앙당부 대강당에서 열리는 6중전대 개막식에 참가했다. 왕징웨이는 이 개막식에서 개막연설을 맡았고, 제 5차 초공작전의 진행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왕징웨이는 대강당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에 참가했다. 이때 장제스는 보안이 안전하지 않다는 측근들의 의견아래 강당에서 예추창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사진 촬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취재기자들 중 회색 대의를 입은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그의 정체는 신광통신사 (晨光通信社) 의 기자였던 쑨펑밍 (孫鳳鳴, 손봉명) 이었다. 쑨펑밍은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스페인제 권총을 꺼내 "타도 매국노! (打倒賣國賊!) " 라고 외치며 왕징웨이를 향해 두발을 쏘았다. 당시 장췬 (張群)이 총을 쏘려는 쑨펑밍을 보고 그를 밀쳐 넘어트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저우포하이는 폭죽소리가 난 줄 알고 뒤를 보았으나, 거기에는 총을 든 쑨펑밍의 모습이 보였고, 그리고 왕징웨이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쑨펑밍은 두발을 쏜 후에도 두발을 연이어 왕징웨이를 향해 쏘았다. 쑨펑밍은 이후 장쉐량을 비롯한 위원들이 달려들고 경비병들이 총을 쏘아 제압당하여 체포되었으나, 왕징웨이는 이미 3발의 총알을 맞은 상태였다. 총소리가 들리자 강당에 남아있던 장제스가 뛰쳐나와 왕징웨이를 직접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게 했고,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은 침착하게 왕징웨이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천비쥔과 천궁보의 도움으로 왕징웨이 부부는 빠르게 난징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으로 갈 수 있었다. 난징 중산동로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 1929년 설립된 이곳은 장제스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중앙의원으로 작동했다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점령되자 일본군이 점령하며 화학전 부대인 영1644 (榮1644) 부대가 사용하다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의 중앙의원이 되게 된다. (기존 중앙의원 조직은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이전했다. ) 병원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10시 30분 중앙의원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바로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 총알의 위치를 파악했다. 왕징웨이는 각각 왼쪽 팔, 왼쪽 뺨 (맨 위의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 그리고 등을 맞았는데, 등의 총알은 다섯번째, 여섯번째 갈비뼈를 지나 허파를 뚫고 척추에 박혔다. 당시 왕징웨이의 의식은 명확했으나, 척추쪽에서 계속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눈 및은 계속하여 부어오르고 있었다. 왕징웨이와 그를 따라온 천비쥔은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중앙의원측은 이를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치명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11월 1일 오후 4시, 왕징웨이의 수술을 위해 상하이에서 급하게 뉴후이린 (牛惠霖, 우혜림) 이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왔다. 1935년 왕징웨이의 수술을 집도한 뉴후이린 (牛惠霖, 1889~1937) 의 모습. 가장 경미했던 왼쪽 팔의 총상은 간단한 봉합수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왼쪽 뺨의 총상의 경우 뼈가 관통되어 파편이 왼쪽 눈에 박힐 정도였지만, 이 또한 3차례의 수술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파편의 경우 완전히 처리 하지 못했다. ) 피습 다음날인 11월 2일 오전 10시, 중앙의원은 왕징웨이의 상태에 대해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가 진행된 이유중 하나는 ,국민정부는 11월 1일 오후 5시, 성명을 통해 왕징웨이가 피습당했음을 발표했으나 문제는 진작 왕징웨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일보에도 "왕씨가 피습을 당한것같다" 정도의 정보가 알려졌을 뿐이었다. ) 이미 소식은 퍼졌고 그속에서 정보의 불확실속 왕징웨이가 '사망' 했다는 유언비어도 퍼지기 시작한만큼, 국민정부측은 이러한 잘못된 유언비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1935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의 "왕씨절명설 (汪氏絶命說)" 보도. 동아일본은 왕징웨이가 11월 1일 오전 11시, 중앙의원에서 왕징웨이가 사망했다는 중국측 보도내용을 토대로 왕징웨이가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의원은 발표에서 왕징웨이의 상태가 양호하며, 2일 새벽부터는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2일 오후 9시반에 잠들어 그다음날 오후 9시까지 긴시간동안 편안한 수면을 취했으며 체온도 37.4도라는 미열에 불과했다. (맥박도 80으로 양호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실제로 오히려 의사들이 말리는데도 신문을 읽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11월 3일에는 쇼와 천황이 왕징웨이의 비보를 듣고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찾아 쾌차를 기원했다. 문제는 등에 박힌 총알이었다. 당시 이 등에 박힌 총알은 중국의 의학 기술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앙의원측은 등에 박힌 총알을 소독등의 임시방편적 치료만 하고, 총알 자체는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피습으로 부터 여러일이 지난 11월 20일, 당시 의학 선진국이었던 독일 의사들의 치료와 수술을 받기 위해 독일 의사들이 있는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했다. 11월 20일 오후 3시, 퇴원한 왕징웨이 부부는 야간열차를 통해 20일 밤 상하이로 향했다. 21일 오전 7시, 상하이에 도착함과 동시에 왕징웨이는 상하이의 중국홍십자회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에 입원하게 된다. 중국홍십자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현재의 푸단대학부속 화산의원) 의 모습. 이곳에는 독일인 의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독일 의사들은 중앙의원에서 처리하지 못한 왼쪽 눈의 파편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의사들도 당시 기술로는 왕징웨이의 척추에 박힌 총알을 완전히 적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때 빼내지 못한 총알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난징중앙의원측에서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이 불편함을 줄수 있었도 목숨에 영향을 줄 만큼 큰 영향을 줄것이라 생각하진 않았고, 독일의사들도 그러했다. 왕징웨이는 병원에서 퇴원한뒤, 상하이의 자신의 사택에 머물며 요양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직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고, 그결과 왕파 (汪派) 라 불리는 왕징웨이의 인사들은 대거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습이후, 빼내지못했던 마지막 총알의 영향은 이때부터 끼치고 있었다. 당대 기사들을 보면, 상하이의 사택 관저로 돌아온 이후에도 왕징웨이는 계속 고통을 호소해 왔고, '중태' 라고 불릴만한 건강악화가 12월에만 3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5일, 12월 9일, 12월 23일) 12월 9일, 왕징웨이는 계속되는 고통과 피로감을 호소했고, 맥박도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띄기도 했다. 게다가 1936년 2월 2일에는 독감에 걸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왕징웨이는 결국 독일로의 요양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독일인 주치의가 권한 것이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건강 회복을 위해 요양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가 독일로 가기 위해 탑승했던 나치독일의 SS 그나이제나우 (SS Gneisenau) 1936년 2월 19일 오후 4시, 왕징웨이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독일의 함부르크로 가는 SS 그나이제나우 여객선에 탑승했다. 이때 부인이었던 천비쥔과, 쩐중밍을 비롯한 수행비서들도 함께했다. 함부르크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베를린을 거쳐 1936년 4월 10일, 독일 남부의 도시인 바트나우하임 (Bad Nauheim) 에 도착했다. 베를린이 아닌 한적한 바트나우하임을 선택한것은 독일 주치의들의 권유였다. 왕징웨이는 1942년 발표한 성명에서 이러한 선택이 독일 주치의들이 권유였음을 이야기하며 이 때문에 히틀러를 비롯한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의 1942년 대 독일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는 바트나우하임의 칼튼 (Carlton) 요양원에 머무르며 온전욕을 즐겼다. 또한 이곳에서 시나 글을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중화민국 주독 대사 청톈팡 (程天放) 은 몇차례 바트나우하임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만나 회담을 했는데, 청폔팡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왕징웨이) 의 몸은 여러차례 치료하며 회복되었지만 (남은) 총알이 제거 되지 못해 심장이 쇠약해졌으며, 바트나우하임의 온천은 심장병에 약효가 좋다고 하여 온천욕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기치료도 받고 있다. " 라고 왕징웨이가 이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건강을 회복했음을 서술해두었다. 왕징웨이는 요양차 독일에 오게되고, 이과정에서 모든 직을 내려놓았지만, 국민당의 2인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만큼, 요양기간동안 앞에서 보았던 청톈팡 외에도 쿠웨이진 (顧維鈞) 주이탈리아 대사 등 유럽의 여러 중화민국 주재 대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1936년 6월까지 바트나우하임에서 요양하다가, 6월 9일 부인 천비쥔에게 전보를 보내 베를린으로 가 다시 진료를 받아보겠다고 하였다. 왕징웨이는 퀄른을 지나 6월 11일 베를린에 도착해 다시 한번 진료를 받은 후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온천도시인 칼스버드 (Karlsbad) 에서 머물며 요양을 계속했다. 이후로도 왕징웨이는 프라하, 베르흐테스가덴 (Berchtesgaden) 등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등지의 여러도시를 다니며 요양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요양을 지속하면서 이전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고, 왕징웨이는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부인 천비쥔에게 보내는 편지등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을 계속 이야기 해왔다. 왕징웨이는 "여행자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과 같다. (旅人如坐鍼氈)" 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측 인사들은 건강을 이유로 계속하여 왕징웨이의 중국행을 말렸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이들도 왕징웨이의 귀국 계획을 완전히 말릴 순 없었다. 흔히 1936년 12월 12일의 시안사변이 왕징웨이의 귀국 이유로 알려져 있지만, 귀국 계획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왕징웨이는 시안사변 이전부터 중국 행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1월부터 왕징웨이는 영국 런던 (11월 1일), 프랑스 니스 (12월 4일), 독일 퀼른 (12월 8일) 등을 오가며 계속하여 전보로 복귀 계획을 논하고 있었다. 즉, 왕징웨이의 중국행은 그 이전부터 논의 되었고 시안사변은 그의 중국행을 결심하게 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왕징웨이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SS 포츠담호. (SS Potsdam) 이배는 위에서 보았던 그나이제나우의 자매함이었다. 시안사변 발발이후 왕징웨이는 14일의 전보에서 자신이 귀국할 결심을 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위에서 보았던 청톈팡, 쿠웨이진 등 유럽 주재 인사들과 현재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귀국을 결정하여 1936년 12월 22일,SS 포츠담 (SS Potsdam) 호를 타고 마지막으로 머물던 제노바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왕징웨이가 출발한 시점에서 시안사변은 이미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장제스가 다시 석방되었다는 전보는 왕징웨이가 탑승한 포츠담호가 수에즈 은하를 통과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귀국을 통한 재기시도는 잘 알듯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역으로 왕징웨이는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이 원하던 중국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다시 국민정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요직에도 복귀하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건강을 되찾고 요직에 복귀하게 되면서, 1935년의 저격사건이 주었던 여파는 사라진듯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1937년 1월 14일 중국으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이후 다시 정계와 요직에 복귀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사진은 1939년의 모습) 1937년 1월 14일 왕징웨이는 중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활동을 재개해왔다. 1937~1943년이라는 6년의 세월 동안 왕징웨이는 제3차 장왕합작의 동반자부터, 항전 국민정부의 부총재, 국민당의 화평운동 지도자, 변절자이자 도망자, 난징국민정부의 행정원장 겸 주석 대리, 그리고 난징국민정부의 주석으로써 수많은 곳과 자리를 옮겨가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그에게 1935년의 상처가 다시 돌아온것은 1943년 8월 이었다. 8월부터 왕징웨이의 증세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거동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11월 5일, 대동아회의 시기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는 도조 히데키에게 자신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이에 일본은 당시 내과전문의였던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당시 도호쿠 대학 내과 교수와 그의 조수였던 마쓰나가 후지오 (松永藤雄) 를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돌보게 했다.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1897~1988), 그는 도조 히데키의 요청을 받아 난징으로 가 왕징웨이를 치료했다. 대동아회의가 끝난 1943년 11월 18일과 21일, 쿠로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일본 의료진들은 두번에 걸쳐 왕징웨이의 신체를 검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35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8년이라는 세월동안 제거하지 못했던 총알의 상태를 확인하여 탄환이 뼈를 이미 뚫고 박혀있는 상황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일본 의료진들은 "빼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본 의료진들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는, 기술의 발전으로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것은 아니었으나,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왕징웨이의 몸에서 총탄을 억지로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이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외과수술은 , 특히 왕징웨이의 상태처럼 신경부분과도 연관된 수술은 가볍게는 마비, 크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점점 커져가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을 하루 빨리 제거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지나파견군 군의장 (軍醫長) 이었던 모모이 나오미 (桃井直幹) 중장을 만나 검사를 부탁했다. 모모이 나오미는 자신의 부하인 난징 제1육군병원장이었던 고토 료우에 (後藤鐐枝) 소장에게 자문을 구해 왕징웨이의 총알을 제거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모모이와 고토는 연구 끝에 제거가 가능할것 같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이러한 고통속에도 왕징웨이는 1943년 말까지 활발한 행동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활동인 중일동맹조약의 체결 (1943.10.30) 뿐만 아니라 대동아회의 (1943.11.5) , 대동아전쟁 3주년 담화(1943.12.8)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1943년 12월 11일의 중국국민당 당무대회였다. 그리고 그 사이 이전 등에 박힌 총알로 인한 통증은 더더욱 증세가 악화되어 1943년 12월 19일, 왕징웨이는 결국 난징 제1육군병원에서 탄환 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이시기 다리가 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1943년 12월 19일, 8년이 넘게 왕징웨이를 괴롭혀왔던 마지막 총탄은 겨우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수술은 19일 오전 11시부터 진행되어 20분만에 끝이 났다. 8년이 넘는 세월동안 왕징웨이의 몸에 있었던 총알은 검게 변했으며, 적출과정에서 심지어 두동강 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수술을 마치고 다음날 오전에 퇴원하여 베이지거 (北極閣,북극각) 라는 별칭이 있었던 쑹쯔원의 전 난징공관으로 향했다. 이곳을 선택했던 것은 공관의 별칭이 되었던 베이지거 지역은 난징의 외곽으로 요양에 적합했고, 동시에 건설당시 난방과 보온을 신경쓴 건물이었기에 겨울 요양을 해야 하는 왕징웨이에게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옛 쑹쯔원 (宋子文) 의 난징 공관. 북극각 (北極閣)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쑹쯔원이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가며 공관이 비게 되자 난징국민정부는 자신들이 이곳을 사용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가장큰 고통의 원인이라 생각했던 총알이 제거된 만큼, 왕징웨이가 빠르게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저오포하이도 수술다음날이자 공관으로 돌아온 12월 20일의 일기에서 "왕 선생은 어제 아침에 이미 총알을 꺼내어 오늘 아침에 퇴원하여 북극각으로 이주하였다. 경과가 양호하나 오후에는 여전히 열기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라고 쓰고 다음날의 일기에서도 "아홉시에 왕 선생이 일어났다..왕 선생에게 물어보니, 정신은 멀쩡하고, 정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의사가 말하길 7일 안에 입도 편하게 움직이게 될것이고, , 10일 안에 완치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만 왕(汪) 선생이 당뇨병이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하였다. " 라고 쓰는등 왕징웨이의 가족들과 측근들, 그리고 왕징웨이의 수술을 담당했던 일본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43년 12월 23일에는 수술의 실밥을 풀었고 이날 왕징웨이와 함께했던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회복이 잘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등 왕징웨이와 그의 주변인물들은 그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왕징웨이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23일 실밥을 풀은 이후, 왕징웨이의 상태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1일, 왕징웨이는 아픈몸을 이끌고 새해 연설을 끝냈다. 하지만 이 새해를 맞이한 이후 왕징웨이는 수술전처럼 걷기 힘들어하며, 더욱 피로를 느끼며 더욱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1944년 1월 9일, 국민정부의 참전 1주년을 맞이한 행사에 왕징웨이는 참가했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는동안 고열이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하타 슌로쿠 (畑俊六) 지나 파견군 사령관 및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과의 연회가 점심에 계획되어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취소하지 못하고 왕징웨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 다음날에도 고열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도 연회가 계획되어 있어 결국 이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의 주치의들은 이 고열이 수술시 제거되지 못했거나 새로이 발생한 고인 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모든 정무를 멈추고 다시 요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21일까지 왕징웨이는 잠을 자면서 발이 떨리는 증상이 있었고, 이 때문에 잠에서 여러번 깨어 앉아 다리를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드는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왕징웨이는 제대로된 수면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결국 1월 25일 시점에는 다리를 비롯한 하반신이 거의 마비되다 싶이하여 걸을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쿠로카와를 다시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하게 했다. 그리고 쿠로가와는 왕징웨이가 총알을 제거한 후 다리가 마비된 것이 척추가 신경을 압박하여 다발성 골수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나고야 제국병원으로 전보를 보내어 3월 1일에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신경외과 교수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가 난징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했다. 사이토는 진단결과 쿠로가와가 진단한 것처럼 다발성 골수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하루 빨리 일본으로 가 치료를 받기를 권했다. 사이토는 일본의 병원에서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존재하나 열악한 난징의 병원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늦지않게 하루빨리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측은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하이지엔호 (海鶼號), 이는 1941년 일본이 왕징웨이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1943년 3월 3일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구급차에 탑승하여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난징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중을 나온 저우포하이, 천궁보등 주요 인사들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왕징웨이는 일본으로 출발하기전, 친필로 글을 적어 " 공무는 천궁보, 저우포하이에게 맡겨라 (公務交由公博、佛海代理) " 라고 쓴후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천비쥔을 비롯한 가족과 수행원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출발했다. 이때 일본은 A6M 4대를 사용하여 왕징웨이가 탄 하이지엔호를 엄호하게 했다. 나고야에 도착하자 일본은 나고야 주둔 일본군으로 하여금 왕징웨이를 경호하게 했다. 왕징웨이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4층 전체, 그리고 3층의 일부를 사용하게 했는데, 이는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수행원들이 머물 공간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던 매화 (梅花) 에서 따온 암호명인 매호(梅號) 라는 암호명을 부여하였다. 이는 왕징웨이의 보안과 왕징웨이의 소식이 함부로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왕징웨이를 담당하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나고야 제국병원 바로 근처의 숙소에서 생활하게 하며 왕징웨이가 위급해지면 바로 현장으로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매호, 즉 왕징웨이를 담당하는 의료진은 기존의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해왔던 쿠로가와와 사이토를 중심으로, 다카기 고지 (高木寬治) 도쿄 제국대학 의학교수, 나고야 제국병원장, 미야 야스오 (三矢晨雄) 교수를 비롯한 당대 일본 의료계의 최고 권위자를 모았다.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 그는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로, 덩치가 커 간호사들은 항상 그를 무서워했다 전해진다. 특이한것은, 사이토는 수술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항상 나막신을 착용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온 다음날인 1944년 3월 4일, 사이토를 중심으로 한 의료진은 왕징웨이에게 추궁절제술 (椎弓切除術, 척추뼈를 일부 제거하여 척추의 종양, 통증등을 완화하기 위한 시술이다. ) 를 실시하였다. 4번~7번 흉골 일부를 절제한 이 수술은 1시간 20분가량 진행되었는데, 수술이 완료되자 왕징웨이는 하반신이 다시 반응하며 다시 걸을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의료진들에게 감사인사를 표했다. 수술과 동시에 왕징웨이의 총탄 근처의 조직에 대한 분석도 행해졌다. 조직 분석의 결과, 사이토와 쿠로가와가 우려했던대로 다발성 골수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종양의 모습은 악성종양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의료진측은 왕징웨이측이 걱정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알리지 않았다. 일본에 온 후 이루어진 첫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것 처럼 보였다. 왕징웨이는 수술후 첫주에 스스로 무릎을 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양발과 다리의 근육이 증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증세 호전에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은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당뇨병도 앓고 있었던 만큼, 회복은 더욱 더뎠다. 천비쥔은 왕징웨이가 증세가 악화될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이에 직원들은 천비쥔을 데리고 주변으로 가 버섯을 캐오곤 했었다. 1944년 5월 4일, 왕징웨이는 병실에서 진갑 (進甲), 즉 61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생일날 왕징웨이는 미소를 보였으며 기운이 넘쳐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진갑에 만주국에서도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6월 5일에는 추민이가 병문안차 나고야를 방문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병실에서도 글을 작성하여 난징측에 전달하는등 이 시점까지 왕징웨이는 병세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더욱 일본측에 불리해져가고 있었고, 일본은 전투에서 계속패배하고 자원공급이 어려워지면서 자원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자원난은 왕징웨이가 있는 나고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에게 매일 닭고기, 돼지고기, 죽순, 시금치와 같은 식단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당뇨병이 있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진 왕징웨이의 식욕은 줄어들대로 줄어든 상태라 왕징웨이는 많은 식사를 하진 않았다. 또한 왕징웨이의 병은 섬세한 온도의 관리를 요구했다. 겨울철에는 자원난에도 불구, 석탄을 동원하여 왕징웨이의 병실을 24시간 난방을 시키는 한편, 더운 여름철에는 규슈에서 냉방기를 급수하여 냉방을 실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오랜시간을 병실에서 보내며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 있었고,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병세는 완전히 호전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징웨이는 욕창이 발생했으며, 헤모글로빈 수치가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O형으로, 이 때문의 같은 혈액형을 가진 자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수혈을 받았지만, 수치는 2~3주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의료진측도 왕징웨이가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으며, 그 증세는 날이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왕징웨이측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8월 초가 되자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저우포하인은 1944년 8월 8일의 기록에서 "일본 대사가 왕선생의 병세가 심해 아마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급히 전했다. 라고 하였고, 이에 8월 9일 난징을 출발, 8월 10일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 왕징웨이를 만난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우포하이는 반년사이 병세가 악화된 왕징웨이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왕징웨이와 대화를 끝낸 후 저우포하이는 그의 아내인 천비쥔과도 대화를 나눴다. 저우포하이는 8월 10일의 기록에서 " (천비쥔은) 왕선생의 자리를 다른이가 대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것 같다" 라고 서술하며 천비쥔이 왕징웨이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음에도 왕징웨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완전히 놓아선 안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9~ 10월 사이 왕징웨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맥박수가 분당 90~110정도가 되어 불안정해졌고, 기침은 더더욱 심해졌다.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폐렴이나 심부전증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여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의 몸은 더욱 약해져갔다. 왕징웨이는 1944년 10월 10일 쌍십절 (중화민국 국경) 행사를 위한 훈시를 작성하여 전달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행한 마지막 대외활동이 되었다. 왕징웨이는 말년에 《육십자술 (六十自述) 》 이라는 시를 지었다. 내용은 왕징웨이 자신이 지나온 60 평생을 회고 하는 내용이었다. (왕징웨이는 당시 61세였다. ) 六十年無一事成,不須悲慨不須驚 60년동안 하나 이룬게 없으나, 슬퍼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네 尙存一息人間在,種種還如今日生 아직 살아 세상에 있으니 온갖것이 아직 지금 살아있는 것만 같네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나고야. 미군의 공습은 왕징웨이가 있었던 나고야 제국병원도 위협했다. 1944년 11월 8일, 의료진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이날 나고야에는 미군의 공습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왕징웨이의 병실이 있던 나고야 제국병원 또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계속되는 공습에 의료진측은 결국 왕징웨이를 지하 방공호로 옮기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왕징웨이에게는 독으로 작용했다. 당시 나고야의 11월 날씨는 추웠으며 이는 왕징웨이 같은 환자들에게는 더욱 취약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특별관리대상인만큼 일본으로 부터 석탄을 지원받아 난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지하방공호에는 이러한 난방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추위속 왕징웨이는 괴로워 했고 결국 왕징웨이는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또한 열이 40도까지 오르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0일 오후, 왕징웨이는 몸을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천비쥔과 가족들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쿠로가와가 뛰어와 그를 진찰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이시점에서 왕징웨이는 누워있는것도 힘들어 일본이 특수틀을 제작하여 몸을 맞춘 상황이었다. 이틀전인 11월 8일,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일본측으로 부터 왕징웨이의 병세가 좋지않으니 하루 빨리 일본을 방문하기를 바란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11월 16일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측은 다시 전보를 보내 재촉했고, 그 결과 이들은 일정을 수정하여 11월 13일 왕징웨이를 보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동료들을 차마 보지 못한채,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야한다... (我要回中國....)" 라는 희미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병실에는 적막과 함께 슬픔이 가득했다. 천비쥔은 울부짖었고 함께 있던 쿠로가와 또한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나고야 비행장으로 옮기는 운구차 행렬. 왕징웨이의 유해는 사망 이후 방부 처리가 이루어졌고, 왕징웨이의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구차에 실렸다. 1944년 11월 12일 오전, 왕징웨이의 유해는 나고야 제국병원을 떠나 나고야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고야 비행장에는 도조 히데키와 고노에 전 총리대신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힌 그의 관이 일본의 히노마루가 그려진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은 왕징웨이와 그의 정권의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요소다. 왕징웨이의 유해는 중국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혔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DC-3 수송기는 나고야를 출발, 1944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 청천백일문양이 보인다. 왕징웨이의 유해가 난징에 도착한 11월 12일은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쑨원의 탄생일이기도 했다. 1943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가 도착했고, 난징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잠시동안 난징국민정부의 대예당에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다. 비행장에 내려서도 천비쥔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비행장에는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있었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하자 이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날 난징국민정부는 애전위원회 (哀典委員會)를 조직하여 앞으로 치루어질 왕징웨이의 장례식 행사 준비에 나섰으며, 동시에 국민정부 지역에 한달간 조기를 게양하게 하고 일주일간 주요 오락행사를 중지하게 했다. 이날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경성의 중화민국 영사관에서도 오후 1시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자리에 조선 총독은 직접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사람을 보내어 자신 대신 총독의 이름으로 행사에 참가하게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주요 요인들, 주요 경제계 인사들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 화교사회가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조선 화교사회도 모두 조기를 게양했다. "우리의 최고영도자 왕주석 서거"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부에서 운영하던 언론이었던 신중국보 (新中國報) 의 1944년 11월 13일자 기사. 대중들에게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1944년 11월 13일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이날 공보를 발표하여 왕징웨이 주석이 사망했으며,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왔고 차후 애전위원회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당시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일본과 조선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필리핀 방어전과 본토폭격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화평운동과 1940년 정부수립, 1941년 방일 당시 일본-조선 신문들의 1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왕징웨이는 마지막에는 단신뉴스칸에서 그 존재감을 피력할 뿐이었다. 조기가 게양된 난징의 모습. 왕징웨이의 유해가 돌아온 다음날인 1944년 11월 13일, 왕징웨이의 유해를 임시봉안한 국민정부 대예당에서는 간단한 형식으로 왕징웨이의 후계자인 천궁보의 대예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천궁보를 중심으로 하여 왕징웨이의 납관식 (納棺式) 이 거행되었다. 국민정부 대예당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배치되었고, 그 양옆으로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들 및 쇼와 천황을 비롯한 우방국들에서 보내온 조화들이 위치 해있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천궁보는 행사를 진행했고 모두가 일어서 국가를 부른뒤 묵념을 통해 왕징웨이를 기렸다. 천궁보는 이후 조문을 읽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새로운 관에 넣으면서 행사를 마무리 했다. 왕징웨이는 이를 통해 화려하게 꾸며진 새 관에 안장될수 있었다. 매화산 (梅花山). 중산릉과 명 효릉 사이 위치한 이 언덕에는 약 16,000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있다고 한다. 1944년 11월 14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민정부명령 (國民政府命令) 을 통해 왕징웨이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진행할 것이며, 묘가 위치할 자리는 국부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릉과 명 효릉(明孝陵) 사이의 매화산(梅花山) 으로 결정했다. 매화산으로 결정한 이유는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매화가 가득 피어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전 왕징웨이가 좋아하던 장소였으며,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국부 쑨원이 있는 중산릉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1944년 11월 18일의 중앙정치위원회에서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매화산에 가매장 (假埋葬)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이 처해있던 상황과 관련 있다. 본래 왕징웨이 정권측은 5000만 위안 가량 (저비 기준) 의 예산을 투입하여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하게, 여러 부대시설과 함께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자원난도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중산릉과 같은 대규모 건축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중앙정치위원회는 이때문에 동시에 왕징웨이가 염원하던 화평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후, 정식적으로 제대로된 국장을 다시 치뤄 제대로된 새로운 묘에 다시 모시기로 결정했다. 국부 쑨원도 처음에는 제대로 모셔지지 못했으나 이후 중산릉에 다시 모셔진것 처럼, 왕징웨이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43년 11월 22일에는 왕징웨이의 묘 건설이 거의 완성되어 유해를 옮길수 있는 환경이 되었고, 이에 1943년 11월 23일 오전 6시 30분,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국 대사들등 여러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운구식이 진행되었다. 국민대예당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10시 30분, 매화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의 운구행렬. 화평건국군 뿐만 아니라 난징시 경찰등 수많은 조직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매화산에 마련된 왕징웨이의 묘의 안장식 현장모습. 묘 예정지로 들어가는 왕징웨이의 유해. '왕주석의 묘 (汪主席之墓)' 라고 간판이 적혀있다. 관을 묻기전 왕징웨이의 관의 모습. 이는 왕징웨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0시 30분, 유해가 묘에 도착하자 마자 안장식 (安葬式) 이 거행되었고, 이어 11시에는 왕징웨이의 관을 정식으로 묘에 묻음으로서 왕징웨이의 장례식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왕징웨이의 묘 (뒤) 옆에 매화나무를 심고 있는 추민이 일행의 사진. 이 사진은 왕징웨이의 묘를 다룬 몇 안되는 사진중 하나이다. 왕징웨이의 묘 모습 (1945년 초). 웅장한 중산릉의 모습에 비하면 초라할 따름이다. 왕징웨이 묘의 비석에는 단순하게 '왕징웨이의 묘 (汪精衛的墓)' 라고만 새겨졌고, 묘비에는 그가 좋아하던 시 '매화(梅花)' 가 함께 실렸다. 梅花 매화 梅花有素心,雪月同一色 매화의 마음은 눈 위에 비취는 달빛처럼 새하얗네 照徹長夜中,遂令天下白 밤새도록 빛나니 마침내 천하를 밝히게 하네 앞에서 보았듯 난징국민정부는 본래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한 규모로 건축하기를 희망했으나 현실적인 상황때문에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묘에는 묘와 조그만한 사당과 기둥들만이 건설되지 못하게 된다. 잘 알려졌듯이 , 왕징웨이의 묘 건설에는 약 5t 가량의 철근과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재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천비쥔이 중일전쟁 이후 자신의 남편인 왕징웨이의 묘를 훼손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달은 만큼 공습을 우려하여 이렇게 건설했다는 설이 혼재한다. 하지만 장제스와 사이가 나빴던 천비쥔이 이러한 튼튼한 무덤을 건설하기를 원했다는 점, 왕징웨이 본인도 이와 같은 건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욱 가능성 높은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천궁보가 이끌었던 난징국민정부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난징국민정부가 해산됨에 따라 왕징웨이의 묘도 확장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라이벌이자 민족의 반역자인 왕징웨이의 묘가 존재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항일전쟁 승리후 허잉친을 시켜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게 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이러한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을 당시 속으로 못마땅해 했지만, 1946년 1월, 충칭에서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기로 계획했던 장제스와 요인들이 중산릉을 참배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의 묘를 보게되었을 때 생길 파급을 막기 위해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허잉칭 자신도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는 것에 대한 완전한 찬성을 가하지 않았던 만큼, 다른이를 시켜 이를 처리하게 했다. 1946년 1월 15일, 허잉친은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74군의 구유달(邱維達), 당시 난징 시장이었던 마초준(馬超俊), 육군본부 공병지휘관 마숭육(馬崇六), 육군본부 참모장 소의숙(蕭毅肅) 등이 참가했다. 허잉친은 회의에서 "그대들이 한 가지 일을 협의해 달라. 다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 어디에든 새어나가서는 안된다. 위원장이 곧 '환도'할 것이다. 왕징웨이 이 대매국노의 분묘가 여전히 매화산에 있다. 손총리의 능묘와 나란히 있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만일 왕징웨이묘를 없애버리지 않고, 위원장이 '환도'했을 때 보게 된다면 반드시 진노할 것이다.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관심으로 골치아플 것이다. 여러분이 자세히 연구해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반드시 타당한 처리방법을 찾으라." 라고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소의숙은 이러한 허잉친의 뜻이 사실이며, 이는 충칭에서 이미 승인이 난 내용이며 10일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여 장제스가 오기전에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구유달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유달은 임무수행을 위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매화산 일대를 '포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매화산 근처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위한 것으로, 헌병사령부와 난징시정부도 이에 협력했다. 구유달은 자신의 공병부대를 통해 왕징웨이의 묘를 둘러본 후, 이 묘를 처리하기 위한방법은 '폭파' 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폭파 계획을 준비했다. 구유달은 묘의 폭파를 위해서는 150kg 가량의 TNT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이를 준비했다. 구유달은 폭파계획을 위하여 계획 3일전부터 주변의 출입을 엄금하고 음파장치를 준비하여 폭파시 나타나는 소리를 덮으려 준비하였다. 구유달은 두단계로 나누어 폭파의 준비를 하였다. 1단계는 밖을 덮고 있는 콘크리트 외벽을 제거하는 것이고, 2단계는 관 자체를 파괴하여 굳게 닫힌 관을 여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구유달은 의문을 가졌다. 허잉친은 분명 무덤을 '옮기라' 라고만 지시하였는데 어찌하여 죽은이의 관을 열려고 하는 것인가? 구유달은 허잉친의 '옮겨라' 라는 말은 수사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파괴하라'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왕징웨이 묘의 폭파전 모습. 20일, 구유달은 폭파를 계획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월 21일에야 폭파가 진행되었다. 폭파는 성공적이었다. 왕징웨이의 묘는 산산조각 났으며 왕징웨이의 관 또한 열리게 되었다. 관두껑을 열자, 왕정위의 시신은 청천백일기로 덮여 있었다. 시신은 난징국민정부의 문관예복이고, 청색장포마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예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수(大綏)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갈색에 흑반점이 있었다. 방부제를 사용한 만큼 시체를 거의 썩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관에서는 천비쥔이 적은 혼혜귀래(魂兮歸來 )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혼혜귀래는 혼이 장소를 잘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것으로 생각된다. 폭파를 함께 했던 마조춘, 마숭육등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살펴본뒤, 마숭육은 공병대장을 시켜 왕징웨이의 시신을 트럭에 실게 했다. 이들은 시신을 청량산 (淸凉山, 난징의 서쪽) 으로 옮겼고, 그날 새벽 은밀하게 왕징웨이의 시체와 관을 불태워 화장시켰다. 이로 인해 한때 민국의 2인자이자 쑨원의 후계자로 점쳐졌던 왕징웨이는 재도 남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구유달의 공병부대는 묘 잔해를 치우고 평탄화작업을 진행했고, 그결과 실제 장제스가 방문했을 때는 이곳이 자신의 라이벌이 묻혀 있던 묘라는 것도 알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옛 왕징웨이 묘 자리에 정자를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매화산의 관매헌 (觀梅軒) 이다. (관매헌은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겉으로만 보면 이곳이 왕징웨이의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긴 어렵다.) 왕징웨이의 묘자리에 세워진 관매헌 (觀梅軒)의 모습. 마무리하며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으로 취급받는, "1935년의 암살미수사건에서 제거하지 못한 총알이 독이되어 곪아아있다가 1943년 말 증상이 악화되었고, 총알을 제거했으나 다발성 골수종이 발생했고, 이 다발성 골수종이 악화되고 당뇨병등 기존의 지병등이 여기에 추가적인 악영향을 끼치며 건강이 악화되며 결국 사망했다. " 라는 이론을 다룬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 큰 논쟁은 왕징웨이를 사망으로 이끌게 한 1935년의 암살사건에 장제스가 개입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천비쥔이 저격사건 직후 장제스를 비난했다는 점, 장제스가 '우연히' 저격 현장에 없었다는 점등은 저격사건의 배후로 장제스를 지목하게 한다. 당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경쟁관계에 있었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것도 장제스 였으니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제스 배후설은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만큼,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죽였을 것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긴 어렵다. 애초에 장제스 본인은 앞장서서 1935년 당시 왕징웨이를 병문안을 갔으며, 매일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가게 하고 치료비 및 위문금을 보내려 했으며, 앞장서서 사건의 해결을 주도했던 이였다. 또한 역사적 맥락상으로도, 왕징웨이는 자신의 경쟁자일지언정 자신에게 불필요한 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죽일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서 " 정신적 충격은 총알이 폐에 박힌 것보다 몇 배나 더 고통스러운데, 이번 총알이 차라리 내 가슴에 박혔다면 내 마음의 편안함이 얼마나 빨랐을지." (精神之受打擊,其痛苦較甚於槍彈之入肺腑數倍,此次之彈如穿入於我心身,則我心安樂必比甚何等事快也。) 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받는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장제스 배후설은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그 가능은 낫다. 두번째로 존재하는 논쟁은 일본암설설 - 일본책임설이다. 이는 한국 작가 김형석 (1920~) 의 글 '고독이라는 병'에서도 나타난다. "태평양 전쟁이 격심했을 때, 장제스 총통과 갈라져 일본측과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애국자 왕징웨이는 이 새의 이름인 정위 (精衛) 를 자기의 아호로 삼았다. 그는 스무살 전후의 젊은 나이에 웅지를 품고 황제의 수례에 폭탄을 던져 사형을 언도 받은 바 있었으며, 일평생 민족을 위해 살다가 끝까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가 10억을 헤아리는 무지하고 불행한 중국 백성들에게 보람있는 봉사와 아낌없는 희생을 각오했을 때, 스스로를 이 전설의 산새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새의 약한 날개와 한두알의 작은 돌에 비하여 바다는 너무나도 넓고 깊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한 배경은 여러가진데 첫 번째는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의 탄환 적출 수술을 집도하였던 모모이 나오미와 고토 료우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쿠로가와도, 독일의 의사들도 뺄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 했으나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강행해 왕징웨이의 죽음을 초래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중엔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으로 진행했음을 증명할 서류는 존재하지 않고, 모모이와 고토 모두 태평양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의 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책임설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언급되는 것이 1944년 11월 8일의 왕징웨이를 지하방공호로 옮긴 선택이 왕징웨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것이 일본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또한 증명된 바 없고 위에서 보았듯 왕징웨이의 병세는 이미 그전부터 악화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습이라는 상황속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호행을 무작정 비판하기도 어렵다. 또한 왕징웨이의 몸에 박힌 총알이 몸에 영향을 끼치는 '납탄' 이 아니며 몸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 '금속탄'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여기선 총알은 애초에 왕징웨이의 죽음에 기여한 바가 적으며, 일본이 오히려 왕징웨이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주장이 있다. 천비쥔의 경우, 전후 일본이 양의학을 고집하는 바람에 왕징웨이가 죽었다고 주장한바가 있고,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일본이 왕징웨이를 독살했으나 이를 다발성 골수종이란 이름으로 덮으려 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위에서 보았듯 의료진들은 치료초기 왕징웨이의 상태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바가 있고, 이러한 두루뭉실한 서술은 가족들로 하여금 오히려 의혹을 가지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죽음은 확실한 결론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을 다루었지만, 위와 같은 음모론의 내용을 서술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주장도 존재한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중간에 서술하지 않은 것은, 서술에 있어서는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라 할수 있다. 번외로, 천비쥔은 왕징웨이의 사망후 자신의 남편을 그동안 치료해준 나고야 제국병원측에 감사를 표하며 매화나무 3그루를 기증했다. 그리고 이중 2그루는 아직 나고야에 남아있다. 나고야대학 오유키 의료센터 (大幸医療センタ) 뒤에 위치한 '왕징웨이씨 기념의 매화 (汪兆銘紀念の梅) 의 모습. 본래 3그루가 있었으나 한그루는 시들어 현재남은건 2그루 뿐이다. 또한 왕징웨이의 묘는 폭파되어 중국대륙에서 사라졌지만, 일본 도쿄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는 묘비가 존재한다. 일본 도쿄 종태원 (宗泰院) 에 존재하는 왕징웨이의 묘. "애국자. 쑨원의 수제자, 동아의 위인 왕자오밍 선생 여기에 잠들다." 라고 적혀있다. 묘비 뒤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설명과 자신이 1944년의, 이제는 이미 폭파되어 사라져버린 왕징웨이의 묘 조각을 발견하여 1988년 11월 10일 이곳에 묻어 기록한다라고 적혀있고, 묘비의 앞에는 중화민국의 국화이자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했던 매화가 새겨져 있다. 이 묘비를 건설한 일본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묘비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출처 :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김형석, 『고독이라는 병 』, p 217 , 1960 蔡德金, 『汪精衛之死』, 1998 朱子家, 『汪政權的開場與收場』 , 2020 『中国文化』, 第39期, 2014 『僑協雜誌』, 第156期, 2016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https://www.koreanhistory.or.kr/totalSearch.do 일본뉴스 233호 / 236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361_00000&chapter=004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364_00000&chapter=001 신중국보 1944년 11월 13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4.11.13 동아일보 / 조선일보 1935년 11월 ~1936년 3월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1%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9%95%EC%94%A8%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9%2C%22startDate%22%3A%221935-01-01%22%2C%22endDate%22%3A%221935-12-31%22%7D 추민이의 사진 : https://cotca.org/items/loc-0004/ 장제스의 일기 : https://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7073877 도쿄 왕징웨이의 묘 사진 : https://nkurashige.wordpress.com/2021/12/06/%E6%B1%AA%E5%85%86%E9%8A%98%E3%81%AE%E5%A2%93/ 왕징웨이의 매화 사진 : https://x.com/hironakaisseis1/status/1765602577008431530 나고야 공습 / 쑹쯔원 공관 / 그나이제라우 /포츠담 : 영문판-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항목
- 대한민국 임시정부시기 잡지 한민 (韓民) 의 왕징웨이 관련 기록 (1940)
잡지 한민(韓民) 의 표지. 는 194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국민당 선전부의 엄항섭(嚴恒燮)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중국서 발간한 월간종합지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이 본 잡지에 참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하였다. 본 자료는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 의 자료 중에서 왕징웨이 정권 & 왕징웨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역적 왕징웨이 괴뢰조직의 죄상 석촌 (石村)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역적 왕징웨이 의 괴뢰조직은 지난달 30일 난징에서 왜적의 연출로 그 막을 올렸다. 이 천고의 추한 연극은 가물거리는 적의 ‘마지막 방패’임을 폭로하고 온 천하에 알려진 역적 왕징웨이의 죄상이 산송장의 짓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우리들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역적 왕징웨이가 일본과 내통하여 염전(艶電, 여기를 참조 )을 발표한 때는 이미 민족과 국가와는 절교한 것이다. 그는 황제(黃帝)의 자손이라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온갖 멸시를 당함이 마땅하다. 이 반역행위의 출현을 장(蔣)위원장은 “일왕밀약 (日汪密約, 1939년 12월 30일 체결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을 의미한다. 여기를 참조 ) 을 전국 군민(軍民)에게 알리는 글”에 명료하게 지적했다. “나는 몇개월 전 앞잡이 조직이 조만간 출현하리라 생각했다” 고 한 것이다. 이에 나는 통분한 나머지 비분에 떠는 열정으로 전심전력 적의 악랄한 정치음모를 분쇄하고 반역자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할 일이 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적이 왜 왕정위를 끌어들였겠는가?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항전에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연구한 이후에 비로소 정확하게 노력방향을 잡아야 하겠다. 왕징웨이의 무능함을 우리뿐만 아니라 적도 명백히 알고 있다. 적의 대변인실이 최근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들 역시 ‘왕정권( 汪政權) ’이 질서정연한 중앙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또한 4년에 걸치는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지 실제로 이 시국을 수습할 능력이 있는가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적은 이미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하리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공연히 골치거리를 하나 더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가? 왕징웨이가 말하는 평등호혜(平等互惠)·화평반공(和平反共)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적은 원래 기질이 교활하고 악랄하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적이 연출하는 꼭둑각시 연극을 볼 것 같으면 3가지 음모가 숨어 있다. 1. 자국민을 기만함 적이 그들 국민에게 한 거짓선전을 보자. “중국은 비옥한 땅과 광물이 무한정하다. 하지만 국방력이 미약하고 민족의식이 저하되어 중국을 정복하기만 하면 일본의 난국은 자연히 해결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용하고 아무리 취해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3개사단의 병력 정도로 3개월이면 중국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하여 민중의 침략심리를 조성했다. 루거우차오 이래 적은 많은 병력과 경비를 투입해서 연안 부근을 점령했다. 그러나 우리의 장기항전은 적을 한층 진흙 속으로 몰아넣어 전쟁의 종결이 요원한 것이다. 적의 국내 사정은 날로 더욱 심각해졌다. 물자는 결핍하고 생산은 저조하여 경제가 날로 무력해지니, 공채를 증발하고 세금이 과중해져 국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 졌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날로 많아지고 장정은 줄어들어 병력을 보충하기도 곤란해졌다. 이렇게 되자 그 국민들은 전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몽상임을 알게 되고 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니 반전운동은 점점 만연되었다. 이 때에 적은 ‘인심안정정책’으로 왕징웨이를 무대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자기국민을 기만함으로써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역적 왕정위의 괴뢰조직의 성립이 중국사건을 매듭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했다. 그러나 이 계산은 불가능한 것이다. 적의 전 수상 아베(阿部)는 일찌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신중앙정권의 성립이 사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240개 사단의 정규군과 수백만의 유격대가 있기 때문이다.” 적의 수뇌층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자기네 일본 국민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고 보는가? 기실 적의 운명은 우리 손아귀에 쥐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교묘한 재주를 피워도 일은 악화만 되어 가는 것이다. 2. 세계 각국을 위협 적의 대륙정책은 중국에, 정식이권을 획득한 제3국으로서의 위치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을 완전 독점하고 나아가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이다. 적이 발표한 성명을 볼 것 같으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건설’, 중국에서의 제3국의 권리 존중은 사탕발림의 말일 뿐으로, 이는 ‘일왕밀약(日汪密約)’을 통해 적의 악랄한 음모라는 것이 세계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그러므로 허무맹랑한 선전을 아무리 해보아도 한층 어긋날 뿐이다. 때문에 적은 역적 왕징웨이를 끌어들여 제3국의 권익을 존중하는 체함으로써 장강을 개방하고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각국과 접촉하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점령지역내에서 일어난 반영운동이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무모한 짓은 모두 적의 간교한 계책임을 잘 알고 있다. 결코 이것이 세계 여러 나라를 위협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도 당하고 있을 나라는 없는 것이다. 미 국무성은 왕정위의 괴뢰조직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영국의회는 충칭의 국민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세계여론을 보아도 적과 왕(汪)의 괴뢰조직의 음모는 명백한 것이다. 3월 3일자 워싱턴 ≪명성(明星-The Morning Star)≫지의 언급은 “도쿄측에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성립을 널리 선전하는 것은 중국을 중국에 되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는 이미 ‘자유중국’을 속일 수 없고, 또한 세계 각국도 속일 수 없다.” 고 했다. 1일자 상해대미(大美)석간도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대해서, “반드시 새로운 계략이 있을 것인데, 문제는 외국을 배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25일자 ≪진리 (眞理)≫지 논설은 “난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한 연극이다. 일본 내부의 형세가 날로 약해져 가는 것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고 왕의 괴뢰조직을 일축했다. 이상의 언급은 국제적으로 일본을 대신해서 조종(吊鍾)을 울려 준 것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또한 세계는 정의와 화평의 우방이며, 일본의 어리석은 위협은 절대 받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이화제화(以華制華) 정책 적은 중국을 침략하여 많은 괴뢰조직을 만들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임시정부’, ‘유신정부’로써 광주(廣州)·무한(武漢)·하문(厦門) 등지의 괴뢰조직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아직도 충분치 못했단 말인가? 적의 침략수법(手法)은 조금씩 먹어 들어가는 식이다. 피차 마찰을 피하면서 좋게 조금씩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중앙정권’ 이라고 하는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왜 내세워야만 했나? 역적 왕정위는 중국국민당과 국민 정부의 이름을 도용해서 새로운 그의 당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위 ‘화평운동’ 이니뭐니 하지만 이는 ‘중국영토의 주권존중’,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은 없음” 등의 구호가 사실인듯이 보이기 위한 적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도구인 것이다. 바로 이화제화(以華制華), 이당제당(以黨制黨)의 악랄한 술책이 그 목적하는 바이다. 장위원장은 ‘일왕밀약고전국군민서(日汪密約告全國軍民書)’에서 역적의 간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는 오늘 이후 반드시 국부적 화해로써 전체적 화해를 이루자”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화평운동’에 주력할 것이다. 그는 매수한 무리로 괴뢰정부를 조직해서 ‘일지관계조정강요’의 골자를 수행하려 할 것이다. 제3국이 괴뢰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더라도 복잡한 사건이 생기면 많은 국가가 그의 괴뢰정부와 실제로 거래가 있을 것이라 하고. 아마도 망상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부적 화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본군의 난징점령을 의미한다. 일본에 부분을 팔아버리고 다시 그 부분을 기초로해서, 적의 힘을 이용하여 항전하는 전군민, 망국의 노예됨을 원치 않는 이들을 없애면 전면적인 화평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망상할 것이다. 적의 야심을 따라 완전히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 그의 간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굳세게 항거하여 적의 음모를 분쇄하고 화평과의 타협반대만이 승리를 얻을수 있고 항전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역적의 말로를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황제(黃帝)의 자손됨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라고 말이다. 가. 중국 국민의 반역자를 보는 눈 왕징웨이는 역적으로, 도둑의 하수로 사회에 알려지기에 앞서, 국내외에 잠복하여 터무니 없는 ‘화평’ 를 선전했다. 일시적으로 생활이 곤란하고 환경이 나쁜 이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활한 유혹에 넘어가 항전에 회의를 갖는 자가 있으니, 이처럼 제 집을 도적질하는 무리는 막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숨은 걱정은 바로 이런 무리이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정치 무대에 나타났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망국의 노예됨을 원하지 않고 있고 그들을 역적이라고 보며, 같은 동포의 손을 끊는 자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유혹을 해도 국민은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적의 앞잡이를 제외한 4억 5천만 중국 동포 대부분이 순(順)과 반(反)의 행위를 엄격히 구별하며, 충(忠)과 간(奸)은 결코 병립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결코 적에 대한, 격렬한 원한과 분노로 가득찬 중국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저하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적 내부의 충돌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비록 일은 시작했지만 그 내부의 모순은 날로 커진다. 괴뢰 ‘임시정부’와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인 괴뢰 화북정무위원회(華北政務委員會)의 왕극민(王克敏), 왕읍, 무빈(繆斌) 등이 왕징웨이와 반목하고 있고, 표면상 취소된 ‘유신정부(維新政府)’의 양홍지(梁鴻志), 온종요(溫宗堯), 임원도 (任援道) 등도 마찬가지로 각처에서 왕징웨이를 견제하고 있다. 괴뢰 ‘몽강자치정부’의 이수신(李守信)과 괴뢰 ‘우한 정권’의 하패용(何佩瑢), 장인려, 석성천(石星川), 뇌수영(雷壽英) 등도 왕징웨이의 지배에 대한 항거가 공공연하게 또는 비밀리에 일고 있다. 이미 왕징웨이 자신의 조직에서도 진공박(陳公博), 저민의, 주불해(周不海) 등이 권리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갖 추태를 다 노출하고 있다. 적의 손아귀에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명리(名利)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의 환심을 사야한다. 따라서 당연히 서로 배척하고 견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앞잡이 조직 내부의 모순과 충돌은 점점 심해져서 결국엔 그들이 저지를 죄악을 감소시킨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적이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내세운 이유와 작용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장(蔣)위원장의 항전 2주년 기념사에서 지시한 바를 보자. “대체로 적에 유리하다고 인정되면 모두가 우리에겐 해로운 것이다. 때문에 적이 원하면 우리는 해주지 말아야 하고, 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해야 된다. 적이 좋다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것이고, 나쁘다고 하면 반드시 좋은 것이다. 적이 하는 일체의 언행은 모두 그 반대적 입장에서 관찰하여 받아들이고 뿌리쳐야 한다”고 했다. 적의 교묘한 계책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충실히 수행하고 용감하게 매진함으로써 적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한국인의 눈에 비친 역적 왕징웨이 일파(一波)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나는 한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말이 들리는 바에 대해 그렇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그가 소위 염전(艶電)을 발표하고 괴뢰정권을 만든 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이미 우리의 혁명동지가 아니며 일본의 앞잡이인 적이 된 것이다. 그는 적을 끌어 들여 수십만의 자기 동포를 죽였다. 그는 앞잡이가 되자 곧 우리 한국인과 가장 친한 전우인 중국인, 어떤 의미에서는 간접적으로 몇십만 명의 한국 동포를 죽인 것이다. 이 괴뢰조직이 목적하는 바가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다. 그의 간계가 성공한다고 할 때 한중 양국의 전도는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중국 항전의 최후 승리를 한층 촉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케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은 독립과 해방을 맞게 되니,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비단 관심을 가질 뿐이 아니라 또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씹지 않고서는 시원치않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에 “역적 왕징웨이의 계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길 바라고 또한 괴뢰조직의 원흉인 왕징웨이를 한국인이 능히 박살내 줄 것이며, 이는 결코 기회주의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믿어주기 바란다. 왜적의 조종을 받는 매국노의 죄악과 그 죄악이 초래하는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 중국 동지들보다는 아마도 한국인이 조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반역행위에 관한 한 매국노는 민족의 패륜아요, 인류의 저주받는 독충인 바 누구보다도 엄히 다스려져야 한다. 옛부터 우리 한국인들 중에는 의사(義士)들이 많았다. 박랑사중(博浪沙中)에서 진시황(秦始皇)을 격파한 창해 역사(滄海力士),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죽인 안중근 (安重根), 황포강(黃浦江)에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저격한 김익상 (金益相), 앵전문(櫻田門)에서 일본 천황 유인(裕仁)을 저격한 이봉창( 李奉昌),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白川義則)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尹奉吉)의사 등은 모두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한국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희망은 결코 몽상이 아니며 오래지 않아 반드시 실현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완용 (李完用)은 본래 그 조상들이 고위고관을 지낸 귀족의 후손으로 부유한 집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의지가 굳고 냉혹한 성질에 시기심이 많았다. 한국혁명의 여명기에 있어서 매우 열렬하게 수차의 정치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제법 민중의 호응도 얻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들어서자 곧 정권쟁탈에 급급하여 친러시아파의 영수가 되었다. 일본은 재빨리 이완용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그를 매수한 것이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매우 소심한 방법을 썼다. 일본의 힘을 이용할 뿐, 그들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정치 야욕에 어두운 이완용은 모르는 사이에 일본의 이용물이 되었다. 이미 발은 진흙땅에 빠져 들어가 끝내 헤어나질 못했다. 게다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이완용은 한국의 역적이라는 사실무근의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이 이러한 간계를 쓰는 목적은 2가지였다. 첫째는 이완용을 신뢰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의 언행을 의심하게 하므로써 장차 그의 사회적 신용을 완전히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고, 다음은 역적으로 몰린 이완용이 제2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여 완전한 한국의 역적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완용도 이런 일본의 간계를 몰랐으므로 자신은 종래의 애국자적인 입장에서 허무맹랑한 말로 민중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세가 나날히 약해짐을 통탄하며 친일로써 나라를 구하는게 옳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자신의 입으로 세상 소문이 사실임을 밝힌 셈이다. 민중은 이제 “이완용은 철저한 역적이다”라고 단정을 내리니 이완용 또한 민중과의 접촉을 피하게 되고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끝내 후회하지 않고, 반대로 오기가 나서 더욱 철저하게 나라와 국민을 해치고자 하였다. “일을 하지도 않고 억울하게 쉬지는 않겠다”하여 하등의 거리낄 바가 없었다. 이는 실로 뜻밖의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제일 관문이다. 그는 사리사욕을 위해 우두머리가 되고자 대담하게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러나 적의 앞잡이가 그 한사람은 아니었다. 송병준 (宋秉畯), 이용구 (李容九), 조중응 (趙重應) 등 아첨하는 무리는 각양각색으로 공을 다투었다. 그러므로 그는 “안했으면 몰라도 뛰어든 이상 남에게 뒤질 필요가 없다”고 결심했다. 이같이 하여 그는 가장 악질적인 앞잡이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둘째 관문이었다. 그는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한정없는 큰 죄를 범했다. 후에 이재명 (李在明)의 저격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 채찍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그 운명은 울고 웃을 수 있는 자유도 구속 받은 채 결국 조국을 팔아 넘겼으니 천추만대에 죄인이 된 것이다. 이제 역적 왕징웨이의 과거를 살펴보자! 그의 지나온 길이 이완용과 교묘하게 들어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흥미있는 문제이다. 역적 왕징웨이의 가계(家系)·가산(家產), 총명함·성질, 명예욕, 초기의 구국사업, 몽상적인 정권욕, 기회주의적인 친 러시아정책, 친일구국, 애국지사에게 저격당한 일 등 여러 반역의 무리[양홍지(梁鴻志)·왕극민(王克敏) 등]와 공을 다툰 일, 비밀리에 매국협정을 한 일, 이에 대한 왜적의 대우, 어느 한곳 이완용의 행로와 다른 것이 있는가? 역적 왕징웨이는 일찌기 이완용의 매국적인 궤도를 그대로 달렸는데 더구나 이완용이 철저한 매국노가 되게 한 마음의 제1, 제2 관문까지 그대로 겪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각처의 상황과 내포하고 있는 조건들이 30년 전의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도에는 광명이 있을 뿐, 결코 왕징웨이 때문에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와 이완용은 그 말로가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완용이 한국의 역적이 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히 알고 있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반역 목적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광적인 역적 왕징웨이가 민중을 속이려 한다면 제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누가 그를 당해 내겠는가? 만약 역적 왕징웨이가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면 이완용은 왜 한국을 구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완용은 한국의 스승을 따라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중일전쟁은 3년간에 걸쳐 그 전선이 4천킬로에 달하였다. 왜적은 현재 인적·물적·재정적인 힘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경제공황 속에 붕괴하려는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빨리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황은 더욱 확대되어 뜻하던 바와 같이 되지 않자 산궁수진(山窮水盡)한 왜적은 이때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다. 왕징웨이를 요직에 올려 난국을 적당히 대처하여 그 붕괴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소위 중국으로 중국을 제어하는 것인 바, 전쟁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하는 정책이다. 또한 적의 정부요인 요나이(米內)가 정책을 밝히기를, 군사적인 면에 덜 치중하고 힘을 분산시켜 정치 및 경제면으로 방향을 돌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역적 왕징웨이는 거의 죽어가는 왜적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키는 강심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장뇌작용을 할 수 있는지는 상관할 바 아니라도 사실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의 말은 모두 왜적이 지시하는 것들로서 왕징웨이는 무대위에서 꼭두각시역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거처는 왜적의 물샐틈 없는 감시하에 말과 행동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왜적이 그에게 준 수백만 원의 대가이다. 중국을 구하자는 그의 말은 바로 왜국을 구하자는 것이고, 그가 지껄이는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바로 노예주의인 것이다. 왜적이 중국을 침략한 목적은 바로 중국 4억 5천만 인구의 고혈을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화북(華北)·화중(華中)·화남(華南) 각 지역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화북 연락부 아래에 또 제1, 제2 경제국을 설치하고, 그 직할하에 무슨 ‘화북개발회사(華北開發會社)’·‘화중진흥회사(華中振興會社)’·‘ 중국연합준비은행( 中國 聯合準備銀行,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 화흥실업은행 (華興實業銀行,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이니 하는 등의 허수아비 경제금융기관을 조직했다. 또한 점령지역내의 곳곳에 크고 작은 수십개의 일본과의 공동경영이라는 허수아비 은행·스파이 은행 따위를 설치했다. 또한 무슨 전기회사·전신전화회사·운수회사·성냥회사·광업회사·제철회사·수산회사·기선회사·수도회사·잡사회사·제염(製鹽)회사·방직회사·제분소·정미소니 하는 등의 무려 수 백 가지에 손을 대었다. 그밖에 점령지역내의 철로와 도로를 완전히 정리하여 교통망을 확보했다. 그들은 이같이 많은 일을 벌려 놓았지만 그 중에서도 착취기관만은 아주 완벽하게 설치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붙들지 못했다. 이유는 재벌들이 모조리 모두 대륙으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민족의 자본을 끌어 들이려고 점령지역내에 들어갔지만, 일반 지주와 소상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일면 왕징웨이로 하여금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퍼뜨리게 하고, 또 일면으로는 서민들에게 작은 혜택을 베풀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았을 때 30년 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전후의 사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적이 처음 한국에 공격해 을 때 백성들은 모두 비분해 하고 두려워하여 일제히 심산궁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병합한 후, 곧 숨어버린 사람들을 끌어내는 방법을 쓴 것이다. 도시에 모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고 세금을 감해 주는 등, 작은 혜택을 베푸는 듯했다. 또한 미신을 장려하고 중대한 반일분자라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기 공작은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다.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몇몇 시골 노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온 후로 우리 사는게 전보다 좀 나아졌어” 라고.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1년도 되지 않아 시달림으로 날을 보내게 되었다. 2, 3년쯤 지나서는 재산·가옥·농지들이 모두 동양척식회사·금융조합 등 착취기관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가련한 이들은 대소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났다. 남부여대하여 동북쪽의 황야를 향해 유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매우 불행스러운 일이다. 30년 후인 현재 나는 충칭 거리에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옛날 한국에서 들었던 것과 아마도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이렇게들 말한다. “이곳은 물건이 너무 비쌉니다. 며칠 전 고향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곳은 살기가 아주 좋아졌다나 봅니다. 전처럼 영망은 아니라니 나도 이젠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읍니다. 여기서는 하루를 보내기도 힘이드니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옛날 우리의 처지가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앞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는 꼭 구해주려고 하겠지만 이 경우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나에게 매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어찌 할 것인가! 후방의 인심이 불안정하면 전방의 승리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후방 인심을 안정시키는 중요조건은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비록 전시에 있어서 물가의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현재 충칭 물가의 폭등은 단지 전시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조건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위적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정부를 도와주고 격려하므로 억제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적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의 물가 앙등은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본토의 2, 3배 이상이나 되는 중국영토를 점령하더라도 제일차대전 중의 독일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경제의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점령구내의 모든 물자를 바닥이 날 때까지 수탈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인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러는 것일까? 노동자·농부·상인·학자·정치가 할 것 없이 절대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 중국국민의 생활은 비교적 다른 교전국보다는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닥쳐올 많은 역경이 있지만 최후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광명된 앞길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투 노력해야 한다. 절대 굽히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국가 민족을 통일하기 위한 대계는 반드시 정부에 협조하고 최고 통수자를 옹호하며 다같이 국난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도중에 한 명이라도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안주(安住)하고 싶고 영원히 복을 누리고 싶다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만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그것을 타도하기에 앞서 먼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지만 역적 왕징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원한은 왜적보다는 역적 왕징웨이에게 더 사무치지 않은가 ! 왕징웨이는 중화민족의 패륜아일 뿐 아니라, 전인류의 독충(毒虫)이다. 일본과 그 도당을 제외한 전세계가 그에게 침을 뱉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독균박멸(毒菌撲滅)을 위해서는 강력한 소독약을 써야만 한다. 혹 이에 소홀하면 그 독성은 넓게 만연될 것이 아닌가 ! 우리의 구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하면 먼저 그들의 앞잡이 왕징웨이를 없애자” “중국이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장위원장의 항전을 옹호하자”. “동부아시아의 영원한 평화 수립을 위해선 혁명지도자 장제스 장군을 옹호하자.” 이완용과 왕징웨이 - 한민 (韓民) 제1기 제1호 지난날 한국을 망하게 한자는 이완용이고, 오늘날 중국을 팔아먹으려는 자는 왕징웨이다. 둘다 적을 아버지로 여기는 (認賊作父) 민족의 변절자이며 일제의 앞잡이 이기도 하다. 한중에게 불행이 있다면, 왕징웨이와 이완용이 비록 생은 다르지만 서로 하는 일마다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3.1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왜 총독부 당국은 조선의 앞잡이들에게 진압책을 구했다. 이완용은 가장 먼저 꼬리를 흔들며 3가지의 정책을 바쳤다. 1. 해산을 권고한다. 2. 군대를 보내어 무력시위를 한다. 3. 학살을 감행한다. 이는 지난 여름 중국 각 식문에 폭로된 왕징웨이의 친일적인 책동, 난창, 창사, 난닝 등지에 대해 진격을 권하고, 주요 도시를 폭격하게해 국민정부를 위협한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왕징웨이는 적이 곧 무너질때, 국가의 항전이 승리할 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의 생존을 돌보지 않고 있다. 동서남북을 모두 팔아먹고 자연과 자원을 팔아먹어 대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버린 '일왕밀약' 을 체결한 죄는 이완용보다 더 심하다. 적이 일왕밀약을 가볍게 승낙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 1939.12.30)
가오쭝우가 1940년 1월 22일자 홍콩의 대공보 (大公報) 에 폭로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 (가오쭝우는 비밀리에 일어로 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일본어판을 찍어 대공보에 폭로했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1939.12.30 왕징웨이측 : 저우포하이 (周佛海) , 메이쓰핑 (梅思平) , 린바이셩 (林柏生) , 저우룽샹 (周隆庠) 일본측 : 카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 스가 히코지로 (須賀彥次郎) , 야노 마사키 (矢野征記), 이누카이 다케루 (犬養健) 요령 (要領) 일지 양국 정부는 ‘부속 문서 1’에 기재된 새로운 일지신관계의 원칙을 준봉하여 양국 간의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한다. 사변 중 새로운 국교 관계 조정 이전 이미 존재해왔던 사실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태의 변화에 따라 전조의 원칙에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사변이 계속되는 동안 불가피하게 존속하고 있는 특수사태의 변화 및 해결, 나아가 사변의 해결은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위의 2개 항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 과정을 거친다. 부속문서 1 (일지신관계조정의 원칙) 일만지 삼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서로 선린하여 결합하고, 동아화평을 공동의 중추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한 기초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초로 한다. 일만지 3국의 일반적인 제휴 및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등의 원칙을 설정한다. 화북지역과 몽강을 국방 및 경제상의 일지강도결합지대로 설정하고, 몽강은 추가적으로 방공을 위하여 군사적, 정치적 특수지위를 특별히 설정한다. 장강 하류에 경제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에 특별지위를 설정한다. 위 열거된 항목의 구체적인 사항은 ‘부속 문서 2’에 기재된 주요 항목들을 기준으로 한다. 부속문서 2 (일지신관계조정요항) 친선우호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여 동아화평을 확보하며, 선린우호를 위해 상호보완과 우호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인정하고, 일본과 만주는 지나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3국은 국교를 성립한다. 일만지 3국 정부는 정치,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상호간의 우호를 훼손할만 한 조치와 원인을 차츰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실시하며, 제삼국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조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협력하여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기여 한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고문을 파견하여 신건설에 협력하게 하고, 특별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 중요기관에 고문 직원을 배치한다. 일본과 만주국과의 선린관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일본은 단계적으로 조계와 치외법권 등의 철폐를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방공에 협력하고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의 구역에서 공산당 분자와 조직을 척결하고, 방공을 위한 정보선전에 서로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공동방공의 실행과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군대를 화북과 몽골의 요충지에 주둔시킨다. 일지방공군사동맹을 별도로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체적, 국지적 정세에 따라 가능한 빨리 철수하되, 현재 화북 및 장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치안이 확립될 때까지 계속 주둔한다.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 함선 부대가 장강 연안의 특정지점과 화남의 특정 제도에 주둔하여 정박하는 것을 인정한다. 일본은 대체로 주둔 지역 내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항만과 수로에 대해 군사상의 요구권과 감독권을 유지한다. 중국은 일본 주둔 지역내의 경찰대 및 군부대 등 무장 단체의 배치 및 군사시설의 설치는 당분간 치안 및 국방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으로 하고, 일본은 중국 군대와 경찰대 건설에 대하여 고문 및 교관 파견, 무기 공급 등에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지속적인 연대와 공동방위를 실현하기 위해 산업, 경제 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상호보완의 취지를 바탕으로 공동호혜를 주 목적으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하여 위의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각각 필요한 협정을 체결한다. 화북과 몽강의 자원, 특히 몽강의 자원 개발과 이용해 대해서 중국은 공동방위 및 경제결합을 위하여 일본에 특별한 편리를 제공한다. 즉, 특정 자원의 개발과 이용에 관하여 경제경합지역에서 편익을 제공한다. 일반 산업에 대해 일본은 중국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생산량 증대와 농업에 관련하여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이의 개선을 지원한다. 중국의 재정, 경제 정책 수립과 관련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원을 한다. 교역에 관하여 적절한 관세와 세관 제도 등을 채택하여 일만지 간의 일반통상을 진흥시킴과 동시에 일만지간의, 특히 화북과의 물자 공급을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하게 해야 한다. 중국의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관하여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 협력을 하고, 전 중국의 항공 발달, 화북의 철도 (롱하이선 포함) , 일지간 및 중국 연안의 주요 해운 및 강의 수운, 장강 하류의 통신 발전을 일지교통 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본과 협력하여 신 상하이 건설을 추진한다. 비고 신중앙정부는 사변 이래 중국 내의 일본국 신민이 입은 권익의 손실을 배상한다. 신중앙정부는 일본과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하기 전에 일본과 관련문제에 대해 일본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부속문서 1. 임시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의미하는 화북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및 황하 북쪽의 허난성 일대 지역을 의미한다. 화북과 일본, 만주는 국방, 경제적으로 강도 높은 결합지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따라 일본-만주 지역과의 업무 처리를 위하여 화북정무위원회 (가칭, 이하 동일)을 설치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과 구성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협의하되, 중앙정부 수립전에 왕(王,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씨와 왕(汪, 왕징웨이) 씨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 구성은 일지신관계가 정상화 되는 시점에 아래에 기재된 항목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도로 하되, 그 이전에 상한선을 두고 순차적으로 정리한다.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화북정무위원회가 이를 실질적, 잠정적으로 승계하여 정무 이행의 원활을 도모하게 하고 사람들을 동요하지 않게 한다. 공동방위와 방공에 관해서는 (1) 일본군 주둔에 따른 사항을 처리한다. (2) 일지 방공,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3) 기타 일지 군사협력을 처리한다. 경제제휴, 특히 매장된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은 일본 – 만주국- 화북의 물 공급에 관한 것으로, (1) 일본의 매장자원 개발 및 이용에 관한 특별 편익 사항을 처리한다. (2)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물자 처리에 관한 합리적 사항을 처리한다. (3)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통화 협력에 관한 사항 처리한다. (4) 항공, 철도, 통신 및 주요 해운의 지원 협력 사항 처리한다. 일본인 고문 채용 및 직무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중앙정부는 연합준비은행제도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는 기간동안 필요한 지원을 한다. 4-1 화북정무위원회와 중앙정부간의 주요 사항을 일시적으로 규율한다. 화북정무위원회는 소요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한다. 이를 워해 관세, 염세 및 통원 세칙상 중앙세이나 관세 수입의 일정 비율과 염세 수입의 영어부분, 통세는 일시적으로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상술한 국세징수기관의 감독은 중앙정부가 화북정무위원회에 위임한다. 4-2 화북정무위원회는 각종 채권을 보유, 운영한다. 4-3 관유재산은 계속하여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차후 조정한다. 4-4 세관, 우편, 항공은 중앙정부의 관리하에 두되, 점진적으로 이를 실현하게 한다. 4-5 룽하이선의 관리 및 운영은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4-6 제삼국과의 외교교섭은 중앙정부가 하고, 일본 – 만주국간의 교섭 및 지방과의 교섭처리는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2. 유신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유신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유신정부를 동요시키는 것을 막되, 통합을 유도하여 중앙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된 후 유신정부는 양해하여 정무위원회 등을 설치하지 않는 만큼, 왕징웨이 측은 유신정부의 주요인물의 체면과 위상을 고려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되고 유신정부가 해산될 때 중앙정부는 유신정부 기존의 정무를 계승하여 정무를 원활하게 수행하여 관헌과 인민이 불안을 가지지 않게 한다. 장강 하류 지대에서 일지경제강도결합을 실현하기 위한 일본의 특별요구는 다음과 같다. 4-1. 신 상하이에 대하여 신 상하이 건설에 관한 사항에 협력한다. 신 상하이에서 일본군 주둔에 따른 조치사항을 처리한다. 신 상하이에서 항공 및 주요 해운인 장강의 민간 해운 및 통신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기타 일반 일지협력에 관하여 신 상하이에서 처리한 사항을 처리한다. 4-2. 위의 일본측의 요구를 용이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일지경제협의기관의 설치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3. 몽강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이야기하는 ‘몽강’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북쪽의 (만리장성 안쪽 지역도 포함) 의 지역을 의미한다. 몽강은 국방, 경제적으로 일만지 삼국의 강도결합지대로서 특수성을 고려하여 외교 이외의 행정, 입법, 사법, 군사, 대 몽강 교섭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자치를 인정하는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이다. 몽강연합자치정부와 신중앙정부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왕징웨이 또는 그의 대표자와 덕왕 및 그의 대표자와 회견을 통해 문서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한다. (1) 중앙정부는 몽강연합자치정부의 고도의 방공자치를 인정한다. (2) 두 정권의 관계 조정에 관하여 본 양해에 따라 신중앙정부 수립 후 별도의 협정을 체결한 4. 전항의 이해가 성립될 때 몽강연합자치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정치회의에 참석한다 5. 중앙정치회의에서는 제3항의 양해 범위를 벗어난 사안을 다루지 않는다. 4. 샤먼 왕징웨이 측은 샤먼을 특별행정구역으로 두는 것을 인정한다. 5. 화남 연안의 특정제도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 가운데 하이난 섬 지구의 중앙정부 직할의 행정조직 및 군사처리기관은 본 섬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바탕으로 좌기의 요구사항을 처리하도록 한다. 일본군의 주둔에 수반하여 발생한 사항 일본과의 군사 및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 국방상 필요한 특정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한 사항 항공, 통신, 해운에 관한 사항 비고 본 요령은 장래 일지간에 약속해야 할 사항들 및 지나 내정에서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항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가오쭝우의 폭로에 대한 왕징웨이의 반응은 여기를 클릭 : ) (중국연합준비은행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미 국무장관 성명 (1940.3.30)
코델 헐 (Cordell Hull) 제 47대 미합중국 국무장관.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무려 12년 가까이 수행하였다. 미 국무장관 성명 (왕 정권 성립에 관한 미합중국 국무장관 성명) Statement by the Secretary of State of the United State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Wang Government 1931년 이래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비추어 볼 때, 난징에 새 정권을 세우는 것은 한 나라가 이웃 나라에 군대를 통해 그 의지를 강요하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과 정상적인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차단하는 계획의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난징의) 성장은 ‘외부 권력’ 의 지도 아래 중국에서 기존에 설립된 다른 정권의 제도와 모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기능적으로 특히 외부 권력의 이익을 선호하고 미국과 다른 제삼국 국민들이 법적으로 정당한 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누리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외부 세력’ 의 고위 관계자들이 자국은 상대국의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의도가 있으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발전하면 이러한 의도가 증명될 것이라 말한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난징에서 새워진 새로운 정권의 모습을 보면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모두 그러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을 국가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의 입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극동 지역의 상황에 대한 미합중국의 태도와 입장은 여러 번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태도와 입장은 변함이 없다. 12년 전 미합중국 정부는 다른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현재 충칭의 정부가 대다수 중국 국민들의 충성과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라 믿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한 계속하여 충칭의 정부 를 정당한 중국 정부로 인식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명에 난징국민정부는 물론, 일본도 불쾌감을 들어내며 이에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마 야키치로 (須磨弥吉郎, (1892~1970) ) , 일본제국 내각 정보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1941년의 대미교섭에도 참가하였다. 일본 외무성 반박성명 (비공식) - 스마 야키치로 외무성 정보부장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현재 지나에 일어나고 있는 신동향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8년 12월 30일 미국 정부의 대일본통첩에서 스스로 말한 “미국 정부는 극동 사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에 완전 모순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일본군은 지나 전체의 4할가량을 점령하고 있다. 해관 수입의 약 95%는 왕징웨이씨를 수반으로 한 국민정부의 취득이며, 주요한 해항 정부는 모두 일본군에 수중에 있다. 현재의 이런 사실을 미국 정부는 결코 눈감을 수 없다. 헐 국무장관은 왕징웨이씨를 일본군이 추천하였다고 하나 왕징웨이씨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동아 화평을 위해 진췌하고 일지 양국과의 긴밀한 제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결심 아래 이번의 국민정부 성립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헐 장관은 일본이 지나를 경제적으로 봉쇄한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이는 전시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의 나타나게 될 경제적 성과 등을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미국이 본래 화평을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미국이 현재 일본과 싸우고 있는 충칭 정부에 대하여 불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노무라-그루 회담 (1939년 말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노무라 키치사부로 (野村吉三郎)와 주일미국대사 조지프 그루 (Joseph Grew) 의 회담을 이야기한다.) 이래 미국이 선결적 정신으로 일본과 토의하려 한 사실과도 모순된다. 요컨대 미국 정부의 이번 행위는 스팀슨 원칙 (헐 외무장관 바로 전의 외무장관인 헨리 L. 스팀슨 (Henry L. Stimson)을 의미한다. 스팀슨은 만주사변 후 무력에 의한 국제적 영토 변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의향과 스팀슨 일파의 일본침략불승인위원회 (American Committee for Non-Participation in Japanese Aggress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1938년에 설립되었다.) 가 최근 대일금수를 호소하고 충칭측에 원조를 하고 있는 사실은 동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려는 제국에 실로 불쾌한 사실이다. 중화일보 반박성명 중국은 대외적으로 문명국가로, 문명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문명국가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외국인의 중국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외국인의 소위 중국에 대한 특권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정부 환도 선언 및 국민정부의 정강, 그리고 왕 선생과 신문기자단의 담화 중에도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에 대해서도 이로서 답을 하려 한다. 국민정부가 부인하는 것은 부당한 중국에서의 특권뿐이다. 이러한 특권들은 불평등조약에서 비롯되거나 불공평, 부정당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중일전쟁을 이용하여 새로운 중국에서의 특권을 획득하여 영국을 대신하여 중국을 지배하려는 주인 역할을 하려 하고 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기도에 대해 미국의 만족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헐 국무장관에게 당당히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일화평을 위해 실현한 국민정부의 환도는 중국 국민이 3년 동안 일본과의 항쟁 결과 도달한 결론에 의한 것이다. 헐 장관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은 이미 대중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지난번 소련-핀란드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소련과 핀란드의 평화조약 ( 1940년 3월 12일 체결된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의미한다.) 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미국 금융계는 소련이 화약을 통해 획득한 것을 공연하게 승인해왔다. 실로 이는 미국의 국력에 의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본인도 빨리 미국이 이 평화조약을 승인하기를 바랬다.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책약은 먼저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의 중국 내 세력을 소멸시킨 후에 일본을 타도하여 중국을 제2의 라틴아메리카로 만들려는 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심리는 대중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며 대중들은 이를 아주 비판하고 있다.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가 12년 전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승인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하였고 이는 국민정부가 중국의 정통정부를 계승하였고 때문에 이를 승인하였다는 국민정부로 하여금 충분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헐 장관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미국이 승인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민정부를 승인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위협을 가해왔으나, 국민정부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였고 헐 장관은 예전과 같이 포효하고 있으나 역시 국민정부의 난징 환도 이후의 발전을 막을 순 없다. 미국의 각종 위협과 포효는 오직 미국 자신의 역사에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는 것에 불과하기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