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민회 (大民會, 1938~1940)
최종 수정일: 2024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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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작성했던 3개의 포스트를 먼저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두 글중 특히 신민회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면 본글을 읽는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미리 적어둡니다.
擁護汪精衛先生 (왕징웨이 선생을 옹호하자) 라고 적힌 선전 문구벽화. 선전문구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야기해보려는 것은 이 선전구호 위에 보이는 이슬람 문양과도 같은 이 문양에 대해서다.
이 사진은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왕징웨이 정권' 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사진이자. 동시에 영어로 'Wang jingwei Regime (왕징웨이정권)' 이라고 검색했을때 이미지 부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구글에 검색해보자, 이미지코너에서 쉽게 이 사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옹호왕정위선생(擁護汪精衛先生)" 이라는 구호가 가지는 의미또한 대단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통해 이 사진을 접했을때 질문하게 되었던 것은, 과연 사다리 근처에 있는 문양은 무엇인가? 에 대한것이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초승달과 별 문양과 같은 문양 (물론 이러한 것이 완전하지는 않다는것, 달의 방향은 반대방향을 하고 있지만 실제 초승달과 별은 북반부에서는 반대방향이라는 것... 과 같은 정보는 일단은 무시하고) 과 너무나도 유사한 이 문양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양이 이슬람의 문양과 닮은것으로 보아 혹시 중국대륙 내에서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있었던 지역에서 이러한 親 왕징웨이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었던 것이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回族) 과 같은 이슬람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이러한 행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이 중국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왕징웨이정권과 일본의 점령지 중 회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이러한 행동을 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러한 이슬람문양과 비슷한 문양의 정체는 바로 1938년 설립된 대민회 (大民會) 라는 조직의 문양이었다.
대민회의 깃발 (재현, 글씨체와 색채도에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한다.)
대민회의 문양. (재현) 심지어 색도 튀르키예와 비슷한 붉은색을 사용하면서 더더욱 이슬람문화권의 문양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깃발의 모습을 보면 앞의 사진에서 보았던 벽화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의 벽화가 대민회측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39년 작성된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 에서는 이 문양의 의미도 설명해두어 그 으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문양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는 이슬람문화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日 (태양, 붉은 동그라미) : 하늘에 빛나는 붉은 태양을 상징, 동아를 이끄는 일본을 상징
月 (달, 초승달) : 갈고리처럼 하늘에서 빛나는 존재로서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상징
星 (별) :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처럼 유신정부와 중국인민의 빛나는 단결을 상징
청색 (깃발의 배경) : 천지의 광대함, 밤의 순환, 우주의 맑음을 상징하며, 중일 협력이 동아의 평화와 번영을 건설하고 평화와 번영의 땅을 영원히 수호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
본래라면 이제 대민회라는 조직에 대해 설명해야겠으나, 조직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이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더 이어나가려고 한다. 문양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계속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혼란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대민회측에서 사용되는 문양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이를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민회에서 만든 부채, 오색기와 함께 대민회기가 그려져있다. (여기서는 문양이 반대방향으로 그려져있다.)
이와 같이 문양이 반대로 그려진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반대된 문양이 등장하게 된것인가? 처음 추측으로는 두가지버전이 혼용되었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에서 발간한 서적들을 탐색해본 결과, 이 두가지버전은 혼용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반대로 문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민회가 창설된 1938년 이래 1938년 12월 대민회출판부에서 출판한 《大民會的任務 (대민회의 임무)》 를 비롯한 대민회가 창립되었던 1938년의 잡지와 출판물에서는 지금의 튀르키예의 월성과 같은 방향의 깃발이 사용되었다. 즉, 위의 부채에 사용되었던, 현재 튀르키예를 비롯한 이슬람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우리에게 친숙한 방향의 로고가 초기의 로고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러한 경향은 1939년에 와서도 이어졌다. 대민회가 1939년 2월 출판한 《大民會宣言 (대민회선언)》과 대민회가 1939년 2월부터 자신들의 라디오강연을 정리한 《播音演講集》 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9년 7월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거꾸로 사용되게 되었다. 1939년 6월 30일에 대민회에서 발행되었던《中日同文同種考(중일동문동종고)》 에서는 문양이 본래대로 사용되었던 반면,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칠칠동아민족해방2주년집, 1939.7)》 를 비롯한 1939년 7월부터 발간되는 출판물에서 문양이 거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대민회가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39년 6월과 7월에 대민회에서 출판한 서적의 문양차이. 중일동문동종고의 "6월 30일" 이라는 발행날짜는 더더욱 7월부터 문양이 바뀌었음에 확신을 주는 자료로 적용한다.
따라서 이번글을 읽으면서 두 문양을 다루는 자료가 등장할때 문양의 방향을 기준으로 1939년 7월 전인지 후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이번글을 읽으면서 이점에 미리 파악하고 읽는다면 본글을 읽으면서 무수히 등장하는 문양을 보고 시점을 파악할수 있음은 물론 본글을 이해하는데 더더욱 도움이 생각되리라 생각해
이러한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1939년 7월이라는 날짜를 본격적으로 이글을 시작하기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대민회의 문양변화.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좌우가 반전되었다.
그렇다면 대민회라는 조직은 어떤조직인가?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초기 빠른속도로 점령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전쟁시작으로 부터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는 등 일본은 전쟁초기 고무적인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광대한 중국대륙이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점령지를 다스리기에 중국의 막대한 인구와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게릴라들은 일본의 강압적인 군사지배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괴뢰정부를 성립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법을 구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중일전쟁으로 부터 1년이 다되어가던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본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유신정부(中華民國 維新政府)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성격을 가장 간단하게 규정하자면, 일본이 유신정부보다 3개월정도 앞서 설립한 1937년 12월 베이징에 세웠던 중화민국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의 2호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화북을 지배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화중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중지나방면군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두개의 괴뢰정부의 형성과정에서는 동시에 특별한 과정을 하나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신정부의 운영과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친일이면서도, 신정부를 지지할 수 있는 범대중성 조직의 구성이었다. 일본과 그들의 협력정부는 점령지 내의 민중들로 하여금 이전의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아닌, 자신들의 새로운 단체에 지지를 가하면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베이징의 임시정부에서는 신민회 (新民會) 라는 조직이 구성되었다. 신민회는 해당 신정부에서의 "유일선전조직" 으로 활동하고 여러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일종의 국민당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일본과 임시정부의 통치를 더더욱 용이하게 하는데에 기여했다. 유신정부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것이 대민회 (大民會) 라고 할 수 있겠다. 임시정부에는 신민회가, 유신정부에는 대민회라는 비슷한 선전조직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민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해에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이다.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도 신민회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데, 신민회는 본래 구성과정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또한 신민회를 구성한다라는 계획이 이미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부터 일본에 의해 계획되었다. 대민회 또한 구성과정에서 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다는 점에서는 특징을 공유하지만, 형성과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대민회의 성립과정. 초창기부터 일본이 개입했던 신민회와는 조금 다른 과정을 보인다.
대민회의 뿌리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직후 상하이공동조계(상해에서 성립된 동아회(東亞會) 라는 조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아회가 형성된 시점은 중일전쟁 직후로, 상하이공동조계라는 국민정부와는 분리된 환경이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아회를 만든 인물들은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친일가문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도움속에서' 동아회를 만들 수 있었다. 전쟁 직후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이후 화평파라고 불리는 인물들도 이때까지는 완전한 친일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동아회의 경우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이런 완전한 친일성향을 보이고 있다는데서 그 구성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중국과 악관계를 맺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상해공동조계측에서는 동아회에 탄압과 제재를 가하면서 상하이전투가 진행중이었던 1937년 10월시점에서 동아회는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다.
상하이가 일본에게 함락된 후, 1938년 1월, 동아회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다시한번 조직이 구성된다. 이름도 흥아회(興亞會) 로 바꾸고, 일본의 중지나방면군 특무부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를 비롯한 더더욱 많은 인원이 흥아회에 참가하게 된다. 1938년 4월의 시점에서 흥아회는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쑹장(松江) 을 중심으로 4천명 가까운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신정부측에서 흥아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동아회와 이를 계승한 흥아회 모두 친일조직이었으며, 일부 일본인들이 이에 참여하고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유신정부의 입장에서는 두 조직 모두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사(私) 조직이었다. 따라서 유신정부는 이러한 조직속에서 항일분자가 활동하거나, 일본과의 협력보다 단순한 기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활동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유신정부는 직접 이러한 조직 구성에 개입하여, 흥아회가 가지고 있었던 단점을 보완해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려 했다. 이가 바로 대민회였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대민회를 "유신정부의 유일선전조직" 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동아회에서 대민회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이제 완전한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이 된 것이다. 동아회에서 흥아회로 오면서 점점 조직은 확대되고, 더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신민회와 대민회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각자의 정부의 유일선전조직으로 성장했지만, 성립과정에서는 차이가 일정부분 존재했다. 신민회의 경우 결성전부터 일본과 북지나방면군 측에서 완전한 성립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대민회의 경우 기존의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이 이루어졌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성립 → 신민회 성립 (10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 대민회 성립 (65일)
두 조직을 구성하는데에 걸린 시간이 차이가 나는데에도 이러한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하이에서 결성되었고, 7월 15일에는 난징으로 이동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공식적인 대민회의 활동 시작은 7월 15일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대민회의 활동 1주년을 기념하는 발행물이었던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에서 6월 1일이 아닌, 난징에서 활동을 시작한 7월 15일을 1주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존재했었다. 앞에서 보았듯, 일본은, 특히 화북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북지나방면군에서는 신민회를 화북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 이전의 국민당과 공산당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이유로 신민회는 많은 분야에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신민회의 활동예산은 임시정부의 행정위원회 조직보다 많은 책정을 받을 수 있었고, 신민회의 활동은 완전히 임시정부의 국고에서 수급이 되었다. 신민회는 선전활동을 위한 도서의 출판은 물론, 잡지의 출판, 신문의 출판과, 이를 보급하기 위한 보급망의 운영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전활동을 위한 교육시설과, 청소년들의 선전을 위한 청소년조직의 구성까지 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교류에서도, 예를 들어 스포츠와 같은 교류에서도 신민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직업들의 분회와 군사훈련을 위한 훈련소까지 존재했던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화북에서 유일한 선전단체이자 동시에 일종의 유일정체단체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화북에서는, 국민당의 나라가 신민회의 나라 가 되었다고 봐도 무관했다.
大民會是我們民眾自己的集團 (대민회는 우리민중 스스로의 조직) 이라는 대민회의 구호, 대민회가 출판한 도서에서 이러한 구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의 경우 신민회와 다르게 화중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물론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선전단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자적인 출판체계를 갖추고 발행물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대민회출판 (大民會出版) 에서 발행한 잡지 대중국(大中國). 1938년부터 발행되어 대민회가 사라지는 1940년 말까지 발행된다. 일본과 조선이 빨간색, 만주가 분홍색으로 칠해져 중국대륙과 분리되어 있다.
또한 신민회가 청소년조직을 운영했던 것 처럼 대민회 또한 대민청년단 (大民靑年團) 과 같은 청소년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민회의 행동은 이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신민회보다 큰 제약을 받아왔다.
이의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과 유신정부가 대민회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신정부와 일본은 대민회가 신민회처럼 수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아닌, '선전' 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다. 신민회가 단순한 선전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활동에도 매진하며 일종의 정당역할까지 했다면, 대민회는 정부차원에서 이러한 정치활동, 즉 대민회가 일종의 정당으로 보이게하는데에 반대를 표했다. 화중에서는 국민당의 나라가 대민회의 나라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본래부터 신민회가 구성전부터 어떠한 목적을 위해 구성된 단체였음이 분명했다면,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부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민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하고 신민회의 구성을 집행했던 북지나방면군과 달리 대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지나방면군은 군 내에서도 대민회를 어떠한 조직으로 구성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이 존재하지 않았다. 흥아회라는 조직을 대민회라는 조직으로 개편하면서 정부의 관리체제 안에 두고싶었던 것은 맞으나,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고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민회의 이전조직이었던 흥민회는 물론 대민회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 또한 대민회를 만드는 과정이 신민회의 형성과정처럼 연구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며
"(대민회는) 사실 졸속주의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実は拙速主義の下に始めたもの。)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부족한 준비과정, 부족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사실상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었다. 대민회는 더더욱 문제점이 있었는데, 앞에서 나는 조선일보를 인용하면서 대민회가 "유신정부의 유일한 선전조직"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중지나방면군의 정치반과 선전반은 대민회와 별도로 선전활동을 진행했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신문사들도 또한 별도의 선전활동을 유신정부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에서는 임시정부와 다르게 선전조직이 일원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대민회와 유신정부의 모습을보면서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의 丸山静雄 (마루야마 시즈오) 기자는
'화북에서 신민회가 만들어졌으니까 화중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번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앞에서 언급한 와키 미즈오 소좌를 비롯한 인원들이 신민회의 영향을 받아 대민회를 만든것으로 보인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민회와 신민회는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고 일정부분 유사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구성과정이나 그 역할과 권한과 영역에 있어 차이가 존재했기에 대민회와 신민회를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오히려 대민회는 신민회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민회가 신민회의 영향을 받았음을, 대민회가 신민회와 유사점을 보이는 부분에는 단체를 지탱하는 사상에도 나타난다. 신민회는 신민주의(新民主義) 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신민주의에 대해서는 신민회를 다루는 포스트에서 더더욱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본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만 서술하려한다. 신민주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가지고 있는 삼민주의(三民主義) 를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신민회의 영향으로, 대민회 또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이가 바로 민덕주의(民德主義) 다. 민덕주의가 만들어진 이유 또한 화중에서 이전 국민정부의 삼민주의를 대체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민회강령(大民會綱領) 이라는 것으로, 이는 다음과 같다.
대민회의 "초대" 강령. 대민회의 성립부터 1940년 초까지 사용되었다.
대민회강령 (大民會綱領)
1. 민덕주의를 진흥하고 실천하여 신중국 국민정신을 확립한다.
振興實踐「民德主義」確立新中國國民精神
2. 정부의 가르침을 보급하고, 민중들의 정서를 상달(고양) 시킨다.
政敎普施,民情上達
3. 생활을 혁신하고, 민력 (국민들의 경제력)을 강화한다.
革新生活,強化民力
4. 중일제휴로 동아의 자주번영을 도모한다.
中日提攜, 以圖東亞之自主興隆
강령에서는 신민회의 강령과 유사한점도,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하는데, 우선 "경제의 중요성" 을 언급한다는 것, "중국과 일본의 협력(중일제휴)" 를 강조하는 부분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신민회의 강령과는 아주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바로 초공멸당 (剿共滅黨, 공산당을 금지하고, 국민당을 멸한다) 라는 反 국민당적 구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속에서 대민회의 강령은 신민회보다 강압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일정부분의 온건한 구호가 등장한 것은 당시의 상황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되는데 대민회는 앞에서 보았듯 신민회보다 완전한 장악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신민회처럼 대범한 움직임을 하기에 어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민회보다 조직도 미약하고, (신민회의 경우 조직이 기본 만명 단위였지만, 대민회의 경우 1939년 2월 기준으로 전체 7천명도 안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영향력도 약한 대민회가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하지 않았던 화북도 아닌, 2차북벌이후 완전한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던 화중지역에서 신민회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기는 어려움이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온건한 이유는 뒤에서도 서술할 유신정부 자체의 특징이 존재했다.
1939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대민회의 연등. "유신정부만세 (維新政府萬歲)" 라고 적혀있고 , 측면에는 민국28년 3월 28일 (1939년 3월 28일) 이라고 적혀있다.
대민회와 신민회의 모습은 달랐지만,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선전조직으로, 대민회는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대민회 역시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8년 12월 18일,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것이다.
정부 통합과정에서 이렇게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이미 이전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두 정부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교' 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두 정부는 통합과정을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통합논의가 1938년 후반기부터 진행되었음을 생각하면, 유신정부는 정부수립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통합논의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존재가 임시적이라는 것을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합된다면 베이징의 임시정부에게 흡수되는 모양새를 취할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저자세' 가 있었기에 두 정부의 통합과정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설득하기 위해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화평운동을 진행해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면 "신중앙정권 (新中央政權)" 을 건설해줄 것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임시정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신중앙정권' 이 만들어져야 화평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일본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이야기했었다.
이렇게 정부 통합과정에서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완전한 신중앙정권' 구상
하지만 이에 대해 임시정부측과 유신정부측은 표면적으로는 찬성하고 필요성에 동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를 표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신정권에서 왕징웨이가 주도권을 장악하는것에 반대를 표했고, 이로 인해 왕징웨이는 '통합신중앙정권' 이라는 구상을 량홍즈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구상을 일본측에서 찬성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왕징웨이의 구상에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극강한 반대가 존재했었기에, 새롭게 세워지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은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갖추게 되는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은 명목상으로는 통합되지만 독자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제 우리는 위의 표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왕징웨이의 구상에 반대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유신정부는 결국에는 통합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이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는데, 첫째로, 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던 지리적 조건이 있었다.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의 옛수도 난징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난징은 수도인만큼 이전의 국민당과 그의 이데올로기 삼민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했던 장소중 하나였다. 이러한 난징의 환경때문에 유신정부는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히 작동하지 않았던 화북지역과 다르게 국민정부에 반대하는 모습은 똑같이 보이지만, 임시정부에서 보였던 것 만큼 급진적인 반대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또한 이 지역은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쿠테타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자본가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기에 반공주의의 영향력도 다른지역보다 크게 작용했다.
둘째로, 첫째 사유의 영향으로,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 또한 임시정부와 큰 차이를 보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이 완전한 反장제스 反 국민당 성격을 띄는 친일 주의자가 많았다면,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전부터 쑨원과, 국민당과, 국민정부와 함께 한자들이 많았다. 유신정부에는 국민당과 국민정부 자체에 실망하고 반대하기 보다는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의 독재는 싫어" "국민당은 좋은데 공산당이랑 합작하는 건 아니야" 라는 이유로 유신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충칭의 장제스 국민정부는 "본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데 잘못 굴러가고 있는 것" 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를 해왔지만 거꾸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원들의 입장에서는 왕징웨이의 국민당은 받아드릴 수 있는 대안이었던 것이다.
셋 째로, 유신정부의 구상과 왕징웨이가 구상하는 신정권의 구상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신정부는 정부를 설립하면서 '화평(和平)' , '반공(反共)' , '공화(共和)' 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왕징웨이의 화평(和平), 반공(反共), 건국(建國) 이라는 구호와 오히려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신정부는 장제스의 행하는 일이 독재라면서 비판하면서, 중화민국이 장제스 독재 이전의 훈정(訓政) 정치를 복원하고 민국 초기의 민주정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고 비슷한 정권으로 생각되었지만, 속에서는 신민회와 대민회가 차이가 보였던 것처럼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또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신정부는 화평이라는 목적도, 반공이라는 목적도 일치하고,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또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상극이었던 임시정부나 몽강보다는 원활한 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민회의 발행물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 "중일제휴 (中日提携) " 와 대민회라는 글자를 적어뒀다. (사실 귀여워서 넣음)
넷 째로, 일본은 화북지역에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했으나, 화중지역은 이러한 논의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화북의 특수성' 같은 이유를 들며 화북의 이권만은 지키려고 했으나, 일본의 입장에서도 화중지역정도는, 특히 국민정부로의 정통성을 중요시했던 왕징웨이에게 옛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밑에서 통합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실무자들은 왕징웨이와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통합작업을 진행하던 유신정부의 陳牽(천친, 진견, 유신정부에서 내정부장을 맡음) 과 伍澄宇(우청위, 우등우, 유신정부의 정강을 작성) 의 경우 신해혁명 전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웠으며, 유학과정에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참가하고, 중화민국 수립 이후에는 쑨원의 혁명활동을 도왔으나, 장제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공산당에는 반대하고, 화평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이었다. 과연 이들이 왕징웨이와 엄청난 차이를 가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오히려 왕징웨이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이들에게 왕징웨이와 그의 주장은 충분히 받아드려질 수 있는 주장이었다.
또한 협상과정에서 유신정권 출신의 신정부에서도 지분이 약속되면서 유신정부측 인사들에게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된것이다. 이는 동시에 유신정부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던 대민회에게도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임을 의미했다. 이는 왕징웨이와 임시정부가,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신민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공존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견제와 경쟁, 반대를 일삼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와의 통합협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이 반대와 반대로 일본의 설득으로 '독자성을 지키는' 방법까지 동원함으로서 겨우겨우 합의를 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9년 7월 에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합의가 완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을 량홍즈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량홍즈 또한 초반에는 극한 반대를 표했지만, 협의가 7월부터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후 9월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완전찬성으로 의견이 돌아서게 된다.
(신민회 포스트 참조)
대민회 이야기로 돌아와서, 통합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대민회와 신민회 모두 이제 왕징웨이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에 맞추어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삼민주의와 국민당이 다시 돌아오게 된 상황에서 삼민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두 단체의 사상과, 국민당에 반대하는 모습을 더이상은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민회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의 출범에 불만을 표하고 있었지만, 대민회는 그렇지 않았다. 신민회가 왕징웨이와의 공존에 불만을 표하고 공존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반면, 대민회는 이렇게 신정부 합의를 끝냄과 동시에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신정부는 이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대민회가 문양의 방향을 바꾼것은 놀랍게도 유신정부와 대민회가 왕징웨이의 구상에 동의하고 합의를 끝낸 시점과 일치한다. (둘다 1939년 7월)
대민회가 1939년 11월 발행한 "손중산선생탄생기념(孫中山先生誕生紀念) 발행물.
대민회는 문양이 좌우반전된 1939년 7월부터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발행물의 주제가 기존의 주장에서 벗어나 쑨원, 왕징웨이에 대한 옹호가 시작되었고, (이는 신민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1939년 7월 10일에는 왕징웨이의 라디오 방송에 축전을 보내는 등, 이 시점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을 이미 띄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선생의) "국가와 민중을 위한 분투정신은 감복할 수 밖에 없다.... (중략) 왕선생의 대성질타로 화평과 항전중 어느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충분히 명백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할 지를 충분히 알고있다. 일치협력하여 화평의 실현에 매진해야한다. 이것이 국가를 구하는 길이고 우리를 구하는 길이다. " - 1939년 7월 9일 왕징웨이가 한 라디오 방송에 대한 대민회 성명.
1939년 7월(통합정부합의)~ 1940년 3월(왕징웨이정권수립) 이라는 이 6개월의 과정을 다루는 신문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등) 들을 분석해보면, 대민회의 경우 이시점부터 왕징웨이에 대한 긍정적인 모양새를 많이 취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민회의 경우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1939년 7월 15일, 대민회의 성립 1주년을 맞이하는 행사에서 대민회측은 왕징웨이에게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출마를 종용했고 동시에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수립에 동의한다는 통전(通電) 을 전달하기도 했다 .
대민회 성립 1주년 기념행사, 좌우반전된 신민회의 문양을 또한번 볼 수 있다.
이렇듯 대민회는 1939년 7월이라는 이시점부터,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협상이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이시점을 기준으로 성향이 친 왕징웨이 성향으로 변화해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함께 왕징웨이를 지지하고 이를 선전하는 단체로 변모하게 된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민회 문양의 좌우반전은, 대민회의 성격또한 완전히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민회 문양이 좌우반전되기 전과 된 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신정부의 확실하지도 않은 선전단체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의 왕징웨이 선전단체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좌우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40년이 되어서는 대민회는 완전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를 선전하는 단체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우선 1940년 1월 30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신정부 출범에 맞추어 조직의 새로운 방침을 발표한다.
대민회의 신방침 (大民會的新方針)
1.쑨원의 삼민주의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충하여 왕 선생의 화평건국 정신에 의거하여 동아신질서의 건설의 매진한다.
2. 정당으로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까운 시기에 열리게될 중앙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3. 사업의 중심을 사회사업과 경제선전에 둔다.
신방침의 1항에서 볼 수 있듯이, 대민회는 이시점에서 이전의 민덕주의에서 벗어나 완전한 삼민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또한 왕징웨이에 대한 찬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대민회라는 단체가 이제는 완전한 왕징웨이를 위한 단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항에서는, 정당으로서의 입장을 취하지 않음을 선언하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충돌하지 않겠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민회가 깃발을 국민정부속에서도 오색기로 굳이 바꾸는 행위를 저지르고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라면서 국민당을 견제해왔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0년 3월, 왕징웨이의 정권이 출범하기 한달전에 대민회는 신정부옹호운동(新政府擁護運動) 을 진행한다. 3월 3일부터 5일까지 난징의 회화로(淮海路) 중앙대무대 (中央大舞臺, 현재 난징 친화이구 회화로, 총통부에서 2km 정도 거리가 있음) 에서 학생들 12,000명을 동원한 가두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서는 영화상영, 연극, 연등행렬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난징환도를 위한 준비에 동참하기도 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성립을 기념하는 난징거리의 행진행사에서 대민회의 모습. "화평문(和平門)" 이라는 모형을 들고 전진하고 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대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대민회의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1939년 2월 7천명에 약간 못미치던 대민회의 회원수는 1940년 8월 시점에는 거의 15만명에 이르게 되면서 1년 반사이 20배가 넘는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1939년 말만 하더라도 회원수가 2만명이 되지 못해 대민회측에서 아쉬워 한걸 생각하면 더더욱 큰 성과였다.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성립이후 왕징웨이의 국민당쪽의 인사들이 무더기로 대민회에 가입한 결과였다.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을 선전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의 정책중 하나였던 청향운동 (淸鄕運動) 도 선전했다.
대민회에서 만든 청향운동 프로파간다. 철책을 경계로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휘날리는 마을은 평화속에서 살아가지만 철책밖은 굶주림과 죽임만이 보일 뿐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민회가 발행하던 잡지 《 대중국 (大中國) 》에도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대중국 잡지는 본래 1938년 발행될 때부터 이름을 유지했는데,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면서 잡지 이름을 《 대민 (大民) 》으로 바꾸게 되었다.
잡지 《 신중국 (新中國) 》의 변화. 여기서도 문양의 좌우반전을 함께 볼 수 있다.
我們應在正統國民黨領袖 汪先生領導下, (우리는 정통 국민당의 영수 왕징웨이 선생의 영도아래) 協力向和平建國大道邁進。 (협력하여 화평건국의 길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적힌 대민회의 프로파간다문구.
이렇게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 정권의 초기 대민회는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라는 칭호속에서 이룬 큰 성장속에서 일종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정기는 길지 않았다.
대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으로 부터 1년도 가지 못하고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흡수되며 사라지게 된다. 대민회는 1940년 10월 10일, 난징 환도이후 처음맞이하는 쌍십절 행사에도 대민회는 참가하는 등 여러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런 행보속에서도 대민회는 흡수과정을 피할수 없었다. 이렇게 거대해진 선전조직을 두지않고 흡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동아연맹운동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1940년부터 중국에서 확산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내에서도 (왕징웨이정권내에서도) 확산되었고, 여기에 왕징웨이 본인도 관심을 표하고 1940년 말부터는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 정권의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동아연맹운동을 왕징웨이 정권이 직접 실시하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이를 선전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서는 독립된 조직이아닌, 왕징웨이의 국민당으로 대민회를 비롯한 다른 선전, 정치조직이 통합되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이유로, 1940년 12월 17일, 대민회를 비롯해 중국공화당 (中國共和黨), 중국흥건연맹 (中國興建聯盟) 라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내의 非 국민당 조직들이 국민당으로 통합하면서 "발전적 해소"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대민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대민회를 흡수하는 과정 (1940.12.17)
신민회라는 조직의 성격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듯, 대민회라는 조직의 성격 또한 단순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민회와 대민회 두조직은 비슷한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조직 모두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한 괴뢰정부의 괴뢰선전조직이었고,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가진 삼민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이를 선전하고, 왕징웨이가 새로운 정권을 수립함에 따라 두 조직 모두 변화를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두조직은 다른 모습도 보인다. 신민회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유일하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여, 넓은 범위에서 행동하며 "일본"의 완전한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작동하게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대민회는 성립과정도 치밀하지 못했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강력한 힘도 가질수 없었고, 행동의 범위도 제한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과 유신정부를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후에는 왕징웨이를 위해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두조직이 비슷한듯 다르게 작동한 이유로는, 화북과 화중이라는 지리적 환경의 차이,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라는 인물적, 사상적 차이, 왕징웨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의 차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의 차이 때문에,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시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유신정부와 그의 선전단체 대민회는 왕징웨이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왕징웨이와 대립할 필요도, 왕징웨이를 반대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화북정무위원회) 와 신민회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왕징웨이와 대립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겉으로는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이번 4부작의 목표는 이표를 왕징웨이 정권을 알지못하는 이에게 이해시키는데에 목표가 있었다. (청향운동은 넣지않았다. 청향운동은 오히려 하나의 글로 정리할 수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 요소가 적기에)
어쩌다 보니 신국민운동-신민회-동아연맹운동-대민회 로 이어지는 긴글 4부가 되게 되었다. 본래 신국민운동에 관한 글을 쓸때는 이러한 4부작이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4부작을 마무리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 4부작의 요소들은 서로 얽혀있어 하나의 글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 속에는 엄청난 속사정들이 존재하며, 이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설명을 잘했다고 한들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민회, 대민회를 이야기하면서 신국민운동, 화북정무위원회, 임시정부, 유신정부, 동아연맹운동등 여러가지를 함께 서술했던 , 해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긴 글이지만 4개의 요소를 모두 설명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모습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장대한 과정을 거쳐서 서술했지만, 이 서술또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민회에 관련된 연구는 앞에서 글을쓴 신민회, 동아연맹운동, 신국민운동에 비해 너무나 적다. 국내에서도, 일본에서도 신민회에 대한 연구는 꽤 진행되었으나 대민회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앞으로 이에관한 자료가 더욱 만들어지고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나긴 4부작을 끝내고자 한다.
[출처]
土屋光芳, 「中華民国維新政府はなぜ平穏に在精衛政権に吸収されたか?」, 『政経論叢第 83巻第 3・4号』,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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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智英, 「袁殊と興亜建国運動: 汪精衛政権成立前後の対日和平陣営の動き」, 『東洋学報 第 94巻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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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民會總本部, 『大民会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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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문 - 매일신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조선신문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125204931&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대중국 1940년 1월-5월호 표지 : https://cotca.org/items/damin-cover-image-may-1940/
손중산선생탄생기념 표지 : http://read.nlc.cn/advanceSearch/allRes?searchWord=%E5%A4%A7%E6%B0%91%E6%9C%83#hahaha
벽화사진 : 영문판 위키피디아 "Wang jingwei Regime" 문서
1938년판 신중국 표지, 프로파간다 문구, 청향운동 ,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 , 대민회 부채자료 : 중국 바이두 웹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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