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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왕징웨이의 죽음 (1944.11.10)

최종 수정일: 2024년 10월 12일


본 글에서는 왕징웨이의 '죽음' 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왕징웨이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이유, 건강이 악화되었던 1943년 말부터 사망에 이르게 되는 1943년 11월까지의 과정, 왕징웨이의 죽음 직후 있었던 일과 이에 따른 여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935년 피격이후 생존한 왕징웨이
1935년의 저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왕징웨이. 사진은 천궈치 (陳國琦) 가 촬영했다. (이후 천궈치는 왕징웨이정권에 참가하여 왕징웨이정권의 국영보도국인 중앙전신사의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1942년에는 난징국민정부 행정원 비서직을 맡게 된다. )

1935년 (민국 24년) 11월 1일, 이날은 중국국민당 제 4기 6중전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본래 6중전회는 9월 중으로 개최되어야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11월 1일이 되서야 개최될 수 있었다.


오전 7시, 당시 외교부장이자 행정원장이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집행위원들은 중산릉을 방문하여 참배한 뒤, 오전 9시, 중앙당부 대강당에서 열리는 6중전대 개막식에 참가했다. 왕징웨이는 이 개막식에서 개막연설을 맡았고, 제 5차 초공작전의 진행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왕징웨이는 대강당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에 참가했다. 이때 장제스는 보안이 안전하지 않다는 측근들의 의견아래 강당에서 예추창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사진 촬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취재기자들 중 회색 대의를 입은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그의 정체는 신광통신사 (晨光通信社) 의 기자였던 쑨펑밍 (孫鳳鳴, 손봉명) 이었다. 쑨펑밍은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스페인제 권총을 꺼내


"타도 매국노! (打倒賣國賊!) "

라고 외치며 왕징웨이를 향해 두발을 쏘았다. 당시 장췬 (張群)이 총을 쏘려는 쑨펑밍을 보고 그를 밀쳐 넘어트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저우포하이는 폭죽소리가 난 줄 알고 뒤를 보았으나, 거기에는 총을 든 쑨펑밍의 모습이 보였고, 그리고 왕징웨이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쑨펑밍은 두발을 쏜 후에도 두발을 연이어 왕징웨이를 향해 쏘았다. 쑨펑밍은 이후 장쉐량을 비롯한 위원들이 달려들고 경비병들이 총을 쏘아 제압당하여 체포되었으나, 왕징웨이는 이미 3발의 총알을 맞은 상태였다.


총소리가 들리자 강당에 남아있던 장제스가 뛰쳐나와 왕징웨이를 직접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게 했고,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은 침착하게 왕징웨이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천비쥔과 천궁보의 도움으로 왕징웨이 부부는 빠르게 난징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으로 갈 수 있었다.


1935년 왕징웨이 저격사건 이후 왕징웨이가 향한 난징중앙의원
난징 중산동로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 1929년 설립된 이곳은 장제스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중앙의원으로 작동했다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점령되자 일본군이 점령하며 화학전 부대인 영1644 (榮1644) 부대가 사용하다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의 중앙의원이 되게 된다. (기존 중앙의원 조직은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이전했다. )

병원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10시 30분 중앙의원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바로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 총알의 위치를 파악했다. 왕징웨이는 각각 왼쪽 팔, 왼쪽 뺨 (맨 위의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 그리고 등을 맞았는데, 등의 총알은 다섯번째, 여섯번째 갈비뼈를 지나 허파를 뚫고 척추에 박혔다. 당시 왕징웨이의 의식은 명확했으나, 척추쪽에서 계속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눈 및은 계속하여 부어오르고 있었다.


왕징웨이와 그를 따라온 천비쥔은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중앙의원측은 이를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치명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11월 1일 오후 4시, 왕징웨이의 수술을 위해 상하이에서 급하게 뉴후이린 (牛惠霖, 우혜림) 이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왔다.



왕징웨이 저격사건 당시 왕징웨이를 치료한 뉴후이린
1935년 왕징웨이의 수술을 집도한 뉴후이린 (牛惠霖, 1889~1937) 의 모습.

가장 경미했던 왼쪽 팔의 총상은 간단한 봉합수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왼쪽 뺨의 총상의 경우 뼈가 관통되어 파편이 왼쪽 눈에 박힐 정도였지만, 이 또한 3차례의 수술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파편의 경우 완전히 처리 하지 못했다. )


피습 다음날인 11월 2일 오전 10시, 중앙의원은 왕징웨이의 상태에 대해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가 진행된 이유중 하나는 ,국민정부는 11월 1일 오후 5시, 성명을 통해 왕징웨이가 피습당했음을 발표했으나 문제는 진작 왕징웨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일보에도 "왕씨가 피습을 당한것같다" 정도의 정보가 알려졌을 뿐이었다. ) 이미 소식은 퍼졌고 그속에서 정보의 불확실속 왕징웨이가 '사망' 했다는 유언비어도 퍼지기 시작한만큼, 국민정부측은 이러한 잘못된 유언비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1935년 저격사건 이후 등장한 왕징웨이 사망설 뉴스
1935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의 "왕씨절명설 (汪氏絶命說)" 보도. 동아일본은 왕징웨이가 11월 1일 오전 11시, 중앙의원에서 왕징웨이가 사망했다는 중국측 보도내용을 토대로 왕징웨이가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의원은 발표에서 왕징웨이의 상태가 양호하며, 2일 새벽부터는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2일 오후 9시반에 잠들어 그다음날 오후 9시까지 긴시간동안 편안한 수면을 취했으며 체온도 37.4도라는 미열에 불과했다. (맥박도 80으로 양호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실제로 오히려 의사들이 말리는데도 신문을 읽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11월 3일에는 쇼와 천황이 왕징웨이의 비보를 듣고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찾아 쾌차를 기원했다.


문제는 등에 박힌 총알이었다. 당시 이 등에 박힌 총알은 중국의 의학 기술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앙의원측은 등에 박힌 총알을 소독등의 임시방편적 치료만 하고, 총알 자체는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피습으로 부터 여러일이 지난 11월 20일, 당시 의학 선진국이었던 독일 의사들의 치료와 수술을 받기 위해 독일 의사들이 있는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했다.


11월 20일 오후 3시, 퇴원한 왕징웨이 부부는 야간열차를 통해 20일 밤 상하이로 향했다. 21일 오전 7시, 상하이에 도착함과 동시에 왕징웨이는 상하이의 중국홍십자회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에 입원하게 된다.


중국홍십자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현재의 푸단대학부속 화산의원) 의 모습. 이곳에는 독일인 의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중국홍십자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현재의 푸단대학부속 화산의원) 의 모습. 이곳에는 독일인 의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독일 의사들은 중앙의원에서 처리하지 못한 왼쪽 눈의 파편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의사들도 당시 기술로는 왕징웨이의 척추에 박힌 총알을 완전히 적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때 빼내지 못한 총알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난징중앙의원측에서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이 불편함을 줄수 있었도 목숨에 영향을 줄 만큼 큰 영향을 줄것이라 생각하진 않았고, 독일의사들도 그러했다.


왕징웨이는 병원에서 퇴원한뒤, 상하이의 자신의 사택에 머물며 요양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직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고, 그결과 왕파 (汪派) 라 불리는 왕징웨이의 인사들은 대거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습이후, 빼내지못했던 마지막 총알의 영향은 이때부터 끼치고 있었다. 당대 기사들을 보면, 상하이의 사택 관저로 돌아온 이후에도 왕징웨이는 계속 고통을 호소해 왔고, '중태' 라고 불릴만한 건강악화가 12월에만 3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5일, 12월 9일, 12월 23일) 12월 9일, 왕징웨이는 계속되는 고통과 피로감을 호소했고, 맥박도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띄기도 했다. 게다가 1936년 2월 2일에는 독감에 걸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왕징웨이는 결국 독일로의 요양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독일인 주치의가 권한 것이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건강 회복을 위해 요양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가 독일로 가기 위해 탑승했던 나치독일의 SS 그나이제나우 (SS Gneisenau)
왕징웨이가 독일로 가기 위해 탑승했던 나치독일의 SS 그나이제나우 (SS Gneisenau)

1936년 2월 19일 오후 4시, 왕징웨이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독일의 함부르크로 가는 SS 그나이제나우 여객선에 탑승했다. 이때 부인이었던 천비쥔과, 쩐중밍을 비롯한 수행비서들도 함께했다. 함부르크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베를린을 거쳐 1936년 4월 10일, 독일 남부의 도시인 바트나우하임 (Bad Nauheim) 에 도착했다. 베를린이 아닌 한적한 바트나우하임을 선택한것은 독일 주치의들의 권유였다. 왕징웨이는 1942년 발표한 성명에서 이러한 선택이 독일 주치의들이 권유였음을 이야기하며 이 때문에 히틀러를 비롯한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의 1942년 대 독일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는 바트나우하임의 칼튼 (Carlton) 요양원에 머무르며 온전욕을 즐겼다. 또한 이곳에서 시나 글을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중화민국 주독 대사 청톈팡 (程天放) 은 몇차례 바트나우하임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만나 회담을 했는데, 청폔팡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왕징웨이) 의 몸은 여러차례 치료하며 회복되었지만 (남은) 총알이 제거 되지 못해 심장이 쇠약해졌으며, 바트나우하임의 온천은 심장병에 약효가 좋다고 하여 온천욕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기치료도 받고 있다. "

라고 왕징웨이가 이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건강을 회복했음을 서술해두었다. 왕징웨이는 요양차 독일에 오게되고, 이과정에서 모든 직을 내려놓았지만, 국민당의 2인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만큼, 요양기간동안 앞에서 보았던 청톈팡 외에도 쿠웨이진 (顧維鈞) 주이탈리아 대사 등 유럽의 여러 중화민국 주재 대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1936년 6월까지 바트나우하임에서 요양하다가, 6월 9일 부인 천비쥔에게 전보를 보내 베를린으로 가 다시 진료를 받아보겠다고 하였다. 왕징웨이는 퀄른을 지나 6월 11일 베를린에 도착해 다시 한번 진료를 받은 후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온천도시인 칼스버드 (Karlsbad) 에서 머물며 요양을 계속했다. 이후로도 왕징웨이는 프라하, 베르흐테스가덴 (Berchtesgaden) 등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등지의 여러도시를 다니며 요양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요양을 지속하면서 이전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고, 왕징웨이는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부인 천비쥔에게 보내는 편지등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을 계속 이야기 해왔다. 왕징웨이는


"여행자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과 같다. (旅人如坐鍼氈)"

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측 인사들은 건강을 이유로 계속하여 왕징웨이의 중국행을 말렸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이들도 왕징웨이의 귀국 계획을 완전히 말릴 순 없었다.


흔히 1936년 12월 12일의 시안사변이 왕징웨이의 귀국 이유로 알려져 있지만, 귀국 계획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왕징웨이는 시안사변 이전부터 중국 행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1월부터 왕징웨이는 영국 런던 (11월 1일), 프랑스 니스 (12월 4일), 독일 퀼른 (12월 8일) 등을 오가며 계속하여 전보로 복귀 계획을 논하고 있었다. 즉, 왕징웨이의 중국행은 그 이전부터 논의 되었고 시안사변은 그의 중국행을 결심하게 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왕징웨이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SS 포츠담호. (SS Potsdam) 이배는 위에서 보았던 그나이제나우의 자매함이었다.
왕징웨이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SS 포츠담호. (SS Potsdam) 이배는 위에서 보았던 그나이제나우의 자매함이었다.

시안사변 발발이후 왕징웨이는 14일의 전보에서 자신이 귀국할 결심을 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위에서 보았던 청톈팡, 쿠웨이진 등 유럽 주재 인사들과 현재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귀국을 결정하여 1936년 12월 22일,SS 포츠담 (SS Potsdam) 호를 타고 마지막으로 머물던 제노바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왕징웨이가 출발한 시점에서 시안사변은 이미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장제스가 다시 석방되었다는 전보는 왕징웨이가 탑승한 포츠담호가 수에즈 은하를 통과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귀국을 통한 재기시도는 잘 알듯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역으로 왕징웨이는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이 원하던 중국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다시 국민정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요직에도 복귀하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건강을 되찾고 요직에 복귀하게 되면서, 1935년의 저격사건이 주었던 여파는 사라진듯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1939년 왕징웨이의 초상화
1937년 1월 14일 중국으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이후 다시 정계와 요직에 복귀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사진은 1939년의 모습)

1937년 1월 14일 왕징웨이는 중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활동을 재개해왔다. 1937~1943년이라는 6년의 세월 동안 왕징웨이는 제3차 장왕합작의 동반자부터, 항전 국민정부의 부총재, 국민당의 화평운동 지도자, 변절자이자 도망자, 난징국민정부의 행정원장 겸 주석 대리, 그리고 난징국민정부의 주석으로써 수많은 곳과 자리를 옮겨가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그에게 1935년의 상처가 다시 돌아온것은 1943년 8월 이었다.


8월부터 왕징웨이의 증세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거동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11월 5일, 대동아회의 시기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는 도조 히데키에게 자신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이에 일본은 당시 내과전문의였던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당시 도호쿠 대학 내과 교수와 그의 조수였던 마쓰나가 후지오 (松永藤雄) 를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돌보게 했다.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1897~1988), 그는 도조 히데키의 요청을 받아 난징으로 가 왕징웨이를 치료했다.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1897~1988), 그는 도조 히데키의 요청을 받아 난징으로 가 왕징웨이를 치료했다.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1897~1988), 그는 도조 히데키의 요청을 받아 난징으로 가 왕징웨이를 치료했다.

대동아회의가 끝난 1943년 11월 18일과 21일, 쿠로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일본 의료진들은 두번에 걸쳐 왕징웨이의 신체를 검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35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8년이라는 세월동안 제거하지 못했던 총알의 상태를 확인하여 탄환이 뼈를 이미 뚫고 박혀있는 상황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일본 의료진들은 "빼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본 의료진들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는, 기술의 발전으로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것은 아니었으나,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왕징웨이의 몸에서 총탄을 억지로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이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외과수술은 , 특히 왕징웨이의 상태처럼 신경부분과도 연관된 수술은 가볍게는 마비, 크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점점 커져가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을 하루 빨리 제거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지나파견군 군의장 (軍醫長) 이었던 모모이 나오미 (桃井直幹) 중장을 만나 검사를 부탁했다. 모모이 나오미는 자신의 부하인 난징 제1육군병원장이었던 고토 료우에 (後藤鐐枝) 소장에게 자문을 구해 왕징웨이의 총알을 제거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모모이와 고토는 연구 끝에 제거가 가능할것 같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이러한 고통속에도 왕징웨이는 1943년 말까지 활발한 행동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활동인 중일동맹조약의 체결 (1943.10.30) 뿐만 아니라 대동아회의 (1943.11.5) , 대동아전쟁 3주년 담화(1943.12.8)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1943년 12월 11일의 중국국민당 당무대회였다. 그리고 그 사이 이전 등에 박힌 총알로 인한 통증은 더더욱 증세가 악화되어 1943년 12월 19일, 왕징웨이는 결국 난징 제1육군병원에서 탄환 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이시기 다리가 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1943년 12월 19일, 8년이 넘게 왕징웨이를 괴롭혀왔던 마지막 총탄은 겨우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 수술장면
1943년 12월 19일, 8년이 넘게 왕징웨이를 괴롭혀왔던 마지막 총탄은 겨우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수술은 19일 오전 11시부터 진행되어 20분만에 끝이 났다. 8년이 넘는 세월동안 왕징웨이의 몸에 있었던 총알은 검게 변했으며, 적출과정에서 심지어 두동강 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수술을 마치고 다음날 오전에 퇴원하여 베이지거 (北極閣,북극각) 라는 별칭이 있었던 쑹쯔원의 전 난징공관으로 향했다. 이곳을 선택했던 것은 공관의 별칭이 되었던 베이지거 지역은 난징의 외곽으로 요양에 적합했고, 동시에 건설당시 난방과 보온을 신경쓴 건물이었기에 겨울 요양을 해야 하는 왕징웨이에게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옛 쑹쯔원 (宋子文) 의 난징 공관. 북극각 (北極閣)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쑹쯔원이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가며 공관이 비게 되자 난징국민정부는 자신들이 이곳을 사용했다
옛 쑹쯔원 (宋子文) 의 난징 공관. 북극각 (北極閣)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쑹쯔원이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가며 공관이 비게 되자 난징국민정부는 자신들이 이곳을 사용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가장큰 고통의 원인이라 생각했던 총알이 제거된 만큼, 왕징웨이가 빠르게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저오포하이도 수술다음날이자 공관으로 돌아온 12월 20일의 일기에서


"왕 선생은 어제 아침에 이미 총알을 꺼내어 오늘 아침에 퇴원하여 북극각으로 이주하였다. 경과가 양호하나 오후에는 여전히 열기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라고 쓰고 다음날의 일기에서도


"아홉시에 왕 선생이 일어났다..왕 선생에게 물어보니, 정신은 멀쩡하고, 정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의사가 말하길 7일 안에 입도 편하게 움직이게 될것이고, , 10일 안에 완치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만 왕(汪) 선생이 당뇨병이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하였다. "

라고 쓰는등 왕징웨이의 가족들과 측근들, 그리고 왕징웨이의 수술을 담당했던 일본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43년 12월 23일에는 수술의 실밥을 풀었고 이날 왕징웨이와 함께했던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회복이 잘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등 왕징웨이와 그의 주변인물들은 그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왕징웨이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23일 실밥을 풀은 이후, 왕징웨이의 상태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1일, 왕징웨이는 아픈몸을 이끌고 새해 연설을 끝냈다. 하지만 이 새해를 맞이한 이후 왕징웨이는 수술전처럼 걷기 힘들어하며, 더욱 피로를 느끼며 더욱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1944년 1월 9일, 국민정부의 참전 1주년을 맞이한 행사에 왕징웨이는 참가했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는동안 고열이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하타 슌로쿠 (畑俊六) 지나 파견군 사령관 및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과의 연회가 점심에 계획되어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취소하지 못하고 왕징웨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 다음날에도 고열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도 연회가 계획되어 있어 결국 이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의 주치의들은 이 고열이 수술시 제거되지 못했거나 새로이 발생한 고인 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모든 정무를 멈추고 다시 요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21일까지 왕징웨이는 잠을 자면서 발이 떨리는 증상이 있었고, 이 때문에 잠에서 여러번 깨어 앉아 다리를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드는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왕징웨이는 제대로된 수면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결국 1월 25일 시점에는 다리를 비롯한 하반신이 거의 마비되다 싶이하여 걸을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쿠로카와를 다시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하게 했다. 그리고 쿠로가와는 왕징웨이가 총알을 제거한 후 다리가 마비된 것이 척추가 신경을 압박하여 다발성 골수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나고야 제국병원으로 전보를 보내어 3월 1일에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신경외과 교수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가 난징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했다. 사이토는 진단결과 쿠로가와가 진단한 것처럼 다발성 골수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하루 빨리 일본으로 가 치료를 받기를 권했다. 사이토는 일본의 병원에서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존재하나 열악한 난징의 병원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늦지않게 하루빨리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측은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하이지엔호
왕징웨이의 전용기 하이지엔호 (海鶼號), 이는 1941년 일본이 왕징웨이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1943년 3월 3일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구급차에 탑승하여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난징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중을 나온 저우포하이, 천궁보등 주요 인사들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왕징웨이는 일본으로 출발하기전, 친필로 글을 적어


" 공무는 천궁보, 저우포하이에게 맡겨라 (公務交由公博、佛海代理) "

라고 쓴후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천비쥔을 비롯한 가족과 수행원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출발했다. 이때 일본은 A6M 4대를 사용하여 왕징웨이가 탄 하이지엔호를 엄호하게 했다.


나고야에 도착하자 일본은 나고야 주둔 일본군으로 하여금 왕징웨이를 경호하게 했다. 왕징웨이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4층 전체, 그리고 3층의 일부를 사용하게 했는데, 이는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수행원들이 머물 공간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던 매화 (梅花) 에서 따온 암호명인 매호(梅號) 라는 암호명을 부여하였다. 이는 왕징웨이의 보안과 왕징웨이의 소식이 함부로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왕징웨이를 담당하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나고야 제국병원 바로 근처의 숙소에서 생활하게 하며 왕징웨이가 위급해지면 바로 현장으로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매호, 즉 왕징웨이를 담당하는 의료진은 기존의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해왔던 쿠로가와와 사이토를 중심으로, 다카기 고지 (高木寬治) 도쿄 제국대학 의학교수, 나고야 제국병원장, 미야 야스오 (三矢晨雄) 교수를 비롯한 당대 일본 의료계의 최고 권위자를 모았다.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 그는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로,  덩치가 커 간호사들은 항상 그를 무서워했다 전해진다. 특이한것은, 사이토는 수술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항상 나막신을 착용했다는 것이다.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 그는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로, 덩치가 커 간호사들은 항상 그를 무서워했다 전해진다. 특이한것은, 사이토는 수술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항상 나막신을 착용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온 다음날인 1944년 3월 4일, 사이토를 중심으로 한 의료진은 왕징웨이에게 추궁절제술 (椎弓切除術, 척추뼈를 일부 제거하여 척추의 종양, 통증등을 완화하기 위한 시술이다. ) 를 실시하였다. 4번~7번 흉골 일부를 절제한 이 수술은 1시간 20분가량 진행되었는데, 수술이 완료되자 왕징웨이는 하반신이 다시 반응하며 다시 걸을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의료진들에게 감사인사를 표했다.


수술과 동시에 왕징웨이의 총탄 근처의 조직에 대한 분석도 행해졌다. 조직 분석의 결과, 사이토와 쿠로가와가 우려했던대로 다발성 골수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종양의 모습은 악성종양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의료진측은 왕징웨이측이 걱정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알리지 않았다.


일본에 온 후 이루어진 첫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것 처럼 보였다. 왕징웨이는 수술후 첫주에 스스로 무릎을 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양발과 다리의 근육이 증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증세 호전에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은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당뇨병도 앓고 있었던 만큼, 회복은 더욱 더뎠다. 천비쥔은 왕징웨이가 증세가 악화될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이에 직원들은 천비쥔을 데리고 주변으로 가 버섯을 캐오곤 했었다.


1944년 5월 4일, 왕징웨이는 병실에서 진갑 (進甲), 즉 61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생일날 왕징웨이는 미소를 보였으며 기운이 넘쳐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진갑에 만주국에서도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6월 5일에는 추민이가 병문안차 나고야를 방문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병실에서도 글을 작성하여 난징측에 전달하는등 이 시점까지 왕징웨이는 병세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더욱 일본측에 불리해져가고 있었고, 일본은 전투에서 계속패배하고 자원공급이 어려워지면서 자원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자원난은 왕징웨이가 있는 나고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에게 매일 닭고기, 돼지고기, 죽순, 시금치와 같은 식단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당뇨병이 있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진 왕징웨이의 식욕은 줄어들대로 줄어든 상태라 왕징웨이는 많은 식사를 하진 않았다. 또한 왕징웨이의 병은 섬세한 온도의 관리를 요구했다. 겨울철에는 자원난에도 불구, 석탄을 동원하여 왕징웨이의 병실을 24시간 난방을 시키는 한편, 더운 여름철에는 규슈에서 냉방기를 급수하여 냉방을 실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오랜시간을 병실에서 보내며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 있었고,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병세는 완전히 호전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징웨이는 욕창이 발생했으며, 헤모글로빈 수치가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O형으로, 이 때문의 같은 혈액형을 가진 자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수혈을 받았지만, 수치는 2~3주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의료진측도 왕징웨이가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으며, 그 증세는 날이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왕징웨이측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8월 초가 되자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저우포하인은 1944년 8월 8일의 기록에서

"일본 대사가 왕선생의 병세가 심해 아마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급히 전했다.

라고 하였고, 이에 8월 9일 난징을 출발, 8월 10일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 왕징웨이를 만난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우포하이는 반년사이 병세가 악화된 왕징웨이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왕징웨이와 대화를 끝낸 후 저우포하이는 그의 아내인 천비쥔과도 대화를 나눴다. 저우포하이는 8월 10일의 기록에서


" (천비쥔은) 왕선생의 자리를 다른이가 대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것 같다"

라고 서술하며 천비쥔이 왕징웨이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음에도 왕징웨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완전히 놓아선 안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9~ 10월 사이 왕징웨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맥박수가 분당 90~110정도가 되어 불안정해졌고, 기침은 더더욱 심해졌다.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폐렴이나 심부전증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여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의 몸은 더욱 약해져갔다.


왕징웨이는 1944년 10월 10일 쌍십절 (중화민국 국경) 행사를 위한 훈시를 작성하여 전달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행한 마지막 대외활동이 되었다.


왕징웨이는 말년에 《육십자술 (六十自述) 》 이라는 시를 지었다. 내용은 왕징웨이 자신이 지나온 60 평생을 회고 하는 내용이었다. (왕징웨이는 당시 61세였다. )



六十年無一事成,不須悲慨不須驚
60년동안 하나 이룬게 없으나, 슬퍼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네

尙存一息人間在,種種還如今日生
아직 살아 세상에 있으니 온갖것이 아직 지금 살아있는 것만 같네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나고야.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나고야. 미군의 공습은 왕징웨이가 있었던 나고야 제국병원도 위협했다.

1944년 11월 8일, 의료진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이날 나고야에는 미군의 공습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왕징웨이의 병실이 있던 나고야 제국병원 또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계속되는 공습에 의료진측은 결국 왕징웨이를 지하 방공호로 옮기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왕징웨이에게는 독으로 작용했다. 당시 나고야의 11월 날씨는 추웠으며 이는 왕징웨이 같은 환자들에게는 더욱 취약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특별관리대상인만큼 일본으로 부터 석탄을 지원받아 난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지하방공호에는 이러한 난방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추위속 왕징웨이는 괴로워 했고 결국 왕징웨이는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또한 열이 40도까지 오르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0일 오후, 왕징웨이는 몸을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천비쥔과 가족들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쿠로가와가 뛰어와 그를 진찰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이시점에서 왕징웨이는 누워있는것도 힘들어 일본이 특수틀을 제작하여 몸을 맞춘 상황이었다.


이틀전인 11월 8일,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일본측으로 부터 왕징웨이의 병세가 좋지않으니 하루 빨리 일본을 방문하기를 바란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11월 16일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측은 다시 전보를 보내 재촉했고, 그 결과 이들은 일정을 수정하여 11월 13일 왕징웨이를 보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동료들을 차마 보지 못한채,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야한다... (我要回中國....)"

라는 희미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병실에는 적막과 함께 슬픔이 가득했다. 천비쥔은 울부짖었고 함께 있던 쿠로가와 또한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나고야 비행장으로 옮기는 운구차 행렬.
왕징웨이의 유해를 나고야 비행장으로 옮기는 운구차 행렬.

왕징웨이의 유해는 사망 이후 방부 처리가 이루어졌고, 왕징웨이의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구차에 실렸다. 1944년 11월 12일 오전, 왕징웨이의 유해는 나고야 제국병원을 떠나 나고야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고야 비행장에는 도조 히데키와 고노에 전 총리대신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힌 그의 관이 일본의 히노마루가 그려진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은 왕징웨이와 그의 정권의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요소다.

왕징웨이의 유해는 중국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혔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DC-3 수송기는 나고야를 출발, 1944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 청천백일문양이 보인다.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 청천백일문양이 보인다. 왕징웨이의 유해가 난징에 도착한 11월 12일은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쑨원의 탄생일이기도 했다.

1943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가 도착했고, 난징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잠시동안 난징국민정부의 대예당에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다. 비행장에 내려서도 천비쥔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비행장에는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있었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하자 이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날 난징국민정부는 애전위원회 (哀典委員會)를 조직하여 앞으로 치루어질 왕징웨이의 장례식 행사 준비에 나섰으며, 동시에 국민정부 지역에 한달간 조기를 게양하게 하고 일주일간 주요 오락행사를 중지하게 했다.


이날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경성의 중화민국 영사관에서도 오후 1시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자리에 조선 총독은 직접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사람을 보내어 자신 대신 총독의 이름으로 행사에 참가하게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주요 요인들, 주요 경제계 인사들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 화교사회가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조선 화교사회도 모두 조기를 게양했다.



"우리의 최고영도자 왕주석 서거"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부에서 운영하던 언론이었던 신중국보 (新中國報) 의 1944년 11월 13일자 기사.
"우리의 최고영도자 왕주석 서거"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부에서 운영하던 언론이었던 신중국보 (新中國報) 의 1944년 11월 13일자 기사.

대중들에게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1944년 11월 13일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이날 공보를 발표하여 왕징웨이 주석이 사망했으며,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왔고 차후 애전위원회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당시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일본과 조선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필리핀 방어전과 본토폭격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화평운동과 1940년 정부수립, 1941년 방일 당시 일본-조선 신문들의 1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왕징웨이는 마지막에는 단신뉴스칸에서 그 존재감을 피력할 뿐이었다.


조기가 게양된 난징의 모습.
조기가 게양된 난징의 모습.

왕징웨이의 유해가 돌아온 다음날인 1944년 11월 13일, 왕징웨이의 유해를 임시봉안한 국민정부 대예당에서는 간단한 형식으로 왕징웨이의 후계자인 천궁보의 대예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천궁보를 중심으로 하여 왕징웨이의 납관식 (納棺式) 이 거행되었다. 국민정부 대예당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배치되었고, 그 양옆으로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들 및 쇼와 천황을 비롯한 우방국들에서 보내온 조화들이 위치 해있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천궁보는 행사를 진행했고 모두가 일어서 국가를 부른뒤 묵념을 통해 왕징웨이를 기렸다. 천궁보는 이후 조문을 읽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새로운 관에 넣으면서 행사를 마무리 했다. 왕징웨이는 이를 통해 화려하게 꾸며진 새 관에 안장될수 있었다.


매화산 (梅花山). 중산릉과 명 효릉 사이 위치한 이 언덕에는 약 16,000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있다고 한다.
매화산 (梅花山). 중산릉과 명 효릉 사이 위치한 이 언덕에는 약 16,000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있다고 한다.

1944년 11월 14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민정부명령 (國民政府命令) 을 통해 왕징웨이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진행할 것이며, 묘가 위치할 자리는 국부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릉과 명 효릉(明孝陵) 사이의 매화산(梅花山) 으로 결정했다.


매화산으로 결정한 이유는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매화가 가득 피어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전 왕징웨이가 좋아하던 장소였으며,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국부 쑨원이 있는 중산릉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1944년 11월 18일의 중앙정치위원회에서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매화산에 가매장 (假埋葬)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이 처해있던 상황과 관련 있다. 본래 왕징웨이 정권측은 5000만 위안 가량 (저비 기준) 의 예산을 투입하여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하게, 여러 부대시설과 함께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자원난도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중산릉과 같은 대규모 건축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중앙정치위원회는 이때문에 동시에 왕징웨이가 염원하던 화평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후, 정식적으로 제대로된 국장을 다시 치뤄 제대로된 새로운 묘에 다시 모시기로 결정했다. 국부 쑨원도 처음에는 제대로 모셔지지 못했으나 이후 중산릉에 다시 모셔진것 처럼, 왕징웨이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43년 11월 22일에는 왕징웨이의 묘 건설이 거의 완성되어 유해를 옮길수 있는 환경이 되었고, 이에 1943년 11월 23일 오전 6시 30분,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국 대사들등 여러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운구식이 진행되었다. 국민대예당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10시 30분, 매화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의 운구행렬. 화평건국군 뿐만 아니라 난징시 경찰등 수많은 조직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왕징웨이의 운구행렬. 화평건국군 뿐만 아니라 난징시 경찰등 수많은 조직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매화산에 마련된 왕징웨이의 묘의 안장식 현장모습.
매화산에 마련된 왕징웨이의 묘의 안장식 현장모습.

묘 예정지로 들어가는 왕징웨이의 유해. '왕주석의 묘 (汪主席之墓)' 라고 간판이 적혀있다.
묘 예정지로 들어가는 왕징웨이의 유해. '왕주석의 묘 (汪主席之墓)' 라고 간판이 적혀있다.

관을 묻기전 왕징웨이의 관의 모습. 이는 왕징웨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관을 묻기전 왕징웨이의 관의 모습. 이는 왕징웨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0시 30분, 유해가 묘에 도착하자 마자 안장식 (安葬式) 이 거행되었고, 이어 11시에는 왕징웨이의 관을 정식으로 묘에 묻음으로서 왕징웨이의 장례식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왕징웨이의 묘 (뒤) 옆에 매화나무를 심고 있는 추민이 일행의 사진. 이 사진은 왕징웨이의 묘를 다룬 몇 안되는 사진중 하나이다.
왕징웨이의 묘 (뒤) 옆에 매화나무를 심고 있는 추민이 일행의 사진. 이 사진은 왕징웨이의 묘를 다룬 몇 안되는 사진중 하나이다.

왕징웨이의 묘 모습 (1945년 초).  웅장한 중산릉의 모습에 비하면 초라할 따름이다.
왕징웨이의 묘 모습 (1945년 초). 웅장한 중산릉의 모습에 비하면 초라할 따름이다.

왕징웨이 묘의 비석에는 단순하게 '왕징웨이의 묘 (汪精衛的墓)' 라고만 새겨졌고, 묘비에는 그가 좋아하던 시 '매화(梅花)' 가 함께 실렸다.

梅花
매화

梅花有素心,雪月同一色 
매화의 마음은 눈 위에 비취는 달빛처럼 새하얗네

照徹長夜中,遂令天下白
밤새도록 빛나니 마침내 천하를 밝히게 하네


앞에서 보았듯 난징국민정부는 본래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한 규모로 건축하기를 희망했으나 현실적인 상황때문에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묘에는 묘와 조그만한 사당과 기둥들만이 건설되지 못하게 된다.


잘 알려졌듯이 , 왕징웨이의 묘 건설에는 약 5t 가량의 철근과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재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천비쥔이 중일전쟁 이후 자신의 남편인 왕징웨이의 묘를 훼손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달은 만큼 공습을 우려하여 이렇게 건설했다는 설이 혼재한다.


하지만 장제스와 사이가 나빴던 천비쥔이 이러한 튼튼한 무덤을 건설하기를 원했다는 점, 왕징웨이 본인도 이와 같은 건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욱 가능성 높은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천궁보가 이끌었던 난징국민정부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난징국민정부가 해산됨에 따라 왕징웨이의 묘도 확장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라이벌이자 민족의 반역자인 왕징웨이의 묘가 존재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항일전쟁 승리후 허잉친을 시켜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게 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이러한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을 당시 속으로 못마땅해 했지만, 1946년 1월, 충칭에서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기로 계획했던 장제스와 요인들이 중산릉을 참배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의 묘를 보게되었을 때 생길 파급을 막기 위해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허잉칭 자신도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는 것에 대한 완전한 찬성을 가하지 않았던 만큼, 다른이를 시켜 이를 처리하게 했다.


1946년 1월 15일, 허잉친은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74군의 구유달(邱維達), 당시 난징 시장이었던 마초준(馬超俊), 육군본부 공병지휘관 마숭육(馬崇六), 육군본부 참모장 소의숙(蕭毅肅) 등이 참가했다.


허잉친은 회의에서


"그대들이 한 가지 일을 협의해 달라. 다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 어디에든 새어나가서는 안된다. 위원장이 곧 '환도'할 것이다. 왕징웨이 이 대매국노의 분묘가 여전히 매화산에 있다. 손총리의 능묘와 나란히 있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만일 왕징웨이묘를 없애버리지 않고, 위원장이 '환도'했을 때 보게 된다면 반드시 진노할 것이다.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관심으로 골치아플 것이다. 여러분이 자세히 연구해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반드시 타당한 처리방법을 찾으라."

라고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소의숙은 이러한 허잉친의 뜻이 사실이며, 이는 충칭에서 이미 승인이 난 내용이며 10일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여 장제스가 오기전에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구유달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유달은 임무수행을 위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매화산 일대를 '포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매화산 근처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위한 것으로, 헌병사령부와 난징시정부도 이에 협력했다. 구유달은 자신의 공병부대를 통해 왕징웨이의 묘를 둘러본 후, 이 묘를 처리하기 위한방법은 '폭파' 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폭파 계획을 준비했다.


구유달은 묘의 폭파를 위해서는 150kg 가량의 TNT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이를 준비했다. 구유달은 폭파계획을 위하여 계획 3일전부터 주변의 출입을 엄금하고 음파장치를 준비하여 폭파시 나타나는 소리를 덮으려 준비하였다. 구유달은 두단계로 나누어 폭파의 준비를 하였다. 1단계는 밖을 덮고 있는 콘크리트 외벽을 제거하는 것이고, 2단계는 관 자체를 파괴하여 굳게 닫힌 관을 여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구유달은 의문을 가졌다. 허잉친은 분명 무덤을 '옮기라' 라고만 지시하였는데 어찌하여 죽은이의 관을 열려고 하는 것인가? 구유달은 허잉친의 '옮겨라' 라는 말은 수사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파괴하라'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왕징웨이 묘의 폭파전 모습.
왕징웨이 묘의 폭파전 모습.

20일, 구유달은 폭파를 계획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월 21일에야 폭파가 진행되었다. 폭파는 성공적이었다. 왕징웨이의 묘는 산산조각 났으며 왕징웨이의 관 또한 열리게 되었다.


관두껑을 열자, 왕정위의 시신은 청천백일기로 덮여 있었다. 시신은 난징국민정부의 문관예복이고, 청색장포마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예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수(大綏)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갈색에 흑반점이 있었다. 방부제를 사용한 만큼 시체를 거의 썩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관에서는 천비쥔이 적은 혼혜귀래(魂兮歸來)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혼혜귀래는 혼이 장소를 잘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것으로 생각된다.


폭파를 함께 했던 마조춘, 마숭육등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살펴본뒤, 마숭육은 공병대장을 시켜 왕징웨이의 시신을 트럭에 실게 했다. 이들은 시신을 청량산 (淸凉山, 난징의 서쪽) 으로 옮겼고, 그날 새벽 은밀하게 왕징웨이의 시체와 관을 불태워 화장시켰다. 이로 인해 한때 민국의 2인자이자 쑨원의 후계자로 점쳐졌던 왕징웨이는 재도 남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구유달의 공병부대는 묘 잔해를 치우고 평탄화작업을 진행했고, 그결과 실제 장제스가 방문했을 때는 이곳이 자신의 라이벌이 묻혀 있던 묘라는 것도 알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옛 왕징웨이 묘 자리에 정자를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매화산의 관매헌 (觀梅軒) 이다.

(관매헌은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겉으로만 보면 이곳이 왕징웨이의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긴 어렵다.)


왕징웨이의 묘자리에 세워진 관매헌 (觀梅軒)의 모습.
왕징웨이의 묘자리에 세워진 관매헌 (觀梅軒)의 모습.

마무리하며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으로 취급받는, "1935년의 암살미수사건에서 제거하지 못한 총알이 독이되어 곪아아있다가 1943년 말 증상이 악화되었고, 총알을 제거했으나 다발성 골수종이 발생했고, 이 다발성 골수종이 악화되고 당뇨병등 기존의 지병등이 여기에 추가적인 악영향을 끼치며 건강이 악화되며 결국 사망했다. " 라는 이론을 다룬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 큰 논쟁은 왕징웨이를 사망으로 이끌게 한 1935년의 암살사건에 장제스가 개입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천비쥔이 저격사건 직후 장제스를 비난했다는 점, 장제스가 '우연히' 저격 현장에 없었다는 점등은 저격사건의 배후로 장제스를 지목하게 한다. 당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경쟁관계에 있었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것도 장제스 였으니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제스 배후설은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만큼,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죽였을 것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긴 어렵다.


애초에 장제스 본인은 앞장서서 1935년 당시 왕징웨이를 병문안을 갔으며, 매일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가게 하고 치료비 및 위문금을 보내려 했으며, 앞장서서 사건의 해결을 주도했던 이였다. 또한 역사적 맥락상으로도, 왕징웨이는 자신의 경쟁자일지언정 자신에게 불필요한 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죽일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서


" 정신적 충격은 총알이 폐에 박힌 것보다 몇 배나 더 고통스러운데, 이번 총알이 차라리 내 가슴에 박혔다면 내 마음의 편안함이 얼마나 빨랐을지." (精神之受打擊,其痛苦較甚於槍彈之入肺腑數倍,此次之彈如穿入於我心身,則我心安樂必比甚何等事快也。)

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받는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장제스 배후설은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그 가능은 낫다.


두번째로 존재하는 논쟁은 일본암설설 - 일본책임설이다. 이는 한국 작가 김형석 (1920~) 의 글 '고독이라는 병'에서도 나타난다.

"태평양 전쟁이 격심했을 때, 장제스 총통과 갈라져 일본측과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애국자 왕징웨이는 이 새의 이름인 정위 (精衛) 를 자기의 아호로 삼았다. 그는 스무살 전후의 젊은 나이에 웅지를 품고 황제의 수례에 폭탄을 던져 사형을 언도 받은 바 있었으며, 일평생 민족을 위해 살다가 끝까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가 10억을 헤아리는 무지하고 불행한 중국 백성들에게 보람있는 봉사와 아낌없는 희생을 각오했을 때, 스스로를 이 전설의 산새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새의 약한 날개와 한두알의 작은 돌에 비하여 바다는 너무나도 넓고 깊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한 배경은 여러가진데 첫 번째는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의 탄환 적출 수술을 집도하였던 모모이 나오미와 고토 료우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쿠로가와도, 독일의 의사들도 뺄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 했으나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강행해 왕징웨이의 죽음을 초래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중엔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으로 진행했음을 증명할 서류는 존재하지 않고, 모모이와 고토 모두 태평양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의 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책임설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언급되는 것이 1944년 11월 8일의 왕징웨이를 지하방공호로 옮긴 선택이 왕징웨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것이 일본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또한 증명된 바 없고 위에서 보았듯 왕징웨이의 병세는 이미 그전부터 악화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습이라는 상황속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호행을 무작정 비판하기도 어렵다.


또한 왕징웨이의 몸에 박힌 총알이 몸에 영향을 끼치는 '납탄' 이 아니며 몸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 '금속탄'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여기선 총알은 애초에 왕징웨이의 죽음에 기여한 바가 적으며, 일본이 오히려 왕징웨이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주장이 있다.


천비쥔의 경우, 전후 일본이 양의학을 고집하는 바람에 왕징웨이가 죽었다고 주장한바가 있고,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일본이 왕징웨이를 독살했으나 이를 다발성 골수종이란 이름으로 덮으려 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위에서 보았듯 의료진들은 치료초기 왕징웨이의 상태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바가 있고, 이러한 두루뭉실한 서술은 가족들로 하여금 오히려 의혹을 가지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죽음은 확실한 결론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을 다루었지만, 위와 같은 음모론의 내용을 서술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주장도 존재한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중간에 서술하지 않은 것은, 서술에 있어서는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라 할수 있다.


번외로, 천비쥔은 왕징웨이의 사망후 자신의 남편을 그동안 치료해준 나고야 제국병원측에 감사를 표하며 매화나무 3그루를 기증했다. 그리고 이중 2그루는 아직 나고야에 남아있다.


나고야대학 오유키 의료센터 (大幸医療センタ) 뒤에 위치한 '왕징웨이씨 기념의 매화 (汪兆銘紀念の梅) 의 모습. 본래 3그루가 있었으나 한그루는 시들어 현재남은건 2그루 뿐이다.
나고야대학 오유키 의료센터 (大幸医療センタ) 뒤에 위치한 '왕징웨이씨 기념의 매화 (汪兆銘紀念の梅) 의 모습. 본래 3그루가 있었으나 한그루는 시들어 현재남은건 2그루 뿐이다.

또한 왕징웨이의 묘는 폭파되어 중국대륙에서 사라졌지만, 일본 도쿄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는 묘비가 존재한다.


일본 도쿄 종태원 (宗泰院) 에 존재하는 왕징웨이의 묘. "애국자. 쑨원의 수제자, 동아의 위인 왕자오밍 선생 여기에 잠들다." 라고 적혀있다.
일본 도쿄 종태원 (宗泰院) 에 존재하는 왕징웨이의 묘. "애국자. 쑨원의 수제자, 동아의 위인 왕자오밍 선생 여기에 잠들다." 라고 적혀있다.

묘비 뒤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설명과 자신이 1944년의, 이제는 이미 폭파되어 사라져버린 왕징웨이의 묘 조각을 발견하여 1988년 11월 10일 이곳에 묻어 기록한다라고 적혀있고, 묘비의 앞에는 중화민국의 국화이자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했던 매화가 새겨져 있다. 이 묘비를 건설한 일본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묘비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출처 :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김형석, 『고독이라는 병 』, p 217 , 1960

蔡德金, 『汪精衛之死』, 1998

朱子家, 『汪政權的開場與收場』 , 2020

『中国文化』, 第39期, 2014

『僑協雜誌』, 第156期, 2016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s://www.koreanhistory.or.kr/totalSearch.do

신중국보 1944년 11월 13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4.11.13

추민이의 사진 : https://cotca.org/items/loc-0004/

나고야 공습 / 쑹쯔원 공관 / 그나이제라우 /포츠담 : 영문판-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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