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 / 1940.7~ 1946.4)
최종 수정일: 2024년 10월 26일
중일전쟁시기 국립중앙대학의 변천사. 중일전쟁이 계속되면서 당시 국립중앙정부를 비롯한 난징의 대학들은 모두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다른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경제, 산업, 모든 분야가 전쟁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고 교육계 또한 그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의 교육체제는 전쟁의 발발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아야 했고 이는 가장 고등교육이었던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대륙의 주요대학이었던 베이핑(징)의 칭화대, 베이징대만 하더라도 창사로 옮겨 난카이대학과 함께 창사연합대학 (長沙臨時大學)를 구성해야 했고, 이들은 1938년 쿤밍으로 또 한번 옮겨 국립서남연합대학 (國立西南聯合大學) 을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들의 피난은 오늘 이야기할 난징의 대학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발발 반년도 되지 않아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까지 위협을 받게되는 상황이 되자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의 대학들도 칭화대, 베이징대의 경우를 따라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충칭국민정부가 지배하는 서쪽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었다. 난징의 사립학교였던 진링대학 (金陵大學) 과 진링여자대학 (金陵女子大學)는 물론, 난징에 위치해 있었던 국민정부 최대 · 최고 대학이었던 국립중앙대학 (國立中央大學) 등 여러 난징의 대학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래 일본점령지에 있었던 대학들이 모두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서쪽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일본 점령지에는 대학 고등교육의 기회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일본과 중화민국 임시정부, 유신정부를 비롯한 협력정부들은 다시 대학을 만들어 민중들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다시 제공하는 것이 협력정부의 발전에 유리하다 판단, 해당 지역에 다시 다시 대학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다시 교원과 학생을 모집하고 일본군에 의해 접수되었던 옛 대학들의 건물들을 다시 활용하여 대학을 다시 열었다.
이들은 '복교 (復校)' 라는 명칭을 내걸며 새로이 대학이 세워지는 것이 아닌, 충칭을 비롯한 장제스의 국민정부 지역으로 옮겨졌던 대학들이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음을 주장했다. 대학의 명칭도 '베이징대' 와 '상하이대' 와 같이 충칭국민정부 지역으로 옮겨 엄연히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던 대학들의 명칭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물론 이런 '복교' 된 대학들을 보고 충칭국민정부와 원 대학들은 당연히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역 주민들도 이렇게 '복교' 를 거쳐 다시 문을 열게 된 대학들을 진짜 '복교'로 인정하지 않고 이를 괴뢰 대학, 가짜 대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복교' 된 대학들은 전쟁중이라는 상황과 점령지라는 한계 속 고등교육을 받을수 없었던 어떤 이들에게는 고등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 셈이기도 했다.
국립중앙대학의 '복교'
자오정핑 (趙正平, 1878~1945) . 그는 중화민국 건국 이후 교육계에 몸을 담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교육부 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된 이후에도 그대로 교육부 부장을 하게 된다. 그가 계속하여 교육부 부장을 할 수 있었 던것은 그가 교육계에 오래 몸을 담았다는 경험도 있지만, 여러 세력의 집합체였던 난징국민정부에서 모든 이들이 반대하지 않는 이름바 '무당무파 (無黨無派)' 였기 때문이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후, 구 유신정부의 교육부 부장이자 난징국민정부의 교육부 부장을 맡게 되었던 자오정핑은 왕징웨이에게 정통 국민정부를 표방하는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만큼, 국민정부의 최고대학이었던 국립중앙대학 또한 부활시키는 것을 건의했다.
자오정핑의 제안에 왕징웨이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에 1940년 4월 16일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에서 자오정핑의 국립중앙대학 복교계획은 정식으로 논의되게 된다. 본 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國民政府行政委員 第3次會義
(1940.4.16)
1. 웨이하이의 예속 문제
[汪, 화북정무위원회]
2. 동아운동대회참가주비위원회 (기원2600년봉축동아경기대회 참가를 위한것) 을 조직하고 이를 위한 경비 7만 위안을 사용하는 것
[교육부]
3. 전 유신정부의 강수순대사령부(江水巡隊司令部), 동녕정수순학교 (同綏靜水巡學校)
의 개편문제
[해군부]
4.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國立中央大學復興籌備委員會) 조직과 예산안 마련[교육부]
5. 각 성의 사법기관 소송비용 관련 문제
[사법부]
회의에서는 자오정핑의 국립중앙대학 복교계획을 승인하고,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위한 준비위원회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國立中央大學復興籌備委員會) 를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이를 위한 예산안도 마련하기로 결정한다.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내용을 다루는 1940년 4월 17일자 중화일보 (中華日報) .
행정원회의로부터 4일이 지난 1940년 4월 20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를 공식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국립중앙대학의 복교계획을 처음 구상했던 교육부 부장인 자오정핑을, 부위원장으로 교육부 차장이었던 판중윈 (樊仲雲, 1901-1990, 이후 판중윈은 국립중앙대학의 교장이된다) 와 다이잉푸(戴英夫, 1897~1969)를 선출하고 첸웨이충 (錢慰忠)을 비서장으로 하고, 루이쥔(陸翊君), 우시티(吳煕悌), 카이푸추(蔡復初) 3명의 전임위원 , 7명의 겸임위원 , 대학교육위원회위원 탕요우량 (唐有樑) 을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에 포함시켰다.
난징의 국립중앙도서관 사진. 본래 이 국립중앙도서관은 1937년 확장계획을 세웠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충칭으로 이전하게 된다.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충칭으로 떠나고 비어버린 난징의 국립중앙도서관 터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 5월 8일, 처음으로 열린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회의에서는 국립중앙대학에 문과대학, 법학대학, 상과대학, 교육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약학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에서 일할 교원을 전국 각지 (물론 여기서 전국 각지는 사실상 汪정권의 지배지역을 의미했다.) 에서 모집하는 한편, 5월 13일에는 초생위원회 (招生委員會) 를 구성, 난징 국부로 282호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베이핑,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우한, 광저우 7개의 주요 도시에서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할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에는 난징국민정부가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위해 임시비 40만 위안, 경상비 68만 위안 총 108만 위안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5월 29일에는 학교에 필요한 물품구매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5일에는 일본으로 부터 건물을 환원받아 농과대학 건물의 부지를 확보했다. 또한 6월 12일에는 일본 문부성이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대학은 점령지의 , 협력정부의 대학이라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입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였다. 우선 등록하는 이들에게 큰 혜택을 부여하였다. 4(5)년제 과정에 지원하는 학생의 경우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하였고, 2년제 과정의 경우에도 학생들의 식비, 실험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성적장학금제도를 많은 학생들이 편의를 볼 수 있도록 바꾸었으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별도의 장학금을 또 따로 지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근로장학생 제도도 만들어 50명 (개교 당시 기준 약 총 학생수의 7%)의 학생이 학교에서 규정한 시간동안 근로활동을 하면 월 10위안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다. 때문에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은 고등교육은 받고 싶으나 가정의 소득은 적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이 지원을 많이 하게 되었다.
6월 26일에는 난징의 국립정치대학 (國立政治大學) 부지를 새롭게 세워질 국립중앙대학 부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옛 국립중앙대학 부지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첫 째로는 난징에서 대학의 규모가 가장 큰 국립중앙대학 부지를 사용하기에는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은 그 규모가 본래의 국립중앙대학에 비하면 작았으며 또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가 화평에 응하여 난징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기에 '복교' 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옛 국립중앙대학 부지가 아닌 국립정치대학 부지를 학교 부지로 선정하였다.
부지가 선정된만큼 대학 시설의 준비가 시작되었고 (시설의 정비에만 3만 위안 가량이 들었다고.) 7월 3일에는 초생위원회의 각 지역에서 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초생위원회 측은 대학 지원의 요건을 (1) 공립 또는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자 (2) 고등학교와 동등한 학교를 졸업한 자 (3) 중학교 졸업 성적이 특히 우수한 자 (입학정원의 10%) 로 하였고 초생위원회 측은 학생들의 지원 독려를 위해 본래 7월 15일까지였던 등록기간을 2일 연장하여 7월 17일까지 지원할 수 있게 했고 그 결과 17세부터 31세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입학을 지원하게 된다.
초생위원회 측은 입학 시험을 8월 1일~3일에 걸쳐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학생들을 배려하여 해당기간동안1위안이라는 돈만 내면 시험기간동안의 모든 식사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2일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으로 판중원을 선출하였고 부총장으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비서장이었던 첸웨이충을 부총장으로 선출하며 입학과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복교 준비과정을 마쳤으며 7월 24일에는 일종의 준비위원회였던 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를 끝내고 정식으로 국립중앙대학 운영을 시작한다. (물론 대학본부만 운영을 시작한 것으로, 아직 정식 개교는 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대학의 정문. 이 문은 1927년 국립정치대학의 전신이었던 중앙당무학교의 교문으로 건설되었다.
국립중앙대학 (原 국립정치대학) 정문의 2011년 모습. 국립정치대학이 대만으로 천도하며 옛 국립정치대학자리는 중국공산당 강소성 당학교가 2011년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강소성의 여러 기관들이 사용)
7월 17일까지 기간을 연장하며 학생들을 계속 모집해왔던 국립중앙대학이었고, 8월 1일~3일에는 입학시험과정도 이루어졌지만, 국립중앙대학측은 학생들의 추가 모집을 위해 베이징 등 일대에서는 8월에도 학생모집과정을 실시하였다.
8월 1일에는 학과장들의 임명이 있었으며, 9월 11일에는 대학 도서관을 위한 서적 1만 여권을 구매하였고, 9월 20일에는 공과대학 실험교재를 구매하는 등 국립중앙대학 측은 계속하여 수업 시작을 위한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5일에는 난징 일대의 기자들50여 명을 초청하여 국립중앙대학 운영이 준비되었음을 홍보하기도 하였다.
9월 26일에는 부총장이었던 첸웨이중이 중앙정치회의에 의해 안후이성 정부위원 겸 교육감으로 임명됨에 따라 사표를 제출하며 국립중앙대학은 정식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총장 자리가 궐석이 되게 되었다.
1940년 9월 30일, 국립중앙대학은 드디어 정식으로 수업을 개시하였다. 국립중앙대학의 출범 1년을 기념하는 책자인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수업 첫날인 9월 30일 기준으로 674명의 학생이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국립중앙대학 제1회 입학 당시 통계 (1940.9.30 기준)
학생
남학생 : 533명 (79%)
여학생 : 144명 (21%)
학생 출신지
중화민국 : 670명
일본 : 3명
일본령 조선 : 2명
학생 구성 (단과대학별)
문과대학 : 50명
법학-상과대학 : 137명
교육대학 : 36명
이공대학 : 95명
농과대학 : 12명
의과대학 : 48명
약학대학 : 4명
사범전수교육과정 : 33인
농업전수교육과정 : 28인
교양반 : 92명
실무반 : 139명
학생 구성 (거주)
기숙사생 : 479명
통학생 : 195명
교수 및 강사
남성 : 71명 (99.87%)
여성 : 1명 (0.13%)
1회 입학자의 통계를 보면, 남학생이 533명으로 약 8할 가량을 차지했고, 여학생도 144명으로 2할 가량을 차지했다. 입학생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일본인도 3명 있었고 놀랍게도 조선인도 1명 존재했다.
다만 교원의 경우에는, 남성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72명의 교수 & 강사 중 여성은 쓰촨 출신의 鄭福地라는 31세의 여성 1명 뿐이었으며 심지어 그녀는 정식 교수도 아닌 강사직을 맡았다. 또한 교원 중에는 도쿄를 비롯한 일본에서 온 교수도 3명이 있었다. 이렇게 국립중앙대학에 참여한 교원진들은 새로이 임용된 사람들이거나, 기존 난징 혹은 점령지에 있던 대학 교원들이 참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國立中央大學要覽』의 재학생 일람 부분에 적혀 있는 28세의 문과대학 2학년 이규해 (李圭海) 씨. 그의 출신지는 '조선' 으로 표기 되어있다.
국립중앙대학 살펴보기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인 真知力行 (참된 지식으로 힘쓰다) . 왕징웨이가 직접 썼다.
(1) 국립중앙대학의 개설학과
국립중앙대학은 개교 당시 (1940) 다음과 같은 학과를 가지고 있었다. 특정과 들은 과 안에서도 전공이 나뉘기도 했다. 가장 공급이 부족한 교사, 공급의 확대가 필요한 농업부분은 단기 과정을 설치했다.
문과대학 (文學院) / 4년제
- 중국문학과 (中國文學係)
- 외국어문학과 (外國語文學係)
- 역사사회학과 (歷史社會學係)
법학-상과대학 (法商學院) / 4년제
- 법률과 (法律係)
- 정경학과 (政經學係)
● 경제전공
● 정치전공
- 상학과 (商學係)
● 회계전공
● 은행학전공
교육대학 (敎育學院) / 4년제
- 교육학과 (敎育學係)
- 심리학과 (心理學係)
이공대학 (理工學院) / 4년제
- 수학과 (數理係)
● 물리전공
● 수학전공
- 화학과 (化學係)
- 토목공정과 (土木工程係)
농과대학 (農學院) / 4년제
- 농학과 (農學係)
- 생물학과 (生物學係)
의과대학 (醫學院) / 5년제 (5학년은 실습)
(계열 분류 x)
약학대학 (藥學院) / 4년제
(계열 분류 x)
사범전수교육과정 (師範專修科謨程) / 2년제
■ 문학/역사/지리 과정 (文史地組)
■ 교육행정과정 (敎育行政組)
농업전수교육과정 (農業專修科謨程) / 2년제
■ 원예과정 (園藝組)
■ 목축과정 (畜牧組)
(2) 국립중앙대학의 수업관련 규정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대학 교육과정에 관한 규정을 서술하면서 졸업을 위한 요건과 학생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을 지정하고 있다. 또한 단과대학에 대한 규정도 서술하고 있다.
단과대학에 대한 규정에서는, 해당 단과대학이 어떤 과를 개설하는지, 해당 단과대학의 졸업요건은 무엇인지, 해당 과 학생은 1학년부터 4(5) 학년까지 어떠한 수업이 진행되는지, 선택과목으로 해당과 학생이 어떤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지를 규정하고 있다. (선택과목의 경우 문과의 경우 폭이 넓으나 이과의 경우 폭이 좁은 편이었다.)
전 학생 해당사항 (1940)
- 졸업을 위해서는 최소 144학점 이상을 이수할 것.
(사범전수교육과정, 농업전수교육과정은 90학점 이상)
(1학년을 제외하면 한 학기 21학점 최대)
- 부전공시 해당 학과의 필수학점 ⅓ 이상을 이수할 것.
- 졸업 논문 필수 (4학점 취급)
- 각 과의 공통필수과목의 비율은 해당 단과대학 졸업학점의 ¼ 이하로 할 것.
(과마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이 다르나 이 비율은 지켜야)
- 제2외국어 (독일어 혹은 프랑스어) 성적은 2년 이상 수강 & 합격해야 학점 인정
(해당 수업을 듣는경우)
- 성적의 경우, 과목의 시험을 90점을 넘기면 갑(甲), 80점을 넘기면 을(乙), 70점을 넘기면 병(丙), 60점을 넘기면 정 (丁), 60점 미만 불합격으로 처리, 학기 전체 성적은 수강 과목의 평균을 통해 측정
- 해당 학기의 수강과목의 ⅓ 이상을 불합격하면 유급, 유급생은 재시험을 거쳐야 하며 유급이 2회를 넘어가면 퇴학 조치.
- 출석의 경우, 수업 6분의 1이상을 결석하면 해당 학기의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
(불합격처리)
전 학생 공통필수과목
- 기본국문 (基本國文) / 6학점
- 기본영어 (基本英文) / 6학점
- 기초일어 (基本日文) / 6학점
- 중국통사 (中國通史) / 4학점
- 사회과학(社會科學) 혹은 자연과학 (自然科學) 과목 / 6학점
(선택 과목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서 이수하면 되었다.)
공통필수과목은 아니나 반드시 이수해야하는 과목
(공통필수과목 학점에 포함되지 않음)
- 체육 (體育) / 8학점
- 군사훈련 (軍事訓練) / 8학점
각 학과 졸업학점
문과대학 - 144학점
법학-상과대학 - 144학점
교육대학 - 144학점
이공대학 - 160학점
농과대학 - 195학점
의과대학 - 212학점
약학대학 - 156학점
규정에서 주목해 볼만한 부분은, 국립중앙대학의 공통필수과목에 기초 '일어' 가 존재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생긴 이후 교육부에서 추가된 내용으로, 고등교육을 하는 대학 뿐만 아니라 초등-중등 교육을 하는 소학교, 중학교에도 공통으로 적용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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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체육과 군사훈련이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 군사훈련의 경우 당대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꺼려지는 과목이었다. 군사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언제나 전선에 끌려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원하지 않는 이러한 군사훈련 과목을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했다. 때문에 군사훈련 과목의 존재는 재학생이 국립중앙대학을 포기하거나 신입생들이 국립중앙대학의 입학을 꺼려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3) 국립중앙대학의 시간표 / 학사일정
『國立中央大學要覽』에 묘사된 국립중앙대학의 시간표. 표에서는 표기하지 않았지만 원 자료에는 해당 시간표에 맞추어 종을 치는 방법까지 규정되어 있었다. (물론 본 시간표는 기숙사생 기준으로, 통학생의 경우 8시전까지만 등교하면 되었고 저녁식사 전에 귀가할 수 있었다.)
시간표에서 주목할 부분은 국기게양 - 국기하강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서 생긴 변화로, 난징국민정부는 중화민국 유신정부 - 임시정부시절에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교육 현장에서의 국기게양식을 부활시켰고, 이 과정에서 국가를 제창하게 하는 과정도 다시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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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국기게양식 행사 시간에는 일종의 아침 조례가 함께 이루어져 인원 점검과 체조가 이루어졌다. 1941년부터는 난징국민정부에서 국민체조도해(國民體操圖解)가 보급된 만큼, 해당 체조에 기반한 체조가 이루어졌다.
하루동안의 시간표를 살펴보았다면 1년 동안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1월 1일~ 3일 : 새해 휴가
1월 25일 ~ 2월 4일 : 겨울 방학
2월 8일 : 정식 수업 시작
3월 12일 : 국부손문서세기념일 (휴일)
3월 21일 ~ 3월 27일 : 중간고사
3월 29일 : 혁명선열기념일 (휴일)
3월 30일 : 국민정부환도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 대체)
4월 1일 ~ 4월 7일 : 봄 방학
4월 17일 : 복교기념일
5월 5일 : 혁명정부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대체)
5월 10일 ~ 5월 15일 : 기말고사
6월 25일 ~ 9월 13일 : 여름방학
8월 1일 ~ 8월 3일 : 신입생 입학고시
9월 14일 : 정식 수업 시작
10월 10일 : 중화민국 국경 (휴일)
10월 27일 ~ 11월 1일 : 중간고사
11월 12일 : 국부탄신기념일 (휴일)
11월 30일~ 12월 5일 : 기말고사
12월 25일 : 운남기의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 대체)
국립중앙대학의 학사일정 (1941년) . 많은 기념일 행사에 참가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학사 일정의 경우, 난징국민정부에서 정한 국경일 / 기념일을 따르되, 모든 기념일을 쉬지 않고 특정 기념일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기념행사 참가를 통해 수업을 대체하게 한 부분이 눈에 띈다. (국립중앙대학은 학생규정에서 이러한 기념행사를 애초부터 의무화하였다.)
또한 복교기념일을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의 결과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던 4월 17일을 복교기념일로 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본래의 국립중앙대학은 1927년 5월 5일을 개교기념일로 두었으나, 난징국민정부 아래의 국립중앙대학에서는 이 날은 기념하지 않고 오직 복교기념일만을 기념하였다.)
(왕징웨이 정권의 연간기념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4) 국립중앙대학의 등록금 및 비용
국립중앙대학은 앞에서 보았듯 학생 유치를 위해 학생들에게 학비 면제, 기숙사비 면제를 내세웠다. 하지만 강의비라는 이름을 통해 학생들에게 돈을 받았으며 또한 필수활동인 체육을 하는데도 돈을 내야했다.
또한 제복을 구매하는 비용과 식비, 교재 비용도 별도로 지출해야 했다.
국립중앙대학
학생교비표 (學生繳費表)
중화민국 30년 (1941)
* 환불불가
◎ 신입생때만
학비 : 면제
기숙사비 : 면제 (단, 특수생의 경우 20위안을 지불)
교재-실험비 : 문과대학 / 법학-상과대학 / 교육대학 : 15위안*
이공대학 / 농과대학 / 의과대학 / 약학대학 / 사범전수교육과정 / 농업전수교육과정 : 20위안*
(단, 사범전수교육과정의 경우 국비로 10위안을 지원)
강의비 : 5위안*
체육비 : 2위안*
기타 비용 (잡비) : 2위안
제복비 : 남학생 - 100 위안◎ (하복 2벌, 동복 1벌세트)
여학생 - 40위안◎ (하복 2벌, 동복 2벌세트)
식비 : 65위안 (한학기, 3끼를 다먹을때)
(한 달의 식비를 36위안으로 계산, 그중에서 23위안을 학교측에서
지원, 따라서 학생은 나머지 13위안만을 지불하면 되는 구조)
35위안 (한학기, 3끼중 절반만 먹을때)
(한달의 식비를 18위안으로 계산, 그중 11위안을 학교측에서
지원, 따라서 학생은 나머지 7위안만을 지불하면 되는 구조)
(단, 위와 같은 학교측의 지원은 기숙사생에게만 제공,
통학생, 특수생에게는 학교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며
이 경우 식비는 180위안 / 90위안)
표에서는 일회성이긴 하나 가장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제복비가 눈에 띈다. 그렇다면 당대 100위안의 제복 가격은 어느정도였을까. 국민정부의 기관지 『中報』 에서는 국립중앙대학이 설립되기 직전이었던 1940년 9월 28일의 당시 난징국민정부 지역의 물가가 쌀 한가마니가 50위안 가량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대략 쌀 두마니 정도의 가격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으로 치자면 약 34만원 정도의 금액이 되는 것으로 (2024), 하복 2벌과 동복 1벌을 제공하는 구성이니 만큼 금액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금액은 아니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용은 당시 난징 지엔캉로 (建康路,건강로) 에 있는 농상은행(農商銀行)을 통해 납부하게 했다. 1940년 개교 당시에는 구 법폐도 취급했으나, 1941년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된 이후로는 저비권만 취급하게 되었다.
(저비권과 중앙저비은행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 )
(5) 국립중앙대학의 장학금제도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은 많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난 장학금 제도를 내세웠다. 성적 장학금의 경우도 기준을 엄격하지 않게 하여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그 외에도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등 많은 장학금 제도가 존재했다 .
국립중앙대학 장학금제도
(1940)
(1) 성적장학금
갑종장학금 (甲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갑(甲)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을종장학금 (乙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을(乙)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병종장학금 (丙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병(丙)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2) 기타장학금
청한학생보조금 (淸寒學生補助金)
최근 2학기의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병(丙) 등급 이상,
대학조사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지원이 필요하다 인정한 자
등급에 따라 월 20위안 / 15위안 / 10위안을 지원
독서회 장학금 (讀書會奬學金)
학생들의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방학기간에 독서대회를 개최,
성적이 우수한 이에게 장학금을 지급
1위 : 50위안 / 2위 : 20위안 / 3위 : 10위안 / 4위 : 5위안
근로장학금 (工讀生級工腋生奬學金)
교내에서 근로활동을 하거나, 대학생활을 영위하며 노동활동을
하는 자
10위안 / 5위안을 지급
그렇다면 당시 이러한 장학금 혜택을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얼마나 누릴 수 있었을까?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이러한 장학금을 받은 이들의 통계까지 모두 서술해 두었다.
성적장학금을 받은 학생 (갑,을,병 모두포함) : 120명
청한학생보조금을 받은 학생 : 50명
근로장학금을 받은 학생 : 24명
독서회장학금을 받은학생 (모든 등급 포함) : 64명
장학금을 받은 학생 (단순합계, 이중지급제외)
= 258명 (전체 학생의 약 39%)
이중으로 장학금을 수령한 이들을 제외하지 않은 단순 합계상으로는 전체 학상의 약 4할 가량이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6) 국립중앙대학의 기숙사
국립중앙대학의 남자기숙사 (위) , 여자기숙사 (아래) . 여성 학생들이 남성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던 만큼 기숙사의 크기도 더 작았다.
국립중앙대학의 경우,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이 모집과정에서 기숙사생의 기숙사비를 전액 부담하기로 한 만큼, 기숙사 학생들은 기숙사 비를 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국립중앙대학은 기숙사에서의 생활을 원칙으로 하여 통학의 경우를 특별 사례로 취급하였으며, 통학도 학부모가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때문에 통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이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의 기숙사의 경우, 남녀기숙사가 분리되어있었고 남녀간의 기숙사왕래는 당연히 금지되었다. 기숙사생은 대학이 임의로 정해주는 자리를 사용해야 했으며 (특정 사유가 없으면 변경할 수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짐 검사등 여러 절차가 이루어졌다.
국립중앙대학측에서는 기숙사생에게 이불 하나를 지급하였는데, 기숙사 규정에 따라 이 이불은 바르게 정리되어야 했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했다. (기숙사 규정 2조의 내용) 이 뿐만 아니라 위생과 관련된 규정이 엄격하여 기숙사 학생들은 규정된 시간에 목욕과 세면을 실시해야 했다.
기숙사생은 기숙사생임을 증명하는 기숙증(寄宿證) 을 제시해야만 기숙사 건물에 출입할 수 있었으며, 기숙사 건물에는 허락되지 않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외부인의 접견을 허락받는다 할지라도 접견실에서만 만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접견실에서의 면회또한 시간을 제한받았다. 또한 기숙사생은 휴가를 비롯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외박할 수 없었다.
기숙사생은 규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취침하고 정해진 시간에 기상해야 했으며 기숙사 내부의 물품 반입도 자유롭지 않아 기숙사에는 고가의 귀중품을 들고 갈 수 없었다. (만약 들고온 경우 공동 창고에 보관해야만 했고 이 또한 함부로 가져가거나 사용할 수 없었다.)
기숙사 규정에서는 특이한 항목들을 볼 수 있었는데, 자기전에 서로 담소를 나누지말것 (8조), 소등 후에 함부로 촛불을 켜지 말것 (9조), 기숙사 내 조리 활동을 하지 말것 (13조), 겨울 시기에 기숙사 내부에 난방장치를 가져오지 말것 (14조) 와 같은 조항이 있었다. 13조와 14조의 내용은 화재위험등 여러 사유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8조와 9조와 같은 내용도 규정으로 명시 해둔 것은 특이한 점이다.
(6) 국립중앙대학의 시설
국립중앙대학은 초기에 국립정치대학의 시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만큼, 많은 시설들을 초기 부터 운영할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기숙사는 물론, 여러 시설이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이었던 眞知力行에서 글자를 따온 진지당 (眞知堂), 역행당 (力行堂)
두 건물에서 주요 수업이 치뤄졌다.
도서관 건물의 모습과 안의 서적들.
1941년 기준으로 도서관에는 3만권이 넘는 서적이 있었고 일어, 영어 서적을 비롯한 외국서적들도 많이 보유 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입구에는 큰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민국 30년 (1941) 기준 국립중앙대학 도서관 보유목록
총 서적 : 31,611권 (중국어 서적 26,225권, 일본어 서적 1,047권, 영어 서적 4,321권, 기타 언어서적 18권)
분류 : 철학 803권 / 종교 204권 / 사회과학 8,700권 / 정치학 881권 / 자연과학 1,771권 / 응용과학 1,952권 / 미술 101권 / 언어학 2,710권 / 역사 3,189권 / 소설 2,012권
도서관 규정인 圖書館學生借書規則에 따르면 학생은 한번에 2권씩 책을 대출할 수 있으며, 기간은 14일로 하였다. (만약 대기자가 없다면 1회에 한하여 연장대출할 수 있었다. 또한 책을 분실시 책값의 8배를 배상해야한다는 내용과 도서관에서 떠들면 안된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국립중앙대학에는 이공대학 & 농과대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특히 농과대학의 경우 잡곡등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실험 농장이 존재했으며 목축과정을 위해 소, 오리, 돼지등 가축들을 실험적으로 기르는 축사도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은 또한 별도의 의료시설을 갖추고 일본인 의사가 진료를 하게 하여 학생들의 건강을 책임지게 했다.
이공대학생들과 화학과 학생들이 실험을 하던 실험실.
토목공정과 학생들이 실습을 하던 공간.
농과대학 농업전수교육과정 목축과정 학생들이 실습하던 축사.
국립중앙대학 안에는 부설 학교도 존재했다. 1942년 발간된 『國立中央大學一覽』 에서는 국립중앙대학 내부에 부설소학교, 부설중학교가 존재했으며 (정확히는 초등부, 중등부로 분류하여 같은 건물에서 함께 교육했다. ) 이곳에서 사범교육과정과 교육대학 학생들이 실습과정을 겪고, 대학 직원들의 자녀를 맡길 수 있게 하였다. 국립중앙대학에서는 이들 학교에 대해 국립중앙대학 부속실험학교 (國立中央大學 附屬實驗學校) 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국립중앙대학 부속실험학교의 소학생들.
국립중앙대학의 발전과 성장
이런 많은 요소들을 담은 국립중앙대학은 1940년 9월 30일 정식으로 수입을 시작했고, 수업의 개시와 동시에 교장이었던 판중윈은 교육대학 및 경양대학의 학장을 겸하게 된다.
10월 10일, 오전 8시 국립중앙대학의 대예당 건물에서는 쌍십절 기념 행사가 치뤄졌고, 동시에 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중대주간 (中大週刊) 의 발행을 발표하였다. 또한 17일에는 대학 복교 이후 처음으로 외부인의 특별강의가 진행되었다. 강의자로 나선것은 당시 상공부 장관이었던 메이쓰핑 (梅思平) 이었다. 이외에도 일본 규슈제국대학의 이마나카 자모 (今中次麼) 교수를 초청, 중국 민족운동과 그 방책 (中國民族運動及其方策) 과 같은 강의를 하며 그외에도 선전부의 린바이셩, 만주국 만주건국대학의 중산 교수등 여러 여러 외부 강사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이렇게 특강을 진행한 이는 국립중앙대학의 복교 직전에 안후이성으로 발령나 국립중앙대학의 부총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던 첸웨이충도 있었다. (1940년 11월 18일)
국립중앙대학은 난징에 위치해있었던 만큼, 주요 기자재들은 모두 상하이에서 반입되었다. 상하이를 통해 일본, 미국, 독일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기자재들은 국립중앙대학으로 옮겨졌다. 특히 일본을 통해 의학 기자재들이 많이 구매되었다.
일본측에서는 국립중앙대학의 양성을 위해 많은 지원을 가했다. 위에서 보았던 의료 기자재들만 하더라도 일본측의 구매에 있어서 지원을 가했고 그외에도 여러 물자를 지원해왔다. 주중화민국 일본대사관도 국립중앙대학측에 자료를 지원하거나 학생들에게 일본 문화 & 자연과 관련된 영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도 서적의 기부가 이어졌다. 물론 이런 서적들의 기부는 일본어 사전과 같은 일본어 교육과 관련된 도서이거나, 농업등 기초 산업과 관련된 기술서적들이 주를 이뤘다.
11월 28일에는 교내에서 여자농구팀이 발족되었고 이후 그외에도 축구, 크로스컨트리 등 여러 대학내 스포츠팀들이 결성되었다. (1941년 말에는 교직원 체육회도 생긴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회 영화상영을 실시했고, 1941년 1월 1일 새해에는 대학측에서 음악회를 마련, 학생들에게 무도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41년 3월 12일에는 국부손문서세기념일을 기념하여 학교가 휴교했다. 하지만 기숙사 생들은 학교에 나무를 심는 등의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바로 다음날인 3월 13일에는 첫 대학 체육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체육대회의 개최를 위하여 왕징웨이는 직접 1,000위안의 금액을 기부하였다. 이날 체육대회에서는 축구, 농구, 테니스 등 7개 종목의 경기가 개최되었다.
1941년 3월 30일, 국립중앙대학은 난징국민정부의 환도 1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했다. 학생들은 모두 왕징웨이의 연설을 경청해야 했고 환도식전과 관련된 강연을 들어야 했다. 또한 같은날 진행된 잡지사 화문오사카마이니치 (華文大阪每日) 이 국민대회당에서 진행한 동아보위의 노래 (保衛東亞之歌) 후보곡들의 경연을 관람했다.
1941년 3월 30일 진행된 동아보위의 노래 (保衛東亞之歌) 경연. 왕징웨이도 본 경연을 직접 참관했다.
(동아보위의 노래 응모전에서 최종 채택된 동아민족진행곡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1941년 6월 교감과 비서실장직을 폐지하고 교무, 훈육, 비서, 총무 등 4개 부서를 교장의 직속으로 두었고 1941년 7월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난징시 보건소 건물을 다시 재건, 국립중앙대학에 신생당 (新生堂)으로 편입시켜 대학 시설의 확충을 꾀하는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2년에는, 늘어난 재학생과 늘어난 학생수요에 맞추어 교수진의 수를 늘렸다. 1940년 복교당시 72명이었던 교수 & 강사진을 두배가 넘는 149명으로 늘렸고 이렇게 새롭게 합류한 교원진에는 일본인 15명 , 독일인 교수 1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당대 유명작가인 저우쭈워런 (周作人)이 국립중앙대학을 방문, '중국 문학상 2가지 사상 (中國文學上的兩種思想)' 이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학생들의 출신이 더욱 다양해졌다. 1940년 복교 당시 2명에 불과했던 조선인 학생은 7명으로 크게 증가했고, 일본, 대만, 만주국 등 학생들의 출신이 다양해졌다.
1942년 8월, 국립중앙대학은 늘어나는 학생 수요와 부족한 시설 수요를 대체하기 위해 기존의 국립정치대학 부지에서 시설을 이전, 난징의 진링대학 부지로 이전하게 된다. (기존의 국립정치대학 부지중 일부는 이공대학, 농과대학 등의 실험실 , 실습실로 유지)
아쉽게도 국립중앙대학이 진링대학 부지로 옮긴 이후에는 국립중앙대학에 대한 사진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국립정치대학 부지 시절 국립중앙대학에서 발행한 여러 자료에서 학내 시설 사진을 구할 수 있으나 진링대학 부지 시절에는 국립중앙대학서 발행한 자료의 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화문오사카마이니치 (華文大阪每日) 의 1942년 제8권 6기에 서술된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의 모습.
해당 건물은 앞에서 보았던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에서 비롯된 건물중 하나인 진지당(眞知堂)의 모습이다.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국립중앙대학복교제1기졸업기념간) 에 서술되어 있는 진링대학 부지로 옮긴 이후의 대학 대예당과 기숙사의 모습.
국립중앙대학의 한계
난징국민정부는 국립중앙대학이 국민정부의 최고 대학중 하나로 작동했던 만큼, 자신의 정권에 이 국립중앙대학을 다시 세워 충칭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대학을 대체할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난징국민정부가 '국민정부'를 내세웠지만 충칭국민정부보다 완전하지 못했던 것처럼, 난징에 새롭게 '복교' 한 국립중앙대학 역시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다.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여러면에 있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1944년의 기준으로,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3,592명의 재학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94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940명이라는 수치는 충칭 국립중앙대학의 1학년 수 (1,248명) 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으로 이전했다는 한계점 속에서도 충칭국민정부 지역의 최대 - 최고 대학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이 충칭을 따라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개설되어 있는 학과와 전공, 수업의 수도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보다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문과 뿐만 아니라 기술, 과학 분야에서도 능통했지만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서 다루는 기술과학 분야는 기초적인 부분에 그쳤고 다루는 부분도 기술과학의 발전보다는 경제성장 기여라는 목적이 더욱 강했다.
난징국민정부가 제대로된 국민정부로 인정받지 못해 지역의 주민들이 완전한 참여를 가하지 않았던 것처럼, 난징국민정부 지역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국립중앙대학에 완전한 참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군사훈련 과목의 존재, 일본어 수업을 필수로 하였던 난징 국립중앙대학의 모습들은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도, 대학에 있는 학생들도 국립중앙대학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요소로 작동했다. 때문에 매년 10~15%의 학생들이 난징국립중앙대학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내 구성원의 경우에도 잦은 교체가 있었다. 의과대학 학과장의 경우 대학이 운영되는 5년동안 10번이나 바뀌었고 교육대학의 경우에도 7명이나 교체되는 등 잦은 인사교체가 있었다.
또한 '국립중앙대학' 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진작 이전 국립중앙대학의 부지를 사용하지 않고 국립정치대학-진링대학의 옛부지를 사용하며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던 국립중앙대학은 "대학 이름도, 대학자리도 훔쳐 대학 행세를 하는 것뿐" 이라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1941년 12월 7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전쟁이 장기화, 점점 일본측에 불리해지기 시작하면서 일본 뿐만 아니라 난징국민정부를 비롯한 중국대륙 마찬가지로 자원난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자원난은 난징의 국립중앙대학도 피할 수 없게되었다. 1943년부터 기자재 등 여러부분에서 부족을 겪기 시작했고, 이는 수업의 질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동했다.
게다가 왕징웨이의 국립중앙대학은,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실패를 거뒀다. 이는 바로 자신들 난징국민정부을 지지해줄, 화평운동에 참가하고 화평운동을 이끌어나갈 지식인 청년들을 양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는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자신의 난징국민정부를 지지해주길 바랬고 대학교육을 통해 이러한 청년들을 양성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왕징웨이 정권의 한계와 진실을 잘 알고 있었던 학생들은 앞에서 보았듯 대학 및 교육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해왔고 (일본어 필수화, 군사훈련 필수화 등) 오히려 대학에서 이탈하여 충칭, 혹은 연안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화평반공건국의 청년들을 양성하겠다던 왕징웨이의 목표와 달리, 학생들은 오히려 충칭, 혹은 공산당에 더욱 가까워지고 것이다. 이들은 대학 도서관에 걸려있는 왕징웨이의 초상화에 잉크로 먹칠을 하거나, 난징국민정부에서 만든 화평운동 노래를 바꾸어 부르는 등 왕징웨이 정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인 '동아민족진행곡' .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이노래의 탄생을 직접 지켜본 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이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며 일본과 왕징웨이에 저항했다.
기록에 따르면, 국립중앙대학에서 동아민족진행곡이 울려퍼지자, 한 학생이 이 노래의 가사를
大地湧起和平的呼聲 대지에서 화평의 소리가 들려오니
에서
大地湧起抗日的呼聲 대지에서 항일의 소리가 들려오니
로 바꿔부르기 시작하며 이후의 노래가사들도 항일, 항전에 어울리는 가사로 바꾸기 시작하니 다른 학생들도 이에 동참하며 왕징웨이의 노래로 왕징웨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것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노래들을 더 알고싶다면 여기를 클릭 : )
또한 학생들은 비밀리에 항일 조직을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왕징웨이가 그토록 싫어했던 공산당과 점점 밀접해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학생들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학교 내에는 비밀리에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공산당과 연관된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대학 학생들과 청년구국사 (青年救國社, 공과대학생들 중심) , 민사 (民社, 교육대학생, 문과대학생들 중심, 이조직은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단결구국사 (團結救國社) 등의 조직을 구성, 중국공산당측과 제휴하며 항일운동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국립중앙대학의 교칙에 따르면, 학생들이 대학측의 허락없이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금지조항에도 굴하지 않고 비밀리에 조직을 구성,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공산당과 제휴하여 충칭의 항전방송 내용을 비밀리에 전파하거나, 항전과 관련된 인쇄물을 발행, 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여러 행동을 게시했다. 난징국민정부와 국립중앙대학측도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단결구국사를 이끌던 주웨이치안 (朱為捐, 공과대학의 여학생) 를 검거, 퇴학조치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비밀항일조직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다.
민사의 경우에는 다른 방향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했는데,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은 허가된 학생조직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내에 존재하는 조직들은 대부분은 정치적 색채를 띄지 않는, 스포츠조직과 같은 조직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선전부 장관 린바이셩의 주도로 학교내에서 난징국민정부의 노선을 지지하는 학생상호회 (學生互助會), 건자운동실재회 (乾字運動實踐會) 등이 구성되었는데, 민사는 이들의 지도부를 장악하여, 합법조직이었던 이들 조직의 이름을 빌려 합법의 틀에서 운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이들 조직의 이름을 빌려 잡지를 발행하여 학생들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게 했으며, 조직의 이름을 빌린 독서회등을 개최, 진보적인 학자들의 책을 읽게 했다. 교내 직원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규제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이들은 "우리는 학교의 합법조직이다" , "우리가 다루는 이론은 교회에서 배운것이다" 와 같은 말로 매번 직원들의 규제움직임을 피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 & 강사를 비롯한 교원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국립중앙대학에 참가한 교원진중에는 소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국립중앙대학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난징국민정부가 성공할 수 없다 보고 중국공산당, 혹은 충칭의 국민정부와 연락하면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대학의 조선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도 존재했으며, 1943년 시점에서는 그 숫자가 7명에 달했다. 이들 조선인 유학생들은 송지영 (宋志泳, 당시에는 야마모토 시에이 山本志泳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을 중심으로 한족동맹 (韓族同盟)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충칭당국과 제휴하며 국립중앙대학 내 항일운동을 하는 중국학생, 충칭당국과의 연조로 항일운동을 하고자하는 조선인들을 임시정부지역으로 후송하거나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점령지 내의 애국청년들을 규합하는 행동을 하는등 항일 운동을 이어나간다.
송지영 (宋志泳, 1916~1989) 그는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문학과) 그리고 그는 대학의 다른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한족동맹이라는 비밀항일조직을 결성, 항일운동을 이어나간다.
판중윈 총장 퇴진운동
이렇게 학생들 사이에서 진보주의, 항일운동이 점차 퍼지고 있는 사이, 1943년 5월에는 이들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이었던 판중윈이 업자와 짜고 학생들의 식비를 횡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국립중앙대학의 학생이었던 왕스홍 (王士弘)은 전후 자신의 글에서 "1943년은 고된 해였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세 끼 식사에 의존하는데, 이 식사가 학교 총장과 급식업체의 착취를 거쳐 식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학생들은 거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에 학생들의 불만은 커졌고, 청년구국사가 주축이 되어 1943년 5월 31일 새벽2시 학교식당에,거의 1,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였고, 이들은 난징 신화로의 왕징웨이 공관으로 향했다. (왕스홍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부터 가난했던 지방 학생들의 불만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난징의 왕징웨이 공관, (現 중국대륙 난징시 구러우구 신화로 38, 당시주소로 난징특별시 제4구 신화로 34호 ) 이 건물은 왕징웨이의 처남이었던 추민이 (褚民誼)가 기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우리는 부패한 교장은 필요없다! (“我們不要貪污分子當校長!")
라 구호를 외치며 왕징웨이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요구사항으로 부패한 판중윈 총장의 퇴진과 부실해진 식사의 개선등을 내걸었다. 학생들은 본 과정에 '탄원'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얼핏 잘못 받아드려져 유혈사태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이들은 사전에 탄원서도 작성하였고, 시위 과정도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했다. 또한 혹시 모를 유혈사태가 생길것을 우려하여 일본 국적의 한 학생을 통해 일본군 헌병대와 대화하여 헌병대의 동향을 파악하게 하고, 기숙사 주임도 학생들에게 불상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측에 연락을 가하여 본 시위의 목적이 건전한 것에 있음을 주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위대가 일본군 헌병대와 소통하게 했던 일본 국적의 한 학생은 바로 조선인이었다. )
잠을 자던 왕징웨이는 깜짝 놀아 이 학생시위대를 직접 맞이, 학생들과 교섭할 것을 약속했고 학생시위대는 교섭 요구가 이루어지자 질서있게 자진 해산했다. 국립중앙대학은 그날 오후 3일간의 임시휴강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임시 교무위원회를 구성, 6월 4일 난징국민정부측의 협상자로 나온 당시 교육부 부장이었던 리셩우 (李聖五) 와 린바이셩과 협상을 개시, 총장 판중윈을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할 것이며, 부실했던 식사도 개선하겠다는 합의를 이뤄내는데 성공한다.
합의가 이루어진 6월 4일 정오를 기점으로 수업은 다시 재개되었고, 다음날 임시 교무위원회등 학생들이 만든 임시기구가 모두 해체를 선언하며 학교는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난징국민정부는 판중윈을 해임하고, 잠시 리셩우가 임시로 총장을 겸하게 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가 여름이 다가오고 시험기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후에 당시 문과대학 학과장이었던 천주 (陳柱)를 총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방식은 난징국민정부측이 '해임' 하는 방식이 아닌, 판중윈 스스로가 '사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판중윈 이후 임시로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직을 맡은 리셩우 당시 교육부 부장.
1943년 6월 5일자 신중국보 (新中國報)의 국립중앙대학 총장 판중윈이 '사임' 한다는 기사.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왕징웨이측이 학생들의 반발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이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타협과정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왕징웨이는 국립중앙대학의 '교풍 (校風)'이 잘못되었다 비판했고,학생들의 새벽 시위 이후 난징국민정부는 바로 공무원들을 보내 학생들의 행동을 훈계하였고 모든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자신이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법을 준수하고, 영도자 (왕징웨이)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회개서' 에 서명해야 했다.
또한 난징국민정부와 국립중앙대학은 판중윈의 해임이후 바로 교내의 학생단체들에 대해 해산을 명했고, 교내에서 비밀단체를 조직한 이들과 본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를 처벌하려 하는등 오히려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때문에 국립중앙대학에 재학하며 한족동맹과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있었던 조선인 학생들은 걱정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국립중앙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입대를 포섭하기 위해 파견된 김병호 (金柄豪, 현지에서는 고중민 高仲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 와 연락하며 임시정부에 협력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병호는 송지영에게 1943년 6월 한국독립당 난징-상하이 일대의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송지영은 이를 승낙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조선인 학생은 결국 일본에 송지영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 일부가 항일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임정과도 연관되었다는 밀고를 해버렸고 그 결과 송지영과 김병호는 모두 일본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이렇게 조선인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일본에 밝혀지면서 국립중앙대학 내의 모든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에 검거,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과정에서 일본과 협력을 선택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학생운동과 난징국민정부의 임시동맹 - 청해운동 (淸毒運動)
이러한 학생운동 탄압의 분위기는 1944년 초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1944년부터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국립중앙운동의 학생운동이 난징국민정부와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바로 아편이었다.
당시 난징국민정부에서는 아편의 재배 & 판매 & 사용이 자유로웠다. 왕징웨이는 정권 초기 정부 재정수입을 위해 아편의 유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후기에는 이에 통제해야 한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왕징웨이가 아편 통제로 돌아서게 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난징국민정부 권역내에서 아편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그 수익을 난징국민정부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만큼,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아편유통권을 일본에서 가져와 아편을 자신이 직접 통제함으로서 그 수익을 얻어 부족한 정부재정을 매꾸려 했다. 왕징웨이가 기존의 국민정부에서 실시되고 있던 아편통제정책 (1936) 을 난징국민정부에서 실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편수입을 극대화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하여 아편의 유통권을 장악, 아편의 수익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고, 때문에 왕징웨이는 생각을 바꾸어 오히려 아편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권이 아편의 유통권을 장악하기를 바랬다.
또한 민중들의 지배를 얻기 위해서도, '아편을 자유로이 허용하고 있는 정권' 이라는 이미지는 아편전쟁을 겪었던 중국 민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져올 수 없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이 아편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왕징웨이가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되었던 난징조약 체결 100주년을 기념해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를 개최하고 아편의 해악을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차원이었다.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당시 난징국민정부의 린바이셩은, 이러한 아편 통제권을 일본에서부터 가져올 방법을 생각해낸다. 이는 바로 민중들의 '아편 반대' 여론을 부추겨 일본으로 하여금 아편의 통제권을 난징국민정부로 이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편 반대' 여론을 어떻게 부추길 것인가? 바로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도 함께했다.
당대의 아편 유통 상황 구조를 보면, 아편전쟁의 발발에서 100년이 넘게 지나며 아편의 해악이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계적으로 아편을 반대하는 여론도 커지게 되면서, 아편은 세계적으로 규제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세계 각국이 정부차원에서 점점 규제를 하고 있었고, 중국도 장제스의 국민정부 시기에는 1935년의 6개년 아편 금지 계획등 여러차례 아편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쳤다. 유신정부시기에도 유신정부는 아편의 판매를 신규 사용자에게는 제한하고 기존에 아편 사용자로 등록된 사람들에게만 판매하는 등 제한 정책이 점차 펼쳐지며 아편의 사용자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였다.
학생들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편이 인민에게 주는 해악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일반 민중들보다는 아편과는 거리가 더 멀었으며, 오히려 아편을 강력하게 통제해야한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인민의 해악인 아편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학생들과 민중들
'아편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정권의 지지와 정통성을 세우고 일본으로부터 아편 유통권을 받기를 원하는'
난징국민정부
는 대립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린바이셩은 학생들을 '동원'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아편 반대집회를 개최하게끔 하려 했다. 당시 난징국민정부서 신국민운동을 통해 중국청소년단 (보이스카우트 개념) 등 청소년단체를 지도하고 있었던 린바이셩은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에서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밝히며, 대학생들도 본 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이 아편 반대시위는 '아편 반대' 여론을 확대하기 위한 왕징웨이측의 고의적으로 일으킨 관변 시위의 모습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신국민운동과 이를 통해 탄생한 중국청소년단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이에 청년구국사를 비롯한 지하 학생조직들은 난징국민정부가 자신들의 오랜 주장인 아편 반대를 주장하는 것을 알고, 이 기회를 오히려 아편을 몰아내고 아편이라는 존재로 일본과 묶여있는, 아편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그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왕징웨이 정권의 모순성을 동시에 비판할 기회로 삼아
린바이셩이 시위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를 하기도 전에 아편 반대시위를 자진하여 개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3년 12월 7일, 이들은 린바이셩의 주장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편 반대 구호를 외치며 거리의 아편 판매상들을 공격, 아편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모습에 아편이라면 질머리가 나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린바이셩을 비롯한 난징국민정부는 시위를 규탄하기는 커녕 오히려 시위의 진행을 내버려 두며 암묵적으로 이러한 학생들의 자진적인 시위행동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시위에는 국립중앙대학의 공과대학 2학년이었던 한 학생도 참가했는데, 그 학생의 이름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장쩌민 (江澤民) 이었다.
중국대륙 제5대 주석이었던 장쩌민은 1943년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였다. 장쩌민은 당시 입학한 학생중 최연소였으며 장쩌민은 여러 동아리 활동과 문예활동에 참가했다. 장쩌민은 중국대륙 성립후 1998년 자신이 쓴 글 '憶厲恩虞同志' 에서 이날의 시위에 참가한 경험을 서술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12월 8일에는 난징 내 여러 대학의 학생조직들이 연합을 구성,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난징 국민대회당에 모인 후 이 과정에서 난징 민중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국민대회당 앞에서 난징 시내의 아편상인들로 부터 압수한 아편을 모아 불태우고 동시에 아편 흡입에 사용되는 담뱃대등 도구들도 같이 불태웠다. 일본 헌병대가 이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난징국민정부가 이 시위를 옹호하고 있는 이상 일본은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학생들은 아편 반대시위에서 일본 헌병대가 시위를 방해 & 해산시키려 하면 린바이셩의 이름을 내세워 헌병대를 철수 시켰고, 학생이 일본에 의해 체포되어도 린바이셩의 이름을 내세워 석방을 유도했다. 학생들의 아편반대 시위대는 공개적으로 항일구호를 내세우기 보다는 '아편 반대' 라는 구호에 집중하여 "아편을 피우면 일본, 왕징웨이가 이득을 본다" 라는 메시지를 민중들에게 완곡하게 전달하는데 노력했다.
이후 청년구국사는 난징에서 수도청년청독총회 (首都學生清毒總會) 를 구성했고 아편 반대운동은 이후 난징뿐만 아니라 상하이, 광저우, 베이징등 난징국민정부 구역 일대로 확산되었다.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차오위청(曹玉成) 이라는 난징의 아편왕을 잡아 난징의 신자커우 거리의 손중산 동상앞에 묶어두고 아편의 해악성을 알리고 이러한 아편을 판매한 차오위청의 악행을 이야기하며 난징국민정부로 하여금 차오위청을 처형하라는 모습도 보였다.
汪主席是復興中國的最高領袖 (왕주석은 중국부흥의 최고지도자시다!) 라는 플랜카드가 걸린 난징 시내의 신자커우 (新街口)의 손중산 동상. 이 동상은 중국대륙의 성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난징국민정부가 의도하지 않았던 열기를 가졌던 아편 반대 운동은 1944년 3월 난징국민정부의 아편 통제권을 인정하고 아편 유통권을 넘기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양보는 일본이 이러한 아편반대시위가 난징국민정부의 반일 시위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이러한 중국대륙 내에서의 아편유통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들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일본에게는 이 아편유통권 말고도 수익을 얻을 수단이 많았던 만큼, 아편 유통권을 포기해도 큰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일본은 난징국민정부쪽으로 아편 유통권을 이양하면서 아편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몽강자치연합정부 (명목상으로는 난징국민정부의 몽강자치구) 를 위해서도 쓰여야함을 명시했다.
이렇게 관변 시위까지 조직하며 아편 유통권을 획득한 왕징웨이는 이후 장제스 국민정부시기의 아편 통제정책을 다시 제정하는 등 아편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결국에는 다시 아편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민중들의 비난은 '아편을 파는 일본' 에서 '아편을 파는 왕징웨이'로 구호가 바뀌었을 뿐, 아편 문제는 난징국민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1944년 왕징웨이의 아편통제정책은 여기를 클릭 : )
국립중앙대학의 결말
임시총장이었던 리셩우를 이어 2대 총장으로 정식으로 선출된 천주 (陳柱).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국립중앙대학이었지만, 국립중앙대학의 운영은 지속되었다. 1944년에는 231명의 첫 졸업자를 배출했으며 학생의 수도 940명까지 증가하게 된다. (아쉽게도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1943년을 거치며 모두 체포됨에 따라 조선인 졸업자는 1명도 없었다.)
국립중앙대학 1기 졸업자 통계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1944)
문과대학 : 28명 (중국문학과 12명 / 역사학과 8명 / 외국어문학과 8명)
법학-상과대학 : 81명 (정경학과 28명 / 법률과 26명 / 상학과 27명)
교육대학 : 30명 (상세 구분되어 있지 않음)
이공대학 : 35명 (토목공정과 28명 / 화학과 7명)
농과대학 : 31명 (농학과 13명 / 생물학과 18명)
농업전수교육과정 : 13명
사범전수교육과정 : 13명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고 자원이 부족해지며 대학운영은 더더욱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교육의 질 또한 함께 떨어지는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1944년 4월에는 취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천주 총장이 내려오고 천창주 (陳昌祖) 가 총장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립중앙대학은 총장의 경우에도 4년동안 4번이나 교체를 겪게 되었다. (임시였던 리셩우를 포함하여)
천주 (陳柱)를 이어 3대 총장이 된 천창주 (陳昌祖) . 그는 국립중앙대학의 마지막 총장이었다.
난징국민정부의 말기였던 1945년 여름, 국립중앙대학은 238명의 제2회 졸업자를 배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대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조선인 학생 정영호 (의과대학) 가 졸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를 낸지 얼마되지 않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난징국민정부도 역시 해체가 선언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충칭의 국민정부가 다시 난징국민정부 지역을 지배하고 난징국민정부 시기 설립된 대학들을 모두 장악하면서 국립중앙대학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난징국민정부의 해체이후도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잠시 존속했으나, 1945년 9월, 쑹즈원 (宋子文) 내각은 교육부 부장 주자화 (朱家華)를 통해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기존 난징국민정부 점령지에 존재했던 대학들에 대해 '가짜 (僞)' 라는 명칭을 붙이고 해체를 명령하면서 국립중앙대학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하여 난징국민정부에서 만든 대학에 남아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국민정부는 '윤함구전과이상학교학생 급졸업생견심판법 (淪陷區專科以上學校學生及畢業生甄審辦法)' 을 발표하여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기존 난징국민정부 시기 형성된 대학에 다니는 재학생과 이 학교들을 졸업한 학생들로 하여금 1945년 10월, 난징과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임시로 설치되는 임시대학보습반 (臨時大學補習班) 을 통해 별도의 교육을 추가로 받고, 시험을 통하여 학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점령지 내의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구 점령지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반대 시위를 펼쳤다. 이 때문에 국민정부는 정책을 바꾸어 이들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루게 한다는 계획을 바꾸어 기존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생긴 대학을 '임시대학' 으로 바꾸어 그대로 학생들을 수용하게 했다. 이는 기존의 , 충칭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이전한 본래의 대학들이 아직까지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재학생, 졸업생들의 소속문제를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해결하게 했다.
난징국민정부 시기 설립된 대학 (국민정부의 분류에 의하면 '가짜' 대학들)
→ 임시대학으로 변환 (예: 국립중앙대학[난징] → 난징임시대학 )
-> 학생들은 기존의 대학시설 (난징등의) 에서 계속 대학과정을 진행
중일전쟁으로 타 지역으로 이전한 대학들 (본래의 대학들)
→ 정부가 안정되기 전까지 이전한 위치를 유지 (충칭 등)
→ 학생들은 기존의 (충칭등의) 대학시설에서 계속 대학과정을 진행
정부가 안정되어 기존의 대학이 본래의 위치로 '복교'할시
→ 임시대학은 해산, 임시대학 졸업자 & 기존 졸업자들은 본래 대학의 학위 수여처리
(예 : 난징국민정부시기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 학생이어도 임시대학시기 졸업요건을 충족했다면 본래 국립중앙대학의 졸업장을 수여 / 난징국민정부시기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을 졸업했다면 본래 국립중앙대학의 학위를 받은 것으로 인정)
→ 임시대학 재학생들은 학과, 환경들은 고려하여 임시대학 해산후 주변 대학으로 분산
(예 :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생은 국립중앙대학, 교통대학 등으로 분산)
국립중앙대학은 '난징임시대학 (南京臨時大學)' 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문과대학, 법학-상과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이공대학 1~2학년 등 대부분의 구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이 새로이 바뀐 난징임시대학에 남았으나, 이공대학 3~4학년을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교사들의 부족으로 교통대학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1946년 4월 국민정부는 임시대학 제도를 폐지했고, 위와 같이 졸업자에게는 본래 학교의 학위를 인정하게 했고 재학생들은 주변의 대학으로 분산되게 함으로서 국립중앙대학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끝이 나게 된다. 이름바 '복교' 로부터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진링대학과 국립정치대학, 국립중앙대학이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며 본래 자신들의 부지를 다시 되찾게 되었고, 국립중앙대학 해체당시 대부분의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진링대학은 본래의 국립중앙대학과의 합의를 통해 부지 밑 서적은 진링대학교에 그대로 귀속시키고, 기자재들은 국립중앙대학에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의 짧은 역사는 끝이 나게 되었으나, 국립중앙대학 출신들은 이후로도 학문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활동을 지속하면서 중화권을 빛내는 인재들로 성장하게 된다.
[출처]
(난징 국립중앙대학 자료)
國立中央大學祕書處,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 1944.
國立中央大學祕書處, 「國立中央大學覆校第二屆畢業紀念刊 」, 1945.
國立中央大學, 「國立中央大學要覽 」, 1945.
國立中央大學, 「國立中央大學一覽」, 1942.
(충칭 국립중앙대학 자료)
國立中央大學學生自治會, 「國立中央大學概況」, 1944.
(그외 자료)
박강, 2003, 『중일전쟁기(1937-45) 화중점령지에서의 일본 아편정책』, 중국사연구 143, pp 241-267.
大阪每日日報, 「華文大阪每日 1942年 第8券 6期」, 1942
중화일보 1940년 4월 17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0.04.17
신중국보 1940년 6월 5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3.06.05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
국립중앙대학 정문 사진 / 장쩌민 사진 : 중문판 위키피디아
난징중앙도서관 사진 : https://www.ncl.edu.tw/content_267.html
1945년 이후 정보 : https://web.archive.org/web/20140201232823/http://sec.ncu.edu.tw/ncudhis/index_chs.php?year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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