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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㉝ 국민정부 환도 1년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표지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18.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19. 전면화평과 대외관계 

20. 팔굉일우와 사해위가 

21.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연맹운동

22. 동아연맹중국동지회선언

23. 장제스에게 최후의 경고 

24.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다 

25. 중일국교조정에 대해서 

26. 동아연맹실현으로의 추진

27. 국민당과 동아연맹운동 

28. 중국국민당 제6기 3중전대 대회선언 

29. 중국국민당 당원과 민중에게 고하는 글 

30. 중화민국 30년의 의의 

31. 동아연맹의 중심문제 

32 동아연맹운동의 의의, 정신 및 과정에 대해


국민정부 환도 1년
(國民政府 還都一年)

*국민정부 환도 1주년 기념식은 쇼와 16 (1941) 년 3월 30일, 오전 9시 30분부터 국민정부 대예당에서 거행되었다. 청천백일기와 손중산 선생의 초상화가 걸린 검소한 식장에서 왕 주석은 「국민정부 환도 1년」 이라는 제목의 훈사를 하였고 이는 전국에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열렬한 훈사의 시작부터 왕 주석은 동아연맹운동의 진전을 설명한 후 시정 전반에 걸친 1년간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전면 화평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밝혔다.

     

작년 오늘, 국민정부는 중앙정치회의의 결의에 따라 난징으로 환도하여 화평반공건국을 시정의 근본방침으로 삼을 것을 선언하고 화평의 실현, 헌정의 실시에 매진해왔다.

     

화평의 실현을 위해 우방 일본에선 아베 대사 및 국민사절을 난징에 파견했고, 성의를 다해 중일 양국은 피아협력하여 과거의 분규를 제거하고, 장래의 광명한 대도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중일 양국은 국교조정교섭을 개시하여 11월 30일 중일국교조정을 위한 중일기본조약을 성립시켰고, 동시에 중일만삼국선언을 발표하여 상호간에 도의를 기초로 하는 신질서를 건설하고, 서로가 서로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며, 정치와 경제, 문화등 각 방면에서 상호 친선의 수단을 강구하여 공존공영, 동아부흥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완수하기를 기약했다. 중일관계는 이리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국의 동지들은 나아가 이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동아연맹운동을 발흥시켜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구통의 4대 강령을 표방하고, 동아의 여러민족으로 하여금 각각의 자유와 독립의 입장에서 공동의 목적을 향해 공동으로 노력하여 공동의 행복을 가져오려 하고 있다.

     

헌정의 실시에 대해서는 그 근본정신은 전국의 유력인사들이 당파 구별없이 일치단결하여 중심세력을 만들어 국본을 전정하는 것에 있고, 중앙정치위원회는 이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생겨났고 성장하게 되었다. 동아연맹운동이 생겨난 이후 국내의 각 당파뿐만 아니라 공화당, 흥아건국운동, 대민회등이 모두 자발적으로 발전적 해소를 하고 중국국민당에 가입함으로써, 중심세력을 증대하고 정치, 경제등 일체의 건설을 촉진시키는데 용이하게 하였다. 이밖에 헌정실시위원회의 설립이 있었고, 헌정 실시의 첫걸음으로 오권 헌법 초안의 재심의를 하게 했다, 현재 편성과 심의는 끝났고 연합심의를 하고 있다. 요컨대 기본정신이 확립되었으니 기관의 조직이나 각각의 문제들은 자연히 합리적으로 해결되고, 헌정실시는 필연적으로 화평의 실현과 함께 진전되어 갈 것이다.

     

이상 이야기한 바는 일체의 건설에 대한 근본적인 방침으로, 이는 국민정부가 이 방침에 따라 매진할 것이며, 이러한 방침에 절대 오류가 없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정 및 사회의 정황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책임하다고는 할 수는 없겠다. 국민정부 환도 이후 1년간 정치, 경제 등 각종의 정세는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전면적 화평이 아직 실현되지 않고 전쟁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 수반되는 민중의 고통은 아직 존재하고 있고 또한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고 전면적 화평이 실현되지 못해 시정의 행정적 능률과 경제생활의 개선 모두 제한과 속박을 받아 충분한 발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고통은 전면적 화평이 실현되지 못한 결과인데, 그렇다면 전면적 화평을 실현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충칭 당국이다.

     

충칭측항전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신속하게 화평을 다시 회복해야 하고, 더욱이 반공을 하지 않으면 건국도, 화평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인적 권리에 대해선 잊은채 독단으로 맹목적이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펼쳤고 이 때문에 전면적 화평은 지연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도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를 그르치고 인민에게 재앙을 가져온 자의 죄를 국민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취해야 할 유일한 행동은 국민정부의 힘이 미치는 지방에 있어서 화평반공건국의 근본방침에 근거하여 하나의 화평의 모범을 만들고 전력을 다해 치안을 확립하고 사회인민의 경제생활을 개설하는 것이다. 지역에서의 화평이 잘 이루어진다면 전면적 화평은 자연스럽게 실현될 수 있다. 이는 맹자가 이야기한 ‘백성이 돌아오게 하는 것’ 과 같은 것으로, 이는 충칭당국의 방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치안확립경제생활의 개선이라는 두가지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주의해야할 점이 두가지 있다.

     

첫 째, 나는 작년 4월 26일, 나를 벌하는 정신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가 있다. 여기서는 전면화평의 실현 이후에도 중국과 일본은 합작을 위해 할 일이 존재하며, 우리가 만약 이 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전면적 화평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재에 있어서 이러한 정신은 더욱 명심해야하는 것이다. 현재 치안상황도, 경제와 생활도 매우 곤란하다. 이 고통은 전부터 충칭당국에 의한 것이지만, 국민정부는 현재 충칭방면으로 하여금 화평을 승낙시키게 해 국난에 임하게 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치안을 확립하고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비관할 필요도, 이를 과대포장할 필요도 없다.

     

둘 째, 치안의 확립과 경재생활 개선은 정신물질도 함께 필요한 것이다. 특히 물질재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청렴은 장려하고, 부정은 엄벌해야 한다. 또한 금전을 출납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이를 잘 연구하여 가장 유효한 곳에 사용할 수 있게 해야한다. 이상의 두가지는 거의 전체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에 의해 행하고 있는 일은 다음과 같다.

     

     

     

재정과 경제의 확립

먼저 재정경제 방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재정방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밑에 서술한 바와 같다.


  • (1) 세입세출에 대해서는 국민정부의 환도 당시 매달 예정된 수익은 1,600만 위안 가량이었다. 그리고 이를 지출에 사용했다. 그리고 재정당국의 절실한 조정을 거쳐 잘 대응함으로써 재정의 기초는 마침내 확립되었다. 그후 사업비를 비롯한 기타 필요한 지출은 계속 증가하거나 여러 사정으로 수입과 지출의 절대적 평형은 항상 유지할 수 없었으나, 지난 1년 평균적으로는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 지출에 공급할 수 있었기에 그 기초는 점점 공고화 되었다. 민국 30 (1941) 년 초에는 매월 2,600만 위안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는 환도 당시와 비교해보면 월마다 1,000만 위안 가량이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재정당국이 채택한 신뢰할 수 있고 적정한 정책들은 이를 가능하게 재정에 여유를 불어넣었을 뿐만이 아니라 화평의 건설사업을 더욱 진전시키게 하며 수 많은 난관을 돌파해왔다.


  • (2) 지방재정회의를 소집한 것에 대해, 재정부는 작년 11월 1일 지방재정정리회의를 소집하여 40여 건의안건을 통과시키고 이로 하여금 각 성시가 지방재정을 확실하게 집행하게 하고 재정을 조정하게 하였다. 이 회의내용은 매우 상세하게 인쇄도 되었으니 참고하기에 충분하다.


  • (3) 중앙저비은행을 설립한 것에 대해서는, 재정부는 작년 5개월 가량의 설립준비 과정을 거쳐 올해 1월 6일 중앙저비은행을 설립했다. 현재 중앙저비은행은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지점도 연이어 개업되고 있고, 신 지폐를 발행하여 이는 상당한 신용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향후 물자의 조정도, 금융의 평형도 순차적으로 진전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4) 세율을 증가시키는 사항에 대해서는, 관세, 염세, 물품세의 3가지 세금은 재정상의 수입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모두 신중한 고려를 거친다. 즉, 특수한 상황이나 인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된 것은 절때로 세율을 높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채소나 달걀과 같이 생활과 밀접한 것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고, 담배, 맥주, 양주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세율을 높이는 등 수입을 증가 시키되, 인민의 부담을 감소시킨다는 데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 (5) 소득세 징수에 대해서는, 소득세는 납세자에 대해 직접 징수하는 것으로, 간접세와 달리 전가할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재정상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세금이다. 현재 공무원의 봉급에 대해 과세를 실시했지만, 점차 그 외의 영리사업 소득과 저축 소득에 대해서도 적당한 시기를 고려해 과세에 착수할 예정이다.


  • (6) 염장의 정리에 대해서는. 소금은 인민의 식용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금은 해염, 지염, 그리고 정염이 있는데 해염의 생산량이 가장 많다. 하지만 바닷가의 염장들은 전쟁의 발생이후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설비들이 파손되어 손실되어버렸기 때문에 소금의 생산량은 갑자기 감소했다. 현재 계획적으로 염장의 회복을 실행하고, 생산량을 증가시켜 인민의 식용으로 공급하려 하고 있다. 광동성의 염무기관은 이미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소금 생산 시설은 장래 점차 복구되어 소금의 공급을 충분히 하여 가격을 낮추게 될 것이다.


  • (7) 가혹한 기타 세금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러한 세금들은 인민의 생활을 해치는 것이기 국민정부가 환도 후 즉시 명령을 통해 이를 철저히 없애게 했다.

     

    

위에서 언급한 7가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으로, 요컨대 세출입의 평형은 재무행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추축이며, 지방재정의 정리는 국가재정의 근본을 위한 것이다. 재정부가 이전부터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근본은 인민이기에, 인민에게 가혹한 잡세를 없애고, 소금의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국력을 배양하는 것으로, 이는 국민의 납세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국가은행의 설립은 금융을 활용하여 경제의 조절에 중점을 두는 것이나, 증세 등에 대해서는 재정정책을 통해 수지 양쪽의 평균을 계산하는 등의 조치 이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 방면에 대해서는, 작년 3월 20일, 일본군 총사령부로부터 군 관리 공장의 교환 선언 발표가 있었다. 이에 5월 공상부일본군관리공창접수위원회 (日本軍管理工廠接收委員會) 가 설립되어, 작년 10월에 공장 4개, 작년 12월 공장 4개, 올해 2월 6개의 공장을 회수하여 합계 14개의 공장을 회수했다. 방적공장 3개, 기계염색공장 2개, 시멘트공장, 제분공장, 꽃무늬 드레스 공장, 기계제조공장, 모직공장, 고무공장, 양말공장, 셔츠 제조 공장, 제강 공장을 회수했다. 또한 중일 공장주들 간의 협의와 합작에 의해 일본대사관을 거쳐 공상부에 통지하여 일본군의 관리를 해제한 공장이 5개 있다. 이들은 금속 도색 공장, 염색 공장, 면직물 공장, 제지 공장등이다.

     

그리고 광동 방면에서 회수한 것으로는 발전기 공장, 수도공장, 시멘트 공장, 음료수 공장, 황산소다 공장, 제지 공장 2개, 설탕 공장 2개가 있다. 이 10개의 공장은 모두 광동성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는 사업으로, 그 중 발전기 공장, 수도공장, 시멘트 공장, 설탕 공장, 음료수 공장등은 회수 이후에도 광동성 정부는 본래 이를 경영하고 있던 일본측에 잠시 대리경영을 위탁했는데, 제지 공장은 아직 교섭이 미해결된 채 남아있다.

     

이렇게 민국 30 (1941) 년 3월까지 회수된 공장은 합계 28개로, 이것은 우방인 일본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중국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번영과 발전을 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이는 것으로써, 중국은 더욱 노력을 가해 진흥과 발전을 도모해야한다. 현재 공상부가 사업 착수를 통해 처리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1)전쟁 발발 후 공업의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각 성 정부에 명하여 공상부가 고지한 공장등기규칙에 따라 공장등기를 실행함으로써 조사에 이바지한다.


  • (2)전국 공장의 상황을 공상부의 직접조사 통계외에도, 각 지방정부에 명하여 개별적으로 이를 조사하게 하여 부흥계획에 참고할 수 있게 한다.


  • (3)공업금융의 발전, 방직공업의 부흥, 화중 지역의 제분공업의 부흥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고안한다.


  • (4)협조공창복업철행변법(協助工廠復業哲行弁法) (공창들간의 협조를 돕고, 공창들의 부흥을 위해 인재들을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 을 마련한다.

  • (5) 소형 제사(製絲) 공창 관리법을 수리한다.


  • (6) 전국 도량형 관리소를 다시 설치하고, 각 성과 시에 검정소를 설립하여 도량형의 각종 규정을 마련한다.


  • (7) 기술자, 기술부의 등록증 정리에 대해서는 공상부와 농광부 양부가 협동으로 관리하게 한다.

    

  • (8) 각종 상업행정기관의 발전에 대해서는, 상표국, 상표검사국, 차류 & 면직물 관리국과 같은 것은 1년내에 정리하여 상표국, 상표검사국의 양국의 행정을 다시 전쟁 전의 상태로 복구시켜 다시 수출에 다대한 공헌을 하게 한다.


  • (9) 상업단체들에 대해서는. 베이징과 상하이 두 개 도시의 상회와 같은 것은 공상부, 사회부 양부에 의해 개조 작업을 하게 하고, 또한 이들을 통해 각 동업분회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하여 각종 상업단체 조직을 확대한다.

  • (10) 국제무역국을 설립하여 대외무역의 통제를하고, 본국의 국제수지의 평형을 재고하고, 신 법폐의 기초를 공고히하게 한다. 공상부는 이미 이에 대한 초안을 마련했고, 새로운 국제무역국 및 국제무역공사의 설립의 준비를 위해 각종 규제와 통제사항을 마련하고 있다.


  • (11) 회사들의 상호등기를 정리하고 회계사의 증명서를 검사한다.


     

등등이 있다. 이상 이야기한 바는 공상부에 대한 예로, 농광(農鑛), 교통과 철도 각 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년동안 진행된 교통사업을 돌아보면, 우정방면에서는 우선 우정관리권을 다시 회수하여 직접 이를 관리하고 감독하게 하여 우정의 관리를 통일하게 했다. 작년 9월 23일 우편요금을 개편하여 전국과 지방의 구별이 없게 했다.

          

소절환 (蘇浙皖,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3개의 성을 이야기한다.)  구역의 저금업무는 최근에 복구되어 이전에 저금한 것과 새로운 저금한 몫을 구별하여 각지의 우체국에서 이를 관리하게 하고, 부에서 규칙을 개정하여 엄격하게 감독을 하고 있다. 전신 방면은 선전부와 협력하여 각지의 전신을 접수, 개조하고 있다. 항운 방면은 상해항정국을 정리한 해외 항공업무의 실황을 살펴 광저우 등의 항정국을 회복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동시에 선업공회를 개편하여 용선업의 부담을 경감시키게 하고 있다. 철도 방면에 있어서는 철도의 손실은 도로보다 큰 만큼, 환도 직후부터 중일 쌍방이 성의를 가지고 협의하고, 중국의 의견을 반영하여 국유국영을 원칙으로 하여 전국의 화평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전쟁상태가 계속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가능한 범위에서 이를 위해 조정하고 있다. 농업과 광산업은 국민경제에 있어 큰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현재 계획이 진행중이다.

     

각자의 부분은 각자의 전문기관이 있으나, 그 성질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하나의 전체를 위하는 것으로, 최근 행정원에 경제위원회를 구성하여 행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원장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재정, 공상, 농광, 교통, 철도 5부분의 부장을 위원으로 하고 그 외의 각 부의 장은 출석할 수 있게 하여 전체 경제계획의 발전을 도모하게 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발전시켜 민력과 국력을 확충시키고, 중일 양국의 관계에서 경제제휴를 실행하여 동아의 번영을 도모하게 한다. 재정과 경제의 확립은 이와 같이 책임을 가지고 전력을 가지고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민식의 해결


여기서 한가지 중대한 일을 특별히 보고하고자 한다. 이것은 쌀의 문제이다. ‘백성은 음식으로써 하늘이 된다 (民以食爲天)’, ‘중국은 농사로써 나라를 세운다’ 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전쟁 전 중국의 쌀은 부족했다. 그랬기 때문에 해관의 통계에 따르면 쌀의 수입량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발생 이후 이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큰 전쟁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따른다” ( 大兵之後、必有凶年, 노자의 도덕경 30장에서 비롯된 말이다.) 라는 말은 피할 수는 없는 사실이지만, 여기에 공산당유격전, 초토전에 의해 생산량은 날이갈수록 더더욱 감소하고 있고, 교통은 가로막히며 쌀이 날이 갈수록 품귀해졌다. 또한 충칭당국의 지폐가 남발하고 있고 상해의 악의적인 상인들의 투기에 의해 일반 인민들은 한층 더 공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공비를 숙청하고, 농촌을 안정시키고, 아울러 여러 과학적인 방법이나 정치적 수단을 통해 농업을 장려하고 생산을 증진시켜야 한다. 또한 공정하게 쌀의 가격을 조절하여야 한다. 양식관리위원회의 설립은 이 중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년 10월부터 전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 그 공작의 경과 상황은 다음과 같다. 쌀 가격의 폭등은 대부분 상인의 착취 농단에 의한 것으로, 난징 장강 일대의 쌀값은 안후이 남쪽의 우후를 표준으로 하고 있다. 쑤저우와 창저우 일대는 상하이 조계에 의해 가격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최근 여러 사정으로 상하이와 타 지역의 가격은 점점 연계를 이탈하고 있다. 따라서 쑤저우와 창저우의 쌀값은 상하이와 동일하지 않게 되었다. 양식관리위원회는 쌀값 관리에 대해 힘을 쏟고 있으며, 특히 미곡징집변법 (米穀徵集弁法)을 정하여 양식공회를 통해 연합변사무처를 조직하여 하나의 기구아래 가격을 한정하고 매수를 집중하여 각 방면의 자유판매를 엄금하였던 것이다.

     

최근 난징과 장강의 쌀값이 현물이 부족해지며 품귀현상을 빚었지만, 아직 70위안대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정부에 의해 미곡을 매입하여 가능한 범위에 보급했기 때문에 난징과 장강 일대의 쌀값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통제를 가하지 않았다면 우후의 쌀 가격은 벌써 100위안을 넘고, 난징과 장강일대의 쌀 가격은 백 수십 위안을 초과했을 것이다. 이상 언급한 바는 쌀의 자유판매에서 생기는 농단을 방지하는 것으로, 이의 조절에 대해서는 전년도 미곡의 생산이 감소되어 각지의 비축량이 안정되지 못했다. 소절환 구역과 난징과 상하이 등 질서가 회복된 지역의 쌀 생산량도 2,400만여 석으로, 소비량이 2,900만여 석이기에 500만 석이 부족한다. 최근 각지의 인민들이 대부분 잡곡을 겸식하고 있으나, 아직 많이 부족하다. 현재 양식관리위원회의 노력우방 일본의 성의 있는 원조로 부족분의 5분의 4가량은 구했기 때문에, 수확시기 까지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를 난징, 진장, 단양, 난퉁, 항저우, 우후, 벙부 등에 분할하여 운반하여 인민의 식용으로 공급하데, 한편으로는 계속하여 쌀을 수매하여 수확시기까지 백성의 식용이 부족하지 않게 하고 있다. 이렇듯 요컨대 쌀의 문제는 참으로 긴급한 문제로써 정부는 전력을 다해 이를 처리하기 위해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여름 공무원들은 봉급을 스스로 헌납하며 쌀의 가격하락을 원조하였고 또한 재정부는 비상한 어려움 속에서도 거액의 돈을 내어 매해 쌀을 비축하고 있다. 이는 외부의 사람들도 알고 있는 바이겠지만, 그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일시에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한마디로 이를 개괄하며 정부는 전력을 다해 책임을 지고 있을 뿐이다. 양식관리위원회의 사명은 이렇듯 지엽적인 것을 다스리는 것이나, 농업이라는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농광부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행정원의 책임이며, 또한 국민정부 전체의 책임이다.

     

우리는 시시각각 ‘백성은 음식으로써 하늘이 된다’, ‘중국은 농사로써 나라를 세운다’ 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중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농업상에서 큰 개선을 이뤄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경제정책의 출발점에 있어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이다. 현재 중국 인민의 고통은 쌀 문제에 있지만, 우리는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한다. 국민정부 환도 이후 각 지역이 입은 피해가 광대함을 감안하여 진무위원회를 설치하고 구제공작을 담당하게 했다. 예를 들어 작년 4, 5월은 곡물의 수확전 가장 양식이 품귀해지는 시기로, 정부는 곤란한 가운데도 구제금으로 100만 위안을 내었고, 강소성, 절강성, 안후이성 및 베이징과 상하이 두 도시의 가격 안정을 위해 124만 위안 가량을 지출했다. 또한 수도와 강소성과 절강성의 응급 구제를 위해 추가로 20만 위안을 지출했다. 쌀 수확 이후에도 계속하여 겨울시기의 구제를 위해 4성 2시외에도 후난, 후베이, 허난 및 우한 등 총 8개 성과 3개의 도시에 구제금으로 138만 위안을 지출했다. 이 3종의 구제와 그 밖의 영세한 구제를 합치면 1년에 약 300만 위안의 구제금을 지출한 것이 되는데 이는 정부가 정한 지출보다 40만 위안을 더 지출 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 방면에서는 진무위원회와 각 부, 지방 기관단체등이 협력하여 겨울의 구제를 위해 70만 위안을 모집하였는데, 이를 통해 구제받은 이는 16만 여명에 이르고, 이 밖에 직접 구제사업을 실시하여 2,200명을 수용하였으며, 겨울 구제기 간에는 3,400명에 이르렀다. 이 외에 강서성, 절강성의 자동차 수리와 화재 복구에 대해서도 진력을 다하고 있으나 각지의 교통이 인력과 여러 자원이 부족하여 교통이 아직 원할이 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상은 구제금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 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50만 위안의 구제 준비금도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도 재정 상황이 허락한다면 순차적으로 증가시켜야 할 것이다.


그 외 수리(水利) 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수리가 되지 않으면 이는 수재가 되기 때문에, 수리위원회는 강둑, 운하의 둑, 바다의 방파제를 수리하여 결멸의 화를 막고 있다. 그중 황하강의 중머우 (中牟)의 제방이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기에 현재 국민정부는 이를 위해 특히 위원회 (1941년 4월 5일 설립된 주도황하중모결구위원회 (籌堵黃河中牟決口委員會)를 의미하는 것이다.) 를 설치하여 그 일에 종사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중머우부터 리진(利津) 까지 이르는 일천리 가량이 강바닥이 막히어 황하의 물이 바다로 많이 막혀 제대로 배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제대로 배수시키지 못하면 산동과 하남성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신중하게 주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선전의 철저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는 경제생활의 이야기로, 경제생활에 연관되고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문화생활이다. 민국 27 (1938) 년 12월 29일 나는 염전에서 이야기 한바 있지만, 교육사상의 방침을 확립하여 양국의 영구적 화평의 기초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작년 11월 30일 체결된 중일기본조약에서 문화의 융합, 창조와 발전에 대해 규정을 마련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심리의 개조부터 착수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인 일로, 이를 위해 국민정부는 환도 이래 행정원에서 교육부와 별도로 선전부, 사회부 2개의 부를 신설했다. 선전부와 사회부는 사변 전에는 본래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안에 설치되었던 것이나, 환도 이후에는 새롭게 행정원 안에 설치되었다. 사회부는 사회사업 외에도 사회운동에도 힘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교육부, 선전부와는 매우 관계가 깊은 것이다. 선전부는 정부의 사상과 정책을 사회민중에게 선전하고, 이를 실행한다. 또한 사회부와 교육부와 관계도 깊다. 이처럼 3개의 부서가 협력한 결과, 1년동안 문화에 있어서 공헌이 많았다. 선전부분에 있어 중요한 진전의 예는 다음과 같다.


  • (1) 신문보도의 개편에 대해서는 작년 5월 중앙(中央)사 (現 중화민국(대만)의 중앙통신사 (中央通訊社), 중일전쟁 당시 남아있던 상하이 지부를 왕징웨이측이 접수했다.), 중화(中華)사 (중화연합통신사 (中華聯合通訊社)를 의미)를 합병하여 중앙전신사(中央電訊社) 로 개편하고, 중앙전신사를 국가를 대표하는 유일한 언론사로 하였다. 그 다음 중련의 판매부를 개편하여 중앙서보발행소로 하고, 신문업 연락실 (報業聯絡室)을 접수, 개조하여 중앙신문업경리처로 하여 각 신문의 발생상황를 관리하고 광고, 설비상의 발전을 보조하고 신문 경영의 합리화를 꾀하게 했다.


  • (2) 상하이신문검사소의 접수를 통해 선전부에 의해 직접 신문검사권을 행사한다.


  • (3) 영화검사위원회를 설립하여 영화에 대한 검사권을 회수하였다.


  • (4) 중화전영 (중화전영 (中華電影), 1939년 설립된 영화사 중화전영고분유한공사 (華電影股份有限公司)를 의미한다.)에 대한 조정


  • (5) 중국방송사업건설협회 (中國廣播事業建設協會)를 설립하여 각지의 방송국을 접수, 개조하였다.


  • (6) 각지역의 선전기구를 개편하여 성시선전조직규정 (省市宣傳組織規定), 성시선전회의조직통칙 (省市宣傳會議組織通則)을 제정하여, 이를 발표하여 실행한다.


  • (7) 선전부 간부들의 훈련을 위해 중앙선전강습소 (中央宣傳講習所)를 설치하였고, 현재 중앙선전강습소는 제2기생의 훈련을 시작하고 있다.

     

이처럼 1년동안 선전기구는 점점 확립되고 있으며, 선전공작은 점차 전개되어 교섭과 조정을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원만하게 해결할 것이다. 특히 방송사업의 경우, 각지의 방송국들은 본래 사변 이후 일본이 운영하였고 이를 위해 기계설비등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운영권과 장비를 기부 또는 인도의 방식으로 반환하고 필요한 기자재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모든점에 있어서 우방인 우리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이며, 선전에 있어서의 합작의 성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노력한다면 심리개조는 성공할 것이며, 이를 통해 중일양국의 신관계 및 동아신질서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있어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교육시설철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교육방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교육의 진가는 실제로 교육방침이 독립자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있다. 이점에 대해 일반인들은 화평지구 지역 내의 교육이 독립자주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1년간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종류의 억측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 (1) 각 대학교, 중학교, 소학교 학생들은 환도 이후 즉시 국가(國歌)를 제창하게 하던 것을 복원했다.


  • (2) 유신정부 시기에는 일본의 5년제 학교 제도를 따랐던 적이 있으나, 국민정부 환도 이후에는 3·3제로 다시 복귀되었다. (일본이 중등교육을 중학교를 통해 5년으로 운영한 반면, 중화민국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운영하였다.)  


  • (3) 중학교, 소학교의 교과서는 교육부에서 자유롭게 편찬할 수 있게 하였다. 반일과 배일의 교과서에서 벗어나 우리의 손으로, 선린우호의 교과서로 바꾸게 하고, 타 국가민족의 의식을 소개하는 자료도 자유롭게 편입, 배치할 수 있게 했다.


  • (4) 각 학교의 교육과정은 외국어로 일본어를 추가한 것 이외에는 전쟁 전과 비교했을 때 변화한 점이 없다.


  • (5) 훈육 방침에 대해서는 지난 일년동안 교육부를 통해 각 성의 교육당국을 소집하여 상세하게 논의하고 방안을 규정하였다. 이 때 우방 일본의 간섭이 있었던가 하는 것은 없었다.


  • (6) 학교 내의 군사훈련 및 보이스카우트 교육도 다시 복원했다.


  • (7) 교육부는 체육과목을 통해 국민체조도해 (國民體操圖解)를 발행하여 각 성시에 보급하여 실시하게 했다.

     

요컨대 지난 1년간의 교육방침은 반일, 배일 제외하고는 우방 측과의 약속 속에서 여러 가지로 서로 존중하고 있는, 일체의 독립자주 정신을 보유하고 있다. 염전에서 내가


“ 일본 양국의 근린관계에 비추어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선린과 우호관계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지금의 상태는 철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일본과 중국 이 함께 이에 대한 상호 책임을 규명해야한다. 일본과 중국간의 영구적 평화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교육정책을 선린주의와 상호모순되지 않게 하고, 일본 또한 중국에 대해 전통적인 멸시의 태도와 정복사상을 포기하고 대신에 친중국적 교육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

     

라고 이야기 한바와 같이, 환도 이후 우리는 이점에 대해 실제로 노력하며 이를 완수하고 있다. 일본측의 우리에 대한 원조와 불간섭은 우리를 감탄시키고 있다. 또한 국민교육의 구체적 실시도 착실하게 발전하고 있다. 각 시와 현이 전쟁으로 파괴되면서 지방교육비를 짜낼 방법은 없으나, 중앙정부는 다음과 같은 각종 방법으로 이를 지원하고 있다.

     

  • (1) 교육경비의 보조, 소절환 3성과 베이징과 상하이 2개 도시에 대해 중앙이 부담하는 교육보조비는 연 300만 이상에 달한다. (광동과 호북지역은 지역에서 자급할 수 있다.)


  • (2) 중앙이 직접 교사와 및 지방의 중소학교 교사를 양성하고 비용을 지불한다. 교사의 양성과 이를 위한 비용 마련은 전쟁 이후 문제가 되었으나, 각 성과 시 정부들은 사범학교를 부활시킬 여력이 부족하다. 이에 수도 난징에 국립사범학교를 창설하여 교사의 보충 및 개진을 도모한다.


  • (3) 전쟁의 발발이후 각지에 사숙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를 단속하지 않고 국민교육의 보조기관으로 삼아 각지의 사숙에 대해 중앙이 방침을 하달하고 관리함으로 써 교육 보급의 노고를 분담한다.


  • (4) 정상적인 소학교와 사숙외에도, 중앙정부는 각 지방으로 하여금 일반 민간의 교육시설도 복원시키고 나아가 이곳에서 보습교육을 중심으로 그 실시를 장려하며, 민간의 교육도서 편찬을 지원하여 각지로 하여금 민간교육을 진흥시키게 하고, 보습교육의 신체제를 확립하여 직업교육등 교육과정의 보충 목적을 달성하게 한다.

     

  • (5) 교육학술단체에 대해서는 별도로 국민교육의 추진에 협력할 것을 장려한다. 정부의 지원으로 중국교육건설협회 (中國敎育建設協會) 가 다수의 간이 소학교를, 중국아동교육협회가 소학교를, 부녀자검학회 (婦女慈儉學會)에서 빈민들을 위한 아동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중앙정부는 이러한 조직에 대해 물질적 정신적 양방면으로 원조를 하고 있다. 또한 종교단체가 설립하는 학교에 대해서도 중앙정부는 간섭주의를 취하기 보다는 여러 방법을 강구하여 발전을 가한다.

     

이러한 방법과 시설들만으로는 문맹을 완전히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짐잔, 정부는 문맹을 일소하는 공작에 매진함으로써 전쟁 후의 부흥의 기초를 수립하려 하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을 향해 말하고자 한다.

     

고등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교육에 있어 가장 손실이 큰 것은 사실 고등교육이다. 이는 복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고등교육을 복구할 교사와 자원이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을 비롯한 각지에서 중등교육을 끝마친 졸업생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졸업생들이 고등교육의 상급학교로 나아갈 길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국가의 전문인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고등교육의 부흥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광동대학과 북경대학이 다시 복구되었고, 그 외에 정부는 환도 직후에 중앙대학의 복구에 착수하여, 작년 4월 중앙대학복교주비위원회 (中央大學復校籌備委員會)를 성립시키고, 7월 25일 정식으로 다시 학교를 복구해 문학, 법학과 상업학, 이공학, 농학과 약학의 6개 분과대학을 설치했다. 이 외에 별도로 사범, 농업의 단기연수과정 등을 설치하여 취학 인원수가 약 600명에 이르고 있다. 중앙대학의 설치를 위해 1년동안 100만위안 가량을 지출하였고, 우한과 상하이도 또한 대학의 설치계획이 촉진되고 있다. 사변 전 대학이 난립했던 것을 비추어, 이러한 난립을 막는 등의 개편을 통해 이후로는 부흥을 도모하고 재능있는 인재의 양성을 기대하고 있다.

     

생산에 대해서는, 전쟁후 가장 곤란한 문제는 사회의 궁핍이다. 따라서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중등학교의 제도에 대해서도 노력하여 개진을 도모하고 있다. 앞으로도 전력을 다하여 생산교육을 제창해야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학도교육’,‘청년학교’,‘생산교육’ 3편의 책을 편찬하여 주의를 촉구하는 동시에 수도에 국립 제1, 제2 직업학교를 창설하고, 상하이에 제3 국립 직업학교를 창설할 계획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각 성과 시, 지방에 일반학교는 제한하고, 직업학교를 많이 설립하도록 장려하여 현재 쑤저우, 항저우, 쿤산, 벙부 등 각 지방에서 공립직업학교, 사립직업학교가 계속 잇달아 생기고 있다.

     

효과가 어떠할지는 기대해봐야하는 것이나,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생산교육의 기초는 확립되었다. 이전 교육의 폐해고등실업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힘을 다해 이러한 폐해가 해결될 수 있게 하고, 교육이 실제 사회의 요구에 적합하게 해야한다.

     

     

사회교육에 대해서는, 생산기능의 증대와 공민훈련보습학교를 중심사업으로 전개하고 있고, 동시에 문화기관의 신설과 복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앙대학이 복원된 것 외에도, 복원된 중앙도서관은 문헌의 탐색, 독학을 하는데 있어 집중을 할 수 있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각 사회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편역관 (編譯館) 과 같은 시설에서는 독학을 위한 참고서를 출판할 뿐만이 아니라, 학자들을 모아 학술의 연구를 할 수도 있다. 이들 모두 환도 이후 복구되었다. 전쟁 발발후 중등학교들이 가장 곤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이과 과목에 있어서의 자원부족이지만, 현재 수도에 있어서 국립 이과 실험소도 설립되었고, 또한 각 지방학교들의 이과 과목의 자원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실험을 위한 표본제조소 등이 마련되어 이를 염가로 각 지방에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사회사상지도

사회사업과 사회운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국민정부의 환도 이후, 시대의 요구에 부흥하기 위해, 현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행정원 산하에 사회부를 설치하여 사회정책과 사회행정을 집행하게 했다. 사회부의 성질은 대략 일본의 후생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국,프랑스, 독일의 노공부(勞工部), 소련의 노공위원회, 독일의 실업부, 프랑스의 공공훈련부, 이탈리아의 법단부와 그 성격이 유사하다. 사회부는 성립이래 사회정책의 실행, 사회사업의 촉진, 인민단체의 지도감독, 민중의 조직훈련 등을 모두 잘 수행해왔다. 또한 노사분규의 해소, 사회복리사업의 개설, 공익구제사업의 증진, 노사합작의 추진, 산업조합의 개선과 확대, 조합원 소집과 훈련, 각조 인민단체의 정리, 민중조직과 훈련공작 장려, 각 성의 사회운동 분회 설립등 가능한 현실 속에서 적절한 공작을 펼치고 있다. 사회부는 신설된 행정기관이나, 이들의 임무는 중대하다. 이들의 임무를 요약하자면 일체의 사회문제에 대해 합리적 해결의 길을 찾게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그 이득을 얻게 하고, 사회를 건전하게 나아가게 하여 인민의 사상과 행동을 정상적으로 이끌어나가 국책에 부합하게 하고, 화평반공건국의 아래 모여 함꼐 부흥을 위해 노력하게 하는 것에 있다.

     

최근에 특별히 보고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대사관에서 외교부로 이번 전쟁 중 난징과 항저우, 상하이등의 지방에서 수집, 보관, 정리한 문화자료 및 설비를 중국으로 인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자료가 어떤 것인가 하면

     

  • 난징, 항저우, 상하이에 보관하고 있는 옛 도서와 잡지, 기타 출판물 및 도서


  • 난징에 보관하고 있는 공문 서류들


  • 난징, 항저우에 보관하고 있는 학술 표본자료


  • 난징, 항저우에 보유중인 옛 건물, 설비들

  • 난징 자금산(紫金山) 천문대

  • 난징 북극각(北極閣) 기상대 및 지진관측대

  • 난징 전 중앙연구소 건물

  • 난징 전 실업부 지질조사소 건물

  • 항저우 전 절강성립 시후 박물관 건물

  • 항저우 전 저장성립 도서관 구산분관 건물

     

이다. 위의 자료들과 설비들은 전쟁의 화에 휘말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측의 관리와 정리가 추가되며 그중에는 이를 위해 순직한 일본인이 있을 정도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라 부가적인 물건들과 설비들도 함께 인도하기로 하였다. 중국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여 그것의 손실을 막고, 부흥을 꾀하는 이러한 모습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 문화보관위원회 (文化保管委員會)를 조직하여 이를 신중하게 접수함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이를 발전시켜 동방 문화를 위해 상호협력을 한 호의를 갚으려한다.

     

해외 교민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화교들로 하여금 화평반공건국의 대의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선전, 교육, 사회운동의 각 방면에 대하여 상당한 노력을 가하고 있다. 화교와 조국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써, 이전에는 충칭측에 의해 위만을 당했지만, 현재는 우리의 선전을 통해 사실을 알고 이가 하루 하루 증명되는 것을 확인하며 장래에는 반드시 그 역량을 가지고 화평반공건국 운동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변방 지역에 대해서는 국내 중심지역과 변방 지역은 성망성쇠를 함께하는 관계임을 알고, 민족의 협화에 중점을 두어 이를 화평반공건국운동과도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치안의 확립생활의 개선이라는 것은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치안이 점차 개선되면 생활도 동시에 점점 확립된다. 치안이 확립되면 인민은 안정되어 생업에 종사하고 경제의 건설에 조사할 수 있다. 생활이 개선되고 안정을 얻으면 극소수의 교란분자 이외에는 누구도 사회의 해충이 되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국민정부는 환도이래 치안확립생활개선이라는 이 두방면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그중 치안확립의 책임을 지고 있는 곳은 내정부와 헌정부, 사법행정부와 군사위원회가 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정부에 대해 말하자면, 국민정부 환도이후 민정회의를 소집하고 각 성에 명하여 각 성들이 가지고 있는 자치회, 유지회, 또는 현(縣) 정부 준비처 등을 취소하게 하고 기존의 현정(縣政) 체제를 복원하게 하고, 각 성에 대해 각 현장의 임명은 법정 절차에 따라 조치하게 할 것을 명하고, 현정에 있어 인원을 훈련하고 현장(縣長) 훈련반을 증설하여 지방행정을 순차적으로 건전화 하려 하고 있다.

     

위생행정 방면에서는 항저우, 우후, 벙부 등 각지에 병원을 설치하여 중앙병원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울러 거액의 경비를 지출하여 제2중앙병원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중앙병원 및 방역과, 위생실험과, 그리고 지역 병원의 조직 규정을 개편하고, 의사, 약사, 산파와 관련된 조례를 개편하고, 간호사와 한약판매상, 약상의 규칙을 개편했다. 또한 위생훈련소를 설치하여 간호사반과 고급 간호사반 및 산파반을 두게 했다. 그 외에도 내정부는 토지의 징수, 토지 등기의 조사, 각 성,시,현의 수로와 관련된 세금 징수, 상하이 건설계획의 심사, 명승 고적 유물에 대한 조사, 선행의 장려, 내정 각 항목에 대한 조사표 발행과 각종 통계도표 제작등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

     

경정부(警政部)환도 이후 치안 확립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특별히 설치하였다. 설립과 동시에 각지의 경찰기구를 조정하고, 전국경정회의를 개최하고, 각지의 경찰인사를 정리하고, 각급 간부들을 훈련시켜 경찰의 능률을 높이고 사법행정부에 협력하게 했다. 상하이 제2특구 지방법원을 회수하고 전국감화원(感化院)을 설치하게 하고, 징후-후항통철로경무소 (京滬滬杭甬鐵路警務所)를 회수한 것도 이러한 치안 확립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층 더 나아가 말하려는 것은. 경찰과 특공경찰의 단결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공비와 악당들이 화평운동을 교란하고 화평운동에 대해 여러 극단적인 파괴수단을 이용하고 있기에 이를 막아내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정확한 수단은 기밀이지만 이러한 수단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체포된 범인들이 만약 이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갱생할 의지가 있다면 정부는 이를 위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바일 것이다.

     

     

사법행정부의 지난 1년간 성과는 다음과 같다.

     

  • (1) 관할의 확대이다.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하남성의 법원이 국민정부 환도 이래 즉시 국민정부에 예속되었고, 광동성, 호북성 법원도 이를 이어 국민정부에 예속되었다. 또한 호북성 고등법원은 호남성과 강서성 두성의 사법을 임시로 겸하게 했고, 상하이 제2특구 법원 교도소도 작년 11월 중앙에 예속되게 되면서, 사법행정부의 관할구역은 합계 11개 성에 검찰분서가 1개, 고등법원 9개, 고등법원 분원이 5개, 지방법원이 43개, 교도소가 17개, 구치소 43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매월 평균 1만 6천여 건의 재판을처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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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법원의 조정이다. 법원조직법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대강을 개정하여 장닝지방법원을 수도지방법원으로 하고, 쿤산등 7개소의 지방법원 분원을 지방법원으로 복구하고 푸동 지역과 상하이 서부 분원을 상해지방법원에 합병하여 법에 맞게 하였다.


  • (3) 인민의 소송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이전 각 법원에서 재결이 허가된 소송비의 추가징수 및 직권에 의하여 송부할 수 있는 정본의 초록비는 모두 법령으로 징수를 금지하게 했다.


  • (4) 사법인원의 훈련을 위해 설치한 사법행정부 부설 법무훈련소는 금년 서기관반과 교도관반 학생들이 졸업을 하였으며, 졸업과 동시에 졸업성적에 따라 각 법원에 배분하여 재직 혹은 실습하게 했다. 전쟁의 발발후 우한에서 사법훈련소를 설치하여 서기관반 수훈생 1반이 존재했으나, 해당 훈련소는 현 체제에 적합하지 않기에 본부 법관훈련소에 파견하여 한커우로 가 졸업고사 시험을 실시하게 해 합격자는 각 법원으로 파견하여 재직 혹은 실습하게하고, 불합격자는 난징으로 전입시켜 계속하여 수훈을 하게 하고 우한의 사법훈련소는 철폐했다.


  • (5) 관할 법원들을 감독함으로써 인민이 재판상 불공평한 대우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용인민정체서장변법조사세칙 (人民呈遞書狀辦法調査細則) ( 서장의 제출방법등 을 다룬 규정) 을 공표하여 큰 효과를 보았고, 동시에 각급 법원에 명하여 함부로 범인을 속박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6) 사면, 감형의 처리다. 사면의 안건에 대해서는 일찍이 처리를 완료하여 사면을 받은이가 780명에 이르고, 감형 안건도 처리를 완료하여 최근 통계에 따르면 3,848인이 감형을 받았다.


  • (7) 사법통계작성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전의 사법통계작성은 대부분 여러해의 내용을 가지고 작성했기 때문에 불필요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간략된 부분이 많았고, 양식도 많고 다양하여 중복되는등 오류가 많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는 달마다, 혹은 년마다 각종 통계작성을 일괄적으로 작성, 수정하여 공포하고 있다.

     

군사위원회의 공작은 기밀에 관한 것이 많기에 공개할 수 없는 것이 많다. 하지만 확실히 군사위원회의 목적은 국방에 있는 만큼, 중국은 향후 중일기본조약과 중일만삼국공동선언을 근거로 하여 동아의 축심을 결성하여 동아의 화평을 보장하고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보장하려한다. 이는 건국의 목적인 동시에 건군의 목적으로, 이 목적을 바탕으로 중국 군대의 정신은 새롭게 시작해야한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군대는 애국을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고, 애국을 알지라도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명목은 애국일지라도 사실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아가 없으면 중국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특히 우리는 만약 동아의 선진국 일본과 일치 협력하지 않으면 동아를 유지할 수 없고, 나아가 중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중국을 사랑하는 일과 동아를 사랑하는 일은 동일하다. 이것은 건국의 정신인 동시에 건군의 신정신이다.

     

장래의 국방계획 일체는 모두 이점에서 시작해야한다. 현재 국방에 있어 가장 시급한 임무는 치안의 확립이다. 본래 치안의 확립은 경찰의 책임이지만, 다만 현재 상황에서는 치안 확립의 책임을 군대가 분담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전쟁이 이어지고 있고 공비멋대로 항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중국 전체를 코민테른의 동아 침략, 나아가 세계 침략의 거점으로 만들고자 전쟁 발발 후 3년 반 동안 자신이 내세운 항전보다는 자신의 군대를 확대하고 충원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때문에 나라엔 태평이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소위 유격전, 초토전인민을 자원으로 하여 자기 군대를 살찌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잔인무도한 부정의 무력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하는 무력만이 이를 타파할 수 있다. 충칭당국은 이야기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우리가 이를 담당하여 공비 숙청 공작을 하고, 경찰의 공작을 지원하고, 이러한 두 행동을 통해 공비를 숙청하고 치안을 확립하는 것이다.

     

작년 11월 31일 중일기본조약을 체결했을 때, 부속의정서의 제 3조에서는 ‘양국간의 전면화평을 회복하고, 전쟁상태가 종료되었을 때는 철병을 개시하고, 치안의 확립으로부터 2년이 지나면 철병을 완료한다.’ 라고 규정한바 있다. 이 규정을 보더라도, 우리의 목표는 첫 째로 화평구역내의 공비를 숙청하고, 둘째로 화평구역을 전개, 확대하여 전국에 미치게 하고, 이렇게 하여 중국을 보전하고, 중국의 독립자유를 획득하는 것에 있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건군의 목적은 국방도 있지만, 치안의 확립이 더 크다.

     

군사위원회는 이러한 목적에 따라 성립되었다. 위원장은 국민정부 부주석이 겸하고, 모의본부, 참모본부, 군사참의원, 군사훈련부, 정치훈련부, 군정부, 해군부, 및 항공서 등을 산하에 두고 있다. 환도 이래 군사의 건설은 다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간략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육군방면에서는,

     

  • (1) 국내 각지의 부대에서 화평반공건국 운동에 감동을 받아 화평건국 진영에 합류한 것이 합계 20개 사단, 6개독립 여단, 3개 연대, 인원만 20여 만명이다. 이들은 무장과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각 방면의 군 사령부, 각 진무총사령부, 각 진무주임등에 의해 통솔되며 공비의 숙청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2) 최근 리창장(李長江 (1893~1956) , 충칭국민정부의 유격대 부사령관으로, 1941년 1월 왕징웨이측으로 전향했다. 이후 리장강은 화평건국의 제1집단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부하 3만을 이끌고 투항해왔는데, 리창장은 현재 제1집단군의 총사령관으로 특파되었고, 현재 그의 부대는 이에 맞게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다.


  • (3) 화북에는 현재 7개의 집단군이 위치하고 있고, 30개의 여단으로 이루어진 5만명의 병력이 화북의 치안 및 공비숙청 작업을 분담하여 진행하고 있다.


  • (4) 강소, 절강, 안휘, 호북, 광동, 및 남징과 상하이, 한커우 등 각 성시의 무장경찰들이 점차 성립되어 그 수가 2만명 이상에 이르고 있다. 이는 그 밖에 지방 자위단체들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 (5) 육군의 군사교육은 중앙군관학교의 광저우, 우한 분교 및 군사교도단 등을 창립하여 훈련을 서두르고 있으며, 신군의 하급간부를 양성하여 군사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해군방면으로는,

     

  • 해군의 인재양성을 위해 중앙해군학교가 성립되어 제1기생 을종 졸업생 11명이 졸업하여 연습을 하고 있다. 1기생 갑종 졸업생 35명도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제2기생 141명은 이미 1년 가량을 수료하였고, 현재는 제3기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수병, 기관병, 의무병, 군수병 등 특수병과에 대한 훈련도 이루어져 현재 4번의 과정을 거쳐 1,366명이 이미 졸업을 하였다.


  • 함정의 건조에 대해서는, 본래 보유하고 있던 하이스이(海绥) (옛 국민정부시기 창펑급 구축함 2번함 ‘지엔캉(健康)’), 하이칭 (海靖) (옛 국민정부시기 하이칭급 포함 1번함 ‘하이칭’) , 장칭 (江靖), 장스이(江綏) (왕징웨이 정권 시기 새로 건조한 30톤급의 포함들. ) 외에도, 새롭게 접수한 융젠(永績) (옛 국민정부시기 융젠급 포함 2번함) 에 하이싱 (海興) 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과 별도로, 강평(江平) 급 포함 12척, 강일(江一) 급 포정 18척을 건조하고, 측량정 허펑(和風), 장펑(江風), 칭허(靖和), 칭핑(靖平) 등 4척을 개장하고, 웨이하이를 접수하게 되면서 우방 일본이 융샹(永翔) (중산함으로 유명한 융펑급 포함의 2번함 ‘융샹’) 함을 반환하여 하이샹 (海祥) 으로 명하였고, 이외에도 4개의 포함을 보유하고 있다.


  • 군항과 부대기지의 설립이다. 난징은 수도의 소재지인 만큼 난징요항부를 설립하여 장강 하류의 지역과 이 지역의 함정을 관할하게 하고, 이를 통해 수도 근방을 방어하게 하고, 장강 일대의 요충지인 난징과 장인, 우시와 민항(閔行)에 기지를 설립하고, 웨이하이는 화북의 해안 요충지인 만큼 기지를 설치하여 화북의 포정 및 칭다오, 옌타이, 하이저우, 시댜오 등의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 수로측량 및 해상도의 제작을 위해 수로사관기술양성소 (水路士官技術養成所)를 설치하여 측량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공군에 대해서는, 환도 이후 탄스창 (譚世昌, 1940년 6월 20일 그는 비치크래프트 D-17 비행기를 몰고 충칭을 떠나 왕징웨이 정권으로 전향했다. 이후 그가 가져온 기체는 왕징웨이 정권에서 사용되었다.)  이 비행기를 몰고 합류하였고, 항공기 및 이와 관련된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이 10 여명이 합류하였다. 현재 항공학교의 설립, 항공기지의 건설 및 항공 관련 인원의 양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면화평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만큼, 국민정부가 군사방면에서 우방 일본의 원조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언제나 국민정부가 스스로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화평을 보장하고 화평을 확대하고 속히 전쟁을 끝내어 공동으로 동아보위라는 중대한 임무를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기에 국민정부의 건군에 대해 인재, 기술, 무기의 보충 등 여러 가지 원조를 하여 힘을 실어주고 있고, 적군일지라 할지라도 국민정부에 참가하려는 군대에 대해서는 모두 우의로써 대우하고 있다.

     

해군의 경우, 일본은 지난해 국민정부의 환도 이후 융스이(永綏) (옛 국민정부시기 신닝급 포함 ‘융스이’)  함을 반환하였고, 지난해 중일기본조약 체결후 융샹함 및 퉁춘(同春) 함 등의 총 9척의 함정을 반환하였고, 웨이하이의 류공다오(劉公島)의 훈련병영, 칭다오, 즈푸, 시쥬(石臼) 등의 병영을 반환받았다. 또한 광동의 연안함대에 대해서도 비슷한 원조를 하고 있다. 이는 모두 선린우호의 정신에서 비롯된 선의의 표시로, 중국의 부흥을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샤먼의 구랑위, 진먼등에서 일본 해군이 관리하고 있었던 학교, 병원, 전보국, 비행장, 도서관 등 234개의 건물도 우리의 샤먼특별시 정부에 반환하기로 했다. 이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국민정부 환도 1주년 기념 축하행사가 오늘 거행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바라보며 중일합작을 통해 공동으로 동아를 보호하는 것에 대해 최대의 흥분을 느끼고 있다. 최근 국민정부에는 청향위원회라는 조직이 설치되었다. 청향공작은 정치가 6할, 군사는 3할에서 4할을 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원과 군사위원회 양 기관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청향위원회가 성립 이후 치안확립에 공헌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최근 군사위원회 전군사회의를 소집, 개최하여 남북의 각성 군사당국을 한자리에 모아, 건군의 목적은 국방에 있고, 치안의 확립에 있음을 잘 인식하게 하고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용왕매진 하게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국민정부는 환도 이후 경제생활, 문화생활의 개선 및 치안의 확립에 어느정도 다가간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이 성공은 어느 일부, 혹은 단독의 행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행정, 입법, 사법, 고시, 감찰 각 원이 그 권한을 가지고 있으되 서로 자주 연락과 협력을 하고, 중앙과 지방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손발과 같이 협력하고, 모든일에 대해 잘 대응하고, 전국의 화평반공건국을 옹호하는 민중들이 동고동락한 결과다. 즉, 이 성공은 정부와 인민이 합심하고 노력하여 얻어낸 결과다.

     

론 우리는 이 근소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이 성공을 토대로 화평반공건국의 앞길광명이 있음을 알고 노력하여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이러면 전면화평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고, 반공은 반드시 관철될 것이며, 삼민주의의 중화민국을 반드시 건설할 수 있으며, 동아의 영구화평과 공존공영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해 국가와 민족에 공헌하여 이 중대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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