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⑤ 충칭 탈출의 진상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11일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충칭 탈출의 진상 (重慶脫出の眞相)
*화평건설의 길을 따라 하노이에서 홍콩으로, 다시 상하이로 전진한 왕 선생은, 쇼와 14(1939)년 7월 9일 상하이에서 전 중국 민중을 향해 “우리들의 중일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과 전진목표” 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여, 충칭탈출의 진상을 밝히고 동지들과 화평전진의 결의를 표명했다. 그리고 또한 이 방송의 내용은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중화일보에 게재되었다.
중화일보 1939년 7월 10일자에 나온 왕징웨이의 방송내용을 다룬 글, 본래 이글은 《我對於中日關係之根本觀念及前進目標, 중일관계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관념과 전진 목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 충칭 탈출의 진상이라는 이글은 신문의 《我對於中日關係之根本觀念及前進目標》을 그대로 다루었다.
총리 손선생은 우리에게 “중국혁명의 성공은 일본의 양해에 기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말의 의의는 중대한 것이다. 일본은 동아의 일대 강국으로서 경제에, 군사에, 문화에 착착 진보를 이루어 최근 수십년의 상황은, 일본이 없으면 곧 동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은 매사에 뒤쳐져 있었지만, 동아의 큰 국토속에서 인구도 많고, 많은 역사를 가진 하나의 국가이다. 만약 중국이 강성해지게 된다면, 일본은 반드시 중국이 강성해지는 것이 일본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일본에 유리할지 유해할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일본은 당연히 중국이 강성해지기를 희망하고 중국을 친구로 삼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일본에 해롭다면, 일본은 반드시 중국이 강성을 이루려는 것을 분쇄하고, 중국을 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지금, 일어서려는 중국이 강성한 일본을 적으로 삼는 것은 정말로 알로서 돌을 공격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패망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혁명의 성공이 일본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권모술책이 아니라 성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중국혁명을 일본에 유리하게 할수 있을까. 이는 중국과 일본의 외교방침을 일치시키고, 군사방침을 일치시키고, 나아가 평등호혜의 원칙에 기초하여 경제합작을 꾀한다면 중국의 강성은 곧 일본에 유리하고 무해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반대로 중국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국가와 이해를 함께하기 위해 결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주권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것은 제3국의 정당한 권익을 해치는 것인가라고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과 일본의 결합은 공동의 생존과 발전을 헤아리기 위한 것으로 결코 제3국의 정당한 권익을 배척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국 13(1924)년, 손 선생이 광둥에서 손으로 국민정부 건국대강을 작성한 당시,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방침에 따라 일을 진행했다. 민국 14(1925)년 손 선생이 서거하자, 나는 그 의지를 계승하여 국민정부를 주지하고 위의 방침을 지키며, 전전긍긍 하면서 감히 이를 변경하려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민국 17년(1928)년 에 이르러 사태는 변화했고, 지난 사건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원수의 끈은 처음부터 묶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이때 최대한 인내하여 최대한의 의지로 소통을 꾀하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악화되기보다 호전되게 되돌렸어야 했다. 불행히도 당시의 국민정부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중일관계의 악화의 일로를 나아가, 9.18사변 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당시의 국민정부의 이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명의 국민당원이며 동시에 한명의 국민정부와 관련이 있는 자이므로 이러한 착오에 마땅히 책임을 분담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당시 나는 한명의 망명자였으며, 또한 국민정부의 체포령에 따라 해외에서 유랑할 수 밖에 없던 자에 불과하였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932년 1월 28일 나는 난징으로 돌아와 행정원장이 되었고, 이후 다시 외교부장을 겸하기에 이르자 이름바‘일면저항 일면교섭’을 제창해서, 당시의 ‘직접교섭반대’여론을 바꾸고, 직접 내손으로 상하이 정전협정, 탕구정전협정을 각각 체결하였는데, 당시 나의 생각은 여전히 원수의 끈은 풀어야한다는 신념에 기초해 국부적 일시적 안정을 도모해 나아가 전국적 영구적 평화를 도모해야한다는데 있었다. 나의 주장은 4년동안 결국 실현시키지 못한채 끝났으나, 나는 비뚤어져 남을 탓하지 않으며, 단지 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의 뜻이 달라져버림을 탄식할 뿐이다.
다만 나는 시종일관 반대해온 일종의 논조가 있다. 이 논조란 당시 소위 주전파의 논조이다. 시도와 관계없이 이제야 일어나려는 중국이 강대국 일본을 적으로 삼는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과연 어떠하겠는가, 실로 국가와 민족으로을 가지고 어린애 장난을 하는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나는 장개석 선생이 처음에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민국 20년(1932년, 쇼와6년) 12월 장선생이 국민정부 주석직을 사퇴한 후 발표한 한편의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읽고, 나와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하여 성심성의껏 장 선생과 합작을 결의하였는데, 4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비로서 그 의견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민국 24년(1935년) 11월 1일 큰 시련의 후, 몸의 3개의 상처를 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밖에 없었고, 1936년은 1년간 멀리 타향에서 쉬었지만 시안사변이 발생하면서 급히 귀국하면서 사태는 더욱 큰 변화를 거듭하였다. 나는 당시 초공작전은 결코 중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면 공산당은 오직 코민테른이 있음을 알고 중국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코민테른의 비밀명령을 받아 계급전쟁의 간판을 내리고 ‘항일’이라는 간판을 새롭게 내걸고 중국의 민족의식을 이용해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도발하고 있음으로 결코 이러한 속임수에 걸려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당시 말과 주장의 방침이 대체로 이러한 점에 중점을 둔 것임을 독자들은 당시를 돌아보면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 발생후 나는 국민정부가 중일전쟁에 대해 처음부터 이를 저지할 방법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한순간도 전환의 길을 생각하지 않고, 또한 공산당의 음모에는 한시라도 이를 제압하고 폭로할 필요를 느끼지 않자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1938년 12월 18일 충칭을 떠나 29일에는 평화의 건의를 발표하게 이르게 된 것이다.
나의 평화 건의는 일본의 고노에성명에 찬동한 것이다. 어째서 찬동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전부터 일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신념하에 일본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고 원수를 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년반을 싸운 결과 일본이 보여주고자 하는 국력과 중국이 보여주고자 하는 민족의식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일본은 이미 중국에 대해 침략적 야심이 없음을 천명하고 손을 내밀어 공동의 목적 아래에서 친밀한 합작을 꾀할 것을 요구하는데 반해 중국은 왜 손을 뻗지 못하는가? 흡사 형제 둘이 한번 싸운 뒤 억울하게 울고나서 다시 화해하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마음이 울컥해지고 동시에 기쁜일인가. 만약에 장 선생이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이미 새로운 시기에 도달 할 수 있음을 알고 의연히 이 성명에 동참했다면 중일평화의 길은 금방 열리고 나아가 소위 3원칙에 따라 각종 구체적 조건을 상의해 서로 그 이익을 받을 수 있게 했다면, 동아의 영구적 평화의 기초는 확립되는 것이고, 이후 공동의 생존과 공동의 발전은 차례차례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장개석은 이를 채택하지 않고 오히려 거절의 태도로 일본의 제의에 대항하고, 극단적인 압박적 태도로 일본의 제의에 대항하며 극단적인 압박적 수단을 이용해 국내 및 당내 일체의 평화 건의에 대항하고, 이로 인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대국은 날로 악화되어 수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실로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3항의 원칙은 처음 고노에 성명에서 그 윤곽을 밝힌 것이지만, 수년 이전에 일본은 이미 이를 제안한 바가 있었다.
민국 24(1935)년 11월 20일 일본의 아라요시 대사 가장 총재와 만났을 때, 3원칙으로 하여금 중일관게 개선의 기초를 제안했고, 장 총재는 이에 찬동을 표히고 또 별도의 대안이 없음을 표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후 금방 입장을 번복했다. 그 이유로 첫째로 당시로는 군사위원장으로서 행정위원장이 아니었기에 이를 위한 담화를 거론할 수 없다는 이유였고, 둘째로는 당시 개인의 자격으로 말하는 것으로 공식적 담화가 아니었다는 이유이고, 셋째로는 찬성한다는 것은 3원칙을 의논하는 것을 찬성하는거지, 3원칙 자체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며, 넷째로 별도로 대안이 없다는 것은 3원칙의 실시에 관한 것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찬동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후 민국 25(1936)년 꼬박 1년이 걸렸던 중국과 일본의 교섭은 결국 정지되기에 이르러 결국 이는 민국26(1937)년의 중일충돌이 마침내 폭발하는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당대의 외교담화기록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탄식을 했었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월에 걸쳐 독일 트라우트만 대사가 사변 조정을 시도할 때, 그때 일본이 요구한 조건도 이 3원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전에 나열한 “하나의 예”를 다루는 글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으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고노에 성명이라는 것은 종래 일본이 보여왔던 일관적인 주장에 기초해 계통적인 서술을 시도하고, 또한 우리나라로 하여금 고려해야할 점에 대해 부단히 각각 설명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동방공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에 이를 위해 군사내정에 간섭하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고, 일독이방공협정의 정신으로 일지방공협정을 체결할 것임을 천명하고, 경제제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이에 따라 정치적 분규를 해결할 수 있게 고려하고, 중국의 주권 및 행정의 완전독립을 존중할 것임을 천명하고, 또한 중국에서의 경제적인 이익을 독점할 의사가 없음을 이야기하고 제3국의 이익 또한 제한하는 것은 어긋남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정중하고 명백한 성명인 이상, 3원칙의 실행은 결코 중국의 자유독립을 해칠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름바 공동방공과 경제제휴의 주요목적은 공산주의의 교란행위와 경제침략이라는 2대 해악을 동아의 천지에서 뿌리 뽑으려는 것으로서 그 책임은 실로 중대한 것이다. 일본이 이미 중국에 대해 책임의 분담을 요망하고 있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중국에 충분한 자유와 독립으로서 비로소 이 중대한 책임을 분담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성명에 찬동하는 것은 결코 하루동안 겨우 편안함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동아백년대계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즉, 우리들이 이러한 성명에 대해 문을 닫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겠는가?
장제스의 통제하에 있는 충칭의 선전은 일본은 모든 힘을 다해 중국을 멸망시키려 들고 있고 이름바 3원칙이라는 것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전은 실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일본이 만약 중국을 멸망시킬 심산이라면 전력을 다해 작전을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실을 마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고노에 성명의 3원칙은 이미 수년전부터 제출된 것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했듯이 알 수 있을 것이고, 고노에 성명 이후에는 이를 한층 명확하게 해 국책으로 정하고 전국의 여론도 이미 일치하고 있다. 왜 이를 구실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셋째로, 만약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노력할 목표가 없다면 이해의 충돌을 초래할 것이며, 반드시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 물과 불은 서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의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반대로 공동으로 노력해야할 하나의 목표가 있으면 이해가 일치하니 충돌이 발생할 틈은 없다. 이러한 중대한 관계로 보았을 때도 어찌 이를 단순한 구실이라고 하는 것인가.
넷 째로, 수년동안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가능한것이었으나 날로 악화되는 이유는 일종의 순환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중국의 배일정책이 9.18사변의 원인라고 이야기하고, 중국은 일본의 침략이 배일정책의 원인이라고 하고, 일본은 중국이 이이제이의 정책을 포기하면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다고 설명하는. 이러한 언변은 대체로 상대방에게 요구와 비난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지금부터 하나의 목표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함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를 시작하고, 먼저 자신에게 요구하고, 먼저 자신을 탓하고, 이후에 다른이를 탓하게 된다면 그 진보는 반드시 신속하게 용이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중국과 일본은 과거의 분규를 청산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비극을 결속으로서 이를 끝내고 속죄하고 보상할수 있게, 나아가 미래의 공동생존과 공동발달이라는 큰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화의를 거부하고 계속 항전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인가? 우리들도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항전 이래 군대도, 인민도 이미 충분히 민족의식이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표명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또 알아야 한다. 이제 이 민족의식이 완전히 이제 공산당이 이용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민족의식을 이용해 민족의식을 지킨다라는 말로 민족을 멸망시키고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공작은 공산당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소위 민족, 국가가 있음을 모르고, 오직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아 중국을 희생시켜야 함을 알 뿐이므로, 희생의 지역이 점점 커지면 더욱 좋고, 희생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 더욱 좋고, 희생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은 하나도 빠짐없이 희생되고, 일본도 상당한 손실을 입는 것을 피할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코민테른에게 있어서는 진정으로 일석이조인 것이며, 하물며 장제스를 간판으로 삼으며 국공결렬 이후 초공작전에서의 한을 마음 것 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충분한 원한을 풀고나면 그들은 고향 코민테른으로 돌아가 아무런 마음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번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오로지 항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중국은 이제 영원히 평화를 추구할 수 없고, 결국에는 코민테른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공산당의 죄악은 이전의 의화단보다 심한 것이고, 공산당에게 이용되는 죄악은 강의제인(剛毅諸人) 보다 위이며, 비록 지금 충성스럽고 용감한 군대가 있고 충성스러운 인민이 있지만 이들은 최대한 섭사성(聶士成)과 마찬가지로 근소하게 보국의 심정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켤코 눈앞의 액운을 만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유곤일(劉坤一), 장지동(張之洞)이 동남을 보장하고 이홍장(李鴻章)이 몸을 바쳐 베이징으로 들어가 8국연합군의 총검아래에 화의를 성립시켰던 것보다 못한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에게 두가지 길이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제스를 따라 게속 항전을 이어나가는 길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일본에 저항하기에 부족하고 공산당을 제압할 수도 없다. 또한 장제스의 지금 심경으로는 공산당을 따르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온 민족이 장제스를 공산당으로 따르게 되는 희생만이 있을 뿐이다. 국가민족을 향해 국가민족의 희생을 공산당의 희생으로 삼게 되는 것 뿐이게 된다. 또 다른 한길은 장제스와의 관계를 단념하고, 총리 손선생의 유지를 다시 한번 천명하고, 나아가 이를 실행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적대관계를 풀고, 적대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의의에 기초하여 적을 바꾸어 친구로 삼으려 노력하여, 첫걸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평화를 회복하고, 두 번째 걸음으로 동아의 평화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의 길 중에서 전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종족을 멸하게 하는 길이며, 후자의 길은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키게 하는 길이다. 나는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키는 길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있다. 나는 동지들과 단결하고 전국의 각 당파 및 무당무파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단결해 이길을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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