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② 왕징웨이 (중화민국) 의 연설 (1943.11.5)
- 데헷쟝
- 8월 27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9월 3일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1943.11.7)
14.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15.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16.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17.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18.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19.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부록]
21.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2.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2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24. 대동아회의 일정표
도조 히데키 (일본대표) : (앉은 채) 계속하여 국명의 이로하 순으로 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를 중국어로, 그다음 영어로 통역하여 전달한다)
도조 히데키 (일본대표) : (앉은 채) 중화민국 대표 각하?
(이를 중국어로, 그다음 영어로 통역하여 전달한다)

왕징웨이 (汪精衛) 중화민국 국민정부 (난징) 행정원 원장.
왕징웨이의 연설
(1943.11.5)
(중국어)
세계역사상 위대한 의미를 가지는 대동아회의가 오늘 맹방 일본의 수도에서 거행된 것에 대해, 도죠 총리대신 각하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분하게 되었습니다. 영미의 동아침략은 이미 백 년 전부터 시작된만큼, 지금과 같은 중대한 시기에는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의 힘에 의지해야 처음부터 영미의 침략야심을 억제하고, 동아를 보전하며, 영미를 분쇄하는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최근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영미의 동아침략세력은 분쇄되어, 동태평양과 남양 일대에서 영미의 육해군 근무지는 일본 육해군에 의해 격파, 점령되었습니다.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방도의(東方道義)의 정신에 근거하여 동아국가의 민족들의 공존공영을 추구하고 그들의 독립과 자주를 원조하여 그들의 애국적 희망을 달성시키고, 지지하며, 각지의 부서들로 하여금 최대의 노력을 통해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숭고한 일본의 위대한 포부와 그의 빛나는 기적에 삼가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동시에 함께 우호 관계에 있는 만주국, 태국, 신흥 버마국, 필리핀과 자유인도임시정부가 각각의 굳을 결심과 휘어지지 않는 노력에 따라 대동아전쟁과 대동아건설의 책임을 나누고 있는 것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중화민국은 동아의 한 측의 날개입니다. 이에 지금 이 자리 이 기회를 빌어,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침에 대한 국민정부의 결심과 노력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 일생의 포부는, 중국과 동아로 하여금 영미침략세력을 분쇄시켜 그들의 독립과 자주를 완성시키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포부에 근거해 그는 서거에 이르는 날까지 약 40년간, 필생분투를 계속해왔습니다. 그는 서거하기 3개월 전, 일본의 고베에서 두 번에 걸쳐 연설을 한 적이 있있으며, 민국 13년 (1924년) 11월 28일에 열렸던 제1회 연설에서 그가 이야기한 것은 대아시아주의였습니다.
연설에서는 "우리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백 년 이래 영국의 침략을 받고 갈취당하기에 이르러 거의 하나로 완전한 독립 국가의 존재를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 쇠퇴가 극에 달했을 때, 돌연 전환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유신이었고, 일본의 유신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선진국이 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동시에 아시아 부흥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시아 각국은 당연 선진국 일본과 함께 동심협력해, 동방의 왕도적 문화로 하여금 서양의 패권주의적 문화를 물리쳐 미영의 침략 세력을 완전히 구축하고 아시아 각국의 단결에 따라 아시아 각국의 독립 자주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쇠퇴하는 아시아 전체를 부흥으로 이끄는 것이 가능하다" 라고 연설했습니다.
두 번째의 연설은 같은 해 같은 날의 연설이었는데,
연설에서는 "일본은 당연히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해야 한다"라고 말하였고, 또 “중일 양국은 형제와 같다. 일본은 일찍이 불평등한 속박을 타파하고, 동방의 선진국, 세계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은 현재,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얻으려는 것이며, 일본의 충분한 원조를 갈망하고 있다, 중국의 해방은 곧 동아의 해방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상 두 차례에 걸친 연설은 손중산 선생 일생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습니다. 이후 국부 손중산 선생은 병세의 영향으로 다음 해 3월 12일 베이징에서 서거하게 되었으나 서거의 당시 유지를 동지들에게 남겼고, 저와 동지들은 그의 유지에 따라 계속 분투하고 그의 뜻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손중산 선생의 서거 이후 그 유지가 실현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고, 중일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민국 26년 (1937)년 7월의 전쟁이 발생하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서거한 지 1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중일의 관계가 결렬됨에 따라 영미는 호기를 맞이했고, 양측의 관계를 이용해 중일전쟁의 연장을 부추겼습니다. 저와 동지들은 국부의 유지가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단 것을 보고, 중일 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것을 보고, 통심이 극에 이르게 되었고,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으나 다행히도 일본 정부는 전쟁을 최단기간에 중단시키기 위한 방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방침에서는 일본의 전쟁목적이 중국의 멸망이 아닌 중국의 부흥에 있으며, 일본은 중국이 동아건설의 책임을 나눌 것을 기대하고, 일본이 중국을 원조할 것을 결심하고, 그들의 독립 자주의 소망을 달성하게 하려 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동지들은 일본이 이러한 진의를 선포한 것을 듣고, 중일 관계의 호전이 국부의 유지를 완성 시키는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충칭 정권에 대항하여 항전의 중지와 화평의 회복을 이야기했지만, 이를 듣지 않으려는 모습에 저와 동지들은 화평운동을 위해 분주하게 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여 정정당당하게 중일의 제휴와 동아의 부흥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말한 대로 영미는 중일전쟁에 대해 항상 도발과 이간질에 노력하여, 전쟁의 연장을 부추겨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국민정부 환도 이후 더더욱 강화되었고, 영미는 충칭에게 항전의 강화와 평화의 저지등 전쟁의 연장을 부추기는 수단을 강구해왔습니다.
그 후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이르러, 영미는 그동안의 자신들이 구축한 동아의 세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충칭의 분자들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는 방도를 강화시켜 왔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제 영미의 이러한 계획이 물을 필요 없이 실패에 이르렀다고 단정 지을 순서에 이르렀습니다.
충칭의 상인들과 민중이 국부 손중산 선생님의 가르침에 아직 귀의해 있고, 일본은 올해 1월 9일 이후 중국에 대해 빠르게 조계를 반환하고, 치외법권을 철회하고, 특히 최근에는 중일동맹조약을 통해 중일기본조약과 동시에 각종 부속 문서를 폐기했습니다. 이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가 이미 광명을 찾게 된 것입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일본에 갈망하셨던, 중국을 구하고, 불평등조약을 폐기하는 일이 이미 현실화된 것입니다. 가령 영미가 어떤 식으로든 유혹해 이를 저지 한다고 하더라도, 충칭 민중의 각성을 막을 수는 없게 되었기에, 충칭은 언젠가 반드시, 영미에 의존하는 것은 동아에 반역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국부 손중산 선생에게도 반역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임을, 민중도 장사꾼들도 깨닫게 될 것임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1943년 1월 9일 체결된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1943년 1월 9일 체결된 중일공동선언 / 일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중일동맹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국민정부는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있어, 오로지 기본의 방침에 기초해 노력을 거듭하고, 한편으로는 충칭의 상인들과 민중들의 각성을 촉진시키며, 통일을 완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정치력을 얻는 지방으로 하여금 하나의 모범지방을 수립하는 것으로, 그 공작은 다음의 3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상의 숙정, 둘째는 치안의 보장, 셋째는 생산의 증가로, 소위 사상의 숙정은 영미의 개인주의, 공리주의적 사상을 철저히 쓸어버리고, 동방도의적 정신으로 바꾸고, 동아인의 자각심으로 동아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일심일덕, 동아인의 공존공영에 분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음 치안의 보장은 대동아전쟁의 후방인 중국의 지배지역에서의 치안을 확보해 맹방 전선의 병사들로 하여금 후방의 근심을 없애게 하고,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대를 전선으로 수송하여 맹방 장병들의 노고를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셋째, 소위 생산의 증가는 일체의 경제계획과 재정계획에 무게를 두고 총력 결전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다만 생산증가라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소비 절약, 장물 이용의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3가지는 국민정부가 대동아전쟁에 협력하게 하는 공작의 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국민정부가 체득한 대동아전쟁, 즉 대동아건설의 의미는 전쟁중의 동감동고(同甘共苦), 동생공사(同生共死)를 결심하고, 밖으로는 공동의 적인 영미를 제패하고, 영미의 침략 세력을 분쇄하고, 그들의 침략 기도를 소멸시키는 것이고, 속으로는 각고공부, 용왕매진의 정신으로 동아 동포들과 함께 동심협력해 동아의 건설을 착실히 하는 것에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의 날개가 향하는 곳은 승리고, 대동아건설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우리의 날개가 향하는 곳은 공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동아 각국은 자국을 사랑하고, 서로의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동아를 사랑해야 해야합니다. 우리 중국이 모토로 삼아야 할 것은 중화의 부흥, 동아의 보위이며, 중국이 독립 자주를 획득했을 때만이 동아보위의 책임을 나누는 능력이 생기며, 동시에 동아의 보위를 얻게 되며, 중국의 자주독립이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 자신의 국가를 자주독립의 국가로 만들고, 또한 자국을 동아의 강력한 분자(分子)로 만드는것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동아 각국은 각국의 본연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독립 자주를 확보해야 하고,독립 자주를 위해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아 각 국가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심협력, 공동의 목적을 향해 공존공영을 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이미 그 빛나는 독립 자주를 세계에서 확립했지만, 최근에는 동아 각국을 방문해 그들의 독립 자주를 획득하게 하고, 원조를 아끼지 않고, 일치단결시켜 공동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실로 바람직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치상의 독립 자주를 얻은 후에 만약 외교상의 방침이 일치하고, 군사상의 대적관계가 일치한다면 공동의 목적에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한편, 문화면에서 선진국인 일본이 확실히 자기의 문화를 기초로 하고, 동방의 문화를 고양시키고, 세계문화를 흡수하는 3대 요점을 성취한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탄복할 따름입니다. 저는 신흥국가들이 함께 격려, 노력, 전진할 것이라는 점을 깊이 믿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은 특히 전력으로 문화의 부흥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문화의 융합과 창조는 각 민족을 친밀하게 하고 단결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 양 민족 간에는 일찍이 불교의 도입에 의해 사상교류를 도모하며 동방문화사에 이미 획을 그었습니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동아 각 국가는 호혜의 기조에 근거해, 장단상보, 유무상통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맹방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목화는 수많은 이웃 국가들의 수요가 있고, 남방 각지의 가솔린, 고무, 주석 등도 마찬가지로 이웃 국가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서로 돕는다면, 반드시 일절의 자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미가 과거에 해왔던 착취정책을 철저히 소멸하고 새롭게 하나의 인도(人道)로 합치되는 신천지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상 말한 것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면 동아 각국의 민족의 행복은 무한히 증진되어 동아 공영의 확실한 보장을 획득하게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에 있어서의 기초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광명은 실로 우리의 앞길에 놓여있고, 오로지 우리 동아각국의 민족이 함께 손을 잡고 그곳에 도달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타이, 버마, 필리핀 각국, 그리고 일본점령하에 있는 영국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역 내에 있는 중국인은 총 7~800만 명을 넘지 않으며, 이러한 중국 재류민은 그 소재국 정부의 우대를 받아 소재국 인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하고, 교통의 개척과 자원의 개발에 대해 심혈과 땀을 쏟고 있고, 그 심혈과 땀은 소재국 인민과의 결합으로 이어져 동아인의 자각이 커지는 추진력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인민은 결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있어 화평, 신실, 노동으로 소박하게 소재국 인민과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장점을 찾아 결점을 보완하며 이제는 분리할 수 없는 우호협력 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관계가 이번 대동아전쟁에서 더욱 단련되고 단결되기에 이르게 됨을 믿음과 동시에, 이 관계가 대동아공영에 공헌하는 바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중일만공동선언 /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민국 29년 (1940) 11월 30일을 회고해보면, 이날 체결된 중일만공동선언은 동아에 축심을 수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대동아회의는 타이 왕국, 버마국, 필리핀 공화국 및 자유인도임시정부가 함께하며 동아의 축심인 공영권의 범위는 더욱 더 넓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저의 소견을 마치며 정성을 다하여 본 회의에 참가하신 여러 국가의 국운이 흥륭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박수)
(이후 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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