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㉗ 제2차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5.3.17.) [완결]
- 데헷쟝

- 11월 18일
- 7분 분량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제2차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5.3.17.)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제2차 대동아회의 개최에 관한 건
(1945.3.17.)
이유:
4월 중순을 기해 도쿄에서 제2차 대동아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시급히 준비한다. 다가오는 반추축측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연합국측이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약 두달간 개최한 회담이다.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 라고 불리는 본 회의에는 약 50개국의 연합국이 참가했으며 본 회의를 통하여 국제연합(UN)의 기초가 되는 연합국 헌장이 채택되었다.)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적에 대한 정치공세를 전개함과 동시에 결전 단계를 맞이하여 대동아의 결집을 한층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번에 타이왕국의 아파이윙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을 이어 타이왕국의 총리가 된 타이왕국의 4대 총리인 쿠앙 아파이웡 (Khuang Aphaiwong)을 의미하는 것.)가 일본을 방문한 것을 계기 삼아 제2차 대동아회의를 개최하는 것이 선전에 적합하다고 인정하는 바 이를 승인함.
최고전쟁지도회의결정
(1945.3.29.)이번 달 17일 본 회의에서 결정한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앞으로의 정세를 고려하여 잠시동안 이를 연기하기로 한다.
대동아 대사회의 개최에 관한 건
(1945.4)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황상 1945년 4월 이후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대사회의를 준비한 내각 인원들이 1945년 4월 출범한 스즈키 칸타로 (鈴木貫太郎) 내각의 이들이기 때문이다. )
1) 대동아대사회의 개최의 경과
쇼와 18(1943)년 개최된 대동아회의의 석상에서 만주국 대표로부터 이러한 회의를 수시로 개최하는 것을 희망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당시 각국 대표들 역시 이에 대해 찬동을 표하였음. 그 후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하고 동시에 반추축국 측의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적에 대한 정치공세를 전개하고, 결전 단계를 맞이하여 대동아의 결속을 한층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제2차 대동아회의의 개최 방법이 고려되어 최고전쟁지도회의의 의제가 되어 쇼와 20(1945)년 3월 17일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음.
최고전쟁지도회의 회의내용
(1945.3.17.)
가) 제2차 대동아회의 개최에 관한 건이 회의의 안건으로 올라오면서 외무대신으로부터 우측 별지의 ‘이유’에 근거하여 설명을 추가함과 동시에 회의의 의제로서는 대동아공동선언을 출발점으로 하는 대동아의 협력 사항 등을 고려하고 있음.
나) 본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심의되었음.
나-1) : 초청의 범위에 대해서는 지난 회의의 출석국 외에도 이번에 독립을 선언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및 인도네시아 등의 각 대표도 유치하기로 의견 일치 되었음.
나-2) : 또한 위와 관련하여 육군대신은 이번 기회를 통하여 꼭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고 외무대신 역시 이를 지지하였음.
다) : 제2차 대동아회의의 준비사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심의되었음.
다-1) : 외무대신은 가장 곤란한 교통수송 문제에 관해서는 육해군으로 하여금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정도가 1국 (혹은 1개의 대표 측) 당 항공기 1대를 충당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대표부, 수행원, 일본 측 안내원을 포함하여 참가 인원을 엄격하게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음.
다-2) 총리대신은 본 회의의 준비는 모두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관계 관청이 이를 원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였고 이를 외무대신은 승낙하였음. 사무기구에 대해서는 최고회의 간사를 주관 당국으로 하고 외무성 정무국장 및 대동아성 총무국장 으로 하여금 간사의 보좌로 하여 이를 보조하게 하는 것을 제의하였고 이는 전원의 승낙을 얻었음.
다-3) : 숙소 및 회의장에 대해서는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하여 초청하는 빈객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대하여 전원의 승낙을 얻었음.
하지만 앞으로의 전국(戰局)의 진전을 살펴볼 때 회의의 개최로 발생하는 교통과 수송문제는 이러한 현 전국의 곤란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높기에 제2차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어쩔 수 없이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3월 29일 개최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음.
최고전쟁지도회의 회의내용
(1945.3.29.)
제2차 대동아회의 개최에 관한 건의 경우, 앞으로의 정세를 생각하면 여행의 위험도가 현저히 증가하는 만큼 이를 위한 준비가 곤란해짐에 따라 회의를 연기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 이를 대신하여 대사(大使) 회의와 같은 회의를 여는 것을 외무대신이 고려하게 하는 방향으로 양해를 구하기로 함.
위와 같은 심의에 따라 외무성 및 대동아성으로 하여금 대동아대사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기로 하였음.
2) 대동아대사회의의 개최
이에 따라 쇼와 20 (1945)년 4월 23일 대동아 각국 대사회의가 개최되었음. 제국측에서는 도고(東郷)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스즈키 내각에서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을 담당한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외무대신을 의미한다.)을 시작으로 수행원으로서 외무성 정무국장, 대동아성 총무국장, 육군성 군무국장, 해군성 군무국장, 정보국 제3부 부장, 각국의 대표단은 왕(王)만주국 대사 (당시 주일만주국대사였던 왕운칭(王允卿) 을 의미한다.) , 차이(蔡)중화민국 대사 (당시 주일중화민국(난징) 대사였던 차이페이(蔡培) 를 의미한다.), 테몬(Te Moun) 버마국 대사, 위칫와타칸 (Wichitwathakan)타이왕국 대사 (대동아회의 개최 과정 당시 타이왕국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루앙 위칫와타칸(Luang Wichitwathakan) 은 이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일 타이왕국 대사로 활동하게 된다.), 바르가스(Vargas) 필리핀 공화국 대사(필리핀 행정위원회의 의장이었던 호르헤 B. 바르가스(Jorge Bartolome Vargas)를 의미한다.) 및 그들의 수행원으로 하고 이외의 배석자로서 자유인도임시정부의 대표로 라마무르티씨 (인도독립연맹(IIL) 의 도쿄 지부 수장이었던 문가 라마무르티(Munga Ramamurti)를 의미한다.) 등 약 30여 명이 출석하였음.
도고 외무대신은 대동아전쟁의 완수 및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전국(戰局) 에 대하여 제국 정부의 소견 개진을 겸하여 개회의 인사를 하고 다음으로 본 회의의 목표인 공동성명의 작성의 건에 대한 제안 이유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각국 대사의 의견 개진을 요구할 것을 주장하였음.
이에 각국 대사들의 진지한 의견 교환 토의를 진행 결과 진정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한 지도원칙을 전원 일치로 대내외에 천명하게 되었음. 본 회의에서는 (1) 정치적 평등 및 인종차별의 철폐 (2) 국가의 독립 존중 및 내정불간섭 (3) 식민지 민족의 해방 (4) 경제의 상호호혜 (5) 문화교류 (6) 침략 방지 (7) 강대국의 전제(專制) 배제 및 획일적 세계평화기구의 타파라는 7대 지도원칙을 담은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음.
이와 같은 7대 지도 원칙을 지표로서 대동아 각국은 끝까지 전제, 독점, 차별을 배제하고 정의를 기조로 하는 진정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공동의 투쟁을 이어나간다는 결의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음. 또한 공개된 오후의 회의에서는 바르가스 필리핀 공화국 대사로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독립 완성을 지원하자는 제안이 제출되어 가결하였으며 위칫와타칸 타이왕국 대사로부터 인도차이나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자는 제안이 제출되어 가결하였음. 또한 왕운칭 만주국 대사로부터 전국의 현 상황을 생각했을 때 본 회의와 같은 회의를 이후에 다시 한번 개최하자는 제의가 있어 이 역시 이의없이 가결하였음. 마지막으로 제국 정부로부터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하여 본 회의의 토의 내용 및 결정, 결의한 내용에 대하여 통보하는 것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이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
이와 같은 결의의 채택을 통하여 대동아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더욱 결합하게 되어 금융, 무역, 교통, 노동등 실질적인 방면에서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게 되는 계기를 형성하는 성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음.
3) 대동아대사회의 공동성명의 채택
회의 종료 후 같은 날, 대동아대사회의 서기국에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음.
대동아대사회의 서기국 발표
(1945.4.23.)
대일본제국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및 주일 만주국, 중화민국, 버마국, 타이왕국, 필리핀 공화국 각국 대사는 본국 정부와의 예비적 협의를 바탕으로 대동아전쟁 완수의 방도 및 공동전쟁을 통한 세계신질서 건설의 이념에 대하여 격의 없는 의견 교환을 실시한 결과 본 23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을 채택하였음.
대동아대사회의 공동성명
(1945.4.23.)
대동아각국은 영미의 끊임없는 침략에 상호제휴하여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존자영(自存自榮)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공동으로 전쟁에 매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영미는 무력으로 중립국들을 압박하고 이를 전쟁의 도구로써 사용하며 타국의 해방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의 세력 범위 확대와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있다. 또한 적대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가의 존립, 민족생존의 기초는 물론 그 고유문화도 말살하려 기도하고 있다. 영미가 오늘날 품고 있는 전쟁계획은 수많은 정치적 겉치레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로지 무력을 기초로 하여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강제로 찬동하게 하는 것으로, 영미는 국제정치를 자신의 전제(專制)하에 두고 방자하게 자신들을 세계의 경찰로 칭하고 세계경제도 농단하여 이로써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를 더욱더 영구화하는 것을 꾀하고 있다. 때문에 그 밖의 각국 각민족은 그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정하고 균등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으며 특히 대동아민족에 대해서는 여전히 편견과 차별관을 드러내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들과 우리의 전쟁목적의 결정적 차이는 우리는 영미가 지금과 같은 부정한 국제 질서를 끝까지 유지, 강화하려는 것에 반대하고 대동아 각국은 이와 같은 전제, 독점, 차별을 배제하고 끝까지 정의를 기조로 하는 진정한 신질서를 건설하려는 것에 있다. 대동아 각국은 이를 위해 공동선언을 (대동아공동선언을 의미하는 것.) 발표하여 대동아전쟁의 의의와 목적을 천명하였으나, 더 이상 영미의 폭력에 의해 국제정의와 인류의 복지가 유린당하는 것을 묵시할 수 없어 대동아 각국은 이에 포회(抱懷)하는 공동의 전쟁목적에 근거하여 진정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한 지도원칙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이를 저지, 파괴하려는 영미의 야망에 대해서는 끝까지 그 총력을 결집하여 전쟁을 완수하겠다는 견고한 결의를 새로이 표명한다.
국제 질서의 확립을 위한 근본적 기초를 정치적 평등, 경제적 호혜 및 고유문화에 대한 존중에 원칙에 두고 이에 기초하여 인종등에 기초한 일체의 차별을 철폐하고, 친화협력(親和協力)의 취지를 공존공영의 이념에 포함시킨다.
국가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보장한다. 또한 국가의 향상 발전에 따른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기 위해 정치형태는 각국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결정하며 이에 대한 타국의 간섭은 용인하지 않는다.
식민지적 지위에 있는 여러 민족을 해방시켜 각자가 각자의 자리를 얻게 하고, 인류 문명의 진전에 기여할 길을 개척한다.
자원, 통상, 국제교통의 농단(壟斷)을 배제하고 경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여 세계의 경제 불균형을 바로잡아 각 국민의 창의(創意)와 근로에 즉응하는 경제적 번영의 보편화를 도모한다.
각국의 문화의 전통을 상호 존중하는 동시에 문화교류에 의한 국제친화 및 인류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불위협, 불침략의 원칙 아래 타국에게 위협이 되는 군비를 배제하고 통상 상의 장애를 제거하되 무력에 의한 방법은 포기하며 경제적 수단에 의한 타국의 압박 내지 도발을 방지한다.
안전보장기구에 대해서는 강대국의 전제 및 전 세계에 걸친 일방적인 강요적 방법을 피하고, 실정에 맞는 지방적 안전보장체제를 주체로 하여 필요한 세계적 보장기구를 아우를 수 있는 신질서를 수립하고 또한 부단하게 진전하는 세계정세에 대응하여 국제 질서를 평화적으로 개정할 방도를 기약한다.
4) 채택된 결의안
가) 인도차이나 각국의 독립 완성 지원에 관한 결의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에 비추어 이번에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캄보디아 및 라오스가 빠르게 원하는 형태로서 신국가 건설의 열매를 수확하고 대동아의 유력한 일익(一翼)이 되어 상호 공동의 이상 실현에 매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독립 달성 지원에 관한 결의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에 비추어 동인도 민족이 꺾이지 않는 노력과 일본 측의 호의적인 지원을 통하여 속히 독립 준비를 완료하고 독립이라는 숙망을 달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본 회의의 토의 내용 및 결정, 결의 내용에 대한 통보에 관한 결의
인도의 해방은 대동아의 공동 관심사로서 대동아 각국은 이를 위하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투쟁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지원하기 위하여 본 회의에서의 토의 내용 및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 및 결의사항을 자유인도임시정부에게 통보하고 이에 대한 찬동을 권장하기로 한다.
올 여름부터 시작한 긴 번역작업이 끝이 났습니다. 작성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응원해주신 여러분 덕에 작업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아시아는 하나다》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㉖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https://static.wixstatic.com/media/00f48f_01ab40eb536847bba407cbf8a1589044~mv2.jpg/v1/fill/w_980,h_644,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00f48f_01ab40eb536847bba407cbf8a1589044~mv2.jpg)





결과적으로 2차 회의는 계획으로만 그치고 끝났군요. 근데, 당시 정세를 보면 저런 거 개최해봤자 딱히 효용은 없었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