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⑯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표지.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호세 라우렐의 대동아회의 당시 숙소 사진.
호세 라우렐이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인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郞, 당시 일본상공회의소 의장. 전후 일본항공의 초대 사장, 외무대신, 중의원을 역임했다. ) 의 저택.  (현재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 1~3초메 일대, 1979년 철거되어 현재는 쉐라톤 미야코 호텔 도쿄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도쿄 시바구(芝區) 시로카네이마자토쵸(白金今里町)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藤山愛一郞)
본저 응접실 / 오전 8시)

저는 지금까지 여러 국가를 여행하고 여러 회의에 참석해봤지만, 이번의 대동아회의 만큼 감명깊게 느낀 적은 없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동아에 찾아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상화의 모델인 상태로, 큰 몸짓으로) (도조 히데키는 호세 라우렐에게 초상화 한편을 선물하려 했다. 이에 후지타 쓰구하루 (藤田嗣治) 가 그의 초상화를 담당하게 되었다. 기자단이 라우렐을 방문했을 때는 초상화의 스케치가 진행중이던 때였다.)
호세 라우렐 사진.
호세 라우렐의 담화문
(1943.11.7 오전 8시) 

대동아의 각 국가와 민족은 스스로를 지키고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서로 긴밀히 단결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동아의 각국가들은 서로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고 서로의 문화를 전통하고 서구의 공리주의에 흔들리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상호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동아 각국은 이미 모든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거부하고 타국과의 친교를 진심으로 도모하며 정의롭지 못했던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고뇌를 해결하고 세계 문화의 진보를 위하여 대동아공영권 내 각 국가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결하여 함께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필리핀을 비롯한 대동아 국가들은 다른 어떠한 나라에도 적의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확보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생활하고 우리와 우리 자손이 세계에서 마땅히 차지해야할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은 오직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부터 스스로의 힘으로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양 문명은 자신을 선진 국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상들이 유럽의 황야를 떠돌고 있을대 동양의 문명은 이미 성숙하게 발전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을 일꾼 우리의 조상을 생각하며 열열한 신념과 용감한 정신 속에서 그들의 무한한 지혜와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개조해야 합니다.

     

필리핀 국민은 앞으로 대동아의 안전과 진보에 공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독립을 확보할 책임을 필리핀 스스로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전폭적으로 공존공영과 상호협력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리핀 국민은 지금의 고통을 참고 희생을 감내하며 일본이 신성한 사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기자단과 호세 라우렐의 문답

Q : 대동아공동선언의 5개항 중에서 필리핀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A : 필리핀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원칙은 2항의 독립친화(獨立親和)입니다. 미국은 항상 필리핀에게 일본은 침략국이며, 악인이라 선전해왔고 이러한 선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필리핀에게 완전한 독립을 주고 대동아공동선언의 원칙에 따라 대동아 각국의 독립과 주권이 인정받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은 필리핀 대통령으로서 귀국하여 당당하게 필리핀 국민들에게 보고할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주먹을 치켜들며)

     

Q : 필리핀 독립에 대한 귀하의 포부는 어떠한지.

     

A : 두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필리핀은 대동아의 여러민족과 정신적으로 단결해야 하며, 동아 각국은 각각의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고 아시아의 통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둘째, 필리핀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나아가 공영권의 여러 국가와 긴밀히 협력하며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을 도모하고 나아가 공영권의 경제 번영에 기여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상 존재하는 모든 민족의 차별적 편견을 없애고 서로 친목하고 문화적으로는 동아의 전통 철학을 최대한 발휘하여 동아 고유의 정신을 고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 경제 문제에 대한 소견이 있으신지.

     

A : 필리핀의 경우 경제문제는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후 저는 기획원(企劃院)을 조직하여 농상부장관인 라파엘 알루난 1세 (Rafael Alunan Sr.) 의 지도하에 필리핀의 경제상황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리핀은 농업국가로서 식량면에서 자급자족의 지경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동시에 상공업의 부흥을 도모하며 경제안정을 확보하려 하고 있습니다.

     

Q : 충칭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 충칭도 동양인이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영미와 손을 잡았던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 선언에 따라 더욱 동요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쟁은 미련할 뿐이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덧없는 가련한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쪽으로 와라!”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Q : 어떻게 하면 미국에 의존해왔던 필리핀 경제를 바꿀 수 있을지, 지금까지 대미 수출에 의존해온 필리핀 재계 인사들은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적응해 나갈 것인지.

     

A : 미국 의존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대동아적 경제체제를 갖추는 것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쟁 전 미국의 필리핀 설탕 산업 투자는 5억 2천만 페소로, 그중 1억 페소 가량의 설탕을 미국에 수출하여 남부 설탕지대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필리핀의 경제는 약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수출할 수 없게 된) 설탕 과잉 문제를 처리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시장보다 더큰 1억 인구를 가진 일본과 5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설탕 과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Q : 필리핀의 치안확보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은 어떠한지.

     

A : 필리핀은 국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1만 명의 경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치안이 나쁜 지역등을 완전히 다스리기 위해서는 경찰대를 5만명 가량으로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국방부 및 국방군은 필요하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이를 논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일단은 이 경찰대의 확대부터 시작해 갈 생각입니다.

     

Q : 칼리바피 (필리핀 일본 군정시기인 1942년 12월 창설된 정당 KALIBAPI, (Kapisanan sa Paglilingkod sa Bagong Pilipinas, 신 필리핀 봉사 협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칼리바피는 일본의 필리핀 점령시기 필리핀의 모든 정당을 대체하는 유일한 조직으로서, 일종의 필리핀판 대정익찬회 역할을 하였다. 칼리바피는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제2공화국이 세워진 후에도 제2공화국의 유일정당으로 작동했다.) 의 조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A : 필리핀인을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강력한 국민운동을 통한 청년들의 분발을 재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동아전쟁이라는 세계적 대전환기에서 독립을 맞이하는 우리는 칼리바피 운동을 더욱더 지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칼리바피는 일본의 대정익찬회와 유사한 조직으로, 군정 초기에 성립되었습니다. 필리핀은 40년간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물질만능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필리핀이 이러한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칼리바피와 같은 국민운동을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리바피의 임무는 국민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입니다. 현재 칼리바피의 총재는 대통령이지만 실제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부총재 겸 사무총장인 아키노씨입니다. 따라서 저는 귀국 후 아키노씨 (칼리바피의 창립자중 한명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 1세 (Benigno Aquino Sr.)를 의미한다.) 와 함께 이 운동을 더욱더 강화할 생각입니다.

댓글


데헷넷45신중7.png

연락하기

아주 킹아

데헷넷25-3-1.png
데헷넷45신중8.png
데헷넷45신중9.png
저조구락부
  • Instagram
  • Facebook

© 2014~2023 데헷이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