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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회의 일정표 (大東亞會議日程表, 1943.10.31~1943.11.25)

최종 수정일: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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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대동아회의 일정 (그림에는 8일까지의 일정까지만을 서술했다. 8일 이후의 일정을 지도에 표시하지 않은 것은 8일 이후의 일정은 각국 대표와 도조 히데키와의 회담뿐이기 때문). 대부분의 일정이 도쿄 도심 (現 미나토구, 치요다구) 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일정을 위해 각국 대표 숙소 역시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도쿄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아회의 일정표 
(大東亞會議日程表)
(정확한 시간을 알수 없는 경우 '-'로 표기)


1943년 10월 31일 ()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입국.

     

1943년 11월 1일 (월)

오전 11시 20분 :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일본 방문을 기념하여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왕징웨이가 대동아회의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탑승한 것으로 추측되는 중화항공의 MC-20 사진.
왕징웨이가 대동아회의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탑승한 것으로 추측되는 중화항공의 MC-20.

오후 3시 35분* : 왕징웨이과 중화민국 대표단을 태운 중화항공(中華航空)* MC-20* 항공기 착륙.

(도조 히데키 총리내각대신, 시마다 시게다로(嶋田繁太郎) 해군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등이 마중을 나왔고 비행기에서 내린 왕징웨이는 이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1) 난징의 중보(中報) 에서는 3시 4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2) 현재 중화민국(대만) 의 중화항공과는 이름만 같은 회사로, 일본의 지원 아래 1938년 12월 설립된 항공회사.

*3) 기체명은 추홍호(秋鴻號) 이라는 이름이 붙은 C-5130으로 추측된다. 왕징웨이는 1941년의 방일 때 일본으로부터 선물받은 자신의 전용기 해겸호(海鶼號, G3M 기반)이 있었음에도 대동아회의 때는 쓰이지 않았는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기록상으론 마지막으로 해겸호의 사용이 알려진 것은 1942년 12월의 대동아전쟁 발발 1주년 기념 방일 일정때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장징후이가 대동아회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 탑승한 만주항공의 MC-20.
장징후이가 대동아회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 탑승한 만주항공의 MC-20.

     

오후 3시 45분* : 장징후이와 만주국 대표단을 태운 만주항공(滿洲航空) MC-20* 항공기 착륙.

(왕징웨이를 태운 차량 행열이 빠져나간 이후 바로 착륙했다, 장징후이는 협화회(協和會) 복을 입었다고 전해지며 장징후이 역시 앞서 왕징웨이를 마중나온 일본 인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1) 난징의 중보(中報) 에서는 3시 50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2) 기체명은 M-611.

     

1943년 11월 2일 (화)

오후 2시 : 호세 라우렐과 필리핀 공화국 대표단을 태운 DC-3* 항공기 착륙.

(도조 히데키 총리내각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등이 마중을 나왔고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호세 라우렐의 아들 마리아노 라우렐(Mariano Laurel) 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찬드라 보스와 일본 기자단간의 기자회견

     

*1)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1943년 11월 3일 (수)
일본 도쿄의 (구) 총리관저 사진.
일본 도쿄의 (구) 총리관저.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위치했었다)

오후 4시 : 총리 관저에서 다과회 개최.

(다과회 장소에는 그 전날 설치해둔 국화꽃이 장식되어 있었고, 대형 일장기를 중심으로 각국 국기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다과회에서 각국 대표들은 처음으로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찬드라 보스 포함) 다과회에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하여 내각의 대신들, 각 성의 차관들, 중의원 의장, 도쿄도지사를 비롯한 다양한 내각의 인원이 참가했다. 또한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참모총장을 비롯한 다양한 군부측 인사도 참가했다. 밑에서 볼 수 있듯 타이 왕국의 완 와이타야콘과 버마국의 바모는 다과회 개최 이후에 도쿄에 도착하여 이들은 바로 다과회장으로 향했는데, 도조 히데키는 이들 대표단이 도착할 때마다 직접 정문까지가 이들을 맞이하였고 자신의 내각 각료 및 인원들을 각국 대표에게 일일이 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찬드라보스는 도조 히데키에게 본 다과회를 보고 “이는 (대동아라는) 한가족의 파티와 같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오후 4시 15분 : 완 와이타야콘과 타이 왕국 대표단을 태운 항공기 착륙.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주일 타이 왕국 대사등이 마중을 나왔고 당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완 와이타야콘의 아들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오후 4시 30분 : 바모와 버마국 대표단을 태운 항공기 착륙.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주일 버마국 대사등이 마중을 나왔고 당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바모의 7명의 자식중 1명(아들)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바모는 찬드라보스를 포함한 6개국 대표중 유일하게 군복차림이었다.)

        

오후 4시 50분 : 완 와이타야콘이 다과회에 도착.

     

오후 5시 : 바모가 다과회에 도착.

(바모의 도착 이후 도조 히데키와 각국 대표들은 원형 탁상에 둘러앉아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오후 5시 30분 : 다과회 종료, 각국 대표들은 숙소로 복귀.


*1) 난징의 중보(中報) 에서는 4시 3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43년 11월 4일 (목)
황거로 들어가는 대표단 차량행렬 사진.
황거로 들어가는 대표단 차량행렬. (일본뉴스 179호)

오전 11시 50분 : 각국 대표들의 황거 방문, 쇼와 천황 접견.

(황거앞에는 수많은 일본 시민들이 집결하여 일장기를 흔들며 황거로 들어가는 대표단의 차량 행렬을 환영했다. 각국 대표들은 황거를 방문하여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 궁내대신의 안내를 받아 쇼와 천황을 접견하였다. (순서는 왕징웨이가 가장 먼저였다.) 왕징웨이를 비롯한 각국 대표가 인사를 건네면 히로히토는 악수를 하며 말을 건넸다.)

     

오후 12시 30분 : 쇼와 천황 주최 오찬회.

(오찬은 풍명전(豐明殿)에서 개최되었으며 오찬회에는 각국 대표 및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정부 인사들 및 각국 대사들이 참가하였다. 오찬회가 끝난 이후에는 모단간(牡丹間)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오후 2시 5분 : 각국 대표들의 궁성 일정 종료.

     

     

     

궁내성 발표
(1943.11.4.)

     

천황폐하께서는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중화민국 대표 왕징웨이 국민정부행정원장, 타이 왕국 대표 완 와이타야콘 총리대신대리, 만주국 대표 장징후이 국무총리대신, 필리핀 공화국 대표 호세 라우렐 대통령, 버마국 대표 바모 내각총리대신과 본월 4일 오후 12시 30분 오찬을 베푸시어 다카마쓰노미야 친왕 각하를 모시고 주일 만주국 대사, 중화민국 대사, 버마국 대사, 타이 왕국 대사 임시대리와 함께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과 함께 식사하시었다.


우에노의 도쿄도 미술관. (東京都 美術館)   사진.

우에노의 도쿄도 미술관. (東京都 美術館)      

오후 2시 30분 : 도쿄도 미술관에서 개최중이었던 제6회 문부성 미술전람회* (신문전 新文展)을 관람.

(안내는 문부대신이었던 오카베 나가카게가 담당했다. (본 관람에는 찬드라보스도 함께했다.) 미술관에 도착한 대표단은 2층 귀빈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눈 뒤, 왕징웨이는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의 안내를 받아 일본화를 감상했고 장징후이는 야마구치 호슌(山口蓬春)의 안내를, 호세 라우렐이 마에다 세이손(前田靑邨)의 안내를, 바모는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 의 안내를 받아 작품을 감상했다. 오카베 나기카게 문부대신은 대표단의 작품 감상이후 대동아회의를 기념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각 대표에게 선물했다. 코무로 스이운은 《서창(瑞昌)》을, 아라키 짓포(荒木十畝)는 《국화(國華)》를, 야마시타 신타로(山下新太郞)는 《나라공원신록(奈良公園新綠)》을,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는 《홍후지(紅富士)》를 그려 전달했다. 찬드라 보스는 그림이 아닌 와타나베 카네나가(渡邊兼永)의 일본도를 선물받았다.)


왕징웨이가 받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의 《서창(瑞昌)》을 담은 엽서.  오른쪽에 '제6회 문부성 미술전람회 출품 작품' 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왕징웨이가 받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의 《서창(瑞昌)》을 담은 엽서. 오른쪽에 '제6회 문부성 미술전람회 출품 작품' 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오후 7시 : 시게마츠 마모루 외무대신, 아오키 가즈오 대동아대신이 공동주최한 비공식 만찬회에 참석.

(만찬회는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마이 케이쇼(今井慶松)를 비롯한 이들이 무용과 일본음악을 공연하였다.)

     

*1) 1943년 10월 16일부터 11월 20일까지 개최되었다. (공익재단법인 일본미술원)


1943년 11월 5일 (금) / 대동아회의 1일차

오전 10시 6분 : 1일차 회의 시작.

     

오전 11시 20분 : 휴회 및 오찬.

(본래 계획에서는 타이 왕국의 완 와이타야콘의 연설은 오후에 진행되어야 했으나 계획보다 일정이 빠르게 흐르며 오전에 완 와이타야콘까지 연설을 하게 되었다.)

     

오후 1시 1분 : 회의 재개.

     

오후 2시 45분 : 휴회.

(본래 계획에서는 2시 30분에 휴회를 할 예정이었으나 필리핀 호세 라우렐의 연설이 길어지며 15분 가량 지연되었다.)

     

오후 3시 27분 : 회의 재개.

(앞에서 휴회가 지연된 것도 있고 긴 연설 속의 피로로 본래 계획의 30분이 아닌 40분 휴회를 거쳤다.)

     

오후 4시 47분 : 1일차 회의 종료.


-정보국 발표

(본 정보국 발표전까지는 대동아회의에 관한 사항은 기밀이었다.)

     

1943년 11월 6일 () / 대동아회의 2일차

오전 9시 58분 : 2일차 회의 시작.

     

오전 11시 56분 : 휴회 및 오찬.

     

오후 12시 45분 : 회의 재개.

     

오후 1시 즈음 : 대동아공동선언 채택

     

오후 3시 17분 : 회의 종료.

     

오후 3시 30분 : 신주쿠교엔(新宿御苑) 방문.

(방문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高松宮宣仁親王),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 기도 고이치 (木戶幸一) 내대신부, 마츠다이라 츠네오 (松平恆雄) 궁내대신, 시마다 시게다로(嶋田繁太郎) 해군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등이 참가 했다.)

     

오후 4시 : 쇼텐페이(翔天亭) 에서의 다과회 참가.

(신주쿠교엔 내부에 존재)


만찬회가 개최된 대동아회관 (大東亞會館) 사진.

만찬회가 개최된 대동아회관 (大東亞會館, 현재 도쿄회관 본관자리) . 1940년부터 이곳을 대정익찬회가 쓰게 되면서 이름을 도쿄회관에서 대동아회관으로 바꾸었다. (전후 복귀)    

오후 6시 : 대동아회관*에서 개최된 만찬회 참가.

(대동아회관의 연회실 벽에는 대동아공영권의 지도가 모자이크 스타일로 그려져 있었는데, 일본의 세력범위를 붉게 칠해 돋보이게 그려두었다. 당시 대동아회관의 지배인이었던 미카미 료조 (三神良三)은 왕징웨이를 비롯한 각국 대표들이 마치 자신들을 속국 취급하는 것 같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묘사했다. 특히 만주국의 장징후이는 이 회의를 얕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고 전해진다.)


-대동아회의 사무국 발표.

(본 사무국의 발표로 대동아공동선언이 대내외에 공개되게 된다.)


*1) 현재 도쿄회관(東京會館) 본관.


1943년 11월 7일 ()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오전 7시 30분: 각국 대표들과 기자단간의 담화.

(각국 대표들의 숙소들은 서로 먼거리에 있지 않았던 만큼, 기자단은 왕징웨이를 시작으로 각국 대표의 숙소를 순회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오전 8시 : 황거앞에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 참가하는 인원들 집결, 행진 개시.

(약 10만명이 참가했으며 여기에는 대정익찬회 장년단원 2만 5천명, 산업보국회, 농업보국회, 상업보국회, 해운보국회, 청소년단체, 대일본부인회, 국민 학교 교직원들, 종교교화단체, 각국 유학생등이 포함되어있었다. 일반 참가자의 경우 남성은 방공복장, 여성은 몸빼로 복장이 통일되었고 집결한 이들은 4열행진하여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개최되는 히비야공원으로 향했다. )

     

오전 9시 40분 : 히비야 공원에서 해군군악대가 연주를 개시, 황거앞에서 출발한 행진 도착.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개최모습.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개최모습.     

오전 10시 10분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개최.

(행사의 시작후 참가자들은 궁성 참배를 행한후 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했다. 그리고 고토 후미오 국무상이 조서를 낭독하였다.)

     

오전 10시 30분 :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각국 대표 입장, 연설 시작.

(아오키 대동아대신이 각국 대표를 소개 및 안내했다. 입장은 이로하순으로 이루어졌으며 맨 마지막에 슈타머 독일대사가 입장했다.)

       

오후 1시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종료.

(행사의 종료는 바다에 가면(海行かば) 의 제창, 천황 폐하 만세 삼창, 참가 각국 만세 삼창으로 마무리되었다. 행사의 종료후에는 애국행진곡(愛國行進曲)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각국 대표를 비롯한 인원들의 퇴장이 시작되었다.)

     

오후 2시 30분 : 제14회 메이지신궁 국민연성대회 (十四回明治神宮國民鍊成大會) 참가.

(대표단은 청년들이 그린 두루마리그림(繪卷物)를 관람하고, 동아 각지의 유학생 200명을 포함한 대동아청년 합동 체조 (大東亞靑年合同體操)를 관람했다.)


오후 8시 : 아오키 대동아대신 – 시게미츠 외무대신 공동초대 연극 관람.

(연극은 긴자의 가부키자(歌舞伎座)에서 진행되었다.)

     

1943년 11월 8일 (월)
도쿄 아타고 산 (愛宕山) 의 중앙방송국. (현재 NHK방송박물관 자리) NHK의 전신인 JOAK의 글자가 보인다.
도쿄 아타고 산 (愛宕山) 의 중앙방송국. (현재 NHK방송박물관 자리) NHK의 전신인 JOAK의 글자가 보인다.

오전 10시 : 왕징웨이의 라디오 방송.

(방송은 도쿄의 중앙방송국*에서 진행되었다.)

     

오전 10시 20분 :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도조는 바모가 대동아회의의 연설에서 치안을 중요시한다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바모는 도조 히데키와의 회담에서도 치안 유지를 위한 전문가 파견등을 요청하는 등 버마국의 전쟁 수행 및 버마국의 행정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하였다. 바모는 버마의 평균 쌀 생산량이 400만 톤이었는데 전쟁 상황으로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을 이야기하면서 일본 측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오후* : 장징후이의 귀국, 신징 복귀.


*1) 현재 도쿄 아타고(愛宕) NHK 방송박물관 일대.

*2) 오후라고만 서술되어 있어 정확한 시간은 알수 없다.

     

1943년 11월 9일 (화)

오후 2시 : 장징후이, 만주국 기자단과 담화, 대동아회의의 성과를 보고.

     

오후 5시 30분 : 왕징웨이의 귀국, 난징 복귀.

     

1943년 11월 10일 (수)

오후 4시 15분 :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호세 라우렐은 이 회담에서 자신의 귀국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일본이 필리핀에 여러 분야를 위한 전문지도관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비행기 1대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도조 히데키는 취임 1주년 행사에 맞추어 최대한 빠르게 비행기를 제공하겠다 밝혔다. 하지만 이즈음에는 필리핀 전투가 발발하여 실제 비행기 인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1월 12일 (금)

오후 4시 50분 : 완 와이타야콘의 도조 히데키와의 귀국인사.

(완 와이타야콘은 도조 히데키에게 대동아회의 일정에서 편의를 제공해준 일본에 감사를 표하며 14일 귀국할 것임을 도조 히데키에게 밝혔다.)


-호세 라우렐의 귀국.

    

1943년 11월 13일 ()

오전 11시 :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찬드라 보스는 이 회담에서 자신의 귀국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귀국할 것이며 하루 빨리 안다만-니코바르 제도를 방문할 것임을 이야기 했다. 또한 동시에 자유인도임시정부에는 자체 통화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일본 엔화를 사용하게 되면 적측에게 자유인도임시정부가 일본의 괴뢰정부로 보일 가능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활동을 위한 항공기를 요청하는 등 도조 히데키와 인도 독립과 관련된 다양한 사항을 논의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항공기를 제공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예산등 여러 문제로 민간기는 아닌 일본 육군이 관리하는 비행기 1대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1943년 11월 14일 ()

-완 와이타야콘 귀국.

     

1943년 11월 17일 (수)

오후 5시 : 찬드라 보스 난징 도착.

(찬드라 보스는 복귀 과정에서 중화민국 난징, 마닐라, 싱가포르등을 경유하여 복귀하였다. 찬드라 보스의 방문에 왕징웨이도 직접 비행장에 마중을 나왔다. )

     

1943년 11월 19일 (금)

-바모 마닐라 도착.

(바모 역시 복귀 과정에서 필리핀의 마닐라를 경유하는 일정을 선택했다. 바모는 19일 마닐라의 말라카냥궁(Palasyo ng Malakanyang)에서 필리핀-일본 기자단 앞에서 연설을 하였고 27일 버마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게 된다.)

     

1943년 11월 25일 (목)

오전 10시 30분 : 필리핀 국회에서 호세 라우렐 대통령이 대동아회의의 성과에 대해 보고.

     

- 태국 인민의회의 정기회의에서 완 와이타야콘이 대동아회의의 성과를 보고.




[출처]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호사카 마사야스, 페이퍼로드, 2022, 478쪽.

『大東亜共同宣言』, 情報局記者会, 新紀元社, 1943.

『大東亞會議』, 中華日報社, 中華日報社出版, 1943.

『中報』, 1943년 11월 1일자~11월 10일자

『新中國報』, 1943년 11월 1일자~11월 10일자

『每日新報』, 1943년 11월 1일자~11월 30일자



항공기 관련사진자료 : http://minhangji.com/index.php/zhhk/


공익재단법인 일본미술원 : https://nihonbijutsuin.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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