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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③ 완 와이타이콘 (태국) 의 연설 (1943.11.5)

최종 수정일: 9월 3일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표지.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1943.11.7)

14.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15.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16.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17.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18.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19.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부록]

21.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2.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2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24. 대동아회의 일정표
도조 히데키 (일본대표) : (앉은 채)  계속하여 타이 왕국 대표 각하..? 
(이를 중국어로, 그다음 영어로 통역하여 전달한다)
완 와이타이콘 (Wan Waithayakon) 타이 왕국 내각총리대신 대리 사진.
완 와이타이콘 (Wan Waithayakon) 타이 왕국 내각총리대신 대리.

완 와이타이콘의 연설
(1943.11.5)
(태국어)

     

타이 왕국은 이번 일본이 개최한 대동아회의의 참가 초청장을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이는 본 회의가 대동아전쟁을 완수함과 동시에 항구적인 번영을 추구하는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유효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타이 왕국 총리대신인 쁠랙 피분송크람 원수 각하께서는 현재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도쿄로의 원거리 여행이 어려워 스스로 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원수께서는 저에게 명하시어 그 대리로서 본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대동아전쟁의 수행과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에 관한 타이 왕국의 소견은 기존의 방침(1940년 6월 12일 일본과 타이왕국이 체결한 ‘우호관계의 존속 및 상호 영토존중에 관한 일본국-타이왕국간 조약’ , ‘ 1941년 12월 21일 일본과 타이왕국이 체결한 ’일본-타이왕국 동맹조약‘을 의미한다.), 특히 일본 – 타이왕국 관계의 기본방침에 준거한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때도 지극히 타당한 것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일본 – 타이 왕국 관계가 당면한 문제는, 현존하는 우호, 협력의 관계에 충분한 양해를 한층 더 증진시켜 물적, 심적인 힘을 결집시키고 일체화 하여 일체화를 통하여 대동아전쟁의 수행과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소견은 대동아 흥륭의 역사에 대해 하나의 주석을 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아시아 대륙은 인류발달의 원천으로서 태고부터 고도의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달은 인류의 마음에 빛나며 인류로 하여금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맑은 빛으로서 정의의 기초 위에 수립된 우호와 호의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국교로서 불교를 신봉하는 타이 왕국 국민의 고유한 발전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원리는 타이 왕국 국민의 고유한 발전 윈리인 동시에 일반 아시아 국민에 의해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문화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즉, 아시아의 원칙에 따르는 발전은 실로 문화적인 것이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빛은 동방에서, 법은 서방에서 (EX ORIENTE LUX, EX OCCIDENTE LEX 라는 고대 라틴어 문구를 의미하는 것)“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명백하게 유럽인들에게도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럽의 발달은 이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발달은 물질적 진보의 촉진, 다르게 말하면 국가의 경제력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형식을 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근대 세계사 속 유럽 각 국가들은 유럽 밖으로 뻗어 나가며 발전했습니다.히 영미는 1세기 전부터 대동아 지역에 진출하여 대동아 지역을 식민지로서, 또는 원료 획득의 독점적 지역으로서, 또는 자신의 제품을 판매할 시장으로서 대동아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 해왔습니다. 때문에 대동아의 각 민족은 독립과 주권을 잃거나, 최외법권과 불평등 조약에 의해 그 독립과 주권에 여러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대동아 민족은 국제법상의 어떤 호혜적 취급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는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문화적 성질을 상실하고, 그저 한 대륙의 지리적 명칭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로 발생한 고뇌는 대동아 각 국민의 감정과 기억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현대세계의 진전에 있어서는 서양문명에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동시에 기존의 동야적 문화 원칙을 믿고 따라야함을 통찰하며 이를 현대식으로 조정하는데 성공하여 치외법권을 철폐하고 성공적으로 독립과 주권을 다시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순식간에 일대 강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타이 왕국도 동일한 길을 걸어 수년간의 부단한 노력의 끝에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독립과 주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대동아는 풍양(豐穰) 의 옥토로, 자급자족의 원칙에 근거하여 해당 지역을 공영속에서 발전시킬 천연 자연과 산업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팔굉일우(八紘一宇) 의 이상을 따라 공영권을 수립하여 정의, 공정 및 평화에 기초한 한가족과 같은 결속을 가져오는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정책은 타이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분쟁의 예시에서 보았듯이, 평화적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이 왕국은 영토 상실에 따른 분쟁을 제거하여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상실 영토의 일부 반환을 프랑스에 요구하였는데, 기쁘게도 일본정부가 이를 위한 조정에 동의하여 마침내 정의에 입각한 협정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1941년 5월 9일 타이 왕국과 일본이 체결한 ‘보장 및 정치적 견해에 관한 일본국 – 타이왕국 간 의정서(保障及政治的了解ニ關スル日本國「タイ」國間議定書) 및 같은날 일본과 비시 프랑스 정부가 체결한 ’‘보장 및 정치적 견해에 관한 일본국 – 프랑스 간 의정서 (保障及政治的了解に関する日本國「フランス」國間議定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은 1940년 12월 타이 왕국 – 비시 프랑스 간의 전쟁을 중재하여 양국간의 충돌을 종료시켰다. 타이 왕국은 이를 통하여 일정부분의 영토를 획득했다.) 때문에 이러한 일본의 호의는 타이 왕국 국민으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책 수행은, 영미가 지속적으로 가한 여러 가지 방해에 의해 성공을 보지 못했고, 결국 대동아전쟁의 발발이라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빛나는 대전과는, 대동아공영권을 확고한 토대위에 수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었고, 이는 전 아시아 민중의 가슴에 기쁨을 가득 넘치게 했습니다.

     

타이 왕국은 과거 수백년간 일본과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히 긴밀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타이 왕국은 일본의 이러한 숭고한 목적을 충분히 양해하고 내각 총리 대신 각하의 지도하에 대동아전쟁의 발발 이후 즉시 일본의 동맹국으로 협력해 왔습니다. 이는 명백히 대동아공영권의 수립과 이를 방해하는 세력의 일소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타이 왕국과 일본이 체결한 양국간의 동맹 조약에 의한 것입니다.

     

본 동맹조약의 근본방침은 1. 상호의 독립 및 주권의 상호존중을 기초로 하는 동맹관계의 설정, 2. 양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및 군사적 수단에 의한 상호 원조입니다. 군사적으로 타이 왕국군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용맹하고 완강하게 싸워 소기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더궁이 타이 왕국군은 궁극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 수행을 위해 여러 가지 희생을 바칠 용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타이 왕국은 이전부터 일본과 충분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상태에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지금의 타이 왕국이 일본에 원조를 요구한다는 것은, 이는 전쟁 완수를 위해 기존의 경제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로 한 것에 한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精神)은 아시아 문명 본래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가장 중대한 요소 중 하나는 이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태국은 자국의 문화를 선영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으로 하여금 일덕일심(一德一心)의 정신으로 단결시키고 동시에 일본과 문화협정 (1942년 10월 28일 체결된 일본-타이왕국 문화협정 (日泰文化協定)을 의미.) 을 체결하여 양국민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시켜 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타이 왕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가장 밀접한 상태에 있다 할 수 있으며, 서로의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넓은 아량으로 타이 왕국의 실지 회복과 타이 민족의 역량 결집이라는 국민적 요망에 동감을 표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마라이(Malai) 4주 및 샨(Shan) 2주의 타이 편입을 승인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943년 8월 20일 체결된 ‘마라이 및 샨 지방에 대한 타이국 영토에 관한 일본-타이 왕국 간 조약 (マライ及シャン地方に於けるタイ國の領土に關する日本國タイ國間條約)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이 실로 타이 왕국의 독립 및 주권을 존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 왕국의 일치단결과 국력의 증진을 도모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타이 왕국 관민은 일본국 관민에 대해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일본은 타이 왕국에 보였던것과 같은 호의를 나아가 대동아의 여러 국가에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은 중화민국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돕고 있으며, 만주국, 필리핀 공화국, 버마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립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인도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고 있습니다. 타이 왕국은 이러한 성과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충심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타이 왕국은 오랫동안 이들 국가들과도 우호 선린 관계를 가지고 문화적 유대를 지속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동아는 그저 지도상의 지리적 이름이 아니라, 확고한 기초 위에 선 공영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대동아 각국민의 대사업은 전쟁수행상 상호 협력하여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각 국민이 가진 총력을 가하여 전체의 공통이익인 공영권의 항구적 확립을 위해 기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동아에 항구적 번영을 가져오는 공영권의 근본방침은 상호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고, 호혜의 기초 아래 사서 상호의 경제 관계를 증진시키고, 정의에 입각하여 상호 협력을 원조하고 물질적, 도의적 역량 및 정신력을 포함한 각국의 국력을 최고로 증진시키고 대동아 각국 및 대동아 전역의 평화, 행복, 번영을 확보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동아의 여러국가는 각각의 문화에 따라 발전을 이룩함과 동시에, 본 공영권의 진보와 발전의 고양이라는 공동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 각국과 세계 각국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일반적인 우호관계도, 통상관계도, 문화 관계도, 위에서 언급했던 원칙, 즉 독립 및 주권의 존중이라는 원칙 과 함께 상호호혜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 평화는 이러한 원칙 아래에서만 확보불발(確乎不拔) 해지는 것입니다.

     

일본은 과학 지식과 근대 문명의 방법을 이용하되 아시아 문화를 진보의 한 요소로 삼은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대동아공영권이 대두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본국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다시 한번 심심한 만족과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타이 왕국 내각 총리 대신 쁠랙 피분송크람 원 수 각하의 이름으로 이 역사적 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대동아의 안정과 번영을 더욱 증진시키길 기원하며, 저의 소견을 마치겠습니다.


(박수)
(이후 착석)  
도조 히데키 (일본대표) : (기립하며)  지금부터 오찬을 위하여 휴회를 선언합니다. 오찬 후의 회의는 오후 1시부터 재개하겠습니다. 
(이를 중국어로, 그다음 영어로 통역하여 전달한다)
(이후 퇴석)
1943년 11월 5일 (금) / 11시 20분 회의 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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