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⑮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43.11.7)
- 데헷쟝
- 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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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이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왕징웨이가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인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 일본 재벌 미쓰비시의 4대 총수로, 1916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미쓰비시의 총수를 역임했다. ) 의 저택. (고야타의 별저는 고야타의 아버지이자 미쓰비시의 3대 총수였던 이와사키 야노스케(岩崎弥之助) 가 1908년 영국의 건축가 조시아 콘도르의 설계 아래 건설한 저택으로, 야스노케는 이 저택이 완성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여 고야타가 물려받게 되었으나 고야타는 해당 저택을 싫어하여 자신의 저택을 아타미(熱海) 에 별도로 건설했다. 현재 해당건물은 개동각(開東閣)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여전히 미쓰비시가 관리하고 있다.)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도쿄 시바구(芝區) 타나카와미나미쵸(高輪南町)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
별저 응접실 / 오전 7시 30분)
이제 대동아회의도 순조롭게 종료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자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웃으며, 옆의 저우포하이(周佛海)와 린바이셩(林柏生)도 함께 웃는다, 그리고 안주머니의 별갑(鼈甲) 안경을 꺼내쓰고 원고를 꺼내든다.)

왕징웨이의 담화문
(1943.11.7 오전 7시 30분)
저는 이번 세계사에서 위대한 의의를 가진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내심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의를 통해 일본 도조 수상의 위대한 이론을 경청하고, 각국 대표들의 위대한 이론을 직접 접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복하는 바입니다.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영미 양국은 제멋대로 침략과 착취정책을 자행하며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세계 지배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세력은 그 야망을 처음에는 남양, 그 다음에는 중국으로 확장시켜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미국도 태평양을 넘어 동아를 침공하여 영국과 연합하여 협공지세를 형성하였습니다. 당시 동아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으나, 다행히 일본이 홀로 일어서는데 성공하여 영미의 야망을 막아내고 영미에게 타격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영미의 이러한 야심은 변하지 않아 계속하여 동아 민족을 이간질 시키고 서로 싸우게 하여 동아는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어 영미 양국의 세력이 동아에서 무너지고, 영미 침략이 착취해왔던 소득과 시도는 모두 일본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렇기에 대동아의 모든 민족은 일본이 동아를 지켜낸 공적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영미 양국이 동아를 해치고 동아의 침략 정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여 영미세력을 격퇴하고, 나아가 이들이 펼쳤던 정책을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즉, 공존의 구호를 통해 침략의 구호를 바꾸고, 공존을 통해 착취를 끝내고, 동아민족이 각각 자주독립할 수 있게 하고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문화방면에서는 그 창의력과 조화력을 발휘하게 하며, 경제방면에서는 호혜를 실행하고,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여 유무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방침은 영미의 기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동양의 도의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서양의 이기적인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대동아회의는 일본이 주최하여 동아의 각국가들과 연합하여 단결의 힘으로 도의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위대한 공헌으로, 대동아 각국가들의 영원한 우호의 토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원한 화평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일본의 유신이 동아의 기회가 될 것" 이라 한 것은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 (쑨원이 제창한 개념으로, 쑨원은 이 대아시아주의를 통하여 중국과 일본의 연대를 추구했다. 그리고 일본과 협력하고 있었던 왕징웨이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길이라 주장했다.) 는 일본이 중국의 불평등 철폐에 협조하는 것도 소망해왔는데, 이 또한 이제는 구체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몇일 전 주중 일본대사와 중일동맹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오늘 중화민국을 대표하여 대동아회의에 참석하여 대동아공동선언에 서명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분들도 모두 같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반드시 관철될 것이고 대동아의 건설도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위의 목적과 임무를 완수, 달성하는 것은 동아 각 민족의 노력, 그리고 동아 공동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우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부흥하길 희망하고 대동아전쟁을 관철시켜 대동아 건설완성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동아의 광명대업은 대동아 각 국가민족이 스스로 노력하고, 함께 노력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미가 예전에 행해오던 침략과 약탈의 정책은 이미 무너졌고, 영미가 행해왔던 이간질도 이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어떠한 정책을 펼치든, 어떠한 감언이설을 펼쳐 우리를 유인하거나 이간질을 하더라도, 우리의 신념은 이제 흔들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억압을 받지 않고 속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대동아 각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대동아를 해방시키고 대동아의 광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기자단과 왕징웨이의 문답
Q : 대동아공동선언의 중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A : 대동아공동선언 5항목 중에 어느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생각되는데, 대동아공동선언은 5가지 항목이 한데 모아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어떠한 항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대동아공동선언을 분석하여 설명하자면 제1항은 총론이라 할 수 있으며, 제2, 3, 4항은 이를 세세하게 다룬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2항의 독립자주의 존중이라는 것은 각국의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과 상대방의 국가를 사랑하고 동시에 동아를 협동체로서 사랑하는 것을 의무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제 3항은 문화의 융합, 제4항은 경제제휴를 강화해야 함을 강조하고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5항은 대동아공동선언은 미국의 먼로주의와 같이 배타적인 것임이 아님을 세계에 천명한 것으로 중국에게는 어느 항목이든 똑같이 모두 중요하며 중국은 만강의 성의를 가지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Q : 인도를 원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있는지.
또한 중국은 현재 상태로는 인도의 독립에 대해 적은 원조를 할 수밖에 없지만, 인도의 독립에 관해서 중국은 인도와 성심성의껏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인도와 동고동락하고 싶습니다.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의 공존공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독립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영미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독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인도를 지원하겠다는 일본의 지원성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와 경복(敬服) 하는 바입니다.
인도의 기근에 대해서는 전시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생각하지만 영국은 이를 전혀 대처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도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이제 영국의 억압 대신 일본의 독립원조라는 밝은 희망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아직 간디씨를 투옥시키고 있지만 (간디는 1942년 독립운동 중 체포되어 1944년이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일본은 인도의 다른 혁명가 찬드라 보스씨를 지원하여 인도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일화동맹조약이 어떠한 영향을 불러올것이라 보는지.
A : 생각건대 전쟁이란 어느쪽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이 있을지라도 앞길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화평지구의 민중은 전쟁 발발 이래 계속하여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동맹조약이 체결되면서 민중은 밝은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동맹조약의 체결은 충칭측에 상상 이상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충칭의 선전 방침을 보면 ‘항전을 해도 망하고, 안해도 망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같은 죽음을 당할꺼면 철저히 항전하다 죽는 것이 낫다는 완전한 비관론으로, 이러한 비관론을 통하여 민중이 화평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동맹조약의 체결은 일본은 중국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중국의 자주독립을 완성시키려 한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현재 충칭에는 화평에 반대하는 이도 있고, 화평에 찬성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도 있고, 어느 쪽도 좋다는 이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동맹조약을 신속하게 충칭의 각 방면에 철저히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충칭의 미몽을 분쇄하고 충칭을 반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Q : 정치력 및 경제력 강화를 위한 방책은 무엇인지.
동맹조약은 국민정부의 정치력을 강화하고 경제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여기에는 3가지의 요점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사상의 숙정, 치안의 확보, 생산의 증강입니다. 사상의 숙정을 살펴보면, 과거 중국에는 영미의 사상, 즉 자유주의를 비롯한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철저히 숙정하려 합니다. 치안의 확보에 대해 살펴보면, 중국은 대동아전쟁의 후방으로서 최전선에 있는 일본 장병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장래적으로는 중국군도 전선의 노고를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의 증가에 대해 살펴보면, 중국은 현재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농업의 경우 잡곡류의 생산 증가를 목표로 하여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남중국 민중들에게 잡곡을 보다 많이 사용하게 하려 합니다. 또한 경공업은 먼저 면직업부터 착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Q : 물가문제 및 식량문제에 관해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지.
현재 중국 경제의 중대 문제인 물가 문제의 해결은 앞에서 보았던 면직물의 정부 매입이나 일본의 원조에 의해 착착 진척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전시상황에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면할 수 있는 고통은 최대한 없애고, 면할 수 없는 고통은 어디까지나 인내해 나가는 방침을 취하고 있습니다.
면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은 물자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결핍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면할 수 있는 고통은 첫째, 중국과 일본의 협력과 조정을 통하여 영향을 최소화하고, 둘째, 통제의 방법을 통하여 고통을 경감시키고, 셋째,국민에게 청렴결백의 정신을 양성하여 민중의 수많은 고통을 최대한 줄여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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