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⑱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民族主義と大亞洲主義)
*손중산 선생의 탄생기념일인 쇼와15 (1940)년 11월 12일, 왕 선생은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와 관련하여 민족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민족의식에 대한 시대성에 대해 설명 하면서 현 단계에서의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의 융합일체에 대해 논했다. 여기서 왕 선생의 동아연맹 사상에 대한 공명이 느껴진다.
“나는 4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총리유촉의 가장 첫마디)
이는 중산 선생의 유촉 중의 말로, 중국의 민족의식은 손중산 선생에 의해 확실히 대표되어 집대성되어왔다. 중국에는 민족이 있고, 본래부터 민족의식이 존재해왔으며, 이는 4천년 이래의 역사속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옛 민족의식을 현대의 민족의식으로 까지 단련시켜 하나의 민족주의로 발전시키고, 이를 이론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시키기 위해 노력만진하는 것에 손중산 선생은 그 일생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손중산 선생은 자신의 임종에 즈음하여 아직 다하지못한 혁명의 책임을 뒤에 남은 동지들에게 부탁하여 대신 행하게 했다.
올해는 정확히 아편전쟁의 발발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다. 1840년부터 1940년까지 100년간에 이르는 경제침략을 위해 무력침략을 행해온 제국주의는 중국의 민족의식을 향해 끊임없는 파괴공작을 가했고, 이 파괴공작은 중국민족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중국의 민족의식은 이미 굳어져 아무리 파괴된다고 한들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분열을 꾀하면 꾀할수록 하나가 되게 되었고, 압박을 하면 할수록 단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파괴공작 이외에도 우리는 증오해야할 것이 있다. 이는 바로 민족의식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는 공산당이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표어를 내걸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의 민족의식을 이용해 구국을 절규하는 이상한 계급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민족의식을 악용해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두구육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별것없음) 과 같은 비겁한 수단은 중국민족에게 고통을 주고 있을 뿐인데, 이를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제국주의의 파괴공작과 비교해봤을 때 그 해로움은 더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또한 치명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이 중국민족의 눈을 잠시 가릴 수는 있겠지만, 중국민족은 곧바로 각성해, 눈을 뜬 이후에는 두 번 다시 이러한 속임수에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이 돌아가실 무렵에 공산당은 아직 흉악한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만약 손중산 선생이 계속 살아계셨다면 민국 16년 (1927년) 이후의 공산당의 해악은 반드시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제국주의가 창궐하는 문제의 경우, 이것은 손중산 선생의 국민혁명에서 타도할 대상이었다. 손중산 선생은 아편전쟁으로부터 22년 후인 1866년에 태어나, 아편전쟁으로부터 45년이 지난 1885년부터 국민혁명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1925년에 서거하셨으니 이는 아편전쟁으로 80년이 지난 후다. 손중산 선생은 “나는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프랑스에 패한 그 해, 비로소 나는 청조의 전복을 염두하고 민국을 창건하기로 결정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1885년의 일로, 당시 손 선생은 23세였다. 이렇듯 국민혁명의 결정은 제국주의의 외환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 단순히 청조를 타도하는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주의가 없다면 중국민중을 자각시키는 것도, 중국민중의 역량을 단결시는 것도 불가능하며, 대아시아주의가 없다면 동아민중을 자각시키는 것도, 동아민중의 역량을 단결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손중산 선생은 1924년 8월 24일 삼민주의에 대한 강연을 마친후, 11월 28일에는 일본의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강연했다. 손중산 선생의 유촉에는 “40년간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중국의 자유평등이라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중에 호소하여 궐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투쟁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소위 평등하게 우리를 대우하는 민족을 소련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촉에서는 이를 따로 어느나라라고 지정하지 않고, 단지 ‘평등하게 우리를 대우하는 민족’이라 지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일본이 우리를 평등하게 대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대아시아주의를 기도할 수 있는 바라 할 것이다. 어째서 민중을 환기시키고 평등하게 우리를 대우하는 민족과 공동 분투할 필요가 있는것인가.
경제침략을 위해 무력침략을 종용하는 제국주의 세력은 매우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만 하더라도, 호주에서, 필리핀에서 그들은 이미 유색인종을 병탄, 정복해 노예로 삼고 있다. 중국이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을 막으려면 중국민중의 자각을 환기시키고, 중국민중의 역량을 단결시켜 이를 근본으로 삼아야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보았을 때도, 주위의 형세는 이를 어쩔 수 없는것이기에 어떤 나라도 이 ‘연합’이라는 두 글자를 경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연합하게 되면 운명은 공동의 것이 되고, 함께 번영도, 함께 멸망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는 속박에서 벗어나는데에는 고립이 편리할 수도 있겠지만, 세계의 대세는 경제상으로도, 군사상으로도, 점차 일국의 단독행동에서 집단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연합’이라는 두글자는 이미 강대국에게 있어서도 필요한 것이 되었으며, 하물며 앞으로 발전할 나라나 이미 낙오되어 다시 부흥하려는 나라에게는 더욱더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아시아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나온 것으로, 제국주의 세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침략으로 몰락한 필리핀 뿐만이 아니라, 아편전쟁 이후로 거의 모든 황인종도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중국뿐만이 아니라 일본까지 침략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일찍이 그 침략에서 벗어나 중국보다 수십년을 앞서 자유와 평등을 얻고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소멸하지 않는 한, 이는 일본에게도 다시 침략의 위험이 있게 되는 것으로,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중일 양국의 운명은 마찬가지이며, 양국이 이러한 점을 경시한다면 이 공동의 운명은 순식간에 상극이 되어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며 이를 막기 위해선 서로가 반성하고 노력하여 공동운명을 향해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대아시아주의는 손중산 선생의 서거로부터 15년만에 다시 광명을 찾게되어 중일 양대민족의 찬란한 앞길을 비추고 있다. 때문에 중일은 더욱더 상호제휴하여 이를 전진시켜야 한다.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는 중일양국의 운명이 상극인 시대에는 서로 양립할수 없는 것이었지만, 현재와 같이 중일양국의 운명이 공동의 것이 된 시대에는 서로 연관될 뿐만이 아니라 융합해 일체의 것이 되었다고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국이 만약 독립과 자유를 얻을수 없다면, 동아의 책임을 분담할 수 없게 되는것이고, 동아의 해방이 없다면, 중국의 독립자유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명심하고 뼈에 새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도 중국이 동아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희망한 이상, 일본은 당연히 평등으로서 우리를 대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일본에 있어서 고노에성명 이래 부동의 정책이 되어, 여론이 일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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