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㉕ 중일국교조정에 대해서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18.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19. 전면화평과 대외관계
20. 팔굉일우와 사해위가
21.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연맹운동
22. 동아연맹중국동지회선언
23. 장제스에게 최후의 경고
24.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다
중일국교조정에 대해서 (日華國交調整について)
*쇼와 15 (1940)년 11월 30일, 난징의 국민정부 대례당에서 일화기본조약의 조인식이 거행되었고, 동시에 일만화삼국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동아의 기념일인 이날 오후 왕 주석은 일화기본조약과 일만화삼국공동선언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고 그 의의를 설명했는데, 그 결론으로 동아연맹운동의 진전과 동아연맹의 결성이라는 중대 사명에 대해 역설했다.
오늘, 중일국교조정기본조약(일화기본조약을 의미.)이 조인되어 중일 양국관계는 하나의 신기원을 열게 되었고, 중일 양민족은 새롭게 하나의 광휘있는 대도를 함께 열어, 각자가 각자의 나라를 사랑하고 동시에 서로 상대국을 사랑하고, 각자가 각자의 민족을 사랑하고 또 그 상대국의 민족을 사랑하고,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며 군사, 경제 및 문화의 각 방면에 있어 협력, 합작하여 공동의 복리를 도모하고 동시에 동아의 영원화 평화를 보장할 것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 두나라가 친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원수가 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부 손중산 선생은 “중국과 일본 두나라는 모든 방면에서 제휴, 협력해 나가야 한다.” 라고 설명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전에 우리가 제휴, 협력하지 못한 이유는 까닭은 모두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3년의 비극이라는 한심해 견딜 수 없는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죽어나간 인민,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과 장수들의 기분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며, 중국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동시에 중일 양국이 함께 상처를 입고 함께 망해가는 것을 바라는 이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반드시 중국과 일본의 화평을 복원하고 공존공영의 날을 볼 수 있기를 바랬다. 이와 같은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라 고통을 참고 있는 모든 인민이, 모든 장병이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충칭 방면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인민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마음의 외침도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외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서도 중일양국의 화평이 복윈되고 공존공영의 날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이러한 날이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다가 올 시기가 시기 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제군들이여, 오늘 중일 양국 평화를 다시 회복했고, 공존공영의 날은 이미 도래하였다. 제군들은 이에 응해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여 시대에 획을 그을 이 일을 함께 부담해야 할 것이다.
조약에 의하면, 중일양국은 상호간의 주권 및 영토를 존중하고, 그리고 양국간의 상호우호를 파괴하는 수단과 그 원인을 배제하기로 하였다. 중일 양국간에는 앞으로 이전과 같은 분규를 초래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는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라, 장래의 양국간 일체의 행동과 일은 모두 이에 기초로 하게 되는 것이다. 군사, 경제, 문화 각 방면의 제휴와 협력의 실행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들이 다수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조금도 아쉬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양국간의 충돌은 모두 국가간의 관계적 문제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전 중국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의심하고, 일본은 중국이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처럼, 사변에 있어 쌍방 모두 이러한 관계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군사, 경제, 문화 방면에 걸쳐 제휴와 협력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국교방침이 일치하게 되었고, 공존공영, 공존공욕의 상태가 되었기에, 군사, 경제, 문화 각 방면의 제휴 협력은 실행가능할 뿐만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현재 세계각국은 교통의 발달에 의해 국가간의 거리가 날이 갈수록 단축됨에 따라 국가간의 관계는 날로 긴밀해지게 되어 자연스럽게 국가간의 집단행동을 요구하게 된다. 이전의 ‘광영스러운 고립’을 표방하던 국가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이전의 전통적 정책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금의 시대적 환경에는 적합하게 않게 되었다. 이렇듯 중일 양국이 축심을 결성하여 양국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동아의 화평을 보장하려 이르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렇기에 조약에서 일종의 회의감을 느낄 여지는 없는 것이다.
또 만약, 충칭 방면에서 ‘철저한 항전’을 고집하지 않고 화평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이번 조약의 성립은 더욱 신속하게 완성되고 각 방면에 대한 고려도 일정부분 생략할 수 있을 것이다. 충칭방면에서 고집하고 있는 ‘철저한 항전’은 화평의 장애물이 되어서, 일본은 국민정부와 화평조약에 대해 교섭을 하려해도 충칭방면에 대해 전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고, 일본은 전쟁을 필요한 행위로 생각하고 전쟁을 계속하려 할 것이다.
이는 국민정부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것이고, 일본에 있어서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죄악은 충칭 방면의 가장 부정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민국 27 (1938) 년 12월 28일, 내가 충칭을 탈출해 쿤밍으로 날아왔을 때, 윈난성 주석 룽윈은 나에게 “이번 교섭에서 일본은 정전이후 2년 이내에 철병을 완료하는가 안하는가?”라고 묻기에
나는“한다.”라고 답했지만, 룽윈은“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는 것이 좋다.” 라고 이야기하기에 나는 "나도 동감한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룽윈은 이어 ”하노이에 도착한 후에는 더욱 노력해 이를 더 빨리 이루기를 바란다.“ 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들이 나왔던 것은 민국 27년 12월 28일의 이야기로, 오늘은 민국 29년 11월 30일로, 그 이후로 벌써 2년이 되었다. 만약 당시의 전보(염전(豔電)을 의미하는 것, 2장 ‘장제스 총재에게 고함’참조.) 를 충칭 방면에서 채택했더라면, 지금 쯤에는 철병의 완료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의 동포들이여, 제군들은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고 얼마나 초조했을지를 나를 대신해서 생각해주기 바란다. 내가 이처럼 천만의 쓰라린 고생과 수많은 위험을 각오하고도 화평, 반공, 건국의 운동을 제창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사실 여기에 있다.
이전에는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에 이를 공개하고 이야기할 능력은 없었지만, 이제는 부속의정서도 이미 발표되어 전국 동포들도 똑같이 이를 볼 수 있다. 일본은 정전 후 2년 이내에 철병을 완료한다는 것을. 이전 유럽의 전승국 각국이 전쟁의 패배에 가했던 속박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상을 전제로 철병을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배상이 지연될시 다시 출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전국의 동포들이여, 만일 전국의 화평이 빨리 회복되지 않고 전쟁 상태를 빨리 종료하지 않으면 철병의 시기는 연장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전부터 거듭하여 충칭 방면에 최후의 충고를 보내어 그들이 실제로 전쟁을 오래 끌 이유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려 했다. 만약 계속하여 집요하게 전쟁을 연장시키 국가의 원동력과 인민의 생활력을 소모하해 다하게 된다면 중국은 이후에 영원히 부흥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라 설득하려 했다. 나는 전국의 동포들이 필연 이러한 충칭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요컨대, 시국을 수습하려면 대국을 멀리 바라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일화기본조약의 조인은 단순히 잠깐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며, 잠깐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중일 양국의 영원한 우호와 동아의 영원한 화평을 위한 것이다.
동북 4성의 만주는 본래 중국영토의 일부분이었으나, 9,18사변(만주사변 (1931)을 의미. 9.18은 만주사변의 발생일.) 이후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 10년간의 추이는 세상의 모두가 함께 지켜봐야 할 일이다. 민국 27 (1938) 년 4월, 중국국민당이 우한에서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열고 발표한 선언을 하며 이 문제에 관한 더욱 명확한 의견을 표명했다. 민국 28 (1939) 년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 6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서는 더욱더 명확한 뜻을 밝혔다. (중국국민당 제 5차, 6차(왕징웨이)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는 “동북 4성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금년 3월 국민정부의 난징환도 이래 우리들은 이러한 방침에 근거해 진행해왔다. 따라서 이번의 일화기본조약의 조인과 동시에 일만화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일만화 서로가 지금도, 미래에도 동포가 되어 어깨를 맞잡고 손을 잡고 공동으로 각 국가의 인민의 행복과 동아의 영구적 화평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게끔 했다.
대아시아주의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바로, 우리 동지들은 이러한 이상에 근거해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실현시키는 것을 구하려 했고, 이는 최근에는 더욱 발전하여 동아연맹운동이 되어 동아 각 국가와 민족의 정치독립, 군사동맹, 경제합작, 문화구통이라는 4개의 기본원칙하의 연맹을 결성해 동아의 영구적 평화에 공헌함과 동시에 세계의 영구적 평화에 공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공동으로 전진한다면, 동아 각 국가와 민족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이게 되어 점점 서로 의지하게 될 것이다.
전국의 동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하여 이시대의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이 시대의 중대 사명을 완성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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