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연맹운동 (東亞聯盟運動)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4일
동아연맹운동의 이론을 확립한 이시하라 간지 (石原莞爾). 그는 자신이 주장하던 "세계최종전쟁" 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비롯한 동아연맹을 계획했던 인물이었다.
동아연맹운동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 입안하고 그가 중심이되어 시작한 것으로, 1939년 10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동아연맹협회 (東亞聯盟協會) 이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동아연맹은 이시하라와 그의 뜻에 동참하는 동지들 수십명으로 시작되었던 아주 작은 단체에 불과했으나 단체가 조직된지 2년이 되지 않아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전국은 물론,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당시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던 동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시하라 간지는 어떠한 이유로 동아연맹이라는 운동을 창안했고 이 동아연맹운동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 곳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일까? 또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
이시하라 간지는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사실 이전부터 일본에서 만주의 중요성은 이미 인식되고 있었다. 중국대륙으로 나아가고, 소련의 극동아시아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리적 중점을 제외하고도 만주의 수많은 자원과 광활한 농지등 만주의 많은 요소들은 일본에게 중요한 것이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이 이전부터 남만주지역에서의 팽창과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던 봉천군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시하라에게 있어 만주는 또다른 의미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만주는 기필코, 무조건 일본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시하라는 어떠한 이유로 만주가 일본에게 기필코 필요한 필수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시하라는 1927년 이미 자신이 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일본의 국방(現在及び将来に於ける日本の国防)》 에서 만주와 내몽골지역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본이 만주와 몽골 (이름바 만몽) 을 점령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1928년 《관동군 만몽영유계획 (關東軍 滿蒙領有計劃)》 를 통해 일본이 만몽을 점령함으로서 제국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앞에서 보았듯 만주는 경제적, 지리적 여러 이점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대공황때 일본은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엔(円) 블록을 결성해 세계대공황에 대처할 수 있었고,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대륙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던 만주는 전쟁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이러한 이유외에도, "진정한 목적" 을 위해 만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시하라에게 만주가 그렇게 중요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가 작성한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이시하라는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세계최종전쟁론(世界最終戰論)》 이라는 책을 서술한다. 이시하라는 만주가 이 "세계최종전쟁" 을 위해 일본에게 필요했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최종전쟁이 무엇이길래, 이시하라는 만주가 일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를 위해 그의 세계최종전쟁론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시하라의 세계최종전쟁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시하라가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 . 이시하라는 세계최종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 보았으나, 이를 위해서는 많은 선행조건이 준비가 되어야 했다. 만주는 그중 하나였다.
이시하라는 두차례의 걸친 세계전쟁으로 세계가 하나로 통일된다고 보았다. 이시하라는 세계가 점점 일종의 연합체로 합쳐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이는 소련,유럽,미국,동아 4개로, 동아는 일본이 주도하는 연합체였다. 이시하라는 세계최종전쟁에서는 "한발이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폭탄" 이 등장할것이라면서 미래의 무기기술에 대한 일정부분 예측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여러 존재했다.
이시하라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가 세계최종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지만, 이시하라는 지금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만주였다. 이시하라는 만주의 자원과 인구를 보면서 만주가 무궁무진한 발전을 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5개년 경제개발 계획과 같은 경제개발,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중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발전의 촉진은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이시하라는 만주를 점령한 뒤 만주에서 발전을 진행함과 함께, 중국을 비롯한 동아국가들을 일본의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한 이론이 바로 동아연맹론(東亞聯盟論)이었다. 일본과 만주, 중국을 연결하는 하나의 (일본중심이고 일본이 주도하는) 경제적, 군사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동아연맹론의 당시 핵심이었다. 이시하라는 중국을 이러한 동아공동체에 끌어들이기를 희망했다. 그렇다면 중국을 어떻게 이 공동체에 편입시킬 것인가? 처음에는 전쟁이 그 답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정부도, 군부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고 이시하라도 전쟁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국은 이시하라의 구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을 포섭하려던 이시하라의 계획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물거품이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이시하라는 이전부터 만약 일본이 제대로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이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며, 20년이고 30년이고 전쟁을하게되는 장기전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따라서 이시하라의 관점에서 1937년의 일본은 아직까지 중국과의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다리에서의 충돌을 시작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중국과 전쟁을, 그것도 전면전을 시행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었다. 또한 이시하라가 우려했던 것처럼 중국에서의 전쟁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의 길로 향해가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이상, 이시하라가 구상했던 것처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하여 공동체를 구상하는 것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이 공동체를 구상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이시하라가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시하라에게는, 최대한 빠르게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을 일본중심의 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징웨이가 화평교섭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 중국 내에도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시하라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1938년 중엽에는, 이시하라의 동아연맹론은 일부분 변화하여 3개의 핵심요소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경제의 일체화
어느 국가군에도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급자족 경제블록을 구축하는것.
국방의 공동화
세나라 (일본,만주,중화민국) 이 통일된 방침아래 군대를 만들고 운영하는 체제를 만드는것
정치적 독립
공동체의 가맹국들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정치적 독립" 이었다. 이는 일본정부나 이전의 동아연맹론이 주장해오던 일방적인 중국침략정책에 비하면 온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의 완전한 복속도 아닌, 트라우트만 공작에서 보였던것과 같은 굴욕적인 협상도 아닌 동아연맹론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당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데,
"제국정부는 난징공략이후 지나국민정부에 반성의 최후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오늘에 이르렀으나, 국민정부는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만연히 항전을 도모하여 국민도탄의 쓴맛을 헤아리지 못하고 동아전국의 평화를 돌아볼 바가 없음으로 제국정부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을 만한 신흥지나정권 성립과 이의 발전을 기대하고 , 이와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신지나 건설에 협력하기로 한다. 본래 제국이 지나의 영토주권을 존중한다는 방침에는 조금도변화가 없으며, 이제 동아평화에 대한 제국의 책임이 막중하기에 정부는 국민들이 이러한 중대한 임무수행을 위해 한층 분발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바다. "- 1938년 1월 16일, 제 1차 고노에 성명 (쇼와13년 1월 16일 제국성명)
제 1차 고노에 성명을 통해 일본정부가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일본국민정부와 일본과의 대화루트가 중단된 상황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해야한다는 일본의 요구사항을 해결할 필요가 있는 화평파에게 이러한 동아연맹론의 "정치적 독립" 이라는 조건은 화평파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에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역할로 작동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독립은 일본의 지도하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한계점은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들은 이러한 동아연맹론을 근거로하여 화평을 위해 세우게되는 새로운 정권이 일본의 괴뢰가 아니라 이전과 같은 정치적인 독립, 즉 주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동아연맹론의 변화는 마치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의 화평시도에 맞추어 응답하는 모양새를 보였는데, 이는 사실 다분 의도된 것으로,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화평파들을 이끌어내어 충칭쪽을 굴복시켜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킬 수 있기를 일본과 이시하라는 기대했던 것이다.
동아연맹론의 주장은 겉보기상으로 당시 너무나도 가혹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일본의 이전의 요구사항보다 많이 완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하라와 그의 동아연맹론은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들의 화평공작이 진행되고, 실제로 그 성과를 점점 거두기 시작하면서 일본에서도 주요한 정치적 주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동방회 (東方會) 라는 정치단체 출신으로 의원이 되었던 기무라 다케오 (木村武雄)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일본농민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더더욱 확대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에서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시하라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동아연맹론을 더더욱 확대시키고 쟁점화 시켜 동아연맹론을 일본국민들에게도 보급함과 동시에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동아연맹론의 본질을 인식시키게 할 필요성을 인식했고, 이를 위해 동아연맹론을 주장하는 정치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성 속에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동아연맹협회(東亞聯盟協會) 다.
동아연맹운동이 더더욱 힘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12월 22일, 왕징웨이의 충칭탈출 이후 발표되었으며, 앞으로 세워지게될 왕징웨이의 신정권과 일본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인가, 왕징웨이의 신정권에 대해 일본은 어떠한 방침을 세울 것인가를 규명하는 제 3차 고노에 성명이 발표되면서다. 제 3차 고노에 성명에서는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제휴(經濟提携) 라는 3대원칙이 결정되었는데, 이 3대원칙이 동아연맹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공동의 군사체제, 공동의 경제체제를 만든다는 동아연맹론의 구상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제3차 고노에 성명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동아연맹측에서는 이 3대 원칙이 자신들의 동아연맹론이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청년장교그룹이 제3차 고노에 성명의 작성에 크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실제로 동아연맹론이 고노에 성명에 영향을 끼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제 3차 고노에성명을 통해 이제 동아연맹론의 주장 (즉, 중국을 무작정 복속시키게 할것이 아니라 중국의 권리도 일정부분 지키면서 중국을 일본의 편으로 포섭한다) 은 이제 실질적인 국가의 대중국방침이 되었다.
일본동아연맹협회에서 발행한 《동아연맹(東亞聯盟)》창간호.
이렇게 영향력을 확대한 동아연맹운동은 1938년 가을부터 동아연맹협회의 창설준비에 들어갔고, 여러 준비과정을 거친 끝에 1939년 10월 8일, 도쿄에서 동아연맹협회 사무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동아연맹협회가 설립된 이후 동아연맹운동은 빠르게 확대되었다. 동아연맹협회는 일본 각지에서 강연을 함과 동시에 협회의 기관지 《동아연맹(東亞聯盟)》을 발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대외로 알리는데 노력했다.
동아연맹운동의 확대는 단순하게 일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연맹론이 더더욱 중요한 이론으로 작동했던 중국대륙에서도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동아연맹운동이 시작된지 1년도 되지 않아 중국내의 일본점령지에 확산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에 집중하려 한다.
중국대륙에서 전개된 동아연맹운동. 베이징을 시작으로 광저우, 난징까지 확산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동아연맹운동이 전파된 곳은 베이징이었다. 전쟁초기부터 점령되어 점령지 지배체제가 갖추어진 곳이기도 했고, 이시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日 아사히신문의 기자 다무라 신사쿠 (田村 眞作)은 당시 화북지역에서 선전을 비롯한 여러 중요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신민회 (신민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의 머우빈(繆斌,무빈) 이라는 자에게 접근해 동아연맹론을 설파했다. 본래 머우빈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친일주의자로, 신민회의 근간이자 사상을 만들었던 자였다. 하지만 머우빈은 동아연맹론에 대해 서술한 《동아연맹론》 책을 읽고 이에 감명받아 신민회에 있으면서도 동아연맹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동아신질서와 중국의 자유독립은 일치할 수 있다" - 머우빈
당시 화북지역, 즉 중화민국 임시정부(1937) 의 강역에서 일종의 유일한 정치단체였던 신민회를 제외하고 임시정부에서 정치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연맹운동 뿐이었다. 머우빈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민중들이 동아연맹운동을 지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민회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화북에서 이런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동아연맹운동이 중국내의 일본점령지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음과 동시에 완전한 친일성향 신민회에게는 골칫거리가 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권 (난징국민정부) 가 설립되었다. 왕징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난징정부가 전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중화민국의 정통정부임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정부가 일본측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가 아닌 완전한 독립된 주권을 가진 정부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독립을 이야기하는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부의 입지를 내외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좋은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왕징웨이 또한 동아연맹운동에 찬성하고 지지를 표했다.
이런 왕징웨이의 지지속에서 1940년 5월, 베이징에서 중국내 첫 동아연맹운동 조직인 중국동아연맹협회 (中國東亞聯盟協會) 가 베이징에서 설립되었다. 회장은 머우빈이 맡았다. 일본내에서 가장 친일성향을 띄는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최대한 중국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참가하게 된 셈이다.
중국동아연맹협회는 6월부터 《동아연맹(東亞聯盟, 일본동아연맹운동의 잡지와는 이름만 같음) 》 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중국동아연맹협회 에서 발행한《동아연맹(東亞聯盟)》.
중국대륙 내 동아연맹운동의 확산은 베이징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0년 9월에는 광동성 광저우 중산기념당에서 중화동아연맹협회 (中華東亞聯盟協會) 가 설립되었다. 광저우에서 동아연맹운동은 준비과정에서만 8,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등, 빠르게 세를 불려나갔다. (전성기 때는 80,000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중화동아연맹협회는 《동아연맹월간(東亞聯盟月刊) 》 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베이징과 광저우보다 늦은 1940년 11월에 동아연맹운동 조직이 설립되었다. 동아연맹운동 자체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난징에서 추진되고 있었지만 조직의 수립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저우포하이를 중심으로 난징에서 동아연맹운동 잡지를 발행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아연맹운동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미 난징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징에서의 동아연맹운동조직은 동아연맹중국동지회(東亞聯盟中國同志會)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아연맹중국동지회에서도 《대아주주의(大亞洲主義) 》 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난징의 동아연맹운동조직이었던 동아연맹운동중국동지회에서 발행했던 대아주주의 (大亞洲主義, 대아시아주의) 잡지의 표지.
그리고 이 조직은 왕징웨이가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중국동지회의 창설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동아연맹은 동아 각 민족이 각기 자유독립의 입장에서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며, 그 조건은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융합이다" - 왕징웨이, 1940년 11월 동아연맹중국동지회 결성식에서.
본래 동아연맹론에서 정치적독립은 가장 마지막에 서술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최우선순위로 언급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권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물론 왕징웨이만이 정치적독립을 최우선 순위로 둔 것은 아니었다. 베이징의 머우빈도, 광저우도 정치적독립을 가장 우선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1940년 11월, 난징의 동아연맹중국동지회가 창설되는 시점에서는 광저우든 베이징이든 난징이든 동아연맹운동에서 정지적 중립을 가장 중요시 했었다.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했던 인물들의 성격은 다양했지만, 정치적 독립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한 이시점부터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의 중요 이데올로기이자, 중요 범국민적 운동중 하나로 작동했다. 왕징웨이는 1940년 12월의 국민당(왕징웨이) 3중전회에서 동아연맹운동을 이제 정부차원에서, 국민당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왕징웨이에서 추진되었던 주요 정치운동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통해 일본측으로 부터 정치적 독립을 비롯한 최대한 중국의 권리를 얻어내려고 했다.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을 움직이게 하는 3대 축중 하나로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의 대외용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신국민운동 (신국민운동에 대해 알고싶다면 여기를 : ) 이 대내용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 국민들의 단결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면,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이 일본으로부터 최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동아연맹운동을 토대로 언젠가는 일본과 중국(왕징웨이)가 동등한 관계에 도달해야하며, 일본은 중국에 최대한 권리를 보장해주어야하고, 일본은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의 정치적독립을 존중하여 왕징웨이의 중앙정부가 꼭두각시가 아님을 증명시켜 왕징웨이의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내 동아연맹운동은 동시에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연대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왕징웨이 정권에 대해 지지와 권한확대를 일본 국민과 일본 지도부에 타진했다.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정권의 주요정치운동이 됨에 따라, 지역별로 분리되어있던 조직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왕징웨이 정권에서는 베이징과 난징, 광저우의 동아연맹조직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니, 이가 바로 동아연맹중국총회 (東亞聯盟中國總會) 였다.
통합된 중국의 동아연맹조직들. 하지만 이들은 이전에 발행하고 있었던 잡지는 계속 발행하기도 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는 1941년 2월 1일, 난징의 중국국민당 중앙당사에서 오후 4시에서 발기식을 가졌다.
발기식에는 왕징웨이는 물론, 그의 부인 천비쥔과 정부의 주요인사들, 일본 영사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발기식에서 왕징웨이를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초대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이었던 고노에 후미다로는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성립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형제의 분투로써 귀국의 동아연맹운동이 전국적 통일, 발전을 이루게 된것은 동아의 해방의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며, 아울러 중국동아연맹의 성대한 성립식을 진심으로 경배함과 동시에 솔선수범해 동아연맹을 제창하여 동아의 영원한 평화와 동아보위에 분발하는 형제에게 진심으로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 고노에 후미다로
경축동아연맹중국총회2주년특간 (慶祝東亞聯盟中國總會成立二週年紀念特刊, 1943) 에 묘사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깃발. 파란배경에 흰색 4개의 직선은 평등,호혜,자유,건설을 의미하고, 노란원은 황인종의 공영권을, 원안의 파란직선 3개는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을 의미하며 상하의 적색은 영광과 성공을 의미한다.
수도 난징에 설립된 동아연맹중국총회는 구성면에서 왕징웨이정권이 이 운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애초에 발기식이 열렸던 곳이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의 중앙당사였으며, 천궁보(陳公博,진공보)와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陳璧君, 진벽군) 을 비롯한 왕징웨이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참가함은 물론이요, 머우빈을 비롯한 기존의 조직간부들까지 참가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이제 왕징웨이정권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동아연맹중국총회는 난징을 중심으로 타 지역의 조직들을 중국총회의 지부로 재편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베이징의 중국동아연맹협회는 지부로 포함되지 못했는데, 이는 동아연맹운동의 확대를 우려하던 일본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화북에서만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겠다며 화북정무위원회를 세우던 북지나방면군이 왕징웨이정권에 펼쳤던 간섭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아연맹중국총회로 통합되면서 조직은 더더욱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연맹운동은 상하이와 산터우, 후베이 성에도 지부를 설치하면서 조직을 더더욱 확대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 상하이지부는 《중국과동아(中國與東亞) 》라는 잡지를 별도로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각 지부에는 청년조직을 비롯한 여러 단체조직을 결성하고, 심지어 유럽에 연락소를 설치해 유학생도 동아연맹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 상해분회의 뱃지.
동아연맹중국총회는 조직의 요강인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의 1장에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중요목표를 4가지로 삼았다.
정치독립 (政治獨立), 경제합작(經濟合作), 군사동맹(軍事同盟), 문화구통(文化溝通)
왕징웨이가 이전부터 동아연맹운동에서 정치적독립을 최우선시, 중요시했던 것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리고 여기는 중-일간의 문화교류에 관한 문화구통이라는 4번째 항목이 추가되었다. 문화구통이라는 구호는 본래 일본동아연맹운동측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호였다. 하지만 중국측에서 일본과 중국이 공유하는 문화 (특히 유교적 전통) 가 많음을 이유로 중일간의 문화교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추가하자 일본측에서 이를 받아드렸다. (참고로 2장부터는 동아연맹중국총회 조직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있다.)
중일기본조약 (1940.11.30)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프로파간다.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구통 이라는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중요구호들이 적혀있다. 물론 정치적독립은 맨위에 위치했다.
왕징웨이는 이 동아연맹운동을 대외적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동시에, 정권 내부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반대세력에 영향력을 끼치는데에도 사용했다. 대표적인 곳이 신민회로,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화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사용했다. 동아연맹운동측에서는 "신민회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 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화북의 신민회를 비난하면서 화북에서 동아연맹운동과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신민회를 견제하고, 장차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국민당과 동아연맹은 어디까지나 동지익우(同地益友)로서 사상과 정신을 함께하지만, 신민회와 국민당은 어디까지나 동등한관계이지 종속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신민회와 일본에서는 이를 비난하고 왕징웨이를 견제하면서 이러한 왕징웨이의 노력은 일본과 신민회측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렇다면, 왕징웨이가 이토록 중요시했던, "정치적 독립" 을 쟁취하겠다는 왕징웨이의 의지가 보였던 동아연맹운동에 화평파나 정치가나 군인이 아닌, 당시의 민중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왕징웨이가 중요시했던 동아연맹운동은 민중들에게는 큰 지지를 얻지못했다. 민중들이 동아연맹운동에 큰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인데, 우선 동아연맹운동은 조직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본래 부터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일본동아연맹운동측의 지시를 받는 쪽에 더더욱 가까웠으며, 상하이를 비롯한 여러 지부를 설립하는데 일본에 관여했었다. 동아연맹건설강령 《(東亞聯盟建設綱領) 》에서는 중국의 동아연맹이 조직이나 운영 모두 중국인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함을 이야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측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애초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은, 일본동아연맹협회의 대륙지부에 불과했다. 1941년 4월의 일본동아연맹의 조직표에는 도쿄부터 아오모리까지 일본 내 27개 지역에서 지부가 설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본동아연맹협회는 일본내의 동아연맹운동만을 관할하지 않았다. 일본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하고 있었던 남양군도에 설치된 지부 (지부는 팔라우에 존재했다) 와 함께, 대륙내에 설치되었던 동아연맹협회 조직들 또한 일본동아연맹협회의 지배를 받았다. 조직표에서는 대륙내에서 설치한 동아연맹협회를 두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대륙동아연맹협회 (大陸東亞聯盟協會) 로, 이들은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권 내에 존재하는 동아연맹조직이지만 화북정무위원회와 신민회처럼 일본군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지역의 조직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두번째가 왕징웨이가 이끄는 동아연맹중국총회였다.
1941년 4월기준 (동아연맹중국총회 조직은 그이후의 조직까지 표시가 되어있다.) 일본동아연맹협회의 조직도. 중국동아연맹운동조직들이 모두 이들의 산하에 있었다.
문제는 왕징웨이가 이끄는 동아연맹중국총회를 비롯한 중국측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이 이러한 구조를 받아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동아연맹측의 영도(領導)를 인정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정권내에서 이를 주도했지만, 이 운동은 애초부터 일본에 결속된 운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지역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측이 아닌 일본군측이 제어하게 되어버리면서,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권 강역내에서도 완전한 동아연맹운동을 이끌 수도 없었다.
두 번째는, 왕징웨이 정권 스스로가 내세우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연맹운동의 충돌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국가의 공식적 이념으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내걸었다. 앞에서 보았던 난징의 동아연맹중국동지회가 발행하던 잡지이름이 "대아주주의" 인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이 대아시아주의를 통해 일본과 중국이 연합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 대아시아주의는 일본과 협력관계에 있는 왕징웨이정권을 정당화 함과 동시에, 일본과 중국이 동등한 연합을 맺어야한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동아연맹론이나 동아신질서와 같은 일본중심의 동아세력구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론들이 가지는 불평등성을, 즉 쑨원이 이야기했던 중국과 일본의 동등한 연합이 아닌 일본 우위의 연합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또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계승함으로서, 왕징웨이 자신이 진정한 쑨원의 후계자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존재했다.
이렇듯, 왕징웨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이용해 일본측과 협력하고 있는 자신들을 정당화했고, 쑨원을 잇는 정통정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동시에 일본중심의 구상에도 반대를 던질 수 있었다. 그런데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의 입장에서는, 동아연맹운동은 중일의 동등한 연합이 아닌, 불평등한 연합이기에 비판받아야 마땅한 요소였다. 하지만 문제는 왕징웨이 정권은 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아연맹운동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쑨원을 계승했다는 왕징웨이 정권이 이런 일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에 더더욱 그 정당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거꾸로 대아시아주의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현재 자신들의 정권의 위치가 현실적으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 사이에서 당시 선전부장을 맡고 있던 린바이셩은 1942년부터는 결국 대아시아주의는 차츰 사라지고 동아연맹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민중들은 동아연맹운동으로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한들, 이는 일본의 허락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애초부터 동아연맹운동이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손선생은 13년 1월에 열린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이 선언을 발표한 이후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동지들에게 맡기려 했던것 같았다. 은인이 자필로 건국강령을 쓰고 삼인제를 받아 피로를 풀었고, 정오가 되자 군서적을 읽을 틈도 없이 8월말이 되어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 나는 대아시아에 관한 연설을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일본 고베를 특별히 방문했는데 이것이 손선생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었다. 중국에서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손 선생이 오래전 말했듯이 동아의 해방이 있어야 합니다. 대아시아주의는 동아연맹의 근본원칙이고, 동아연맹은 대아시아주의의 구체적 실현이다...(중략) - 동아연맹중국동지회 창설식에서 왕징웨이의 연설 中.
또한, 신국민운동의 존재가 있었다.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국민들을 결집시키는 국내용 수단으로, 동아연맹운동을 대외용 수단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내의 이 민중들은 이 두 운동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신국민운동을 소개할때도 이야기했지만, 신국민운동을 강조하면 동아연맹운동이 약화되어버리고, 동아연맹운동을 강조하면 신국민운동이 약화되어버리는 두운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왕징웨이는 두 운동이 서로 균형을 맞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동아연맹운동의 실패에는 대외적 요인도 존재했는데, 이는 바로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연맹운동 내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만큼, 자신들의 동아연맹운동을 더이상 중국과 만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새롭게 점령된 일본의 점령지들에 전파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때 동아연맹중국총회에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참전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반려되고 후방에서의 지원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문제는,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부는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동아연맹운동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위해 일본의 종속국과 점령지가 모두 총동원체제 속에서 일본을 지원을 해도 모자랄판에, 이들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일본과 중국의 유교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연맹운동은 전쟁수행이 시작된지 얼마안된 시점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받아드리기 힘들었다. (실제 일본이 남방을 비롯한 태평양전쟁 점령지대의 운영방법을 바꾼 시점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지 2년이 다되어가는 시점인 1943년의 중반에야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동아연맹협회는 흥아원(興亞院) 아래에서 아시아주의 단체를 규합한 대일본흥아동맹(大日本興亞同盟) 에 포함되게 된다. 1942년, 동아연맹동지회(東亞聯盟同志會) 라는 이름으로 바꿔 활동을지속했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이전과는 너무 낮아진 후였다. 반면 일본동아연맹이 대일본흥아동맹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동아연맹조직들은 이전과 같은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정익찬회, 대일본흥아동맹, 일본방송협회가 발표했던 음반 《아시아의 힘(アジアの力)》
문제는 일본동아연맹협회가 사실상 영향력을 소멸해버리면서, 중국내의 동아연맹조직들 또한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일본 외교관이었던 이와이 히데이치(岩井英一)는 그의 글에서, 1942년 8월 시점에서 광저우의 동아연맹운동이 사실상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이 2년만에 위축되어 광명을 잃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 일본의 양해속에서 정치적 독립을 얻어내야하는 운동이 진작 일본내에서는 힘을 잃은 상황에서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었겠는가?
1943년에 이르러 동아연맹중국총회는 한커우 분회를 후베이분회에 통합시키는 등 조직의 축소과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각 지부마다 발행하고 있던 잡지들 또한 통합의 과정을 거쳤다. 잡지 《대아주주의 (大亞洲主義)》 와 《동아연맹월간 (東亞聯盟月刊)》 은 《대아주주의와 동아연맹 (大亞洲主義與東亞聯盟)》 이라는 잡지로 통합과정을 거쳤고, 이마저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잉크를 비롯한 물자부족으로 1944년 4월부터는 흑백만을 이용해 축소된 출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1943년에 들어 대동아회의등 다시 아시아주의는 주목을 받았지만, 이미 이시점에서 동아연맹운동은 그 주목에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의 사망이후 개점휴업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동아연맹운동 또한 왕징웨이가 사망하면서 더더욱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왕징웨이가 죽은 이후 개점휴업 상태를 유지하다가, 일본이 항복하면서 동아연맹운동도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런 점속에서도 주목해야할 부분은,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사실상 그 명맥을 잊지못했던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달리,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은 1944년까지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왕징웨이가 동아연맹운동속에서 "정치적 독립" 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노력을 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동아연맹협회 (좌) 와 동아연맹중국총회(우) 의 로고. 완전한 버전을 찾을수는 없어 아쉬웠다.
그렇다면 동아연맹운동은 무엇이었는가? 동아연맹운동을 행해왔던 것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국가였다.
하지만 두 국가는 같은 운동속에서도 일종의 동상이몽을 걷고 있었다. 이시하라를 비롯한 일본측은 운동속에서 중국의 일본공동체의 참가를 원했지만, 왕징웨이를 비롯한 중국측은 이 운동을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시하라도, 왕징웨이도 본래 자신이 추구했던 목표를 운동속에서 달성하진 못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진행했음에도 결국은 꼭두각시 지도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이시하라는 자신이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요건을 완성하지 못했다.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가 조계회수운동, 치외법권폐지운동, 산업회수운동 등 일본지배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중 하나로 평가된다. 오늘의 서술을 통해 왕징웨이라는 인물이 벗어날수 없는 협력정권이라는 한계속에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어떻게든 이 한계를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음을, 그것이 문제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고 과연 그것이 좋은것이라고 할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는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동아연맹운동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동아연맹중국총회를 비롯한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은 경성에 조직을 설치하기도 했지만,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동아연맹운동이 조선에 전파되면 조선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킬까 우려했다. 그러한 이유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쪽의) 조선에서 금지당했다고 봐도 무관했다. 또한 이미 이시점에서 조선인들은 왕징웨이정권의 수립과정을 지켜보면서 동아연맹론을 비롯한 일본의 논리가 이미 '허상' 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 또한 조선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참조 : 여기 )
[출처]
嵯峨 隆, 「東亜連盟運動と中国」, 『法學研究 : 法律・政治・社会 第 88 号』, 2015
内村 琢也, 「準宗教運動としての東亜連盟運動-東亜連盟協会の事例を中心に」, 『創価大学大学院紀要』, 1992
内村 琢也, 「東亜連盟論の基本的性格」, 『アジア研究 第 22 券 1 号』, 1975
桂川, 光正, 「<研究ノート>東亜連盟論の成立と展開」, 1980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2009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民の衆動員工作 「新国民運動の展開」 」,『中国研究月報 723号』 , 2008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34.
이시하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汪兆銘, 『全面和平への路』, p. 172-175
동아연맹 (중) 잡지 : https://aucfree.com/items/d479007012
중일기본조약 1주년 포스터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0/Propaganda_leaflet_of_the_first_anniversary_of_Sino-Japanese_Basic_Treaty.jpg
이시하라 사진 : 일문판 위키피디아의 이시하라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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