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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㉗ 국민당과 동아연맹운동

최종 수정일: 2024년 3월 23일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표지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18.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19. 전면화평과 대외관계 

20. 팔굉일우와 사해위가 

21.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연맹운동

22. 동아연맹중국동지회선언

23. 장제스에게 최후의 경고 

24.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다 

25. 중일국교조정에 대해서 

26. 동아연맹으로의 추진 

국민당과 동아연맹운동 (國民黨と東亞聯盟運動)
*중문판 본래제목은 신시대의 사명 (新時代的使命)

*일화기본조약 조인 후인 쇼와 15 (1940)년 12월 15일, 오전 9시부터 중국국민당 제3중전회가 열렸다. 같은 왕주석은 국민당 동지들을 향한 훈화를 실시했다. 이 연설에서 왕 주석은 손중산 선생대아시아주의를 설명하고, 현재는 새로운 시대의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의 시대임을 강조했다. 왕 주석의 훈화가 동아연맹을 중심으로 행해진 것은 국민당이 정식으로 동아연맹의 주체가 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는 중요하게 살펴볼만 한 것이다.

     

동지 여러분,

금년 3월, 우리는 상하이에서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최했고, 2중전회 이후에는 그 결의에 따라 당 중앙본부를 난징으로 옮겨 국민정부의 난징환도를 완성시켰다. 그 이후 수개월 동안 우리는 제6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 따라 화평의 실현헌정 실시를 위한 공작에 노력해왔다.

     

본래 장정과 규정에 비추어보면 중앙전회는 반년마다 한번 씩 개최하게 되어있지만, 여러 가지 관계에서 연기되어 오늘 제3중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환도 이후, 중국국민당 의 중앙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최초의 회합인 이 자리에서 우리는 비정상적인 흥분을 느끼기까지 한다.

     

수 개월동안의 공작에 대해서는 별도로 보고가 있었기에 서면 보고는 제외하고, 제 1차 회의에서 동지들의 상세한 보고도 있었기에 나는 이 3중전회를 개최하는데에 있어서 본 회의가 가지는 중대 사명만을 설명하려 생각하고 있다.

     

3중전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계속하여 화평을 실현시키는 것과 헌정의 실시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 있다. 오늘 총회의 개회에 있어 모두는 일종의 신시대가 도래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신시대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과거의 공작을 검토하고, 향후의 방침을 심의하고, 명확한 확정적 방안을 가지고, 그것을 공동 준수, 공동 실행해야한다.

     

신시대의 도래에 대해서는, 손중산 선생은 우리에게 이전부터 지시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오늘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다시 읽고 그 유촉이 시간이 초월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손중산 선생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는 분명하고 또한 정확하다. 손중산 선생의 주장은 대아시아주의로써 민족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장을 따르고 지켰으나 민국 17 (1928)년 이는 멈추었다. 민국 17년 이후에는 손중산 선생의 주의를 향한 절실한 봉행은 없었고, 오로지 국제연합의 한가지 길에 의탁해왔다. 이 때문에 일본과는 원수가 되어 점점 그 골이 깊어졌다. 이런종류의 원수적 감정은 십수년간 분규가 되었고, 결국에는 3년간의 미증유의 싸움이 되었다.

          

만약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잘 지키고 따랐다면, 분명히 중일은 원수의 입장에 서지 않았을 것이고, 중국이 지금의 보잘것없는 것과 같은 지위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이 오늘날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돌이켜보며, 대아시아주의에 기대어 신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우방이 제안한 동아협동체, 동아신질서 및 최근 양국인사가 제창하고 있는 동아연맹은 바로 손중산 선생의 유촉의 정확한 해석이며 기본정신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벌써 신시대는 도래했다. 우리는 단지 노력을 필요로 하는것이며, 민족주의에 노력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총리가 설명한 민권주의는 시종일관 국가적 자유와 민족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적 자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유의 희생과, 이 희생을 통한 국가민족의 자유보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손중산 선생의 주장은 민국 13년, 이는 벌써부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적인 맹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독특한 나치즘도 희미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손중산 선생의 주장은 파시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선생의 이러한 주장은 개인적 자유에 그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자유와 민족적 자유에 주장이 더욱 노력이 경도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학자들은 18세기 민주주의 사상의 교육에 따라 개인적 자유를 중시했다. 이 까닭에 손중산 선생의 주장은 존중되지 않았고 이에 대한 공개적 비평도 드물었다. 민국 23,24 년에 걸쳐 《동방잡지(東方雜誌)》를 시작으로 비평이 있었지만 명백한 공격적인 논지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이 주장하는 바의 민권주의와 구미의 민주정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구미의 민주주의개인의 자유를 중요시 여기나, 손중산 선생의 주장은 그런 것이 아니다.

     

손중산 선생의 신도인 우리가 이를 간파해보았을 때, 선생이 주장하는 민권주의는 완전한 개인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파시즘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민권주의는 국가와 민족적 자유를 중요히 여기는 것이다. 손중산 선생이 주장했던 민권주의는 진리로 여겨져야할 것이지만, 당시의 모든 이들은 팽배한 구미의 민주주의의 조류의 밀려 선생의 민주주의를 받아드려야 함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유럽의 대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이들은 비로소 민주정치의 착오를 알게 되었고, 더구나 민주주의가 현재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모두 과거에 주장했던 개인자유적 민주주의에서 국가민족적 자유로 옷을 바꿔입게 되었다.

     

일본이 최근 노력하고 있는 신체제는 개인적 자유를 대신하여 국가민족적 자유를 가지게 하려는 것에 있으며, 개인주의보다 전체주의에 이르려는 것이며, 민주주의보다 집권주의에 이르려는 것이다.

     

민국 23 (1924) 년, 영국, 미국, 프랑스가 세계대전에서 대승을 획득한 후의 민주주의의 황금시대에, 손중산 선생은 영국, 미국, 프랑스의 민주주의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만약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장래에는 부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보아야한다. 우리 국민의 유일한 영도자 손중산 선생의 눈빛이 가지고 있었던 대식견의 원대함을!

     

현재 헌정실시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우리가 요구하는 헌정은 민국 원년에 실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민권주의의 신시대의 헌정이어야 한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민권주의를 집행하기위해 철저히 선생의 유촉을 다시 되읽고, 그 장황한 유헌을 따라 민권주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구미의 개인자본주의는 이미 사회주의와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손중산 선생께서도 주의하셨던 바로, 개인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추이는 정확히 일어나고 있으며, 선생은 이 때문에 구미의 개인자본주의에 불만을 품고 절제자본(節制資本), 평균지권(平均地權)을 주장했다.

     

동시에 선생은 공산주의에도 불만이었다. 동지 여러분은 대부분 기억할 수 있을 것이지만, 민국 10 (1921) 년, 손중산 선생이 북상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소련의 한 신사 가 계림에 와서 선생을 만난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현재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건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그것에 대해 신사는 대답하면서,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실행에 필요한 것은 신경제정책이라면서, 신경제정책의 계획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선생은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의 민생주의라면서, 민생주의개인자본주의가 아니다, 개인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필연의 한 단계라고 말했다.

     

민생주의는 또한 국가사회주의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도 ‘국가사회(國家社會)’라는 4글자를 이용해 ‘민생주의(民生主義)’를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총리는 당시 이미 이러한 입장을 취하여 소련의 사상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후 국민당은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개인자본주의적 길에 오르지 않고,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길에 오르지 않고, 민생주의의 길을 달려왔던 것이다.

     

당시 전세계에 걸쳐 개인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발흥기였고, 대부분은 모두 민주주의가 아직 일어나지 발흥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는 잘 보아야 한다, 소련의 신경제정책도, 파시즘도, 나치즘의 국가는 물론, 영미도 이미 이러한 종류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종말을 고했다.

     

일본의 신체제운동은 정치를 가지고 이를 이야기하자면, 개인의 자유를 국가민족의 자유로 대신하고, 경제에 대하 말하자면 개인자본주의보다 국가자본주의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에 의거해 손중산 선생의 주장을 보기 위한 이론으로 삼아야할 뿐만 아니라 실로 진리로서 삼아야한다. 우리들은 경제의 부흥을 필요로 하고, 일정한 방침이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손중산 선생의 민주주의를 실행해 세계의 조류에 응하고, 새로운 경제시대의 도래에 노력해야 한다.

     

민족주의에서 보아도, 민권주의에서 보아도, 또 민생주의에서 보아도, 하나의 신시대는 바로 코앞에 있다. 모두들 길을 잃지말고, 경외하지말라. 손중산 선생이 주장하는 노선에 의하면 이는 광명스러운 대도다. 하나의 신시대는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에 입각하여 동아의 우방들과 합작하고, 동아의 각민족과 합작하여 중국민족의 해방을 요구하고 동아 각 민족의 해방을 구해야한다.

     

민권주의에 입각하여 헌정을 실시하고,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여 국가민족의 자유를 완성하고, 민생주의에 입각하여 민생 문제를 해결하며, 국가경제의 부흥을 도모해야한다.

     

2중전회의 중대사명은 과거의 공작을 검토하는데 있었으나, 회의중 1개의 방안을 의정했고, 그에 따라 우리는 손중산 선생이 지시하는 노선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전반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중전회의 중대사명은 신시대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 신시대란, 민족주의적, 민권주의적, 민생주의적 신시대이다. 오늘날 이곳에 모인 동지들은 수도에서 근무하는 이들도 있고, 수도밖에서 온 이들도 있다. 나는 최단기간 내의 자신의 공작과 수개월후의 정치상황과, 눈앞의 고난된 환경과 향후 민족의 출로에 대해 깊은 검토를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들은 분발해야하며 동시에 협동심을 발휘하여 신시대의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


(중문판 원판과 달리 일어 번역판은 민생주의를 민주주의로 잘못 번역해두었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이를 고쳐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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