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1942.8.29)
최종 수정일: 2024년 8월 5일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조직 중 하나였던 중화민족반영미협회 (中華民族反英美協会) 에서 만든 아편전쟁사화 (鴉片戰爭史畫) 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려진 난징조약의 모습. 조약의 체결에 영국인은 크게 웃고있다.
1842년 8월 29일, 제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은 결국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난징조약을 통해 청은 항구를 개방하게 되었으며,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홍콩 섬을 영국에게 넘겨줘야 했고 관세자주권 또한 상실하게 되었다. 난징조약의 체결은 동시에 서양세력의 중국침략 신호탄이기도 했다.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중국은 수많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았고, 수 많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며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서양 세력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세력의 침략, 불평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난징조약 체결로 부터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민에게 난징조약으로부터 이러한 불평등해결까지 이어지는 백 여년의 세월은 수치스러운 백 년이었고 동시에 중국인민이 이러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백 년이기도 했다.
1942년 8월 29일은 난징조약의 체결로 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왕징웨이 정권은 아직 정식적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과 영국과 싸우는 일본의 동맹국이었고, 왕징웨이 정권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영미의 식민주의를 비판해왔다.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던 왕징웨이 정권에게 이러한 근대 중국침략의 상징과 같은 아편전쟁의 난징조약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1942년 8월부터, 각 지역으로 하여금 아편전쟁의 해악과, 이로 인해 체결된 난징조약의 해악에 대해 선전을 해왔다. 예를 들어 호북성에서는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아편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거리에서는 아편전쟁에 관한 연극, 영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연극이 이루어졌고, 지역 라디오 방송국은 아편전쟁사를 비롯한 영국의 중국침략사를 다루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수도 난징에서는 8월 29일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를 개최하기로 했다.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가 개최되었던 난징의 국민대회당.
아편전쟁 100년기념 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는 1942년 8월 29일 난징의 국민대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왕징웨이 정권 인사를 비롯한 5천여명의 대중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오후 3시, 대회의 개막이 선언된 후, 국가 제창을 비롯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후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였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날 왕징웨이의 훈시는 40분 가량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대회장에 배치된 대회의 로고모습. (아래는 재현도) 중앙에는 청천백일문양이 그려져있고, 그 주변으로 아편전쟁100년반영흥아대회라고 표시되어있다. 그리고 문양 위에는 3개의 화평반공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從不平等做到平等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오늘 우리는 난징에서 백년전의 소위 난징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먼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이를 왜 기념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이는 원수를 갚거나 원한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원수나 원한을 염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를 기념하는 것은 중국이 걸어나가야 할 하나의 대도를 밝히기 위함에 있다. 중국이 걸어나가야 할 대도를 지적한 이는 이전에도 있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은 이미 이를 지적한 바가 있었다. 만약 우리 중국인 모두가 손중산 선생이 지적한 바를 따랐다면 중국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기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은 유언에서, “나는 4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라고 말했다. 중국은 어째서 자유평등을 얻지 못했는가? 이는 중국이 불평등조약의 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평등조약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이는 분명하게 우리가 오늘 기념하고 있는, 100년 전 오늘,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부터이다. 난징조약은 어째서 체결되었는가? 이는 영국이 인도에서 만든 아편을 억지로 중국에 팔아먹으려 했고, 중국인은 그 과정에서 셀수 없이 많은 돈을 빼앗겼고 동시에 아편이라는 독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아편을 중국은 받아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꺾고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았을 뿐만 아니라, 광동,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의 개항을 얻어냈다.
이 다섯 항구의 개항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중국을 하나의 신체로 생각해보자. 여기서 이 다섯 항구의 개항은 마치 몸에 상처 5개를 낸 다음 그곳에서 혈액을 계속 빼내게 하고, 동시에 아편과 같은 독극물을 계속 받아드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개의 개항은 어떻게 이렇게 큰 해악이 되었는가, 이는 난징조약의 부속조약에서 영국인의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본래 치외법권은 공사와 같은 외교관에게만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일반 영국인은 모두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영국의 영토가 중국으로 연장되는 것과 같은 것 으로 이는 정치상으로는 치외법권이 존재하고, 군사상으로는 군함의 정박, 군대수송의 근거지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외법권이라는 보장속에서 경제침략은 이루어졌고, 영국인들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난징조약 체결일은 곧 중국이 차식민지의 지위로 떨어진 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영국은 여러 조약의 체결과 최혜국 대우를 적용시키며 타국이 어떠한 권한을 중국에서 획득 했을 때 이를 자신에게도 줄 것을 이야기했고, 이는 영국의 권한을 한층 더 확대하는 요소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난징조약은 요컨대 모든 불평등조약의 근간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조약은 그 근간 위에서 성립된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손중산 선생은 유촉에서 국민혁명의 목적이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것에 있음을 지적하고, 최대한 빠르게 이러한 불평등조약을 폐기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는 원한을 갚고 한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중국을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만들기 위한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실현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민중에 호소하여 민중을 궐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 이다. 난징조약이 서기 1842년에 체결 된후 8년이 지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의 난이 1864년 끝난 후 2년이 지난 서기 1866년, 손중산 선생이 탄생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확실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손중산 선생의 탄생 1년 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있었다. 영국은 당시 침략을 중국에서 이어나가고 있었고, 동시에 일본에서도 이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고, 28년이 지난 1894년에는 불평등조약을 폐지했다. 중국은 어떠했는가? 손중산 선생은 중불전쟁에서 중국이 패전한 해 (1885년을 의미.) 청조를 멸하고 민국을 창건할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이를 중요하게 받아드리는이가 없었고 대부분이 이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손중산 선생은 여러곳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했고, 청일전쟁에서의 패전 이후에야 호놀룰루에 중흥회를 창립하고, 1911년이 되어서야 1차혁명을 광동에서 일으킬 수 있었다. 중일양국이 선진과 낙오로 갈리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손중산 선생이 혁명을 일으키자 일본의 동지들은 이를 원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손중산 선생은 청일전쟁의 패배라는 환경속에서도 어째서 이러한 일본동지들의 원조를 받은 것일까? 일본의 동지들은 어째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이러한 중국의 혁명을 지원했는가?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삼국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촉의 유비는 오가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죽인 것에 분격하여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백제성에서 분개하며 죽었다.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이어 나라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오와 화친을 맺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충칭방면의 인사들이 본다면 절대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촉은 사천과 관중만을 얻고, 호북과 호남을 잃었다. 영토는 반토막이 난 것이다. 게다가 유비가 아꼈던 관우는 오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조조에게 갔다. 유비는 이러한 부끄러움 속에 설욕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나라와 화친을 한 제갈량의 모습은 충칭 방면의 인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뿌리 깊은 한간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제갈공명은 이러한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갈량은 천하의 재앙이 위에 있는 것이지 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위를 거부하는 오와는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하여 오와 촉이 원수 관계에 있으면 천하를 통일하기는커녕, 결국에는 양쪽 모두가 멸망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를 알았기 때문에 의연하게 오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었고, 이 덕에 남만을 정벌하고 북벌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이을 사람이 없어 결국 촉은 망했지만, 그가 살아있었을 때 촉은 매우 약했는데도 강적인 위와 맞설 수 있었다. 위나라가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 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대회식장의 모습.
영국은 인도를 병탄하고 남양을 석권한 뒤, 그 욕심을 키워 동아 전체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중일 양국은 어떠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형제애로써 서로 굳게 걸어 잠군 문을 열고 함께 외부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했다. 일본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대적을 막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중국은 비록 낙후되었지만, 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오와 촉이 대업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악연을 잊고, 새로이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이 일본의 원조를 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고, 일본의 동지들이 손중산 선생을 도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중산 선생의 이러한 의지는 매우 확고하여 아무리 좌절해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손중산 선생의 의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민국 6 (1917) 년 저술된 《중국존망문제 (中國存亡問題) 》라 할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은 이책에서 영국은 인도가 없으면 그저 3등국에 불과하다는 것, 영국은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영국은 자신과 대립하는 강대국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점, 영국은 자신과 대립하는 모든 국가들을 포섭하고 선동하여 서로 싸우게 하고 자신은 이들 사이서 편안하게 앉아서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따라서 손중산 선생의 결론은 영제국이 타도되지 않으면 세계는 평화의 소망을 이룰 수 없고, 중국의 자유평등도 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손중산 선생은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존망과 안위를 함께 하는 관계로, 일본이 없으면 중국이 없고, 중국이 없으면 또 일본이 없다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양국이 백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국 사이에 조금도 거리를 두어선 안된다. ”라고 목소리를 높혀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때가 당시 소위 21개조 요구로부터 2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있었고, 당시 일본 상품 배척을 제창해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손중산 선생은 의연하게 이러한 주장을 하며, 중국이 가야할 길을 이야기했다. 이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이며, 이는 중국이 나아가야할 유일한 대도다.
손중산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면, 국민혁명군에 힘을 다할 때부터, 돌아가시기 직전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강연하기 까지 40년간, 동아에 대한 방침, 중일관계에 대한 방침은 시종일관 같았고, 그 주장에는 모두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40년간 중일간의 분규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손중산 선생은 이러한 분규에 늘 심통으로 우려해왔던 것이다. 또한 항상 중일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했고, 결코 이를 역전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남은 일생을 국민혁명에 대한 충성과 국부 손중산 선생에 대한 충성을 근본으로 하여 살아가려 한다.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곡해하여 이용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중산 선생은 동아신질서 건설이 제창되기 전에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동아신질서 건설의 구호의 등장은 이전 중국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를 일본도 제창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이상이 점차 실현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년 전 오늘 체결된 소위 난징조약은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폐지되어 이미 그 효력이 멈추게 되었지만, 오늘 우리들은 이것이 누구에 의해 멈추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과연 중국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일본의 육해공군 없이는 난징조약의 효력은 여전히 중국의 머리 위를 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오늘 이를 아주 크게 반성해야한다. 중국은 오늘부터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며 왜 일본과 협력해야하는지, 어째서 대동아전쟁을 완수해야하는 지를 스스로 반성해야한다.
물질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정신력에 대해 논해보자. 중국에는 4억의 아직도 무너지지 않은 정신, 4800년의 역사속에서 만들어진 정신력과 가장 풍부한 인적 자원이 있다. 중국은 이전처럼 교만해져서는 안되고, 지금과 같이 자포자기 해서도 안된다. 중국은 동아 건설의 책임을 분담하여 중국을 구하고, 동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 말로 중국이 가야할 길이며, 유일한 대도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세력은 이제 이전과 같이 동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영국의 세력이 영원히 동아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인도의 독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자유평등과 인도의 독립은 감정상, 이해상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지사들은 지금도 동포들로 하여금 독립을 지도하고 분투하고 있고 영국은 이를 막으려 흉악한 본심과 수단을 모두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충칭방면의 인사들은 항상 영국에 의존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이 인도에 대해 압력을 완전히 줄 수 없는 현 상황을 알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커다란 모순이며 동시에 우스운 꼴이라 할 수 있다. 어째서 동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일본과 협력하고, 동아를 보위하여 스스로를 구하고 인도를 구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인가? 충칭의 이들은 손중산 선생을 망각하고 있지 않다면 진심으로써 손중산 선생께서 지시한 일대 노선을 향해 돌진해 나가야 한다. 이는 중국이 진정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대 노선이며 유일한 대도이기 때문이다.
일본뉴스 119호에 묘사된 하얀색 정장을 입고 연설하는 왕징웨이의 모습. 왕징웨이는 그의 스승 쑨원과 그의 라이벌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표준중국어에 서툴어 방언투가 나는 어색한 모습으로 연설을 하였고, 이때문에 이를 잘 이해 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현대 중국인조차도)
일본 뉴스 119호 (1942.9.15) 에서는 왕징웨이의 본 대회에서의 연설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는 왕징웨이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과, 공개된 훈시의 내용이 전체적인 내용면에서는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문자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알아야하는 것은, 이는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기념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기념의 의미는, 바로 중국이 지금 따라야할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기념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정무에서는 대아시아주의를 마땅히 받아드려야하고, 이는 우리의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마음으로 단결한다면, 손중산 선생이 지시한 노선을 따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건설할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중화를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동아를 보위할 수 있을 것이다! ""所以今天紀念的意思,真正要明白的,就不是什麼報仇雪恨。今天紀念的意思是什麼呢?紀念的意思呢,就是指示出一條,中國現在應該走的道路,這個才是紀念性意思。應見到是,在政務,應該以大亞洲主義為事,這個就是我們的真自由。現在所怕的,我們人人一心,不肯一條心。如果大家集中一條心,往孫先生所指定的路來走,我們一定能夠建立大東亞戰爭!我們一定能夠興復中華!我們一定能夠保衛東亞!" -일본뉴스 119호에서의 왕징웨이 연설 원문
왕징웨이의 실제 연설과 위에서 공개된 훈시의 내용은 이처럼 일정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왕징웨이의 실제 연설과 공보를 비롯한 대외에 게시되는 내용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징웨이의 연설은 위에서 이야기 한것 처럼 방언으로 이루어졌고, 앞에서 본것 처럼 40분이나 연설이 진행된 만큼, 내용 또한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왕징웨이 정권측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연설을 대외에 공개되는 과정에서 최대한 연설을 한 왕징웨이의 취지는 살리되, 일반 민중들이 읽기 쉽도록 일종의 정제과정을 거쳤다. 즉, 공문의 내용과 실제 연설의 내용은 그 내용과 취지는 사실상 같으나, 문자상의 표현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의 훈시 내용은 왕징웨이 정권의 외교공문 (外交公文) 72호를 반영한것으로, 본 훈시의 내용을 담은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과 1942년 8월 30일, 대회 다음날 발행된 중화일보(中華日報) 나 중보 (中報) 와 같은신문언론보도에서도 이때문에 외교공문측의 정제된 발언을 담았지, 위와 같은 연설 원문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러한 왕징웨이의 연설을 보도했던 일본뉴스도, 이러한 공문에 기반한 내용을 자막으로 써넣었지, 연설 원문의 내용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따라서 위의 나타난 영상과 같이 특수하게 드러나는 일부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위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연설 원문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왕징웨이의 글에는 이러한 특징이 있음을 알고 읽을 필요가 있다.
왕징웨이의 연설이 끝난 이후에는 린바이셩 (林柏生) 선전부장은 대회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편전쟁 100년기념 반영흥아대회 대회선언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大會宣言)
본 대회는 난징조약 100주년이라는 침통한 기념일에 청년학생들, 청년군인들, 청년학도들, 청년농민들, 청년공인들, 청년 상인들 및 각 기관 각 단체의 공작인원들은 우엄하고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영도자의 연설을 경청하고, 중국의 부흥, 동아보위의 대계 및 우리 동포, 우리 동아민족이 가하고 있는 노력에 대해 적절한 논의를 독려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백년 이래 동아가 혼란스러운 이유, 중국이 차식민지로 전락한 이유가 첫째로는 영미제국주의의 침략, 둘째는 중국의 내정이 불완전했기 때문, 셋째는 동아민족이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 임을 알게 되었다.
중일합작과 동아의 공동보위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국민혁명의 근본방침으로 직접 정한 것으로, 과거에는 여러 결절로 인해 중단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중일 양대민족은 전쟁이라는 피를 흘리는 경험을 통해 깨닫고 다시 손을 잡았다. 우리 영도자가 제창한 화평반공건국운동을 통해 국민혁명의 기본적 근본은 회복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영미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를 통해 동아해방은 다시 전개되었고, 민족공존이라는 광명스러운 대도는 작년 봄의 동아연맹운동의 발전, 이번 새해의 신국민운동요강의 반포를 통해 대내외의 역량 쇄신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중화의 부흥, 동아보위라는 중대한 임무를 위해 우리는 침통한 마음으로 100년전의 난징조약을 기념한다. 우리는 모든 마음을 다하여 충성하여 국부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받들고 영도자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분투하여 대동아전쟁에 헌신해 중국의 건설사명을 완수하고 동아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 부흥시켜야 하고, 우리는 동아의 화평을 수호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모두 일어나주십시오) 다음과 같이 크게 외치고자 한다 :
영미침략주의를 타도하자!
打倒英美侵略主義!
대동아전쟁에 협력하자!
協力大東亞戰爭!
중화를 부흥시키자!
興復中華!
동아를 보위하자!
保衛東亞!
영도자 만세!
領袖萬歲!
중화민국 만세!
中華民國萬歲!
동아연맹 만세! 만세! 만세!
東亞聯盟萬歲! 萬歲! 萬歲!
( 볼드체로 표기된 부분은 일본뉴스 119호에서 린바이셩이 읽은 부분이다. 괄호는 원문에는 없고 린바이셩이 바로 밑의 구호를 외치기 위해 추가적으로 언급한 내용이다.)
중화민국 만세! 를 외치고 있는 린바이셩의 모습. 여기서도 일본뉴스는 실제 린바이셩의 발언과는 다른 자막을 넣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첫구호인 '영미침략주의를 타도하자' 라는 린바이셩의 말에 일본뉴스는 '대동아정신을 발전시키자' 라는 자막을 넣었다.
연설에서 왕징웨이는 이 대회의 '기념' 목적이 영국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나, 영국에게 쌓인 원한을 푸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본 대회의 '기념' 목적이 이러한 치욕을 기억함으로써 자유평등, 불평등조약의 폐지를 위해 중국이 나아가야할 길은 역시 중일합작을 통한 화평의 건설과 이를 통한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있음을 다시 한번 알게하는 것 에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연설에서는 , 직접적으로 영국을 비난하기보다, 여러 이유를 제시하며 영국제국주의가 나쁜이유, 영국 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불평등조약 폐지 시도는 영국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등을 찾기 위한 '당연한' 시도라 이야기했다.
연설에서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정권을 촉과 제갈량의 모습으로, 유비를 쑨원에 비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동맹을 맺은 일본을 오나라에, 영국제국주의와 여기에 함께하는 충칭을 '재앙' 과 같은 위나라의 모습에 비유했다. 이러한 삼국지까지 동원한 왕징웨이측의 시도는, 자신과 자신의 정권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시도였다. 또한 왕징웨이는 연설에서 "누가 난징조약을 없앨 수 있게 했는가?" 를 생각해보라 이야기하면서 일본과 동맹하고 있는 자신의 정권이 한 선택이 합당함을 정당화 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왕징웨이는 연설에서 "쑨원의 뜻을 왜곡할 생각은 전혀없다" 라고 이야기했지만, 대중들은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와 일본의 동아신질서, 대동아공영권을 연결시키려는 왕징웨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왕징웨이가 같지 않은 것을 억지로 연결시켜 오히려 왕징웨이가 쑨원의 뜻을 왜곡하고 있다 생각했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사상과 민중들의 생각은 괴리가 존재했었고, 이런 기본 사상에서 부터 괴리가 존재했기에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민중들로 부터 제대로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출처]
중화일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2.08.30/mode/2up
중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bao-nanjing-1942.08.30
매일신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아편전쟁사화 (鴉片戰爭史畫)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NLC416-02jh005019-14774_%E4%B8%AD%E8%8B%B1%E7%BE%8E%E9%97%9C%E4%BF%82%E7%95%A5%E5%8F%B2.pdf
왕징웨이의 연설원문내용 : https://ek21.com/news/life/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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