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회의 왕징웨이 연설문 (1943.11.5)
본문은 일본에서 1943년 발행된 대동아회의의 각국대표들의 연설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아시아는 하나가 되리 (アジアは一つなり) 를 번역한 것입니다.
세계역사상 위대한 의미를 가지는 대동아회의가 오늘 맹방 일본의 수도에서 거행된것에 대해,
도죠 총리대신 각하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분하게 되었습니다.
미영(미국과 영국) 의 동아침략은 이미 백년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의 중대한 시기에 있어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 경제문화등 각방면의 힘의 의지해야 처음부터 미영의 침략야심을 억제하고, 동아를 보전하며, 영미를 분쇄하는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최근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미영의 동아침략세력은 분쇄되어, 동태평양과 남양일대에서 미영의 육해군 근무지는 일본 육해군에 의해 격파, 점령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동방도의(東方道義)의 정신의 근거하여 동아국가의 민족들의 공존공영을 추구하고 그들의 독립과 자주를 원조하고, 그들의 애국적 희망을 달성시키고, 지지하며, 각지의 부서들로 하여금 최대의 노력을 통해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숭고한 일본의 위대한 포부와 그의 빛나는 기적에 삼가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동시에 함께 우호관계이 있는 만주국, 태국, 신흥 버마국, 필리핀과 자유인도정부가 각각의 굳을 결심과 휘어지지 않는 노력에 따라 대동아전쟁과 대동아건설의 책임을 나누고 있는것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중화민국이 동아의 한측의 날개로서, 지금 이자리 이 기회를 빌어,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침에 대한 국민정부의 결심과 노력에 대해 말씀을 말씀드리는 것은 순순히 추쾌의 지경에 달려있습니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님 일생의 포부는, 중국과 동아로하여금 미영침략세력을 분쇄시켜 그들의 독립과 자주를 완성시키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포부에 근거해, 그는서거에 이르는 날까지 약 40년간, 필생분투를 계속해왔습니다.
그가 서거하기 3개월전, 일본의 고베에서 두번에 걸쳐 연설을 한적이 있었고,
민국 13년 (1924년) 11월 28일에 열렸던 제1회 연설에서 그가 이야기 한것은 대아시아주의였습니다. 연설중에서
"우리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백년이래 영국의 침략을 받고 갈취당하기에 이르러 거의 하나로 완전한 독립국가의 존재를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 쇠퇴가극에 달했을때, 돌연 전환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유신이었고, 일본의 유신만이 일본이 아시아에서 선진국이 될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동시에 아시아 부흥의 출발점이된 것이었다 ,아시아 각국은 당연 선진국 일본과 함꼐 동심협력해, 동방의 왕도적 문화로 하여금 서양의 패권주의적 문화를 물리쳐 미영의 침략세력을 완전히 구축하고 아시아 각국의 단결에 따라 아시아 각국의 독립자주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되는것 이다. 이렇게 쇠퇴하는 아시아 전체를 부흥으로 이끄는것이 가능하다"
라고 연설했습니다.
두번째의 연설은 같은해 같은날의 연설이었는데,
연설에서
" 일본은 당연히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또 그안에 "일지(支) 양국은 형제와 같다. 일본은 일찍이 불평등한 속박을 타파하고, 동방의 선진국, 세계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은 현재,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얻으려는 것이며, 일본의 충분한 원조를 갈망하고 있는것이다, 중국의 해방은 곧 동아의 해방이다"
이상 두차례에 걸친 연설은 손중산 선생 일생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고, 이후 국부 손중산 선생은 병세의 영향으로 다음해 3월 12일 베이징에서 서거하게 되었지만, 서거의 당시 유지를 동지들에게 남겼고, 동지들은 그의 유지에 따라 계속 분투하고 , 그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것은 손중산 손생님의 서거 이후 그 유지가 현실화 될 가능성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일지 (일본과 중국) 의 관계는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민국26년 (1937)년 7월의 사변이 발생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님이 서거한지 12년이 지난 후의 일이였습니다.
당시 일지의 관계가 결렬되는 바, 미영은 호기를 맞이했고, 양측의 관계를 이용해 일지사변의 연장을 부추겼습니다.
나와 동지들은 국부의 유지가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단 것을 보고, 일지관계가 날로 악화다는것을 보고, 통심이 극에 이르게 되고,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일본정부는 사변을 최단기간에 중단해야할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그안에서 일본의 목적으로 중국의 멸망이 아닌 중국의 부흥에 두고, 일본은 중국이 동아건설의 책임을 나눌것을 기대하고, 일본이 중국을 원조할 것을 결심하고, 그들의 독립자주의 소망을 달성하게 하려 하는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나와 동지들은 일본이 그러한 진의를 선포한것을 듣고, 일지관계의 호전에 국부의 유지를 완성시키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충칭정권에 대항하여 항전의중지(抗戦地棄) 와 화평의회복(和平恢復)을 이야기했지만, 듣지않으려는 모습에 나와 동지들은 화평운동을 위해 분주하게 뛰기로 결정한것 입니다.
얼마안있어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여 정정당당하게 일지의 제휴와 동아의 부흥의 최대의 노력을 하게 된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대로, 미영은 일지사변에 대해 항상 도발과 이간질에 노력하여, 사변의 연장을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국민정부 환도 이후 더더욱 강화되었고, 미영은 충칭에게 항전의 강화와 평화의 저지등을 부추기는 수단을 강구해왔습니다.
그후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이르러, 미영은 그동안의 자신들이 구축한 동아의 세력이 사라질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충칭의 분자들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는 방도를 강화시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영미의 이러한 계획이 물을 필요 없이 실패에 이르렀다고 단정지을 순서에
이르렀습니다.
충칭의 장사꾼들과 민중이 국부 손중산 선생님의 가르침에 귀의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올해 1월 9일이후 중국에 대해 빠르게 조계를 반환하고, 치외법권을 철회하고, 특히 최근의 일화동맹조약을 통해 일화기본조약과 동시에 각종 부속 문서를 폐기했습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가 이미 광명을 찾게된것입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일본에 갈망하셨던, 중국을 돕고, 풀평등 조약을 폐기하는 일이 이미 현실화 된것입니다.
가령 영미가 어떤식으로든 유혹해 이를 저지 한다고 하더라도, 충칭 민중의 각성을 막을 수는 없게 되었기에, 충칭은 다른날 반드시, 미영에 의존하는것은 동아에 반역하는것이 되고, 동시에 국부 손중산 선생에게도 반역하는 행위가 된다는것을 깨닫게 될것임을, 민중도 장사꾼들도 깨닫게 될 것임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있어, 오로지 기본의 방침에 기초해 노력을 거듭하고, 한편으로는 충칭의 상인들과 민중들의 각성을 촉진시키며, 통일을 완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정치력을 얻는 지방으로 하여금 하나의 모범지방을 수립하는것으로, 그 공작은 다음의 3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상의 숙정, 둘째는 치안의 보장, 셋째는 생산의 증가로, 소위 사상의 숙정은 미영의 개인주의, 공리주의적 사상을 철저히 쓸어버리고, 동방도의적 정신으로 바꾸고, 동아인의 자각심으로 동아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일심일덕, 동아인의 공존공영에 분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치안의 보장은, 즉 대동아전쟁의 후방인 중국의 지배지역에서의 치안을 확보해 맹방전선의 병사들로 하여금 후방의 근심을 없애고,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대를 전선으로 수송하여 맹방장사의 노고를 나누는데에 있습니다.
셋째, 소위 생산의 증가는 일체의 경제계획과 재정계서에 무게를 두고 총력결전의 역량을 증가시키는것입니다. 다만 생산증가라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소비절약, 장물이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것입니다.
이상의 3가지는 국민정부가 대동아전쟁에 협력하게 하는 공작의 중점으로서, 동시에 국민정부가 체득한 대동아전쟁, 즉 대동아건설의 의미는 전쟁중의 동감동고(同甘共苦), 동생공사(同生共死)를 결심하고, 밖으로는 공동의 적인 영미를 제패하고, 그의 침략세력을 분쇄하고, 그들의 침략기도를 소멸시키는것이고, 속으로는 각고공부, 용왕매진의 정신으로 동아동포들과 함께 동심협력해 동아의 건설을 착실히 하는데에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에 대해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의 날개가 향하는곳 은 승리고, 대동아건설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우리의 날개가 향하는곳은 공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동아각국은 자국을 사랑하고, 서로의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동아를 사랑해야합니다.
중국, 우리가 모토로 삼아야할 것은 중화의 부흥, 동아의 보위이며, 중국이 독립자주를 획득했을때에야 동아보위의 책임을 나누는 능력이 생기며, 동시에 동아의 보위를 얻게되며, 중국의 자주독립이 보장받을 수 있는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 자신의 국가를 자주독립의 국가로 만들고, 또한 자국을 동아의 강력한 분자(分子)로 만드는것을 필요로 하기에, 동아각국은 각국의 본연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자주를 확보해야하고, 독립자주를 위해 분중히 하는것이 필요합니다.
동아 각국가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동심협력, 공동의 목적을 향해 공존공영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이미 그 빛나는 독립자주를 세계에서 확립했지만, 최근에는 동아각국을 방문해 그들의 독립자주를 획득하게 하고, 원조를 아끼지 않고, 일치고결시켜 공동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을 하겠다는 그 모습은 말로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저는 정치상의 독립자주를 얻은 후에 만약 외교상의 방침이 일치하고, 군사상의 대적관계가 일치한다면 공동의 목적에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문화면에서 선진국인 일본이 확실히 자기의 문화를 기초로하고, 동방의 문화를 고양시켜고, 세계문화를 흡수하는 3대 요점을 성취한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탄복하기 나름입니다.
저는 신흥국가들이 함께 격려, 노력, 전진할것이라는 점을 깊이 믿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은 특히 전력으로문화의 부흥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하며 문화의 융합과 창조는 각민족을 친밀하게 하고 단결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도와 중국의 양만족간에는 일찍이 불교의 도입에 의해 사상교류를 도모하며 동방문화사에 이미 획을 그었습니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동아 각국가는 호예의 기조에 근거해, 장단상보, 유무상통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맹방을 편리하게 할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합니다.
예를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목화는 수많은 이웃의 수요가 있고, 남방각지의 가솔린,고무, 주석등도 마찬가지로 이웃국가에 공급할 수 있는것으로서, 우리가 서로 돕는다면, 반드시 일절에 자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것입니다.
영미가 과거에 해왔던 착취정책을 철저히 소멸하고 새롭게 하나의 인도(人道)로 합치되는 신천지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상 말한것을 실현할수 있게 된다면 동아 각국의 민족의 행복은 무한히 증진되어 동아공영의 확실한 보장을 획득하게 되는것에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에 있어서의 기초를 만들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광명은 실로 우리의 앞길에 놓여있고, 오로지 우리 동아각국의 민족이 함꼐 손을잡고 그곳에 도달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것은, 타이, 버마, 필리핀 각국, 그리고 일본점령하에 있는 영국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역내에 있는 중국인은 총 7-800만명을 넘지않으며,
이러한 중국재류민은 그 소재국정부의 우대를 받아 소재국 인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하고, 교통의 개척과 자원의 개발에 대해 심혈과 열땀을 쏟고있고, 그 심혈과 열땀은 소재국 인민과의 결합으로 이어져 동아인의 자각이 커지는 추진력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인민은 결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있어 화평, 신실, 노동으로 소박하게 소재국 인민과 동거동락하며 서로의 장점을 찾아 결점을 보완하며 이미 분리할 수 없는 우호협력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관계가 이번 대동아전쟁에서 더욱 단련되고 단결되기에 이르게 됨을 믿음과 동시에, 이 관계가 대동아공영에 공헌하는 바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박수갈채)
[일어 원문] '아시아는 하나가되리 (アジアは一つなり)' 의 디지털 아카이브본
: https://dl.ndl.go.jp/info:ndljp/pid/126303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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