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① 만주중앙은행 (만주국)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만주국 - 만주중앙은행(滿洲中央銀行)
신징의 만주중앙은행 신 본점 건물이 그려진 엽서. 이 건물은 1938년 3월, 만주국의 수도 신징의 대동광장 앞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지상 4층, 지하 2층로, 건물 정면의 10개의 그리스식 기둥이 특징이다. (현재 이자리에는 중국인민은행 장춘시 지점이 위치해있다.) 만주중앙은행 건물은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정동궈 (鄭洞國, 정동국 ) 국민당군 사령관이 장춘 전투에서 공산당에게 투항한 곳이기도 하다.
만주중앙은행은, 1932년 7월 1일 설립된 만주국의 중앙은행이다. 만주국이 관동군의 작품이었듯, 만주중앙은행 역시 만주국의 몸통이었던 관동군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되지 않은 1932년 3월 15일, 관동군은 만주중앙은행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만주중앙은행 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국 총무장관이었던 코무이 도쿠조 (駒井徳三) 는 일본의 자본출자와 이전부터 만주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구 봉천군벌 자본이었던 동3성관은호(東三省官銀號), 변업은행(邊業銀行), 흑룡강관은호(黑龍江官銀號), 길림영형관은전호(吉林永衡官銀銭號)까지 4개의 은행을 합쳐서 만주중앙은행을 설립하려 했다.
만주중앙은행 초기에 사용되었던 본점건물. (옛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
1932년 6월 11일 만주중앙은행법(滿洲中央銀行法, 大同元年6月11日教令第26號 대동 원년 6월11일교령제26호) 과 만주중앙은행조직변법 (滿洲中央銀行組織辦法) 을 공포하여 만주중앙은행은 만주국의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출자된 3천만엔을 초기자금으로 하여 주식을 발행했다.
그리고 1932년 7월 1일, 개업과 동시에 동3성관은호, 변업은행, 흑룡강관은호, 길림영형관은전호를 통합하고 이곳의 자본까지 통합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8천만엔의 초기자본금을 가진 상태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은행의 본관은 수도 신경 북대로에 있는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개업과 동시에 128개의 지점도 동시에 영업을 시작했다. 만주국이 성립된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만주중앙은행은 일본과 중국대륙에도 지점을 설치하며 점점 성장하게 된다.
만주중앙은행의 성립과정. 만주중앙은행은 일본자본과 일본이 점령한 구 봉천군벌의 자본의 결과물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혼란스럽게 유통되고 있는 이전 중화민국 / 봉천군벌의 화폐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법폐개혁 전이었기에 만주에서는 1. 봉천군벌소유 은행 '들' 이 발행한 화폐. 2. 기타지역은행'들'에서 발행한 화폐 3. 청, 중화민국 시기 발행된 은동전 (銀圓) 들 등 너무나 많은 종류의 화폐가 화폐가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이러한 화폐들의 남발을 막기 위해 구화폐정리변법(舊貨幣整理辦法) 을 통해 이전에 만주지역에서 봉천군벌의 은행들이 유통하고 있던 은행들을 회수, 교환하게 했다. 교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1934년의 시점에서는 93%, 교환이 종료되던 1935년의 시점에는 97%가 회수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뤄진 구화폐 → 만주국 원으로의 교환. 화폐종류가 너무나 많이 혼용되고 있었기에 각 화폐마다 교환비율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초기에는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자신들의 만주국 원과 중화민국에서 주로 통용되던 은동전 은원(銀圓)과 1:1의 교환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1934년, 미국정부에서 은 매입법이 통과되면서 세계 은값이 급상승하게 되자, 만주중앙은행은 은본위제도를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의 법폐개혁이 이루어진 원인중 하나도 이 미국의 은구매법이었다.) 만주국은 이에 1935년 4월,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금본위제도를 도입하려하며,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일만 환율 등가 유지에 관한 성명 (満日為替相場等価維持に関する声明)'을 11월 4일에 발표하면서 만주국 원과 일본엔은 동가가 되었다. 즉 만주국 1원 = 일본 1엔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중앙은행이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주중앙은행은 세계최초로 '통화 스왑' 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만주국의 만주국 원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은행의 지폐와 조선은행의 조선은행권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1935년 11월 4일부로 관리통화제도(금본위제도와 일본엔과의 환율등가)를 도입하면서 조선은행권이 퇴출되게 되면서 조선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은 예금협정을 맺고 만주중앙은행은 조선은행권을 회수한 만큼 조선은행 앞의 예금을 늘리고, 조선은행은 만주중앙은행 예금액만큼 화폐발행액을 줄였다.
거래의 목적은 현재의 통화스왑과는 달랐지만 두 중앙은행의 계약으로 자산과 부채가 연동되어 움직였다는 점은 현재의 통화 스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주중앙은행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바로 전날이었던 1935년 11월 3일,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은본위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의 화폐는 초기에는 일본의 조폐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만주국의 조폐공장에서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만주국 말기의 일이었다. 동전의 경우 옛 봉천성 조폐창을 이용하려했으나, 설비가 오래되고 이조차도 만주사변 과정에서 방치되면서 만주국은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신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1932년 6월 만들어진 '화폐법'에 따르면 만주국 원은 4가지의 단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1원(圓) = 10각(角) = 100분 (分) = 1,000리 (厘)
원/각/분/리 라는 현재 중국대륙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십진법 체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화폐법에 따르면 화폐의 종류는 9종류로 규정이 되어있다.
100원 / 10원 / 5원 / 1원 / 5각 = 지폐
1각 / 5분 = 백동 동전
1분 / 5리 = 청동 동전
5종의 지폐, 4종의 동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전의 경우 백동과 청동을 사용하는 동전을 구분하였다.
만주중앙은행의 첫 화폐 시리즈. 종류는 9가지지만, 여러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처음으로 등장한 화폐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요소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오색기와 모란꽃, 푸이의 집무실이었던 근민루 (勤民樓)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5원을 제외하면 지폐의 색도 파란색으로 모두 똑같았다.) 이 시기 발행된 화폐는 일본의 화폐 보다는 중국 화폐의 느낌을 살리려 했는데, 이는 의도된 것으로 만주국 = 일본의 꼭두각시 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행시기를 생각해보면, 화폐법 제정 (1932.6) 으로 부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난이후에 화폐가 발행되었다. 가장 늦게 나온 1분짜리 동전이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1년 2개월, 가장 빠른 5각짜리 지폐가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발행이 되었다. 그렇다면 화폐법 제정 - 신화폐 발행 사이에 적어도 3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이 기간에는 어떻게 화폐를 처리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이전에 사용되던 동삼성관은호 지폐에 '만주중앙은행' 이라는 도장을 찍어 사용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국가들이 전시에 우표나 지폐에 도장을 찍어 임시적으로 사용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에다가 '만주중앙은행' 이라고 적혀있다.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는 만주국에서 발행될 1원짜리 화폐와 가치도 완전히 동일했고 발행량도 많았기에 임시지폐로 선정되었다.
만주국 측에서는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이용해 1원권, 5원권, 10원권 이렇게 3종류의 지폐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원과 10원 두개 종류만 만들어지고 5원권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2차, 3차시리즈의 등장
이른바 '乙시리즈' 라 불리는 만주중앙은행 2차발행권. (이시기 동전은 1차 발행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35년 부터는 일본 본토의 지폐의 형태와 비슷해진 새로운 2차 발행권들이 등장했다. 1차발행권이 모두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다양성이 커졌다. 공자, 맹자, 그리고 중화권에서 재물의 신으로 취급되는 조공명처럼 중화권의 고전시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만주국의 국장을 지폐의 전면에 배치했다. 뒷면 또한 이전의 화폐법 내용만 고작 적혀있던 모습에서 만주중앙은행의 인장과 함께 만주국 국무원, 만주중앙은행 건물등 주요 건물들이나 풍경을 배치하는등 이전과 차이를 두었다. 하지만 화폐법과 관련된 내용은 이전처럼 계속 존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고액권인 100원짜리의 뒷면에는 양떼들이 그려져있는데, 이때문에 당대 만주국에서는 돈이 많다라는 뜻으로 "양을 많이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1원짜리와 5각짜리의 장원과 문방은, 어디의 장원과 문방을 가져온것인지 알기 어렵다. (일본과 중화권 인터넷에서도 이 두곳이 어디인지 의문을 가지는 글들이 있었다. 장원의 경우 신징의 만주국 황궁의 장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 일본과 만주국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속 자원부족이 시작되면서 동전의 재료가 달라지게 된다. 1939년, 화폐법을 개정하여 '동전의 재료 규정'을 삭제하여 이전의 백동 / 청동이 아니라도 동전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자원부족속에서 동전들은 새로운 재료들로 제작되었다.
1각 : 백동 → 백동(2차) → 알루미늄
5분 : 백동 → 알루미늄
1분 : 청동 → 알루미늄
5리 : 청동 → 제작중지 (알루미늄 동전이 계획되었었음)
모든 동전이 제조가 용이하고 단가가 저렴한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금액이 큰 1각 동전의 경우 2대 동전이 초기에는 이전과 같이 백동으로 발행되었으나, 8개월만에 새로운 도안과 함께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5리 동전의 경우 본래 청동버전과 이를 대체할 알루미늄버전이 계획되었으나 발행이 되지 않고, 5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만주국의 2차 발행 동전들. 재료가 모두 알루미늄으로 바뀌었고 1각짜리 동전은 백동화가 등장했다가 알루미늄화로 바뀌었고 5리 동전은 사라졌다.
동전까지 신동전으로 바뀐 이후, 5각 지폐가 1941년 1차례 변화한 것 말고는 (이것도 도안의 변화가 아닌 인쇄색의 변경에 가까웠다) 1944년까지 계속하여 쓰이게 된다. 1944년에는 동전과 지폐가 모두 바뀌게 되어 3차 변화를 겪게 된다. 동전의 경우, 동전의 두께가 이전보다 얇아졌는데 (예로 1각 동전의 두께는 40%가 줄어들었다) , 이는 1944년 시점에서 태평양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일본에게 있어 알루미늄도 이제는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3차발행권 '丙시리즈' 의 모습. 1각(角) 지폐가 추가되었다.
3차 발행권에서는 지폐의 경우 전면의 경우에는 거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면의 경우 인쇄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후면의 그림이나 글씨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1각짜리 지폐가 추가되었다. 이는 1각짜리 동전에 발행되는 알루미늄을 절약하려 한 것으로, 1각짜리 지폐가 1944년 9월 발행되면서 1각짜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폐가 일본이 아닌 만주에서 직접 생산되기 시작했다. 본래는 일본에서 지폐를 발행하고 이를 선박을 통해 만주로 수송하였는데 (이 수송과정에서 부관연락선도 사용되었다.) 이 선박들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만주의 화폐를 더이상 일본에서 생산하는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각짜리 지폐만 만주에서 생산되었으나, 이후 생산이 확대되어 지폐에는 도안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쓰이며 이전처럼 "일본제조" 라고 적혀있으나 생산은 모두 만주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시점부터 만주에서 만들어진 지폐에는 특별한 기술이 숨어있는데, 또한 전쟁이 격화되면서, 연합국 충칭정부와 미국또한 만주국과 일본을 혼란시키기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 연합군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의 지폐를 위조해 항공기를 통해 일본 점령지에 살포했다. 만주국측에서는 이러한 위조지폐 살포를 통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내몽고에서만 생산되는 특별한 염료를 지폐에 사용해 이를 방지하려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만주중앙은행
태평양전쟁의 말기 1945년에 들어오면서, 만주국은 극심한 자원난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문에 화폐 발행에도 많은 변화가 등장하게 된다. 첫 째는 잉크- 용지의 변화다. 1945년에는 3차 시리즈와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른 잉크와 저품질 용지를 사용해 화폐를 제작했다. 이를 丙시리즈의 개조판이라고 하여 45년에 발행된 화폐들을 丙改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주중앙은행 1000원권. (실제로 발행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고액권의 발행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전시경제체제가 붕괴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고액권의 발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1000원권을 계획하고 실제 도안도 완성이 되었으나, 유통은 이뤄지지 못했다. 셋째는 동전에서 사용되는 알루미늄의 대체였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만주국은 1940년부터 동전에서 자원절감을 위해 알루미늄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1944년과 45년 시점에서는 이 알루미늄도 부족하게 되었다. (사실은 일본의 알루미늄 필요에 의해 만주국 또한 알루미늄을 공출해야했던 상황에 더 가깝다.)
이로 인해, 만주국에서는 동전 발행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루미늄을 대체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주국에서는 이를 위한 두가지 방법이 병행되었는데, 첫째는 지폐의 발행이다. 5분(分) 짜리 지폐를 새롭게 도입함으로서 동전 제조에 사용되는 자원을 아끼려 했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1. 동전을 대체할 지폐를 발행하기 (지폐는 1각 지폐와 마찬가지로 만주제국인쇄창에서 만들어졌다.)
둘째는 신소재를 이용한 동전의 발행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운 5분, 1분짜리 동전을 발행하게 된다. 도안은 1944년에 만들어진 3차 동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문제는 마그네사이트가 동전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그네사이트는 금속중에서도 매우 약한 금속이었기에 쉽게 부서지거나 형태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시기 마그네사이트로 만들어진 동전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전쟁 말기 부족한 환경속에서 부족한 기술속에서 이루어진 금속 제련의 결과, 더더욱 동전의 품질은 나빠졌다. 동전이 부서지는건 기본이요, 몇번만 부딪쳐도 글씨가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2. 새로운 재질로 동전을 만들기. 만주중앙은행은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이 동전을 만들었다.
당대 만주에서는 이 동전을 보고 도자기에 쓰이는 흙 도토(陶土)와 비슷한 색이나는 것을 보고 "흙으로 동전을 만든건가?"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만주중앙은행은 여기서 더나아가 실제로 "도자기 동전" 을 기획하기도 했다. 세라믹으로 코팅된, 마치 주방의 접시와 같은 재질의 동전을 기획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약해 이는 실제로 발행되진 못했다. (시제품을 중국대륙 지린성의 당안관 (檔案館)의 만주관련자료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5분 동전의 경우 백동에서 알루미늄으로, 알루미늄에서 마그네사이트로, 마그네사이트에서 지폐로, 혹은 도자기로, 기구한 운명을 겪은 셈이다.
만주국 붕괴 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의 운명
1945년 8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만주작전을 통해 관동군이 붕괴되면서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도 그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만주국 붕괴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 8월 20일, 소련군은 만주중앙은행을 장악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만주중앙은행이 사라진 소련군 치하에서도 만주국 원의 발행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가장 신용할 수 있는 화폐가 아이러니하게도 만주국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가 해방되면서 만주에는 다시 많은 화폐가 유입되었다. 국민정부의 법폐도 돌아왔고, 공산당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도, 소련군이 만주에서 자체발행한 군표도 만주에서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 절대다수가 이전까지 사용하고 있던 만주국 원에 비해서는 신용도가 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 (동북은행의 동북지역유통권) 과 만주중앙은행 원을 1:1 비율로 등가 교환하게 했다.
이후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이에 자신이 소유한 동북은행을 통해 만주국 원을 자신들의 화폐로 교환을 추진했다. 1946년 3월, 중국공산당은 만주국 원 : 동북은행지방유통권 원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도 만주국 원은 계속 유통되었는데, 이는 국민정부가 공산당이 동북은행권을 통해 만주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이전까지 만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국 원을 통해 동북은행권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이러한 만주국 원의 유지시도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국 원의 평가절하, 기간내 사용정책을 이용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만주국 원을 빨리 교환하게 해 대다수가 동북은행권으로 옛 만주국돈을 바꾸어버리면서, 국민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1947년 1월 15일부터 만주국 원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면서, 만주국 원은 발행 15년만에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출처]
김성진, 김상옥 「만주국의 지폐 변천과 지폐 도안의 특징」, 『통권 7호』, 2019
만주중앙은행 초대건물 사진 : https://weibo.com/ttarticle/p/show?id=2309404670405347770834
만주중앙건물 후대건물 사진 : https://www.gakushuin.ac.jp/univ/geore/research/2015a/sinkyo-manchuriancentralbank.html
만주중앙은행10년사 : https://dl.ndl.go.jp/pid/1276581
만주중앙은행 강덕4년판 : https://dl.ndl.go.jp/pid/1463670/1/11
만주중앙은행연혁사 별편부록(満洲中央銀行沿革史 別冊附録) : https://dl.ndl.go.jp/pid/1449899/1/10
만주국 원 - 만주중앙은행 일문판 / 중문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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