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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② 몽강은행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합자 - 몽강은행(蒙疆銀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도였던 장자커우에 위치한 몽강은행 본점의 모습.

몽강은행의 전신, 찰남은행 

몽강은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몽강은행의 전신이 되는 찰남은행(察南銀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은 차하얼(察哈尔)성, 쑤이위안(绥遠)성을 비롯 장자커우를 비롯한 내몽고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내몽고 지역에 친일성격을 띄는 자치정부들을 성립하게 된다. 1937년 8월 27일 장자커우를 점령하고 장자커우에 9월 4일에 찰남자치정부(察南自治政府) 를, 9월 13일에는 다퉁을 점령하고 10월 15일에는 진북자치정부(晋北自治政府) 를 설치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행정구역도 (1942). 진북정청 (晉北政廳) 과 찰남정청 (察南政廳) 은 옛 진북자치정부와 찰남자치정부가 자리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찰남자치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차하얼성의 상업전국을 장악하고, 이 상업전국을 개편하여 1937년 9월 27일 찰남은행 (察南銀行) 이라는 은행을 세웠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주도로 100만 위안(圓)의 자본을 가지고 설립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점령한 찰남을 비롯한 내몽고지역에서 국민정부의 법폐 & 공산당의 지폐에다가 일본이 점령하면서 조선은행, 만주중앙은행등에서 새로이 들어온 일본계열의 지폐 등등 무려 9개은행의 지폐들이 유통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중앙은행으로서, 1937년 10월 10일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찰남은행은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현지역에서 발행되고 있던 화폐를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찰남은행의 경우, 신 지폐를 발행하려 했으나, 그 여력이 부족해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미 한번 재사용과정을 거친,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다시한번' 재사용 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삼성관은호 1원 지폐 (원본) → 만주중앙은행이 임시사용함 (1차 재사용)→ 만주중앙은행에서 이걸 찰남은행에 주어 사용하게 함 (2차 재사용) . 맨처음동삼성관은호에 밑줄을 긋고 만주중앙은행 도장을 찍었고 거기에 또 밑줄을 긋고 찰남은행이 사용한 모습이다.

이 동삼성관은호 지폐는 중화민국 18년 (1929년) 에 처음만들어져서 사용되다가 만주중앙은행을 거쳐 (1932년) 찰남은행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1937년) 어떻게 보면 기구한 운명의 지폐라 할 수 있겠다.


찰남은행 생산지폐 (*는 실제발행되지는 못함)  
동삼성관은호 / 만주중앙은행임시권 → 찰남은행 1원(圓) / 10원
차하얼상업전국권 → 찰남은행 1원(圓)* / 20원* 

차하얼상업전국의 지폐를 재활용한 찰남은행 지폐. 견본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것으로 보아 이 지폐를 발행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 발행되지는 못했다.

《북지경제도설 쇼와15년 판(北支経済図説 昭和15年版) 》에 따르면, 찰남은행에서는 위의 사진처럼 다른 지폐도 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여력이 되지 않아 만주은행으로 부터 구 동삼성관은호 지폐를 개조한 지폐들만이 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찰남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찰남을 비롯한 몽강지역에서의 일본은행권 / 만주중앙은행권 / 찰남은행권을 제외한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긴급통화방위령(緊急通貨防衛令) 을 공포해 '20일'이라는 기간동안 그동안 사용하던 지폐들을 교환 / 회수하게 했다. 일본과 찰남측이 이러한 교환조치를 서두른데에는 당시 이지역에서 추산 천만 위안가량의 법폐, 공산당 지폐, 옛 군벌지폐등등 지폐가 너무나 남발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너무나 많이 유통되고 있는 지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교환 / 회수조치를 통해 이지역의 금융질서를 장악하고자 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수도인 장자커우, 그리고 진북자치정부의 다퉁, 그리고 몽골연맹자치정부의 후흐허트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북자치정부에서는 옛 산서성지폐에 정부도장을 찍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찰남은행권 또한 유통이 되고 있었다.


1937년 12월, 몽골연맹자치정부가 출범하고 진북-찰남-몽골연맹정부가 통합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찰남은행은 진북-찰남-몽골연맹지역 모두를 포괄할수 있게 '몽강은행'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확대 개편되게 되었다. 찰남은행이 개업 2달도 되지 않아 후에 서술하게 될 몽강은행으로 확대개편되버리면서 이 시기 만들어진 임시 찰남은행권은 발행 수도 많지 않을 분더러 대부분 회수과정을 거쳤기에 현재 찰남은행권은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다.)


이렇게 찰남은행은 2달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찰남은행권은 몽강은행이 생긴 이후에도 약 4달가량 더 사용되다가, 1938년 4월 몽강은행에서 신지폐 발행이 완료되면서 유통이 정지된다.


몽강은행의 설립, 몽강은행권(몽강권) 의 제작 


몽강은행의 성립과정. 몽강은행은 일본과 그 괴뢰정부들의 작품이었다.

몽강은행은 일본과 괴뢰정부의 작품에 가까웠다. 기존의 찰남은행에다가 1937년 11월 11일 결성된 몽골연합위원회를 구성하는 몽골연맹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가 각각 4천만 위안씩, 총 1억 2천만 위안을 모으고, 여기에 일본에서 출자된 600만 위안을 합쳐 1937년 11월 23일 설립되었다. 또한 당시 지역에서 영업중이던 찰남풍업은행(察南豊業銀行), 수원성은행의 몽강지점, 기동은행의 몽강지점을 통합해 1937년 12월 1일 장저커우의 고루서가(鼓楼西街) 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다퉁, 후흐허트등 몽강지역 뿐만 아니라 톈진이나 베이핑지역까지 주재원을 파견했다. 이후에는 이 지역들에 지점들을 건설하고, 도쿄에도 사무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초기 총재는 바오웨칭 (包悦慶,포열경) 이라는 이가 맡았고, 부총재는 일본인 야마다 모지(山田茂二) 가 맡았다. 하지만 1942년부터는 총재도 일본인이 하게 되는 등, 몽강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지배 속에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몽강은행은 설립 초기 약 한달가량은 이전의 찰남은행권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1938년 1월부터 새로운화폐가 발행되고 4월에 발행이 완전히 완료되면서 이전의 찰남은행권은 사용이 중지되고 회수가 되었다.


몽강은행은 초기 지폐 4종류 (1원, 5원, 10원, 100원) 과 동전4종류 (5각, 1각,5분, 1분) 를 발행했다. 지폐는 일본에서 인쇄가 이루어졌고, 동전의 경우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에서 발행한 동전을 공급받아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후 1938년 8월 16일, 5각 동전은 커우베이 조화창 (口北造貨倉) 에서 자체 제작해 사용한다.



몽강은행의 첫 화폐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의 경우 한번 도안이 바뀌었고, 동전의 경우 5각짜리를 제외하면 만주중앙은행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권의 경우, 한번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처음에 발행된 100원의 경우, 임시권의 성격이 강해 종이의 품질이 좋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특징으로는 '몽강' 인 만큼 만주국과 달리 몽골문자가 처음부터 혼용되었다는 것이다. 유목지역인 만큼 낙타나 양같이 유목지역을 상징하는 동물들이 많이 그려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동전에서는 '중화민국 27년' 처럼 중화민국의 기년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자체 화폐를 발행함과 동시에 한가지 조치를 실시했는데, 이는 뒤에서 소개할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연은권(聯銀券)의 사용을 금지한 것이었다. 민간에서 몽강권이 아닌 연은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괴뢰정부 지역끼리의 화폐가 혼용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일본에서는 일본돈이, 만주에선 만주돈이, 임시정부에선 임시정부 돈이, 몽강돈이 사용되길 기대했다. 또한 찰남은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몽강은행도 몽강에서의 사용가능한 화폐를 몽강은행 지폐와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으로 제한했다. 이는 일본의 지배를 용이하게 위한 것이기도 했고, 당시 만주국 원이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던 것처럼, 몽강권 또한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42년 발행된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에 따르면 이런 금지조치에도, 민간 내에서는 연은권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처럼 완전한 통화의 장악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40년에는, 1원짜리 지폐를 새롭게 공개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만주중앙은행에서 공급받아 사용하고 있던 5각, 1각,5분 짜리도 지폐로 만들게 된다. 1940년 7월 1일에는 5분, 1각짜리 지폐가, 1940년 8월 10일에는 5각짜리 지폐가 등장했다. (중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8월 15일 발행되었다고 하지만,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 에서는 8월 10일을 제시한다.여기서는 당대기록인 지나중앙은행론을 따랐다. )





5각, 1각, 5분도 지폐로 발행된데에는 자원문제가 가장 컸다.

동전으로 제작하지 않은 이유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 자원부족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작은 단위의 화폐도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지폐로 5각, 1각, 1분을 발행함과 동시에 자원확보를 위해 시장에 유통되어 있었던 만주산 동전들을 회수하기 시작했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이시기 몽강에 공급되었던 만주동전은 제작에 용이한 알루미늄 동전도 아니었기에 더욱 회수가 중요했었다.


몽강권의 현실과 한계 

몽강은 왕징웨이정권의 일부가 되었지만, 몽강은행과 몽강은행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0년 이 시기 몽강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몽강은 '몽강자치구' 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정부조직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본과 덕왕을 비롯한 기존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편과 같이 일부조직에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몽강의 경우, 1941년 1월,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되었음에도, 몽강은행권의 유통과 사용은 계속되게 된다. 중앙저비은행의 저비권은 몽강에서 오히려 연은권보다 낮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왕징웨이가 세운 중앙저비은행은 몽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몽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강화했다. 몽강은행은 몽강의 자원을 수탈하는 일본 기업에 투자와 대출을 제공했고, 일본의 국채, 공채를 몽강은행이 구매함으로서 일본의 몽강개발을 가속화하고 일본내의 재정압박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예로, 전쟁이 계속되고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1941년에 일본은 전비마련을 위해 몽강은행에 일본국채 구매를 종용한다. 몽강은행은 일본 국채 1억 원(위안) 을 구매하면서 몽강은행은 가지고 있던 금 보유고를 대부분 지출해야 했고, 이 때문이 몽강은행은 운용자금이 부족해지며 부실해지게 되었고, 이에 화폐를 남발 하게되면서 몽강지역의 물가는 급상승하게 된다. 1938년 말 대비 1941년 말에는 화폐 발행이 300% 증가했고, 이로 인해 물가상승으로 몽강의 주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즉,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자국의 물가안정과 전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몽강은행을 일본이 수탈하면서 그 부작용은 모두 몽강의 주민들이 책임지게 된 셈이었다.



북지경제도감(北支經濟圖鑑, 1942) 에 표기된 몽강은행권의 발행액수, 중일전쟁이 지속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발행액수가 크게 늘었다.


같은 책에 표기된 몽강자치연합정부의 수도 장자커우의 물가. 쇼와13 (1938년) 에 비해 쇼와 16 (1941년) 말에는 3배 넘게 올랐다. 같은 시기, 도쿄의 물가가 10%가량 오른것에 비하면 아주큰 상승이다.

1942년에는, 새로운 동전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전 1940년에 모두 지폐로 대체되었던 1각, 5각이 만주와 마찬가지로 그나마 마련하기 쉬웠던 알루미늄 동전으로 대체되었고, 지폐에서는 없었던 1분 짜리가 새롭게 동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가장 큰 단위인 5각은 동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5각의 경우 동전이 아닌 지폐로 계속 발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동전에서는, 이전 1938년의 동전과 달리 발행년도에서 중화민국의 민국기년이 아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성기(成紀) 기년법이 사용되었다. (사진의 성기738년은 1943년을 의미.) 성기기년법은 징기즈 칸의 제위인 1206년을 기원으로 하는 기년법으로, 몽골제국의 부활을 이야기하던 몽강연합자치정부에서 사용되었던 연호였다. 이렇게 성기기원을 사용한것은 이제 몽강이 중화민국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것이었다. 몽강이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의 일원임에도 이런 움직임을 보였다라는 것은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몽강에는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시기에는 기존의 종이시리즈도 혼용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몽강은행

몽강은행의 마지막 지폐들. 만주와 마찬가지로 지폐생산과정에서 드는 자원을 절약하려 재질이나 잉크면에서 품질이 나빠졌다.

1944년에는, 10원권과 5각을 새롭게 발행했다. 하지만 이때 발행된 5각의 경우 발행량이 아주 적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100원이 새롭게 발행되었다. 만주가 그랬듯, 몽강도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며 자원부족으로 인해 지폐의 질도 이전보다 나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몽강연합자치정부 붕괴 이후 몽강은행과 몽강권의 운명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몽강연합자치정부 또한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몽강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만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몽강권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붕괴 이후에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몽강지역에서 사실상 유일한 화폐로 취급되고 있었던 몽강권을 쉽게 대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만주와 다르게 중일전쟁이후, 몽강의 경우 국민당공산당 둘다 몽강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점령지는 중국공산당의 밑에 있었다.) 이렇기에 국민정부와 공산당 모두 몽강권에 대한 교환작업을 실시하게 된다.


국민정부의 점령지역의 경우를 보면, 국민정부는 몽강은행을 중화민국 중앙은행에 합병하고 중화민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1947년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몽강은행돈을 1:0.4의 비율로 다시 법폐로 교환하게 했다.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4각 (1:0.4)

하지만, 국공내전의 혼란속 이러한 교환사실은 몽강의 도서지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3개월이라는 짧은 교환기간 속에서 많은 이들이 다시 법폐로 돈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이결과 외딴지역에서는 많은 몽강권이 교환되지도 못한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몽강권 교환의 실패는 국공내전에서 많지도 않았던 몽강 국민당 점령지역이 국민당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이유중 하나기도 했다.


반면, 옛 몽강연합자치정부 지역 일부를 점령한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의 승리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46년 4월부터 자신들이 소유한 섬강녕변구은행 (陝甘寧邊口銀行)의 지폐로 바꿀 수 있게 했다. 교환과정에서 교환 한도는 없었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였으나,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섬강녕변구은행 5원 (1:5)

의 비율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로 3달이라는 짧은기간이었던 중앙은행 법폐로의 교환과 큰차이가 있지 않지만,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공산당 점령지에서는 많은 이들이 돈을 바꾸는데에 성공했다. 이는 대부분의 구 몽강자치연합정부 지역이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었기 떄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몽강권 회수성공은 국민정부에 비해 몽강에서 공산당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출처]


북지경제도설 쇼와 15년판 : https://dl.ndl.go.jp/pid/1281686/1/31

북지경제도설 쇼와 17년판 :https://dl.ndl.go.jp/pid/1461376/1/35

지나중앙은행론 : https://dl.ndl.go.jp/pid/1276552

중문판 / 일문판 몽강은행 위키백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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