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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칭다오회담 (青島會談, 1940. 1. 24~ 1.26)

최종 수정일: 2024년 8월 1일


1940년 1월 23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왕징웨이 (중앙),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 (왼쪽),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오른쪽)
1940년 1월 23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왕징웨이 (중앙),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 (왼쪽),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오른쪽)


1938년 봄부터 일본측과 접하면서 화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왕징웨이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신정권을 수립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당시 화북에는 왕커민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1937.12.24) 와 난징 량홍즈의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8.3.28) 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일본측에게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중앙정부로 통합해야한다" 라고 주장하며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임시정부, 유신정부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정부로 통합되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일본과의 논의끝에 1938년 11월 12일,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이 성립되었고, 여기서는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부를 옹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왕징웨이는 1938년 12월 18일 충칭을 탈출, 화평운동을 시작하며 자신의 신정권 수립을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왕징웨이가 생각했던 신중앙정권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을 비롯한 기존 정권들을 흡수하기를 희망했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을 비롯한 기존 정권들을 흡수하기를 희망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汪)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을 성립시키기를 희망하고 있었다.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뿐만 아니라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비롯한 다른 정권 & 세력들도 모두 흡수하기를 희망했다. 이는 왕징웨이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화평운동은 자신을 중심으로한 거대한 통합신정권에서만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독보적인 주도권을 자신이 확립해야 '일본의 꼭두각시' 라는 비판을 최대한 피할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내몽골부터 광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왕징웨이의 중앙정권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징웨이는 만주국도 자신의 정권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중앙정권에서는 화북,화중,화남의 주요산업은 물론 수많은 인구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촉나라땅만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장제스의 충칭정부

에 비하면 엄청난 경제력과 인구를 가질 수 있었다.


실제 이루어진 통합의 행태. 왕징웨이는 자신이 생각하던 구상을 이루지 못했다.
실제 이루어진 통합의 행태. 왕징웨이는 자신이 생각하던 구상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계획은 왕징웨이의 화평파와 일본 내의 왕징웨이 지지세력으로 부터 지지를 받아왔으나, 왕징웨이의 구상은 여러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 째는 기존에 구성되었던 괴뢰정권 자체들에서 비롯된 반대였다. 임시정부의 왕커민과 유신정부의 량홍즈는 이미  1938년 9월 22일부터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 독자적으로 정부통합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두 정부 모두 유교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에, 통합에 대한 논의는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왕징웨이의 등장은 이러한 통합논의를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왕징웨이에 등장에, 기존 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왕징웨이의 구상에 대해 반대를 가했다. 특히,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왕커민은 왕징웨이의 구상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를 표했다. 1939년 6월 27일 왕징웨이는 왕커민과 만나 정부통합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왕커민은 "통합된 중앙정부가 필요하긴 필요하다" 라는 동의를 얻어내어 겉으로는 꽤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커민은 사실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유신정부의 지도자 량홍즈는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왕징웨이는 왕커민을 만난 후 량홍즈를 만나러 갔으나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왕징웨이와 그의 세력이 신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확실한 거부를 보였다. 왕커민과 달리 신중앙정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둘 째는 일본의 반대였다. 일본은 스스로 일화협의기록의 작성과정에서 왕징웨이측의 중앙정권 필요성을 인지했지만, 왕징웨이가 생각한것처럼 거대한 중앙정권을 구성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본은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가 유신정부-임시정부보다 조금 확대된 수준에 그치는 정부를 구성하길 희망했다.


지나방면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나방면군에게 난징을 비롯한 화중지역은 괜찮지만, 당시 중국의 주요철도가 지나가고 수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화북지역만은 자신들의 강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진행해왔던 이들에게 다시 화북을 넘겨준다는 일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1939년 6월 6일에 '수립신중앙정부적방침(樹立新中央政府的方針)" 을 통해서 이미 화북지역을 특수지역으로 만들어 왕징웨이의 새로운 신중앙정권과 분리하기로 결정을 지었던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의 희망사항은 더더욱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1939년 7월 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는 다시 긍정적으로 진행되게 된다. 첫째는 유신정부측의 호응이다. 이전 대민회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유신정부의 구성원들은 임시정부의 구성원들과 달라 왕징웨이측에 조금더 호의적이었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 본인은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의 일반적 구성원들은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안을 받아드릴 수 있었기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둘째는 왕징웨이측의 타협이다. 자신의 제안이 작동하기 어렵다는 걸 알자 왕징웨이는 결국 신정부에서 기존 두 정부의 지분을 인정해줄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앞에서 보았듯 기존 두 정부세력이 완전히 자신에게 흡수되는 것을 희망했지만 기존 정부의 지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요구했던 화북-몽강 지역의 특수성도 사실상 인정해버리면서, 자신의 구상에 반대하는 일본측과 기존 두 정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협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셋 째는 일본측의 압박이다. 왕징웨이의 막대한 중앙정부계획에는 반대를 표했던 일본이지만, 일단은 중앙정부를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수립하기로 약속한 만큼, 그리고 왕징웨이의 구상이 타협과정을 거치며 약화된 만큼, 정부 수립에 있어 충분히 자신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생각한 일본은 이제 왕징웨이측의 중앙정권 구상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에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호의를 보였던 유신정부 외의 임시정부, 몽강측도 결국 통합과정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타협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위가 인정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1939년 9월 19~20일 난징에서 개최된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는,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가 모두 참여하여 아닌 왕징웨이의 중앙정부 성립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왕징웨이가 왕커민, 량홍즈와 각자 만나 논의를 한바는 있었으나, 이 9월의 만남은 3명이 처음으로 만난 회의가 되었다.


1939년 12월 15일 진행된 제 7차회의에서는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통합논의기구인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를 해산하고 왕징웨이측의 신중앙정부 성립에 매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과정에서 왕징웨이가 추진하는 중앙정치회의에 보낼 양측 인사의 선정과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논의에서는 새롭게 수립될 정부를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구성으로 언제 설립할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부 성립을 위한 다음단계를 위한 논의와 회담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칭다오 회담이다.


본 회의는 1940년 1월에 개최되었지만, 회의에 대한 언급은 이미 11월 즈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11월 2일의 보도에서 "왕(汪), 왕(王), 량(梁)" 3인의 2차회담으로 칭다오 회담이 멀지않았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왕커민은 1939년 11월 24일, 도쿄를 방문하여 진행한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중앙정권 수립문제에 관해) " 칭다오 회담과 같은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진행은 생각보다 빠를지 모른다"

라고 이야기하며 칭다오 회담이라는 가능성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1939년 12월 30일 일화신관계조정요강 (日華新關係調整綱要) 이 서명되고, (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이 얼마나 불평등한 것이었는가는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1940년 1월 8일 일본 정부는 신정부수립의 기본방침을 확정짓고 왕징웨이의 신정권수립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1940년 1월 15일, 임시정부의 왕커민, 유신정부의 량홍즈, 그리고 몽강의 덕왕에게 회담초정장을 보냈다. 왕징웨이측은 왕(汪), 왕(王), 양(梁) 셋의 만남으로는 부족하며 여기에 몽강까지 참가하는 넷의 만남이 되어야함을 주장했다. 이는 자신이 구상하는 신중앙정권에 미온했던 몽강측이 적극적으로 임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은 초대장을 발송했다.


"작년 9월 말 난징에서 회담하였을 때 여러 가르침을 받고 여러 의견을 교환한 것에 대해 감명을 그치기가 어렵다. 그후 수개월 간 각 사항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절충과정을 거치며 성숙해졌기에 이제 중앙정치회의를 조직하여 화평을 촉진하고 헌정을 실현하는 건에 대해서 한걸음 더 진보하는 것을 검토를 가하여 실행을 기하려 한다. 이에 금월 하순 칭다오에서 회담을 하여 협의를 하길 희망한다. "

이에 임시정부의 왕커민, 유신정부의 량홍즈가 응했고, 왕징웨이의 기대와 달리 몽강측은 응하긴 했으나 수장 덕왕이 아닌 리서우신 (李守信) 국가부주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몽강과 일본측에 의해 다분 의도된 것으로, 왕징웨이측으로 흡수되기로 스스로 결정한 유신정부와 겉모습의 형태라도 통합의 형태를 띄기로 했던 임시정부와 달리 이미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로부터 구분되는 특별지위를 이미 약속을 받은 상황인데다 일본이 몽강을 신중앙정부 체제속 '중화민국'과 구분되는 '제2의 만주' 로 만드려는 의도를 의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본 회의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본회담을 "3거두 (三巨頭)" 의 회담이라 칭했다. 여기서 3거두는 각각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이시점에선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고, 왕커민과 량홍즈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칭다오를 회담지로 선정한 것은 여러 이유가 존재했는데, 첫째, 칭다오는 당시 상하이에 있던 왕징웨이도, 화북의 왕커민도, 난징의 량홍즈도, 몽강의 리서우신도 모두 접근하기 편리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칭다오는 4명의 대표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난징이나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면 이는 한쪽에게 치우친 개최라고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셋째, 칭다오는 중일전쟁에서도 큰 파괴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칭다오가 명확한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칭다오는 일본 & 일본의 괴뢰정권 영향이 확실히 미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칭다오는 일본에게도, 일본의 괴뢰정권에게도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칭다오 회담이 개최된 칭다오 영빈관 (青島迎賓館) , 이곳은 1905년 과거 칭다오가 독일 조차지였던 시절, 독일 총독의 관저로 지어졌다.
칭다오 회담이 개최된 칭다오 영빈관 (青島迎賓館) , 이곳은 1905년 과거 칭다오가 독일 조차지였던 시절, 독일 총독의 관저로 지어졌다.

주최측은 경호상의 편의를 위해 칭다오의 영빈관 (구 독일총독관저) 를 선택했다. 영빈관의 1층에는 회의장을, 2층에는 왕징웨이측이 머물게 했다.



왕커민과 량홍즈, 리서우신이 묵었던 칭다오 태평로의 칭다오 호텔일대 사진. (과거 프린스 호텔 (Hotel Prinz Heinrich) 자리 ) 현재는 보이는 4개 건물중 왼쪽에서 두번째 건물만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왕커민과 량홍즈, 리서우신이 묵었던 칭다오 태평로의 칭다오 호텔일대 사진. (과거 프린스 호텔 (Hotel Prinz Heinrich) 자리 ) 현재는 보이는 4개 건물중 왼쪽에서 두번째 건물만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왕커민과 리서우신, 량홍즈는 칭다오 영빈관에서 가까운 태평로의 칭다오호텔에 묵게했다. 칭다오는 경찰과 주둔해 있는 일본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들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회의장에는 35대의 차량이 동원되었으며, 일본은 영빈관의 직원들과 흥아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모두 흥아원에서 준 興(흥, 흥아의 약칭) 이라는 약장을 차게 하였으며, 신문기자들은 칭다오 호텔에서 대기하다가 필요시에만 영빈관을 방문할 수 있게 했다.


충칭측은 이러한 칭다오회담의 개최소식을 듣고 칭다오에 파견되어 있던 군통 푸성란 (傅勝蘭, 부승란) 요원으로 하여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왕징웨이 일행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으나, 오히려 푸성란의 상관이었던 군통의 왕티안무(王天木, 왕목천, 1891~1995)가 전향하여 왕징웨이가 칭다오에 도착하기 전 이를 일본측에 알리게 되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푸성란은 체포된뒤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결국 76호측에 의해 포섭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인사가 되게된다. 푸성란은 왕징웨이 정권아래 무려 항저우 시장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국민정부에 의해 처형당하게 된다.)


1940년 1월 21일 (일)


대련기선 (大連汽船) 의 호텐마루 (奉天丸) . 이 여객선은 쇼와 3 (1928) 년 건조되어 일만연락선으로 사용되다가, 쇼와 13 (1938) 년 부터 상하이-칭다오 구간은 운항했다.
대련기선 (大連汽船) 의 호텐마루 (奉天丸) . 이 여객선은 쇼와 3 (1928) 년 건조되어 일만연락선으로 사용되다가, 쇼와 13 (1938) 년 부터 상하이-칭다오 구간은 운항했다.

왕징웨이 일행과 량홍즈 일행은 배편을 통해 칭다오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징웨이와 량홍즈는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전 9시, 둘과 일행은 상하이에서 칭다오로 향하는 대련기선의 호텐마루(奉天丸) 에 탑승하였다.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메이쓰핑, 츄민이, 린바이셩 등을 데리고 왔고, 량홍즈 또한 자신의 관원을 함께 데리고 왔다.


21일 오후, 왕커민이 가장 먼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관원들을 데리고 칭다오에 도착했다. 왕커민은 도착과 함께 바로 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같은날, 이탈리아 왕국의 치아노 외무상은 스테파니 통신 (Agenzia Stefani) 를 통해 왕징웨이에게

"왕징웨이씨의 신중앙정부수립에 대하여 이탈리아 왕국은 왕정위씨의 친우(親友) 로써 어떠한 지원도 망설이지 않겠다"

라는 전보를 보냈다. 왕징웨이도 회담이후 답보를 보냈다.



1940년 1월 22일 (월)


22일 오전 3시 30분, 몽강의 리서우신도 비행기를 타고 칭다오 창커우 비행장 (滄口飛行場, 현재는 군용비행장) 에 도착했다. 리서우신도 도착과 함께 칭다오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왕징웨이와 량홍즈 둘과 일행을 실은 호텐마루는 22일 새벽 4시에 칭다오에 도착했고, 도착후 왕징웨이 일행은 영빈관으로, 량홍즈 일행은 칭다오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한후 왕징웨이는 일본군 칭다오 사령관이었던 오오시마 켄이치 (大島健一) 사령관을 만나 감사인사를 전했다.

영빈관에서 기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하는 왕징웨이.

영빈관에서 기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하는 왕징웨이.

오후 5시, 영빈관에서 왕징웨이는 국내외 기자단 약 70 여명과 접견하여 '화평운동의 진의' 라는 이름의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평운동의 진의 (和平運動之眞義)

   

나는 화평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화평운동은 첫째, 동아의 대국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중일 양국의 공존공영은 화평 없이는 할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따라서 이는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구차하게 평온하게 지내려하는 것이 아니다.

     

화평운동은 둘째, 중일 양국의 백년대계이자 공존공영의 기초를 심는 것이지, 일시적인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화평운동은 셋째, 일종의 사상, 일종의 신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는 중일 양국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전쟁은 양국을 모두 해치나 화평은 공존공영을 이뤄낼 수 있기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지, 권모술수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여러 해 동안 가지고 있어왔다. 그리고 이는 고노에 성명 이후 일본 국민들의 공통된 입장이 되었다. 일본은 동아보위의 책임을 가지고 중국이 이 책임을 분담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동지들과 함께 화평운동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중국이 패배하게 된다면 어떤 힘에도, 어떠한 세력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진실되고 영구적인 화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사상과 열정적인 신념을 가져야 한다 확실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신념에서 비롯된 세력은 진정한 세력으로서 화평운동의 기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국 민중, 특히 뜻있는 청년들의 공통적 이해과 공통적 책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화평운동은 이렇게 기초가 확립되어야만 중간에 변질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으며, 무력과 다른 세력의 건설은 그 기초 이후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야만 화평운동이 권모술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상과 신념이 화평운동의 점진적인 진전으로 이어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이 우리가 맡은 사명을 완전히 달성하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깊게 믿는 바다.


이후 기자회견이 진행되었고, 이자리에서 린바이셩은 왕징웨이의 화평사상이 위대한 사상임을 이야기하며 기자들에게 화평사상의 위대함을 자랑했다.


1940년 1월 23일 (화)


오전 10시, 본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 회담이 개최되었다. 추운날이었던 이날, 리서우신이 가장 먼저 영빈관에 도착하여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몽강의 리서우신을 만나 회담을 진행하였다. 리서우신은 중일전쟁의 발발이후 내몽골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외몽골과 신강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당의 항일운동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고, 저우포하이는 중앙정치회의의 성립 방침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서우신은 저우포하이는 화평과 반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에 있어 의견을 모았고, 리서우신은 저우포하이에게 몽강도 중앙정치회의에 참가할 것을 이야기 했다. 저우포하이도 몽강측이 신중앙정부 아래에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분리될 것임을 이야기했다.


같은 시간, 왕징웨이는 왕커민과 량홍즈와 만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내일 열리게 될 본회담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간단했던 예비회담이 11시 종료된 후, 왕징웨이는 직접 리서우신을 만났다. 왕징웨이는 몽강지역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빈번하다 지적하며 몽강측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덕왕과 리서우신의 몽강 통치를 극찬했다.


점심시간, 왕징웨이는 왕커민, 량홍즈, 리서우신과 함께 만찬을 같이하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영빈관에서 칭다오 시장이 주최하는 연회가 개최되었다. 이자리에는 왕징웨이와 왕커민, 량홍즈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주요인사들이 참가했다.


1940년 1월 24일 (수)



회담 장면. 왕징웨이의 왼쪽에 썬글라스와 같은 안경을 쓴이가 왕커민, 왕징웨이와 대화하고 있는 오른쪽의 인물이 량홍즈다. 왕커민 쪽에는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량홍즈 쪽에는 유신정부의 인사들이 앉았다.
회담 장면. 왕징웨이의 왼쪽에 썬글라스와 같은 안경을 쓴이가 왕커민, 왕징웨이와 대화하고 있는 오른쪽의 인물이 량홍즈다. 왕커민 쪽에는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량홍즈 쪽에는 유신정부의 인사들이 앉았다.

이날은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며 눈이 펑펑내리는 날이었다. 이날 새벽, 리서우신은 일본의 군용기를 타고 다시 몽강으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제 1차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진행은 왕징웨이가 맡았다. 왕징웨이는 회의를 시작하며, 삼민주의의 진제(眞諦, 진리, 제일의 진리) 라는 이야기를 회의장에서 진행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민주의의 진제 (三民主義之眞諦)

삼민주의는 구국주의로, 중국을 차식민지 지위에서 해방시키고 국가의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민족해방은 정치해방은 민권주의, 경제해방은 민생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삼민주의는 민족을 구하는 구국주의이지만, 동아주의, 세계주의와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삼민주의는 기본정신을 중국 고유의 도덕에 두어 화평을 신조로 하고 침략을 능사로 하지 않는 패도가 아닌 왕도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반드시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동아의 일원이자 세계의 일원으로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을 이룰 것이다,

     

손중산 선생의 죽음 이후, 그의 도당들은 삼민주의에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삼민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사상의 유행에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당 외부에서는 삼민주의에 대한 ‘오해’를 하지만, 이는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원이 하고 있는 ‘곡해’는 심각한 것이다. 따라서 삼민주의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는 편협한 국가주의가 아니며, 민권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아니며, 민생주의는 맑스의 공산주의와 다른 것으로 양립할수 없다는 것을 삼민주의를 믿는 이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기에 이번 회의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왕징웨이의 말이 끝난 후, 회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신중앙정부의 수립방법, 정치와 강령등에 대해서 논의 되었다. 가장 먼저 논의된것은 신중앙정부수립대강 (新中央政府樹立大綱) 으로, 여기서 신중앙정부를 친일, 화평, 반공을 신중앙정부의 근본적 방책으로 삼고, 신중앙정부의 구성은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 조직과 기존의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과 기타 정치세력과 정치인사들을 모두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만약 충칭측이 화평을 선택한다면 이를 포용하기로도 결정했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중앙정치회의는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 뿐만 아니라 여러 당파, 여러 인사들이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왕(汪), 왕(王), 량(梁)은 그리고 새롭게 수립될 신중앙정부가 이전 국민정부의 법통을 잇기로 결정하며 명칭을 '국민정부 (國民政府)' 로 하고, 수도를 난징에 두기로 합의, 결정했다. 그리고 새롭게 수립될 국민정부의 깃발은 이전의 청천백일기를 다시 사용하되, 구분을 위해 노란색 삼각천을 위에 달고 '화평반공건국' 혹은 '화평건국' 의 구호를 달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일본측과는 이전부터 논의가 끝난 것이었으나, 왕커민, 량홍즈을 비롯한 기존 정권 구성자들과는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


또한 신중앙정부의 수립시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여기서 왕커민과 량홍즈는 왕징웨이측의 방침에 따라 신정부를 설립, 그리고 기존의 유신정부를 해체, 임시정부는 개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오후에는 다소 특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는 회의 바로 직전이었던 1월 22일, (당시 왕징웨이는 칭다오로 이동중이었기에, 왕징웨이가 이소식을 접한 것은 칭다오에 도착한 후였다. ) 가오쫑우와 타오시성이 홍콩으로 탈출,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가 체결한 일화신관계조정요강 (日華新關係調整綱要) 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임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셋은 갑작스러운 이러한 폭로에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이 셋은 회의를 거쳐 오후, 왕징웨이는 로이터 통신과 UP (United Press, 미국의 언론사) 를 비롯한 대내외 기자들을 모아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가오쫑우와 타오시성의 주장이 '허위' 임을 주장했다.


고도(高陶) 사건에 대해

타오시성, 가오쭝우는 모두 화평운동의 시작부터 참가한 이들 이었으나, 작년 3월 21일 쩡중밍 동지가 하노이에서 암살 당한 이후, 두 사람은 비겁한 모습을 보여왔다.

     

내가 하노이에 있을 때 나는 가오쭝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그가 홍콩으로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타오시성은 우유부단하고 흔들리며 방향을 잃어 가오쭝우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처음부터 함께 해온 동지였던 만큼, 이들을 관대하게 대해왔다.

     

지난 해 11월, 나는 그들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작년 11월 5일, 중국에 있던 일본인의 일부 시험계획서들을 훔치기도 했다. 그들은 이를 진귀한 것으로 여겼고 이는 충칭과 결탁한 것이다.

     

이는 비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짓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온갖 유혹에 빠져 인격을 상실한 모습은 정말 비열하고 매우 원망스러운 것이다.

     

다만 어떤 운동에서든 이런 패륜아들에게 벌을 억지로 줄 필요는 없다. 이러한 무뢰한 행동의 결과는 자신을 도태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대국 자체에는 큰 손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충칭이 공산당의 의 음모에 빠져 있을 때 화평운동에 종사해왔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고, 오늘날 중국에는 화평 이외에 다른 자구책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화평운동은 나날히 발전하며 성공을 이루고 있다.

     

나라가 찢어지고 가족이 무너지고 있는 이 때에,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항전에 실패하면 항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화평에 실패하면 화평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서양단(首鼠兩端) 의 행태는 잘못된 길로 나아갈 뿐이다.


이제 나와 나의 동지들은 모두 맹렬하게 전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중간에 변절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절자들은 오랫동안 변절에 대한 마음을 품어왔던 만큼, 이들이 사라진다면 화평운동의 순수함과 광명은 더욱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화평방안은 최근 중일 쌍방이 양국의 백년대계 및 동아의 장래를 위해 서로 양해하고 양보하여 중국의 부흥기반을 마련하고, 그 능력으로 동아의 화평과 신질서의 책임을 분담하게 하는 것이지,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이 조작하여 발표한 문서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담화에서는 가오쭝우와 타오시셩에 대한 인격적 비판과 함께, 폭로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의 조작에 의한 것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내용이 진짜임이 밝혀지게 된다.)


회담이 끝난 후, 왕징웨이는 '법통 문제 (法統 問題)' 라는 담화를 발표, 왕징웨이와 왕커민, 량홍즈가 어째서 국민정부의 법통을 잇기로 결정하였는지, 어떻게 그 법통을 이을 것이며 자신들이 구성하게될 새로운 '국민정부'는 어떤 모습인지,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는 어째서 법통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법통문제 (法統問題)

     

중일전쟁은 점차 진정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전국의 역량을 집중시켜 중앙정부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법통 문제다.

     

중국이 통일된 중앙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낡은 법통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통을 세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혁명의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시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쟁은 과거 국민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국민정부의 정치체제가 잘못되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시국을 수습하는 목적은 대외적인 화평을 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대내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책은 마땅히 수정되어야하고, 정치제도나 법에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적당한 수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의 법통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필요는 없다. 이는 혼란만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존의 법통을 계승하되,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과거 국민정부의 법 제도가 비난받았던 이유는 전국의 정치를 추진하는 중앙정치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오직 중국국민당의 중앙위원으로 제한되며 당 외의 인사들이 참석하지 못해 외부로부터 독재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년에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을 때, 이를 개선하기로 결의하여 대회 선언에서 이 취지를 표명한 바 있다.

     

앞으로 중앙정치위원회는 국민당 오직 1개 당만이 독점하지 않게 될 것이며, 모든 합법적 정당과 전국의 유능한 인사는 법에 따라 이에 참여하여 정치를 논하고 함꼐 협력할 수 있다. 이것은 헌정 실시의 첫걸음이며, 동시에 과거의 잘못된 법 제도를 교정하는 것이다.

     

충칭 정권은 현재 공산당의 압박을 받아 자유로이 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따라서 우리가 중앙정치회의의 의결에 따라 법을 개편하되, 기존의 정무를 그대로 집행하며 화평에 관한 논의를 끝마칠 수 있다면 법통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는 최단기간 내에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할 것이다.

     

이렇게 헌정을 실시할 수 있다면, 가벼운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가는 것처럼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른 정치 개혁과 달리 분규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방법이 어찌 계책이 아니겠는가?



1940년 1월 25일 (목)


영빈관의 정원을 구경하는 3인방.
영빈관의 정원을 구경하는 3인방.

이날도 눈이 내렸다. 오전 10시, 2일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본 회의에서는 전날의 회의보다 더욱 상세하고 복잡한 내용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왕징웨이는 우선 일본과 비밀리에 체결한 일화신관계조정요강

의 내용을 왕커민과 량홍즈에게 설명하고, 이후 일본과의 협상은 왕징웨이가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전날과 달리 빠른 합의가 이끌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이날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이 "그렇다면 정부를 '진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신중앙정부를 자신이 중심이 되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하려 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왕징웨이는 실제로는 그러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그랬기에 일종의 타협과정을 거쳐 현재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통합'은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인가? 이날 회의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중앙정부의 조직구성에 대해 긴 시간동안 지속된 논의 끝에, 왕(汪), 왕(王), 량 (梁) 은 다음과 같은 합의를 도출해냈다.



1) 유신정부는 해체, 하지만 인사들은 고용


2) 임시정부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정부조직만 존속,

실권을 유지한채 중앙정권에 편입


3) 화북에서의 일본의 특권을 인정


4) 몽강의 경우 신중앙정권으로 편입하나 그 실권은 유지


5) 충칭의 린썬을 명목상 주석으로, 왕징웨이를 주석대리로

(만약 린썬이 전향하지 않으면 왕징웨이를 주석으로)


그리고 신중앙정부, 즉 난징에 세워지게 되는 국민정부에 행정, 입법, 사법, 감사, 고시의 5권헌법에 의거한 부서를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여러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는 이전 국민정부의 조직, 그리고 충칭 국민정부의 조직을 모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중앙정부의 내각에 참가할 인원을 내정하였다.


행정원 원장 겸 주석대리 : 왕징웨이

행정원 부원장 : 추민이

입법원장 : 천궁보

사법원장 : 원종야오

감찰원장 : 량홍즈

고시원장: 왕이탕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 : 왕커민

부주석 겸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 저우포하이


등등 여러 인원이 각자의 직을 받게 되었다. 인원 내정의 과정에서 3인방은 서로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서로는 자신과 자신의 인물을 요직에 내정하려 했고, 이 때문에 회의장에서는 과함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날의 완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를 대체하게될 조직인 화북정무위원회의 조직구성, 대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왕커민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혔고, 이때문에 왕커민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중앙정치회의의 요강및 규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중앙정치위원회의 규정에 대한 논의, 국민대회의 개최시기, 헌정의 실시시기에 대한 논의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중앙정치회의의 요강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 논의는 간단한 개괄적인 범위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3인방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중앙정치회의 개최 이후 결정하기로 결정했다.


저우포하이는 이후 자신의 기록에서 이런 회의의 모습을, 마작을 두는 이들의 모습에 비유했다. 마작패 (왕왕량3인방)들이 치열하게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이 마작패들의 운명은 모두 마작을 두는 이 (일본) 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1940년 1월 26일 (목)


회담의 마지막 날이었던 26일 오전에는, 왕징웨이가 10시 왕커민을, 11시에는 량홍즈를 각각 만나 중앙정치회의의 구성과 각 정권의 중앙정치회의 대표로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리고 3월 중으로 중앙정치회의와 신중앙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전날 중요한 내용이 많이 논의되고, 대부분의 상세한 사항은 차후 중앙정치회의에서 결정하길 합의한 만큼, 이날은 많은 논의가 오가진 않았다.


오후에는 왕(汪), 왕(王), 량(梁) 3인은 영빈관 1층의 중앙현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본 회의의 성과, 의의에 대해 발표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칭다오회담의 의의 (青島會談之意義)

작년 9월 말, 나는 일찍이 난징에 가서 왕 위원장과 량 위원장과 회담하면서 시국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고 모두가 화평의 실시, 그리고 헌정의 실시에 중점을 두었다.

     

제 1차 회담을 통해 시국 해결에 대한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오늘의 제 2차 회담을 통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으며 중앙정치회의의 조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중앙정치회의는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각 정당과 전국의 헌명한 인사들이 연합, 공동으로 조직하여 과거의 간극에서 생기는 폐해를 일소하고, 일치단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책임을 져 화평 정착을 위한 헌정 실시라는 원칙을 결정함으로서 새롭게 세워질 중앙정부가 이에 근거하여 성립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전국인민이 필시 한마음 한뜻으로 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전진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대외적으로는 중일의 친선관계 수립에 힘쓰고, 각우방과 국교를 돈목하게 하며, 대내적으로는 전후 건설에 힘쓰고 정치를 개편하여 인민의 고통을 해소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칭다오 회담은 실로 화평운동의 큰 발전이자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발표를 끝으로 칭다오회담은 마무리되었고, 다음날인 27일 오전 왕(汪), 왕(王), 양(梁)이 이별하여 비행기를 통해 각자의 장소로 다시 돌아감에 따라 칭다오회담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칭다오회담은,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즉 난징국민정부의 성립이 완전히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왕징웨이와 일본측은 신중앙정권 수립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해왔지만, '정부를 수립한다' 정도의 합의가 된 것이었지, 언제, 어떻게 정권을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기에 왕징웨이측은 칭다오회담을 통해 확실하게 정권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 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동시에 왕커민과 량홍즈로 하여금 신중앙정권이 기존 왕커민과 량홍즈가 보였던 것과 다른, 국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국민정부' 일것이며, 그 신중앙정권의 수장은 자신임을 인정하게 하면서 신중앙정권이 왕징웨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될 것임을 확인했다.


즉, 칭다오 회담은 왕(汪), 왕(王), 량(梁) 3명의 꼭두각시가 모여 왕(汪) 이라는 꼭두각시가 가장 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왕(王)과 량(梁) 은 왕(汪)이 자신의 위에 서는것을 받아드리기 힘들었지만,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다. 회의는 완전히 왕징웨이의 주도에 의해 운영되었고, 일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분이 왕징웨이의 뜻대로 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앞에서 보았듯 일본측이 회담 이전부터 왕징웨이가 신중앙정권의 중심이 되어야함을 인식하고 양측에 대해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이렇듯 칭다오회담을 통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권, 즉 난징국민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과정 중 하나를 성공시켰다. 물론 자신이 완전히 바라던 바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 정부를 통합하여, 국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국민정부' 의 형태로 성립되는 '중앙정부' 를 세운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이 완전하지 못했던 성과의 결과는, 이후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이후 해체시기까지 평생 왕징웨이 정권의 약점으로 작동했다.



[출처]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萬仁元,  『汪精衛與汪偽政府』, 1994

马庚存, 「汪伪青岛会谈述评」, 『历史教学』, 2007

吕温泉, 「汪伪政权的出笼与“青岛会谈”」, 『春秋 1995年第4期』 , 1995

青岛日报, 汉奸三巨头青岛会谈的幕后」, 2015


영빈관 / 칭다오 호텔 사진 : 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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