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④ 중국연합준비은행 (중화민국 임시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국연합준비은행(中國聯合準備銀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베이징 본점 (2대). (현재 중국대륙 베이징시 시청구 시자오민샹 17호, 北京市西城区西交民巷17号) 이곳은 본래 북양보상은행(北洋保商銀行)가 자리하고 있었다. 북양보상은행은 중일전쟁이후 영업을 중단했고, 이후 북양보상은행자리를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차지한 것이다. (현재 이곳중국인민은행을 거쳐 중국화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통합의 산물, 중국 '연합' 준비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1937년 12월 14일 베이징(핑)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앙은행으로, 1938년 3월 10일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화북지역에는 적어도 11개 이상의 은행에서 발행한 통화들이 혼용되고 있었고,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군표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적어도 화북에서 3~4억 위안 가량의 법폐들이 유통되고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일본과 임시정부는 이러한 혼용으로 생기는 혼란을 끝내고, 화폐를 통일하여 화북지역의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된 화폐의 권위를 통해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만드는 법폐에 맞서려 했다. 일본측은 임시정부의 이러한 통화통일시도를 '대담한 시도' 라 서술하기도 했다.
정부수반이자 재정장관이었던 왕커민 (王克敏, 왕극민)은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38년 1월 6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는 앞으로 생기게 될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1月)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중앙은행은 중화민국임시정부와 중국측 은행들의 공동출자로 설립하기로 한다.
2. 자본금은 5천만 위안으로 하고, 반은 정부가, 반은 민간이 출자하기로 한다.
3. 신중앙은행은 유일한 화폐발행은행으로써 신화폐를 발행하기로 한다.
4. 중국연합준비은행에 참가하는 은행의 화폐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새로운 화폐로 일정기간내에 교환·회수하기로 한다.
5.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 (통합혹은 산하로 둠) 하는 은행은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중국은행(中國銀行)*, 교통은행(交通銀行)*, 금성은행(金城銀行)*, 대륙은행*(大陸銀行), 중남은행*(中南銀行), 기동은행(冀東銀行), 염업은행*(鹽業銀行) 8개로 한다.
(*표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점령지에 있는 지점들만 해당)
이름처럼 , 중국 '연합' 준비은행은 화북지역에 존재하는 은행들을 통합 & 산하에 두는 방식을 통해 설립하려 했다. 그리고 현지정보북지경제지리 (現地報告北支経済地理) 에 따르면, 여기에는 하나의 내용이 더 존재한다. 이는 바로
6. 일본측의 은행들로부터 1억 위안의 차관을 받는다.
인데, 이 내용은 현지정보북지경제지리에는 서술되어 있으나,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1月)나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 것같다.
그리고 다음날, 1938년 1월 7일,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정부차원에서 화북지역 (중화민국 임시정부 점령지역) 의 통화안정과 통화의 통일을 목표로 신중앙은행인 중국연합준비은행을 건설하겠다는 취지를 담은성명을 발표했다.
정 부 성 명 서 (1938.1.7)
중국의 화폐제도는 개혁이래, 표면상으로는 안정이 된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직 취약한 상태임에도 이를 등한시해버려, 지금의 중대한 위기로 인해 안정화의 기초는 뿌리로부터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통화의 안정은 금융제도의 확립에 있고, 그리고 이는 국가의 생존, 민생의 기초적 조건이다. 이 조건을 갖추려는 정부는 막중한 책무를 지닌다. 적어도 국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불안한 상태에 있게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반드시 적법하게 이를 처리하고 완전히 해결할 필요가 있다.
본 정부는 성립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제정을 혁신하고 정책을 확신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특히 산업의 개발, 국민경제의 진전은 오로지 화폐제도, 통화의 안정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통화의 불안을 일소하고, 통화제도의 통일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해 국내의 각 은행들을 연합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우방 일본의 국민들도 나아가 원조를 할것이다.
오늘부로 정부는 은행 창립을 위한 위원을 임명하고, 설립 준비를 위한 명령을 내렸다. 본 정부는 위와 같은 취지에 근거한 신은행을 설립하기로 한 이상, 해당 은행의 기초와 안정에 있어서 조밀한 계획을 세우려한다. 예를 들어 발행 준비금의 충실, 재정기능의 확립과 같은 것을 말이다. 다시 한번 정부는 재정 안정 방안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것을 국민들에게 천명하는 바이다.
창립위원으로는, 임시정부의 수장인 왕커민과,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하는 8개은행의 지배인, 그리고 만주국의 중국은행 지배인 왕시징(汪時璟) 까지 총 10명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중 왕시징은 이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가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 왕시징 (汪時璟), 그는 왕커민과 함께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창설인물 중 한명이기도 했다. (사진은 중국연합준비은행 베이징 본점의 사무실)
그리고 이들 창립위원들은 여러번의 회의끝에 1938년 2월 6일,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를 공표한다. 조례에는 지폐로 1원, 5원, 10원, 100원 4종류를, 동전으로 5각, 2각, 1각, 5분, 1분, 5미 6종류를 만든다고 정의하고 있고 (9조~ 12조), 총재의 임기는 2년이고 주주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20조), 부총재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18조), 본점을 베이징에 두는것 (3조) 등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례의 공포와 동시에, 왕커민을 비롯한 정부요인들,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를 결정한 8개 은행의 관계자들, 일본계 은행들의 관계자들이 모여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창립총회를 열었다. 창립총회에서는 왕시징을 총재로, 사카타니 키이치(阪谷希一)를 고문으로 결정하고 동시에 이사들과 간사들도 선정했다. (이사와 간사에는 8개은행의 경리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본점사무소로 베이징 중국은행 건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전 중국은행 베이징지점 (현 중국대륙 베이징시 시청구 시자오민샹 17호, 北京市西城區西交民巷17號, 천안문과 전인대가 가깝다.) 에 설치된 중국연합준비은행 본점사무소. 사진은 영업을 개시한 1938년 3월 10일의 사진이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가운데 직원들이 현판식을 진행하고 있다. (애초에 이건물은 위에서 소개한 2대 본점의 바로 옆건물이다.)
그리고 1938년 2월 10일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 설립을 위한 자본금을 어떻게 부담할것인가가 결정되었다.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2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2月)에는 그 부담의 비율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자료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성립과정. 수많은 주체들이 은행설립을 위해 자금을 출자했다. (*표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점령지의 지점들만 해당)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자본금 5천만 위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이중 절반인 2500만 위안은 주식을 발행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1주 100위안) , 나머지 2500만 위안중 절반인 1250만 위안은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하는 8개은행이 분할하여 조달하기로 하고, 나머지 1250만 위안의 경우 중화민국 임시정부 정부측에서 마련하기로 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위해 일본의 요코하마 정관은행 (横浜正金銀行) 과 일본흥업은행 (日本興業銀行), 그리고 조선의 조선은행에 각 300만 위안씩, 총 900만 위안의 담보를 제공하고, 여기서 마련한 자금을 만주중앙은행, 조선은행, 그리고 요코하마 정관은행의에 융자를 받아 자본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부족한 분은 400만 위안은 현물을 일본측에 제공함으로서 생긴 금액을 사용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구조도. 이름처럼 다른은행들을 산하에 둔 '연합' 은행이었다. (이전 포스트의 기동은행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임시성격의 1차 정규권등장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은 2월 11일, 정식으로 설립이 되었고, 이로 부터 한달이 지난 1938년 3월 10일부터는 베이징(핑) 을 비롯한 여러지점들이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개업날에는 왕커민을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위의 베이징 본부사무소에서 열린 개행식에 참가했고, 이자리에서는 국기 (임시정부의 오색기) 의 게양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개업식을 마친 오전 10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드디어 정식 영업을 시작했다. (본래 3월 1일 개업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내부 사정으로 10일로 연기 된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생기기전부터 이미 북평의 인쇄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전 청나라 시기의 은행, 대청은행(大淸銀行)의 지폐활판을 가져와 이를 개조해 지폐발행을 이미 준비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만주나 몽강에서 처럼 임시권 사용이 없었던 이유는, 정부 수립직후부터 임시정부가 자체화폐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 측에서는 초기 화폐로서 '조선은행권' 의 유통을 고려했었다. 만주중앙은행이나 몽강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은행권에 '중국연합준비은행' 도장을 찍어 사용하려 했다. 조선은행권은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군표로서 사용했던 화폐이기도 했고 발행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약 7천만 위안)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너무나도 많은 조선은행권이 필요할것으로 예상되었고 (4억 위안이상이 필요할것이라 보았다), 또한 조선은행권 자체는 화북에서 유통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은행과 유통되고 있는 조선은행권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단념하고 자체 화폐 발행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런 임시권 사용보다 빠르게 자체 화폐를 발행하고 옛 화폐들을 자신들의 신화폐로 교환시키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임시권을 발행하지 않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개업과 동시에 등장한 1차시리즈. 하지만 이들은 임시권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등장과 동시에 생겨난 1차 시리즈는, '정규 1차' 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임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첫 화폐들은 앞에서 소개했던 대청은행의 활판을 재사용한 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 청나라 시기의 화폐를 아주 조금만 바꾸어 자신의 화폐로 사용했다. (은행 이름을 연합준비은행으로 바꾸고, 그려진 인물을 황제에서 다른 인물들로 바꾼것에 불과했다.)
1909년 발행된 대청은행의 지폐와 1938년 발행된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지폐 (10원). 은행이름, 그리고 인물을 섭친왕 재풍에서 관우로 바꾼것외에는 대부분의 요소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이때 발행된 화폐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서양산 종이의 재고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재고는 얼마가지 않아 바닥났고, 그렇기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마날라 삼(蔘) 재질의 새로운 종이를 수입해와야 했다. 그리고 새종이로 지폐를 만드는 과정에서 도안을 일부 수정하게 된다.
일본측에서는 이러한 도안에 만족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지나정세요람(新支那現勢要覧) 에서는 이러한 신 지폐들의 도안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의 화폐를 "역겨운" 쑨원의 초상화나 서양지폐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모습이 사라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러한 초대 화폐의 발행과 동시에 구 화폐들의 회수 / 교환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화북지역은 너무나도 많은 종류의 화폐가, 너무나도 많이 발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인쇄국에서 지폐를 발행이 이들을 모두 대체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임시정부는 이들 옛 화폐들의 사용을 임시적으로 허가하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영업을 개시한 다음날인 1938년 3월 11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은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을 공표하고, 옛 화폐 : 연합준비은행권 (연은권)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함과 동시에, 일정기간동안 옛 화폐들을 임시로 사용할 수 있게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옛 화폐들에게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부여했다.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 1938.3.11
중국연합준비은행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 기동은행(冀東銀行) 의 화폐 / 교통은행(交通銀行) 북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북방권 / 산서성은행(山西省銀行) / 산동-산서 지역의 지역은행들 → 1939년 3월 10일까지사용가능 (1년)
교통은행(交通銀行) 남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남방권 / 중앙은행 (中央銀行)
중국실업은행(中國實業銀行) / 북양보상은행 (北洋保商銀行) / 중국간업은행 (中國墾業銀行) / 절강흥업은행 (浙江興業銀行) / 대중은행 (大中銀行) / 변업은행 (邊業銀行) / 중국농공은행 (中國農工銀行) / 중남은행 (中南銀行) / 중국통상은행 (中國通商銀行) / 농상은행 (農商銀行) / 사명은행 (四明銀行) / 중국농민은행 (中國農民銀行) 의 화폐 → 1938년 6월 10일까지 사용가능 (3개월)
소액권 (角,分,厘) → 1941년 5월 31일까지 사용가능 (3년)*
(이후에는 연은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용불가)
*는 1938년 5월 28일 추가된 내용
여기서는 각 은행권마다 사용기간을 제한했다. 기동은행이나 하북성은행처럼 이전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적었던 은행들에게는 1년이라는 여유로운 사용기간을 부여한 반면, 이전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은행들에 대해서는 3개월이라는 짧은시간을 부여했다.
그리고 1938년 5월 28일에는 《소액지폐급보조화정리변법 (少額紙幣及補助貨整理辨法) 》을 발표해 6월 1일부터 각(角)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옛 은행들의 소액권 (각, 분, 리) 에 대해 3년동안 사용을 할 수 있게 했다. 3년이라는 긴 유예기간을 준 것은 민중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자 동시에 소액권 발행에 필요한 금액을 절약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6월 1일에는 각(角) '지폐' 가 등장하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 에서는 이러한 소액권은 동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어떠한 이유로 이들은 동전이 아닌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이는 조례 조항속의 빈틈을 이용한 것으로,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 11조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 11조: 중국연합준비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의 종류는 1원, 5원, 10원, 100원 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동전의 종류는 5각, 2각, 1각, 5분, 1분, 5리 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동전도 지폐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을 이유로, 중국연합준비은행에서는 이 소액권들을 동전이 아닌 지폐로 발행하게 된다.
1938년 6월 1일 등장한 각(角) '지폐'들. 본래 계획에 없었던 2각짜리 지폐가 등장한게 흥미롭다.
하지만 이 지폐들도 위의 원(圓) 지폐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발행되지 못한채, 1938년 12월에는 새로운 도안의 지폐로 발행되게 된다. 각 정규1차 시리즈도 결국에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연은권의 지폐가 확립되는 것은 1938년 말 분(分) 지폐와 새로운 각 지폐가 등장하고 1939년 1월 새로운 원(圓) 지폐가 등장하고 나서야였다.
화폐 교환을 독려하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포스터.
그리고 중국연합준비은행은 1938년 8월 7일 오후 6시,성명을 발표하고, 위의 구통화정리변법에서 1년간 사용이 허가되었던 교통은행 - 중국은행 지폐에 대해 평가절하를 실시했다. 본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들 지폐에 1:1의 가치를 부여하여 교환을 진행하게 했는데, 계속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두은행의 법폐의 교환을 유도하기 위해 "장제스 정권의 법폐는 점점 신뢰성을 잃고 있다" 라는 이유로 1:1로 평가되고 있었던 중국은행 / 교통은행의 법폐에 대해 10% 평가 절하를 실시했다. 게다가 12월 10일 다시 한번 30%의 평가 절하를 실시하면서 (물론 이때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제공되었다) 화북에서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가지고 있던 이들 화폐의 가치는 1:0.6까지 떨어지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1 (1938.3)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0.9 (1938.8)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0.6 (1939.2)
중국연합준비은행의 1.5차 시리즈. 이 시기에 와서야 연은권은 진정한 확립에 이르게 된다.
1.5차 시리즈와 엔(円,圓) 블록 그리고 그 한계
1938년 말에서 1939년 초에 등장한 1.5차 시리즈에서는, 원(圓)의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38년 3월 공개된 1차 도안과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원의 경우 발행이 1939년 1월 부터 진행이 되었지만, 지폐에는 그대로 '중화민국27년 (1938년)' 이라고 표기를 해두었다. 각(角)의 경우 12월에 생산된 2차 버전은 베이징에서 인쇄가 이뤄졌던 것과 다르게 2각, 1각의 경우 일본 도쿄에서 인쇄가 되기 시작했다. 5각 짜리 지폐가 가장 흥미로운데, 지폐의 도안으로 바로 루거우차오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이 루거우차오에서 시작되었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이 일본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음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는 만주중앙은행, 몽강은행과 마찬가지로 모두 일본은행권과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제국은
일본은행권 1엔 = 조선은행 1원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 중국연합준비은행 1원
라는 일본-조선-만주-북지(화북) 을 연결하는 이름바 '엔(円) 블록'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일본은 임시정부 지역에서 법폐를 말살하기 위해 더더욱 노력을 가해갔다. 1939년 2월 11일에는 재정부훈령을 통해 모든 예금에서 연은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즉, 법폐로 넣은 예금도 받을 때는 연은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보았듯 평가절하된 가치를 반영했다.)
그리고 구통화관리변법에서 정한 1939년 3월 10일자로 소액권을 제외한 법폐가 완전히 사용금지되면서 임시정부 지역은 이제 연은권으로 완전히 통일되게 되었다. 화폐 발행수도 이 시점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세워지 당시 화북에서 유통되고 있을것이라 추정한 3억~4억 위안을 넘게 되게 되었다.
동아경제독본 (東亜経済読本, 1941) 에 묘사된 연은권의 발행수. 1939년 여름에는 3억위안을 넘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이렇게 빠르게 지폐발행수를 늘린데에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법폐를 대체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유통하고 있었던 군표를 대체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은행권을 화북에서 군표로 사용했는데, 이 군표의 유통량이 만만치 않아 화북 지역에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은 화폐 발행량을 늘려 지역에 유통되었던 군표, 즉 조선은행권을 모두 연은권으로 바꾸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화폐의 통일과정속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1939년 5월 5일 오후 4시에 개최된 제1차 주주총회에서 왕시징 총재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큰이익을 거두었음을 당당히 발표하기도 했고, 외화도 취급하게 되었으며 1938년 8개에 불과했던 지점이 12개로 증가하는등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성장을 거두고 있었다.
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사진집인 대동아사진년도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에 실린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영문광고. 로고와 함께 설립일이 1938년 2월 11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중 하나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세는 전쟁의 지속속에 오래가지는 못했다. 우선 목표로 했던 법폐의 말살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임시정부내에서도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법폐나 공산당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임시정부에 둘러쌓인 톈진 조계에서는 조계당국과 조계를 구성하는 서구 열강들이 기를 쓰고 연은권의 유통을 막으려 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1939년 8월 9일자로,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을 더이상 중화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화민국 임시지역을 방문하는 일본,조선, 만주의 사람들은 모두 입국과정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연은권으로 교체해야 했다 (제한은 500위안까지). 선박을 통해 방문하는 이는 선박내에서 가지고 있는 조선-만주-일본돈을 연은권으로 모두 바꿔야 했고 항공기를 이용하는 경우 도착 비행장에서 환전을 하게했다. 육로 (기차등) 를 이용하는 경우 만주국-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국경의 교환소에서 교환을 해야했다. 이러한 내용을 화북지역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강조하는 기사가 1939년 8월 12일자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1940년 6월부터는 연은권 사용을 방문하는 일본,만주,조선 사람은 특별한 허가가 없는한 200위안까지만 연은권으로 바꿀수 있게 되었다. (단 만주국-구 중화민국 임시정부 국경을 통해서는 500위안)
이후 만주국에서도 연은권이 사용금지되고 (1940년 5월), 조선, 일본에서도 연은권이 사용되지 않게 되면서 (1940년 6월) 연은권은 원블록에 속해있지만 사실상 화북에서만 통용되는 화폐가 되게 되었다. 이런 조치는 일본측에서 연은권의 남발과 그속에서 생겨나는 인플레이션이 일본국내까지 전파되는것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연은권이 이제 이전과 같이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연은권은 필요이상으로 발행을 이어나갔고, 위에서 본 1939년 3월의 발행고가 3억 위안이었는데 1940년 10월에는 그 두배인 6억 위안 가까이까지 발행이 이어지면서 지폐가 초과발행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런 연은권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자본을 투입해야 했고, 일본측에서는 이를 부정했지만 일각에서는 연은권의 가치절하설이 돌기도했다. 연은권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북정무위원회에서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수립에도 그 실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도 난징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몽강이 그랬던 것처럼 중화민국 임시정부 또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정부에 통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그 실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이었던 중국연합준비은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 정부수립과정에서 왕징웨이측은 신중앙정권의 신중앙은행이 몽강(몽강연합자치정부), 화북(중화민국 임시정부), 화중(중화민국 유신정부) 지역을 모두 통괄하기를 바랬으나 일본과 임시정부의 요구로 이를 실현시킬 수 없었다.
또한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동시에 설립된 화북정무위원회에서는 '신중앙정부의 중앙은행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연은권의 지위는 변함없을것이며 더더욱 강화될것'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정권의 등장에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이었던 중앙저비은행은 화중에 그 영향력을 제한받았다.
또한 화북정무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일본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지배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의 난징정부가 발행량을 보고 하라했지만 제대로된 수치를 보고하지 않았고, 1943년에는 심지어 총재였던 왕시징이 "화폐발행량을 화북정무위원회와 난징에 보고해야한다" 라고 해도 이를 듣지않는등 이때부터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영향에 놓여있게 된다. 이렇게 화북정무위원회도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이전부터 초과발행되던 연은권의 발행을 더더욱 늘리게 되었고, 본래 4억가량으로 추정되었던 구 법폐 유통량을 뛰어넘어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1년 말에는, 발행액이 10억위안에 가까워지면서 화폐는 더더욱 남발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모두 화북의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톈진과 도쿄의 물가상승률 비교. 쇼와12(1937) ~ 쇼와 17(1942) 사이 도쿄의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았지만, 톈진의 경우 4배 넘게 물가가 올랐다.
1938년 1월과 1942년 1월의 물가 비교 (1937년 6월 도쿄물가를 100이라고 했을때)
도쿄 : 102.9 → 147.2 (+45.3)
톈진 : 111.9 → 468.1 (+357.2)
베이징과 도쿄물가 비교 (도쿄의 가격을 1이라고 했을때, 1942년 초)
백미 → 1 : 3.2
청주 → 1 : 2.8
차 → 1 : 1.8
설탕 → 1 : 2
간장 → 1 : 4
연은권의 남발 속 베이징의 물가는 도쿄의 물가보다 더욱 비쌌다. (고기나 계란같은것은 베이징이 더욱 저렴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상품은 도쿄보다 베이징이 비싼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이용해 전쟁자금을 대려 화폐발행번호 조차 기입하지않은 화폐를 대량 남발하면서 이러한 물가는 더더욱 오르게 된다. 일본은 심지어 화폐활판을 복제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아닌 일본군 자체적으로 화폐를 제작해 마치 군표처럼 유통시켜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화북정무위원회 치하에서는 이전에 해결되지 못했던 톈진 조계에서의 연은권 사용문제와 관련해 1940년 6월 20일, 조계측이 연은권의 사용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일본, 임시정부측과 합의를 하게 되면서 톈진 조계에서도 연은권이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은권이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인 1941년에, 제2차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 2차시리즈에서는 이전에 지폐로 대체되었던 소액권들이 본래 계획대로 동전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1941년에 등장한 2차 시리즈.
2차 시리즈에서는 지폐의 경우 인물에는 변화가 없었고, 건물의 경우 베이징 자금성의 건물들을 많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인쇄표시가 '화북정무위원회인쇄국발행' 이라 표시함으로서 은행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화북정무위원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전의 경우 1각, 5분, 1분 3종류가 등장했는데, 만주나 몽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 알루미늄 소재를 채택했다. 5각짜리 동전이 등장하지 않은 것이 의외한 부분이다. (이전에 발행된 종이 소액권도 모두 통용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연은권이 너무나 발행되고 있음을 인식은 하고있었기에 1940년 9월부터 "이제 연은권에게 중요한건 물가와의 싸움" 이라 이야기 하면서 연은권의 안정을 이야기하고 연은권의 가치가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실제로는 상황은 더욱 악화되면 악화되고 있었지, 나아지지는 않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전시경제체제가 공영권 전체로 확대됨에 따라 이름바 '원(엔) 블록'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시경제체제속 만주중앙은행과 중국연합준비은행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은행들은 물자,자원의 수탈과 이로인한 부족상황 속 맞이한 자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은행 설립 5주년이 되는 1943년 3월 10일에는 일본은행에서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원조하기 위해 2억위안을 제공하기로 하고, 6월 29일에는 만주중앙은행도 9천만 위안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이러한 자금지원에도 이미 남발되고 있는 연은권의 추락을 저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2.5차 시리즈 (1943) . 화폐의 남발과 인플레이션속 고액권이 등장했다.
1943년에는 10원권, 100원권 고액권의 디자인을 수정하고, 500원이라는 새로운 고액권 화폐를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 도안들도 오래가지 못하고, 1944년에 되어 또한번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1943년, 연은권의 가치는 계속하락하고 있고 발행고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왕시징 총재와 화북정무위원회측은 계속하여 물가안정을 이야기했지만,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장기화 속 전비마련을 이유로 이를 신경쓰지 않았고 화북정무위원회와 은행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앞에서 톈진의 물가가 4년사이 4배 이상 올랐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1943년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북정무위원회의 자체조사에서도조차, 1943년 12월 기준, 톈진의 물가는 더더욱 올라 전쟁전에 비하면 "11배" 이상이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재앙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진정한 재앙은 1944년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중국연합준비은행
1944년에 등장한 3차시리즈.
1944년에는 모든 지폐의 도안이 수정된 새로운 3차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 3차시리즈에서는 종이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고액권을 제외하면 모두 크기를 줄였고, 잉크 사용량도 줄이기 위해 도안도 일정부분 바꾸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화폐남발로 인한 이름바 '초' 인플레이션의 발생으로, 소액권은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물론 이전까지 유통된 구권을 계속 사용하게했다.)
이권의 특징으로는, 1원, 5원, 10원에 화폐를 식별할 수 있는 번호가 기입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 3종류의 화폐가 너무나도 많이 발행되어 식별번호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3차 시리즈를 시작으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에는 재앙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재앙은 바로 발행고가 너무나도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일본과 임시정부 (이후 화북정무위원회) 측은 1940년부터 연은권이 예상보다 많이 유통되어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위한 안정화작업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화폐발행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41년 말 10억위안이 조금안되던 화폐발행량은 1944년말에는 '162억 위안' 을 넘겼다.
1938년 말 : 1.62억 위안
1941년 말 : 9.66억 위안
1944년 말 : 162.25억 위안
1944년 9월 13일 일본은 일본은행을 통해 추가로 2억 위안을 지원했지만 (게다가 이것은 5년이라는 기간도 있었다.) 이미 발행액이 통제할수 없을 정도로 커진 연은권의 붕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44년부터는 연합국이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위해 항공기를 이용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는데, 그 위조화폐에는 만주중앙은행권과 중국연합준비은행권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화폐발행고속에서 이런 위조지폐까지 공급되어버리면서 더욱 혼란이 찾아왔고, 앞에서 보았듯 일본군도 이 연은권을 자체적으로 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많은 발행량 + 일본군의 독자적발행 + 연합국의 위조지폐살포로 화폐의 남발속 화북의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속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찾아오는 자원과 물자의 부족은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다.
1944년 말 또한번 변경된 10원권. 이 10원권도 식별번호가 없었을 뿐더러 발행주제도 연은, 일본군, 연합군, 신민회 등등 너무나 많은 곳에서 발행되어 엄청난 수가 유통되었다. (심지어 이들 주체마다 잉크도 다르게 사용해 색도 달랐다.)
중국연합준비은행 측에서는 이런 연합국의 공작을 막기위해 10원권의 도안을 새로이 변경하는 등 술책을 썼지만, 이러한 시도도 큰 성과를 거두지못하면서 발행량이 자꾸만 늘어만 가는 상황은 바꿀 수 없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마지막 화폐들. 이시점에서 화폐는 화폐용지에 인쇄되지도 못했다. 일반종이에 돈이라고 찍혀 나오는 수준이었다.
1945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어 새 화폐가 화폐용 용지도 아닌 일반용지에 찍혀나오기 시작했고, 이런 성질때문에 100원권의 경우, 연합준비은행도, 일본군도, 신민회도 다른 주체들도 마구잡이로 인쇄를 시작했다. 본래 인쇄국이었던 베이징의 화북정무위원회 인쇄국에서만 30억위안 이상의 100원 화폐가 발행되었고 모든 발행주체의 생산량은 '추산치만 550억 위안' 가량이 될정도이다. 이시기에 도난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도난 단위가' 1억' 위안정도일 상황이니, 얼마나 많은돈이 시중에 풀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시중에 나오지 못했던 5,000원권. 하지만 이 오천원권은 일본항복 이후 교환과정을 위해 다시 유통되게 된다.
10원권의 경우 1944년에 만들었던 디자인과 1944년말에 만들었던 디자인을 혼용하여 발행했다. 또 1,000 원권이라는 고액권도 등장했으며, 이후에는 5,000원 권이라는 더 고액권도 등장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화폐의 남발속 주민들은 연은권에 대한 완전히 신뢰를 잃고 이돈을 '한간돈(漢奸票)' 혹은 '앞잡이돈(走狗票)' 이라 부르기도 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사라지기 전까지, 발행되었던 화폐는 '1,915억 위안' 가량이었다. (1,423억 위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수치는 이미 붕괴조짐이 보이던 1944년보다도 10배를 넘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의 결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연합준비은행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중국연합준비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만주에서도, 몽강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연은권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북정무위원회의 붕괴 이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연은권의 경우 몽강이나 만주와 달리 빠르게 교환이 시작되었다. 만주나 몽강에서 1년~2년가까이 더 사용되었던 만주중앙은행권과 몽강은행권과 달리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연은권의 경우 1945년 11월 22일 부터 국민정부가 법폐로 교환을 시작하게 했다. 이는 그만큼 연은권의 가치가 붕괴되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 연은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0.2원 (0.2 : 1)
교환은 연은권의 가치가 폭락해버린 만큼 교환에 있어서 법폐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항복 직후에는 국민정부가 연은권 : 법폐의 가치를 1:1로 통용하게 했지만, 교환과정에서는 그 낮은가치를 반영해 0.2:1 이라는 교환비를 가지고 교환이 되게 했다. 공산당지역에서도 교환은 진행되었지만 어떤은행으로, 어떤비율로 교환이 진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후 이부분을 더 알아보고 싶다.)
1946년 중순이 되어서는 국민정부지역, 공산당점령지역 모두 연은권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이로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출처]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 : https://dl.ndl.go.jp/pid/1437734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2월 : https://dl.ndl.go.jp/pid/1438178/1/22
통제경제독본 4정판 : https://dl.ndl.go.jp/pid/1709768/1/272
동아경제독본(東亜経済読本) : https://dl.ndl.go.jp/pid/1281545
흥아경제론 - 몽강 / 북지 : https://dl.ndl.go.jp/pid/1459430/1/111
조선일보 1938년 5월 29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529002391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8-05-29&officeId=00023&pageNo=1&printNo=6124&publishType=00010
조일동아연보 쇼와 13년 (朝日東亜年報 昭和13年) : https://dl.ndl.go.jp/pid/1143488/1/157
중국연합준비은행 건물자료 : https://zh.wikipedia.org/wiki/%E5%8C%97%E6%B4%8B%E4%BF%9D%E5%95%86%E9%93%B6%E8%A1%8C
중국연합준비은행 영업사진 : https://kknews.cc/news/j3mq55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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