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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⑤ 화흥상업은행 (중화민국 유신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중화민국 유신정부 - 화흥상업은행(華興商業銀行) 

옛 화흥상업은행 2대 본점자리 (현 중국대륙 상하이시 대명로 65호, 上海大名路65號). 현재는 일반 상가들이 입점해있다.

중앙은행이 아닌 '상업은행' 

화흥상업은행은 1938년 3월 28일 난징을 수도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상업은행' 으로, 1939년 5월 16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상업은행임을 강조한 이유는 밑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화북지역과 마찬가지로, 당시 화중지역에서도 이전의 법폐와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군표가 남발되고 있었다. 또한 이 화중지역은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 경제적 중심지 상하이가 있었던 만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유신정부에게 있어 이지역의 경제를 장악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세워졌지만, 유신정부에게는 임시정부와 같은 강력한 국가주도의 금융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신정부는 이를 위해 1939년 4월 22일, 유신정부는 유신정부행정원령으로 《화흥상업은행조례 (華興商業銀行條例)》 를 공표, 화흥상업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조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흥상업은행조례 (華興商業銀行條例)

명칭: 화흥상업은행(華興商業銀行)
조직형태 : 유신정부 정부법인
자본금 : 5천만 위안
출자 : 유신정부와 일본측은행이 각각 절반씩 부담하기로 함. 하지만 중국의 민간자본 혹은 제3국자본이 참가에 호의적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기로함.
일본측은행은 일본흥업은행, 대만은행, 조선은행, 미쓰이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모토은행
업무: 무역통상관계에서의 금융에 중점을 두기로함.
특권 : 강제통용력이 있는 은행권의 발행 / 개업일과 동시에 유신정부로 부터 무이자로 1천만 위안을 제공받기로함.
발행권 : 10원(圓), 5원, 1원 / 보조단위로 2각(角), 1각 5종류, 대체로 법화와 그 가치를 같게하여 자유롭게 태환할 수 있게 함.
국고업무 : 신은행은 유신정부의 국고은행업무역할을 하게 함.
영업기간 : 3년 (3년마다 정부 허가를 통한 갱신가능.)
본점 : 상하이시 두락안로 2호 (上海竇樂安路2號)
지점 :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우후(蕪湖), 전장(鎭江), 우시(無鍚)

이 조례에서는, 화흥상업은행이 만주의 만주중앙은행,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몽강은행,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중앙은행역할' 이 화흥상업은행에게는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장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 에서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성격을 확실한 국가의 중앙은행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화흥상업은행에서는 이런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례에서는 제3국자본의 참여를 환영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화흥상업은행의 설립에 참가한 제3국의 자본은 없었다.


정부는 중국연합준비은행으로 하여금 일반금융기간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하고, 타 금융기관의 업무에 대해 일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함. 
-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13조 

무역통상관계에서의 금융에 중점을 두기로함. 
- 화흥상업은행조례 中

화흥상업은행에 화폐발행권과 유통권은 부여되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중앙은행의 역할이라 보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일본은 화흥상업은행을 어디까지나 '상업은행' 으로서의 목적에 그치게 하려 했다. 그리고 주목해야할 부분은, 화흥상업은행의 경우, 화폐가치의 기준을 '일본 엔(円)' 이 아닌 '법폐(圓)' 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즉 앞에서 만주,몽강, 화북의 은행들을 소개할때 이야기했던

일본은행 1엔 = 조선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 중국연합준비은행 1원 =/= 화흥상업은행 1원 

 이라는 같은 가치로 일본과 조선, 조선과 만주, 만주와 화북을 연결하는 일본의 통화경제권인 '원(엔) 블록' 에 화흥상업은행은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 블록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법폐에 대한 조치가 달라짐도 의미한다. 화흥상업은행의 설립과정에서는 구 법폐에 대한 조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만주와 몽강, 화북의 것과 달랐다. 화흥상업은행은 설립과정에서 법폐를 모두 회수하려하고 말살하려 했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달리 법폐와의 '공존'을 추구하려했다. 법폐도, 화흥은행의 새화폐도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교환이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이 또한 일본의 화중지역 경제장악을 위한 일종의 술책이었다.


본점의 경우, 조례에서는 상하이시 두락안로2호[上海竇樂安路2號, 현재는 건물이 철거되고 상하이패션빌딩(上海時裝商廈)이라는 건물이 들어서있다.] 에 두기로 했지만, 이후 위에서 보았던 상하이시 대명로65호(上海大名路65號) 로 옮기게 된다. 조례에서는 영업과 동시에 난징을 비롯한 지점의 영업도 개시하려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난징 지점을 제외한 다른 지점들은 영업시작이 연기되었다.




중화민국유신정부개사 (中華民國維新政府概史) 에 존재하는 화흥상업은행 본점 (두락안로 시절) 의 사진.

이렇듯 화흥상업은행은 만주나 몽강, 화북의 은행들보다 시작부터 애매하고 약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당시 화흥상업은행의 설립을 보도하는 신문기사에서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은행의 화폐의 성격이 만주,몽강,화북의 것과 다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렇게 화흥상업은행에 작은 역할만을 부여한 이유로는 몇가지가 이유가 있는데, 첫 째화흥상업은행이 만들어질 당시 유신정부가 처해있는 위치였다.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달리 이미 자기 스스로를 '임시적인 정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흥상업은행이 세워지기 10개월전인 이미 1938년 9월 부터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하고 통합논의를 이미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이때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정부가 왕징웨이측이 아닌 임시정부에 통합될 것이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이런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정부에 굳이 중앙은행을 설치하여 통합이후 작업을 어렵게 할 필요가 없었다.


둘 째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는 임시정부와 다른 특성이다. 대민회를 소개할때도 언급했지만,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사들은 완전한 친일을 선택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국민당으로서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는 싫어" , "국민당은 좋은데 국공합작이 싫어" 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反공산주의, 反장제스주의자들로 반공, 반장을 위해 일본을 선택한 것이지, 임시정부의 인사들처럼 완전한 친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유신정부가 왕징웨이정권이 부드럽게 흡수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이들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곳 중 하나인 이전 국민정부 수도 난징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특성 때문에 일본은 압도저인 영향력을 지배할수 없는 유신정부의 화중에 임시정부의 화북보다 중요도를 크게 두지 않았다.


셋 째는 본래 일본의 경제블록구상이 화북까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엔(원) 블록을 구상할 당시 초기에는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일만조블록을 구상했고 이후에 화북이 이곳에 추가되었는데, 화중은 아니었다. 일본은 '화북의 특수성' 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 화북을 확보하려 여러 모습을 보였지만 화중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제권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중요도도 떨어지는 유신정부 지역에 화북에서와 같은 작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대민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화흥상업은행의 성립과정.

그리고 조례에 따라, 자본금 5천만위안유신정부가 절반, 일본측 은행들이 절반을 부담하기로 함에 따라, 상하이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계 은행 6개 (조선은행, 대만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토모은행, 미쓰이 은행, 일본흥업은행) 이 절반 2500만 위안을 부담하기로 했다. 5천만 위안이라는 자본금만 두고 보았을때 화흥상업은행은 같은 5천만 위안의 자본금으로 영업을 시작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같은 체급을 가지고 있었다.



상해의 신아대주점(上海新亞大酒店, New Asia Hotel) . 이곳에서 화흥상업은행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1939년 5월 1일에는 화흥상업은행의 창립대회가 상하이의 신아대주점(新亞大酒店) 에서 열리게 되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행사에는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梁鴻志) 행정원장을 비롯한 유신정부 주요인사들과 일본측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량홍즈 행정원장이 축사를 낭독한 이후, 화흥상업은행의 주요 인사들을 선출하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총재로 유신정부의 전 재정부장관이었던 첸진타오(陳錦濤, 진금도, 하지만 이후 건강문제로 사직) 를, 부총재로는 만주중앙은행의 전 이사였던 와시오 이소이치(鷲尾碕一) 를, 그리고 이사와 다른 직들을 임명하게 된다. 행사는 오후 1시에 끝났고 이로소 화흥상업은행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그리고 1939년 5월 16일부터 화흥상업은행은 정식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본래 10일에 영업시작을 계획했으나 연은처럼 내부사정으로 연기되었다.)

화흥권(華興券)의 등장, 그렇다면 화폐의 확산은 어떻게? 



화흥상업은행의 첫 화폐시리즈.

이렇게 등장한 화흥상업은행의 화폐 '화흥권' 은 화흥상업은행의 영업과 함께 공개되었다. 화폐에는

민국27년 (1938) 인쇄가 되었다고 적혀있지만, 실제 인쇄는 민국28 (1939)년에 이루어졌다. 화흥권 원(圓) 단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憑票卽付國弊壹(伍,拾)圓 = 이 지폐를 1원 (5원,10원) 으로 사용하는것을 허가함.

화흥권에는 연은권이 그랬듯, 화중지역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투입되었다. 쑤저우, 난징의 풍경이 지폐에 사용되었으며 인물은 한명도 등장하지 않은게 특징이다.


앞에서 보았듯, 유신정부는 법폐의 회수도,강제교환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전에 쓰이던 법폐와의 공존을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유신정부와 일본은 어떻게 이 태환권과 같은 화흥권을 확산시킬것인가?


첫 째, 장제스의 충칭정부가 내세운 금융안정판법(金融安定辦法) 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충칭정부는 1939년 6월 11일, 법폐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자 금융안정판법 (2차)을 발표해 모든 예금의 인출을 제한했다. 그렇기에 법폐를 사용하는 민중들은 국민정부 지역이든 일본점령지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금을 인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화흥은행권은 법폐와 같은 가치를 가지게 한다" 라고 했던 화흥상업은행조례가 기억나는가? 유신정부는 화흥권의 가치가 법폐와 같음을 이용해 화흥상업은행은 화흥권을 통해서는 예금의 인출이 가능하게 했다. 예금을 가지고 있는 민중들은 언제 가치가 폭락하고 언제 다시 인출이 가능해질지 모르고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법폐의 옛 가치를 보장받는 화흥권을 통해서 예금을 찾던가, 예금을 계속하여 방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에 힘입어 유신정부측은 법폐가 붕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붕괴하는 법폐에 대비해 화흥권을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둘 째, 무역과 통상에 있어서는 무조건 화흥권을 사용하게 했다. 유신정부는 앞에서 보았듯 법폐와 화흥권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했다. 하지만 무역과 통상에서는 무조건 화흥권을 사용하게 했다. (이는 화흥상업은행조례의 '강제통용력' 을 이용한것이었다.) 때문에 상인들은 화흥권이 아니면 무역과 통상을 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가지고 있던 법폐를 교환할 수 밖에 없었다. 관세의 경우에도 화흥권으로만 지불할 수 있게 해 상하이의 공공조계에서도 거래를 위해서는 화흥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셋 째, 유신정부 정부내에서는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유신정부의 군인, 공무원등 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봉급으로 화흥권만을 지급받았다. 또한 세금납부를 비롯한 공공서비스에서도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법폐보다 우위에 서는 방법을 사용하려 했다.


넷 째, 외화 취급에도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즉, 유신정부의 주민은 외화로 환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법폐를 화흥권으로 바꿔야만 했다. 이렇듯 일본과 유신정부는 화흥권을 특정부분에서 사용을 강제함으로서 법폐와 공존하면서도 법폐를 대체할수 있는 신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법폐와의 동등가치 포기 

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사진집인 대동아사진년도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에 실린 화흥상업은행의 영문광고. 화흥상업은행의 로고를 확인할수 있는 자료중 하나이다. (華를 형상화한것이 로고.)

하지만 화흥권은 등장으로부터 3개월도 되지않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본래 화흥권은 법페와 1:1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법폐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있음에 따라 (1939년 1월대비 7월 30% 하락) 더이상 법폐와 동등가치를 지키기 어려워 진 것이다. 이에 유신정부는 1939년 7월 19일 성명을 발표하고, 더이상 화흥권의 가치기준을 법폐와 연동시키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유신정부는 화흥권의 가치를 독자적인 기준을 두고 마련하게 된다.


보통 법폐의 가치를 영국의 파운드화와 비교하는데, 이에 따르면 법폐는 1위안 = 8페니 (약 3.36 펜스, 0.015파운드,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원정도 ) 라는 가치를 1938년부터 유지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1939년 전쟁의 장기화속 일본의 방해공작, 금융안정판법등과 같은 조치들로 법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 유신정부가 법폐기준을 포기한 1939년 7월의 시점에서는

1938년 : 1위안 = 8페니 (약 3.36펜스, 약 0.015파운드)
1939년 7월 : 1위안 = 5페니 (약 2.2펜스, 약 0.009파운드)

까지 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39년 8월에는 1위안 = 3페니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후 1939년 말에는 다시 5페니 수준까지 복구가 되긴 된다.) 아무튼 이로 인해 화흥권은

화흥상업은행 1위안 = 6페니 (약 2.52펜스, 약 0.01파운드)

라는 독자적인 기준을 세우게 된다. 이후 법폐의 가치가 더더욱 떨어져 1위안 = 3페니 근처까지 떨어지게 되면서 이 시점부터 화흥권은 법폐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각(角) 권 소액권은 이전처럼 법폐와 같은가치를 가지기로 했다. 즉 이러한 독자기준은 원(圓) 권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유신정부는 이와 동시에 화흥권을발행을 독려하고 화흥권을 안정적이라 이야기하며 주민들로 하여금 화흥권으로 빠르게 교환하라하면서 법폐를 금지하지 않고도 법폐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화흥권의 현실과 한계 

1939년 7월, 화흥상업은행의 성립으로부터 반년도 되지않아 유신정부는 왕징웨이의 신정권으로 흡수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속에서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은 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첫 째로 화흥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이다. 앞에서 보았듯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스스로를 곧 통합될 존재, 임시적인 존재라고 존재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도 화흥상업은행에 큰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고 화흥상업은행은 화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런 시작부터 부여되었던 한계성 속에서 화흥권은 위에서 언급한 조치들에도 크게 유통되지 못한다. 1940년 1월 기준으로 유통된 화흥권은 '530만 위안' 에 불과했다. (화흥권의 발행이 중단되는 1940년 12월까지도 560만 위안에 불과했다) 중화민국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연은권이 설립 1년도 되지않아 '1억 위안' 이 넘는 발행고를 올린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수치였다. (심지어 몽강은행도 1939년 기준으로 4천만 위안 가량의 발행고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법폐와의 공존주의를 선택하고, 그속에서 화흥권이 더 우월함을 증명해 화중지역에서 법폐보다 우위에 서려했던 화흥상업은행의 생각과 달리, 화중지역에서 법폐의 영향력은 위에서 본것과 같은 조치들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화중지역은 본래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과 경제중심지 상하이가 있었던곳으로 가장 법폐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이런 화중지역보다 법폐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낮았던 화북지역에서도 법폐의 말살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법폐의 영향력이 가장 높은 곳이자 가장 유통고가 많은지역이며 게다가 법폐와 공존주의까지 선택한 화흥권이 절대적 영향력의 법폐의 다발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화흥권은 연은권이나 만주중앙은행 원과 달리 다른 지역에서의 유통은 아예 없었으며, 오로지 화중지역에서만 그 유통이 가능했는데, 그 화중에서도조차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화흥상업은행의 경우 일본측은행들과 협력관계에 있었고 원블록의 일원으로서 일본이나 만주에게 자금지원도 받을 수 있었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달리 화흥상업은행에는 거의 아무런 지원이 이루어지지않았다.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에서도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흥상업은행의 협력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블록도 아니며, 완전한 지배력도 없으며, 화폐일원화도 하지 않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은행에 일본은 지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화북지역에서는 발행을 중단했던 군표를 화중지역에서는 계속 발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왕징웨이정권에서의 화흥상업은행 
8. 대외무역을 진흥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중앙은행을 재건하여 폐제를 통일해 사회금융의 기초를 확립한다. - 왕징웨이정권의 10대정강 (1940.03.30)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되면서 화흥상업은행은 또한번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난징국민정부의 성립과 동시에 10대정강을 발표해 자신의 정권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중 8번째는 '신중앙은행의 설립' 이 존재했다.


하지만 화흥상업은행은 계속하여 영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는 왕징웨이정권의 신중앙은행이었던 중앙저비은행의 설립작업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일본뿐만 아니라 초대 총재 첸진타오를 이어 총재가 된 구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도 기자들의 질문에


"화흥권의 발행은 많지 않다. 하지만 화흥상업은행은 충분한 외화보유고를 가지고 있어 극히 온건한 상황이기에 휼륭한 성과를 내리라 믿고 있다. 신중앙정부 설립이후 화흥상업은행의 지위는 본래 유신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은행으로서 중앙정부설립이후에는 규정에 따라 인계되는 것이 맞으나, 정부와 직접 관계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화흥상업은행을 확대해 신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나로서는 화흥상업은행을 상업은행으로서 계속하여 지금처럼 견실하게 유지할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 량홍즈, 1940년 7월

화흥권의 발행수가 스스로 많지 않음을 인정하면서까지 "화흥상업은행을 계속 유지시켜달라" 라고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측의 분류에서도 일개 상업은행에 불과한 화흥상업은행을 무리하여 통합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화흥상업은행은 계속하여 영업을 진행하고 화흥권을 계속하여 발행하게 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 시리즈도 유통을 시작하게 된다.



1940년 등장한 화흥상업은행의 동전들. 10분짜리의 경우 청동으로 제작되기도 했고 백동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1분, 5분, 10분(1각), 20분(2각), 4종류의 동전으로서 이들은 앞에 등장했던 소액권 지폐들을 일정부분 대체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1분과 5분은 청동을, 10분과 20분은 백동을 사용했다. (10분의 경우 혼용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전들은 전쟁자원부족이라는 이유로 생산량이 아주 적었고, 게다가 화흥상업은행이 1940년 12월부터 화폐생산을 종료해버리면서 1년도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발행되었다. (10분 동전의 경우 꽤 발행이 된듯하나 5분 동전과 20분동전은 아주 적은수가 발행되어 사진자료가 아주 적은 편이다.) 게다가 이들 소액권은 중앙저비은행이후 대부분이 회수되면서 현재는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1분동전의 경우 70만원 상당에 거래되곤 한다.)


왕징웨이정권의 신중앙은행으로 중앙저비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12월 20일로 중앙저비은행법(中央儲備銀行法)이 통과됨에 따라, 화흥상업은행은 존치하되, 본래 상업은행의 역할만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1940년 12월 20일부터는 화흥상업은행의 화폐발행이 종료되고 화흥상업은행은 일반 상업은행으로 역할을 바꾸어 영업을 진행하게 된다.


발행되지 못했던 화흥상업은행의 2차 지폐시리즈. 인물구성은 연은권을 생각나게 한다.

화흥은행은 화폐발행을 중지하기 전에 5원권과 10원권을 새롭게 준비하고 도안까지 만든 상태였으나, 화흥권의 발행이 종료가 임박한 시점이었기에 이는 발행되지 못하게 된다.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의 결말 

그렇다면 이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저비은행법과 동시에 공표된 정리화폐잠행변법(整理貨幣暫行辨法)서는 화흥권의 정리를 규정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화흥상업은행의 화폐발행권을 취소하고, 화흥권은 회수하여 본행(중앙저비은행)의 본권(저비권)으로 교환하게 한다. (5조)

이에 따라 발행되었던 화흥권은 중앙저비은행에서 회수 & 교환 조치를 내리게 되어


화흥상업은행 1원 = 중앙저비은행 2.4원 (1:2.4)

라는 비율로 회수 & 교환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화흥상업은행은 일반상업은행으로 왕징웨이정권이 해체되는 1945년 까지 영업을 지속하다, 중일전쟁에서 국민정부가 승리한 후인 1945년 11월에 중국은행으로 흡수되게 되며 화흥상업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출처]


김성진, 김상옥 「만주국의 지폐 변천과 지폐 도안의 특징」, 『통권 7호』, 2019

중화민국유신정부개사 : https://dl.ndl.go.jp/pid/1453880

지나중앙은행론 : https://dl.ndl.go.jp/pid/1444804

대동아사진년보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 https://dl.ndl.go.jp/pid/1123693

화흥권 미발행권 자료 : http://asiamoney.weebly.com/rude-confuciu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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