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의 여명 (1941)
최종 수정일: 2024년 8월 5일
* 본 글에서는 박태원의 '아세아의 여명 (亞細亞의 黎明, 1941) 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글은 한국근대소설단편대계 (1988,이주형,권영민, 정호웅) 에서 수집된 1941년 당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박태원 (朴泰遠, 1909~1986). 소설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그는 1941년 왕징웨이에 관한 소설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아세아의 여명' 이다.
본자료는 한국근대소설단편대계 (1988) 에서 수집된 1941년 2월 『조광』 의 원문을 가져와 옮긴 것입니다.
서술과정에서는 편의성을 위해 한자표기를 한글로 바꾸어 표기합니다. (단 옆에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했습니다.)
본 자료작성의 목적은 역사적자료 공유에 있습니다. 만약 이 자료가 법 상으로 문제가 된다면 알려주시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亞細亞의 黎明 (아세아의 여명)
풍운 가득한 아세아대륙에 오래간만에 새벽은 찾아왔다. 화평구국의 큰뜻(雄志) 을 품은 왕징웨이(汪精衛), 저우포하이 (周佛海), 쩐중밍 (曾仲鳴) 등 애국 선혈 지사는 드디어 궐기하였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한날 우매한 장제스의 괴뢰는 아니었다.
한시를 빼지않고 그림자 같이 뒤를 떠보며 오로지 목숨을 노리는 자객의 물결을 헤치고 용약하게 공포의 도시 「충칭(重慶) 」 을 탈출하여 백절밸굴 일로만진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신정부를 수립하기 까지의 유혈사 (流血史) 구전기 (舊戰記) ! (소개글)
목차
화평 · 항전 - 312
밀사 - 324
탈출 - 334
동지 - 347
낭패 - 351
성명 - 354
제3처장 - 357
제2처장 - 363
회유 - 378
희생 - 394
(본 목차는 조광 (1941.2)의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화평(和平) · 항전(抗戰)
충칭의 하늘은 오늘도 잔뜩 흐렸다. 일년 삼백육십일에 해를 구경하는 날이 대체 며칠이 되느냐? 늘 그날이 그날로 충칭의 하늘은 흐리다. 그렇기에 옛말에 촉견(蜀犬)은 해를 보면 짖는다 하였다.
중화민국 27년 12월 9일, 가뜩이나 흐린 겨울날씨에 또 가릉강(嘉陵江) 을 건너 불어드는 바람이 치는 날, 충칭중앙은행(重慶中央銀行) 귀빈실에, 국민당의 요인들이 모여있었다. 왕칭후이(王寵惠), 바이충시 (白崇禧), 쉬모(徐謨), 구주퉁(顧祝同), 천부레이(陳布雷), 쩐중밍 (曾仲鳴), 이러한 무리들과 주석 장제스, 부주석 왕징웨이 …
난징이 함락된 뒤, 우한삼진(武漢三鎭)이 일본군의 수중에 돌아가고,창사가 한줌의 재로 되어버린 이제도, 오히려 초토항전을 부르짖는 무리들 앞에, 마침내 비통한 빛을 띠우고 부주석 왕징웨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늘도 이자리에서 다시한번 제군들에게 괴로운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왕징웨이는 좌중을 둘러보고 엄숙히 입을 열었다. "최후의 승리가 과연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이라면 물론, 철저한 항전도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공연한 흥분을 버리고, 좀 냉정하게 현재의 정세를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일이라, 제가 구테어 이자리에서 말씀 안하여도 좋을지 모르나, 우리들의 반성을 위하여 굳이 한말씀 합니다. 바로 두달전, 쌍십절 수일 전에, 일본군이 바이아스만(灣) 의 상륙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내외의 신문이 모두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동군 당국(廣東軍 當局)은 염체도 좋게 일본군에게는 광동을 공약할 역량도, 용기도 없으니 각계의 민중은 결코 요언을 경신(輕信) 하여 소요함과 같은 일이 있지 말라고 고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이미 바이아스 만에 상륙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광저우시를 향하여 급한 형세로 직격하여 오고있고 있음을 알자, 군정당국은 즉시 정부의 이동을 개시하고, 그뿐 아니라 철거와 도시에 온갖 상점민가에 불을 질러 버렸던 것입니다."
왕징웨이는 잠깐 말을 끊었으나, 쉬융창(徐永昌)이, 상반신을 앞으로 내어밀며 "그러나ㅡ" 하고 무슨 말을 이으려 할떄, 그는 그편은 돌아보지도 않고, 장제스의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은 얼굴만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최고군부는 이미 무한의 방기를 결정하고 있었음에도, 그래도 모든 사실을 감추고, 후베이(湖北), 장시(江西)의 성 변경지대에서는 연전연승하여 일본군 4개사단 이상을 전멸시켰고, 따라서 우한 지방은 반석(盤石)의 편안함을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지우장(九江)등의 지방도 머지 않아 이를 회복할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정부의 기관지만이 그렇게 보도한것이 아닙니다. 군사최고당국이 주석의 위로전보에 대해 보낸 답보속에도 그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수일이 못되어 우한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충칭시민은 이를 알턱이 없었습니다. 신문의 보도대로 우리의 승전을 믿고, 상점과 민가가 모두 축첩(祝捷)의 붉은 종이를 대문마다 붙이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온 거리를 뒤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손으로 창사를 불질러 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이는 본래 러시아인 고문의 계획으로, 우리군대가 부득이 퇴각을 하여야할 경우에, 하나의 물건도 일본군에게 이용당하게 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일본군은 아직도 창사로부터 수백킬로밖에 머무르고 있었음에도, 창사의 경비사령부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경솔하게 믿고 곧 시가지를 파괴하는 실행명령을 내려버렸습니다. 불길은 닷세를 연달아 하늘을 찌르고, 만명에 가까운 무고한 백성이 이 불로 하여 죽고 또 다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결코 과신(過信)해서는 못씁니다.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상의 세가지 사건에 비추어 확실히 인식하여야 할것입니다. 내부가 이처럼 부패하고, 암흑한 까닭에, 국력을 충실하게 없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국력을 크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끝끝내는 국력의 원천을 고갈시키고야 말것입니다."
"무엇을 국력의 원천이라 하는것일까요? 그것은 인민의 의력(意力)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지금 말씀한 세가지 사건을 가지고 보더라도, 군사최고당국은 인민의 생명재산을 조금도 안중에 두고 안중에 두고 있는것입니까? 없는것입니까? 인민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안중에 있는것입니까? 없는것입니까? 인민의 생명을 이렇게까지 낭비하여 버린다는 것은 물론, 뼈아픈 사실이겠으나, 인민의 자유 또한 그 손발을 결박을 당해버렸고, 그 눈과 귀도 가려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전선에서는 연일연야의 포연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시체는 산같이 쌓이고 있고, 피는 흘러 강을 이루며 대지도 또한 그 형상이 변하게 되고, 인가는 폐허로 불타버리고 있는데, 충칭의 국민들은 이를 모르고, 전승 축하를 위하여 집집마다 붉은 종이를 불태우고 폭죽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부모의 시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자식은 이를 모르고 무당을 불러다가 부모가 장수하기를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왕징웨이의 얼굴은 점차 흥분한 빛을 띠어 갔다. 그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의 언사가 항전파들앞에서 너무 과격하다는 것은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장부가 두려워할 바가 아니었고, 국민당 부총재로서, 국민정부의 부주석으로서 자기의 책무는 무겁기 태산이었다. 그러나 흥분하고 있는것은 왕징웨이 뿐만이 아니었다. 왕칭후이, 쉬융창, 천부레이등 항전파의 무리들도 그리하였거니와, 왕파(汪派) 라 은근히 지목을 받고 있는 바이충시도 빛을 잃었고, 왕의 비서 쩐중밍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지웨이가 공석, 사석을 들나들며 장제스에게 화평을 권고한 것이 오늘까지 사십 여차례에 이르는 것이지만, 오늘 이자리처럼 그 언사가 격월했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항전파의 무리들은 얼굴이 붉어지거나 혹은 푸르러져 각자 뜻모를 소리를 입안에 중얼거리며, 일제히 장제스 쪽을 바랍오싸다. 그들은 주석이 이러한 화평론자에게 대하여 무슨 조처가 곧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장제스는 의연히 표정없는 얼굴로 생각난듯이 담배에 또 새로히 불을 붙혔다. 아무리 마음은 격동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굳이 감추고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최후에 자기의 결심만을 발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이 장제스가 회의석상에서 항상 취하는 태도였다.
왕징웨이는 여전히 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군이 광저우에 들어서며 발표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중간에 한번도 우리 군대의 공격을 받은 일이 없었고, 오직 모기가 많아 약간 고생을 하였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군대의 이른바 진지작전(陣地作戰) 이란 일본군으로서 보았을떄 그 효력이 모기만도 못하였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정부는 또 게릴자전술에 대하여 선전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게릴라전으로 척촌(尺寸)의 실지(失地)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정당한 전쟁을 할 수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오직 지방을 소요하게 하고 인민을 살해하였을 뿐입니다. 지방은 그 병화로 말미암아 공업은 이야기할 것도 없고, 상업과 같은것도, 자리에만 앉아있으면 곧 유격대가 강제의금을 중수하려 오는 상황입니다. 이밖에도 무고한 백성을 혹은 불모로도 잡아다 가는등, 그 행악(行惡)은 가히 쌍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행상의 무리들은 또 어떻습니까? 길에서 유격대를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사라는 미명아래 금전과 상품등, 몸에 지닌 것은 물론이오, 입은 옷조차도 빼앗기고 만다고 합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에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700원의 은을 가지고 스치(石岐, 현 광저우성 중산시) 에서 마카오로 길을 떠나자, 유격대를 만나 700원을 고대로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사람은 하는 수 없이 자기도 유격대들의 하는짓을 흉내내어,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그가 가진 것을 강탈하여 가며 여행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중간에도 다시 몇차례 유격대에가 붙잡혔으나 다른 여객에게 여러차례 금품을 강탈하였기에 결국 마카오에 도착했을 때는 그는 본래의 700원 말고도 300원의 이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웃을 일이겠습니까?
"이어 농민들의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손바닥만한 땅이 있을 뿐인데, 경작을 할때면 꼭 유격대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유격대는 물론 그들을 도와 농사를 지어주려 온것이 아닙니다. 한 이랑에도 강제징수를 하기위해서 입니다. 신고를 무릅쓰고 농사를 짓는것도 비참한 일인데, 또 그들은 이처럼 유격대에게 까닭모를 돈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인민은 궁하고 재물은 다하여 그 결과로는 국가와 민족이 다 함꼐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사상으로 볼때도, 동진(東晉)은 불행히도 외족의 침범을 받았지만 그래도 오히려 백여년의 편안을 얻을수 있었으나, 명말 (明末)의 홍광(弘光), 영림(永曆)에는 그나마도 간천을 보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동진, 송말시대에는 이러한 유격대, 즉 유구(流寇) 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오, 설익고 더러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정부가 능히 이것들을 박멸할 수 있었기에 민력은 아주 소모되지 않고 국가도 또한 이에 힘입어 멸망을 면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조 말년에는 유구가 한번 생기자 적지천리(赤地千里)로 민력은 완전히 소모되어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 해도 이를 막을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를 명조 말년에 비하여 볼떄 오히려 더욱 어려운바가 있습니다. 공산당의 무리들이 유구주의 (流寇主義) 를 제창한 이래 토비 (土匪) 도 유격대에 편입이 되었고 지방보안대도 유격대에 편입이 되었고 정규군에서도 조차 점차 유격대에 편입되고 있는 자가 있어 우리는 항전의 계속을 이자들에게 맡기고 최후의 승리를 이자들에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말로 말하자면 우리 국가와 민족은 멸망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항전력이 부족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누가 마땅히 져야 옳지 않겠습니까? 유격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는 공산당도 물론 책임의 일부를 져야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우리 모든 군사위원에게 과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 참석한 우리 모든 위원, 그리고 참석한 모든 위원들 모두 죄가 적지 않다고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말을 잠시 끊고 왕징웨이는 군사위원장인 장제스의 입을 바라보았다. 좌중의 공기가 더욱 긴장되고 더욱 험악하여진 이제 아무리 장제스라 할지라도 그 얼굴에 표정이 없을수 없었다. 그래도 약간 얼굴빛이 홀쭉
해졌을 뿐 여전히 말 없는 입으로는 담배 연기말을 토할 뿐이었다.
항전파의 안색이 지치고 숨소리가 험악해지는 것을 느끼며 중앙정치회의 부비서장 쩐중밍은 불안속 마음을 조이면서 왕징웨이를 향하여 몇번인가 눈짓을 하였다. 그는 딴말없이 직언을 하는 그의 언사가 마침내는 그의 신변에 어떤 위협을 초래하지 않을까 애를 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두려움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힘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항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도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물론 거리에 나가보았을때, 누구 한사람도 화평을 입에 올려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특무공작대(特務工作隊)의 이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사람만 모이면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진심으로 화평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또 한사람이 끼게되면 그들은 서로 못믿고 도리어 어조를 높이어 항전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는 오직 일반 인민들에게만 한정된 일일까요? 화평을 바라는 것은 과연 그들 인민들 뿐일까요? 나는 굳게 아니라 하겠습니다. 시종일시 항전을 주장하고 계신 제군들도 화평을 바라기는 마찬가지라고 믿겠습니다. 바로 작년 이맘때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씨가 본국정부의 훈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화평에 대한 의사가 있으면 독일은 이를 거중조정(居中調停) 을 할 용의가 있노라 말하였을때 우리는 일본정부가 제시하였다는 수개조항을 검토하여 보고는 그만한 조건이면 화평에 응해도 좋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 계신 분으로 구주퉁 위원도 그때 계셨습니다. 바이충시 위원도 그때 계셨습니다. 쉬융창 위원도 그때 계셨던걸로 기억합니다. 위원장께서 세분께 의견을 구하셨을 때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고 위원장꼐서도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당시의 독일대사가 전달하여온 화평조건을 지난 11월 3일 일본정부의 성명과 비교하여 볼떄, 우리는 당시의 일본측의 조건이 이번처럼 명확하지 않았고 또 이번 성명에 비하여 가혹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위원장 이하 모든 위원은 대국을 고려하시어 당시의 조건을 가지고 화평담판의 기초를 삼을 것을 승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독일대사의 제안은 화평담판의 기초로 삼으려 하시면서, 이번 일본정부의 성명은 그 기초로 삼을 수 없다 하시는 것입니까?"
"1년전 독일대사가 조정에 분주하였을 때는 우리의 수도 난징이 아직 함락도 되기 전이었는데 그당시에 벌써 화평론이 대두하였던 것입니다. 고노에(近衛) 수상이 성명을 말한 이제는, 난징, 지난, 쉬저우, 카이펑, 안칭, 지우장, 광둥, 우한, 모두 연달하 함락되고 창사는 우리손에 의하여 초토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화평담판에 나아가는 것을 불가하다 하시는 것은 어떠한 까닭입니까? 저는 감히 제군들의 의견들을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왕징웨이는 비로소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좌중은 다시 소란하였으나 감히 일어서서 한마디의 반박을 가할 이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논리정연한 왕의 논설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항할 항전의 이론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깐 있다 쉬융창이 일어나 입을 열어,
"기왕에 화평을 말하고 이제와서 항전을 주장하는것이 알수 없는 일이라 하시지만, 부주석께서도 원래는 주전론자가 아니셨습니까? 이제와서 화평을 논하시는 것은 역시 이치에 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빠른 어조로 말하고 입가에 비웃은 웃음을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왕징웨이는 다시 조용히 자리에 일어나 그말에 대해 대답했다.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국가의 목적은 생존과 독립에 있고 화평과 전쟁은 다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싸우는 것오, 화평하기에 이르러 화평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으로서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화평할 수 없는 것이고 만약 국가의 독립과 생존을 저해하지 않는것이라면 마땅히 화평할 것입니다. "그만하면 망국적 조건은 아니다" 라고 모두들 말하셨으면서 어찌하여 저의 화평주장을 불가하다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쉬융창 편을 보지않고 눈은 의연히 장제스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미쳐 다시 자리에 앉기도 전에, 쉬모가 그대로 앉은채로 한마디 하였다. "우리 민국은 이번 항전에 의하야 통일이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만약 이제 화평을 주장해버리면 힘들게 통일되었던 것이 다시 분열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왕징웨이는 그의 편을 잠깐 바라보았으나, 다시 고개를 장제스에게 돌리어 말하였다. "그 말씀에는 절대로 반대입니다. 예부터 이제 이르기까지 국가에 대하여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국내를 평정할것이오, 결코 국내를 평정하기 위하여 외적을 물리칠 것이 아닙니다. 대외전쟁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대내통일의 수단에 이를 이용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항전은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서만 할 것이오 대내통일의 수단으로 이용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 말씀에 반대임을 이 자리에서 거듭 천명합니다. 더구나 오늘 형세로 볼때, 화평을 주장하는 것이 국가의 통일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였을떄 좌중에서 " 지금 화평을 주장하는 것은 공산당에게 교란의 기회를 주는것에 지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 말하는 이가 있었다. 돌아보니 왕칭후이였다. 왕징웨이는 앉으려던 몸을 다시 일으켜 이에 대답했다.
"비록 말씀은 그러하오안 공산당의 교란정책은 저들의 본성으로 화평과 전쟁 어느경우를 막론하고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화평을 제창할 때에 공산당의 책모(策謨)가 표면화 된다고 할지라도, 이를 현재와 같이 뒤로 가만히 돌아 도발이간(挑發離間) 만을 꾀하고 있는것과 비교하여 보자면 오히려 사태는 좋아질 언정 더욱 악화될리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왕은 대답을 마치자 곧 자리 장제스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듣기 괴로우실 것을 무릅쓰고 저는 주석꼐 다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강화 (講和)의 결과로 우리가 얻는 것이 망국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면 물론 그 강화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합작 (經濟合作)과 같은 것이 과연 망국적 조건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일본이 혹은 공동방공, 경제합작의 이름을 빌어 우리 중국의 군사적 경제적 독립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려 한다고 생각해 영토를 떼어주지 않더라도 떼어주는 것보다 심하고 배상을 묻지 않더라도 배상하는 것보다 심하다 말할지 모르나 이는 당치 않은 말입니다. 공동방공, 경제합작에는 내용과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에 우리는 강화조약을 체결할때 그 내용과 범위를 확정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
"또 누구는 '일본이 만약 성의(誠意)를 가지고 화평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어찌 우선 철병을 하지 않는것이냐, 적어도 루거우차오 사건 이전의 상태에까지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 않는 이상 어떠한 화평조건도 모두 허위다 ㅡ ' 이렇게 말하나 이는 더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본래 두나라가 교전을 하는 경우에 정전이 있은 뒤에 강화를 하고, 강화가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철병이 이루어지는것이 정론입니다. 이것은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제 의연히 항전계속을 강조하고 있고 따라서 교전상태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 상태에서 철병을 이야기할 도리는 없는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여 볼것은 돌아가신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말씀입니다." 왕징웨이는 말을 하담라고 머리를 들어 저편 벽에 걸리어 있는 손중산의 초상화를 우러러 보았다. 우러러보대 그 감개는 은근히 새로운바가 있어, 눈꺼풀이 저절로 더워짐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대아세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 관한 선생의 말씀으로, 선생의 전생에 있어 최후의 연설인것 입니다. 저는 일본 고베(神戶)에서 직접 이 연설을 들었거니와, 그것은 손선생 생애의 포부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중산전서(中山全書)에도 물론 수록되어 있으니 읽지 않으신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은, 이 강연록을 읽어보면 우리 아세아의 위기가 얼마나 중대한가, 아세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일양국은 어찌하여 서로 벗이 되어야 하는지, 어찌하여 서로가 적이 되면 안되는것인가? 그것은 서로 우호관계를 맺어야 비로소 서로 그 중대책임을 부담할 수가 있고 따라서 그 중대위기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나라가 적이 된다면 서로 저편의 힘을 죽이려 들게 되고 그 결과는 반드시 타국에는 기회를 주어 함께 국운이 피폐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중일양국이 벗이 되어야하고 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까닭은 이 중대한 의의를 그 기초로 함고 있는 것입니다. 설혹 일시의 암운으로 하여 이 중대의 위기가 가리워지기는 하였으나 저는 이제도 오히려 시기가 늦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징웨이의 말에는 어느틈엔가 울음조차 섞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국과 아세아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하여 그는 통곡도 하고 싶었다. 장내가 다시 수선스러워지려 하였을 때, 장제스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거의 창백하였다. 그도 역시 크게 흥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도 능히 알수 있었다.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중국항전의 전도에는 점차로 광명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각전선에서 우리 군대는 산지(山地)로 물러가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있으며 지형(地形)도 더욱 유리한 것입니다. 이번 사변과 왕년의 시안사건을 비교하여 본다면 이번은 정부와 민중의 태도가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능히 일체의 곤란을 극복하여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것이라 믿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어디까지든 항전을 계속하여 전국의 통일을 피하고 성의로서 국가민족을 단결시키기만 하면 어떠한 강적이라도 족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일 것이니 두고 보십시다."
이말에 왕징웨이는 크게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끝없는 적의(敵意)마저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감추지 않으며 장제스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저는 결코 그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주석 자신도 아마도 그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든간에 국가와 민족을 오늘날 멸망에 직면하게 한것은 국민당의 책임입니다. 우리들은 하루 바삐 연몌사직(連袂辭職) 하여 죄값을 치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 창백한 얼굴에 냉소하는 빛을 띄우며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사직을 하면 대체 누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까? " 그리고 그는 곧 분연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저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혼자 서재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안락의자 위에 피로한 몸을 의지하였다.
(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길은 오직 하나였다. 장제스와 인연을 끊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화평구국운동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몸이 충칭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절대로 불가능 한일이었다. 이제까지도 화평파로 지목을 받아 온 몸이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오늘 자신은 항전파와 완전히 대립이 되고 만것이다. 국민당의 부총재, 국민정부의 부주석인 자기가 초토항전을 부르짖는 부내에서 완전히 대립된 주장을 표명해버린 이상, 이제는 그 신변에 위험조차 느끼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
( "특무공작대들은 이제부터 나의 행동을 감시하려 들것이겠지..." )
왕징웨이는 지금 윈난성 쿤밍(昆明) 에서 자기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을 동지 저우포하이와 아내 천비쥔(陳璧君)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들은 수일전에 용하게 충칭을 탈출하여 나갔던 것이다.
( " 나도 그들과 함께 떠나버릴 걸 그랬나...")
물론 그것은 저우포하이가 그날 권하여 마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한번만 더 장제스에게 화평을 권하여 보고 싶었다. 충칭을 탈출하는 것은 그 뒤라고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모든것이 허사였다. 장제스는 결코 자신의 말을 들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지성으로 일깨어 준 모든 말은 오직 항전파들의미움을 샀을 뿐이다. 미움을 산것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으나, 이제 더욱이 그들의 경계가 심하여 충칭 탈출이 곤란해진것이 사뭇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곤란한 일이 있다할지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동포드를 도탄속에서 건져내는 성(聖) 스러운 사업에 착수하여만 한다. 하지만 억지로 이곳을 벗어나 나가려 할때, 장제스는 자신의 자유는 물론이오, 생명까지도 빼앗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가벼운 깃털과 같은 것이었다.
( "어떻게든 기회를 타서 이곳을 탈출하여야만..." )
왕징웨이는 고개를 번쩍들어보았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 서가의 벽에 걸려있는 액자속의 손중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왕징웨이는 이윽히 '혁명의 아버지'를 우러러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 " 선생님! 저는 제가옳다고 믿는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부디 제게 힘을 주십시오..." )
밀사 (密使)
그로서 이틀이 지나 21일 저녁때, 위난성 주석 룽윈(龍雲)에게서 전보가 왔다. 그에게 강연차로 쿤밍까지 와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자리에 있던 쩐중밍과 더불어 그는 일을 상의하였다.
"쩐중밍군, 이 전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왕징웨이는 전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며 젊은 동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구요?" 쩐중밍은 자기가 외경(畏敬)하는 이 선배의 얼굴을 빠안히 쳐다 보며 되물었다.
"응, 단순히 강연을 청하는 전보라 생각하느냐 이말이다." 왕징웨이도 전보에서 고개를 들고 사랑하는 후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글쎄요, 저의 생각같아서는 현재 아내분이랑 저우포하이씨가 쿤밍에 체류하고 계신것과 이 전보는 필연 관련이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 "나도 같은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것은 주군이 나더러 곧 충칭을 빠져나오라는 뜻 같네" 나에게 쿤밍행의 구실을 만들어 주기 위해 룽윈에게 이 전보를 치게 한것같네."
"하지만 이 전보 한장으로 선생님께서 용이하게 충칭을 떠나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역시 어렵겠지. 위원장에게 고지식하게 전보를 보여주며 말한다고 나같은 위험인물을 그가 쉽사리 내어 보낼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럼 부단히..." "역시 그럴수 밖에 없겠지. 그러나 이러한 정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겠지. 만약에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 하나의 구실은 만들어 주는것이니..."
"쩐중밍군, 그렇게 기운을 떨어트릴 것도 없네.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무슨 좋은 기회가 있을것이야."
"암요 있지요, 꼭 있지요. 천도 (天道)는 길고 무심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4억의 동포가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우선 선생님께서 먼저 자유를 얻으실 수 있을 것는 저는 믿습니다." " 고맙네."
왕징웨이는 진심으로 제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나 불란서창(佛蘭西窓,마루면까지 안으로 열리는 커다란 쌍여닫이 창) 으로 걸어갔다. 화항(花港, 항저우의 지명) 에 있는 어느 술집에서 부터 인듯싶은 남국의 음곡(音曲)이 들려온다. 하늘은 오늘도 역시 흐렸다.
그 흐린 하늘을 여윽히 창 넘어로 쳐다보고 있다가 그는 그대로 서 있는 채 쩐중밍에게 말하였다.
"어찌될지, 언제 쓸지 모르니 좌석표나 준비하여 둡세" "네, 역시 팽군 (彭君) 에게 부탁을 하는것이 좋겠죠?" "그럴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일이라도 가서 두어장 ㅡ"
그러나 왕징웨이는 말을 하다말고 곧 자리로 돌아와 다시 앉으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부인과 이야기는 어찌할 생각인가? 쩐중밍군..." 쩐중밍은 잠깐동안 대답을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얼굴은 약간 붉히면서도, 분명한 말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선생님을 모시고 이제 큰뜻을 천하에 펴려 하는데 어찌 구구히 처자를 돌보아 마땅할 것이겠습니까?" ...... 그러나 저는 차마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행복과 자유와 광과 희망을 가져보지 못하는 체, 이대로 음울한 충칭의 하늘 아래서 그들의 생애를 마치게 할 순 없습니다. 좋은 기회가 있어 그들도 함께 이곳을 탈출 할 수 있다면 저는 기어코 그들도 데리고 떠날까 합니다. 그러나 동반하여 선생님의 충칭 탈출이 털끝만이라도 지장을 받게 된다면 물론 그들의 생명과 자유 같은것은 개의하여 볼것이 못됩니다."
왕징웨이는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말하였다. "우리들이 모두 무사히 충칭을 벗어날수 있을 , 어떤 좋은 기회가 이제 필연코 있을 것이네, 끈기 좋게 기다려보세, 좌석표는 아주 넉넉하게 얻어 두기로 하세. 그리고 명의는 팽군것으로 하면 되지않겠는가?
"그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곧 전화로 알아보고 찾아가 보겠습니다." "내일해도 괜찮을 듯한데..." "아닙니다. 별로 볼일도 없는데 빠르게 표를 얻어두자구요." "그럼 그렇게 하게."
쩐중밍은 즉시 수화기를 뗴어들고 교통부차장 펑쉐페이(彭學沛)를 불러내었다. 무슨일로 그러느냐 묻는 것을, 쩐중밍은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하며 끊고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는 염려할 것이 없었다. 펑쉐페이는 이를테면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화평파의 한사람이다. 왕징웨이가 쓰겠다는 것이라면 그는 두말않고 좌석표를 얻어 줄것이 틀림 없었다.
( " 허나 정작 탈출할 기회가?......." )
그러나 그것은 이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짝 소용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왕징웨이는 서가 앞으로 가서 한권 서적을 꺼내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육방옹(陸放翁)의 시 ㅡ 그것은 그의 선친이 그가 10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매일같이 이삼 수(首)씩 써 보고 외우게 했던 그리운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두시간이 지나 펑쉐페이 명의의 비행기표6장을 들고 쩐중명이 돌아올 때까지 모든 시름을 잊고 육방옹의 시를 한편, 두편, 낮은 음성으로 읊고 있었다......
좌석권은 이렇게 쉽사리 수중에 넣었지만, 정작 탈출할 기회는 용이하게 오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에 장제스는 그에게 항상 자기 좌우에 있어 주기를 요구하였고, 또 그의 일거일동은 차차 알고 보니 수 명의 특무공작대원에게 감시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역시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난성 주석 룽윈에게 갈때 가더라도 아직은 간다 안간다 말을 하여 두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어서, 아직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룽윈보다도 아내 천비쥔과 또 딸과 동지 저우포하이가 궁금하여 할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충칭탈출이 성공될 때까지, 그는 모든 일에 세심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얼마전까지도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히 알아오던 저우포하이에게까지도 요즘에 이르러서는 장제스는 그 신임하는 것이 전만 못한 것 같다.
저우포하이가 충칭을 탈출하여 쿤밍으로 달려 간 것은 장제스가 마침 국민당의 청년위원들을 모아 놓고 훈화를 하는 짧은 동안의 일이었다. 표면에 내세운 명목은 '선전공작시찰(宣傳工作視察)' 이라는 것으로 전 같으면 장제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저우포하이가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충칭을 나갔다는 것을 알자 곧 천부레이에게 명하여 그에게 즉시 충칭으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치게했다.
전보를 받고 저우포하이가 은근히 불안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칭에 앉아서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기들의 모든 게획이 탄로 될것이 아닐까ㅡ? 하고까지 염려를 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염려가 비록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기회를 타서 쿤밍까지 빠져나온 몸이 다시 충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쩐중밍이 알아온 바에 의하면, 천부레이에게 온 저우포하이의 답전에는 아직도 시찰이 끝나지 않았기에 수일 더 머물러 그것을 마치고 돌아가겠노라 하였다고 한다.
그 수일이라는 것도 이제 일주일이 넘었다. 날은 자꾸 가고, 정작 자신은 오지 않고... 저우포하이는 천비쥔과 더불어 얼마나 초조하여 궁금하여 할 것인가? ㅡ 왕징웨이는 은근이 애가 쓰이지 않을수 없었다.
( " 쿤밍에 있긴 한걸까......" )
그러나 생각하여 보면 그것은 또 알수 없는 일이었다. 저우포하이와 자신의 아내가 쿤밍을 향해 떠난것도 이달 초엿셋날의 일 ㅡ,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들보다 삼일 뒤늦어 왕징웨이 자신도 충칭을 탈출하여 쿤밍에서 모여 가지고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佛領印度支那)의 수도, 하노이(河內)로 벌써 지금쯤은 가있어야 했을 일이었다.
( " 어쩌면 내가 졸연히 못나올 것을 눈치채고, 그들만 먼저 하노이로 떠나지나 않았을까..." )
정말 그렇게나 하였으면 오히려 좋겠다고 생각도 된다. 즉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도 그처럼 오랫동안 쿤밍에 머물러 있을 때, 장제스는 저우포하이의 태도에 문득 의혹을 품고 있었기에 이제 무슨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 " 나는 나대로 어떻게든 갈것이니, 어서 저들이나 떠나주었으면... " )
탁자 위에 놓인 분에 심은 납매(臘梅) 를 바라보며, 왕징웨이가 생각을 멀리 쿤밍의 하늘로 보내고 있을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후 쩐중밍이 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손님이 왔습니다." 그는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의자에 앉기도 전에 그러한 말부터 하였다.
"손님이? 누구신가?" 왕징웨이는 그의 약한 흥분한 빛을 띠운 얼굴을 보마 저모르게 상반신을 앞으로 내어 밀며 물었다.
"쿤밍에서요, 저우포하이씨가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쩐중밍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왕징웨이의 맞은편에 앉았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한통의 편지를 꺼내어 탁자위에다 놓으며 말하였다. "그사람은 어디있는가?" 왕징웨이는 분명히 저우포하이 필적의 편지를 집어들며 물었다.
"향화다관 (香花茶館) 에서 만나 이야기 하고 싶ㅡ" "향화다관?" "네, 아마 선생님께서는 모르실만도 합니다. 부두에 있는 조그만한 다관입니다. 거기서 만나서 이야기 하고, 다시 내일 만나기로 하고서는 즉시 해어졌습니다."
"거기는 또 왜 간건가?" "아침에 집을 나서려니까, 어떤 사나이 하나가 앞으로 와서 담뱃불을 청하더니 불을 붙이고 나자 '오후7시, 향화다관, 주 선생 대리입니다.' 그런 말을 남이 보기에는 불을 빌려주는 사례나 하듯이 말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렸습니다. 주선생이란 저우포하이 씨를 가르키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쨋든 시간에 맞춰서 저는 그곳까지 가보았습니다."
쩐중밍의 이야기를 들으며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의 편지를 두번 읽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하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오시지도 않고 또 아무 기별도 없으시어 궁금합니다. 저는 이미 21일의 하노이행 비행기표를 예약하여 놓았습니다. 그때까지 안오시면 단독이라도 탈출을 결행할 결심입니다. 그러나 다만 제가 하노이로 떠나감으로 하여 선생께 어떠한 위해가 없을런지, 그것이 염려됩니다. 부인께서는 영애와 더불어 당분간 선생의 도착을 기다리시며 쿤밍에 머물러 계시겠다 합니다. 편지를 가지고 간이는 신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두로든 서신으로든 즉시 회답을 내려주십시오."
대개 그런 뜻이 적혀있었다.
( " 중간에 특무공작대에게 수상하게나 보여 몸뒤짐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서신을 주어 보냈는가..?" )
아무리 하여도 좀 경솔한 것이었다고 왕징웨이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로만 본다면아무튼 서신이 이렇게 무사히 자신의 수중에게까지 들어왔고, 우선 이역만리 그들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매우 대견하여 그는 아무말 하지 않고, "서신만 전하던가? 무슨 다른말은 없었나? " 하고 쩐중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기회 있으신대로 지체 마시고 쿤밍으로 오시라구요. 쿤밍에서 하노이행은 선생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윈난성 주석이 비행기를 얻어주겠다 한다구요." 쩐중밍은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하였다. "그사이 홍콩과 연락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하루 바삐 선생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홍콩에서?"
왕징웨이는 한마디 묻고, 다음에 눈을 가만히 감았다. 린바이셩(林柏生), 메이쓰핑 (梅思平) 은 얼마전에 중앙선전특파원의 자격으로 공공연하게 충칭을 떠나 현재 홍콩에 머므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왕징웨이의 수족같은 사람들이었다. 초토항전파와 대립하여 화평구국의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는 그들은 사실 왕징웨이의 궐기를 청하여 온지 오래였다.
그들을 생각하니 한시 바삐 그들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한시 바삐 달려가서 자신의 기관지 남화일보 (南華日報)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싶었다.
"그래, 회답은? " 왕징웨이는 다시 눈을 뜨고 쩐중밍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장소는?" "태평문(太平門) 에서 저기문(楮寄門) 사이입니다." "자세히 이야기 해보라."
"내일 아침 저는 자동차로 9시 정각에 태평문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그도 꼭 정각에 맞추어 그 곳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다관에서 헤어지기 전에 서로 시계를 맞춰두었습니다. 제가 자동차를 잠깐 멈추면 그사람은 곧 올라 탈겁니다. 우리는 다시 차를 달리며 차속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저기문에서 그를 내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서신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필요까지도 없겠지마는 ㅡ " 쩐중밍은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눈을 크게 뜨고
"회답은 물론 구두로 하시겠지요?" "물론이지" 왕징웨이는 말하고, 다시 "잘했네" 하고 덧붙혔다.
"나의 일은 염려말고, 예정대로 하노이라 떠나라 이르게, 그가 떠났다고 나의 몸에 위해가 미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아직은 주(周) 군과 나 사이에 표면적으로 들어난 관계라는 것은 없으니까, 장 위원장도 내게완전히 의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ㅡ 그리고 내 아내에게는 그대로 더 쿤밍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니 주 군과 함께 하노이로 가던지 단독으로 홍콩으로 가라고 하게. 가서 하포파(荷包派) 를 지휘하라 하게 ㅡ "
그리고 이어서 한마디 했다. " 물론 기회가 오는대로 우리도 충칭을 하루 바삐 떠날 결심이라고 ㅡ "
저우포하이가 보낸 사람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 다음에, 왕징웨이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 "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대체 기회는 언제 돌아온단 말인가...? " )
탈출 (脫出)
기회는 그러나 의외로 일찍히 찾아왔다. 저우포하이의 밀사가 돌아간 것이 12월 16일 ㅡ 바로 다음날인 17일 장제스는 갑자기 내일 군무를 가지고 간쑤성 란저우 (蘭州)로 갔다가 20일에 돌아올 뜻을 발표 했던 것이다. 그날 밤 왕징웨이는 자기 서재에서 쩐중밍과 더불어 상의하였다.
"장위원장이 란저우로 떠나는 것이 오전 9시,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는 9시반. 그사이 삼십분의 여유가 있을 뿐이네, 좀 촉박하지만 그가 떠나는 것만 보고 우리도 쿤밍으로 향하세."
왕징웨이는 긴장한 얼굴로 쩐중밍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럼 장 위원장이 비행장을 떠날 때 비행장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 쩐중밍은 약간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왕징웨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장 위원장이 같이 나가자는 말이 없더라도 나갈 생각이네, 우리의 신변은 특무공작대의 감시를 박고 있네, 그렇기에 비행장으로 나가면 그들의 의심을 안살수 없는것이네, 그렇다고 그들의 눈을 피하여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믿네 ."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배웅간다고 빙자하고 공공연하게 비행장으로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그곳에는 물론 다른사람도 나올것이고... 또 30분밖에 시간의 여유는 없고..."
"나도 그것이 염려되네, 장 위원장이 란저우로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우리들만 남의 의심을 사지 않고 남아있다가 비행기로 탈출하기에는 30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네, 더구나 장위원장이 출발을 좀 늦게라도 하게 되면 계획은 그만 틀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찌됬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는 내일 떠나시긴 하셔야합니다." "물론이지, 내일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이곳을 벗어날지 모른다. 20일에 돌아온다고 하니까 모래라도 가려면 갈수는 있겠지만, 일정을 변경하고 즉시 돌아올지 누가 알겠소? 더구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사람을 시켜 우리를 좀더 경계할 수도 있는 일이니 , 어떻게든 일은 내일 결행해야한다."
"네...... 그러나 저의 생각 같아서는 시간의 여유는 좀ㅈ더 만들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팽 군에게 부탁하여 무슨 구실을 지어서든 30분이나 한시간 쯤 쿤밍행을 늦게 출발시키면 될 것이니까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ㅡ "
"경우에 따라서는? "
"역시 팽 군에게 부탁하여 달리 한대를 비밀리에 준비시키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어림도 없는 말 말게, 장제스의 명령없이는 군용기든 민용기든 아무나 함부로 사용을 금하고 있는것을 자네는 잊어버렸나?" "하지만 팽군이, 주선만 하면 될것입니다. 팽 군은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들ㄹ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어느 일과도 다르니까 ㅡ, 만약 나중에라도 그것이 탄로가 난다면 팽 군은 그 지위 뿐만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을 느끼기 쉬워지게 된다."
"그렇지만 팽 군은 그 위협을 무릅쓰고 힘써 주리라 생각합니다. 위험하기는 여객기를 이용하시는 경우라도 마찬가집니다. 팽 군 명의의 비행기표를 이용한신것을 알면 그를 그대로 두진 않을 겁니다. "
왕징웨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펑쉐페이는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를 이처럼 희생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쩐중밍도 잠시 말이 없다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이렇게 하시지요. 내일 아침에 비행장으로 나가서 장제스가 떠나는대로 우리도 쿤밍으로 가기로 하되, 팽 군에게 부탁하여 30분 내지 한시간만 여객기를 늦게 출발 시키게 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 보는 데서 한차레 성내로 들어왔다가 즉시, 팽 군의 자동차로 팽 군과 함께 비행장으로 다시 나가기로. 팽군은 그만한 의기와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징웨이는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물었다. "부인과 애기들은 어쩔려고 그러나?" 쩐중밍은 대답하기 거북한듯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하였다.
"저의 욕심같아서는 팽 군에게 말하고 팽군의 가족인듯이 구미고서 아주 팽 군의 자동차로 우리보다 한걸음 먼저 비행장으로 나가 있게 할까 합니다만은ㅡ "
왕징웨이는 눈을 감은채 다시 물었다. " 내일 비행장에 나올만한 사람으로 부인이나 애기와 안면이 있는 이가 있는가? "
"바이충시 씨와 안면이 있습니다만은, 비행장에서 보더라도 그는 모르는체 해줄듯싶습니다. 근데 천부레이가......"
왕징웨이는 약간 미간을 찌프렸다. 쩐중밍은 자기도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띠우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선생님, 저는 역시 처자를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다. 선생님의 크나크신 일이 저의 아녀자 같은 애정으로 하여 패를 보셔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왕징웨이는 말 없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가 마침내 눈을 고요히 뜨며 말했다.
"장위원장이 다른 때나 마찬가지로 내일도 시간에 엄격하기만 하여 준다면, 그가 떠나는 것이 아홉시 정각ㅡ, 보내고 즉시 사람들이 되돌아 들어가면 아옵시 30분 출발의 쿤밍행에 오르실 부인을 천부레이는 볼수가 없을 것이네. 그러나 장위원장 출발이 만약에 늦어진다면......"
"......."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십중팔구 없을 것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때에는 또 쿤밍행에 오르는 여객에게서 천부레이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할수도 있을 것이네." "그러면 우리는요?"
"만약 30분이나 한시간 쿤밍행 여객기의 출발을 늦추어도 장 위원장이 안떠나는 경우에는, 우리는 부인과 애기들만 먼저 보내고 뒤에 따로 팽 군에게 힘을 빌리기로 하세" "그럼 아주 처음부터 여객기를 이용할 필용 없이 처음부터 다른 비행기를 한대 주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 ㅡ 나는 팽 군이 나중에 장제스에게 받을 형벌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해주고 싶네." 왕징웨이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주 팽 군도 우리와 같이 가기로 하면 어떨까? 그렇게만 되면 모든 일이 좋겠구만서도...." 그러나 쩐중밍은 대답을 하였다. " 그러나 그것은 팽 군이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병상에 누운 칠순이 넘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이 때 전화의 종이 울렸다. 왕징웨이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드는 쩐중밍을 한손으로 제지하고, 자기가 모소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천부레이에게서 온 것으로, 장제스가 그에게 곧 관저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장 위원장이?"
역시 쩐중밍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상의하고 있던 문제가 문제라, 불안한 빛은 순간에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입가에 미소조차 띄우고 말하였다.
"별 염려는 없을듯하네, 아마 자기없는 사이에 내게다 무엇 부탁할 말이 있어 그러는게지" "자네는 내가 다녀올 동안 팽 군에게 우리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겠나? " 그리고 왕징웨이는 즉시 자동차를 달리어 장제스에게로 갔다.
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기가 비록 충칭에 있지않더라도 일양일내로 긴급히 처리하여야 할 몇가지 정무에 관하여 그와 상의하려고 이 밤에 왕징웨이를 부른 것이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밝은 날은 바로 민국27년 12월 18일ㅡ, 이날도 날은 잔뜩 흐리고 비행장 넓은 마당에는 음산한 바람이 언 땅을 휩쓸고 있었다. 란저우로 떠나는 장개석과 그를 바래는 왕징웨이 이하의 일행이 자동차를 몰아 비행장에 이른 것은 예상한 시각보다 늦어 9시 15분ㅡ, 왕징웨이의 은근한 염려가 드디어 사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비록 교통부 차장 펑쉐페이가 최대한도 한시간 늦게 출발을 시키기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을 왕징웨이가 이용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용을 하게 되고 못되고 간에, 장제스나 어서 한시라도 충칭을 떠나주었으면 ㅡ 하고 왕징웨이와 쩐중밍은 은근히 바랬다. 자기들의 계획이 계획인만큼 그들도 조금이라도 장제스와 오래 자리를 가지고 있기가 거북하였다. 장제스는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마음속을 알리가 없다. 알턱은 없으면서도 예정하였던 시간보다 늦은것이 자신 스스로도 유쾌하지는 못하여 비행장에 도착하자 즉시, 비행복으로 갈아입고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군용기 앞으로 갔다. 9시 25분이었다. 보내는 사람과 두어마디 말이 있은 뒤에 장제스는 문득 왕징웨이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왕선생,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신색이 좋지 못한것 같은데..." 왕징웨이는 간밤에 역시 흥분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부족하였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호젓하게 웃고 말하였다.
"수삼일 전부터 몸이 좀 불편합니다. 심장병이 재발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제스는 딱한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말하였다.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어제 말씀한 것은 천부레이군에게 일임하고 왕 선생은 댁에서 며칠 쉬시지요."
"감사합니다. 쉴 정도 까진 아닌것 같습니다." "그래도 쉬시는게 좋겠습니다."
장제스는 옆에 서있는 처부레이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부주석께서는 몸이 불편하신듯 하니 자네가 맡도록 하게, 정 모를 일이 있으면 부주석께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ㅡ "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천부레이 옆에 있는 쩐중밍을 바라보고, " 참, 증군, 천부레이 군을 좀 거들어 주시게, 뭐 대단한 일은 아니야." 장제스는 그렇게 당부하기를 마치고 나서, 문득 저편에 우편물을 싣고 있는 여객기가 눈에 띠자, 왕징웨이는 펑쉐페이를 보고 물었다.
"저게 어디가는 여객기인가?" 펑쉐페이는 "쿤밍으로 가는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몇시 출발하는 비행긴가?" 펑쉐페이는 약간 지체한 뒤에 말하였다. "9시 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9시반?" "시간이 되었는데 웬일인구?" 펑쉐페이는 곧 말하였다. "준비가 아직 덜된거겠지요, 곧 출발할 것입니다. 가서 알아볼까요?"
"그럴필요는 없지." 장제스는 마침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펑쉐페이와 쩐중밍, 그리고 왕징웨이도 자신도모르게 한숨을 가만히 쉬었을 때, 문득 동남편 하늘에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며 한대의 비행기가 나타났다. 장제스는 잠시 쳐다보다가 펑쉐페이를 바라보고 물었다.
"지금 어디서 들어올 비행기가 있는가?" 펑쉐페이는 차츰 차츰 비행장 상공을 향하여 가까워지는 더글러스 비행기를 지켜보며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프로펠러는 이미 돌기시작하였으나, 장제스는 비행사에게 손짓을 하고 자기는 그대로 하늘을 쳐다았다. 마침내 더글러스 비행기는 비행장 한가운데 착륙하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일신에 집중시키고 그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의외로도 공산당의 거물, 저우언라이(周恩來) 였다.
그는 막 출발을 하려고 하고 있는 군용기 위에 장제스의 모습을 발견하자, 황망히 손짓을 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 있는 아무와도 인사를 할 시간없이 바로 장제스 옆으로 가서 "주석, 어디를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저기 란저우에 잠깐... 그래, 무슨일로 돌아오셨소?" "여쭐 말씀이 있어서......" "무슨 말씀이오?"
장제스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묻는 말에 저우언라이는 옆에 서있는 왕징웨이 와 몇사람을 흘낏 둘러보고는 "주석께만 잠깐 말씀 하고 싶은데" 하고 대답하였다.
장제스는 말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저편 주임실을 향하여 걸어갔다.
" 대체 무슨 이야길까?" 쉬모가 천부레이에게 물었다. " 글쎄 ㅡ 아무튼 무슨 긴급한 일이 생긴것만은 틀림없겠지."
천부레이는 지금 막 주임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멀리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처럼 입밖에 내어 말은 아니하나,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좀더 궁금하고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왕징웨이와 쩐중밍, 그리고 펑쉐페이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금 전선으로부터 돌아온 저우언라이의 용무를 기어코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의외의 중대한 사항이어서 장제스가 출발을 중지하거나 연기할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왕징웨이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이미 10시 5분이었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회견은 25분이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여러사람들이 모여 서있는 곳에서 혼자 떨어져 단장을 가볍게 휘두르며 그 건방을 거닐었다.
( "란저우 행을 중지하려는 것은 아니곘지...... 설혹 기어코 오늘 출발을 한다 하더라도 이미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는 우리가 여객기를 이용하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책을 취해야 좋을까? ㅡ " ) 하고 잠시 그가 생각에 잠기었을때, 어느틈엔가 쩐중밍이 그의 옆에와서 서서
"팽 군이 여객기를 출발시키겠다고 합니다. 이이상 출발을 유예할 떄는 혹은 장 위원장의 의혹을 살지도 모르겠다면서요." 하고 극히 낮은 어조로 말하였다.
"그 대신 장 위원장만 떠난 뒤에는 어떻게든 쿤밍까지 가시도록 주선을 하시겠다고 팽 군이 말했습니다." 왕징웨이는 여객기가 나래를 쉬고 있는 방향과는 정반대편 산을 바라보며 역시 적은 소리로 물었다.
"부인과 애기들은 어떻게 할려고?" 쩐중밍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며 말하였다.
"여객기에 태워 먼저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천부레이 옆으로 가서 서면 팽 군이 저의 가족을 이끌고 휴게실에서 나오기로 되었습니다."
왕징웨이는 "그럼 어서 가보게." 말을 남기고 자기는 아까처럼 다시 그 근방을 거닐며 은근히 휴게소 편을 보았다. 저편 휴게소에서 쿤밍가는 여객들이 나와 여객기 앞으로 걸아갔다. 여섯사람째에 펑쉐페이가 나타나고 다음에 쩐중밍의 부인이 한아이를 안고 한아이는 걸으며 뒤를 따랐다.
왕징웨이는 재빨리 천부레이 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휴개소 편을 멀리 등지고 서서 무엇인지 한참 쩐중밍과 이야기가 바빴다. 왕징웨이는 눈을 감고 그곳에가 잠깐 우둑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프로펠러 소리가 웅장히 일어나고, 마침내 쿤밍행 여객기는 비행장을 떠나, 왕징웨이가 잠깐 뒤에 눈을 떠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는 이미 기수를 동남쪽으로 향하고 한참 흐린 충칭의 상공에서 그림자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천천히 걸어 천부레이와 쩐중밍이 서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마침 장제스와 저우언라이가 주임실에서 나왔다.
10시 15분, 장제스는 다시 한차례 배웅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침내 그가 탄 군용기는 북쪽하늘을 바라보고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잠깐 바라보고 있다가 왕징웨이는 모든 사람과 함께 자동차 세워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가지런히 한 쩐증밍은 낮고 빠른 어조로 말하였다.
"천부레이가 저와 함께 주석관저로 들어가자고 합닌다. 의심을 살까 승낙을 하였습니다. 저우언라이도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떠나기는 불가능하겠습니다. 오히려 선생님 한분이나 안전하시도록 저는 남아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에 누구인지 발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자 그는 황망히 말을 이었다.
"팽 군의 준비는 다 되었답니다. 쌍-루이 병원 뒷문에서 팽 군이 기다리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곧장 병원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는 극히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보았다. 뒤 쫓아온 사람은 천부레이다. 그는 왕징웨이 곁까지 오자 그와 발을 맞추어 말하였다.
"아까 주석 말씀도 있으시고 하니 부주석께서는 바로 사저로 돌아가십시오, 어제 주석과 결정하신 일은 제가 증 군과 함께 하겠습니다. " 왕징웨이가 그말에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어느틈엔가 저우언라이가 옆으로 와서 서서 말하였다.
"부주석, 어디 편찮으시다구요?" 왕징웨이는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심장병이 재발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닥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은......" 그리고 다시 천부레이를 향해 물었다. " 지금 바로 관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왕징웨이는 다시 저우언라이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저우언라이는 말했다. "진 선생, 증 선생과 함께 주석 관저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 ㅡ " 하고 왕징웨이는 자신의 자동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하였다. "제 차로 같이 가십시다."
천부레이가 물었다. "부주석께서도 같이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아아니, 나는 가는 길에 병원을 들러야해서...." 쩐중밍, 천부레이, 저우언라이와 왕징웨이는 한차에 올랐다. 차가 비행장을 나설 때 왕징웨이는 운전수에게 명하였다. "쌍 - 루이 병원ㅡ"
쌍 - 루이 병원은 성내를 들어 서서 얼마 안되는 곳에 있었다. 차가 병원 문앞에 이르렀을 때, 왕징웨이는 스톱을 명하고 돌 기둥 앞에 내려섰다. "그럼 세분은 어서 주석관저로 가보시죠."
그리고 왕징웨이가 모자를 벗어 들자 천부레이가 물었다. "차는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나중에 택시라도 부르기로 하고 오늘은 종일 내차를 빌려 드리리다. 나의 크라이슬러가 충칭 제일의 휼륭한 차라는 것만 아시오." 라고 말하고 나자 왕징웨이의 입가에는 호젓한 웃음이 떠올랐다.
세 사람을 태운 차는 병원의 길 돌담을 끼고 달려갔다. 그 모양을 잠깐 바라보고 있다가 왕징웨이는 곧장 병원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현관으로 향하지 않고, 곧장 병사 (病舍)를 바른편으로 끼고 ㄷ자로 돌아 뒷문으로 나섰다. (원문에도 ㄷ자라 표시되어있음, 오타 x)
병원 뒷골목은 언제든 행인이 드물다. 그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펑쉐페이의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펑쉐페이는 왕징웨이를 보며 말했다.
"증 군은 역시 못빠져 나오게 되었습니까?" 왕징웨이는 말 없이 가만히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펑쉐페이는 추연한 기색으로 창밖만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듯이 외투주머니에 손을 넣고, "참 ㅡ, 이걸ㅡ"
하고는 검은 안경을 꺼내며
"증 군이 아까 부탁을 하더군요, 누가 볼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은 그래도 쓰고 계시지요." 왕징웨이는 입가에 쓴웃음을 띠웠으나 그래도 말 없이 안경을 받아 썼다.
차는 막 성문을 나서려 하고 속력을 약간 늦춘다. 왕징웨이는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사나이를 발견하고 곧 외면을 하였다. 그 사나이는 장제스의 특무공작대 제2처장 다이리(戴笠)였던 것이다. 차가 그의 옆을 지날때, 다이리는 차안을 홀낏 들여다 보았다. 펑쉐페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망히 목례를 하고, 다음에 다시 뒷창으로 돌아다 보려 하였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그의 무릎에 손을 얹어 그것을 제지하였다.
( " 펑쉐페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나, 왕징웨이라는것을 알아버린건 아닐까......?" )
물론 약간의 불안이 그에게도 없을수는 없었으나,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여,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호젓한 웃음을 띄었다.
믈런 그가 펑쉐페이와 함께 비행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다이리가 알았다 할지라도, 장제스에게서 무슨 지령이라도 받아두지 않은이상 국민당 부총재이자 국민정부 부주석인 자기를 당장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 " 하지만 혹시 위원장이 무엇 일러둔 말이라도 있다면.......?" )
그러나 그리하여 이제 충칭탈출에 실패에 돌아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왕징웨이가 다시 호젓한 웃음을 지어보였을 때, 그들이 탄 자동차는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교통부차장 펑쉐피이는 곧 주임실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와 격납고로 달려갔다. 왕징웨이는 자동차안에 그대로 안자 있는체, 문득 쩐중밍을 생각하고 마음이 아팠다.
( " 만약 그가 영영 충칭을 탈출 할수 없다고 하면......" )
이제 자신의 충칭탈출이 바로 탄로가 나게되면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그의 자유와 생명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와ㅇ징웨이는 그가 몇일전 밤에 하던 말을 생각하여 참말 천도(天道)가 무심하지 않기를 내심 빌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의 몸도 아직 완전히 위험지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내에서 나올 때 지나친 다이를 생각하고, 자신이 탈 비행기가 격납고에서 비행장으로 끌려나오는 결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초조하게 보냈다. 윈난성 주석에게서 강연을 청한 전보는, 만일의 준비로 항상 몸에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바로 15분 전에 의사 진찰을 받겠노라고 병원 문앞에서 천부레이와 저우언라이와 인사를 나눈 자신이다. 이제 누구에게든 비행기를 타려는 현장을 발견당한다면 그까진 전보는 아무짝의 소용이 없을 것이다......
"팽 군의 은혜를 내 갚을 길이 없구려." 펑쉐페이는 호젓하게 웃고 말하였다. "미미한 수고로서 수고를 이야기할것이 못됩니다. 부디 먼길 가시는동안 평안하십시오. 선생님의 진력으로 하루라도 일찍이 동아의 화평이 이뤄지기를 빕니다."
"부디 증 군의 편의도 보아주시기 바라오." " 당부 안하신다고 잊을리 있겠습니까?"
"위원장이 돌아와서 내가 떠난 것을 알고 말이 있거든, 모든 것을 다 내탓으로 미루시오." 그러나 그답에는 답을 하지 않고, " 일로평안 (一路平安) 하시기만을 빕니다." 라 말했다. 다시한번 인사를 마치고 펑쉐페이는 비행기 옆에서 물러섰다.
프로펠러가 돌고 활주를 시작해, 마침내 이륙하자, 비행장 상공을 한바퀴 선회하고 다음에 기수를 동남으로 향하여 '라이트 싸이크론 750마력' 2기를 장비한 커티스 라이트-콘도르 형 (型) 수송기는 음울한 충칭의 하늘을 떠나 일로 쿤밍을 향해 시속 240km 로 얼마동안 양쯔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쿤밍의 하늘은 맑았다. 말게 개인 날은 겨울에도 겹옷이 더운 쿤밍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심호흡을 두어번 하였으나, 마침 쏜살같이 비행장으로 안으로 달려온 한대의 링컨 자동차에서 뜻밖에 그의 아내 천비쥔과 그의 딸과 동지 저우포하이, 그리고 윈난성 주석 룽윈이 뛰어온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셨소?" 그는 저우포하이가 내미는 손을 덥썩 잡고 진정으로 반갑게 흔들었다.
"전보를 보고 나왔는데.... 당신이 친것 아니었나요?" 아내 천비쥔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럼 팽 군이 쳤나보군, 아니면 증 군이 친건가?
왕징웨이가 그렇게 말하고 비로소 룽윈을 향하여 인사를 하려 돌아섰을 때, 그는 어느틈엔가 그의 등뒤에 서있는 쩐증밍의 부인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 두렵기나 한듯 그는 아무런 말이 없이 왕징웨이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저우포하이가 대신하여 물었다.
"선생님, 쩐중밍 군은...?"
왕징웨이는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 하고 대답하였다. "증 군은 이번에 같이 오지 못했소," 자세한 말은 들어가서 하십시다. "그래도 잘하면ㅡ " 그는 자신이 없는 것을 그래도 힘있게,
"그래도 잘하면, 수일 있다가 뒤쫓아 오게 될 것이오." 쩐중밍 부인의 입술이 가만히 경련하였다. 그의 안면에는 울음을 참으려는 필사의 노력이 나타나 있었다. 왕징웨이의 마음이 그와 마찬가지로 암담하였을 떄, 윈난성 주석이 말하였다.
"아무튼 빨리 들어가십시다. " 왕징웨이는 곧 그의 뒤를 따라 그가 안내하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성내로 들어가서 도독부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의 바로 다른 고장의 여름철 모양으로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거침없이 불어드는 표고 (標高) 1960m 고원의 바람이 맑고, 또 시원하였으나 역시 왕징웨이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도 잠깐 뒤에 그는 불길한 생각이라도 쫓으려는듯이 머리를 한번 흔들고, 곁에 앉은 룽윈을 돌아보고 말했다. "폐를 끼치게 되어 불안스럽습니다만은, 하노이까지 비행기를 한대 주선하여 주십시오."
" 그 말씀은 저우포하이 선생에게 이미 들었습니다. 언제가 좋으십니까?" "내일 바로 떠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안으로 주선해두겠습니다." 왕징웨이는 정중하게 "감사합니다" 라 사례를 하고 다시 별 말이 없었다.
동지 (同志)
중화민국 27년 12월 21일 오후 6시 ㅡ, 홍콩 빅토리아 스트리트 일각 (一角) 에 있는 남화일보사 삼층 주필실안에 린바이셩과 메이쓰핑 두 사람이 조금전에 들어온 '왕징웨이 충칭을 탈출하여 하노이에 도피' 라 적힌 로이터 충칭보도 기사를 손에들고 지금 이야기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하였든 왕 선생님께서 충칭을 탈출하신 것 만은 사실일 것이오. "
메이쓰핑은 아까부터 몇번인가 한 말을 또 되풀이하였다. "그렇다면 좋기나 하겠소, 그러나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구료."
린바이셩도 아까부터 몇번인가 한 말을 또 되풀이 하였다. "예정대로 하노이로 가셨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충칭을 탈출하신 것만은 사실이라고 믿소, 로이터 통신이 이렇게 중대한 뉴스를 확실한 근거 없이 발표할 까닭이 없소."
메이쓰핑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찌하여 아무 기별이 없으시오? 선생님부인과 저우포하이씨가 쿤밍에 계시니 선생님이 충칭을 탈출하셨다면 분명 쿤밍에 한번 가셨을 것이리다. 그러면 저우포하이씨로 부터 무슨 정보가 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린바이셩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저간에 무슨 사정이 있어, 우리에게 아직은 통지를 안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
"그러면 그런걸로 칩시다. 그러나 그 통제기구가 거의 완전한 충칭에서 선생님이 무사히 탈출하여 하노이까지 오셨으리라고는 도무지 믿을수가 없어 그러오."
"아무리 믿을 수 없더라도 사실이라면 하는 수 없지 않소? 아무리 장 위원장이 감시를 엄중히 한다 하더라도, 선생님께는 선생님을 도와드릴 동지가 하나 또 있지 않소? 나는 어떻든간에 선생님께서 드디어 충칭을 탈출하시는데 성공하셨다고만 믿소. "
메이쓰핑이 두뺨을 붉혀가며까지 자기의 설 (說) 을 고집하는 것을, 린바이셩은 더이상 반대하지 않고, 잠깐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충칭을 나오신것이 사실이라 하고 나는 이번 일에는 그 배후에 위원장의 암묵적 양해가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되오."
"위원장의 암묵의 양해라니?"
"즉, 선생님을 장위원장이 이용하여 선생님의 화평운동을 가지고 일본의 공격을 막아놓고, 그 사이에 위원장은 군대를 재편성하고 항전체계를 다시 정비한다음, 시기를 엿보아 공세로 나아가려는 것이나ㅡ "
린바이셩이 말을 맺기전에 메이쓰핑은 " 노, 노" 라고 손조차 내저으며
" 그게 될법이나 한 말이요? 선생님께서 장 위원장에게 이용을 당하시다니...."
"아니, 이용을 당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장 위원장편에서 선생님을 이용하려고 선생님의 충칭탈출을 모른체 하고 있었던것이 아닌가 그말이오. 그렇게라도 해석할수 밖에, 선생님의 충칭탈출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 글쎄ㅡ " 메이쓰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을 이윽고 보고 있다가 린바이셩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당치 않은 말이라면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하오. 입으로는 비록 항전을 부르짖으나, 속으로는 장 위원장도 화평을 희구 (希求)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오. 작년에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이 화평조정을 나서겠다 말했을 때 그는 우선 귀가 솔깃했었고, 그 뒤 금년들어 와서도 가오쭝우 (高宗武)를 도쿄에 까지 보내지 않았소?"
"그것은 저우포하이씨가 주장하여 보냈다고 봐야하지 않소? "
"비록 주장은 주 씨가 하였다 할지라도 그말을 들은 것으로 보아 위원장도 조건만 어지간하면 화평을 하려든다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소. 자기도 화평을 바라기는 하나 아무렇기로 이제와서 자기 입으로 그말을 차마 할 수 있겠소? 그러니까 이제까지 화평을 주장하여 오셨고, 또 일본인에게도 신용이 있으신 선생님께 정작 운동은하시게 하고 그 운동의 결과 국민들의 동향이 달라지기를 기다리어 자기 일신 (一身)의 안전도 도모하여 놓고, 중일 양국의 화평을 실행하려는 것이 아닐까 말이오 나는 이 둘중에 하나라고 믿소. "
이번에도 메이쓰핑은 " 글쎄ㅡ"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좀더 기다려봅시다 그려." 린바이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앞으로 갔다. 창밖은 곧 바다요, 바다건너 구룡반도에는 폭풍우신호소의 회색건물이 석양을 띠고 서 있었다.
"아무튼 수일내로 또 무슨 좀더 확실한 정보가 있겠지."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 다른 정보가 없다. 린바이셩, 메이쓰핑이 한참 애를 태울 떄, 나흘 되는날 저녁에 표연히 남화일보사 편집국에 거짓말같이 저우포하이가 나타났다.
"아! 주선생! " 린바이셩과 메이쓰핑은 각기 그의 한손씩을 잡고 곧 주필실로 이끌어 들였다.
"대체 어찌된일이오? 선생님께서 충칭을 탈출하셨다는 것이 사실이오?"
"사실이오, 지금 선생님께서는 하노이에 계시오. 나는 그곳에서 오는 길이오. "
" 선생 부인께서도 함께 계시오? " " 부인도 계시고 쩐중밍씨의 아내도 있고." "그럼 모두 함께 오셨소?"
"아니, 쩐중밍은 이틀 뒤 늦어서... 그래 충칭서는 다시 아무 지령이 없었소?"
" 예추캉 (葉楚傖) 에게 그만 돌아오라고 두번이나 전보가 있었소. 그러나 일이 아직 남았다 하고 답전을 처버렀소. 그래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이리 오시겠답니까?"
"아직은 미정이시오. 얼마동안 하노이에서 계시면서 정세를 좀 관망하시겠다 하십니다."
"어찌 이리로 오시지 않고....."
"선생님께서는 아직은 오시지 않지만 수일내로 선생님의 성명 (聲明)이 나올 것이오. 선생님의 성명, 화평통전 (和平通電)을 어떻게 대대적으로 취급할 것인가 하는것이 우리 목전의 중대한 임무이오."
린바이셩은 그의 말에 적지않은 활기를 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그것은 차차 상의하기로 하고, 우선 어디가서 축배를 듭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밤에 한잠도 자지 못할것만 같소."
두사람은 곧 동의하고, 함께 신문사를 나와 해안통 (海岸通) 을 향해 걸어갔다.
낭패 (狼狽)
예정보다 하루 늦어 21일에 란저우에서 충칭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돌아오자 즉시 왕징웨이와 쩐중밍이 충칭이 탈출한 것을 알고 사뭇 당황하여 하였다. 그는 특무공작대에 명하여 비밀히 그들의 탈출 경로를 탐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왕징웨이는 바로 자기가 란저우로 떠나던날 ㅡ, 즉 18일에 쿤밍으로 가서 그 이틑날 그의 아내와 저우포하이를 동반하여 하노이로 간 것이 판명되고, 쩐중밍은 그들보다 이틀 뒤늦어 20일에 역시 쿤밍을 경유하여 그곳에 날아 기다리고 있는 처자와 함께 하노이로 탈출하여 버린 것이 명백하여 졌다.
두번이 모두 교통부차장 펑쉐페이가 편의를보아준것이 틀림 없어, 장제스는 괘씸하기가 이를때 없었으나, 민심이 소요할 것이 두려워 아직은 아무처분도 내리지 않기로 하였다. 물론 사실을 안 항전파들은 왕징웨이를 한간 (漢奸) 이라 부르며 비난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것을 도리어 억압하려 애썼다. 그는 어떻게든지 하여 왕징웨이로 하여금 생각을 고치고 다시 충칭으로 돌아오게 하려 은근한 노력을 하였다.
그는 12월12월 26일, 국민당 기념일 석상에서도 왕징웨이의 출국이유를 고질의 심장병이 재발하여 명의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하노이로 간것으로, 결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충칭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ㅡ 아무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대한 충절을 다음과 같이 말을 극진히 하여 칭찬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부총재 왕징웨이씨의 행동이 언제든 지극히 진지하였다는 것은 주지 (周知) 의 사실입니다. 최근 수년래로 그가 구국항전을 위하여 분골쇄신, 일신을 들어 국사에 처하여 온 것은 중앙당국이 깊이 인정하는 바 로, 동시에 불초중정으로 감격하여 마지않는 바 입니다. 다만 이번에 왕징웨이씨가 우연한 사정으로 하여 쓰촨을 나갔기 떄문에 적진에 요언(搖言) 을 살포할 기회를 준 것은 유감입니다. "
"왕징웨이씨와 중앙당인, 그리고 왕징웨이씨와 나는 이제까지 간난 (艱難) 를 함께 하여온 깊은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언제고, 또 무슨 일이고, 한번도 숨긴 적이 없이 서로 협의를 해 왔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무슨 의견이 있을 때면, 반드시 이를 당중앙과 토의를 하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와 서로 무릎을 맞대며 의논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러한 국가존망의 대사에 관하여 중앙당인과 또 나에게 의논하지 않았다는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애국의 지성에 불타고 국난에 나아가는 성심은 반드시 항전의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 인물일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외간에 전하는 것과 같은 소문에 대해서는, 국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소문이야 말로 일소 (一笑)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이 대체 얼마만한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 ㅡ 하고 생각할 때, 그는 저모르게 한숨을 쉬고 안타까워하기를 마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있든 왕징웨이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떄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노이에 가 있는 왕징웨이와 그 일파의 동정을 은근히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국 27년 12월 29일, 마침내 왕징웨이는 그의 소신을 중외 (中外)에 성명하고 말았다.
그 성명은 다음과 같았다.
『 지난 4월 개최되었던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발표된 중국 현재의 항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1934년 탕구정전협정 후 온갖 굴욕을 참으면서 일본과의 교섭에 응해왔던 것은, 하나는 군사행동을 피하고, 다음의 두 사업을 평화적인 법에 따라 수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업들은, 첫째는 북지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동북 4성의 현안을 합리적인 해결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요건은, 우리나라에서의 외국권익 불침해, 독립의 보장, 영토보전에 있으며, 한편 경제적으로는 우리의 지도는 호혜주의와 평등에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의 발발로 중국은 상기했던 평화적 해결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무기를 들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지난 12월 22일의 성명에서 일지(日支) 국교 조정에 관한 일본 정부의 근본 방침을 천명했다. 이 방침에서 첫 째로 강조된 것은 선린우호였다. 즉, 이 방침에 의하면, 일본은 중국에 대해 영토도, 배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본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지만, 그러나 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실행된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인이 중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하고 상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일본은 중국에 대해 조계를 반환하고, 또한 지나에 대한 치외법권 철폐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이와 관련된 선언을 엄숙하게 발표한 이상, 우리는 평화적 수단으로서 북지 각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번 사변의 과정에서 상실된 영토도 회복할 수 있고, 중국의 영토주권, 행정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회의 선언에 따라 북지 4성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조치를 취해야한다. 이 문제는 지난 수년에 걸쳐 일본정부에 의해 계속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두 번째 요점은 공동방공이다. 이는 과거 수개년을 두고 일본정부가 누차 제의하여온 바이나, 우리는 그것이 중국의 군정과 내정에의 간섭에까지 미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믿지 않아왔다. 우리는 일본과의 방공협정이 중국의 군사적, 정치적 문제에 간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해왔지만, 일본은 일지방공협정은 일독이(日獨利)방공협정과 같은 정신으로 체결되어야 한다는 매우 솔직한 언명을 한 이상, 이에 대한 의혹은 이제 철회되어도 될 것이다. 방공협정의 목적이 공산당의 국제음모를 방지하고 전복하기 위한 것인 이상, 이 이유 때문에 이 협정이 중국의 '소련'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은 이미 삼민주의를 따르기로 서약한 이상, 공산당으로서는 당조직의 선전활동을 멈추고, 그 변경정부를 폐지하는 동시에, 그 특별군사조직을 폐지하고 중화민국 정부의 법률제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삼민주의란 중국 국민의 근본주의이며, 조국을 방위하는 우리들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삼민주의에 배치되는 모든 조직이라던가 선전 따위를 탄압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요점은 경제제휴이다. 이 사안도 마찬가지로 과거 수 년전부터 일본정부로부터 자주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정치적 혼란이 미해결된 채 남아있는 한, 경제제휴와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져왔다. 일본 정부는 이제 엄숙하게 중국의 주권, 정치적 독립, 영토를 존중한다고 천명하고, 일본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나에 대한 제삼국의 권익을 제한하는 것을 요구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간의 경제적 협력을 위한 평등주의를 만드는 것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이를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그 기초 속에서 각종 구체적 조건을 제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신중한 고려속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한다.
국민정부는 앞의 세가지 요점(선린우호-공동방공-경제제휴)의 기초 위에 신속하게 평화의 회복을 위해 일본정부와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지난 11월 3일의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1월 16일의 성명에서 태도를 바꾸었음을 상기해야한다. 따라서 국민정부가 위의 세가지를 평화 토의의 기초로 한다면 협의로의 길은 열리게 될 것이다. 중국이 무력저항하는 목적은 국가의 존재와 독립을 학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미 1년 이상에 이르는 지금의 전쟁 속에서 우리나라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만약 우리가 정의에 따라 평화를 재건할 수 있다면 국가의 존속과 독립은 유지되고,이로서 무력저항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위의 세가지 요점은 평화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나아가 평화의 조건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그 조건의 안정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신중한 고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일본군의 중국 철병의 모든 과정이 빠르고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한된 일지방공협정의 존속기간 중 일본군이 주둔은, 이름 바 특정 지구의, 내몽골 부근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이 군대의 주둔은 중국의 주권과 정치적 독립,정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나, 중국은 이렇게 주둔의 제한을 둠으로서 비로서 전후의 부흥과 재건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양국의 근린관계에 비추어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선린과 우호관계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지금의 상태는 철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일본과 중국 이 함께 이에 대한 상호 책임을 규명해야한다. 일본과 중국간의 영구적 평화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교육정책을 선린주의와 상호모순되지 않게 하고, 일본 또한 중국에 대해 전통적인 멸시의 태도와 정복사상을 포기하고 대신에 친중국적 교육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동아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할 바인 것이다. 동시에 태평양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들은 국제친선과 상호의 이익증진이라는 공통된 대의를 위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각국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앞에서 언급한 제안들을 이루고 또한 이 외의 제안이 받아드려지기를 충정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
민국27년 12월 29일
왕 조 명 (汪 兆 銘)
제3처장 (第三處長)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이 그의 기관지 홍콩의 남화일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12월 30일 ㅡ , 그로서 이틀지난 1월 1일 정오 가까이, 한 사나이가 상하이 공관마로 (公館馬路) 의 넓은 길을 황포강 (黃浦江) 강변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이날 상하이 기온이 영하 2도 ㅡ, 영하2도면 이 도시로서는 무섭게 추운날이라고 할수 없으나, 그래도 도수만 가지고 따지자면 역시 단지 영하2도에 지나지 않는 추위인것을 그 사나이는 외투깃을 빳빳이 세워 두뺨과 코 아래를 감추고, 푸욱 눌러 쓴 회색 중절모 앞 챙에 이마와 눈썹을 가리고는 두손은 또 외투 주머니에 깊숙히 꽃아 무척이나 추위를 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는 남에게 자기의 얼굴을 들어 내놓고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밖에 들어난 살이라고는 도무지 코와 두눈 뿐이라 꼭 장담은 못하겠으나, 이는 35세 가량, 키가 호리호리 크고 마른데다 그 눈이 총기를 띄고 있는 것이, 모자나 외투나 구두가 다 낡은 것이기는 하였어도 결코 상스러운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얼마동안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앞만 바라보며 걸었던 것이나, 강변까지 거의 다 나와 프랑스 영사관 앞을 지날 때였다. 마침 세차게 불어드는 강바람에 모자 앞챙이 휘뜩 뒤로 제쳐지는 것에 놀라 무심코 든 눈이 그곳 길 모퉁이에서 승합차를 기다리고 서있는 두명의 중년신사를 보았을때, 그는 모르게 걸음을 딱 멈추었다.
( " 회색모자는 틀림 없는 푸시서 (傅式設)이다. 그러나 나이 제법 더 먹은 저 사람은 누구인가...? " )
그 사나이가 이렇게 생각하며 오십은 되어보이는 검정모자 쓴 신사를 눈여겨 볼때, 그가 푸시서이라 말한 회색 모자 쓴 신사도 우연히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갑자기 당황하여 좀더 승합차를 기다려 보려 안하고 마침 옆을 지나가는 빈 택시 하나에 손을 들어 세우고, 의아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나이 먹은 신사를 팔을 이끌어 차에 태우고, 다음순간 그들은 강을 끼고 황포탄로 (黃浦灘路) 를 달려갔다. 보고있던 남자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편을 향하여 두어간통 달려가며 분주히 주위를 둘러 택시를 찾는 모양이었으나, 정작 저편에서 빈 택시가 달려 왔을 때는 도리어 그쪽은 보려고도 안하고 픽 ㅡ, 스스로를 비웃는 웃음을 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이 사나이는 장개석의 비밀경찰인 특무공작대 제3처장 딩모춘 (丁默邨) 이다. 그는 대장 천궈푸 (陳果夫) 의 밀명을 받고 대원을 인솔하고 몇달전부터 상하이로 잠입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원래가 인텔리 출신인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명에 대하여 늘 회의감을 가지고 오던 터인데, 바로 어제 남화일보에 게재된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을 읽이에 미쳐,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제스의 초토항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무공작대라는 그의 소임은 누구보다도 민심, 민정에 대하여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백성들은 일부 항전파를 제외해 놓고는 누구나 화평을 희구하고 있고, 또 그들이 화평을 희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도탄의 괴로움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이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준 순간, 그는 이제 다시 화평파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계획을 밀탐하고,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생명과 자유를 뺏기조차 하는 자신의 직업이 부끄럽고 한심스러워졌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한심스럽고 부끄러운 활동으로 말미암아, 화평파의 운동이 조금이라도 미약해지고 거기에 4억 동포가 좀더 오래 불행 속에 빠져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고도 한편으론 슬펐다.
( "이제 다시는 장제스의 인형으로 그러한 우습고 막한 소임을 하지는 않으리라...." )
그는 황포탄로에 있는 바에서, 오늘 또 진삼(陳三) 에게 정보를 듣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것에는 이제 혐오조차 느끼고 걸어가던 중에, 문득 일즉부터 상하이에 있어 화평운동의 지하공작을 하고 있다하여 은근히 그의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여 온 부식설을 보자, 오랫동안의 습관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 보려 하였던 것이나, 그 즉시 그러한 제자신에 증오조차 느끼고
( " 이제는 장제스와의 일체의 과거관계를 청산해 버리리라...." ) 하고 굳게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 " 관계를 끊어 버린 이상, 이제 진삼이를 만날 필요도 없다...." )
그는 강변에 걸음을 멈추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얼마동안 강위로 왕래하는 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시 마음에 뜻한 바가 있는듯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탄력 있는 걸음걸이로,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의 조그마한 바를 찾아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한번 그안을 둘러보고, 저 편 구석 탁자에 흡사 불량청년으로 보이는 진삼이를 발견하자, 그의 탁자로 갔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 진삼이는 불평을 하는듯 손목시게를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응, 좀 생각하는 일이 있어, 차를 안타고 걸어 오느라고 그랬네, 그래 무슨 ㅡ "
하다가 뒤에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자 돌아다 보지도 않고 " 위스키 ㅡ!" 하고 명한 마음에 그 발소리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는 것을 들은 다음에,
"그래, 그 뒤 무슨 정보가 있었나? " 하고 은근히 물었다. "별 정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주칭라이 (諸靑來)가 펠리스 호텔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어제밤에 곧장 가보았으나, 이미 이틀전에 어디로 인지 떠난뒤 였습니다. 주칭라이는 지금 푸시서와 왕푸옌 (汪馥炎) 두사람과 함께 잡지를 창간하려고 운동중인 모양입니다. "
"왕푸옌이라면 우창 중산대학의 헌법교수였던...? " "네, 그사람이 중일화평을 꾀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증가가 있습니다." "잠시만, 그사람 나이 한 오십되었지?" "네"
딩모춘은, ( " 그럼 아까 부시서와 함께 차를 타고 간 신사가 왕푸옌일지도 모르겠군.. " )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 그밖에 다른 정보는 없는가? " 하고 물었다. 위스키가 도착했다. 딩모춘과 진삼이는 잔에 한잔 따라주고 자기는 스스로 석잔이나 마시었다. "별 정보가 없습니다. 이건 우리쪽 이야기입니다만은, 제2처 (第二處) 의 애들이 몇명 하노이로가 왕징웨이의 동정을 탐지하러 갔답니다. "
"그건 알고 있는 거고..." "그러나 아직까지도 왕징웨이가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답니다. "
"그것도 알고 있는 거고..." "저 제2처장이 홍콩으로 수일내에 곧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
"제2처장, 다이리가?" " 네" "흐으음......." 딩모춘은 탁자위로 쑥 내밀고 있던 상반신을 의자등에다 기대고 눈을 감으며 잠깐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듯 하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내 자네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네. " 하고 잠깐 주위를 둘러본 뒤에 상반신을 부척 진삼이에게 내밀었다.
제2처장 (第二處長)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이 남화일보를 통하여 발표되자, 홍콩안은 발칵 뒤집혔다. 그 흥분이 아직도 새로운 1월 1일 오후, 남화일보사로 두장의 비전 (秘電)이 들어왔다. 한장은 충칭정부 선전부장 예추캉이, 또 한장은 장제스의 비서 천부레이에서 온것으로 수신인은 두장 모두 린바이셩으로 되어있었다.
오직 발신인만 다를 뿐, 내용은 두장 모두 같은것으로, 저우포하이가 지금 어디 있느냐ㅡ ? 하고 묻는 힐문 (詰問) 이었다. 왕징웨이의 성명이 얼마나 충칭정부를 당황하게 놓았는지는 이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린바이셩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주 선생이 계신 곳을 내가 알 턱이 있오?" 라는 뜻으로 답전을 치고는, 곧 단장을 들고 신문사를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해안통에 있는 '아즈마야 료칸 (吾妻旅館)' 이라는 일본여관이었다. 2층, 그중 구석진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메이쓰핑은 방 한가운데 다다미위에 거북하게 앉아서 중산전서를 뒤적거리고 있었고 저우포하이는 창에다 바짝 붙혀놓은 책상앞에가 단정하게 앉아서 남화일보에 실릴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사흘전부터 이 여관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쓰핑은 호텔을 주장하였으나, 여관이 남의 이목을 더 안끌수 있다고 저우포하이가 고집하여 그들은 이곳으로 숙소를 결정한 것이다.
저우포하이는 일본 유학생으로, 일직이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일본말도 능하거니와 일본적인 생활에도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메이쓰핑은 베이징대학 출신으로 일본도 외국도 모르는 사람이다. 순수한 중국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에게는 다다미방이란 거처하기에 심히 거부함을 느꼈고, 일본음식이란 도무지 입에가 맞이 않았다. 그래도 그는 한번 그렇게 숙소를 정한 뒤 입밖에 내어서는 한번도 불평도 말하지 않았다.
"무슨일이시오? 벌써 나오는 길이시오?" 린바이셩을 보자 메이쓰핑은 우선 방석부터 그에게 권하며 물었다.
"벌써 나오기는 , 처음부터 안나온 사람도 있는데....." 린바이셩은 비꼬는듯 한마디 하고, 그가 내어 놓은 방석 위에 앉았다.
"사에는 안나가더라도 이렇게 원고만 쓰면 그만아니오?" 저우포하이가 한손에 만년필을 잡은채 책상앞에서 물러 앉으며 말하였다.
"그래 주선생은 원고라도 쓰고 계시니.... 매 선생은 대체 무얼 하고 계신거요? " 린바이셩은 웃고 다시 메이스핑에게 고개를 돌려 또 한마디 하였으나, 그는 그말에는 대답을 않고
"무슨 뉴스라도 있소? " 하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있다 마다, 기절 요절할 소식이...." 린바이셩은 주머니에서 바로 조금전에 받은 두장의 전보를 꺼내어 그들 앞에다 놓았다. "뭐? 저우포하이가 어디있느냐? 하 하 하 ....." 저우포하이는 호걸 웃음을 웃고 물었다.
"그래 답전을 췄소? " "응" " 뭐라고?" "뭐라기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였지, 어떻든 주 선생이 그들에게는 괘씸하게 생각되었던걸꺼요. 다른 사람 이야기는 묻지않고 주선생 주소만 물으니..."
"두분은 하도 죄가 커서 그들이 어이가 없어 모른체 하고 있나 보오" " 우리가 무슨 죄가 있소? "
"중앙선전부 특파원으로서 선생님의 화평통전을 발표하고 위원장이하 항전파 공격만하니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있겠소? " 세사람은 잠깐동안 명랑하게 웃었다. 한바탕 웃고 다시 입을 연 것은 저우포하이였다.
"하지만 차차 정신들을 차려야 하오. 우리들의 태도가 이만치 선명해진 이상, 쟤들이 가만 있을리가 있겠소?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운동을 방해하려 들 것이오. 물론 우리들의 신변도 위험할것이고 ㅡ "
"그것은 벌써 ㅡ " 하고 린바이셩은 대수롭지 않은듯 말하였다.
"우리들이 이 운동을 시작하리라 결심한 때에 이미 각오한 바가 아니오, 이제 새삼스레 말할 것이 무엇이오?"
"그야 물론 각오야 하고 있지, 하지만 우리의 운동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우리 목숨이 소중한게 아니겠소? 그러니까 아무리 술이 먹고싶더라도 사호주가 (思豪酒家) 와 같은 술집에는 발을 들여놓지말라는 것이오 "
"사호주가? 어떤 집이지?" "나도 아직 가본 적은 없소, 해안통 바로 근처 어디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술집이 왜?" "요 수일동안에 특무공작대가 한 7~8명이나 모여 들었다합니다."
"그 정보는 어디서 들어온 것이오? " " 내가 이곳에 온뒤로 간첩 (間諜)을 매수한 것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시구료? " 린바이셩은 잠깐 못믿어운듯이 저우포하이를 바라보다가 메이쓰핑을 보고 물었다.
"정말이오? " 매사평은 대답하였다. " 정말이오, 수히 다이리도 온다고 합니다" "다이리가?"
린바이셩은 다이리 라는 말에 순간 전신에 피가 끓어올르는 것을 느꼈다.
"그 암살단의 두목이? " 그는 증오가 가득한 어조로 씹어 뱉듯이 말하였다. 저우포하이가 매수한 간첩의 보고는 역시 사실이었다. 제2처 특무공작대원 몇명이 홍콩에 들어와 사호주가를 중심으로 암약을 하여 오더니 1월 4일 밤에는 마침내 제2처랑 다이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그는 뒷문으로 들어서자 마주방에서 내다보는 요리사를 보고 턱으로 천정을 가리키며 "주인장 계시나? " 하고 물었다. 젊은 요리사는 처음보든 인상 좋지 않은 사나이가 뒷문으로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데, 또 그는 "해라." 라는 말투를 계속 붙였고 이에 꼴이 나서 "계신다. 대체 너는 누구야" 하였더니
"아 이놈, 말버릇 좋다! " 하고 무서운 눈으로 홀기더니, 흥 ㅡ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구석의 좁고 또 급한 층게로 발소리를 유난스럽게 쿵쿵거리며 올라갔다.
"누구냐ㅡ?" 하고 불 멘소리가 물었다.
"나다" 하고 문을 홱 열고 들어서자, 오십이 넘은 사호주가의 주인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눈이 금시에 수박처럼 커져서는
"아 처장님아니세요? 수염을 깎으셔서 얼른못알아 보았습니다." 하고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몇번씩 허리를 꾸벅거리며 "오실줄은 알았습니다만 이처럼 일찍 오시리라고는 생각안했습니다." 하고 그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안락의자를 권하고, 저편에 놓인 나무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맞은편에다가 놓고 또 방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얘야ㅡ" 하고 요리사를 부른마음, "오가피주 한병이랑 안주 몇가지 얼른 가져오너라. " 그렇게 명하고 손을 연신 부비며 제자리로 돌아와 "숙소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직 안정했네, 자네만 귀찮아 하지않는다면, 이방을 좀 쓰고도 싶다만은....." 하고 주머니에서 마도로스 파이프를 꺼내들었다.
"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ㅡ? 누추하고 비좁은 것만 참아주신다면야 저야 그 밖에 더 좋을것이 없겠습니다. 처장님께서 여기 계셔주시면 저야 일도 편하지요. "
다이리는 그가 하는 말을 귓가로 흘홀려들으며 골통에다 불을 붙이고나서는
"그 뒤에 하노이에서는 무슨 정확한 정보가 있었는가? "하고 맞은편 벽에 걸리어 있는 서양미인의 나체화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주인은 마침 계집 하나가 운반하여 올리는 술과 안주를 식탁 위에 벌려놓고 내려가게 한 뒤에 저편 책상 서랍을 열쇠로 열고 서너장의 종이쪽을 꺼내어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다이리는 아랫입술을 삐죽이 빼물고, 한손에는 술잔을 들고 그것들을 차레로 읽었다.
첫장에는, '왕징웨이는 확실히 부인을 동반, 하노이에 있다. 빠니에가 42번자 중국인 보석상의 주선으로 시내 어느 병원에 신분을 감추고 입원중.' 둘째 종이에는 ' 왕징웨이는 하이폰교로 부터 22km 떨어진 곳에 있다.' 읽고 나자 다이리는 종이를 꼬깃꼬깃 뭉쳐 주인의 앞에 던지고
"미친 녀석들! " 하고 술을 한숨에 들이 마셨다. 주인은 자기가 꾸지람을 들은듯싶게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조심 조심 종이뭉치를 집어 한장한장 구김을 다시펴서 차곡차곡 접어서는 바로 소중한것처럼 다시 책상 서랍에다 가져다 넣고, 자물쇠를 채운뒤에 제자로 돌아왔다.
'미친 녀석들!" 다이리는 다시 중얼거렸다. "왕징웨이는 한 10명 되는줄 아나? 그래 두달이 되도록 그저 그자가 숨어있는곳을 못찾아냈다고?" 다이리는 하는수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한번치고 또 술잔을 들었다.
"저어ㅡ, 있는데만 알면 ㅡ " 하고 주인은 조심조심 다이리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즉시 처치해 버리나요 ?"
"뭐?" 하고 다이리는 성미급한 사람처럼 우선 소리를 한번 꽥 지르고 말하였다. "그렇게나 되었으면 속이 시원하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그냥 곱게 내버려 두라는 거라네"
"그냥 두면 뭘해요? " "뭘하는지 내가 아나? 그냥 두라니까 그냥 둘수 밖에........"
"저어, 그럼 여기 남화일보 패들도...?" "그것두 아직은 가만 두라지만, 내 얼마 있다가 혼구녕이라도 내주고 말걸세" 그리고 다이리는 생각난듯이 물었다.
"그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다 알고 있겠지? " "남화일보사로 가면 다 만날 수 있지요." "아니 누가 신문사로 가나? 사처말이지"
"네, 저기 린바이셩은 지사관저앞 우드박사 옆집에 세들어있고, " "또?ㅡ"
"저우포하이하고 메이쓰핑은 바로 요 위 아즈마야 여관이라는 일본여관에 묵고 있습니다."
"또ㅡ?" "그밖에 별로 감시할 사람이ㅡ" "없단말이지? 있네, 또 있지."
"......."
"천궁보 (陳公博) 가 있지 않은가? 센츠가오 (沈次高) 가 있지 않은가? 타오시성 (陶希聖)이 있지 않은가? 대체 자네들은 뭘 하고 있는건가...?
"그래도 그자들 왔단말은 못들었는데요. "누가 자네들 알라고 광고치고 다닌다던가? 모두 수일전에 이리로 들어 왔다고 나는 벌써 알고 오는 길일세."
수일동안 다이리는 사호주가 2층 주인의 방에 머물러 앉아 각처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보며, 무료한 그날그날을 술로 보냈다. 신통한 정보도 없었거니와 충칭에서 그뒤에 직접 행동을 취하라는 지령도 없었기 에 그는 도무지 못마땅하여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제3처장 딩모춘이 인텔리 출신인거에 비해, 다이리는 장제스가 그를 자기 수하에 걷어들이기전까지 한낱 시정의 파락호 (破落戶) 였던 것이다. 그날도 그는 사호주가에서 반나절을 보냈는데 하노이에서 부하 하나가 보낸 정보는, 이번에야 말로 정확하게 왕징웨이가 은거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왕징웨이가 탐다오의 호텔 더 라 카스카드 다르쟝에 있는것은 확실하다 ㅡ 탐다오의 호텔로부터 그 본점 하노이의 메트로폴리스 호텔로 침구6인분, 신량과 기타등등을 주문. '
일찍이 하노이에 가본적이 있는 다이리는 탐다오의 더 라 카스타드 다르쟝이라는 호텔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피서객 전문의 호텔이다. 겨울에 가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이를 폐쇄하여 버린다. 왕징웨이는 이곳을 찾아 본점인 하노이의 메트로 호텔로 침구와 식량을 주문한것이 틀림없다고 다이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 " 왕징웨이가 숨어있는 곳이 판명된 이상, 정부에서는 어쩌면 날더러 곧 가서 처치하여 버리라고 할지도 모르는일이다....." )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술잔을 기울일때, 상하이에 있던 부하 하나가 주인의 안내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오 너 왔느냐, 그래, 상하이에는 별 일이 없는가? " 다이리는 그를 자기 옆자리로 불러다 앉히고, 자기가 마시려던 술잔을 물려주며 물었다.
"별일 없습니다. " 부하는 대답하고 잔을 받아 한숨에 술을 마시었다. "딩모춘이 그녀석은 여전히, 상하이바닥을 해매돌고 있느냐?"
"네.아 아뇨.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지요. 상하이에서 제가 떠날 때 정녕코 한배를 타는 것을 본듯한데, 뱃속을 찾아봐도 없고 내릴 때 봐도 없었단 말입니다. "
"어휴 미친놈, 내가 여기 있는데 정부에서 그놈을 뭣하러 또 이리로 가라고 했겠냔 말이다. 네가 잘못본거지?" 한마디로 물리쳐버리고 다이리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듯 하더니, 은근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내가 요새 심심해 죽겠다. 너 내일 남화일보사좀 갔다 오련?" 그리고 음협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심심풀이로 어디 이놈들을 혼꾸녕이나 내볼까?" 그러한말을 하며 취하면 하는 버릇으로 팔을 걷어 올렸다.
1월 5일 정오, 남화일보사 편집국에 천궁보, 저우포하이, 타오시성, 메이쓰핑, 린바이셩등..... 화평파의 쟁쟁한 무리들이 모여 이야기가 한참이었을 때, 직원이 들어와 특무공작대 제2처장 대이리에게서 사람이 왔다고 하였다. 천궁보는 군자는 위태로운 곳에 가까이히 가지 않는법이라 하여 말렸고, 저우포하이, 메이쓰핑은 만나기는 하더라도 단독으로는 재미 적다고 했지만 린바이셩은 깔깔 웃으며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장주석의 정부부문에 있는 한도 내에서 저들과 우리는 동지가 아니요? 우리는 조금도 저들을 두려워 할 까닭이 없소." 그리곤 그는 응접실로 혼자 내려갔다. 말을 전하러 온 것은 상하이에엇서 어제 이곳으로 건너온 대원이었다.
"임 선생이십니까? 다이리 선생이 좀 만나뵙고 싶다 하십니다. " 린바이셩은 웃고 대답하였다.
"좋은말이오, 시간과 장소를 정하시오." "장소는 '사호주가' 입니다. 아시겠지요? 해안통에 있는... 그리고 시일은 추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았소, 그럼 기다리고 있으리다. "
린바이셩이 편집국으로 돌아가 그말을 하자, 모두들 너무 무모한 짓이라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비평에는 좀더 기울이려 하지 않고, 지금 바로 아래층에 나갔다가 받아가지고 온 서신을 뜯어보더니, 반가운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부석실에서 편지가 왔소. 원기 왕성하다고ㅡ, 이번에 왕푸옌씨와 주칭라이씨와 셋이서 잡지 심성주간 (心聲週刊) 을 발행하여 상하이 문하계에 있어서 화평의 제일성 (第一聲)을 높게 부르짖겠다고 ㅡ "
그가 편지사연을 발표하자 모두들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 하고는 기뻐하는 빛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났으나, 천궁보만은 다이리의 일이 마음에 꺼림직한지,
하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여 가지고 린바이셩에게 몇번이든 그말을 되풀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다이리에게서는 아무 다른 말이 없었다. 천궁보는 그제야 비로서
( " 저들이..... 사호주가니 뭐니 한것이 그러면 단순히 위협이었던걸까.....?" )
하고 마음을 놓으려 들었던 것이나 위협은 좀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신변에 절박하여 왔다.
1월 10일 밤에, 그들은 마침 달도 보름이 가까워 식후 산책을 겸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빅토리아 산을 올라기기로 말들을 하였다. 그러나 신문사에 모여 그들이 막 출발하려 할때, 직원이 한장의 종이를 들고 와 린바이셩에게 주었다.
"다이리의 무리가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오늘밤의 산책은 중지하십시오. " 서두도 서명도 없는 그 기괴한 형식의 서신에는 이와 같이 써있었던 것이다.
린바이셩은 곧 직원에게 물었다. "이것을 누가 가져다 주던가?"
직원이 대답했다. "어떤 아이가 가지고 와서 임선생에게 가져다 드리라 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갔습니다." 린바이셩은 잠깐 생각하다가 탁자위에 놓인 모자를 집어들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서들 나갑시다. " 타오시성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나가다니?" 린바이셩이 말했다. "빅토리아 산으로 달구경 가잔 말이지."
저우포하이가 말하였다. "누구짓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이러한 경고가 있는 이상, 구태어 나갈 필요가 없소. "
그러나 린바이셩은 말하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편지를 써보낸 이가 바로 다이리 자신이 아닌가 하오. 실상은 우리를 해칠 생각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이러한 장난으로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뒤에 숨어 우리들을 비웃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이 되오. "
메이쓰핑이 말하였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밤에 꼭 달구경을 나가야할 만한 까닭도 없는것이니 가지말기로 합시다. "
모든사람이 그렇게 말하여 린바이셩도 더 고집하지 않았는데, 저우포하이와 메이쓰핑은 이틑날 밤 빅토리아가 어느 요리점에서 약간의 술과 반찬을 먹고서 막 그곳을 나오려 할때, 그전날과 똑같은 필적의 경고장을 소년에게서 받았다.
"누가 주던? " "어떤 아이가 들고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을 물어보려니까 곧 달아나버렸습니다. " 저우포하이와 메이쓰핑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나서 한번 그 기괴한 서신을 읽어보았다.
"대립의 무리가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꼭 자동차를 타시고 큰길로 돌아가십시오. " 만약 린바이셩의 추측이 가당치 않은 것이라 하면, 대체 누가 이처럼 자기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인지, 또 그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다이리 무리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는것인지 ㅡ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의혹은 의혹대로 두고, 그들은 무명의 이름으로 경고하여주는대로 그곳에서 여관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았으나, 즉시 소년에게 시켜 차를 부르라 하여 큰거리로만 돌아서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이야기를 그들은 이틑날 린바이셩을 보고 하였으나, 그는 역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려 마지 않았다.
"나는 역시 그놈들이 우리를 놀릴려고 그러는줄만 믿소, 공공연히 종이쪽에 몇줄 긁적거려 보낸걸 그대로 믿고 불안해서, 그냥 갈것도 저리 돌아서 가는 꼴을 숨어서 보고는, 배들을 움켜 쥐고 웃으려고 그러는것이 틀리지 않소? 참말이지, 공연히겁을 낼게 없습니다. "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마냥 웃으며 말할수 없게 하는 일이 바로 또 그 이틑날 뒤에 생기자 그는 비로소 그 경고장이 확실히 근거가 있는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의 홍콩의 인심은 사뭇 흉흉한바가 있어 화평운동의 기치를 선명히 하고 있는 남화일보사에 대하여 장제스가 파견한 특무공작대는 이미 선전을 포고하였다고,
"곧 남화일보사를 불질러 버릴 것이다 " "홍콩에 있는 화평파들은 앞으로 사흘안에 모조리 암살을 당하고 말것이다" 혹은 " 화평파들을 도아 남화일보의 일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죄는 마찬가지다. 그 신변이 극히 위험하다. " 와 같은 유언비어가 빈번하게 돌아다녔고 그중에서도 맨나중 풍설은 사실로 나타나 남화일보사에서 식자 (植字) 와 문선을 맡아보는 직공 몇이 회사에서 돌아가는 길에 분명히 다이리의 부하라 추정이 되는 무리들에게 곤봉으로 난타를 당하여 중상을 입은 일이 있은 뒤로는 어쩌면 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화평사를 모조리 암살한다는 것도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시민들은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절때로 귀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린바이셩은 흥 ! 하고 코웃음을 치고난 뒤에 소년을 향하여 물었다. "너 이편지를 누구에게 부탁받았니?"
소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갖다 두라니까 가지고 왔지. "
"그러니까 어떤사람이 갖다 두랬느냐 그말이야. " "깜깜해서 누가 아나요? 더군다나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외투깃을 바짝 치켜새세워 나는 코밖에 안보였어요."
"그래, 처음보는사람이야?" " 글쎄 모르는 사람이래두...." "대체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니?"
"바로 옆골목에서 ㅡ , 그 골목이 펍 어둡죠?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사람이 ㅡ "
하고 이제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저우포하이가 나서서 물었다.
'얼굴은 어두워서 그럼 못봤다 하더라도 키가 큰가 적은가정도는 봤으니 알겠지?" "네, 키는 큽니다요"
"키는 크다? 그래, 뚱뚱한 사람이던 마른사람이던?" "말랐는진 몰라두 뚱뚱하진 않어요"
그리고 소년은 도망갈 기회라도 엿보드는듯 싶게 눈치만 보며
"인제 다 이야기했수 " 하고는 갑자기 몸을 삐쳐 방에서 뛰어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곁에 서있던 직원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왜그래요? 내가 뭐 죄라도 졌어요? 왜이러는거에요?" 소년은 직원에게 꽉 붓ㅌ잡힌 덜미를 뿌리치려 애쓰며 거의 울보가 되어 소리치는 것을 린바이셩이 나서서
" 너 한마디만 더 이야기를 하면 집에가게 해주지,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너를 주던?"
소년은 대답하였다.
"이걸 가지구 신문사러 들어가서 거기있는 사람들에게 주라고 ㅡ, 그리고는 뭣이라 물어보든 암말두 말고 곧 도망을 해나오라고 ㅡ 뭐 나쁜일 같지도 않구 또 돈을 벌려고 심부름을 했지 정말이지 난 아무것도 몰라요. " 소년이 덜미 잡힌것을 또 뿌리치려고 애쓰는것을 보고 린바이셩은
"그만 놔주어라" 하고 직원에게 이른 다음에 "나도 돈을 주마" 하고 은전 한잎을 꺼내주니 소년은 받기는 하면서도 " 그사람은 두푼을 주는데..." 하고 말하여 그는 웃으며 다시 한푼을 꺼내 주었다.
소년이 호주머니에 은전 네잎을 짤랑거리며 뛰어나간뒤에 잠깐 침묵이 있다가 저우포하이가 린바이셩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다이리의 짓이라고 주장하시겠죠?" 린바이셩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럼 누구짓이란 말씀이요? 많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돈을 써가며 누가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고 나서겠단 말이요? 다이리놈이 공연히 심심하니까 그러는게지. "
그러나 저우포하이는 다시 말하였다.
"내 마음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해서든 내 추측이 맞나 안맞나 알아보겠소? 나는 그사람이 꼭 우리편인것만 같소. 따라서 그가 보내는 경고장은 우리가 그의 충고를 따라야만 옳은줄로 믿소. "
린바이셩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충고를 쫓고 안쫓고... 오늘밤은 여기서 꼬박 세우게 될 모양이니 고집을 세우고 싶어도 오늘은 못하겠구려. "
그리고 세 사람은 공장으로 들어가 문성공을 모아서 활자를 고르기에 바빠 그 경고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질 수도 없었는데, 자정이 넘어 지사관저로 들어가는 어두운 옆 골목에서 한사나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지사관저 근처면 바로 린바이셩이 사처가 있는 동네이다,. 세사람은 기약하지 않고 4~5시간 전에 받았던 그 경고장을 생각하고 그것과 이 살인사이에 필연코 무슨 관련이 있는듯만 생각이 들었다. 같이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있던 젊은 탐방기자를 곧 검찰청으로 보내 보았더니 50분뒤에 돌아와 하는 말이 시체는 지사관저 근처라기보다는 바로 린바이셩의 집 옆집 우드 박사의 저택 돌담 옆에서 발견된 것으로 몸에 3방 탄환을 맞았는데 후두부를 맞힌것이 치명상이 되었다하는데 그것보다 꼭 생각을 하여 보여야 할것은 피해자의 연령과 몸체와 그 보다도 용모가 바로 린바이셩과 비슷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에는 아무리 린바이셩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 치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 저녁에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경고장은 결코 아무리의 장난도 아니었던 것으로, 그 불운한 사나이는 모든것이 너무나 린바이셩과 같았기 때문에 다이리의 무리에게 잘못 죽임을 당한것이 분명하다.
세사람은 잠깐 말없이 있다가 린바이셩이 입을 열었다.
"경고장에 대해서는 나의 이제까지의 고집을 버리기로 했소. 그러나 다이리가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히 사실이라 알았고 또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데 우리에게 경고장을 보내주는 인물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아는 도리가 없구료. 대체 누가 그들의 음모를 그렇게 신속하게 또 그렇게 정확하게 알아가지고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인지.... 참 이상한 일이요 . "
메이쓰핑이 답했다. "아마 우리와 우리의 운동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
린바이셩이 다시 말하였다.
"물론 그 호의야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다이리의 계획을 그처럼 잘 알고 있느냐 ㅡ 그것이 의문이란 말이오. "
메이쓰핑이 그말에는 대답을 못하고 있을때, 저우포하이가 말했다. "가령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상상하여 볼수가 있지 않소? 즉, 다이리의 무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은근히 호의를 가지고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ㅡ "
린바이셩은 갑자기 저우포하이를 돌아보고 물었다. "참 아까도 마음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소? 주선생. 그게 누구란 말씀이오?"
그러나 저우포하이는 역시 언명하기를 피하고 말하였다. "십중팔구는 내 생각이 맞을듯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추측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추측이라는 것이 무슨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이를테면 나의 육감이라고나 할까...? 증거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
"그것은 물론 천천히 알아도 그만이지만 어떻게든 이제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정녕한 사실인 이상 우리는 한층 더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
린바이셩이 말했다. "호신용으로 무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저우포하이가 말했다.
"밝거든 홍콩정청으로 가서 자세하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검찰청에다가 말을 해서 권총을 한자루씩 얻어달라고 그럽시다. "
두사람은 즉시 그말에 찬동을 하였으나 저우포하이가 다시 " 아무튼 그일은 그일이고 지금은 조간 발행이 당장 급하니...." 하고 공장쪽으로 발길을 옮기려 할때 메이쓰핑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였다.
"나는 하노이가 걱정이 되오. " " 하노이?" 저우포하이와 린바이셩은 기약하지 않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왕선생?"
메이쓰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들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을 때 하노이에 계신 왕선생의 신변에 위험이 절박하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을 안할수가 없지 않소? "
두사람은 침퉁한 표정으로 잠시 얼굴들만 마주 바라보았다. 조금있다가 메이쓰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왕 선생에게 곧 말씀을 드리기로 합시다. 한군데 오래 계신것이 좋지 않으시니 호텔에서는 그만 나오셔서 어디 좀더 은밀하고 안전한곳에 숨으시도록......"
저우포하이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린바이셩은 침퉁한 어조로
"그럽시다. 곧 그말을 올리기로 합시다. " 하고 말하였다.
회유 (懷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와 87km 떨어진 탐다오에 있는 호텔 더 라 카스타드 다르쟝 2층의 방에서 왕징웨이는 부인 처비쥔과 함께 일체 외출을 중지하고 표면으로는 무사평온한듯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가장 다사 (多事) 하고 격렬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쩐중밍 부부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통로 옆 의 맞은편 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징웨이처럼 언제든 자기방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홍콩과 상하이등지에 있는 동지들과의 연락이며 충칭으로부터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는 빈번하게 하노이로도 들어갔다가 하이퐁으로도 나갔다. 그래 그는 하노이에 있는 매트로 호텔 3층에 방하나를 빌려놓고 하노이 - 탐다오 간을 왕래했던 것이다.
충칭에서의 정보에 의하면 장제스는 처음에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대한 과거의 공적과 충절을 칭찬하여 그의 뜻을 돌리게 하려 했던 것이나, 드디어 그의 화평통전을 받게 되자 장제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왕징웨이와 연연락을 할 가능성이 있는 요인들의 신변에 경계망을 치고 또 왕징웨이와 내통할 염려가 있는 군벌에 대해서는 탄압과 회유의 변통자재 (變通自在)한 방법으로 그들이 왕징웨이와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막기로 방침을 세운 모양이라고 한다.
충칭으로의 정보가 분명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자세히는 아는 도리가 없었으나 미루어 생각컨대, 장제스는 우선 각 장군 에 대해 왕징웨이문제를 제시하고 제군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ㅡ 하고 의견을 구하는 한편으로 자기 직계의 군사와 특무기구를 잠입시켜 그 압력을 차츰차츰 늘려 온전히 자신과 국민정부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구하려 한 모양이다.
이리하여 각 장군들은 더러 내심으로는 왕징웨이의 화평제의에 찬의를 표하면서도, 역시 함부로 그것을 표명하지 못하고 도리어 장제스 이하 항전파들에게 혐의를 살것이 두려워 항전파와 공산당의 무리들이 각지에서 띄운 왕징웨이 반대 (汪兆銘反對), 항전계속(抗戰繼續)의 통전(通電)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고 일제히 서명을 하여 장제스를 지지하기로 맹세지은 모양이다.
이리하여 대세는 결정이 되고 말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왕징웨이에게 호응하여 일어나려던 모든 장군들은 그 행동의 자유를 잃고 말았다. 윈난성 주석 룽윈 같은이도 왕징웨이의 화평구국운동이 하루빨리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있기는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나 하는수 없이 남들 모양으로 항전계속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장제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광서파 (廣西派) 를 엄중하게 경게하였다. 광서파는 왕징웨이와 원래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나 오랫동안 장제스에게 대하여 완연하게 일개의 적을 이루고 있었 까닭이다. 그래, 장제스는 광서파의 두목 리쭝런 (李宗仁)과 바이충시가 서로 긴밀한 연락이 있을 것을 두려워 분리책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지린에 있는 바이충시의 진영에 대하여 갑자기 물질적 원조를 더하고 다시 충칭으로 부터 자기 직계의 참모단을 파견하여 그곳에 배치시키는 등의 방법을 취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왕징웨이에게 여비와 비행기표를 자기사람에게 주어 멀리 하노이까지 찾아가게 했다. 물론 왕징웨이는 그것을 단번에 거절하여 버렸다. 그래도 장제스는 용이하게 단념하지 않고 두번 세번 거듭 보내고 네번째에는 자신의 고굉 (股肱) 인 중앙헌병사령 구정룬 (谷正倫)을 시켜 하노이로 파견하였다.
왕징웨이는 호텔 자기방에서 그와 만났다. 인사가 끝난뒤에 구정룬은 곧 장제스의 뜻을 전하여
"주석께서는 왕선생이 즉시 운동을 포기하시고 유럽으로 외유하실것을 희망하고 계십니다. "
"......."
왕징웨이가 잠깐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말이 없을때, 구정룬은 다시 입을 열어
"바른대로 말씀드리자면 희망이 아니라 명령이십니다. " 하고 사뭇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
왕징웨이는 그대로 그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구정룬은 다시 어조를 높히어
"왕선생께서 주석의 명령에 복종하시지 않는 때에는 정부는 중대한 결의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여 둡니다." 하고 이번에는 거의 노골적인 위협을 했다.
왕징웨이는 비로소 입을 열어 조 용히 말하였다.
"내가 충칭을 떠나온 것은 그러지 않고서는 통전을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위급존망지추 (危急存亡之秋)를 당하여 충칭을 떠나는 것도 사뭇 마음이 괴로운 노릇이었다. 하물며 나라를 온전히 떠나 외유라니 무슨 말인가?"
왕징웨이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들리는바에 의하면 국민정부는 국제조정촉진 (國際調停促進)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이것은 나로서도 반대하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제조정과 직접 교섭을 동시에 병행하려는 것이라면 나도 재야의 몸이기는 하나 측면으로부터 협력원조를 아끼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닌것이다. "
왕징웨이는 다시 말을 끊어 그가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ㅡ 반응을 본다음
"가서 나의 뜻을 부디 주석께 전달해주시게." 하고 그를 홀까지 바래다 주었다.
구정룬이 돌아간 뒤 그는 홀로 방안에 앉아 앞으로 자기가 취할 에정행동에 대하여 검토를 거듭하고 있을때, 어제 하노이로 들어갔다 온 쩐중밍과 천비쥔이 한차를 타고 돌아왔다.
"충칭에서 또 사람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오는 길입니다. " 하고 쩐중밍은 좀 황당한 어조로
"아직 안온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왕징웨이는 호쾌하게 웃고 대답했다.
"벌써 다녀갔네." "네? 벌써요? 대체 이번에는 누가 왔었습니까?"
"구정룬." "구정룬이요? 구정강 (谷正綱) 의 형되는 사람말씀입니까?" "그렇다네. "
"아우만 못한 형같으니 ㅡ 정강은 그처럼 우리 운동을 돕고 있건만...... 그래 또 외유랍니까?"
"그렇지, 그러나 이번은 아마 일종의 최후통첩 같네 . 내가 듣지 않으면 중대한 결의가 있을거라더군. "
왕징웨이는 잠깐 고개를 들어 장식용 선반 위에 걸려있는 손중산선생의 초상을 우러러 보다가
"곧 장소를 옮겨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네" "장소를요?"
쩐중밍은 한마디 더해서 " 그게 옳습니다. 홍콩서도 벌써 여러차례나 권해왔거니와 도무지 선생님께서 저의 말을 들으시지 않으시는데 다이리가 무리라도 보내 무슨 불손한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라서요. "
"제가 곧 얻어보겠습니다." 하고, 조금전에 벗어 놓았을 뿐인 모자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런것은 장 (張) 에게 맡겨도 좋지 않을까?" "역시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
그리고 그는 자기방으로 잠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와 자동차를 몰아 하노이 방면으로 향하여 사라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 왕징웨이 일행은 탐다오를 떠나 하노이 시내로 들어갔다.
새로 얻은 집은 코론가 27번지 ㅡ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삼층 건물과 역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원에 사면에 1미터 70센치 가량의 높이 철책이 둘러쌓여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언제까지든 안전한 곳은 아니어서 옮긴지 일주일이 넘지 못해 집 근처에 수상한 인물이 배회하고 있는 것을 쩐중밍은 알았다. 그는 자기가 출입할 때마다 자기의 뒤를 은근히 미행하는 특무공작대원이 있는 것을 깨달았으나 일일히 그러한 것에 신경을 써가지지고는 아무일도 못할것이라 생각하고 길가의 개새끼들보다 더 무관심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 원문에도 '개색기' 라고 표기되어있음. )
그러나 며칠 안되어 그는 충칭으로부터 놀랍고도 슬픈 정보를 받았다. 교통부차장 펑쉐페이가 총살을 당한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쩐중밍과 왕징웨이는 마주 앉아 얼마동안 말이 없었다. 물론 총살을 당한것 같다고 하였지, 정녕 총살을 당했다고는 써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자신들의 충칭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고, 그가 장제스의 손에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아무리 싫어도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 "그의 병든 어머님은 지금 어찌 되었을꼬....." )
그 늙고 병든 어머니 하나로 하여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감히 자신을 따라 충칭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펑쉐페이가 그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무참히 죽임을 당했을때 과연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ㅡ 하고 생각해 보니 왕징웨이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 싶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일찍이 자기가 충칭을 탈출하던 날 펑쉐페이가 쓰라고 준 검은 안경을 꺼냈다. 그 안경은 그가 바로 왕징웨이의 안전을 위해 준비하였던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왕징웨이가 무사하기를 비느라 그는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희생(犧牲)
며칠 지나 홍콩에 있는 저우포하이에게서 소식이 있었다. 남화일보사를 거점으로 하고 자신들의 화평구국운동의 전개에 대하여 소상한 말이 있은 뒤 다이리가 그 수하들을 하노이로 향하여 더 보낸 형적이 있고 자기도 수일내로 떠나려는 눈치가 보이니 될 수 있으면 집을 또 옮기고 사람을 사서 경계를 더 엄중히 하라는 부탁이 있었다. 쩐중밍은 자기자신은 그다지 특무공작대에 대해 겁을 먹고 있지는 않았으나, 왕징웨이의 신변을 염려하여 그 정보를 보고 다시 집을 옮기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옮기고 또 옮기더라도 저들의 눈을 완전히 피할수는 없는 일이라 여겨 오히려 한곳에 있는 것이 나을듯 싶다고 왕징웨이는 그 의견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쩐중밍은 더 권해 볼것을 난념하고 4~5명의 현지인들을 사들여 집 안밖의 경계를 엄중히 서게 했다.
홍콩에서는 다시 정보가 있었다. 그것은 쩐중밍이나 왕징웨이에게 있어 참으로 의외이면서 또 유쾌한 소식이었다. 즉 특무공작대 제3처장 딩모춘이 장제스와 완전히 절연을 선언하고 화평파의 진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저우포하이는 다이리의 음모를 폭로하는 석장의 경고문을 받았을떄 그것을 전하러 왔다 붙잡힌 소년의 입에서 편지를 준 사나이가 키가 크고 말랐다는 말만 듣고도 막연하게나 혹시 그것이 딩모춘이 아닐까 ㅡ 하고 생각이 들었었다. 그것은 그때 보면 너무나 엉뚱한 상상인듯도 싶었으나 그는 자기가 사용하는 간첩의 입에서 제3처장이 홍콩에 나타났는데 제2처장 다이리와 그 부하 대원에게 는 일체 연락이 안된다는 말을 그 전에 들었었고, 또 그처럼 다이리의 무리들의 음모를 신속히 또 정확히 알아낸다는 것은 외부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랴. 그러고 보니 딩모춘이 인텔리 출신으로서 항상 자기가 받고 있는 사명에 대해 회의적인 까닭에 부내에서 은근히 비난을 받고 있다던 소문도 기억속에 살아나 저우포하이는 그것이 혹시 딩모춘의 짓이 아닐까? ㅡ 추측을 했던 것이다.
그는 간첩에게 명하여 딩모춘이 숨어있는 처소를 발견하게 하고 다음에 그의 행동을 감시하게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의 간첩은 딩모춘이 8번째의 경고장을 길가의 소년에게 부탁하는 현장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틑날 저우포하이는 간첩이 알려준데로 중국인 마을로 딩모춘을 찾으러 갔다. 딩모춘은 물론 구태어 화평파들에게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 하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 장제스의 괴뢰로 그들의 운동을 방해해온 몸이 이제 새삼스래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 전날 잘못을 사죄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우포하이에게 그 정체가 발각된 이제 그는 이전처럼 본색을 감추려하지 않고 그와 함꼐 남화일보사로 가서 천궁보, 메이쓰핑, 린바이셩과 만났다. 그는 자기가 현재 홍콩으로 데리고 오기는 진삼이라는 부하 하나이지만, 상하이에 남겨두고 온 수십명의 대원 이제는 이미 장제스의 사람이 아닌 실로 '왕선생' 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리들이라는 것을 밝혀 모든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실례의 말씀이오만은 ㅡ " 하고 천궁보가 그에게 물었다.
"이처럼 장제스를 버리고 우리와 일을 함께 하고자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소? "
딩모춘은 약간 얼굴을 붉히고 잠깐 주저하다가 대답하였다. " 남화일보에 발표된 왕 선생의 화평통전을 읽고서 입니다. " 그말에 일동은 선전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지 새삼스레 느꼈던 것이다......
그로서 다시 이틀 지나 저우포하이에게서 다이리가 드디어 홍콩을 떠나 하노이로 향하였다고 한층 경계를 엄중히 할것과 딩모춘을 곧 보내기로 했으니 그리 알리는 소식이 왔다. 그는 그날로 왕징웨이를 어디 좀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긴박한 시기에 적당한 처소가 발견될리 없다.
"천천히 구해보게나. " 하고 왕징웨이는 말하였으나 쩐중밍은 이제까지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오늘안으로 그를 어디 안전한곳으로 옮겨 가게 하지 않으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갑자기 속으로 생각한 바가 있어 분주히 방으로 뛰어나가 곧 자동차를 몰아 일본총영사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나본 사람은 도쿄 어느 신문사의 하노이특파원 두명과 시내에서 면포상을 경영하며 은근히 왕징웨이 일파의 화평운동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기시모토 (岸本) 씨 그리고 또 두명의 일본인이었다.
이야기는 한시간 10분이나 계속되었다. 오후 8시 15분, 쩐중밍은 지극히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차를 몰아 코론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왕징웨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는 의자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고
"선생님, 오늘만은 그저 모든일을 제가 하자는대로 하셔야만 합니다. " 하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왕징웨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의 이상하게도 흥분된 모양을 얼마동안 의아스럽게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인가? " 쩐중밍은 그래도 다시한번 되풀이 했다.
"무슨 말이든 꼭 제가 하자고 하는대로만 하셔야 합니다. " 왕징웨이는 그의 태도에 어딘지 알수없는 결사적 기백조차 느껴지는 것에 놀라면서 "그래 알겠네, 말해보게" 라고 말했다.
그러나 쩐중밍은 그말에 대해 "감사합니다. " 하고 사례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뿐으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중요서류를 손가방에 모조리 넣은 다음에
"곧 외출하실 준비를 하십시오 " 하고 거의 명령적으로 말하였다.
왕징웨이는 다시 한번 그의 열을 띤 눈을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8시 30분, 검은 안경을 쓴 왕징웨이와 쩐중밍은 현지인 호위 두사람과 함께 자동차로 하노이 교외 태호산 (太湖山) 산책도로로 향했다. 금방 비가 쏟아질듯 잔뜩 찌푸린 밤이었다. 쩐중밍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왕징웨이도 물으려 하지 않았다. 두명의 호위도, 운전수도 말이 있을 턱 없이 완전한 침묵을 그안에 실고 차차 야자나무, 벵골보리수, 보리수 나무가 심어진 길을 어둠을 뚫고 달려갔다.
교외로 나서며 쩐중밍은 고개를 돌려 뒷창으로 어둠속을 내다 보았다. 300미터 뒤로 한대의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두개의 괴물눈처럼 번뜩이며 쫓아오고 있었다. 쩐중밍의 입가에 처창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차가 태호에 이르자 저편으로에서 한대의 자동차가 역시 어둠을 뚫고 나타나며 차안에서 불빛이 세번 켜지고 세번 꺼졌다.
쩐중밍이 운전수에게 한마디 하자 차는 서고 저쪽차가 서자 마주 바라보며 오던차도 약 50미터 간격을 두고 섰다. 그리고 두 자동차에서 탔던이들이 모두 나란히 서로 접근해 갔다.
모든일은 어둠 속에 말이없이 거행되었다. 일분 30초 뒤에 사람들은 다시 각자 차에 오르고, 저 편에서 오며 불빛 신호를 하던 자동차가 먼저 움직여 그대로 하노이 시내를 향해 달려갔다. 왕징웨이의 차를 추적하여 와서 그곳에 잠시 멈춰섰던 수상한 자동차 옆을 지날 때 그차의 끄지 않은 헤드라이트에 차안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이 일순간 환하게 떠올랐다.
면포상 기시모토씨만 보이지않고 나머지는 오늘 저녁때 쩐중밍이 일본총영사관에서 만난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수상한 자동차의 수상한 사나이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다음순간 150미터 앞에 서있던 왕징웨이의 자동차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자 그들도 곧 다시 추적을 계속하여 갔다.
두차는 서로 앞뒤로 호숫가 한바퀴를 돌았다. 두차의 간격이 50미터.. 10미터... 20미터... 자꾸 다가갔다.
호수를 한바퀴 돌고 났을 때는 그 거리가 실로 70미터 에 불과하였다. 헤드라이트가 앞차를 어둠속에 뚜렷이 그려내는 한순간 ㅡ , 두명의 호위사이에 끼어 뒷자석 한가운데 앉아있던 검은안경을 쓴 왕징웨이의 놀라고 겁먹은 얼굴이 홀깃 뒤를 돌아다 보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어 운전수에게 무슨 말이 있는듯 싶더니 갑자기 앞차는 속력을 높이어 질풍과 같이 시내를 향해 달려갔다. 뒤를 쫓는 차도 좀더 속력을 내어서 갔다.
마침내 코론가 27번지 앞에 이르러서는 왕징웨이의 차는 섰고 뒷차가 속력을 늦추었을때 두 호위에게 좌우로 부축을 하게 하여 빠르게 차에서 내린 왕징웨이는 분주히 문을 열고 들어서서 현관안으로 사라졌다.
그뒤로 쩐중밍이 서류 든 손가방을 옆에 꼭 끼고 역시 좀 당황한 걸음걸이로 쫓아 들어갔다.
이때 수상한 사나이들을 태운 자동차는 저택앞을 지나 30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사나이가 모두 다섯명으로, 언뜻 보기에도 두목격인 사나이는 바로 얼마전까지도 홍콩 해안통 사호주가의 2층에 묵고 있던 다이리가 분명하였다.
다이리가 대원들에게 몇마디 말을 이르자 그들은 곧 어둠속에 흩어졌다. 다이리는 잠깐 주위를 살핀뒤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가만한 헛기침이 들렸다.다이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별 이상없었나? " "없었습니다. 다만 왕징웨이가 나간후 조금있다 천비쥔이 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어디로 데리고 가든? " "폴 베엘가 시립대극장이요. " "극장?" 다이리는 흥! 하고 코웃음치고 말했다.
"새벽 3시에 결행한다!" 그리고 그는 옆골목을 돌아 왕징웨이의 저택 뒤로 갔다. 어둠속에서 다시 가만한 헛기침이 들렸다. 다이리는 또한번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지금, 왕징웨이의 방에 불이 켜졌습니다. "
다이리는 커텐을 내린 삼층의 서쪽방을 쳐다보고 눈을 다시 동쪽방으로 돌렸다. 그방에는 쩐중밍 부부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다.
"새벽 3시에 결행이다!"
다이리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좀 급한 걸음걸이로 자동차를 세워두었던 곳까지 돌아와 차안으로 들어가갔고 차는 그대로 어디인지 전속력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보다 조금전, 태호산 호숫가에서 어둠속에 자동차를 바꾸어타고 4명의 일본인과 함께 다이리의 눈을 피해 매트로 호텔로 들어간 왕징웨이는 334호실에서 그보다 조금전에 그곳에 와있던 부인과 경호원과 함께 모였다.
"대체 어떻게 된일이오? " 왕징웨이는 부인 천비쥔에게 물었다.
"증 선생 단독의 게획입니다. 증 선생은 다이리가 하노이에 잠입하였다고 기어코 오늘밤으로 코론가에서 옮기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 경호원이 말했다.
"만약 오늘밤이 위험하다면 증군도 그곳에 있으면 위험한것 아닌가? "
"그래도 증선생은 자기마저 빠져나오려 들면 선생님이 안계신것이 들통날지도 모른다고 해 그냥 있겠다고 했습니다. "
"그럼 날 대신하여 코론가로 돌아간 사람은 누군가? "
"기시모토라는 일본인입니다."
"그사람의 몸에 위해가 있으면 어찌하려고?" "그사람은 잠깐 있다가 그곳을 나와 자기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
왕징웨이는 더 묻기를 그치고 안락의자로 자리를 옮겨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두말말고 자기 하자는대로만 하라고 다른말 없이 그렇게 하자고만 하던 쩐중밍의 한껏 흥분된 얼굴이 망막 위에 떠올랐다.
( " 과연 무슨 일이 있으려나?......")
생각을 하려니까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길한 예감이 떠오른다.
( " 다이리 무리는 오늘밤에 정말 나를 습격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증군의 신변도 위험해지는것은 당연한것인데....." )
사랑하는 동지를 위하여 불안은 갈수록 더해졌지만 당장은 아무런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가만히 눈을 뜨고 옆에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여 가지고 앉아있는 딸을 보더니 조용히 말하였다.
"남화일보를 가져오라고 해라. " 신문이 오자 그는 안락의자 위에 몸을 비스듬이 하여 우선 사설을 읽어보았다. 손중산선생의 대아세아주의를 들어 중국은 일본과 손을 맞잡고 신동아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논문은 분명히 저우포하이의 손으로 써진듯 싶었다.
자기나자기와 마찬가지로 화평구국의 대신념에 불타고 있는 동지의 글은 그의 마음에 조금전까지 깃들었던 불안을 잊게 해주었다.
( " 나도 이제 나서야.....가오쭝우가 도쿄에서 돌아오는 대로 그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도 가까운 시기에 도쿄를 한번 다녀와야만.... " )
왕징웨이는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얼마뒤에 부인과 딸이 옆방으로 물러가고 자기도 침실로 들어갔을 떄, 그는 역시 코론가에 남아있는 쩐중밍 때문에 불안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날밤이 미쳐 새기저느, 오전 3시에 코론가 27번지 저택 뒷길에 다이리가 지휘하는 특무공작대원 5명이 나타나 철책을 소리없이 뛰어넘었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주위의 동정을 살펴 보았으나 식구들은 든잠이 아직도 깊은 모양이었다.
다이리가 손짓을 하자 그들은 곧 주방의 뒷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물론 굳게 안으로 잠겨 있다고 다이리가 신호를 하자 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날이 시퍼런 한자루의 도끼였다.
타ㅡ악 타ㅡ악 ! 쥐죽은듯한 주위의 적막을 깨트리고, 나무쪽 문위에 도끼날이 두번 부딪히자, 그들의 앞에는 다시 막히는 것이 없었다.
다이리가 권총을 들고 앞장을 서서 주방으로 뛰어들자 수하 다섯명의 부하들은 각기 권총과 곤봉을 들고 뒤를 따랐다. 문이 깨지는 소리와 다음에 들리는 여러무리의 발소리에 놀래어 아랫층 구석방에서 자던 호위 3명이 자잠옷바람으로 뛰어나왔으나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곤봉으로 맞아 그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들은 그대로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다시 3층으로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올라갔다. 3층으로 올라가자, 다이리는 두명의 부하와 함께 왕징웨이의 방으로, 나머지 두명은 쩐중밍의 방으로 잠긴 문을 깨부수고 뛰어 들어갔다.
뛰어들며 다이리는 침대가 놓여 있는 방향을 향하여 우선 한발 쏘았던 것이나 다음순간 그는 그것이 한개의 빈방이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내가 속았구나! "
한마디 중얼거렸을떄 쩐중밍의 방에서 여자의 지르는 비명이 들리며 십 여발의 총소리가 뒤이어 방안에 울려퍼졌다. 어둠속에 부딛딪히는 소리 무엇이 방바닥에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중에 부하 두명은 쩐중밍의 방에서 다시 뛰어나왔다.
"쩐중밍 가족은 있던? " "네 분명히 해치웠습니다. 왕은?"
"벌써 어디로 피하고 없더라. "
다이리는 그대로 다시 앞을 앞장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왕징웨이가 이 변을 알게 된 것은 그밤도 다 밝은 새벽 6시였다. 쩐중밍은 복부에 3방 발꿈치에 한방을 맞았고 그 부인도 대퇴부에 총상을 입어 함께 시립병원에 수용이 되어있었다. 물론 부인은 경상이었다. 그러나 쩐중밍은 도저히 생명을 건질 도리가 없는 중상이었다. 그래도 지극한 고통속에도 명료한 의식은 왕징웨이에게 자신의 재난을 알릴것을 금하였다.
흉한에게 곤봉을 맞은 한명 호위의 급보에 의해 시각을 지체 않고 달려온 경관들의 손에 4명의 범인을 잡았다고 하지만 분명히 그들을 지휘하였으리라 믿는 다이리는 용하게 자취를 감춘 모양이었다. 섯불리 왕징웨이에게 알려 혹시나 그가 병원으로 찾아오는 그 기회를 노려 다이리가 다시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 까닭이다.
까닭에 왕징웨이가 사랑하는 동지의 조난을 알게 된것은 오전 여섯시 ㅡ , 간밤에 자기를 자동차에 태워 호텔까지 바래다준 사람중의 한명인 모리 (森) 라는 도쿄 어느 신문사의 하노이특파원으로의 전화로 알게 된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곧 부인과 함께 자동차를 달려 시립병원을 찾아갔다. 그들이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급보를 받고 달려온 기시모토씨 이하 3명의 일본인의 표정으로 이미 희망은 끊어지고 만것을 짐작하였다.
쩐중밍은 그 괴로운 중에도 자리위에 상반신을 일으켜 자기가 맡아 가지고 있던 5만 2천 피아스터의 소절수 (小切手) 에다 서명을 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침통한 얼굴로 병상 옆에 다가서자 그는 힘없이 펜을 자리 위에 떨어트리고 바로 누으며 이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 눈을 들어 왕징웨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 선생님."
눈에는 순간에 눈물이 맺혔으나 입가에는 가만한 미소가 떠오르고 그 어음은 분명하였다.
"저는 그놈들에게서 이겼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안전하게 모셨습니다. "
진정으로 그는 기쁜듯이 말했다. 그의 입가에 도는 가만한 미소에는 자신의 꾀로 하여 ' 왕선생' 의 귀중한 생명을 구할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듯 싶은 일종의 득이양양함 조차 느껴졌다.
왕징웨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이자리에서 이 동무에게 자기는 입을 열어 대체 무슨 말을 할것인가? 말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이 어린 눈을 들어 죽어가는 이의 얼굴을 지켜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쩐중밍의 눈이 힘없이 감겨졌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약해져 갔다. 의사는 눈으로 그의 임종이 가까워 졌음을 말했다. 방안의 모든 사람이 도무지 말이 없었다. 밤은 완전히 밝았으나 흐린 날씨에 창밖은 그저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무겁고 괴로운 몇분이 또 지나자 쩐중밍은 다시 힘없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간신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국사는 왕선생이 있고, 가사는 내 아내가 있으니, 이제 나는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다.”
한마디 말을 남기고 입가에는 그대로 가만한 미소를 띄운채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이날 호텔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부인과 딸도 옆방으로 물러가게 하고 홀로 방안에 들어앉아 소리없는 울음을 울었다.
쩐중밍 ㅡ 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해온 동지였다. 참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동포를 생각하고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자기와 함께 온갖 곤란과 장애와 싸워왔고 또 싸우려는 그 ㅡ 아직도 많은 춘추 (春秋) 를 남기고 그 큰뜻을 영구히 펴볼 시간도 없이 이렇게 하루아침 흉탄에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할 때 왕징웨이는 창자가 끊어지는듯 하였다.
쩐중밍은 그의 사랑하는 처자로 하여금 차마 영원히 행복과 자유와 관명과 희망을 가져보지 못한채 그대로 음울한 충칭의 하늘아래서 그들의 생애를 마치게 할 수 없다 하여 또는 위험을 무릎쓰고 그들을 이끌어 멀리 이곳 하노이 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바라던 행복과 자유와 광명과 희망을 제 자신이 먼저 보지 못한채로 돌아오지 못할길을 떠났다. 천도는 결코 무심하지 않습니다 라고 부르짖던 그에게 이다지도 하늘의 뜻은 무정 하더냐?
“국사는 왕선생이 있고, 가사는 내 아내가 있으니, 이제 나는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다.”
그가 남겨놓고 간 이 한마디의 말을 다시 생각해 내었을 떄 왕징웨이의 주먹 쥔 손은 부르르 떨리고 누ㄴ물은 걷잡을사이 없이 그의 두뺨에 줄줄 흘러내렸다.
( " 증군! 내 반드시 더욱 분발하여 하루라도 일찍이 동아 천지에 화평을 가져오고 증군을 대신하여 부인과 애기들에게 행복과 자유과 광명과 희망을 내 꼭 주도록 하겠네 .... " )
속으로 맹세하기를 마치자 그는 눈물을 걷고 책상으로 가 붓을 잡았다.
내심으로는 화평을 바라마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의연히 초토항전을 부르짖고 참말로 나라와 동포를 생각하여 화평을 제창하는 이를 한간이라 부르고 마침내는 가히 국가의 주석 (柱石) 이라할 쩐중밍의 목숨을 빼앗은 장제스와 그의 정부에 대하여 그는 이제 그 모순된 내정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같은 운명이 언제 어디서 기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자기 몸의 한조각 불타는 우국충정을 천히 피력하려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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