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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① 왕징웨이와 나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데헷넷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왕징웨이와 나 (汪兆銘氏と私)
여기서 "나" 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일본수상을 이야기한다.

나는 왕징웨이씨를 자유의 집 (일본의 공영권을 의미) 으로 부르며 약 3년 반동안 의견을 교환했다. 나는 지나어를 할 줄 모르고, 왕징웨이씨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에 우리는 나름대로 한문을 이용해 필담을 주고받았다. 이를 입으로 말하면 한 시간 정도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장래에도 공표할 성격은 아니지만, 나는 고노에성명(近衛聲明) 에 대해 당시의 책임자로서 결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한다.


일로전쟁(러일전쟁) 후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이 공개되어 우리 국민들의 불만이 손 쓸수 없을 정도가 되어 도쿄에 소토사건 (燒討, 1905년의 히비야 방화폭동사건을 의미한다. ) 을 야기되고 있던 때, 왕징웨이씨는 자신이 유학생으로 도쿄에 있을 때 이 사건을 봤다라고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이번의 사변에 대해서도 오래된 관념에서 본다면 영토분할과 전비배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강화조건이 될 것이다. 우리 국민중에는 이만큼의 전과, 이만큼의 희생을 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도 영토의 분할도, 전비의 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도의적인 요구에 그치는 것이니 우리가 우려하는 사태가 야기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한없이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무릅쓰고 고노에성명을 충실히 지키겠다 결의한 것의 뒤에는 비장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상상해 보았으면 한다. 그런데, 고노에 성명이 발표된 이래로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국민전체가 이번의 사변은 국민들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알고, 이 사명의 도의성을 국민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위해 거룩한 봉사를 할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 국민에게 이러한 의식이 있다면 고노에 성명이 완전히 이행될 것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이야기했는데, 왕징웨이 씨는 이에 깊게 감명한 것처럼 보였다.

왕징웨이 씨는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어가야할 국민당의 최장로이며, 장제스의 선배이기도 하다. 몇 번이고 해외로 망명할 정도로 가시의 길을 걸어온 과거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화하고 좋은 신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이 30년전에는 청조의 섭정왕 재풍(載灃, 선통제의 아버지였던 순친왕 아이신교로 자이펑를 의미한다. 왕징웨이는 1910년 그를 죽이려 했으나 폭탄이 사전이 발각되어 실패했다. )을 죽이려고 폭탄을 들고 노리는 열혈한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풍채였다. 옛 진시황제에게 철퇴를 던지려고 했던 장량(張良)의 용모가 여자처럼 아름다웠다고 하니, 왕징웨이 씨가 장량의 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곰곰이 이 정치가를 바라보기도 한 적이 있다. 화평을 이야기하는 자는 곧 한간으로 취급받는 충칭에서 왕징웨이 씨는 이미 화평을 설파하고 있었다. 하노이에 머물며 자객에게 둘러쌓이면서도 왕징웨이 씨는 제 2차, 제3차 화평권고 성명을 발표했다. 가장 아끼던 협력자 쩐중밍(曾仲鳴, 하노이에서 왕징웨이 대신 암살을 당했던 사람의 이름. )씨가 총탄에 쓰러지자 “나 또한 쩐중밍 선생의 뒤를 따라 가게 될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화평공작을 계속하여 힘을 쏟은 것이 왕징웨이 씨였다. 이러한 대용기가 어떻게 저 하얀얼굴에서, 단신에서 나오는 것일까.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진흙속에 묻어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장제스 일파를 비판하면서 뺨에 마음에 사무쳐 뜨거운 눈물을 흘릴정도의 열정이 57세의 지금도 가슴속에 끓고 있는 왕징웨이 씨였다. 영원한 청년이라고 부르고싶은 매력이, 이 혁명정치가를 신지나의 지도자답게 만든 것이다. 나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왕징웨이 씨를 만족시킨 것처럼 보였고, 왕징웨이 씨의 의견 또한 나를 납득 시킬 수 있었다.


왕징웨이 씨는 동경에서의 회담 (1939년 6월 도쿄에서 고노에와 왕징웨이가 가진 회담을 이야기한다. )을 통해 신지나건설에 한층 확신을 얻고 돌아간 것으로 믿고 있다. 본디 왕징웨이 씨는 명쾌하게 고노에 성명에 다시한번 확신을 가지고, 일지제휴(日支提携)로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협력하도록 지나국민들을 설득하였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이 지금의 왕징웨이씨의 생각을 받아드리고 협력하고 있는지는 측정하기가 어렵지만 필연적인 몰락의 길이 가까워진 충징정부를 보고 전 지나 국민이 왕징웨이 씨에게 지도를 받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왕징웨이 씨의 책무이며 동시에 또한 우리에게는 지나 국민제군들이 솔직하게 고노에 성명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것이야 말로 지나 국민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왕징웨이 씨는 8월 말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 (1939년 8월 28일의 중국국민당 6차전국대표대회를 의미 )를 열고 반공친일(反共親日), 일당전제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하는 순정(純正) 국민당을 조직하여 국공합작으로 왜곡되었던 삼민주의를 이전 손중산 선생의 것으로 되돌리려 순정 삼민주의를 제창하였다. 신지나의 경영이 순정 국민당의 조직과 순정 삼민주의의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나라에도 국민당이나 삼민주의에 무조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국민당이든 삼민주의든 이를 통해 일어나는 폐해는 당이나 주의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를 가지고 국내통일의 도구로 삼고 동시에 일본을 적국이라 하여 지나 전 국민을 항일전선에 동원하려고 하는 것처럼, 민생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각 계급의 협력을 배격하여 계급투쟁을 유도하는 것 모두 국공합작으로 삼민주의가 왜곡된 결과라 하겠다. 삼민주의를 왜곡이 아닌 순정한 수단으로 이를 실천한다면 우려할 바가 없을 것이다.


왕징웨이 씨 등이 중앙정권을 확립하고 고노에 성명을 신뢰하며 우리와 제휴하게 된 이상, 대강(大綱) 에 대해서는 장래에 화근이 생기지 않도록 충분히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세세한 일에 대해서는 지나에는 지나의 전통과 관습이 있으니 이를 존중해야 한다. 특히 자치는 그들의 장점으로 하는 바이므로 대부분 지나 국민의 책임에 맡겨도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닌가. 간섭하는 것 같은 행동은 최대한 주의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견실한 걸음을 함께 하며 10년, 20년의 장래의 결실의 가을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역사적 일대 사업이 단시간에 완성될 것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대륙의 정신에 동조시킬 정도의 각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일본국민 서로서로는 특히 이러한 점에 주의를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이글은 고노에 성명의 고노에공(公)과 고노에성명에 응해 충칭을 탈출한 왕 선생과의 역사적 회담후에 쓰여진 것으로, 쇼와 14년 10월 10일 (1939.10.10. 중국의 쌍십절)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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