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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동아신문기자대회 (東亞新聞記者大會) 1941. 8.4~8.7

최종 수정일: 2023년 8월 29일


광저우 중산기념당에서 개최된 동아신문기자대회의 개회식 모습, 만주국, 난징국민정부, 일본의 깃발이 보인다.

동아신문기자대회 (혹은 동아기자대회) 는 1941년 8월 4일부터 8월 7일까지 3일간 중화민국 광동성

광저우시 중산기념당 (現 중국대륙 광동성 광저우시 중산기념당) 에서 개최된 일본-만주국-중화민국 국민정부 (왕징웨이정권) 3국의 기자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대회를 주최한 것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로, 린바이셩 (林伯生, 임백성) 선전장관이 단장을 맡고 광동성 정부가 함께 주가 되어 만주국 측과 일본측을 초대하는 형태로 이루어 졌다. 대회는 1941년 6월에 처음으로 대회를 할것임을 이야기하고 계획을 세워 선전부와 광동성이 함께 준비위원회를 꾸려 대회를 준비했다.



린바이셩 (林伯生) , 그는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장관이자 중국청소년단 (中國靑少年團) 의 위원을 맡기도 했다.

동아신문기자대회의 목적은 동아의 5억 5천민중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서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필요성을 동아의 민중들이 인식하고 각성하게 하는 이치를 전달하는 기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일본-중국-만주간의 언론들이 마치 하나처럼, 통일된 규범을 가지고 통일된 보도와 선전이 필요했기에 이를 위해 이를 논의하고 협의하는 것이 필요했다. 즉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일본-만주-중국(왕징웨이)의 기자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동아기자대회에는 총 108명의 기자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의 국적은 다음과 같다.

보다싶이 개최국인 왕징웨이 정권이 79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했고,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은 22명, ( 만주국은 7명이 참가했다. 조선에서는 당시 매일신보 (每日新報) 의 주필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서춘(徐椿, 1894~1944) 와 그의 자매, 경성일보의 사무국장까지 3명이 참가했다.


서춘은 자신의 삼천리 제13권 제11호에서 쓴 동아기자대회 기행문에서 경성에서 출발하여 대만으로 거쳐 광동으로 가는 과정에서 "중국해안에 떠다니는 배는 모두 일본배" 라면서 일본제국 해군의 제해권 장악능력에 감탄을 표하고 광동에는 "빈민이 너무나도 많다" 와 같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동아신문기자대회 1일차 (1941.8.4)


오전 8시 30분, 기자들이 중산기념당에 모여있는 가운데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두가 기립해 일본제국, 만주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삼국의 국가를 제창하고 (이때, 개최국인 중화민국의 국가가 제일 먼저 연주되었다.) 삼국의 국기게양식을 거친다음 행사의 단장을 맡았던 린바이셩이 개회사를 말하면서 대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 난징국민정부의 광동성주석이었던 천야오주 (陳耀祖, 1892~1944, 진요조) 가 환영사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왕징웨이가 직접 훈사를 맡았다. 훈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번 일만화(日滿華) 삼국의 언론계의 많은 권위자들이 광동에 모이는 기회를 얻게 된것은 신동아건설의 길에 있어 의미가 깊은 일입니다. 모두가 잘 알다싶이, 광동은 손중산의 고향이자 국민혁명군의 발상지입니다. 손중산 선생의 시종일관적인 혁명에 관한 주된 방침은 구주(유럽)의 동아침략정책과 중국의 위기를 인정하고 중일양국은 연합하여 한몸이 됨으로서 동아의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그렇기에 이번 대회야말로 삼국에게 있어 실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아의 동포다' 라는 말 속에는 슬픔, 비극, 고통, 고난을 함께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 속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국가를 사랑함과 동시에 친구의 국가도 사랑하고, 동아전체에 경애의 마음을 표하면서 의의를 가져야합니다. "


왕징웨이를 이어 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 군사령관, 소지마 다이스케 (副島大助) 해군사령관, 타카쓰 토미오(高津富雄) 광동일본총영사관 영사, 독일영사, 이탈리아 영사가 축사를 발표했다.


오후가 되어서는 삼국의 대표가 각각 각국의 언론상황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1일차 일정을 마무리했다.


동아신문기자대회 2일차 (1941.8.5)


2일차 일정은 8월 5일 오전 9시부터 중산기념당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날에는 동아기자단협회(東亞記者團協會) 설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를 위해 각국에서 5명의 추진위원을 발족했다. 또한 삼국대표의 공동제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 제안이 무엇인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후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해서 정치, 경제, 문화 3분야에 관해서 좌담회를 시작했다. 각 분야당 3시간의 시간동안 좌담회가 진행되었는데 이 좌담회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정치분야 (일본측이 대표를 맡음)


대동아공영권에는 화평이 전제 되기에 화평문제가 우선시된다. 중국의 전면적인 화평을 펼치기 위해서는 일본측의 아낌없는 협력이 필요하고 중국(왕징웨이) 는 용기와 결의를 가지고서 이에 임할 필요가 있다.


경제분야 (만주측이 대표를 맡음)

중국 경제의 부흥을 위해서는 중국 점령지 내의 치안의 확립과 교통의 발전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측은 전쟁의 수행과 동시에 중국의 경제부흥을 위해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또한 화폐 문제를 해결해야하고 동아경제를 확립해야 한다.


문화분야 (국민정부측이 대표를 맡음)


기자들인 만큼 문화분야에 있어서 많은 논의가 오고갔는데, 그중에서는 동아신문협회 (東亞新聞協會) 의 활동을 확대해야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의제중의 하나였다. (동아신문협회는 1940년 6월 난징에서 설립되어 이미 이전부터 일본과 중화민국국민정부 양국의 기자들이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동아신문협회를 만주국으로 확대하고 더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가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삼국의 기자들은 몇가지 공통된 의견을 모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언어로 인한 불편 (상호간의 소통불가, 글을 읽지못함 등) 을 해소하기 위해서 각국가의 언어를

학교필수과목으로 할 필요가 있다.


- 일본의 한자제한을 최소한 3천자 까지 할 필요가 있다.


- 삼국의 실정을 소개하기 위해서 상호간에 견찰단을 파견- 교환하고 이를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다.


동아신문기자대회 대회장에서 촬영된 기념사진의 모습.

2일차 일정에는 동아신문기자선언 (東亞新聞記者宣言)이 이루어졌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신문기자선언 (東亞新聞記者宣言)


유럽 추축각국은 유럽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벌써 착착 전진하고 있고 동아각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그 최대의 노력을 가하고 있다. 이 신질서 건설의 반향(反響)으로서 동아민족이 해방을 쟁취하기에 때마침 주어진 이 기회에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만민의 단결하여 협력공존하는 것으로서 제1의 요지로 하기위해 이 원칙에 의거하여

  1. 정치상에 있어서는 상호간의 독립을 존중하고 구조적으로 단결한다.

  2. 경제상에 있어서는 유무상통(有無相通) 하여 장단상보(長短相補) 함으로서 평등한 상호간의 경제제휴를 확립한다.

  3. 군사상에 있어서는 공작을 분합함으로서 공통의 안위를 위한 공동방위를 도모한다.

  4. 문화상에 있어서는 동아본체의 문화적 입장에 입각하여 자신과 다른 문화의 문화적 융합을 기도함으로써 세계에 동아문화의 발전을 보여준다.

신문은 사상과 정보의 선구(先驅) 로서 우리는 동아신문계를 동원하여 전력을 다해 동아신질서 건설의 사상을 선전하여 구질서 압제자와 싸우려 한다. 동아신문계의 모든 무기를 동원해 동아문화의 융합과 창조를 위해 최대의 노력을 가한다. 신문은 선전보도의 선봉이다, 우리는 동아신문계의 전 투사를 동원하여 동아의 안전에 힘을 다해 나아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려 한다. 구질서의 붕괴는 코앞에 있으며 신질서의 영광은 이미 목전에 있는 오늘, 우리는 뜻을 하나로 하고 이를 위한 발걸음을 함께하며 공동의 장래를 위하여 함께 분투한다. 이자리서 이를 선언한다.






동아신문기자대회 3일차 (1941.8.6)


3일차부터는 2일차에 이미 중요일정이 끝난 상황으로, 논의보다는 시찰에 가까운 일정으로 구성되었기에 신문을 비롯한 자료에서도 자료가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3일차 일정으로는 오전에는 신해 혁명 이전의 중국동맹회의 공화봉기를 기념하는 황화강72열사릉(黃花崗七十二烈士) 을 방문해 참배하고, 육해장병들이 치료하고 있는 병원을 방문하여 이들을 격려했다. 오후에는 동아연맹(東亞聯盟)의 각 현 대표들을 만나 동아연맹운동에 대한 실정을 보고받았다.


동아신문기자대회 4일차 (1941.8.7)


마지막날인 4일차에는 폐막식 행사를 가졌고, 폐막식에서 삼국대표들은 이 행사를 주최할 수 있게 해준 왕징웨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2일차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안을 전보로 일본의 고노에 수상에게 발송했다.



이후


이렇게 3일간의 광저우에서의 동아신문기자대회는 막을 내렸다. 놀랍게도, 이 동아신문기자대회는 광동에서의 대회로 부터 1년이 지난 다음해인 1942년 8월 4일에 제 3차 대회가 열리게 된다. 3차대회라는 것은 이번대회가 2차대회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1차대회는 언제 개최된 것일까? 1차대회는 1940년 2월 8일 일본 도쿄시가 주최하여 개최된 동아문필가/조고자 대회 (東亞文筆家/操觚者大會) 를 의미하는 것으로, 동아신문기자대회와 비슷하게 일만화 삼국의 신문기자들을 초청하여 언론에 관한 논의를 하는 대회였다.




3차대회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에서 이루어졌다. 놀라운점은 대회를 소개하는 기사에서도 신징에서 이루어지는 대회가 이번글의 주제인 광저우에서의 동아신문기자대회를 2대로 보고 이를 계승한 3대 대회임을 이야기하지만, 대회의 명칭은 "동아신문인대회 (東亞新聞人大會)" 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징에서 진행된 2차대회에서는 일본에서 38명(조선포함), 난징국민정부에서 19명, 몽강에서 4명,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4명, 태국에서 5명, 만주국에서 30명이 참가하면서 광저우에서의 대회보다 참가국이 증가했다.)


이런식으로 공영권 내에서의 기자들간의 교류는 1943년의 대동아신문대회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전황의 악화로 대회는 이후로는 개최되지 못하고 일본은 패전을 맞이했다. 동아문필가/조고자대회부터 대동아신문대회까지 이어지는 네차례의 공영권 내의 기자들간의 교류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이루어졌던 대동아문학자대회(大東亞文學者大會) 와 같은 공영권 내의 지식인 교류행사 중 하나였다.


대동아신문기자대회를 보도하는 일본뉴스 제 63호 (영상)



[출처]

매일신보 1941년 7월 20일자 / 1941년 8월 6일~7일자 / 조선신보 1941년 8월 8일자 / 부산일보 1940년 2월 8일자 등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한국근대잡지자료 - 삼천리 제 13권 11호 : https://db.history.go.kr/id/ma_016_0870_0120

한국민족대백과사전 - 서춘 / 동아신문기자대회 사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238

린바이셩 자료 : Wang Jingwei and Lin Baisheng Photograph collection / https://exhibits.stanford.edu/wangjingwei/catalog/dp130sv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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