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데헷쟝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④ 동지 쩡중밍(曾仲鳴)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최종 수정일: 2024년 3월 1일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길 표지



동지 쩡중밍(曾仲鳴)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同志會仲鳴先生の死に誓ふ)


*항상 왕선생과 행동을 같이했던 쩡중밍씨는 쇼와 14년 (1939) 3월 21일 오전 2시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하노이의 은가를 습격당하여 충칭 항전파가 파견한 남의사의 테러에 쓰러졌다. 왕선생은 같은달 28일 홍콩에서 슬픔 속에 강하게 쓴 이 글속에서 국방최고회의 제54차 상무위원회의의 내용을 발표함과 동시에 동지 쩡중밍씨의 고귀한 희생을 맹세하였다.

쩡중밍 선생은 임종하기 바로 직전에 정중하고 동시에 간단한 다음의 두 구절을 말했다. “국사는 왕선생이 있고, 집안일은 내 아내가 있으니, 이제 나는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다.”라고. 쩡선생의 국사에 대한 주장은 우리와 완전히 일치하며, 주장하는 바도 서로 같다. 쩡 선생의 죽음은 국사를 위한 죽음이었고, 국사 주장을 위한 죽음이었다. 또한 죽음에 임할 때도 국사에 대해서 나와 전적으로 똑같은 주장을 펼쳤고, 국사에 대해 우려하면서 결국에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조금이라도 쉴 여유가 생긴다면 나는 죽음을 맞이한 벗을 위로하고, 그가 마음에 두고 염원하던 바를 나의 염원으로 삼고 싶었다. 나는 그래서 이에 대해서 최대의 노력을 다해 그의 주장을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실현시키는 것은 국가 민족 생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지난 12월 29일 (1938년 12월 29일) 화평건의 통전으로 화평을 주장했다. 화평의 주장은 곧 인간의 주장인 것으로, 나 한 사람만의 주장은 아니다. 이는 최고기관에서 토론을 통해 공동으로 결정된 주장이다.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수천 가지가 되지만, 여기서 그 한가지 예를 이야기하고 싶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국방최고회의 제54차 상무위원회의


시간 : 민국26(1937)년 12월 6일 오전 9시

장소 : 한커우중앙은행

출석자 : 위유런(于右任), 쥐정(居正), 쿵샹시(孔祥熙), 허잉친(何應欽)

열석자 : 천궈부(陳果夫), 천부레이(陳布雷), 쉬칸(徐堪), 쉬두(徐讀), 윙윈하오(翁文灝), 샤오리즈(邵力子), 천리푸(陳立夫), 둥셴광(董顯光)

주석 : 왕징웨이(汪精衛)

서기관 : 장췬(張群)

서기주임 : 쩡중밍(曾仲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위 회의에서의 외교부장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지난달 28일(1937년 11월 28일), 일본정부의 명령에 따라 쿵샹시 행정원 부원장을 만나고, 29일 또한 왕부장 (왕칭후이 당시 외교부장을 의미)을 만나 우리 정부의 훈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주일 독일대사(일본 주재 독일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젠(Herbert von Dirksen)을 의미한다. )으로 하여금 일본 외무대신을 만나게 하여, 일본정부가 과연 현재의 국면을 종결시킬 의지가 있는지, 의지가 있다면 어떤 조건에 따라 종결할지를 질문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동시에 이를 중국 당국에 전하여 일을 맡겼다. 일본측이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내몽골의 자치

2.화북의 비무장지구를 확대하는 일

(하지만 화북의 행정권은 모두 중앙에 속하게 한다. 희망하는 것은 장래 항일 성격을 띄는 인물을 화북 정권의 최고 지도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사변의 종결을 이루는데 있어 위의 조건이 가능할지라도 화북신정권을 성립할 의지는 없다. 현재 담판중인 광산 개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문제 해결에 임한다.)

3.상하이의 정전지구를 확대하는 일

(확대의 정도와 방법에 대해서는 일본측은 구체적인 표시를 하지 않았지만, 상하이의 행정권은 그대로 존립시켜야 할 것.)


4.배일(排日) 문제에 관한 일

(이는 작년 장췬 당시 외교부장과 카와고에(川越茂) 주중국 일본대사와의 회담에서 표시한 방침에 따라 처리하기를 바란다. 상세한 방법은 기술적 문제가 존재한다.)

5.공동방공의 문제

(일본은 이문제에 대해 다양한 방법을 논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6.관세개선의 문제

7.중국정부는 외국인의 중국내 권리를 존중할 것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트라우트만 대사는 쿵샹시 원장과 왕 외교부장과의 회견후, 장 위원장을 만나 뜻을 전하고 싶다는 취지와 희망사항을 표시해 이를 전보로 알리니 장 위원장도 즉각 트라우트만 대사와 면담하라는 뜻의 답변이 와 나는 트라우트만 대사를 따라 난징으로 향했다. 난징으로 가는 배안에서 트라우트만 대사와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 트라우트만 대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 중국이 일본에 보여준 저항으로 이미 중국의 항전정신은 충분히 표시되었다. 이제 슬슬 결말을 매듭지어야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몇 번이고 강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짖만, 자국의 역량을 너무 자산한 나머지, 강화를 받아드리지 않은 결과는 결국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시기에 이르러서는 협상국 측의 제시하는 조건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사는 또한 히틀러 총통의 의견을 인용해 일본의 조건이 반드시 가혹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을 밝히며 중국측이 이를 잘 고려해보기를 희망했다.

이렇게 12월 2일 난징에 도착하여, 우선 먼저 내가 장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장 위원장은 심사숙고한 후 나에게 “난징에서 장군들과 일단 상의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오후 4시에 이르러 다시 가보니 이미 구주퉁(顧祝同), 바이충시(白崇禧), 탕성즈(唐生智), 쉬융창(徐永昌) 등이 모여있었다. 거기서 장 위원장에게 초청을 받은 나는 독일 대사의 난징에서의 임무에 대해 보고 하자, 각 참가자들로부터 “위의 조건에는 부대적인 조건이 있는지 없는가? 또 우리 군비에 대한 제한 조항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질문이 있었기에 나는 이는 독일 대사의 말에 의하면 위의 조건은 지금까지 제출된 조건들일 뿐이며, 그 외의 특별한 부대적인 조건은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그래서 장 위원장은 정전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에 대해 탕성즈에게 먼저 의견을 구하자 탕성즈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이어 바이충시에게 의견을 묻자 바이충시는“(만약에) 조건이 이것 뿐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가?”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일단 독일대사가 제출하고 있는 바는 이 몇 개의 조건에 지나지 않다” 라고 대답했다. 장제스는 그래서 이번에는 쉬융창에게 물으니, 쉬융창은 “(만약) 그들이 종전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에 응해야할 터”라고 이야기했다. 또 구주퉁에게 의견을 물으니“이에 응해라”라고 답했고, 탕성즈에게 다시 의견을 물으니 탕성즈도 찬성의견을 보였다. 장 위원장은 마침내

1.독일의 조정을 결코 거부해서는 안된다. 이는 망국적 조건이 아니다.


2. 화북에서의 정권을 보존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의 의견을 제시했다. 오후 5시에 트라우트만 대사가 장 위원장을 만나자, 나는 그 자리에서 양자간의 회담을 통역했다. 트라우트만이 장 위원장에게 이야기한 바는 이전의 쿵샹시와 왕칭후이에게 전달한 바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 조정에 응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해 나간다면 장래의 조건은 필시 받아드리기 힘든 것이 될 것이라는 구절이 덧붙여졌다. 장 위원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일본을 믿기 어렵다. 일본은 조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조약을 위반하고, 말 또한 어렵게 하며 우리를 농락하려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독일과 우호관계기에 따라서 독일이 이와 같이 조정을 위해 노력해주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그 성의를 믿고 있으며, 독일이 조정을 위해 보이는 호의에 대해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각항의 조건을 담판의 기초로 하고, 그 범주를 정하는데 에는 트라우트만 대사 각하가 독일 본국 정부에 보고해 주었으면 하는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중국과 일본의 담판에 있어 독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정자의 위치를 요구한다. 즉. 독일은 어디까지나 중재자 역할에 그쳐야한다.

두 번째는 화북에서의 행정 주권은 철두철미하게 유지되어 한다는 것이다.

이 범위속에서는 위의 조건으로 담판의 기초를 두어도 좋다. 즉, 일본이 전승국의 태도로 임하고, 이 조건을 가지고 최후통첩이라 말하게 하는 것을 불가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트라우트만 대사는 장 위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마디를 보태어 “중국 정부는 현실에 비추어 너무 지나친 요구는 하지 않는 것이, 지금은 이를 고집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답했다.


장 위원장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양해를 구하고 말을 보태어“지금처럼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조정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독일이 먼저 일본에 대해 정전을 종용해주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이에 독일대사는 “장 위원장이 언급한 두 가지는 본국에 전달될 것이다. 독일은 중재를 원함과 동시에 일본 또한 히틀러 총통이 중국과 일본에 먼저 정전을 실시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희망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장 위원장은 이에 더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일본이 스스로 자신이 승자라고 하고, 또한 앞으로 선전을 위해 중국이 이미 각항의 조건을 승인했다고 이야기하는 일이 있다면 다시 담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트라우트만 대사는 “이번 회담의 결과는 매우 유망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사는 난징에서 장 위원장에게 이는 결코 최후통첩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대사는 배안에서 도쿄와 배를린으로 이를 전보로 타전했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답변이 없었고 이후의 발전여부도 알 수 없다.

나는 작년 12월 28일 (1938년 12월 28일), 국방최고회의에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지난해 12월 초 난징이 아직 함락되기 전에 독일대사가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났을 때 만난 일본측의 조건은 이와 같이 명확하지 않았고, 또 이에 견주어 보면 가혹하다. 그런데도 장제스는 대국을 고려하여 이를 의연히 화평담판의 기초로 삼을 것을 승낙했다.” 쉬모(徐謨)의 보고로 보았을 때, 내가 말한 내용은 극히 구체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밖에도 아직 증거를 말하자면 백 가지도 천 가지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아직 과거의 일이라 보기 어렵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비밀을 엄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만 독일대사의 조정은 이미 완전한 과거의 일에 속해 이를 공표해도 무방하기에 이를 하나의 예로 든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3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첫째로는, 독일대사의 제안과 고노에성명을 비교해볼 때, 독일 대사의 제안은 화평담판의 기초로 할 수 있다면서 이야기하면서 왜 고노에 성명은 그 기초로 할 수 없다고 하는가?


둘째로, 독일대사가 동분서주하고 있던 당시에는 난징은 함락되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논의하는 것을 승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노에 성명 당시에는 난징은 함락되었고, 지난, 카이펑, 안칭, 구강, 광저우, 우한 연달아 함락된 이후의 일이며, 창사도 함락은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불을 질러 초토화 되어있었다. 앞의 경우에는 화평을 추진한다고 했음에도 후자에 경우에는 어떠한 이유로 화평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인가?

셋째로, 독일대사과 분주하고 있을 동안, 국방최고회의의 사람들은 난징이나 우한에 있으며 모두 궤를 같이하여 화평에 찬성을 표명했다. 그런데 고노에 성명의 경우는 평화를 논하는 것에 대립하고, 반대적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아무렇치도 않게 하고 있다. 결국 생명을 빼앗는 국가의 위력만 완벽해져버렸다.

나는 이상의 3가지 의문에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화평에 대방침에 대해서는 거듭 국민들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미 주전 방침을 가지고 있는 이상 화평논의에는 응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이치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생존과 독립에 있는 것이며, 화평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었을 때, 화평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그 조건에 결정된다. 그 조건이 국가의 생존독립을 방해한다면 화평을 해서는 안되고, 그렇지 않다면 화평을 해야한다.

또, “중국은 항전을 통해서만 통일을 이룰 수 있다, 지금 화평을 이야기한다면 국가는 또 분열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에는 절대로 반대한다. 국가의 생존과독립을 위해 항전을 한다면 별개이지만, 정부 내의 통일을 위해 항전을 한다는 것은 나는 절대로 반대하는 바이다. 화평을 주장하는 것은 국가 통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에 반대하는 것 또한 분열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는 “지금 평화를 논하는 것은 공산당에게 교란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고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산당의 교란정책은 본래 통상적인 것으로 전쟁과 화평 모두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평화시대에 공산당의 계략이 표면화 된다고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공산당의 행동을 제압할 구실을 이야기 해야한다.


또 누군가는 “제 3국이 중국의 평화를 희망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외교는 모름지기 자주적인 것이며, 중국은 자신의 국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전쟁과 화평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의 입장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청일전쟁 이후의 굴욕적인 강화는, 그후의 우리에게 고난을 가져왔기에 우리는 이와 같은 일시적인 강화를 원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굴욕적 강화를 맺었고,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그 원수를 갚아 크게 득이 되었지만, 이럼에도 우리는 똑같이 이러한 일시적 강화를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멈출줄 모르는 순환적인 보복은 결코 영구평화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성심성의껏 구하는 바는 동아의 백년대계이다. 나는 중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 싸우는 일은 중일 모두에 피해를 주는 일이며, 양국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중일 모두 공존할 수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양국이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면 반드시 동아 100년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양국 모두에게 상처만 입히고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양국인 모두 회의적이면서도 동시에 모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있다. 26개월간의 고통스러운 전쟁의 결과 일본은 소모는 적지 않고 중국의 희생도 가볍지 않았다. 양측 모두 상처를 입고 함께 파멸의 길로 나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공존공영, 공동발전의 길이라는 또 다른길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양국의 유지를 한때의 재앙과 복, 칭찬과 비난을 두려워해 이생각 저생각 하느라 집중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며 감히 그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나는 제군들이 불요불굴 (不屈不撓) 의 정신으로 그 근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화평건의 제 1번의 희생자 쩡중밍 선생은 이미 자신의 죽음으로서 우리가 매진해야할 공동공존, 공존발달의 큰 길을 비추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여러사실들이다. 2월 중순 충칭정부는 중앙위원 모군(장제스의 측근이었던 구정딩(谷正鼎)을 의미하는 것)을 파견하여 나에게 여권을 주어 출국시키려 할 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달했다.

“내가 충칭을 떠나지 않으면 통전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고난의 때에 있어 충칭을 떠난 것은 실로 가슴 아픈일이다. 어찌 나라를 떠날 수 있겠는가?내가 출국을 원했던 것은 나의 주장을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그 이유를 요구하고 이에 대해 표명하기 위한 것이다. 결코 개인적인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내가 들은 바로는, 이상의 주장들이 3월 21일의 사건의 주요한 원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쩡중밍씨는 나보다도 아직까지 나이가 젊음에도 뜻밖에도 서거한 일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먼저 총탄을 맞고 싶었다. 나는 이 문장을 발표한 만큼, 언젠가는 쩡중밍 서선생을 따라 흉수에 찔리게 될지 모르지만, 이는 내가 바라는 바라고 할 것이다. 나의 죽음 이후 국민 제군은 부디 내가 남긴 문자를 숙독완미(熟讀玩味) 하여 나의 뜻을 명확히 터득하길 바란다. 이는 중국의 생존과 독립에 불가결한 길인 동시에 세계와 동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얻기위한 불가결 길인 것이다. 나의 주장은 하지만 현재로서는 충칭에서는 채용될 수 없다. 그러나 장차 언젠가 나의 주장이 전국인민 내지는 중국과 일본 양국에 의해 받여드려지는 일이 있기를 나는 바라는 것이다.


1 Comment


go1024go
Nov 04, 2023

왕 아저씨의 애국적인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었어요

Lik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