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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⑥ 중국국민당전국대표대회의 역사적 의미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의 역사적의미 
(中國國民黨全國代表大會の歷史的意義)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쇼와 14(1939)년 8월 상하이에서 열렸다. 왕선생은 같은해 12월 25일 상하이의 중앙육군군관훈련단에게 동 대회의 선언문을 설명하고,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동 대회 선언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했다.

동지 제군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 선언문의 내용이다. 중국국민당은 지금까지 총 7번의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해왔다. 제1회부터 제6회까지 오는 과정에서 한번의 임시대회가 있었다. 매번 대표대회를 할때마다 선언이 있었다. 나는 솔찍히 여러분에게 이에 대해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7번의 전국대표대회 중에서 내가 4번의 대회에 기초를 마련했기에 대회선언의 전후에 대해서는 내가 비율적으로도 확실히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초를 마련한 사람의 이야기가 반드시 긍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초는 혼자서 할 수 있다하더라도 결국 대화의 통과를 거쳤기 때문에 대회의 공공적 의사인 것이지 기초자 개인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초자의 의지를 해석할 수 있다변 이는 반드시 여러분 동지들에게 참고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먼저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민국 13(1924)년 1월 광저우에서 개최되었다. 이때는 손 총리가 친히 지도하여 대회 이전에 4명의 기초자를 지정했다. 한 사람은 후한민(胡漢民) 선생, 한명은 랴오중카이(廖仲凱) 선생, 한명은 다이지타오(戴季陶) 선생, 그리고 한사람은로, 4사람이 논의한 후 내가 종합하여 기초하였다. 그 때의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는 먼저 당시의 환경을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선, 국민혁명의 목적은 시종일관 하나로서 변경할 수 없는 것임을 명료하게 알아야 하지만, 때때로 바뀌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때때로 다른 일시적 전진방침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당시의 환경을 명료하게 알아야 그 때의 방침이 어떻게 정해졌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민국13(1924)년 1월, 당시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그때는 국제적으로 워싱턴회의가 민국10(1921)년 폐막되었기에 사람들은 세계가 잠정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 때문에 중국의 북양군벌들은 이 국제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수명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시기 혁명은 어떤가 하면, 혁명의 뿌리를 둔 땅은 광저우 한곳 뿐이었고, 광저우 밖 동강(東江)은 천중밍(陳炯明)에게 속해있었고, 남쪽은 천중밍의 부하 덩번인(鄧本殷)에게 속해있었다. 게다가 북쪽으로는 북양군벌이 장시성에서 계속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의 근거지는 오직 광저우라는 한지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때 무게를 두었던 것은 곧 혁명 동지의 단결, 혁명 정서의 고양이었다. 이러한 국내 환경을 타파하기 위해 전폭적인 정신을 이용해 제국주의의 미몽과 북양군벌의 악세력을 몰아내고 혁명의 세력을 신장하고자 했던것이다. 광저우라는 혁명의 기지에서 혁명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것이다. 이 1차 전국대표대회의 방침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1차대회의) 선언은 즉, 이 방침에 기초하여 당대의 환경을 밝히고, 당시의 태도를 설명하여 우리들이 이 작은 혁명의 근거지인 광저우서 전국의 반혁명을 타파할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곧 제1차 전국대표대회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의의였다.

제2차 전국대표대회는 어떤가 이야기하면, 제2차 전국대표대회는 민국15(1926)년 1월에 열렸고, 당시 회의 기초자로 내가 지정되었다. 그때 당시의 환경은 어떠했냐면 민국14(1925)년 3월 12일, 손 총리가 서거하셨고, 광저우와 광저우 부근에서는 계속하여 반혁명 토벌과 숙청이 이루어졌다. 민국14년 겨울에는 광동이 평정되었고 동시에 광시의 리쭝런(李宗仁), 바이충시, 황샤오슝(黄紹雄) 이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고, 후난의 탕성즈도 뜻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때의 환경은 1924년 1차 전국대표대회를 할 때보다 조금 더 좋았던 것이다. 2년의 숙성을 거치면서 혁명의 목적은 모두에게 알려져 혁명의 선전도 비교적으로 확대되었고, 동시에 혁명의 뿌리는 드디어 광저우라는 작은 지역에서 광둥, 광시라는 양대성으로 확대 된 것이다. 당시의 유일한 목적을 말하자면 이는 바로 혁명세력을 신장하여 북벌을 준비하는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국 15년 1월의 환경이었다. 이 환경에 기초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을 결정하여 우리들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의 일의 기초를 다지고, 이러한 목적에서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은 전부 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계승한 것이기에 조금도 고칠 점이 없었다. 이는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은 손 총리가 스스로 우리를 지도한 결과였기 때문이었고, 총리가 서거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았기에 소정의 방침을 고치기보다는, 이전의 방침에 따라 그대로 전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당시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한번 보라! 여러분은 그것이 제1차 대표대회선언을 잇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혁명세력의 기초가 단단해지고, 점차 전국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제2차 대표대회 선언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어떠한 때에 열리게 되었는가? 민국18(1929)년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은 자극히 위험했던 것이었다. 왜인가? 1924년에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고, 그 2년후인 1926년에 제2차 대표대회가 열렸다. 그렇다면 제 3차 대표대회는 1928년에 열려야 했거늘 어째서 1년 늦은 1929년에 열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이 이전에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당이 난징과 우한으로 분열함으로서 결국에는 당의 분열이 초래되고 만 것이다.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난징에서 열렸다. 열리기 전에 당내의 분쟁이 숙성되고 결국에는 이가 터지면서 광시를 쳐야한다, 후베이를 쳐야한다, 북방의 각성을 쳐야한다면서 각 방면에서 내란이 마침내 발생한 형국이었다.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은 누가 기초를 만들었는가? 나는 알수 없다. 이는 내가 난징의 불법적 소집에 의한 제3차 대표대회에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법률상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내가 이를 반대했던 것은 장제스가 개인독재의 관념을 가지고 당내의 분쟁을 발생시키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금 여러분이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완전히 당내분열의 한 현상이다. 이점에 대해 나는 당시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많은 비평을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은 당내분쟁을 위해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는 언제 열리게 되었냐 하면 민국20(1931)년 (원문에서는 민국12(1923)년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아마도 十二와 二十을 헷갈려 잘못적은 것이라 추측된다. ) 12월 말(이는 통합된 제4차전국대표대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는 장제스 세력, 쑨커 세력, 왕징웨이세력이 이미 각자 이전에 대회를 시작한 바가 있었으나 이후 통합하여 하나의 제4차 전국대표대회를 열게되었다.)

에 열렸다. 역시 난징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때는 9.18 사변(만주사변을 의미) 이후에 전국의 정성의 단결, 전당 동지의 합작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4차 전국대표대회는 곧 1929년 이후의 당내분쟁 국면을 끝내고 모두가 정성으로 단결하여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함에 있었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은 누가 초안을 작성했는지는 모른다. 이는 내가 당시 상하이에 있었고 난징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제4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은 당시의 환경에 적합하게 만들어 진 것임을 알고 있다. 당시 나라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기에 전국은 정성단결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당 전체도 마찬가지로 정성단결을 강구해야 했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은 이러한 목적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하면, 모두가 은연자중하며 국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정신은 제4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 이후에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제5차 전국대표대회는 민국24(1935)년 12월에 열렸다. 제 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체될 당시 나는 부상으로 (나는 11월 1일 부상을 입었었다.)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제5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기초한 사람이 다이지타오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선언에서 중요한 것은 화평이 완전히 희망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결코 화평을 포기하지 않으며, 희생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결코 경쾌하게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는 구절이었다. 이러한 뜻은 어디서 나오게 된 것인가, 우리는 당시의 환경을 명료하게 보아야 한다. 1931년 9월 18일 국난이 발생한 이래, 5년이 지났지만 모두는 방법을 생각하여 인욕자중(忍辱自重)의 정신에 입각해 국가의 생명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는 지둥방공자치정부가 독립하여 전국이 매우 위급한 시기에 처해있을 때였다. 제 5차 전국대표대회는 역시 제4차 전국대표대회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일본과는 결렬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째서 인가, 이는 아직까지 국가가 아직 견고하지 않고 국력이 아직 충실하지 않아 과감하게 국가를 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앞의 몇구절의 말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곧 제5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의 가장 중요한 뜻이면서, 당시의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1935년 12월에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고, 1936년 1월에는 이 방침에 따라서 일이 진행되게 되었다. 1936년에 열린 많은 중앙집행위원 전체회의를 보면 이를 바로 알 수 있다.

민국 26(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변이 발생한 후 민국 27(1938)년 4월 우한에서 임시 전국대표대회를 열게 되었는데, 이때 임시라는 이름을 붙힌 이유는, 이 대회가 열려서는 안되는 대회라는 것이 아니라, 1935년 말에 대회를 열었으니 1937년 연말, 1938년 연초에 대회를 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의 전쟁을 위한 시간 사정상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열게 된 것이다. 이 임시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에 내가 기초했던 대회선언은 어떠했는가 하면, 이는 즉 1935년, 제5차 전국대표대회의 방침에 따라서 우리가 어째서 항전하는가에 대한 그 원인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평화에 대한 희망과 화평의 조건에 대해 설명하고, 만약 화평에 희망이 있음을 알게된다면 우리는 평화를 회복하지만, 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 전국대표대회 선언의 제1단부더 제 3단까지 확실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정, 외교, 교육의 각종 문제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던 것이다. 그때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1937년 12월 난징이 함락되고 1938년 4월 쉬저우는 급박한 국면에 이르렀기에 모두는 위급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알고 우한을 사수하기로 각오하였으나, 국력만 각종 관계에서 작년 루거우차오에서의 전쟁은 참으로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이로서 이 항전의 목적과 화평의 조건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견지하여 양보를 할 수 있는 것은 양보를 하되,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한 것이다. 모두가 임시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보면 당시의 선언은 당시의 환경에 적응시켜 방침을 정했음을 분명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어떠한가? 이는 올해 (1939년) 8월 상하이에서 열렸다. 어째서 상하이에서 열리게 되었는가? 당장(黨章) (중국국민당당장(中國國民黨黨章)을 의미한다. )에서는 수도의 소재지에서 대회를 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평시에는 그렇지만, 비상시기에는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임시전국대표대회 또한 우한에서 열렸지만, 당시 수도는 충칭에 있었고, 이는 1937년 12월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후였다. 이는 천도가 아니며 지방을 바꾸어 공무를 이어나는 것일 뿐이며, 전쟁시의 국가수도는 어떤지방에 있는지는 일정하지 않다. 이는 평시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점은 법률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언의 내용이 어떤지 볼 필요가 있다. 내용은 임시대표대회를 계승하는 것으로, 즉 앞에서 말했듯이 평화조건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항전을 계속하지만, 만약 평화조건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작년 임시대회와 같은 선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선언문을 잘 살펴보라, 이 선언은 앞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지, 중간에 끊기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이 1차 대표대회선언과 같았던 것과 같다. 형식까지도 같다. 첫째로 항전의 목적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화평조건의 도달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삼민주의와 내정, 외교, 교육을 열거한 것은 전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임시전국대표대회 때는 아직 화평을 위한 조건도달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항전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평화 조건에 도달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곧 대표대회의 선언이 둘 다 모순적이 아님을 이야기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연속적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어느쪽이 임시 전국대표대회에서 정해진 방침을 위반하고 있는 것인가?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임시 전국대표대회를 잇는 것으로, 여러분들이 이 두 개의 선언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본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총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중국국민당에는 7번의 전국대표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3차대회를 제외하면, 제1차, 제2차, 제4차, 제5차, 제6차는 모두 일관되게 하되, 모두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진행방침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방침은 국민혁명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기초하여 일치하게, 연결되게 시대의 수요와 환경의 수요에 맞게 정한 것이다. 그러니 동지들은 역대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따라서 일치된 노력으로 일관된 방침으로 용맹매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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