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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왕징웨이의 일본방문 (1941.6.13~6.28)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27일


왕징웨이가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거친 과정들. 왕징웨이는 비행기, 배, 기차, 자동차까지 모두 탑승하며 난징에서 출발한지 거의 "90시간" 만에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1941년 6월 13일부터 방일 일정을 시작해 16일간의 일정을 가지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왕징웨이는 하노이 탈출이후 도쿄를 방문한 적 있었지만, 왕징웨이정권 출범 이후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적으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렇기에 일본에서도 거는 기대가 컸고, 왕징웨이 또한 방일에서 기대하는 것이 컸다. 심지어 만주국에서도 이번 방문을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1940년 말부터 일본을 방문하기를 원했으나. 일본측이 이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지속된 요구에 일본측은 1941년 4월 17일에야 왕징웨이의 일본방문을 허락했다. 이는 일본측의 생각이 왕징웨이 측에 긍정적으로 바뀐 결과였다.


총 16일의 긴 일정이지만,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의 절반가량을 이동에 사용했기에 실질적인 방일기간, 도쿄에서 왕징웨이가 업무를 보았던 시기는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번 포스트에는 신문자료가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에서 당시 발행되던 3대신문과 동시에, 왕징웨이정권에서 발행하던 중화일보까지 이용하여 글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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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13일 (金), 날씨 맑음 - 출발일




난징의 왕징웨이 공관, (現 중국대륙 난징시 구러우구 신화로 38, 당시주소로 난징특별시 제4구 신화로 34호 ) 이 건물은 왕징웨이의 처남이었던 추민이 (褚民誼)가 기부한 것이었다.

오후 2시 40분, 왕징웨이는 자신의 관원들을 데리고 자신의 공관에서 출발, 난징의 대교장기장(大校飛行場) 으로 이동했다. (약 15km, 약20분 소요.) 비행장에서는 왕징웨이에게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郎) 지나파견군총참모장을 비롯한 다양한 일본측 인사, 난징국민정부측 인사, 뤼롱위안(呂榮寰) 만주국 대사등 일본,만주국,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인사 약 500명이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의 방일 일정의 출발에 대해 환영했다.


인사들에게 환영을 받는 동시에, 국민정부 군악대는 환송곡을 연주했고, 이에 왕징웨이는 무언의 미소를 지으면서 비행기에 올랐고, 왕징웨이가 비행기에 오르자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왕징웨이의 관원들도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왕징웨이가 탑승했던 미쓰비시 MC-20 비행기. (사진은 다른 기체)

왕징웨이는 미쓰비시에서 만들었던 폭격기 Ki-21의 민수용인 MC-20을 탑승했다. 승무원까지 총 15명의 사람이 탑승할 수 있는 MC-20은 여러대가 당시 중국대륙에서 사용되었는데, 왕징웨이가 탑승한 기체는

C-5105 기체로, 福州號(복주호, 푸저우호) 라는 명칭이 붙은 비행기였다. 이 MC-20은 중화항공(지금 중화민국의 중화항공과는 상관없는 이전의 회사) 에서 약 10대가량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국적항공사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인사가 탑승하는 전용기로 임대하여 한대 마련하는 경우가 있듯이 이 경우 또한 중화항공에서 운용하던 MC-20 중 한대를 임대하여 왕징웨이를 비롯한 정부 고위인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푸저우호 (福州號) 에 탑승하는 왕징웨이.

오후 3시 10분, 비행기의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비행기는 이륙을 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당시 왕징웨이의 출발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왕주석 만세!" 를 연호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호속에서 비행기는 이륙했고, 상하이로 향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천궁보(당시 입법원장), 쉬량(당시 외교부장), 린바이셩 (당시 선전부 장관) , 저우포하이(당시 재무부장) 등을 데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오후 4시 10분, 왕징웨이의 푸저우호가 상하이 홍커우 비행장에 착륙했다. 난징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하이 홍커우 비행장에는 당시 상하이특별시 시장과 오오타 타이시(太田 泰治) 흥아원 화중연락부장관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왕징웨이는 이들의 환영을 받은 뒤 숙소로 향해 그곳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1941년 6월 14일 (土)


오전 10시, 왕징웨이는 관원들과 함께 숙소를 나와 후이산부두로 향했다.


후이산 부두 (匯山碼頭)의 모습, 이름은 조계를 처음 지을 시절, 대충 지었던 Wayside wharf (길가의 부두) 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후이산 부두(匯山碼頭, 현재 중국대륙 상하이시 홍커우구 양수푸루(양수포로) 18호 , 虹口區楊樹浦路18號)에는 야와타마루 (八幡丸) 라는 일본의 화객선 (화물과 승객을 모두 태우는 배) 가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일본공사를 따라 왕징웨이는 배에 승선했다. 딩모춘과 당시 상하이시장을 비롯한 난징국민정부 인사들은 배까지 따라와 왕징웨이를 배웅하였고, 왕징웨이는 이들의 배웅과 환영을 받은 뒤 특별실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야와타마루(八幡丸), 1940년에 건조된 당시로는 최신 상선이었다. 하지만 1942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자 징발되어 항공모함 운요(雲鷹)로 개조되게 된다. 그리고 운요는 1944년 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오후 12시 30분, 왕징웨이는 관원들과 함께 갑판에 올라가 관원들과 함께 건배를 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축복했다. 이때 배 옆 항구에서 국민정부 군악대가 다시한번 환송가를 연주하였다. 그리고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郎) 지나방면함대 사령장관과 만나 축복을 기하는 건배를 하였다.


오후 1시 30분, 야와타마루는 드디어 출발을 시작해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 배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17명의 난징국민정부 인사가 함께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마다 시게타로 (嶋田繁太郎) 지나방면함대 사령장관과 건배하는 왕징웨이. - 경성일보, 1941년 6월 15일

당시 야와타마루에는 왕징웨이와 그의 관원들, 정부인사들 뿐만 아니라 왕징웨이의 기념적인 첫 방일일정을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징웨이가 배에서 한 행동들은 바로 전보를 통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지역으로 바로 바로 전달되었다. 이때 이 배에 함께 탑승했던 기자들은 기사를 시작할때 난징발, 도쿄발, 이렇게 기사가 작성된 곳을 작성할때 이들은 "야와타마루 발 (八幡丸 發)" 이라고 쓰기도 했다.


왕징웨이를 태운 야와타마루가 일본으로 가고 있는동안, 일본에서는 쇼와 덴노(히로히토) 가 왕징웨이의 방문에 대해 "황실의 손님으로 대하라" 라고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가 도쿄에 와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숙소로 황실이 보유하고 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有栖川宮邸)의, 외국의 국빈이나 왕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제공했던 카스미가세키별궁 (霞関離宮) 을 숙소로 제공하라 지시를 내렸다. 이 소식은 배에 타고 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일행에게도 전달되었는데, 이에 대해 왕징웨이를 비롯한 일행들은 감사인사를 표했다고 한다.



왕징웨이가 도쿄에서 머물렀던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별궁 (霞関離宮, 霞ケ関離宮), 일본 치요다구 가스미가세키에 있었다. 1945년 도쿄대공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또한 궁내청에서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난징국민정부 인사를 접대할 인원을 선출하고, 왕징웨이의 일본도착에 맞추어 환영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16일 (月)


오전 8시, 야와타마루의 마스트(돛대) 에 청천백일만지홍기 (물론 왕징웨이의 그것) 이 게양되었다. 즉, 야와타마루는 도착 당시에는 배에 일장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베시에서는 왕징웨이를 환영하기 위한 주요인사들이 준비를 시작했고, 고베시청 앞의 국기게양대에는 일장기와 함께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었다.


오전 9시, 당시 일본에 중화민국대사로 있었던 추민이(褚民誼)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따로 작은 배를 타고 고베로 다가오고 있는 야와타마루로 접근해 먼저 왕징웨이를 만났다. 이때 당시 안개가 끼어었으나, 이를 뚫고 왕징웨이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추민이는 이때 왕징웨이와 악수도 나누었다.



야와타마루에서의 왕징웨이. (옆의 인물은 선전장관이었던 린바이셩) - 매일신보, 1941년 6월 17일

오전 9시 30분, 이 시점에서 왕징웨이의 야와타마루가 도착하기로한 고베항 4번부두에는 이미 외무성 동아국장, 카츠타 킨지로(勝田銀次郎) 고베시장을 비롯한 일본 인사들이 왕징웨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약 천명의 사람들이 왕징웨이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는데, 350명 가량은 주요인사들, 600명 가량은 고베의 중화동문학교(中華同文学校)의 학생들이었다. 이때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전 주중화민국 일본대사도 시간이 된다고 하여 참가했다.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그 아베가 맞다.)


오전 10시, 왕징웨이가 탑승한 야와타마루는 드디어 고베항에 도착했다. 미리 고베항에 모여있던 인파들은 왕징웨이 일행의 도착에 환호했다.


오전 10시 30분, 하선준비를 마친 야와타마루는 계단을 내리고 하선을 시작했다. 이때 빨간 레드카펫이 함께 깔렸으며, 왕징웨이가 카펫을 따라 배에서 내려오자 외무성 동아국장이 총리를 대신하여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인사와 장시간 여행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음을 이야기하고, 이후 다른 인사들도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말을 건냈다. 이와 동시에 효고현 현립상공학교의 밴드가 중국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국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왕징웨이가 선두에 서고, 쉬량과 저우포하이, 린바이셩이 왕징웨이를 따라 부두를 따라 걸어 나갔다. 이때 왕징웨이는 쓰고 있던 실크햇을 벗어 인파들에게 흔들면서 감사를 표했다.


이때 왕징웨이와 함께 했던 기자단은 일본의 도착한 왕징웨이의 눈이 빛나고 있었으며, 가슴에는 감개무량함이 보이는 것 같다고 기록했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부두에서 나와 효고 현에서 준비한 차량 20대에 나누어 탑승하였다.


이날 일본방송협회 오사카 라디오 (JOBK)에서는 야와타마루의 도착에 맞추어 야와타마루 안에다가 마이크를 설치해 왕징웨이의 일본도착을 실황중계하였다고 한다.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차량행렬과 이를 환영하는 고베시민들의 모습.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20대의 차량행렬은 고베의 한신가도(阪神街道) 를 달려 고시엔(甲子園) 호텔로 향했다. 이때, 학생단체들, 재향군인단체들, 부인단체들 등 약 4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일장기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면서 왕징웨이를 환영하고 환호를 보냈다.


왕징웨이가 고베에서 머물렀던 숙소인 고시엔 호텔. (한신타이거즈의 고시엔 야구장이 있는 그 고시엔이 맞다)

오전 11시, 왕징웨이와 일행이 탄 차량행렬은 고시엔 호텔(현 무코가와 여자대학 고시엔회관) 에 도착했다. 이 때 고시엔 호텔에는 일본의 일장기와 난징국민정부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크게 게양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왕징웨이는 롯코산을 비롯한 고베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3층의 양식&일본식이 결합된 방에서 묵었다고 한다.


오후 12시,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왕징웨이는 호텔 정원의 연못앞에서 호텔 지배인이 준비한 일본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식사 이후 왕징웨이는 방으로 돌아가 계속 쉬었는데, 이는 이날 밤 다시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일본 궁내청과 6월 17~18일간 도쿄에서 일정을 잡은 만큼, 일정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후 8시 50분, 호텔에서 어느정도 쉰 왕징웨이는 고베역에서 도쿄로가는 급행특별열차에 탑승했다. 이때도 고베역에는 왕징웨이의 도쿄행을 환영하는 인파들이 왕징웨이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상, 고베에서 도쿄까지 가는데에는 12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기에 왕징웨이와 일행은 기차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941년 6월 17일 (火)


오전 8시 45분,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도쿄역에 도착했다. 전날 오후 8시 50분에 출발했으니 거의 12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역에는 일본과 난징국민정부의 깃발이 크게 걸려있었고, 고노에 일본총리와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육군대신, 마츠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 외무대신, 오이카와 코시로(及川古志郎) 해군대신, 만주국대사등 일본 정부의 주요인사와 인파가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왕징웨이는 가장 먼저 고노에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왕징웨이와 일행은 역에서 나와 외무부에서 준비한 차들에 탑승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1호차에, 저우포하이는 2호차에 탔다고 전해진다.


도쿄역을 떠나는 왕징웨이와 일행의 차량행렬

오전 9시 5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고베와 마찬가지로 환영인파의 환대를 받으며 도로를 달려 도쿄 아자부구(麻布区, 현재 도쿄 미나토구, 롯본기근처) 에 있는 주일중화민국대사관에 도착한다. (당시 중화민국 대사관이 있던 자리는 현재 외무성 이쿠라공관 (外務省 飯倉公館) 이 되었다.) 대사관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 왕주석각하 (歡迎 汪主席閣下)" 와 같은 현수막을 걸고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대사관에 왕징웨이가 들어오자 대사관 직원을 비롯한 현장에 있던 2백명의 인원이 "왕선생 만세!" 를 외쳤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대사관에서 대사관 직원들과 회견하며 대사관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이후 대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 왕징웨이 일행의 차량행렬이 대사관으로 들어가고 있고 인파들은 깃발을 흔들며 이를 환영하고 있다.

오전 11시, 왕징웨이는 혼다 쿠마다로(本多熊太郎) 주 중화민국 일본대사와 함께 가벼운 간담회를 가지고,

추민이와 함께 3명이서 식사시간을 가졌다. 이때 요리는 대사관의 자체 요리사가 간단하게 중국요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를 포함한 3명은 식사를 하면서 1시간이 넘도록 여러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렇게 식사와 간담회를 마치고, 왕징웨이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는 대사관에서 나와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으로 향했다. 카스미가세키 별궁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거실과 푸른색 발코니가 있고, 사계절을 나타낸 일본도가 그려진 가장 큰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의 숙소 카스미가세키별궁의 대회당에서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쉬량, 린바이셩을 포함한 왕징웨이측 일행과 일본측 인사들이 비공식적인 만찬회를 가쳤다.


1941년 6월 18일 (水)


아침 (정확한시간이 적혀있지 않음) , 왕징웨이의 숙소 카스미가세키 별궁 앞에는 이미 오노데라 마코토(小野寺信) 가 이끄는 1개 의장대 중대와 군악대가 도착해 도열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이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이후 아침식사를 하였다.


오전 10시 33분,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린바이셩을 비롯한 일행들은 궁내청에서 보낸 자동차에 나누어 탑승해 궁성( 현재 황거, 고쿄,皇居)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차량이 출발하면서 앞에서 도열하고 있던 군악대는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하였다.



궁성(宮城)의 이중교(二重橋)를 지나는 왕징웨이 일행의 차량행렬

오전 10시 40분, 왕징웨이 일행이 탑승한 차량행렬이 이중교를 통과해 궁성 내부로 들어갔다. 궁성 내부로 들어간 차량행렬은 메이지궁전 (明治宮殿, 1945년 미국의 폭격으로 소실됨)의 현관으로 향했다.


궁성의 메이지궁전의 현관 (車寄せ, 자동차를 댈수 있는 현관), 쇼와 덴노은 직접 이곳까지 나와 왕징웨이를 만났다.

히로히토는 직접 현관까지 행차하여 왕징웨이의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맞이하였다. 히로히토는 왕징웨이와 악수와 함께 짧은 말을 건네며 왕징웨이를 환영하였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마츠다이라 요시타미(松平慶民) 궁내성 무부장관의 안내를 받아 마츠다이라를 따라 봉황간(鳳凰間, 호우오우노마) 로 향했다. 봉황간에서는 고준 황후가 왕징웨이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로히토는 왕징웨이를 봉황간의 정석으로 모시고 공식적인 회견을 시작했다. 회견에 앞서, 왕징웨이는 히로히토 부부에게 중국식 4곡짜리 오래된 병풍을 선물했다.


왕징웨이와 쇼와 부부가 회견을 진행했던 메이지궁전의 봉황간(鳳凰間) 의 모습. 메이지궁전이 전쟁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고쿄에는 이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봉황간의 옆방에서는 궁내성의 인원들과 왕징웨이의 일행들이 대기를 하며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왕징웨이는 이러한 황실의 깊은 친절에 감사를 표했고, 히로히토 부부도 통역을 이용해 왕징웨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징웨이는 또한 추민이 대사를 히로히토 부부에게 소개시켜 추민이 대사와 히로히토 부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추민이는 히로히토부부에게 또다른 선물을 전달했다. (선물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다.)



왕징웨이와 쇼와부부가 봉황간 에서 자리를 옮겨 이동한 천종간(千種間)

오후 12시, 히로히토 부부와 왕징웨이는 자리를 천종간(千種間) 으로 옮겼다. 히로히토 부부도 왕징웨이에게 궁내성의 직원들을 소개시켜주고, 고노에 총리를 비롯한 일본내각의 고위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는 자리를 풍명전(豊明殿) 으로 옮겼다.



풍명전(豊明殿), 가장넓은 공간이며, 연회를 비롯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풍명전으로 옮겨 히로히토 부부와 왕징웨이는 점심 만찬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가장 상석에 앉고, 고준황후는 이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으며, 왕징웨이는 고준황후의 오른쪽에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만찬에는 일본 황족들, 고노에 총리, 궁내대신, 마츠오카 외무대신, 도조 육군대신, 오이카와 해군대신, 당시 흥아원 부총재, 혼다 대사, 추민이, 저우포하이, 그리고 왕징웨이의 관원들 7명, 그리고 쇼와 덴노의 측근과 궁내청 직원들이 함께 만찬을 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는 모단간(牡丹間)로 가서 함께 차를 마셨다. 이때 히로히토 부부도 왕징웨이에게 선물을 전달하였다. 왕징웨이도 히로히토 부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의 만찬, 자료에 따르면 이렇게 3명의 핵심적인 자리가 정해졌고, 이 주변을 고노에총리를 비롯한 인원들이 채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후 1시 20분, 왕징웨이는 궁성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별궁으로 향했다. 히로히토는은 왕징웨이가 가는 길에도 현관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고 한다.


오후 1시 30분, 왕징웨이가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 별궁으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다키히토 (三笠宮崇仁) 친왕이 왕징웨이가 있던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을 방문했다. 왕징웨이와 다키히토는 1층의 응접실에서 짧은 회견을 가졌다.


오후 4시, 휴식을 취한 왕징웨이는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을 나와 전날 방문했던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오후 5시, 왕징웨이는 중화민국대사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일본어 통역은 저우포하이가 맡았다.) 이번 방일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쿄의 중화민국대사관에서 담화문을 발표하는 왕징웨이.
왕징웨이의 방일담화 (1941.6.18, 주일중화민국대사관, 도쿄) 

이번에 내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 것은 우리를 지지해주는 일본 귀국의 호의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과 동시에 양국간에 있어 협력해야 할 여러가지 근본적 문제를 일본정부와 논의하기 위함이다. 오늘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으로서 일본 천황황후를 만나 친히 우리정부와 우리국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정부와 동아의 장래를 친히 염려해주시고 격려해준 일본 천황에게 감사를 표할 뿐이다.


내일부터는 귀국정부당국을 방문해 우리정부의 충정(衷情)을 피력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일본국민 여러분들의 굳은 결심속에서 고노에 총리대신이 작년 발표한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3원칙의 실현을 위하여 깊은 노력을 해 작년의 중일기본조약중일만공동선언을 완전히 실현시켜 전면화평을 완성하고, 또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이에 마땅한 책임을 다해 영원한 동아의 화평을 수립하고 나아가 세계의 화평에 매진하려는 나의 의지는 절때로 꺼지지 않을것을 단언할 수 있다. 고베 도착이후 귀국으로 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있는데, 천황께서 보여준 특별한 대우와 일본국민 여러분이 보여준 정성은 내 인생에 있어 잊힐 수 없는 감격으로 남을 것이다. 이에 삼가 깊은 사의(謝意)를 표한다.


(중일만공동선언,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같은 시간, 린바이셩도 대사관에서 일본기자들과 회견을 하며 담화문을 낭송했다. 이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오후 8시 30분, 왕징웨이의 방문을 기념하여,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는 도쿄방송국관현악단이 『동아민족진행곡』 을 연주했다.


1941년 6월 19일 (木) , 날씨는 비가 조금 내림


18일로서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났고 , 이때부터는 행정과 관련된 비공식적 일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중화민국 대사관을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추민이를 비롯한 일행을 데리고 오오야 마사오(大谷正男) 를 통해

지방의 인사들과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오전 9시 45분, 오오야 마사오가 직접 도쿄의 중화민국대사관에 찾아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오전 10시 30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메이지신사를 방문했다. 이날은 가볍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왕징웨이는 자갈을 밟으며 메이지신궁의 내부로 향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다마구시(玉串) 대금을 봉납했다.

다마구시(玉串)

10시 35분, 왕징웨이는 메이지신궁에서 기도를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왕징웨이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왕징웨이의 모습을 취재하던 기자는 이러한 왕징웨이의 모습이 동아부흥의 희망에 불타고 있는것 같다고 묘사했다.



메이지 신궁을 참배하는 왕징웨이와 일행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날아침에는 비가와서 우산을 쓰고 있다.

오전 11시 45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로 향했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의 기념관을 방문하여 방명록을 남기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오후 12시 20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왕징웨이 일행은 점심식사를 한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1시 30분, 린바이셩 선전장관이 대정익찬회의 중앙협력회의를 참관하였다.


오후 2시 20분, 왕징웨이는 이때부터 고노에 수상을 비롯한 일본 고위인사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순서는 마츠다이라 궁내대신 → 고노에 총리 → 마쓰오카 외무대신 → 도조 육군대신 → 오이카와 해군대신 → 스기야마 참모총장 → 나가노 군령부총장 → 카와다 대장(大蔵)대신 → 하라 추밀원 의장 였다.


이때 왕징웨이는 각 인물을 만날때마다 감사의 선물을 전하였는데, 예를 들어 오이카와 해군대신에게는 백옥색의 여의봉을 선물하였고, 마쓰오카 외무대신에게는 고전풍 꽃병을 선물하였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과 회견하는 왕징웨이.

오후 (시간이 적혀있지 않음) ,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의 (中央協力會議) 에서 전원일치로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환영사를 가결시켰다.


汪主席閣下歡迎辞 (왕주석각하환영사)

今回中華民國國民政府主席行政長官汪精衛閣下來訪に當り大政翼贊會中央協力會議は衷心より歡迎の意を披瀝し閣下の始終變らざる和平建國の努力に對し滿腔の敬意を表す


이번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행정장관 왕징웨이 각하 내방에 즈음하여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의는 충심으로 환영의 뜻을 피력하고 각하의 시종 변함없는 평화건국의 노력에 대하여 만강의 경의를 표한다.


이 환영사는 미츠기(未次) 의장이 왕징웨이에게 전달하였다.


오후 7시, 왕징웨이는 총리관저에서 고노에 총리가 주최하는 만찬회에 참가하였다. 왕징웨이쪽에서는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추민이와 린바이셩과 관원들이 참가했고, 일본측에서는 고노에를 비롯한 여러 고위급 정부인사가 참가한 것은 당연했으나, 이번에는 그 인사의 폭이 늘어 일본은행 총재, 도쿄 도지사, 대정익찬회의 인원들, 도쿄시장 등도 참가하여 약 100명의 인사가 만찬회에 참가했다.


만찬에선, 고노에수상이 먼저 인사를 하고, 이에 왕징웨이가 답사를 발표하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만찬은 7시부터 시작되어 9시쯤 끝이났다.


오후 9시 20분, 만찬을 끝낸뒤, 왕징웨이와 고노에총리, 마쓰오카 외무대신 3명은 남아서 추가로 약 30분간 회담을 하였다.


1941년 6월 20일 (金)


오전 6시 40분,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왕주석의 방문에 즘하여" 라는 방문을 약 20분간 진행했다.


오전 10시 30분, 일본 해군은 왕징웨이정부측에 수송기 한대를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왕징웨이는 이 비행기에 海鶼號(해겸, 하이지엔)호 라는 이름을 붙혔다. 이 비행기는 왕징웨이의 전용기로 사용되게 된다. 방일전까지만 해도 왕징웨이는 비행기를 빌려서 사용해야하는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는 이미 이전부터 일본측에 자신을 위한 전용기를 주문했었다. 이에 일본해군측이 방일에 대한 감사보상으로 비행기를 한대 제공하면서 이제 제대로된 비행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신문에서는 왕징웨이에게 준 전용기의 기종에 대해서는 적어두지 않았지만, 우리는 왕징웨이가 이때 받은 비행기의 기종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1942년 12월 방일할 당시에 는 이번 방일과 달리 하이지엔호를 이용해 비행기로 난징에서 도쿄로 바로 왔기 때문이다. (물론 후쿠오카에서 연료를 재보급하기는 했다.) 일본뉴스 133호에는 하네다공항에 도착하는 왕징웨이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따라서 우리는 일본뉴스 133호에서 왕징웨이가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가 해겸호 임을 알 수 있다.


일본뉴스 133호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왕징웨이의 하이지엔호과 똑같은 기종인 96식육상수송기 11형 (L3Y1)의 모습

왕징웨이가 일본 해군에게 받은 기종은 해군에서 운용하던 G3M (96식육상공격기, 九六式陸上攻撃機) 폭격기에서 무장을 제외하고 10명가량이 들어갈 수 있는 좌석을 설치한 수송기 버전의 L3Y (96식육상수송기) 의 11형 (L3Y1) 이다. 글의 처음에서 보았듯 푸저우호의 기반이었던 미쓰비시 MC-20의 경우 항속거리가 3,000km 밖에 되지 않는데에 반해 L3Y는 45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한계로으로 인해 장거리비행이 어려웠던 이번 방일과정에서 난징-도쿄가 90시간 가까이 걸렸던 반면,해겸호를 이용함으로서 27시간만에 난징에서 도쿄까지 갈 수 있었다. (심지어 이것도 왕징웨이가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묵었기에 이런것으로 무리하였다면 하루안에 도쿄까지 갈수도 있었다.)


그리고 L3Y의 원본기종이었던 G3M은 이미 태평양전쟁시작 전부터 한계를 들어내고 있었던 구형기종이었다. 해군측에서 이기종을 선택했던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해겸호(海鶼號) 의 재현도.

일본뉴스 133호의 영상을 토대로 재현한 해겸호의 모습을 보면, 콕핏쪽에 왕징웨이정권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그리고 콕핏 밑의 부분은 해겸(海鶼) 이라는 이름이 적혀있고, 중화항공 (中華航空股份有限公司)의 로고와 사명이 적힌것으로 "추정"된다. (로고부분이 특히 확실하지 못하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해겸호에는, 청천백일문양이 아닌, 일본 항공기에 쓰이는 히노마루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오후 12시 30분, 왕징웨이는 도조의 육군대신 관저에서 도조 육군대신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주최하는 점심식사에 참가했다. 이자리에는 왕징웨이 일행과 일본 육군인사들이 참가한 행사로, 행사에서는 도조가 먼저 인삿말을 건냈고, 이에 왕징웨이도 답을 보내고 축배를 들었다. 도조는 인삿말에서 국공결렬이후 20년가까이 반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왕징웨이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충칭정부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식사가 끝난뒤 왕징웨이와 스기야마, 도조와 그들의 부하까지 합쳐 총 6명이서 별실에서 추가적으로 회견을 진행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와 함께 일본에온 쉬여 외무부장은 일본 도쿄의 만주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쉬여는 만주국대사에게, 도쿄방문때 마중을 나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고, 20분가량 회담을 가졌다.


오후 9시, 린바이셩이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자신의 감상을 약 30분간 이야기했다.



1941년 6월 21일 (土)


오전 7시 30분,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와 함께 오기쿠보(荻窪)의 고노에 수상의 사택으로 가서, 사택을 함께 방문한 마쓰오카 외무대신과 함께 4명이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4명은 중일제휴에 대한 회담을 1오전 10시 반까지 진행하였다.


오후 11시 25분, 왕징웨이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平沼騏一郎) 내무대신의 관저를 방문, 회담을 진행했다. 히라누마 내무대신은, 자신의 총리였던 시기 (1939.1~1939.8) 를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에게 자신의 총리를 했던 시기처럼 그대로 노력해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에게 "일본의 협력을 얻어 전력을 기울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했다. 왕징웨이와 히라누마의 회담은 25분만에 끝이 났다.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수교사(水交社, 지금의 도쿄타워 근처) 에서 오이카와 해군대신과 오찬을 가졌다. 이 오찬에는 왕징웨이측 일행과 일본해군측 인사들을 포함해 70명가량이 참가하여 2시까지 오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2시에 오찬이 끝난 후 오이카와 해군대신과 왕징웨이는 따로 30분가량 회담을 더 진행하였다.


왕징웨이와 함께 수교사에서 걷는 오이카와 해군대신 (가장왼쪽)

오후 3시, 왕징웨이는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일본 외무성 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기자단이 질문을 종합해 질문을하면, 왕징웨이가 이에 대해 답을하는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치뤄졌다. 이 기자회견은 약 1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오후 5시, 도쿄의 8개의 여학교의 여학생 7천명이 히비야공원에 모여 왕징웨이를 환영하기로 하였다. 여학생들은 환영왕주석각하(歡迎汪主席閣下) 라고 적힌 팻말을 선두로, 4열종대로 "애국행진곡"의 멜로디에 맞추어 일장기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면서 왕징웨이가 있는 제국호텔로 행진했다. (이는 물론 관제행사였다.)


오후 5시반, 제국호텔에서 추민이의 주도로 각계인사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열었다. 이 다과회는 마쓰오카 외무대신, 나가노 군령부총장, 스기야마 참모총장, 대정익찬회의 인사들, 신문기자들, 문학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까지, 600명가량이 참가하는 대형행사였다. 왕징웨이는 행사에 참석하고 있던 중, 위의 여학생들이 제국호텔앞에 도착하여 외치는 "왕주석만세!" 소리를 듣고, 호텔의 발코니에 올라가 환호를 보내준 여학생들에게 손을 3번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건냈다. (이때 왕징웨이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 20분정도가 지나고 왕징웨이가 발코니에서 내려가자, 저우포하이와 린바이셩이 계속하여 이 여학생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발코니에서 내려가 요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호텔안의 연극장에서 단풍놀이(紅葉狩) 를 비롯한 7종류의 일본무용을 감상하였다. 공연은 7시에 끝이났다.



제국호텔 안의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단풍놀이(紅葉狩)의 장면, 이 사진은 실제 왕징웨이의 방일기념사진첩에 있던 사진이다.

오후 7시 30분, 왕징웨이는 다과회를 마치고 차를타고 달려 정치가 도야마 미츠루(頭山満)의 사택에서 그 를 만났다. 이자리에는 이시와타 소타로(石渡荘太郎) 대정익찬회 사무총장, 아키타 키요시 (秋田清) 척무대신을 비롯한 주요 정계 인사들이 이미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도야마를 만났던 이유는 왕징웨이 스스로가 아시아주의자였기에 (정확히는 쑨원의 아시아주의를 따르는) , 쑨원의 아시아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도야마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 10시 30분, 3시간가량 진행된 도야마를 비롯한 요인들과의 대화를 끝내고, 왕징웨이는 숙소인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왕징웨이와 이야기하는 도야마의 모습. (왕징웨이의 왼쪽이 도야마.)

(시간을 알수없음, ) 왕징웨이는 흥아서도전(興亞書道展)의 상품으로 난징의 유명한 붓과 먹 10세트를 기증하였다. 이 행사에는 일본, 만주국, 왕징웨이정권의 서예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이 중에는 고노에 일본총리, 왕징웨이, 만주국의 장징후이를 비롯하여 일본측에서 작품 3천개, 만주와 중국측에서 합쳐서 약 1천개가량의 작품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22일 (日)


이날은 많은 신문속에서 왕징웨이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날이었기에 거의 모든 신문은 이에 대한 소식을 담기 바뻤고, 이로인해 이날 왕징웨이의 행적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일본과 조선의 신문뿐만 아니라 심지어 난징정부에서 만들었던 신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린바이셩을 대리로 육군 제1병원으로 보내, 부상병들을 격려했다. 이후 군의관학교도 방문하여, 군의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오전중 (시간알수없음), 왕징웨이는 추민이와 함께 시나가와의 카미오사키에 있는 이네나가 유키치(岩永裕吉) 전 동맹통신사장의 사택을 방문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8시,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고노에 총리와 왕징웨이가 이번 방일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8시 정각부터 8시 15분까지, 고노에 총리가 먼저 이야기를한뒤, 이를 중국말로 번역하고, 8시 30분부터 저우롱샹(周隆庠)의 지원을 받아 왕징웨이가 15분동안 방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1941년 6월 23일 (月)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카와다 대장대신의 관저에서 카와다 대장대신과 회담을 가졌다. 이행사는 주로 일본측의 재계인사들이 참가했었다. 일본은행, 조선은행, 대만은행 총재등이 자리에 참가했었다. 왕징웨이는 감사의 인사를 올린뒤 카와다 대장대신도 이에 답으로 인사를 올렸다. 이후 회담이 진행되었고 회담은 오후 1시 30분까지 진행되었다. 1시 30분 모임은 끝났지만, 왕징웨이와 카와다는 남아서 조금더 이야기를 진행했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는 고노에 수상관저에서 '고노에-왕징웨이 공동선언' 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노에총리대신-왕징웨이행정원장 공동성명
 (近衛總理大臣-汪行政院長 共同聲明)

나와 왕징웨이씨는 지금의 지나사변을 속히 처리하고, 이것을 계기로하여 일화(日華)양국의 영원한 관계를 확립하고, 공존공영(共存共榮), 동아부흥(東亞復興) 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매진하고, 이전에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를 내용으로하는 동아신질서건설에 관한 각각의 선언(고노에성명을 의미) 을 한바가 있었는데 이는 지난해 11월 30일 성립된 일화기본조약, 일만화공동선언이 같은 취지속에서 만들어져 그 뜻이 계속되었다. 무릇 동아신질서 건설의 의미는, 동아 고유의 도의적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동아에서 침략주의, 공산주의의 독을 제거하고 상호제휴, 공존공영의 나라를 건설하는데에있다. 중국 민중들 중에는 중국과 일본의 합작에 의한 동아의 번영을 희망하면서도 과연 이 희망이 실현될수 있을지에 대해 아직 자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연히 이를 머뭇머리며 그저 관망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않다. 동아부흥의 위대한 사업은 지금의 단계에서도 될수 있는한 그 뜻을 최대한 뚜렷하게 나타내어 많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전면화평의 실현에 매진함으로서 비로소 이를 달성할 수 있는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회담한 결과, 일화 양국정부는 위의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정치상, 경제상, 군사상, 문화상의 일화제휴협력의 구체적 실현을 제공하고, 민중들로 하여금 일화합작, 동아부흥이 일본과 중국 양국민 공동의 사명임을 알리는데에 힘쓰고, 일본제국 정부는 이에 대하여 최대의 협조를 하여 국민정부가 속히 독립자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동아신질서의 책임을 분담시키려 노력한다.


쇼와 16(1941)년 6월 23일

近 衛 文 麿

汪 兆 銘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저우포하이

성명은 중국어로는 저우포하이가, 일본어로는 정보국총재였던 이토 노부후미(伊藤述史)가 낭독하였다.


오후 7시, 성명을 발표한 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제국호텔의 환영회에 참가하였다. 대정익찬회 측이 주최한 이행사에는 왕징웨이 인사들, 대정익찬회 인사들, 민간인사 일부가 참여하여 약 70명 가량이 참가하였다. 고노에 총리는 참가하지 못하고 대신 축하문을 보내어 자리에 있던 대정익찬회 부총재가 이를 대신 읽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모임은 8시에 끝이 났다.


1941년 6월 24일 (火)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방일과정에서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고노에 총리를 비롯한 주요인사들을 중화민국대사관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약 50명가량이 참가한 이 오찬은 1시까지 진행되었다.


오후 3시, 왕징웨이는 궁성으로 들어가 남유간(南溜間)에서 마츠다이라 궁내부 무부장관을 만나 내일 도쿄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했다. 왕징웨이는 일본 황실이 방일과정에서 보여준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는 귀족원-추밀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다과회에 참가하였다. 행사는 국회의사당에서 마츠다이라 요리나가 (松平頼寿) 귀족원 의장을 중심으로 ,도조 육군대신, 오이카와 해군대신, 오가와 고다로(小川 郷太郎) 철도대신이 내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약 600명의 귀족원-추밀원 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마츠다이라 귀족원 의장이 감사인사를 건냈고 왕징웨이도 답문을 읽어 보답했다. 4시반까지 다과회는 진행되었다가, 4시반부터 추밀원 의원들과 따로 이어서 다과회를 계속하였다.


라디오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고노에와 왕징웨이의 모습 - 경성일보 1941년 6월 25일자

오후 8시 10분, 모임을 끝낸 왕징웨이와 고노에총리는 JOAK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송은 8시 40분까지 진행되었다. 일본국가와 중화민국의 연주가 있은 후, 고노에가 먼저 "왕주석각하를 환영하며" 라는 제목의 방송을 하였고, 이후 왕징웨이가 "우방일본을 방문하며" 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다.


1941년 6월 25일 (水) - 귀국일정


오전 8시 40분, 왕징웨이는 방일일정을 끝내고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나와 도쿄역으로 향했다. 이때 차량은 외무성에서 제공되었다. 도쿄역으로 가는길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길가에서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며 왕징웨이를 맞이했다.


왕징웨이의 난징행에 도쿄역에 마중을 나온 고노에와 일본주요인사들. 180cm가 넘는 고노에의 키는 분명 당시기준으로도 키가 큰 편이었던 왕징웨이보다 돋보이게 한다.

오전 9시, 왕징웨이는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쿄역에는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크게 게양되어있었다. 도쿄역의 8번 플랫폼에는 고노에 총리와 도조, 요우카이, 마츠다이라를 비롯한 방일과정에서 함께했던 주요인사들이 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쓰오카 외무대신의 안내를 받아 플랫폼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마중을 나온 인사들 한사람 한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마쓰오카와 고노에와 악수를 하였다. 승차시간이 되자 업무처리를 위해 일본에 남게된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일부 관원들을 제외하고, 왕징웨이와 일행은 특급열차 "츠바메 (燕,제비)" 호에 올랐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맨 끝칸의 전망차 (展望車) 에 탑승하였다



왕징웨이와 일행이 탑승했던 츠바메(燕) 의 맨마지막칸 관람차의 모습. (1936년 촬영.)

오후 5시, 왕징웨이가 탄 특급 '츠바메'호가 오사카역에 도착했다. 오사카역에는 이미 고베총영사, 오사카 시장, 오사카부 지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마중을나와 왕징웨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도착하자 이들은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내었고 귀빈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오사카역 또한 도쿄와 마찬가지로 대형의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어있었고, 오사카부에서 준비한 차량 20대에 나누어 탑승하였다. 왕징웨이는 차에 걸려있는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보고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에 고베에서, 도쿄에서처럼 수많은 인파들이 왕징웨이의 오사카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오사카내의 중국학교의 학생들은 "환영왕주석" 이라는 팻말을 걸고 왕징웨이를 환영했고, 이밖에도 오사카 내의 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이 깃발을 흔들며 약 3만명가량의 인파가 왕징웨이를 환영하고 있었다.


오후 5시 30분, 왕징웨이는 일본에 도착했을때 묵었던 숙소이자 이번에도 숙소로 쓰이게 된 고시엔 호텔에 도착하였다. 왕징웨이는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왕징웨이는 오사카와 고베의 신문기자단과 함께 가벼운 회견을 진행하였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는 고시엔호텔을 나와 차량을 타고 오사카의 '신오사카호텔'에 방문했다. 왕징웨이는 신 오사카호텔에서 오사카부 - 오사카시에서 공동으로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가했다. 400명의 여러 분야의 여러 인사들이 자리에 참가했지만, 이자리에는 특히 우리에게는 '영친왕' 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대한제국의 최후의 황태자 이은이 함께하였다. 환영회에서는 오사카부 지사였던 미나베 쵸우시 (三辺長治)가 환영사를 낭독했고, 이에 왕징웨이도 답사를 낭독하였다. 이후 만찬을 함께한 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별실에서 관원들과 자신만의 자리를 가진뒤 9시 45분, 숙소인 고시엔 호텔로 돌아갔다.


오후 10시이후 (왕징웨이가 숙소로 돌아온이후로, 시간은 표기되어있지않음) , 왕징웨이는 고시엔 호텔의 1층 로비에서 각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저우롱샹의 통역을 받으며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린바이셩은 동맹통신 본사로 전신을 통해 담화문을 전달하였고, 이 담화문은 그다음날 발표되었다.


1941년 6월 26일 (木) - 날씨 비



고베마루에서 깃발을 흔들며 마중을 나와준 인파에 감사인사를 보내는 왕징웨이.

오전 11시, 왕징웨이는 효고 현에서 준비해준 차량에 나누어 탑승해 고베항으로 향했다. 이날 아침에 비가왔음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에 깃발을 흔들고 환영하였다고 한다.


오전 11시 15분, 왕징웨이는 고베항에서 고베마루(神戸丸) 에 탑승하였다. 이때 고베시장, 효고현지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와서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1등실에 탑승하고 데크에서 마중나와준 인파들에게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일장기를 양손에 들고 흔들며 감사인사를 보냈다. 동시에 고베시 밴드가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파는 비속에서도 "왕주석만세" 를 외쳤고 중화민국 국가가 연주되고 인파들이 환호를 보내는 가운데, 고베마루는 출발, 난징을 향해 나아갔다.



왕징웨이가 난징으로 돌아가는 길에 탔던 고베마루 (神戸丸), 1940년 만들어진 이 여객선은 1942년 11월 사고로 침몰한다.

1941년 6월 28일 (土)


오후 4시, 왕징웨이의 고베마루가 상하이에 도착했다.


오후 5시 30분, 왕징웨이는 앞에서 언급한 해겸호에 처음탑승하여 상하이에서 난징을 향해 날아갔다. 왕징웨이의 해겸호는 한시간후 난징비행장에 착륙했다. 착륙과 동시에 중화민국 국가가 연주되었고 정부인사들로부터 환영인사를 받고 공관으로 돌아갔다. 공관으로 가는길에 난징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돌아온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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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의 상징적인 첫 방일을 기념하여 일본측에서도, 왕징웨이정권측에서도 (중화전영)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사진첩도 발행되었다. (이 덕에 본 포스트에 풍부한 사진을 실을 수 있었다.)


[출처]


매일신보 1941년 6월 12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경성일보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조선신문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중화일보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방일사진첩 ② : https://read01.com/7xe4Na.html


푸저우호 관련자료 / 중화항공 관련자료 : http://cwlam2000.epizy.com/new_page_2.htm?i=2

구 궁성 사진자료 :https://tanken.com/meijikyuden.html

고베마루, 츠바메호 , 왕징웨이 공관 사진자료 : 위키피디아 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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