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新民會, 1937~1945)
신민회의 깃발(1차).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본것같은 깃발인데..? 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특히 일본의 대륙괴뢰정권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우선 신민회의 깃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시작을 하려한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중일전쟁시기 일본이 중국대륙에 세운 괴뢰정권에 대해서 가볍게 들어보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민회의 깃발에서 무언가가 연상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여러분의 생각은 틀린것이 아니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실제로 이와 너무나도 비슷한 깃발이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과 쑤시원 (蘇錫文,소석문) 이 1937년 말에 상하이에 세웠던 상하이대도정부 (上海市大道政府) 의 깃발과 신민회의 깃발. 사용되었던 색깔과 너무나도 유사해보이는 태극무늬까지, 두 깃발은 판박이처럼 닮았다.
상하이시 다다오정부 (상해다도정부) 를 세운 쑤시원은 본래 불교와 도교의 융합에 관심이 있던 자였다. 그는 불교를 상징하는 노랑색을 배경에두고, 도교를 상징하는 태극무늬를 넣음으로서 자신의 시각을 들어냈다. (또한 대도(大道) 라는 이름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되었다.)
신민회 회무수지(新民會會務須知) 에서 묘사된 신민회 깃발(1차)
주목해야 할 부분은 두 깃발이 만들어진 시기가 단 19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친일행동을 한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으나, 두 조직은 정체성이 크게 달랐다. 상하이대도정부는 도교와 불교를 융합한 이데올로기를 도입했고, 중지나방면군의 지배를 받았는데, 신민회는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유교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북지나방면군의 지배를 받고있었다. 이토록 두 조직은 속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토록 비슷한 깃발을 비슷한 시기에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민회는 무엇인가?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일본은 전쟁초기 빠른 속도로 점령지를 확대에 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광대한 중국대륙이라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점령지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중국인구와 그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게릴라들을 일본은 단순한 군사지배로는 제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일본은 이미 중일전쟁 이전부터 화북분리공작(華北分離工作) 을 통해 화북지역을 장제스의 국민정부로 부터 이탈시켜 일본의 괴뢰정부를 옹립해 일본의 경제권으로 편입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가지 필요성에서 당시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은 화북지역에 새로운 친일신정부를 옹립하여 화북을 좀더 용이하게 통제하고 제어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였다. 화북을 점령하고 통제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은 정부 수립을 위해 과거 북양정부 시절 중화민국 재정총장을 지냈던 왕커민(王克敏, 왕극민) 에게 접근했다. 이전부터 친일성향이 있었던 그에게 접근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을 맡게 했다. 그리고 이전에 수립했던 괴뢰정권이었던 기동방공자치정부(冀東防共自治政府) 또한 임시정부로 통합시키게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임시정부의 운영과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친일이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지원할 수 있는 범대중적 조직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성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부터 10일이 지난 1937년 12월 24일에 설립되었다. 신민회는 명목상으로는 청년들의 훈련, 농촌의 구제를 목표를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친일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민중의 반대를 무마하고, 친일사상을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신민회라는, 앞에서 이야기한 친일이자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지지하는 범대중적 조직을 건설한다는 개념은 임시정부의 수립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었다. 북지나방면군 특무부는 정부 수립 이전부터 "새로운 정권을 지지할 단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시작부터 이미 일본의 손안에 있었던 것이다. 신민회는 임시정부가 운영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북지나방면군 특무부 총무과의 지휘를 받았고, 흥아원(興亞院) 화북연락사무소 정무국의 통제를 받았다. 신민회의 직원 900명중 400명이 일본인이었다는것은 신민회의 성격을 더더욱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민회에서 발행했던 선전잡지 우방대일본 (友邦大日本) 잡지의 뒷면. 일본의 일장기, 만주국의 신오색기,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오색기, 그리고 신민회의 깃발이 그려져있다. (필자도 처음에 이 깃발을 위의 상해대도정부와 착각한 바 있다.)
특무부는 새로이 만들어질 조직의 모토를 옆의 만주국의 만주국 협화회(滿洲國協和會)에서 가져왔다. 만주국에서 일종의 유일정당이자 유일한 정치단체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고, 문화와 교육등을 통해 국민들을 개조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춘 만주국 협화회는 북지나방면군 입장에서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중국민중들이 다수이며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게릴라의 활동은 멈추지 않는등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의 점령이후 발생한 혼란이 계속되는 화북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었다. 실제로 만주국 협화회 설립을 주도했던 오자와 가이사쿠(小沢開作) 를 비롯한 여러 협화회 설립인사들이 신민회의 구성에 참가했었다. 따라서 신민회는 협화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북지나방면군은 신민회를 임시정부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만들어 화북에서 이전에 화북을 지배하고 있던 국민정부의 국민당을 자신들이 대체하려 했다. 점령이후에도 남아있는 국민당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민중들에게 신민회를 국민당의 대체지지세력으로 인식하게 하면서 민중들이 신민회를 통해 단결해 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내주기를 바랬다.
베이징에서 열린 신민회의 발회식 (1937.12.24)
1937년 12월 24일 오전11시 , 베이징 중난하이의 회인당(懷仁堂) 에서 성대한 발회식 행사가 열리면서 신민회는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폭죽이 울려퍼지고 베이징에는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아닌 오색기가 다시 걸리게 되었다. "신민회 만세!" 와 같은 구호와 함께 발회식은 끝이났다. 놀라운 것은 신민회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회장자리가 공석이었다. 신문의 기록에 따르면 신민회가 만들어진 12월 24일 시점에서는 회장자리가 비어있었다. 이렇게 회장자리를 임시로 비운 상태에서 장옌칭(張燕卿,장연경)이 회장을 보좌하는 부회장자리에 올라 임시적으로 수장이 되었다. 해가 지나고 1938년 1월 6일, 신민회는 주요 인사들을 결정하고 발표했지만, 이시점에서도 회장자리는 공석으로 비어있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수반 왕커민이 신민회 회장에 앉게 되는데 이는 신민회 결성으로 부터 3년이 거의 다 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1939년 12월 2일)
장옌칭 (張燕卿) , 그는 만주국의 외무장관이었으나, 신민회가 생기기전에 사임하고 신민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이때 일본은 조선에도 신민회와 임시정부의 활동을 위해 압박을 가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임시정부가 생겼던 시점에서도 한성을 비롯한 조선의 각지역에 존재하는 중화민국 (물론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의미) 영사관에 압박을 가하여 직원들로 하여금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아닌 왕커민의 임시정부를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일부 영사관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 내의 화교사회와 중화민국 영사관은 모두 일본과 왕커민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민회 또한 황해도와 평양을 비롯한 조선의 곳곳에 지부를 설치했다. (이 조선내 영사관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자세하게 한번 다루려고한다)
일본이 이러한 행동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 라는 제1차 고노에성명 바로 직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민회는 신민주의 (新民主義) 라는 개념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신민주의는 중국 전통의 유교적 보수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중국 전통의 봉건사상과 일본산 파시즘이 혼합된 결과물이었다. 신민주의라는 이름은 신민회가 국민정부의 삼민주의 (三民主義) 를 "악의 근원" 이라 비난하면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로 생각된다. (신민회라는 이름도 있고)
신민회는 신민회강령(新民會綱領) 을 가지고 있었는데, 강령은 다음과 같다 :
신민회강령 (新民會綱領)
1. 신정권을 옹호하고 민의의 창달(거침없이 쑥쑥 뻗어 발달함)을 도모한다.
擁護新政權,以圖暢達民意
2. 산업을 발달시키고 민생을 편하게 한다.
開發產業,以安民生
3. 동양의 문화도덕을 펼쳐 일으킨다.
發揚東方之文化道德
4. 초공멸당 (공산당을 금지하고 국민당을 멸한다) 의 기치 아래 반공전선에 참가한다.
於剿共滅黨旗幟下, 參加反共戰線
5. 우방과의 연맹의 실현을 촉진시켜 인류화평에 공헌한다.
促進友邦聯盟之實現,以貢獻人類和平
강령에서는 동양의 문화도덕을 펼쳐 일으킨다라면서 유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초공멸당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신민회는 공산당에도 국민당에도 모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진 중국에서 일종의 3지대론을 꺼내든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마지막 항에서 볼 수 있듯이 우방 (즉 일본) 과의 친선이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 친일적 성향을 확실하게 들어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친일적이고 친일적인 이 신민회의 강령은 사실 일본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신민회에서는 신민주의를 창조한 사람이 머우빈 (繆斌,무빈) 이라는 자가 이를 작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머우빈은 이후 1939년에 신민회 부회장을 맡은 그는 실제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저서 《무덕론(武徳論)》 의 내용을 조금 수정하여 《신민주의 (新民主義)》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출판했지만, 그 기본틀이 이미 일본 북지납방면군에 의해 짜여져있었다는 점에서 신민주의 또한 사실은 일본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한편 머우빈은 조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신민주의를 세계로 확산시키겠다" 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으니 하니 머우빈은 자기의 사상 (일본이 함께 만든) 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신민회는 활동을 시작하고 난 이후 각 성, 각 도시, 각 고을에 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 직업분회까지 설치하는 등 수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본래 국민정부시절에도 직업분회는 존재했었다. 공회(工會) 와 직업공회(職業公會) 라는 정부와 국민당, 그리고 각분야의 노동자들이 결합한 직업조직이 존재했었으나 이 조직들에는 노동자들만 참여하고 경영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민회는 직업분회를 설치하면서 기존 국민정부시절의 직업조직들을 해체하고, 새 직업분회에는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가 참가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 직업분회에는 총 16개의 직종에서 약 4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가입해있었는데, 이중에서 맥주직업분회 (啤酒職業分會) 가 가장 먼저 생겼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음악계, 인쇄계, 자동차산업계, 연극계, 미술계등 다양한 직업분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교육의 경우 신민학원 (新民學院, 대학급) 과 신민학교 (新民學校), 신민청년훈련소 (新民靑年訓練所) 를 비롯한 여러 교육시설을 설치해 신민회와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일본에서 "지나말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 라고 하자 중국어를 가르칠 교원을 양성하여 일본으로 보낸것도 신민회였다.
그리고 신민청소년단(新民靑小年團), 신민청년단(新民靑年團) 과 같은 유소년 조직을 구성해 운영하기도 했다. 전 포스트에서 이야기했던 왕징웨이랑 똑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민국28년 (1939) 신민학원동학회 탕산분회 설립기념 사진 (新民学院同学会唐山分会) . 일본군인의 모습이 보인다.
학생들은 신민회가 만든 교육시설 (특히 청년훈련소)에서 신민주의에 대해 배우고, 공산주의와 삼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일본어교육과 농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군사교육도 받았다. 항일 게릴라가 활동하고 있는 화북에서 치안의 유지를 위해 신민회의 교육을 받는 청년들은 농촌의 사상선도자가 되어 농촌의 민중들을 교화하고, 민중들에게 농업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농업을 공비를 비롯한 "적" 으로 부터 지켜낼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신민회의 군사교육은 어디까지나 자위 (自衛) 를 위한 것으로, 이 청년들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전장에 투입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러한 군사교육과정을 통해서 화북의 청년들과 일본군의 관계가 가까워 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의 청년들은 "일본이 우리를 군사교육을 시켜서 전선에 끌고가려한다!" 와 같은 공포심속에 훈련에서 도망쳐서 오히려 공산당이나 국민당지배지역으로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일본군과 관계자들이 나서서 이런 전선투입설을 부정했지만 (애초에 임시정부는 이미 자체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청년들은 이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일본에 대한 공포심을 공산당과 국민당은 역으로 이용해 화북의 청년들이 자신의 구역으로 오게 하기도 하였다.
신민회의 청소년조직,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모은 (청소년여단훈련대青少年女團訓練隊) 의 체조시간. 뒤에 일장기와 오색기가 휘날린다.
하지만 이후 1942년 이후 전황이 악화되면서 신민회는 이렇게 군사교육을 받는 청년들을 실제로 무장시키고 공산당 소탕과 같은 전투에 참가시켰다. 청년들이 우려했던 것이 결국에는 사실이었던 셈이다. 신민회 내부에서는 "청년들을 무장시키는게 과연 옳은가? " 에 대한 논쟁이 오고갔으나 결론적으로 "늘어나는 공비의 침입을 막기위해서는 어쩔수 없다" 라는 답을 내고 청년들을 무장시키고 향촌에서 전투를 하게 했다.
신민회청소년단의 행진에 나치식 경례를 하는 나치독일의 사절단 (1939.5)
일본은 청년들에게 신민회에서의 군사교육을 비롯한 신민회의 교육과정을 통하면 취업을 비롯한 여러부분에서 이익이 있다고 선전했다. 이들 대다수가 취업과 같은 목적을 위해 신민회 청년훈련소를 비롯한 시설에서 교육을 받았고 적어도 2만명 이상의 청년들이 이를 거쳤다. 일본측은 신민회에서의 교육을 통해 향촌과 지방의 친일협력자를 양성하기를 바랬지만 중국 청년들은 "취직하기 편하니까 가는거죠" 와 같은 반응으로 청년은 응했다. 즉, 신민회는 본래 의도하고자 했던 것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이런 신민회에서의 교육을 이수한 청년들은 신민회의 중앙간부나 지방간부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출세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은 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교육을 모두 마쳤음에도) 추가적인 교육을 계속 이수해야했고 심지어 사상 검증도 이루어졌다. 항일전쟁승리 이후 신민회 출신들은 한간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이 청년들은 어땠는지 알기 어렵다.
언론의 경우 신민보 (新民報) 라는 자체 신문을 발행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선전하고, 앞에서 보았듯 우방대일본(友邦大日本) 과 같은 여러 잡지들을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지역에는 신민열람실(新民閲覧室) 과 신민차관(新民茶館) 과 같은 시설을 설립하여 도시의 도서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런 선전물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차를 제공하여 사람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선전물을 읽게 장려했다. 이조차도 어려운 곳은 자동차에 선전물을 실은뒤 이동식 도서관처럼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러 선전 활동을 펼쳤는데, 그중에는 한국이 군사독재시절 불온도서를 신고하고 불온도서를 불태우는 행위를 해왔듯 항일서적을 신고하게 하고 태우는 행사도 진행되기도 했다.
신민회는 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과 조선에 톈진특별시체육협회(天津特別市體育協會) 베이징시교육국(北京市敎育局)과 함께 농구대표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북지(北支)" 대표팀으로 출정한 임시정부 농구팀은 일본에서 두번의 경기를, 조선에서 1번의 경기를 치뤘다고 하는데 일본에서의 두경기는 모두 패배하고 조선 경성에서 열린 경기에서는 승리를 거두는데 승리했다고 한다.
정치의 경우 1938년 11월 16일 반장구국중앙대회(反蔣救國中央大會) 를 개최하고 각지역마다 반장구국대회 (反蔣救國大會) 를 개최하게 했다. (이 행사는 톈진과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지역에서 이뤄졌다) 또한 영국조계가 검역조치를 강화하자 영국조계를 비롯한 연합국 조계 근처에서 반연합국 시위를 이어나갔고, 이후 조치의 완화, 나아가 조계의 환수를 주장하는 신민회도시부준비위원회(新民會都時部準備委員會) 를 구성해 신민회도시부위원회(新民會都時部委員會) 를 만들어 톈진과 상하이를 비롯한 영국조계가 있는 곳에서 반영시위를 이어나갔다. 또한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왕커민에 대한 선전활동에 나서면서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정부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행하기도 했다.
"경축 왕커민 위원장이 신민회 회장으로 임명되다!" 1939년 12월쯤의 포스터로, 신민회에서 왕커민의 신민회회장 취임을 환영하는 포스터
신민회는 대외적으로 여러 활동을 했는데, 난징에 세워진 또다른 괴뢰정부였던 유신정부와의 여러 협력은 물론 결성 1주년을 기념해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에게 감사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신민회에서는 조선에 "사과나무를 보내달라" 라고 요청한 바가 있다. 이 또한 선전을 위한것이었는데,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 북지(화북) 은 평화를 찾아가고 있어 그 평화를 상징하는 사과나무를 심으려고한다. 근데 알아보니까 "조선 평안남도의 사과나무가 제일 좋으니 그걸로 보내달라" 라고 주문을 넣기도 했다.
이런 외에도 더 많은 분야에서 신민회는 수많은 선전과 계도활동을 이어나갔다. 국민정부를 "국민당의 나라" 라고 하듯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신민회의 나라" 라고 말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신민회는 모든 예산을 임시정부의 국고에서 받아 쓰고 있었으며, 이 비용은 '임시정부 행정위원회'의 예산보다 많았다고 할 정도이니, 신민회가 임시정부에 끼치는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신민회는 임시정부와 한몸이되어 신민회가 임시정부 그 자체라고 할만큼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8년 12월 18일, 신민회는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것이다.
사실 본래 임시정부는 유신정부와 함께 1938년 9월 22일부터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하고 통합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두 정부 모두 유교에 입각하고 국민당에 반대하고 있기에 오히려 이 두정부의 통합논의는 큰 문제가 없이 점점 진행을 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시점에서 이미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두정부는 이미 통합을 위한 제 3차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탈출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두정부가 한몸이 되다." -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성립 기념포스터, 1938년 9월
화북이라는 영토속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신민회는 왕징웨이의 탈출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자신들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기도 했고 게다가 일본은 왕징웨이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의 신정부가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통합하는 통합신정권이 되어야한다고 이야기를 나눴으며 왕징웨이측도 중광당회담 (重光堂會談, 1938.11.12) 에서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해체하고 왕징웨이의 중앙신정부로 통합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바가 있었다.
만약 왕징웨이의 생각대로 모두 이루어진다면 화북에서 독자적이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신민회는, 심지어 "국민당을 멸해야 한다" 라고 까지 이야기했던 신민회에게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커민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중앙신정권 구상에 반대했다.
왕징웨이가 생각했던 '신중앙정권 구상' .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물론, 몽강과 기타 정치세력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신중앙정권을 왕징웨이는 구상하고 있었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내몽골부터 광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왕징웨이의 중앙정권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징웨이는 만주국도 자신의 정권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중앙정권에서는 화북,화중,화남의 주요산업은 물론 수많은 인구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촉나라땅만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장제스의 충칭정부에 비하면 엄청난 경제력과 인구를 가질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또한 이러한 거대한 통합신정권을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 수 있어야 민중들에게 화평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시킬수 있으니 새롭게 구성되는 정권에서 왕징웨이는 독보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싶어했다. 이러한 생각을 왕징웨이 뿐만 아니라 일본내에서 왕징웨이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 개편이 이루어진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의 모습. 화북은 물론 몽강도 명목상으로는 편입되었으나 왕징웨이는 이지역에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이후 1939년 6월 부터 통합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왕징웨이는 중앙신정부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임시정부의 왕커민을 1939년 6월 27일 만나 이야기했지만, 왕커민과 왕징웨이는 "통합된 중앙정부가 필요하긴 필요하다" 라는 동의를 얻어내어 겉으로는 꽤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커민은 사실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유신정부의 지도자 량홍즈는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왕징웨이는 왕커민을 만난 후 량홍즈를 만나러 갔으나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왕징웨이와 그의 세력이 신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확실한 거부를 보였다. 왕커민과 달리 신중앙정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지나방면군 또한 생각이 달랐다. 지나방면군에게 난징을 비롯한 화중지역은 괜찮지만, 당시 중국의 주요철도가 지나가고 수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화북지역만은 자신들의 강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진행해왔던 이들에게 다시 화북을 넘겨준다는 일도 불가능했다.
이렇듯 위의 포스터에서는 두 정부가 평화롭게 웃으면서 새정부구성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대륙의 주도권을 뺏기기 싫다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존재했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1939년 6월 6일에 '수립신중앙정부적방침(樹立新中央政府的方針)" 을 통해서 이미 화북지역을 특수지역으로 만들어 왕징웨이의 새로운 신중앙정권과 분리하기로 결정을 지었던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의 희망사항은 더더욱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1939년 7월 열린 제5차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회의를 거치면서 다행히도 두정부가 왕징웨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변화하게 된다. 두 정부는 왕징웨이의 뜻에 동의하기로 결정하고 원만하게 합의에 나서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합의가 가능했던것은 임시-유신 양정부보다는 일본과 왕징웨이로 인해 가능했는데, 왕징웨이는 결국 화북에서의 특수권을 인정했고, 일본도 임시-유신측에 신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일종의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임시정부는 왕커민 위원장을 위시하여, 유신정부는 나와 내 및의 모든 사람은 왕(왕징웨이) 선생이 신속한 공작을 펼쳐 중앙정부를 속히 실현시켜주기를 바라는 점에는 모두가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 유신정부 량홍즈 , 1939년 9월 21일 일본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불과 3개월전에 결사 반대를 했던 량홍즈가 3달만에 의견히 변하게 된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39년 10월 시점에서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에 대한 방침이 사실상 확정이 되었다. (이후 이 통합과정을 다른 포스트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겠다.)
완전하지 않은 왕징웨이 정권의 모습은 사실 일본과 왕징웨이의 타협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 39년 7월이후 원만한 합의가 시작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이과정에서 크게 합의된것은 다음과 같은데,
1) 유신정부는 해체, 하지만 인사들은 고용
2) 임시정부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정부조직만 존속,
실권을 유지한채 중앙정권에 편입
3) 화북에서의 일본의 특권을 인정
4) 몽강의 경우 신중앙정권으로 편입하나 그 실권은 유지
이러한 합의의 결과 겉보기상으로는 왕징웨이의 중앙신정부가 모두를 통합한것 처럼 보이지만, 구 임시정부지역과 몽강자치정부 지역은 그 실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말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신민회는 지금까지 이어왔던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민회는 더이상 이전과는 같이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즉, 바뀐 시대에 변화를 해야했다는 것이다.
이로서 왕징웨이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지만, 신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속 화북정무위원회에서 행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친일에 "국민당을 멸한다" 라고 이야기하던 신민회는 더이상 과거와는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없었다.
신민회의 2대 깃발, 오색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1940년 2월 29일, 신민회는 기구 개혁을 발표했다. 기구에 대한 통합과, 왕징웨이정권의 출범에 맞게 개조가 이루어질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북지나방면군 특무부에 있었던 정보조직이었던 선무반을 신민회에 통합시키고, 북지나방면군과 신민회에서 역할이 겹치는 조직에 대한 통합등이 이루어질 것임을 이야기했다.
1940년 3월 30일로 왕징웨이 정권이 출범했을때, 평양의 신민회조직은 왕징웨이정권 출범에 축하인사를 보냈다. 고작 2~3년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을 멸해라라고 이야기했던 조직이 "국민당 만세" 를 외치게 된것이다. 신민회는 왕징웨이 정권 출범이후 강령을 수정했다 신민주의라는 기본 이념은 변화가 없었지만 . 특히 "초공멸당" 이라는 반 국민당적구호가 "실시반공(實施反共)" 이라는 구호로 대체되었다. 신민회 내의 보수파들은 이에 반발했으나 변화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 출범이후 신민회는 자신들의 깃발을 앞의 노란깃발에서 임시정부를 상징했던 오색기로 바꾸었다 (진짜 단체깃발이 그냥 옛 북양정부 깃발) 일종의 임시정부에대한 전통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기상으로는 신민회는 5월에는 대대적인 개조를 거치면서 친 국민당이자 친 왕징웨이 조직이 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민회와 왕징웨이측은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왕징웨이정권의 정치운동과 주변관계.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신민회는 존속되었고 개조가 되었음에도 왕징웨이 정권과 국민당의 행동에 반대와 견제를 해왔다.
신민회와 왕징웨이는 1940년 12월부터 다시 갈등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둘이 갈등을 벌인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왕징웨이정권이후 신민회는 국민정부를 용인하는 등 여러 개조를 거쳤으나, 결과적으로 신민회는 왕정권 이후 북지나방면군을 비롯한 일본측에서 완전히 장악되었다.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왕징웨이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일본 세력이 주가 된 것이었다. 따라서 신민회 조직의 구성은 왕징웨이 정권 이전과 이후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신민회는 이때부터 왕징웨이의 국민당을 용인은하지만 더욱더 철저한 친일조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신민회에서는 이탈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신민주의의 이론을 작성한 (일단은) 머우빈은 왕징웨이정권의 동아연맹운동에 감탄하여 신민회에서 나와 동아연맹운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트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려고 계획중)
머우빈은 동아연맹운동에서 "신민주의와 삼민주의는 같은것" , "삼민주의는 서양사상이아닌 동양 전통사상을 가져온것" , "삼민주의는 서양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 과 같이 머우빈은 자신이 신민주의 사상을 만들고 신민회의 주요 간부였음에도 왕징웨이의 동아연맹쪽으로 선회해버렸다. 신민회에서는 머우빈 외도 여러 인물들이 동아연맹쪽으로 선회했으며, 이렇게되며 신민회에는 보수적이고 국민당에 강경한 세력만 더더욱 남게 된 것이다.
동아연맹 중국동지회 (동아연맹의 난징지부)에서 발행한 잡지 "대아주주의 (大亞州主義, 대아시아주의)"
이번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 다루기만 하겠지만, 동아연맹운동은 1938년부터 시작되어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가 30년대 초반 초석을 닦고 여러 인물들이 더더욱 참가하면서 1938년 쯤에는 동아연맹의 완전한 이론이 완성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관심을 보였던 부분은 "정치의 독립" 이었다. 즉 (일본편이 된다는 가정아래에)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주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에서, 동등한 수준의 연맹을 제안했다는 소식에 중국인들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동아연맹운동은 빠르게 중국으로도 확산되었고, 이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는 물론이요, 친일 세력이었던 신민회가 있던 임시정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앞에서 보았던 머우빈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것있었는데, 머우빈은 "중국의 자유독립" 과 "동아신질서" 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머우빈을 비롯한 동아연맹운동 세력들은 1940년 초중반에 중국 곳곳에 동아연맹운동 지부를 세웠고, 왕징웨이도 일본으로 부터 자신의 정권 영향력을 높히기 위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렸다. 1940년 12월의 국민당(왕징웨이) 3중전대이후 부터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동아연맹운동을 주도해서 이끌게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의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했다.
"동아연맹은 동아 각 민족이 각기 자유독립의 입장에서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며, 그 조건은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융합이다" - 왕징웨이, 1940년 11월 동아연맹중국동지회 결성식에서.
(본래 정치독립은 동아연맹론에서 가장마지막에 언급되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제일 처음에 언급했다. 이를 통해 왕징웨이가 추구하고자 했던 바를 알수 있다.)
화북정무위원회 정문의 모습, 왕징웨이정권의 깃발이 그대로 걸려있다.
게다가 왕징웨이 정권의 지배에 있고 왕징웨이 정권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화북정무위원회에서는 그대로 사용했으나, 속에서는 왕징웨이정권에 반대하고 있었다. 화북정무위원회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일본 세력과 친일세력은 점차 일본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동아연맹운동이 점점 왕징웨이 정권 내에서 확산되면서 동아연맹운동 또한 화북에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신민회는 화북지역의 유일한 정치단체였다. 하지만 동아연맹운동이 화북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더이상 신민회는 화북지역의 완전한 지배자가 아니게 되었다.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은 동아연맹운동을 이용해 국민당을 화북에 확산시키길 원했다. 그렇기에 신민회 측에서는 화북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아연맹운동과 이와 함께 성장하는 왕징웨이의 국민당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일본에 대한 완전한 종속을 기본전제로 했던 신민회에게 "정치적 독립" 을 이야기하는 동아연맹운동과 국민당은 반가울 수 없었다. 심지어 동아연맹운동측에서는 "신민회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 라면서 신민회를 동아연맹운동에 흡수 시켜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신민회측과 더더욱 날을 세웠다. 이런 환경속에서 신민회는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동아연맹운동에 더더욱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신민회도 가만히 있지않고 1941년 12월에는 화북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寧次) 북지나방면군 총사령관은 "신민회육성대강 (新民會育成大綱)" 을 발표한다. 신민회 육성대강에는
"국민당과 동아연맹은 어디까지나 동지익우(同地益友)로서 사상과 정신을 함께하지만, 신민회와 국민당은 어디까지나 동등한관계이지 종속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라면서 국민당과 동아연맹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또한
"현재 국민당이 화북에 진출하려는 것은 자신의 본분인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을 소홀히 하는 것이며 이는 결코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라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화북에 진출할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왕징웨이의 국민당은 화중과 화남지방으로 충분하다면서 화북에서 신민회의 권위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다.
이후로도 신민회와 왕징웨이측은 계속 신경전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견제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1942년
10월 27일에는 "신민회 신강령 (新民會 新綱領)" 을 발표하게 되는데, 신강령은 다음과 같다:
신민회 신강령 (新民會 新綱領)
1.신민정신을 발전시킨다.
2.화평반공을 실현한다.
3.국민조직을 완성한다.
4.동아민족을 단결시킨다.
5.동아신질서를 건설한다.
일단 구호가 굉장히 간단해진것이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화평반공을 실현한다" 와 같은 구호에서 국민당과 왕징웨이 정권을 용인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동아신질서를 건설한다" 라는 구호와 "신민정신 (삼민주의가아닌) 을 발전시킨다" 와 같은 구호는 아직까지 신민회가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거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신강령을 소개하는 기사에도 "제 5조는 일본과 중국이 한몸이 되어 신세계를 건설한다라는 의미" 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신민회의 3대째이자 마지막 깃발. 亞를 형상화한 글자가 중앙에 들어가있다. (1943년부터 사용)
. 1943년 3월 3일, 신민회는 새로운 깃발을 공개했다. 이는 3대째 사용된 깃발로서 해체시까지 사용되었다.
이 깃발 이전에 이를 위한 과도기적 깃발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 과도기적 깃발이 언제사용되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좀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3세대와 비슷한 형태를 띄지만 다른 글자가 적혀있는 신민회 깃발의 모습.
1943년에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국가는 전시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지난 포스트에서도 이야기했듯 1943년은 신국민운동 (新國民運動) 이 가장 강력하게 진행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신국민운동에 대해 궁금하다면 : 여기를 클릭)
지난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은 이 신국민운동의 실천을 자신의 영향력이 약한 신민회를 제어할수 있는 또다른 기회로 보았다. 신민회가 아무리 국민당에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앞에서 오카무라 야스지가 이야기했듯 결국은 동지익우 (同志益友) 관계에 있었기에 신민회도 어쩔 수 없이 신국민운동의 노선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왕징웨이쪽의 정책을 실행할 수 밖에 없게 된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번에도 신민회를 제대로 자신의 영향권으로 편입할 수 없었다. 일본군을 비롯한 기존의 강경한 신민회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국민당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신민회측에서 더더욱 손을 썼는데, 이는 바로 "왕징웨이를 신민회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기" 였다. 신민회는 1943년 4월 2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참전하면서 중지(中支)와 북지(北支)의 일체화는 이제 필수조건이 되었다면서 두 지역의 통합을 위해 왕징웨이를 신민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왕징웨이가 이를 받아드림으로서 이 시점에서 신민회는 이제 완전한 왕징웨이의 조직이 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직은 명예회장으로서 큰 역할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왕징웨이가 신민회 명예회장으로 임명되고 왕징웨이가 이를 받아드림으로서 "신민회의 존재이유가 정당화" 되어버리는 역효과를 낳아버리면서, 결과적으로 왕징웨이는 이번에도 겉으로만 주도권을 장악한것 처럼 되어버렸다.
신민회에서 발급한 신분증명서, 1945년 6월에 만든것으로 전쟁말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후 1943년이 끝나갈 무렵, 왕징웨이가 주도했던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가 쓰러지고, 전황이 나날히 악화되면서 힘을잃고 그의 국민당과 정부가 동시에 힘을 잃었듯 신민회 역시 일본의 패배가 점점 확실시 되면서 약화 되어갔다. 신민회 또한 이후 세를 불리지못한 채 점점 축소되어갔다가 일본이 패망하면서 신민회도 함께 사라졌다. 참고로, 신민회의 중요간부였다가 동아연맹의 주요간부였던 머우빈은 1945년 3월 자신은 1943년 다시 변절하여 장제스 충칭정권과 연락하고 있고 장제스의 밀명을 받고왔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측에 중국과의 종전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이 협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아직까지도 머우빈이 실제로 장제스 정권측으로 다시 변절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신민회의 성격을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했었던 것은 신민회는 왕징웨이 정권 이전에도, 이후에도 화북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되지 않는 조직이었다. 오늘 포스트에서 신민회가 행한 여러 활동들에 대해서 소개했지만, 이는 극히 일부분으로, 기록을 찾기 어려운 활동들도 훨씬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신민회가 어떤조직이었는가, 어떤특징을가지고 있는가를 알기에는 이정도 서술이어도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오늘의 서술속에서,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권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지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이름바 "가짜정권" 으로 불리는 조그만한 정권속에서도 치열한 정치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후에 왕징웨이정권 내에서의 치열한 정치싸움을 더 이야기해보고싶다.)
또한 신민회는 왕징웨이에게 맞설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조직이었다. 동시에 여러가지 흥미로운점을 제공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왕징웨이 정권 수립이후 더더욱 진행된 보수화, 왕징웨이 정권의 동아연맹운동의 등장으로 발생한 조직내의 이탈등 왕징웨이와 신민회의 견제관계는 근 3년간 지속되었다. 충칭입장에서는 가짜정권에서 가짜조직끼리 싸우면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는 이 모습을 어떻게 봐라봤을까.
[출처]
윤형진, 「점령지 통치와 주민조직 - 북경(北京)의 신민회(新民會) 직업분회를 중심으로 -」, 『史叢 93』 , 2018
菊地俊介, 「日本占領下華北における新民会の青年政策」, 『現代中国研究 第 26 号』, 2015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2009
鞆谷純一, 日中戦争下 北京における抗日図書の接収 -中華民国新民会の活動中心に」, 『図書館史中国 第 57 号 』, 2006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매일신보 1942년 10월 27일자 / 1943년 4월 3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청소년조직관련사진 :http://codh.rois.ac.jp/north-china-railway/search/metadata?text=%E6%96%B0%E6%B0%91%E4%BC%9A
화북정무위원회 사진 : https://kknews.cc/zh-mo/history/xjevyqq.html
오색기 / 장옌칭 : 위키피디아 중문판 각각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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