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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계림호 (鷄林號) 이야기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명인 신용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신용욱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신용욱 (愼鏞寅, 1901~1961) , 그는 안창남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비행분야를 개척한 이중 한명이었다.

신용욱은 식민지 조선에서 항공분야를 개척한 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 아브로식 제 504호 K형 타이거호) 그는 1927년 여의도에 그의 비행기를 이끌고 착륙하여 아직 '비행' 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조선 민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최초의 비행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에 안창남이 1922년 비행을 한바 있다.)


그는 1930년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경성을 구경하는 유람비행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36년, 조선 최초의 민간항공사 신항공사업사 (愼航空事業社) 를 설립해 상업적 비행 운행을 시작했다. 즉 그는 조선 최초의 항공기 비행사는 아니었지만, 조선 최초의 항공기의 상업화를 이뤄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항공사업사는 해방이후 대한국민항공사를 거쳐 대한항공 (大韓航空) 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곳곳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자신의 항공기를 이용해 운행을 게시했다. 우편이나 화물, 승객까지 가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제국의 거대 항공사들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만이 운영하고 있던 항공사업에 조선인도 참가하게 되었다는데에 의미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그의 회사와 비행기 또한 전쟁에 동원되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전쟁을 위해 협력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한국 항공사업의 시초이자 해방이후 한국 항공사업에 성장에 기여한 바는 무시할 수 없으나, 그가 일제 시절 그의 회사와 비행기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였기에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신용욱은 1940년 왕징웨이 (汪精衛) 가 이끄는 신중앙정부 (왕징웨이정권) 이 설립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비행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항공기들은 조선반도 밖으로 비행을 한 경험이 없었다. 즉 단거리 비행경험만 존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미 일본의 거대항공사들은 도쿄와 난징같은 장거리를 연결하는 노선을 이미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H6K와 같은 거대 비행정을 이용해 일본과 남방을 연결하는 노선까지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용욱의 신항공사업사는 아직 조선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축하비행은 왕징웨이의 신정권 수립을 축하함과 동시에 조선의 항공업계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길지 않았기에 일본의 대형항공사들 처럼 한번에 난징까지 날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만주-중국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번의 착륙과 정비, 주유 과정을 겪어야 했다.

계림호의 비행기록, 앞에서 서술하였듯 그는 비행기의 한계로 여러지역을 경유하는 일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기 (愛機) 인 비치크래프트 B-17 (Beechcraft Model 17) 모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사용한 비치크래프트 모델 17 B는 항속거리가 1,078km에 불과한 모델이었지만, 당시 제대로 된 항공기 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높은 성능의 항공기였다.

이 4인승의 이 항공기를 신용욱 본인과, 항공기를 정비할 고준식 (高準植) 이 동행하여 두명이 탑승하여 가기로 결정되었다.




신항공사업사의 비치크래프트 B-17 기체, 이 J-BAOI 이라는 식별명이 붙은 이 기체가 이후 계림호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같은 비치크래프트 기체고 , 밑의 계림호 사진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1940년 3월 16일 신용욱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축하비행 계획을 밝히고, 조선총독부에 이를 위한 비행허가를 요청했다. 다음날 총독부에서는 그에게 허가를 내려주었고, 23일에는 미나미 지로 (南次郎) 조선 총독에게 이 축하비행에 사용될 기체의 이름도 하사받았다. 미나미 총독은 이 비행기의 이름을 과거 신라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일본에서 조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용어중 하나였던 계림 (鷄林)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계림호의 모습을 재현해보려 했다 , 도장은 녹색이었던것으로 추측된다. 계림 밑의 글자는 세글자로 추정되는데 한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출발 하루전인 24일에는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의 안전을 위한 비행안전기원제까지 개최되었다. 당시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주요 신문에서 다루어졌음을 보면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음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3월 25일 오전 9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많은 인사들의 환영속에 계림호는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첫 목적지였던 봉천(奉天) 으로 향했다. 이날 계림호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성립 축하를 위한 축전이 함께 실려서 난징으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30분이 되지 않아 개성을 지났고, 한시간이 되지 않아 평양을 지나 서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륙으로 부터 3시간이 안되는 오전 11시 55분, 계림호는 첫 목적지였던 봉천(펑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림호의 이동경로, 항속거리의 한계로 만주를 통해 중국대륙으로 들어가야 했다.

봉천에 도착한 계림호는 만주국협화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환영을 받고 환영식에 참가했다. 이후 신용욱은 봉천 마로만 (馬路灣) 육군 병원을 방문해 입원중인 병사들을 위로 했다. 이렇게 행사를 마무리하고 그는 금주(진저우) 로 가서 첫 째 날을 마무리 하려 했으나 진저우 비행장의 문제로 인해 이루지 못하고 봉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봉천에서 바로 북경(베이징) 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둘째날 (3월 26일) 오전 9시 계림호는 봉천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5시간 가량이 지난 오후 1시 45분이었다. 북경에서도 그는 계류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제남(지난)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난징에 도착한 계림호와 신용욱 일행, 계림호의 실제모습을 알 수 있는몇안되는 사진 자료이다.

셋째날인 3월 27일 오전 10시 계림호는 제남으로 향했다. 제남은 그들의 경로에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기름을 재보급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시쯤 제남에 도착한 제남호는 20분가량 이곳에서 가솔린을 주유하고 , 오후 1시 다시 난징으로 향했다. 난징으로 향하는 길에 쉬저우 상공을 잠시 선회한 뒤 마침내 출발 55시간만에 계림호는 신정권의 수도 난징에 도착했다. 3월 27일 오후 4시 10분 경 계림호는 난징 상공에서 선회비행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고 4시 40분 난징에 착륙하면서 계림호의 축하비행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난징시민들의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환도식전 방문객들을 위한

난징의 수도반점 (首都飯店) 으로 향했다.


이 북경-남경 비행 과정에서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기를, 자신이 북경을 떠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일본 언론사들의 비행기들도 비슷한 시간 북경에서 이륙해 난징을 향해가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용욱측이 당시 바람의 방향이 불리했음에도 일본측보다 더 빨리 난징에 도착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일본과 조선의 첫 항공레이스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곳에서 신용욱은 조선의 언론인 유광렬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신용욱측이 27일, 유광렬 측이 28일에 난징에 도착함에 따라 신용욱 측이 하루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신용욱은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의 기자단 일행과 함께 28일 오전 난징 중산북로의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방문해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을 회견하고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유광렬의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이후 숙소로 돌아온 신용욱은 환도식전 준비를 하는 유광렬을 두고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이때 유광렬의 회고에서는 "나도 가고싶었는데 식전준비때문에 못가 아쉬웠다" 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유광렬을 두고 28일 오후 2시 난징에서 이륙해 30분뒤 상하이에 착륙했다. 이때 상하이에 거류하고 있는 조선인협회약 600명 가량이 그를 마중나왔다고 한다. 조선인협회를 비롯한 대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상하이에 도착한 신용욱은 조선인협회장에게 꽃다발을 전달받고, 아스트호텔 (The Astor House Hotel, 현재 푸장반점, 浦江饭店) 의 환영식에 참가했다.




신용욱이 묵었던 아스트 호텔, 현재도 푸장반점이라는 호텔이 위치해있다.

다음날인 29일 신용욱은 다시 비행기를 몰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인 3월 30일의 왕징웨이 정권의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신용욱은 유광렬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했다.


[ 환도식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 환도식전에서 왕징웨이의 선언문인 '환도선언'은 여기서 : ]



환도식전을 끝내고, 신용욱은 4월 1일, 유광렬과 함께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임광렬과 함께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유일한 조선인 기자' 라는 유광렬의 존재를 흥미롭게 여겨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은 일본 기자단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왕징웨이와의 식사에 신용욱 또한 참가했다.


[ 미나미지로 총독의 축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왕징웨이는 "조선에서 온 비행사" 였던 신용욱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비행사 신용욱을 소개했고, 왕징웨이는 그에게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말을 건냈다고 전해진다. 왕징웨이의 신용욱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어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질문하자 신용욱은 웃으면서

" 편도로 날면 다섯시간 정도 걸립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대일본항공회사 (大日本航空會社)의 팜플렛에 따르면 경성과 거리가 조금더 만 후쿠오카에서 난징까지의 비행을 6시간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이와 비슷하거나 더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난징 직행 항공편은 없었기에 신용욱 본인도 잘 알지 못 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 이광렬과 왕징웨이 + 신용옥의 식사시간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서 :]


이렇게 왕징웨이와의 회담을 마치고, 신용옥은 이틀이 지난 4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다시 조선을 향해 이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국과정에서는 그의 계림호가 4인승이었던 만큼, 조선의 기자 유광렬과 다른 기자를 포함해 4명을 채워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돌아오는 과정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여의도 비행장에 계림호가 돌아온 것은 출발한지 8일이 지난 4월 11일이었다. 가는데에는 3일만에 갔지만 돌아오는 과정에는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복귀가 지연되면서 8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신용욱 일행은 이렇게 환영속에 조선에 돌아왔고, 이후 일행은 미나미 지로 총독을 독대하여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4월 14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신국민정부환도 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 영화대회' 에 참가 하게 된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신용옥의 《경축황군위문비행의인상》강연을 볼 수 있다.

신용욱은 매일신보에 유광렬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행기를 신문에 연재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황사로 인한 먼지라고 이야기하고,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육십이 다되어 가는 나이인데도, 그 눈매는 초롱하다고 하고, 중원에서 큰인물이 난다던데, 왕 주석이 그렇다라고 왕주석에 대해 극찬했다. 이 기록은 앞에서 소개드린 유광렬의 기록과도 상당 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해 이런 왕징웨이와 조선인 인사들과의 교류 기록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1940년 4월 1일 왕징웨이에게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는 신용욱, 이후 그는 왕징웨이와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축하비행을 통해 조선과 왕징웨이정권의 교류, 조선 항공산업에 기여했다는 공여를 인정받아 총통부 체신국과 방호과로 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신용욱은 지난번 소개한 임광렬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과 식민지 조선의 인사들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뜻 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인물의 기록을 통해 임광렬의 친일활동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듯, 신용욱 또한 친일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다루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태평양전쟁시기 항공기를 이용한 친일협력만 부각되지 이렇게 태평양전쟁 이전의 보였던 친일활동은 부각하지 않았다. 대한항공도 자신들의 시초를 신항공사업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지만 이러한 활동은 부각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지 않았던 신용욱의 새로운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3월 15일~6월 11일자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40년 3월 17일자 ~ 4월 11일자


왕징웨이와 신용욱의 악수 사진 / 계림호 사진


신용욱의 사진 (朝鮮日報)


계림호로 추정되는 기체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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