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란으로 159개 검색됨
- 유광렬 (柳光烈)의 왕징웨이와의 회견 (1940.4.1)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언론인 유광렬의 보도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유광렬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유광렬 (柳光烈, 1899~1981) , 태평양전쟁 시기 친일 행위를 하여 지금까지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아있는 그는 1940년 3월,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편집국장으로 난징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왕징웨이 정권의 환도식전과 왕징웨이와 인터뷰를 하게된다. 유광렬 (柳光烈, 1899~1981) 은 파주에서 태어나 1919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每日新報) 에서 기자로서 언론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동아일보의 창간에 합류하여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1940년 그는 자신이 청음으로 기자활동을 하였던 매일신보로 돌아와 그곳의 편집부장이 되었고, 편집부장인 그는 1940년 3월 30일의 난징국민정부 환도식전에 참가하여 이를 취재하게 된다. 그는 이후 매일신보에 자신의 난징취재기를 연재하였는데, 이는 4월 3일자 매일신보 1면의 [重慶側의 迷夢打開 全面的和平에 邁進-南總督, 中村軍司令官 메시지에 感謝-柳本社特派員, 汪氏와 會見] (중경측의 미몽타개, 전면적화평에 만진 - 미나미 총독, 나카무라 군사령관 메시지에 감사- 유 본사 특파원, 왕씨와 회견) 이라는 기사에서 자신을 비롯한 기자단과 왕씨의 회견내용을 수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는 같은 날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다른 조선의 신문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는데, 이는 유광렬이 난징에 파견된 "유일한 조선인 기자" 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매일신보는 이러한 유광렬의 취재기를 단독으로 보도 할 수 있었다. (매일신보를 제외한 여러 조선의 언론이 이를 보도하러 난징에 왔지만, 이들은 유광렬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기자였다.) 또한 그는 1940년 4월 15일에 그는 태평통 부민관 (경성부민관을 의미) 에서 열리는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에 직접 참가하여 자신이 난징에서 취재한 바를 강연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임광렬의 《국민정부 환도식전 참관의 관상 》 이라는 강연제목을 볼 수 있다. 또한 4월 18~19일자 매일신보 1면에서 그는 자신의 환도식전 취재기록을 다시 한번 연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유일한 조선인 기자였던 임광렬이 난징에서 겪었던 일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조선인 기자의 임광렬의 취재기를 토대로 왕징웨이 정권 성립 당시를 묘사해보려 한다. ( 행사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제가 이전에 작성하신 글을 보고 오시면 더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B%82%A8%EA%B2%BD%ED%99%98%EB%8F%84%EA%B9%8C%EC%A7%80%EC%9D%98-%EC%9D%BC%EC%A3%BC%EC%9D%BC-%EB%AC%B4%EC%8A%A8%EC%9D%BC%EC%9D%B4-%EC%9E%88%EC%97%88%EB%82%98-1940-03-23~03-30 )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일행은 28일 이전에 난징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확한 도착날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27일 혹은 26일로 생각된다. 임광렬을 비롯한 일행은 난징의 수도반점(首都飯店) 을 숙소로 이용했다. 임광렬의 글에서 일본과 각국의 기자단들 또한 수도반점을 숙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아, 일본 혹은 왕징웨이정권측에서 수도반점을 일종의 프레스센터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8일 (木)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일행은 중산북로에 있는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도주의사항에 대해 들은후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를 회견하고 계림호(鷄林號)를 타고 이미 27일 난징에 도착했던 신용옥 (愼鏞鈺) 신항공사사업사장 과 함께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사장,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니시오 사령관은 이를 일일이 신중히 읽으면서 ,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미나미 지로 총독각하와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 각하로 부터 이런 간곡한 말씀을 주시다니 감사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또한 매일신보 사장으로부터 격려의 말씀을 주시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욱 반도민중의 총후봉공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라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이후 유광렬과 신용옥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후 신용옥의 계림호는 상하이로 향했다. 임광렬은 자신의 글에서 자신도 함께 상하이로 동행하고 싶었으나, 다음날 있을 국민정부환도식전의 취재준비가 미비할 것을 우려하여 함께 가지 않았다. 3월 29일 (金) 이 시점에서 이미 프레스센터 수도반점은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뿐만 아니라 중국 현지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기자단들이 대거 모여있었다. 이 시점에서 임광렬은 걱정을 했는데, 총사령부 보도국에서 왕징웨이의 환도식전에 참가할 인원을 300명으로 제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230명의 기자가 이를 보도할 수 있었다. 일본언론 (조선포함) 100명, 중국 60명, 기타국가 70명이 배정되었다.) 보도국에 따르면 각 언론사에서 1명정도는 대체로 수용이 될 것이라고 했으나, 문제는 보도국에서 3월 22일의 중앙정치위원회 회의를 참관한 언론에 우선권을 부여하기로 결정되었고 또한 100명으로 제한된 일본언론의 참가권의 대다수가 이미 일본 국내의 대형언론의 고정으로 할당됨에 따라 남아있는 참가권은 단 4장. 이로 인해 일본 국내기자들도 대다수가 참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라고 하니 조선에서 출발했으며 중앙정치위원회 회의 이후 난징에 도착한 임광렬을 포함한 매일신보 기자단은 이를 취재하지 못할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에서부터 모처럼 먼길을 오신 조선기자들에게 편의를 드리겠다" 다행히도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언론들의 사정을 들은, 특히 유광렬이라는 조선인 기자가 취재를 왔다는 이야기에 보도국에서는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언론의 기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고. 이로인해 유광렬과 다른 기자단은 무사히 내일 있을 환도식전을 참관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30일 (土), 국민정부 환도식전 당일날 보도국에서 8시 반까지 난징 계림사(鷄林寺) 안의 고시원 (考試院) 앞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임광렬과 기자단은 자동차를 몰아 계림사로 향했다. 이날 아침에는 봄비가 내렸는데,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미 계림사에는 수많은 기자단의 차량들이 모여있었다고 한다. 계림사 안에서는 친위대들이 도열을 하며 기자단들을 환영하고 있었고, 기자단들은 계림사의 "천하위공 (天下爲公)" 이라는 쑨원의 필체가 적힌 고시원 정문을 통과하여 행사장으로 향했다. 실제 계림사 고시원의 정문모습. 천하위공 (天下爲公) 이라는 쑨원의 필체가 세겨져 있다. 오전 9시가 되자 현장에서는 3발의 큰 폭죽이 터졌고, 군함 하이스이 (海綏) 에서 예포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왕징웨이가 고시원 정문 뒤 광장에 도착했다. 왕징웨이와 요인들은 새로운 왕징웨이의 화평반공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 (和平反共建國靑川白日萬地紅旗)의 국기게양식을 가지고, 임광렬을 비롯한 현장의 모두가 중화민국의 국가를 제창했다. (이때 어떤 버전의 노래가 사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에서는 기존의 괴뢰정부들이 사용하던 경운가 (卿雲歌) 가 울려퍼졌다고 서술했는데, 국민정부의 계승을 이야기했던 왕징웨이 정권이 이러한 경운가를 사용했다고는 생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정부의 국가 (삼민주의가) 혹은 국기게양시에 사용하는 (국기가) 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광렬은 이때 자신의 글에서 왕징웨이가 이때만 하더라도 긴장을 많이 했는 모양인지 왕징웨이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서술했다. 이후 쑨원의 묘가 있는 중산릉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왕징웨이 정권의 각 부원장의 임명식을 가졌다. 그리고 행사 일동은 바로옆의 신설된 난징 국민대회당의 중앙강당에서 오전 10시 연설을 시작했다. 이가 바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환도선언" 이었다. [환도선언에 관한 내용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A%B5%AD%EB%AF%BC%EC%A0%95%EB%B6%80-%ED%99%98%EB%8F%84%EC%84%A0%EC%96%B8-%E5%9C%8B%E6%B0%91%E6%94%BF%E5%BA%9C-%E9%82%84%E9%83%BD%E5%AE%A3%E8%A8%80-1940-03-30 ] 그의 서술에 의하면 환도선언을 읽을 때 왕징웨이는 이전의 국기게양식을 비롯한 식전행사보다 더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인사들은 대회당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가졌다. 이때의 분위기를 임광렬은 "매화꽃이 만개했으며, 두마리의 비둘기가 화평을 환영하듯 날아갔다." 라고 묘사했다. 국민대회당에서의 환도선언 발표가 끝나고 11시부터 별관에서 왕징웨이와 기자단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때 200명의 기자가 기자회견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유광렬도 앞에서 이야기했듯 보도국의 배려로 이곳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통역은 저우포하이가 맡았다.) 왕징웨이는 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정부 경제정책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이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 중일 양국이 이로부터 협력하여 동아의 신기원(新紀元) 을 짓게 되었음은 (기자) 여러분들이 이미 본 바이며, 신중국의 탄생도 이미 여러분들이 본바이다. " - 왕징웨이와 기자단의 회견 中 임광렬은 이러한 기자회견에서 왕징웨이의 버릇을 하나 찾아냈는데, 환도식전을 읽을 때도 안경을 쓰지 않았던 왕징웨이가 기자회견에서는 안경을 쓰고 나와선 계속 말을 하는 중에 안경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임광렬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행동을 그의 버릇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임광렬과 기자단은 숙소로 돌아와 조선의 신문사 본부에 보낼 전보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서술에 따르면 이때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을 축하하는 거리행렬이 그의 숙소 근처를 지나갔다고 한다. 임광렬은 창문을 넘어 이러한 행렬을 봤는데, 이 행인들의 수가 실로 수만은 되는 것 같으며 끝이 없어 보인다고 서술했다. 4월 1일 (月) 임광렬과 매일신보 기자단은 4월 1일에 추가로 진행된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번 30일의 회견보다는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후 4시, 임광렬과 기자단은 30일 기자회견을 했던 별관에 도착했다. 건물안의 정원을 지나 방에 도착했는데, 이방에는 여러개의 그림이 있었고, 왕징웨이가 앉을 중앙의 테이블에는 아직 피지 않은 복숭아꽃이 도자기속에 있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기자대표가 기원 2600년 (1940년) 을 기념하는 축주를 전달했고, 이후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했다. 이후 여러 언론의 기자단이 모여있던 큰 방에서의 회견은 끝이나고 각각의 언론이 각각의 축전을 전달했고 이후 왕징웨이는 매일신보의 기자단을 조용히 별관의 식당으로 초대했다. 왕징웨이가 일본의 거대언론도 아닌 조선의 언론을 초대한데에는 매일신보 기자단이 먼 곳에서 온 것에 대한 감사인사로 생각된다. 또한 임광렬이라는 조선인 기자가 있었다는 특징도 있었다. 왕징웨이는 식당에서 임광렬을 포함한 매일신보 기자단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권했다. 임광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징웨이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의 왕징웨이를 세기적 위인(偉人) 이라 평가했고 이러한 위인 과 가까이 할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했다고 자신의 서술에서 밝혔다. 왕징웨이는 이자리에서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에 대한 감사를 기자단앞에서 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들께서 직접 보신바와 같이 국민정부의 환도는 선언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선언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전면 화평을 실현하여 중경측으로 하여금 용공항일 (容共抗日) 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 "나는 우선 우리의 노력이 미치는 구역에서 화평을 실현하여 "화평건국" 이 가능하다는 나의 굳센 신념을 보여주려 합니다. 우리의 화평건국과 중경측의 민족보전은 다른말같지만 사실 같은 말입니다. 이제부터 나와 정부직원들은 이를 위해 전력을 다해 집중할것입니다. " "일본의 흥아론이 정당한 이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한것은 저의 일생에 있어 잊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국민정부의 환도에 대하여 정중한 축전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도 직원일동과 함께 일치협력 (一致協力) 하여 여러분들의 뜻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자리가 준비는 변변치 않지만 다같이 정답게 가슴속에 품어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왕징웨이는 기자단에게 이렇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기자단과 함께 만찬에 참가했던 신용옥을 소개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왕징웨이는 이렇게 물었다.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하자 신용옥은 편도로 비행할시 다섯시간 이면 갈 수 있다고 회답했다. 이후 유광렬이 직접 왕징웨이에게 직접 자신이 환도식전의 연설에서 감동받은 부분을 이야기했다. "각하께서 삼민주의의 민생주의(民生主義) 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공자의 대동주의 (大同主義) 라는 말에 대하여 조선의 청년들은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이전부터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기에 각하의 말에 더더욱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노력에 힘입어 대동주의는 동양에 더더욱 확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에 왕징웨이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민생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동양에는 동양고유의 정신이 있습니다. 조선의 청년들이 이러한 옛 정신을 존중한다는 이야기에 기쁜 마음을 금할수가 없군요. 이러한 혼란의 세계 속에서 도의(道義) 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광렬은 자신의 서술에서 왕징웨이의 이런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왕징웨이를 눈빛은 총명하며, 목소리는 힘이있고, 열정이 있는 모습이 중국의 오억인구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다웠다고 평가했다. 그날의 점심 메뉴는 "샌드위치" 였다. 왕징웨이는 직접 큰 접시의 샌드위치들을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광렬은 이러한 샌드위치를 나누어주는 왕징웨이의 손을 보며 "몸은 그렇게 가는 사람이 손가락은 왜이리 굵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샌드위치를 먹고 차를 마시고 난후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를 직접 유광렬에게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광렬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식찬을 마무리 하면서 기자단의 마츠모토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선은 합병이후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조선과 일본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흥아정신에 불타고 있다" 라는 말에 왕징웨이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왕징웨이가 이러한 기자의 말에 답변이나 맞장구를 치지 않고 단순히 끄덕거린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이렇게 25분의 사실 다과회에 가까운 식사시간이 끝나면서 매일신보 기자단의 회견은 끝이 났다. 왕징웨이는 별관 정문 앞까지 나와 고개까지 숙이면서 친절히 기자단을 배웅하였다고 한다. 임광렬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친절을 높이 평가하고 왕징웨이와의 만남을 "일생 뼈속까지 감격한 일" 이라고 서술했다. 임광렬은 해방이후 자신의 과거 친일행적을 숨기기 위해 자신은 1940년 매일신보에서 미움을 보여 "해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일본기자들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면담시간을 가진 것에 대해 일본기자들의 미움을 샀고, 이로 인해 해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행적을 1면에 당당하게 특집으로 게재 했다는 점, 친일행각으로 보이는 행동이 오히려 1940년 매일신보를 떠난이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임광렬이 1940년 매일신보를 떠나야했던 것은 압박으로 인한 해임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사정, 더욱 발전된 친일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광렬의 이러한 취재와 면담은 일종의 친일행위였지만, 식민지 조선과 왕징웨이 정권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몇되지 않는 연결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광렬의 서술이 親日, 親 왕징웨이정권적으로 고의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광렬의 취재기가 다른 언론의 왕징웨이정권 환도식전을 다루는 기사와 크게 다른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신뢰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4월 3일자 / 4월 18~19일자 https://nl.go.kr/newspaper/index.do 유광렬의 사진 http://dongne.donga.com/2018/09/28/%E6%9D%B1%E4%BA%9E-100%EB%85%84-%E6%9D%B1%E5%8F%8B-100%EC%9D%B8-%EC%9C%A0%EA%B4%91%EB%A0%AC/ 계림사 정문의 사진 - Wang Jingwei and Lin Baisheng Photograph collection https://exhibits.stanford.edu/wangjingwei/browse/lin-baisheng-410541fb-2e47-4020-9ae1-8057c4ddb318
- 구축함 하이스이 (海绥)
구축함 하이스이의 일생, 48년 퇴역전까지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청은 이미 이전부터 하이륭급 (海龍級)의 구축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이 의화단 운동에서 서양열강의 연합국에게 패배하면서 이 하이륭급 구축함 4척은 대영제국,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프랑스에게 나포, 그들의 해군에 편입되어 잃게 되면서 청 정부는 1909년 새로운 구축함을 갖추기 위한 계획에 나서게 되었다. 청 정부는 새로운 구축함의 급명을 창펑급 (長風級) 이라 정하고 독일제국의 시하우-베르케 조선소에 390톤급의 구축함 3척을 주문하게 된다. (본래 1척을 계획했으나 1911년 2척이 추가되었다. ) 그리고 이야기해볼 2번함인 푸보(伏波)를 비롯해 1번함에는 창펑(長風), 3번함에는 페이운(飛雲) 라는 이름을 붙혔다. 하지만 이 창펑급 구축함 3척은 모두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한 뒤에 중국으로 인도되었다. (1번함이었던 창펑은 청 멸망이전에 완성되었으나, 인도가 늦어져 인도가 이루어진 것은 중화민국 수립이후였다.) 그렇기에 청을 이은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이들을 그대로 인수하여 그대로 운용하게 되었다. 푸보를 포함한 창펑급 구축함 3척은 1912년 11월 7일 정식으로 중화민국 해군에 편입되었는데, 편입 당시에는 푸보를 비롯한 3척의 구축함 모두 청대 계획되었던 이름을 유지하려 했으나 당시 같은 이름의 배들이 존재해 중복되어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3척의 구축함 모두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할 2번함 푸보는 지엔캉 (建康,건강) 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배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배의 사진이야기부터 하고 시작을 하고싶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중문판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진을 푸보의 사진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中國新海軍插圖 (중국신해군삽도) 의 자료로서 푸보를 묘사했다는 사진, 인터넷상에서는 이 사진이 유일하게 푸보를 비롯한 창펑급 구축함의 유일한 사진 자료인데, 필자는 이사진에는 의문을 표하고 싶다. 이는 중국신해군삽도가 1948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것, 또한 이시대에 이미 푸보는 지엔캉(建康)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이후라는것, 또한 동시대에 실제 푸보라는 배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푸보의 사진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청나라 말기의 창펑급 구축함 2번함 푸보가 아닌, 2차대전 승전이후 중화민국에 편입된 푸보라는 배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이다. 1947년 중화미국 해군에게 인도된 영국해군의 H.M.S.Petunia. 그리고 이배는 중화민국 해군에 인도된뒤 푸보(伏波) 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연돌을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위의 사진과 유사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점 때문의 중문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 푸보(창펑급 구축함 2번함의) 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은 이 1947년의 푸보의 사진이 잘못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음 사진을 보자. 1929년 촬영된 창펑급 구축함 3번함 퉁안(同安) 의 모습. 위의 두 사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모습이 실제 푸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이 사진이 오히려 푸보의 모습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작하기 전에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시작하고 싶었다. 아무튼, 1912년 지엔캉(建康) 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푸보는 계속하여 중화민국 해군에서 활동하게 된다. 쑨원의 호법정부가 탄생하면서 북양정부가 분열된 시점에서 지엔캉은 쑨원의 호법정부가 아닌 북양정부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북벌의 과정에서 지엔캉은 북양정부에서 탈출하여 국민정부의 국민혁명군에 합류했다. 이후에는 구축함의 역할보다는 어뢰를 주로 사용하는 어뢰유격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지엔캉을 비롯한 창펑급 구축함들은 이미 노후화 되어 구식으로 취급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지엔캉 역시 일본과의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다루었듯 이미 이전부터 지엔캉을 비롯한 창펑급 구축함은 크기도 작고 속도도 20노트밖에 나오지 않는 구식함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1937년 9월 25일, 지엔캉은 장인전투에 참가했다. 1번함이었던 창펑은 1932년 이미 사고로 침몰했고, 3번함이었던 퉁안은 중일전쟁 발발당시 칭다오에 있었기에 지엔캉 만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장인전투에서 지엔캉은 일본 항공기의 폭격으로 침몰하고 있는 순양함 이셴( 逸仙) 에 접근하여 이셴의 승무원들을 구조했다. 하지만 구조를 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지엔캉 역시 일본 항공기의 폭격을 받게 되었다. 지엔캉은 대공포조차 없는 구식 함선이었기에 가지고 있던 75mm 함포를 고각으로 사격하고 함 내에 구비되어있던 소총들까지 동원하여 일본 항공기에 대공사격을 가했지만, 안타깝게도 일본항공기의 공격으로 4발의 폭탄과 기총사격으로 침수되어 장강에 좌초되었다. 장인에서 일본 항공모함 카가(加賀) 의 공격을 받고 좌초된 중화민국 해군의 순양함 이셴 (逸仙). 지엔캉은 이셴의 승무원을 구조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일본 항공기의 공격으로 침수되어 좌초되었다. 이후 1938년, 일본은 수리함 아사히(朝日) 를 이용해 좌초된 지엔캉을 다시 인양하여 수리한다음1938년 7월 13일 수리를 끝내고 翆(야마세미) 라는 이름으로 일본해군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939년 12월 21일, 일본은 이 야마세미를 다시 유신정부측에게 제공하였다. 유신정부에서는 이배의 이름을 일본의 협조로 (協助) 바다를 (海) 평정한다 (绥靖) 라는 이유로 하이스이(海绥) 라는 이름을 붙혀 사용했다. 그리고 하이스이는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면서 이름을 유지한 채 그대로 다른 군함들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의 해군에 편입되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일이자, 중화민국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수도환도식전에 참가하게 된다. (수도환도식전에 관한 내용은 여기 와 여기 와 이곳을 참조) 3월 30일 오전 9시, 식전의 시작과 함께 폭죽 3발이 터지자, 하이스이는 환도식전이 열리는 난징 국민대회당 근처의 장강에서 정박하면서 축포를 21발 발포 했다. ( 일반적으로 국가원수를 대우할 때 21발을 발포한다. 국가원수였던 왕징웨이를 예우하기 위한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21발의 축포가 발사됨과 동시에, 식전 행사장에서는 군악대의 연주속에 왕징웨이 정권의 새로운 깃발인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 를 게양하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국기게양식 이후에는 왕징웨이의 환도선언이 발표되면서 정식으로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는 수립되었다. 즉, 하이스이는 왕징웨이정권의 시작을 끊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이스이는 이후 왕징웨이정권의 해군에서 몇 되지 않는 군함으로 활동하며 난징에 배치되어서 양쯔강 중하류를 경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위의 사진이자 중일전쟁당시 칭다오에 있던 3번함 퉁안도 좌초되었다가 일본에 노획되었다가 퉁춘(同春)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왕징웨이 정권의 해군에게 제공되었다. 결과적으로 창펑급 구축함 모두 왕징웨이 정권에게 제공된 것이다. 하지만 퉁춘은 왕징웨이 정권의 말기였던 1944년 11월 정도길(鄭道吉) 가 이끄는 항일 게릴라에 의해 파괴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끝나는 시점에서 살아남은 창펑급 구축함은 하이스이만이 남게 되었다. 이후 하이스이는 다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에게 반환되고 이전 국민정부시절의 이름 지엔캉(建康) 이라는 이름도 되찾았지만, 이시점에서 지엔캉은 너무나도 노후화가 된 함선이었다. 무장도, 엔진도 너무나 노후화 되었고 작점범위도 좁은 지엔캉은 결국 1947년 7월 퇴역하였다. 청나라의 구축함으로 설계되었으나 청나라를 겪지못하고, 일본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일본에 노획되어 본래의 이름도 잃은 채 괴뢰의 해군으로 활동하며 괴뢰정권의 시작을 알리고, 승리 이후 본래 이름을 되찾았으나 이미 너무나도 노후화되어버려 결국은 사라져야 했던 안타까운 함생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 중문판 위키피디아 伏波號驅逐艦, 長風級驅逐艦, 飛雲號驅逐艦 항목 (https://zh.wikipedia.org/zh-tw/%E4%BC%8F%E6%B3%A2%E8%99%9F%E9%A9%85%E9%80%90%E8%89%A6) 네이버 신문라이브러리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B6%95%ED%8F%AC%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3-01%22%2C%22endDate%22%3A%221940-03-31%22%7D) 퉁안호 사진 : https://kknews.cc/zh-hk/military/3yqo438.html 2대 푸보호 정보 : http://homepage.ntu.edu.tw/~yingshao/de0fupo.htm 2대 푸보호의 원본함 H.M.S.Petunia의 사진 : https://leithbuiltships.blogspot.com/2010/05/hms-petunia.html
- 일화공동선언 (日華共同宣言, 1943.1.9)
정식 명칭은 "전쟁완수 협력에 관한 일화공동선언 (戰爭完遂ニ付テノ協力ニ 關スル日華共同宣言)" 난징국민정부가 미영에 선전포고한지 한시간이 지난 시점인 1943년 1월 9일 11시, 일본과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난징정부가 공동으로 선언한것이었다. 선언문은 일본어와 중국어 두 언어로 작성되었다. (본 포스트에서는 일문 원어를 서술) 선언문은 일본측에서는 시게미츠 아오이 (重光 葵) 특명전권대사가 읽었고 난징국민정부측에서는 왕징웨이가 직접 읽었다. 전쟁완수 협력에 관한 일화공동선언 (戰爭完遂ニ付テノ協力ニ 關スル日華共同宣言) 대일본제국과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긴밀히 협력하여 大日本帝國政府及中華民國國民政府ハ兩國緊密ニ協力シ 미•영 양국에 대한 공동의 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에 米英両國ニ對スル共同ノ戰爭ヲ完遂シ大東亞ニ於 도의에 기반한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전반에 공정한 신질서를 道義ニ基ク新秩序ヲ建設シ惹テ世界全般ノ公正ナル新秩序ノ 초래하는 것에 공헌할것을 희망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招來ニ貢獻センコトヲ期シ左ノ通宣言ス: 대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공동의 전쟁을 완수하기 위해 大日本帝國及中華民國ハ米國及英國ニ対スル共同ノ戰爭ヲ完遂スル爲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신념으로 군사상, 정치상, 경제상 완전한 협력을 한다 不動ノ決意ト信念トヲ以テ軍事上、政治上及経済上完全ナル協力ヲ爲ス 昭和十八年一月九日即チ中華民國三十二年一月九日南京ニ於テ (쇼와 18년 1월 9일, 중화민국 32년 1월 9일 남경에서) 大日本帝國特命全權大使 重光 葵 대일본제국특명전권대사 시게미츠 아오이 中華民國國民政府行政院院長 汪 兆銘 중화민국국민정부행정위원장 왕 징웨이 (왕 자오밍)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는 이 일화공동선언을 토대로 租界還付及治外法権撤廃等に関する日本国中華民国間協定(조계반환과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 ) 으로 일본이 점령한 조계지를 반환받고 최외법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난징국민정부의 대 영미 선전포고는 이에 대한 댓가였다. 왕징웨이정권의 대영미 선전포고문은 여기로 : [출처] 일화공동선언 일문 원문 : http://gauss0.livedoor.blog/archives/12688211.html 『매일신보』, 1943년 1월 9일자, 1면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1943.1.9)
상하이공동조계 반환을 기념하여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서 발행한 우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이 협정을 근간으로 중국내의 조계지를 환수하고, 치외법권을 폐지할 수 있었다.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租界還付及治外法權撤廢等ニ關スル日本國中華民國間協定) 대일본제국정부 및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금일 발인한 '전쟁완수 협력에 관한 일화공동선언' 에 따라 중화민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취지에 기초하여 일화(日華)양국간의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고자 다음과 같이 협정한다. 제 1장 전관조계 (専管租界) 제 1조 일본국 정부는 현재 일본국이 중화민국에 소유하고 있는 조계행정권을 중화민국정부에 반환한다. 제 2조 양국 정부는 각각 동수의 위원을 임명하여 전조 (1조의 내용을 말함) 에 관한 상세항목을 협의하여 결정한다. 제 3조 중화민국정부는 전조 (2조의 내용을 말함) 에 의한 조계반환 실시후 해당 지역의 시정 등에 대하여 일본국 신민의 거주 , 영업 , 복지에 관해서는 적어도 이전의 정도를 유지한다. 제 2장 공동조계 및 공사관구역 (共同租界及公使館區域) 제 4조 일본국 정부는 따로 협의 · 결정하는 바에 따라 중화민국정부가 최대한 속히 상하이공동조계행정권 및 샤먼 구랑위 공동조계행정권을 회수하는 것을 승인한다. 제 5조 일본국 정부는 중화민국정부가 북경(북평) 공사관구역 행정권을 속히 회수하는 것을 승인한다. 제 3장 치외법권 (治外法權) 제 6조 일본국 정부는 현재 일본국이 중화민국에서 가지고 있는 치외법권을 속히 철폐하는 것을 결의하고 양국정부는 이에 관한 구체적인 안을 심의 · 작성하는 목적으로 (양국정부가 동수로) 전문위원회를 설치한다. 제 7조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국의 치외법권 철폐에 따라 자국영토를 일본국 신민의 거주, 영업을 위해 개방하고, 일본국 신민에 대해서는 중화민국 국민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전조 (6조의 내용을 말함) 의 전문위원회는 이에 관한 (7조의 내용을 말함) 구체적인 안도 같이 연구하도록 한다. 제 8조 본 협정은 서명한 날로터 실시한다. 우증거(右證據)로서 하명(下名)은 각본국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고 본 협정에 서명, 조인함. 쇼와 18년 1월 9일 중화민국 32년 1월 9일 난징에서 일어와 중국어로서 본문 두통을 작성함. 대일본제국 특명전권대사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 중화민국 국민정부 행정원 원장 왕징웨이 (汪兆銘) 왕징웨이 정권은 이를 근간으로 상하이공동조계를 비롯한 중국내의 조계를 반환받았다. (대부분의 조계가 일본의 동맹국이거나, 이미 일본의 점령상태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치외법권 철폐는 명목상의 요소로서 거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출처] 원문(일어) : https://ja.wikisource.org/wiki/%E7%A7%9F%E7%95%8C%E9%82%84%E4%BB%98%E5%8F%8A%E6%B2%BB%E5%A4%96%E6%B3%95%E6%AC%8A%E6%92%A4%E5%BB%A2%E7%AD%89%E3%83%8B%E9%97%9C%E3%82%B9%E3%83%AB%E6%97%A5%E6%9C%AC%E5%9C%8B%E4%B8%AD%E8%8F%AF%E6%B0%91%E5%9C%8B%E9%96%93%E5%8D%94%E5%AE%9A 매일신보 1943년 1월 10일자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 남경환도까지의 일주일, 무슨일이 있었나? (1940.03.23~03.30)
한국-일본의 신문 조사를 통해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1940년 3월 30일까지 일주일간, 중국을 비롯한 한-중-일 삼국에서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과 관련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해보았습니다. 계림호가 가지고간 미나미 지로의 축전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B%AF%B8%EB%82%98%EB%AF%B8-%EC%A7%80%EB%A1%9C-%E5%8D%97%E6%AC%A1%E9%83%8E-%EC%A1%B0%EC%84%A0%EC%B4%9D%EB%8F%85%EC%9D%98-%EC%99%95%EC%A7%95%EC%9B%A8%EC%9D%B4%EC%A0%95%EA%B6%8C-%EC%88%98%EB%A6%BD-%EC%B6%95%EC%A0%84-1940-03-30 계림호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A%B3%84%EB%A6%BC%ED%98%B8-%E9%B7%84%E6%9E%97%E8%99%9F-%EC%9D%B4%EC%95%BC%EA%B8%B0 구축함 하이스이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 (예정) 환도선언과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국민정부-환도선언-國民政府-還都宣言-1940-03-30 조선의 유광렬 매일신보기자 - 왕징웨이 대담문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C%9C%A0%EA%B4%91%EB%A0%AC-%EF%A7%89%E5%85%89%E7%83%88-%EC%9D%98-%EC%99%95%EC%A7%95%EC%9B%A8%EC%9D%B4%EC%99%80%EC%9D%98-%ED%9A%8C%EA%B2%AC-1940-4-1 이날 10시에 발표된 10대정강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C%99%95%EC%A7%95%EC%9B%A8%EC%9D%B4%EC%A0%95%EA%B6%8C%EC%9D%98-10%EB%8C%80%EC%A0%95%EA%B0%95-1940-3-30 요나이- 왕징웨이 일화 교환방송의 내용은 여기서 : (예정) [출처] : 만선일보 (滿鮮日報) / 조선신문 (朝鮮新聞) / 부산일보 (釜山日報) / 매일신보 (每日新報) 1940년 3월 25일자 ~ 1940년 4월 1일자 / https://nl.go.kr/newspaper/ 조선일보 (朝鮮日報) / 동아일보 (東亞日報) 1940년 3월 25일자 ~ 1940년 4월 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삼천리 제12권 5호 - 南京 新政府 盛典 參禮記 (1940.5.1)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a_016_0750_013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9%82%84%E9%83%BD%E5%BC%8F%E5%85%B8&searchKeywordConjunction=AND
- 계림호 (鷄林號) 이야기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명인 신용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신용욱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신용욱 (愼鏞寅, 1901~1961) , 그는 안창남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비행분야를 개척한 이중 한명이었다. 신용욱은 식민지 조선에서 항공분야를 개척한 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 아브로식 제 504호 K형 타이거호) 그는 1927년 여의도에 그의 비행기를 이끌고 착륙하여 아직 '비행' 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조선 민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최초의 비행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에 안창남이 1922년 비행을 한바 있다.) 그는 1930년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경성을 구경하는 유람비행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36년, 조선 최초의 민간항공사 신항공사업사 (愼航空事業社) 를 설립해 상업적 비행 운행을 시작했다. 즉 그는 조선 최초의 항공기 비행사는 아니었지만, 조선 최초의 항공기의 상업화를 이뤄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항공사업사는 해방이후 대한국민항공사를 거쳐 대한항공 (大韓航空) 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곳곳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자신의 항공기를 이용해 운행을 게시했다. 우편이나 화물, 승객까지 가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제국의 거대 항공사들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만이 운영하고 있던 항공사업에 조선인도 참가하게 되었다는데에 의미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그의 회사와 비행기 또한 전쟁에 동원되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전쟁을 위해 협력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한국 항공사업의 시초이자 해방이후 한국 항공사업에 성장에 기여한 바는 무시할 수 없으나, 그가 일제 시절 그의 회사와 비행기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였기에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신용욱은 1940년 왕징웨이 (汪精衛) 가 이끄는 신중앙정부 (왕징웨이정권) 이 설립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비행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항공기들은 조선반도 밖으로 비행을 한 경험이 없었다. 즉 단거리 비행경험만 존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미 일본의 거대항공사들은 도쿄와 난징같은 장거리를 연결하는 노선을 이미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H6K와 같은 거대 비행정을 이용해 일본과 남방을 연결하는 노선까지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용욱의 신항공사업사는 아직 조선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축하비행은 왕징웨이의 신정권 수립을 축하함과 동시에 조선의 항공업계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길지 않았기에 일본의 대형항공사들 처럼 한번에 난징까지 날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만주-중국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번의 착륙과 정비, 주유 과정을 겪어야 했다. 계림호의 비행기록, 앞에서 서술하였듯 그는 비행기의 한계로 여러지역을 경유하는 일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기 (愛機) 인 비치크래프트 B-17 (Beechcraft Model 17) 모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사용한 비치크래프트 모델 17 B는 항속거리가 1,078km에 불과한 모델이었지만, 당시 제대로 된 항공기 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높은 성능의 항공기였다. 이 4인승의 이 항공기를 신용욱 본인과, 항공기를 정비할 고준식 (高準植) 이 동행하여 두명이 탑승하여 가기로 결정되었다. 신항공사업사의 비치크래프트 B-17 기체, 이 J-BAOI 이라는 식별명이 붙은 이 기체가 이후 계림호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같은 비치크래프트 기체고 , 밑의 계림호 사진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1940년 3월 16일 신용욱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축하비행 계획을 밝히고, 조선총독부에 이를 위한 비행허가를 요청했다. 다음날 총독부에서는 그에게 허가를 내려주었고, 23일에는 미나미 지로 (南次郎) 조선 총독에게 이 축하비행에 사용될 기체의 이름도 하사받았다. 미나미 총독은 이 비행기의 이름을 과거 신라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일본에서 조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용어중 하나였던 계림 (鷄林)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계림호의 모습을 재현해보려 했다 , 도장은 녹색이었던것으로 추측된다. 계림 밑의 글자는 세글자로 추정되는데 한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출발 하루전인 24일에는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의 안전을 위한 비행안전기원제까지 개최되었다. 당시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주요 신문에서 다루어졌음을 보면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음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3월 25일 오전 9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많은 인사들의 환영속에 계림호는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첫 목적지였던 봉천(奉天) 으로 향했다. 이날 계림호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성립 축하를 위한 축전이 함께 실려서 난징으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30분이 되지 않아 개성을 지났고, 한시간이 되지 않아 평양을 지나 서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륙으로 부터 3시간이 안되는 오전 11시 55분, 계림호는 첫 목적지였던 봉천(펑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림호의 이동경로, 항속거리의 한계로 만주를 통해 중국대륙으로 들어가야 했다. 봉천에 도착한 계림호는 만주국협화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환영을 받고 환영식에 참가했다. 이후 신용욱은 봉천 마로만 (馬路灣) 육군 병원을 방문해 입원중인 병사들을 위로 했다. 이렇게 행사를 마무리하고 그는 금주(진저우) 로 가서 첫 째 날을 마무리 하려 했으나 진저우 비행장의 문제로 인해 이루지 못하고 봉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봉천에서 바로 북경(베이징) 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둘째날 (3월 26일) 오전 9시 계림호는 봉천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5시간 가량이 지난 오후 1시 45분이었다. 북경에서도 그는 계류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제남(지난)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난징에 도착한 계림호와 신용욱 일행, 계림호의 실제모습을 알 수 있는몇안되는 사진 자료이다. 셋째날인 3월 27일 오전 10시 계림호는 제남으로 향했다. 제남은 그들의 경로에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기름을 재보급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시쯤 제남에 도착한 제남호는 20분가량 이곳에서 가솔린을 주유하고 , 오후 1시 다시 난징으로 향했다. 난징으로 향하는 길에 쉬저우 상공을 잠시 선회한 뒤 마침내 출발 55시간만에 계림호는 신정권의 수도 난징에 도착했다. 3월 27일 오후 4시 10분 경 계림호는 난징 상공에서 선회비행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고 4시 40분 난징에 착륙하면서 계림호의 축하비행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난징시민들의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환도식전 방문객들을 위한 난징의 수도반점 (首都飯店) 으로 향했다. 이 북경-남경 비행 과정에서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기를, 자신이 북경을 떠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일본 언론사들의 비행기들도 비슷한 시간 북경에서 이륙해 난징을 향해가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용욱측이 당시 바람의 방향이 불리했음에도 일본측보다 더 빨리 난징에 도착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일본과 조선의 첫 항공레이스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곳에서 신용욱은 조선의 언론인 유광렬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신용욱측이 27일, 유광렬 측이 28일에 난징에 도착함에 따라 신용욱 측이 하루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신용욱은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의 기자단 일행과 함께 28일 오전 난징 중산북로의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방문해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을 회견하고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유광렬의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이후 숙소로 돌아온 신용욱은 환도식전 준비를 하는 유광렬을 두고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이때 유광렬의 회고에서는 "나도 가고싶었는데 식전준비때문에 못가 아쉬웠다" 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유광렬을 두고 28일 오후 2시 난징에서 이륙해 30분뒤 상하이에 착륙했다. 이때 상하이에 거류하고 있는 조선인협회약 600명 가량이 그를 마중나왔다고 한다. 조선인협회를 비롯한 대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상하이에 도착한 신용욱은 조선인협회장에게 꽃다발을 전달받고, 아스트호텔 (The Astor House Hotel, 현재 푸장반점, 浦江饭店) 의 환영식에 참가했다. 신용욱이 묵었던 아스트 호텔, 현재도 푸장반점이라는 호텔이 위치해있다. 다음날인 29일 신용욱은 다시 비행기를 몰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인 3월 30일의 왕징웨이 정권의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신용욱은 유광렬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했다. [ 환도식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 환도식전에서 왕징웨이의 선언문인 '환도선언'은 여기서 : ] 환도식전을 끝내고, 신용욱은 4월 1일, 유광렬과 함께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임광렬과 함께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유일한 조선인 기자' 라는 유광렬의 존재를 흥미롭게 여겨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은 일본 기자단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왕징웨이와의 식사에 신용욱 또한 참가했다. [ 미나미지로 총독의 축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왕징웨이는 "조선에서 온 비행사" 였던 신용욱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비행사 신용욱을 소개했고, 왕징웨이는 그에게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말을 건냈다고 전해진다. 왕징웨이의 신용욱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어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질문하자 신용욱은 웃으면서 " 편도로 날면 다섯시간 정도 걸립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대일본항공회사 (大日本航空會社)의 팜플렛에 따르면 경성과 거리가 조금더 만 후쿠오카에서 난징까지의 비행을 6시간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이와 비슷하거나 더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난징 직행 항공편은 없었기에 신용욱 본인도 잘 알지 못 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 이광렬과 왕징웨이 + 신용옥의 식사시간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서 :] 이렇게 왕징웨이와의 회담을 마치고, 신용옥은 이틀이 지난 4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다시 조선을 향해 이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국과정에서는 그의 계림호가 4인승이었던 만큼, 조선의 기자 유광렬과 다른 기자를 포함해 4명을 채워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돌아오는 과정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여의도 비행장에 계림호가 돌아온 것은 출발한지 8일이 지난 4월 11일이었다. 가는데에는 3일만에 갔지만 돌아오는 과정에는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복귀가 지연되면서 8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신용욱 일행은 이렇게 환영속에 조선에 돌아왔고, 이후 일행은 미나미 지로 총독을 독대하여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4월 14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신국민정부환도 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 영화대회' 에 참가 하게 된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신용옥의 《경축황군위문비행의인상》강연을 볼 수 있다. 신용욱은 매일신보에 유광렬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행기를 신문에 연재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황사로 인한 먼지라고 이야기하고,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육십이 다되어 가는 나이인데도, 그 눈매는 초롱하다고 하고, 중원에서 큰인물이 난다던데, 왕 주석이 그렇다라고 왕주석에 대해 극찬했다. 이 기록은 앞에서 소개드린 유광렬의 기록과도 상당 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해 이런 왕징웨이와 조선인 인사들과의 교류 기록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1940년 4월 1일 왕징웨이에게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는 신용욱, 이후 그는 왕징웨이와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축하비행을 통해 조선과 왕징웨이정권의 교류, 조선 항공산업에 기여했다는 공여를 인정받아 총통부 체신국과 방호과로 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신용욱은 지난번 소개한 임광렬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과 식민지 조선의 인사들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뜻 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인물의 기록을 통해 임광렬의 친일활동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듯, 신용욱 또한 친일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다루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태평양전쟁시기 항공기를 이용한 친일협력만 부각되지 이렇게 태평양전쟁 이전의 보였던 친일활동은 부각하지 않았다. 대한항공도 자신들의 시초를 신항공사업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지만 이러한 활동은 부각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지 않았던 신용욱의 새로운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3월 15일~6월 11일자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012299&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40년 3월 17일자 ~ 4월 1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17%22%2C%22officeId%22%3A%2200023%22%2C%22page%22%3A1%2C%22fevt%22%3A8936%7D 왕징웨이와 신용욱의 악수 사진 / 계림호 사진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026506&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신용욱의 사진 (朝鮮日報)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02/18/EKSA2JGKZVHPNFUUGI6YF2OLA4/ 계림호로 추정되는 기체의 사진 https://richardmin.com/%ED%95%9C%EA%B5%AD%EB%B0%94%ED%96%89%EC%97%AD%EC%82%AC-%EC%99%80-%EC%8B%A0%EC%9A%A9%EC%9A%B1-%EB%B9%84%ED%96%89%EC%82%AC-korean-version/
- 국민정부 환도선언 (國民政府 還都宣言, 1940.03.30 )
국민정부 환도선언 (國民政府 還都宣言) 국민정부는 중앙정치회의의 결의에 의해 남경으로 환도하였음으로, 이에 삼가 성의를 피력하여 동포들에게 고한다. 화평실현 (和平實現) 과 헌정실현 (憲政實現) 이라는 2대방침은 중앙정치회에서 정중히 결의한 바로서 국민정부는 이러한 방침을 견지하고 맹세하며 이를 실행하려 한다. 소위 화평실현이라는 것은 일본과 협력하여 선린우호 (善隣友好),공동방공 (共同防共) 과 경제제휴 (經濟提携)의 원칙에 의하여 과거의 분규를 일소하고 장래의 친선관계를 확립하여 과거의 취한 정책 혹은 법력으로 이러한 방침에 반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폐지하거나 수정하여 주권의 독립자유와 행정의완정을 보전하고, 또한 경제상의 호혜평등합작 (互蕙平等合作) 을 실현하여 공존공영의 기초를 확립하려는데에 있다. 1940년 3월 30일 오전 10시, 난징 국민대회당에서 환도선언을 발표하는 왕징웨이. (同盟寫眞部, 1940.03.30) 중일양국은 원래 형제와 같았다. 불행히 서로를 간과하고 전쟁까지 하게 되었으나 이번 국교 조정을 이룬 이후는 평화를유지하여 함께 동아를 안정시키고 동시에 일절우방인 일본에 대해 화평외교방침에 의거해 신의를 지키고 신뢰를 두터히하여 우호관계를 촉진시킬 것이다. 소위 헌정의 실시라는것은 중국국민당 제5차급 제6차 전국대표회의 선언에서 이미 명확하게 규정되고 또한 전국의 능력있는 지사들이 일찍이 함께 참여한 결과이다. 전후 각지역의 파괴된 시설들이 이제 부흥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에 전국의 동포들은 물심양면(物心兩面)의 힘을 집중하여 용맹매진(勇猛邁進) 하여 현대국가의 건설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 개인의 독재는 전국인원의 정성단결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음으로 이를 혁명정치로서 제거되어야 한다. 또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도발하고 독립을 이룬 민족들의 대적이니 반들이 이를 근절시켜 그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한다. 각급 민의기관의 설치, 지방제도의 실시, 국민대회의 소집, 헌법제정의 발포등등은 모두 오늘을 기하여 실행에 옮겨 전국 인민의 여망에 부할것이다. 화평의 실현과 헌정의 실시는 국민정부의 준봉한 최대방침인 동시에 국민정부가 부담해야할 최대의 임무다. 이에 국민정부는 환도와 함께 이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 인민들, 화평운동을 위해 희생된 선열에 대해 무언의 애도와 경의의 예를 표한다. 국민정부가 제일로 자신의 책임을 지각하는 바는 실로 전후의 인민을 무휼하고 생명, 자산, 자유로 하여금 국가법률의 보증을 받을 수 있게하고 기업들이 안심하고 경제산업의 부흥과 문화의 발전에 종사하게 허는 것이다. 국민정부는 삼가 벗들인 다른민족들을 청렴하고 용감하게 이끌고, 이로인해 원망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를 꺼리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무고한 인민과 동고동락을 함께하고 생사를 같이하며 국가민족의 부흥을 기도할 것이다. 현재 충칭을 비롯한 각지에 복무중인 공무원과 일반 군인들에데 대하여 경의로서 포고한다. 신고를 하는 인원에 대해서는그 확실한 표명이 있은 후 모두 원급원봉으로서 이를 임용할것이며 공무인원인 자도 포고가 있은후 속히 난징으로 귀환하여 신고하라. 충성이념을 가지고 있고 , 그 지역에 응해 알선운동에 고심하고 공헌한 바 있는 자는 특히 우대하여 임용할 것이다. 이 포고가 있은 이후 반드시 명령을 준수하고 즉시 정전하여 후의 명령을 기다리라. 정규군이 아닌 각지에서 산재하며 유격을 담임하는 유격대도 또한 명령에 복종하여 활동을 정지하고 속히 점검을 받아 (왕징웨이 군으로) 수용되기를 기대한다. 이는 화평건국의 이상으로서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바이다. 국민정부의 이번 환도는 전국을 통일하고 화평 실현과 헌정 실시의 큰 길을 향해 용맹전진하는 것으로서, 전국내 이로서 유일의 합법적 중앙정부인것이다. 따라서 충칭측에서 만약 전국내의 대한 법령을 발포하고 외국에 대해 조약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모두 무효인것이 당연하다. 충칭측도 기존의 관계를 벗어 던지고 신속의 국면의 수습을 함과 동시에 간난을 구하기를 기대한다. 사변이래 임시정부, 유신정부등의 정권은 전후 성립되었으나 모두 국맥을 보전하고 민명(民命)을 유지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국궁진췌 (鞠躬盡萃) 하고 노고를 겪어왔다. 이제 이미 이들은 뜻을 같이해 국민정부에 통일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이에 변한 사항에 대해서는 잠시 그 현상을 유지하고 모두 대세의 방침에 의해 속히 조정을 할것이다. 그러한 후 전국은 통일적 지도하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전후의 상처로 부터 회복하고 장래의 발전을 그릴 수 있게 될것이다. 이는 실로 국가민족의 부흥과 동아의 화평에 관련되는바 심대한바로 촉망하여 마지 않는바이다. 1940년 3월 30일 오전 10시 난징 국민대회당,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정치위원회 주석 왕징웨이 (汪精衛). [출처] : 동아일보 / 조선일보 1940년 3월 3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003310023910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0-03-31&officeId=00023&pageNo=1&printNo=6791&publishType=00010 왕징웨이의 연설사진 : https://www2.i-repository.net/il/meta_pub/G0000002chosakai_F01_1940_0331(0)11876
-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수립 축전 (1940.03.30)
미나미 지로 (南次郎) 7대 조선총독, 1936~1942 재임 미나미 지로의 왕징웨이 정권 설립 축전 (1940.03.30) 미나미 조선 총독 (南朝鮮總督) 남경 중화민국 정부 왕주석 각하 (南京中華民國政府 汪主席 閣下) 금일 귀국 중앙정부수립의 소식에 삼가 심후한 경의를 표합니다. 생각컨데, 동야인의 동양을 건설하고 항구적평화를 확보함은 귀국과 우리의 부동의 국시로서 실로 세계 평화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현은 오직 일화양국의 제휴흥융에 의하여야 가능할 것입니다. (왕징웨이 각하께서) 앞장서서 화평구국의 대업에 마땅한 천지인의 삼화(三和)를 득한바, 귀 정부의 전도는 혁혁한 광명에 차고 공동흥아의 성업은 기대되는 바입니다. 이에 귀국의 융창과 양국의 돈의를 축복하고 왕징웨이 각하와 귀 정부 각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1940년 3월 30일 ,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출처]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30%22%2C%22page%22%3A1%2C%22officeId%22%3A%2200023%22%2C%22fevt%22%3A8077%7D (조선일보 1940년 3월 30일자)
- 중화민국이 국제연합에서 퇴출된것에 대해 총통이 전국 동포들에게 고함 (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1.10.26)
중화민국은 1944년 국제연합 (UN) 의 창설과정부터 기여했던 UN 생성당시의 핵심국가이자,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다. 하지만 1971년 10월 25일, 유엔총회 제2758회 결정에서는 UN에서의 중국대륙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켰고, 이름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민국의 권리는 박탈되게 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은 반발하여 UN에서 탈퇴하게 된다. 중화민국이 국제연합에서 퇴출된것에 대해 총통이 전국 동포들에게 고함 (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1.10.26) 제26차 유엔 총회 (1971년 10월 25일의 유엔총회 제2758호 결정,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합법적 권리의 회복결정을 의미 ) 는 국제연합헌장을 위반하고 알바니아와 기타 도적 국가의 제안을 통과시켜 마오주의 비적을 이끌고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화민국의 자리를 훔치도록 했다. 우리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이라는 본래 가치를 지켜왔다. 나는 표결이 있은 후에 중국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연합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인민 전체가 이번 총회에서 통과된 헌장 규정을 위반한 이 불법적인 결의가 유효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마오와 공산주의 도적단들은 중화민국의 반란군이며 내부적으로는 인민에 대한 범죄의 집합체이다.전 중국 인민, 특히 본토의 7억 동포의 공공의 적이며 통치하는 침략자이다. 유엔의 무자비한 전복과 침략에 대해. 비록 본토가 현재 마오주의 도적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대만, 펑후, 진마에 기반을 둔 중화민국 정부는 본토에 있는 7억 중국인의 진정한 대표자로서 공통의 의지와 고통의 외침을 대표하며, 그리고 그들에게 마오주의 공산당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제공해왔다. 따라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 인도주의 , 자연법칙, 특히 중국 인민의 일반의지와 상관없이 마오주의 공산주의 비적이 국제연합에서 중화민국의 안전보장위원회의 지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것이다. 1944년 우리나라는 덤바턴오스크 회의에 참가하여 국제연합 선언문에 서명하고, LA연합국국제기구회의에 참가하여 헌장을 작성하였다. 국제연합과 우리는 인류가 이 세대에 겪은 두번의 전쟁의 참화로부터 미래세대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헌장을 공동으로 지켜왔다. 하지만 이번 유엔총회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무너트리고,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부끄럽게도 악에 굴복하고 폭력에 비겁하게 굴복하면서 우리나라가 참여해 열심히 만든 국제연합은 오늘날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중화민국의 국제연합 탈퇴 선언이 사실상 국제연합 파괴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문화전통은 정의를 수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것이며 비록 우리가 참가하여 창설한 국제연합에서 비록 우리가 탈퇴하였지만 국제연합이 앞으로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척도가 되어서 국제사회를 수호하고 세계의 정의와 평화 안전을 위해 용감히 싸우길 바란다. 나는 지난 반세기동안 이 세상에서 두번의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제 1차 세계대전의 큰 고통을 겪은 후 다시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모두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국제연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일부국가는 침략자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악에 굴복하고 폭력에 무릎을 꿇는것이 굴욕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생각했고 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일부 민주주의 국가는 비적을 옹호하고 마오주의 비적과 함께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법적 지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고 그들의 사상과 관행은 1차 세계대전에서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직전의 역사적 사실은 정의를 수호하는 도덕적 용기가 세계안보와 평화를 위한 가장 견고한 토대이고 , 거꾸로 권력정치에서 헤게모니 사용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라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동포들이여, 우리 국가의 운명은 국제연합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국부 손중산선생도 말하셨다. "존재의 기원은 국가와 인민의 불굴의 독립 정신에 있다. 국가는 이익에 유혹되거나 빼앗길 수 없으며 그래야만 새계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라고 말하셨다. "Strongly Oppose Red Chinese Entry into United Nations!" (공산중국이 유엔에 들어가는걸 강력히 반대한다!) - 1971년, 중화민국 타이난역의 문구 , 중화민국의 UN속출로 부터 1달전. 오늘날 우리의 혁명기지(대만) 는 이 두세력, 특히 대륙의 7억 반공인민과 해외 반공화교의 애국주의를 뒷받침할 인적자원, 경제력, 군사력,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중화민국은 결코 타인에게 조종당하고 배신당할 수 있는 나약한 국가가 아니며, 더욱이 우리는 세계의 힘의 균형을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른 국가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만약 우리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세계에 정말 큰 변혁를 만들 수 있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매우 위험하나 우리가 계속하여 자기개선을 위해 분투하는 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흔들수 없고, 우리가 용기를 내는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인내하고 끝까지 싸우면 우리는 결국 성공할 것이다. 본래 혁명의 승리적 성과는 모두 대변혁에서 착상되고 생산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야할 것이다. 특히 현재 세계 정세의 변화는 중국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중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전 세계 인류의 운명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변혁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우리의 투쟁의 성패는 세계의 안전과 인류의 운명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세계 정세의 변화를 좌시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고 변화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분투하여 적보다 기회를 먼저 잡아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비적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으며 최근의 격화되는 투쟁은 마오주의 도적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 체제가 완전히 파산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들을 포함한 본토인들은 실망에서 저항으로 돌아섰고, 그들의 발밑에 있는 반공 화산이 곧 폭발할 것을 보고 마오주의 공산당 도적은 그것을 진압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비적은 '반소비에트 수정주의', '반미제국주의', '반만능 반동'이라는 목표를 결코 바꿀수 없다. 따라서 대외전략의 변화는 비적들은 이데올로기 노선과 정책노선에서 설 자리를 잃게 했고, 더욱 심각한 이견과 혼돈을 야기했고, 더욱 치열한 권력투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자신감을 강화하고 힘을 강화하며 전투 태세를 강화하여 신속하게 행동하고 본토에서 반마오, 반공 혁명 투쟁을 가속화해야 한다. 동포 여러분, 반공투쟁의 행로는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 배를 항해하는 것과 같으니 반공의 근본사정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한 순간의 변화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함께 일하고, 불행과 행복에 의지하지않고 화를 나누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니 느슨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 교만않고 폭풍우가 닥쳐도 소심함과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기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상황이 더 위험할수록 우리는 더 강하고 굳세진다. 열심히 일하면 우리는 곧 받드시 대륙의 동포를 구하고 본토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10월 26일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蒋中正) 이글은 중화민국의 UN탈퇴 그 다음날 배포되었고, 사진의 책자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중화민국 국민들에게 배포되었다. 출처 (中文 원문) : https://zh.wikisource.org/wiki/%E4%B8%AD%E8%8F%AF%E6%B0%91%E5%9C%8B%E9%80%80%E5%87%BA%E8%81%AF%E5%90%88%E5%9C%8B%E5%91%8A%E5%85%A8%E5%9C%8B%E5%90%8C%E8%83%9E%E6%9B%B8
- 필리핀 제2공화국의 선전포고문 (1944.9.23)
필리핀 제2공화국의 국기 WHEREAS, the Filipino people, during the whole period of their subjection to alien rule, have unremittingly labored for their freedom and independence and to this end fought two wars and countless resolutions; 필리핀 국민들은 외세의 지배를 받는 내내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2년동안 전쟁을 하고 수많은 결의를 다져왔습니다: WHEREAS, upon the attainment by the Philippines of this cheri shed goal of freedom and independence and on the occasion of the inauguration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on October 14, 1943, 필리핀이 소중한 목표인 자유와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1943년 10월 13일 필리핀 제2공화국의 출범을 기념하여 the President appeal to all nations and peoples of the world for amity and goodwill and,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especially, pleaded that the Philippines be spared the suffering and destruction incident to the resumption of military operations on our soil. 대통령은 세계의 국가들과 국민들에게 우호와 선린을 호소 해왔습니다. 특히 필리핀 국토에서 미합중국이 군사 작전을 재개함에 따라 발생하는 파괴와 고통을 면해줄것을 호소해 왔습니다. WHEREAS, notwithstanding this appeal,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Great Britain have attacked from the air certain parts of the Philippines thereby violating the territorial integrity of the Republic and causing death or injury to its citizens and destruction or damage to their property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과 영국은 필리핀의 특정 지역을 공습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침해하고 있고,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과 대영제국은 필리핀의 공중에서 필리핀의 지역을 공격함으로서 공화국의 영토를 칩해하고 사망과 부상을 시민들에게 입히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켰습니다 WHEREAS, the Philippines must safeguard its independence and territorial integrity as every self-respecting sovereign state is in honor bound to do; and 필리핀은 모든 자존심을 존중하는 주권국으로서 독립과 영토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WHEREAS,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has entered into a Pact of Alliance with Japan, based on mutual respect of sovereignty and territories, to safeguard the territorial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the Philippines. 그리하여 필리핀 제2공화국은 필리핀의 독립과 필리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주권과 영토보전에 기초해 일본제국과의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호세 라우렐 대통령은 직접 군복을 입고 선전포고문을 낭독했다. NOW, THEREFORE, I, Jose P. Laurel,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do hereby proclaim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Great Britain, effective September 23, 1944, at 10:00 o'clock in the morning 그리하여 지금, 나 필리핀 제2공화국의 대통령 호세 라우렐은 1944년 9월 23일, 오전 10시를 기해 필리핀 제2공화국과 미합중국, 대영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존재함을 선언합니다. Face to face with the grim realities of war, I earnestly, call upon every Filipino at this momentous hour to show his unswerving loyalty and to give his support to the Government, so that, regardless of the trials and tribulations we are undergoing and those we shall have to suffer in the near future, we may closely and firmly unite to safeguard the free and independent existence of the Philippines. 전쟁이라는 암울한 현실에 직면해 있지만, 나는 중대한 시기에 모든 필리핀인이 확고한 충성과 지지를 정부에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겪는 시련과 환난과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겪게될 고통에 우리는 긴밀히 확고히 단결하여 필리핀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낼수 있을 것입니다 IN WITNESS THEREOF, I have hereunto set my hand and caused the seal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to be affixed. 그 증거로, 나는 손을 들어 필리핀 제2공화국의 인장을 날인합니다. Done in the City of Manila, this 22nd day of September, in the year of Our Lord, nineteen hundred and forty-four, and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the first. 이는 우리 신의 해 ,그리고 필리핀 제2공화국의 첫해인 1944년 9월 22일 마닐라에서 작성되었습니다.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 1944년 9월 22일 실제 선전포고문 낭독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7h6eynWc8hg (1) https://www.youtube.com/watch?v=qpyQk2dTCeg&t=11s (2) * 두영상 모두 일본에 의해 편집되면서 선전포고문의 일부를 읽는 모습만 나와있습니다. [출처] https://www.lawphil.net/executive/proc/procXXX/proc_30_1944.html
- 왕징웨이정권의 10대정강 (1940.3.30)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에 보도된 왕징웨이 정권의 10대 정강에 관한 기사 1. 선린우호의 방침에 의해 화평외교로써 중국국권 행정의 독립완성을 추구하고 동아영원의 평화신질서건설의 책임을 분담한다. 2. 우호각국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고 아울러 그 관계를 조정하여 우의를 증진한다. 3. 우호 각국과 연락해 국제공산주의음모등 기타 평화교란의 행동을 막는다. 4. 화평건국을 옹호하는 군대 및 각지 유격대에 대해서는 이를 각각 수용해 안정시키고 또한 국방군을 건설, 군정 군령이란 양대권을 명료히 구분하여 군사독재체제를 타파한다. 5. 각급 민의기관을 설립하여 각계의 인재를 고려하여 전국의 공의를 집중시켜 민주주의를 조성한다. 6.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정하고 헌정을 실시한다. 7. 중국국가의 자본 및 기술합작으로 전후 경제의 회복과 산업 발전을 도모한다 . 8. 대외무역을 진흥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중앙은행을 재건하여 폐제를 통일해 사회금융의 기초를 확립한다. 9. 구 세제를 정리하여 인민의 부담을 경감하여 농촌을 복흥시켜 난민을 구제해 각각 생업에 안심케한다. 10. 반공화평건국으로서 교육의 방침을 정하고 과학교육의 향상을 도모하여 부화맹동(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한) 학교를 일소한다. [기사출처] 네이버 옛날신문 - 동아일보, 1940년 3월 31일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31%22%2C%22page%22%3A1%2C%22officeId%22%3A%2200020%22%2C%22fevt%22%3A206%2C%22publishType%22%3A%2200010%22%7D)
- 왕주석환영가 (汪主席 歡迎歌) / 1942.5.4
1942년 5월 4일, 환영 왕주석 이라고 적힌 풍선을 보고 환호하며 만주국과 일본 깃발을 흔드는 만주국 소녀들. 1942년 5월 4일, 왕징웨이와 측근들은 만주국을 방문합니다 . 왕징웨이의 첫 만주국이기도 했던 이 방문 만주국측에서는 왕징웨이의 첫 방문에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우선은 중화민국이 만주국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 1942년의 시점에서 건국 10주년을 앞두고 있는 만주국의 산업 발전성과를 왕징웨이측에 보여주면서 만주국의 발전상을 자랑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만주국측은 왕징웨이측을 환영하면서 왕징웨이를 국민정부의 정통지도자로 치켜세우고, 방송국에서는 '중화민국 국민정부 왕징웨이 주석 환영의 밤' 과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등, 왕징웨이측을 환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주국측에서는 왕징웨이의 방문을 환영하며 노래 또한 준비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왕주석환영가 (汪主席歡迎歌)" 입니다. 신문 흥경시보 (盛京時報) 에 서술된 왕주석 환영가의 악보와 가사. 汪主席來雲軺下 滿洲國民喜無 왕주석님이 비행기에서 내리시니 만주국민들은 행복하다네 來吧 來吧 快來吧 大家一齊歡迎他 어서, 어서, 어서, 우리 모두 그를 환영하세 滿華提携如一家, 實現我們大東亞 만주와 중화의 제휴는 한가족과 같다네, 우리들의 대동아를 실현한다네 來吧 來吧 快來吧 大家一齊歡迎他 어서, 어서, 어서와서 우리 모두 그를 환영하세! [출처] 정호윤, 「汪精衛정부와 동아신질서」 , 영남대학교 (석사논문), 2016, 2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