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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㉗ 제2차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5.3.17.) [완결]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제2차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5.3.17.)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제2차 대동아회의 개최에 관한 건 (1945.3.17.)       이유:        4월 중순을 기해 도쿄에서 제2차 대동아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시급히 준비한다. 다가오는 반추축측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 연합국측이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약 두달간 개최한 회담이다.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 라고 불리는 본 회의에는 약 50개국의 연합국이 참가했으며 본 회의를 통하여 국제연합(UN)의 기초가 되는 연합국 헌장이 채택되었다.) 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적에 대한 정치공세를 전개함과 동시에 결전 단계를 맞이하여 대동아의 결집을 한층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번에 타이왕국의 아파이윙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을 이어 타이왕국의 총리가 된 타이왕국의 4대 총리인 쿠앙 아파이웡 (Khuang Aphaiwong)을 의미하는 것.) 가 일본을 방문한 것을 계기 삼아 제2차 대동아회의를 개최하는 것이 선전에 적합하다고 인정하는 바 이를 승인함.                   최고전쟁지도회의결정 (1945.3.29.) 이번 달 17일 본 회의에서 결정한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앞으로의 정세를 고려하여 잠시동안 이를 연기하기로 한다.             대동아 대사회의 개최에 관한 건 (1945.4)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황상 1945년 4월 이후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대사회의를 준비한 내각 인원들이 1945년 4월 출범한 스즈키 칸타로 (鈴木貫太郎) 내각의 이들이기 때문이다. )       1) 대동아대사회의 개최의 경과  쇼와 18(1943)년 개최된 대동아회의의 석상에서 만주국 대표로부터 이러한 회의를 수시로 개최하는 것을 희망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당시 각국 대표들 역시 이에 대해 찬동을 표하였음. 그 후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하고 동시에 반추축국 측의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적에 대한 정치공세를 전개하고, 결전 단계를 맞이하여 대동아의 결속을 한층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제2차 대동아회의의 개최 방법이 고려되어 최고전쟁지도회의의 의제가 되어 쇼와 20(1945)년 3월 17일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음.       최고전쟁지도회의 회의내용 (1945.3.17.)       가)  제2차 대동아회의 개최에 관한 건이 회의의 안건으로 올라오면서 외무대신으로부터 우측 별지의 ‘이유’에 근거하여 설명을 추가함과 동시에 회의의 의제로서는 대동아공동선언을 출발점으로 하는 대동아의 협력 사항 등을 고려하고 있음.       나)  본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심의되었음. 나-1) : 초청의 범위에 대해서는 지난 회의의 출석국 외에도 이번에 독립을 선언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및 인도네시아 등의 각 대표도 유치하기로 의견 일치 되었음.       나-2) : 또한 위와 관련하여 육군대신은 이번 기회를 통하여 꼭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고 외무대신 역시 이를 지지하였음.       다)  : 제2차 대동아회의의 준비사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심의되었음. 다-1) : 외무대신은 가장 곤란한 교통수송 문제에 관해서는 육해군으로 하여금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정도가 1국 (혹은 1개의 대표 측) 당 항공기 1대를 충당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대표부, 수행원, 일본 측 안내원을 포함하여 참가 인원을 엄격하게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음.       다-2) 총리대신은 본 회의의 준비는 모두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관계 관청이 이를 원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였고 이를 외무대신은 승낙하였음. 사무기구에 대해서는 최고회의 간사를 주관 당국으로 하고 외무성 정무국장 및 대동아성 총무국장 으로 하여금 간사의 보좌로 하여 이를 보조하게 하는 것을 제의하였고 이는 전원의 승낙을 얻었음.       다-3) : 숙소 및 회의장에 대해서는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하여 초청하는 빈객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대하여 전원의 승낙을 얻었음.  하지만 앞으로의 전국(戰局)의 진전을 살펴볼 때 회의의 개최로 발생하는 교통과 수송문제는 이러한 현 전국의 곤란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높기에 제2차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어쩔 수 없이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3월 29일 개최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음. 최고전쟁지도회의 회의내용 (1945.3.29.)        제2차 대동아회의 개최에 관한 건의 경우, 앞으로의 정세를 생각하면 여행의 위험도가 현저히 증가하는 만큼 이를 위한 준비가 곤란해짐에 따라 회의를 연기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 이를 대신하여 대사(大使) 회의와 같은 회의를 여는 것을 외무대신이 고려하게 하는 방향으로 양해를 구하기로 함.  위와 같은 심의에 따라 외무성 및 대동아성으로 하여금 대동아대사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기로 하였음.       2) 대동아대사회의의 개최  이에 따라 쇼와 20 (1945)년 4월 23일 대동아 각국 대사회의가 개최되었음. 제국측에서는 도고(東郷)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스즈키 내각에서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을 담당한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외무대신을 의미한다.) 을 시작으로 수행원으로서 외무성 정무국장, 대동아성 총무국장, 육군성 군무국장, 해군성 군무국장, 정보국 제3부 부장, 각국의 대표단은 왕(王)만주국 대사 (당시 주일만주국대사였던 왕운칭(王允卿) 을 의미한다.) , 차이(蔡)중화민국 대사 (당시 주일중화민국(난징) 대사였던 차이페이(蔡培) 를 의미한다.) , 테몬(Te Moun) 버마국 대사, 위칫와타칸 (Wichitwathakan)타이왕국 대사 (대동아회의 개최 과정 당시 타이왕국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루앙 위칫와타칸(Luang Wichitwathakan) 은 이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일 타이왕국 대사로 활동하게 된다.) , 바르가스(Vargas) 필리핀 공화국 대사 (필리핀 행정위원회의 의장이었던 호르헤 B. 바르가스(Jorge Bartolome Vargas)를 의미한다.) 및 그들의 수행원으로 하고 이외의 배석자로서 자유인도임시정부의 대표로 라마무르티씨 (인도독립연맹(IIL) 의 도쿄 지부 수장이었던 문가 라마무르티(Munga Ramamurti)를 의미한다.) 등 약 30여 명이 출석하였음.  도고 외무대신은 대동아전쟁의 완수 및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전국(戰局) 에 대하여 제국 정부의 소견 개진을 겸하여 개회의 인사를 하고 다음으로 본 회의의 목표인 공동성명의 작성의 건에 대한 제안 이유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각국 대사의 의견 개진을 요구할 것을 주장하였음.  이에 각국 대사들의 진지한 의견 교환 토의를 진행 결과 진정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한 지도원칙을 전원 일치로 대내외에 천명하게 되었음. 본 회의에서는 (1) 정치적 평등 및 인종차별의 철폐 (2) 국가의 독립 존중 및 내정불간섭 (3) 식민지 민족의 해방 (4) 경제의 상호호혜 (5) 문화교류 (6) 침략 방지 (7) 강대국의 전제(專制) 배제 및 획일적 세계평화기구의 타파 라는 7대 지도원칙을 담은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음.  이와 같은 7대 지도 원칙을 지표로서 대동아 각국은 끝까지 전제, 독점, 차별을 배제하고 정의를 기조로 하는 진정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공동의 투쟁을 이어나간다는 결의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음. 또한 공개된 오후의 회의에서는 바르가스 필리핀 공화국 대사로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독립 완성을 지원하자는 제안이 제출되어 가결하였으며 위칫와타칸 타이왕국 대사로부터 인도차이나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자는 제안이 제출되어 가결하였음. 또한 왕운칭 만주국 대사로부터 전국의 현 상황을 생각했을 때 본 회의와 같은 회의를 이후에 다시 한번 개최하자는 제의가 있어 이 역시 이의없이 가결하였음. 마지막으로 제국 정부로부터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하여 본 회의의 토의 내용 및 결정, 결의한 내용에 대하여 통보하는 것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이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  이와 같은 결의의 채택을 통하여 대동아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더욱 결합하게 되어 금융, 무역, 교통, 노동등 실질적인 방면에서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게 되는 계기를 형성하는 성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음.       3) 대동아대사회의 공동성명의 채택  회의 종료 후 같은 날, 대동아대사회의 서기국에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음.       대동아대사회의 서기국 발표 (1945.4.23.)        대일본제국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및 주일 만주국, 중화민국, 버마국, 타이왕국, 필리핀 공화국 각국 대사는 본국 정부와의 예비적 협의를 바탕으로 대동아전쟁 완수의 방도 및 공동전쟁을 통한 세계신질서 건설의 이념에 대하여 격의 없는 의견 교환을 실시한 결과 본 23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을 채택하였음.       대동아대사회의 공동성명 (1945.4.23.)        대동아각국은 영미의 끊임없는 침략에 상호제휴하여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존자영(自存自榮)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공동으로 전쟁에 매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영미는 무력으로 중립국들을 압박하고 이를 전쟁의 도구로써 사용하며 타국의 해방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의 세력 범위 확대와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있다. 또한 적대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가의 존립, 민족생존의 기초는 물론 그 고유문화도 말살하려 기도하고 있다. 영미가 오늘날 품고 있는 전쟁계획은 수많은 정치적 겉치레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로지 무력을 기초로 하여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강제로 찬동하게 하는 것으로, 영미는 국제정치를 자신의 전제(專制)하에 두고 방자하게 자신들을 세계의 경찰로 칭하고 세계경제도 농단하여 이로써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를 더욱더 영구화하는 것을 꾀하고 있다. 때문에 그 밖의 각국 각민족은 그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정하고 균등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으며 특히 대동아민족에 대해서는 여전히 편견과 차별관을 드러내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들과 우리의 전쟁목적의 결정적 차이는 우리는 영미가 지금과 같은 부정한 국제 질서를 끝까지 유지, 강화하려는 것에 반대하고 대동아 각국은 이와 같은 전제, 독점, 차별을 배제하고 끝까지 정의를 기조로 하는 진정한 신질서를 건설하려는 것에 있다. 대동아 각국은 이를 위해 공동선언을 (대동아공동선언을 의미하는 것.) 발표하여 대동아전쟁의 의의와 목적을 천명하였으나, 더 이상 영미의 폭력에 의해 국제정의와 인류의 복지가 유린당하는 것을 묵시할 수 없어 대동아 각국은 이에 포회(抱懷)하는 공동의 전쟁목적에 근거하여 진정한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한 지도원칙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이를 저지, 파괴하려는 영미의 야망에 대해서는 끝까지 그 총력을 결집하여 전쟁을 완수하겠다는 견고한 결의를 새로이 표명한다.       국제 질서의 확립을 위한 근본적 기초를 정치적 평등, 경제적 호혜 및 고유문화에 대한 존중에 원칙에 두고 이에 기초하여 인종등에 기초한 일체의 차별을 철폐하고, 친화협력(親和協力)의 취지를 공존공영의 이념에 포함시킨다.       국가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보장한다. 또한 국가의 향상 발전에 따른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기 위해 정치형태는 각국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결정하며 이에 대한 타국의 간섭은 용인하지 않는다.       식민지적 지위에 있는 여러 민족을 해방시켜 각자가 각자의 자리를 얻게 하고, 인류 문명의 진전에 기여할 길을 개척한다.       자원, 통상, 국제교통의 농단(壟斷)을 배제하고 경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여 세계의 경제 불균형을 바로잡아 각 국민의 창의(創意)와 근로에 즉응하는 경제적 번영의 보편화를 도모한다.       각국의 문화의 전통을 상호 존중하는 동시에 문화교류에 의한 국제친화 및 인류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불위협, 불침략의 원칙 아래 타국에게 위협이 되는 군비를 배제하고 통상 상의 장애를 제거하되 무력에 의한 방법은 포기하며 경제적 수단에 의한 타국의 압박 내지 도발을 방지한다.       안전보장기구에 대해서는 강대국의 전제 및 전 세계에 걸친 일방적인 강요적 방법을 피하고, 실정에 맞는 지방적 안전보장체제를 주체로 하여 필요한 세계적 보장기구를 아우를 수 있는 신질서를 수립하고 또한 부단하게 진전하는 세계정세에 대응하여 국제 질서를 평화적으로 개정할 방도를 기약한다.       4) 채택된 결의안       가) 인도차이나 각국의 독립 완성 지원에 관한 결의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에 비추어 이번에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캄보디아 및 라오스가 빠르게 원하는 형태로서 신국가 건설의 열매를 수확하고 대동아의 유력한 일익(一翼)이 되어 상호 공동의 이상 실현에 매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독립 달성 지원에 관한 결의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에 비추어 동인도 민족이 꺾이지 않는 노력과 일본 측의 호의적인 지원을 통하여 속히 독립 준비를 완료하고 독립이라는 숙망을 달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본 회의의 토의 내용 및 결정, 결의 내용에 대한 통보에 관한 결의  인도의 해방은 대동아의 공동 관심사로서 대동아 각국은 이를 위하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투쟁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지원하기 위하여 본 회의에서의 토의 내용 및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 및 결의사항을 자유인도임시정부에게 통보하고 이에 대한 찬동을 권장하기로 한다. 올 여름부터 시작한 긴 번역작업이 끝이 났습니다. 작성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응원해주신 여러분 덕에 작업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는 하나다》 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㉖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찬드라 보스 – 도조 히데키 회담 요지 (1943.11.13. / 총리관저 소객간(小客間))       ◎ 찬드라 보스의 발언 요지       대동아회의 초청 및 이 과정에서 베풀어주신 호의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바임. 동시에 앞으로도 인도 해방을 위하여 투쟁할 것은 물론, 일본을 위한 협력도 이어나가겠음. 저는 유럽의 정세가 어떠할지라도, 대동아민족의 일치단결은, 우리의 승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바임.       안다만 제도 및 니코바르 제도의 귀속에 관한 건 및 비행기 기증의 건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임.       비행기의 기증에 대해서는, 이를 통하여 자신의 활동은 자유로워지며 시간의 제약 문제도 해결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동 과정이 편리해질 것으로 생각됨.       내일은 해군 측과도 회담이 예정되어 있고 저는 일정을 마친 후에 빠르게 안다만, 니코바르를 방문한 후 싱가포르로 돌아갈 예정임. 이에 대한 사항은 발표할 예정.       또한 귀국이 확정된 후에는, 안다만 및 니코바르 제도의 방위를 위하여 일본군의 주둔을 용인할 것, 인도군과 일본군이 공동방위하게 하기 위해 속도를 낼 예정이며 이 역시 대내외에 발표할 예정임. 이러는 이유는 적측은 일본이 인도에 안다만 및 니코바르 제도를 귀속시킨다 한들, 일본군이 주둔한다면 이는 의미 없는 귀속이라 반드시 선전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 이에 먼저 대응하기 위하여 인도 정부가 일본군의 방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방위를 위하여 이러한 주둔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빠르게 발표해야 한다고 봄.       인도 점령지의 화폐는, 자유인도임시정부의 통화를 사용할 생각임. 일본의 화폐를 사용하면 적측은 필시 자유인도임시정부를 일본의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선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임. 여러 준비 과정을 통하여 처음에는 일본의 화폐에 스탬프를 찍어 임시로 사용하되, 이후에는 자유인도임시정부의 화폐로 교환하게 할 생각임. 이 역시 선전할 예정임.       스기야마(杉山)참모총장 ( 스기야마 겐(杉山元) 을 의미.) 과의 인도에서의 작전에 관한 논의에서 저는 본 작전의 성공을 확신하며 자신의 의견은 인도에서의 작전은 버마에서의 작전, 말레이에서의 작전과는 다른 것이며 장기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함. 나아가 인도 내에 진입하게 되어 점령지를 획득하게 되고 이를 자유인도임시정부가 통제하게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한다면 다른 인도지역에 큰 경향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함. 따라서 선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점령지 행정이 성공하면, 다른 인도지역은 봉기하거나 현 상황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함. 이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상황은 진주한 군과 주민 간의 사이가 원만해야 한다는 것임. 나아가 인도에 진주하게 되는 경우 최고사령관은 일개의 무관이 아니라, 무인(武人)인 동시에 대(大)정치가인 이를 선택하여 임무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됨.       진주한 군와 주민 간의 분쟁, 오해는 모두 전쟁의 부산물과 같은 것으로, 버마만 하더라도 초기에는 원만하게 진행되었으나 이후 두세 개의 분쟁이 생기게 되었음. 이를 살펴보면서 인도에서는 사전에 이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참모총장 각하에게도 전달한 것이나, 인도에서의 작전은 적측을 예상해보면 최대한의 대병력을 제1선에 배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음. 반면 싱가포르에는 최소한의 병사가 배치되어있음. 이 점을 특히 중앙에서도 인지하기를 바라는 바임.       인도국민군은 물론 일본군의 통제 아래에 있으나, 가능하다면 인도인의 대병력을 창설하고 싶음. 이는 자신에게는 당연한 의무이자 책무이며 동시에 적 측에게도 대다수의 인도인 병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선전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됨. 적 측에게도 다수의 인도인 병사가 있으면 선전상으로 좋지 않으며 우리 측에게는 인도인 다수가 이에 반응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음.       참모총장 각하에게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저는 개인적인 소망으로서 나 자신으로 하여금 제1선의, 전장과 같은 곳을 경험하기를 희망 하고 있음. 이에 대한 허락을 해줄 수 있는지.       인도에 국한하여 말씀드리면, 인도의 혁명, 인도의 해방은 앞으로의 2~3개월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됨. 세계의 전쟁 상황을 따라 인도인이 어떻게 어떠한 노력을 할지라도 추축국이 유럽에서 불리해지고 있는 이상, 적은 인도에서도 추축국 측, 즉 인도 해방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적은 선전할 것이니 인도에게는 이러한 모략을 파쇄하고 가까운 장래에 인도 해방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 민심을 위해서도 전선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됨.       마지막으로 자유인도임시정부 수립부터 지금까지 각하께서 보여주신 호의 및 장래를 위한 지도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임.       일본의 숭고한 정신과 일본이 보여준 호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음. 각하의 기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음. 하지만 저의 요지는, 형제간에도 당연히 적용되는 것이며 적의 선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임. 당연하게도, 적은 반드시 자유인도임시정부를 노리며 자유인도임시정부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작동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임.       나치 독일의 전력, 유럽의 정세를 동양인은 잘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됨. 이를 타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각하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바임, 앞으로는 행동으로서 우리들의 결의와 감사의 마음을 표명하도록 하겠음.       ◎ 도조 히데키의 발언요지       대동아회의에 대하여 협력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바임. 앞으로 한층 더 분투하기를 희망하는 바임. 나아가 일본이 인도에 원하는 바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 대동아가 끝에는 승리할 것임을 저는 확신하는 바임.       제국정부로서는 대동아회의의 석상에서 안다만 제도 및 니코바르 제도를 자유인도임시정부에 귀속시키겠다는 용의를 천명하였고, 이제 그 첫걸음을 조치하려 함. 즉, 지금의 일본군으로 하여금 점령 중인 인도령인 안다만 제도 및 니코바르 제도는 자유인도임시정부의 귀속시키되, 귀속의 시기는 별도로 정하여 다음과 같이 처리하고자 함.       작전에 관련된 방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필요한 자유인도임시정부의 계원의 현지 진출을 승인하고 현지에서 정치에 참여하게 할 것.   위의 정치참여 범위는 순차적으로 확대하기로 하며 현지 해군 최고 지휘관의 지도하에 극력으로 자유인도임시정부 측의 희망을 충족할 수 있게 처리할 것. 자유인도임시정부가 만약 해당 지역을 자유인도임시정부에 귀속시킬 경우에는 이를 기성사실화 하여 대외 선전에 이용할 것. 위의 제도는 자유인도임시정부에 귀속 결정된 후 방위를 위하여 일본의 일절 요망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음.       이처럼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는 적의 반격이 당연히 예상되는 곳으로서 작전적으로 제국에게는 포기하기 어려운 곳임. 약속한 귀속의 조치는 현재 착착 실행되어가고 있음, 단, 현재와 같은 정세 속에서는 먼저 그 제1차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 제국은 이를 위하여 속도있게 분명하게 귀속 조치를 취할 것임.       각하로부터 참모본부 측에 이야기하셨던 비행기와 관련된 건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경수송기 1대를 기증하려 하고 있음. 이와 관련해서, 조종사라던가 설비라던가 기체의 점검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제국은 일절 이러한 항공기를 육군으로 하여금 관리하는 게 적절하다 판단됨. 따라서 만약 각하가 항공기의 운용을 필요하다 생각한다면 이를 일절 일본 육군이 관리하게 하고 이를 자유로이 이용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음. 조종사는 가능하다면 각하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인도인을 일본에 데려와 교육시켜려 함.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일본인 조종사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됨.       이번의 조치는 위에서 본 것처럼 귀속을 위한 제1단계 조치로서 중앙에서 직접 현지에 시달할 것, 이는 제국정부로서의 의상(意想)을 표하는 것인 동시에 해군 측의 협의도 필요한 것. 현지에서 어떠한 사건이 진행되는 경우에도 이를 중앙에서 직접 시달할 것.       지금 각하께서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방문하려는 계획에 대해 승인을 하는 바이며 이는 무척 훌륭한 일이라 생각함. 다만, 알다시피, 적기는 최근 지속하여 해당 지역을 폭격하고 있음. 각하께서 해당 지역을 방문하겠다고 하면 적은 반드시 각하를 공격하려 할 것. 이를 특별히 주의하시기 바람.       공동방위의 건의 경우에는, 제국의 경우 국내에선 절차를 모두 완료한 이후 발표하려 함. 또한 통수권의 관계 문제도 있음. 발표에 대해서는 현지 최고사령관과 사전에 협의를 하길 요망하는 바임.       제국의 태도는 영국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제국이 제도를 귀속시키겠다는 약속을 한 이상, 필시 명확하게 귀속 조치를 취할 것임. 대신에, 가능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드리려 함. 나아가 정식으로 귀속 후 공동방위의 건을 발표하는 것이 좋겠음. 이점을 주의해주길 바람.       화폐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방향에 동의하는 바임. 제국은 앞으로 여러 차례 성명을 발표하여 인도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성장을 야심있게 추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표명하려 함. 단, 발행 준비에 대한 건, 임시정부를 통한 지폐의 발행에 대해서는 편법(便法)으로서 일본의 구 지폐에 도장을 찍어 사용하는 등의 수단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음.       현재 진주한 군과 주민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군은 칙어(勅語), 전진훈(戦陣訓) ( 1941년 1월 8일 도조 히데키가 발표한 육훈일호(陸訓一號)를 의미하는 것.) 등을 능히 따르며, 충실한 대 이상을 가지고 있고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도 이해하고 있으며, ‘부모의 마음을 자식은 모른다’ 라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에서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러한 실천을 철저히 도모하고 있음. 그러나 이렇게 철저한 도모속에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부부싸움, 형제간의 싸움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함. 각하도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만큼, 이점에 대해서는 양해해주기를 바람.       최대 다수의 인도국민군을 전선에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한가지 주의드리고 싶은 점은, 충분히 현지군과의 협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임, 특히, 이 과정에서 저돌적인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됨. 예를 들어 공수를 통한 인도군의 투입은 각개 격파당할 가능성이 있기에 위험함. 현지 최고사령관과 진중한 상담을 한 후 신중하게 실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됨. 영국군도 상당한 준비를 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과 공동으로 실시되어야 함. 저돌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절망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 인도군은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만큼 초조한 감정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작전은 초조하면 적의 함정에 빠지게 될 수 있음. 저는 이러한 점을 걱정하고 있음.       각하께서 최고사령관으로서 제1선에서 지휘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하의 의견을 존중하나 각하께서는 최고사령관이실 뿐만 아니라 인도 재건의 완성이라는 큰 책임을 가지신 대정치가로서의 책무 역시 다할 필요가 있음. 이를 실념(失念) 해버리면 절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할 수 있음. 정치, 군사, 양면을 깊게 생각하고 처리하기를 바라는 바임. 노파심을 주의하길 바람.       극히 가까운 장래에, 인도에서의 행동을 이루기 유리해질 것이라 생각함. 하지만 저는 작전과 정치의 관점을 능히 균형있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임. 정치상에서 볼 때는, 호기라고 할지라도 작전에서 패배해버리면 만사휴의(萬事休矣)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다.) 가 되어버리는 것임. 전쟁을 시작했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함.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초조해버리면 이는 실패를 초래하게 될 수 있음. 작전에 대해서는, 통수에서도 진중하게 고려 중이니 각하께서는 현지의 군사령관과 충분한 협의를 하시길 바람. 적어도 단독 행동과 같은 모습은 주의해주길 바람. 일단 작전이 개시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태세 속에서 인도에서의 행동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됨.       유럽정세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각하의 의견과 약간 상통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시간도 없는 만큼 저는, 이에 관하여 간단한 소견을 개진하고자 함. 현재의 전쟁은 어떻게 보아도 일본이 중심임. 하지만 대동아전쟁의 완수, 대동아에서의 행동은 본질적으로는 유럽에서의 전쟁 상황에 따라 어떻게든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임. 유럽에서의 추축국 측의 정세가 유리해지면 일본의 짐 역시 가벼워질 수 있음. 만약 불리해진다면, 일본의 짐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음. 즉, 대동아전쟁의 완수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나, 유럽의 전쟁과 상호적으로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임. 유럽이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일본도 즐거울 것임. 따라서 유럽정세는 대동아전쟁의 완수에 근본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또한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한 판단도, 각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음. 독일은 아직 여력이 있다고 생각됨. 만일 약해졌다고 할지라도 유럽은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것임. 그사이에 대동아는 착착 정비될 것임.       미국은 전쟁 전에 “일본을 4개월 안에 처리한다” 라고 호언장담하였음. 하지만 현재 상황이 어떠한가를 생각해볼 것. 미국은 귀중한 2년을 우리 앞에서 허비하였고 미국이 직접 명령한 타격은 대실패로 드러났음. 우리들은 미국이 이러는 사이에 대동아를 확고불발(確固不拔)한 모습으로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이를 점점 확고하게 하려 하고 있음. 이러한 상황에서 각하는 초조하지 않고 착실히 행동할 필요가 있음. 초조하면 초조할수록 적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임. 현재 우리가 영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초조함” 이라고 생각함. 따라서 초조해서는 안됨. 만약 우리 모두가 초조해한다면 초조한 만큼 적에게는 기회가 되는 것. 우리는 이를 주의할 필요가 있음.       현재 각하는 장래에 일본이 인도에게 베푼 호의, 차관 등은 미래에 갚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보지만, 일본은 이러한 대가를 일절 바라지 않음. 인도가 인도 본연의 자리를 찾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음. 일본이 바라는 것은 이뿐임, 다른 의도는 없음. 부모에게는 자식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되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됨. 일본과 인도의 관계는 이와 다르지 않음. 아직 각하께서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시지 못한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폭소)       독일의 전력 등에 대해서는 적의 모략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됨. 이러한 사상모략에 대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음. 각하는 정치인인 만큼 특히 이러한 모략에 빠지지 않고 민중을 마땅히 계몽시키기를 소망하는 바임.       마지막으로, 귀국길의 무사를 기원하는 바임.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㉕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국회 연설 (1943.11.25)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인사 (1943.11.12. / 총리관저 소객간(小客間))       도조 히데키 : 이번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각하의 출석과 협력을 통하여 성공리에 종료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경축할만한 일입니다.       완 와이타야콘 : 저도 이번의 성공에 대하여 진심으로 축하를 표하며 또한 존중의 환대를 해주신 점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도조 히데키 : 체재중에 불편한점도 많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송구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완 와이탸야콘 : 끝까지 이렇게 환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귀국 후에 대동아회의의 성과에 대해 피분 총리에게 상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총리께서도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를 파악하고 조속히 실시하기 위해 노력하려 할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도조 히데키 : 일본도 물론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를 철저히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번의 회의는 명확하게 의견의 일치가 되었기 때문에 성공리에 종료될 수 있었다고 강력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일본은 앞으로도 한층 더 협력을 강화하여 대동아전쟁의 완수, 대동아건설의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부디 귀국 후에 피분 총리에게 (이를) 상세히 설명하여 앞으로도 공동의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완 와이타야콘 : 저는 피분총리도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에 대하여 충분히 결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번의 회의를 통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물론, 각 대표와의 관계도 친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대하여 동경(同慶) 하는 바입니다.       도조 히데키 : 귀국은 언제 하실 예정이신지.       완 와이타야콘 : 14일에 타이 왕국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코네(箱根)에서 2일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㉔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국회 연설 (1943.11.25)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호세 라우렐 – 도조 히데키간 회담 요지 (1943.11.10. 오후 4시 15분~ 오후 5시 10분, 총리관저 소객간(小客間))       ◎ 호세 라우렐의 발언 요지       12일 귀국할 예정임. 필리핀 독립이라는 이번 기회에 일본정부의 필리핀 정부에 대하여 표해주신 수없는 호의와 방문중 일행에 대해 베풀어주신 친절에 대해 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함. 또한 최근 남태평양에서의 대전과에 대해 축하를 표하는 바임.       귀국 후에는 대동아공동선언의 요지를 의회에서 표명하는 것과 동시에 이를 실행하여 민중의 철저한 개조를 이끌어 낼것임.       도조 총리 각하의 허락을 얻어 필리핀 국내 사정에 대해 보고하면서 쿠로다(黑田) 최고 사령관, 와치(和智) 참모장 (구로다 시게노리(黒田重徳) 당시 14군 사령관을 의미.) 및 무라타(村田) (무라타 쇼우조 (村田省蔵) 당시 필리핀 대사를 의미. 무라타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까지 필리핀 대사를 역임했다.)  대사등을 언급하면서 위대한 군인, 정치가를 파견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며 이를 통하여 필리핀 정부와 일본정부간의 관계는 현재 더욱 돈독해지게 되었음.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았으나, 귀국 후에는 대동아회의에서 결정된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임할 것임. 책임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려 함. 이를 위하여 2~3가지 정도 논의하고 싶은 바가 있음.       일본인 고문 및 전문지도관의 파견에 대한건. 대사관을 통하여 이전에 전달받은 내용을 보면, 일본 측의 안은 총수 220명 가량을 파견할 것을 안에 담았으나, 필리핀 정부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에 대해 이견이 존재함. 농업, 공업, 재정경제의 전문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파견의 내용이 다뤄지지 않았는데, 이 방면에서는 일본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정치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일본의 고문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바임. 이와 같은 중요한 시기에 이러한 행동은 필리핀을 괴뢰정부로 보이게 하는 나쁜 인상을 줄 위험성이 존재함. 필리핀의 치안에 관한건. 치안의 확보를 위하여 출발전에 군사령관 및 대사와 협의하여 근본적 문제에 대한 요해(了解)를 얻게 되었음. 즉,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사령(大赦令)을 공표하여 아직 산지에서 일본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필리핀 동포들에게 귀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와 관련하여 2~3개월의 기간동안 군의 군사행동을 정지하여 귀순을 용이하게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요해를 도출하였음. 이를 통하여 치안의 회복도, 한층 더 진보하게 되어 필리핀도 생산증강에 만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함.       국가 지도자로서의 진두지휘에 관한건. 자신은 신체의 위험등은 염려하고 있지 않음. 민중과 직접 접하여 정부의 뜻을 전달하고 치안의 확보를 위하여 노력할 생각임. 때문에 대단히 송구하나 요구사항이 존재함. 이는 즉, 대통령 및 필리핀 정부용의 비행기 1기와 배 1척을 소망하는 것으로 , 이를 소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음. 필리핀은 제도가 많아 해당 지역들을 시찰하기 위해서는 비행기가 필요함. 또한 비행기로 갈 수 없는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 배가 필요함. 지금의 상황에서는 총리 각하로부터 비행기를 기증받으려고 함. 이는 송구하기 짝이 없는 일로, 필리핀으로서는 일방적으로 호의를 제공받기만 하고 있으며, 자신 스스로도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음. 이에 대해서는 송구할 뿐임.게다가 이전부터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보여준 태도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임. 지방시찰을 위하여, 필리핀 권내에 각지 군관들과 회견을 하기 위하여 2개월간 자본금을 준비해줄 것.       귀국에 임하면서, 다시 한번 일본에 대한 충성을 표하는 바임, 또한 각하에게는 이러한 다사다망한 시기에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람. 이는 대동아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임을 유념해주시길 바람.       ◎ 도조 히데키의 발언요지       라우렐 대통령의 대동아회의에 대한 협력과 참가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건강을 기원함. 일본은 대동아회의에서 결정된 대동아공동선언의 정신을 끝까지 이루기 위하여 방책에 있어 공동선언의 이러한 내용들을 반영하려하고 있음. 이 기회를 맞이하여 특별히 한마디 하자면, 이번 기회에 행정부의 최고장관 자격으로서, 각하의 방문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가까운 시기에 다시 한번 대통령의 자격으로서, 국가 원수의 자격으로서 방문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음. 각하가 최고군사령관 및 대사와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를 승인하며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고 있음. 하지만, 지금의 220인의 고문 및 전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임, 언급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일본은 현재 고문 및 전문가를 파견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필리핀에 대해 간섭하려는 의사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음. 또한 필리핀 공화국의 요구가 있을때만 파견할 것임. 각하는 필리핀 공화국 원수이신 만큼, 본건에 대한 결정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충분한 검토 후에 필요한 인원을 요구해주시길 바람. 치안에 확립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신 것처럼, 군과 대책을 세우고 대응하여 하루라도 빨리 이를 완성하고 생산의 증강을 할 수 있기를 바람. 때문에 치안을 제1의 우선순위로 할 필요가 있음.   말씀하신 대사령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방법적으로는 현지군과의 격의없는 의견을 교환 후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함. 저로선 특히 만의 있는 의견의 교환이 이루어져야한다는 점을 강조드리는 바임.   대통령 전용 비행기 1대에 대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대통령 취임의 축하기념으로서 전달하려 할 것. 배에 대해서는 해군 대신과 협의하여 최대한 빠르게 이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음. 비행기의 조종사 및 보관에 대해서는, 군이 담당하는 것으로 하고 또한 일본인 비행사를 쓰려 하고 있음. 대통령을 담당하는 조종사는 기술적인 신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하 자신에 대해 절대 충성하는 이를 필요로 함. 조종사는 적어도 4년간의 훈련 경험을 요하며, 필리핀인들이 적격하다 생각되는 이를 일본에 이야기하면 훈련을 통하여 충분한 훈련을 하게 한 후 일에 임하게 할 필요가 있음. 또한 각하에 대한 충성에 대한 부분도 고려 해야함. 이는 만일 각하가 적지역에서 납치되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보호하기 위함임. 또한 부품의 교환 및 점검에 대한 문제도 있음. 때문에 각하의 비행기는 군에서 담당하고 일본군의 비행사를 사용하게 하는게 안전하다고 생각됨. 각하께서 시찰을 하시겠다한 부분에 대하여 형제로서 빠르게 이에 조력하겠음. 다만 오지 지역에 대한 시찰은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함. 자본금에 준비에 대한 건은 2주간의 협의를 통하여 결정하도록 하겠음.    마지막으로, 각하의 건강을 기원하며 이는 필리핀의 장래를 위해서도, 대동아민족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됨. 각하에게 말씀드렸듯이 이번 일 이 끝난 이후 대통령의 자격으로 다시 한번 일본을 방문해주시기를 희망하는 바임.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㉓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국회 연설 (1943.11.25)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바모 (Ba Maw) 당시 버마국 내각총리대신. 그와 도조 히데키는 대동아회의 이후 별도로 회담을 진행했다. 바모는 이자리에서 일본의 행동들이 부당함을 명확하게 밝히기도 했다. 바모 – 도조 히데키간 회담 (1943.11.08. / 총리관저 소객간(小客間) 귀소) (당시 바모는 감기기운이 있었으며 (발열은 없었음) 이에 대해 도조 히데키는 건강과 쾌차를 기원하였고 이에 바모는 감사의 뜻을 표했음)       도조 히데키 : 각하의 귀국편에 대해서는 현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바모 : 후의(厚意)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도조 히데키 : 국사가 다망한 와중에도 이렇게 회의에 참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대동아회의를 통해서 각방면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은 이후의 공동사명의 수행에도 몹시 큰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실로 경사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바모 : 저는 처음부터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도조 히데키 : 저도 같은뜻입니다. 이에 더해 한마디 드리자면, 이번에 각하께서 버마국을 대표하시어 이번에 방문하시게 된 이유는, 이번의 회의가 행정의 최고장관 회의이기 때문으로, 각하께서는 이번에는 행정의 최고장관으로서 방문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 기회가 된다면, 행정최고장관이 아닌 국가대표로서 다시 한번 일본을 방문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회가 가까운 시기에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바모 : 후의(厚意)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 기회에, 저는 회담 개최중에 제안드렸던것처럼, 어떠한 형식으로든 중앙기관을 설치하여 대동아의 공동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등의 조치를 요청하려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도조 히데키 : 방금 주신 의견에 대해 고려해보겠습니다. 또한 만주국 대표의 제안도 고려하여 연구하도록 하려 합니다. 위의 제안에 대해서 한마디 드리자면, 우선 현재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버마국 대사를 통하여 알린 바가 있습니다만, 일본에는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기관으로서 대동아성이라는 기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동아성은 대동아 여러 국가를 종래의 외국과 같이 인식하지 않고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로서 교류하고 있습니다. 즉, 손님의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친(肉親) 의 관계로서 보살펴야한다는 생각속에서 대동아성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를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대동아성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친한 동료에게 우리는 동료가 집의 현관에 찾아왔을 때 동료로 하여금 벨을 누르고 정중하게 명함을 꺼내는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럴 땐 문앞까지 찾아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즉, 격식을 차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떤때가 되었든 편하게 방문하게 하고 우리도 편하게 그들을 맞이합니다. 대동아성이 그렇습니다. 대동아성과 대동아 각국의 관계는 이와 같은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대동아 밖의 국가와 외교를 진행할 땐 자주독립 존중의 원칙을 비롯한 여러 원칙 아래 외교를 진행해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대동아성과 같이 동료와 같은 친근한 관계는 아닌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친한 동료로 하여금 편하게 우리집으로 오게 할 때는 필요가 없었던 정중한 격식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경우에는 외무성이 이러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서양인에게는 대동아성의 행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모 : 유희있는 말 잘 경청했습니다. 현재 버마국은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쟁 수행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해주신 바를 생각하면서 계속하여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조 히데키 : 감사합니다.       바모 : 버마국은 이번에 협력대신을 수행원의 일원으로서 배치하였고 전쟁수행의 협력을 위하여 협력성을 설치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사다망한 가운데 죄송하지만, 여기서 저의 희망사항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여기서는 윤곽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협력대신으로 하여금 대동아성에 연락하여 전달하게 하려합니다.       도조 히데키 : 그러시죠.       바모 : 각하에게 부탁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3가지입니다. 첫 번째 는 버마정부와 일본군간의 전쟁수행에 협력에 관한 내용 이고, 두 번째 는 버마국 정부에 파견해주었으면 하는 고문 및 전문 지도자에 관한 내용 이며, 세 번째 는 버마국의 국민의 긴급 수요 물자에 대한 내용 입니다.       첫 번째 내용의 경우 현재 원만하게 실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일부 상층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나 그런 것으로, 바라건대 이 원만한 관계가 국가총력전을 견지하고 모든 계급 및 모든 이들에게 미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버마국 정부와 일본군 사이의 협의기관을 설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기밀에 접촉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최근의 일을 예로 들자면, 최근 일본측은 버마국 정부에 사전연락없이 주요 도로의 교통을 금지시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사전에 버마국 정부에게 연락만 되었어도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협의기관은 이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한 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협의기관의 부의사항에 대해서는, 기관이 최대한 광범위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군사기밀 관계상, 부의사항의 결정과정에서 군으로 하여금 군의 독자적인 입장 속에서 결정하게 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의사항의 결정과정에서 적어도 사전에 가능한 한 저에게 정보를 전달해주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현재의 고난을 완화하고 원만하게 유효한 전쟁협력을 가능하게 하기를 염원하는 바입니다.       또한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싱가포르 (원문에는 쇼난(昭南) 이라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명칭이 사용되었다.)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언론검열정책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저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것중 하나입니다. 인도인은 버마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버마국내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매우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점은 분위기가 변화하고 있다는 뜻으로서, 일본의 대 인도정책이 충분히 고려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또한 식량에 대해 살펴보면, 평소 버마국의 쌀 생산량은 약 4백만 톤 가랑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년의 생산 예측은 약 250만톤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부족의 원인은 일본군에 의한 사역(事役) 에 농민이 동원되기 때문이며 또한 농사에 사용되는 소를 징발하였기 때문으로, 이 역시 사전에 버마국 정부에게 사전에 연락하였다면 군의 수요를 충족시키면서도 쌀 생산을 떨어트리지 않을 방책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일본군이 현지 정책을 적절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으며 이 역시 버마국 정부와 일본군간의 협의기관이 있다면 이러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조 히데키 : 이렇게 이야기를 통하여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저도 처음 듣는 정보도, 기탄(忌憚) 스러운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의 방책 결정에 있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도움을 주셔서 기쁨을 느끼는 바입니다. 이야기 해주신 내용은 버마가 독립한 이후에 점차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또한 부모의 마음을 자식은 모른다는 말 도 떠오릅니다. 게다가 버마에 대한 적들의 반격은 점점 거세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알고 이러한 문제들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이를 시급하되 충분히 조절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협의기관의 설치에 대해서는 지극히 강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하여 다시 원활한 협력관계가 구성되기를 크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지 군 및 대사와 우선 상담한 이후 설치가 가능한지를 살펴보고 중앙에서 현지에 지시하게 하려 합니다. 또한 저는 현지에 계신 각하께, 일본군 사령관 및 대사 간의 정례 비공식 회담을 제안드리려 합니다. 이러한 제안이 각하의 간절함을 만족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물론 이러한 협의기관의 건도, 회의의 건도 각하께서 제안하셨다는 것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교통문제, 검열문제, 식량문제에 대해서는, 전쟁 목적의 달성이라는 관점 속에서 이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버마국 정부가 일본군 및 대사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대사에게도, 군에게도 중앙에서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이 기회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는, 관대한 마음으로, 큰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봐주셨음 합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근처의 이웃들이 서로를 동지로 생각하고 사이좋게 지낸다면, 이웃의 아이들 역시 사이좋게 지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아이들은 싸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어른들이 관대하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후 아이들 역시 다시 좋은 관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모 :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도조 히데키 : 형제도 싸울때가 있습니다. 요컨대 마음을 알고 있는 친한 사이에서도 싸움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바모 :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해 설명해주시니 귀에 속속 들어올뿐더러, 각하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전쟁협력을 어떻게 다시 원활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협의기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귀국 후 현지에서 신속하게 상담하며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버마의 민정에 대한 문제에 대해 국가주석으로서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도조 히데키 : 감사합니다. 버마 현지의 군사령관은 잘 알고 있는이로, 군사령관에게 솔직하게 말해 두겠습니다. 현지의 풍속, 습관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많은 문제가 일어나곤 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주의를 요하게 하겠습니다. 그 외의 점에 대해서는 각하로부터 현지군에게 연락을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모 : 최근에 일어난 일로, 군으로 하여금 정치범의 검속(檢束)을 행한적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버마인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국무대신을 비롯한 이들도 비판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본 사건에 대해서, 저에게는 어떠한 사전 연락도 없었습니다. 국무대신에게 전달 받은 바로는, 국가주석인 제가 이러한 문제를 우선적으로 아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으며 특히 의외인점은 헌병의 하급 장교 가 저를 방문하여 본 사건에 대하여 저의 방침을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원수로서 위 장교에게 응수(應酬) 하며 이러한 방문은 적합한 것이 아니며, 회답할 용의도 없다는 요지의 뜻을 전달하여 떠나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가까운 시기에 군사령관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려 합니다.       도조 히데키 :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들은 범위에서만 판단하자면, 진실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바모 : 위와 같은 일의 발생은 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건 물론, 버마 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도, 저의 지위를 우습게 할 뿐입니다. 이렇게 원수로서의 저에게 신뢰를 주지 않고,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일을 벌이는 것은 원수로서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하는 일입니다.       도조 히데키 :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대사 및 사령관에게 솔직하게 말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저부터 주의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는 각하를 하나부터 열까지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절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헌병과의 문제에 대해서는, 헌병이 버마에 황군이 진격했을 당시의 인식을 여전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역시 바꾸어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각하가 군사령관의 명령을 듣고, 행정부장관의 생각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 역시 각하의 지위에 곤란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하가 원수이시자 내각총리대신이신 각하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리들이 보았을 땐 하급자들에게 유감으로 여겨질 것이며 아직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바모 : 다음으로, 두 번째 쟁점인 일본인 고문 및 전문지도자에 대해선, 군사령관과 협의해본 결과, 중앙에서 일단 결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대사와도 상담해본 결과, 대사는 중앙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면서도 극력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최고고문에 대해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일반적으로 상담할 수 있는 이여야 하며, 지혜를 빌릴 수 있는 사람이기를 소망하는 바입니다. 그 외의 고문의 경우에는, 최고고문의 의견을 듣고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조 히데키 : 각하는 의중에 두신 인물이 있으십니까?       바모 : 아직 의중에 둔 인물은 없습니다만, 소망하는 사람은 국제관계에 밝고 군과도 관계가 좋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도조 히데키 : 본건에 관해서는 일단 알겠습니다. 인물의 선발은 가능하다면 각하가 도쿄에 계실 때 결정하도록 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충분히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발할 인물은 버마국의 국내 국정경영에서 각하 스스로가 극히 능력을 가지고 감독할 수 있도록, 일본과의 관계를 최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인물의 선발과정에서 중점으로 두려 합니다.       바모 : 좋습니다.       도조 히데키 : 이를 위해서는 유망한 인물이 좋겠습니다. 또한 각하의 의도와 맞는, 버마국과 현지 일본기관과 관계를 조절할 수 있는 인물이면 좋겠습니다. 사쿠라이(櫻井)  (바모가 대동아회의 기간동안 묵었던 숙소의 주인인 사쿠라이 효고로(櫻井兵五郞)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15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이후 버마군정기관최고정치고문으로 활동한다.) 씨와 같은 인물은 어떻습니까?       바모 : 사쿠라이씨 같은 사람은 최고로 소망하는 바입니다. 그는 버마에 대한 공감도 있으며 유능한 인물이며, 군과의 관계도 좋은 인물이니만큼 소망하는 바입니다. 그 외에도 기획, 교통, 식량에 대해서도 3명의 고문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고의 고려를 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문지도자를 필요로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지군과 협의하려 합니다. 고문 및 전문지도자의 임명에 대해서는 버마 정부의 승인 및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도조 히데키 :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고문 및 전문지도자는 버마국 정부의 직원이기 때문입니다.       바모 : 3번째 쟁점인 물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세한 사항은 대동아성을 통하여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오랜기간에 걸친 회담에 대하여 바모는 감사의 뜻을 표명하였고 당시 다낭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㉒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종료후 기자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국회 연설 (1943.11.25)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왕징웨이의 중앙전신사 인터뷰 (1943년 11월 6일, 대동아회의 종료후)             대동아전쟁은 공영주의대 식민주의의 전쟁으로, 왕도 대 패도의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의 의의는 파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작게는 동아의 영미 침략세력을 소탕하는 것에 있고, 크게는 대동아공영주의를 확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아 민족이 성의로 인치단결하여 호혜를 도모하고 동거동락하여 생사를 함께하게 된 것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개최된 대동아회의는 동아의 도의정신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아 각국을 하나로 묶어 영미 식민주의의 억압과 수탈 정책을 타파하고 동아 각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독립과 자주속 애국심을 충실히 가지게 하고 공존공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동아 각국이 근본정신을 도의정신에 두어 단결하게 된다면 대동아전쟁은 반드시 승리하고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수년간, 저는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동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고, 이제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에 대해 무한한 감회를 느끼는 바입니다. 저는 열성을 다하여 대회의 성공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최대의 노력으로 중국의 전국민을 이끌고,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를 실천하여 화평운동을 관철하고, 중국의 독립을 구하고, 동아의 해방을 실현하고, 대동아전쟁의 완성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왕징웨이의 기념방송 (1943.11.08.)       저는 이번 세계사에서 위대한 의의를 가진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내심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의를 통해 일본 도조 수상의 위대한 이론을 경청하고, 각국 대표들의 위대한 이론을 직접 접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습니다.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영미 양국은 제멋대로 침략과 착취정책을 자행해왔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세계 지배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세력은 그 야망을 처음에는 남양, 그 다음에는 중국으로 확장시켜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미국도 태평양을 넘어 동아를 침공하여 영국과 연합하여 협공지세를 형성하였습니다. 당시 동아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으나, 다행히 일본은 홀로 일어서는데 성공하여 영미의 야망을 막아내고 영미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그 야심은 변하지 않아 계속하여 동아 민족을 이간질 시키고 서로 싸우게 하여 동아는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어 영미 양국의 세력이 동아에서 무너지고, 영미 침략이 착취해왔던 소득과 시도는 모두 일본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대동아의 모든 민족은 일본이 동아를 지켜낸 공적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영미 양국이 동아를 해치고 동아의 침략 정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여 영미세력을 격퇴하고, 나아가 이들이 펼쳤던 정책을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즉, 공존의 구호를 통해 침략의 구호를 바꾸고, 공존을 통해 착취를 끝내고, 동아민족이 각각 자주독립할 수 있게 하고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문화방면에서는 그 창의력과 조화력을 발휘하게 하며, 경제방면에서는 호혜를 실행하고, 장단점을 서로보완하여 유무상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방침은 영미의 기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동양의 도의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서양의 이기적인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대동아회의는 일본이 주최하여 동아의 각국가들과 연합하여 단결의 힘으로 도의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위대한 공헌으로, 대동아 각국가들의 영원한 우호의 토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원한 화평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일본의 유신이 동아의 기회가 될 것" 이라는 것은 이제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는 일본이 중국의 불평등 철폐에 협조하는 것도 소망하였는데, 이 또한 이제는 구체화되었습니다.       저는 몇일 전 주중 일본대사와 중일동맹조약을 체결한데에 이어 오늘 중화민국을 대표하여 대동아회의에 참석하여 대동아공동선언에 서명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분들도 모두 같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반드시 관철될 것이고 대동아의 건설도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위의 목적과 임무를 완수, 달성하는 것은 동아 각 민족의 노력, 그리고 동아 공동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우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부흥하길 희망하고 대동아전쟁을 관철시켜 대동아 건설완성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동아의 광명대업은 대동아 각 국가민족이 스스로 노력하고, 함께 노력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미가 예전에 행해오던 침략과 약탈의 정책은 이미 무너졌고, 영미가 행해왔던 이간질도 이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어떠한 정책을 펼치든, 어떠한 감언이설을 펼쳐 우리를 유인하거나 이간질을 하더라도, 우리의 신념은 이제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억압을 받지 않고 속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동아 각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대동아를 해방시키고 대동아의 광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㉑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1943.11.18.)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0.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0.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0.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0.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0.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대동아회의 그 이후] 21.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2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23.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8) 24.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0) 25. 완 와이타야콘의 귀국 인사 (1943.11.12) 26.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1943.11.13) 27.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국회 연설 (1943.11.25)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일정표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여기에는 대동아회의의 종료 후 대동아회의의 결과 및 성과 (대동아회의에서 발표된 대동아공동선언등) 를 홍보하기 위한 방법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1943.11.18.) 대동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대동아공동선언의 취지를 철저하게 대동아 각국의 대동아전쟁 완수의 결의와 대동아건설에 대한 단결과 협력으로 대내외에 선전하여 적측의 전쟁 목적을 절멸시키고 전의를 상실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전 국호 선전 실시 요강(菊號宣傳實施要綱)에 따라 활발하게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대내외에 선전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선전 실시의 개황은 다음과 같다.       대내선전 1-1 : 신문, 통신 각 신문사 및 통신사 편집 간부들에 대해 사전에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의 중요성을 설명하여 철저히 사전에 내면지도를 충실히 함. 동시에 각사 언론위원에 대해 대동아공동선언의 취지를 반복하여 해설할 것을 지시함. 대동아공동선언 발표 당일 (6일) 의 석간 혹은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개최일 조간 (7일) 에 대해 기자를 증원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함. 이후의 신문의 각면에 대해 대동아공동선언의 내용 및 정신을 대외적 및 대내적으로 반복하여 해설할 것을 지도함. 전항에서 다뤄지지 않은 다른 언론사, 언론인으로 하여금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기고를 하게 유도함.       1-2 : 방송 대동아회의장, 대동아결집국민대회장에서 녹음한 내용을 반복 재생하는 방송을 11월 6일부터 7일동안 진행함.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보도, 해설 및 강연을 11월 5일 이래 현재 여러번의 방송을 진행함. 이후로도 방송 및 각종 수단을 통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을 인용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의 5원칙하고 대동아건설의 높은 도의성과 필승의 신념을 인상시키고 함양하는 방송을 편성하여 실시할 것. 1-3 : 영화 일본뉴스 제179호를 특별호로 하여 3파트에 걸쳐서 각국대표의 하네다 공항 착륙부터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내용을 수록하여 대동아회의의 내용을 보도하기 위해 현재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음. 일본영화사 (日本映画社) 로 하여금 특별 선전영화를 개발하게 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의 의미’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게 하려 하고 있으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현재 일본영화사가 현재 제작하고 있는 선전영화인 ‘일억 전투 배치에 나서라 (一億戰鬪配置に就け) 의 적당한 부분에 대동아회의와 관계에 있는 장면들을 삽입할 예정임. 기타 극 영화, 문화 영화에 대해서도 수시로 적당한 기회에 대동아회의와 관된 내용을 다루게 할 것.       1-4 : 연극, 연예(演藝) 수시로 적당한 기회에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의 선전이라는 취지에 대해 철저히 협력하도록 지도함.       1-5 : 음악 일축(日蓄)  (ニッチク, 1942년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가 사명을 변경한 이름이다.) 으로 하여금 일본방송협회에서 녹음한 대동아공동선언 및 대동아회의,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녹음본을 통하여 적절히 편집하여 ’대동아결집선언집(가칭)‘ 이라는 이름으로 해설본과 함께 음반집을 만들어 보급할 예정임.       대동아공동선언 채택에 대한 도조 총리의 연설을 단독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보급할 계획이 있음.       1-6 : 주보(週報) 11월 10일 호에 ’대동아회의의 의미‘를 게재하였음 5원칙을 중심으로 하여 해설을 어렵지 않게 작성하여 ’대동아공동선언해설‘을 12월 1일 호에 대동아공동선언의 5항과 함께 게재하기 위해 집필중에 있음. 대동아전쟁 2주년호 (12월 8일호) 에 공영권 각지의 현황을 게재할 예정으로 현재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 현지 각지국으로부터 원고가 도착하고 있음. 1-7 : 사진주보 (寫眞週報) (일본 내각정보국에서 발행하던 국책 주간 잡지로, 잡지에는 다양한 국내외 소식을 사진으로 전달했다.) 11월 17일 호 (제298호) 에 대동아회의와 관계 있는 사진, 기록을 수록하였음. 대동아전쟁 2주년 기념호 (12월 8일호, 300호) 공영권 각지의 동향을 게재할 것.       1-8 : 주보총서 (週報叢書) 주보총서의 하나로서 대동아회의의 기록, 선언요해, 각국대표발언 전문,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연설집등 필요한 자료를 책으로 수록하여 12월 중에 5만 부 (B6 크기, 150장)을 발매할 예정임.  ( 이 과정을 거쳐서 정보국은 12월 15일 《アジアは一つなり (아시아는 하나다) 》을 출판하였다.)       1-9 : 강연회, 전람회등 기타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내용 지도를 실시하였음. 찬드라 보스씨의 강연회를 개최 지도하였음. 백화점 점포의 창문에 현수막을 배치하여 홍보하였음. 일본선전협회로 하여금 빠르게 표어를 제작하여 보급하게 하였음. 각종 전람회의 개최를 지도하였음. 벽에 붙이는 형태의 신문을 발행할 예정. 그 외의 전람회 개최를 지도할 예정. 정보위원회를 이용할 예정. 일반 강연을 통한 선전을 개시할 예정. 도쿄도 주최 대동아결집소국민대회(大東亞結集少國民大會)를 개최 지도할 예정.       1-10 : 문화단체 동원 대동아언론보국회(大東亞言論報國會) 회원을 동원하여 신문 및 잡지에 기고할수 있게 하였음, 방송, 강연회 개최 및 단행본을 발행하였음.     일본문학보국회(日本文學報國會) 소속의 작가 및 신진 작가들로 하여금 대동아공동선언의 5원칙의 내용과 관련있는 소설, 시 , 희곡등을 집필하게 하여 발표 하여 신문, 잡지, 방송등에서 대동아회의에 대한 문학자의 입장을 문화적으로 표하는 것을 전개하려 하고 있음.   위 두항의 우수한 작품은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대외선전을 위해 활용할 예정.       대외선전 2-1 : 신문, 통신 정보국 대변인의 발언을 통하여 11월 5일 이후 수차례 회의의 성과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였음. 이후로도 기회가 되면 매번 회의의 성과에 대해 선전할 예정. 대동아회의에 관하여 도쿄의 여러신문에 주요한 기사를 게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전부 동맹통신사 및 일본방송협회가 대외선전에 활용할 수 있게 하였음. 11월 7일 각국 대표의 신문기자 합동회견에 외국인 기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석시켜 기자들의 본국에 소식을 전달하게 하였음. 또한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수반은 10월 31일 외국 기자들과 회견하였으며 별도로 독일 기자와 단독으로 특별 인터뷰를 진행하였음. 2-2 : 대외방송 대동아선언을 각국대표명,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을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힌두어, 스페인어로 매일 반복하여 대외에 방송하고 있음. (위에서 언급하였던 방송용 특별 녹음음반을 작성하여 올해 동안은 지속할 것.)   대동아공동선언 채택에 대하여 도조 수상의 연설을 이에 대한 해설과 함께 매일 반복하여 대외에 방송하고 있음. 중국, 만주국, 타이 왕국, 필리핀 공화국 등 각국대표의 회의에서의 연설을 녹음하여 11월 8일 이후로 각방면으로 반복하여 방송하고 있음. 자유인도임시정부 수반 찬드라 보스씨의 발언은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지역을 향하여 방송 되었고 16일에는 독일과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지역을 향하여 총 2회 가량 3종의 녹음본을 토대로 반복 방송하였음. 회의의 전과정은 일본방송협회로 하여금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녹음하였으며 필요시 사용하기 위해 편집하여 최대한 전과정에 가까운 음반을 제작할 계획중에 있음.       2-3 : 영화 ’대동아뉴스‘ 버마어판, 태국어판, 중국어판, 영어판을 특별 제작하여 각대표의 대동아회의, 대동아국민결집회의, 메이지신궁 국민연성대회 (1943년 11월 7일,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참가후 방문하였다.)  등의 활동 내용에 대하여 2파트로 나누어 편집하여 11월 중순에 각국에 배급하기로 하였음. 위 뿐만 아니라 별도의 임시 특별호를 일본영화사 시사 영화부에 제작을 담당하게 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을 3파트로 나누어 해설하기로 하였음. 위의 영화는 대동아공동선언의 5원칙을 중심으로 영상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프랑스어판, 영어판, 중국어판, 태국어판, 버마어판, 말레이어판을 편집 제작하여 남방 각지 및 유럽에 배급하기로 하였음 (12월 초순 완성 예정)       2-4 : 사진 대동아회의와 관련 있는 사진들을 보도용으로 편집하여 대독일용, 소련용,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용, 태국용, 버마용, 필리핀용, 말레이용 8가지를 만들 것. (필수 사진 6장은 모두 공통으로 포함할 것)       2-5 : 음악 대동아공동선언 발표 및 각국대표 소견등을 음반으로 제작하여 참가 각국은 물론 독일, 소련등에도 전달하여 공중 집회 등에서 수차례 발표하여 내용의 보급을 철저히 할 예정. 대동아공동선언독가 (大東亞共同宣言讀歌)를 작곡하여 음반으로 만드어 대동아 각지 및 독일, 소련등에 배포하여 동시에 공연회를 수시로 개최할 계획의 실시에 착수하였음.       2-6 : 서적 선언 및 각국 대표 연설 기록, 회담 경과등을 도표등을 넣어 편집하여 영문 팜플렛 10만부 (B4크기 20장)을 발행할 예정임. (11월 중순쯤 완성될 예정.) 대동아건설 5원칙을 해설하여 각지 원주민에게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협력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는 목적으로 사진, 스케치, 만화등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태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버마어,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중국어 팜플렛 3만부 (B6크기, 32장)을 발행하여 남방 각지에 배부할 계획중임. 간단한 회의 기록 및 각대표의 발언을 선별하여 수록하여 정부가 공표하는 책자 (B6, 50장가량)을 2만부 제작하여 구미(歐米) 및 남방 지도자들에게 배부할 계획임.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⑳ 대동아결집국민대회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 본래 각 대표마다 글을 별도로 작성하려 했으나 묶어서 작성하였습니다.) 대동아회의가 종료된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가 개최되었다. 해당 대회에는 대동아회의에 참가했던 각국 대표 및 열석자들이 참가했으며. 각국 대표들은 히비야공원에 집결한 일본 국민 및 각국 유학생들을 향하여 연설을 하였다. (해당 행사에는 특별히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Heinrich Georg Stahmer) 당시 주일독일대사도 참가하여 연설을 하였다.)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년 11월 7일, 도쿄 히비야공원)       오전 8시 : 궁성앞에 참가자들 결집 (약 10만명, 대정익찬회 장년단원 2만 5천명, 산업보국회, 농업보국회, 상업보국회, 해운보국회, 청소년단체, 대일본부인회, 국민 학교 교직원들, 종교교화단체등 참가, 일반 참가자 남성은 방공복장, 여성은 몸빼복장을 착용, 4열행진, 각국 유학생들도 참가) 오전 9시 40분 : 해군군악대의 연주 개시 (무대 중앙의 하단에 위치했다.) 오전 10시 10분 : 행사 개막, 궁성 참배, 국가 (기미가요)제창, 대정익찬회 고토 후미오 국무상의 조서 낭독, 아베 노부유키 익찬정치회 총재의 개회사 및 전선 황군 장병에 대한 감사인사 오전 10시 30분 :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각국 대표 입장, 아오키 대동아 대신이 각국 대표를 소개 및 안내, 이로하순 으로 입장 (맨 마지막이 스타머 독일대사) , 착석       아베 노부유키 (익찬정치회 총재) 개회사             금일 이렇게 대동아결집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중화민국, 타이 왕국, 만주국, 필리핀 공화국, 버마국 및 자유인도임시정부의 각 대표를 이렇게 단상에 모시고 대동아결집의 맹세를 굳히고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부동의 신념을 표명할 수 있게 되어 주최자측으로서 영광스럽고 감명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감명을 느끼는 동시에 황군의 진충(盡忠)과 지성(至誠), 그리고 선모용전에 대해 갚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동시에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전국민 총전투배치에 대한 성명을 받들어 널리 대동아 국가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열의를 한층 다지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금일 참석하신 여러 맹방 각국의 물심양면에 걸친 제휴 및 협력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동아에 있는 국가 및 민족의 대부분은 영미세력에 의해 그 자유와 행복을 박탈당하고 착취의 대상이 된지 수백년이 되었지만, 이번 대동아전쟁의 발발 후 불과 2년만에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이렇게 이곳에 오시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각각이 선린우호와 상호돈목의 의(義)를 맺을 것을 맹세하고 나아가 동아의 대사를 논의하게 된 것은 실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으며 세계에 있어 경이로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숭고한 정신 위에 서서 건설된 이번 회의의 광경은 이전에는 실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동아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나아가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이를 경축하는 바입니다.       부디 전 아시아 민족 모두가 정의와 공도(公道)를 위해 싸우고 있는 이 대동아전쟁의 진정한 의의에 입각하여 전국가 전민족을 신질서 및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는 일대의 사명에 대하여 총력을 다하여 끝까지 매진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인사말을 마치는 바입니다. (이후 황군에 대한 감사결의를 진행)       황군에 대한 감사 결의       대동아의 성전이 발발한지도 2년이 되었다. 천황 페하의 위세 아래 우리 충용한 제국 육해군은 미증유의 대전과를 거두어, 적을 동아의 천지에서 구축하여 황위(皇威)를 대내외에 마땅히 떨치며 대동아 결성의 초석을 이루었다. 이러한 훈공, 전과는 실로 생각건대 고금의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었던 일이다.       서전에서 승리한 이래, 우리는 불패의 태세는 더욱더 확고해지고 있다. 원수 영미는 각지에서 총반격을 기도하고, 잃은 땅을 탈환하기 위해 광분하고 있어 전황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끝이 없다.       하지만 제국 육해군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선모격투(善謀激闘) 하고 유악(惟幄)한 계책을 통하여 매순간 적의 공격을 격퇴하며 더욱더 성전에서 완승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이는 국민에게 감사하고 감격해야 할 일이다.       이에 대동아결집국민대회는 대동아로 하여금 총협력하게 하여 대동아전쟁의 완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과감히 싸울 것을 다짐하고 삼가 제국육해군의 위대한 행동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하고 아울러 숭고한 호국 영령에 대한 깊은 경조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위와 같이 결의한다.       쇼와 18 (1943) 년 11월 7일 대 동 아 국 민 결 집 대 회             (이후 도조히데키가 단상에 오른다.)       도조 히데키의 연설       국민 제군 여러분! 대전쟁이 진중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중화민국, 타이 왕국, 만주국, 필리핀 공화국, 버마국 및 자유인도임시정부를 각각 대표하는 각국 대표 각하를 맞이하여 대동아결집국민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실로 쇼와(昭和)시대의 일대 성의(盛儀)라고 할 수 있으며, 제군들과 이를 함께 진실되게 축하하는 바입니다.       대동아 각국 대표는 도쿄에 모여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였고 그리고 대동아회의에서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 신질서 건설 방침에 관하여 격의 없는 협의를 완수하여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내어 협심육력(協心戮力) 으로서 중대한 공동의 사명을 달성한다는 결의를 새로이 하여 어제 대동아공동선언을 대내외에 성명한 바 있습니다.       이는 도의에 기초한 공존공영의 질서 건설, 상호의 자유독립을 존중하는 대동아의 친화 확립, 각민족의 창조성을 신창(伸暢) 하는 대동아 문화의 양성, 호혜속 긴밀히 제휴하는 경제발전, 인종적 차별을 철폐하여 세계 진보에 대한 공헌이라는 이상의 5대 강령에 근거하여 대동아 각국은 서로 제휴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새로운 대동아를 건설하여 세계 평화의 확립에 기여하겠다는 결의를 굳게 다지고 이를 명확하게 세계에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널리 알고 있으시겠지만, 대동아전쟁의 발발 이후 대동아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황군이 한번 진격하자 가는곳마다 선모용전하여 개전 반년이 되지 않아 수년간 동아를 침략해온 영미 세력은 홀연히 구축되어 소탕되었습니다. 게다가 적은 계속하여 반격을 해오고 있으나 이를 모두 격퇴시키며 대동아의 신건설은 착착 그 발걸음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후 일만(日滿) 양국은 일덕일심으로 친목을 더더욱 돈목히 하고 있으며, 일화 (日華) 양국은 기존의 모습에서 일절 탈피하여 동아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하여 동맹국으로서 새로이 밀접한 관계를 결성하였습니다. 또한 일본과 타이왕국의 동맹관계는 더욱 새로운 한걸음을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버마국은 영국의 다년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하였고, 필리핀 역시 미국의 기만과 착취에서 해방되어 빛나는 신생 국가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우국의 열정을 가진 인도인은 영미의 난폭하고 끝이 없는 억압에서 이탈하여 4억 민중의 숙망인 독립과 자유, 그리고 번영을 획득하기 위해 수바스 찬드라 보스씨가 이끌고 있는 자유인도임시정부 밑에서 힘을 다하여 궐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동아전쟁 발발 후 2년도 되지 않아 새로운 대동아의 기초는 확립되었고, 그 속에서 이렇게 대동아 각국의 대표가 도쿄에서 만나 획기적인 일대의 회의를 개최하여 빛나는 성과를 거둔 오늘의 본회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세계의 성전(盛典) 이며 세기의 장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동아에서는, 안에서는 각국이 서로를 믿고, 친하게 지내고, 협력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전력을 다하여 영미의 반격을 격퇴하고 있습니다. 숙적 영미가 그들의 물질력에 의지하여 이름바 총반격을 반복하는 것은 확실히 예상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적은 정의의 편이 아닙니다. 대동아 전쟁은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들어낸다는 불교 용어.)  의 성전으로, 대의명분은 명확하게 우리 대동아 국가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궁국의 승리가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서전의 대전과에 의해 필승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은 웅혼(雄渾) 히 과감한 작전에 호응하며 국내 태세를 결전화하고 급속하게 전력의 획기적 증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대동아 각국은 이제 밀접하게 일본과 책응하고, 협동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하여 숙적 영미의 반격을 분쇄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대동아 영원의 안정을 도모하기로 한 결의는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승에 대한 믿음을 점점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독일을 비롯한 구주의 맹방 국가들은 더욱더 확고한 국내의 결속 속에서 감연하게 영미를 격멸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필승의 신념 아래, 더욱 강인한 투지를 가지고 끝까지 전쟁에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 대회를 통하여 우리의 이 열렬한 필승의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투지를 표명하는 것은 국민제군과 저의 진실된 숙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저는 대동아 각국의 대표를 맞이하여 행해지는, 이 의의 있는 본 대회를 경축하는 동시에 대동아결집의 결의와 필승의 확신을 명확하게 피력하며 저의 인사를 끝내는 바입니다. (박수)             (이후 대동아전쟁완수결의가 진행되었다.)       대동아전쟁완수결의       대동아의 건설은 하루가 다르게 착착 진행되어 우리의 건국 이상은 착실히 구현되고 있다. 성전 발발로부터 2주년, 빠르게도 이 여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위(皇威)는 전 동아에 이르게 되었고, 이는 실로 감격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제 대동아의 여러 국가 민족은 영미의 다년간 진행된 무도한 압박으로 해방되어 숭고한 도의에 입각하고 각각의 자리를 얻어 대동아 건설의 유업(遺業) 달성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는 대동아를 영원히 대동아를 위한 대동아로 만들어야 하며 나아가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원수 영미는 계속하여 집요한 반격을 거듭하여 대동아를 탈환하기 위해 광분하고 있다. 이에 전동아는 반드시 공동으로 힘써 필승부동의 신념 아래 그 총력을 응집하여, 끝까지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다시는 대동아에 있어서 영미가 도량발략(跳梁跋扈)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 만연하다는 뜻)  하지 않게 하고 세계신질서 건설에 협력할 것을 기한다. 위와 같이 결의한다.       쇼와 18 (1943) 년 11월 7일 대 동 아 국 민 결 집 대 회                  왕징웨이의 연설 (왕징웨이가 단상에 오름, 일장기에 경례, 준비해온 원고를 가슴에서 꺼냄) 저는 오늘 맹방인 일본의 성대한 국민대회에 참석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중일양국은 이미 중일동맹조약 체결로 양국의 영속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일본은 중국에 대해 최대의 원조를 하기로 결정하였고, 중국의 독립자주를 확실히 보증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동아보위 및 동아건설의 책임을 분담하게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제 대동아회의는 성황리에 폐막하였으며, 대동아공동선언은 이미 세계에 발표되습니다. 중국은 대동아 각국과 서로 협력하여 광명의 대도로 함께 나아가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대동아의 사업은 오직 동아인 자신이 해야만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백년간 동아를 침략해온 영미는 그 야망과 폭력으로 동전 세계를 삼키려 했고, 이를 동양의 일본은 앞장서서 이들의 야망과 폭력을 막아냈습니다. 이는 일본 국민의 독립투쟁의 결과로써 참으로 감복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국력을 강화하여 동아에서의 영미의 폭력을 격파하고, 동아를 다시 동아인에게 돌려주고 동아의 일은 동아 모두가 스스로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고, 모두가 함께 투쟁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공존공영하기로 하였습니다.       무릇 동아인, 특히 중국인은 이러한 일본의 정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건설을 실현하여 일본국민 제군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영미의 멸시와 속박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 노력하여 이 동포들이 빨리 깨닫고 영미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와 같은 잊방에 설 수 있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국민대회 제군 여러분,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민정부는 일본과 동거동락하기를 바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국민정부는 일본과 그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결의와 의지는 더욱 공고해질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어 각국대표들의 연설이 진행되었다.)             완 와이타야콘의 연설       이 국민대회는 일본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대동아전쟁을 수행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전쟁 사유는 정의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자국의 방위를 보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백년 전부터 일본의 우방이었던 우리 타이 왕국 국민은 지금도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공영권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 있으며, 타이 왕국군은 일본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양국은 경제 및 정치 방면에서도 긴밀하게 제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관계는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번 대동아회의에서는 대동아 각국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긴밀히 제휴하여 매진하겠다는 결의를 보였습니다. 대동아 각국은 이 숭고한 대이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일본 정부 및 국민에 대하여 심심한 감사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장징후이의 연설       금일 대정익찬회 및 익찬정치회 공동주최의 국민대회가 개최되어 우방 일본 국민 여러분에게 한마디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저는 진실로서 흔쾌하게 감격하는 바입니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이후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실로 광활한 전역에 걸쳐서 극혁한 대전과를 쌓고 있는 우방 일본 장병 여러분들의 충성과 용무(勇武) 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용감하게 산화된 용사의 영령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저는 작년 3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사은(謝恩) 특파대사로서 일본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직후의 일본 관민들의 헌거(軒擧) 한 의기와 굳건한 결의를 친히 견문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저는 우리 국민에게 이러한 실정을 전하여 국민들에게 많은 감명을 전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대동아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게 되며 저는 일본 국민 여러분이 더욱 필승의 신념에 불타오르고 태연하게 스스로가 전장을 위해 과감하게 싸우겠다는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마음이 든든해지며 우방 일본에 대한 믿음을 흔들림 없이 한층 더 깊게 느끼는 바로, 이러한 저력을 가진 일본 국민에 대해 완전히 감복하는 바입니다.       우리 만주국 역시 대동아전쟁의 완수를 위하여 일만공동방위, 일본과 만주국은 일덕일심이라는 대의에 입각하여 황제폐하께서 친히 먼저 모범을 보이고 있으며, 4천만 국민이 하나가 되어 북방의 장벽으로서 나아가 장래 대동아공영권의 거점으로서 부과된 중대사명을 위하여 밤낮할 것없이 부지런히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만주국 관민은 지금이야말로 건국 이래 우방 일본으로부터 받은 의로운 은혜에 보답해야할 때이라고 생각하여 보국과 감사의 정성으로 증산과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은혜를 갚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떠한 곤란을 이겨내고 어떠한 장애물도 돌파하여 전시 하에 우리 국가에게 주어진 중대 책무를 완수하여 신동아건설에 적합한 ‘제2기 건설’ (1942년 실시된 제2차 5개년 계획을 의미하는 것) 을 성취하려 굳게 결의하고 있습니다.       동아가 폭려(暴戾) 스러운 영미의 침략과 속박에 완전히 지배당하게 된지 수 백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일본 장병의 용전으로 동아의 천지에서 영미의 세력은 완전히 쫓겨났고, 동아는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버마국 및 필리핀 공화국을 비롯한 새로운 맹방 국가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고, 최근에는 자유인도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며 대동아에는 부흥과 건설의 기운이 고동치고, 끊임없이 흐르는 공존공영의 근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어제 우리들이 대내외에 천명한 대동아공동선언은 바로 이 새로운 동아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당당히 세계에 나타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부앙천지(俯仰天地) 에 부끄럽지 않게 대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확고한 결속을 가지고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대동아회의에서는 여러 국가의 대표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열렬한 열정을 가지고 대동아전쟁 수행의 방책과 대동아건설의 근본이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의논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영권 내 맹방 국가들은 이번 회의에서 더욱 굳건한 대동단결의 유대를 맺어 빛나는 광명과 새로운 희망에 불타며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혈맹관계를 새로이 맺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아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신질서 건설을 위해서도 실로 경축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치열한 결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일본 국민 여러분의 넘치는 의지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감사감격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는 나아가 이러한 뜻을, 이러한 감격을 만주국의 4천만 국민에게도 나누어 주어 확고부동한 필승신념을 다시 한번 다지고 더욱 분발하여 일본의 전력을 북돋아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 국민 여러분과 함께 승리의 영광이 우리의 머리위에 빛나는 날까지 분투를 이어갈 것을 맹세하며 인사의 말을 마치는 바입니다.       호세 라우렐의 연설 (필리핀 유학생의 마부하이 (Mabuhay!, 만세) 가 이어지는 가운데 연단에 오름) (원고 없이)       친애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일본 국민 여러분에게 필리핀 국민의 진실된 친호(親好)의 뜻을 이렇게 인사를 통하여 표명할 수 있게 된것에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필리핀사람으로서, 자유독립의 국가 대표로서, 자유와 독립을 얻은 국가의 대표로서, 이렇게 우리가 전세계에 호소해왔던 독립과 자유라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상 처음있는 일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위대한 일본 정부와 국민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필리핀 국민은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는 데 있어 여러 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개최된 이번 회의에 이렇게 대표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된 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국민은 대동아를 서양의 속박에서 해방되게 하는 이 거대한 계획을 위해 자신들은 어떠한 일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알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번 회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곤란하고 복잡한 것입니다. 각국의 경제적, 정치적 및 사회적 상태에 검토하고, 일본을 승리시켜 이 성전을 완수하기 위해 공영권 내의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각국에 대해 전시하에서 수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번영을 확보시키는 이러한 대사업은 각국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명확하고 정당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필리핀과 일본은 정치, 경제 및 군사를 비롯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동맹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943년 10월 14일 일본제국과 필리핀 제2공화국이 체결한 ‘일본국-필리핀국간 동맹조약 (日本國「フィリピン」國間同盟條約)을 의미한다.) 필리핀인은 이제 외적의 침략이라는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층 명확한 이념과 지조 아래 단결하여 대 필리핀 건설을 위한 사업에 감연하게 정진하여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스러운 일원이 되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공영권 내 각국은 이제 일본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각하께서 말하신 대로, 공동 유일의 이상 및 목적에 정진하기 위해 강고하게 하나로 뭉치고 대동아 여러국가의 국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기초 사업의 완수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동아공영권은 이제 마침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모의 연설 저는 대동아전쟁의 서쪽 최전선에서 온 한명의 병사로서 이렇게 말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서부 최전선에서 포탄 소리의 빗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버마인의 이름으로, 저는 버마국 전국민을 대표하여 감사의 뜻을 여러분에게 기쁘게 말씀드리는 동시에, 최전선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 버마 국민의 이름으로 일본에 영구히 충성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버마전선은 우리 측의 승리로 돌아가고 있고, 사기는 매우 왕성합니다. 적은 밤낮으로 폭격과 공격을 하며 버마인의 마을, 집,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그 포화에 노출시키고 있지만, 이와 같은 전화속에서도 버마인들은 일치단결하여 흔들림 없는 전시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포화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장소에서도, 어떠한 때에도, 어떠한 상태에도 완전히 이겨낼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적이 쓰러지거나 우리가 쓰러지거나 둘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점을 여러분의 귀에 전해드리기 위해 버마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저는 이번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매우 성대한 의식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며, 저는 이 대회야말로 대동아민족의 각오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는 바이며 이 대회야말로 대동아의 대행진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 동양인은 오랜 옛날부터 혈연을 맺고 피로 맺어진 맹약속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아래 서양과 전쟁을 하여 이겨냈습니다. 어제 선포된 대동아공동선언은 동양 민족이 다시한번 피의 맹약을 맺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동선언을 우리는 꼭 승리해야하며 그러지 못한다면 죽겠다는 결의의 표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대동아공동선언은 대동아의 여러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동양은 동양인의 것임을, 대동아의 안정은 대동아 각 민족의 손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세계에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동아의 운동은 반드시 대동아의 여러민족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의 결의로부터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이는 버마도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신이 각자의 가슴에 있을때야 비로소 민중이 집결한 대운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를 끝으로 인사의 말을 마치는 바입니다.       찬드라 보스의 연설 (인도독립연맹 및 자유인도임시정부 측 인원들의 박수)       대동아공동선언은 어제 만장일치로 열성적으로 표결되었습니다. 저는 나아가 이 대동아헌장이 대동아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대헌장임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이 대동아공동선언은 자유와 해방을 위한 대헌장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를 위한 대헌장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대동아회의의 가장 큰 보람은 영미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대동아 여러민족을 완전히 결집시킨 것으로 이는 적의 마음과 담력에 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저는 가까운 장래에 이 대동아회의에서 보여준 결집이 전장에서, 경제와 정치를 비롯한 각 방면에서 착착 구현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자유인도임시정부의 이름을 걸고, 이제부터 공동의 적을 향해 진군할 것입니다. 어제 발표된 일본의 선심에 의해 가까운 장래에 안다만제도, 니코바르 제도가 우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귀속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중대 성명은 인도인 전체에 매우 희망을 주어 더욱 명랑한 장래를 꿈꿀 수 있게 했습니다. 이에 이번 기회를 빌어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도인은 적과의 타협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국과 타협하는 것은 다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타협을 한다는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인도인에게는 죽음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노예적 상황을 영원히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국이 쓰러질 때까지 자유 인도를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때문에 동양의 마지막 전장은 아마도 인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인도에서 쉽게 철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도인들은 자유를 위한 희생을 끝까지 받아드릴 것입니다. 지금 이 전쟁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 중 살아서 인도의 자유를 보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를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더라도 인도의 자유는 완전히 획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전쟁이 몇 년 동안 계속된다 할지라도 최후의 승리는 결국 우리에게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국의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인도 국민을 지원하고 있는 일본의 힘 역시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생각했을 때, 저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겨낼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영국을 쓰러트릴 것입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우리 인도의 운명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대동아의 운명을 결정하고, 아시아 전체의, 또한 아시아 밖의 여러 국가에 있는 여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는 절대 실패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 인도 독립의 준비는 완전히 갖추어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이를 단지 행동으로 옮기는 것 뿐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인도 해방을 위한 최후의 전쟁을 위해 힘차게 첫걸음을 내딛을 것을 여러분 앞에서 천명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Heinrich Georg Stahmer) 당시 주일독일대사. 그는 추축국 대표단으로서 대동아회의를 참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3년 주일독일대사에 취임하기 전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독일대사이기도 했다.)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의 연설 (나치식 경례를 하며 등장)       오늘 이렇게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업숙하게 개최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본 국민대회 참가자분들께서는 일본 정부의 이러한 현명한 지도에 의해 전쟁 수행 중임에도 이렇게 빠르게 대동아의 평화적 신질서 건설이라는 대업을 진행하였고 이미 그 대부분을 실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사업을 대동아 각국 자신에게 편리한 목적을 위해서 하기보다는, 영미의 이기적인 욕먕을 대동아의 영역에서 영원히 구축하고 도의에 기초한 맹방간의 여러 민족간의 공동간의 신뢰라는 뿌리 아래 신질서의 평화적 전당을 건설하기 위해 펼쳐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러한 대동아와 유럽의 신질서 이념을 맹약으로서 정부간의 목적으로 처음으로 확립한 삼국동맹의 위대한 구상이 맞았음을 증명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독일의 대표자인 저는 독일과 삼국동맹에 가맹하고 있는 유럽 각국의 대표분들을 대신하여 오늘의 이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 참가하신 대동아 각국 대표 각하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독일 및 유럽의 추축국은 지금 대동아와 동일하게, 이상을 실현하고 유럽에 올바른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용약하게 대규모의 결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및 유럽 추축국은 앞으로도, 일본 및 해방된 대동아 각국과 굳게 결합하여 공동의 승리와 올바르고 행복한 평화를 수립할 때까지 지금의 이 결전을 단호하게 이어간다 확고히 결의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바다에 가면 (海行かば) 을 제창, 천황폐하 만세 삼창, 참가 각국 만세 삼창, 애국행진곡 (愛國行進曲) 이 울려퍼지며 각국 대표 퇴장, 이때가 오후 1시)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정보국 발표 (1943.11.1.) 대동아각국은 선린우호, 상호협력의 강고한 기초에 서서 공동의 목적 달성에 매진하고 각국 대표자간에 있어서 대동아전쟁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침에 관한 격의없는 협의를 완수하기 위해 이번에 일본, 중화민국, 타이 왕국, 만주국, 필리핀 공화국 및 버마국을 비롯한 대동아각국의 대표자를 상회(相會) 하고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개최 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회의에는 우연히 도쿄를 방문중인 자유인도정부의 대표자도 배석할 예정이다. 각국대표 및 열석자, 배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해군 대신 시마 다 시게타로 ( 嶋田繁太郎) 대동아대신 아오키 카즈오 (青木一男)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 내각서기관장 호시노 나오키 (星野直樹) 정보국 총재 아모우 에이지 (天羽英二) 외무차관 마츠모토 슌이치 (松本俊一) 대동아차관 야마모토 쿠마이치 (山本熊一) 외무성 정무국장 카미무라 신이치 (上村伸一) 육군성 군무국장 사토 겐료 (佐藤賢了) 해군성 군무국장 오카 타카즈미 (岡敬純) 대동아성 총무국장 타케우치 신페이 (竹內新平)       중화민국 국민정부행정원원장 왕징웨이 (汪精衛) 국민정부행정원부원장 저우포하이 (周佛海) 국민정부외교부부장 추민이 (楮民誼)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 천창주 (陳昌祖) 국민정부행정원비서장 저우룽샹 (周隆庠) 국민정부행정원부비서장 쉬펑위안 (薛逢元) 타이 왕국 내각총리대신대리 완 와이타야콘 (Wan Waithayakon) 무임소대신,외무대리대신겸 내각서기관장겸 육군소위 차이 바라트 바트센 (Chai Bratay Pasen) 외무차관 시트트 시트트 사야무칸 (sitt sitt sayamkhan) 외무성동방정무국장 위수크 안타유크 (Wisut Antayuk) 외무성 1등서기관 윙사누와싯 테와쿵 (Wongsanuwasit Tewakung) 육군소좌 아아시 치란싱 (Aasi Charansingh) 만주국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 (張景惠) 외무부대신 리샤오겅 (李紹庚) 특명전권대신 왕운칭 (王允卿) 외교부 정무국장 오오키라 아키라 (大江晃) 총무청 비서관 마츠모토 마사오 (松本益雄) 총무청 비서관 가오피쿤 (高丕琨) 외교부 이사관 정투카이 (鄭隤凱)       필리핀 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 (José P. Laurel) 대통령 외무대신 클라로 레토 (Claro M. Recto) 외무대신 국회의장 퀸틴 파레데스 (Quintín Paredes) 토목교통대신 대통령비서 겸 국회의원 호세 라우렐 주니어 (José P. Laurel .Jr)       버마국 내각총리대신 바모 (Ba Maw) 협력대신 툰앙 (Tun Aung) 특명전권대사 테몬 (Te Moun) 외무차관 조에 보 (Joe Bow) 내각총리대신비서 니온한 (Nion han) 내각총리대신비서 겸 육군대좌 보욘나이 (Bo yun Nai)       자유인도임시정부 내각총리대신 찬드라 보스 (Subhas Chandra Bose) 최고사령부참모장 자가나흐 본스레 (J. K. Bhonsle) 무임소각료 겸 서기관장 사하이 (Sahai) 최고사령부 중좌 라줄 (Razule) 비서관 핫산 (Hassan)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지침 대동아회의 개최에 있어서 대동아 각국의 대동아전쟁 완수의 결의 및 대동아건설에 대한 단결과 협력을 한층 더 강화, 촉진시킴과 동시에 이를 대내외에 천명하여 적측의 전쟁목적을 복멸(覆滅) 시키고 그 전의를 파쇄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전 내용 2-1) 이번 회의의 개회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전한다.       대동아건설의 진척이 결집하여 이번 회의의 개최에 이르게 되었음을 밝힐 것.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대표 모두가 대동아의 거물임을 이야기 하며 각국 민중의 대동아건설에 대한 열의를 대표함을 지적할 것. 영미 및 충칭의 전쟁 목적의 복멸(覆滅)을 꾀할 것. 대동아에 건설되고 있는 신질서가 정의와 인도에 준거하는 것으로 대동아 각국이 공통의 요망으로 신질서 건설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 것 및 신질서가 현실의 시책에 따라 착실히 실현되고 있는다는 것을 강조 하여 영미의 전쟁목적이 멸실(滅失) 되고 있음을 지적할 것, 충칭에 대해서는 일화동맹조약 (1943년 10월 30일 체결된 일화동맹조약 (日華同盟條約, 중일동맹조약이라고도 한다)를 의미.) 에 관한 선전요강의 요령을 따를 것.       2-2) 이번 회의의 성과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전한다.       이번 회의를 통하여 대동아의 결집은 더욱 강화되어 우리의 필승의 태세는 완벽에 도달하고 있음과 대동아건설의 항구적 기초가 완성되었음을 강조할 것. 대동아건설과 관련된 강령이 확정되어 대동아 각국의 공동이상은 명확해지고 각국의 건설 열의는 더욱 고양되어 모두가 공동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성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강조할 것. 유의사항 대동아에 있어서 제국이 지도성을 가진다는 인상을 주는 듯한 글의 형태는 주의할 것. 제국의 지도성에 대해서는 우리측에서 이를 타국에 강요하는 듯한 논조는 사전에 억지할 것. 다만 타국에서 언급하고 이를 우리쪽에서 인용하는 것은 방해하지 않는다. 대동아가 세계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 것. 대동아공영권의 범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할 것. 특히 (공영권의 범위에) 소련영토를 아우르는 듯한 인상을 주지 말 것.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에 대해서는 특히 언급하는 것을 피할 것. 대동아전쟁을 인종전으로 생각하게 하는 인상을 주지 말 것.       조치(措置)       대동아회의 개최의 사실 및 각국 대표의 행동은 당국의 발표 전까지는 취급하지 말 것. 당국 발표 이전에는 회의에 대한 (기존의) 수상의 연설 및 일화조약 체결등을 관련지어 대동아건설의 진보를 선전할 것.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해서는 장기에 걸쳐 그 취지를 반복 선전할 것.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29) 0. 정보국 발표 (1943.11.1) /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0.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준비위원회의 구성 쇼와 18 (1943)년 10월 21일 (정식명칭은 국호(菊號) 위원회로, 일본은 이 대동아회의에 대해 '국호(菊號) 라는 암호를 붙혀서 보안을 유지 했다.) 1) 총괄 위원장 : 대동아성 대신 부위원장 : 내각 서기관장, 외무성 차관, 대동아성 차관 위원 (10인) : 식부성(省式省) 차장, 내각 정보국 차장, 내각 총무과장, 외무성 정무차장,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장, 대장성 주계국장, 육군성 군무국장, 해군성 해무국장, 대동아성 총무국장, 도쿄도 차장       2) 사무국 사무국장 : 대동아성 차관 회계 : 대동아성 대신 관방회계과장       총무부(總務部) (회의 진행과 관련된 업무 총괄) 1) 총무반 (總務班) / 6인 2) 사찰반 (查察班) / 2인 3) 사무연락관 (事務聯絡官) / 7인 4) 각성연락관 (各省聯絡官) / 6인       영선부(營繕部) (숙소, 인원운송, 경비 담당) 1) 총무반 (總務班) / 13인 (운영을 위한 물자 구입) 2) 숙사반 (宿舍班) / 6인(숙소의 준비, 운영) 3) 수송반 (輸送班) / 5인(차량 및 연료의 분배등) 4) 경비반 (警備班) / 7인 (내무성, 경시청과 연계하여 회장 및 숙소 경비) 4) 각성연락관 (各省聯絡官) / 6인       의장부(議場部) (회의장 준비, 회의 기록 담당) 1) 총무반 (總務班) / 6인 (업무 총괄) 2) 설비반 (設備班) / 9인 (회장 내 설비, 다과 준비등) 3) 의사반 (議事班) / 9인 (회의 기록, 속기, 번역등) 4) 남리반 (藍理班) / 5인 (내부 경비, 자동차 관리 등)       접반부(接伴部) (送迎), 접대 담당) 1) 총무반 (總務班) / 6인 (회의 외 일정 관리 및 진행, 업무총괄) 2) 의식반 (儀式班) / 7인 (행사중 예식 진행) 3) 연회반 (宴會班) / 15인 (연회 관련 업무) 4) 교통반 (交通班) / 3인 (항공기 관련 업무) 5) 중국반 (中國班) / 4인 (중화민국 대표단 접대 업무) 6) 태국반 (タイ班) / 3인 (타이 왕국 대표단 접대 업무) 7) 만주반 (滿洲班) / 2인 (만주국 대표단 접대 업무) 8) 필리핀반 (フィリピン班) / 3인 (필리핀 공화국 대표단 접대 업무) 9) 버마반 (ビルマ班) / 2인 (버마국 대표단 접대 업무) 10) 인도반 (印度班) / 2인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단 접대 업무)       각부의 사무는 대동아성 관계자 및 연계기관 연락관이 담당한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대동아회의 초청 및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참가국의 의향       1) 중화민국 : 중화민국 주재 제국 대사가 10월 18일 왕주석에게 정식적으로 초청장을 수교하고 25일에는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하여 내시(內示) 하였으며 왕주석은 이에 대해 지극히 훌륭하다 고 바로 동의를 표하였음.       2) 타이 왕국 : 대사의 병가로 이시이 참사관으로 하여금 10월 17일 초청장을 위칫와타칸 외무부 장관에게 전달하였음. 21일에는 담롱 ( 담롱 라자누브합 (Damrong Rajanubhab)을 의미.)  외무부 사무관장의 공문으로 타이 왕국 정부는 제국정부의 초청을 수락한다는 취지를 전달했으나 수상은 건강상 현재 장거리 여행을 견디기 어려운 만큼 완 와이타야콘 친왕을 타이 왕국의 대표로 임명하고 완 와이타야콘은 수상을 대표하고 수상의 대리로서 행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수상의 지위로서 책임을 진다는 뜻을 밝혔음. 또한 차이 (내각서기관장 및 육군소위 차이 바라트 바트센 (Chai Bratay Pasen)을 의미)  소위 및 시트트 ( 외무차관 시트트 시트트 사야무칸 (sitt sitt sayamkhan)을 의미.)  외무차관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 파견한다는 뜻을 회답하며 동시에 회의에 관한 상세한 내용 등은 타이 왕국 주재 제국 대사로부터 통지해줄 것을 요청하며 동시에 제국측이 요구한 각서에 대한 회답, 즉 완 와이타야콘이 피분 총리를 대신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질수 있다는 점, 완 와이타야콘이 피분 총리를 대신하여 행동할수 있다는 점, 회의 결과 각 대표가 연명하여 발표하는 선언에는 ‘피분 총리를 대신하여’ 대리자의 이름을 발표하는 것을 하게 한다는 점 두 항목을 승낙할 수 있다는 내용 을 초청장에 대한 회답문에 명확히 표하였음.       이후 타이 왕국 주재 제국 대사는 25일 담롱 및 완 와이타야콘에게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하여 설명하고 타이 왕국 정부가 시급히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줄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완 와이타야콘은 조속히 피분 총리에게 이를 보고한 후 의향을 알리고 자신이 총리 대리로서 이를 개진하기로 하였음. 그리고 완 와이탸야콘은 타이 왕국의 견해로서 현재 기초가 완성된 공동선언안에 대하여 공영권과 타지역간의 관계를 다루는 제5항에 공영권 내 각국간의 관계를 다루는 제 4항에서 각국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호혜(reciprocity)’ 라는 단어가 제5항에서도 사용되는 것이 선언 전문에서 추구하는 정의의 취지를 철저하게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서술하였음.       완 와이타야콘은 26일 다시 피분 총리와의 협의를 거쳐 공동선언안에 대하여 타이 정부로서는 ‘수용할 수 있다(Acceptable)’라는 요지의 각서로 회답하였으며 동시에 공동선언의 제5항을 “호혜적으로 문화와 산업을 교류하고”라는 문구로 변경하는 것을 고려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으나 완 와이타야콘은 동시에 타이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변경을 고집하지만은 않는다는 취지의 부가적인 설명을 하였다. 또한 피분 출석에 대한 타이 왕국측의 절충 경위에 비추어 우리측의 의향을 더 우선시 하는게 합당하다고 인정하였음. 이에 타이 왕국 주재 제국 대사는 다음과 같이 타이측의 의향을 설명하는 전보를 보냈음.       본 선언안 제5항은 대동아와 대동아 이외의 국가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것으로 타이 왕국측의 의견은 이에 있어서 ‘호혜’ 라는 용어를 추가하여 대동아 각국이 함께 세계의 진보에 공헌하게 하는 것을 강하게 기대할 뿐만 아니라 본 선언은 대동아가 세계를 향하여 폐쇄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음. 본 선언은 영미에 대하여 반성을 촉구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으며 안(案) 속에 제한적 조건을 삽입하기 보다는 원안대로 하는 것이 오히려 그 효과를 더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현재의 상황에서도 선언의 장래적 실행에 있어 지장을 초래할 우려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타이 왕국측에 대하여 이를 엄중히 설명하고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음.       3) 만주국 : 만주국 정부에 대해서는 10월 21일 리샤오겅(李紹庚) 외교대신으로부터 같은 날 공문을 통하여 대동아회의 개최 및 의제에 대해 수용하며 “대동아건설의 현단계에 있어서 이와 같은 회의의 개최는 실로 의의가 깊은 것이며 흔연하게 정부의 대표자를 출석시킬 것이며 동시에 귀국 정부가 제안한 의제에 대해서도 찬의를 표한다”라는 취지의 회답을 받았음.       또한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해서도 10월 27일 만주국 정부는 원안대로 하는 것에 대하여 이의가 없음을 통보하였음. 그리고 만주국 정부 수뇌부 내에서는 일본측으로 하여금 지장이 없는 한 적당한 단계에서 대표로서 대동아회의를 매년 1회 도쿄에서 개최하는 것에 대한 희망 을 표시하거나 이에 관한 결의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된 바 제국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의견을 요청 하였고 이러한 제안에 대하여 일본측은 찬성한다는 뜻을 밝힘 또한 만주국은 자국과 제국과의 특수관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의견을 자신이 제안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질 경우 중화민국 그 외의 국가로 하여금 이러한 의견을 내게 하고 만주국이 이에 대하여 찬의를 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취지로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이에 제국 정부는 만주국측과 협의하여 결국 만주국측의 희망을 인정하여 회의 제2일째의 오후 의안 채택후에 만주국 대표로 하여금 간단하게 “대동아회의와 같은 회의를 장래에 있어서도 수시로 개최하는 것은 지극히 유의미하다 생각하여 이러한 종류의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을 희망한다” 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게하고 동시에 이러한 제안이 결의 등의 형식을 통하여 구속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본 회의의 개최의 취지 및 본회의의 성질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만큼 본 제안에 대해서 각 대표의 박수를 통하여 찬의를 표하게 하였음.       4) 필리핀 공화국 : 필리핀 공화국 주재 제국 대사는 10월 19일 라우렐 대통령과 회담하고 초청장을 전달하였음. 라우렐은 이를 전면적으로 양해하고 20일 공문으로서 이를 수락하는 취지의 회답을 보냈으며 28일 필리핀 공화국 정부는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해 원안의 형태에 동의를 표하였음.       5) 버마국 : 10월 19일 랑곤에 주재하고 있는 키타자와(北澤)  (키타자와 나오키치(北沢直吉)를 의미.) 참사관이 버마국 외무대신을 방문하여 정식으로 초청장을 전달하였음. 21일 공문을 통하여 버마국 정부는 일본정부의 제안에 동의하며 일본정부의 초청을 기쁘게 수락한다는 취지와 바모 총리가 버마국의 대표로서 회의에 출석하고 협력대신 및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버마국 대사 (특명전권대사 테몬 (Te Moun)을 의미.) 가 본 회의에 참석 할것임과 동시에 함께할 일행의 명단을 회답하였음.       이후 10월 27일 버마국 주재 제국 대사 (당시 버마국 주재 주일대사였던 사와다 렌조우(沢田廉三)를 의미.) 가 바모 총리의 사저를 방문하여 (툰앙 (Tun Aung) 협력대신이 동석하였음.) 공동선언문의 영문 번역문을 전달하였고 이에 대하여 상세 설명하여 선언안 원안에 대하여 그대로 동의할 수 있도록 극력 설득에 노력하였음. 바모는 본 선언안에 관하여 찬성하나 본 선언은 영미의 공동선언 (1941년 8월 14일 영국과 미국이 발표한 대서양 헌장을 의미.)  에 대항하는 의미를 가지는 만큼 대동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영미에 반대하는 민족 (아라비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 에게도 호소하는 뜻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하며 이러한 취지의 제안을 회의 제2일의 의안 심사 과정에서 서술할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음.       이에 대하여 대사는 이러한 바모의 주장이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모로 하여금 이러한 주장은 사양해주길 고려해 달라는 취지를 전하였음. 제국정부는 이러한 대사의 보고에 기초하여 버마국 대표 일행 명단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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