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회의 (1939.8.28~8.30)
최종 수정일: 2024년 3월 30일
1939년 8월 31일자의 중화일보 (中華日報) , 중국국민당 제6차전국대표대회가 거행되었음을 이야기하며, "이제부터 역사적사명은 화평건국에 종사하는것" 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1939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까지, 상하이의 극사비이로(极司菲尔路) 76호에서 개최되었다. (극사비이(极司菲尔) 는 영어 제스필드 (Jessfield)를 음차한 것으로, 지금은 상하이 만항도로(萬航渡路) 로 이름이 바뀌었다. )
왕징웨이는 1939년 3월, 자신의 심복이었던 쩐중밍이 암살 당하는 사건을 맞이한 이후, 충칭을 떠나 체류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신변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앞으로의 화평운동을 진행하는데에도 지장있다고 생각하여, 1939년 5월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떠나, 1939년 5월 26일에는 상하이의 프랑스조계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일본측에서는 일본 선박을 이용하여 상하이로 이동할것을 권유했으나, 왕징웨이는 프랑스 선박을 이용하기를 고집했다. )
(쩐중밍 암살사건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쩐중밍 암살사건을 다룬 박태원의 아세아의 여명 소설은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가 상하이로 돌아온 이후부터, 왕징웨이와 일본은 왕징웨이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신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계획에 들어가게 되었다. 왕징웨이 전부터 일본의 대륙점령지에 구성되어 있었던 베이징의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난징의 중화민국 유신정부와 논의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신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였다.
극사비이로 76호 (极司菲尔路 76號). 이곳은 이후 이름바 "76호" 라는 왕징웨이 정권의 첩보기관으로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왕징웨이가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구상했던 것은, 당시 왕징웨이가 처해있었던 상황과 관련있다고 할 수있다. 왕징웨이는 충칭을 탈출하기 전까지 국민정부내에서 부주석이라는 명목상으로는 장제스 바로 다음의 자리에 있었다. 또한 왕징웨이는 쑨원을 보좌해오며 중국국민당의 시작부터 이를 함께 해온 만큼 국민당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1938년 12월 28일 충칭을 탈출하고 일본과의 화평을 주장하는 염전(艶電) 을 발표해버림에 따라, 왕징웨이는 항전을 이야기하는 충칭의 국민당조직과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1939년 1월 1일,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이름바 왕파(汪派) 로 분류되는 이들을 영구 제명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직을 모두 박탈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징웨이와 그를 지지하는 왕파 (汪派) 에게는 이제 자신들을 대표할 세력을 구성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전에는 국민당이라는 세력내에서 개조파를 거쳐 화평파라는 계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이제 그러한 행위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물론 왕징웨이와 그를 지지하는 왕파가 염전이후 본격적으로 화평운동을 시작한 만큼, 홍콩에서, 하노이에서,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내 일본점령지에서는 왕징웨이의 화평운동을 지지하는 여러 단체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세워질 자신의 신중앙정권의 성공을 위해서도 이러한 흩어져있는 이러한 화평운동단체들을 하나의 중앙조직으로 묶고 자신이 그것을 영도함으로서 충칭 장제스의 국민당에 완전히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화평운동의 중앙영도조직이자 자신이 세우게 될 신중앙정권의 중앙조직으로 어떠한 조직을 구성할 것인가? 이는 당연히 중국국민당이었다. 쑨원의 정통 후계자이자 정통 국민정부를 자청하던 왕징웨이에게 중국국민당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왕징웨이는 '자신의 중국국민당' 을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완성이 바로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였다.
중일전쟁 시기 중국국민당의 모습. 왕징웨이는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국민당을 충칭의 국민당과 별도의 것으로 설정하려 했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국민당은 1935년 개최한 제5차 전국대표대회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제6차 전국대표대회 계획이 중일전쟁으로 모두 연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칭의 국민정부는 1935년의 제5차 전국대표체제 속에서 이에 버금가는 '임시' 전국대표대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전국대표대회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고, 충칭의 국민정부는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5차 전국대표대회 체제를 계속 이어나갔다. 충칭의 국민정부가 제대로된 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왕징웨이는 자신의 중국국민당에서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5차전국대표대회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충칭과 결별을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점부터 왕징웨이의 화평파는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을 통해 충칭에서 계속 항전을 주장하는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과 완전히 다른 조직임을 확실히 하려 한 것이다. 즉, 왕징웨이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일종의 분당선언이자, 일종의 충칭과의 선긋기 작업이었다.
왕징웨이는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위해 준비단을 구성하고, 전국 각지에서 (이는 충칭정부 지역도 포함) 자신을 따를 사람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왕징웨이를 비롯, 린바이셩, 메이쓰핑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부인 천비쥔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중국국민당을 구성하기 위한 인재발굴에 나섰다. 심지어 저우화롄(周化人, 주화인) 을 충칭에 비밀리에 보내 사람을 모집했으나 그 효과는 크지 못했다.
이렇게 가족까지 동원되어 인원을 채우려는 모습은 그만큼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 조직이 쉽지 않은 환경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천비쥔의 형제와 조카들도 의원으로 동원되었고, 린바이셩은 자신의 신문사 직원들을, 리셩우(李聖五, 이성우) 의 경우 자신의 아내, 처남, 조카, 사촌까지 의원으로 동원시켰다. 이렇게 힘든 과정속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위한 인원 준비는 아슬아슬하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대보다는 부족한 수치였다. 본래 왕징웨이측에서는 300명 정도의 인원을 모집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집된 인원은 240 여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예상보다 인원이 부족했다보니, 한 의원이 여러 직을 맡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진슝바이(金雄白, 김웅백, 한국계는 아니다. ) 의 경우 당시에는 국민당원이 아니었음에도 행사에 참가해 이후 중앙정치위원회 법무위원회 부주석 직을 맡기도 했다.
왕징웨이에게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중요한 행사인 만큼, 제6차 전국대표대회의 준비는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왕징웨이는 상하이로 오자 마자 바로 행사가 치뤄지는 76호를 방문하여 현장을 점검하였고 76호에서는 혹시나 충칭쪽에서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이 대회에 직접 참가하게 될 왕징웨이의 신변을 우려하여 철저히 경호를 하려 했다. 특히 왕징웨이가 상하이로 온 이후 親 왕징웨이 언론 국민신문의 무스잉 (穆時英, 목시영) 등이 암살당하는 등 親왕징웨이 인사들에 대한 암살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기에, 76호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려 했다.
일본측에서는 이를 지원하겠다 했으나, 왕징웨이는 이러한 일본의 경호지원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일본의 꼭두각시 취급을 받고 있었던 왕징웨이는 자신이 일본 헌병에 의해 경호를 받으며 당 대회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이는 오히려 더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다이리는 왕징웨이가 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인마오쉬엔 (尹懋萱, 윤무휜) 이라는 암살자를 보내어 이 대회에 참가하려는 왕징웨이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쩐중밍 사건이후 더더욱 강력해진 경호정책 때문에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76호에서는 이때문에 행사가 열리는 76호 근처의 골목주민들을 모두 다른곳으로 이주시키고, 76호로 들어오는 골목에 직접 가게를 차리고 이곳을 검문초소로 사용하고, 길거리에는 행상들로 위장한 요원들이 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인마오쉬엔 같은 이는 회의장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인마오쉐엔은, 행사당일날 대회장으로 이동하는 왕징웨이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으나, 왕징웨이측에서 대회전날 미리 76호로 이동하여 머무는 바람에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왕징웨이가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은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상하이를 비롯한 일본내 점령지 민중들도 이 소식을 알게 된 것은 개최 이틀전인 8월 26일의 중화일보를 통해서, 그것도 왕징웨이쪽에서 정보를 주었기에 가능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아주 비밀스럽게, 철저한 경호속에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다이리처럼 이러한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이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이회의에서 왕징웨이는 중국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8월 28일, 제6차 전국대표대회 당일날, 이날 상하이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76호 앞의 높은 탑에는 색색에 장식간판에 걸려있었고, 가운데에는 생일을 축하하는 수(壽) 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이는 정치적 행사라기 보다는 지역 노인의 생일행사에 가까운 모습처럼 보였다. 물론 이또한 위장된 것이었다.
그리고 행사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 군인들이었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왕징웨이측은 일본군인이 이 대회현장을 지키게 되면 왕징웨이의 화평운동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일본과 76호측에서는 당시 상하이국제조계에 주둔해있던 이탈리아군에 연락을 취해 본 행사에 공공조계경찰, 그리고 충칭의 군통이나 중통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려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은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 76호를 돌아 뒷건물에 배치되어있던 일본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도보로 도착한 경우 76호 앞의 이탈리아군의 호위를 받으며 회의장에 비밀스럽게 진입했다.
대회는 28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개회식에서는 먼저 쓰러져간 애국 선열에 대한 묵념을 가지고 회의를 시작했다. 오전에는 왕징웨이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오후와 다음날 있을 본격적 회의를 위한 예비 회의가 있었다. (아쉽게도 왕징웨이의 개회사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회의 성격상 그 자료를 찾지 못했다.)
오후에는 당 헌장을 개정하고 정리당무안 (整理黨務案) 이 공포되었다. 정리당무안(整理黨務案)의 정식명칭은
"민국28년 1월 이후 의 본중앙이 직권을 행사할 자유를 완전하 상실한 것으로 하고 모든 결의와 명령은 무효로 하며 당무의 중단을 피하기 위해 각종 구제책을 대회에서 의결하는 것을 요구하는 안"
(請大會宣告自民國二十八年一月以後本黨中央已完全喪失行使職權 之自由所有決議及命令應歸無效並 爲免使黨務中斷起見應由大會議決各種補救辦法案, 청대회선고자민국28년1월이래본당중앙기완전상실사직권지자유소유결의급명령응귀무효병위면사당무중단기견응유대회결의각종보구판공법안 )
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국28년 1월 이후 의 본중앙이 직권을 행사할 자유를 완전하 상실한 것으로 하고 모든 결의와 명령은 무효로 하며 당무의 중단을 피하기 위해 각종 구제책을 대회에서 의결하는 것을 요구하는 법안
(請大會宣告自民國二十八年一月以後本黨中央已完全喪失行使職權之自由所有決議及命令應歸無效並 爲免使黨務中斷起見應由大會議決各種補救辦法案)
올해 1월 1일부터 당 중앙위원회는 권한 행사의 자유를 상실했음으로, 따라서 1월 1월 이후의 모든 결의와 명령은 무효라고 선언한다. 모든 중앙당 기관은 임시해산되고 조직개편을 해야하며, 지방 당 사무소와 당 특별사무소는 국가통제 임무가 개편될 때까지 임시해산시켜야 하지만, 중앙 및 지방 기관은 하루도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대회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을 요청한다.
중국국민당 총장(總章)을 개정하여, 총재제를 폐지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직을 신설한다.
(제 5장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27조 : 본 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1명을 두고, 이를 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한다.
28조 : 중앙집행위원회주석은 제 4장의 규정에 따라 총리를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한다.
1.중앙집행위원선거를 통해. 중앙집행위원, 중앙감찰위원, 중앙후보감찰위원를 각각 선출한다.
2.대회는 전보를 통해 중앙집행,감찰 및 후보감찰 등 각위원회를 초청하여 이들이 빠르게 충칭을 떠날 수 있게 하거나 공산당의 협박받는 지점에서 떠나게 해 상하이에 결집될 수 있게 한다.
3.중앙위원회의 여러위원회가 모이기 위해서는 자유 속에서 중앙위원회의 정의석수의 절반이상이 참석해 야한다.
4. 당의 각 중앙기관과 지방기관을 조속히 복구하여 당업무가 중단되지 않게 해야한다.
위와 같은 제안들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정리당무안에서는, 민국 28 (1939) 년 1월 1일자로 충칭의 중국국민당에서 행해진 결의와 명령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즉,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의 직무해제와 영구제명과 같은 조치가 무효임을 선언함으로서, 오히려 충칭쪽이 잘못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있다. 그리고 이는 왕징웨이가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 잘못된 행위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충칭의 중국국민당이 '자유를 상실했기에'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즉 충칭의 중국국민당은 장제스의 사당(私黨) 이 되었음으로, 이러한 조치는 정당한 조치가 아니니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총재제를 폐지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직을 신설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국민당의 총재에 있었던 장제스를 완전히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직을 신설하여 장제스에 동등하게 맞설 수 있는 고위직을 신설했다.
또한 눈여겨볼점은 새롭게 추가된 28조의 2항인데, 2항에서는 충칭이든 공산당점령지든 인재를 초빙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충칭의 인물까지 포섭함으로서 왕징웨이는 장제스보다 정통에 서려고 했다.
이 당무정리안이 통과된 후, 제 6차 전국대표회의는 당무정리안에 의해 수정된 중국국민당 헌장을 통해 왕징웨이를 중앙집행위원회의 주석으로 선출했다. 84명의 대표가 왕징웨이가 국가를 위기로 부터 구하기 위해 주석이 되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28조에서 규정한 것처럼 중앙집행위원선거를 통해 10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 했다. (하지만 사실상 말이 선거였지 실제로는 임명에 더욱 가까웠다.)
중화일보의 표현에 따르면,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선정되자 회장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펴졌다고 한다.
이 선출과정에서, 후자이닝(胡翟寧, 호적녕) 이라는 자는 반대의견을 표시했으나, 이미 회의장에 배치되어있었던 76호 요원들은 그에게 허리에 있는 권총을 보여주며 위협했고, 이에 후자이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왕징웨이는
"대표들중 의견이 있으면 회의 후 나와 개인적으로 얘기해도 좋다. 이제 대회선언문을 낭독할 테니 모두들 이를 통과시켜주길 바란다. " 代表們有什麼意見,會後可以和我個人來談,現在要宣讀大會宣言,請大家通過。”
라고 웃으면서 말하면서 이러한 자신에 대한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왕징웨이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구성하는 인원들은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왕징웨이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는 국민당원이 아닌 사람부터, 주요 인사들의 가족도 있었지만, 이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단순히 왕징웨이의 강연회로 알고 온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76호에 들어오고나서야 자신이 전국대표대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음을 안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76호를 동원해 왕징웨이측에서 이러한 인사들을 협박, 납치하여 데리고 온 경우도 존재했었다. 청콴정(程寬正, 정관정) 이라는 이는 왕징웨이측으로 부터 화평운동에 대한 참가를 강요받았고, 대회날에는 76호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했기 때문에 왕징웨이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반대의사를 표시하기가 어려웠다. 위에서 보았듯 76호 요원들은 이미 회장안에서 참가한 이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용기를 내어 반대를 한다고 한들, 대부분이 親왕징웨이 인사들로 이미 꾸려졌기 때문에 반대는 그 효과를 낼 수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도 있었다. 대회의 비서가 루잉(盧英, 로영) 이라는 당시 친일파로 분류되던 상하이시 경찰국장인 것을 보고 여기에 대해 어째서 저러한 친일파를 대회에 데려왔냐며 저런 이는 대회에 있을 자격이 없다며 왕징웨이를 만나게 해달라는 말에, 저우포하이는 이를 가로막고
"루잉이 배신자인지 아닌지는 후세에 의해 결정될 일입니다. 그러나 루잉씨는 왕 선생이 상하이에 도착했을때 가장 먼저 화평운동에 참가한 사람입니다. 또한 루잉씨는 왕씨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차가 전복되어 목숨을 잃을 뻔도 했습니다. 이처럼 루잉씨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화평운동 참가자입니다. 그리고 왕 선생의 보안요원은 모두 루잉이 파견한 사람들인데, 만약 이로 인해 오해가 생긴다면 왕 선생의 안전은 누가 책임질까요? 여러분들께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왕 선생은 루잉을 이미 중앙위원으로 내정했습니다."
라며 반대의견을 완전히 묵살시켜버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비 민주적인 모습속에서,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대부분의 안건이 빠르게 통과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음날인 29일 오후 2시부터는 국민당 정강에 대해 수정을 가한 수정안이 통과된다. 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정본당정강안 (修訂本黨政綱案)
본래 당의 강령은 손중산선생이 작성한 유산의 일부로써 무분별하게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민국13년이래 오늘날의 국제 및 국내 사정은 당시와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의 강령은 현재의 실제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고 우선순위도 지금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총리께서 친필로 작성한 당의 강령과 그 유산의 일부를 토대로 삼가 당의 강령 28개조를 개정하고자 한다.
甲. 외교
1. 본국가의 생존 및 주권 독립의 주지는 선린정책을 통해 동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확립하는 것에 있다.
2. 비공산주의 각국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코민테른의 국제적 음모를 방지한다.
3. 각 우방국의 합법적인 권익을 존중하고 우호증진을 위해 관계를 조정한다.
4. 통상조약은 각 국가과 평등과 상호주의 원칙을 함께 논의하여 수정하여야 한다.
5. 경제의 회복과 자원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모든 우방국의 자본 및 기술합작을 환영한다.
6. 평화, 외교적 수단을 통해 조계를 회복하고,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침해하는 기타 조약들을 수정하고, 영사재판권을 폐지한다.
乙. 정치
7.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건국대계에 대해 논의한다.
8. 정부는 헌법초안을 작성해 국민대회에 제출해 심의를 받고 정부는 이를 공포하여 시행한다.
9. 공산분자를 제외한 모든 인민의 법적자유는 완전히 보호되어야 한다.
10. 균권통치의 원칙으로 지방의 제도를 바로잡는다.
11. 치안을 회복하고, 부랑자를 힘써 인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다시 업무에 종사할 수 있게 도모한다.
12. 현 단위로 행정기관을 확대하고, 충실하게 행정자원을 양성하고, 지역의 자위역량을 배양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한다.
13. 각 분야의 행정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공무원 제도를 확정한다.
丙. 군사
14. 군사국가화는 개인과 지역체계를 소멸시키는 원인이다.
15. 군사의 복원, 군대의 주둔 및 군사 사건등의 해결을 위한 군사위원회의를 소집한다.
16. 사상자에 대해서는 보상과 공로를 표창하고, 강제로 징집된 인원들은 본 지역으로 다시 송환시켜 그들이 다시 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돕는다.
17. 유격대를 해산하고, 그들이 다시 업무에 종사할 수 있게 돕는다. 이중 군에 지원하고자 하는 자는 심사를 거쳐 국방군이나 지역 치안대에 편입시킨다.
18. 부관 임용법을 개정하여 계파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군사인재를 모집한다.
丁. 경제
19. 화폐제도를 정비하고 금융과 재정을 안정시키며 화폐가치의 폭락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을 최소화 시킨다.
20. 은행제도를 정비하여 농업과 상공업을 부조하는 임무를 다하게하고, 사회금융으로 하여금 국가재정의 희생을 치루지 않게 한다.
21. 수출입 무역과 외환을 통제하여 수입과 수출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한다.
22. 공공산업을 발전시키고 민간기업을 전면적으로 보호한다.
23. 농촌 금융을 원활하게 하여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농업생산, 운송, 판매를 촉진시켜 농촌의 번영을 도모한다.
24. 국민의 부담을 균등하게 하고 경감하기 위해 노력하며, 국민생활 향상에 관심을 기울인다.
戊. 교육
25. 민족 고유의 문화와 도덕성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며, 국정에 맞는 외국문화와 윤리를 흡수하도록 노력한다.
26. 편협적인 배척사상을 근절하고, 선린정신의 선린정책을 실시한다.
27. 기율 훈련과 과학 연구를 장려하여 건전한 공민과 건국인재를 양성한다.
28. 교육제도를 개정하여 신중국 건설에 맞게 교재를 개편한다.
수정본당강령안 에서는 총 28가지의 새로운 강령이 추가되었는데, 외교,정치,군사,교육까지 여러분야에 있어서 많은 부분 수정이 있었다. 가장 핵심은 1항에서 국민정부의 목적을 '동아의 항구적 화평' 으로 설정하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완전히 항전을 포기하고 화평을 함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또한 2항과 9항의 모습에서는 강력한 반공주의적 모습이 나타난다. 9항에서는 심지어 공산분자는 중화민국의 인민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강력한 반공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또한 2항의 비공산국가와의 연합을 통한 코민테른의 음모를 방지한다라는 항목은 일본과 중국이 맺은 중일방공협정과, 중국이 이후 방공협정에 가입하는 것을 정당화 했다.
그리고 7항과 8항에서는, 충칭의 장제스 국민정부가 해내지 못한 '헌정' 의 단계에 나아감으로서 장제스보다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고 했다. 그리고 경제부분에서의 화폐제도 정리라는 내용은 왕징웨이가 이때부터 중앙저비은행과 같은 자신의 신중앙은행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중앙저비은행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그리고, 중국국민당과 새롭게 세워질 신중앙정권의 기본방침을 반공주의로 할 것을 규정하는 결정이반공위기본국책방안(決定以反共爲基本國策案) 이 통과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정이반공위기본국책방안(決定以反共爲基本國策案)
서구의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그리스에서 유래되었으며 본래 윤리적 추구였다. 19세기 전반에는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의 삶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서유럽 학자들은 소위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제창해왔다. 그들의 최고적 이상주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소위 ’대동‘과 비슷하다. 그러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단어는 모두 사회 개혁을 위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이후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이용해 세계에 ’과학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요구했는데, 이는 다른 사회 개혁이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넓게 보면 우리나라의 소위 ’대동‘과 비슷한 것이지 마르크스의 구체적인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손중산 선생의 민생주의 제1강의 “민생주의는 즉 공산주의다.” 라는 말은 민생주의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물사관은 본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초석이나 손중산 선생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대해 반박하기도 했다. 손중산 선생은 유물론적 사관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그것이 도출하는 결론인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니 민생주의가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손중산 선생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유입될 위험성과 우리나라의 대동사상이 서양의 소위 모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본질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왔다.
그렇기에 인민에게 민생과 정의를 보여줘야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고유의 대동 사상을 회복하는 한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침략을 배격해야한다. 그렇기에 “민생주의는 공산주의”라는 말은 민생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오히려 혼동하지 않게 하는 말이며, 당원들과 일반대중들에게 민생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기엔 충분한 말이다. 이 당은 삼민주의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단호하게 반대해야함을 기본 정책 중 하나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실 계급투쟁을 사회혁명의 도구로 지칭하고 이용하고 있고 그들의 최종목표는 기존 사회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현대의 극도로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그러한 혁명적인 방법이 필요없으며, 사회는 이토록 잔인하고 악랄한 파괴만을 통해서만 진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최근 수십년간 유럽,미국,일본, 미국의 국가사회정책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계급의 생활은 점차 개선되고 계급간의 대립자세는 점차 완화되어 왔다. 마르크스의 기계적 진화론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무너졌고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가 비과학적임이 입증되었다. 최근 여러나라의 공산당 세력이 쇠퇴하고 있으며 이는 공산주의가 현대사회의 진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농업사회단계에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공산주의에 적합하지도 않다. 우리당은 국정을 고려하여 반공주의를 기본정책 중 하나로 삼아야한다.
더욱이 중국공산당이 실제 펼치고 있는 정책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에 해로운 가증스러운 일이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으며, 소위 코민테른은 표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든 실제로는 소련의 확장된 국제 스파이 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소련의 국가건설강령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수만 리 떨어져 있으며, 코민테른의 소위 세계 혁명음모는 소련의 국가강령과 또 수만 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에 코민테른은 사실상 교리도 없고 이론도 없고 고정된 정책도 없는 국제간첩집단에 불과하다. 그들의 다양한 교활하고 잔인한 방법은 러시아 제국시대의 국제음모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해졌다.
공산주의는 더 이상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중국공산당을 공산주의 정당으로 간주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다른 진짜 공산당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소위 중국공산당은 한마디로 소련이 중국에 파견한 정찰기관, 비밀기관에 불과하다. 이들은 교리도 이론도 정책도 전혀없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고 민중도 없다. 코민테른의 명령을 관철하고, 언제나 구호를 바꾸고, 인민을 기만하고 무지하고 야심찬 군벌이나 정치인을 이용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정책이다. 공산당이 성공한다는 것은 중국이 공산주의를 시행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소련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민국 16 (1927)년의 숙청부터 민국 25 (1936) 년 까지는 소련 간첩에게는 우울한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안사변 이후 장제스 동지는 납치되어 그는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공산당이 나라와 민족이 망할 때 까지 착취하는 것을 인정해버렸다. 그렇기에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에게 가하는 피해는 지난 10년보다 훨씬 더 크다. 나라와 민족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가진 집단을 우리당의 구성원은 이를 막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이론적, 실제적 이유를 바탕으로 반공주의를 우리당의 항구적 기본방침으로 삼을 것을 대회에서 결의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우리 당은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조국을 수호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국 인민을 영도하여 결연하게 항전해왔다. 독립과 영토보전이 이루어지는한, 일본이 중국의 자유와 독립을 존중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우리나라의 활력을 지키고 인민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언제라도 전쟁을 포기하고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항전은 우리 자신의 생존과 이해를 위한 것이고 어디까지나 국가를 위해 궁극적인 희생한 것이지, 그 어떤 3국이나 그 어떤 국제, 국내적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 당은 화평과 항전의 문제에서 나라의 전체 인민의 이익을 전제로 삼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전면적인 항전이 시작된 이래, 공산당은 항전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차지하려는 코민테른의 음모를 감행해왔다. 공산당의 근본적 입장은 소련의 이익을 자신들의 이익으로, 코민테른의 의지를 자신들의 의지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우리 당원들은 마지못해 이를 따라가고 있고, 공산당은 곳곳에서 대중의 천박한 심리를 이용해 사회의 여론을 탄압하며 당과 정부의 의지를 강탈하고 있다. 장제스는 지난 2년동안 화평과 항전 계획에 대해 매우 명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를 동시에 반복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왕 부주석은 확고한 혁명정신으로 민국 27 (1938)년 12월 29일 중앙에 죽어가는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조속히 화평을 결단하자고 제안했고 전국의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숙여 이를 축하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우리 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회의와 중앙감찰위원회는 공산당의 위협으로 여론을 무시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왕 부주석의 제안을 채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국28 (1939)년 1월 1일에는 왕 부주석을 당에서 영구제명하고 모든 직위를 박탈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주석과 부주석은 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되고 그 권한과 지위는 중앙집행위원회보다 높다. 총통과 부총통은 오로지 전국대표대회에 의해서만 해임되고 처벌될 수 있다. 이 때문에 1월 1일의 결의안은 자체가 불법이고 무효인 것이며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당 중앙위원회가 권한 행사의 자유를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1월 1일부터 모든 행위가 불법속에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최고국방회의의 조직을 통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이 공산당원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당원들에게 공산당으로 이양되어버렸고 조약과 법에 규정된 항전과 화평에 관한 특권을 국민정부는 최고국방회의로 이청해버렸다. 그 법을 어기고 규율을 문란하게 하여도 오히려 역행하니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법과 규율을 위반하고 비뚤어진 행동을 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당 수십만 당원들이 계속하여 중앙당의 자유가 상실되는 것을 묵인한다면 나라가, 전국의 4억동포가, 민족의 정신이, 손중산 선생이 분개하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위해 대회의 의결을 요청한다.
이는 통과되었고, 이로 인해, 왕징웨이의 중국공산당과 국민정부는 반공주의를 국책으로 삼게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과의 빠른 관계회복을 촉구하는 '중일관계의 근본적인 조정과 국교의 조속한 회복안(根本調整中日關係並儘速恢復邦交案)' 과 '헌정을 촉구하고 국민대회의 소집을 촉구하는 안 (關於盡快召集國民大會實施憲政案)' 과 등 총 5개의 주요안건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원문을 찾지 못해 가져오지 못했다.)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약 3일에 걸쳐 개최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안건과 회의는 첫날이었던 28일에 처리되었다. 이는 위에서도 보았듯 제6차 전국대표대회 자체가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반대를 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일사천리로 처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첫날의 대회를 마치면서, 폐회연설에서 자신들이 치루고 있는 대회가 일본의 꼭두각시적인 대회로 취급당하는 것을 의식한듯,
"밖에서 우리를 두고 일본인의 꼭두각시라고 욕을 퍼붓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는데, 여러분, 오늘 회의장에 일본인이 있습니까? ." ( "外面有人對我們造謠污衊,說我們是日本人的傀儡,請大家看看,我們今天會場裡有沒有日本人?")
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이대회에 끼치는 일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모두 알고있었다. 대회장 뒷문은 일본헌병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고, 이탈리아 군을 부른것도, 왕징웨이가 대회에서 화평을 강조하는 것도 일본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탄생한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은 충칭의 국민당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을 대부분 가져왔다. 당기였던 청천백일기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던 8월 30일, 이들은 제6차 전국대표대회의 결과로써 '중국국민당 제6차전국대표회의 선언 (中國國民黨第六次全國代表大會宣言)' 을 발표하게 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국민당 제6차전국대표회의 선언 (中國國民黨第六次全國代表大會宣言)
중화민국 28년 (1939) 8월 30일
지난해 4월, 본 당은 우한에서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열어 이번 항전의 목적과 장래의 희망사항을 선언문에 명시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탕구정전협정 이후 우리는 치욕을 참고 일본과 협력하여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채택하여 먼저 북방 각 성의 보전을 도모한 후 동북 4성 (만주국) 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정치에서는 주권과 행정의 완전성을 최소한의 조건으로, 경제에서는 호혜평등을 협력의 조건으로 삼는다. ”
라고 한 바 있다. 이는 중국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본래 목적과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루거우차오 사건이후 중국은 평화에 대한 희망을 없어 어쩔 수 없이 항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중히 결론을 내렸다.
“우리들이 본래 원하는 바는 화평이고, 우리들의 최종목표는 화평에 있다. 우리들이 말하는 화평은 정의로움에 부합하는 화평이다. 그래야만 대내적으로 자립할 수 있고, 대외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
라고. 이렇듯 중국의 본래 목적과 화평을 위한 기본조건은 변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분명히 알게하고, 중국을 결코 폭력적으로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침략주의를 버리고 중국과 정의의 화평을 도모할 때 중일공존의 희망이 실현되고 태평양의 위기가 진정되고 세계의 화평이 진실로서 보장된다” 라고 하였다.
중국은 장래에 대한 희망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드러내놓고 있다. 이는 우리 당 동지들의 공언일 뿐만이 아니라, 중국 동포들의 공언이기도 하다. 중일 양국은 동아에 함께 있으며 문화관계가 깊고 절실하다. 일본은 수십년동안 유신을 통해 동아의 무게를 세계에 더해왔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손중산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불행한 전쟁에서 중국은 일본의 국력이 강하다는 것을 깊게 인식했고, 일본도 중화민족의 융성함과 건국에 대한 신념이 확고함을 깊이 인식했다. 항일전쟁은 이렇게 일어나게 되었지만, 중국은 군대를 잃고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전 국민의 희생과 결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정의의 화평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항전은 하루아침에 멈추지 않는다.
일본도 이에 선진국의 책임을 느끼고 승자를 자처하고 있지 않다. 지난해 12월 22일,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에서는 일본이 중국에 대해 요구하는 사항으로서 ‘선린우호’,‘공동방공’,‘경제제휴’라는 3가지 항목을 열거했다. 공동방공의 항목에는 “일독이방공협정의 정신으로 중일방공협정을 체결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경제제휴 항목에는 ”중국을 경제적으로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3국이 중국에서 가지고 있는 이익을 제한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시되어있다. 이 3가지 요구외, 일본은 중국에 대해 영토의 요구도, 군비의 배상요구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주권을 존중할 뿐이 아니라, 조계를 반환하고 중국의 독립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치외법권을 폐지하는 일도 마지 않았다. 중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을위한 분담자의 자격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보증을 요구받은 것이다.
일본의 성명을 보면, 침략주의를 포기하고 중국과 정의의 화평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본이 전쟁 속에 이러한 반성을 해왔으니, 중국도 정의에 부합하는 화평을 하루 빨리 실현할 수 있도로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중일 양국의 관계는 이미 손중산 선생의 귀중한 가르침인 대아시아주의에 관한 연설에서 이미 그 길을 보여주었다. ”중일은 어떤면에서든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 양국의 발전을 도모해야한다, 중일 양국은 아시아 민족의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어야한다.“ 라고 말이다.
이 깊고 저명한 연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중국은 자유와 평등을 얻지 못한 그 책임을 분담할 자격과 능력이 없었기에 국민혁명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의 독립과 생존은 이미 위협을 받고 있으며, 멸망의 두려움에 처해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침범을 당해왔고, 결국에는 이 불행한 전쟁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은 이 성명을 통해 현재의 분쟁을 끝낼 뿐이 아니라, 수십년간 이어진 분쟁도 해결하려고 한다. 또한 동아가 일본과 협력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화평의 토대를 마련하려고 하고 있다. 지난번 선언에서 ‘중일공존의 희망이 비로소 실현되어야 태평양의 위기도 비로소 해소될것이고, 세계의 평화도 비로소 진실로써 보장되는 것이다.”라고 밝힌 것은 이를 위한 것이다.
작년 12월 29일, 왕징웨이(왕자오밍) 동지는 중앙정부에 대해 일본의 설명을 원칙적으로 찬성해야 한다며 이 원칙에 따라 다양한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렇게 선언에 명시된 방침에 따라, 정의에 부합하는 화평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은 전 당 동지들이 인정한 바이고, 전 국민이 바라는 바이다.
(12월 29일 왕징웨이의 주장, 즉 염전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지난대회는 선언문에 방침을 명시하여 장제스, 왕징웨이 두 동지를 총재, 부총재로 선출하여 이 방침을 집행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는 동시에 국내외 동포에게 공지하였다. 공통의 신앙인 삼민주의 아래서 충성을 다하고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했다. 하지만 장 동지는 갑자기 방침을 버리고, 일본 정부의 작년 12월 22일 성명에 대하여 개인적인 독단, 발언으로 이를 거절했다. 왕 동지의 건의를 보고, 이전 대회에서 왕 선생에게 부탁한 바는 생각하지도 않고 갑자기 당적을 영원히 제명하고 모든 직무에서 해임시키는 처분을 주어, 극단적인 엄한수단으로 여론을 억압하고, 극단적인 참혹한 수단을 써서 동지를 학살하였다. 결국 화평운동은 좌절되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특히 안타까운 것은 작년 4~5월, 공산당원들이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의 책략노선》이라는 책을 만들고 퍼트린 것이 발각되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소위 모든 것에 항일 구호를 내세우고, 항일구호의 엄호속에서 계급투쟁, 토지혁명을 진행한다” 라는 것이 신조로 정해져 있었다. 이를 행한자들은 항전을 빙자하여 국민정부의 힘을 약화시켰다. 계속하여 군대를 잃고 땅을 잃고 있음에도 이들은 붕괴를 촉진시키고 항전을 빙자하여 인민의 가난과 재물을 고갈시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소위 중소부르주아 계급을 말살시켜 대부분 사람들이 무직자가 되게 하여 이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항전을 빙자하여 우민 정책을실행하려 하고 있다. 지식 계급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여 전국을 정신적 파탄에 빠트리게 하고, 알지못하게 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게 했고, 항전을 빙자하여 변구 정부의 세력을 확장하고, 중화민국을 중화소비에트로 만들어 소련의 영원한 종속물로 만들고, 항전을 빙자하여 중일의 병사들을 연달아 재앙으로 몰아넣어 소련이 편안하게 우리를 비참하게 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것은 확립된 전략에 의해 체계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변구 정부 지역내에서는 봉쇄정책을 이용하여 눈과 귀를 차단하고,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과 함락된 지역에서는 파렴치한 선전과 폭정으로 인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국민정부의 소재지에서는 장제스를 옹호한다는 구호를 이용해 호가호위하고 있고 몰래 비방과 공격을 하여 인민들을 위협하고 장병과 동지들을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이 공비의 모습이며, 조국을 팔아먹는 것은 그들의 소원이니 그들은 책임을 질 것이 없다. 비난 받을 것은 장 동지가 양쪽으로부터 옹호받는 동시에 이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10여년 동안 장병들이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흘린 피는 10개 성에 걸쳐있고, 인민은 공비의 손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수천만명이 죽어나갔다. 이 나라의 존망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음에도, 장 동지는 모든 동지들의 충언을 듣지 않고 공비들에게 좌지우지 되고 있다. 공산당을 용납할 수 없는 동지는, 장 동지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성명은 공동방공과 관련해 코민테른의 국제교란 음모를 막으려 하는데, 이는 중국정부의 최우선 과제다. 이전에는 이와 관련해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군사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 가장 우려되었던 것이나, 이번의 성명을 통해 일독이 방공협정의 정신으로 중일방공협정을 체결한다고 선언하였으니, 이러한 우려는 해소될 수 있다.
일본은 중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고 방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협정 기간내에 특정 장소에서 일본군의 방공 주둔을 허가하고, 내몽골을 특수방공지역으로 지정하는 것을 요구했다. 협정기간 및 특수 지역은 양국이 협의하고 동의해야하는 내용이다. 내몽골은 비록 특수방공지역이지만, 그 영토 주권은 여전희 중국에 있음으로 이는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경제협력에 대해 일본은 이미 “중국의 주권을 존중한다.” 라고 밝혔고, “중국을 경제적으로 독점하거나 제3국이 중국에서 가진 이익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일의 제휴와 합작만을 요구한다.” 라고 재차 선언한 것은 지난대회 선언의 “정치적으로는 주권과 행정의 완전성을 최소조건으로 하고, 경제적으로는 호혜평등을 협력의 원칙으로 한다.” 라고 말한것과 부합한다.
만주 문제를 포함한 선린우호의 문제는 9.18 사변 이래 중일간에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대회 선언문에는 “동복 4성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한다.”라고 명시되어 있고, 장 동지는 이 회의에서 이점을 설명하며 “일본이 동북문제를 해결하고 더 이상 우리 영토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일본이 중국의 영토주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고 동북 4성의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하고 있는 이상, 중국은 당연히 선린우호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
이 3가지 요소는 이번회의에서 결정된 원칙부터 구체적인 계획까지 모두 국민정부가 협상을 통해 신중하게 교섭하여 적절한 완성을 구해야 한다. 요컨대, 정의의 화평은 이미 중일양국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기에 그 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지금까지의 ’항전건국‘ 이라는 구호를 ’화평건국‘으로 바꾸어 정중히 선포하며, 공비가 다시 힘을 키워 재앙이 닥치기 전에 반공을 화평건국의 필수사업으로 삼을 것을 정중히 선포한다. 화평은 건국의 과정을 순조롭게 진행하게 하고, 반공은 건국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국내외 동포들이 이뜻을 함께 알고 공동신앙인 삼민주의 아래 이 중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이번대회는 외교, 내정등 모든 중대한 방침에 대하여 더욱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외교에 관해서는, 지난대회의 선언문에서 “중국은 오늘날의 대외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원칙을 준수해야한다. 첫째는 일찍히 참가했던 국제화평을 유지하는 조약을 반드시 확실하게 준수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계 각국의 기존 우호에 대해 계속 부단히 노력하여 이를 더욱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당시에는 인민전선론과 국제전선론이 유행하여 이에 참가하는 것이 바른 것으로 여겨졌다. 인민전선론자들은 하지만 앞에서는 구국을 이야기 하지만 뒤에서는 공산당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고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에 대한 불충이며, 세계에 대한 불인(不仁) 이다. 최근 국제관계의 격변속 이러한 근거없는 말들은 쓸모 없는 것이 되었다. 국제전선이라는 대외정책을 따르게 되면 나라와 민족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중국은 약한나라이기에 세계 강대국들 사이에서 종횡으로 활동할 힘이 없으며, 그들의 급속한 분단과 협력의 변화를 따라가며 주요 계획을 결정할 힘도 없다.
특히 먼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와 싸워서 승리를 거둘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를 하더라도 동맹의 원조가 없는 것이고, 평화는 대외적 제약 속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며, 이 과정 속에서 동아의 두 강대국이 재난을 당하고 스스로 어찌할 수 없게 될 뿐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불성실하고 어질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헌명하지 못한 것으로, 불충(不忠), 불인(不仁), 불지(不智) 는 중국 국민의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의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의 향후 외교방침은 지난대회에서 제시된 두가지 원칙을 준수하여,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각국의 우호를 증진시켜 중국의 정당한 권익의 발달을 도모하고 선린우호를 도모해야한다. 동아의 화평으로 세계의 화평을 얻을 수 있다. 먼나라와 동맹하고 가까운 나라와 싸우는 방책은 배척해야 하는 것이며, 합종연횡과 같은 것은 모두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안으로는 자립할 수 있고 밖으로는 공존할 수 있다.
내정에 관해서는 지난 대회 선언문에서 내정 방침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내정과 외교정책은 밖과 안을 다룬다는점에서 차이는 있으나, 둘 다 삼민주의를 최고의 지도원칙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지난 1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인용하여 “민족주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국민족이 스스로 해방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는 중국내의 모든 민족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있다.
소위 “중국민족이 스스로 해방을 구한다.”라는 것은 대외적으로 중국이 차식민지의 지위에 처해있기에 불평등 조약의 철폐는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구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방법이라는 것이고, “중국내의 모든 민족이 평등하다.” 는 내부적으로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약속한 모든 민족이 자유롭게 조직되고 단결되는 나라 (각 민족 자유연합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회는 이전의 일관된 정신을 유지하고 그 실행을 기대하려는 것에 그친다고 할 수 있다.
민권주의에 대해서는, 지난 대회의 선언문에서 “민중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민중의 힘을 키우는 데 필요한 과제이며, 민권 신장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또한 이번 대회가 계속해서 추진해야 할 일이다. 다만 지난 대회 선언문에서는 정치기구에 대해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제 5차 전국대표대회가 의결한 국민대회의 소집, 헌법 제정의 공포에 대해서는 부득이하게 연기한다.” 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정부는 이때 “국민정부에서 제정,공포한 약법에 의거하여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라며 “국민참정기관을 설립하는 것에 응하여 전국의 헌명한 인사들이 주요 게획에 참가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나,이번 대회에서 국민참정회의 성립 이후의 성과를 검토해본 결과 이는 명목상에 불과한 것으로 들어났다. 개인독재가 심화되면서 중앙의 동지들은 더 이상 토론의 자유가 없게 되었으며, 국민참정회는 명목상으로만 그 목적에 맞게 되었다. 더욱이 국민참정회의 기능과 권한에 대해서도 주요 계획에 대한 참여가 입증되지 못했다.
민생주의에 관해서는 지난 대회선언에서 손중산 선생의 유훈을 확인하며 계급투쟁을 청산하는 것이 목표힘을 명확하게 밝혀 손중산 선생의 유훈을 잇는것을 분명히 했다. 이번대회가 끝나면 공산당원들의 야망이 다시 되살아 날 것이다. 그들은 부득이하게 또 성명을 발표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은 민생주의에 대한 첫 강의의 “민생주의는 즉 공산주의다.” 라는 문구를 가로채서 자신들의 부적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 싶이 민생주의 첫 강의의 문장은 “민생주의란 곧 사회주의고, 또한 공산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대동주의다” 이다. 이는 원래 일반적인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뜻이 매우 명확한데 어찌 이렇게 붙일 수 있는가?
그리고 민생주의의 제1강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생주의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물질중심이고, 민생주의는 민생중심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을 사회진화의 원동력으로 삼고, 민생주의는 계급투쟁을 사회병리적으로 여기며, 사회가 살아갈 방도로 삼았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사회혁명으로 사회경제를 개조할 것을 주장하였고, 민생주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경제를 개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모든 산업의 사적권리를 몰수할 것을 주장하고 민생주의는 자본의 절제를 옹호하고 모든 산업을 국가자본의 국유기업과 민간자본의 민간기업으로 하여 국가가 이를 법률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모든 토지의 사적 권리를 몰수할 것을 주장했지만, 민생주의는 몰수에 반대하며 평균지권의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민생주의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이론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르고 방법론적으로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오늘날 학문과 정책의 모든 부분에서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으며, 세계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국가는 없다. 소련의 신경제정책과 5개년 경제계획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제거했기에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 더욱이 공비들은 살인과 방화에서 멈추지 않고 이자성과 장헌충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이자성과 장헌충은 명말 반란을 일으켜 청에게 도움을 줬단 평가를 받았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고, 민생주의와 연결시키는 것도 인민들을 힘들게 할 뿐이다. 이제부터 중국은 “화평,반공,건국”을 위해 필요한 사업을 할 것이다. 민생에 관해서는 이론적으로 민생주의를 견지하고 방법론적으로 실업과 구제계획을 추진하여야 한다. 자본주의의 틀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틀도 관여하지 않는다. 이는 지난대회에서 이미 국민들에게 알린 바가 있으나, 이번 대회에서는 이를 엄숙히 소명하는 것을 꺼리지 않겠다.
교육과 사상에 대해서는 외교와 내정과 같이 지난회의의 선언에서 두가지 조항을 제안했다. 하나는 도덕의 수양이고, 하나는 과학운동으로, 이는 화평반공건국의 기간에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이다. 공비의 물질관념속 인류의 숭고한 평화의 이상은 모두 버림받았다. 그결과 인류는 우민으로 전락하게 될것이며, 특히 그 우민정책은 특히 과학운동에 역행하고 악영향을 주었다. 간단한 구호나 일반적인 구호는 과학운동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공비들이나 살인과 방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도덕의 수양을 통해 사회적 상부상조의 정신을 제고하고 계급투쟁사상을 제거하고, 과학운동을 통해 지식과 신뢰의 정신을 추구하여 맹목적인 복종과 강압적 사상을 제거해야 한다. 화평반공건국 운동의 성공은 여기에 달려있다.
특히 진전된 점은 최근 몇 년동안 중국의 민족의식이 점점 대중화되고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진보이고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를 시기하고 중국의 민족의식과 그 싹을 말살하려는 자도 있고,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음모를 실현하려는 자도 있다. 이것이 최근 중국이 몇 년간 겪은 불행이며, 이를 아는 이들은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큰 상처를 입은후, 화평이 아니면 건국을 할 수도 없고, 반공이 아니면 화평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음모를 꾸미는 자는 더 이상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은 삼민주의의 지시에 따라 고유의 도덕을 성실히 계승하고 겸손한 용기로써 현대문화를 수용하여 민족의식을 성숙하게 하고 속으로는 자립의 기둥을, 밖으로는 공존의 기둥을 세워나가야한다. 중국은 결코 편협한 애국주의를 자초하여 배척사상의 길로 빠지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웃국가들과 모든 우방들에게 이러한 뜻을 밝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보는 상호우호정신으로 서로 노력하여 동아의 화평과 세게의 화평에 공헌해야 한다.
이번 대회에선 지난 1년간의 경과를 검토하면서 중국의 현주소, 외교, 내정 전반에 대해 엄숙히 선언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당 동지들은 손중산 선생을 따르고 국민혁명에 힘써온지 벌써 50년이 되었다. 우리가 맡은 일은 역사적 사명이고, 우리의 사명은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장제스는 집권이후로 내부적으로는 중화민국 건국강령에 따라 삼민주의의 실현을 하지 못했고, 외부적으로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예방하지 못해 재앙을 초래해 갑작스러운 재난이 발생했고 이는 제때 구제되지 못해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생각해보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항전‘없이는 조국을 건설할 수 없다고 믿어왔다. 정신과 힘을 집중하여 투쟁하여 언제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는 오늘부터 ’화평반공‘ 없이는 조국을 건설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는 고된 일이고, 이를 위해 해야할 수고와 감당해야 할 위험은 항전에 견주어 볼때 더욱 엄중하다. 화평운동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고, 그 것이 효과가 있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 일본정부의 발언은 고정된 국가정책이자 일관된 여론으로 우리는 결코 이유없는 억측을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는 원칙의 실현과 다양한 구체적인 계획의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
또한 전후의 수습도 쉽지않은 일이다. 지금 전 국민은 어디를 가든 도탄에 빠져있다. 항일전쟁 시대에 필요했던 희생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나, 정부의 잘못된 조치와 공비들의 방해로 인해 대다수 인민의 생명과 재산이 쓸때없이 낭비되었다. 민력이 고갈되고 국력도 고갈되고 있는데 이를 회복하지 못하면 세계에서 어찌 국가와 민족이 자립할 수 있겠는가? 본 당 동지들은 자기책임을 다하고 큰 결단과 용기를 가지고 책임을 져야한다.
본 당 동지들은 수년동안 당이 민주집권적 제도와 정신을 잃고 점점 더 개인독재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모든 부패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덕망있는 동지들에게 권한을 부여해 민첩하게 행동해야 하나, 그바탕은 여전히 민주적이여야 한다. 민첩한 민주조직이 있어야 민첩한 집권행동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의지와 규율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야 당이 의식과 힘을 집중할 수 있을 것이고, 당은 그러면 자주성을 가진 동지들을 지속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의견과 자유로운 사고로 책임을 분담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진정한 이해와 결단력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개인 독재는 맹목적인 복종과 강압을 가져올 뿐이고 그 결과는 여전히 엉망이다. 또한 동시에 당의 조직과 훈련이 건전해야 인민을 영도하고 인민을 조직하고 인민을 훈련시킬 수 있다. 당의 활동이 국민의 활동이 되어야 당과 국민사이에 장벽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본 당 동지들은 이러한 불운을 감내하고 이러한 불행을 오히려 겪어가며, 자책하며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본 당 동지들은 과거의 사명을 계속 짊어져야 하며, 특히 본 당 동지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고 부흥에 헌신하는 것은 선열과 자손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순교자는 생사(生死), 화복(禍福), 영욕(榮辱), 비방 모두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내의 능력과 정성이 단결하는 것은 이에 달려있다. 그리고 전국의 뜻있는 이들이 진정으로 협력하고 “화평,반공,건국”의 목적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루거우차오 사건이후 전국이 하나가 되어 항전에 나섰다. 항전의 가장 큰 목적은 정의의 화평을 달성하는 것이다. 오늘 날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화평은 이미 그 빛을 보았다. 이번대회에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동포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동시에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협력한 동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된 결심과 발걸음으로 화평을 실현하고 헌정을 실시하여 동아와 세계에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화민국을 건립해야 한다.
선언에서는 이제부터 중국국민당이 "항전" 의 구호를 "화평" 의 구호로 바꾸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바꾼 이유로서 화평의 중요성, 자신들이 화평에 나서는 이유, 반공에 나서는 이유를 상세하게 서술해두었다. 그리고 장제스가 행해온 행동들에 대한 비판을 함과 동시에 왕징웨이의 새롭게 태어난 중국국민당은 장제스가 하지 못한 헌정의 실시와 민주적 개혁을 해 낼것임을 서술해 두었다.
여기서는 삼민주의의 민생주의를 언급했고, 실제로 삼민주의의 민생주의 1강에는 "민생주의는 공산주의라고도 할수 있다." 라고 규정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은 민생주의와 공산주의를 다른 것이라 생각했는가? 왜냐면 여기서 규정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유교의 대동과 같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구호인것으로,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징웨이측에서는 이러한 상세한 이해없이 단순하게 민생주의 = 맑스주의로 규정되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선언을 끝으로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8월 30일 오후 4시의 폐회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왕징웨이측은 이 대회의 내용과 자료가 유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유출되어 고난을 겪기도 했다. 왕징웨이측은 대회를 위해 위에서 보았듯 여러 지역인사를 모집했다. 근데 문제는 만주국의 영역인 동북 4성의 대표들도 목록에 있었던것, 일본측은 이에 항의했지만 메이쓰핑은 "그것은 이전문서를 그대로 쓰다보니 생긴문제, 이전문서는 우리가 아직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을 시기꺼다." 라며 얼버무리며 문제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대회의 결과를 일본에서는 '국민당의 대결심' 이라고 평가한 것과 달리, 충칭에서는 이를 단지 일본의 꼭두각시 회의로 규정하고,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결정된 내용에 대해 모조리 무시를 가했다. 이후 9월 5일, 왕징웨이는 상하이 자신의 공관에서 제6차 전국대표대회 제1차회의를 시작했고 정식으로 중앙당을 설립하며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은 정식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이 대회는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장제스의 국민당이 완전히 갈라서게 되는 지점이라는데 그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고, 대회는 동시에 신중앙정권을 옹립하려는 왕징웨이를 위한 세력으로 국민당(왕징웨이) 를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헌정을 이야기하는 모습, 국민대회를 이야기하는 모습등은 왕징웨이가 이과정에서 장제스보다 더 정당성을 얻으려고 한 노력이라고 할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대회는 졸속으로, 그리고 억압적인 분위기속 치뤄진 비정상적인 대회였다. 애초에 국가 제1정당의 당대회가 국정원 강당에서 열린 꼴이었고, 비밀스럽게 개최된것은 물론, 왕징웨이에 대한 반대는 사실상 불가능 했으며, 왕징웨이가 일본인은 없다라고 한것과는 반대로 일본은 이 대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왕징웨이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어떻게든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과 동등한 수준의 조직을 만들려고 했던 발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왕징웨이 본인은 이러한 결과에도, 본인 스스로는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6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있었던 라디오방송에서는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합당한것으로 평가하고, 오히려 자신의 6차 전국대표대회가 이전 1935년의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계승한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이렇듯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왕징웨이와 왕징웨이정권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나, 그속에는 왕징웨이 정권이 가지고 있는 많은 한계점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왕징웨이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당시 일본이나 조선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선과 일본에 이 대회의 정보가 전달된 9월 1일, 나치독일이 폴란드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버리면서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6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라디오방송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조 :)
[출처]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이강범, 『중국친일매국노 漢奸』, p 175-183
國民政府宣伝部, 『和平反共建国文献 : 国民政府還都週年紀念冊』 , 1941 : https://dl.ndl.go.jp/pid/1267342/1/28
중화일보 1939년 8월 31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yang-ribao-1939.08.31/page/n1/mode/2up
위키문헌, 중국국민당 제6차전국대표대회선언 항목 : https://zh.wikisource.org/zh-hant/%E4%B8%AD%E5%9C%8B%E5%9C%8B%E6%B0%91%E9%BB%A8%E7%AC%AC%E5%85%AD%E6%AC%A1%E5%85%A8%E5%9C%8B%E4%BB%A3%E8%A1%A8%E5%A4%A7%E6%9C%83%E5%AE%A3%E8%A8%80_(%E6%B1%AA%E7%B2%BE%E8%A1%9B%E5%9C%8B%E6%B0%91%E6%94%BF%E5%BA%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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