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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환도까지의 일주일, 무슨일이 있었나? (1940.03.23~03.30)
한국-일본의 신문 조사를 통해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1940년 3월 30일까지 일주일간, 중국을 비롯한 한-중-일 삼국에서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과 관련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해보았습니다. 계림호가 가지고간 미나미 지로의 축전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B%AF%B8%EB%82%98%EB%AF%B8-%EC%A7%80%EB%A1%9C-%E5%8D%97%E6%AC%A1%E9%83%8E-%EC%A1%B0%EC%84%A0%EC%B4%9D%EB%8F%85%EC%9D%98-%EC%99%95%EC%A7%95%EC%9B%A8%EC%9D%B4%EC%A0%95%EA%B6%8C-%EC%88%98%EB%A6%BD-%EC%B6%95%EC%A0%84-1940-03-30 계림호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A%B3%84%EB%A6%BC%ED%98%B8-%E9%B7%84%E6%9E%97%E8%99%9F-%EC%9D%B4%EC%95%BC%EA%B8%B0 구축함 하이스이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 (예정) 환도선언과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국민정부-환도선언-國民政府-還都宣言-1940-03-30 조선의 유광렬 매일신보기자 - 왕징웨이 대담문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C%9C%A0%EA%B4%91%EB%A0%AC-%EF%A7%89%E5%85%89%E7%83%88-%EC%9D%98-%EC%99%95%EC%A7%95%EC%9B%A8%EC%9D%B4%EC%99%80%EC%9D%98-%ED%9A%8C%EA%B2%AC-1940-4-1 이날 10시에 발표된 10대정강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C%99%95%EC%A7%95%EC%9B%A8%EC%9D%B4%EC%A0%95%EA%B6%8C%EC%9D%98-10%EB%8C%80%EC%A0%95%EA%B0%95-1940-3-30 요나이- 왕징웨이 일화 교환방송의 내용은 여기서 : (예정) [출처] : 만선일보 (滿鮮日報) / 조선신문 (朝鮮新聞) / 부산일보 (釜山日報) / 매일신보 (每日新報) 1940년 3월 25일자 ~ 1940년 4월 1일자 / https://nl.go.kr/newspaper/ 조선일보 (朝鮮日報) / 동아일보 (東亞日報) 1940년 3월 25일자 ~ 1940년 4월 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삼천리 제12권 5호 - 南京 新政府 盛典 參禮記 (1940.5.1)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a_016_0750_013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9%82%84%E9%83%BD%E5%BC%8F%E5%85%B8&searchKeywordConjunction=AND
- 계림호 (鷄林號) 이야기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명인 신용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신용욱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신용욱 (愼鏞寅, 1901~1961) , 그는 안창남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비행분야를 개척한 이중 한명이었다. 신용욱은 식민지 조선에서 항공분야를 개척한 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 아브로식 제 504호 K형 타이거호) 그는 1927년 여의도에 그의 비행기를 이끌고 착륙하여 아직 '비행' 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조선 민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최초의 비행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에 안창남이 1922년 비행을 한바 있다.) 그는 1930년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경성을 구경하는 유람비행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36년, 조선 최초의 민간항공사 신항공사업사 (愼航空事業社) 를 설립해 상업적 비행 운행을 시작했다. 즉 그는 조선 최초의 항공기 비행사는 아니었지만, 조선 최초의 항공기의 상업화를 이뤄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항공사업사는 해방이후 대한국민항공사를 거쳐 대한항공 (大韓航空) 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곳곳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자신의 항공기를 이용해 운행을 게시했다. 우편이나 화물, 승객까지 가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제국의 거대 항공사들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만이 운영하고 있던 항공사업에 조선인도 참가하게 되었다는데에 의미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그의 회사와 비행기 또한 전쟁에 동원되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전쟁을 위해 협력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한국 항공사업의 시초이자 해방이후 한국 항공사업에 성장에 기여한 바는 무시할 수 없으나, 그가 일제 시절 그의 회사와 비행기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였기에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신용욱은 1940년 왕징웨이 (汪精衛) 가 이끄는 신중앙정부 (왕징웨이정권) 이 설립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비행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항공기들은 조선반도 밖으로 비행을 한 경험이 없었다. 즉 단거리 비행경험만 존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미 일본의 거대항공사들은 도쿄와 난징같은 장거리를 연결하는 노선을 이미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H6K와 같은 거대 비행정을 이용해 일본과 남방을 연결하는 노선까지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용욱의 신항공사업사는 아직 조선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축하비행은 왕징웨이의 신정권 수립을 축하함과 동시에 조선의 항공업계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길지 않았기에 일본의 대형항공사들 처럼 한번에 난징까지 날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만주-중국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번의 착륙과 정비, 주유 과정을 겪어야 했다. 계림호의 비행기록, 앞에서 서술하였듯 그는 비행기의 한계로 여러지역을 경유하는 일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기 (愛機) 인 비치크래프트 B-17 (Beechcraft Model 17) 모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사용한 비치크래프트 모델 17 B는 항속거리가 1,078km에 불과한 모델이었지만, 당시 제대로 된 항공기 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높은 성능의 항공기였다. 이 4인승의 이 항공기를 신용욱 본인과, 항공기를 정비할 고준식 (高準植) 이 동행하여 두명이 탑승하여 가기로 결정되었다. 신항공사업사의 비치크래프트 B-17 기체, 이 J-BAOI 이라는 식별명이 붙은 이 기체가 이후 계림호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같은 비치크래프트 기체고 , 밑의 계림호 사진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1940년 3월 16일 신용욱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축하비행 계획을 밝히고, 조선총독부에 이를 위한 비행허가를 요청했다. 다음날 총독부에서는 그에게 허가를 내려주었고, 23일에는 미나미 지로 (南次郎) 조선 총독에게 이 축하비행에 사용될 기체의 이름도 하사받았다. 미나미 총독은 이 비행기의 이름을 과거 신라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일본에서 조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용어중 하나였던 계림 (鷄林)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계림호의 모습을 재현해보려 했다 , 도장은 녹색이었던것으로 추측된다. 계림 밑의 글자는 세글자로 추정되는데 한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출발 하루전인 24일에는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의 안전을 위한 비행안전기원제까지 개최되었다. 당시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주요 신문에서 다루어졌음을 보면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음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3월 25일 오전 9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많은 인사들의 환영속에 계림호는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첫 목적지였던 봉천(奉天) 으로 향했다. 이날 계림호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성립 축하를 위한 축전이 함께 실려서 난징으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30분이 되지 않아 개성을 지났고, 한시간이 되지 않아 평양을 지나 서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륙으로 부터 3시간이 안되는 오전 11시 55분, 계림호는 첫 목적지였던 봉천(펑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림호의 이동경로, 항속거리의 한계로 만주를 통해 중국대륙으로 들어가야 했다. 봉천에 도착한 계림호는 만주국협화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환영을 받고 환영식에 참가했다. 이후 신용욱은 봉천 마로만 (馬路灣) 육군 병원을 방문해 입원중인 병사들을 위로 했다. 이렇게 행사를 마무리하고 그는 금주(진저우) 로 가서 첫 째 날을 마무리 하려 했으나 진저우 비행장의 문제로 인해 이루지 못하고 봉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봉천에서 바로 북경(베이징) 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둘째날 (3월 26일) 오전 9시 계림호는 봉천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5시간 가량이 지난 오후 1시 45분이었다. 북경에서도 그는 계류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제남(지난)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난징에 도착한 계림호와 신용욱 일행, 계림호의 실제모습을 알 수 있는몇안되는 사진 자료이다. 셋째날인 3월 27일 오전 10시 계림호는 제남으로 향했다. 제남은 그들의 경로에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기름을 재보급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시쯤 제남에 도착한 제남호는 20분가량 이곳에서 가솔린을 주유하고 , 오후 1시 다시 난징으로 향했다. 난징으로 향하는 길에 쉬저우 상공을 잠시 선회한 뒤 마침내 출발 55시간만에 계림호는 신정권의 수도 난징에 도착했다. 3월 27일 오후 4시 10분 경 계림호는 난징 상공에서 선회비행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고 4시 40분 난징에 착륙하면서 계림호의 축하비행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난징시민들의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환도식전 방문객들을 위한 난징의 수도반점 (首都飯店) 으로 향했다. 이 북경-남경 비행 과정에서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기를, 자신이 북경을 떠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일본 언론사들의 비행기들도 비슷한 시간 북경에서 이륙해 난징을 향해가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용욱측이 당시 바람의 방향이 불리했음에도 일본측보다 더 빨리 난징에 도착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일본과 조선의 첫 항공레이스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곳에서 신용욱은 조선의 언론인 유광렬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신용욱측이 27일, 유광렬 측이 28일에 난징에 도착함에 따라 신용욱 측이 하루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신용욱은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의 기자단 일행과 함께 28일 오전 난징 중산북로의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방문해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을 회견하고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유광렬의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이후 숙소로 돌아온 신용욱은 환도식전 준비를 하는 유광렬을 두고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이때 유광렬의 회고에서는 "나도 가고싶었는데 식전준비때문에 못가 아쉬웠다" 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유광렬을 두고 28일 오후 2시 난징에서 이륙해 30분뒤 상하이에 착륙했다. 이때 상하이에 거류하고 있는 조선인협회약 600명 가량이 그를 마중나왔다고 한다. 조선인협회를 비롯한 대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상하이에 도착한 신용욱은 조선인협회장에게 꽃다발을 전달받고, 아스트호텔 (The Astor House Hotel, 현재 푸장반점, 浦江饭店) 의 환영식에 참가했다. 신용욱이 묵었던 아스트 호텔, 현재도 푸장반점이라는 호텔이 위치해있다. 다음날인 29일 신용욱은 다시 비행기를 몰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인 3월 30일의 왕징웨이 정권의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신용욱은 유광렬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했다. [ 환도식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 환도식전에서 왕징웨이의 선언문인 '환도선언'은 여기서 : ] 환도식전을 끝내고, 신용욱은 4월 1일, 유광렬과 함께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임광렬과 함께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유일한 조선인 기자' 라는 유광렬의 존재를 흥미롭게 여겨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은 일본 기자단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왕징웨이와의 식사에 신용욱 또한 참가했다. [ 미나미지로 총독의 축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왕징웨이는 "조선에서 온 비행사" 였던 신용욱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비행사 신용욱을 소개했고, 왕징웨이는 그에게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말을 건냈다고 전해진다. 왕징웨이의 신용욱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어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질문하자 신용욱은 웃으면서 " 편도로 날면 다섯시간 정도 걸립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대일본항공회사 (大日本航空會社)의 팜플렛에 따르면 경성과 거리가 조금더 만 후쿠오카에서 난징까지의 비행을 6시간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이와 비슷하거나 더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난징 직행 항공편은 없었기에 신용욱 본인도 잘 알지 못 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 이광렬과 왕징웨이 + 신용옥의 식사시간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서 :] 이렇게 왕징웨이와의 회담을 마치고, 신용옥은 이틀이 지난 4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다시 조선을 향해 이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국과정에서는 그의 계림호가 4인승이었던 만큼, 조선의 기자 유광렬과 다른 기자를 포함해 4명을 채워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돌아오는 과정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여의도 비행장에 계림호가 돌아온 것은 출발한지 8일이 지난 4월 11일이었다. 가는데에는 3일만에 갔지만 돌아오는 과정에는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복귀가 지연되면서 8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신용욱 일행은 이렇게 환영속에 조선에 돌아왔고, 이후 일행은 미나미 지로 총독을 독대하여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4월 14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신국민정부환도 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 영화대회' 에 참가 하게 된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신용옥의 《경축황군위문비행의인상》강연을 볼 수 있다. 신용욱은 매일신보에 유광렬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행기를 신문에 연재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황사로 인한 먼지라고 이야기하고,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육십이 다되어 가는 나이인데도, 그 눈매는 초롱하다고 하고, 중원에서 큰인물이 난다던데, 왕 주석이 그렇다라고 왕주석에 대해 극찬했다. 이 기록은 앞에서 소개드린 유광렬의 기록과도 상당 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해 이런 왕징웨이와 조선인 인사들과의 교류 기록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1940년 4월 1일 왕징웨이에게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는 신용욱, 이후 그는 왕징웨이와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축하비행을 통해 조선과 왕징웨이정권의 교류, 조선 항공산업에 기여했다는 공여를 인정받아 총통부 체신국과 방호과로 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신용욱은 지난번 소개한 임광렬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과 식민지 조선의 인사들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뜻 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인물의 기록을 통해 임광렬의 친일활동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듯, 신용욱 또한 친일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다루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태평양전쟁시기 항공기를 이용한 친일협력만 부각되지 이렇게 태평양전쟁 이전의 보였던 친일활동은 부각하지 않았다. 대한항공도 자신들의 시초를 신항공사업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지만 이러한 활동은 부각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지 않았던 신용욱의 새로운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3월 15일~6월 11일자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012299&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40년 3월 17일자 ~ 4월 1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17%22%2C%22officeId%22%3A%2200023%22%2C%22page%22%3A1%2C%22fevt%22%3A8936%7D 왕징웨이와 신용욱의 악수 사진 / 계림호 사진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026506&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신용욱의 사진 (朝鮮日報)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02/18/EKSA2JGKZVHPNFUUGI6YF2OLA4/ 계림호로 추정되는 기체의 사진 https://richardmin.com/%ED%95%9C%EA%B5%AD%EB%B0%94%ED%96%89%EC%97%AD%EC%82%AC-%EC%99%80-%EC%8B%A0%EC%9A%A9%EC%9A%B1-%EB%B9%84%ED%96%89%EC%82%AC-korean-version/
- 국민정부 환도선언 (國民政府 還都宣言, 1940.03.30 )
국민정부 환도선언 (國民政府 還都宣言) 국민정부는 중앙정치회의의 결의에 의해 남경으로 환도하였음으로, 이에 삼가 성의를 피력하여 동포들에게 고한다. 화평실현 (和平實現) 과 헌정실현 (憲政實現) 이라는 2대방침은 중앙정치회에서 정중히 결의한 바로서 국민정부는 이러한 방침을 견지하고 맹세하며 이를 실행하려 한다. 소위 화평실현이라는 것은 일본과 협력하여 선린우호 (善隣友好),공동방공 (共同防共) 과 경제제휴 (經濟提携)의 원칙에 의하여 과거의 분규를 일소하고 장래의 친선관계를 확립하여 과거의 취한 정책 혹은 법력으로 이러한 방침에 반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폐지하거나 수정하여 주권의 독립자유와 행정의완정을 보전하고, 또한 경제상의 호혜평등합작 (互蕙平等合作) 을 실현하여 공존공영의 기초를 확립하려는데에 있다. 1940년 3월 30일 오전 10시, 난징 국민대회당에서 환도선언을 발표하는 왕징웨이. (同盟寫眞部, 1940.03.30) 중일양국은 원래 형제와 같았다. 불행히 서로를 간과하고 전쟁까지 하게 되었으나 이번 국교 조정을 이룬 이후는 평화를유지하여 함께 동아를 안정시키고 동시에 일절우방인 일본에 대해 화평외교방침에 의거해 신의를 지키고 신뢰를 두터히하여 우호관계를 촉진시킬 것이다. 소위 헌정의 실시라는것은 중국국민당 제5차급 제6차 전국대표회의 선언에서 이미 명확하게 규정되고 또한 전국의 능력있는 지사들이 일찍이 함께 참여한 결과이다. 전후 각지역의 파괴된 시설들이 이제 부흥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에 전국의 동포들은 물심양면(物心兩面)의 힘을 집중하여 용맹매진(勇猛邁進) 하여 현대국가의 건설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 개인의 독재는 전국인원의 정성단결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음으로 이를 혁명정치로서 제거되어야 한다. 또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도발하고 독립을 이룬 민족들의 대적이니 반들이 이를 근절시켜 그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한다. 각급 민의기관의 설치, 지방제도의 실시, 국민대회의 소집, 헌법제정의 발포등등은 모두 오늘을 기하여 실행에 옮겨 전국 인민의 여망에 부할것이다. 화평의 실현과 헌정의 실시는 국민정부의 준봉한 최대방침인 동시에 국민정부가 부담해야할 최대의 임무다. 이에 국민정부는 환도와 함께 이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 인민들, 화평운동을 위해 희생된 선열에 대해 무언의 애도와 경의의 예를 표한다. 국민정부가 제일로 자신의 책임을 지각하는 바는 실로 전후의 인민을 무휼하고 생명, 자산, 자유로 하여금 국가법률의 보증을 받을 수 있게하고 기업들이 안심하고 경제산업의 부흥과 문화의 발전에 종사하게 허는 것이다. 국민정부는 삼가 벗들인 다른민족들을 청렴하고 용감하게 이끌고, 이로인해 원망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를 꺼리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무고한 인민과 동고동락을 함께하고 생사를 같이하며 국가민족의 부흥을 기도할 것이다. 현재 충칭을 비롯한 각지에 복무중인 공무원과 일반 군인들에데 대하여 경의로서 포고한다. 신고를 하는 인원에 대해서는그 확실한 표명이 있은 후 모두 원급원봉으로서 이를 임용할것이며 공무인원인 자도 포고가 있은후 속히 난징으로 귀환하여 신고하라. 충성이념을 가지고 있고 , 그 지역에 응해 알선운동에 고심하고 공헌한 바 있는 자는 특히 우대하여 임용할 것이다. 이 포고가 있은 이후 반드시 명령을 준수하고 즉시 정전하여 후의 명령을 기다리라. 정규군이 아닌 각지에서 산재하며 유격을 담임하는 유격대도 또한 명령에 복종하여 활동을 정지하고 속히 점검을 받아 (왕징웨이 군으로) 수용되기를 기대한다. 이는 화평건국의 이상으로서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바이다. 국민정부의 이번 환도는 전국을 통일하고 화평 실현과 헌정 실시의 큰 길을 향해 용맹전진하는 것으로서, 전국내 이로서 유일의 합법적 중앙정부인것이다. 따라서 충칭측에서 만약 전국내의 대한 법령을 발포하고 외국에 대해 조약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모두 무효인것이 당연하다. 충칭측도 기존의 관계를 벗어 던지고 신속의 국면의 수습을 함과 동시에 간난을 구하기를 기대한다. 사변이래 임시정부, 유신정부등의 정권은 전후 성립되었으나 모두 국맥을 보전하고 민명(民命)을 유지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국궁진췌 (鞠躬盡萃) 하고 노고를 겪어왔다. 이제 이미 이들은 뜻을 같이해 국민정부에 통일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이에 변한 사항에 대해서는 잠시 그 현상을 유지하고 모두 대세의 방침에 의해 속히 조정을 할것이다. 그러한 후 전국은 통일적 지도하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전후의 상처로 부터 회복하고 장래의 발전을 그릴 수 있게 될것이다. 이는 실로 국가민족의 부흥과 동아의 화평에 관련되는바 심대한바로 촉망하여 마지 않는바이다. 1940년 3월 30일 오전 10시 난징 국민대회당,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정치위원회 주석 왕징웨이 (汪精衛). [출처] : 동아일보 / 조선일보 1940년 3월 3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003310023910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0-03-31&officeId=00023&pageNo=1&printNo=6791&publishType=00010 왕징웨이의 연설사진 : https://www2.i-repository.net/il/meta_pub/G0000002chosakai_F01_1940_0331(0)11876
-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수립 축전 (1940.03.30)
미나미 지로 (南次郎) 7대 조선총독, 1936~1942 재임 미나미 지로의 왕징웨이 정권 설립 축전 (1940.03.30) 미나미 조선 총독 (南朝鮮總督) 남경 중화민국 정부 왕주석 각하 (南京中華民國政府 汪主席 閣下) 금일 귀국 중앙정부수립의 소식에 삼가 심후한 경의를 표합니다. 생각컨데, 동야인의 동양을 건설하고 항구적평화를 확보함은 귀국과 우리의 부동의 국시로서 실로 세계 평화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현은 오직 일화양국의 제휴흥융에 의하여야 가능할 것입니다. (왕징웨이 각하께서) 앞장서서 화평구국의 대업에 마땅한 천지인의 삼화(三和)를 득한바, 귀 정부의 전도는 혁혁한 광명에 차고 공동흥아의 성업은 기대되는 바입니다. 이에 귀국의 융창과 양국의 돈의를 축복하고 왕징웨이 각하와 귀 정부 각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1940년 3월 30일 ,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출처]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30%22%2C%22page%22%3A1%2C%22officeId%22%3A%2200023%22%2C%22fevt%22%3A8077%7D (조선일보 1940년 3월 30일자)
- 중화민국이 국제연합에서 퇴출된것에 대해 총통이 전국 동포들에게 고함 (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1.10.26)
중화민국은 1944년 국제연합 (UN) 의 창설과정부터 기여했던 UN 생성당시의 핵심국가이자,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다. 하지만 1971년 10월 25일, 유엔총회 제2758회 결정에서는 UN에서의 중국대륙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켰고, 이름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민국의 권리는 박탈되게 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은 반발하여 UN에서 탈퇴하게 된다. 중화민국이 국제연합에서 퇴출된것에 대해 총통이 전국 동포들에게 고함 (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1.10.26) 제26차 유엔 총회 (1971년 10월 25일의 유엔총회 제2758호 결정,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합법적 권리의 회복결정을 의미 ) 는 국제연합헌장을 위반하고 알바니아와 기타 도적 국가의 제안을 통과시켜 마오주의 비적을 이끌고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화민국의 자리를 훔치도록 했다. 우리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이라는 본래 가치를 지켜왔다. 나는 표결이 있은 후에 중국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연합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인민 전체가 이번 총회에서 통과된 헌장 규정을 위반한 이 불법적인 결의가 유효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마오와 공산주의 도적단들은 중화민국의 반란군이며 내부적으로는 인민에 대한 범죄의 집합체이다.전 중국 인민, 특히 본토의 7억 동포의 공공의 적이며 통치하는 침략자이다. 유엔의 무자비한 전복과 침략에 대해. 비록 본토가 현재 마오주의 도적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대만, 펑후, 진마에 기반을 둔 중화민국 정부는 본토에 있는 7억 중국인의 진정한 대표자로서 공통의 의지와 고통의 외침을 대표하며, 그리고 그들에게 마오주의 공산당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제공해왔다. 따라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 인도주의 , 자연법칙, 특히 중국 인민의 일반의지와 상관없이 마오주의 공산주의 비적이 국제연합에서 중화민국의 안전보장위원회의 지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것이다. 1944년 우리나라는 덤바턴오스크 회의에 참가하여 국제연합 선언문에 서명하고, LA연합국국제기구회의에 참가하여 헌장을 작성하였다. 국제연합과 우리는 인류가 이 세대에 겪은 두번의 전쟁의 참화로부터 미래세대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헌장을 공동으로 지켜왔다. 하지만 이번 유엔총회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무너트리고,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부끄럽게도 악에 굴복하고 폭력에 비겁하게 굴복하면서 우리나라가 참여해 열심히 만든 국제연합은 오늘날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중화민국의 국제연합 탈퇴 선언이 사실상 국제연합 파괴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문화전통은 정의를 수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것이며 비록 우리가 참가하여 창설한 국제연합에서 비록 우리가 탈퇴하였지만 국제연합이 앞으로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척도가 되어서 국제사회를 수호하고 세계의 정의와 평화 안전을 위해 용감히 싸우길 바란다. 나는 지난 반세기동안 이 세상에서 두번의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제 1차 세계대전의 큰 고통을 겪은 후 다시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모두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국제연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일부국가는 침략자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악에 굴복하고 폭력에 무릎을 꿇는것이 굴욕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생각했고 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일부 민주주의 국가는 비적을 옹호하고 마오주의 비적과 함께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법적 지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고 그들의 사상과 관행은 1차 세계대전에서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직전의 역사적 사실은 정의를 수호하는 도덕적 용기가 세계안보와 평화를 위한 가장 견고한 토대이고 , 거꾸로 권력정치에서 헤게모니 사용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라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동포들이여, 우리 국가의 운명은 국제연합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국부 손중산선생도 말하셨다. "존재의 기원은 국가와 인민의 불굴의 독립 정신에 있다. 국가는 이익에 유혹되거나 빼앗길 수 없으며 그래야만 새계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라고 말하셨다. "Strongly Oppose Red Chinese Entry into United Nations!" (공산중국이 유엔에 들어가는걸 강력히 반대한다!) - 1971년, 중화민국 타이난역의 문구 , 중화민국의 UN속출로 부터 1달전. 오늘날 우리의 혁명기지(대만) 는 이 두세력, 특히 대륙의 7억 반공인민과 해외 반공화교의 애국주의를 뒷받침할 인적자원, 경제력, 군사력,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중화민국은 결코 타인에게 조종당하고 배신당할 수 있는 나약한 국가가 아니며, 더욱이 우리는 세계의 힘의 균형을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른 국가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만약 우리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세계에 정말 큰 변혁를 만들 수 있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매우 위험하나 우리가 계속하여 자기개선을 위해 분투하는 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흔들수 없고, 우리가 용기를 내는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인내하고 끝까지 싸우면 우리는 결국 성공할 것이다. 본래 혁명의 승리적 성과는 모두 대변혁에서 착상되고 생산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야할 것이다. 특히 현재 세계 정세의 변화는 중국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중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전 세계 인류의 운명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변혁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우리의 투쟁의 성패는 세계의 안전과 인류의 운명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세계 정세의 변화를 좌시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고 변화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분투하여 적보다 기회를 먼저 잡아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비적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으며 최근의 격화되는 투쟁은 마오주의 도적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 체제가 완전히 파산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들을 포함한 본토인들은 실망에서 저항으로 돌아섰고, 그들의 발밑에 있는 반공 화산이 곧 폭발할 것을 보고 마오주의 공산당 도적은 그것을 진압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비적은 '반소비에트 수정주의', '반미제국주의', '반만능 반동'이라는 목표를 결코 바꿀수 없다. 따라서 대외전략의 변화는 비적들은 이데올로기 노선과 정책노선에서 설 자리를 잃게 했고, 더욱 심각한 이견과 혼돈을 야기했고, 더욱 치열한 권력투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자신감을 강화하고 힘을 강화하며 전투 태세를 강화하여 신속하게 행동하고 본토에서 반마오, 반공 혁명 투쟁을 가속화해야 한다. 동포 여러분, 반공투쟁의 행로는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 배를 항해하는 것과 같으니 반공의 근본사정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한 순간의 변화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함께 일하고, 불행과 행복에 의지하지않고 화를 나누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니 느슨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 교만않고 폭풍우가 닥쳐도 소심함과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기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상황이 더 위험할수록 우리는 더 강하고 굳세진다. 열심히 일하면 우리는 곧 받드시 대륙의 동포를 구하고 본토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10월 26일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蒋中正) 이글은 중화민국의 UN탈퇴 그 다음날 배포되었고, 사진의 책자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중화민국 국민들에게 배포되었다. 출처 (中文 원문) : https://zh.wikisource.org/wiki/%E4%B8%AD%E8%8F%AF%E6%B0%91%E5%9C%8B%E9%80%80%E5%87%BA%E8%81%AF%E5%90%88%E5%9C%8B%E5%91%8A%E5%85%A8%E5%9C%8B%E5%90%8C%E8%83%9E%E6%9B%B8
- 필리핀 제2공화국의 선전포고문 (1944.9.23)
필리핀 제2공화국의 국기 WHEREAS, the Filipino people, during the whole period of their subjection to alien rule, have unremittingly labored for their freedom and independence and to this end fought two wars and countless resolutions; 필리핀 국민들은 외세의 지배를 받는 내내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2년동안 전쟁을 하고 수많은 결의를 다져왔습니다: WHEREAS, upon the attainment by the Philippines of this cheri shed goal of freedom and independence and on the occasion of the inauguration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on October 14, 1943, 필리핀이 소중한 목표인 자유와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1943년 10월 13일 필리핀 제2공화국의 출범을 기념하여 the President appeal to all nations and peoples of the world for amity and goodwill and,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especially, pleaded that the Philippines be spared the suffering and destruction incident to the resumption of military operations on our soil. 대통령은 세계의 국가들과 국민들에게 우호와 선린을 호소 해왔습니다. 특히 필리핀 국토에서 미합중국이 군사 작전을 재개함에 따라 발생하는 파괴와 고통을 면해줄것을 호소해 왔습니다. WHEREAS, notwithstanding this appeal,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Great Britain have attacked from the air certain parts of the Philippines thereby violating the territorial integrity of the Republic and causing death or injury to its citizens and destruction or damage to their property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과 영국은 필리핀의 특정 지역을 공습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침해하고 있고,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과 대영제국은 필리핀의 공중에서 필리핀의 지역을 공격함으로서 공화국의 영토를 칩해하고 사망과 부상을 시민들에게 입히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켰습니다 WHEREAS, the Philippines must safeguard its independence and territorial integrity as every self-respecting sovereign state is in honor bound to do; and 필리핀은 모든 자존심을 존중하는 주권국으로서 독립과 영토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WHEREAS,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has entered into a Pact of Alliance with Japan, based on mutual respect of sovereignty and territories, to safeguard the territorial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the Philippines. 그리하여 필리핀 제2공화국은 필리핀의 독립과 필리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주권과 영토보전에 기초해 일본제국과의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호세 라우렐 대통령은 직접 군복을 입고 선전포고문을 낭독했다. NOW, THEREFORE, I, Jose P. Laurel,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do hereby proclaim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Great Britain, effective September 23, 1944, at 10:00 o'clock in the morning 그리하여 지금, 나 필리핀 제2공화국의 대통령 호세 라우렐은 1944년 9월 23일, 오전 10시를 기해 필리핀 제2공화국과 미합중국, 대영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존재함을 선언합니다. Face to face with the grim realities of war, I earnestly, call upon every Filipino at this momentous hour to show his unswerving loyalty and to give his support to the Government, so that, regardless of the trials and tribulations we are undergoing and those we shall have to suffer in the near future, we may closely and firmly unite to safeguard the free and independent existence of the Philippines. 전쟁이라는 암울한 현실에 직면해 있지만, 나는 중대한 시기에 모든 필리핀인이 확고한 충성과 지지를 정부에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겪는 시련과 환난과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겪게될 고통에 우리는 긴밀히 확고히 단결하여 필리핀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낼수 있을 것입니다 IN WITNESS THEREOF, I have hereunto set my hand and caused the seal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to be affixed. 그 증거로, 나는 손을 들어 필리핀 제2공화국의 인장을 날인합니다. Done in the City of Manila, this 22nd day of September, in the year of Our Lord, nineteen hundred and forty-four, and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the first. 이는 우리 신의 해 ,그리고 필리핀 제2공화국의 첫해인 1944년 9월 22일 마닐라에서 작성되었습니다.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 1944년 9월 22일 실제 선전포고문 낭독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7h6eynWc8hg (1) https://www.youtube.com/watch?v=qpyQk2dTCeg&t=11s (2) * 두영상 모두 일본에 의해 편집되면서 선전포고문의 일부를 읽는 모습만 나와있습니다. [출처] https://www.lawphil.net/executive/proc/procXXX/proc_30_1944.html
- 왕징웨이정권의 10대정강 (1940.3.30)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에 보도된 왕징웨이 정권의 10대 정강에 관한 기사 1. 선린우호의 방침에 의해 화평외교로써 중국국권 행정의 독립완성을 추구하고 동아영원의 평화신질서건설의 책임을 분담한다. 2. 우호각국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고 아울러 그 관계를 조정하여 우의를 증진한다. 3. 우호 각국과 연락해 국제공산주의음모등 기타 평화교란의 행동을 막는다. 4. 화평건국을 옹호하는 군대 및 각지 유격대에 대해서는 이를 각각 수용해 안정시키고 또한 국방군을 건설, 군정 군령이란 양대권을 명료히 구분하여 군사독재체제를 타파한다. 5. 각급 민의기관을 설립하여 각계의 인재를 고려하여 전국의 공의를 집중시켜 민주주의를 조성한다. 6.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정하고 헌정을 실시한다. 7. 중국국가의 자본 및 기술합작으로 전후 경제의 회복과 산업 발전을 도모한다 . 8. 대외무역을 진흥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중앙은행을 재건하여 폐제를 통일해 사회금융의 기초를 확립한다. 9. 구 세제를 정리하여 인민의 부담을 경감하여 농촌을 복흥시켜 난민을 구제해 각각 생업에 안심케한다. 10. 반공화평건국으로서 교육의 방침을 정하고 과학교육의 향상을 도모하여 부화맹동(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한) 학교를 일소한다. [기사출처] 네이버 옛날신문 - 동아일보, 1940년 3월 31일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31%22%2C%22page%22%3A1%2C%22officeId%22%3A%2200020%22%2C%22fevt%22%3A206%2C%22publishType%22%3A%2200010%22%7D)
- 왕주석환영가 (汪主席 歡迎歌) / 1942.5.4
1942년 5월 4일, 환영 왕주석 이라고 적힌 풍선을 보고 환호하며 만주국과 일본 깃발을 흔드는 만주국 소녀들. 1942년 5월 4일, 왕징웨이와 측근들은 만주국을 방문합니다 . 왕징웨이의 첫 만주국이기도 했던 이 방문 만주국측에서는 왕징웨이의 첫 방문에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우선은 중화민국이 만주국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 1942년의 시점에서 건국 10주년을 앞두고 있는 만주국의 산업 발전성과를 왕징웨이측에 보여주면서 만주국의 발전상을 자랑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만주국측은 왕징웨이측을 환영하면서 왕징웨이를 국민정부의 정통지도자로 치켜세우고, 방송국에서는 '중화민국 국민정부 왕징웨이 주석 환영의 밤' 과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등, 왕징웨이측을 환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주국측에서는 왕징웨이의 방문을 환영하며 노래 또한 준비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왕주석환영가 (汪主席歡迎歌)" 입니다. 신문 흥경시보 (盛京時報) 에 서술된 왕주석 환영가의 악보와 가사. 汪主席來雲軺下 滿洲國民喜無 왕주석님이 비행기에서 내리시니 만주국민들은 행복하다네 來吧 來吧 快來吧 大家一齊歡迎他 어서, 어서, 어서, 우리 모두 그를 환영하세 滿華提携如一家, 實現我們大東亞 만주와 중화의 제휴는 한가족과 같다네, 우리들의 대동아를 실현한다네 來吧 來吧 快來吧 大家一齊歡迎他 어서, 어서, 어서와서 우리 모두 그를 환영하세! [출처] 정호윤, 「汪精衛정부와 동아신질서」 , 영남대학교 (석사논문), 2016, 21쪽
- 중화민국 난징정부 (왕징웨이정권) 연표
왕징웨이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1936년부터, 왕징웨이 정권이 끝이 나게되는 1945년까지 서술되어있습니다. 더욱 추가할 내용이 있거나,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연락바랍니다.
- 대동아회의 왕징웨이 연설문 (1943.11.5)
본문은 일본에서 1943년 발행된 대동아회의의 각국대표들의 연설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아시아는 하나가 되리 (アジアは一つなり) 를 번역한 것입니다. 세계역사상 위대한 의미를 가지는 대동아회의가 오늘 맹방 일본의 수도에서 거행된것에 대해, 도죠 총리대신 각하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분하게 되었습니다. 미영(미국과 영국) 의 동아침략은 이미 백년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의 중대한 시기에 있어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 경제문화등 각방면의 힘의 의지해야 처음부터 미영의 침략야심을 억제하고, 동아를 보전하며, 영미를 분쇄하는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최근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미영의 동아침략세력은 분쇄되어, 동태평양과 남양일대에서 미영의 육해군 근무지는 일본 육해군에 의해 격파, 점령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동방도의(東方道義)의 정신의 근거하여 동아국가의 민족들의 공존공영을 추구하고 그들의 독립과 자주를 원조하고, 그들의 애국적 희망을 달성시키고, 지지하며, 각지의 부서들로 하여금 최대의 노력을 통해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숭고한 일본의 위대한 포부와 그의 빛나는 기적에 삼가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동시에 함께 우호관계이 있는 만주국, 태국, 신흥 버마국, 필리핀과 자유인도정부가 각각의 굳을 결심과 휘어지지 않는 노력에 따라 대동아전쟁과 대동아건설의 책임을 나누고 있는것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중화민국이 동아의 한측의 날개로서, 지금 이자리 이 기회를 빌어,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침에 대한 국민정부의 결심과 노력에 대해 말씀을 말씀드리는 것은 순순히 추쾌의 지경에 달려있습니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님 일생의 포부는, 중국과 동아로하여금 미영침략세력을 분쇄시켜 그들의 독립과 자주를 완성시키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포부에 근거해, 그는서거에 이르는 날까지 약 40년간, 필생분투를 계속해왔습니다. 그가 서거하기 3개월전, 일본의 고베에서 두번에 걸쳐 연설을 한적이 있었고, 민국 13년 (1924년) 11월 28일에 열렸던 제1회 연설에서 그가 이야기 한것은 대아시아주의였습니다. 연설중에서 "우리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백년이래 영국의 침략을 받고 갈취당하기에 이르러 거의 하나로 완전한 독립국가의 존재를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 쇠퇴가극에 달했을때, 돌연 전환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유신이었고, 일본의 유신만이 일본이 아시아에서 선진국이 될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동시에 아시아 부흥의 출발점이된 것이었다 ,아시아 각국은 당연 선진국 일본과 함꼐 동심협력해, 동방의 왕도적 문화로 하여금 서양의 패권주의적 문화를 물리쳐 미영의 침략세력을 완전히 구축하고 아시아 각국의 단결에 따라 아시아 각국의 독립자주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되는것 이다. 이렇게 쇠퇴하는 아시아 전체를 부흥으로 이끄는것이 가능하다" 라고 연설했습니다. 두번째의 연설은 같은해 같은날의 연설이었는데, 연설에서 " 일본은 당연히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또 그안에 "일지(支) 양국은 형제와 같다. 일본은 일찍이 불평등한 속박을 타파하고, 동방의 선진국, 세계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은 현재,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얻으려는 것이며, 일본의 충분한 원조를 갈망하고 있는것이다, 중국의 해방은 곧 동아의 해방이다" 이상 두차례에 걸친 연설은 손중산 선생 일생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고, 이후 국부 손중산 선생은 병세의 영향으로 다음해 3월 12일 베이징에서 서거하게 되었지만, 서거의 당시 유지를 동지들에게 남겼고, 동지들은 그의 유지에 따라 계속 분투하고 , 그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것은 손중산 손생님의 서거 이후 그 유지가 현실화 될 가능성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일지 (일본과 중국) 의 관계는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민국26년 (1937)년 7월의 사변이 발생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님이 서거한지 12년이 지난 후의 일이였습니다. 당시 일지의 관계가 결렬되는 바, 미영은 호기를 맞이했고, 양측의 관계를 이용해 일지사변의 연장을 부추겼습니다. 나와 동지들은 국부의 유지가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단 것을 보고, 일지관계가 날로 악화다는것을 보고, 통심이 극에 이르게 되고,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일본정부는 사변을 최단기간에 중단해야할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그안에서 일본의 목적으로 중국의 멸망이 아닌 중국의 부흥에 두고, 일본은 중국이 동아건설의 책임을 나눌것을 기대하고, 일본이 중국을 원조할 것을 결심하고, 그들의 독립자주의 소망을 달성하게 하려 하는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나와 동지들은 일본이 그러한 진의를 선포한것을 듣고, 일지관계의 호전에 국부의 유지를 완성시키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충칭정권에 대항하여 항전의중지(抗戦地棄) 와 화평의회복(和平恢復)을 이야기했지만, 듣지않으려는 모습에 나와 동지들은 화평운동을 위해 분주하게 뛰기로 결정한것 입니다. 얼마안있어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여 정정당당하게 일지의 제휴와 동아의 부흥의 최대의 노력을 하게 된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대로, 미영은 일지사변에 대해 항상 도발과 이간질에 노력하여, 사변의 연장을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국민정부 환도 이후 더더욱 강화되었고, 미영은 충칭에게 항전의 강화와 평화의 저지등을 부추기는 수단을 강구해왔습니다. 그후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이르러, 미영은 그동안의 자신들이 구축한 동아의 세력이 사라질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충칭의 분자들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는 방도를 강화시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영미의 이러한 계획이 물을 필요 없이 실패에 이르렀다고 단정지을 순서에 이르렀습니다. 충칭의 장사꾼들과 민중이 국부 손중산 선생님의 가르침에 귀의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올해 1월 9일이후 중국에 대해 빠르게 조계를 반환하고, 치외법권을 철회하고, 특히 최근의 일화동맹조약을 통해 일화기본조약과 동시에 각종 부속 문서를 폐기했습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가 이미 광명을 찾게된것입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일본에 갈망하셨던, 중국을 돕고, 풀평등 조약을 폐기하는 일이 이미 현실화 된것입니다. 가령 영미가 어떤식으로든 유혹해 이를 저지 한다고 하더라도, 충칭 민중의 각성을 막을 수는 없게 되었기에, 충칭은 다른날 반드시, 미영에 의존하는것은 동아에 반역하는것이 되고, 동시에 국부 손중산 선생에게도 반역하는 행위가 된다는것을 깨닫게 될것임을, 민중도 장사꾼들도 깨닫게 될 것임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있어, 오로지 기본의 방침에 기초해 노력을 거듭하고, 한편으로는 충칭의 상인들과 민중들의 각성을 촉진시키며, 통일을 완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정치력을 얻는 지방으로 하여금 하나의 모범지방을 수립하는것으로, 그 공작은 다음의 3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상의 숙정, 둘째는 치안의 보장, 셋째는 생산의 증가로, 소위 사상의 숙정은 미영의 개인주의, 공리주의적 사상을 철저히 쓸어버리고, 동방도의적 정신으로 바꾸고, 동아인의 자각심으로 동아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일심일덕, 동아인의 공존공영에 분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치안의 보장은, 즉 대동아전쟁의 후방인 중국의 지배지역에서의 치안을 확보해 맹방전선의 병사들로 하여금 후방의 근심을 없애고,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대를 전선으로 수송하여 맹방장사의 노고를 나누는데에 있습니다. 셋째, 소위 생산의 증가는 일체의 경제계획과 재정계서에 무게를 두고 총력결전의 역량을 증가시키는것입니다. 다만 생산증가라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소비절약, 장물이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것입니다. 이상의 3가지는 국민정부가 대동아전쟁에 협력하게 하는 공작의 중점으로서, 동시에 국민정부가 체득한 대동아전쟁, 즉 대동아건설의 의미는 전쟁중의 동감동고(同甘共苦), 동생공사(同生共死)를 결심하고, 밖으로는 공동의 적인 영미를 제패하고, 그의 침략세력을 분쇄하고, 그들의 침략기도를 소멸시키는것이고, 속으로는 각고공부, 용왕매진의 정신으로 동아동포들과 함께 동심협력해 동아의 건설을 착실히 하는데에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에 대해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의 날개가 향하는곳 은 승리고, 대동아건설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우리의 날개가 향하는곳은 공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동아각국은 자국을 사랑하고, 서로의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동아를 사랑해야합니다. 중국, 우리가 모토로 삼아야할 것은 중화의 부흥, 동아의 보위이며, 중국이 독립자주를 획득했을때에야 동아보위의 책임을 나누는 능력이 생기며, 동시에 동아의 보위를 얻게되며, 중국의 자주독립이 보장받을 수 있는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 자신의 국가를 자주독립의 국가로 만들고, 또한 자국을 동아의 강력한 분자(分子)로 만드는것을 필요로 하기에, 동아각국은 각국의 본연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자주를 확보해야하고, 독립자주를 위해 분중히 하는것이 필요합니다. 동아 각국가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동심협력, 공동의 목적을 향해 공존공영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이미 그 빛나는 독립자주를 세계에서 확립했지만, 최근에는 동아각국을 방문해 그들의 독립자주를 획득하게 하고, 원조를 아끼지 않고, 일치고결시켜 공동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을 하겠다는 그 모습은 말로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저는 정치상의 독립자주를 얻은 후에 만약 외교상의 방침이 일치하고, 군사상의 대적관계가 일치한다면 공동의 목적에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문화면에서 선진국인 일본이 확실히 자기의 문화를 기초로하고, 동방의 문화를 고양시켜고, 세계문화를 흡수하는 3대 요점을 성취한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탄복하기 나름입니다. 저는 신흥국가들이 함께 격려, 노력, 전진할것이라는 점을 깊이 믿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은 특히 전력으로문화의 부흥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하며 문화의 융합과 창조는 각민족을 친밀하게 하고 단결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도와 중국의 양만족간에는 일찍이 불교의 도입에 의해 사상교류를 도모하며 동방문화사에 이미 획을 그었습니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동아 각국가는 호예의 기조에 근거해, 장단상보, 유무상통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맹방을 편리하게 할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합니다. 예를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목화는 수많은 이웃의 수요가 있고, 남방각지의 가솔린,고무, 주석등도 마찬가지로 이웃국가에 공급할 수 있는것으로서, 우리가 서로 돕는다면, 반드시 일절에 자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것입니다. 영미가 과거에 해왔던 착취정책을 철저히 소멸하고 새롭게 하나의 인도(人道)로 합치되는 신천지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상 말한것을 실현할수 있게 된다면 동아 각국의 민족의 행복은 무한히 증진되어 동아공영의 확실한 보장을 획득하게 되는것에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에 있어서의 기초를 만들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광명은 실로 우리의 앞길에 놓여있고, 오로지 우리 동아각국의 민족이 함꼐 손을잡고 그곳에 도달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것은, 타이, 버마, 필리핀 각국, 그리고 일본점령하에 있는 영국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역내에 있는 중국인은 총 7-800만명을 넘지않으며, 이러한 중국재류민은 그 소재국정부의 우대를 받아 소재국 인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하고, 교통의 개척과 자원의 개발에 대해 심혈과 열땀을 쏟고있고, 그 심혈과 열땀은 소재국 인민과의 결합으로 이어져 동아인의 자각이 커지는 추진력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인민은 결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있어 화평, 신실, 노동으로 소박하게 소재국 인민과 동거동락하며 서로의 장점을 찾아 결점을 보완하며 이미 분리할 수 없는 우호협력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관계가 이번 대동아전쟁에서 더욱 단련되고 단결되기에 이르게 됨을 믿음과 동시에, 이 관계가 대동아공영에 공헌하는 바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박수갈채) [일어 원문] '아시아는 하나가되리 (アジアは一つなり)' 의 디지털 아카이브본 : https://dl.ndl.go.jp/info:ndljp/pid/126303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콜렉션)
-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왕징웨이정권) 대영미선전포고문 (1943.1.9)
왕징웨이가 직접 작성한 대 영미(英美) 선전포고문 , 1943년 1월 9일 어제 오후 10시, 국민정부는 다음과 같은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昨天上午十時, 國民政府發出宣戰布告如下。 재작년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시작되고 국민정부는 중일기본관계조약의 정신에 근거하여 前年二十月八日大東亞戰爭發動之始, 國民政府根據 中日基本關係條約之精神, 우호국인 일본과 동거동락을 함께하는 성명을 해왔다. 聲明決與友邦日本同甘共苦, 自是以來 。 신국민운동에 착수하고, 치안보장에 종사하며,민생을 개선하며, 기어코 국력을 증진시켜 , 대동아전쟁의 완수에 협력하기로 하였다. 著手新國民運動,從事保障治安, 改善民生 期於增進國力, 協助大東亞戰爭之完遂。 영국과 미국은 백년동안 동아를 분열시키기 위한 정책을 계속해왔고 , 이는 점점 격화되고있다. 충칭(渝) 의 분자들을 계속 유혹해 이름바 영미전선(연합국)에 참가하게했고, 인도로 출병하게 해 동아민족이 동아민족을 끔찍하게 죽이게 하였다. 乃英美等國仍沿用其百年以來分裂東亞之政策,且變本加厲,竟勾引渝方分子 參加所謂英美戰線,出兵緬印 , 以東亞人殘殺東亞人。 그들의 폭력은 최근 처음으로 우호국인 일본 육해공군에 의해 격파되며 멎었고, 동아 침략의 거점도 상실하게 되었다。 最近因其暴力已次第為友邦日本陸海空軍所擊破,侵略東亞之根據地亦已喪失。 또한 국민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의 평화를 매우 질시하며 충청의 분자들을 선동해 음모를 꾸미며 계속 침요하고. 乃益逞狡謀,且嫉視國民政府統治區域之和平發展,唆使渝方分子, 不斷侵擾 각종 건설의 진행을 방해하고, 자국의 비행기들을 충칭에 기반을 두고 우리의 우한,광주 등 여러지역을 반복적으로 폭격해 평민들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 以阻撓各種建設之進行,並逕以自國飛機,借渝方為根據, 向我武漢廣州等處, 屢施轟炸,殘害平民。 충칭의 분자들은 기꺼이 영미의 부림을 감수하며,몸소 부끄러운 영미역적이 되었다. 在渝方分子,甘受英美驅使, ,躬為英美叛逆,固屬可恥。 또 영미는 동아에 대해 사려를 쌓고 이간질을 하여 동아병탄이라는 최후의 욕망을 이루려 한다. 그렇기에 특히 동아민족은 공동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워야한다. 而英美對於東亞處心積慮,盡其挑撥離間之能事, 以圖遂其最後併吞之欲, 尤為東亞民族所當同仇敵愾。 이를 위해 국민정부는 오늘부터 영국 미국과 전쟁상태에 들어감을 선언한다. 國民政府為此宣告,自今日起,對英美處於戰爭狀態。 우리의 전력을 마땅히 다해,우호국 일본과의 협력으로 영미의 잔혹함을 쓸어내고, 중국의 부흥을 도모하며 當悉其全力, ,與友邦日本協力 , 一掃英美之殘暴,以謀中國之復興 동아의 해방을 도모하고, 만주와 중국 양국의 우호를 돈독히 하며 東亞之解放,滿泰兩國,夙敦友好, 동아의 공영에서 특히 단결하며 이후 더더욱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對於東亞共榮,尤具同心,今後當益謀提攜。 도덕과 정의를 바탕으로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以期共同建設以道義為基礎之東亞新秩序, 독일-이탈리아는 수년째 서방에서 영미와 싸워오며 여러번 승리의 영광을 얻고 있다. 德意諸友邦,數年以來,在西方與英美勢力周旋 , 迭獲勝利之光榮。 우리나라는 오늘 대동아전쟁에 참가했다, 이에 호응하며 세계전체에 대하여 공정한 신체제에 공헌하기를 기대한다 我國今茲參加大東亞戰爭, 當相與呼應, 以期對於世界全體之公正的新秩序有所貢獻。 나의 모든 국민들은 이것만이 마땅히 국부 손중산선생의 범아시아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임을 알것이다. 凡我國民,當知此為實現國父大亞洲主義之唯一時會。 중화민국의 부흥. 대동아공영건설의 실현, 세계전체의 정의와 평화의 획득 모두 여기에 있다. 그러니 中華民國之復興,大東亞共榮建設之實現,世界全體正義和平之獲得, 胥繫於此 일덕일심하고 끝까지 힘을 합쳐 이 위대한 시대의 위대한 사명을 관철시키자. 其一德一心,戮力始終,以貫徹此偉大時代之偉大使命! 중화민국 32년 (1943) 1월 9일 , 중화민국남경정부주석 왕징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