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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항공고분유한공사 (中華航空股份有限公司, 1938~1945)
중화항공의 탄생과정. 점령지의 많은 기업이 그러했듯이 중화항공 역시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한 중국자본과의 합작기업이었으며, 기업간의 통합과정을 통해 탄생한 기업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뿐만 아니라 베이징, 톈진, 우한, 광저우, 상하이 등 중국대륙의 주요 대도시들을 점령했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수 많은 시설들을 접수 하는 데 성공하였고, 철도, 해운, 차량을 비롯한 해당 지역의 교통 까지 대부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점령지에서 이러한 교통체계를 어떻게 운영했을까? 오늘은 일본의 점령지 교통체계 중 하나였던 항공 분야를 담당했던 중화항공 (中華航空) (현재 중화민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중화항공과는 명칭만 같을 뿐, 전혀 연관성이 없음) 과 그 전신이 되었던 후이퉁항공 (惠通航空) 이라는 회사를 살펴보려 한다. 1. 중화항공의 전신, 후이퉁항공(惠通航空) 의 설립 1936년 일본에서 작성된 《일본급만주국항공노선도 (日本及滿洲國航空路線圖 》. 만주국과 조선, 대만을 비롯한 영역 뿐만 아니라 산하이관, 톈진, 베이징, 장자커우를 비롯한 중국대륙의 도시들도 영역에 포함되어있다. 일본은 화북 진출을 비롯한 자신들의 이익 증대를 위해 중국에서의 항공사업의 필요성을 예전부터 인식해왔다. 일본은 1933년 탕구협정이 체결된 이래 베이핑을 비롯한 화북 지역에서의 항공 사업을 진행하길 원했으나,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는 일본측은 화북에서의 항공사업을 통해 ' 만주국'과 화북 지역을 연결하는 항공 교통망을 구축 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으로, 장제스에게 있어 이를 용인하는 것은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또한 항공협정을 통해 항공사업을 하게 된들 이득을 보는 것은 일본뿐이 될 것이라 생각해 중국의 산업 발전에 큰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당시 일본측과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던 장제스는 이러한 항공협정이 유사시 일본항공기가 중국에 위협을 가할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장제스는 일본과의 항공협정을 계속 거부해왔고 때문에 일본의 항공사업은 만주국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에 1935년 4월, 이름바 '자유비행' 이라는 명목으로 여러대의 항공기를 통해 중화민국 영공 내에서 허가되지 않은 비행을 하는 등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을 압박해왔고, 이에 1935년 7월부터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은 교통부(交通部) 로 하여금 일본과 직접 교섭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측의 교섭에서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1935년 8월 당시 일본측의 요구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자본 및 감독 부분에서 '일본' 이 지배할것. (2) 활동범위는 남만주 및 화북지역* 평진 (베이핑-톈진) 이남에서도 비행을 할것. 계획 노선 1. 진저우 - 산하이관 - 톈진 - 베이핑 2. 베이핑 - 창더 3. 베이핑 - 장자커우 4. 다롄 - 톈진 5. 다롄 - 칭다오 차후 확장 노선 1. 베이핑- 장자커우- 다퉁- 바오터우 2. 베이핑- 타이위안 3. 베이핑 - 지난 * 일본은 화북지역을 룽하이선 이북, 정저우 이북의 지역을 모두 화북으로 칭하였다. 1935년 8월 당시 일본측의 요구에 따른 신항공사 노선도. 화북 지역의 대부분 도시들에 취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이러한 일본측의 요구를 중국을 포산포해 (包山包海, 산과 바다에서 포위하려는) 하려는 속셈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국민정부측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시하였다. 1935년 8월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측의 요구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자본 및 감독 부분에서 '중국' 이 지배할것. (2) 활동 노선은 화북 내에서 '2개'의 노선으로 한정. (3)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해당 항공사를 통해 항공우편을 개시할 권리를 가진다. 기술자, 관제체제등은 중국이 주도한다. 이렇게 양측의 입장차이가 명확하게 들어나게 되면서 교섭은 교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중국측이 노선의 수를 2개가 아닌 4개로 양보한 안을 제시하고, 일본측도 한쪽이 모든 지분을 가지는 형태로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아닌 중일 합작으로 회사를 설립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1935년 8월 당시 제시되었던 타협안 동방항공공사 설립에 관한 양해사항 (1935.8.17) (關於設立東方航空公司申合事項)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일본측 45%, 중국측 55% 지분으로 설립한다. (2) 활동 노선은 화북 내에서 '4개'의 노선으로 한정. 결정적으로 노선 문제에 있어서 일본은 "초기에는 중국측이 제시한대로 4개의 노선만을 가질 것이지만, 차후에는 칭다오, 바오터우, 지난 등 일대로 노선을 확장할것" 이라며 노선 확대를 계속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러한 교착 속에서 결국 교섭은 결렬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이러한 교섭 결렬에도 이후 1936년 3월, 4대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지나주둔군 (의화단의 난 이후 체결된 신축조약의 결과로 톈진에 주둔하게된 일본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일전쟁 이후 중국에 주둔했던 지나파견군과는 다른 존재이다.) 이 사용하던 비행장인 리밍좡(李明莊) 비행장을 통해 톈진 - 다롄 구간을 단독적으로 개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러한 노선 개설은 중화민국 정부와 전혀 논의되지 않은 불법적인 행위였다. 일본은 이러한 '자유비행' 행위를 통해 다시 한번 중화민국 측을 압박하고, 다시 국민정부로 하여금 협상테이블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국민정부 측은 '자유비행' 이라는 명목하의 불법 행위를 멈추어야만 협상을 재개할 수 있으며, 현재로서는 협상을 보류할 것이라고 명시하면서 일본측과 항공관련 협상을 재개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의 화북항공사업 진출은 또 한번 위기를 겪게 되었다. 쑹저위안 (宋哲元), 그는 기찰정무위원회의 수장으로서 일본과 경제제휴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화북 항공사업에 있어 위기를 겪었던 일본은 1935년 말 화북 일대에 기찰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 가 세워지면서 항공 사업에 관한 논의를 다시 진행할 수 있었다. 1935년 12월 18일,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기동사변(1935.11) 의 결과로 일본과의 마찰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허베이성 일대와 차하얼성 일대에 일종의 자치정부인 기찰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 를 수립한다. 기찰정무위원회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자치정부이자 일본-만주국-기동자치반공정부와 중화민국 사이의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중앙정부인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충성하였으나, 동시에 외교, 군사, 경제, 재정, 인사, 교통의 권한은 중앙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행사하였다. 때문에 기찰정무위원회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면서도, 행동은 국민정부와 별도로 행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측과 제휴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이러한 기찰정무위원회의 행동에 비판을 가했지만, 기찰정무위원회와 일본측은 지속하여 해당 지역에서 제휴를 이어나갔다. 1936년 10월, 지나주둔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취임한 다시로 간이치로(田代皖一郎)는 기찰정무위원회의 수장 쑹저위안 (宋哲元) 에게 경제제휴를 위한 4가지 원칙과 8가지 항목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기찰정무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쑹저위안은 이를 승인하였다. 화북경제제휴의 4원칙 - 8요항 (華北經濟提攜四原則-八要項) 4원칙 1. 공존공영의 원칙에 의거하여 중일 양국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 2. 중일제휴는 중일 양국 모두 평등한 위치에서 실시한다. 3. 각종 경제제휴 사업은 일본측에서 중국측에 차관을 제공하는 형태로, 중일합작 기업의 형태로 실시한다. 일본은 이를 위하여 자본과 기술을 지원한다. 4. 인민의 복리증진, 생활 개선을 경제제휴의 목적으로 한다. 8요항 1. 정기적 항공사업의 개시 2. 산업의 근간이 되는 철도 부설 3. 탄광 개발 4. 철광석 광산 탐사, 개발 5. 신 항구 건설 (탕구 일대) 6. 전력산업 확대, 수력발전 증대 7. 농어촌 진흥 (염업, 면화 수출 증대) 8. 기존 통신시설 보수 (일본이 자본 지원) 8요항의 1항에서는 장기적 항공사업의 개시를 명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일본은 기찰정무위원회의 천칵셩(陳覺生) 과 일본의 마츠무로 타카요시(松室孝良) 지나주둔군 베이핑특무기관장으로 하여금 기찰정무위원회 - 일본간의 항공 사업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게 했다. 1936년 10월 17일, 기찰정무위원회와 일본측은 중일통항협정(中日通航協定) 을 체결한다. 중일통합협정에서는 일본과 기찰정무위원회가 50%씩 출자하여 후이퉁항공 (惠通航空) 이라는 항공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일통항협정(中日通航協定)* 1 항공회사 설립에 관한 교환 문서 (關於設立航空會社交換文書)* 2 1. 일본과 기찰정무위원회는 합작하여 합작회사인 항공사 '후이퉁항공공사(惠通航空公司)' 를 설립한다. 2. 자본금은 450만엔으로, 중일이 각자 절반씩 부담한다. 3. 계획노선 (1) : 톈진 - 다롄 (2) : 톈진 - 베이핑 - 청더 (3) : 톈진 - 베이핑 - 장자커우 - 장베이 (4) : 베이핑 - 톈진 - 진저우 4. 계획 보유 기체 (1) : 포커(Fokker) F.VII 1기 (2): 포커(Fokker) 슈퍼 유니버셜 6기 (3) : 드 하빌랜드 (de Havilland) DH.80A 2기 *1 : 중국측 명칭 *2 : 일본측 명칭 후이퉁 항공의 엠블럼. 협정에서는 중일이 (여기서 중은 기찰정무위원회측을 의미) 함께 합작하여 후이퉁항공공사라는 항공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해당 항공사 설립을 위한 비용은 일본과 중국이 각각 절반씩을 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경우 남만주철도가, 중국의 경우 하북성은행, 이중담배공사(頤中煙草公司, 現 BAT (British American Tobacco) 가 중국에 설립했던 담배회사) 를 통해 주식을 발행 (1주 1,000엔) 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노선의 경우, 이전 1935년 8월 일본측이 제안했던 노선이 거의 모두 반영된 모습을 보였으며, 일본측은 톈진의 주둔군이 사용하던 비행장인 리밍좡(李明莊) 비행장에 보유하고 있던 비행기 9기를 후이퉁항공쪽에 제공하여 항공사업을 진행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찰정무위원회의 화북경제제휴의 4원칙 - 8요항은 당시 국민정부 중앙에서는 보류중인 사항이었으며, 이에 근거한 중일통항협정의 체결은 장제스를 비롯한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쑹저위안의 독단적인 행위였다. 장제스가 있던 난징중앙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안 것은 협정의 체결 이후였다. 협정이 체결된 이후 하루가 지나서야 난징 중앙정부는 협정에 관한 소문이 돌았고, 장제스는 협정 체결 이틀이 지난 19일, 장제스는 "중앙의 비준을 받지 않은 어떠한 대외협정도 체결하지 말라" 라고 쑹저위안에게 이러한 논란을 해명할 것, 협정을 체결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 이미 협정을 체결한 쑹저위안은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어 자신이 이미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러한 협정을 체결한 사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중일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할 것이다. 2.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는 순수한 상업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3.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 조직은 기존 국민정부의 항공사 조직의 모습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4. 노선의 범위는 기찰정무위원회 내로 한정된다. 5. 현재 이야기 되고 있는 경제제휴 문제는 원칙적인 논의일 뿐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우려할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보에도 장제스는 재차 쑹저위안으로 하여금 이러한 협정을 무효화할 것을 명령했으나 쑹저위안 측은 이를 사실상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정부의 고위 인사들도 이미 협정이 승인되어 일본 항공기들이 자유로이 운항을 시작한 상황에서 이러한 장제스의 조치가 일본과의 재충돌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미온한 조치들로 인해 결국 장제스는 중일통항협정의 내용을 사실상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이후 입장을 바꾸어 외교부와 기찰정무위원회 측에 "중일통항협정에서 규정한 내용을 잘 지키라" 라 이야기하며 이미 협정이 체결되어 이를 되돌리기 어려워진 이상, 협정의 내용이라도 잘 지키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선회하였다. 2. 후이퉁항공(惠通航空) 의 활동 후이퉁항공에서 발행한 항공권 (1937). 옆에는 비행시 유의해야할 사항을 서술하고 있는데, 비행시간이 긴 만큼 용변을 사전에 볼 것과 장거리 승객은 간식 혹은 도시락을 지참하면 편리하다는 내용, 기내에서의 흡연, 화기 사용을 금지하며 기내 촬영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수화물의 경우 10kg까지는 무료 이나, 그 이상은 요금을 부과함 등을 서술하고 있다. 1936년 10월 17일, 중일통항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후이퉁항공 (정식 명칭은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 恵通航空股份有限公司 ) 은 출범하게 된다. 후이퉁항공은 당시 만주국의 국영항공사였던 만주항공(滿洲航空)의 톈진 사무소를 개조한 것에서 시작하였고 (이후 본사는 베이핑에 두게 된다.) 출범 3일만인 10월 20일, 정식적으로 운항을 시작하였다. 사장은 기찰정무위원회의 장운롱(張允榮) 이 맡았고, 만주항공의 부사장이었던 코다마 츠네오 (兒玉常雄) 가 부사장을 맡았다. 후이퉁항공은 앞에서 보았듯 중일합작기업의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일본은 후이퉁항공의 출범 직후 후이퉁항공의 내부 장악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일통항협정에서는 회사를 중일합작으로 구성한다고만 규정하였지, 항공기, 항공관련 기술자, 관제등과 같은 부분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일간의 경제, 기술은 큰 격차를 가지고 있었고, 항공기도, 항공기 관련 기술도 일본에 비해 부족했던 기찰정무위원회는 후이퉁항공 경영에 있어 후이퉁항공을 위한 토지와 자본을 제공하는 역할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항공기, 항공기 정비, 관제를 비롯한 대부분은 모두 일본측에 의해 주도되었다. (심지어 조종사도 일본에서 파견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후이퉁항공은 중일합작기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사실상 주도권을 장악한 형태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1937년에는 사장이었던 장운롱도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대부분의 기업 경영권을 일본이 장악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후이퉁항공의 일본 기업화(化) 는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이전부터 우려했던 바였다. 쑹저위안도 이러한 일본측의 움직임에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쑹저위안도 결국 태도를 바꾸어 일본과 후이퉁항공의 행동을 규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후이퉁항공은 이를 무시하거나 다른 수단들을 통해 이러한 규제를 파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가장 단적인 예가 후이퉁항공의 비행장 & 공항 확대인데, 후이퉁항공은 출범 이후 노선 확대, 사업 확대라는 명목으로 베이핑과 톈진 일대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려 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사실상) 일본 주도의 비행장 건설이 유사시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비난하면서 새로운 비행장 건설을 반대했고, 쑹저위안도 이러한 취지에 동참하여 일본과 후이퉁항공이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지역에 외국인이 토지를 구매할 수 없게 조치를 취하여 이를 막았다. 하지만 일본과 후이퉁항공은 해당 지역의 농민들에게 비싼 가격을 처준다며 몰래 토지를 거래하였고, 톈진 등 지역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비행장 건설을 위한 허가를 받아내는 등 국민정부의 조치를 피해 비행장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제스가 우려했던 대로 일본이 건설한 비행장은 중일전쟁 시기 중국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되었다.) 후이퉁항공은 중일통합협정에서 규정되었던 9기의 비행기를 시작으로 항공여객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사업의 확장을 꾀하여 1937년 2월, 후이퉁항공은 일본 나카지마 사(社) 에서 만든 AT-2 여객기 3대를 추가로 구입하였다. 해당 AT-2 에는 북평(베이핑)호(北平號), 천진(톈진)호 (天津號), 상해(상하이)호 (上海號) 라는 이름이 붙였다. 후이퉁항공에서 발행한 나카지마 AT-2 도입 기념 엽서. 엽서에 묘사된 베이핑(북평) 호. 날개쪽과 후미 날개쪽에 후이퉁항공의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 후이퉁항공의 항공노선도. 일본은 후이퉁항공을 통해 1935년 희망하였던 만주국- 화북 항공연락망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고, 지난, 칭다오, 타이위안등 화북의 주요도시로 노선을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후이퉁항공은 신형 항공기의 구매와 더불어 노선의 확장을 꾀했다. 헤이퉁 항공은 기찰정무위원회 내에 6개의 비행장 & 공항을 통해 다퉁, 바오터우, 타이위안, 석거좡, 더저우, 지난, 칭다오 등으로 노선을 확장시키며 화북의 대부분 주요도시에 취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7년에는 하얼빈 행 (3월) , 도쿄행 (6월) 노선이 생기면서 국경지대만 연결하는 수준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국제선 노선도 형성하게 된다. 이는 만주국의 만주항공, 일본의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 (日本航空輸送株式會社) 와 제휴를 통해 형성한 것으로, 여행객들은 후이퉁항공을 통해 연락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후, 해당 장소에서 만주항공 혹은 일본항공으로의 환승을 통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연락편 형태의 장거리 비행노선은 큰 성공을 거두어 《北支那経済年鑑 昭和14年版 》 에서는 후이퉁항공이 일주일에 3번 운항하는 도쿄-톈진 노선이 톈진 행이든 도쿄 행이든 항상 매진되어 예약을 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일본은 이전부터 추구해왔던 항공우편사업도 후이퉁항공을 통해 개시했다. 이 항공우편은 무게에 따라 그 요금이 다르게 책정되었으며 후이퉁항공은 만주항공, 일본항공과 연계하여 일본 본토와 만주까지 항공편을 통해 우편과 소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후이퉁항공 항공우편 요금 (우편요금은 별도) 서장 (書狀) : 20g 당 10센(錢) 엽서 : 7센 (봉투가 있으면 10센) 소포 : 1kg 까지는 1엔(圓), 이후 500g 당 50센 물론 이러한 국제선의 확장과 항공우편 개시 또한 앞의 중일통합협정의 내용을 벗어난 것이며 국민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었기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7년 6월 10일, 전보를 보내어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고 멈추라고 명령하였지만, 일본은 이러한 장제스의 비난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며 이를 강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까지 발발하게 되면서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후이퉁항공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3. 중일전쟁의 발발과 중화항공(中華航空)의 설립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에 따라 수송에 있어 항공의 역할은 더욱 부각되었다. 후이퉁항공은 영업을 지속하는 한편, 일본군의 물자 수송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본군은 전쟁에 따라 늘어난 항공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민간 항공사들로부터 포커(Fokker) 슈퍼 유니버셜 5기 , 비치크래프트(Beechcraft) C17E 4기 를 비롯한 여러 항공기를 징용하였다. ( 때문에 국내선* (일본과 그 식민지 + 만주) 노선 일부가 영향을 받았다. ) 일본군은 이렇게 징용한 민간 항공기들과 자신이 보유한 항공기들을 통해 자체적인 항공노선을 구축하여 일본군의 병력과 물자를 운송하는데 사용했다. 또한 일본군 장병들의 군사우편 또한 이 항공노선을 통해 일본 본토로 전달되었다. 일본 육군이 중국대륙 내에 설치한 항공노선. 일본 육군 운영 대륙 항공 노선 [1937년 운영 개시 노선] (1) 후쿠오카 - 상하이 (1937.10.12 부터 / 주 3회) [1938년 운영 개시 노선] (2) 후쿠오카 - 베이징 (1938.1 부터 / 주 3회) (3) 후쿠오카 - 칭다오 (1938.1 부터 / 주 3회) (4) 난징 - 상하이 - 항저우 (1938.3~ 1938.8 / 주 3회) (5) 타이페이 - 광저우 (1938.11.15 부터) (6) 타이페이 - 상하이 (1938.11.15 부터) (7) 난징 - 우한(한커우) (1938.11.15부터) 일본 육군이 장거리 항공노선에서 주로 사용했던 DC-2. 일본군이 자체적으로 대륙에서의 항공노선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8월, 상하이 전투가 시작되면서였다. 상하이 전투가 격화되면서 일본은 1937년 10월부터 후쿠오카 - 상하이 노선을 DC-2 항공기를 통해 주 3회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 1월에는 후쿠오카 발 칭다오, 베이징 노선도 운영하면서 노선을 확장시켰다. 1938년 3월에는 난징 - 상하이 - 항저우 를 운항하는 군 정기 항공노선을 설립한 데 이어, 11월에는 새로이 점령한 우한과 난징을 연결하는 노선, 일본령 대만과 중국대륙을 연결하는 노선도 개통하게 되며 일본군은 중국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항공노선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일본군은 이러한 항공노선의 운영을 위해 난징을 비롯한 중국대륙 내의 운항 도시에 주재원을 파견하고 난징과 상하이에는 사무소를 운영하는 등 일본군은 자신들이 설치한 항공 노선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중일전쟁 초기 형성한 항공노선은 1938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바로 '민간화' 이다. 일본군은 이러한 중일전쟁 초기에 자체적으로 형성한 항공 노선을 초기에는 군 장병과 군용 화물을 수송하는 군 전용 노선으로 사용했으나, 1938년 중반 부터는 이를 민간에게도 개방, 군에서 운영하는 항공노선을 일반 민간인들도 요금을 내고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군용 화물이 아닌 민간 화물도 수송할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군용 노선으로 운용했던 항공노선을 민간에게도 개방했을까? 이는 바로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연관이 있다. 중일전쟁이 6개월이면 끝날 것이라던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우한, 충칭으로 이전하며 계속 항전을 계속해 중일전쟁이 장기전의 형세를 보이게 되면서 일본군은 지속하여 전쟁 관련 비용을 지출 해야 했고 이는 군 재정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일본은 재정 안정을 위해서라도 군 재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군은 이러한 전쟁 비용을 자신들이 만들어둔 항공 노선을 통해 충당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후이퉁항공, 만주항공과 일본 항공사들을 비롯한 기존 항공사들이 일본군이 경영하고 있던 항공노선과 대부분 중복되는 노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수익은 제한적이었고 때문에 일본은 장기전이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 일본군이 이러한 독자적인 항공 노선 경영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중국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항공사로 기존에 설립하였던 후이퉁항공을 확장, 개편하여 새로운 항공사를 설립하여 그 항공사로 하여금 이러한 항공노선을 경영하게 하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새로운 항공사로 하여금 중국 대륙 방면의 항공 사업을 일원화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38년 12월 16일, 일본은 내각 회의를 통하여 중국대륙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항공사 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기존의 후이퉁항공은 이 새로이 출범하는 항공사에 통합시키기로 결정한다. 쇼와 13년 (1938년) 12월 16일 각의결정 (* 원 문서에서는 지나(支那) 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이를 '중국' 이라는 단어으로 변화시켰다.) (1) 방침 중국에서의 항공사업을 우리 실권 하에서 일원화된 경영을 도모하여 정치, 경제 및 국방상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도모하는 것과 동시에 동아 항공 정책의 실현에 이바지하기 위해 본격적 일지(日支) 합작의 항공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현재의 긴박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신속하게 중화항공 (가칭) 을 설립한다.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 (恵通航空股份有限公司) 는 본 사에 통합한다. (2) 요령 1. 명칭 : 중화항공주식회사 (中華航空株式會社) (가칭) 2. 사업 목적 ①.여객과 우편물 또는 그 밖의 화물의 항공기에 의한 운송 ②.항공기 임대사업 ③.그 밖에 항공기로 하는 일체의 사업 ④.항공사업의 발전에 이바지할 사업 ⑤.전 각호 (①~④를 의미)에 부대하는 사업 ⑥.전 각호에 (①~④를 의미) 게제하는 사업에 대한 투자 (3) 자본 1. 자본 총합 600만 엔 2. 자본 할당 (예정) ①. 중화민국 임시정부 180만 엔 ②. 중화민국 유신정부 200만 엔 ③. 몽강연합자치정부 20만 엔 ④.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 100만 엔 (현물출자) ⑤. 대일본항공주식회사* 100만 엔 (현물출자) [주1] 후이퉁항공의 출자 100만 엔은 본사 설립후 임시정부에 50만 엔, 대일본항공에 50만엔으로 명의변경하는 것으로 한다. [주2] 출자금은 최초에 절반인 300만엔을 제출, 이후 본사 설립 6개월 후 잔액을 제출하는 것으로 한다. [주3] 현재 만주항공이 후이퉁항공 내에서 운용하고 있는 자금과 기재에 대해서는 자금은 본 회사가 그대로 인수하고, 기재는 본 회사에 매각하는 것으로 한다. 본 회사는 [주1]에 따라 명의변경이 이루어지면 대일본항공의 자금을 통해 해당 자금과 기재에 대한 금액을 만주항공측에 제공한다. (4) 법인 및 본사 소재지 본 사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특수법인으로서 3 정부에 모두 설립등기를 제출한다. 다만 본사는 당분간 베이징에 둔다. (5) 임원 사장 1명, 부사장 1명, 이사(정수 결정x), 감사(정수 결정x) (6) 특전 1. 중국에서의 항공사업 (항공사업 및 항공기제조사업을 포함한다) 의 독점권 향유 (단, 이미 국민정부의 허가를 받은 항공 수송 사업에 대해서는 장래 정리과정을 거치기로 하고, 대일본항공 및 만주항공을 비롯한 일본 내 항공 수송 사업에 대해서는 차후 별도로 결정한다.) 2. 국유비행장 사용에 대한 독점 특권 3. 필수품에 대한 수출입세의 면세 및 조세를 비롯한 기타 일체의 공과 면제 4. 토지 수용 및 기타 관영사업에 특전 부여 5. 사업상 필요한 통신, 관제 및 방송의 전용 운용권 부여 6. 3정부 (임시,유신,몽강) 및 기타 주체로부터 경영상 필요로 하는 보조금의 교부 (7) 특수의무 본 사는 공익상 필요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한다. (8) 감독 본 사의 감독에 관해서는 차후 따로 결정한다. [비고] (1) 본 사는 신속하게 설립하기 위해 우선은 주식 공모의 방법을 실시하지 않고 본사 발기 설립에 의한 성립 이후 장래에 적당한 시기에 실시하여 일반 국민이 본 회사의 주주가 될 수 있게 한다. 이때 (일본) 군인 및 그 가족, 중국인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한다. (2) 본 사의 인원 채용에 대해서는 (일본) 군인 및 그 가족, 중국인들에 대해 사정이 허락하는 한 우대한다. (3) 중국에서 제3국의 항공 권익에 대해서는 본 회사는 제3국의 기존 운항 노선을 유지하게 하되, 현 상황에 대한 분석 작성에 노력하여 제3국과의 상의에 즈음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준비한다. [양해사항] (1) 동아에서의 항공 사업 (항공 사업과 항공기 제조산업을 포함한다.) 의 확실한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 중국 현지의 항공 사업은 일본 정부가 실질적으로 일원적 통제를 유지할 수 있게 조치한다. (2) ①. 관세 및 기타 공과 면제에 관해서는 정부 보조금과 관련하여 별도로 설정한다. ②. 본 사에 대한 민간 기관의 보조금은 원칙적으로 대일본항공주식회사를 통해 지출하도록 조치한다. ③. 본 사는 적당한 수의 중국인 임원을 둔다. ④. 본사는 인원 및 자재의 제공, 비행장의 사용에 대해 육해군에서 필요한 원조를 제공한다. ⑤. 후이퉁항공고분유한공사의 인원은 원칙적으로 본 사에 인계, 흡수 시킨다. ⑥. (1) 방침 에서 서술한 항공사 설립은 신속하게 설립시키기 위해 이의 설립에 관해서는 자본의 구성, 인정 관계, 본사의 소재지등을 잠정적으로 설립될 본 사를 구속하지 않는 견지에서 실시한다. ⑦. 본 사의 설립시에는 그 설립의 취지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방국의 자본 및 기술을 참가시키는 것을 고려한다. (3) 본 요강의 실시에 있어서 자금,물자의 관계는 다음을 따른다. 1. 본 사업 수행에 필요한 물자는 가능한 한 이를 일본에서 조달한다. 2. 일본에서 이미 적출된 화물의 결제도 이를 일본에서 조달한다. 3. 외국 자본 (이는 중국 자본을 포함한다.) 의 매수는 최소한으로 하고, 현물 출자의 방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매수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는 계약 체결 전에 일본정부와 협의한다. 4. 기업비, 운송자금의 송금 및 설비용 기계류에 수출에 관해서는 차후 환율과 물자 수급관계에 따라 계획을 수정한다. *(大日本航空, 위에서 보았던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 내 항공사들이 합병과정을 통해 설립한 새로운 항공사) 각의 결정에서는,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의 명칭을 '중화항공(中華航空)' 으로 결정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 3개의 정부가 공동으로 참가하며 대일본항공과 후이퉁항공이 출자 (후이퉁항공은 통합까지) 하여 중화항공을 출범시키기로 결정한다. 후이퉁항공의 인원은 그대로 중화항공에 흡수되었고 새로이 설립될 중화항공으로 하여금 중국 대륙 내에서의 독점적인 항공사업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새로이 설립되는 항공사를 일본 정부 통제하에 두려 하였으며, 전쟁 중 점령지에서 활동한다는 특징 속에서 자신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대부분의 기자재를 일본에서 조달하게 하고 외국자본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등 일본은 이전 후이퉁항공 때와 마찬가지로, 외양적으로는 중일합작의 형태로 항공사를 설립하려 했으나, 속으로는 완전한 '일본 주도'의 항공회사로 설립하려 했다. 또한 '독점적인 항공사업권' 이라는 말과는 달리 일본은 중화항공이 기존에 운행중인 만주항공, 대일본항공의 노선과 중복되는 노선은 이들로 하여금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하면서 (차후 논의한다라고 서술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점적인 항공사업권이라는 모습도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중화항공의 설립과정. (후이퉁항공의 100만엔은 이후 대일본항공 / 임시정부 명의로 처리된다) 이러한 각의결정에 따라, 1938년 12월 17일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왕인타이(王蔭泰),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대표 장훙제(江洪傑),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대표 두윈위(杜運宇)는 새로운 항공사로 중화항공을 설립한다는 내용의 중일합판항공공사설립협정 (中日合辦航空公司成立之協定) 에 서명하였고, 이에 따라 중화항공은 12월 18일 정식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회장은 후이퉁항공의 초대 부사장이었던 코다마 츠네오 (兒玉常雄) 이 맡았다. 중화항공의 활동 '중화항공주식회사' 라고 적힌 팜플렛. 중화민국의 항공사 팜블렛에 히노마루가 그려진 비행기가 그려진 모습이 중화항공의 현실을 직감하게 해준다. 중화항공의 로고. 난징국민정부 출범이후 중화(中華) 라는 글자를 형상화한 로고를 도입했다. 1938년 12월 18일 정식으로 운항을 시작한 중화항공은 기존의 후이퉁항공이 보유하고 있던 노선, 일본 육군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노선을 대부분 그대로 인수하여 운항하게 된다. 그리고 사세가 확장된 만큼 부족한 인원, 자원등은 모두 일본과 만주국에서 충당하여 사용했다. 일본은 중화항공쪽에 자신들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와 자신들이 제작한 항공기를 임대 등 여러형식으로 제공하였다. 일본은 기존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록히드(Lockheed) 모델 14를 비롯하여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L2D (DC-3의 쇼와-나카지마 라이센스판) , MC-20 (Ki-21의 민수판) 등의 항공기를 중화항공에 제공했다. 중화항공 항공기 목록 ~ 앞의 숫자 : 사진 자료등으로 확인되는 기체수 * 기체번호를 통한 총 기수 추정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 자료를 통해 사용이 된 것은 확인되나, 정확한 기체수는 파악불가 카와사키 Ki-56 (일본) : 3기 나카지마 AT-2 (일본) : 6~16기* 미쓰비시 MC-20 (일본) : 30기 쇼와 / 나카지마 L2D (일본) : 3기 타치카와 KKY2 (일본) : 1~2기* 만주 MT-1 (만주) : ⊙ 타치카와 Ki-54 (일본) : ⊙ 비치크래프트(Beechcraft) (미국) C17E : 4기 + ⊙ 포커(Fokker) F.VII (네덜란드) : 1기 포커(Fokker) 슈퍼 유니버셜 (네덜란드) : 9기~14기* 드 하빌랜드 (de Havilland) DH.80A (영국) : 2기 록히드(Lockheed) 모델 14 (미국) : 9기 더글러스 (Douglas) DC-2 (미국) : 3기 + ⊙ 중화항공의 항공기는 'C' 로 시작하는 기호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개체의 번호가 붙었다. 항공기 전면에는 중화항공의 로고가 붙었고 날개와 후미에는 히노마루문양 (난징국민정부 성립 이전과 초기) 과 청천백일문양 (난징국민정부수립 후기) 가 붙었다. 중화항공의 항공기 세부 보유갯수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파악이 쉽지 않은데, 이는 중화항공의 항공기가 대부분 일본으로 부터 임대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화항공 내에서 운영되는 항공기는 시기에 따라 다시 일본에 징용되어 사용되는 모습을 취하면서 때에 따라 주인이 바뀌는 모습을 취했고 때문에 정확한 기체수의 파악은 쉽지않다.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일본 내에서 중화항공에 관해 서술한 서적, 신문등 자료들도 세부적인 기체 보유 정보까지는 서술하지 않는 대부분인 경우가 많아 명확한 정보를 파악하긴 힘들다. 1942년 10월 5일자 매일신보.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중화항공에 항공기들을 전달하였다는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진작 전달한 기체의 수, 종류는 '○' 으로만 표기하여 어떠한 기체가 몇대 전달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1941년 왕징웨이의 방일 당시 사용되었던 중화항공의 푸저우호 (福州號) . 본 기체는 C-5105라는 코드를 부여받았다. (전면에 중화항공의 로고도 확인할 수 있다.) 중화항공은 기존 후이퉁항공, 일본 육군이 구축했던 노선을 넘어 더 넓은 범위로 노선의 확장을 시도했다. 이는 화북지역에 운항 노선이 집중되어있던 후이퉁항공과 주요 대도시만 연결하며 노선간 연결성이 떨어졌던 일본 육군의 항공노선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었다. 중화항공은 1939년 2월 록히드(Lockheed) 모델 14 을 이용하여 상하이-베이징 노선, 베이징-다퉁 노선을 운영하고, 1939년 말에는 상하이에서 타이페이를 경유하여 광저우까지 가는 노선도 운항하는 등 (1939년에는 타이페이까지만 개통되었고, 광저우까지 노선이 개통된 것은 1940년이었다.) 점령지 내 주요 도시들로 노선을 확장해 나간다. 특히 이러한 확장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크게 활성화되었다. 난징국민정부시기 중화항공은 운항 노선을 대폭 늘려 상하이, 베이징, 톈진, 난징, 우한과 같은 기존 대도시 뿐만 아니라 카이펑, 하이저우, 정저우, 타이위안, 안칭 등 지방도시들로도 노선을 확대하였고 점령지 내의 대부분의 주요도시들에 항공편을 취역시키는데 성공하며 중화항공은 1943년에 이르러서는 29곳 (만주국, 일본령 포함) 의 비행장& 공항에 취역하며 총 노선길이 12,000km 이상을 경영하는 항공사로 성장한다. 「日本航空史 昭和前期編」에 따른 1941년 6월 기준 중화항공의 노선도. 난징국민정부 지역 일대 대부분의 주요도시들에 취항한 모습을 보인다. 중화항공 항공노선도 (1941.6) (1) 베이징 - 바오터우선 (주3회) / 3시간 소요 사용기체 : 포커 슈퍼유니버셜 → 미쓰비시 MC-20 베이징 - 장자커우- 다퉁 - 바오터우 (2) 베이징 - 다롄선 (매일 1회) / 2시간 소요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이후 MC-20, L2D 추가) 베이징 - 톈진 - 다롄 (3) 베이징 - 상하이선 (주 6회) / 7시간 30분 소요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록히드(Lockheed) 모델 14 (이후 미쓰비시 MC-20 추가) 베이징 - 지난 - 쉬저우 - 난징 - 상하이 (4) 상하이 - 광저우 선 (매일 1회)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록히드(Lockheed) 모델 14, L2D 상하이 - 타이페이 - 산터우 - 광저우 - 하이커우* (5) 난징 - 우한 선 (매일 1회) / 3시간 소요 사용기체 : 나카지마 AT-2 ,록히드(Lockheed) 모델 14 (이후 미쓰비시 MC-20 추가) 난징 - 안칭 - 주강 - 우한(한커우) (6) 다롄 - 상하이 선 사용기체 : 더글러스 DC-2 다롄 - 칭다오 - 상하이 (7) 칭다오 - 타이위안 선 사용기체 : 미쓰비시 MC-20 칭다오 - 지난 - 석가좡 - 타이위안 (8) 베이징 - 우한 선 사용기체 : 미쓰비시 MC-20 베이징 - 석가좡 - 정저우 - 우한(한커우) (9) 난징 - 상하이 선 사용기체 : 미쓰비시 MC-20 난징 - 쑤저우 - 상하이 (10) 다퉁 - 윈청 선 (주 3회) 다퉁 - 타이위안 - 린펑 - 윈청 (11) 베이징 - 쉬저우 선 (주 3회) 베이징 - 석가좡 - 장더 - 신샹 - 카이펑 - 구이더 - 쉬저우 (12) 칭다오 - 쉬저우 선 (주 3회) 칭다오 - 하이저우 - 쉬저우 (13) 장자커우 - 펑톈 선 (주 2회) 장자커우 - 창더 - 펑톈 (14) 난징 - 후쿠오카 선 [대일본항공 연락] 난징 - 상하이 - 후쿠오카 (15) 베이징 - 펑톈 선 [만주항공 연락] 베이징 - 펑톈 (16) 베이징 - 경성선 [대일본항공 연락] 베이징 - 톈진 - 다롄 - 경성 *는 1942년 추가 중화항공은 이러한 확장된 노선 운영을 위해 주요 도시마다 지부 혹은 영업소를 설치하여 여행객들이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게 했고 JTB (Japan Tourist Bureau) 를 비롯한 다른 장소에서도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중화항공은 탑승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승객들에게 항공우편과 소포는 물론, 기내식 제공 (베이징 - 바오터우 선, 베이징 - 상하이 선등) 까지 제공하면서 중화항공의 이런 항공 서비스는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특히 베이징-다롄 선, 난징- 우한 선의 경우 이용자가 많아 높은 가격을 자랑했음에도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탑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화항공은 독특한 서비스로 베이징 노선에 한하여 특별 관광비행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인당 5엔의 추가요금을 지불하면 착륙전에 10분간 베이징 일대를 순환비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어린이는 2엔) 나날히 성장하던 중화항공은 1939년 11월 5일, 중화항공 제1회 감독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대일본항공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인사들 모두가 참가하였고 해당 회의에서는 1)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 출범에 맞추어 본사를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이전 2) 노선 확대의 문제 (상하이-광저우 선등) 3) 상하이, 칭다오의 비행장에 무선시설 확충 4) 비행장 근처의 도로 포장 5) 상하이와 베이징에 항공기 수리공장 건설 / 일만지연결노선 설치 와 같은 사항이 논의, 결정되었으며 또한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항공수요에 맞추어 자본을 증자시켜 기존 600만 엔의 자본 규모에서 5천만엔 규모로 증자시키기로 결정하며 중화항공의 규모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1939년 11월의 증자 결과. 이후 중화항공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난징국민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이후로도 지속하여 항공 사업을 지속한다. 왕징웨이와 중화항공 중화항공의 MC-20 '푸저우호' 에 탑승하는 왕징웨이. (1941년 6월) 1938년 12월, 충칭을 탈출하여 일본과 신정권 수립을 논의하고 있던 왕징웨이에게도 중화항공은 중요한 존재였다. 물론 왕징웨이는 대외 방문에서 기차나 해운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 그의 대외 방문에서 비행기가 차지 하는 비중은 크진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 순간 중화항공은 그의 발이 되어주었다. 1940년 3월 18일 신정부 출범에 맞추어 왕징웨이는 중화항공의 특별편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 난징에 도착했으며 이는 왕징웨이에게 있어선 1937년 12월의 난징 함락 이후 처음으로 다시 난징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또한 1941년 6월, 정권 수립 이후의 첫 방일 과정에서도 왕징웨이는 중화항공의 특별편을 이용했다.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중화권에서는 이 DC-3이 바로 중화항공에서 운영했던 대붕(大鵬) 호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중화권에서는 왕징웨이가 1944년 11월 사망하였을 때, 나고야를 통해 난징으로 유해를 전달했던 L2D (DC-3) 이 중화항공이 운용했던 DC-3 2대중 한대인 대붕(大鵬) 호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이 진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 우선 왕징웨이의 유해를 L2D에 싣는 모습이 담긴 일본뉴스 233호, 236호에는 유해를 실은 기체 어디에도 중화항공의 로고, 중화항공의 기체분별코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233호에서는 유해를 실고 나고야 비행장을 떠나는 L2D의 모습도 보이는데, 중화항공 기체로 보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일본군 수송기의 모습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착한 유해를 다루는 236호에서는 근위병들이 왕징웨이의 유해를 들고 L2D 앞을 행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때도 중화항공에서 운용하던 L2D의 형상을 특정할 수 있는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 주장은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이전에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왕징웨이가 사용하던 전용기였던 해겸호를 사용했다는 서술도 있었으나, 영상에서 DC-3 (L2D) 가 명확하게 판명되었기에 이러한 주장은 반려되었다.) 중화항공에서 운영했던 DC-3. 중화항공의 사건사고 1939년 3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서술된 중화항공의 항공기 추락 사고. (해당 항공기는 톈진에서 다롄으로 향하던 록히드 모델 14 항공기로 뤼순 근처에 바다에 추락하였다. 승무원 3명, 승객 9명을 비롯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였고 승객 중 2명은 경성에서 온 조선인이었다.) 중화항공은 하지만 동시에 영업과정에서 여러번의 인명사고를 겪었다. 영업을 개시한지 얼마되지 않은 1939년 3월 24일, 중화항공의 록히드 모델 14 항공기는 톈진- 다롄 구간을 운항하던 도중 추락하여 12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1941년 6월 12일에는 또 한번 추락사고를 내어 승무원 2명, 승객 3명 탑승객 5명 모두가 사망하기도 했다. 1942년 2월 24일 상하이를 출발, 일본 후쿠오카로 향하던 중화항공의 구룡(九龍) 호는 도중 추락하여 탑승객 11명이 사망하였는데, 이중에는 도쿄에서 개최되는 동아인도인대회(東亞印度人大會) 에 참가하려는 인도인 대표 4명도 포함되어있었다. 신문기록에서 확인되는 중화항공 항공사고기록 1939.3.24 추락사고 기종 : 록히드 모델 14 탑승객 12명 전원 사망 (조선인 승객 2명 포함) 1941.1.15 추락사고 기종 : [불명] 탑승객 3명 전원 사망 1941.6.12 추락사고 기종 : 비치크래프트 C17 탑승객 5명 전원 사망 1941.9.10 추락사고 기종 : [불명, 비치크래프트 C17로 추측됨] 탑승객 5명 전원 사망 1941.12.1 추락사고 기종 : 더글러스 DC-3 탑승객 15명 사망 / 2명 생존 (독일인 승객 1명도 사망) 1942.2.24 추락사고 기종 : 미쓰비시 MC-20 탑승객 11명 전원 사망 (인도인 승객 4명 포함) 1944.1.18 추락사고 기종 : 미쓰비시 MC-20 탑승객 13명 사망 , 11명 생존 (생존자 11명은 충칭정부에 포로로 수용) 이렇듯 중화항공 시기에는 최소 7차례의 추락사고가 발생하는 등 여러차례 항공사고가 일어났다. (물론 이는 항공기 기술이 현대에 비해 발전되지 못했던 근대에는 이러한 항공기의 추락사고는 드문 것이 아니었다.) 일본과 난징국민정부측은 이러한 추락사고 발생이후 조사위원회를 설치, 기체 잔해의 발견에 나서서 실종자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위원회의 조사에도 탑승자의 유해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처음에 소개했던 조선인 승객이 탑승했던 추락사고의 경우에도 추락 기체 자체를 발견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탑승자의 유해는 발견하지 못했다. ) 물론 이러한 안타까운 결과는 현대에 비해 부족했던 수색 기술의 결과이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중화항공과 중화항공의 해체 태평양전쟁 시기 미국인을 상대로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잡지인 大東亜写真年報 의 1943년판에 보이는 중화항공이 서술된 조선여행 포스터. 중화항공의 발음을 일본식으로 표기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대일본항공과 중화항공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민간항공사들은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의 발발로 이들 항공사 노선 일부는 영향을 받아 운행이 중지되거나 노선이 축소, 폐쇄 되는 모습을 보였다. 중화항공 역시 영향을 받아 상하이-광저우(하이커우) 노선을 비롯한 일부 노선의 운영을 중지했다. 중화항공은 전쟁 발발에 따라 일본군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광저우의 중화항공 비행장 & 항공기들은 1941년 12월 홍콩 전투를 위해 징발되어 사용되었고 남지나방면군은 이러한 중화항공의 협조에 대해 공이 크다며 1942년 8월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는 태평양전쟁 시기 민간항공사로서는 첫 훈장이었으며 중화항공은 대일본항공과 함께 1944년 한번 더 훈장을 받는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의 전선은 이름바 남방 (南方) 이라는 태평양 일대로 크게 확대되었고, 일본에게 항공기는 이러한 광대한 전선에서의 전쟁 물자 수급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였다. 일본 육군은 남방항공수송부 (南方航空輸送部) 를 설치하여 타이완 섬 이남의 남방 지역에 항공기를 통해 보급하기 위한 부처를 설치하였고, 남방항공수송부에는 대일본항공, 중화항공, 만주항공의 인원들이 참가하게 되었고 이들 항공사의 항공기 일부도 징발되어 남방 보급을 위해 사용되게 된다. (해군 역시 대일본항공의 항공기를 징발하여 자신들의 보급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중화항공측은 이러한 전쟁의 진행속 자신들이 경영하고 있던 노선을 유지 - 강화하기 위해 1939년 11월 6백만 엔에서 5천만 엔으로 증액시켰던 자본액을 1942년 1억 엔까지 증액시키려 했으나, 전황의 악화로 이러한 계획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중화항공의 광고포스터. 치파오를 입은 승무원이 날개에 기대있고 밑에는 간략한 노선도가 표시되어있다. 중화항공은 1943년, 몽강 내의 서세네딘 (西蘇尼特), 시우주무친(西烏珠穆沁) 를 연결하는 신규 노선을 확장하고 전쟁의 개시로 중단되었던 상하이-광저우(하이커우) 노선을 복구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전황이 날로 악화되며 자원이 부족해지며 항공기의 유지 & 보수가 어려워지고 신규 항공기의 생산도 차질을 겪었고 때문에 중화항공은 소규모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은 운항을 중단하고 난징,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를 연결하는 노선 중심으로 노선 운영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944년부터 타이완을 비롯한 중국 남부가 연합국 공군의 작전 가능 범위에 포함되면서 중화항공은 다시 광저우 행 노선을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다.) 1943년 후반기부터 연합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일본의 중국대륙내 항공대들이 중국대륙에서의 제공권을 잃기 시작하며 하이난 (1944.3) 을 비롯한 중국 남부의 일본군 기지에도 폭격이 가해졌고, 8월에는 상하이 일대까지 폭격을 받기 시작하자 중화항공은 제대로 된 운항이 어려워졌다. 이에 중화항공은 대부분의 항공기를 지키기 위해 베이징의 시자오 (西郊, 현재는 군용으로만 사용) 비행장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고 항공기를 베이징으로 옮기기도 전인 1944년 8월 9일, 미군은 상하이를 공습했고 중화항공이 보유하고 있던 MC-20 10기가 순식간에 전소되는 등 중화항공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연합군의 공습은 더욱 광범위해지며 난징, 상하이, 심지어 베이징까지 난징국민정부의 대부분 도시들이 사정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수도인 난징 (1944.11), 우한 (1944.12) 등의 도시들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면서 중화항공은 이 시점에서는 사실상 개점휴업의 상태가 되어 대부분의 노선을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중화항공은 이렇게 전쟁 말기 사실상 제대로된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고, 이에 중화항공은 모든 영업을 중단하고 해체 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화항공은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를 총동원하여 중국 대륙내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후 비행장과 공항을 비롯한 시설과 잔존 항공기들, 직원들은 모두 국민혁명군 항공부대와 중앙항공 (中央航空運輸公司) 에 인수되었다. 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중앙항공은 중화항공이 운영하던 항공기를 지속하여 운영하였으나, 제 2차국공내전의 혼란속에서 이들 기체는 사실상 모두 소실되면서 현재는 중화항공에서 운영하였던 기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게 되었다. [출처] 『 変容する世界の航空界・その4 日本の航空100年(上) 』, 酒井正子, (2010) 『 七七事變之前的冀察政務委員會 』, 李君山, (2018) 『大東亞共榮圏の交通現勢』 (1942) 『 北支経済図説 昭和17年版 』 (1942) 『 旧南京国民政府の交通と通信事業 』 (1941) 『 大東亜写真年報 2603년年販 』 (1943) 각의결정 관련 자료 http://www.ndl.go.jp/horei_jp/kakugi/txt/txt00183.htm 중화항공 - 후이퉁항공 관련사진자료 http://minhangji.com/index.php/zhhk/ http://cwlam2000.epizy.com/new_page_2.htm?i=2#%E7%AB%8B%E5%B7%9D_%EF%BC%88%E7%9F%B3%E5%B7%9D%E5%B3%B6%EF%BC%89%E9%99%B8%E8%BB%8D%E5%B0%8F%E5%9E%8B%E8%BC%95%E6%82%A3%E8%80%85%E8%BC%B8%E9%80%81%E6%A9%9F(KKY)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6~1940년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2%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4%91%ED%99%94%ED%95%AD%EA%B3%B5%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2%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그 외 신문자료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그 외 사진자료 http://jbaaijbaci.xsrv.jp/planeChuka.html https://museumcollection.tokyo/works/6447101/
-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 / 1940.7~ 1946.4)
중일전쟁시기 국립중앙대학의 변천사. 중일전쟁이 계속되면서 당시 국립중앙정부를 비롯한 난징의 대학들은 모두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다른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경제, 산업, 모든 분야가 전쟁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고 교육계 또한 그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의 교육체제는 전쟁의 발발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아야 했고 이는 가장 고등교육이었던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대륙의 주요대학이었던 베이핑(징)의 칭화대, 베이징대만 하더라도 창사로 옮겨 난카이대학과 함께 창사연합대학 (長沙臨時大學)를 구성해야 했고, 이들은 1938년 쿤밍으로 또 한번 옮겨 국립서남연합대학 (國立西南聯合大學) 을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들의 피난은 오늘 이야기할 난징의 대학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발발 반년도 되지 않아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까지 위협을 받게되는 상황이 되자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의 대학들도 칭화대, 베이징대의 경우를 따라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충칭국민정부가 지배하는 서쪽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었다. 난징의 사립학교였던 진링대학 (金陵大學) 과 진링여자대학 (金陵女子大學)는 물론, 난징에 위치해 있었던 국민정부 최대 · 최고 대학이었던 국립중앙대학 (國立中央大學) 등 여러 난징의 대학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래 일본점령지에 있었던 대학들이 모두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를 따라 서쪽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일본 점령지에는 대학 고등교육의 기회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일본과 중화민국 임시정부, 유신정부를 비롯한 협력정부들은 다시 대학을 만들어 민중들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다시 제공하는 것이 협력정부의 발전에 유리하다 판단, 해당 지역에 다시 다시 대학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다시 교원과 학생을 모집하고 일본군에 의해 접수되었던 옛 대학들의 건물들을 다시 활용하여 대학을 다시 열었다. 이들은 '복교 (復校)' 라는 명칭을 내걸며 새로이 대학이 세워지는 것이 아닌, 충칭을 비롯한 장제스의 국민정부 지역으로 옮겨졌던 대학들이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음을 주장했다. 대학의 명칭도 '베이징대' 와 '상하이대' 와 같이 충칭국민정부 지역으로 옮겨 엄연히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던 대학들의 명칭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물론 이런 '복교' 된 대학들을 보고 충칭국민정부와 원 대학들은 당연히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역 주민들도 이렇게 '복교' 를 거쳐 다시 문을 열게 된 대학들을 진짜 '복교'로 인정하지 않고 이를 괴뢰 대학, 가짜 대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복교' 된 대학들은 전쟁중이라는 상황과 점령지라는 한계 속 고등교육을 받을수 없었던 어떤 이들에게는 고등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 셈이기도 했다. 국립중앙대학의 '복교' 자오정핑 (趙正平, 1878~1945) . 그는 중화민국 건국 이후 교육계에 몸을 담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교육부 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된 이후에도 그대로 교육부 부장을 하게 된다. 그가 계속하여 교육부 부장을 할 수 있었 던것은 그가 교육계에 오래 몸을 담았다는 경험도 있지만, 여러 세력의 집합체였던 난징국민정부에서 모든 이들이 반대하지 않는 이름바 '무당무파 (無黨無派)' 였기 때문이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후, 구 유신정부의 교육부 부장이자 난징국민정부의 교육부 부장을 맡게 되었던 자오정핑은 왕징웨이에게 정통 국민정부를 표방하는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만큼, 국민정부의 최고대학이었던 국립중앙대학 또한 부활시키는 것을 건의했다. 자오정핑의 제안에 왕징웨이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에 1940년 4월 16일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에서 자오정핑의 국립중앙대학 복교계획은 정식으로 논의되게 된다. 본 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國民政府行政委員 第3次會義 (1940.4.16) 1. 웨이하이의 예속 문제 [汪, 화북정무위원회] 2. 동아운동대회참가주비위원회 (기원2600년봉축동아경기대회 참가를 위한것) 을 조직하고 이를 위한 경비 7만 위안을 사용하는 것 [교육부] 3. 전 유신정부의 강수순대사령부(江水巡隊司令部), 동녕정수순학교 (同綏靜水巡學校) 의 개편문제 [해군부] 4.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國立中央大學復興籌備委員會) 조직과 예산안 마련 [교육부] 5. 각 성의 사법기관 소송비용 관련 문제 [사법부] 회의에서는 자오정핑의 국립중앙대학 복교계획을 승인하고,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위한 준비위원회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國立中央大學復興籌備委員會) 를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이를 위한 예산안도 마련하기로 결정한다.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 내용을 다루는 1940년 4월 17일자 중화일보 (中華日報) . 행정원회의로부터 4일이 지난 1940년 4월 20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를 공식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국립중앙대학의 복교계획을 처음 구상했던 교육부 부장인 자오정핑 을, 부위원장으로 교육부 차장이었던 판중윈 (樊仲雲, 1901-1990, 이후 판중윈은 국립중앙대학의 교장이된다) 와 다이잉푸 (戴英夫, 1897~1969)를 선출하고 첸웨이충 (錢慰忠)을 비서장으로 하고, 루이쥔(陸翊君), 우시티(吳煕悌), 카이푸추(蔡復初) 3명의 전임위원 , 7명의 겸임위원 , 대학교육위원회위원 탕요우량 (唐有樑) 을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에 포함시켰다. 난징의 국립중앙도서관 사진. 본래 이 국립중앙도서관은 1937년 확장계획을 세웠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충칭으로 이전하게 된다.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충칭으로 떠나고 비어버린 난징의 국립중앙도서관 터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 5월 8일, 처음으로 열린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회의에서는 국립중앙대학에 문과대학, 법학대학, 상과대학, 교육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약학대학 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에서 일할 교원을 전국 각지 (물론 여기서 전국 각지는 사실상 汪정권의 지배지역을 의미했다.) 에서 모집하는 한편, 5월 13일에는 초생위원회 (招生委員會) 를 구성, 난징 국부로 282호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베이핑,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우한, 광저우 7개의 주요 도시에서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할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에는 난징국민정부가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위해 임시비 40만 위안, 경상비 68만 위안 총 108만 위안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5월 29일에는 학교에 필요한 물품구매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5일에는 일본으로 부터 건물을 환원받아 농과대학 건물의 부지를 확보했다. 또한 6월 12일에는 일본 문부성이 국립중앙대학의 복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대학은 점령지의 , 협력정부의 대학이라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입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였다. 우선 등록하는 이들에게 큰 혜택을 부여하였다. 4(5)년제 과정에 지원하는 학생의 경우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하였고, 2년제 과정의 경우에도 학생들의 식비, 실험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성적장학금제도를 많은 학생들이 편의를 볼 수 있도록 바꾸었으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별도의 장학금을 또 따로 지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근로장학생 제도도 만들어 50명 (개교 당시 기준 약 총 학생수의 7%)의 학생이 학교에서 규정한 시간동안 근로활동을 하면 월 10위안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다. 때문에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은 고등교육은 받고 싶으나 가정의 소득은 적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이 지원을 많이 하게 되었다. 6월 26일에는 난징의 국립정치대학 (國立政治大學) 부지를 새롭게 세워질 국립중앙대학 부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옛 국립중앙대학 부지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첫 째로는 난징에서 대학의 규모가 가장 큰 국립중앙대학 부지를 사용하기에는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은 그 규모가 본래의 국립중앙대학에 비하면 작았으며 또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가 화평에 응하여 난징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기에 '복교' 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옛 국립중앙대학 부지가 아닌 국립정치대학 부지를 학교 부지로 선정하였다. 부지가 선정된만큼 대학 시설의 준비가 시작되었고 (시설의 정비에만 3만 위안 가량이 들었다고.) 7월 3일에는 초생위원회의 각 지역에서 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초생위원회 측은 대학 지원의 요건을 (1) 공립 또는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자 (2) 고등학교와 동등한 학교를 졸업한 자 (3) 중학교 졸업 성적이 특히 우수한 자 (입학정원의 10%) 로 하였고 초생위원회 측은 학생들의 지원 독려를 위해 본래 7월 15일까지였던 등록기간을 2일 연장하여 7월 17일까지 지원할 수 있게 했고 그 결과 17세부터 31세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입학을 지원하게 된다. 초생위원회 측은 입학 시험을 8월 1일~3일에 걸쳐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학생들을 배려하여 해당기간동안1위안이라는 돈만 내면 시험기간동안의 모든 식사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2일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는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으로 판중원을 선출하였고 부총장으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 비서장이었던 첸웨이충을 부총장으로 선출하며 입학과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복교 준비과정을 마쳤으며 7월 24일에는 일종의 준비위원회였던 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를 끝내고 정식으로 국립중앙대학 운영을 시작한다. (물론 대학본부만 운영을 시작한 것으로, 아직 정식 개교는 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대학의 정문. 이 문은 1927년 국립정치대학의 전신이었던 중앙당무학교의 교문으로 건설되었다. 국립중앙대학 (原 국립정치대학) 정문의 2011년 모습. 국립정치대학이 대만으로 천도하며 옛 국립정치대학자리는 중국공산당 강소성 당학교가 2011년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강소성의 여러 기관들이 사용) 7월 17일까지 기간을 연장하며 학생들을 계속 모집해왔던 국립중앙대학이었고, 8월 1일~3일에는 입학시험과정도 이루어졌지만, 국립중앙대학측은 학생들의 추가 모집을 위해 베이징 등 일대에서는 8월에도 학생모집과정을 실시하였다. 8월 1일에는 학과장들의 임명이 있었으며, 9월 11일에는 대학 도서관을 위한 서적 1만 여권을 구매하였고, 9월 20일에는 공과대학 실험교재를 구매하는 등 국립중앙대학 측은 계속하여 수업 시작을 위한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5일에는 난징 일대의 기자들50여 명을 초청하여 국립중앙대학 운영이 준비되었음을 홍보하기도 하였다. 9월 26일에는 부총장이었던 첸웨이중이 중앙정치회의에 의해 안후이성 정부위원 겸 교육감으로 임명됨에 따라 사표를 제출하며 국립중앙대학은 정식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총장 자리가 궐석이 되게 되었다. 1940년 9월 30일, 국립중앙대학은 드디어 정식으로 수업을 개시하였다. 국립중앙대학의 출범 1년을 기념하는 책자인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수업 첫날인 9월 30일 기준으로 674명의 학생이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국립중앙대학 제1회 입학 당시 통계 (1940.9.30 기준) 학생 남학생 : 533명 (79%) 여학생 : 144명 (21%) 학생 출신지 중화민국 : 670명 일본 : 3명 일본령 조선 : 2명 학생 구성 (단과대학별) 문과대학 : 50명 법학-상과대학 : 137명 교육대학 : 36명 이공대학 : 95명 농과대학 : 12명 의과대학 : 48명 약학대학 : 4명 사범전수교육과정 : 33인 농업전수교육과정 : 28인 교양반 : 92명 실무반 : 139명 학생 구성 (거주) 기숙사생 : 479명 통학생 : 195명 교수 및 강사 남성 : 71명 (99.87%) 여성 : 1명 (0.13%) 1회 입학자의 통계를 보면, 남학생이 533명으로 약 8할 가량을 차지했고, 여학생도 144명으로 2할 가량을 차지했다. 입학생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일본인도 3명 있었고 놀랍게도 조선인도 1명 존재했다. 다만 교원의 경우에는, 남성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72명의 교수 & 강사 중 여성은 쓰촨 출신의 鄭福地라는 31세의 여성 1명 뿐이었으며 심지어 그녀는 정식 교수도 아닌 강사직을 맡았다. 또한 교원 중에는 도쿄를 비롯한 일본에서 온 교수도 3명이 있었다. 이렇게 국립중앙대학에 참여한 교원진들은 새로이 임용된 사람들이거나, 기존 난징 혹은 점령지에 있던 대학 교원들이 참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國立中央大學要覽』의 재학생 일람 부분에 적혀 있는 28세의 문과대학 2학년 이규해 (李圭海) 씨. 그의 출신지는 '조선' 으로 표기 되어있다. 국립중앙대학 살펴보기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인 真知力行 (참된 지식으로 힘쓰다) . 왕징웨이가 직접 썼다. (1) 국립중앙대학의 개설학과 국립중앙대학은 개교 당시 (1940) 다음과 같은 학과를 가지고 있었다. 특정과 들은 과 안에서도 전공이 나뉘기도 했다. 가장 공급이 부족한 교사, 공급의 확대가 필요한 농업부분은 단기 과정을 설치했다. 문과대학 (文學院) / 4년제 - 중국문학과 (中國文學係) - 외국어문학과 (外國語文學係) - 역사사회학과 (歷史社會學係) 법학-상과대학 (法商學院) / 4년제 - 법률과 (法律係) - 정경학과 (政經學係) ● 경제전공 ● 정치전공 - 상학과 (商學係) ● 회계전공 ● 은행학전공 교육대학 (敎育學院) / 4년제 - 교육학과 (敎育學係) - 심리학과 (心理學係) 이공대학 (理工學院) / 4년제 - 수학과 (數理係) ● 물리전공 ● 수학전공 - 화학과 (化學係) - 토목공정과 (土木工程係) 농과대학 (農學院) / 4년제 - 농학과 (農學係) - 생물학과 (生物學係) 의과대학 (醫學院) / 5년제 (5학년은 실습) (계열 분류 x) 약학대학 (藥學院) / 4년제 (계열 분류 x) 사범전수교육과정 (師範專修科謨程) / 2년제 ■ 문학/역사/지리 과정 (文史地組) ■ 교육행정과정 (敎育行政組) 농업전수교육과정 (農業專修科謨程) / 2년제 ■ 원예과정 (園藝組) ■ 목축과정 (畜牧組) (2) 국립중앙대학의 수업관련 규정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대학 교육과정에 관한 규정을 서술하면서 졸업을 위한 요건과 학생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을 지정하고 있다. 또한 단과대학에 대한 규정도 서술하고 있다. 단과대학에 대한 규정에서는, 해당 단과대학이 어떤 과를 개설하는지, 해당 단과대학의 졸업요건은 무엇인지, 해당 과 학생은 1학년부터 4(5) 학년까지 어떠한 수업이 진행되는지, 선택과목으로 해당과 학생이 어떤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지를 규정하고 있다. (선택과목의 경우 문과의 경우 폭이 넓으나 이과의 경우 폭이 좁은 편이었다.) 전 학생 해당사항 (1940) - 졸업을 위해서는 최소 144학점 이상을 이수할 것. (사범전수교육과정, 농업전수교육과정은 90학점 이상) (1학년을 제외하면 한 학기 21학점 최대) - 부전공시 해당 학과의 필수학점 ⅓ 이상을 이수할 것. - 졸업 논문 필수 (4학점 취급) - 각 과의 공통필수과목의 비율은 해당 단과대학 졸업학점의 ¼ 이하로 할 것. (과마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이 다르나 이 비율은 지켜야) - 제2외국어 (독일어 혹은 프랑스어) 성적은 2년 이상 수강 & 합격해야 학점 인정 (해당 수업을 듣는경우) - 성적의 경우, 과목의 시험을 90점을 넘기면 갑(甲), 80점을 넘기면 을(乙), 70점을 넘기면 병(丙), 60점을 넘기면 정 (丁), 60점 미만 불합격으로 처리, 학기 전체 성적은 수강 과목의 평균을 통해 측정 - 해당 학기의 수강과목의 ⅓ 이상을 불합격하면 유급, 유급생은 재시험을 거쳐야 하며 유급이 2회를 넘어가면 퇴학 조치. - 출석의 경우, 수업 6분의 1이상을 결석하면 해당 학기의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 (불합격처리) 전 학생 공통필수과목 - 기본국문 (基本國文) / 6학점 - 기본영어 (基本英文) / 6학점 - 기초일어 (基本日文) / 6학점 - 중국통사 (中國通史) / 4학점 - 사회과학(社會科學) 혹은 자연과학 (自然科學) 과목 / 6학점 (선택 과목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서 이수하면 되었다.) 공통필수과목은 아니나 반드시 이수해야하는 과목 (공통필수과목 학점에 포함되지 않음) - 체육 (體育) / 8학점 - 군사훈련 (軍事訓練) / 8학점 각 학과 졸업학점 문과대학 - 144학점 법학-상과대학 - 144학점 교육대학 - 144학점 이공대학 - 160학점 농과대학 - 195학점 의과대학 - 212학점 약학대학 - 156학점 규정에서 주목해 볼만한 부분은, 국립중앙대학의 공통필수과목에 기초 '일어' 가 존재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생긴 이후 교육부에서 추가된 내용으로, 고등교육을 하는 대학 뿐만 아니라 초등-중등 교육을 하는 소학교, 중학교에도 공통으로 적용된 부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 : ) 또한 체육과 군사훈련이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 군사훈련의 경우 당대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꺼려지는 과목이었다. 군사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언제나 전선에 끌려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원하지 않는 이러한 군사훈련 과목을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했다. 때문에 군사훈련 과목의 존재는 재학생이 국립중앙대학을 포기하거나 신입생들이 국립중앙대학의 입학을 꺼려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3) 국립중앙대학의 시간표 / 학사일정 『國立中央大學要覽』에 묘사된 국립중앙대학의 시간표. 표에서는 표기하지 않았지만 원 자료에는 해당 시간표에 맞추어 종을 치는 방법까지 규정되어 있었다. (물론 본 시간표는 기숙사생 기준으로, 통학생의 경우 8시전까지만 등교하면 되었고 저녁식사 전에 귀가할 수 있었다.) 시간표에서 주목할 부분은 국기게양 - 국기하강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서 생긴 변화로, 난징국민정부는 중화민국 유신정부 - 임시정부시절에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교육 현장에서의 국기게양식을 부활시켰고, 이 과정에서 국가를 제창하게 하는 과정도 다시 부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 : ) 또한 국기게양식 행사 시간에는 일종의 아침 조례가 함께 이루어져 인원 점검과 체조가 이루어졌다. 1941년부터는 난징국민정부에서 국민체조도해(國民體操圖解)가 보급된 만큼, 해당 체조에 기반한 체조가 이루어졌다. 하루동안의 시간표를 살펴보았다면 1년 동안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1월 1일~ 3일 : 새해 휴가 1월 25일 ~ 2월 4일 : 겨울 방학 2월 8일 : 정식 수업 시작 3월 12일 : 국부손문서세기념일 (휴일) 3월 21일 ~ 3월 27일 : 중간고사 3월 29일 : 혁명선열기념일 (휴일) 3월 30일 : 국민정부환도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 대체) 4월 1일 ~ 4월 7일 : 봄 방학 4월 17일 : 복교기념일 5월 5일 : 혁명정부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대체) 5월 10일 ~ 5월 15일 : 기말고사 6월 25일 ~ 9월 13일 : 여름방학 8월 1일 ~ 8월 3일 : 신입생 입학고시 9월 14일 : 정식 수업 시작 10월 10일 : 중화민국 국경 (휴일) 10월 27일 ~ 11월 1일 : 중간고사 11월 12일 : 국부탄신기념일 (휴일) 11월 30일~ 12월 5일 : 기말고사 12월 25일 : 운남기의기념일 (기념행사 참여로 수업 대체) 국립중앙대학의 학사일정 (1941년) . 많은 기념일 행사에 참가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학사 일정의 경우, 난징국민정부에서 정한 국경일 / 기념일을 따르되, 모든 기념일을 쉬지 않고 특정 기념일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기념행사 참가를 통해 수업을 대체하게 한 부분이 눈에 띈다. (국립중앙대학은 학생규정에서 이러한 기념행사를 애초부터 의무화하였다.) 또한 복교기념일을 국민정부행정위원 제3차회의의 결과로 국립중앙대학부흥주비위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던 4월 17일을 복교기념일로 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본래의 국립중앙대학은 1927년 5월 5일을 개교기념일로 두었으나, 난징국민정부 아래의 국립중앙대학에서는 이 날은 기념하지 않고 오직 복교기념일만을 기념하였다.) (왕징웨이 정권의 연간기념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4) 국립중앙대학의 등록금 및 비용 국립중앙대학은 앞에서 보았듯 학생 유치를 위해 학생들에게 학비 면제, 기숙사비 면제를 내세웠다. 하지만 강의비라는 이름을 통해 학생들에게 돈을 받았으며 또한 필수활동인 체육을 하는데도 돈을 내야했다. 또한 제복을 구매하는 비용과 식비, 교재 비용도 별도로 지출해야 했다. 국립중앙대학 학생교비표 (學生繳費表) 중화민국 30년 (1941) * 환불불가 ◎ 신입생때만 학비 : 면제 기숙사비 : 면제 (단, 특수생의 경우 20위안을 지불) 교재-실험비 : 문과대학 / 법학-상과대학 / 교육대학 : 15위안* 이공대학 / 농과대학 / 의과대학 / 약학대학 / 사범전수교육과정 / 농업전수교육과정 : 20위안* (단, 사범전수교육과정의 경우 국비로 10위안을 지원) 강의비 : 5위안* 체육비 : 2위안* 기타 비용 (잡비) : 2위안 제복비 : 남학생 - 100 위안 ◎ (하복 2벌, 동복 1벌세트) 여학생 - 40위안 ◎ (하복 2벌, 동복 2벌세트) 식비 : 65위안 (한학기, 3끼를 다먹을때) (한 달의 식비를 36위안으로 계산, 그중에서 23위안을 학교측에서 지원, 따라서 학생은 나머지 13위안만을 지불하면 되는 구조) 35위안 (한학기, 3끼중 절반만 먹을때) (한달의 식비를 18위안으로 계산, 그중 11위안을 학교측에서 지원, 따라서 학생은 나머지 7위안만을 지불하면 되는 구조) (단, 위와 같은 학교측의 지원은 기숙사생에게만 제공, 통학생, 특수생에게는 학교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며 이 경우 식비는 180위안 / 90위안) 표에서는 일회성이긴 하나 가장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제복비가 눈에 띈다. 그렇다면 당대 100위안의 제복 가격은 어느정도였을까. 국민정부의 기관지 『中報』 에서는 국립중앙대학이 설립되기 직전이었던 1940년 9월 28일의 당시 난징국민정부 지역의 물가가 쌀 한가마니가 50위안 가량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대략 쌀 두마니 정도의 가격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으로 치자면 약 34만원 정도의 금액이 되는 것으로 (2024), 하복 2벌과 동복 1벌을 제공하는 구성이니 만큼 금액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금액은 아니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용은 당시 난징 지엔캉로 (建康路,건강로) 에 있는 농상은행(農商銀行)을 통해 납부하게 했다. 1940년 개교 당시에는 구 법폐도 취급했으나, 1941년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된 이후로는 저비권만 취급하게 되었다. (저비권과 중앙저비은행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 ) (5) 국립중앙대학의 장학금제도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은 많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난 장학금 제도를 내세웠다. 성적 장학금의 경우도 기준을 엄격하지 않게 하여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그 외에도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등 많은 장학금 제도가 존재했다 . 국립중앙대학 장학금제도 (1940) (1) 성적장학금 갑종장학금 (甲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갑(甲)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을종장학금 (乙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을(乙)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병종장학금 (丙種奬學金)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병(丙) 등급 이상, 품행이 우수한자 (2) 기타장학금 청한학생보조금 (淸寒學生補助金) 최근 2학기의 전체 성적 (체육, 군사훈련을 포함) 이 병(丙) 등급 이상, 대학조사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지원이 필요하다 인정한 자 등급에 따라 월 20위안 / 15위안 / 10위안을 지원 독서회 장학금 (讀書會奬學金) 학생들의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방학기간에 독서대회를 개최, 성적이 우수한 이에게 장학금을 지급 1위 : 50위안 / 2위 : 20위안 / 3위 : 10위안 / 4위 : 5위안 근로장학금 (工讀生級工腋生奬學金) 교내에서 근로활동을 하거나, 대학생활을 영위하며 노동활동을 하는 자 10위안 / 5위안을 지급 그렇다면 당시 이러한 장학금 혜택을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얼마나 누릴 수 있었을까? 『國立中央大學要覽』 에서는 이러한 장학금을 받은 이들의 통계까지 모두 서술해 두었다. 성적장학금을 받은 학생 (갑,을,병 모두포함) : 120명 청한학생보조금을 받은 학생 : 50명 근로장학금을 받은 학생 : 24명 독서회장학금을 받은학생 (모든 등급 포함) : 64명 장학금을 받은 학생 (단순합계, 이중지급제외) = 258명 (전체 학생의 약 39%) 이중으로 장학금을 수령한 이들을 제외하지 않은 단순 합계상으로는 전체 학상의 약 4할 가량이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6) 국립중앙대학의 기숙사 국립중앙대학의 남자기숙사 (위) , 여자기숙사 (아래) . 여성 학생들이 남성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던 만큼 기숙사의 크기도 더 작았다. 국립중앙대학의 경우,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이 모집과정에서 기숙사생의 기숙사비를 전액 부담하기로 한 만큼, 기숙사 학생들은 기숙사 비를 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국립중앙대학은 기숙사에서의 생활을 원칙으로 하여 통학의 경우를 특별 사례로 취급하였으며, 통학도 학부모가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때문에 통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이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의 기숙사의 경우, 남녀기숙사가 분리되어있었고 남녀간의 기숙사왕래는 당연히 금지되었다. 기숙사생은 대학이 임의로 정해주는 자리를 사용해야 했으며 (특정 사유가 없으면 변경할 수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짐 검사등 여러 절차가 이루어졌다. 국립중앙대학측에서는 기숙사생에게 이불 하나를 지급하였는데, 기숙사 규정에 따라 이 이불은 바르게 정리되어야 했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했다. (기숙사 규정 2조의 내용) 이 뿐만 아니라 위생과 관련된 규정이 엄격하여 기숙사 학생들은 규정된 시간에 목욕과 세면을 실시해야 했다. 기숙사생은 기숙사생임을 증명하는 기숙증(寄宿證) 을 제시해야만 기숙사 건물에 출입할 수 있었으며, 기숙사 건물에는 허락되지 않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외부인의 접견을 허락받는다 할지라도 접견실에서만 만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접견실에서의 면회또한 시간을 제한받았다. 또한 기숙사생은 휴가를 비롯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외박할 수 없었다. 기숙사생은 규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취침하고 정해진 시간에 기상해야 했으며 기숙사 내부의 물품 반입도 자유롭지 않아 기숙사에는 고가의 귀중품을 들고 갈 수 없었다. (만약 들고온 경우 공동 창고에 보관해야만 했고 이 또한 함부로 가져가거나 사용할 수 없었다.) 기숙사 규정에서는 특이한 항목들을 볼 수 있었는데, 자기전에 서로 담소를 나누지말것 (8조), 소등 후에 함부로 촛불을 켜지 말것 (9조), 기숙사 내 조리 활동을 하지 말것 (13조), 겨울 시기에 기숙사 내부에 난방장치를 가져오지 말것 (14조) 와 같은 조항이 있었다. 13조와 14조의 내용은 화재위험등 여러 사유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8조와 9조와 같은 내용도 규정으로 명시 해둔 것은 특이한 점이다. (6) 국립중앙대학의 시설 국립중앙대학은 초기에 국립정치대학의 시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만큼, 많은 시설들을 초기 부터 운영할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기숙사는 물론, 여러 시설이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이었던 眞知力行에서 글자를 따온 진지당 (眞知堂), 역행당 (力行堂) 두 건물에서 주요 수업이 치뤄졌다. 도서관 건물의 모습과 안의 서적들. 1941년 기준으로 도서관에는 3만권이 넘는 서적이 있었고 일어, 영어 서적을 비롯한 외국서적들도 많이 보유 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입구에는 큰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민국 30년 (1941) 기준 국립중앙대학 도서관 보유목록 총 서적 : 31,611권 (중국어 서적 26,225권, 일본어 서적 1,047권, 영어 서적 4,321권, 기타 언어서적 18권) 분류 : 철학 803권 / 종교 204권 / 사회과학 8,700권 / 정치학 881권 / 자연과학 1,771권 / 응용과학 1,952권 / 미술 101권 / 언어학 2,710권 / 역사 3,189권 / 소설 2,012권 도서관 규정인 圖書館學生借書規則에 따르면 학생은 한번에 2권씩 책을 대출할 수 있으며, 기간은 14일로 하였다. (만약 대기자가 없다면 1회에 한하여 연장대출할 수 있었다. 또한 책을 분실시 책값의 8배를 배상해야한다는 내용과 도서관에서 떠들면 안된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국립중앙대학에는 이공대학 & 농과대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특히 농과대학의 경우 잡곡등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실험 농장이 존재했으며 목축과정을 위해 소, 오리, 돼지등 가축들을 실험적으로 기르는 축사도 존재했다. 국립중앙대학은 또한 별도의 의료시설을 갖추고 일본인 의사가 진료를 하게 하여 학생들의 건강을 책임지게 했다. 이공대학생들과 화학과 학생들이 실험을 하던 실험실. 토목공정과 학생들이 실습을 하던 공간. 농과대학 농업전수교육과정 목축과정 학생들이 실습하던 축사. 국립중앙대학 안에는 부설 학교도 존재했다. 1942년 발간된 『國立中央大學一覽』 에서는 국립중앙대학 내부에 부설소학교, 부설중학교가 존재했으며 (정확히는 초등부, 중등부로 분류하여 같은 건물에서 함께 교육했다. ) 이곳에서 사범교육과정과 교육대학 학생들이 실습과정을 겪고, 대학 직원들의 자녀를 맡길 수 있게 하였다. 국립중앙대학에서는 이들 학교에 대해 국립중앙대학 부속실험학교 (國立中央大學 附屬實驗學校) 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국립중앙대학 부속실험학교의 소학생들. 국립중앙대학의 발전과 성장 이런 많은 요소들을 담은 국립중앙대학은 1940년 9월 30일 정식으로 수입을 시작했고, 수업의 개시와 동시에 교장이었던 판중윈은 교육대학 및 경양대학의 학장을 겸하게 된다. 10월 10일, 오전 8시 국립중앙대학의 대예당 건물에서는 쌍십절 기념 행사가 치뤄졌고, 동시에 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중대주간 (中大週刊) 의 발행을 발표하였다. 또한 17일에는 대학 복교 이후 처음으로 외부인의 특별강의가 진행되었다. 강의자로 나선것은 당시 상공부 장관이었던 메이쓰핑 (梅思平) 이었다. 이외에도 일본 규슈제국대학의 이마나카 자모 (今中次麼) 교수를 초청, 중국 민족운동과 그 방책 (中國民族運動及其方策) 과 같은 강의를 하며 그외에도 선전부의 린바이셩, 만주국 만주건국대학의 중산 교수등 여러 여러 외부 강사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이렇게 특강을 진행한 이는 국립중앙대학의 복교 직전에 안후이성으로 발령나 국립중앙대학의 부총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던 첸웨이충도 있었다. (1940년 11월 18일) 국립중앙대학은 난징에 위치해있었던 만큼, 주요 기자재들은 모두 상하이에서 반입되었다. 상하이를 통해 일본, 미국, 독일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기자재들은 국립중앙대학으로 옮겨졌다. 특히 일본을 통해 의학 기자재들이 많이 구매되었다. 일본측에서는 국립중앙대학의 양성을 위해 많은 지원을 가했다. 위에서 보았던 의료 기자재들만 하더라도 일본측의 구매에 있어서 지원을 가했고 그외에도 여러 물자를 지원해왔다. 주중화민국 일본대사관도 국립중앙대학측에 자료를 지원하거나 학생들에게 일본 문화 & 자연과 관련된 영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도 서적의 기부가 이어졌다. 물론 이런 서적들의 기부는 일본어 사전과 같은 일본어 교육과 관련된 도서이거나, 농업등 기초 산업과 관련된 기술서적들이 주를 이뤘다. 11월 28일에는 교내에서 여자농구팀이 발족되었고 이후 그외에도 축구, 크로스컨트리 등 여러 대학내 스포츠팀들이 결성되었다. (1941년 말에는 교직원 체육회도 생긴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회 영화상영을 실시했고, 1941년 1월 1일 새해에는 대학측에서 음악회를 마련, 학생들에게 무도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41년 3월 12일에는 국부손문서세기념일을 기념하여 학교가 휴교했다. 하지만 기숙사 생들은 학교에 나무를 심는 등의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바로 다음날인 3월 13일에는 첫 대학 체육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체육대회의 개최를 위하여 왕징웨이는 직접 1,000위안의 금액을 기부하였다. 이날 체육대회에서는 축구, 농구, 테니스 등 7개 종목의 경기가 개최되었다. 1941년 3월 30일, 국립중앙대학은 난징국민정부의 환도 1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했다. 학생들은 모두 왕징웨이의 연설을 경청해야 했고 환도식전과 관련된 강연을 들어야 했다. 또한 같은날 진행된 잡지사 화문오사카마이니치 (華文大阪每日) 이 국민대회당에서 진행한 동아보위의 노래 (保衛東亞之歌) 후보곡들의 경연을 관람했다. 1941년 3월 30일 진행된 동아보위의 노래 (保衛東亞之歌) 경연. 왕징웨이도 본 경연을 직접 참관했다. (동아보위의 노래 응모전에서 최종 채택된 동아민족진행곡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1941년 6월 교감과 비서실장직을 폐지하고 교무, 훈육, 비서, 총무 등 4개 부서를 교장의 직속으로 두었고 1941년 7월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난징시 보건소 건물을 다시 재건, 국립중앙대학에 신생당 (新生堂)으로 편입시켜 대학 시설의 확충을 꾀하는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2년에는, 늘어난 재학생과 늘어난 학생수요에 맞추어 교수진의 수를 늘렸다. 1940년 복교당시 72명이었던 교수 & 강사진을 두배가 넘는 149명으로 늘렸고 이렇게 새롭게 합류한 교원진에는 일본인 15명 , 독일인 교수 1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당대 유명작가인 저우쭈워런 (周作人)이 국립중앙대학을 방문, '중국 문학상 2가지 사상 (中國文學上的兩種思想)' 이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학생들의 출신이 더욱 다양해졌다. 1940년 복교 당시 2명에 불과했던 조선인 학생은 7명으로 크게 증가했고, 일본, 대만, 만주국 등 학생들의 출신이 다양해졌다. 1942년 8월, 국립중앙대학은 늘어나는 학생 수요와 부족한 시설 수요를 대체하기 위해 기존의 국립정치대학 부지에서 시설을 이전, 난징의 진링대학 부지로 이전하게 된다. (기존의 국립정치대학 부지중 일부는 이공대학, 농과대학 등의 실험실 , 실습실로 유지) 아쉽게도 국립중앙대학이 진링대학 부지로 옮긴 이후에는 국립중앙대학에 대한 사진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국립정치대학 부지 시절 국립중앙대학에서 발행한 여러 자료에서 학내 시설 사진을 구할 수 있으나 진링대학 부지 시절에는 국립중앙대학서 발행한 자료의 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화문오사카마이니치 (華文大阪每日) 의 1942년 제8권 6기에 서술된 새로운 국립중앙대학의 모습. 해당 건물은 앞에서 보았던 국립중앙대학의 교훈에서 비롯된 건물중 하나인 진지당(眞知堂)의 모습이다.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국립중앙대학복교제1기졸업기념간) 에 서술되어 있는 진링대학 부지로 옮긴 이후의 대학 대예당과 기숙사의 모습. 국립중앙대학의 한계 난징국민정부는 국립중앙대학이 국민정부의 최고 대학중 하나로 작동했던 만큼, 자신의 정권에 이 국립중앙대학을 다시 세워 충칭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대학을 대체할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난징국민정부가 '국민정부'를 내세웠지만 충칭국민정부보다 완전하지 못했던 것처럼, 난징에 새롭게 '복교' 한 국립중앙대학 역시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다.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의 국립중앙대학보다 여러면에 있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1944년의 기준으로,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3,592명의 재학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94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940명이라는 수치는 충칭 국립중앙대학의 1학년 수 (1,248명) 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으로 이전했다는 한계점 속에서도 충칭국민정부 지역의 최대 - 최고 대학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이 충칭을 따라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개설되어 있는 학과와 전공, 수업의 수도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충칭보다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충칭의 국립중앙대학은 문과 뿐만 아니라 기술, 과학 분야에서도 능통했지만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서 다루는 기술과학 분야는 기초적인 부분에 그쳤고 다루는 부분도 기술과학의 발전보다는 경제성장 기여라는 목적이 더욱 강했다. 난징국민정부가 제대로된 국민정부로 인정받지 못해 지역의 주민들이 완전한 참여를 가하지 않았던 것처럼, 난징국민정부 지역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국립중앙대학에 완전한 참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군사훈련 과목의 존재, 일본어 수업을 필수로 하였던 난징 국립중앙대학의 모습들은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도, 대학에 있는 학생들도 국립중앙대학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요소로 작동했다. 때문에 매년 10~15%의 학생들이 난징국립중앙대학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내 구성원의 경우에도 잦은 교체가 있었다. 의과대학 학과장의 경우 대학이 운영되는 5년동안 10번이나 바뀌었고 교육대학의 경우에도 7명이나 교체되는 등 잦은 인사교체가 있었다. 또한 '국립중앙대학' 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진작 이전 국립중앙대학의 부지를 사용하지 않고 국립정치대학-진링대학의 옛부지를 사용하며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던 국립중앙대학은 "대학 이름도, 대학자리도 훔쳐 대학 행세를 하는 것뿐" 이라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1941년 12월 7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전쟁이 장기화, 점점 일본측에 불리해지기 시작하면서 일본 뿐만 아니라 난징국민정부를 비롯한 중국대륙 마찬가지로 자원난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자원난은 난징의 국립중앙대학도 피할 수 없게되었다. 1943년부터 기자재 등 여러부분에서 부족을 겪기 시작했고, 이는 수업의 질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동했다. 게다가 왕징웨이의 국립중앙대학은,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실패를 거뒀다. 이는 바로 자신들 난징국민정부을 지지해줄, 화평운동에 참가하고 화평운동을 이끌어나갈 지식인 청년들을 양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는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자신의 난징국민정부를 지지해주길 바랬고 대학교육을 통해 이러한 청년들을 양성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왕징웨이 정권의 한계와 진실을 잘 알고 있었던 학생들은 앞에서 보았듯 대학 및 교육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해왔고 (일본어 필수화, 군사훈련 필수화 등) 오히려 대학에서 이탈하여 충칭, 혹은 연안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화평반공건국의 청년들을 양성하겠다던 왕징웨이의 목표와 달리, 학생들은 오히려 충칭, 혹은 공산당에 더욱 가까워지고 것이다. 이들은 대학 도서관에 걸려있는 왕징웨이의 초상화에 잉크로 먹칠을 하거나, 난징국민정부에서 만든 화평운동 노래를 바꾸어 부르는 등 왕징웨이 정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인 '동아민족진행곡' .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이노래의 탄생을 직접 지켜본 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이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며 일본과 왕징웨이에 저항했다. 기록에 따르면, 국립중앙대학에서 동아민족진행곡이 울려퍼지자, 한 학생이 이 노래의 가사를 大地湧起 和平 的呼聲 대지에서 화평 의 소리가 들려오니 에서 大地湧起 抗日 的呼聲 대지에서 항일 의 소리가 들려오니 로 바꿔부르기 시작하며 이후의 노래가사들도 항일, 항전에 어울리는 가사로 바꾸기 시작하니 다른 학생들도 이에 동참하며 왕징웨이의 노래로 왕징웨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것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노래들을 더 알고싶다면 여기를 클릭 : ) 또한 학생들은 비밀리에 항일 조직을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왕징웨이가 그토록 싫어했던 공산당과 점점 밀접해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학생들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학교 내에는 비밀리에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공산당과 연관된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대학 학생들과 청년구국사 (青年救國社, 공과대학생들 중심) , 민사 (民社, 교육대학생, 문과대학생들 중심, 이조직은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단결구국사 (團結救國社) 등의 조직을 구성, 중국공산당측과 제휴하며 항일운동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국립중앙대학의 교칙에 따르면, 학생들이 대학측의 허락없이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금지조항에도 굴하지 않고 비밀리에 조직을 구성,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공산당과 제휴하여 충칭의 항전방송 내용을 비밀리에 전파하거나, 항전과 관련된 인쇄물을 발행, 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여러 행동을 게시했다. 난징국민정부와 국립중앙대학측도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단결구국사를 이끌던 주웨이치안 (朱為捐, 공과대학의 여학생) 를 검거, 퇴학조치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비밀항일조직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다. 민사의 경우에는 다른 방향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했는데,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은 허가된 학생조직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내에 존재하는 조직들은 대부분은 정치적 색채를 띄지 않는, 스포츠조직과 같은 조직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선전부 장관 린바이셩의 주도로 학교내에서 난징국민정부의 노선을 지지하는 학생상호회 (學生互助會), 건자운동실재회 (乾字運動實踐會) 등이 구성되었는데, 민사는 이들의 지도부를 장악하여, 합법조직이었던 이들 조직의 이름을 빌려 합법의 틀에서 운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이들 조직의 이름을 빌려 잡지를 발행하여 학생들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게 했으며, 조직의 이름을 빌린 독서회등을 개최, 진보적인 학자들의 책을 읽게 했다. 교내 직원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규제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이들은 "우리는 학교의 합법조직이다" , "우리가 다루는 이론은 교회에서 배운것이다" 와 같은 말로 매번 직원들의 규제움직임을 피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 & 강사를 비롯한 교원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국립중앙대학에 참가한 교원진중에는 소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국립중앙대학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난징국민정부가 성공할 수 없다 보고 중국공산당, 혹은 충칭의 국민정부와 연락하면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대학의 조선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보았듯 국립중앙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도 존재했으며, 1943년 시점에서는 그 숫자가 7명에 달했다. 이들 조선인 유학생들은 송지영 (宋志泳, 당시에는 야마모토 시에이 山本志泳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을 중심으로 한족동맹 (韓族同盟)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충칭당국과 제휴하며 국립중앙대학 내 항일운동을 하는 중국학생, 충칭당국과의 연조로 항일운동을 하고자하는 조선인들을 임시정부지역으로 후송하거나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점령지 내의 애국청년들을 규합하는 행동을 하는등 항일 운동을 이어나간다. 송지영 (宋志泳, 1916~1989) 그는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문학과) 그리고 그는 대학의 다른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한족동맹이라는 비밀항일조직을 결성, 항일운동을 이어나간다. 판중윈 총장 퇴진운동 이렇게 학생들 사이에서 진보주의, 항일운동이 점차 퍼지고 있는 사이, 1943년 5월에는 이들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이었던 판중윈이 업자와 짜고 학생들의 식비를 횡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국립중앙대학의 학생이었던 왕스홍 (王士弘)은 전후 자신의 글에서 "1943년은 고된 해였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세 끼 식사에 의존하는데, 이 식사가 학교 총장과 급식업체의 착취를 거쳐 식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학생들은 거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에 학생들의 불만은 커졌고, 청년구국사가 주축이 되어 1943년 5월 31일 새벽2시 학교식당에,거의 1,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였고, 이들은 난징 신화로의 왕징웨이 공관으로 향했다. (왕스홍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부터 가난했던 지방 학생들의 불만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난징의 왕징웨이 공관, (現 중국대륙 난징시 구러우구 신화로 38, 당시주소로 난징특별시 제4구 신화로 34호 ) 이 건물은 왕징웨이의 처남이었던 추민이 (褚民誼)가 기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우리는 부패한 교장은 필요없다! (“我們不要貪污分子當校長!") 라 구호를 외치며 왕징웨이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요구사항으로 부패한 판중윈 총장의 퇴진과 부실해진 식사의 개선등을 내걸었다. 학생들은 본 과정에 '탄원'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얼핏 잘못 받아드려져 유혈사태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이들은 사전에 탄원서도 작성하였고, 시위 과정도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했다. 또한 혹시 모를 유혈사태가 생길것을 우려하여 일본 국적의 한 학생을 통해 일본군 헌병대와 대화하여 헌병대의 동향을 파악하게 하고, 기숙사 주임도 학생들에게 불상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측에 연락을 가하여 본 시위의 목적이 건전한 것에 있음을 주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위대가 일본군 헌병대와 소통하게 했던 일본 국적의 한 학생은 바로 조선인이었다. ) 잠을 자던 왕징웨이는 깜짝 놀아 이 학생시위대를 직접 맞이, 학생들과 교섭할 것을 약속했고 학생시위대는 교섭 요구가 이루어지자 질서있게 자진 해산했다. 국립중앙대학은 그날 오후 3일간의 임시휴강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임시 교무위원회를 구성, 6월 4일 난징국민정부측의 협상자로 나온 당시 교육부 부장이었던 리셩우 (李聖五) 와 린바이셩과 협상을 개시, 총장 판중윈을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할 것이며, 부실했던 식사도 개선하겠다는 합의를 이뤄내는데 성공한다. 합의가 이루어진 6월 4일 정오를 기점으로 수업은 다시 재개되었고, 다음날 임시 교무위원회등 학생들이 만든 임시기구가 모두 해체를 선언하며 학교는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난징국민정부는 판중윈을 해임하고, 잠시 리셩우가 임시로 총장을 겸하게 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가 여름이 다가오고 시험기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후에 당시 문과대학 학과장이었던 천주 (陳柱)를 총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방식은 난징국민정부측이 '해임' 하는 방식이 아닌, 판중윈 스스로가 '사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판중윈 이후 임시로 국립중앙대학의 총장직을 맡은 리셩우 당시 교육부 부장. 1943년 6월 5일자 신중국보 (新中國報)의 국립중앙대학 총장 판중윈이 '사임' 한다는 기사.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왕징웨이측이 학생들의 반발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이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타협과정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왕징웨이는 국립중앙대학의 '교풍 (校風)'이 잘못되었다 비판했고,학생들의 새벽 시위 이후 난징국민정부는 바로 공무원들을 보내 학생들의 행동을 훈계하였고 모든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자신이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법을 준수하고, 영도자 (왕징웨이)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회개서' 에 서명해야 했다. 또한 난징국민정부와 국립중앙대학은 판중윈의 해임이후 바로 교내의 학생단체들에 대해 해산을 명했고, 교내에서 비밀단체를 조직한 이들과 본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를 처벌하려 하는등 오히려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때문에 국립중앙대학에 재학하며 한족동맹과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있었던 조선인 학생들은 걱정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국립중앙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입대를 포섭하기 위해 파견된 김병호 (金柄豪, 현지에서는 고중민 高仲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 와 연락하며 임시정부에 협력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병호는 송지영에게 1943년 6월 한국독립당 난징-상하이 일대의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송지영은 이를 승낙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조선인 학생은 결국 일본에 송지영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 일부가 항일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임정과도 연관되었다는 밀고를 해버렸고 그 결과 송지영과 김병호는 모두 일본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이렇게 조선인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일본에 밝혀지면서 국립중앙대학 내의 모든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에 검거,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과정에서 일본과 협력을 선택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학생운동과 난징국민정부의 임시동맹 - 청해운동 ( 淸毒運動) 이러한 학생운동 탄압의 분위기는 1944년 초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1944년부터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국립중앙운동의 학생운동이 난징국민정부와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바로 아편 이었다. 당시 난징국민정부에서는 아편의 재배 & 판매 & 사용이 자유로웠다. 왕징웨이는 정권 초기 정부 재정수입을 위해 아편의 유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후기에는 이에 통제해야 한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왕징웨이가 아편 통제로 돌아서게 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난징국민정부 권역내에서 아편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그 수익을 난징국민정부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진 만큼,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아편유통권을 일본에서 가져와 아편을 자신이 직접 통제함으로서 그 수익을 얻어 부족한 정부재정을 매꾸려 했다. 왕징웨이가 기존의 국민정부에서 실시되고 있던 아편통제정책 (1936) 을 난징국민정부에서 실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편수입을 극대화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하여 아편의 유통권을 장악, 아편의 수익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고, 때문에 왕징웨이는 생각을 바꾸어 오히려 아편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권이 아편의 유통권을 장악하기를 바랬다. 또한 민중들의 지배를 얻기 위해서도, '아편을 자유로이 허용하고 있는 정권' 이라는 이미지는 아편전쟁을 겪었던 중국 민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져올 수 없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이 아편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왕징웨이가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되었던 난징조약 체결 100주년을 기념해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를 개최하고 아편의 해악을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차원이었다.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당시 난징국민정부의 린바이셩은, 이러한 아편 통제권을 일본에서부터 가져올 방법을 생각해낸다. 이는 바로 민중들의 '아편 반대' 여론을 부추겨 일본으로 하여금 아편의 통제권을 난징국민정부로 이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편 반대' 여론을 어떻게 부추길 것인가? 바로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도 함께했다. 당대의 아편 유통 상황 구조를 보면, 아편전쟁의 발발에서 100년이 넘게 지나며 아편의 해악이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계적으로 아편을 반대하는 여론도 커지게 되면서, 아편은 세계적으로 규제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세계 각국이 정부차원에서 점점 규제를 하고 있었고, 중국도 장제스의 국민정부 시기에는 1935년의 6개년 아편 금지 계획등 여러차례 아편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쳤다. 유신정부시기에도 유신정부는 아편의 판매를 신규 사용자에게는 제한하고 기존에 아편 사용자로 등록된 사람들에게만 판매하는 등 제한 정책이 점차 펼쳐지며 아편의 사용자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였다. 학생들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편이 인민에게 주는 해악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일반 민중들보다는 아편과는 거리가 더 멀었으며, 오히려 아편을 강력하게 통제해야한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인민의 해악인 아편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학생들과 민중들 '아편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정권의 지지와 정통성을 세우고 일본으로부터 아편 유통권을 받기를 원하는' 난징국민정부 는 대립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린바이셩은 학생들을 '동원'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아편 반대집회를 개최하게끔 하려 했다. 당시 난징국민정부서 신국민운동을 통해 중국청소년단 (보이스카우트 개념) 등 청소년단체를 지도하고 있었던 린바이셩은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에서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밝히며, 대학생들도 본 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이 아편 반대시위는 '아편 반대' 여론을 확대하기 위한 왕징웨이측의 고의적으로 일으킨 관변 시위의 모습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신국민운동과 이를 통해 탄생한 중국청소년단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이에 청년구국사를 비롯한 지하 학생조직들은 난징국민정부가 자신들의 오랜 주장인 아편 반대를 주장하는 것을 알고, 이 기회를 오히려 아편을 몰아내고 아편이라는 존재로 일본과 묶여있는, 아편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그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왕징웨이 정권의 모순성을 동시에 비판할 기회로 삼아 린바이셩이 시위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를 하기도 전에 아편 반대시위를 자진하여 개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3년 12월 7일, 이들은 린바이셩의 주장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편 반대 구호를 외치며 거리의 아편 판매상들을 공격, 아편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모습에 아편이라면 질머리가 나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린바이셩을 비롯한 난징국민정부는 시위를 규탄하기는 커녕 오히려 시위의 진행을 내버려 두며 암묵적으로 이러한 학생들의 자진적인 시위행동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시위에는 국립중앙대학의 공과대학 2학년이었던 한 학생도 참가했는데, 그 학생의 이름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장쩌민 (江澤民) 이었다. 중국대륙 제5대 주석이었던 장쩌민은 1943년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였다. 장쩌민은 당시 입학한 학생중 최연소였으며 장쩌민은 여러 동아리 활동과 문예활동에 참가했다. 장쩌민은 중국대륙 성립후 1998년 자신이 쓴 글 '憶厲恩虞同志' 에서 이날의 시위에 참가한 경험을 서술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12월 8일에는 난징 내 여러 대학의 학생조직들이 연합을 구성,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난징 국민대회당에 모인 후 이 과정에서 난징 민중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국민대회당 앞에서 난징 시내의 아편상인들로 부터 압수한 아편을 모아 불태우고 동시에 아편 흡입에 사용되는 담뱃대등 도구들도 같이 불태웠다. 일본 헌병대가 이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난징국민정부가 이 시위를 옹호하고 있는 이상 일본은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학생들은 아편 반대시위에서 일본 헌병대가 시위를 방해 & 해산시키려 하면 린바이셩의 이름을 내세워 헌병대를 철수 시켰고, 학생이 일본에 의해 체포되어도 린바이셩의 이름을 내세워 석방을 유도했다. 학생들의 아편반대 시위대는 공개적으로 항일구호를 내세우기 보다는 '아편 반대' 라는 구호에 집중하여 "아편을 피우면 일본, 왕징웨이가 이득을 본다" 라는 메시지를 민중들에게 완곡하게 전달하는데 노력했다. 이후 청년구국사는 난징에서 수도청년청독총회 (首都學生清毒總會) 를 구성했고 아편 반대운동은 이후 난징뿐만 아니라 상하이, 광저우, 베이징등 난징국민정부 구역 일대로 확산되었다. 국립중앙대학의 학생들은 차오위청(曹玉成) 이라는 난징의 아편왕을 잡아 난징의 신자커우 거리의 손중산 동상앞에 묶어두고 아편의 해악성을 알리고 이러한 아편을 판매한 차오위청의 악행을 이야기하며 난징국민정부로 하여금 차오위청을 처형하라는 모습도 보였다. 汪主席是復興中國的最高領袖 (왕주석은 중국부흥의 최고지도자시다!) 라는 플랜카드가 걸린 난징 시내의 신자커우 (新街口)의 손중산 동상. 이 동상은 중국대륙의 성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난징국민정부가 의도하지 않았던 열기를 가졌던 아편 반대 운동은 1944년 3월 난징국민정부의 아편 통제권을 인정하고 아편 유통권을 넘기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양보는 일본이 이러한 아편반대시위가 난징국민정부의 반일 시위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이러한 중국대륙 내에서의 아편유통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들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일본에게는 이 아편유통권 말고도 수익을 얻을 수단이 많았던 만큼, 아편 유통권을 포기해도 큰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일본은 난징국민정부쪽으로 아편 유통권을 이양하면서 아편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몽강자치연합정부 (명목상으로는 난징국민정부의 몽강자치구) 를 위해서도 쓰여야함을 명시했다. 이렇게 관변 시위까지 조직하며 아편 유통권을 획득한 왕징웨이는 이후 장제스 국민정부시기의 아편 통제정책을 다시 제정하는 등 아편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결국에는 다시 아편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민중들의 비난은 '아편을 파는 일본' 에서 '아편을 파는 왕징웨이' 로 구호가 바뀌었을 뿐, 아편 문제는 난징국민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1944년 왕징웨이의 아편통제정책은 여기를 클릭 : ) 국립중앙대학의 결말 임시총장이었던 리셩우를 이어 2대 총장으로 정식으로 선출된 천주 (陳柱).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국립중앙대학이었지만, 국립중앙대학의 운영은 지속되었다. 1944년에는 231명의 첫 졸업자를 배출했으며 학생의 수도 940명까지 증가하게 된다. (아쉽게도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1943년을 거치며 모두 체포됨에 따라 조선인 졸업자는 1명도 없었다.) 국립중앙대학 1기 졸업자 통계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1944) 문과대학 : 28명 (중국문학과 12명 / 역사학과 8명 / 외국어문학과 8명) 법학-상과대학 : 81명 (정경학과 28명 / 법률과 26명 / 상학과 27명) 교육대학 : 30명 (상세 구분되어 있지 않음) 이공대학 : 35명 (토목공정과 28명 / 화학과 7명) 농과대학 : 31명 (농학과 13명 / 생물학과 18명) 농업전수교육과정 : 13명 사범전수교육과정 : 13명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고 자원이 부족해지며 대학운영은 더더욱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교육의 질 또한 함께 떨어지는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1944년 4월에는 취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천주 총장이 내려오고 천창주 (陳昌祖) 가 총장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립중앙대학은 총장의 경우에도 4년동안 4번이나 교체를 겪게 되었다. (임시였던 리셩우를 포함하여) 천주 (陳柱)를 이어 3대 총장이 된 천창주 (陳昌祖) . 그는 국립중앙대학의 마지막 총장이었다. 난징국민정부의 말기였던 1945년 여름, 국립중앙대학은 238명의 제2회 졸업자를 배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대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조선인 학생 정영호 (의과대학) 가 졸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를 낸지 얼마되지 않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난징국민정부도 역시 해체가 선언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충칭의 국민정부가 다시 난징국민정부 지역을 지배하고 난징국민정부 시기 설립된 대학들을 모두 장악하면서 국립중앙대학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난징국민정부의 해체이후도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은 잠시 존속했으나, 1945년 9월, 쑹즈원 (宋子文) 내각은 교육부 부장 주자화 (朱家華)를 통해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기존 난징국민정부 점령지에 존재했던 대학들에 대해 '가짜 (僞)' 라는 명칭을 붙이고 해체를 명령하면서 국립중앙대학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하여 난징국민정부에서 만든 대학에 남아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국민정부는 '윤함구전과이상학교학생 급졸업생견심판법 (淪陷區專科以上學校學生及畢業生甄審辦法)' 을 발표하여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기존 난징국민정부 시기 형성된 대학에 다니는 재학생과 이 학교들을 졸업한 학생들로 하여금 1945년 10월, 난징과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임시로 설치되는 임시대학보습반 (臨時大學補習班) 을 통해 별도의 교육을 추가로 받고, 시험을 통하여 학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점령지 내의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국립중앙대학을 비롯한 구 점령지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반대 시위를 펼쳤다. 이 때문에 국민정부는 정책을 바꾸어 이들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루게 한다는 계획을 바꾸어 기존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생긴 대학을 '임시대학' 으로 바꾸어 그대로 학생들을 수용하게 했다. 이는 기존의 , 충칭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이전한 본래의 대학들이 아직까지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재학생, 졸업생들의 소속문제를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해결하게 했다. 난징국민정부 시기 설립된 대학 (국민정부의 분류에 의하면 '가짜' 대학들) → 임시대학으로 변환 (예: 국립중앙대학[난징] → 난징임시대학 ) -> 학생들은 기존의 대학시설 (난징등의) 에서 계속 대학과정을 진행 중일전쟁으로 타 지역으로 이전한 대학들 (본래의 대학들) → 정부가 안정되기 전까지 이전한 위치를 유지 (충칭 등) → 학생들은 기존의 (충칭등의) 대학시설에서 계속 대학과정을 진행 정부가 안정되어 기존의 대학이 본래의 위치로 '복교'할시 → 임시대학은 해산, 임시대학 졸업자 & 기존 졸업자들은 본래 대학의 학위 수여처리 (예 : 난징국민정부시기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 학생이어도 임시대학시기 졸업요건을 충족했다면 본래 국립중앙대학의 졸업장을 수여 / 난징국민정부시기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을 졸업했다면 본래 국립중앙대학의 학위를 받은 것으로 인정) → 임시대학 재학생들은 학과, 환경들은 고려하여 임시대학 해산후 주변 대학으로 분산 (예 :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생은 국립중앙대학, 교통대학 등으로 분산) 국립중앙대학은 '난징임시대학 (南京臨時大學)' 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문과대학, 법학-상과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이공대학 1~2학년 등 대부분의 구 국립중앙대학 학생들은 이 새로이 바뀐 난징임시대학에 남았으나, 이공대학 3~4학년을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교사들의 부족으로 교통대학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1946년 4월 국민정부는 임시대학 제도를 폐지했고, 위와 같이 졸업자에게는 본래 학교의 학위를 인정하게 했고 재학생들은 주변의 대학으로 분산되게 함으로서 국립중앙대학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끝이 나게 된다. 이름바 '복교' 로부터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진링대학과 국립정치대학, 국립중앙대학이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며 본래 자신들의 부지를 다시 되찾게 되었고, 국립중앙대학 해체당시 대부분의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진링대학은 본래의 국립중앙대학과의 합의를 통해 부지 밑 서적은 진링대학교에 그대로 귀속시키고, 기자재들은 국립중앙대학에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난징국민정부의 국립중앙대학의 짧은 역사는 끝이 나게 되었으나, 국립중앙대학 출신들은 이후로도 학문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활동을 지속하면서 중화권을 빛내는 인재들로 성장하게 된다. [출처] (난징 국립중앙대학 자료) 國立中央大學祕書處, 「國立中央大學覆校第一屆畢業紀念刊 」, 1944. 國立中央大學祕書處, 「國立中央大學覆校第二屆畢業紀念刊 」, 1945. 國立中央大學, 「國立中央大學要覽 」, 1945. 國立中央大學, 「國立中央大學一覽」, 1942. (충칭 국립중앙대학 자료) 國立中央大學學生自治會, 「國立中央大學概況」, 1944. (그외 자료) 박강, 2003, 『중일전쟁기(1937-45) 화중점령지에서의 일본 아편정책』, 중국사연구 143, pp 241-267. 大阪每日日報, 「華文大阪每日 1942年 第8券 6期」, 1942 동아일보 1940년 4월 16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A%B5%AD%EB%A6%BD%EC%A4%91%EC%95%99%EB%8C%80%ED%95%99%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중화일보 1940년 4월 17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0.04.17 신중국보 1940년 6월 5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3.06.05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 난징대학 : https://historymuseum.nju.edu.cn/jypx/ndxs/ndxs/zydxjqqs19021949/dwzlxqdnjzydx19401945/sfragyd/index.html 국립중앙대학 정문 사진 / 장쩌민 사진 : 중문판 위키피디아 난징중앙도서관 사진 : https://www.ncl.edu.tw/content_267.html 주화인 관련정보 : http://www.chinawriter.com.cn/2013/2013-07-12/167214.html 1945년 이후 정보 : https://web.archive.org/web/20140201232823/http://sec.ncu.edu.tw/ncudhis/index_chs.php?years=4
- 대민회 (大民會, 1938~1940)
이글을 읽기전, 신민회 ( 여기를 클릭 ) 와 신국민운동 ( 여기를 클릭 ) 그리고 동아연맹운동 ( 여기를 클릭 ) 이전에 작성했던 3개의 포스트를 먼저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두 글중 특히 신민회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면 본글을 읽는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미리 적어둡니다. 擁護汪精衛先生 (왕징웨이 선생을 옹호하자) 라고 적힌 선전 문구벽화. 선전문구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야기해보려는 것은 이 선전구호 위에 보이는 이슬람 문양과도 같은 이 문양에 대해서다 . 이 사진은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왕징웨이 정권' 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사진이자. 동시에 영어로 'Wang jingwei Regime (왕징웨이정권)' 이라고 검색했을때 이미지 부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구글에 검색해보자, 이미지코너에서 쉽게 이 사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옹호왕정위선생(擁護汪精衛先生)" 이라는 구호가 가지는 의미또한 대단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통해 이 사진을 접했을때 질문하게 되었던 것은, 과연 사다리 근처에 있는 문양은 무엇인가? 에 대한것이었다 .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초승달과 별 문양과 같은 문양 (물론 이러한 것이 완전하지는 않다는것, 달의 방향은 반대방향을 하고 있지만 실제 초승달과 별은 북반부에서는 반대방향이라는 것... 과 같은 정보는 일단은 무시하고) 과 너무나도 유사한 이 문양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양이 이슬람의 문양과 닮은것으로 보아 혹시 중국대륙 내에서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있었던 지역에서 이러한 親 왕징웨이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었던 것이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回族) 과 같은 이슬람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이러한 행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이 중국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왕징웨이정권과 일본의 점령지 중 회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이러한 행동을 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러한 이슬람문양과 비슷한 문양의 정체는 바로 1938년 설립된 대민회 (大民會) 라는 조직의 문양이었다. 대민회의 깃발 (재현, 글씨체와 색채도에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한다.) 대민회의 문양. (재현) 심지어 색도 튀르키예와 비슷한 붉은색을 사용하면서 더더욱 이슬람문화권의 문양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깃발의 모습을 보면 앞의 사진에서 보았던 벽화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의 벽화가 대민회측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39년 작성된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 에서는 이 문양의 의미도 설명해두어 그 으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문양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는 이슬람문화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日 (태양, 붉은 동그라미) : 하늘에 빛나는 붉은 태양을 상징, 동아를 이끄는 일본 을 상징 月 (달, 초승달) : 갈고리처럼 하늘에서 빛나는 존재로서 중화민국 유신정부 를 상징 星 (별) :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처럼 유신정부와 중국인민의 빛나는 단결 을 상징 청색 (깃발의 배경) : 천지의 광대함, 밤의 순환, 우주의 맑음을 상징하며, 중일 협력이 동아의 평화와 번영을 건설하고 평화와 번영의 땅을 영원히 수호할 수 있다는 것 을 상징 본래라면 이제 대민회라는 조직에 대해 설명해야겠으나, 조직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이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더 이어나가려고 한다. 문양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계속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혼란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대민회측에서 사용되는 문양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이를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민회에서 만든 부채, 오색기와 함께 대민회기가 그려져있다. (여기서는 문양이 반대방향으로 그려져있다.) 이와 같이 문양이 반대로 그려진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반대된 문양이 등장하게 된것인가? 처음 추측으로는 두가지버전이 혼용되었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에서 발간한 서적들을 탐색해본 결과, 이 두가지버전은 혼용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반대로 문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민회가 창설된 1938년 이래 1938년 12월 대민회출판부에서 출판한 《大民會的任務 (대민회의 임무)》 를 비롯한 대민회가 창립되었던 1938년의 잡지와 출판물에서는 지금의 튀르키예의 월성과 같은 방향의 깃발이 사용되었다. 즉, 위의 부채에 사용되었던, 현재 튀르키예를 비롯한 이슬람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우리에게 친숙한 방향의 로고가 초기의 로고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러한 경향은 1939년에 와서도 이어졌다. 대민회가 1939년 2월 출판한 《大民會宣言 (대민회선언)》과 대민회가 1939년 2월부터 자신들의 라디오강연을 정리한 《播音演講集》 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거꾸로 사용되게 되었다. 1939년 6월 30일 에 대민회에서 발행되었던《中日同文同種考(중일동문동종고)》 에서는 문양이 본래대로 사용되었던 반면,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칠칠동아민족해방2주년집, 1939.7)》 를 비롯한 1939년 7월 부터 발간되는 출판물에서 문양이 거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대민회가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39년 6월과 7월에 대민회에서 출판한 서적의 문양차이. 중일동문동종고의 "6월 30일" 이라는 발행날짜는 더더욱 7월부터 문양이 바뀌었음에 확신을 주는 자료로 적용한다. 따라서 이번글을 읽으면서 두 문양을 다루는 자료가 등장할때 문양의 방향을 기준으로 1939년 7월 전인지 후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이번글을 읽으면서 이점에 미리 파악하고 읽는다면 본글을 읽으면서 무수히 등장하는 문양을 보고 시점을 파악할수 있음은 물론 본글을 이해하는데 더더욱 도움이 생각되리라 생각해 이러한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1939년 7월 이라는 날짜를 본격적으로 이글을 시작하기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대민회의 문양변화.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좌우가 반전되었다. 그렇다면 대민회라는 조직은 어떤조직인가?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초기 빠른속도로 점령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전쟁시작으로 부터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는 등 일본은 전쟁초기 고무적인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광대한 중국대륙이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점령지를 다스리기에 중국의 막대한 인구와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게릴라들은 일본의 강압적인 군사지배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괴뢰정부를 성립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법을 구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중일전쟁으로 부터 1년이 다되어가던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본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유신정부(中華民國 維新政府) 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성격을 가장 간단하게 규정하자면, 일본이 유신정부보다 3개월정도 앞서 설립한 1937년 12월 베이징에 세웠던 중화민국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의 2호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여기 를 클릭)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화북을 지배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 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화중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중지나방면군 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두개의 괴뢰정부의 형성과정에서는 동시에 특별한 과정을 하나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신정부의 운영과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친일이면서도, 신정부를 지지할 수 있는 범대중성 조직 의 구성이었다. 일본과 그들의 협력정부는 점령지 내의 민중들로 하여금 이전의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아닌, 자신들의 새로운 단체에 지지를 가하면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베이징의 임시정부에서는 신민회 (新民會) 라는 조직이 구성되었다. 신민회는 해당 신정부에서의 "유일선전조직" 으로 활동하고 여러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일종의 국민당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일본과 임시정부의 통치를 더더욱 용이하게 하는데에 기여했다. 유신정부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것이 대민회 (大民會) 라고 할 수 있겠다. 임시정부에는 신민회가, 유신정부에는 대민회라는 비슷한 선전조직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민회에 대해서는 여기 를 클릭)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해에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선전조직 이다.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도 신민회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데, 신민회는 본래 구성과정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또한 신민회를 구성한다라는 계획이 이미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부터 일본에 의해 계획되었다. 대민회 또한 구성과정에서 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다는 점에서는 특징을 공유하지만, 형성과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대민회의 성립과정. 초창기부터 일본이 개입했던 신민회와는 조금 다른 과정을 보인다. 대민회의 뿌리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직후 상하이공동조계(상해에서 성립된 동아회(東亞會) 라는 조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아회가 형성된 시점은 중일전쟁 직후로, 상하이공동조계라는 국민정부와는 분리된 환경이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아회를 만든 인물들은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친일가문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도움속에서' 동아회를 만들 수 있었다. 전쟁 직후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이후 화평파라고 불리는 인물들도 이때까지는 완전한 친일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동아회의 경우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이런 완전한 친일성향을 보이고 있다는데서 그 구성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중국과 악관계를 맺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상해공동조계측에서는 동아회에 탄압과 제재를 가하면서 상하이전투가 진행중이었던 1937년 10월시점에서 동아회는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다. 상하이가 일본에게 함락된 후, 1938년 1월, 동아회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다시한번 조직이 구성된다. 이름도 흥아회(興亞會) 로 바꾸고, 일본의 중지나방면군 특무부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를 비롯한 더더욱 많은 인원이 흥아회에 참가하게 된다. 1938년 4월의 시점에서 흥아회는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쑹장(松江) 을 중심으로 4천명 가까운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신정부측에서 흥아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동아회와 이를 계승한 흥아회 모두 친일조직이었으며, 일부 일본인들이 이에 참여하고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유신정부의 입장에서는 두 조직 모두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사(私) 조직이었다. 따라서 유신정부는 이러한 조직속에서 항일분자가 활동하거나, 일본과의 협력보다 단순한 기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활동하는 것을 경계했다 . 이런 차원에서 유신정부는 직접 이러한 조직 구성에 개입하여, 흥아회가 가지고 있었던 단점을 보완해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려 했다. 이가 바로 대민회였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대민회를 "유신정부의 유일선전조직" 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동아회에서 대민회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이제 완전한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이 된 것이다. 동아회에서 흥아회로 오면서 점점 조직은 확대되고, 더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신민회와 대민회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각자의 정부의 유일선전조직으로 성장했지만, 성립과정에서는 차이가 일정부분 존재했다. 신민회의 경우 결성전부터 일본과 북지나방면군 측에서 완전한 성립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대민회의 경우 기존의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이 이루어졌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성립 → 신민회 성립 (10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 대민회 성립 (65일) 두 조직을 구성하는데에 걸린 시간이 차이가 나는데에도 이러한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하이에서 결성되었고, 7월 15일에는 난징으로 이동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공식적인 대민회의 활동 시작은 7월 15일로 규정되었는데 , 이는 대민회의 활동 1주년을 기념하는 발행물이었던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에서 6월 1일이 아닌, 난징에서 활동을 시작한 7월 15일을 1주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존재했었다. 앞에서 보았듯, 일본은, 특히 화북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북지나방면군에서는 신민회를 화북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 이전의 국민당과 공산당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이유로 신민회는 많은 분야에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신민회의 활동예산은 임시정부의 행정위원회 조직보다 많은 책정을 받을 수 있었고, 신민회의 활동은 완전히 임시정부의 국고에서 수급이 되었다. 신민회는 선전활동을 위한 도서의 출판은 물론, 잡지의 출판, 신문의 출판과, 이를 보급하기 위한 보급망의 운영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전활동을 위한 교육시설과, 청소년들의 선전을 위한 청소년조직의 구성까지 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교류에서도, 예를 들어 스포츠와 같은 교류에서도 신민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직업들의 분회와 군사훈련을 위한 훈련소까지 존재했던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화북에서 유일한 선전단체이자 동시에 일종의 유일정체단체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화북에서는, 국민당의 나라 가 신민회의 나라 가 되었다고 봐도 무관했다. 大民會是我們民眾自己的集團 (대민회는 우리민중 스스로의 조직) 이라는 대민회의 구호, 대민회가 출판한 도서에서 이러한 구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 의 경우 신민회와 다르게 화중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물론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선전단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자적인 출판체계를 갖추고 발행물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대민회출판 (大民會出版) 에서 발행한 잡지 대중국(大中國). 1938년부터 발행되어 대민회가 사라지는 1940년 말까지 발행된다. 일본과 조선이 빨간색, 만주가 분홍색으로 칠해져 중국대륙과 분리되어 있다. 또한 신민회가 청소년조직을 운영했던 것 처럼 대민회 또한 대민청년단 (大民靑年團) 과 같은 청소년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민회의 행동은 이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신민회보다 큰 제약을 받아왔다. 이의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과 유신정부가 대민회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신정부와 일본은 대민회가 신민회처럼 수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아닌, '선전' 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다. 신민회가 단순한 선전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활동에도 매진하며 일종의 정당역할까지 했다면, 대민회는 정부차원에서 이러한 정치활동, 즉 대민회가 일종의 정당으로 보이게하는데에 반대를 표했다. 화중에서는 국민당의 나라 가 대민회의 나라 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본래부터 신민회가 구성전부터 어떠한 목적을 위해 구성된 단체였음이 분명했다면,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부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민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하고 신민회의 구성을 집행했던 북지나방면군과 달리 대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지나방면군은 군 내에서도 대민회를 어떠한 조직으로 구성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이 존재하지 않았다. 흥아회라는 조직을 대민회라는 조직으로 개편하면서 정부의 관리체제 안에 두고싶었던 것은 맞으나,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고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민회의 이전조직이었던 흥민회는 물론 대민회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 또한 대민회를 만드는 과정이 신민회의 형성과정처럼 연구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며 "(대민회는) 사실 졸속주의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実は拙速主義の下に始めたもの。)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부족한 준비과정, 부족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사실상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었다. 대민회는 더더욱 문제점이 있었는데, 앞에서 나는 조선일보를 인용하면서 대민회가 "유신정부의 유일한 선전조직"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중지나방면군의 정치반과 선전반 은 대민회와 별도로 선전활동을 진행했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신문사들도 또한 별도의 선전활동을 유신정부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에서는 임시정부와 다르게 선전조직이 일원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대민회와 유신정부의 모습을보면서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의 丸山静雄 (마루야마 시즈오) 기자는 '화북에서 신민회가 만들어졌으니까 화중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번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앞에서 언급한 와키 미즈오 소좌를 비롯한 인원들이 신민회의 영향을 받아 대민회를 만든것으로 보인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민회 와 신민회 는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고 일정부분 유사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구성과정이나 그 역할과 권한과 영역에 있어 차이가 존재했기에 대민회와 신민회를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오히려 대민회는 신민회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민회가 신민회의 영향을 받았음을, 대민회가 신민회와 유사점을 보이는 부분에는 단체를 지탱하는 사상에도 나타난다. 신민회 는 신민주의(新民主義 ) 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신민주의에 대해서는 신민회를 다루는 포스트에서 더더욱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본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만 서술하려한다. 신민주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 가 가지고 있는 삼민주의(三民主義) 를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신민회의 영향으로, 대민회 또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이가 바로 민덕주의(民德主義) 다. 민덕주의가 만들어진 이유 또한 화중에서 이전 국민정부의 삼민주의를 대체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민회강령(大民會綱領) 이라는 것으로, 이는 다음과 같다. 대민회의 "초대" 강령. 대민회의 성립부터 1940년 초까지 사용되었다. 대민회강령 ( 大民會綱領) 1. 민덕주의를 진흥하고 실천하여 신중국 국민정신을 확립한다. 振興實踐「民德主義」確立新中國國民精神 2. 정부의 가르침을 보급하고, 민중들의 정서를 상달(고양) 시킨다. 政敎普施,民情上達 3. 생활을 혁신하고, 민력 (국민들의 경제력)을 강화한다. 革新生活,強化民力 4. 중일제휴로 동아의 자주번영을 도모한다. 中日提攜, 以圖東亞之自主興隆 강령에서는 신민회의 강령과 유사한점도,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하는데, 우선 "경제의 중요성" 을 언급한다는 것, "중국과 일본의 협력(중일제휴)" 를 강조하는 부분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신민회의 강령과는 아주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바로 초공멸당 (剿共滅黨, 공산당을 금지하고, 국민당을 멸한다) 라는 反 국민당적 구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속에서 대민회의 강령은 신민회보다 강압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일정부분의 온건한 구호가 등장한 것은 당시의 상황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되는데 대민회는 앞에서 보았듯 신민회보다 완전한 장악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신민회처럼 대범한 움직임을 하기에 어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민회보다 조직도 미약하고, (신민회의 경우 조직이 기본 만명 단위였지만, 대민회의 경우 1939년 2월 기준으로 전체 7천명도 안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영향력도 약한 대민회가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하지 않았던 화북도 아닌, 2차북벌이후 완전한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던 화중지역에서 신민회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기는 어려움이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온건한 이유는 뒤에서도 서술할 유신정부 자체의 특징이 존재했다. 1939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대민회의 연등. "유신정부만세 (維新政府萬歲)" 라고 적혀있고 , 측면에는 민국28년 3월 28일 (1939년 3월 28일) 이라고 적혀있다. 대민회와 신민회의 모습은 달랐지만,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선전조직으로, 대민회는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대민회 역시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8년 12월 18일,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것이다. 정부 통합과정에서 이렇게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이미 이전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두 정부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교' 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두 정부는 통합과정을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통합논의가 1938년 후반기부터 진행되었음을 생각하면, 유신정부는 정부수립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통합논의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존재가 임시적이라는 것을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합된다면 베이징의 임시정부에게 흡수되는 모양새를 취할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저자세' 가 있었기에 두 정부의 통합과정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설득하기 위해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화평운동을 진행해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면 "신중앙정권 (新中央政權)" 을 건설해줄 것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임시정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신중앙정권' 이 만들어져야 화평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일본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이야기했었다. 이렇게 정부 통합과정에서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완전한 신중앙정권' 구상 하지만 이에 대해 임시정부측과 유신정부측은 표면적으로는 찬성하고 필요성에 동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를 표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신정권에서 왕징웨이가 주도권을 장악하는것에 반대를 표했고, 이로 인해 왕징웨이는 '통합신중앙정권' 이라는 구상을 량홍즈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구상을 일본측에서 찬성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왕징웨이의 구상에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극강한 반대가 존재했었기에, 새롭게 세워지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은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갖추게 되는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은 명목상으로는 통합되지만 독자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제 우리는 위의 표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왕징웨이의 구상에 반대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유신정부는 결국에는 통합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이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는데, 첫째로, 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던 지리적 조건이 있었다.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의 옛수도 난징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난징은 수도인만큼 이전의 국민당과 그의 이데올로기 삼민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했던 장소중 하나였다. 이러한 난징의 환경때문에 유신정부는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히 작동하지 않았던 화북지역과 다르게 국민정부에 반대하는 모습은 똑같이 보이지만, 임시정부에서 보였던 것 만큼 급진적인 반대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또한 이 지역은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쿠테타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자본가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기에 반공주의의 영향력도 다른지역보다 크게 작용했다. 둘째로 , 첫째 사유의 영향으로,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 또한 임시정부와 큰 차이를 보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이 완전한 反장제스 反 국민당 성격을 띄는 친일 주의자가 많았다면,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전부터 쑨원과, 국민당과, 국민정부와 함께 한자들이 많았다. 유신정부에는 국민당과 국민정부 자체에 실망하고 반대하기 보다는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의 독재는 싫어" "국민당은 좋은데 공산당이랑 합작하는 건 아니야" 라는 이유로 유신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충칭의 장제스 국민정부는 "본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데 잘못 굴러가고 있는 것" 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를 해왔지만 거꾸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원들의 입장에서는 왕징웨이의 국민당은 받아드릴 수 있는 대안이었던 것이다. 셋 째로 , 유신정부의 구상과 왕징웨이가 구상하는 신정권의 구상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신정부는 정부를 설립하면서 '화평(和平)' , '반공(反共)' , '공화(共和)' 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왕징웨이의 화평(和平), 반공(反共), 건국(建國) 이라는 구호와 오히려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신정부는 장제스의 행하는 일이 독재라면서 비판하면서, 중화민국이 장제스 독재 이전의 훈정(訓政) 정치를 복원하고 민국 초기의 민주정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고 비슷한 정권으로 생각되었지만, 속에서는 신민회 와 대민회 가 차이가 보였던 것처럼 임시정부 와 유신정부 또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신정부는 화평이라는 목적도, 반공이라는 목적도 일치하고,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또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상극이었던 임시정부나 몽강보다는 원활한 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민회의 발행물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 "중일제휴 (中日提携) " 와 대민회라는 글자를 적어뒀다. (사실 귀여워서 넣음) 넷 째로, 일본은 화북지역에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했으나, 화중지역은 이러한 논의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화북의 특수성' 같은 이유를 들며 화북의 이권만은 지키려고 했으나, 일본의 입장에서도 화중지역정도는, 특히 국민정부로의 정통성을 중요시했던 왕징웨이에게 옛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밑에서 통합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실무자들은 왕징웨이와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통합작업을 진행하던 유신정부의 陳牽(천친, 진견, 유신정부에서 내정부장을 맡음) 과 伍澄宇(우청위, 우등우, 유신정부의 정강을 작성) 의 경우 신해혁명 전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웠으며, 유학과정에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참가하고, 중화민국 수립 이후에는 쑨원의 혁명활동을 도왔으나, 장제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공산당에는 반대하고, 화평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이었다. 과연 이들이 왕징웨이와 엄청난 차이를 가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오히려 왕징웨이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이들에게 왕징웨이와 그의 주장은 충분히 받아드려질 수 있는 주장이었다. 또한 협상과정에서 유신정권 출신의 신정부에서도 지분이 약속되면서 유신정부측 인사들에게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된것이다. 이는 동시에 유신정부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던 대민회에게도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임을 의미했다. 이는 왕징웨이와 임시정부가,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신민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공존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견제와 경쟁, 반대를 일삼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와의 통합협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이 반대와 반대로 일본의 설득으로 '독자성을 지키는' 방법까지 동원함으로서 겨우겨우 합의를 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9년 7월 에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합의가 완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을 량홍즈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량홍즈 또한 초반에는 극한 반대를 표했지만, 협의가 7월부터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후 9월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완전찬성으로 의견이 돌아서게 된다. (신민회 포스트 참조) 대민회 이야기로 돌아와서, 통합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대민회와 신민회 모두 이제 왕징웨이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에 맞추어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삼민주의와 국민당이 다시 돌아오게 된 상황에서 삼민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두 단체의 사상과, 국민당에 반대하는 모습을 더이상은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민회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의 출범에 불만을 표하고 있었지만, 대민회는 그렇지 않았다. 신민회가 왕징웨이와의 공존에 불만을 표하고 공존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반면, 대민회는 이렇게 신정부 합의를 끝냄과 동시에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신정부는 이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대민회가 문양의 방향을 바꾼것은 놀랍게도 유신정부와 대민회가 왕징웨이의 구상에 동의하고 합의를 끝낸 시점과 일치한다. (둘다 1939년 7월) 대민회가 1939년 11월 발행한 "손중산선생탄생기념(孫中山先生誕生紀念) 발행물. 대민회는 문양이 좌우반전된 1939년 7월 부터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발행물의 주제가 기존의 주장에서 벗어나 쑨원, 왕징웨이에 대한 옹호가 시작되었고 , (이는 신민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1939년 7월 10일에는 왕징웨이의 라디오 방송에 축전을 보내는 등, 이 시점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을 이미 띄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선생의) "국가와 민중을 위한 분투정신은 감복할 수 밖에 없다.... (중략) 왕선생의 대성질타로 화평과 항전중 어느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충분히 명백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할 지를 충분히 알고있다. 일치협력하여 화평의 실현에 매진해야한다. 이것이 국가를 구하는 길이고 우리를 구하는 길이다. " - 1939년 7월 9일 왕징웨이가 한 라디오 방송에 대한 대민회 성명. 1939년 7월 (통합정부합의)~ 1940년 3월(왕징웨이정권수립) 이라는 이 6개월의 과정을 다루는 신문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등) 들을 분석해보면, 대민회 의 경우 이시점부터 왕징웨이에 대한 긍정적인 모양새를 많이 취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민회 의 경우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1939년 7월 15일, 대민회의 성립 1주년을 맞이하는 행사에서 대민회측은 왕징웨이에게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출마를 종용했고 동시에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수립에 동의한다는 통전(通電) 을 전달하기도 했다 . 대민회 성립 1주년 기념행사, 좌우반전된 신민회의 문양을 또한번 볼 수 있다. 이렇듯 대민회는 1939년 7월 이라는 이시점부터,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협상이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이시점을 기준으로 성향이 친 왕징웨이 성향으로 변화해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함께 왕징웨이를 지지하고 이를 선전하는 단체로 변모하게 된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민회 문양의 좌우반전 은, 대민회의 성격또한 완전히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민회 문양이 좌우반전되기 전과 된 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신정부의 확실하지도 않은 선전단체 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의 왕징웨이 선전단체 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좌우반전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40년이 되어서는 대민회는 완전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를 선전하는 단체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우선 1940년 1월 30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신정부 출범에 맞추어 조직의 새로운 방침을 발표한다. 대민회의 신방침 (大民會的新方針) 1.쑨원의 삼민주의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충하여 왕 선생의 화평건국 정신에 의거하여 동아신질서의 건설의 매진한다. 2. 정당으로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까운 시기에 열리게될 중앙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3. 사업의 중심을 사회사업과 경제선전에 둔다. 신방침의 1항에서 볼 수 있듯이, 대민회는 이시점에서 이전의 민덕주의에서 벗어나 완전한 삼민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또한 왕징웨이에 대한 찬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대민회라는 단체가 이제는 완전한 왕징웨이를 위한 단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항에서는, 정당으로서의 입장을 취하지 않음을 선언하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충돌하지 않겠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민회가 깃발을 국민정부속에서도 오색기로 굳이 바꾸는 행위를 저지르고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라면서 국민당을 견제해왔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0년 3월, 왕징웨이의 정권이 출범하기 한달전에 대민회는 신정부옹호운동(新政府擁護運動) 을 진행한다. 3월 3일부터 5일까지 난징의 회화로(淮海路) 중앙대무대 (中央大舞臺, 현재 난징 친화이구 회화로, 총통부에서 2km 정도 거리가 있음) 에서 학생들 12,000명을 동원한 가두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서는 영화상영, 연극, 연등행렬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난징환도를 위한 준비에 동참하기도 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성립을 기념하는 난징거리의 행진행사에서 대민회의 모습. "화평문(和平門)" 이라는 모형을 들고 전진하고 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대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대민회의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1939년 2월 7천명에 약간 못미치던 대민회의 회원수는 1940년 8월 시점에는 거의 15만명에 이르게 되면서 1년 반사이 20배가 넘는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1939년 말만 하더라도 회원수가 2만명이 되지 못해 대민회측에서 아쉬워 한걸 생각하면 더더욱 큰 성과였다.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성립이후 왕징웨이의 국민당쪽의 인사들이 무더기로 대민회에 가입한 결과였다.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을 선전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의 정책중 하나였던 청향운동 (淸鄕運動) 도 선전했다. 대민회에서 만든 청향운동 프로파간다. 철책을 경계로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휘날리는 마을은 평화속에서 살아가지만 철책밖은 굶주림과 죽임만이 보일 뿐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민회가 발행하던 잡지 《 대중국 (大中國) 》에도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대중국 잡지는 본래 1938년 발행될 때부터 이름을 유지했는데,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면서 잡지 이름을 《 대민 (大民) 》으로 바꾸게 되었다. 잡지 《 신중국 (新中國) 》의 변화. 여기서도 문양의 좌우반전을 함께 볼 수 있다. 我們應在正統國民黨領袖 汪先生領導下, (우리는 정통 국민당의 영수 왕징웨이 선생의 영도아래) 協力向和平建國大道邁進。 (협력하여 화평건국의 길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적힌 대민회의 프로파간다문구. 이렇게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 정권의 초기 대민회는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라는 칭호속에서 이룬 큰 성장속에서 일종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정기는 길지 않았다. 대민회 는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으로 부터 1년도 가지 못하고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흡수되며 사라지게 된다. 대민회는 1940년 10월 10일, 난징 환도이후 처음맞이하는 쌍십절 행사에도 대민회는 참가하는 등 여러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런 행보속에서도 대민회는 흡수과정을 피할수 없었다. 이렇게 거대해진 선전조직을 두지않고 흡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동아연맹운동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1940년부터 중국에서 확산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내에서도 (왕징웨이정권내에서도) 확산되었고, 여기에 왕징웨이 본인도 관심을 표하고 1940년 말부터는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 정권의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동아연맹운동을 왕징웨이 정권이 직접 실시하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이를 선전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서는 독립된 조직이아닌, 왕징웨이의 국민당으로 대민회를 비롯한 다른 선전, 정치조직이 통합되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이유로, 1940년 12월 17일, 대민회 를 비롯해 중국공화당 (中國共和黨), 중국흥건연맹 (中國興建聯盟) 라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내의 非 국민당 조직들이 국민당으로 통합하면서 "발전적 해소"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대민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대민회를 흡수하는 과정 (1940.12.17) 신민회라는 조직의 성격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듯, 대민회라는 조직의 성격 또한 단순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민회와 대민회 두조직은 비슷한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조직 모두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한 괴뢰정부의 괴뢰선전조직이었고,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가진 삼민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이를 선전하고, 왕징웨이가 새로운 정권을 수립함에 따라 두 조직 모두 변화를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두조직은 다른 모습도 보인다. 신민회 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유일하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여, 넓은 범위에서 행동하며 "일본"의 완전한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작동하게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대민회 는 성립과정도 치밀하지 못했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강력한 힘도 가질수 없었고, 행동의 범위도 제한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과 유신정부를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후에는 왕징웨이를 위해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두조직이 비슷한듯 다르게 작동한 이유로는, 화북과 화중이라는 지리적 환경의 차이 ,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라는 인물적, 사상적 차이, 왕징웨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의 차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의 차이 때문에,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시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유신정부 와 그의 선전단체 대민회 는 왕징웨이를 수용할 수 있었다 . 그렇기에 그들은 왕징웨이와 대립할 필요도, 왕징웨이를 반대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화북정무위원회) 와 신민회 는 그러지 못했다 . 그렇기에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왕징웨이와 대립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겉으로는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이번 4부작의 목표는 이표를 왕징웨이 정권을 알지못하는 이에게 이해시키는데에 목표가 있었다. (청향운동은 넣지않았다. 청향운동은 오히려 하나의 글로 정리할 수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 요소가 적기에) 어쩌다 보니 신국민운동-신민회-동아연맹운동-대민회 로 이어지는 긴글 4부가 되게 되었다. 본래 신국민운동에 관한 글을 쓸때는 이러한 4부작이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4부작을 마무리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 4부작의 요소들은 서로 얽혀있어 하나의 글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 속에는 엄청난 속사정들이 존재하며, 이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설명을 잘했다고 한들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민회, 대민회를 이야기하면서 신국민운동, 화북정무위원회, 임시정부, 유신정부, 동아연맹운동등 여러가지를 함께 서술했던 , 해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긴 글이지만 4개의 요소를 모두 설명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모습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장대한 과정을 거쳐서 서술했지만, 이 서술또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민회 에 관련된 연구는 앞에서 글을쓴 신민회 , 동아연맹운동 , 신국민운동 에 비해 너무나 적다. 국내에서도, 일본에서도 신민회에 대한 연구는 꽤 진행되었으나 대민회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앞으로 이에관한 자료가 더욱 만들어지고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나긴 4부작을 끝내고자 한다. [출처] 土屋光芳, 「中華民国維新政府はなぜ平穏に在精衛政権に吸収されたか?」, 『政経論叢第 83巻第 3・4号』, 2015 堀井弘 一郎, 「大民会の成立と中華民国維新政府」, 『現代中国 第71号』, 1997 堀井弘 一郎, 「汪精衛政権下, 総動員体制の構築と民衆」,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2009 関智英, 「袁殊と興亜建国運動: 汪精衛政権成立前後の対日和平陣営の動き」, 『東洋学報 第 94巻 』, 2012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大民會總本部, 『大民會初週紀念特刊』 大民會總本部, 『大民会宣言』 大民會總本部,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大民會宣傳部編, 『中日同文同種考』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B%8C%80%EB%AF%BC%ED%9A%8C%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조선신문 - 매일신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조선신문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125204931&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삼천리 제11권 제1호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a_016_0700_015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8C%80%EB%AF%BC%ED%9A%8C&searchKeywordConjunction=AND 대중국 1940년 1월-5월호 표지 : https://cotca.org/items/damin-cover-image-may-1940/ 손중산선생탄생기념 표지 : http://read.nlc.cn/advanceSearch/allRes?searchWord=%E5%A4%A7%E6%B0%91%E6%9C%83#hahaha 벽화사진 : 영문판 위키피디아 "Wang jingwei Regime" 문서 1938년판 신중국 표지, 프로파간다 문구, 청향운동 ,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 , 대민회 부채자료 : 중국 바이두 웹참고
- 왕징웨이의 죽음 (1944.11.10)
본 글에서는 왕징웨이의 '죽음' 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왕징웨이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이유, 건강이 악화되었던 1943년 말부터 사망에 이르게 되는 1943년 11월까지의 과정, 왕징웨이의 죽음 직후 있었던 일과 이에 따른 여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935년의 저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왕징웨이. 사진은 천궈치 (陳國琦) 가 촬영했다. (이후 천궈치는 왕징웨이정권에 참가하여 왕징웨이정권의 국영보도국인 중앙전신사의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1942년에는 난징국민정부 행정원 비서직을 맡게 된다. ) 1935년 (민국 24년) 11월 1일, 이날은 중국국민당 제 4기 6중전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본래 6중전회는 9월 중으로 개최되어야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11월 1일이 되서야 개최될 수 있었다. 오전 7시, 당시 외교부장이자 행정원장이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집행위원들은 중산릉을 방문하여 참배한 뒤, 오전 9시, 중앙당부 대강당에서 열리는 6중전대 개막식에 참가했다. 왕징웨이는 이 개막식에서 개막연설을 맡았고, 제 5차 초공작전의 진행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왕징웨이는 대강당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에 참가했다. 이때 장제스는 보안이 안전하지 않다는 측근들의 의견아래 강당에서 예추창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사진 촬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취재기자들 중 회색 대의를 입은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그의 정체는 신광통신사 (晨光通信社) 의 기자였던 쑨펑밍 (孫鳳鳴, 손봉명) 이었다. 쑨펑밍은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스페인제 권총을 꺼내 "타도 매국노! (打倒賣國賊!) " 라고 외치며 왕징웨이를 향해 두발을 쏘았다. 당시 장췬 (張群)이 총을 쏘려는 쑨펑밍을 보고 그를 밀쳐 넘어트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저우포하이는 폭죽소리가 난 줄 알고 뒤를 보았으나, 거기에는 총을 든 쑨펑밍의 모습이 보였고, 그리고 왕징웨이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쑨펑밍은 두발을 쏜 후에도 두발을 연이어 왕징웨이를 향해 쏘았다. 쑨펑밍은 이후 장쉐량을 비롯한 위원들이 달려들고 경비병들이 총을 쏘아 제압당하여 체포되었으나, 왕징웨이는 이미 3발의 총알을 맞은 상태였다. 총소리가 들리자 강당에 남아있던 장제스가 뛰쳐나와 왕징웨이를 직접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게 했고,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은 침착하게 왕징웨이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천비쥔과 천궁보의 도움으로 왕징웨이 부부는 빠르게 난징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으로 갈 수 있었다. 난징 중산동로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 1929년 설립된 이곳은 장제스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중앙의원으로 작동했다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점령되자 일본군이 점령하며 화학전 부대인 영1644 (榮1644) 부대가 사용하다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의 중앙의원이 되게 된다. (기존 중앙의원 조직은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이전했다. ) 병원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10시 30분 중앙의원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바로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 총알의 위치를 파악했다. 왕징웨이는 각각 왼쪽 팔, 왼쪽 뺨 (맨 위의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 그리고 등을 맞았는데, 등의 총알은 다섯번째, 여섯번째 갈비뼈를 지나 허파를 뚫고 척추에 박혔다. 당시 왕징웨이의 의식은 명확했으나, 척추쪽에서 계속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눈 및은 계속하여 부어오르고 있었다. 왕징웨이와 그를 따라온 천비쥔은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중앙의원측은 이를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치명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11월 1일 오후 4시, 왕징웨이의 수술을 위해 상하이에서 급하게 뉴후이린 (牛惠霖, 우혜림) 이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왔다. 1935년 왕징웨이의 수술을 집도한 뉴후이린 (牛惠霖, 1889~1937) 의 모습. 가장 경미했던 왼쪽 팔의 총상은 간단한 봉합수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왼쪽 뺨의 총상의 경우 뼈가 관통되어 파편이 왼쪽 눈에 박힐 정도였지만, 이 또한 3차례의 수술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파편의 경우 완전히 처리 하지 못했다. ) 피습 다음날인 11월 2일 오전 10시, 중앙의원은 왕징웨이의 상태에 대해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가 진행된 이유중 하나는 ,국민정부는 11월 1일 오후 5시, 성명을 통해 왕징웨이가 피습당했음을 발표했으나 문제는 진작 왕징웨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일보에도 "왕씨가 피습을 당한것같다" 정도의 정보가 알려졌을 뿐이었다. ) 이미 소식은 퍼졌고 그속에서 정보의 불확실속 왕징웨이가 '사망' 했다는 유언비어도 퍼지기 시작한만큼, 국민정부측은 이러한 잘못된 유언비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1935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의 "왕씨절명설 (汪氏絶命說)" 보도. 동아일본은 왕징웨이가 11월 1일 오전 11시, 중앙의원에서 왕징웨이가 사망했다는 중국측 보도내용을 토대로 왕징웨이가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의원은 발표에서 왕징웨이의 상태가 양호하며, 2일 새벽부터는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2일 오후 9시반에 잠들어 그다음날 오후 9시까지 긴시간동안 편안한 수면을 취했으며 체온도 37.4도라는 미열에 불과했다. (맥박도 80으로 양호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실제로 오히려 의사들이 말리는데도 신문을 읽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11월 3일에는 쇼와 천황이 왕징웨이의 비보를 듣고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찾아 쾌차를 기원했다. 문제는 등에 박힌 총알이었다. 당시 이 등에 박힌 총알은 중국의 의학 기술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앙의원측은 등에 박힌 총알을 소독등의 임시방편적 치료만 하고, 총알 자체는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피습으로 부터 여러일이 지난 11월 20일, 당시 의학 선진국이었던 독일 의사들의 치료와 수술을 받기 위해 독일 의사들이 있는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했다. 11월 20일 오후 3시, 퇴원한 왕징웨이 부부는 야간열차를 통해 20일 밤 상하이로 향했다. 21일 오전 7시, 상하이에 도착함과 동시에 왕징웨이는 상하이의 중국홍십자회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에 입원하게 된다. 중국홍십자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현재의 푸단대학부속 화산의원) 의 모습. 이곳에는 독일인 의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독일 의사들은 중앙의원에서 처리하지 못한 왼쪽 눈의 파편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의사들도 당시 기술로는 왕징웨이의 척추에 박힌 총알을 완전히 적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때 빼내지 못한 총알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난징중앙의원측에서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이 불편함을 줄수 있었도 목숨에 영향을 줄 만큼 큰 영향을 줄것이라 생각하진 않았고, 독일의사들도 그러했다. 왕징웨이는 병원에서 퇴원한뒤, 상하이의 자신의 사택에 머물며 요양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직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고, 그결과 왕파 (汪派) 라 불리는 왕징웨이의 인사들은 대거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습이후, 빼내지못했던 마지막 총알의 영향은 이때부터 끼치고 있었다. 당대 기사들을 보면, 상하이의 사택 관저로 돌아온 이후에도 왕징웨이는 계속 고통을 호소해 왔고, '중태' 라고 불릴만한 건강악화가 12월에만 3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5일, 12월 9일, 12월 23일) 12월 9일, 왕징웨이는 계속되는 고통과 피로감을 호소했고, 맥박도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띄기도 했다. 게다가 1936년 2월 2일에는 독감에 걸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왕징웨이는 결국 독일로의 요양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독일인 주치의가 권한 것이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건강 회복을 위해 요양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가 독일로 가기 위해 탑승했던 나치독일의 SS 그나이제나우 (SS Gneisenau) 1936년 2월 19일 오후 4시, 왕징웨이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독일의 함부르크로 가는 SS 그나이제나우 여객선에 탑승했다. 이때 부인이었던 천비쥔과, 쩐중밍을 비롯한 수행비서들도 함께했다. 함부르크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베를린을 거쳐 1936년 4월 10일, 독일 남부의 도시인 바트나우하임 (Bad Nauheim) 에 도착했다. 베를린이 아닌 한적한 바트나우하임을 선택한것은 독일 주치의들의 권유였다. 왕징웨이는 1942년 발표한 성명에서 이러한 선택이 독일 주치의들이 권유였음을 이야기하며 이 때문에 히틀러를 비롯한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의 1942년 대 독일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는 바트나우하임의 칼튼 (Carlton) 요양원에 머무르며 온전욕을 즐겼다. 또한 이곳에서 시나 글을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중화민국 주독 대사 청톈팡 (程天放) 은 몇차례 바트나우하임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만나 회담을 했는데, 청폔팡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왕징웨이) 의 몸은 여러차례 치료하며 회복되었지만 (남은) 총알이 제거 되지 못해 심장이 쇠약해졌으며, 바트나우하임의 온천은 심장병에 약효가 좋다고 하여 온천욕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기치료도 받고 있다. " 라고 왕징웨이가 이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건강을 회복했음을 서술해두었다. 왕징웨이는 요양차 독일에 오게되고, 이과정에서 모든 직을 내려놓았지만, 국민당의 2인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만큼, 요양기간동안 앞에서 보았던 청톈팡 외에도 쿠웨이진 (顧維鈞) 주이탈리아 대사 등 유럽의 여러 중화민국 주재 대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1936년 6월까지 바트나우하임에서 요양하다가, 6월 9일 부인 천비쥔에게 전보를 보내 베를린으로 가 다시 진료를 받아보겠다고 하였다. 왕징웨이는 퀄른을 지나 6월 11일 베를린에 도착해 다시 한번 진료를 받은 후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온천도시인 칼스버드 (Karlsbad) 에서 머물며 요양을 계속했다. 이후로도 왕징웨이는 프라하, 베르흐테스가덴 (Berchtesgaden) 등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등지의 여러도시를 다니며 요양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요양을 지속하면서 이전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고, 왕징웨이는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부인 천비쥔에게 보내는 편지등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을 계속 이야기 해왔다. 왕징웨이는 "여행자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과 같다. (旅人如坐鍼氈)" 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측 인사들은 건강을 이유로 계속하여 왕징웨이의 중국행을 말렸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이들도 왕징웨이의 귀국 계획을 완전히 말릴 순 없었다. 흔히 1936년 12월 12일의 시안사변이 왕징웨이의 귀국 이유로 알려져 있지만, 귀국 계획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왕징웨이는 시안사변 이전부터 중국 행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1월부터 왕징웨이는 영국 런던 (11월 1일), 프랑스 니스 (12월 4일), 독일 퀼른 (12월 8일) 등을 오가며 계속하여 전보로 복귀 계획을 논하고 있었다. 즉, 왕징웨이의 중국행은 그 이전부터 논의 되었고 시안사변은 그의 중국행을 결심하게 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왕징웨이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SS 포츠담호. (SS Potsdam) 이배는 위에서 보았던 그나이제나우의 자매함이었다. 시안사변 발발이후 왕징웨이는 14일의 전보에서 자신이 귀국할 결심을 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위에서 보았던 청톈팡, 쿠웨이진 등 유럽 주재 인사들과 현재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귀국을 결정하여 1936년 12월 22일,SS 포츠담 (SS Potsdam) 호를 타고 마지막으로 머물던 제노바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왕징웨이가 출발한 시점에서 시안사변은 이미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장제스가 다시 석방되었다는 전보는 왕징웨이가 탑승한 포츠담호가 수에즈 은하를 통과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귀국을 통한 재기시도는 잘 알듯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역으로 왕징웨이는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이 원하던 중국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다시 국민정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요직에도 복귀하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건강을 되찾고 요직에 복귀하게 되면서, 1935년의 저격사건이 주었던 여파는 사라진듯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1937년 1월 14일 중국으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이후 다시 정계와 요직에 복귀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사진은 1939년의 모습) 1937년 1월 14일 왕징웨이는 중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활동을 재개해왔다. 1937~1943년이라는 6년의 세월 동안 왕징웨이는 제3차 장왕합작의 동반자부터, 항전 국민정부의 부총재, 국민당의 화평운동 지도자, 변절자이자 도망자, 난징국민정부의 행정원장 겸 주석 대리, 그리고 난징국민정부의 주석으로써 수많은 곳과 자리를 옮겨가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그에게 1935년의 상처가 다시 돌아온것은 1943년 8월 이었다. 8월부터 왕징웨이의 증세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거동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11월 5일, 대동아회의 시기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는 도조 히데키에게 자신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이에 일본은 당시 내과전문의였던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당시 도호쿠 대학 내과 교수와 그의 조수였던 마쓰나가 후지오 (松永藤雄) 를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돌보게 했다.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1897~1988), 그는 도조 히데키의 요청을 받아 난징으로 가 왕징웨이를 치료했다. 대동아회의가 끝난 1943년 11월 18일과 21일, 쿠로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일본 의료진들은 두번에 걸쳐 왕징웨이의 신체를 검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35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8년이라는 세월동안 제거하지 못했던 총알의 상태를 확인하여 탄환이 뼈를 이미 뚫고 박혀있는 상황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일본 의료진들은 "빼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본 의료진들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는, 기술의 발전으로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것은 아니었으나,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왕징웨이의 몸에서 총탄을 억지로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이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외과수술은 , 특히 왕징웨이의 상태처럼 신경부분과도 연관된 수술은 가볍게는 마비, 크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점점 커져가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을 하루 빨리 제거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지나파견군 군의장 (軍醫長) 이었던 모모이 나오미 (桃井直幹) 중장을 만나 검사를 부탁했다. 모모이 나오미는 자신의 부하인 난징 제1육군병원장이었던 고토 료우에 (後藤鐐枝) 소장에게 자문을 구해 왕징웨이의 총알을 제거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모모이와 고토는 연구 끝에 제거가 가능할것 같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이러한 고통속에도 왕징웨이는 1943년 말까지 활발한 행동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활동인 중일동맹조약의 체결 (1943.10.30) 뿐만 아니라 대동아회의 (1943.11.5) , 대동아전쟁 3주년 담화(1943.12.8)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1943년 12월 11일의 중국국민당 당무대회였다. 그리고 그 사이 이전 등에 박힌 총알로 인한 통증은 더더욱 증세가 악화되어 1943년 12월 19일, 왕징웨이는 결국 난징 제1육군병원에서 탄환 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이시기 다리가 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1943년 12월 19일, 8년이 넘게 왕징웨이를 괴롭혀왔던 마지막 총탄은 겨우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수술은 19일 오전 11시부터 진행되어 20분만에 끝이 났다. 8년이 넘는 세월동안 왕징웨이의 몸에 있었던 총알은 검게 변했으며, 적출과정에서 심지어 두동강 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수술을 마치고 다음날 오전에 퇴원하여 베이지거 (北極閣,북극각) 라는 별칭이 있었던 쑹쯔원의 전 난징공관으로 향했다. 이곳을 선택했던 것은 공관의 별칭이 되었던 베이지거 지역은 난징의 외곽으로 요양에 적합했고, 동시에 건설당시 난방과 보온을 신경쓴 건물이었기에 겨울 요양을 해야 하는 왕징웨이에게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옛 쑹쯔원 (宋子文) 의 난징 공관. 북극각 (北極閣)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쑹쯔원이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가며 공관이 비게 되자 난징국민정부는 자신들이 이곳을 사용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가장큰 고통의 원인이라 생각했던 총알이 제거된 만큼, 왕징웨이가 빠르게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저오포하이도 수술다음날이자 공관으로 돌아온 12월 20일의 일기에서 "왕 선생은 어제 아침에 이미 총알을 꺼내어 오늘 아침에 퇴원하여 북극각으로 이주하였다. 경과가 양호하나 오후에는 여전히 열기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라고 쓰고 다음날의 일기에서도 "아홉시에 왕 선생이 일어났다..왕 선생에게 물어보니, 정신은 멀쩡하고, 정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의사가 말하길 7일 안에 입도 편하게 움직이게 될것이고, , 10일 안에 완치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만 왕(汪) 선생이 당뇨병이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하였다. " 라고 쓰는등 왕징웨이의 가족들과 측근들, 그리고 왕징웨이의 수술을 담당했던 일본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43년 12월 23일에는 수술의 실밥을 풀었고 이날 왕징웨이와 함께했던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회복이 잘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등 왕징웨이와 그의 주변인물들은 그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왕징웨이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23일 실밥을 풀은 이후, 왕징웨이의 상태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1일, 왕징웨이는 아픈몸을 이끌고 새해 연설을 끝냈다. 하지만 이 새해를 맞이한 이후 왕징웨이는 수술전처럼 걷기 힘들어하며, 더욱 피로를 느끼며 더욱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1944년 1월 9일, 국민정부의 참전 1주년을 맞이한 행사에 왕징웨이는 참가했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는동안 고열이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하타 슌로쿠 (畑俊六) 지나 파견군 사령관 및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과의 연회가 점심에 계획되어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취소하지 못하고 왕징웨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 다음날에도 고열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도 연회가 계획되어 있어 결국 이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의 주치의들은 이 고열이 수술시 제거되지 못했거나 새로이 발생한 고인 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모든 정무를 멈추고 다시 요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21일까지 왕징웨이는 잠을 자면서 발이 떨리는 증상이 있었고, 이 때문에 잠에서 여러번 깨어 앉아 다리를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드는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왕징웨이는 제대로된 수면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결국 1월 25일 시점에는 다리를 비롯한 하반신이 거의 마비되다 싶이하여 걸을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쿠로카와를 다시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하게 했다. 그리고 쿠로가와는 왕징웨이가 총알을 제거한 후 다리가 마비된 것이 척추가 신경을 압박하여 다발성 골수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나고야 제국병원으로 전보를 보내어 3월 1일에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신경외과 교수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가 난징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했다. 사이토는 진단결과 쿠로가와가 진단한 것처럼 다발성 골수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하루 빨리 일본으로 가 치료를 받기를 권했다. 사이토는 일본의 병원에서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존재하나 열악한 난징의 병원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늦지않게 하루빨리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측은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하이지엔호 (海鶼號), 이는 1941년 일본이 왕징웨이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1943년 3월 3일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구급차에 탑승하여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난징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중을 나온 저우포하이, 천궁보등 주요 인사들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왕징웨이는 일본으로 출발하기전, 친필로 글을 적어 " 공무는 천궁보, 저우포하이에게 맡겨라 (公務交由公博、佛海代理) " 라고 쓴후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천비쥔을 비롯한 가족과 수행원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출발했다. 이때 일본은 A6M 4대를 사용하여 왕징웨이가 탄 하이지엔호를 엄호하게 했다. 나고야에 도착하자 일본은 나고야 주둔 일본군으로 하여금 왕징웨이를 경호하게 했다. 왕징웨이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4층 전체, 그리고 3층의 일부를 사용하게 했는데, 이는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수행원들이 머물 공간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던 매화 (梅花) 에서 따온 암호명인 매호(梅號) 라는 암호명을 부여하였다. 이는 왕징웨이의 보안과 왕징웨이의 소식이 함부로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왕징웨이를 담당하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나고야 제국병원 바로 근처의 숙소에서 생활하게 하며 왕징웨이가 위급해지면 바로 현장으로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매호, 즉 왕징웨이를 담당하는 의료진은 기존의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해왔던 쿠로가와와 사이토를 중심으로, 다카기 고지 (高木寬治) 도쿄 제국대학 의학교수, 나고야 제국병원장, 미야 야스오 (三矢晨雄) 교수를 비롯한 당대 일본 의료계의 최고 권위자를 모았다.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 그는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로, 덩치가 커 간호사들은 항상 그를 무서워했다 전해진다. 특이한것은, 사이토는 수술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항상 나막신을 착용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온 다음날인 1944년 3월 4일, 사이토를 중심으로 한 의료진은 왕징웨이에게 추궁절제술 (椎弓切除術, 척추뼈를 일부 제거하여 척추의 종양, 통증등을 완화하기 위한 시술이다. ) 를 실시하였다. 4번~7번 흉골 일부를 절제한 이 수술은 1시간 20분가량 진행되었는데, 수술이 완료되자 왕징웨이는 하반신이 다시 반응하며 다시 걸을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의료진들에게 감사인사를 표했다. 수술과 동시에 왕징웨이의 총탄 근처의 조직에 대한 분석도 행해졌다. 조직 분석의 결과, 사이토와 쿠로가와가 우려했던대로 다발성 골수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종양의 모습은 악성종양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의료진측은 왕징웨이측이 걱정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알리지 않았다. 일본에 온 후 이루어진 첫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것 처럼 보였다. 왕징웨이는 수술후 첫주에 스스로 무릎을 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양발과 다리의 근육이 증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증세 호전에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은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당뇨병도 앓고 있었던 만큼, 회복은 더욱 더뎠다. 천비쥔은 왕징웨이가 증세가 악화될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이에 직원들은 천비쥔을 데리고 주변으로 가 버섯을 캐오곤 했었다. 1944년 5월 4일, 왕징웨이는 병실에서 진갑 (進甲), 즉 61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생일날 왕징웨이는 미소를 보였으며 기운이 넘쳐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진갑에 만주국에서도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6월 5일에는 추민이가 병문안차 나고야를 방문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병실에서도 글을 작성하여 난징측에 전달하는등 이 시점까지 왕징웨이는 병세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더욱 일본측에 불리해져가고 있었고, 일본은 전투에서 계속패배하고 자원공급이 어려워지면서 자원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자원난은 왕징웨이가 있는 나고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에게 매일 닭고기, 돼지고기, 죽순, 시금치와 같은 식단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당뇨병이 있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진 왕징웨이의 식욕은 줄어들대로 줄어든 상태라 왕징웨이는 많은 식사를 하진 않았다. 또한 왕징웨이의 병은 섬세한 온도의 관리를 요구했다. 겨울철에는 자원난에도 불구, 석탄을 동원하여 왕징웨이의 병실을 24시간 난방을 시키는 한편, 더운 여름철에는 규슈에서 냉방기를 급수하여 냉방을 실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오랜시간을 병실에서 보내며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 있었고,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병세는 완전히 호전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징웨이는 욕창이 발생했으며, 헤모글로빈 수치가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O형으로, 이 때문의 같은 혈액형을 가진 자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수혈을 받았지만, 수치는 2~3주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의료진측도 왕징웨이가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으며, 그 증세는 날이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왕징웨이측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8월 초가 되자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저우포하인은 1944년 8월 8일의 기록에서 "일본 대사가 왕선생의 병세가 심해 아마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급히 전했다. 라고 하였고, 이에 8월 9일 난징을 출발, 8월 10일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 왕징웨이를 만난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우포하이는 반년사이 병세가 악화된 왕징웨이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왕징웨이와 대화를 끝낸 후 저우포하이는 그의 아내인 천비쥔과도 대화를 나눴다. 저우포하이는 8월 10일의 기록에서 " (천비쥔은) 왕선생의 자리를 다른이가 대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것 같다" 라고 서술하며 천비쥔이 왕징웨이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음에도 왕징웨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완전히 놓아선 안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9~ 10월 사이 왕징웨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맥박수가 분당 90~110정도가 되어 불안정해졌고, 기침은 더더욱 심해졌다.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폐렴이나 심부전증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여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의 몸은 더욱 약해져갔다. 왕징웨이는 1944년 10월 10일 쌍십절 (중화민국 국경) 행사를 위한 훈시를 작성하여 전달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행한 마지막 대외활동이 되었다. 왕징웨이는 말년에 《육십자술 (六十自述) 》 이라는 시를 지었다. 내용은 왕징웨이 자신이 지나온 60 평생을 회고 하는 내용이었다. (왕징웨이는 당시 61세였다. ) 六十年無一事成,不須悲慨不須驚 60년동안 하나 이룬게 없으나, 슬퍼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네 尙存一息人間在,種種還如今日生 아직 살아 세상에 있으니 온갖것이 아직 지금 살아있는 것만 같네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나고야. 미군의 공습은 왕징웨이가 있었던 나고야 제국병원도 위협했다. 1944년 11월 8일, 의료진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이날 나고야에는 미군의 공습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왕징웨이의 병실이 있던 나고야 제국병원 또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계속되는 공습에 의료진측은 결국 왕징웨이를 지하 방공호로 옮기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왕징웨이에게는 독으로 작용했다. 당시 나고야의 11월 날씨는 추웠으며 이는 왕징웨이 같은 환자들에게는 더욱 취약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특별관리대상인만큼 일본으로 부터 석탄을 지원받아 난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지하방공호에는 이러한 난방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추위속 왕징웨이는 괴로워 했고 결국 왕징웨이는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또한 열이 40도까지 오르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0일 오후, 왕징웨이는 몸을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천비쥔과 가족들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쿠로가와가 뛰어와 그를 진찰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이시점에서 왕징웨이는 누워있는것도 힘들어 일본이 특수틀을 제작하여 몸을 맞춘 상황이었다. 이틀전인 11월 8일,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일본측으로 부터 왕징웨이의 병세가 좋지않으니 하루 빨리 일본을 방문하기를 바란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11월 16일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측은 다시 전보를 보내 재촉했고, 그 결과 이들은 일정을 수정하여 11월 13일 왕징웨이를 보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동료들을 차마 보지 못한채,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야한다... (我要回中國....)" 라는 희미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병실에는 적막과 함께 슬픔이 가득했다. 천비쥔은 울부짖었고 함께 있던 쿠로가와 또한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나고야 비행장으로 옮기는 운구차 행렬. 왕징웨이의 유해는 사망 이후 방부 처리가 이루어졌고, 왕징웨이의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구차에 실렸다. 1944년 11월 12일 오전, 왕징웨이의 유해는 나고야 제국병원을 떠나 나고야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고야 비행장에는 도조 히데키와 고노에 전 총리대신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힌 그의 관이 일본의 히노마루가 그려진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은 왕징웨이와 그의 정권의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요소다. 왕징웨이의 유해는 중국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혔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DC-3 수송기는 나고야를 출발, 1944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 청천백일문양이 보인다. 왕징웨이의 유해가 난징에 도착한 11월 12일은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쑨원의 탄생일이기도 했다. 1943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가 도착했고, 난징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잠시동안 난징국민정부의 대예당에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다. 비행장에 내려서도 천비쥔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비행장에는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있었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하자 이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날 난징국민정부는 애전위원회 (哀典委員會)를 조직하여 앞으로 치루어질 왕징웨이의 장례식 행사 준비에 나섰으며, 동시에 국민정부 지역에 한달간 조기를 게양하게 하고 일주일간 주요 오락행사를 중지하게 했다. 이날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경성의 중화민국 영사관에서도 오후 1시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자리에 조선 총독은 직접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사람을 보내어 자신 대신 총독의 이름으로 행사에 참가하게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주요 요인들, 주요 경제계 인사들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 화교사회가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조선 화교사회도 모두 조기를 게양했다. "우리의 최고영도자 왕주석 서거"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부에서 운영하던 언론이었던 신중국보 (新中國報) 의 1944년 11월 13일자 기사. 대중들에게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1944년 11월 13일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이날 공보를 발표하여 왕징웨이 주석이 사망했으며,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왔고 차후 애전위원회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당시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일본과 조선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필리핀 방어전과 본토폭격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화평운동과 1940년 정부수립, 1941년 방일 당시 일본-조선 신문들의 1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왕징웨이는 마지막에는 단신뉴스칸에서 그 존재감을 피력할 뿐이었다. 조기가 게양된 난징의 모습. 왕징웨이의 유해가 돌아온 다음날인 1944년 11월 13일, 왕징웨이의 유해를 임시봉안한 국민정부 대예당에서는 간단한 형식으로 왕징웨이의 후계자인 천궁보의 대예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천궁보를 중심으로 하여 왕징웨이의 납관식 (納棺式) 이 거행되었다. 국민정부 대예당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배치되었고, 그 양옆으로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들 및 쇼와 천황을 비롯한 우방국들에서 보내온 조화들이 위치 해있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천궁보는 행사를 진행했고 모두가 일어서 국가를 부른뒤 묵념을 통해 왕징웨이를 기렸다. 천궁보는 이후 조문을 읽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새로운 관에 넣으면서 행사를 마무리 했다. 왕징웨이는 이를 통해 화려하게 꾸며진 새 관에 안장될수 있었다. 매화산 (梅花山). 중산릉과 명 효릉 사이 위치한 이 언덕에는 약 16,000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있다고 한다. 1944년 11월 14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민정부명령 (國民政府命令) 을 통해 왕징웨이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진행할 것이며, 묘가 위치할 자리는 국부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릉과 명 효릉(明孝陵) 사이의 매화산(梅花山) 으로 결정했다. 매화산으로 결정한 이유는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매화가 가득 피어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전 왕징웨이가 좋아하던 장소였으며,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국부 쑨원이 있는 중산릉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1944년 11월 18일의 중앙정치위원회에서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매화산에 가매장 (假埋葬)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이 처해있던 상황과 관련 있다. 본래 왕징웨이 정권측은 5000만 위안 가량 (저비 기준) 의 예산을 투입하여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하게, 여러 부대시설과 함께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자원난도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중산릉과 같은 대규모 건축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중앙정치위원회는 이때문에 동시에 왕징웨이가 염원하던 화평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후, 정식적으로 제대로된 국장을 다시 치뤄 제대로된 새로운 묘에 다시 모시기로 결정했다. 국부 쑨원도 처음에는 제대로 모셔지지 못했으나 이후 중산릉에 다시 모셔진것 처럼, 왕징웨이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43년 11월 22일에는 왕징웨이의 묘 건설이 거의 완성되어 유해를 옮길수 있는 환경이 되었고, 이에 1943년 11월 23일 오전 6시 30분,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국 대사들등 여러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운구식이 진행되었다. 국민대예당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10시 30분, 매화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의 운구행렬. 화평건국군 뿐만 아니라 난징시 경찰등 수많은 조직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매화산에 마련된 왕징웨이의 묘의 안장식 현장모습. 묘 예정지로 들어가는 왕징웨이의 유해. '왕주석의 묘 (汪主席之墓)' 라고 간판이 적혀있다. 관을 묻기전 왕징웨이의 관의 모습. 이는 왕징웨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0시 30분, 유해가 묘에 도착하자 마자 안장식 (安葬式) 이 거행되었고, 이어 11시에는 왕징웨이의 관을 정식으로 묘에 묻음으로서 왕징웨이의 장례식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왕징웨이의 묘 (뒤) 옆에 매화나무를 심고 있는 추민이 일행의 사진. 이 사진은 왕징웨이의 묘를 다룬 몇 안되는 사진중 하나이다. 왕징웨이의 묘 모습 (1945년 초). 웅장한 중산릉의 모습에 비하면 초라할 따름이다. 왕징웨이 묘의 비석에는 단순하게 '왕징웨이의 묘 (汪精衛的墓)' 라고만 새겨졌고, 묘비에는 그가 좋아하던 시 '매화(梅花)' 가 함께 실렸다. 梅花 매화 梅花有素心,雪月同一色 매화의 마음은 눈 위에 비취는 달빛처럼 새하얗네 照徹長夜中,遂令天下白 밤새도록 빛나니 마침내 천하를 밝히게 하네 앞에서 보았듯 난징국민정부는 본래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한 규모로 건축하기를 희망했으나 현실적인 상황때문에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묘에는 묘와 조그만한 사당과 기둥들만이 건설되지 못하게 된다. 잘 알려졌듯이 , 왕징웨이의 묘 건설에는 약 5t 가량의 철근과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재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천비쥔이 중일전쟁 이후 자신의 남편인 왕징웨이의 묘를 훼손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달은 만큼 공습을 우려하여 이렇게 건설했다는 설이 혼재한다. 하지만 장제스와 사이가 나빴던 천비쥔이 이러한 튼튼한 무덤을 건설하기를 원했다는 점, 왕징웨이 본인도 이와 같은 건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욱 가능성 높은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천궁보가 이끌었던 난징국민정부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난징국민정부가 해산됨에 따라 왕징웨이의 묘도 확장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라이벌이자 민족의 반역자인 왕징웨이의 묘가 존재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항일전쟁 승리후 허잉친을 시켜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게 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이러한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을 당시 속으로 못마땅해 했지만, 1946년 1월, 충칭에서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기로 계획했던 장제스와 요인들이 중산릉을 참배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의 묘를 보게되었을 때 생길 파급을 막기 위해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허잉칭 자신도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는 것에 대한 완전한 찬성을 가하지 않았던 만큼, 다른이를 시켜 이를 처리하게 했다. 1946년 1월 15일, 허잉친은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74군의 구유달(邱維達), 당시 난징 시장이었던 마초준(馬超俊), 육군본부 공병지휘관 마숭육(馬崇六), 육군본부 참모장 소의숙(蕭毅肅) 등이 참가했다. 허잉친은 회의에서 "그대들이 한 가지 일을 협의해 달라. 다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 어디에든 새어나가서는 안된다. 위원장이 곧 '환도'할 것이다. 왕징웨이 이 대매국노의 분묘가 여전히 매화산에 있다. 손총리의 능묘와 나란히 있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만일 왕징웨이묘를 없애버리지 않고, 위원장이 '환도'했을 때 보게 된다면 반드시 진노할 것이다.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관심으로 골치아플 것이다. 여러분이 자세히 연구해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반드시 타당한 처리방법을 찾으라." 라고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소의숙은 이러한 허잉친의 뜻이 사실이며, 이는 충칭에서 이미 승인이 난 내용이며 10일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여 장제스가 오기전에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구유달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유달은 임무수행을 위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매화산 일대를 '포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매화산 근처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위한 것으로, 헌병사령부와 난징시정부도 이에 협력했다. 구유달은 자신의 공병부대를 통해 왕징웨이의 묘를 둘러본 후, 이 묘를 처리하기 위한방법은 '폭파' 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폭파 계획을 준비했다. 구유달은 묘의 폭파를 위해서는 150kg 가량의 TNT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이를 준비했다. 구유달은 폭파계획을 위하여 계획 3일전부터 주변의 출입을 엄금하고 음파장치를 준비하여 폭파시 나타나는 소리를 덮으려 준비하였다. 구유달은 두단계로 나누어 폭파의 준비를 하였다. 1단계는 밖을 덮고 있는 콘크리트 외벽을 제거하는 것이고, 2단계는 관 자체를 파괴하여 굳게 닫힌 관을 여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구유달은 의문을 가졌다. 허잉친은 분명 무덤을 '옮기라' 라고만 지시하였는데 어찌하여 죽은이의 관을 열려고 하는 것인가? 구유달은 허잉친의 '옮겨라' 라는 말은 수사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파괴하라'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왕징웨이 묘의 폭파전 모습. 20일, 구유달은 폭파를 계획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월 21일에야 폭파가 진행되었다. 폭파는 성공적이었다. 왕징웨이의 묘는 산산조각 났으며 왕징웨이의 관 또한 열리게 되었다. 관두껑을 열자, 왕정위의 시신은 청천백일기로 덮여 있었다. 시신은 난징국민정부의 문관예복이고, 청색장포마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예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수(大綏)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갈색에 흑반점이 있었다. 방부제를 사용한 만큼 시체를 거의 썩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관에서는 천비쥔이 적은 혼혜귀래(魂兮歸來 )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혼혜귀래는 혼이 장소를 잘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것으로 생각된다. 폭파를 함께 했던 마조춘, 마숭육등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살펴본뒤, 마숭육은 공병대장을 시켜 왕징웨이의 시신을 트럭에 실게 했다. 이들은 시신을 청량산 (淸凉山, 난징의 서쪽) 으로 옮겼고, 그날 새벽 은밀하게 왕징웨이의 시체와 관을 불태워 화장시켰다. 이로 인해 한때 민국의 2인자이자 쑨원의 후계자로 점쳐졌던 왕징웨이는 재도 남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구유달의 공병부대는 묘 잔해를 치우고 평탄화작업을 진행했고, 그결과 실제 장제스가 방문했을 때는 이곳이 자신의 라이벌이 묻혀 있던 묘라는 것도 알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옛 왕징웨이 묘 자리에 정자를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매화산의 관매헌 (觀梅軒) 이다. (관매헌은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겉으로만 보면 이곳이 왕징웨이의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긴 어렵다.) 왕징웨이의 묘자리에 세워진 관매헌 (觀梅軒)의 모습. 마무리하며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으로 취급받는, "1935년의 암살미수사건에서 제거하지 못한 총알이 독이되어 곪아아있다가 1943년 말 증상이 악화되었고, 총알을 제거했으나 다발성 골수종이 발생했고, 이 다발성 골수종이 악화되고 당뇨병등 기존의 지병등이 여기에 추가적인 악영향을 끼치며 건강이 악화되며 결국 사망했다. " 라는 이론을 다룬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 큰 논쟁은 왕징웨이를 사망으로 이끌게 한 1935년의 암살사건에 장제스가 개입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천비쥔이 저격사건 직후 장제스를 비난했다는 점, 장제스가 '우연히' 저격 현장에 없었다는 점등은 저격사건의 배후로 장제스를 지목하게 한다. 당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경쟁관계에 있었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것도 장제스 였으니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제스 배후설은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만큼,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죽였을 것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긴 어렵다. 애초에 장제스 본인은 앞장서서 1935년 당시 왕징웨이를 병문안을 갔으며, 매일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가게 하고 치료비 및 위문금을 보내려 했으며, 앞장서서 사건의 해결을 주도했던 이였다. 또한 역사적 맥락상으로도, 왕징웨이는 자신의 경쟁자일지언정 자신에게 불필요한 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죽일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서 " 정신적 충격은 총알이 폐에 박힌 것보다 몇 배나 더 고통스러운데, 이번 총알이 차라리 내 가슴에 박혔다면 내 마음의 편안함이 얼마나 빨랐을지." (精神之受打擊,其痛苦較甚於槍彈之入肺腑數倍,此次之彈如穿入於我心身,則我心安樂必比甚何等事快也。) 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받는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장제스 배후설은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그 가능은 낫다. 두번째로 존재하는 논쟁은 일본암설설 - 일본책임설이다. 이는 한국 작가 김형석 (1920~) 의 글 '고독이라는 병'에서도 나타난다. "태평양 전쟁이 격심했을 때, 장제스 총통과 갈라져 일본측과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애국자 왕징웨이는 이 새의 이름인 정위 (精衛) 를 자기의 아호로 삼았다. 그는 스무살 전후의 젊은 나이에 웅지를 품고 황제의 수례에 폭탄을 던져 사형을 언도 받은 바 있었으며, 일평생 민족을 위해 살다가 끝까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가 10억을 헤아리는 무지하고 불행한 중국 백성들에게 보람있는 봉사와 아낌없는 희생을 각오했을 때, 스스로를 이 전설의 산새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새의 약한 날개와 한두알의 작은 돌에 비하여 바다는 너무나도 넓고 깊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한 배경은 여러가진데 첫 번째는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의 탄환 적출 수술을 집도하였던 모모이 나오미와 고토 료우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쿠로가와도, 독일의 의사들도 뺄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 했으나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강행해 왕징웨이의 죽음을 초래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중엔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으로 진행했음을 증명할 서류는 존재하지 않고, 모모이와 고토 모두 태평양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의 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책임설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언급되는 것이 1944년 11월 8일의 왕징웨이를 지하방공호로 옮긴 선택이 왕징웨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것이 일본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또한 증명된 바 없고 위에서 보았듯 왕징웨이의 병세는 이미 그전부터 악화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습이라는 상황속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호행을 무작정 비판하기도 어렵다. 또한 왕징웨이의 몸에 박힌 총알이 몸에 영향을 끼치는 '납탄' 이 아니며 몸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 '금속탄'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여기선 총알은 애초에 왕징웨이의 죽음에 기여한 바가 적으며, 일본이 오히려 왕징웨이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주장이 있다. 천비쥔의 경우, 전후 일본이 양의학을 고집하는 바람에 왕징웨이가 죽었다고 주장한바가 있고,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일본이 왕징웨이를 독살했으나 이를 다발성 골수종이란 이름으로 덮으려 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위에서 보았듯 의료진들은 치료초기 왕징웨이의 상태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바가 있고, 이러한 두루뭉실한 서술은 가족들로 하여금 오히려 의혹을 가지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죽음은 확실한 결론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을 다루었지만, 위와 같은 음모론의 내용을 서술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주장도 존재한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중간에 서술하지 않은 것은, 서술에 있어서는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라 할수 있다. 번외로, 천비쥔은 왕징웨이의 사망후 자신의 남편을 그동안 치료해준 나고야 제국병원측에 감사를 표하며 매화나무 3그루를 기증했다. 그리고 이중 2그루는 아직 나고야에 남아있다. 나고야대학 오유키 의료센터 (大幸医療センタ) 뒤에 위치한 '왕징웨이씨 기념의 매화 (汪兆銘紀念の梅) 의 모습. 본래 3그루가 있었으나 한그루는 시들어 현재남은건 2그루 뿐이다. 또한 왕징웨이의 묘는 폭파되어 중국대륙에서 사라졌지만, 일본 도쿄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는 묘비가 존재한다. 일본 도쿄 종태원 (宗泰院) 에 존재하는 왕징웨이의 묘. "애국자. 쑨원의 수제자, 동아의 위인 왕자오밍 선생 여기에 잠들다." 라고 적혀있다. 묘비 뒤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설명과 자신이 1944년의, 이제는 이미 폭파되어 사라져버린 왕징웨이의 묘 조각을 발견하여 1988년 11월 10일 이곳에 묻어 기록한다라고 적혀있고, 묘비의 앞에는 중화민국의 국화이자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했던 매화가 새겨져 있다. 이 묘비를 건설한 일본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묘비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출처 :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김형석, 『고독이라는 병 』, p 217 , 1960 蔡德金, 『汪精衛之死』, 1998 朱子家, 『汪政權的開場與收場』 , 2020 『中国文化』, 第39期, 2014 『僑協雜誌』, 第156期, 2016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https://www.koreanhistory.or.kr/totalSearch.do 일본뉴스 233호 / 236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361_00000&chapter=004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364_00000&chapter=001 신중국보 1944년 11월 13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4.11.13 동아일보 / 조선일보 1935년 11월 ~1936년 3월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1%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9%95%EC%94%A8%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9%2C%22startDate%22%3A%221935-01-01%22%2C%22endDate%22%3A%221935-12-31%22%7D 추민이의 사진 : https://cotca.org/items/loc-0004/ 장제스의 일기 : https://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7073877 도쿄 왕징웨이의 묘 사진 : https://nkurashige.wordpress.com/2021/12/06/%E6%B1%AA%E5%85%86%E9%8A%98%E3%81%AE%E5%A2%93/ 왕징웨이의 매화 사진 : https://x.com/hironakaisseis1/status/1765602577008431530 나고야 공습 / 쑹쯔원 공관 / 그나이제라우 /포츠담 : 영문판-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항목
- 대한민국 임시정부시기 잡지 한민 (韓民) 의 왕징웨이 관련 기록 (1940)
잡지 한민(韓民) 의 표지. 는 194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국민당 선전부의 엄항섭(嚴恒燮)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중국서 발간한 월간종합지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이 본 잡지에 참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하였다. 본 자료는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 의 자료 중에서 왕징웨이 정권 & 왕징웨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역적 왕징웨이 괴뢰조직의 죄상 석촌 (石村)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역적 왕징웨이 의 괴뢰조직은 지난달 30일 난징에서 왜적의 연출로 그 막을 올렸다. 이 천고의 추한 연극은 가물거리는 적의 ‘마지막 방패’임을 폭로하고 온 천하에 알려진 역적 왕징웨이의 죄상이 산송장의 짓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우리들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역적 왕징웨이가 일본과 내통하여 염전(艶電, 여기를 참조 )을 발표한 때는 이미 민족과 국가와는 절교한 것이다. 그는 황제(黃帝)의 자손이라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온갖 멸시를 당함이 마땅하다. 이 반역행위의 출현을 장(蔣)위원장은 “일왕밀약 (日汪密約, 1939년 12월 30일 체결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을 의미한다. 여기를 참조 ) 을 전국 군민(軍民)에게 알리는 글”에 명료하게 지적했다. “나는 몇개월 전 앞잡이 조직이 조만간 출현하리라 생각했다” 고 한 것이다. 이에 나는 통분한 나머지 비분에 떠는 열정으로 전심전력 적의 악랄한 정치음모를 분쇄하고 반역자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할 일이 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적이 왜 왕정위를 끌어들였겠는가?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항전에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연구한 이후에 비로소 정확하게 노력방향을 잡아야 하겠다. 왕징웨이의 무능함을 우리뿐만 아니라 적도 명백히 알고 있다. 적의 대변인실이 최근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들 역시 ‘왕정권( 汪政權) ’이 질서정연한 중앙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또한 4년에 걸치는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지 실제로 이 시국을 수습할 능력이 있는가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적은 이미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하리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공연히 골치거리를 하나 더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가? 왕징웨이가 말하는 평등호혜(平等互惠)·화평반공(和平反共)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적은 원래 기질이 교활하고 악랄하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적이 연출하는 꼭둑각시 연극을 볼 것 같으면 3가지 음모가 숨어 있다. 1. 자국민을 기만함 적이 그들 국민에게 한 거짓선전을 보자. “중국은 비옥한 땅과 광물이 무한정하다. 하지만 국방력이 미약하고 민족의식이 저하되어 중국을 정복하기만 하면 일본의 난국은 자연히 해결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용하고 아무리 취해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3개사단의 병력 정도로 3개월이면 중국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하여 민중의 침략심리를 조성했다. 루거우차오 이래 적은 많은 병력과 경비를 투입해서 연안 부근을 점령했다. 그러나 우리의 장기항전은 적을 한층 진흙 속으로 몰아넣어 전쟁의 종결이 요원한 것이다. 적의 국내 사정은 날로 더욱 심각해졌다. 물자는 결핍하고 생산은 저조하여 경제가 날로 무력해지니, 공채를 증발하고 세금이 과중해져 국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 졌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날로 많아지고 장정은 줄어들어 병력을 보충하기도 곤란해졌다. 이렇게 되자 그 국민들은 전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몽상임을 알게 되고 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니 반전운동은 점점 만연되었다. 이 때에 적은 ‘인심안정정책’으로 왕징웨이를 무대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자기국민을 기만함으로써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역적 왕정위의 괴뢰조직의 성립이 중국사건을 매듭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했다. 그러나 이 계산은 불가능한 것이다. 적의 전 수상 아베(阿部)는 일찌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신중앙정권의 성립이 사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240개 사단의 정규군과 수백만의 유격대가 있기 때문이다.” 적의 수뇌층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자기네 일본 국민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고 보는가? 기실 적의 운명은 우리 손아귀에 쥐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교묘한 재주를 피워도 일은 악화만 되어 가는 것이다. 2. 세계 각국을 위협 적의 대륙정책은 중국에, 정식이권을 획득한 제3국으로서의 위치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을 완전 독점하고 나아가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이다. 적이 발표한 성명을 볼 것 같으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건설’, 중국에서의 제3국의 권리 존중은 사탕발림의 말일 뿐으로, 이는 ‘일왕밀약(日汪密約)’을 통해 적의 악랄한 음모라는 것이 세계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그러므로 허무맹랑한 선전을 아무리 해보아도 한층 어긋날 뿐이다. 때문에 적은 역적 왕징웨이를 끌어들여 제3국의 권익을 존중하는 체함으로써 장강을 개방하고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각국과 접촉하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점령지역내에서 일어난 반영운동이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무모한 짓은 모두 적의 간교한 계책임을 잘 알고 있다. 결코 이것이 세계 여러 나라를 위협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도 당하고 있을 나라는 없는 것이다. 미 국무성은 왕정위의 괴뢰조직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영국의회는 충칭의 국민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세계여론을 보아도 적과 왕(汪)의 괴뢰조직의 음모는 명백한 것이다. 3월 3일자 워싱턴 ≪명성(明星-The Morning Star)≫지의 언급은 “도쿄측에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성립을 널리 선전하는 것은 중국을 중국에 되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는 이미 ‘자유중국’을 속일 수 없고, 또한 세계 각국도 속일 수 없다.” 고 했다. 1일자 상해대미(大美)석간도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대해서, “반드시 새로운 계략이 있을 것인데, 문제는 외국을 배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25일자 ≪진리 (眞理)≫지 논설은 “난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한 연극이다. 일본 내부의 형세가 날로 약해져 가는 것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고 왕의 괴뢰조직을 일축했다. 이상의 언급은 국제적으로 일본을 대신해서 조종(吊鍾)을 울려 준 것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또한 세계는 정의와 화평의 우방이며, 일본의 어리석은 위협은 절대 받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이화제화(以華制華) 정책 적은 중국을 침략하여 많은 괴뢰조직을 만들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임시정부’, ‘유신정부’로써 광주(廣州)·무한(武漢)·하문(厦門) 등지의 괴뢰조직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아직도 충분치 못했단 말인가? 적의 침략수법(手法)은 조금씩 먹어 들어가는 식이다. 피차 마찰을 피하면서 좋게 조금씩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중앙정권’ 이라고 하는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왜 내세워야만 했나? 역적 왕정위는 중국국민당과 국민 정부의 이름을 도용해서 새로운 그의 당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위 ‘화평운동’ 이니뭐니 하지만 이는 ‘중국영토의 주권존중’,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은 없음” 등의 구호가 사실인듯이 보이기 위한 적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도구인 것이다. 바로 이화제화(以華制華), 이당제당(以黨制黨)의 악랄한 술책이 그 목적하는 바이다. 장위원장은 ‘일왕밀약고전국군민서(日汪密約告全國軍民書)’에서 역적의 간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는 오늘 이후 반드시 국부적 화해로써 전체적 화해를 이루자”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화평운동’에 주력할 것이다. 그는 매수한 무리로 괴뢰정부를 조직해서 ‘일지관계조정강요’의 골자를 수행하려 할 것이다. 제3국이 괴뢰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더라도 복잡한 사건이 생기면 많은 국가가 그의 괴뢰정부와 실제로 거래가 있을 것이라 하고. 아마도 망상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부적 화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본군의 난징점령을 의미한다. 일본에 부분을 팔아버리고 다시 그 부분을 기초로해서, 적의 힘을 이용하여 항전하는 전군민, 망국의 노예됨을 원치 않는 이들을 없애면 전면적인 화평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망상할 것이다. 적의 야심을 따라 완전히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 그의 간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굳세게 항거하여 적의 음모를 분쇄하고 화평과의 타협반대만이 승리를 얻을수 있고 항전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역적의 말로를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황제(黃帝)의 자손됨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라고 말이다. 가. 중국 국민의 반역자를 보는 눈 왕징웨이는 역적으로, 도둑의 하수로 사회에 알려지기에 앞서, 국내외에 잠복하여 터무니 없는 ‘화평’ 를 선전했다. 일시적으로 생활이 곤란하고 환경이 나쁜 이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활한 유혹에 넘어가 항전에 회의를 갖는 자가 있으니, 이처럼 제 집을 도적질하는 무리는 막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숨은 걱정은 바로 이런 무리이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정치 무대에 나타났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망국의 노예됨을 원하지 않고 있고 그들을 역적이라고 보며, 같은 동포의 손을 끊는 자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유혹을 해도 국민은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적의 앞잡이를 제외한 4억 5천만 중국 동포 대부분이 순(順)과 반(反)의 행위를 엄격히 구별하며, 충(忠)과 간(奸)은 결코 병립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결코 적에 대한, 격렬한 원한과 분노로 가득찬 중국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저하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적 내부의 충돌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비록 일은 시작했지만 그 내부의 모순은 날로 커진다. 괴뢰 ‘임시정부’와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인 괴뢰 화북정무위원회(華北政務委員會)의 왕극민(王克敏), 왕읍, 무빈(繆斌) 등이 왕징웨이와 반목하고 있고, 표면상 취소된 ‘유신정부(維新政府)’의 양홍지(梁鴻志), 온종요(溫宗堯), 임원도 (任援道) 등도 마찬가지로 각처에서 왕징웨이를 견제하고 있다. 괴뢰 ‘몽강자치정부’의 이수신(李守信)과 괴뢰 ‘우한 정권’의 하패용(何佩瑢), 장인려, 석성천(石星川), 뇌수영(雷壽英) 등도 왕징웨이의 지배에 대한 항거가 공공연하게 또는 비밀리에 일고 있다. 이미 왕징웨이 자신의 조직에서도 진공박(陳公博), 저민의, 주불해(周不海) 등이 권리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갖 추태를 다 노출하고 있다. 적의 손아귀에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명리(名利)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의 환심을 사야한다. 따라서 당연히 서로 배척하고 견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앞잡이 조직 내부의 모순과 충돌은 점점 심해져서 결국엔 그들이 저지를 죄악을 감소시킨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적이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내세운 이유와 작용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장(蔣)위원장의 항전 2주년 기념사에서 지시한 바를 보자. “대체로 적에 유리하다고 인정되면 모두가 우리에겐 해로운 것이다. 때문에 적이 원하면 우리는 해주지 말아야 하고, 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해야 된다. 적이 좋다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것이고, 나쁘다고 하면 반드시 좋은 것이다. 적이 하는 일체의 언행은 모두 그 반대적 입장에서 관찰하여 받아들이고 뿌리쳐야 한다”고 했다. 적의 교묘한 계책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충실히 수행하고 용감하게 매진함으로써 적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한국인의 눈에 비친 역적 왕징웨이 일파(一波)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나는 한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말이 들리는 바에 대해 그렇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그가 소위 염전(艶電)을 발표하고 괴뢰정권을 만든 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이미 우리의 혁명동지가 아니며 일본의 앞잡이인 적이 된 것이다. 그는 적을 끌어 들여 수십만의 자기 동포를 죽였다. 그는 앞잡이가 되자 곧 우리 한국인과 가장 친한 전우인 중국인, 어떤 의미에서는 간접적으로 몇십만 명의 한국 동포를 죽인 것이다. 이 괴뢰조직이 목적하는 바가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다. 그의 간계가 성공한다고 할 때 한중 양국의 전도는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중국 항전의 최후 승리를 한층 촉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케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은 독립과 해방을 맞게 되니,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비단 관심을 가질 뿐이 아니라 또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씹지 않고서는 시원치않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에 “역적 왕징웨이의 계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길 바라고 또한 괴뢰조직의 원흉인 왕징웨이를 한국인이 능히 박살내 줄 것이며, 이는 결코 기회주의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믿어주기 바란다. 왜적의 조종을 받는 매국노의 죄악과 그 죄악이 초래하는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 중국 동지들보다는 아마도 한국인이 조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반역행위에 관한 한 매국노는 민족의 패륜아요, 인류의 저주받는 독충인 바 누구보다도 엄히 다스려져야 한다. 옛부터 우리 한국인들 중에는 의사(義士)들이 많았다. 박랑사중(博浪沙中)에서 진시황(秦始皇)을 격파한 창해 역사(滄海力士),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죽인 안중근 (安重根), 황포강(黃浦江)에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저격한 김익상 (金益相), 앵전문(櫻田門)에서 일본 천황 유인(裕仁)을 저격한 이봉창( 李奉昌),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白川義則)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尹奉吉)의사 등은 모두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한국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희망은 결코 몽상이 아니며 오래지 않아 반드시 실현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완용 (李完用)은 본래 그 조상들이 고위고관을 지낸 귀족의 후손으로 부유한 집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의지가 굳고 냉혹한 성질에 시기심이 많았다. 한국혁명의 여명기에 있어서 매우 열렬하게 수차의 정치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제법 민중의 호응도 얻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들어서자 곧 정권쟁탈에 급급하여 친러시아파의 영수가 되었다. 일본은 재빨리 이완용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그를 매수한 것이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매우 소심한 방법을 썼다. 일본의 힘을 이용할 뿐, 그들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정치 야욕에 어두운 이완용은 모르는 사이에 일본의 이용물이 되었다. 이미 발은 진흙땅에 빠져 들어가 끝내 헤어나질 못했다. 게다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이완용은 한국의 역적이라는 사실무근의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이 이러한 간계를 쓰는 목적은 2가지였다. 첫째는 이완용을 신뢰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의 언행을 의심하게 하므로써 장차 그의 사회적 신용을 완전히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고, 다음은 역적으로 몰린 이완용이 제2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여 완전한 한국의 역적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완용도 이런 일본의 간계를 몰랐으므로 자신은 종래의 애국자적인 입장에서 허무맹랑한 말로 민중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세가 나날히 약해짐을 통탄하며 친일로써 나라를 구하는게 옳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자신의 입으로 세상 소문이 사실임을 밝힌 셈이다. 민중은 이제 “이완용은 철저한 역적이다”라고 단정을 내리니 이완용 또한 민중과의 접촉을 피하게 되고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끝내 후회하지 않고, 반대로 오기가 나서 더욱 철저하게 나라와 국민을 해치고자 하였다. “일을 하지도 않고 억울하게 쉬지는 않겠다”하여 하등의 거리낄 바가 없었다. 이는 실로 뜻밖의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제일 관문이다. 그는 사리사욕을 위해 우두머리가 되고자 대담하게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러나 적의 앞잡이가 그 한사람은 아니었다. 송병준 (宋秉畯), 이용구 (李容九), 조중응 (趙重應) 등 아첨하는 무리는 각양각색으로 공을 다투었다. 그러므로 그는 “안했으면 몰라도 뛰어든 이상 남에게 뒤질 필요가 없다”고 결심했다. 이같이 하여 그는 가장 악질적인 앞잡이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둘째 관문이었다. 그는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한정없는 큰 죄를 범했다. 후에 이재명 (李在明)의 저격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 채찍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그 운명은 울고 웃을 수 있는 자유도 구속 받은 채 결국 조국을 팔아 넘겼으니 천추만대에 죄인이 된 것이다. 이제 역적 왕징웨이의 과거를 살펴보자! 그의 지나온 길이 이완용과 교묘하게 들어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흥미있는 문제이다. 역적 왕징웨이의 가계(家系)·가산(家產), 총명함·성질, 명예욕, 초기의 구국사업, 몽상적인 정권욕, 기회주의적인 친 러시아정책, 친일구국, 애국지사에게 저격당한 일 등 여러 반역의 무리[양홍지(梁鴻志)·왕극민(王克敏) 등]와 공을 다툰 일, 비밀리에 매국협정을 한 일, 이에 대한 왜적의 대우, 어느 한곳 이완용의 행로와 다른 것이 있는가? 역적 왕징웨이는 일찌기 이완용의 매국적인 궤도를 그대로 달렸는데 더구나 이완용이 철저한 매국노가 되게 한 마음의 제1, 제2 관문까지 그대로 겪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각처의 상황과 내포하고 있는 조건들이 30년 전의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도에는 광명이 있을 뿐, 결코 왕징웨이 때문에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와 이완용은 그 말로가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완용이 한국의 역적이 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히 알고 있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반역 목적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광적인 역적 왕징웨이가 민중을 속이려 한다면 제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누가 그를 당해 내겠는가? 만약 역적 왕징웨이가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면 이완용은 왜 한국을 구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완용은 한국의 스승을 따라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중일전쟁은 3년간에 걸쳐 그 전선이 4천킬로에 달하였다. 왜적은 현재 인적·물적·재정적인 힘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경제공황 속에 붕괴하려는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빨리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황은 더욱 확대되어 뜻하던 바와 같이 되지 않자 산궁수진(山窮水盡)한 왜적은 이때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다. 왕징웨이를 요직에 올려 난국을 적당히 대처하여 그 붕괴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소위 중국으로 중국을 제어하는 것인 바, 전쟁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하는 정책이다. 또한 적의 정부요인 요나이(米內)가 정책을 밝히기를, 군사적인 면에 덜 치중하고 힘을 분산시켜 정치 및 경제면으로 방향을 돌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역적 왕징웨이는 거의 죽어가는 왜적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키는 강심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장뇌작용을 할 수 있는지는 상관할 바 아니라도 사실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의 말은 모두 왜적이 지시하는 것들로서 왕징웨이는 무대위에서 꼭두각시역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거처는 왜적의 물샐틈 없는 감시하에 말과 행동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왜적이 그에게 준 수백만 원의 대가이다. 중국을 구하자는 그의 말은 바로 왜국을 구하자는 것이고, 그가 지껄이는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바로 노예주의인 것이다. 왜적이 중국을 침략한 목적은 바로 중국 4억 5천만 인구의 고혈을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화북(華北)·화중(華中)·화남(華南) 각 지역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화북 연락부 아래에 또 제1, 제2 경제국을 설치하고, 그 직할하에 무슨 ‘화북개발회사(華北開發會社)’·‘화중진흥회사(華中振興會社)’·‘ 중국연합준비은행( 中國 聯合準備銀行,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 화흥실업은행 (華興實業銀行,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이니 하는 등의 허수아비 경제금융기관을 조직했다. 또한 점령지역내의 곳곳에 크고 작은 수십개의 일본과의 공동경영이라는 허수아비 은행·스파이 은행 따위를 설치했다. 또한 무슨 전기회사·전신전화회사·운수회사·성냥회사·광업회사·제철회사·수산회사·기선회사·수도회사·잡사회사·제염(製鹽)회사·방직회사·제분소·정미소니 하는 등의 무려 수 백 가지에 손을 대었다. 그밖에 점령지역내의 철로와 도로를 완전히 정리하여 교통망을 확보했다. 그들은 이같이 많은 일을 벌려 놓았지만 그 중에서도 착취기관만은 아주 완벽하게 설치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붙들지 못했다. 이유는 재벌들이 모조리 모두 대륙으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민족의 자본을 끌어 들이려고 점령지역내에 들어갔지만, 일반 지주와 소상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일면 왕징웨이로 하여금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퍼뜨리게 하고, 또 일면으로는 서민들에게 작은 혜택을 베풀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았을 때 30년 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전후의 사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적이 처음 한국에 공격해 을 때 백성들은 모두 비분해 하고 두려워하여 일제히 심산궁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병합한 후, 곧 숨어버린 사람들을 끌어내는 방법을 쓴 것이다. 도시에 모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고 세금을 감해 주는 등, 작은 혜택을 베푸는 듯했다. 또한 미신을 장려하고 중대한 반일분자라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기 공작은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다.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몇몇 시골 노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온 후로 우리 사는게 전보다 좀 나아졌어” 라고.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1년도 되지 않아 시달림으로 날을 보내게 되었다. 2, 3년쯤 지나서는 재산·가옥·농지들이 모두 동양척식회사·금융조합 등 착취기관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가련한 이들은 대소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났다. 남부여대하여 동북쪽의 황야를 향해 유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매우 불행스러운 일이다. 30년 후인 현재 나는 충칭 거리에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옛날 한국에서 들었던 것과 아마도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이렇게들 말한다. “이곳은 물건이 너무 비쌉니다. 며칠 전 고향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곳은 살기가 아주 좋아졌다나 봅니다. 전처럼 영망은 아니라니 나도 이젠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읍니다. 여기서는 하루를 보내기도 힘이드니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옛날 우리의 처지가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앞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는 꼭 구해주려고 하겠지만 이 경우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나에게 매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어찌 할 것인가! 후방의 인심이 불안정하면 전방의 승리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후방 인심을 안정시키는 중요조건은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비록 전시에 있어서 물가의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현재 충칭 물가의 폭등은 단지 전시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조건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위적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정부를 도와주고 격려하므로 억제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적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의 물가 앙등은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본토의 2, 3배 이상이나 되는 중국영토를 점령하더라도 제일차대전 중의 독일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경제의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점령구내의 모든 물자를 바닥이 날 때까지 수탈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인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러는 것일까? 노동자·농부·상인·학자·정치가 할 것 없이 절대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 중국국민의 생활은 비교적 다른 교전국보다는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닥쳐올 많은 역경이 있지만 최후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광명된 앞길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투 노력해야 한다. 절대 굽히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국가 민족을 통일하기 위한 대계는 반드시 정부에 협조하고 최고 통수자를 옹호하며 다같이 국난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도중에 한 명이라도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안주(安住)하고 싶고 영원히 복을 누리고 싶다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만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그것을 타도하기에 앞서 먼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지만 역적 왕징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원한은 왜적보다는 역적 왕징웨이에게 더 사무치지 않은가 ! 왕징웨이는 중화민족의 패륜아일 뿐 아니라, 전인류의 독충(毒虫)이다. 일본과 그 도당을 제외한 전세계가 그에게 침을 뱉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독균박멸(毒菌撲滅)을 위해서는 강력한 소독약을 써야만 한다. 혹 이에 소홀하면 그 독성은 넓게 만연될 것이 아닌가 ! 우리의 구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하면 먼저 그들의 앞잡이 왕징웨이를 없애자” “중국이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장위원장의 항전을 옹호하자”. “동부아시아의 영원한 평화 수립을 위해선 혁명지도자 장제스 장군을 옹호하자.” 이완용과 왕징웨이 - 한민 (韓民) 제1기 제1호 지난날 한국을 망하게 한자는 이완용이고, 오늘날 중국을 팔아먹으려는 자는 왕징웨이다. 둘다 적을 아버지로 여기는 (認賊作父) 민족의 변절자이며 일제의 앞잡이 이기도 하다. 한중에게 불행이 있다면, 왕징웨이와 이완용이 비록 생은 다르지만 서로 하는 일마다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3.1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왜 총독부 당국은 조선의 앞잡이들에게 진압책을 구했다. 이완용은 가장 먼저 꼬리를 흔들며 3가지의 정책을 바쳤다. 1. 해산을 권고한다. 2. 군대를 보내어 무력시위를 한다. 3. 학살을 감행한다. 이는 지난 여름 중국 각 식문에 폭로된 왕징웨이의 친일적인 책동, 난창, 창사, 난닝 등지에 대해 진격을 권하고, 주요 도시를 폭격하게해 국민정부를 위협한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왕징웨이는 적이 곧 무너질때, 국가의 항전이 승리할 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의 생존을 돌보지 않고 있다. 동서남북을 모두 팔아먹고 자연과 자원을 팔아먹어 대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버린 '일왕밀약' 을 체결한 죄는 이완용보다 더 심하다. 적이 일왕밀약을 가볍게 승낙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 1939.12.30)
가오쭝우가 1940년 1월 22일자 홍콩의 대공보 (大公報) 에 폭로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 (가오쭝우는 비밀리에 일어로 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일본어판을 찍어 대공보에 폭로했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1939.12.30 왕징웨이측 : 저우포하이 (周佛海) , 메이쓰핑 (梅思平) , 린바이셩 (林柏生) , 저우룽샹 (周隆庠) 일본측 : 카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 스가 히코지로 (須賀彥次郎) , 야노 마사키 (矢野征記), 이누카이 다케루 (犬養健) 요령 (要領) 일지 양국 정부는 ‘부속 문서 1’에 기재된 새로운 일지신관계의 원칙을 준봉하여 양국 간의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한다. 사변 중 새로운 국교 관계 조정 이전 이미 존재해왔던 사실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태의 변화에 따라 전조의 원칙에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사변이 계속되는 동안 불가피하게 존속하고 있는 특수사태의 변화 및 해결, 나아가 사변의 해결은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위의 2개 항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 과정을 거친다. 부속문서 1 (일지신관계조정의 원칙) 일만지 삼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서로 선린하여 결합하고, 동아화평을 공동의 중추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한 기초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초로 한다. 일만지 3국의 일반적인 제휴 및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등의 원칙을 설정한다. 화북지역과 몽강을 국방 및 경제상의 일지강도결합지대로 설정하고, 몽강은 추가적으로 방공을 위하여 군사적, 정치적 특수지위를 특별히 설정한다. 장강 하류에 경제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에 특별지위를 설정한다. 위 열거된 항목의 구체적인 사항은 ‘부속 문서 2’에 기재된 주요 항목들을 기준으로 한다. 부속문서 2 (일지신관계조정요항) 친선우호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여 동아화평을 확보하며, 선린우호를 위해 상호보완과 우호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인정하고, 일본과 만주는 지나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3국은 국교를 성립한다. 일만지 3국 정부는 정치,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상호간의 우호를 훼손할만 한 조치와 원인을 차츰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실시하며, 제삼국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조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협력하여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기여 한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고문을 파견하여 신건설에 협력하게 하고, 특별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 중요기관에 고문 직원을 배치한다. 일본과 만주국과의 선린관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일본은 단계적으로 조계와 치외법권 등의 철폐를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방공에 협력하고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의 구역에서 공산당 분자와 조직을 척결하고, 방공을 위한 정보선전에 서로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공동방공의 실행과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군대를 화북과 몽골의 요충지에 주둔시킨다. 일지방공군사동맹을 별도로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체적, 국지적 정세에 따라 가능한 빨리 철수하되, 현재 화북 및 장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치안이 확립될 때까지 계속 주둔한다.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 함선 부대가 장강 연안의 특정지점과 화남의 특정 제도에 주둔하여 정박하는 것을 인정한다. 일본은 대체로 주둔 지역 내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항만과 수로에 대해 군사상의 요구권과 감독권을 유지한다. 중국은 일본 주둔 지역내의 경찰대 및 군부대 등 무장 단체의 배치 및 군사시설의 설치는 당분간 치안 및 국방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으로 하고, 일본은 중국 군대와 경찰대 건설에 대하여 고문 및 교관 파견, 무기 공급 등에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지속적인 연대와 공동방위를 실현하기 위해 산업, 경제 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상호보완의 취지를 바탕으로 공동호혜를 주 목적으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하여 위의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각각 필요한 협정을 체결한다. 화북과 몽강의 자원, 특히 몽강의 자원 개발과 이용해 대해서 중국은 공동방위 및 경제결합을 위하여 일본에 특별한 편리를 제공한다. 즉, 특정 자원의 개발과 이용에 관하여 경제경합지역에서 편익을 제공한다. 일반 산업에 대해 일본은 중국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생산량 증대와 농업에 관련하여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이의 개선을 지원한다. 중국의 재정, 경제 정책 수립과 관련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원을 한다. 교역에 관하여 적절한 관세와 세관 제도 등을 채택하여 일만지 간의 일반통상을 진흥시킴과 동시에 일만지간의, 특히 화북과의 물자 공급을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하게 해야 한다. 중국의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관하여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 협력을 하고, 전 중국의 항공 발달, 화북의 철도 (롱하이선 포함) , 일지간 및 중국 연안의 주요 해운 및 강의 수운, 장강 하류의 통신 발전을 일지교통 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본과 협력하여 신 상하이 건설을 추진한다. 비고 신중앙정부는 사변 이래 중국 내의 일본국 신민이 입은 권익의 손실을 배상한다. 신중앙정부는 일본과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하기 전에 일본과 관련문제에 대해 일본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부속문서 1. 임시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의미하는 화북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및 황하 북쪽의 허난성 일대 지역을 의미한다. 화북과 일본, 만주는 국방, 경제적으로 강도 높은 결합지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따라 일본-만주 지역과의 업무 처리를 위하여 화북정무위원회 (가칭, 이하 동일)을 설치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과 구성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협의하되, 중앙정부 수립전에 왕(王,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씨와 왕(汪, 왕징웨이) 씨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 구성은 일지신관계가 정상화 되는 시점에 아래에 기재된 항목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도로 하되, 그 이전에 상한선을 두고 순차적으로 정리한다.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화북정무위원회가 이를 실질적, 잠정적으로 승계하여 정무 이행의 원활을 도모하게 하고 사람들을 동요하지 않게 한다. 공동방위와 방공에 관해서는 (1) 일본군 주둔에 따른 사항을 처리한다. (2) 일지 방공,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3) 기타 일지 군사협력을 처리한다. 경제제휴, 특히 매장된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은 일본 – 만주국- 화북의 물 공급에 관한 것으로, (1) 일본의 매장자원 개발 및 이용에 관한 특별 편익 사항을 처리한다. (2)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물자 처리에 관한 합리적 사항을 처리한다. (3)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통화 협력에 관한 사항 처리한다. (4) 항공, 철도, 통신 및 주요 해운의 지원 협력 사항 처리한다. 일본인 고문 채용 및 직무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중앙정부는 연합준비은행제도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는 기간동안 필요한 지원을 한다. 4-1 화북정무위원회와 중앙정부간의 주요 사항을 일시적으로 규율한다. 화북정무위원회는 소요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한다. 이를 워해 관세, 염세 및 통원 세칙상 중앙세이나 관세 수입의 일정 비율과 염세 수입의 영어부분, 통세는 일시적으로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상술한 국세징수기관의 감독은 중앙정부가 화북정무위원회에 위임한다. 4-2 화북정무위원회는 각종 채권을 보유, 운영한다. 4-3 관유재산은 계속하여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차후 조정한다. 4-4 세관, 우편, 항공은 중앙정부의 관리하에 두되, 점진적으로 이를 실현하게 한다. 4-5 룽하이선의 관리 및 운영은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4-6 제삼국과의 외교교섭은 중앙정부가 하고, 일본 – 만주국간의 교섭 및 지방과의 교섭처리는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2. 유신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유신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유신정부를 동요시키는 것을 막되, 통합을 유도하여 중앙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된 후 유신정부는 양해하여 정무위원회 등을 설치하지 않는 만큼, 왕징웨이 측은 유신정부의 주요인물의 체면과 위상을 고려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되고 유신정부가 해산될 때 중앙정부는 유신정부 기존의 정무를 계승하여 정무를 원활하게 수행하여 관헌과 인민이 불안을 가지지 않게 한다. 장강 하류 지대에서 일지경제강도결합을 실현하기 위한 일본의 특별요구는 다음과 같다. 4-1. 신 상하이에 대하여 신 상하이 건설에 관한 사항에 협력한다. 신 상하이에서 일본군 주둔에 따른 조치사항을 처리한다. 신 상하이에서 항공 및 주요 해운인 장강의 민간 해운 및 통신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기타 일반 일지협력에 관하여 신 상하이에서 처리한 사항을 처리한다. 4-2. 위의 일본측의 요구를 용이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일지경제협의기관의 설치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3. 몽강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이야기하는 ‘몽강’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북쪽의 (만리장성 안쪽 지역도 포함) 의 지역을 의미한다. 몽강은 국방, 경제적으로 일만지 삼국의 강도결합지대로서 특수성을 고려하여 외교 이외의 행정, 입법, 사법, 군사, 대 몽강 교섭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자치를 인정하는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이다. 몽강연합자치정부와 신중앙정부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왕징웨이 또는 그의 대표자와 덕왕 및 그의 대표자와 회견을 통해 문서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한다. (1) 중앙정부는 몽강연합자치정부의 고도의 방공자치를 인정한다. (2) 두 정권의 관계 조정에 관하여 본 양해에 따라 신중앙정부 수립 후 별도의 협정을 체결한 4. 전항의 이해가 성립될 때 몽강연합자치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정치회의에 참석한다 5. 중앙정치회의에서는 제3항의 양해 범위를 벗어난 사안을 다루지 않는다. 4. 샤먼 왕징웨이 측은 샤먼을 특별행정구역으로 두는 것을 인정한다. 5. 화남 연안의 특정제도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 가운데 하이난 섬 지구의 중앙정부 직할의 행정조직 및 군사처리기관은 본 섬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바탕으로 좌기의 요구사항을 처리하도록 한다. 일본군의 주둔에 수반하여 발생한 사항 일본과의 군사 및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 국방상 필요한 특정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한 사항 항공, 통신, 해운에 관한 사항 비고 본 요령은 장래 일지간에 약속해야 할 사항들 및 지나 내정에서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항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가오쭝우의 폭로에 대한 왕징웨이의 반응은 여기를 클릭 : ) (중국연합준비은행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미 국무장관 성명 (1940.3.30)
코델 헐 (Cordell Hull) 제 47대 미합중국 국무장관.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무려 12년 가까이 수행하였다. 미 국무장관 성명 (왕 정권 성립에 관한 미합중국 국무장관 성명) Statement by the Secretary of State of the United State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Wang Government 1931년 이래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비추어 볼 때, 난징에 새 정권을 세우는 것은 한 나라가 이웃 나라에 군대를 통해 그 의지를 강요하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과 정상적인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차단하는 계획의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난징의) 성장은 ‘외부 권력’ 의 지도 아래 중국에서 기존에 설립된 다른 정권의 제도와 모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기능적으로 특히 외부 권력의 이익을 선호하고 미국과 다른 제삼국 국민들이 법적으로 정당한 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누리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외부 세력’ 의 고위 관계자들이 자국은 상대국의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의도가 있으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발전하면 이러한 의도가 증명될 것이라 말한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난징에서 새워진 새로운 정권의 모습을 보면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모두 그러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을 국가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의 입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극동 지역의 상황에 대한 미합중국의 태도와 입장은 여러 번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태도와 입장은 변함이 없다. 12년 전 미합중국 정부는 다른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현재 충칭의 정부가 대다수 중국 국민들의 충성과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라 믿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한 계속하여 충칭의 정부 를 정당한 중국 정부로 인식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명에 난징국민정부는 물론, 일본도 불쾌감을 들어내며 이에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마 야키치로 (須磨弥吉郎, (1892~1970) ) , 일본제국 내각 정보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1941년의 대미교섭에도 참가하였다. 일본 외무성 반박성명 (비공식) - 스마 야키치로 외무성 정보부장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현재 지나에 일어나고 있는 신동향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8년 12월 30일 미국 정부의 대일본통첩에서 스스로 말한 “미국 정부는 극동 사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에 완전 모순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일본군은 지나 전체의 4할가량을 점령하고 있다. 해관 수입의 약 95%는 왕징웨이씨를 수반으로 한 국민정부의 취득이며, 주요한 해항 정부는 모두 일본군에 수중에 있다. 현재의 이런 사실을 미국 정부는 결코 눈감을 수 없다. 헐 국무장관은 왕징웨이씨를 일본군이 추천하였다고 하나 왕징웨이씨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동아 화평을 위해 진췌하고 일지 양국과의 긴밀한 제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결심 아래 이번의 국민정부 성립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헐 장관은 일본이 지나를 경제적으로 봉쇄한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이는 전시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의 나타나게 될 경제적 성과 등을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미국이 본래 화평을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미국이 현재 일본과 싸우고 있는 충칭 정부에 대하여 불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노무라-그루 회담 (1939년 말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노무라 키치사부로 (野村吉三郎)와 주일미국대사 조지프 그루 (Joseph Grew) 의 회담을 이야기한다.) 이래 미국이 선결적 정신으로 일본과 토의하려 한 사실과도 모순된다. 요컨대 미국 정부의 이번 행위는 스팀슨 원칙 (헐 외무장관 바로 전의 외무장관인 헨리 L. 스팀슨 (Henry L. Stimson)을 의미한다. 스팀슨은 만주사변 후 무력에 의한 국제적 영토 변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의향과 스팀슨 일파의 일본침략불승인위원회 (American Committee for Non-Participation in Japanese Aggress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1938년에 설립되었다.) 가 최근 대일금수를 호소하고 충칭측에 원조를 하고 있는 사실은 동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려는 제국에 실로 불쾌한 사실이다. 중화일보 반박성명 중국은 대외적으로 문명국가로, 문명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문명국가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외국인의 중국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외국인의 소위 중국에 대한 특권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정부 환도 선언 및 국민정부의 정강, 그리고 왕 선생과 신문기자단의 담화 중에도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에 대해서도 이로서 답을 하려 한다. 국민정부가 부인하는 것은 부당한 중국에서의 특권뿐이다. 이러한 특권들은 불평등조약에서 비롯되거나 불공평, 부정당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중일전쟁을 이용하여 새로운 중국에서의 특권을 획득하여 영국을 대신하여 중국을 지배하려는 주인 역할을 하려 하고 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기도에 대해 미국의 만족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헐 국무장관에게 당당히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일화평을 위해 실현한 국민정부의 환도는 중국 국민이 3년 동안 일본과의 항쟁 결과 도달한 결론에 의한 것이다. 헐 장관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은 이미 대중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지난번 소련-핀란드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소련과 핀란드의 평화조약 ( 1940년 3월 12일 체결된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의미한다.) 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미국 금융계는 소련이 화약을 통해 획득한 것을 공연하게 승인해왔다. 실로 이는 미국의 국력에 의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본인도 빨리 미국이 이 평화조약을 승인하기를 바랬다.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책약은 먼저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의 중국 내 세력을 소멸시킨 후에 일본을 타도하여 중국을 제2의 라틴아메리카로 만들려는 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심리는 대중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며 대중들은 이를 아주 비판하고 있다.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가 12년 전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승인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하였고 이는 국민정부가 중국의 정통정부를 계승하였고 때문에 이를 승인하였다는 국민정부로 하여금 충분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헐 장관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미국이 승인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민정부를 승인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위협을 가해왔으나, 국민정부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였고 헐 장관은 예전과 같이 포효하고 있으나 역시 국민정부의 난징 환도 이후의 발전을 막을 순 없다. 미국의 각종 위협과 포효는 오직 미국 자신의 역사에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는 것에 불과하기 불과하기 때문이다.
- 중국의 주권 존중 원칙 실행에 관한 일본에 대한 희망 사항 (中國主權尊重原則實行に關し日本に對する希望 / 1939.6.15)
왕징웨이는 1939년 6월의 방일에서 (이때는 비밀리였다.) 자신의 신정권 성립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일본측에 제시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방일 전지나신중앙정권수립방침을 (여기를 클릭 : ) 세우면서 이러한 왕징웨이 측의 요구를 무시했다. 중국의 주권 존중 원칙 실행에 관한 일본에 대한 희망 사항 中國主權尊重原則實行に關し日本に對する希望 일본이 진정으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자 하는 성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방일하여 일본의 여러 요인들과 접촉하며 이를 직접 느끼고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현재 일본은 중앙정부 수립 공작에 전념하고 있으며 특히 인적요소 및 기초적 실력을 구비하게 하는데 전력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측의 성의는 설명을 받아도 추상적으로 생각되어 회의적 감정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없는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이에 한 걸음 나아가 구체적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특히 필요함을 통감하게 되었다. 이에 위의 목적을 위해 정치, 군사, 경제로 나누어 기술하여 일본이 양해해주었으면 하는 부분, 지켜줬으면 하는 부분을 서술하였다. 물론 세부적인 방법은 중앙정부 수립 이후 양국 정부가 중일조정원칙 및 정신을 기조로 신중하게 연구한 후에 결정할 수도 있다. 내정에 관하여 중국 내정의 독립 자주에 관해서는 일본이 여러 번 천명한 원칙인 만큼, 이에 근거하여 일본의 호의를 중국 국민들에게 증명하고 그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하의 중요한 요점들을 나열하여 일본 측의 실행을 갈망한다. 중국은 절대로 항일, 배일사상을 논하지 않을 것이며 친일적 국민교육을 철저히 장려할 것이다. 일본 측도 역으로 친중국, 친중국적 사상 내지 태도를 시정하고 친중국 교육을 실시해주길 바란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이 우리 내정에 대해 간섭한다는 의도가 있다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신중앙정부에 정치고문 및 유사한 명의의 직위를 설치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 일본과 상의를 필요로 하는 사항은 이들 고문이 아닌 모두 정당한 경로를 거쳐 중화민국 주재 일본대사와 행하게 해야 한다. 중앙정부 각 원, 각 부, 행정부처에 있어서 내정간섭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을 직원으로 임용하지 않는다. 일본 전문가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하는 것도 그 직역을 기술 방면으로 한정하여 일반행정에는 참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방침으로 한다. 따라서 해당 부 및 기술과 관련 있는 회의에는 주관 장관의 통지를 통해 참석할 수 있게 하지만, 일반 행정회의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또한 기술고민의 초빙에 있어서는 상급 관청의 인가를 받을 필요가 있으며, 기술고문에 관한 임용규정 및 복무규정은 중앙정부를 통해 공표한다. 각 성 정부 및 특별시 정부에서도 상술한 취지에 따라 정치고문 또는 유사한 명의를 가지는 직위를 설치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철병 이전까지는 해당 지방에 일본군과의 상의 및 일반 논의 사항에 관해 해당 성 정부 및 특별시 정부에 임시적으로 교섭 인원을 설치하게 한다. 성정부 소속의 각 청 및 특별시 정부 소속의 각국에서도 행정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정치고문 또는 유사한 직위를 설치하지 않는다. 단 자연과학 및 기술고문을 임용하는 경우에는 중앙정부의 방법을 따른다. 현(縣) 정부의 논의사항에 관해 교섭비서직을 설치하고 일본군의 철병 이전에 해당 지방현시 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 외교의 방식을 따르기로 하고, 명령식 문서 및 구두식 통지는 지양한다. 현재 작전중인 지역 이외의 각 현 선무반은 신속하게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각 지방정부의 신뢰도를 높이고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피하기 위해 철병 전에 일본 주둔군은 성시현 정부와 논의를 실시하기 위해선 전임 인원을 설정하여 맡겨야 한다. 재정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에 있는 일본의 어떠한 기관과 개인도 직간접적으로 각종 세수 기관을 점유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중국에서 일본군 및 일본 민간인이 중국인을 모욕하는 듯한 행동 및 태도가 보이지 않도록 시정하게 하고, 이와 같은 사소한 사고나 양국 민간의 친선의 장애를 이루는 요소는 철병 전에 특별한 주의를 가한다. 군사에 관하여 중일 양국의 국방방침이 일치하는 이상 우리의 군사시설은 반드시 일본과의 공동목표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중국의 유일 최고 군권의 독립을 위해서는 필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중앙의 최고 군사기관 (군사위원회 혹은 국방위원회처럼) 에는 고문단을 설치하되,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의 군사 전문가를 초빙하여 이를 조직하는 고문단 수는 일본이 절반, 독일-이탈리아가 절반을 차지하게 한다. 고문단장은 일본인이 담당하게 하며 국방계획 및 군사시설의 기획을 보좌하는 단장의 직권 및 범위의 규정은 중앙정부가 제정한다. 각종 군사교육기관에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군사전문가를 교관으로 초빙한다. 중국군을 감시 혹은 속박하는 것과 같은 의혹을 피하기 위해 각 부대내에선 여러 명의를 통하여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군사전문가를 임용하거나 초빙하여 직무를 담당하지 않게 한다 . 단, 중앙의 최고군사기관에서 파견한 고문으로서 부대를 시찰하는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찰은 인사 과정을 거칠 것을 요한다. 각종 병기제조공장은 필요한 경우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전문가를 기사로 임용하게 한다. 중앙정부 난징 환도 이후 중국군대가 신중앙정부로 전향하는 경우에는 협의하여 일본군은 일부 후퇴하여 그 구역을 해당 전향한 군대에 부여하거나 다른 지역을 주둔지로 부여해줄 것을 희망한다. 경제에 관하여 경제합작은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거하여 양국 인사들이 공인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원칙의 구체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시하길 요망한다. 중국의 일본 군사기관, 민간기관 혹은 개인이 점령하여 몰수한 중국의 공장 및 광산, 상점을 속히 중국측에 반환할 수 있도록 충분히 합당한 방법을 규정한다. 현재 합작이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고유자산을 평가하는 것은 객관적 표준에 의해 재평가한다 합자경영의 사업에 대하여 일본 측이 주식 등을 제공하여 실제 상의 출자를 하는 것은 부당하기에 시정해주기 바란다. 합자경영의 사업에서 일본측의 자본액은 과반 이상을 얻을 수 없다. 합자경영의 사업에서 최고 주권은 중국에 속하게 할 것을 요한다. 중앙정부의 난징 환도 전 군사점령기간 동안 허가받지 못한 계약은 재심사의 여지를 부여한다. (비고) 위의 4, 5항은 당연한 일로, 중국인의 복귀 및 투자를 신속하게 촉진시키기 위해 신중앙정부는 이를 선전의 한 방법으로서 일본 측이 한층 더 양해해주길 바란다.
- 일지신관계조정방침 (日支新關係調整方針 / 1938.11.30)
1938년 11월 30일, 일본 고노에 내각은 왕징웨이에 의해 새롭게 세워질 신정권과 일본의 관계를 규정하는 일지신관계조정방침을 세웠다. 이는 왕징웨이가 충칭탈출을 결심하게된 중광당회담의 결과인 일화협의기록에서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일지신관계조정방침 (日支新關係調整方針) 일만지 (日滿支) 3국은 동아에서 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상호선린으로서 결합하여 동양평화의 주축이 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는다. 이의 기초가 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조로 하는 일만지의 일반적 제휴와 선린우호, 공동방공, 공동방위, 경제제휴의 원칙을 제정한다. 북지나 및 몽강에서 국방상 경제상 (특히 자원의 개발 이용에 있어) 일지강도결합지대 (日支强度結合地帶)를 설정한다. 몽강지방은 전항외에 특히 방공을 위해 군사상 정치상 특수지위를 설정한다. 장강 하류지역에 경제상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남지나 연안 특정도서에 특수지위를 설정한다. 이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별도로 비준하게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項) 선린우호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상호의 특징을 존중하고 혼연상 제휴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선린우호의 열매가 맺을 수 있게 상호우호 촉진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 및 만주국은 지나의 영토 및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삼국은 국교관계를 새로이 수립한다. 일만지 3국은 정치, 외교, 교육, 선전, 교역 등 전반에 있어서 상호적인 호의를 파괴하는 조치 및 원인을 철폐하고 장래에 걸쳐 이를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행하고 이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제삼국과의 관계에서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협력한다. 신지나의 정치형태는 분치합작주의에 입각하여 시행한다. 몽강은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으로 하고 상하이, 칭다오, 샤먼은 각각 방침에 근거한 특정행정구역으로 둔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소수의 고문을 파견하여 신걸설에 협력하게 한다. 특히 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서 필요한 기관에 고문을 배치한다. 일만지선린관계의 구현에 따라 일본은 점차 조계, 치외법권 등의 반환을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협동하여 방공에 임함과 동시에 공통의 치안과 안녕의 유지에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 영역 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제거함과 동시에 방공에 관한 정보선전 등에 대해서 제휴, 협력한다. 일본과 중국은 협동하여 방공을 행한다. 이를 위해 일본은 필요한 군대를 북지 및 몽강의 주요지역에 주둔한다. 별도로 일지방공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반적인 정세의 수응하여 조기에 이를 철수시킨다. 단, 공동의 치안과 안녕의 유지를 위해 장강과 연안의 특정지점 및 남지나의 특정 도서와 제도에 관련된 지점에 약간의 함선부대를 주둔시킨다. 또한 장강 및 지나 연안에 있어서 함선의 정박을 자유로이 하게 한다. 지나는 앞항의 치안협력을 위한 일본의 주둔에 대해 재정적 협력의 의무를 가진다. 일본은 주둔지역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수로에 대한 군사상 요구권 및 감독권을 보류한다. 지나는 경찰대 및 군대를 개선, 정리함과 동시에 일본군 주둔지역의 군사시설은 당분간 치안 및 국방상 필요한 최소한으로 한다. 일본은 지나의 군대 및 경찰대 건설에 관한 고문을 파견하고 무기 공급등에 있어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 및 공동방위의 열매를 맺게 하기위해 산업 경제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유무상통의 취지에 기초하여 공동호혜를 취지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해 위의 취지에 따라 각자의 요지를 구현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한다. 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해서는, 북지와 몽강에서 일본과 만주국의 부족한 자원을 획득하고 매장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을 시책의 중심으로 삼고 지나는 공동방위 및 경제적 결합의 견지에서 이에 특별한 편익을 제공하고 그 외의 지역에서도 특정 자원의 개발에 관해 경제적 결합의 견지에서 필요한 편익을 공여한다. 일반 산업에서는 노력하여 지나측의 사업을 존중하고, 일본은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다. 농업에 관해서는 개량을 원조하여 지나 민생의 안정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일본의 필요 자원의 배양을 도모한다. 지나의 재정경제정책 확립에 관해 일본은 필요한 원조를 한다. 교역에 관해서는 타당한 관세 및 해관제도를 채용하여 일본과 만주국간의 일반통상을 진흥함과 동시에 일본과 만주국, 북지나간의 물자 수급을 편하고 합리적이게 한다. 지나에서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대해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는 협력을 한다. 지나 전국의 항공 발전, 북지나의 철도 (이는 룽하이선 (隴海線)을 포함한다.) , 지나 연안에서의 주요 해운, 장강에서의 수운 및 북지나와 장강 하류를 연결하는 통신은 일지교통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지협력을 통해 신 상하이를 건설한다. 부록 지나는 사변 발발 이후 지나의 일본 국민이 지니고 있던 권리에 대해 손해를 배상한다. 제삼국의 지나에서의 경제활동 및 권익은 일만지 경제제휴 강화를 위해 제한하는 것이 당연하나, 국방 및 국가 존립의 필요에 입각하는 범위가 아닌 제삼국의 활동 내지 권익을 부당하게 배제, 제한하진 않는다.
- 중국신정권수립방침 (支那新中央政府樹立方針 / 1939.6.6)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은 1939년 6월 6일, 왕징웨이의 방일전에 왕징웨이정권의 성립방침을 만들었다. 중국신정권수립방침 (支那新中央政府樹立方針 / 1939.6.6) 신중앙정부는 왕(汪)을 중심으로 하여 우페이푸, 이미 구성되어 있는 정권, 충칭의 전향한 이들을 구성요소로 하는 것으로 , 지나사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나측의 적절한 협력에 대한 의지를 수립하는 것이다. 신중앙정부는 일지신관계조정에 관한 원칙에 준거하여 일지의 국교를 정식으로 조정한다. 그리고 이 신정권에 참가하는 이들은 본 원칙을 수락하게 한다. 신중앙정부의 구성, 수립시기는 전국에 걸친 전쟁지도상의 단계에 응하고 자주적 견지에 근거해 통제할 수 있는 인적요소 및 기초적 실력의 구비를 요한다. 장래 지나의 정치형태는 그 역사 및 현실에 부응하는 분치합작주의 에 준거 하게 하고 그 내용에 관해서는 일지신관계조정방침에 준거하여 북지나를 국방 및 경제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日支强度結合地帶)로, 몽강을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으로 설정하고 양쯔강 하류 지역 남지나의 연안특정도서에 특수지위를 설정하는 것 외에는 내정문제로서 지나측에 위임하는 것을 본칙으로 하여 애써 간섭하는 것을 피한다. 특히 신중앙정부의 형태에 있어서는 지도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동시에 기존에 구성된 정권과 우리간의 특수관계를 고려하게 한다. 국민당 및 삼민주의에 관해서는 용공항일을 포기하게 하고 친일, 친만(親滿), 방공을 방침으로 수정하게 하면 그 존재를 인정한다. 충칭 측이 항일용공 정책을 포기하고 필요한 인사교체를 행하고 제1항,2항을 수용하면 굴복으로 간주하고 신중앙정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 1938.11.20)
이름바 '중광당 회담' 의 결과로 완성된 일화협의기록은 왕징웨이의 충칭탈출을 결정하는 배경이 되었다.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1938.11.20) 쇼와 13 (1938) 년 11월 20일, 일본 측 가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이마이 다케오 (今井武夫) 두 명은 중국 측 가오쭝우 (高宗武), 메이쓰핑(梅思平) 두 명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의를 성사시켰다. 1. 일화 양국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침략 세력으로부터 동아를 해방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이란 공동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호 공정한 관계에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관계를 조율하고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열매를 맺고 공고히 결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결정한다. 제1조 : 일화방공협정 을 체결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일독이(日獨伊) 방공협정에 준하는 것으로 하며, 상호협력을 이루고 또한 일본군의 방공주둔을 인정하며 내몽골 지방을 방공특수지역에 포함시킨다. 제2조 : 중국은 만주국을 승인한다. 제3조 : 중국은 일본인에게 중국 내륙에서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승인하고 일본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철폐한다. 또한 일본은 중국 내의 조계 반환도 고려한다. 제4조 : 일화경제제휴는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밀하게 경제합작의 결실을 추구하여 일본에 우선권을 인정하고 특히 화북의 자원 개발 이용에 대해서는 일본에 특별한 편의를 제공한다. 제5조 : 일본은 중국의 사변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 내 일본 거주민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나 전비의 배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제6조 : 협약 이외의 일본군은 일화의 평화회복 후 즉시 철수를 개시한다. 단, 중국 내지의 치안 회복이 이루어진 후 2년 이내에 완전히 철병을 완료한다. 또한 중국은 본 기간 동안 치안의 확립을 보장해야하며 주병지점은 상호합의를 통해 결정한다. 2. 일본 정부는 위와 같은 시국 해결 조건을 차후 발표하며 왕징웨이씨 등 중국 측 동지들은 곧 장제스 와의 절연을 천명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중일제휴 및 반공정책을 성명함과 동시에 기회를 보아 신정부를 수립한다. 쇼와 13 (1938) 년 11월 20일 일본 측 가게사 사다아키, 이마이 다케오 중국 측 가오쭝우, 메이쓰핑 일화협의기록 양해사항 日華協議記錄諒解事項 제1조의 방공주둔은 내몽골 및 연락선 확보를 위해 베이징과 톈진지역에 주병하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주병 기간은 일화방공협정이 유효하는 기간으로 한다. 제4조의 우선권이란, 타국과 동일조건에 있을 때 일본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한다. 일본은 사태를 위해 난민 구제에 협력한다. 일화비밀협의기록 日華秘密協議記錄 일화 양국은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고 선린으로 강하게 결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의 실행을 약속한다. 제1조 : 일화 양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상호 친일, 친화(親華) 교육 및 정책을 실시한다. 제2조 : 일화 양국은 소련에 대응하여 공동의 선전기관을 설치하고 또한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여 평시에는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내몽고 연락선 확보를 위하여 필요하다 생각되는 지역에는 일본군을, 신강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게 하여 협력하게 하고 전쟁시에는 공동작전을 실시한다. 제3조 : 일화 양국은 공동으로 동양의 반식민지적 지위를 점차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일본은 중국을 원조하여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제4조 : 일화 양국은 동양의 경제부흥을 목적으로 경제적으로 합작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따로 연구한다. 경제합작은 중국 이외 남양 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한다. 제5조 : 위 조항 실시를 위해 일화 양국은 필요한 위원을 둔다. 제6조 : 일화 양국은 아시아에서 일화 양국외에 다른 국가도 가능한 본 협정에 가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 전국 장병들에게 고하는 글 (告全國將士書 / 1943.1.1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전국 장병들에게 고하는 글 (告全國將士書) 올 해 1월 9일 오전 10시, 국민정부는 중일기본조약의 일관된 정신에 따라 대동아전쟁의 참가를 공식 선언하고 우방인 일본과 중일공동선언을 체결하여 영미와의 전쟁을 공동으로 완수하고, 공동의 적을 타도하기 위해 양국 정부는 부동의 결의와 신념으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협력하는 한편, 조계반환 및 치외법권 철폐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40년 동안 혁명에 종사해 온 국부께서 간절히 원하셨던 불평등 조약의 철폐는 오늘날 기쁘게도 실현되고 있다. 이제부터 중국은 자주독립, 완전자유의 입장에서 동아의 여러 이웃 국가들과, 세게의 여러 우방들과 합심하여 대동아전쟁을 보위하는 공동전선에 들어설 것이며, 그 의의는 매우 크다. 대동아전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우리 장병들의 임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막중한 것이다. 나는 우리 전우들에게 오늘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근래 백년 동안, 영미 제국주의자들은 흉악한 표정을 가지고 악랄한 손짓을 펼쳐 우리 동아민족에게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서의 침략을 가하며 교묘한 강탈의 역사를 세워왔다. 우리나라도 아편전쟁 이래 그 침해를 받아 각종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차식민지 지위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우방인 일본은 재작년 12월 8일, 동아 민족 전체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을 통감하고 대동아전쟁을 감행하여 동아에 도사리고 있는 영미의 잔학한 세력을 소탕하고 대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도모하였으며, 독일과 이탈리아가 축이 되는 유럽 신질서 건설에 호응하여 세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의 그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는 동방의 도의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며, 동방민족의 공존종영의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 서방의 만든 패도제국주의가 세계에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며 세계에서 강권을 없애고 공리를 얻게 하는 것이며, 피압박자가 압박자로부터 정의의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이 전쟁의 노력의 결과에 달려있다. 국부께서는 일찍이 우리들에게 중국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 바가 있다. 국부께서는 전부터 중국이 자유와 평등을 얻으려면 동아 민족 전체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었으며, 지금 국민정부는 의연하게 대동아전쟁 참전을 선포하여 국부께서 이야기하신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을 위해 열렬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실로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위대한 대사명인 것이다. 충칭 정권은 서쪽의 변경에서 국민정부 통치지역에 평화속에서 발전하는 것을 질시하고, 영미제국주의의 위협과 회유의 미몽에 현혹되어 이름바 영미전선에 참가하여 동아인이 동아인을 죽이는 잔학함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버마로 출병하고, 광저우, 우한 등의 지역을 적기로 하여금 폭격하게 하여 끊임 없이 공격하며 우리의 화평 건설을 방해하며 실로 동아 건설의 파괴자이자 동아 화평의 반역자가 되었다. 이러한 충칭이 아직까지 잔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영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화평을 조속히 실현하고 통일을 조속히 완성할 필요가 있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며 영미는 격파되어 동아침략세력은 파괴되었고, 충칭 정권은 스스로 궤멸하고 있다. 화평통일이란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도 우방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이래 불과 1년만에 이미 각지에서 전례없는 위대한 전과를 거두며 진전을 이루고 있다. 남태평양과 버마에서 모든 영미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특히 솔로몬 해전이 거듭되면서 영미는 큰 타격을 입었고, 반격능력은 더욱 떨어졌으며, 독일-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영미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북아프리카에서의 공세는 영미를 부진과 퇴세에 빠지게 하여 다시 반격할 수도 없게 하였다. 옛말에 “군사는 명분이 옳으면 힘이 쎄다” (師直爲壯, 曲爲老) ,춘추좌씨전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중화민족이 대외전쟁에 참가했던 여러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번 전쟁이 가장 명분 옳은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선현들이 소위 인의의 군대 (仁義之師, 정충악전에서 비롯된 말. 정의로운 군대를 의미)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우리 군대는 영미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할 것이다. 전국의 장병들이여! 이 나라 민족이 엄중한 고비를 맞아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보국하려는 이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근면하고 용감하게 충성을 다하여 적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울 것인지, 어떻게 우군과 동고동락하는 정신을 가지고 동생동사의 투쟁을 도모할 것인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 육해공군의 각 장교들은 모두 병력을 통솔하는 중책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군은 용맹스럽게 매진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우리 국군 모두가 정예병사가 되고 강군이 되어 지금의 신성하고 위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국가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적 영미의 기운을 빠르게 쓸어버리고,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나아가 동아의 공영 실현을 도모하고 세계평화의 완성을 도모하고 흥망성쇠를 이루는 이 일전을 함께 치루자. 그대들에게 큰 기대를 건다. 위원장 왕자오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