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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쟝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⑰ 패탱 원수의 교훈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패탱 원수의 교훈 (ペタン元帥の敎訓)

*이는 쇼와15 (1940)년 11월 4일, 왕선생을 에워싼 중국신문기자단과의 일문일답의 내용이다. 난징 환도이후 국민정부의 향후 방침과 내정, 외교, 경제, 군사 각 방면에 걸쳐 문답이 이루어졌다.

     

Q : 일본은 이미 신정치체제를 추진하고 있는데, 선생께서는 중국의 신체제운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A : 중국의 신체제운동과 일본의 신체제운동은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하지만 중국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 수단은 매우 다르다. 중국은 민국16 (1927)년부터 민국26년 (1937) 년까지의 기간동안 일종의 절반의 상태지만, 민주주의 국가였다. 진정한 전체주의 국가는 반드시 민중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군권에 의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 어느쪽도 군권에 의해 정권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니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때는 겨우 4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히틀러의 베를린 점령 또한 한 두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는 민중의 옹호에 의해 정권을 취득한 것이지 군권에 의한 것이 아님이 명확해진다.

     

중국이 어떻게 절반뿐인 현 상황을 형성했는가 하면 이것은 바로 항일의 결과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정신단결, 공가국난(‘국난극복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라는 뜻으로, 1932년 개봉한 항일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며, 공산당에서 제2차 국공합작을 제안하며 사용한 용어이기도 하다.) ’의 슬로건은 전국 전당을 강하게 압박했다. 민중의 기초를 공고히하여 중심세력을 결성해 집권의 목적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의 우리는 다시 이전의 수단, 즉 강압을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중국 신체제의 전야다. 우리는 모름지기 각 당파의 연합에 의하여 민중들과 함께 중심세력을 건립해야지, 이전처럼 민중을 강하게 압박해서는 안된다.

     

Q : 개조 환도이후, 국민정부의 외교방침은 무엇인가?

     

A : 현재의 외교는 대내적으로는 민중을 단결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맹방을 구해야 하며, 반독일-이탈리아와 영미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히 반대한다. 현재 일본과 소련은 타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 외교방침의 주요 목표는 동아에 중국과 일본의 중심축을 건설하는 것이다. 전쟁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전에 동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중심축개념을 이미 만들어 냈다,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Q : 환도 이후 국민정부의 재정정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국민경제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A : 옛말에 “정치의 핵심은 식량을 충족시키는 것, 병기를 충분하게 하는 것, 백성이 믿게하는 것” (논어 안연 편의 ‘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民信之矣’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국민정부의 국민정부의 재정과 국민경제에 대한 기본 원칙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공고한 재정의 기초는 중점주의를 채택하고 절약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에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시급히 전면화평을 실현하는 것에 있다. 전면화평이 실현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되게 되고 충칭은 더더욱 붕괴의 길을 향해가겠지만, 신정부 또한 고난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전면화평의 실현문제는 프랑스국의 예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패탱원수가 의연하게 독일과 화평을 맺은 것은 가장 위대한 애국애민의 정신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Q : 신중앙정부의 건군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A : 건군과정은 3가지 방면에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완전히 새로운 군대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 둘째는 귀순하려는 항전부대의 수용하는 것, 셋째는 지방의 잡군을 받아드려 재편성하는 것이다. 현재 지방의 잡군들은 재편성을 일단 중지하고 지방의 치안유지에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게 했다.

     

Q : 국민대회의 소집문제(1940년 9월 12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1941년 1월 1일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41년 1월 개최도 늦다는 반응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1941년 1월 1일에 국민대회는 개최되지도 못했다.)는 어떤지.

     

A : 헌정실시위원회(1940년 7월 20일 설립된 왕징웨이정권의 조직.)의 제1차 헌정위원 선정이후 헌정위원회의 전문위원회 및 중앙각부차장 책임장관은 현재 서로 협동하여 적극적이되 신중하게, 헌정초안의 심의와 수정공작을 실시하고 있다. 헌정초안과 수정안을 완성하는 과정 속 선거법의 심의와 수정이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가 있는데 이가 국민대표대회 선거사무소가 조속히 성립되지 않은 원인이다. 이 밖에도, 전시의 교통상태 속 각 성과 시의 대표들이 기일대로 출석할 수 있는지 여부 또한 고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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