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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1932~1947) / 1~5 통합판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만주국 - 만주중앙은행(滿洲中央銀行) 신징의 만주중앙은행 신 본점 건물이 그려진 엽서. 이 건물은 1938년 3월, 만주국의 수도 신징의 대동광장 앞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지상 4층, 지하 2층로, 건물 정면의 10개의 그리스식 기둥이 특징이다. (현재 이자리에는 중국인민은행 장춘시 지점이 위치해있다.) 만주중앙은행 건물은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정동궈 (鄭洞國, 정동국 ) 국민당군 사령관이 장춘 전투에서 공산당에게 투항한 곳이기도 하다. 만주중앙은행은, 1932년 7월 1일 설립된 만주국의 중앙은행이다. 만주국이 관동군의 작품이었듯, 만주중앙은행 역시 만주국의 몸통이었던 관동군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되지 않은 1932년 3월 15일, 관동군은 만주중앙은행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만주중앙은행 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국 총무장관이었던 코무이 도쿠조 (駒井徳三) 는 일본의 자본출자와 이전부터 만주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구 봉천군벌 자본이었던 동3성관은호(東三省官銀號), 변업은행(邊業銀行), 흑룡강관은호(黑龍江官銀號), 길림영형관은전호(吉林永衡官銀銭號)까지 4개의 은행을 합쳐서 만주중앙은행을 설립하려 했다. 만주중앙은행 초기에 사용되었던 본점건물. (옛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 1932년 6월 11일 만주중앙은행법(滿洲中央銀行法, 大同元年6月11日教令第26號 대동 원년 6월11일교령제26호) 과 만주중앙은행조직방법 (滿洲中央銀行組織辦法) 을 공포하여 만주중앙은행은 만주국의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출자된 3천만엔을 초기자금으로 하여 주식을 발행했다. 그리고 7월 1일, 개업과 동시에 동3성관은호, 변업은행, 흑룡강관은호, 길림영형관은전호를 통합하고 이곳의 자본까지 통합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8천만엔의 초기자본금을 가진 상태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은행의 본관은 신경 북대로에 있는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개업과 동시에 128개의 지점도 동시에 영업을 시작했다. 만주국이 성립된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만주중앙은행은 일본과 중국대륙에도 지점을 설치하며 점점 성장하게 된다. 만주중앙은행의 성립과정. 만주중앙은행은 일본자본과 일본이 점령한 구 봉천군벌의 자본의 결과물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혼란스럽게 유통되고 있는 이전 중화민국 / 봉천군벌의 화폐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법폐개혁 전이었기에 만주에서는 1. 봉천군벌소유 은행 '들' 이 발행한 화폐. 2. 기타지역은행'들'에서 발행한 화폐 3. 청, 중화민국 시기 발행된 은동전 (銀圓) 들 등 너무나 많은 종류의 화폐가 화폐가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이러한 화폐들의 남발을 막기 위해 구화폐정리판법(舊貨幣整理辦法) 을 통해 이전에 만주지역에서 봉천군벌의 은행들이 유통하고 있던 은행들을 회수, 교환하게 했다. 교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1934년의 시점에서는 93%, 교환이 종료되던 1935년의 시점에는 97%가 회수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뤄진 구화폐 → 만주국 원으로의 교환. 화폐종류가 너무나 많이 혼용되고 있었기에 각 화폐마다 교환비율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초기에는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자신들의 만주국 원과 중화민국에서 주로 통용되던 은동전 은원(銀圓)과 1:1의 교환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1934년, 미국정부에서 은 매입법이 통과되면서 세계 은값이 급상승하게 되자, 만주중앙은행은 은본위제도를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의 법폐개혁이 이루어진 원인중 하나도 이 미국의 은구매법이었다.) 만주국은 1935년 4월,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금본위제도를 도입하려하며,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일만 환율 등가 유지에 관한 성명 (満日為替相場等価維持に関する声明)'을 11월 4일에 발표하면서 만주국 원과 일본엔은 등가가 되었다. 즉 만주국 1원 = 일본 1엔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중앙은행이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주중앙은행은 세계최초로 '통화 스왑' 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만주국의 만주국 원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은행의 지폐와 조선은행의 조선은행권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1935년 11월 4일부로 관리통화제도(금본위제도와 일본엔과의 환율등가)를 도입하면서 조선은행권이 퇴출되게 되면서 조선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은 예금협정을 맺고 만주중앙은행은 조선은행권을 회수한 만큼 조선은행 앞의 예금을 늘리고, 조선은행은 만주중앙은행 예금액만큼 화폐발행액을 줄였다. 거래의 목적은 현재의 통화스왑과는 달랐지만 두 중앙은행의 계약으로 자산과 부채가 연동되어 움직였다는 점은 현재의 통화 스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주중앙은행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바로 전날이었던 1935년 11월 3일,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은본위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의 화폐는 초기에는 일본의 조폐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만주국의 조폐공장에서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만주국 말기의 일이었다. 동전의 경우 옛 봉천성 조폐창을 이용하려했으나, 설비가 오래되고 이조차도 만주사변 과정에서 방치되면서 만주국은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신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1932년 6월 만들어진 '화폐법'에 따르면 만주국 원은 4가지의 단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1원(圓) = 10각(角) = 100분 (分) = 1,000리 (厘) 원/각/분/리 라는 현재 중국대륙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십진법 체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화폐법에 따르면 화폐의 종류는 9종류로 규정이 되어있다. 100원 / 10원 / 5원 / 1원 / 5각 = 지폐 1각 / 5분 = 백동 동전 1분 / 5리 = 청동 동전 5종의 지폐, 4종의 동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전의 경우 백동과 청동을 사용하는 동전을 구분하였다. 만주중앙은행의 첫 화폐 시리즈. 종류는 9가지지만, 여러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처음으로 등장한 화폐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요소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오색기와 모란꽃, 푸이의 집무실이었던 근민루 (勤民樓)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5원을 제외하면 지폐의 색도 파란색으로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발행시기를 생각해보면, 화폐법 제정 (1932.6) 으로 부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난이후에 화폐가 발행되었다. 가장 늦게 나온 1분짜리 동전이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1년 2개월, 가장 빠른 5각짜리 지폐가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발행이 되었다. 그렇다면 화폐법 제정 - 신화폐 발행 사이에 적어도 3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이 기간에는 어떻게 화폐를 처리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이전에 사용되던 동삼성관은호 지폐에 '만주중앙은행' 이라는 도장을 찍어 사용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국가들이 전시에 우표나 지폐에 도장을 찍어 임시적으로 사용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에다가 '만주중앙은행' 이라고 적혀있다.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는 만주국에서 발행될 1원짜리 화폐와 가치도 완전히 동일했고 발행량도 많았기에 임시지폐로 선정되었다. 만주국 측에서는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이용해 1원권, 5원권, 10원권 이렇게 3종류의 지폐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원과 10원 두개 종류만 만들어지고 5원권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2차, 3차시리즈의 등장 이른바 '乙시리즈' 라 불리는 만주중앙은행 2차발행권. (이시기 동전은 1차 발행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35년 부터는 새로운 2차 발행권들이 등장했다. 1차발행권이 모두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다양성이 커졌다. 공자, 맹자, 그리고 중화권에서 재물의 신으로 취급되는 조공명처럼 중화권의 고전시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만주국의 국장을 지폐의 전면에 배치했다. 뒷면 또한 이전의 화폐법 내용만 고작 적혀있던 모습에서 만주중앙은행의 인장과 함께 만주국 국무원, 만주중앙은행 건물등 주요 건물들이나 풍경을 배치하는등 이전과 차이를 두었다. 하지만 화폐법과 관련된 내용은 이전처럼 계속 존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고액권인 100원짜리의 뒷면에는 양떼들이 그려져있는데, 이때문에 당대 만주국에서는 돈이 많다라는 뜻으로 "양을 많이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1원짜리와 5각짜리의 장원과 문방은, 어디의 장원과 문방을 가져온것인지 알기 어렵다. (일본과 중화권 인터넷에서도 이 두곳이 어디인지 의문을 가지는 글들이 있었다. 장원의 경우 신징의 만주국 황궁의 장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 일본과 만주국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속 자원부족이 시작되면서 동전의 재료가 달라지게 된다. 1939년, 화폐법을 개정하여 '동전의 재료 규정'을 삭제하여 이전의 백동 / 청동이 아니라도 동전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자원부족속에서 동전들은 새로운 재료들로 제작되었다. 1각 : 백동 → 백동(2차) → 알루미늄 5분 : 백동 → 알루미늄 1분 : 청동 → 알루미늄 5리 : 청동 → 제작중지 (알루미늄 동전이 계획되었었음) 모든 동전이 제조가 용이하고 단가가 저렴한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금액이 큰 1각 동전의 경우 2대 동전이 초기에는 이전과 같이 백동으로 발행되었으나, 8개월만에 새로운 도안과 함께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5리 동전의 경우 본래 청동버전과 이를 대체할 알루미늄버전이 계획되었으나 발행이 되지 않고, 5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만주국의 2차 발행 동전들. 재료가 모두 알루미늄으로 바뀌었고 1각짜리 동전은 백동화가 등장했다가 알루미늄화로 바뀌었고 5리 동전은 사라졌다. 동전까지 신동전으로 바뀐 이후, 5각 지폐가 1941년 1차례 변화한 것 말고는 (이것도 도안의 변화가 아닌 인쇄색의 변경에 가까웠다) 1944년까지 계속하여 쓰이게 된다. 1944년에는 동전과 지폐가 모두 바뀌게 되어 3차 변화를 겪게 된다. 동전의 경우, 동전의 두께가 이전보다 얇아졌는데 (예로 1각 동전의 두께는 40%가 줄어들었다) , 이는 1944년 시점에서 태평양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일본에게 있어 알루미늄도 이제는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3차발행권 '丙시리즈' 의 모습. 1각(角) 지폐가 추가되었다. 3차 발행권에서는 지폐의 경우 전면의 경우에는 거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면의 경우 인쇄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후면의 그림이나 글씨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1각짜리 지폐가 추가되었다. 이는 1각짜리 동전에 발행되는 알루미늄을 절약하려 한 것으로, 1각짜리 지폐가 1944년 9월 발행되면서 1각짜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폐가 일본이 아닌 만주에서 직접 생산되기 시작했다. 본래는 일본에서 지폐를 발행하고 이를 선박을 통해 만주로 수송하였는데 (이 수송과정에서 부관연락선도 사용되었다.) 이 선박들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만주의 화폐를 더이상 일본에서 생산하는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처음에는 1각짜리 지폐만 만주에서 생산되었으나, 이후 생산이 확대되어 지폐에는 도안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쓰이며 이전처럼 "일본제조" 라고 적혀있으나 생산은 모두 만주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시점부터 만주에서 만들어진 지폐에는 특별한 기술이 숨어있는데, 또한 전쟁이 격화되면서, 연합국 충칭정부와 미국또한 만주국과 일본을 혼란시키기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 연합군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의 지폐를 위조해 항공기를 통해 일본 점령지에 살포했다. 만주국측에서는 이러한 위조지폐 살포를 통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내몽고에서만 생산되는 특별한 염료를 지폐에 사용해 이를 방지하려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만주중앙은행 태평양전쟁의 말기 1945년에 들어오면서, 만주국은 극심한 자원난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문에 화폐 발행에도 많은 변화가 등장하게 된다. 첫 째는 잉크- 용지의 변화다. 1945년에는 3차 시리즈와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른 잉크와 저품질 용지를 사용해 화폐를 제작했다. 이를 丙시리즈의 개조판이라고 하여 45년에 발행된 화폐들을 丙改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주중앙은행 1000원권. (실제로 발행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고액권의 발행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전시경제체제가 붕괴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고액권의 발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1000원권을 계획하고 실제 도안도 완성이 되었으나, 유통은 이뤄지지 못했다. 셋째는 동전에서 사용되는 알루미늄의 대체였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만주국은 1940년부터 동전에서 자원절감을 위해 알루미늄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1944년과 45년 시점에서는 이 알루미늄도 부족하게 되었다. (사실은 일본의 알루미늄 필요에 의해 만주국 또한 알루미늄을 공출해야했던 상황에 더 가깝다.) 이로 인해, 만주국에서는 동전 발행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루미늄을 대체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주국에서는 이를 위한 두가지 방법이 병행되었는데, 첫째는 지폐의 발행이다. 5분(分) 짜리 지폐를 새롭게 도입함으로서 동전 제조에 사용되는 자원을 아끼려 했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1. 동전을 대체할 지폐를 발행하기 (지폐는 1각 지폐와 마찬가지로 만주제국인쇄창에서 만들어졌다.) 둘째는 신소재를 이용한 동전의 발행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운 5분, 1분짜리 동전을 발행하게 된다. 도안은 1944년에 만들어진 3차 동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문제는 마그네사이트가 동전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그네사이트는 금속중에서도 매우 약한 금속이었기에 쉽게 부서지거나 형태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시기 마그네사이트로 만들어진 동전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전쟁 말기 부족한 환경속에서 부족한 기술속에서 이루어진 금속 제련의 결과, 더더욱 동전의 품질은 나빠졌다. 동전이 부서지는건 기본이요, 몇번만 부딪쳐도 글씨가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2. 새로운 재질로 동전을 만들기. 만주중앙은행은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이 동전을 만들었다. 당대 만주에서는 이 동전을 보고 도자기에 쓰이는 흙 도토(陶土)와 비슷한 색이나는 것을 보고 흙으로 동전을 만든건가?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만주중앙은행은 여기서 더나아가 실제로 "도자기 동전" 을 기획하기도 했다. 세라믹으로 코팅된, 마치 주방의 접시와 같은 재질의 동전을 기획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약해 이는 실제로 발행되진 못했다. (시제품을 중국대륙 지린성의 당안관 (檔案館)의 만주관련자료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5분 동전의 경우 백동에서 알루미늄으로, 알루미늄에서 마그네사이트로, 마그네사이트에서 지폐로, 혹은 도자기로, 기구한 운명을 겪은 셈이다. 만주국 붕괴 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의 운명 1945년 8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만주작전을 통해 관동군이 붕괴되면서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도 그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만주국 붕괴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 8월 20일, 소련군은 만주중앙은행을 장악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만주중앙은행이 사라진 소련군 치하에서도 만주국 원의 발행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가장 신용할 수 있는 화폐가 아이러니하게도 만주국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가 해방되면서 만주에는 다시 많은 화폐가 유입되었다. 국민정부의 법폐도 돌아왔고, 공산당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도, 소련군이 만주에서 자체발행한 군표도 만주에서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 절대다수가 이전까지 사용하고 있던 만주국 원에 비해서는 신용도가 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 (동북은행의 동북지역유통권) 과 만주중앙은행 원을 1:1 비율로 등가 교환하게 했다. 이후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이에 자신이 소유한 동북은행을 통해 만주국 원을 자신들의 화폐로 교환을 추진했다. 1946년 3월, 중국공산당은 만주국 원 : 동북은행지방유통권 원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도 만주국 원은 계속 유통되었는데, 이는 국민정부가 공산당이 동북은행권을 통해 만주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이전까지 만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국 원을 통해 동북은행권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이러한 만주국 원의 유지시도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국 원의 평가절하, 기간내 사용정책을 이용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만주국 원을 빨리 교환하게 해 대다수가 동북은행권으로 옛 만주국돈을 바꾸어버리면서, 국민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1947년 1월 15일부터 만주국 원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면서, 만주국 원은 발행 15년만에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몽강연합자치정부 - 몽강은행(蒙疆銀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도였던 장자커우에 위치한 몽강은행 본점의 모습. 몽강은행의 전신, 찰남은행 몽강은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몽강은행의 전신이 되는 찰남은행(察南銀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은 차하얼(察哈尔)성, 쑤이위안(绥遠)성을 비롯 장자커우를 비롯한 내몽고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내몽고 지역에 친일성격을 띄는 자치정부들을 성립하게 된다. 1937년 8월 27일 장자커우를 점령하고 장자커우에 9월 4일에 찰남자치정부(察南自治政府) 를, 9월 13일에는 다퉁을 점령하고 10월 15일에는 진북자치정부(晋北自治政府) 를 설치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행정구역도. 진북정청 (晉北政廳) 과 찰남정청 (察南政廳) 은 옛 진북자치정부와 찰남자치정부가 자리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찰남자치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차하얼성의 상업전국을 장악하고, 이 상업전국을 개편하여 1937년 9월 27일 찰남은행 (察南銀行) 이라는 은행을 세웠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주도로 100만 위안(圓)의 자본을 가지고 설립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점령한 찰남을 비롯한 내몽고지역에서 국민정부의 법폐 & 공산당의 지폐에다가 일본이 점령하면서 조선은행, 만주중앙은행등에서 새로이 들어온 일본계열의 지폐 등등 무려 9개은행의 지폐들이 유통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중앙은행으로서, 1937년 10월 10일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찰남은행은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현지역에서 발행되고 있던 화폐를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찰남은행의 경우, 신 지폐를 발행하려 했으나, 그 여력이 부족해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미 한번 재사용과정을 거친,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다시한번' 재사용 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삼성관은호 1원 지폐 (원본) → 만주중앙은행이 임시사용함 (1차 재사용)→ 만주중앙은행에서 이걸 찰남은행에 주어 사용하게 함 (2차 재사용) . 맨처음동삼성관은호에 밑줄을 긋고 만주중앙은행 도장을 찍었고 거기에 또 밑줄을 긋고 찰남은행이 사용한 모습이다. 이 동삼성관은호 지폐는 중화민국 18년 (1929년) 에 처음만들어져서 사용되다가 만주중앙은행을 거쳐 (1932년) 찰남은행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1937년) 어떻게 보면 기구한 운명의 지폐라 할 수 있겠다. 찰남은행 생산지폐 (*는 실제발행되지는 못함) 동삼성관은호 / 만주중앙은행임시권 → 찰남은행 1원(圓) / 10원 차하얼상업전국권 → 찰남은행 1원(圓)* / 20원* 차하얼상업전국의 지폐를 재활용한 찰남은행 지폐. 견본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것으로 보아 이 지폐를 발행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 발행되지는 못했다. 《북지경제도설 쇼와15년 판(北支経済図説 昭和15年版) 》에 따르면, 찰남은행에서는 위의 사진처럼 다른 지폐도 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여력이 되지 않아 만주은행으로 부터 구 동삼성관은호 지폐를 개조한 지폐들만이 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찰남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찰남을 비롯한 몽강지역에서의 일본은행권 / 만주중앙은행권 / 찰남은행권을 제외한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긴급통화방위령(緊急通貨防衛令) 을 공포해 '20일'이라는 기간동안 그동안 사용하던 지폐들을 교환 / 회수하게 했다. 일본과 찰남측이 이러한 교환조치를 서두른데에는 당시 이지역에서 추산 천만 위안가량의 법폐, 공산당 지폐, 옛 군벌지폐등등 지폐가 남발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너무나 많이 유통되고 있는 지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교환 / 회수조치를 통해 이지역의 금융질서를 장악하고자 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수도인 장자커우, 그리고 진북자치정부의 다퉁, 그리고 몽골연맹자치정부의 후흐허트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북자치정부에서는 옛 산서성지폐에 정부도장을 찍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찰남은행권 또한 유통이 되고 있었다. 1937년 12월, 몽골연맹자치정부가 출범하고 진북-찰남-몽골연맹정부가 통합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찰남은행은 진북-찰남-몽골연맹지역 모두를 포괄할수 있게 '몽강은행'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확대 개편되게 되었다. 찰남은행이 개업 2달도 되지 않아 후에 서술하게 될 몽강은행으로 확대개편되버리면서 이 시기 만들어진 임시 찰남은행권은 발행 수도 많지 않을 분더러 대부분 회수과정을 거쳤기에 현재 찰남은행권은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다.) 이렇게 찰남은행은 2달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찰남은행권은 몽강은행이 생긴 이후에도 약 4달가량 더 사용되다가, 1938년 4월 몽강은행에서 신지폐 발행이 완료되면서 유통이 정지된다. 몽강은행의 설립, 몽강은행권(몽강권) 의 제작 몽강은행의 성립과정. 몽강은행은 일본과 그 괴뢰정부들의 작품이었다. 몽강은행은 일본과 괴뢰정부의 작품에 가까웠다. 기존의 찰남은행에다가 1937년 11월 11일 결성된 몽골연합위원회를 구성하는 몽골연맹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가 각각 4천만 위안씩, 총 1억 2천만 위안을 모으고, 여기에 일본에서 출자된 600만 위안을 합쳐 1937년 11월 23일 설립되었다. 또한 당시 지역에서 영업중이던 찰남풍업은행(察南豊業銀行), 수원성은행의 몽강지점, 기동은행의 몽강지점을 통합해 1937년 12월 1일 장저커우의 고루서가(鼓楼西街) 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다퉁, 후흐허트등 몽강지역 뿐만 아니라 톈진이나 베이핑지역까지 주재원을 파견했다. 이후에는 이 지역들에 지점들을 건설하고, 도쿄에도 사무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초기 총재는 바오웨칭 (包悦慶,포열경) 이라는 이가 맡았고, 부총재는 일본인 야마다 모지(山田茂二) 가 맡았다. 하지만 1942년부터는 총재도 일본인이 하게 되는 등, 몽강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지배 속에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몽강은행은 설립 초기 약 한달가량은 이전의 찰남은행권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1938년 1월부터 새로운화폐가 발행되고 4월에 발행이 완전히 완료되면서 이전의 찰남은행권은 사용이 중지되고 회수가 되었다. 몽강은행은 초기 지폐 4종류 (1원, 5원, 10원, 100원) 과 동전4종류 (5각, 1각,5분, 1분) 를 발행했다. 지폐는 일본에서 인쇄가 이루어졌고, 동전의 경우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에서 발행한 동전을 공급받아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후 1938년 8월 16일, 5각 동전은 커우베이 조화창 (口北造貨倉) 에서 자체 제작해 사용한다. 몽강은행의 첫 화폐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의 경우 한번 도안이 바뀌었고, 동전의 경우 5각짜리를 제외하면 만주중앙은행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권의 경우, 한번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처음에 발행된 100원의 경우, 임시권의 성격이 강해 종이의 품질이 좋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특징으로는 '몽강' 인 만큼 만주국과 달리 몽골문자가 처음부터 혼용되었다는 것이다. 유목지역인 만큼 낙타나 양같이 유목지역을 상징하는 동물들이 많이 그려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동전에서는 '중화민국 27년' 처럼 중화민국의 기년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자체 화폐를 발행함과 동시에 한가지 조치를 실시했는데, 이는 바로 뒤에서 소개할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연은권(聯銀券)의 사용을 금지한 것이었다. 민간에서 몽강권이 아닌 연은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괴뢰정부 지역끼리의 화폐가 혼용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일본에서는 일본돈이, 만주에선 만주돈이, 임시정부에선 임시정부 돈이, 몽강돈이 사용되길 기대했다. 또한 찰남은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몽강은행도 몽강에서의 사용가능한 화폐를 몽강은행 지폐와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으로 제한했다. 이는 일본의 지배를 용이하게 위한 것이기도 했고, 당시 만주국 원이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던 것처럼, 몽강권 또한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42년 발행된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에 따르면 이런 금지조치에도, 민간 내에서는 연은권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처럼 완전한 통화의 장악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40년에는, 1원짜리 지폐를 새롭게 공개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만주중앙은행에서 공급받아 사용하고 있던 5각, 1각,5분 짜리도 지폐로 만들게 된다. 1940년 7월 1일에는 5분, 1각짜리 지폐가, 1940년 8월 10일에는 5각짜리 지폐가 등장했다. (중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8월 15일 발행되었다고 하지만,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 에서는 8월 10일을 제시한다.여기서는 당대기록인 지나중앙은행론을 따랐다. ) 5각, 1각, 5분도 지폐로 발행된데에는 자원문제가 가장 컸다. 동전으로 제작하지 않은 이유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 자원부족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작은 단위의 화폐도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지폐로 5각, 1각, 1분을 발행함과 동시에 자원확보를 위해 시장에 유통되어 있었던 만주산 동전들을 회수하기 시작했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이시기 몽강에 공급되었던 만주동전은 제작에 용이한 알루미늄 동전도 아니었기에 더욱 회수가 중요했었다. 몽강권의 현실과 한계 몽강은 왕징웨이정권의 일부가 되었지만, 몽강은행과 몽강은행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0년 이 시기 몽강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몽강은 '몽강자치구' 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정부조직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본과 덕왕을 비롯한 기존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편과 같이 일부조직에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몽강의 경우, 1941년 1월,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되었음에도, 몽강은행권의 유통과 사용은 계속되게 된다. 중앙저비은행의 저비권은 몽강에서 오히려 연은권보다 낮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왕징웨이가 세운 중앙저비은행은 몽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몽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강화했다. 몽강은행은 몽강의 자원을 수탈하는 일본 기업에 투자와 대출을 제공했고, 일본의 국채, 공채를 몽강은행이 구매함으로서 일본의 몽강개발을 가속화하고 일본내의 재정압박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예로, 전쟁이 계속되고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1941년에 일본은 전비마련을 위해 몽강은행에 일본국채 구매를 종용한다. 몽강은행은 일본 국채 1억 원(위안) 을 구매하면서 몽강은행은 가지고 있던 금 보유고를 대부분 지출해야 했고, 이 때문이 몽강은행은 운용자금이 부족해지며 부실해지게 되었고, 이에 화폐를 남발 하게되면서 몽강지역의 물가는 급상승하게 된다. 1938년 말 대비 1941년 말에는 화폐 발행이 300% 증가했고, 이로 인해 물가상승으로 몽강의 주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즉,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자국의 물가안정과 전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몽강은행을 일본이 수탈하면서 그 부작용은 모두 몽강의 주민들이 책임지게 된 셈이었다. 북지경제도감(北支經濟圖鑑, 1942) 에 표기된 몽강은행권의 발행액수, 중일전쟁이 지속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발행액수가 크게 늘었다. 같은 책에 표기된 몽강자치연합정부의 수도 장자커우의 물가. 쇼와13 (1938년) 에 비해 쇼와 16 (1941년) 말에는 3배 넘게 올랐다. 같은 시기, 도쿄의 물가가 10%가량 오른것에 비하면 아주큰 상승이다. 1942년에는, 새로운 동전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전 1940년에 모두 지폐로 대체되었던 1각, 5각이 만주와 마찬가지로 그나마 마련하기 쉬웠던 알루미늄 동전으로 대체되었고, 지폐에서는 없었던 1분 짜리가 새롭게 동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가장 큰 단위인 5각은 동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5각의 경우 동전이 아닌 지폐로 계속 발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동전에서는, 이전 1938년의 동전과 달리 발행년도에서 중화민국의 민국기년이 아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성기(成紀) 기년법이 사용되었다. (사진의 성기738년은 1943년을 의미.) 성기기년법은 징기즈 칸의 제위인 1206년을 기원으로 하는 기년법으로, 몽골제국의 부활을 이야기하던 몽강연합자치정부에서 사용되었던 연호였다. 이렇게 성기기원을 사용한것은 이제 몽강이 중국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것이었다. 몽강이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의 일원임에도 이런 움직임을 보였다라는 것은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몽강에는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시기에는 기존의 종이시리즈도 혼용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몽강은행 몽강은행의 마지막 지폐들. 만주와 마찬가지로 지폐생산과정에서 드는 자원을 절약하려 재질이나 잉크면에서 품질이 나빠졌다. 1944년에는, 10원권과 5각을 새롭게 발행했다. 하지만 이때 발행된 5각의 경우 발행량이 아주 적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100원이 새롭게 발행되었다. 만주가 그랬듯, 몽강도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며 자원부족으로 인해 지폐의 질도 이전보다 나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몽강연합자치정부 붕괴 이후 몽강은행과 몽강권의 운명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몽강연합자치정부 또한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몽강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만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몽강권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붕괴 이후에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몽강지역에서 사실상 유일한 화폐로 취급되고 있었던 몽강권을 쉽게 대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만주와 다르게 중일전쟁이후, 몽강의 경우 국민당과 공산당 둘다 몽강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점령지는 중국공산당의 밑에 있었다.) 이렇기에 국민정부와 공산당 모두 몽강권에 대한 교환작업을 실시하게 된다. 국민정부의 점령지역의 경우를 보면, 국민정부는 몽강은행을 중화민국 중앙은행에 합병하고 중화민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1947년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몽강은행돈을 1:0.4의 비율로 다시 법폐로 교환하게 했다.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4각 (1:0.4) 하지만, 국공내전의 혼란속 이러한 교환사실은 몽강의 도서지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3개월이라는 짧은 교환기간 속에서 많은 이들이 다시 법폐로 돈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이결과 외딴지역에서는 많은 몽강권이 교환되지도 못한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몽강권 교환의 실패는 국공내전에서 몽강지역이 국민당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이유중 하나기도 했다. 반면, 옛 몽강연합자치정부 지역 일부를 점령한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의 승리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46년 4월부터 자신들이 소유한 섬강녕변구은행 (陝甘寧邊口銀行)의 지폐로 바꿀 수 있게 했다. 교환과정에서 교환 한도는 없었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였으나,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섬강녕변구은행 5원 (1:5) 의 비율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로 3달이라는 짧은기간이었던 중앙은행 법폐로의 교환과 큰차이가 있지 않지만,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공산당 점령지에서는 많은 이들이 돈을 바꾸는데에 성공했다. 이는 대부분의 구 몽강자치연합정부 지역이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었기 떄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몽강권 회수성공은 국민정부에 비해 몽강에서 공산당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기동방공자치정부- 기동은행(冀東銀行) 퉁저우(通州)의 기동방공자치정부 청사의 정문.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을 통해 획득한 산해관이북의 비무장지대를 기동사변을 통해 장악하고 괴뢰정부를 옹립했다. 계획보다 늦은 은행의 설립, 실패한 화폐발행계획 1933년 5월 31일 체결된 당고정전협정을 통해 일본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산해관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설립하게 했다. 본래 이 비무장지대에는 일본도, 중국도 병사를 주둔해서는 안되었지만, 이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를 원했던 일본은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을 일으켜 이지역에 인루겅(殷汝耕,은여경) 을 옹립해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만들고 수도를 퉁저우로 하는 기동방공자치정부를 설립했다. 기동은행의 설립에는 두가지 날짜가 제시되는데, 지나경제연보 쇼와11년판 (支那経済年報 昭11年版) 에서는 1935년 12월 4일, 기동은행을 설립하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최신지나요람 쇼와11년 9월간(最新支那要覧 昭和11年9月刊)에 따르면, 1935년 12월 26일에 기동은행을 설립하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되어있다. 이렇게 같은 은행의 날짜의 설립에 두가지 날짜가 언급되고 있어 그 진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날짜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이 두날짜는 모두 '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 한 것이지 '은행 설립' 의 날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동정부의 수립으로 부터 멀지않은 기간에 은행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퉁저우 기동은행 본점의 모습. 실제 은행의 설립은 이보다 훨씬 늦게 이루어졌는데, 은행 설립의 결정으로 부터 6개월이 지난 1936년 6월 11일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한 500만 위안가량의 주식을 발행, 1936년 7월 1일에 정식으로 영업을 하려 했으나, 실제 기동은행이 개업된 것은 한참 늦은 1936년 11월 1일이었다. 기동은행은 퉁저우에 본점을 두었고 본래 탕산(唐山), 창리(昌黎), 친황다오 (泰皇島) 3곳에 지점이 있었으나, 1937년 이후로는 지점을 확대해 베이징, 펑톈등 기동방공자치정부의 22개 현과 외부지역에 총 15개의 지점을 설립했다. 기동은행의 로고. 22개의 별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22개현을 나타내고, 왼쪽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오색기를 표현했다 (위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않지만) 당시 기동방공자치정부 지역에서도 여러 화폐가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동은행의 경우, 만주중앙은행과 몽강은행에 보였던 것처럼 지역에서 구 화폐의 교환을 강행하지 않았다. 기동은행의 화폐는 정부수립으로부터 1년 반 가까이가 지난 1937년 3월 10일이 되어서야 발행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 기동은행의 화폐는 기동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중 하나로 취급을 받았지, 유일한 화폐로서 위치하지 않았다. 기동은행권을 강제하지 않은 이유로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던 기동정부에 굳이 중일전쟁도 발발하지 않은 상황에 굳이 기동이라는 좁은 지역을 위해 화폐를 강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동은행은 4종류 (5각, 1원, 5원, 10원) 의 지폐와 5종류의 동전 (2각, 1각, 5분, 1분, 5리)을 만들었다. 지폐는 일본 조폐국에서 만들어졌고, 동전의 경우도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되었고, 2각, 1각, 5분의 경우 백동으로, 1분과 5리의 경우 구리로 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2단위의 화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기동은행의 화폐들, 1937년 3월 10일, 5각짜리와 10원짜리 지폐를 시작으로 여러종류의 화폐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 (기동권) 은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앞에서 보았듯 기동은행권이 기동방공자치정부에서 유일하게 쓰이는 지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동권의 발행에도 여전히 중국의 다른은행의 화폐들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중 하나에 불과했던 기동은행의 기동권은 큰 점유율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중일전쟁이후 일본 폭격기가 기동방공자치정부 지역을 오폭하면서 발생한 퉁저우사건 (通州事件) 에서 분노한 기동방공자치정부 보안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군대역할을 했었다) 와 민중들이 퉁저우 기동은행 본점도 공격해버리고 기동은행권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해버리면서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민중들은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낮아진 기동은행권의 가치로, 일본계 은행들은 기동은행권을 취급중지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사태가 수습되면서 일본계은행들의 취급중지는 종료되었으나, 이러한 타격의 영향은 계속되게 된다. 1937년 9월의 북지경제독본(北支經濟讀本)에서는 기동은행을 두고 " 貧弱でとるに足らない (빈약하여 보잘것없다.)" 라고 기동은행을 평가하는 등,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은 기동정부의 중앙정부이자 중앙은행권임에도 힘을 쓰기 어려워지면서 실패로 남게되었다.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 (기동권)의 결말 도안까지 준비되었지만 발행되지 못한 기동은행의 100원(圓) 권. (이때문에 이 견본 지폐의 경우 24,000달러가 넘는 고액에 거래되기도 했다.) 기동은행이 이렇게 성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1937년 12월 14일에는 베이핑(징) 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맞설 수 있는 기동방공자치정부보다 더 큰 규모의 정부의 성립이었다. 그리고 기동방공자치정부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1938년 1월 30일, 기동방공자치정부의 지도자 치쭝모(池宗墨)와 임시정부의 지도자 왕커민(王克敏)의 합의로 1938년 2월 1일로 중화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게 되었다. 기동방공자치정부가 임시정부로 통합되고, 다음으로 이야기할 임시정부의 중앙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中國聯合準備銀行)이 1938년 3월 10일 설립되었다. '연합' 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은행의 통합과정을 통해 탄생한 은행이었다. 그리고 이과정에 기동은행도 참가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다루지 않고 바로 밑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이야기를 할때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성립되면서, 기동은행은 중국연합준비은행 산하의 일반은행이 되며 임시정부에서 역사를 이어나가게 된다. 기동은행권은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성립된 3월 10일부로 지폐 생산을 종료했다. 하지만 기동은행권은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된 다음날인 3월 11일 공표된 "구통화관리방법 (舊通貨整理辨法)"에서는 일정기간동안 임시적으로 이전에 사용되던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 1938.3.11 중국연합준비은행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 기동은행(冀東銀行) 의 화폐 / 교통은행(交通銀行) 산동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산동권 → 1939년 3월 10일까지사용가능 (1년) 교통은행(交通銀行) 남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남방권 / 중앙은행 (中央銀行) 중국실업은행(中國實業銀行) / 북양보상은행 (北洋保商銀行) / 중국간업은행 (中國墾業銀行) / 절강흥업은행 (浙江興業銀行) / 대중은행 (大中銀行) / 변업은행 (邊業銀行) / 중국농공은행 (中國農工銀行) / 중남은행 (中南銀行) / 중국통상은행 (中國通商銀行) / 농상은행 (農商銀行) / 사명은행 (四明銀行) / 중국농민은행 (中國農民銀行) 의 화폐 → 1938년 6월 10일까지 사용가능 (3개월) (이후에는 연은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용불가) 구통화관리변법에서는 기동권을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된 후로부터 1년이 되는 1939년 3월 10일까지 사용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옛 기동권에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부여해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기동은행 동전의 경우, 실제로는 이 1년이라는 유예기간보다 더 긴 기간동안 사용되어 왕징웨이정권이 세워지고 1년이 넘게 지난 '1941년 5월 31일'까지 사용되게 된다. 이는 왕징웨이정권에서 화북지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화북정무위원회가 내린 조치 때문에 가능했다. (기동은행의 동전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의 소액 동전도 이때까지 사용된다.) 찰동은행에서 발행한 임명장. 민국32년 (1943년) 3월 24일자. 톈진 지점의 직원에게 주어졌던 임명장이다. 문서의 빨간 동그라미 로고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로고로, 찰동은행이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산하 은행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임시정부의 일반은행이 된 기동은행은 이렇게 임시정부, 이후 임시정부를 사실상 계승한 화북정무위원회에서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산하 은행으로 계속 존속하게 된다 . (1942년 5월 15일부터 7월말까지 2년만기, 연 이율 3%을 주는 예금 / 적금 모집을 한 자료도 남아있다.) 이후 중국연합준비은행이 해체되는 1945년 9월 30일을 통해 기동은행도 함께 해체되게 된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국연합준비은행(中國聯合準備銀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베이징 본점 (2대). (현재 중국대륙 베이징시 시청구 시자오민샹 17호, 北京市西城区西交民巷17号) 이곳은 본래 북양보상은행(北洋保商銀行)가 자리하고 있었다. 북양보상은행은 중일전쟁이후 영업을 중단했고, 이후 북양보상은행자리를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차지한 것이다. (현재 이곳중국인민은행을 거쳐 중국화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통합의 산물, 중국 '연합' 준비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1937년 12월 14일 베이징(핑)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앙은행으로, 1938년 3월 10일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화북지역에는 적어도 11개 이상의 은행에서 발행한 통화들이 혼용되고 있었고,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군표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적어도 화북에서 3~4억 위안 가량의 법폐들이 유통되고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일본과 임시정부는 이러한 혼용으로 생기는 혼란을 끝내고, 화폐를 통일하여 화북지역의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된 화폐의 권위를 통해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만드는 법폐에 맞서려 했다. 일본측은 임시정부의 이러한 통화통일시도를 '대담한 시도' 라 서술하기도 했다. 정부수반이자 재정장관이었던 왕커민 (王克敏, 왕극민)은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38년 1월 6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는 앞으로 생기게 될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1月)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중앙은행은 중화민국임시정부와 중국측 은행들의 공동출자로 설립하기로 한다. 2. 자본금은 5천만 위안으로 하고, 반은 정부가, 반은 민간이 출자하기로 한다. 3. 신중앙은행은 유일한 화폐발행은행으로써 신화폐를 발행하기로 한다. 4. 중국연합준비은행에 참가하는 은행의 화폐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새로운 화폐로 일정기간내에 교환·회수하기로 한다. 5.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 (통합혹은 산하로 둠) 하는 은행은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중국은행(中國銀行)*, 교통은행(交通銀行)*, 금성은행(金城銀行)*, 대륙은행*(大陸銀行), 중남은행*(中南銀行), 기동은행(冀東銀行), 염업은행*(鹽業銀行) 8개로 한다. (*표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점령지에 있는 지점들만 해당) 이름처럼 , 중국 '연합' 준비은행은 화북지역에 존재하는 은행들을 통합 & 산하에 두는 방식을 통해 설립하려 했다. 그리고 현지정보북지경제지리 (現地報告北支経済地理) 에 따르면, 여기에는 하나의 내용이 더 존재한다. 이는 바로 6. 일본측의 은행들로부터 1억 위안의 차관을 받는다. 인데, 이 내용은 현지정보북지경제지리에는 서술되어 있으나,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1月)나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 것같다. 그리고 다음날, 1938년 1월 7일,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정부차원에서 화북지역 (중화민국 임시정부 점령지역) 의 통화안정과 통화의 통일을 목표로 신중앙은행인 중국연합준비은행을 건설하겠다는 취지를 담은성명을 발표했다. 정 부 성 명 서 (1938.1.7) 중국의 화폐제도는 개혁이래, 표면상으로는 안정이 된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직 취약한 상태임에도 이를 등한시해버려, 지금의 중대한 위기로 인해 안정화의 기초는 뿌리로부터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통화의 안정은 금융제도의 확립에 있고, 그리고 이는 국가의 생존, 민생의 기초적 조건이다. 이 조건을 갖추려는 정부는 막중한 책무를 지닌다. 적어도 국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불안한 상태에 있게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반드시 적법하게 이를 처리하고 완전히 해결할 필요가 있다. 본 정부는 성립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제정을 혁신하고 정책을 확신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특히 산업의 개발, 국민경제의 진전은 오로지 화폐제도, 통화의 안정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통화의 불안을 일소하고, 통화제도의 통일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해 국내의 각 은행들을 연합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우방 일본의 국민들도 나아가 원조를 할것이다. 오늘부로 정부는 은행 창립을 위한 위원을 임명하고, 설립 준비를 위한 명령을 내렸다. 본 정부는 위와 같은 취지에 근거한 신은행을 설립하기로 한 이상, 해당 은행의 기초와 안정에 있어서 조밀한 계획을 세우려한다. 예를 들어 발행 준비금의 충실, 재정기능의 확립과 같은 것을 말이다. 다시 한번 정부는 재정 안정 방안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것을 국민들에게 천명하는 바이다. 창립위원으로는, 임시정부의 수장인 왕커민과,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하는 8개은행의 지배인, 그리고 만주국의 중국은행 지배인 왕시징(汪時璟) 까지 총 10명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중 왕시징은 이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가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 왕시징 (汪時璟), 그는 왕커민과 함께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창설인물 중 한명이기도 했다. (사진은 중국연합준비은행 베이징 본점의 사무실) 그리고 이들 창립위원들은 여러번의 회의끝에 1938년 2월 6일,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를 공표한다. 조례에는 지폐로 1원, 5원, 10원, 100원 4종류를, 동전으로 5각, 2각, 1각, 5분, 1분, 5미 6종류를 만든다고 정의하고 있고 (9조~ 12조), 총재의 임기는 2년이고 주주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20조), 부총재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18조), 본점을 베이징에 두는것 (3조) 등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례의 공포와 동시에, 왕커민을 비롯한 정부요인들,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를 결정한 8개 은행의 관계자들, 일본계 은행들의 관계자들이 모여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창립총회를 열었다. 창립총회에서는 왕시징을 총재로, 사카타니 키이치(阪谷希一)를 고문으로 결정하고 동시에 이사들과 간사들도 선정했다. (이사와 간사에는 8개은행의 경리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본점사무소로 베이징 중국은행 건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전 중국은행 베이징지점 (현 중국대륙 베이징시 시청구 시자오민샹 17호, 北京市西城區西交民巷17號, 천안문과 전인대가 가깝다.) 에 설치된 중국연합준비은행 본점사무소. 사진은 영업을 개시한 1938년 3월 10일의 사진이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가운데 직원들이 현판식을 진행하고 있다. (애초에 이건물은 위에서 소개한 2대 본점의 바로 옆건물이다.) 그리고 1938년 2월 10일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 설립을 위한 자본금을 어떻게 부담할것인가가 결정되었다.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2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2月)에는 그 부담의 비율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자료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성립과정. 수많은 주체들이 은행설립을 위해 자금을 출자했다. (*표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점령지의 지점들만 해당)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자본금 5천만 위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이중 절반인 2500만 위안은 주식을 발행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1주 100위안) , 나머지 2500만 위안중 절반인 1250만 위안은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하는 8개은행이 분할하여 조달하기로 하고, 나머지 1250만 위안의 경우 중화민국 임시정부 정부측에서 마련하기로 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위해 일본의 요코하마 정관은행 (横浜正金銀行) 과 일본흥업은행 (日本興業銀行), 그리고 조선의 조선은행에 각 300만 위안씩, 총 900만 위안의 담보를 제공하고, 여기서 마련한 자금을 만주중앙은행, 조선은행, 그리고 요코하마 정관은행의에 융자를 받아 자본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부족한 분은 400만 위안은 현물을 일본측에 제공함으로서 생긴 금액을 사용했다. 임시성격의 1차 정규권등장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은 2월 11일, 정식으로 설립이 되었고, 이로 부터 한달이 지난 1938년 3월 10일부터는 베이징(핑) 을 비롯한 여러지점들이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개업날에는 왕커민을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위의 베이징 본부사무소에서 열린 개행식에 참가했고, 이자리에서는 국기 (임시정부의 오색기) 의 게양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개업식을 마친 오전 10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드디어 정식 영업을 시작했다. (본래 3월 1일 개업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내부 사정으로 10일로 연기 된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생기기전부터 이미 북평의 인쇄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전 청나라 시기의 은행, 대청은행(大淸銀行)의 지폐활판을 가져와 이를 개조해 지폐발행을 이미 준비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만주나 몽강에서 처럼 임시권 사용이 없었던 이유는, 정부 수립직후부터 임시정부가 자체화폐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 측에서는 초기 화폐로서 '조선은행권' 의 유통을 고려했었다. 만주중앙은행이나 몽강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은행권에 '중국연합준비은행' 도장을 찍어 사용하려 했다. 조선은행권은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군표로서 사용했던 화폐이기도 했고 발행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약 7천만 위안)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너무나도 많은 조선은행권이 필요할것으로 예상되었고 (4억 위안이상이 필요할것이라 보았다), 또한 조선은행권 자체는 화북에서 유통되었던 것은 사실이엇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은행과 유통되고 있는 조선은행권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단념하고 자체 화폐 발행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런 임시권 사용보다 빠르게 자체 화폐를 발행하고 옛 화폐들을 자신들의 신화폐로 교환시키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임시권을 발행하지 않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개업과 동시에 등장한 1차시리즈. 하지만 이들은 임시권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등장과 동시에 생겨난 1차 시리즈는, '정규 1차' 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임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첫 화폐들은 앞에서 소개했던 대청은행의 활판을 재사용한 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 청나라 시기의 화폐를 아주 조금만 바꾸어 자신의 화폐로 사용했다. (은행 이름을 연합준비은행으로 바꾸고, 그려진 인물을 황제에서 다른 인물들로 바꾼것에 불과했다.) 1909년 발행된 대청은행의 지폐와 1938년 발행된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지폐 (10원). 은행이름, 그리고 인물을 섭친왕 재풍에서 관우로 바꾼것외에는 대부분의 요소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이때 발행된 화폐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서양산 종이의 재고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재고는 얼마가지 않아 바닥났고, 그렇기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마날라 삼(蔘) 재질의 새로운 종이를 수입해와야 했다. 그리고 새종이로 지폐를 만드는 과정에서 도안을 일부 수정하게 된다. 일본측에서는 이러한 도안에 만족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지나정세요람(新支那現勢要覧) 에서는 이러한 신 지폐들의 도안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의 화폐를 "역겨운" 쑨원의 초상화나 서양지폐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모습이 사라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러한 초대 화폐의 발행과 동시에 구 화폐들의 회수 / 교환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화북지역은 너무나도 많은 종류의 화폐가, 너무나도 많이 발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인쇄국에서 지폐를 발행이 이들을 모두 대체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한 이유로 임시정부는 이들 옛 화폐들의 사용을 임시적으로 허가하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영업을 개시한 다음날인 1938년 3월 11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은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을 공표하고, 옛 화폐 : 연합준비은행권 (연은권)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함과 동시에, 일정기간동안 옛 화폐들을 임시로 사용할 수 있게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옛 화폐들에게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부여했다.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 1938.3.11 중국연합준비은행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 기동은행(冀東銀行) 의 화폐 / 교통은행(交通銀行) 북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북방권 / 산서성은행(山西省銀行) / 산동-산서 지역의 지역은행들 → 1939년 3월 10일까지사용가능 (1년) 교통은행(交通銀行) 남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남방권 / 중앙은행 (中央銀行) 중국실업은행(中國實業銀行) / 북양보상은행 (北洋保商銀行) / 중국간업은행 (中國墾業銀行) / 절강흥업은행 (浙江興業銀行) / 대중은행 (大中銀行) / 변업은행 (邊業銀行) / 중국농공은행 (中國農工銀行) / 중남은행 (中南銀行) / 중국통상은행 (中國通商銀行) / 농상은행 (農商銀行) / 사명은행 (四明銀行) / 중국농민은행 (中國農民銀行) 의 화폐 → 1938년 6월 10일까지 사용가능 (3개월) 소액권 (角,分,厘) → 1941년 5월 31일까지 사용가능 (3년)* (이후에는 연은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용불가) *는 1938년 5월 31일 추가된 내용 여기서는 각 은행권마다 사용기간을 제한했다. 기동은행이나 하북성은행처럼 이전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적었던 은행권들에게는 1년이라는 여유로운 사용기간을 부여한 반면, 이전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은행들에 대해서는 3개월이라는 짧은시간을 부여했다. 그리고 1938년 5월 28일에는 《소액지폐급보조화정리변법 (少額紙幣及補助貨整理辨法) 》을 발표해 6월 1일부터 각(角)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옛 은행들의 소액권 (각, 분, 리) 에 대해 3년동안 사용을 할 수 있게 했다. 3년이라는 긴 유예기간을 준 것은 민중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자 동시에 소액권 발행에 필요한 금액을 절약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6월 1일에는 각(角) '지폐' 가 등장하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 에서는 이러한 소액권은 동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어떠한 이유로 이들은 동전이 아닌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이는 조례 조항속의 빈틈을 이용한 것으로,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 11조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 11조: 중국연합준비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의 종류는 1원, 5원, 10원, 100원 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동전도 지폐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을 이유로, 중국연합준비은행에서는 이 소액권들을 동전이 아닌 지폐로 발행하게 된다. 1938년 6월 1일 등장한 각(角) '지폐'들. 본래 계획에 없었던 2각짜리 지폐가 등장한게 흥미롭다. 하지만 이 지폐들도 위의 원(圓) 지폐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발행되지 못한채, 1938년 12월에는 새로운 도안의 지폐로 발행되게 된다. 각 정규1차 시리즈도 결국에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연은권의 지폐가 확립되는 것은 1938년 말 분(分) 지폐와 새로운 각 지폐가 등장하고 1939년 1월 새로운 원(圓) 지폐가 등장하고 나서야였다. 그리고 중국연합준비은행은 1938년 8월 7일 오후 6시,성명을 발표하고, 위의 구통화정리변법에서 1년간 사용이 허가되었던 교통은행 - 중국은행 지폐에 대해 평가절하를 실시했다. 본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들 지폐에 1:1의 가치를 부여하여 교환을 진행하게 했는데, 계속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두은행의 법폐의 교환을 유도하기 위해 "장제스 정권의 법폐는 점점 신뢰성을 잃고 있다" 라는 이유로 1:1로 평가되고 있었던 중국은행 / 교통은행의 법폐에 대해 10% 평가 절하를 실시했다. 게다가 12월 10일 다시 한번 30%의 평가 절하를 실시하면서 (물론 이때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제공되었다) 화북에서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가지고 있던 이들 화폐의 가치는 1:0.6까지 떨어지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1 (1938.3)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0.9 (1938.8)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0.6 (1939.2) 중국연합준비은행의 1.5차 시리즈. 이 시기에 와서야 연은권은 진정한 확립에 이르게 된다. 1.5차 시리즈와 엔(円,圓) 블록 그리고 그 한계 1938년 말에서 1939년 초에 등장한 1.5차 시리즈에서는, 원(圓)의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38년 3월 공개된 1차 도안과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원의 경우 발행이 1939년 1월 부터 진행이 되었지만, 지폐에는 그대로 '중화민국27년 (1938년)' 이라고 표기를 해두었다. 각(角)의 경우 12월에 생산된 2차 버전은 베이징에서 인쇄가 이뤄졌던 것과 다르게 2각, 1각의 경우 일본 도쿄에서 인쇄가 되기 시작했다. 5각 짜리 지폐가 가장 흥미로운데, 지폐의 도안으로 바로 루거우차오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이 루거우차오에서 시작되었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이 일본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음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는 만주중앙은행, 몽강은행과 마찬가지로 모두 일본은행권과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제국은 일본은행권 1엔 = 조선은행 1원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 중국연합준비은행 1원 라는 일본-조선-만주-북지(화북) 을 연결하는 이름바 '엔(円) 블록'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일본은 임시정부 지역에서 법폐를 말살하기 위해 더더욱 노력을 가해갔다. 1939년 2월 11일에는 재정부훈령을 통해 모든 예금에서 연은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즉, 법폐로 넣은 예금도 받을 때는 연은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보았듯 평가절하된 가치를 반영했다.) 그리고 구통화관리변법에서 정한 1939년 3월 10일자로 소액권을 제외한 법폐가 완전히 사용금지되면서 임시정부 지역은 이제 연은권으로 완전히 통일되게 되었다. 화폐 발행수도 이 시점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세워지 당시 화북에서 유통되고 있을것이라 추정한 3억~4억 위안을 넘게 되게 되었다. 동아경제독본 (東亜経済読本, 1941) 에 묘사된 연은권의 발행수. 1939년 여름에는 3억위안을 넘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이렇게 빠르게 지폐발행수를 늘린데에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법폐를 대체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유통하고 있었던 군표를 대체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은행권을 화북에서 군표로 사용했는데, 이 군표의 유통량이 만만치 않아 화북 지역에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은 화폐 발행량을 늘려 지역에 유통되었던 군표, 즉 조선은행권을 모두 연은권으로 바꾸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화폐의 통일과정속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1939년 5월 5일 오후 4시에 개최된 제1차 주주총회에서 왕시징 총재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큰이익을 거두었음을 당당히 발표하기도 했고, 외화도 취급하게 되었으며 1938년 8개에 불과했던 지점이 12개로 증가하는등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성장을 거두고 있었다. 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사진집인 대동아사진년도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에 실린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영문광고. 설립일이 1938년 2월 11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중 하나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세는 전쟁의 지속속에 오래가지는 못했다. 우선 목표로 했던 법폐의 말살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임시정부내에서도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법폐나 공산당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임시정부에 둘러쌓인 톈진 조계에서는 조계당국과 조계를 구성하는 서구 열강들이 기를 쓰고 연은권의 유통을 막으려 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1939년 8월 9일자로,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을 더이상 중화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화민국 임시지역을 방문하는 일본,조선, 만주의 사람들은 모두 입국과정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연은권으로 교체해야 했다 (제한은 500위안까지). 선박을 통해 방문하는 이는 선박내에서 가지고 있는 조선-만주-일본돈을 연은권으로 모두 바꿔야 했고 항공기를 이용하는 경우 도착 비행장에서 환전을 하게했다. 육로 (기차등) 를 이용하는 경우 만주국-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국경의 교환소에서 교환을 해야했다. 이러한 내용을 화북지역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강조하는 기사가 1939년 8월 12일자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1940년 6월부터는 연은권 사용을 방문하는 일본,만주,조선 사람은 특별한 허가가 없는한 200위안까지만 연은권으로 바꿀수 있게 되었다. (단 만주국-구 중화민국 임시정부 국경을 통해서는 500위안) 이후 만주국에서도 연은권이 사용금지되고 (1940년 5월), 조선, 일본에서도 연은권이 사용되지 않게 되면서 (1940년 6월) 연은권은 원블록에 속해있지만 사실상 화북에서만 통용되는 화폐가 되게 되었다. 이런 조치는 일본측에서 연은권의 남발과 그속에서 생겨나는 인플레이션이 일본국내까지 전파되는것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연은권이 이제 이전과 같이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연은권은 필요이상으로 발행을 이어나갔고, 위에서 본 1939년 3월의 발행고가 3억엔이었는데 1940년 10월에는 그 두배인 6억엔 가까이까지 발행이 이어지면서 지폐가 남발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런 연은권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자본을 투입해야 했고, 일본측에서는 이를 부정했지만 일각에서는 연은권의 가치절하설이 돌기도했다. 연은권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북정무위원회에서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수립에도 그 실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도 난징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몽강이 그랬던 것처럼 중화민국 임시정부 또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정부에 통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그 실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이었던 중국연합준비은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 정부수립과정에서 왕징웨이측은 신중앙정권의 신중앙은행이 몽강(몽강연합자치정부), 화북(중화민국 임시정부), 화중(중화민국 유신정부) 지역을 모두 통괄하기를 바랬으나 일본과 임시정부, 몽강의 반대 로 이를 실현시킬 수 없었다. 또한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동시에 설립된 화북정무위원회에서는 '신중앙정부의 중앙은행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연은권의 지위는 변함없을것이며 더더욱 강화될것'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정권의 등장에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이었던 중앙저비은행은 화중에 그 영향력을 제한받았다. 또한 화북정무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일본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지배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의 난징정부가 발행량을 보고 하라했지만 제대로된 수치를 보고하지 않았고, 1943년에는 심지어 총재였던 왕시징이 "화폐발행량을 화북정무위원회와 난징에 보고해야한다" 라고 해도 이를 듣지않는등 이때부터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영향에 놓여있게 된다. 이렇게 화북정무위원회도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이전부터 남발되기 시작했던 화폐발행을 더더욱 늘리게 되었고, 본래 4억가량으로 추정되었던 구 법폐 유통량을 뛰어넘어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1년 말에는, 발행액이 10억위안에 가까워지면서 화폐는 더더욱 남발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모두 화북의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톈진과 도쿄의 물가상승률 비교. 쇼와12(1937) ~ 쇼와 17(1942) 사이 도쿄의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았지만, 톈진의 경우 4배 넘게 물가가 올랐다. 1938년 1월과 1942년 1월의 물가 비교 (1937년 6월 도쿄물가를 100이라고 했을때) 도쿄 : 102.9 → 147.2 (+44.6) 톈진 : 111.9 → 468.1 (+357.2) 베이징과 도쿄물가 비교 (도쿄의 가격을 1이라고 했을때.) 백미 → 1 : 3.2 청주 → 1 : 2.8 차 → 1 : 1.8 설탕 → 1 : 2 간장 → 1 : 4 연은권의 남발 속 베이징의 물가는 도쿄의 물가보다 더욱 비쌌다. (고기나 계란같은것은 베이징이 더욱 저렴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상품은 도쿄보다 베이징이 비싼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이용해 전쟁자금을 대려 화폐발행번호 조차 기입하지않은 화폐를 대량 남발하면서 이러한 물가는 더더욱 오르게 된다. 일본은 심지어 화폐활판을 복제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아닌 일본군 자체적으로 화폐를 제작해 마치 군표처럼 유통시켜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화북정무위원회 치하에서는 이전에 해결되지 못했던 톈진 조계에서의 연은권 사용문제와 관련해 1940년 6월 20일, 조계측이 연은권의 사용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일본, 임시정부측과 합의를 하게 되면서 톈진 조계에서도 연은권이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은권이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인 1941년에, 제2차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 2차시리즈에서는 이전에 지폐로 대체되었던 소액권들이 본래 계획대로 동전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1941년에 등장한 2차 시리즈. 2차 시리즈에서는 지폐의 경우 인물에는 변화가 없었고, 건물의 경우 베이징 자금성의 건물들을 많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인쇄표시가 '화북정무위원회인쇄국발행' 이라 표시함으로서 은행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화북정무위원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전의 경우 1각, 5분, 1분 3종류가 등장했는데, 만주나 몽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 알루미늄 소재를 채택했다. 5각짜리 동전이 등장하지 않은 것이 의외한 부분이다. (이전에 발행된 종이 소액권도 모두 통용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연은권이 너무나 발행되고 있음을 인식은 하고있었기에 1940년 9월부터 "이제 연은권에게 중요한건 물가와의 싸움" 이라 이야기 하면서 연은권의 안정을 이야기하고 연은권의 가치가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실제로는 상황은 더욱 악화되면 악화되고 있었지, 나아지지는 않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전시경제체제가 공영권 전체로 확대됨에 따라 이름바 '원(엔) 블록'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시경제체제속 만주중앙은행과 중국연합준비은행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은행들은 물자,자원의 수탈과 이로인한 부족상황 속 맞이한 자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은행 설립 5주년이 되는 1943년 3월 10일에는 일본은행에서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원조하기 위해 2억위안을 제공하기로 하고, 6월 29일에는 만주중앙은행도 9천만 위안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이러한 자금지원에도 이미 남발되고 있는 연은권의 추락을 저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2.5차 시리즈 (1943) . 화폐의 남발과 인플레이션속 고액권이 등장했다. 1943년에는 10원권, 100원권 고액권의 디자인을 수정하고, 500원이라는 새로운 고액권 화폐를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 도안들도 오래가지 못하고, 1944년에 되어 또한번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1943년, 연은권의 가치는 계속하락하고 있고 발행고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왕시징 총재와 화북정무위원회측은 계속하여 물가안정을 이야기했지만,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장기화 속 전비마련을 이유로 이를 신경쓰지 않았고 화북정무위원회와 은행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앞에서 톈진의 물가가 4년사이 4배 이상 올랐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1943년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북정무위원회의 자체조사에도, 1943년 12월 기준, 톈진의 물가는 더더욱 올라 전쟁전에 비하면 "11배" 이상이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재앙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진정한 재앙은 1944년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중국연합준비은행 1944년에 등장한 3차시리즈. 1944년에는 모든 지폐의 도안이 수정된 새로운 3차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 3차시리즈에서는 종이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고액권을 제외하면 모두 크기를 줄였고, 잉크 사용량도 줄이기 위해 도안도 일정부분 바꾸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화폐남발로 인한 이름바 '초' 인플레이션의 발생으로, 소액권은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물론 이전까지 유통된 구권을 계속 사용하게했다.) 이권의 특징으로는, 1원, 5원, 10원에 화폐를 식별할 수 있는 번호가 기입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 3종류의 화폐가 너무나도 많이 발행되어 식별번호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3차 시리즈를 시작으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에는 재앙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재앙은 바로 발행고가 너무나도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일본과 임시정부 (이후 화북정무위원회) 측은 1940년부터 연은권이 예상보다 많이 유통되어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위한 안정화작업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화폐발행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41년 말 10억위안이 조금안되던 화폐발행량은 1944년말에는 "162억위안"을 넘겼다. 1938년 말 : 1.62억 위안 1941년 말 : 9.66억 위안 1944년 말 : 162.25억 위안 1944년 9월 13일 일본은 일본은행을 통해 추가로 2억 위안을 지원했지만 (게다가 이것은 5년이라는 기간도 있었다.) 이미 발행액이 통제할수 없을 정도로 커진 연은권의 붕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44년부터는 연합국이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위해 항공기를 이용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는데, 그 위조화폐에는 만주중앙은행권과 중국연합준비은행권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화폐발행고속에서 이런 위조지폐까지 공급되어버리면서 더욱 혼란이 찾아왔고, 앞에서 보았듯 일본군도 이 연은권을 자체적으로 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많은 발행량 + 일본군의 독자적발행 + 연합국의 위조지폐살포로 화폐의 남발속 화북의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속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찾아오는 자원과 물자의 부족은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다. 1944년 말 또한번 변경된 10원권. 이 10원권도 식별번호가 없었을 뿐더러 발행주제도 연은, 일본군, 연합군, 신민회 등등 너무나 많은 곳에서 발행되어 엄청난 수가 유통되었다. (심지어 이들 주체마다 잉크도 다르게 사용해 색도 달랐다.) 중국연합준비은행 측에서는 이런 연합국의 공작을 막기위해 10원권의 도안을 새로이 변경하는 등 술책을 썼지만, 이러한 시도도 큰 성과를 거두지못하면서 발행량이 자꾸만 늘어만 가는 상황은 바꿀 수 없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마지막 화폐들. 이시점에서 화폐는 화폐용지에 인쇄되지도 못했다. 일반종이에 돈이라고 찍혀 나오는 수준이었다. 1945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어 새 화폐가 화폐용 용지도 아닌 일반용지에 찍혀나오기 시작했고, 이런 성질때문에 100원권의 경우, 연합준비은행도, 일본군도, 신민회도 다른 주체들도 마구잡이로 인쇄를 시작했다. 본래 인쇄국이었던 베이징의 화북정무위원회 인쇄국에서만 30억위안 이상의 100원 화폐가 발행되었고 모든 발행주체의 생산량은 '추산치만 550억 위안' 가량이 될정도이다. 이시기에 도난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도난 단위가' 1억' 위안정도일 상황이니, 얼마나 많은돈이 시중에 풀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시중에 나오지 못했던 5,000원권. 하지만 이 오천원권은 일본항복 이후 교환과정을 위해 다시 유통되게 된다. 10원권의 경우 1944년에 만들었던 디자인과 1944년말에 만들었던 디자인을 혼용하여 발행했다. 또 1,000 원권이라는 고액권도 등장했으며, 이후에는 5,000원 권이라는 더 고액권도 등장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화폐의 남발속 주민들은 연은권에 대한 완전히 신뢰를 잃고 이돈을 '한간돈(漢奸票)' 혹은 '앞잡이돈(走狗票)' 이라 부르기도 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사라지기 전까지, 발행되었던 화폐는 "1,915억 위안" 가량이었다. (1,423억 위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수치는 이미 붕괴조짐이 보이던 1944년보다도 10배를 넘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의 결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연합준비은행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중국연합준비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만주에서도, 몽강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연은권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북정무위원회의 붕괴 이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연은권의 경우 몽강이나 만주와 달리 빠르게 교환이 시작되었다. 만주나 몽강에서 1년~2년가까이 더 사용되었던 만주중앙은행권과 몽강은행권과 달리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연은권의 경우 1945년 11월 22일 부터 국민정부가 법폐로 교환을 시작하게 했다. 이는 그만큼 연은권의 가치가 붕괴되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 연은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0.2원 (0.2 : 1) 교환은 연은권의 가치가 폭락해버린 만큼 교환에 있어서 법폐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항복 직후에는 국민정부가 연은권 : 법폐의 가치를 1:1로 통용하게 했지만, 교환과정에서는 그 낮은가치를 반영해 0.2:1 이라는 교환비를 가지고 교환이 되게 했다. 공산당지역에서도 교환은 진행되었지만 어떤은행으로, 어떤비율로 교환이 진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후 이부분을 더 알아보고 싶다.) 1946년 중순이 되어서는 국민정부지역, 공산당점령지역 모두 연은권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이로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중화민국 유신정부 - 화흥상업은행(華興商業銀行) 옛 화흥상업은행 2대 본점자리 (현 중국대륙 상하이시 대명로 65호, 上海大名路65號). 현재는 일반 상가들이 입점해있다. 중앙은행이 아닌 '상업은행' 화흥상업은행은 1938년 3월 1일 난징을 수도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상업은행' 으로, 1939년 5월 16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상업은행임을 강조한 이유는 밑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화북지역과 마찬가지로, 당시 화중지역에서도 이전의 법폐와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군표가 남발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화중지역은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 경제적 중심지 상하이가 있었던 만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유신정부에게 있어 이지역의 경제를 장악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1938년 3월 1일,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세워졌지만, 유신정부에게는 임시정부와 같은 강력한 국가주도의 금융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신정부는 이를 위해 1939년 4월 22일, 유신정부는 유신정부행정원령으로 《화흥상업은행조례 (華興商業銀行條例)》 를 공표, 화흥상업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조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흥상업은행조례 (華興商業銀行條例) 명칭: 화흥상업은행(華興商業銀行) 조직형태 : 유신정부 정부법인 자본금 : 5천만 위안 출자 : 유신정부와 일본측은행이 각각 절반씩 부담하기로 함. 하지만 중국의 민간자본 혹은 제3국자본이 참가에 호의적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기로함. 일본측은행은 일본흥업은행, 대만은행, 조선은행, 미쓰이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모토은행 업무: 무역통상관계에서의 금융에 중점을 두기로함. 특권 : 강제통용력이 있는 은행권의 발행 / 개업일과 동시에 유신정부로 부터 무이자로 1천만 위안을 제공받기로함. 발행권 : 10원(圓), 5원, 1원 / 보조단위로 2각(角), 1각 5종류, 대체로 법화와 그 가치를 같게하여 자유롭게 태환할 수 있게 함. 국고업무 : 신은행은 유신정부의 국고은행업무역할을 하게 함. 영업기간 : 3년 (3년마다 정부 허가를 통한 갱신가능.) 본점 : 상하이시 두락안로 2호 (上海竇樂安路2號) 지점 :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우후(蕪湖), 전장(鎭江), 우시(無鍚) 이 조례에서는, 화흥상업은행이 만주의 만주중앙은행,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몽강은행,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중앙은행역할' 이 화흥상업은행에게는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장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 에서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성격을 확실한 국가의 중앙은행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화흥상업은행에서는 이런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는 중국연합준비은행으로 하여금 일반금융기간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하고, 타 금융기관의 업무에 대해 일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함. -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13조 무역통상관계에서의 금융에 중점을 두기로함. - 화흥상업은행조례 中 화흥상업은행에 화폐발행권과 유통권은 부여되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중앙은행의 역할이라 보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일본은 화흥상업은행을 어디까지나 '상업은행' 으로서의 목적에 그치게 하려 했다. 그리고 주목해야할 부분은, 화흥상업은행의 경우, 화폐가치의 기준을 '일본 엔(円)' 이 아닌 '법폐(圓)' 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즉 앞에서 만주,몽강, 화북의 은행들을 소개할때 이야기했던 일본은행 1엔 = 조선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 중국연합준비은행 1원 =/= 화흥상업은행 1원 이라는 같은 가치로 일본과 조선, 조선과 만주, 만주와 화북을 연결하는 일본의 통화경제권인 '원(엔) 블록' 에 화흥상업은행은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 블록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법폐에 대한 조치가 달라짐도 의미한다. 화흥상업은행의 설립과정에서는 구 법폐에 대한 조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만주와 몽강, 화북의 것과 달랐다. 화흥상업은행은 설립과정에서 법폐를 모두 회수하려하고 말살하려 했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달리 법폐와의 '공존'을 추구하려했다. 법폐도, 화흥은행의 새화폐도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교환이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이 또한 일본의 화중지역 경제장악을 위한 일종의 술책이었다. 본점의 경우, 조례에서는 상하이시 두락안로2호[上海竇樂安路2號, 현재는 건물이 철거되고 상하이패션빌딩(上海時裝商廈)이라는 건물이 들어서있다.] 에 두기로 했지만, 이후 위에서 보았던 상하이시 대명로65호(上海大名路65號) 로 옮기게 된다. 조례에서는 영업과 동시에 난징을 비롯한 지점의 영업도 개시하려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난징 지점을 제외한 다른 지점들은 영업시작이 연기되었다. 중화민국유신정부개사 (中華民國維新政府概史) 에 존재하는 화흥상업은행 본점 (두락안로 시절) 의 사진. 이렇듯 화흥상업은행은 만주나 몽강, 화북의 은행들보다 시작부터 애매하고 약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당시 화흥상업은행의 설립을 보도하는 신문기사에서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은행의 화폐의 성격이 만주,몽강,화북의 것과 다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렇게 화흥상업은행에 작은 역할만을 부여한 이유로는 몇가지가 이유가 있는데, 첫 째는 화흥상업은행이 만들어질 당시 유신정부가 처해있는 위치였다.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달리 이미 자기 스스로를 '임시적인 정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흥상업은행이 세워지기 10개월전인 이미 1938년 9월 부터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하고 통합논의를 이미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이때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정부가 왕징웨이측이 아닌 임시정부에 통합될 것이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이런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정부에 굳이 중앙은행을 설치하여 통합이후 작업을 어렵게 할 필요가 없었다. 둘 째는 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는 임시정부와 다른 특성이다. 대민회를 소개할때도 언급했지만,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사들은 완전한 친일을 선택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국민당으로서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는 싫어" , "국민당은 좋은데 국공합작이 싫어" 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反공산주의, 反장제스주의자들로 반공, 반장을 위해 일본을 선택한 것이지, 임시정부의 인사들처럼 완전한 친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유신정부가 왕징웨이정권이 부드럽게 흡수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이들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곳 중 하나인 이전 국민정부 수도 난징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특성 때문에 일본은 압도저인 영향력을 지배할수 없는 유신정부의 화중에 임시정부의 화북보다 중요도를 크게 두지 않았다. 셋 째는 본래 일본의 경제블록구상이 화북까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엔(원) 블록을 구상할 당시 초기에는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일만조블록을 구상했고 이후에 화북이 이곳에 추가되었는데, 화중은 아니었다. 일본은 '화북의 특수성' 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 화북을 확보하려 여러 모습을 보였지만 화중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제권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중요도도 떨어지는 유신정부 지역에 화북에서와 같은 작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화흥상업은행의 성립과정. 그리고 조례에 따라, 자본금 5천만위안을 유신정부가 절반, 일본측 은행들이 절반을 부담하기로 함에 따라, 상하이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계 은행 6개 (조선은행, 대만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토모은행, 미쓰이 은행, 일본흥업은행) 이 2500만 위안을 부담하기로 했다. 5천만 위안이라는 자본금만 두고 보았을때 화흥상업은행은 같은 5천만 위안의 자본금으로 영업을 시작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같은 체급을 가지고 있었다. 상해의 신아대주점(上海新亞大酒店, New Asia Hotel) . 이곳에서 화흥상업은행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1939년 5월 1일에는 화흥상업은행의 창립대회가 상하이의 신아대주점(新亞大酒店) 에서 열리게 되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행사에는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梁鴻志) 행정원장을 비롯한 유신정부 주요인사들과 일본측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량홍즈 행정원장이 축사를 낭독한 이후, 화흥상업은행의 주요 인사들을 선출하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총재로 유신정부의 전 재정부장관이었던 첸진타오(陳錦濤, 진금도, 하지만 이후 건강문제로 사직) 를, 부총재로는 만주중앙은행의 전 이사였던 와시오 이소이치(鷲尾碕一) 를, 그리고 이사와 다른 직들을 임명하게 된다. 행사는 오후 1시에 끝났고 이로소 화흥상업은행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그리고 1939년 5월 16일부터 화흥상업은행은 정식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본래 10일에 영업시작을 계획했으나 연은처럼 내부사정으로 연기되었다.) 화흥권의 등장, 그렇다면 화폐의 확산은 어떻게? 화흥상업은행의 첫 화폐시리즈. 이렇게 등장한 화흥상업은행의 화폐 '화흥권' 은 화흥상업은행의 영업과 함께 공개되었다. 화폐에는 민국27년 (1938) 인쇄가 되었다고 적혀있지만, 실제 인쇄는 민국28 (1939)년에 이루어졌다. 화흥권\바로 원(圓) 단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존재한다. 憑票卽付國弊壹(伍,拾)圓 = 이 지폐를 1원 (5원,10원) 으로 사용하는것을 허가함. 화흥권에는 연은권이 그랬듯, 화중지역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투입되었다. 쑤저우, 난징의 풍경이 지폐에 사용되었으며 인물은 한명도 등장하지 않은게 특징이다. 앞에서 보았듯, 유신정부는 법폐의 회수도,강제교환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전에 쓰이던 법폐와의 공존을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유신정부와 일본은 어떻게 이 태환권과 같은 화흥권을 확산시킬것인가? 첫 째, 장제스의 충칭정부가 내세운 금융안정판법(金融安定辦法) 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충칭정부는 1939년 6월 11일, 법폐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자 금융안정판법 (2차)을 발표해 모든 예금의 인출을 제한했다. 그렇기에 법폐를 사용하는 민중들은 국민정부 지역이든 일본점령지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금을 인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화흥은행권은 법폐와 같은 가치를 가지게 한다" 라고 했던 화흥상업은행조례가 기억나는가? 유신정부는 화흥권의 가치가 법폐와 같음을 이용해 화흥상업은행은 화흥권을 통해서는 예금의 인출이 가능하게 했다. 예금을 가지고 있는 민중들은 언제 가치가 폭락하고 언제 다시 인출이 가능해질지 모르고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법폐의 옛 가치를 보장받는 화흥권을 통해서 예금을 찾던가, 예금을 계속하여 방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또한 유신정부측은 법폐가 붕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붕괴하는 법폐에 대비해 화흥권을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둘 째, 무역과 통상에 있어서는 무조건 화흥권을 사용하게 했다. 유신정부는 앞에서 보았듯 법폐와 화흥권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했다. 하지만 무역과 통상에서는 무조건 화흥권을 사용하게 했다. (이는 화흥상업은행조례의 '강제통용력' 을 이용한것이었다.) 때문에 상인들은 화흥권이 아니면 무역과 통상을 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가지고 있던 법폐를 교환할 수 밖에 없었다. 관세의 경우에도 화흥권으로만 지불할 수 있게 해 상하이의 공공조계에서도 거래를 위해서는 화흥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셋 째, 유신정부 정부내에서는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유신정부의 군인, 공무원등 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봉급으로 화흥권만을 지급받았다. 또한 세금납부를 비롯한 공공서비스에서도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법폐보다 우위에 서는 방법을 사용하려 했다. 넷 째, 외화 취급에도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즉, 유신정부의 주민은 외화로 환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법폐를 화흥권으로 바꿔야만 했다. 이렇듯 일본과 유신정부는 화흥권을 특정부분에서 사용을 강제함으로서 법폐와 공존하면서도 법폐를 대체할수 있는 신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법폐와의 동등가치 포기 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사진집인 대동아사진년도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에 실린 화흥상업은행의 영문광고. 화흥상업은행의 로고를 확인할수 있는 자료중 하나이다. (華를 형상화한것이 로고.) 하지만 화흥권은 등장으로부터 3개월도 되지않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본래 화흥권은 법페와 1:1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법폐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있음에 따라 (1939년 1월대비 7월 30% 하락) 더이상 법폐와 동등가치를 지키기 어려워 진 것이다. 이에 유신정부는 1939년 7월 19일 성명을 발표하고, 더이상 화흥권의 가치기준을 법폐와 연동시키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유신정부는 화흥권의 가치를 독자적인 기준을 두고 마련하게 된다. 보통 법폐의 가치를 영국의 파운드화와 비교하는데, 이에 따르면 법폐는 1위안 = 8페니 (약 3.36 펜스, 0.015파운드,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원정도 ) 라는 가치를 1938년부터 유지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1939년 전쟁의 장기화속 일본의 방해공작, 금융안정판법등과 같은 조치들로 법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 유신정부가 법폐기준을 포기한 1939년 7월의 시점에서는 1938년 : 1위안 = 8페니 (약 3.36펜스, 약 0.015파운드) 1939년 7월 : 1위안 = 5페니 (약 2.2펜스, 약 0.009파운드) 까지 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39년 8월에는 1위안 = 3페니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후 1939년 말에는 다시 5페니 수준까지 복구가 되긴 된다.) 아무튼 이로 인해 화흥권은 화흥상업은행 1위안 = 6페니 (약 2.52펜스, 약 0.01파운드) 라는 독자적인 기준을 세우게 된다. 이후 법폐의 가치가 더더욱 떨어져 1위안 = 3페니 근처까지 떨어지게 되면서 이 시점부터 화흥권은 법폐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각(角) 권 소액권은 이전처럼 법폐와 같은가치를 가지기로 했다. 즉 이러한 독자기준은 원(圓) 권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유신정부는 이와 동시에 화흥권을발행을 독려하고 화흥권을 안정적이라 이야기하며 주민들로 하여금 화흥권으로 빠르게 교환하라하면서 법폐를 금지하지 않고도 법폐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화흥권의 현실과 한계 1939년 7월, 화흥상업은행의 성립으로부터 반년도 되지않아 유신정부는 왕징웨이의 신정권으로 흡수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속에서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은 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첫 째로 화흥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이다. 앞에서 보았듯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스스로를 곧 통합될 존재, 임시적인 존재라고 존재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도 화흥상업은행에 큰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고 화흥상업은행은 화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런 시작부터 부여되었던 한계성 속에서 화흥권은 위에서 언급한 조치들에도 크게 유통되지 못한다. 1940년 1월 기준으로 유통된 화흥권은 '530만 위안' 에 불과했다. (화흥권의 발행이 중단되는 1940년 12월에도 560만 위안에 불과했다) 중화민국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연은권이 설립 1년도 되지않아 '1억 위안' 이 넘는 발행고를 올린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수치였다. (심지어 몽강은행도 1939년 기준으로 4천만 위안 가량의 발행고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법폐와의 공존주의를 선택하고, 그속에서 화흥권이 더 우월함을 증명해 화중지역에서 법폐보다 우위에 서려했던 화흥상업은행의 생각과 달리, 화중지역에서 법폐의 영향력은 위에서 본것과 같은 조치들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화중지역은 본래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과 경제중심지 상하이가 있었던곳으로 가장 법폐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이런 화중지역보다 법폐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낮았던 화북지역에서도 법폐의 말살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법폐의 영향력이 가장 높은 곳이자 가장 유통고가 많은지역이며 게다가 법폐와 공존주의까지 선택한 화흥권이 절대적 영향력의 법폐의 다발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화흥권은 연은권이나 만주중앙은행 원과 달리 다른 지역에서의 유통은 아예 없었으며, 오로지 화중지역에서만 그 유통이 가능했는데, 그 화중에서도조차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화흥상업은행의 경우 일본측은행들과 협력관계에 있었고 원블록의 일원으로서 일본이나 만주에게 자금지원도 받을 수 있었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달리 화흥상업은행에는 거의 아무런 지원이 이루어지지않았다.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에서도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흥상업은행의 협력을 연구함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블록도 아니며, 완전한 지배력도 없으며, 화폐일원화도 하지 않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은행에 일본은 지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화북지역에서는 발행을 중단했던 군표를 화중지역에서는 계속 발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왕징웨이정권에서의 화흥상업은행 8. 대외무역을 진흥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중앙은행을 재건하여 폐제를 통일해 사회금융의 기초를 확립한다. - 왕징웨이정권의 10대정강 (1940.03.30)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되면서 화흥상업은행은 또한번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난징국민정부의 성립과 동시에 10대정강을 발표해 자신의 정권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중 8번째는 '신중앙은행의 설립' 이 존재했다. 하지만 화흥상업은행은 계속하여 영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는 왕징웨이정권의 신중앙은행이었던 중앙저비은행의 설립작업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일본뿐만 아니라 초대 총재 첸진타오를 이어 총재가 된 구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도 기자들의 질문에 "화흥권의 발행은 많지 않다. 하지만 화흥상업은행은 충분한 외화보유고를 가지고 있어 극히 온건한 상황이기에 휼륭한 성과를 내리라 믿고 있다. 신중앙정부 설립이후 화흥상업은행의 지위는 본래 유신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은행으로서 중앙정부설립이후에는 규정에 따라 인계되는 것이 맞으나, 정부와 직접 관계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화흥상업은행을 확대해 신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나로서는 화흥상업은행을 상업은행으로서 계속하여 지금처럼 견실하게 유지할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 량홍즈, 1940년 7월 화흥권의 발행수가 스스로 많지 않음을 인정하면서까지 "화흥상업은행을 계속 유지시켜달라" 라고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측의 분류에서도 일개 상업은행에 불과한 화흥상업은행을 무리하여 통합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화흥상업은행은 계속하여 영업을 진행하고 화흥권을 계속하여 발행하게 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 시리즈도 유통을 시작하게 된다. 1940년 등장한 화흥상업은행의 동전들. 10분짜리의 경우 청동으로 제작되기도 했고 백동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1분, 5분, 10분(1각), 20분(2각), 4종류의 동전으로서 이들은 앞에 등장했던 소액권 지폐들을 일정부분 대체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1분과 5분은 청동을, 10분과 20분은 백동을 사용했다. (10분의 경우 혼용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전들은 전쟁자원부족이라는 이유로 생산량이 아주 적었고, 게다가 화흥상업은행이 1940년 12월부터 화폐생산을 종료해버리면서 1년도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발행되었다. (10분 동전의 경우 꽤 발행이 된듯하나 5분 동전과 20분동전은 아주 적은수가 발행되어 사진자료가 아주 적은 편이다.) 게다가 이들 소액권은 중앙저비은행이후 대부분이 회수되면서 현재는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1분동전의 경우 70만원 상당에 거래되곤 한다.) 왕징웨이정권의 신중앙은행으로 중앙저비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12월 20일로 중앙저비은행법(中央儲備銀行法)이 통과됨에 따라, 화흥상업은행은 존치하되, 본래 상업은행의 역할만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1940년 12월 20일부터는 화흥상업은행의 화폐발행이 종료되고 화흥상업은행은 일반 상업은행으로 역할을 바꾸어 영업을 진행하게 된다. 발행되지 못했던 화흥상업은행의 2차 지폐시리즈. 인물구성은 연은권을 생각나게 한다. 화흥은행은 화폐발행을 중지하기 전에 5원권과 10원권을 새롭게 준비하고 도안까지 만든 상태였으나, 화흥권의 발행이 종료가 임박한 시점이었기에 이는 발행되지 못하게 된다.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의 결말 그렇다면 이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저비은행법과 동시에 공표된 정리화폐잠행변법(整理貨幣暫行辨法)서는 화흥권의 정리를 규정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화흥상업은행의 화폐발행권을 취소하고, 화흥권은 회수하여 본행(중앙저비은행)의 본권(저비권)으로 교환하게 한다. (5조) 이에 따라 발행되었던 화흥권은 1940년 1월 6일 중앙저비은행이 개업함과 동시에 중앙저비은행에서 회수 & 교환 조치를 내리게 되어 화흥상업은행 1원 = 중앙저비은행 2.4원 (1:2.4) 라는 비율로 회수 & 교환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화흥상업은행은 일반상업은행으로 왕징웨이정권이 해체되는 1945년 까지 영업을 지속하다, 중일전쟁에서 국민정부가 승리한 후인 1945년 11월에 중국은행으로 흡수되게 되며 화흥상업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출처 김성진, 김상옥 「만주국의 지폐 변천과 지폐 도안의 특징」, 『통권 7호』, 2019 만주중앙은행 초대건물 사진 : https://weibo.com/ttarticle/p/show?id=2309404670405347770834 만주중앙건물 후대건물 사진 : https://www.gakushuin.ac.jp/univ/geore/research/2015a/sinkyo-manchuriancentralbank.html 만주국 원 사진 1 : https://ja.wikipedia.org/wiki/%E6%BA%80%E6%B4%B2%E5%9B%BD%E5%9C%93# 만주국 원 사진2 : https://en.numista.com/catalogue/manchoukuo-1.html 만주중앙은행10년사 : https://dl.ndl.go.jp/pid/1276581 만주중앙은행 강덕4년판 : https://dl.ndl.go.jp/pid/1463670/1/11 만주중앙은행연혁사 별편부록(満洲中央銀行沿革史 別冊附録) : https://dl.ndl.go.jp/pid/1449899/1/10 만주국 원 일문판 / 중문판 위키피디아 / 몽강은행 사진 : https://zh.wikipedia.org/wiki/%E8%92%99%E7%96%86%E9%93%B6%E8%A1%8C 찰남은행 1원권 사진 : https://www.google.com/search?q=%E5%AF%9F%E5%8D%97%E9%8A%80%E8%A1%8C&tbm=isch&ved=2ahUKEwitsamixfuDAxUE1jQHHd1VCAUQ2-cCegQIABAA&oq=%E5%AF%9F%E5%8D%97%E9%8A%80%E8%A1%8C&gs_lcp=CgNpbWcQA1AAWABg1QVoAHAAeACAAcMCiAHDApIBAzMtMZgBAKABAaoBC2d3cy13aXotaW1nwAEB&sclient=img&ei=yeazZe2oJ4Ss0-kP3auhKA&bih=919&biw=1920&client=firefox-b-d&hl=ko#imgrc=EpOn4jkSGTmUWM 찰남은행 1원권 (차하얼성 견본판) : http://www.yangmingauction.com/goodsdetail.html?auctionid=B15063&code=1006&page=7 북지경제도설 쇼와 15년판 : https://dl.ndl.go.jp/pid/1281686/1/31 북지경제도설 쇼와 17년판 :https://dl.ndl.go.jp/pid/1461376/1/35 지나중앙은행론 : https://dl.ndl.go.jp/pid/1276552 몽강권 사진 : https://en.numista.com/catalogue/chine_japon-1.html#c_meng_chiang1108 몽강권 사진2: https://zh.wikipedia.org/wiki/%E8%92%99%E7%96%86%E9%93%B6%E8%A1%8C 최신지나요람 쇼와11년 9월간 (1936.9) : https://dl.ndl.go.jp/pid/1277835 지나경제연보 쇼와 11년 (1936.11) : https://dl.ndl.go.jp/pid/1452156 기동정권의 정체 (冀東政権の正体, 1937.4) : https://dl.ndl.go.jp/pid/1281558 신지나현세요람(新支那現勢要覧,1938) : https://dl.ndl.go.jp/pid/1269917 기동은행의 로고 : https://www.sohu.com/a/579406180_121124789 기동은행 1원, 10원, 100원 권 : 웨이보 기동은행 5원 권 : https://auctions.stacksbowers.com/lots/view/3-Q9FBB/china-puppet-banks-chi-tung-bank-5-yuan-nd-1937-p-j115s1-specimen-pmg-uncirculated-60?utm_source=coinweek 기동은행 동전들 : https://www.sohu.com/a/579406180_121124789 기동은행 본점사진 :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8419024 기동은행 1942년 자료 : https://dl.ndl.go.jp/pid/1711946/1/71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 : https://dl.ndl.go.jp/pid/1437734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2월 : https://dl.ndl.go.jp/pid/1438178/1/22 통제경제독본 4정판 : https://dl.ndl.go.jp/pid/1709768/1/272 동아경제독본(東亜経済読本) : https://dl.ndl.go.jp/pid/1281545 흥아경제론 - 몽강 / 북지 : https://dl.ndl.go.jp/pid/1459430/1/111 조선일보 1938년 5월 29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529002391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8-05-29&officeId=00023&pageNo=1&printNo=6124&publishType=00010 중국연합준비은행 사진 : http://61.134.53.202:81/CRFDHTML/r201205022/r201205022.1d220bc.html 조일동아연보 쇼와 13년 (朝日東亜年報 昭和13年) : https://dl.ndl.go.jp/pid/1143488/1/157 중국연합준비은행 건물자료 : https://zh.wikipedia.org/wiki/%E5%8C%97%E6%B4%8B%E4%BF%9D%E5%95%86%E9%93%B6%E8%A1%8C 중국연합준비은행 영업사진 : https://kknews.cc/news/j3mq55y.html 미국국립역사박물관 : https://americanhistory.si.edu/collections/nmah_1887578 중화민국유신정부개사 : https://dl.ndl.go.jp/pid/1453880 대동아사진년보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 https://dl.ndl.go.jp/pid/1123693 한국근대신어데이터베이스 :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2-EAZ-3101&callType=dir&dirRsh=%ed%98%84%eb%8c%80%ec%96%b4%ec%88%9c%24%ec%82%ac%ed%95%ad%3a%ec%83%89%ec%9d%b8%24%ec%82%ac%ed%95%ad%3a&dataID=AKS-2012-EAZ-3101_DES@34492 동아일보 1940년 7월 8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00708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40-07-08&officeId=00020&pageNo=3&printNo=6785&publishType=00020 경성일보 1940년 1월 6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⑤ 화흥상업은행 (중화민국 유신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중화민국 유신정부 - 화흥상업은행(華興商業銀行) 옛 화흥상업은행 2대 본점자리 (현 중국대륙 상하이시 대명로 65호, 上海大名路65號). 현재는 일반 상가들이 입점해있다. 중앙은행이 아닌 '상업은행' 화흥상업은행은 1938년 3월 28일 난징을 수도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상업은행' 으로, 1939년 5월 16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상업은행임을 강조한 이유는 밑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화북지역과 마찬가지로, 당시 화중지역에서도 이전의 법폐와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군표가 남발되고 있었다. 또한 이 화중지역은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 경제적 중심지 상하이가 있었던 만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유신정부에게 있어 이지역의 경제를 장악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세워졌지만, 유신정부에게는 임시정부와 같은 강력한 국가주도의 금융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신정부는 이를 위해 1939년 4월 22일, 유신정부는 유신정부행정원령으로 《화흥상업은행조례 (華興商業銀行條例)》 를 공표, 화흥상업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조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흥상업은행조례 (華興商業銀行條例) 명칭: 화흥상업은행(華興商業銀行) 조직형태 : 유신정부 정부법인 자본금 : 5천만 위안 출자 : 유신정부와 일본측은행이 각각 절반씩 부담하기로 함. 하지만 중국의 민간자본 혹은 제3국자본이 참가에 호의적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기로함. 일본측은행은 일본흥업은행, 대만은행, 조선은행, 미쓰이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모토은행 업무: 무역통상관계에서의 금융에 중점을 두기로함. 특권 : 강제통용력이 있는 은행권의 발행 / 개업일과 동시에 유신정부로 부터 무이자로 1천만 위안을 제공받기로함. 발행권 : 10원(圓), 5원, 1원 / 보조단위로 2각(角), 1각 5종류, 대체로 법화와 그 가치를 같게하여 자유롭게 태환할 수 있게 함. 국고업무 : 신은행은 유신정부의 국고은행업무역할을 하게 함. 영업기간 : 3년 (3년마다 정부 허가를 통한 갱신가능.) 본점 : 상하이시 두락안로 2호 (上海竇樂安路2號) 지점 :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우후(蕪湖), 전장(鎭江), 우시(無鍚) 이 조례에서는, 화흥상업은행이 만주의 만주중앙은행,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몽강은행,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중앙은행역할' 이 화흥상업은행에게는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장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 에서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성격을 확실한 국가의 중앙은행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화흥상업은행에서는 이런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례에서는 제3국자본의 참여를 환영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화흥상업은행의 설립에 참가한 제3국의 자본은 없었다. 정부는 중국연합준비은행으로 하여금 일반금융기간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하고, 타 금융기관의 업무에 대해 일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함. -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13조 무역통상관계에서의 금융에 중점을 두기로함. - 화흥상업은행조례 中 화흥상업은행에 화폐발행권과 유통권은 부여되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중앙은행의 역할이라 보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일본은 화흥상업은행을 어디까지나 '상업은행' 으로서의 목적에 그치게 하려 했다. 그리고 주목해야할 부분은, 화흥상업은행의 경우, 화폐가치의 기준을 '일본 엔(円)' 이 아닌 '법폐(圓)' 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즉 앞에서 만주,몽강, 화북의 은행들을 소개할때 이야기했던 일본은행 1엔 = 조선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 중국연합준비은행 1원 =/= 화흥상업은행 1원 이라는 같은 가치로 일본과 조선, 조선과 만주, 만주와 화북을 연결하는 일본의 통화경제권인 '원(엔) 블록' 에 화흥상업은행은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 블록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법폐에 대한 조치가 달라짐도 의미한다. 화흥상업은행의 설립과정에서는 구 법폐에 대한 조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만주와 몽강, 화북의 것과 달랐다. 화흥상업은행은 설립과정에서 법폐를 모두 회수하려하고 말살하려 했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달리 법폐와의 '공존'을 추구하려했다. 법폐도, 화흥은행의 새화폐도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교환이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이 또한 일본의 화중지역 경제장악을 위한 일종의 술책이었다. 본점의 경우, 조례에서는 상하이시 두락안로2호[上海竇樂安路2號, 현재는 건물이 철거되고 상하이패션빌딩(上海時裝商廈)이라는 건물이 들어서있다.] 에 두기로 했지만, 이후 위에서 보았던 상하이시 대명로65호(上海大名路65號) 로 옮기게 된다. 조례에서는 영업과 동시에 난징을 비롯한 지점의 영업도 개시하려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난징 지점을 제외한 다른 지점들은 영업시작이 연기되었다. 중화민국유신정부개사 (中華民國維新政府概史) 에 존재하는 화흥상업은행 본점 (두락안로 시절) 의 사진. 이렇듯 화흥상업은행은 만주나 몽강, 화북의 은행들보다 시작부터 애매하고 약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당시 화흥상업은행의 설립을 보도하는 신문기사에서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은행의 화폐의 성격이 만주,몽강,화북의 것과 다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렇게 화흥상업은행에 작은 역할만을 부여한 이유로는 몇가지가 이유가 있는데, 첫 째는 화흥상업은행이 만들어질 당시 유신정부가 처해있는 위치였다.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달리 이미 자기 스스로를 '임시적인 정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흥상업은행이 세워지기 10개월전인 이미 1938년 9월 부터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하고 통합논의를 이미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이때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정부가 왕징웨이측이 아닌 임시정부에 통합될 것이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이런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정부에 굳이 중앙은행을 설치하여 통합이후 작업을 어렵게 할 필요가 없었다. 둘 째는 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는 임시정부와 다른 특성이다. 대민회를 소개할때도 언급했지만,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사들은 완전한 친일을 선택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국민당으로서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는 싫어" , "국민당은 좋은데 국공합작이 싫어" 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反공산주의, 反장제스주의자들로 반공, 반장을 위해 일본을 선택한 것이지, 임시정부의 인사들처럼 완전한 친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유신정부가 왕징웨이정권이 부드럽게 흡수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이들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곳 중 하나인 이전 국민정부 수도 난징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특성 때문에 일본은 압도저인 영향력을 지배할수 없는 유신정부의 화중에 임시정부의 화북보다 중요도를 크게 두지 않았다. 셋 째는 본래 일본의 경제블록구상이 화북까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엔(원) 블록을 구상할 당시 초기에는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일만조블록을 구상했고 이후에 화북이 이곳에 추가되었는데, 화중은 아니었다. 일본은 '화북의 특수성' 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 화북을 확보하려 여러 모습을 보였지만 화중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제권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중요도도 떨어지는 유신정부 지역에 화북에서와 같은 작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대민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화흥상업은행의 성립과정. 그리고 조례에 따라, 자본금 5천만위안을 유신정부가 절반, 일본측 은행들이 절반을 부담하기로 함에 따라, 상하이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계 은행 6개 (조선은행, 대만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토모은행, 미쓰이 은행, 일본흥업은행) 이 절반 2500만 위안을 부담하기로 했다. 5천만 위안이라는 자본금만 두고 보았을때 화흥상업은행은 같은 5천만 위안의 자본금으로 영업을 시작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같은 체급을 가지고 있었다. 상해의 신아대주점(上海新亞大酒店, New Asia Hotel) . 이곳에서 화흥상업은행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1939년 5월 1일에는 화흥상업은행의 창립대회가 상하이의 신아대주점(新亞大酒店) 에서 열리게 되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행사에는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梁鴻志) 행정원장을 비롯한 유신정부 주요인사들과 일본측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량홍즈 행정원장이 축사를 낭독한 이후, 화흥상업은행의 주요 인사들을 선출하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총재로 유신정부의 전 재정부장관이었던 첸진타오(陳錦濤, 진금도, 하지만 이후 건강문제로 사직) 를, 부총재로는 만주중앙은행의 전 이사였던 와시오 이소이치(鷲尾碕一) 를, 그리고 이사와 다른 직들을 임명하게 된다. 행사는 오후 1시에 끝났고 이로소 화흥상업은행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그리고 1939년 5월 16일부터 화흥상업은행은 정식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본래 10일에 영업시작을 계획했으나 연은처럼 내부사정으로 연기되었다.) 화흥권(華興券)의 등장, 그렇다면 화폐의 확산은 어떻게? 화흥상업은행의 첫 화폐시리즈. 이렇게 등장한 화흥상업은행의 화폐 '화흥권' 은 화흥상업은행의 영업과 함께 공개되었다. 화폐에는 민국27년 (1938) 인쇄가 되었다고 적혀있지만, 실제 인쇄는 민국28 (1939)년에 이루어졌다. 화흥권 원(圓) 단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憑票卽付國弊壹(伍,拾)圓 = 이 지폐를 1원 (5원,10원) 으로 사용하는것을 허가함. 화흥권에는 연은권이 그랬듯, 화중지역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투입되었다. 쑤저우, 난징의 풍경이 지폐에 사용되었으며 인물은 한명도 등장하지 않은게 특징이다. 앞에서 보았듯, 유신정부는 법폐의 회수도,강제교환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전에 쓰이던 법폐와의 공존을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유신정부와 일본은 어떻게 이 태환권과 같은 화흥권을 확산시킬것인가? 첫 째, 장제스의 충칭정부가 내세운 금융안정판법(金融安定辦法) 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충칭정부는 1939년 6월 11일, 법폐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자 금융안정판법 (2차)을 발표해 모든 예금의 인출을 제한했다. 그렇기에 법폐를 사용하는 민중들은 국민정부 지역이든 일본점령지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금을 인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화흥은행권은 법폐와 같은 가치를 가지게 한다" 라고 했던 화흥상업은행조례가 기억나는가? 유신정부는 화흥권의 가치가 법폐와 같음을 이용해 화흥상업은행은 화흥권을 통해서는 예금의 인출이 가능하게 했다. 예금을 가지고 있는 민중들은 언제 가치가 폭락하고 언제 다시 인출이 가능해질지 모르고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법폐의 옛 가치를 보장받는 화흥권을 통해서 예금을 찾던가, 예금을 계속하여 방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에 힘입어 유신정부측은 법폐가 붕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붕괴하는 법폐에 대비해 화흥권을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둘 째, 무역과 통상에 있어서는 무조건 화흥권을 사용하게 했다. 유신정부는 앞에서 보았듯 법폐와 화흥권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했다. 하지만 무역과 통상에서는 무조건 화흥권을 사용하게 했다. (이는 화흥상업은행조례의 '강제통용력' 을 이용한것이었다.) 때문에 상인들은 화흥권이 아니면 무역과 통상을 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가지고 있던 법폐를 교환할 수 밖에 없었다. 관세의 경우에도 화흥권으로만 지불할 수 있게 해 상하이의 공공조계에서도 거래를 위해서는 화흥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셋 째, 유신정부 정부내에서는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유신정부의 군인, 공무원등 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봉급으로 화흥권만을 지급받았다. 또한 세금납부를 비롯한 공공서비스에서도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법폐보다 우위에 서는 방법을 사용하려 했다. 넷 째, 외화 취급에도 화흥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즉, 유신정부의 주민은 외화로 환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법폐를 화흥권으로 바꿔야만 했다. 이렇듯 일본과 유신정부는 화흥권을 특정부분에서 사용을 강제함으로서 법폐와 공존하면서도 법폐를 대체할수 있는 신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법폐와의 동등가치 포기 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사진집인 대동아사진년도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에 실린 화흥상업은행의 영문광고. 화흥상업은행의 로고를 확인할수 있는 자료중 하나이다. (華를 형상화한것이 로고.) 하지만 화흥권은 등장으로부터 3개월도 되지않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본래 화흥권은 법페와 1:1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법폐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있음에 따라 (1939년 1월대비 7월 30% 하락) 더이상 법폐와 동등가치를 지키기 어려워 진 것이다. 이에 유신정부는 1939년 7월 19일 성명을 발표하고, 더이상 화흥권의 가치기준을 법폐와 연동시키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유신정부는 화흥권의 가치를 독자적인 기준을 두고 마련하게 된다. 보통 법폐의 가치를 영국의 파운드화와 비교하는데, 이에 따르면 법폐는 1위안 = 8페니 (약 3.36 펜스, 0.015파운드,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원정도 ) 라는 가치를 1938년부터 유지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1939년 전쟁의 장기화속 일본의 방해공작, 금융안정판법등과 같은 조치들로 법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 유신정부가 법폐기준을 포기한 1939년 7월의 시점에서는 1938년 : 1위안 = 8페니 (약 3.36펜스, 약 0.015파운드) 1939년 7월 : 1위안 = 5페니 (약 2.2펜스, 약 0.009파운드) 까지 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39년 8월에는 1위안 = 3페니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후 1939년 말에는 다시 5페니 수준까지 복구가 되긴 된다.) 아무튼 이로 인해 화흥권은 화흥상업은행 1위안 = 6페니 (약 2.52펜스, 약 0.01파운드) 라는 독자적인 기준을 세우게 된다. 이후 법폐의 가치가 더더욱 떨어져 1위안 = 3페니 근처까지 떨어지게 되면서 이 시점부터 화흥권은 법폐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각(角) 권 소액권은 이전처럼 법폐와 같은가치를 가지기로 했다. 즉 이러한 독자기준은 원(圓) 권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유신정부는 이와 동시에 화흥권을발행을 독려하고 화흥권을 안정적이라 이야기하며 주민들로 하여금 화흥권으로 빠르게 교환하라하면서 법폐를 금지하지 않고도 법폐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화흥권의 현실과 한계 1939년 7월, 화흥상업은행의 성립으로부터 반년도 되지않아 유신정부는 왕징웨이의 신정권으로 흡수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속에서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은 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첫 째로 화흥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이다. 앞에서 보았듯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스스로를 곧 통합될 존재, 임시적인 존재라고 존재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도 화흥상업은행에 큰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고 화흥상업은행은 화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런 시작부터 부여되었던 한계성 속에서 화흥권은 위에서 언급한 조치들에도 크게 유통되지 못한다. 1940년 1월 기준으로 유통된 화흥권은 '530만 위안' 에 불과했다. (화흥권의 발행이 중단되는 1940년 12월까지도 560만 위안에 불과했다) 중화민국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연은권이 설립 1년도 되지않아 '1억 위안' 이 넘는 발행고를 올린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수치였다. (심지어 몽강은행도 1939년 기준으로 4천만 위안 가량의 발행고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법폐와의 공존주의를 선택하고, 그속에서 화흥권이 더 우월함을 증명해 화중지역에서 법폐보다 우위에 서려했던 화흥상업은행의 생각과 달리, 화중지역에서 법폐의 영향력은 위에서 본것과 같은 조치들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화중지역은 본래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과 경제중심지 상하이가 있었던곳으로 가장 법폐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이런 화중지역보다 법폐와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낮았던 화북지역에서도 법폐의 말살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법폐의 영향력이 가장 높은 곳이자 가장 유통고가 많은지역이며 게다가 법폐와 공존주의까지 선택한 화흥권이 절대적 영향력의 법폐의 다발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화흥권은 연은권이나 만주중앙은행 원과 달리 다른 지역에서의 유통은 아예 없었으며, 오로지 화중지역에서만 그 유통이 가능했는데, 그 화중에서도조차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화흥상업은행의 경우 일본측은행들과 협력관계에 있었고 원블록의 일원으로서 일본이나 만주에게 자금지원도 받을 수 있었던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달리 화흥상업은행에는 거의 아무런 지원이 이루어지지않았다.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에서도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흥상업은행의 협력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블록도 아니며, 완전한 지배력도 없으며, 화폐일원화도 하지 않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은행에 일본은 지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화북지역에서는 발행을 중단했던 군표를 화중지역에서는 계속 발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왕징웨이정권에서의 화흥상업은행 8. 대외무역을 진흥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중앙은행을 재건하여 폐제를 통일해 사회금융의 기초를 확립한다. - 왕징웨이정권의 10대정강 (1940.03.30)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되면서 화흥상업은행은 또한번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난징국민정부의 성립과 동시에 10대정강을 발표해 자신의 정권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중 8번째는 '신중앙은행의 설립' 이 존재했다. 하지만 화흥상업은행은 계속하여 영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는 왕징웨이정권의 신중앙은행이었던 중앙저비은행의 설립작업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일본뿐만 아니라 초대 총재 첸진타오를 이어 총재가 된 구 유신정부의 수장이었던 량홍즈도 기자들의 질문에 "화흥권의 발행은 많지 않다. 하지만 화흥상업은행은 충분한 외화보유고를 가지고 있어 극히 온건한 상황이기에 휼륭한 성과를 내리라 믿고 있다. 신중앙정부 설립이후 화흥상업은행의 지위는 본래 유신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은행으로서 중앙정부설립이후에는 규정에 따라 인계되는 것이 맞으나, 정부와 직접 관계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화흥상업은행을 확대해 신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나로서는 화흥상업은행을 상업은행으로서 계속하여 지금처럼 견실하게 유지할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 량홍즈, 1940년 7월 화흥권의 발행수가 스스로 많지 않음을 인정하면서까지 "화흥상업은행을 계속 유지시켜달라" 라고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측의 분류에서도 일개 상업은행에 불과한 화흥상업은행을 무리하여 통합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화흥상업은행은 계속하여 영업을 진행하고 화흥권을 계속하여 발행하게 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 시리즈도 유통을 시작하게 된다. 1940년 등장한 화흥상업은행의 동전들. 10분짜리의 경우 청동으로 제작되기도 했고 백동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1분, 5분, 10분(1각), 20분(2각), 4종류의 동전으로서 이들은 앞에 등장했던 소액권 지폐들을 일정부분 대체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1분과 5분은 청동을, 10분과 20분은 백동을 사용했다. (10분의 경우 혼용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전들은 전쟁자원부족이라는 이유로 생산량이 아주 적었고, 게다가 화흥상업은행이 1940년 12월부터 화폐생산을 종료해버리면서 1년도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발행되었다. (10분 동전의 경우 꽤 발행이 된듯하나 5분 동전과 20분동전은 아주 적은수가 발행되어 사진자료가 아주 적은 편이다.) 게다가 이들 소액권은 중앙저비은행이후 대부분이 회수되면서 현재는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1분동전의 경우 70만원 상당에 거래되곤 한다.) 왕징웨이정권의 신중앙은행으로 중앙저비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12월 20일로 중앙저비은행법(中央儲備銀行法)이 통과됨에 따라, 화흥상업은행은 존치하되, 본래 상업은행의 역할만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1940년 12월 20일부터는 화흥상업은행의 화폐발행이 종료되고 화흥상업은행은 일반 상업은행으로 역할을 바꾸어 영업을 진행하게 된다. 발행되지 못했던 화흥상업은행의 2차 지폐시리즈. 인물구성은 연은권을 생각나게 한다. 화흥은행은 화폐발행을 중지하기 전에 5원권과 10원권을 새롭게 준비하고 도안까지 만든 상태였으나, 화흥권의 발행이 종료가 임박한 시점이었기에 이는 발행되지 못하게 된다.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의 결말 그렇다면 이후 화흥상업은행과 화흥권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저비은행법과 동시에 공표된 정리화폐잠행변법(整理貨幣暫行辨法)서는 화흥권의 정리를 규정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화흥상업은행의 화폐발행권을 취소하고, 화흥권은 회수하여 본행(중앙저비은행)의 본권(저비권)으로 교환하게 한다. (5조) 이에 따라 발행되었던 화흥권은 중앙저비은행에서 회수 & 교환 조치를 내리게 되어 화흥상업은행 1원 = 중앙저비은행 2.4원 (1:2.4) 라는 비율로 회수 & 교환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화흥상업은행은 일반상업은행으로 왕징웨이정권이 해체되는 1945년 까지 영업을 지속하다, 중일전쟁에서 국민정부가 승리한 후인 1945년 11월에 중국은행으로 흡수되게 되며 화흥상업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출처] 김성진, 김상옥 「만주국의 지폐 변천과 지폐 도안의 특징」, 『통권 7호』, 2019 미국국립역사박물관 : https://americanhistory.si.edu/collections/nmah_1887578 중화민국유신정부개사 : https://dl.ndl.go.jp/pid/1453880 지나중앙은행론 : https://dl.ndl.go.jp/pid/1444804 대동아사진년보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 https://dl.ndl.go.jp/pid/1123693 한국근대신어데이터베이스 :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2-EAZ-3101&callType=dir&dirRsh=%ed%98%84%eb%8c%80%ec%96%b4%ec%88%9c%24%ec%82%ac%ed%95%ad%3a%ec%83%89%ec%9d%b8%24%ec%82%ac%ed%95%ad%3a&dataID=AKS-2012-EAZ-3101_DES@34492 동아일보 1940년 7월 8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00708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40-07-08&officeId=00020&pageNo=3&printNo=6785&publishType=00020 동아신경제론 : https://dl.ndl.go.jp/pid/1450416/1/150 화흥은행 동전자료 : https://www.kmcaishui.com/caijin/shoucang/article_147110.html 화흥은행 동전자료2 : https://antique-coin.info/kaitori/shanghai-kosen/ 화흥권 자료 : https://en.numista.com/catalogue/china_reformed_government-1.html 화흥권 미발행권 자료 : http://asiamoney.weebly.com/rude-confucius.html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⑱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 (民族主義と大亞洲主義) *손중산 선생의 탄생기념일인 쇼와15 (1940)년 11월 12일, 왕 선생은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와 관련하여 민족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민족의식에 대한 시대성에 대해 설명 하면서 현 단계에서의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의 융합일체에 대해 논했다. 여기서 왕 선생의 동아연맹 사상에 대한 공명이 느껴진다. “나는 4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총리유촉의 가장 첫마디) 이는 중산 선생의 유촉 중의 말로, 중국의 민족의식은 손중산 선생에 의해 확실히 대표되어 집대성되어왔다. 중국에는 민족이 있고, 본래부터 민족의식이 존재해왔으며, 이는 4천년 이래의 역사속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옛 민족의식을 현대의 민족의식으로 까지 단련시켜 하나의 민족주의로 발전시키고, 이를 이론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시키기 위해 노력만진하는 것에 손중산 선생은 그 일생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손중산 선생은 자신의 임종에 즈음하여 아직 다하지못한 혁명의 책임을 뒤에 남은 동지들에게 부탁하여 대신 행하게 했다. 올해는 정확히 아편전쟁의 발발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다. 1840년부터 1940년까지 100년간에 이르는 경제침략을 위해 무력침략을 행해온 제국주의는 중국의 민족의식을 향해 끊임없는 파괴공작을 가했고, 이 파괴공작은 중국민족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중국의 민족의식은 이미 굳어져 아무리 파괴된다고 한들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분열을 꾀하면 꾀할수록 하나가 되게 되었고, 압박을 하면 할수록 단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파괴공작 이외에도 우리는 증오해야할 것이 있다. 이는 바로 민족의식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는 공산당이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표어를 내걸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의 민족의식을 이용해 구국을 절규하는 이상한 계급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민족의식을 악용해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두구육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별것없음) 과 같은 비겁한 수단은 중국민족에게 고통을 주고 있을 뿐인데, 이를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제국주의의 파괴공작과 비교해봤을 때 그 해로움은 더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또한 치명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이 중국민족의 눈을 잠시 가릴 수는 있겠지만, 중국민족은 곧바로 각성해, 눈을 뜬 이후에는 두 번 다시 이러한 속임수에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이 돌아가실 무렵에 공산당은 아직 흉악한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만약 손중산 선생이 계속 살아계셨다면 민국 16년 (1927년) 이후의 공산당의 해악은 반드시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제국주의가 창궐하는 문제의 경우, 이것은 손중산 선생의 국민혁명에서 타도할 대상이었다. 손중산 선생은 아편전쟁으로부터 22년 후인 1866년에 태어나, 아편전쟁으로부터 45년이 지난 1885년부터 국민혁명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1925년에 서거하셨으니 이는 아편전쟁으로 80년이 지난 후다. 손중산 선생은 “나는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프랑스에 패한 그 해, 비로소 나는 청조의 전복을 염두하고 민국을 창건하기로 결정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1885년의 일로, 당시 손 선생은 23세였다. 이렇듯 국민혁명의 결정은 제국주의의 외환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 단순히 청조를 타도하는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주의가 없다면 중국민중을 자각시키는 것도, 중국민중의 역량을 단결시는 것도 불가능하며, 대아시아주의가 없다면 동아민중을 자각시키는 것도, 동아민중의 역량을 단결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손중산 선생은 1924년 8월 24일 삼민주의에 대한 강연을 마친후, 11월 28일에는 일본의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강연했다. 손중산 선생의 유촉에는 “40년간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중국의 자유평등이라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중에 호소하여 궐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투쟁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소위 평등하게 우리를 대우하는 민족을 소련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촉에서는 이를 따로 어느나라라고 지정하지 않고, 단지 ‘평등하게 우리를 대우하는 민족’이라 지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일본이 우리를 평등하게 대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대아시아주의를 기도할 수 있는 바라 할 것이다. 어째서 민중을 환기시키고 평등하게 우리를 대우하는 민족과 공동 분투할 필요가 있는것인가. 경제침략을 위해 무력침략을 종용하는 제국주의 세력은 매우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만 하더라도, 호주에서, 필리핀에서 그들은 이미 유색인종을 병탄, 정복해 노예로 삼고 있다. 중국이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을 막으려면 중국민중의 자각을 환기시키고, 중국민중의 역량을 단결시켜 이를 근본으로 삼아야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보았을 때도, 주위의 형세는 이를 어쩔 수 없는것이기에 어떤 나라도 이 ‘연합’이라는 두 글자를 경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연합하게 되면 운명은 공동의 것이 되고, 함께 번영도, 함께 멸망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는 속박에서 벗어나는데에는 고립이 편리할 수도 있겠지만, 세계의 대세는 경제상으로도, 군사상으로도, 점차 일국의 단독행동에서 집단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연합’이라는 두글자는 이미 강대국에게 있어서도 필요한 것이 되었으며, 하물며 앞으로 발전할 나라나 이미 낙오되어 다시 부흥하려는 나라에게는 더욱더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아시아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나온 것으로, 제국주의 세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침략으로 몰락한 필리핀 뿐만이 아니라, 아편전쟁 이후로 거의 모든 황인종도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중국뿐만이 아니라 일본까지 침략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일찍이 그 침략에서 벗어나 중국보다 수십년을 앞서 자유와 평등을 얻고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소멸하지 않는 한, 이는 일본에게도 다시 침략의 위험이 있게 되는 것으로,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중일 양국의 운명은 마찬가지이며, 양국이 이러한 점을 경시한다면 이 공동의 운명은 순식간에 상극이 되어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며 이를 막기 위해선 서로가 반성하고 노력하여 공동운명을 향해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대아시아주의는 손중산 선생의 서거로부터 15년만에 다시 광명을 찾게되어 중일 양대민족의 찬란한 앞길을 비추고 있다. 때문에 중일은 더욱더 상호제휴하여 이를 전진시켜야 한다. 민족주의와 대아시아주의는 중일양국의 운명이 상극인 시대에는 서로 양립할수 없는 것이었지만, 현재와 같이 중일양국의 운명이 공동의 것이 된 시대에는 서로 연관될 뿐만이 아니라 융합해 일체의 것이 되었다고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국이 만약 독립과 자유를 얻을수 없다면, 동아의 책임을 분담할 수 없게 되는것이고, 동아의 해방이 없다면, 중국의 독립자유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명심하고 뼈에 새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도 중국이 동아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희망한 이상, 일본은 당연히 평등으로서 우리를 대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일본에 있어서 고노에성명 이래 부동의 정책이 되어, 여론이 일치된 것이다.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④ 중국연합준비은행 (중화민국 임시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국연합준비은행(中國聯合準備銀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베이징 본점 (2대). (현재 중국대륙 베이징시 시청구 시자오민샹 17호, 北京市西城区西交民巷17号) 이곳은 본래 북양보상은행(北洋保商銀行)가 자리하고 있었다. 북양보상은행은 중일전쟁이후 영업을 중단했고, 이후 북양보상은행자리를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차지한 것이다. (현재 이곳중국인민은행을 거쳐 중국화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통합의 산물, 중국 '연합' 준비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1937년 12월 14일 베이징(핑)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앙은행으로, 1938년 3월 10일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화북지역에는 적어도 11개 이상의 은행에서 발행한 통화들이 혼용되고 있었고,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군표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적어도 화북에서 3~4억 위안 가량의 법폐들이 유통되고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일본과 임시정부는 이러한 혼용으로 생기는 혼란을 끝내고, 화폐를 통일하여 화북지역의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된 화폐의 권위를 통해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만드는 법폐에 맞서려 했다. 일본측은 임시정부의 이러한 통화통일시도를 '대담한 시도' 라 서술하기도 했다. 정부수반이자 재정장관이었던 왕커민 (王克敏, 왕극민)은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38년 1월 6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는 앞으로 생기게 될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1月)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중앙은행은 중화민국임시정부와 중국측 은행들의 공동출자로 설립하기로 한다. 2. 자본금은 5천만 위안으로 하고, 반은 정부가, 반은 민간이 출자하기로 한다. 3. 신중앙은행은 유일한 화폐발행은행으로써 신화폐를 발행하기로 한다. 4. 중국연합준비은행에 참가하는 은행의 화폐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새로운 화폐로 일정기간내에 교환·회수하기로 한다. 5.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 (통합혹은 산하로 둠) 하는 은행은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중국은행(中國銀行)*, 교통은행(交通銀行)*, 금성은행(金城銀行)*, 대륙은행*(大陸銀行), 중남은행*(中南銀行), 기동은행(冀東銀行), 염업은행*(鹽業銀行) 8개로 한다. (*표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점령지에 있는 지점들만 해당) 이름처럼 , 중국 '연합' 준비은행은 화북지역에 존재하는 은행들을 통합 & 산하에 두는 방식을 통해 설립하려 했다. 그리고 현지정보북지경제지리 (現地報告北支経済地理) 에 따르면, 여기에는 하나의 내용이 더 존재한다. 이는 바로 6. 일본측의 은행들로부터 1억 위안의 차관을 받는다. 인데, 이 내용은 현지정보북지경제지리에는 서술되어 있으나,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1月)나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 것같다. 그리고 다음날, 1938년 1월 7일,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정부차원에서 화북지역 (중화민국 임시정부 점령지역) 의 통화안정과 통화의 통일을 목표로 신중앙은행인 중국연합준비은행을 건설하겠다는 취지를 담은성명을 발표했다. 정 부 성 명 서 (1938.1.7) 중국의 화폐제도는 개혁이래, 표면상으로는 안정이 된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직 취약한 상태임에도 이를 등한시해버려, 지금의 중대한 위기로 인해 안정화의 기초는 뿌리로부터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통화의 안정은 금융제도의 확립에 있고, 그리고 이는 국가의 생존, 민생의 기초적 조건이다. 이 조건을 갖추려는 정부는 막중한 책무를 지닌다. 적어도 국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불안한 상태에 있게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반드시 적법하게 이를 처리하고 완전히 해결할 필요가 있다. 본 정부는 성립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제정을 혁신하고 정책을 확신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특히 산업의 개발, 국민경제의 진전은 오로지 화폐제도, 통화의 안정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통화의 불안을 일소하고, 통화제도의 통일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해 국내의 각 은행들을 연합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우방 일본의 국민들도 나아가 원조를 할것이다. 오늘부로 정부는 은행 창립을 위한 위원을 임명하고, 설립 준비를 위한 명령을 내렸다. 본 정부는 위와 같은 취지에 근거한 신은행을 설립하기로 한 이상, 해당 은행의 기초와 안정에 있어서 조밀한 계획을 세우려한다. 예를 들어 발행 준비금의 충실, 재정기능의 확립과 같은 것을 말이다. 다시 한번 정부는 재정 안정 방안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것을 국민들에게 천명하는 바이다. 창립위원으로는, 임시정부의 수장인 왕커민과,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하는 8개은행의 지배인, 그리고 만주국의 중국은행 지배인 왕시징(汪時璟) 까지 총 10명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중 왕시징은 이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가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 왕시징 (汪時璟), 그는 왕커민과 함께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창설인물 중 한명이기도 했다. (사진은 중국연합준비은행 베이징 본점의 사무실) 그리고 이들 창립위원들은 여러번의 회의끝에 1938년 2월 6일,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를 공표한다. 조례에는 지폐로 1원, 5원, 10원, 100원 4종류를, 동전으로 5각, 2각, 1각, 5분, 1분, 5미 6종류를 만든다고 정의하고 있고 (9조~ 12조), 총재의 임기는 2년이고 주주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20조), 부총재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18조), 본점을 베이징에 두는것 (3조) 등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례의 공포와 동시에, 왕커민을 비롯한 정부요인들,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를 결정한 8개 은행의 관계자들, 일본계 은행들의 관계자들이 모여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창립총회를 열었다. 창립총회에서는 왕시징을 총재로, 사카타니 키이치(阪谷希一)를 고문으로 결정하고 동시에 이사들과 간사들도 선정했다. (이사와 간사에는 8개은행의 경리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본점사무소로 베이징 중국은행 건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전 중국은행 베이징지점 (현 중국대륙 베이징시 시청구 시자오민샹 17호, 北京市西城區西交民巷17號, 천안문과 전인대가 가깝다.) 에 설치된 중국연합준비은행 본점사무소. 사진은 영업을 개시한 1938년 3월 10일의 사진이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가운데 직원들이 현판식을 진행하고 있다. (애초에 이건물은 위에서 소개한 2대 본점의 바로 옆건물이다.) 그리고 1938년 2월 10일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 설립을 위한 자본금을 어떻게 부담할것인가가 결정되었다.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2월(内外経済概観 昭和13年2月)에는 그 부담의 비율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자료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성립과정. 수많은 주체들이 은행설립을 위해 자금을 출자했다. (*표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점령지의 지점들만 해당)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자본금 5천만 위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이중 절반인 2500만 위안은 주식을 발행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1주 100위안) , 나머지 2500만 위안중 절반인 1250만 위안은 중국연합준비은행에 합류하는 8개은행이 분할하여 조달하기로 하고, 나머지 1250만 위안의 경우 중화민국 임시정부 정부측에서 마련하기로 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위해 일본의 요코하마 정관은행 (横浜正金銀行) 과 일본흥업은행 (日本興業銀行), 그리고 조선의 조선은행에 각 300만 위안씩, 총 900만 위안의 담보를 제공하고, 여기서 마련한 자금을 만주중앙은행, 조선은행, 그리고 요코하마 정관은행의에 융자를 받아 자본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부족한 분은 400만 위안은 현물을 일본측에 제공함으로서 생긴 금액을 사용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구조도. 이름처럼 다른은행들을 산하에 둔 '연합' 은행이었다. (이전 포스트의 기동은행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임시성격의 1차 정규권등장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은 2월 11일, 정식으로 설립이 되었고, 이로 부터 한달이 지난 1938년 3월 10일부터는 베이징(핑) 을 비롯한 여러지점들이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개업날에는 왕커민을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위의 베이징 본부사무소에서 열린 개행식에 참가했고, 이자리에서는 국기 (임시정부의 오색기) 의 게양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개업식을 마친 오전 10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드디어 정식 영업을 시작했다. (본래 3월 1일 개업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내부 사정으로 10일로 연기 된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생기기전부터 이미 북평의 인쇄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전 청나라 시기의 은행, 대청은행(大淸銀行)의 지폐활판을 가져와 이를 개조해 지폐발행을 이미 준비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만주나 몽강에서 처럼 임시권 사용이 없었던 이유는, 정부 수립직후부터 임시정부가 자체화폐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 측에서는 초기 화폐로서 '조선은행권' 의 유통을 고려했었다. 만주중앙은행이나 몽강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은행권에 '중국연합준비은행' 도장을 찍어 사용하려 했다. 조선은행권은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군표로서 사용했던 화폐이기도 했고 발행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약 7천만 위안)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너무나도 많은 조선은행권이 필요할것으로 예상되었고 (4억 위안이상이 필요할것이라 보았다), 또한 조선은행권 자체는 화북에서 유통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은행과 유통되고 있는 조선은행권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단념하고 자체 화폐 발행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런 임시권 사용보다 빠르게 자체 화폐를 발행하고 옛 화폐들을 자신들의 신화폐로 교환시키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임시권을 발행하지 않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개업과 동시에 등장한 1차시리즈. 하지만 이들은 임시권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등장과 동시에 생겨난 1차 시리즈는, '정규 1차' 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임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첫 화폐들은 앞에서 소개했던 대청은행의 활판을 재사용한 것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 청나라 시기의 화폐를 아주 조금만 바꾸어 자신의 화폐로 사용했다. (은행 이름을 연합준비은행으로 바꾸고, 그려진 인물을 황제에서 다른 인물들로 바꾼것에 불과했다.) 1909년 발행된 대청은행의 지폐와 1938년 발행된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지폐 (10원). 은행이름, 그리고 인물을 섭친왕 재풍에서 관우로 바꾼것외에는 대부분의 요소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이때 발행된 화폐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서양산 종이의 재고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재고는 얼마가지 않아 바닥났고, 그렇기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마날라 삼(蔘) 재질의 새로운 종이를 수입해와야 했다. 그리고 새종이로 지폐를 만드는 과정에서 도안을 일부 수정하게 된다. 일본측에서는 이러한 도안에 만족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지나정세요람(新支那現勢要覧) 에서는 이러한 신 지폐들의 도안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의 화폐를 "역겨운" 쑨원의 초상화나 서양지폐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모습이 사라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러한 초대 화폐의 발행과 동시에 구 화폐들의 회수 / 교환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화북지역은 너무나도 많은 종류의 화폐가, 너무나도 많이 발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인쇄국에서 지폐를 발행이 이들을 모두 대체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임시정부는 이들 옛 화폐들의 사용을 임시적으로 허가하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영업을 개시한 다음날인 1938년 3월 11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은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을 공표하고, 옛 화폐 : 연합준비은행권 (연은권)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함과 동시에, 일정기간동안 옛 화폐들을 임시로 사용할 수 있게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옛 화폐들에게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부여했다.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 1938.3.11 중국연합준비은행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 기동은행(冀東銀行) 의 화폐 / 교통은행(交通銀行) 북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북방권 / 산서성은행(山西省銀行) / 산동-산서 지역의 지역은행들 → 1939년 3월 10일까지사용가능 (1년) 교통은행(交通銀行) 남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남방권 / 중앙은행 (中央銀行) 중국실업은행(中國實業銀行) / 북양보상은행 (北洋保商銀行) / 중국간업은행 (中國墾業銀行) / 절강흥업은행 (浙江興業銀行) / 대중은행 (大中銀行) / 변업은행 (邊業銀行) / 중국농공은행 (中國農工銀行) / 중남은행 (中南銀行) / 중국통상은행 (中國通商銀行) / 농상은행 (農商銀行) / 사명은행 (四明銀行) / 중국농민은행 (中國農民銀行) 의 화폐 → 1938년 6월 10일까지 사용가능 (3개월) 소액권 (角,分,厘) → 1941년 5월 31일까지 사용가능 (3년)* (이후에는 연은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용불가) *는 1938년 5월 28일 추가된 내용 여기서는 각 은행권마다 사용기간을 제한했다. 기동은행이나 하북성은행처럼 이전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적었던 은행들에게는 1년이라는 여유로운 사용기간을 부여한 반면, 이전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은행들에 대해서는 3개월이라는 짧은시간을 부여했다. 그리고 1938년 5월 28일에는 《소액지폐급보조화정리변법 (少額紙幣及補助貨整理辨法) 》을 발표해 6월 1일부터 각(角)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옛 은행들의 소액권 (각, 분, 리) 에 대해 3년동안 사용을 할 수 있게 했다. 3년이라는 긴 유예기간을 준 것은 민중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자 동시에 소액권 발행에 필요한 금액을 절약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6월 1일에는 각(角) '지폐' 가 등장하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中國聯合準備銀行條例》 에서는 이러한 소액권은 동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어떠한 이유로 이들은 동전이 아닌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이는 조례 조항속의 빈틈을 이용한 것으로, 《중국연합준비은행조례 》 11조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 11조: 중국연합준비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의 종류는 1원, 5원, 10원, 100원 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동전의 종류는 5각, 2각, 1각, 5분, 1분, 5리 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동전도 지폐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을 이유로, 중국연합준비은행에서는 이 소액권들을 동전이 아닌 지폐로 발행하게 된다. 1938년 6월 1일 등장한 각(角) '지폐'들. 본래 계획에 없었던 2각짜리 지폐가 등장한게 흥미롭다. 하지만 이 지폐들도 위의 원(圓) 지폐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발행되지 못한채, 1938년 12월에는 새로운 도안의 지폐로 발행되게 된다. 각 정규1차 시리즈도 결국에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연은권의 지폐가 확립되는 것은 1938년 말 분(分) 지폐와 새로운 각 지폐가 등장하고 1939년 1월 새로운 원(圓) 지폐가 등장하고 나서야였다. 화폐 교환을 독려하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포스터. 그리고 중국연합준비은행은 1938년 8월 7일 오후 6시,성명을 발표하고, 위의 구통화정리변법에서 1년간 사용이 허가되었던 교통은행 - 중국은행 지폐에 대해 평가절하를 실시했다. 본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이들 지폐에 1:1의 가치를 부여하여 교환을 진행하게 했는데, 계속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두은행의 법폐의 교환을 유도하기 위해 "장제스 정권의 법폐는 점점 신뢰성을 잃고 있다" 라는 이유로 1:1로 평가되고 있었던 중국은행 / 교통은행의 법폐에 대해 10% 평가 절하를 실시했다. 게다가 12월 10일 다시 한번 30%의 평가 절하를 실시하면서 (물론 이때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제공되었다) 화북에서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가지고 있던 이들 화폐의 가치는 1:0.6까지 떨어지게 된다.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1 (1938.3)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0.9 (1938.8) 중국연합준비은행권 : 중국은행 · 교통은행 북부권 (법폐) → 1:0.6 (1939.2) 중국연합준비은행의 1.5차 시리즈. 이 시기에 와서야 연은권은 진정한 확립에 이르게 된다. 1.5차 시리즈와 엔(円,圓) 블록 그리고 그 한계 1938년 말에서 1939년 초에 등장한 1.5차 시리즈에서는, 원(圓)의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38년 3월 공개된 1차 도안과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원의 경우 발행이 1939년 1월 부터 진행이 되었지만, 지폐에는 그대로 '중화민국27년 (1938년)' 이라고 표기를 해두었다. 각(角)의 경우 12월에 생산된 2차 버전은 베이징에서 인쇄가 이뤄졌던 것과 다르게 2각, 1각의 경우 일본 도쿄에서 인쇄가 되기 시작했다. 5각 짜리 지폐가 가장 흥미로운데, 지폐의 도안으로 바로 루거우차오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이 루거우차오에서 시작되었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이 일본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음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는 만주중앙은행, 몽강은행과 마찬가지로 모두 일본은행권과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제국은 일본은행권 1엔 = 조선은행 1원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 중국연합준비은행 1원 라는 일본-조선-만주-북지(화북) 을 연결하는 이름바 '엔(円) 블록'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일본은 임시정부 지역에서 법폐를 말살하기 위해 더더욱 노력을 가해갔다. 1939년 2월 11일에는 재정부훈령을 통해 모든 예금에서 연은권만을 사용하게 했다. 즉, 법폐로 넣은 예금도 받을 때는 연은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보았듯 평가절하된 가치를 반영했다.) 그리고 구통화관리변법에서 정한 1939년 3월 10일자로 소액권을 제외한 법폐가 완전히 사용금지되면서 임시정부 지역은 이제 연은권으로 완전히 통일되게 되었다. 화폐 발행수도 이 시점에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세워지 당시 화북에서 유통되고 있을것이라 추정한 3억~4억 위안을 넘게 되게 되었다. 동아경제독본 (東亜経済読本, 1941) 에 묘사된 연은권의 발행수. 1939년 여름에는 3억위안을 넘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이렇게 빠르게 지폐발행수를 늘린데에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법폐를 대체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유통하고 있었던 군표를 대체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은행권을 화북에서 군표로 사용했는데, 이 군표의 유통량이 만만치 않아 화북 지역에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은 화폐 발행량을 늘려 지역에 유통되었던 군표, 즉 조선은행권을 모두 연은권으로 바꾸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화폐의 통일과정속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1939년 5월 5일 오후 4시에 개최된 제1차 주주총회에서 왕시징 총재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이 큰이익을 거두었음을 당당히 발표하기도 했고, 외화도 취급하게 되었으며 1938년 8개에 불과했던 지점이 12개로 증가하는등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성장을 거두고 있었다. 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사진집인 대동아사진년도 2602년판 (大東亜写真年報 2602年版) 에 실린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영문광고. 로고와 함께 설립일이 1938년 2월 11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중 하나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세는 전쟁의 지속속에 오래가지는 못했다. 우선 목표로 했던 법폐의 말살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임시정부내에서도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법폐나 공산당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임시정부에 둘러쌓인 톈진 조계에서는 조계당국과 조계를 구성하는 서구 열강들이 기를 쓰고 연은권의 유통을 막으려 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1939년 8월 9일자로,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을 더이상 중화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화민국 임시지역을 방문하는 일본,조선, 만주의 사람들은 모두 입국과정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연은권으로 교체해야 했다 (제한은 500위안까지). 선박을 통해 방문하는 이는 선박내에서 가지고 있는 조선-만주-일본돈을 연은권으로 모두 바꿔야 했고 항공기를 이용하는 경우 도착 비행장에서 환전을 하게했다. 육로 (기차등) 를 이용하는 경우 만주국-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국경의 교환소에서 교환을 해야했다. 이러한 내용을 화북지역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강조하는 기사가 1939년 8월 12일자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1940년 6월부터는 연은권 사용을 방문하는 일본,만주,조선 사람은 특별한 허가가 없는한 200위안까지만 연은권으로 바꿀수 있게 되었다. (단 만주국-구 중화민국 임시정부 국경을 통해서는 500위안) 이후 만주국에서도 연은권이 사용금지되고 (1940년 5월), 조선, 일본에서도 연은권이 사용되지 않게 되면서 (1940년 6월) 연은권은 원블록에 속해있지만 사실상 화북에서만 통용되는 화폐가 되게 되었다. 이런 조치는 일본측에서 연은권의 남발과 그속에서 생겨나는 인플레이션이 일본국내까지 전파되는것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연은권이 이제 이전과 같이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연은권은 필요이상으로 발행을 이어나갔고, 위에서 본 1939년 3월의 발행고가 3억 위안이었는데 1940년 10월에는 그 두배인 6억 위안 가까이까지 발행이 이어지면서 지폐가 초과발행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런 연은권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자본을 투입해야 했고, 일본측에서는 이를 부정했지만 일각에서는 연은권의 가치절하설이 돌기도했다. 연은권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북정무위원회에서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수립에도 그 실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도 난징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몽강이 그랬던 것처럼 중화민국 임시정부 또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정부에 통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그 실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이었던 중국연합준비은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 정부수립과정에서 왕징웨이측은 신중앙정권의 신중앙은행이 몽강(몽강연합자치정부), 화북(중화민국 임시정부), 화중(중화민국 유신정부) 지역을 모두 통괄하기를 바랬으나 일본과 임시정부의 요구로 이를 실현시킬 수 없었다. 또한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동시에 설립된 화북정무위원회에서는 '신중앙정부의 중앙은행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연은권의 지위는 변함없을것이며 더더욱 강화될것'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정권의 등장에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이었던 중앙저비은행은 화중에 그 영향력을 제한받았다. 또한 화북정무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일본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지배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왕징웨이의 난징정부가 발행량을 보고 하라했지만 제대로된 수치를 보고하지 않았고, 1943년에는 심지어 총재였던 왕시징이 "화폐발행량을 화북정무위원회와 난징에 보고해야한다" 라고 해도 이를 듣지않는등 이때부터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영향에 놓여있게 된다. 이렇게 화북정무위원회도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이전부터 초과발행되던 연은권의 발행을 더더욱 늘리게 되었고, 본래 4억가량으로 추정되었던 구 법폐 유통량을 뛰어넘어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1년 말에는, 발행액이 10억위안에 가까워지면서 화폐는 더더욱 남발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모두 화북의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톈진과 도쿄의 물가상승률 비교. 쇼와12(1937) ~ 쇼와 17(1942) 사이 도쿄의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았지만, 톈진의 경우 4배 넘게 물가가 올랐다. 1938년 1월과 1942년 1월의 물가 비교 (1937년 6월 도쿄물가를 100이라고 했을때) 도쿄 : 102.9 → 147.2 (+45.3) 톈진 : 111.9 → 468.1 (+357.2) 베이징과 도쿄물가 비교 (도쿄의 가격을 1이라고 했을때, 1942년 초) 백미 → 1 : 3.2 청주 → 1 : 2.8 차 → 1 : 1.8 설탕 → 1 : 2 간장 → 1 : 4 연은권의 남발 속 베이징의 물가는 도쿄의 물가보다 더욱 비쌌다. (고기나 계란같은것은 베이징이 더욱 저렴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상품은 도쿄보다 베이징이 비싼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이용해 전쟁자금을 대려 화폐발행번호 조차 기입하지않은 화폐를 대량 남발하면서 이러한 물가는 더더욱 오르게 된다. 일본은 심지어 화폐활판을 복제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아닌 일본군 자체적으로 화폐를 제작해 마치 군표처럼 유통시켜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화북정무위원회 치하에서는 이전에 해결되지 못했던 톈진 조계에서의 연은권 사용문제와 관련해 1940년 6월 20일, 조계측이 연은권의 사용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일본, 임시정부측과 합의를 하게 되면서 톈진 조계에서도 연은권이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은권이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인 1941년에, 제2차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 2차시리즈에서는 이전에 지폐로 대체되었던 소액권들이 본래 계획대로 동전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1941년에 등장한 2차 시리즈. 2차 시리즈에서는 지폐의 경우 인물에는 변화가 없었고, 건물의 경우 베이징 자금성의 건물들을 많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인쇄표시가 '화북정무위원회인쇄국발행' 이라 표시함으로서 은행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화북정무위원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전의 경우 1각, 5분, 1분 3종류가 등장했는데, 만주나 몽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 알루미늄 소재를 채택했다. 5각짜리 동전이 등장하지 않은 것이 의외한 부분이다. (이전에 발행된 종이 소액권도 모두 통용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연은권이 너무나 발행되고 있음을 인식은 하고있었기에 1940년 9월부터 "이제 연은권에게 중요한건 물가와의 싸움" 이라 이야기 하면서 연은권의 안정을 이야기하고 연은권의 가치가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실제로는 상황은 더욱 악화되면 악화되고 있었지, 나아지지는 않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전시경제체제가 공영권 전체로 확대됨에 따라 이름바 '원(엔) 블록'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시경제체제속 만주중앙은행과 중국연합준비은행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은행들은 물자,자원의 수탈과 이로인한 부족상황 속 맞이한 자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은행 설립 5주년이 되는 1943년 3월 10일에는 일본은행에서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원조하기 위해 2억위안을 제공하기로 하고, 6월 29일에는 만주중앙은행도 9천만 위안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이러한 자금지원에도 이미 남발되고 있는 연은권의 추락을 저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2.5차 시리즈 (1943) . 화폐의 남발과 인플레이션속 고액권이 등장했다. 1943년에는 10원권, 100원권 고액권의 디자인을 수정하고, 500원이라는 새로운 고액권 화폐를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 도안들도 오래가지 못하고, 1944년에 되어 또한번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1943년, 연은권의 가치는 계속하락하고 있고 발행고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왕시징 총재와 화북정무위원회측은 계속하여 물가안정을 이야기했지만,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장기화 속 전비마련을 이유로 이를 신경쓰지 않았고 화북정무위원회와 은행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앞에서 톈진의 물가가 4년사이 4배 이상 올랐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1943년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북정무위원회의 자체조사에서도조차, 1943년 12월 기준, 톈진의 물가는 더더욱 올라 전쟁전에 비하면 "11배" 이상이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재앙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진정한 재앙은 1944년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중국연합준비은행 1944년에 등장한 3차시리즈. 1944년에는 모든 지폐의 도안이 수정된 새로운 3차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 3차시리즈에서는 종이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고액권을 제외하면 모두 크기를 줄였고, 잉크 사용량도 줄이기 위해 도안도 일정부분 바꾸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화폐남발로 인한 이름바 '초' 인플레이션의 발생으로, 소액권은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물론 이전까지 유통된 구권을 계속 사용하게했다.) 이권의 특징으로는, 1원, 5원, 10원에 화폐를 식별할 수 있는 번호가 기입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 3종류의 화폐가 너무나도 많이 발행되어 식별번호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3차 시리즈를 시작으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에는 재앙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재앙은 바로 발행고가 너무나도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일본과 임시정부 (이후 화북정무위원회) 측은 1940년부터 연은권이 예상보다 많이 유통되어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위한 안정화작업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화폐발행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41년 말 10억위안이 조금안되던 화폐발행량은 1944년말에는 '162억 위안' 을 넘겼다. 1938년 말 : 1.62억 위안 1941년 말 : 9.66억 위안 1944년 말 : 162.25억 위안 1944년 9월 13일 일본은 일본은행을 통해 추가로 2억 위안을 지원했지만 (게다가 이것은 5년이라는 기간도 있었다.) 이미 발행액이 통제할수 없을 정도로 커진 연은권의 붕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44년부터는 연합국이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위해 항공기를 이용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는데, 그 위조화폐에는 만주중앙은행권과 중국연합준비은행권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화폐발행고속에서 이런 위조지폐까지 공급되어버리면서 더욱 혼란이 찾아왔고, 앞에서 보았듯 일본군도 이 연은권을 자체적으로 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많은 발행량 + 일본군의 독자적발행 + 연합국의 위조지폐살포로 화폐의 남발속 화북의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속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찾아오는 자원과 물자의 부족은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다. 1944년 말 또한번 변경된 10원권. 이 10원권도 식별번호가 없었을 뿐더러 발행주제도 연은, 일본군, 연합군, 신민회 등등 너무나 많은 곳에서 발행되어 엄청난 수가 유통되었다. (심지어 이들 주체마다 잉크도 다르게 사용해 색도 달랐다.) 중국연합준비은행 측에서는 이런 연합국의 공작을 막기위해 10원권의 도안을 새로이 변경하는 등 술책을 썼지만, 이러한 시도도 큰 성과를 거두지못하면서 발행량이 자꾸만 늘어만 가는 상황은 바꿀 수 없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마지막 화폐들. 이시점에서 화폐는 화폐용지에 인쇄되지도 못했다. 일반종이에 돈이라고 찍혀 나오는 수준이었다. 1945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어 새 화폐가 화폐용 용지도 아닌 일반용지에 찍혀나오기 시작했고, 이런 성질때문에 100원권의 경우, 연합준비은행도, 일본군도, 신민회도 다른 주체들도 마구잡이로 인쇄를 시작했다. 본래 인쇄국이었던 베이징의 화북정무위원회 인쇄국에서만 30억위안 이상의 100원 화폐가 발행되었고 모든 발행주체의 생산량은 '추산치만 550억 위안' 가량이 될정도이다. 이시기에 도난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도난 단위가' 1억' 위안정도일 상황이니, 얼마나 많은돈이 시중에 풀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시중에 나오지 못했던 5,000원권. 하지만 이 오천원권은 일본항복 이후 교환과정을 위해 다시 유통되게 된다. 10원권의 경우 1944년에 만들었던 디자인과 1944년말에 만들었던 디자인을 혼용하여 발행했다. 또 1,000 원권이라는 고액권도 등장했으며, 이후에는 5,000원 권이라는 더 고액권도 등장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화폐의 남발속 주민들은 연은권에 대한 완전히 신뢰를 잃고 이돈을 '한간돈(漢奸票)' 혹은 '앞잡이돈(走狗票)' 이라 부르기도 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사라지기 전까지, 발행되었던 화폐는 '1,915억 위안' 가량이었다. (1,423억 위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수치는 이미 붕괴조짐이 보이던 1944년보다도 10배를 넘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의 결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연합준비은행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중국연합준비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만주에서도, 몽강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연은권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화북정무위원회의 붕괴 이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연은권의 경우 몽강이나 만주와 달리 빠르게 교환이 시작되었다. 만주나 몽강에서 1년~2년가까이 더 사용되었던 만주중앙은행권과 몽강은행권과 달리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연은권의 경우 1945년 11월 22일 부터 국민정부가 법폐로 교환을 시작하게 했다. 이는 그만큼 연은권의 가치가 붕괴되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중국연합준비은행 연은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0.2원 (0.2 : 1) 교환은 연은권의 가치가 폭락해버린 만큼 교환에 있어서 법폐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항복 직후에는 국민정부가 연은권 : 법폐의 가치를 1:1로 통용하게 했지만, 교환과정에서는 그 낮은가치를 반영해 0.2:1 이라는 교환비를 가지고 교환이 되게 했다. 공산당지역에서도 교환은 진행되었지만 어떤은행으로, 어떤비율로 교환이 진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후 이부분을 더 알아보고 싶다.) 1946년 중순이 되어서는 국민정부지역, 공산당점령지역 모두 연은권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이로서 중국연합준비은행과 연은권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출처]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1월 : https://dl.ndl.go.jp/pid/1437734 내외경제개관 쇼와13년 2월 : https://dl.ndl.go.jp/pid/1438178/1/22 통제경제독본 4정판 : https://dl.ndl.go.jp/pid/1709768/1/272 동아경제독본(東亜経済読本) : https://dl.ndl.go.jp/pid/1281545 흥아경제론 - 몽강 / 북지 : https://dl.ndl.go.jp/pid/1459430/1/111 조선일보 1938년 5월 29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529002391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8-05-29&officeId=00023&pageNo=1&printNo=6124&publishType=00010 중국연합준비은행 포스터 : https://digitalcommons.chapman.edu/japanese_propaganda_posters/20/ 중국연합준비은행 사진 : http://61.134.53.202:81/CRFDHTML/r201205022/r201205022.1d220bc.html 조일동아연보 쇼와 13년 (朝日東亜年報 昭和13年) : https://dl.ndl.go.jp/pid/1143488/1/157 중국연합준비은행 건물자료 : https://zh.wikipedia.org/wiki/%E5%8C%97%E6%B4%8B%E4%BF%9D%E5%95%86%E9%93%B6%E8%A1%8C 중국연합준비은행 영업사진 : https://kknews.cc/news/j3mq55y.html 미국국립역사박물관 : https://americanhistory.si.edu/collections/nmah_1887578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② 몽강은행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 - 몽강은행(蒙疆銀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도였던 장자커우에 위치한 몽강은행 본점의 모습. 몽강은행의 전신, 찰남은행 몽강은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몽강은행의 전신이 되는 찰남은행(察南銀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은 차하얼(察哈尔)성, 쑤이위안(绥遠)성을 비롯 장자커우를 비롯한 내몽고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내몽고 지역에 친일성격을 띄는 자치정부들을 성립하게 된다. 1937년 8월 27일 장자커우를 점령하고 장자커우에 9월 4일에 찰남자치정부(察南自治政府) 를, 9월 13일에는 다퉁을 점령하고 10월 15일에는 진북자치정부(晋北自治政府) 를 설치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행정구역도 (1942). 진북정청 (晉北政廳) 과 찰남정청 (察南政廳) 은 옛 진북자치정부와 찰남자치정부가 자리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찰남자치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차하얼성의 상업전국을 장악하고, 이 상업전국을 개편하여 1937년 9월 27일 찰남은행 (察南銀行) 이라는 은행을 세웠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주도로 100만 위안(圓)의 자본을 가지고 설립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점령한 찰남을 비롯한 내몽고지역에서 국민정부의 법폐 & 공산당의 지폐에다가 일본이 점령하면서 조선은행, 만주중앙은행등에서 새로이 들어온 일본계열의 지폐 등등 무려 9개은행의 지폐들이 유통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중앙은행으로서, 1937년 10월 10일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찰남은행은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현지역에서 발행되고 있던 화폐를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찰남은행의 경우, 신 지폐를 발행하려 했으나, 그 여력이 부족해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미 한번 재사용과정을 거친,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다시한번' 재사용 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삼성관은호 1원 지폐 (원본) → 만주중앙은행이 임시사용함 (1차 재사용)→ 만주중앙은행에서 이걸 찰남은행에 주어 사용하게 함 (2차 재사용) . 맨처음동삼성관은호에 밑줄을 긋고 만주중앙은행 도장을 찍었고 거기에 또 밑줄을 긋고 찰남은행이 사용한 모습이다. 이 동삼성관은호 지폐는 중화민국 18년 (1929년) 에 처음만들어져서 사용되다가 만주중앙은행을 거쳐 (1932년) 찰남은행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1937년) 어떻게 보면 기구한 운명의 지폐라 할 수 있겠다. 찰남은행 생산지폐 (*는 실제발행되지는 못함) 동삼성관은호 / 만주중앙은행임시권 → 찰남은행 1원(圓) / 10원 차하얼상업전국권 → 찰남은행 1원(圓)* / 20원* 차하얼상업전국의 지폐를 재활용한 찰남은행 지폐. 견본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것으로 보아 이 지폐를 발행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 발행되지는 못했다. 《북지경제도설 쇼와15년 판(北支経済図説 昭和15年版) 》에 따르면, 찰남은행에서는 위의 사진처럼 다른 지폐도 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여력이 되지 않아 만주은행으로 부터 구 동삼성관은호 지폐를 개조한 지폐들만이 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찰남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찰남을 비롯한 몽강지역에서의 일본은행권 / 만주중앙은행권 / 찰남은행권을 제외한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긴급통화방위령(緊急通貨防衛令) 을 공포해 '20일'이라는 기간동안 그동안 사용하던 지폐들을 교환 / 회수하게 했다. 일본과 찰남측이 이러한 교환조치를 서두른데에는 당시 이지역에서 추산 천만 위안가량의 법폐, 공산당 지폐, 옛 군벌지폐등등 지폐가 너무나 남발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너무나 많이 유통되고 있는 지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교환 / 회수조치를 통해 이지역의 금융질서를 장악하고자 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수도인 장자커우, 그리고 진북자치정부의 다퉁, 그리고 몽골연맹자치정부의 후흐허트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북자치정부에서는 옛 산서성지폐에 정부도장을 찍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찰남은행권 또한 유통이 되고 있었다. 1937년 12월, 몽골연맹자치정부가 출범하고 진북-찰남-몽골연맹정부가 통합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찰남은행은 진북-찰남-몽골연맹지역 모두를 포괄할수 있게 '몽강은행'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확대 개편되게 되었다. 찰남은행이 개업 2달도 되지 않아 후에 서술하게 될 몽강은행으로 확대개편되버리면서 이 시기 만들어진 임시 찰남은행권은 발행 수도 많지 않을 분더러 대부분 회수과정을 거쳤기에 현재 찰남은행권은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다.) 이렇게 찰남은행은 2달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찰남은행권은 몽강은행이 생긴 이후에도 약 4달가량 더 사용되다가, 1938년 4월 몽강은행에서 신지폐 발행이 완료되면서 유통이 정지된다. 몽강은행의 설립, 몽강은행권(몽강권) 의 제작 몽강은행의 성립과정. 몽강은행은 일본과 그 괴뢰정부들의 작품이었다. 몽강은행은 일본과 괴뢰정부의 작품에 가까웠다. 기존의 찰남은행에다가 1937년 11월 11일 결성된 몽골연합위원회를 구성하는 몽골연맹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가 각각 4천만 위안씩, 총 1억 2천만 위안을 모으고, 여기에 일본에서 출자된 600만 위안을 합쳐 1937년 11월 23일 설립되었다. 또한 당시 지역에서 영업중이던 찰남풍업은행(察南豊業銀行), 수원성은행의 몽강지점, 기동은행의 몽강지점을 통합해 1937년 12월 1일 장저커우의 고루서가(鼓楼西街) 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다퉁, 후흐허트등 몽강지역 뿐만 아니라 톈진이나 베이핑지역까지 주재원을 파견했다. 이후에는 이 지역들에 지점들을 건설하고, 도쿄에도 사무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초기 총재는 바오웨칭 (包悦慶,포열경) 이라는 이가 맡았고, 부총재는 일본인 야마다 모지(山田茂二) 가 맡았다. 하지만 1942년부터는 총재도 일본인이 하게 되는 등, 몽강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지배 속에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몽강은행은 설립 초기 약 한달가량은 이전의 찰남은행권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1938년 1월부터 새로운화폐가 발행되고 4월에 발행이 완전히 완료되면서 이전의 찰남은행권은 사용이 중지되고 회수가 되었다. 몽강은행은 초기 지폐 4종류 (1원, 5원, 10원, 100원) 과 동전4종류 (5각, 1각,5분, 1분) 를 발행했다. 지폐는 일본에서 인쇄가 이루어졌고, 동전의 경우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에서 발행한 동전을 공급받아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후 1938년 8월 16일, 5각 동전은 커우베이 조화창 (口北造貨倉) 에서 자체 제작해 사용한다. 몽강은행의 첫 화폐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의 경우 한번 도안이 바뀌었고, 동전의 경우 5각짜리를 제외하면 만주중앙은행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권의 경우, 한번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처음에 발행된 100원의 경우, 임시권의 성격이 강해 종이의 품질이 좋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특징으로는 '몽강' 인 만큼 만주국과 달리 몽골문자가 처음부터 혼용되었다는 것이다. 유목지역인 만큼 낙타나 양같이 유목지역을 상징하는 동물들이 많이 그려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동전에서는 '중화민국 27년' 처럼 중화민국의 기년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자체 화폐를 발행함과 동시에 한가지 조치를 실시했는데, 이는 뒤에서 소개할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연은권(聯銀券)의 사용을 금지한 것이었다. 민간에서 몽강권이 아닌 연은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괴뢰정부 지역끼리의 화폐가 혼용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일본에서는 일본돈이, 만주에선 만주돈이, 임시정부에선 임시정부 돈이, 몽강돈이 사용되길 기대했다. 또한 찰남은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몽강은행도 몽강에서의 사용가능한 화폐를 몽강은행 지폐와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으로 제한했다. 이는 일본의 지배를 용이하게 위한 것이기도 했고, 당시 만주국 원이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던 것처럼, 몽강권 또한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42년 발행된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에 따르면 이런 금지조치에도, 민간 내에서는 연은권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처럼 완전한 통화의 장악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40년에는, 1원짜리 지폐를 새롭게 공개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만주중앙은행에서 공급받아 사용하고 있던 5각, 1각,5분 짜리도 지폐로 만들게 된다. 1940년 7월 1일에는 5분, 1각짜리 지폐가, 1940년 8월 10일에는 5각짜리 지폐가 등장했다. (중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8월 15일 발행되었다고 하지만,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 에서는 8월 10일을 제시한다.여기서는 당대기록인 지나중앙은행론을 따랐다. ) 5각, 1각, 5분도 지폐로 발행된데에는 자원문제가 가장 컸다. 동전으로 제작하지 않은 이유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 자원부족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작은 단위의 화폐도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지폐로 5각, 1각, 1분을 발행함과 동시에 자원확보를 위해 시장에 유통되어 있었던 만주산 동전들을 회수하기 시작했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이시기 몽강에 공급되었던 만주동전은 제작에 용이한 알루미늄 동전도 아니었기에 더욱 회수가 중요했었다. 몽강권의 현실과 한계 몽강은 왕징웨이정권의 일부가 되었지만, 몽강은행과 몽강은행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0년 이 시기 몽강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몽강은 '몽강자치구' 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정부조직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본과 덕왕을 비롯한 기존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편과 같이 일부조직에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몽강의 경우, 1941년 1월,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되었음에도, 몽강은행권의 유통과 사용은 계속되게 된다. 중앙저비은행의 저비권은 몽강에서 오히려 연은권보다 낮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왕징웨이가 세운 중앙저비은행은 몽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몽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강화했다. 몽강은행은 몽강의 자원을 수탈하는 일본 기업에 투자와 대출을 제공했고, 일본의 국채, 공채를 몽강은행이 구매함으로서 일본의 몽강개발을 가속화하고 일본내의 재정압박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예로, 전쟁이 계속되고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1941년에 일본은 전비마련을 위해 몽강은행에 일본국채 구매를 종용한다. 몽강은행은 일본 국채 1억 원(위안) 을 구매하면서 몽강은행은 가지고 있던 금 보유고를 대부분 지출해야 했고, 이 때문이 몽강은행은 운용자금이 부족해지며 부실해지게 되었고, 이에 화폐를 남발 하게되면서 몽강지역의 물가는 급상승하게 된다. 1938년 말 대비 1941년 말에는 화폐 발행이 300% 증가했고, 이로 인해 물가상승으로 몽강의 주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즉,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자국의 물가안정과 전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몽강은행을 일본이 수탈하면서 그 부작용은 모두 몽강의 주민들이 책임지게 된 셈이었다. 북지경제도감(北支經濟圖鑑, 1942) 에 표기된 몽강은행권의 발행액수, 중일전쟁이 지속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발행액수가 크게 늘었다. 같은 책에 표기된 몽강자치연합정부의 수도 장자커우의 물가. 쇼와13 (1938년) 에 비해 쇼와 16 (1941년) 말에는 3배 넘게 올랐다. 같은 시기, 도쿄의 물가가 10%가량 오른것에 비하면 아주큰 상승이다. 1942년에는, 새로운 동전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전 1940년에 모두 지폐로 대체되었던 1각, 5각이 만주와 마찬가지로 그나마 마련하기 쉬웠던 알루미늄 동전으로 대체되었고, 지폐에서는 없었던 1분 짜리가 새롭게 동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가장 큰 단위인 5각은 동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5각의 경우 동전이 아닌 지폐로 계속 발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동전에서는, 이전 1938년의 동전과 달리 발행년도에서 중화민국의 민국기년이 아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성기(成紀) 기년법이 사용되었다. (사진의 성기738년은 1943년을 의미.) 성기기년법은 징기즈 칸의 제위인 1206년을 기원으로 하는 기년법으로, 몽골제국의 부활을 이야기하던 몽강연합자치정부에서 사용되었던 연호였다. 이렇게 성기기원을 사용한것은 이제 몽강이 중화민국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것이었다. 몽강이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의 일원임에도 이런 움직임을 보였다라는 것은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몽강에는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시기에는 기존의 종이시리즈도 혼용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몽강은행 몽강은행의 마지막 지폐들. 만주와 마찬가지로 지폐생산과정에서 드는 자원을 절약하려 재질이나 잉크면에서 품질이 나빠졌다. 1944년에는, 10원권과 5각을 새롭게 발행했다. 하지만 이때 발행된 5각의 경우 발행량이 아주 적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100원이 새롭게 발행되었다. 만주가 그랬듯, 몽강도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며 자원부족으로 인해 지폐의 질도 이전보다 나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몽강연합자치정부 붕괴 이후 몽강은행과 몽강권의 운명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몽강연합자치정부 또한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몽강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만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몽강권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붕괴 이후에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몽강지역에서 사실상 유일한 화폐로 취급되고 있었던 몽강권을 쉽게 대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만주와 다르게 중일전쟁이후, 몽강의 경우 국민당과 공산당 둘다 몽강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점령지는 중국공산당의 밑에 있었다.) 이렇기에 국민정부와 공산당 모두 몽강권에 대한 교환작업을 실시하게 된다. 국민정부의 점령지역의 경우를 보면, 국민정부는 몽강은행을 중화민국 중앙은행에 합병하고 중화민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1947년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몽강은행돈을 1:0.4의 비율로 다시 법폐로 교환하게 했다.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4각 (1:0.4) 하지만, 국공내전의 혼란속 이러한 교환사실은 몽강의 도서지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3개월이라는 짧은 교환기간 속에서 많은 이들이 다시 법폐로 돈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이결과 외딴지역에서는 많은 몽강권이 교환되지도 못한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몽강권 교환의 실패는 국공내전에서 많지도 않았던 몽강 국민당 점령지역이 국민당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이유중 하나기도 했다. 반면, 옛 몽강연합자치정부 지역 일부를 점령한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의 승리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46년 4월부터 자신들이 소유한 섬강녕변구은행 (陝甘寧邊口銀行)의 지폐로 바꿀 수 있게 했다. 교환과정에서 교환 한도는 없었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였으나,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섬강녕변구은행 5원 (1:5) 의 비율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로 3달이라는 짧은기간이었던 중앙은행 법폐로의 교환과 큰차이가 있지 않지만,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공산당 점령지에서는 많은 이들이 돈을 바꾸는데에 성공했다. 이는 대부분의 구 몽강자치연합정부 지역이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었기 떄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몽강권 회수성공은 국민정부에 비해 몽강에서 공산당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출처] 몽강은행 사진 : https://zh.wikipedia.org/wiki/%E8%92%99%E7%96%86%E9%93%B6%E8%A1%8C 찰남은행 1원권 사진 : https://www.google.com/search?q=%E5%AF%9F%E5%8D%97%E9%8A%80%E8%A1%8C&tbm=isch&ved=2ahUKEwitsamixfuDAxUE1jQHHd1VCAUQ2-cCegQIABAA&oq=%E5%AF%9F%E5%8D%97%E9%8A%80%E8%A1%8C&gs_lcp=CgNpbWcQA1AAWABg1QVoAHAAeACAAcMCiAHDApIBAzMtMZgBAKABAaoBC2d3cy13aXotaW1nwAEB&sclient=img&ei=yeazZe2oJ4Ss0-kP3auhKA&bih=919&biw=1920&client=firefox-b-d&hl=ko#imgrc=EpOn4jkSGTmUWM 찰남은행 1원권 (차하얼성 견본판) : http://www.yangmingauction.com/goodsdetail.html?auctionid=B15063&code=1006&page=7 북지경제도설 쇼와 15년판 : https://dl.ndl.go.jp/pid/1281686/1/31 북지경제도설 쇼와 17년판 :https://dl.ndl.go.jp/pid/1461376/1/35 지나중앙은행론 : https://dl.ndl.go.jp/pid/1276552 몽강권 사진 : https://en.numista.com/catalogue/chine_japon-1.html#c_meng_chiang1108 몽강권 사진2: https://zh.wikipedia.org/wiki/%E8%92%99%E7%96%86%E9%93%B6%E8%A1%8C 중문판 / 일문판 몽강은행 위키백과 문서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① 만주중앙은행 (만주국)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만주국 - 만주중앙은행(滿洲中央銀行) 신징의 만주중앙은행 신 본점 건물이 그려진 엽서. 이 건물은 1938년 3월, 만주국의 수도 신징의 대동광장 앞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지상 4층, 지하 2층로, 건물 정면의 10개의 그리스식 기둥이 특징이다. (현재 이자리에는 중국인민은행 장춘시 지점이 위치해있다.) 만주중앙은행 건물은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정동궈 (鄭洞國, 정동국 ) 국민당군 사령관이 장춘 전투에서 공산당에게 투항한 곳이기도 하다. 만주중앙은행은, 1932년 7월 1일 설립된 만주국의 중앙은행이다. 만주국이 관동군의 작품이었듯, 만주중앙은행 역시 만주국의 몸통이었던 관동군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되지 않은 1932년 3월 15일, 관동군은 만주중앙은행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만주중앙은행 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국 총무장관이었던 코무이 도쿠조 (駒井徳三) 는 일본의 자본출자와 이전부터 만주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구 봉천군벌 자본이었던 동3성관은호(東三省官銀號), 변업은행(邊業銀行), 흑룡강관은호(黑龍江官銀號), 길림영형관은전호(吉林永衡官銀銭號)까지 4개의 은행을 합쳐서 만주중앙은행을 설립하려 했다. 만주중앙은행 초기에 사용되었던 본점건물. (옛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 1932년 6월 11일 만주중앙은행법(滿洲中央銀行法, 大同元年6月11日教令第26號 대동 원년 6월11일교령제26호) 과 만주중앙은행조직변법 (滿洲中央銀行組織辦法) 을 공포하여 만주중앙은행은 만주국의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출자된 3천만엔을 초기자금으로 하여 주식을 발행했다. 그리고 1932년 7월 1일, 개업과 동시에 동3성관은호, 변업은행, 흑룡강관은호, 길림영형관은전호를 통합하고 이곳의 자본까지 통합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8천만엔의 초기자본금을 가진 상태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은행의 본관은 수도 신경 북대로에 있는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개업과 동시에 128개의 지점도 동시에 영업을 시작했다. 만주국이 성립된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만주중앙은행은 일본과 중국대륙에도 지점을 설치하며 점점 성장하게 된다. 만주중앙은행의 성립과정. 만주중앙은행은 일본자본과 일본이 점령한 구 봉천군벌의 자본의 결과물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혼란스럽게 유통되고 있는 이전 중화민국 / 봉천군벌의 화폐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법폐개혁 전이었기에 만주에서는 1. 봉천군벌소유 은행 '들' 이 발행한 화폐. 2. 기타지역은행'들'에서 발행한 화폐 3. 청, 중화민국 시기 발행된 은동전 (銀圓) 들 등 너무나 많은 종류의 화폐가 화폐가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이러한 화폐들의 남발을 막기 위해 구화폐정리변법(舊貨幣整理辦法) 을 통해 이전에 만주지역에서 봉천군벌의 은행들이 유통하고 있던 은행들을 회수, 교환하게 했다. 교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1934년의 시점에서는 93%, 교환이 종료되던 1935년의 시점에는 97%가 회수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뤄진 구화폐 → 만주국 원으로의 교환. 화폐종류가 너무나 많이 혼용되고 있었기에 각 화폐마다 교환비율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초기에는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자신들의 만주국 원과 중화민국에서 주로 통용되던 은동전 은원(銀圓)과 1:1의 교환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1934년, 미국정부에서 은 매입법이 통과되면서 세계 은값이 급상승하게 되자, 만주중앙은행은 은본위제도를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의 법폐개혁이 이루어진 원인중 하나도 이 미국의 은구매법이었다.) 만주국은 이에 1935년 4월,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금본위제도를 도입하려하며,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일만 환율 등가 유지에 관한 성명 (満日為替相場等価維持に関する声明)'을 11월 4일에 발표하면서 만주국 원과 일본엔은 동가가 되었다. 즉 만주국 1원 = 일본 1엔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중앙은행이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주중앙은행은 세계최초로 '통화 스왑' 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만주국의 만주국 원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은행의 지폐와 조선은행의 조선은행권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1935년 11월 4일부로 관리통화제도(금본위제도와 일본엔과의 환율등가)를 도입하면서 조선은행권이 퇴출되게 되면서 조선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은 예금협정을 맺고 만주중앙은행은 조선은행권을 회수한 만큼 조선은행 앞의 예금을 늘리고, 조선은행은 만주중앙은행 예금액만큼 화폐발행액을 줄였다. 거래의 목적은 현재의 통화스왑과는 달랐지만 두 중앙은행의 계약으로 자산과 부채가 연동되어 움직였다는 점은 현재의 통화 스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주중앙은행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바로 전날이었던 1935년 11월 3일,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은본위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의 화폐는 초기에는 일본의 조폐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만주국의 조폐공장에서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만주국 말기의 일이었다. 동전의 경우 옛 봉천성 조폐창을 이용하려했으나, 설비가 오래되고 이조차도 만주사변 과정에서 방치되면서 만주국은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신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1932년 6월 만들어진 '화폐법'에 따르면 만주국 원은 4가지의 단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1원(圓) = 10각(角) = 100분 (分) = 1,000리 (厘) 원/각/분/리 라는 현재 중국대륙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십진법 체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화폐법에 따르면 화폐의 종류는 9종류로 규정이 되어있다. 100원 / 10원 / 5원 / 1원 / 5각 = 지폐 1각 / 5분 = 백동 동전 1분 / 5리 = 청동 동전 5종의 지폐, 4종의 동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전의 경우 백동과 청동을 사용하는 동전을 구분하였다. 만주중앙은행의 첫 화폐 시리즈. 종류는 9가지지만, 여러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처음으로 등장한 화폐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요소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오색기와 모란꽃, 푸이의 집무실이었던 근민루 (勤民樓)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5원을 제외하면 지폐의 색도 파란색으로 모두 똑같았다.) 이 시기 발행된 화폐는 일본의 화폐 보다는 중국 화폐의 느낌을 살리려 했는데, 이는 의도된 것으로 만주국 = 일본의 꼭두각시 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행시기를 생각해보면, 화폐법 제정 (1932.6) 으로 부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난이후에 화폐가 발행되었다. 가장 늦게 나온 1분짜리 동전이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1년 2개월, 가장 빠른 5각짜리 지폐가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발행이 되었다. 그렇다면 화폐법 제정 - 신화폐 발행 사이에 적어도 3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이 기간에는 어떻게 화폐를 처리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이전에 사용되던 동삼성관은호 지폐에 '만주중앙은행' 이라는 도장을 찍어 사용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국가들이 전시에 우표나 지폐에 도장을 찍어 임시적으로 사용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에다가 '만주중앙은행' 이라고 적혀있다.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는 만주국에서 발행될 1원짜리 화폐와 가치도 완전히 동일했고 발행량도 많았기에 임시지폐로 선정되었다. 만주국 측에서는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이용해 1원권, 5원권, 10원권 이렇게 3종류의 지폐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원과 10원 두개 종류만 만들어지고 5원권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2차, 3차시리즈의 등장 이른바 '乙시리즈' 라 불리는 만주중앙은행 2차발행권. (이시기 동전은 1차 발행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35년 부터는 일본 본토의 지폐의 형태와 비슷해진 새로운 2차 발행권들이 등장했다. 1차발행권이 모두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다양성이 커졌다. 공자, 맹자, 그리고 중화권에서 재물의 신으로 취급되는 조공명처럼 중화권의 고전시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만주국의 국장을 지폐의 전면에 배치했다. 뒷면 또한 이전의 화폐법 내용만 고작 적혀있던 모습에서 만주중앙은행의 인장과 함께 만주국 국무원, 만주중앙은행 건물등 주요 건물들이나 풍경을 배치하는등 이전과 차이를 두었다. 하지만 화폐법과 관련된 내용은 이전처럼 계속 존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고액권인 100원짜리의 뒷면에는 양떼들이 그려져있는데, 이때문에 당대 만주국에서는 돈이 많다라는 뜻으로 "양을 많이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1원짜리와 5각짜리의 장원과 문방은, 어디의 장원과 문방을 가져온것인지 알기 어렵다. (일본과 중화권 인터넷에서도 이 두곳이 어디인지 의문을 가지는 글들이 있었다. 장원의 경우 신징의 만주국 황궁의 장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 일본과 만주국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속 자원부족이 시작되면서 동전의 재료가 달라지게 된다. 1939년, 화폐법을 개정하여 '동전의 재료 규정'을 삭제하여 이전의 백동 / 청동이 아니라도 동전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자원부족속에서 동전들은 새로운 재료들로 제작되었다. 1각 : 백동 → 백동(2차) → 알루미늄 5분 : 백동 → 알루미늄 1분 : 청동 → 알루미늄 5리 : 청동 → 제작중지 (알루미늄 동전이 계획되었었음) 모든 동전이 제조가 용이하고 단가가 저렴한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금액이 큰 1각 동전의 경우 2대 동전이 초기에는 이전과 같이 백동으로 발행되었으나, 8개월만에 새로운 도안과 함께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5리 동전의 경우 본래 청동버전과 이를 대체할 알루미늄버전이 계획되었으나 발행이 되지 않고, 5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만주국의 2차 발행 동전들. 재료가 모두 알루미늄으로 바뀌었고 1각짜리 동전은 백동화가 등장했다가 알루미늄화로 바뀌었고 5리 동전은 사라졌다. 동전까지 신동전으로 바뀐 이후, 5각 지폐가 1941년 1차례 변화한 것 말고는 (이것도 도안의 변화가 아닌 인쇄색의 변경에 가까웠다) 1944년까지 계속하여 쓰이게 된다. 1944년에는 동전과 지폐가 모두 바뀌게 되어 3차 변화를 겪게 된다. 동전의 경우, 동전의 두께가 이전보다 얇아졌는데 (예로 1각 동전의 두께는 40%가 줄어들었다) , 이는 1944년 시점에서 태평양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일본에게 있어 알루미늄도 이제는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3차발행권 '丙시리즈' 의 모습. 1각(角) 지폐가 추가되었다. 3차 발행권에서는 지폐의 경우 전면의 경우에는 거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면의 경우 인쇄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후면의 그림이나 글씨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1각짜리 지폐가 추가되었다. 이는 1각짜리 동전에 발행되는 알루미늄을 절약하려 한 것으로, 1각짜리 지폐가 1944년 9월 발행되면서 1각짜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폐가 일본이 아닌 만주에서 직접 생산되기 시작했다. 본래는 일본에서 지폐를 발행하고 이를 선박을 통해 만주로 수송하였는데 (이 수송과정에서 부관연락선도 사용되었다.) 이 선박들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만주의 화폐를 더이상 일본에서 생산하는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각짜리 지폐만 만주에서 생산되었으나, 이후 생산이 확대되어 지폐에는 도안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쓰이며 이전처럼 "일본제조" 라고 적혀있으나 생산은 모두 만주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시점부터 만주에서 만들어진 지폐에는 특별한 기술이 숨어있는데, 또한 전쟁이 격화되면서, 연합국 충칭정부와 미국또한 만주국과 일본을 혼란시키기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 연합군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의 지폐를 위조해 항공기를 통해 일본 점령지에 살포했다. 만주국측에서는 이러한 위조지폐 살포를 통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내몽고에서만 생산되는 특별한 염료를 지폐에 사용해 이를 방지하려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만주중앙은행 태평양전쟁의 말기 1945년에 들어오면서, 만주국은 극심한 자원난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문에 화폐 발행에도 많은 변화가 등장하게 된다. 첫 째는 잉크- 용지의 변화다. 1945년에는 3차 시리즈와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른 잉크와 저품질 용지를 사용해 화폐를 제작했다. 이를 丙시리즈의 개조판이라고 하여 45년에 발행된 화폐들을 丙改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주중앙은행 1000원권. (실제로 발행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고액권의 발행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전시경제체제가 붕괴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고액권의 발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1000원권을 계획하고 실제 도안도 완성이 되었으나, 유통은 이뤄지지 못했다. 셋째는 동전에서 사용되는 알루미늄의 대체였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만주국은 1940년부터 동전에서 자원절감을 위해 알루미늄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1944년과 45년 시점에서는 이 알루미늄도 부족하게 되었다. (사실은 일본의 알루미늄 필요에 의해 만주국 또한 알루미늄을 공출해야했던 상황에 더 가깝다.) 이로 인해, 만주국에서는 동전 발행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루미늄을 대체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주국에서는 이를 위한 두가지 방법이 병행되었는데, 첫째는 지폐의 발행이다. 5분(分) 짜리 지폐를 새롭게 도입함으로서 동전 제조에 사용되는 자원을 아끼려 했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1. 동전을 대체할 지폐를 발행하기 (지폐는 1각 지폐와 마찬가지로 만주제국인쇄창에서 만들어졌다.) 둘째는 신소재를 이용한 동전의 발행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운 5분, 1분짜리 동전을 발행하게 된다. 도안은 1944년에 만들어진 3차 동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문제는 마그네사이트가 동전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그네사이트는 금속중에서도 매우 약한 금속이었기에 쉽게 부서지거나 형태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시기 마그네사이트로 만들어진 동전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전쟁 말기 부족한 환경속에서 부족한 기술속에서 이루어진 금속 제련의 결과, 더더욱 동전의 품질은 나빠졌다. 동전이 부서지는건 기본이요, 몇번만 부딪쳐도 글씨가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2. 새로운 재질로 동전을 만들기. 만주중앙은행은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이 동전을 만들었다. 당대 만주에서는 이 동전을 보고 도자기에 쓰이는 흙 도토(陶土)와 비슷한 색이나는 것을 보고 "흙으로 동전을 만든건가?"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만주중앙은행은 여기서 더나아가 실제로 "도자기 동전" 을 기획하기도 했다. 세라믹으로 코팅된, 마치 주방의 접시와 같은 재질의 동전을 기획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약해 이는 실제로 발행되진 못했다. (시제품을 중국대륙 지린성의 당안관 (檔案館)의 만주관련자료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5분 동전의 경우 백동에서 알루미늄으로, 알루미늄에서 마그네사이트로, 마그네사이트에서 지폐로, 혹은 도자기로, 기구한 운명을 겪은 셈이다. 만주국 붕괴 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의 운명 1945년 8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만주작전을 통해 관동군이 붕괴되면서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도 그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만주국 붕괴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 8월 20일, 소련군은 만주중앙은행을 장악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만주중앙은행이 사라진 소련군 치하에서도 만주국 원의 발행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가장 신용할 수 있는 화폐가 아이러니하게도 만주국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가 해방되면서 만주에는 다시 많은 화폐가 유입되었다. 국민정부의 법폐도 돌아왔고, 공산당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도, 소련군이 만주에서 자체발행한 군표도 만주에서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 절대다수가 이전까지 사용하고 있던 만주국 원에 비해서는 신용도가 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 (동북은행의 동북지역유통권) 과 만주중앙은행 원을 1:1 비율로 등가 교환하게 했다. 이후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이에 자신이 소유한 동북은행을 통해 만주국 원을 자신들의 화폐로 교환을 추진했다. 1946년 3월, 중국공산당은 만주국 원 : 동북은행지방유통권 원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도 만주국 원은 계속 유통되었는데, 이는 국민정부가 공산당이 동북은행권을 통해 만주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이전까지 만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국 원을 통해 동북은행권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이러한 만주국 원의 유지시도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국 원의 평가절하, 기간내 사용정책을 이용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만주국 원을 빨리 교환하게 해 대다수가 동북은행권으로 옛 만주국돈을 바꾸어버리면서, 국민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1947년 1월 15일부터 만주국 원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면서, 만주국 원은 발행 15년만에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출처] 김성진, 김상옥 「만주국의 지폐 변천과 지폐 도안의 특징」, 『통권 7호』, 2019 만주중앙은행 초대건물 사진 : https://weibo.com/ttarticle/p/show?id=2309404670405347770834 만주중앙건물 후대건물 사진 : https://www.gakushuin.ac.jp/univ/geore/research/2015a/sinkyo-manchuriancentralbank.html 만주국 원 사진 1 : https://ja.wikipedia.org/wiki/%E6%BA%80%E6%B4%B2%E5%9B%BD%E5%9C%93# 만주국 원 사진2 : https://en.numista.com/catalogue/manchoukuo-1.html 만주중앙은행10년사 : https://dl.ndl.go.jp/pid/1276581 만주중앙은행 강덕4년판 : https://dl.ndl.go.jp/pid/1463670/1/11 만주중앙은행연혁사 별편부록(満洲中央銀行沿革史 別冊附録) : https://dl.ndl.go.jp/pid/1449899/1/10 만주국 원 - 만주중앙은행 일문판 / 중문판 위키피디아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③ 기동은행 (기동방공자치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기동방공자치정부- 기동은행(冀東銀行) 퉁저우(通州)의 기동방공자치정부 청사의 정문.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을 통해 획득한 산해관이북의 비무장지대를 기동사변을 통해 장악하고 괴뢰정부를 옹립했다. 계획보다 늦은 은행의 설립 1933년 5월 31일 체결된 당고정전협정을 통해 일본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산해관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설립하게 했다. 본래 이 비무장지대에는 일본도, 중국도 병사를 주둔해서는 안되었지만, 이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를 원했던 일본은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을 일으켜 이지역에 인루겅(殷汝耕,은여경) 을 옹립해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만들고 수도를 퉁저우로 하는 기동방공자치정부를 설립했다. 기동은행의 설립에는 두가지 날짜가 제시되는데, 지나경제연보 쇼와11년판 (支那経済年報 昭11年版) 에서는 1935년 12월 4일, 기동은행을 설립하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최신지나요람 쇼와11년 9월간(最新支那要覧 昭和11年9月刊)에 따르면, 1935년 12월 26일에 기동은행을 설립하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되어있다. 이렇게 같은 은행의 날짜의 설립에 두가지 날짜가 언급되고 있어 그 진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날짜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이 두날짜는 모두 '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 한 것이지 '은행 설립' 의 날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동정부의 수립으로 부터 멀지않은 기간에 은행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퉁저우 기동은행 본점의 모습. 실제 은행의 설립은 이보다 훨씬 늦게 이루어졌는데, 은행 설립의 결정으로 부터 6개월이 지난 1936년 6월 11일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한 500만 위안가량의 주식을 발행, 1936년 7월 1일에 정식으로 영업을 하려 했으나, 실제 기동은행이 개업된 것은 한참 늦은 1936년 11월 1일이었다. 기동은행은 퉁저우에 본점을 두었고 본래 탕산(唐山), 창리(昌黎), 친황다오 (泰皇島) 3곳에 지점이 있었으나, 1937년 이후로는 지점을 확대해 베이징, 펑톈등 기동방공자치정부의 22개 현과 외부지역에 총 15개의 지점을 설립했다. 기동은행의 로고. 22개의 별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22개현을 나타내고, 왼쪽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오색기를 표현했다 (위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않지만) 당시 기동방공자치정부 지역에서도 여러 화폐가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동은행의 경우, 만주중앙은행과 몽강은행에 보였던 것처럼 지역에서 구 화폐의 교환을 강행하지 않았다. 기동은행의 화폐는 1937년 3월 10일부터 발행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 기동은행의 화폐는 기동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중 하나로 취급을 받았지, 유일한 화폐로서 위치하지 않았다. 기동은행권을 강제하지 않은 이유로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던 기동정부에 굳이 중일전쟁도 발발하지 않은 상황에 굳이 기동이라는 좁은 지역을 위해 화폐를 강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동권의 등장과 실패 기동은행은 4종류 (5각, 1원, 5원, 10원) 의 지폐와 5종류의 동전 (2각, 1각, 5분, 1분, 5리)을 만들었다. 지폐는 일본 조폐국에서 만들어졌고, 동전의 경우도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되었고, 2각, 1각, 5분의 경우 백동으로, 1분과 5리의 경우 구리로 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2단위의 화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기동은행의 화폐들, 1937년 3월 10일, 5각짜리와 10원짜리 지폐를 시작으로 여러종류의 화폐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 (기동권) 은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앞에서 보았듯 기동은행권이 기동방공자치정부에서 유일하게 쓰이는 지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동권의 발행에도 여전히 중국의 다른은행의 화폐들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중 하나에 불과했던 기동은행의 기동권은 큰 점유율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중일전쟁이후 일본 폭격기가 기동방공자치정부 지역을 오폭하면서 발생한 퉁저우사건 (通州事件) 에서 분노한 기동방공자치정부 보안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군대역할을 했었다) 와 민중들이 퉁저우 기동은행 본점도 공격해버리고 기동은행권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해버리면서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민중들은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낮아진 기동은행권의 가치로, 일본계 은행들은 기동은행권을 취급중지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사태가 수습되면서 일본계은행들의 취급중지는 종료되었으나, 이러한 타격의 영향은 계속되게 된다. 1937년 9월의 북지경제독본(北支經濟讀本)에서는 기동은행을 두고 " 貧弱でとるに足らない (빈약하여 보잘것없다.)" 라고 기동은행을 평가하는 등,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은 기동정부의 중앙정부이자 중앙은행권임에도 힘을 쓰기 어려워지면서 실패로 남게되었다.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 (기동권)의 결말 도안까지 준비되었지만 발행되지 못한 기동은행의 100원(圓) 권. (이때문에 이 견본 지폐의 경우 24,000달러가 넘는 고액에 거래되기도 했다.) 기동은행이 이렇게 성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1937년 12월 14일에는 베이핑(징) 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맞설 수 있는 기동방공자치정부보다 더 큰 규모의 정부의 성립이었다. 그리고 기동방공자치정부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1938년 1월 30일, 기동방공자치정부의 지도자 치쭝모(池宗墨)와 임시정부의 지도자 왕커민(王克敏)의 합의로 1938년 2월 1일로 중화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게 되었다. 기동방공자치정부가 임시정부로 통합되고, 다음으로 이야기할 임시정부의 중앙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中國聯合準備銀行)이 1938년 3월 10일 설립되었다. '연합' 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은행의 통합과정을 통해 탄생한 은행이었다. 그리고 이과정에 기동은행도 참가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다루지 않고 바로 다음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이야기를 할때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성립되면서, 기동은행은 중국연합준비은행 산하의 일반은행이 되며 임시정부에서 역사를 이어나가게 된다. 기동은행권은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성립된 3월 10일부로 지폐 생산을 종료했다. 하지만 기동은행권은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된 다음날인 3월 11일 공표된 "구통화관리방법 (舊通貨整理辨法)"에서는 일정기간동안 임시적으로 이전에 사용되던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 1938.3.11 중국연합준비은행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 기동은행(冀東銀行) 의 화폐 / 교통은행(交通銀行) 산동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산동권 → 1939년 3월 10일까지사용가능 (1년) 교통은행(交通銀行) 남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남방권 / 중앙은행 (中央銀行)중국실업은행(中國實業銀行) / 북양보상은행 (北洋保商銀行) / 중국간업은행 (中國墾業銀行) / 절강흥업은행 (浙江興業銀行) / 대중은행 (大中銀行) / 변업은행 (邊業銀行) / 중국농공은행 (中國農工銀行) / 중남은행 (中南銀行) / 중국통상은행 (中國通商銀行) / 농상은행 (農商銀行) / 사명은행 (四明銀行) / 중국농민은행 (中國農民銀行) 의 화폐 → 1938년 6월 10일까지 사용가능 (3개월) (이후에는 연은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용불가) 구통화관리변법에서는 기동권을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된 후로부터 1년이 되는 1939년 3월 10일까지 사용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옛 기동권에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부여해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기동은행 동전의 경우, 실제로는 이 1년이라는 유예기간보다 더 긴 기간동안 사용되어 왕징웨이정권이 세워지고 1년이 넘게 지난 '1941년 5월 31일'까지 사용되게 된다. 이는 왕징웨이정권에서 화북지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화북정무위원회가 내린 조치 때문에 가능했다. (기동은행의 동전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의 소액 동전도 이때까지 사용된다.) 찰동은행에서 발행한 임명장. 민국32년 (1943년) 3월 24일자. 톈진 지점의 직원에게 주어졌던 임명장이다. 문서의 빨간 동그라미 로고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로고로, 찰동은행이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산하 은행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임시정부의 일반은행이 된 기동은행은 이렇게 임시정부, 이후 임시정부를 사실상 계승한 화북정무위원회에서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산하 은행으로 계속 존속하게 된다. (1942년 5월 15일부터 7월말까지 2년만기, 연 이율 3%을 주는 예금 / 적금 모집을 한 자료도 남아있다.) 이후 중국연합준비은행이 해체되는 1945년 9월 30일을 통해 기동은행도 함께 해체되게 된다. [출처] 최신지나요람 쇼와11년 9월간 (1936.9) : https://dl.ndl.go.jp/pid/1277835 지나경제연보 쇼와 11년 (1936.11) : https://dl.ndl.go.jp/pid/1452156 기동정권의 정체 (冀東政権の正体, 1937.4) : https://dl.ndl.go.jp/pid/1281558 신지나현세요람(新支那現勢要覧,1938) : https://dl.ndl.go.jp/pid/1269917 기동은행의 로고 : https://www.sohu.com/a/579406180_121124789 기동은행 1원, 10원, 100원 권 : 웨이보 기동은행 5원 권 : https://auctions.stacksbowers.com/lots/view/3-Q9FBB/china-puppet-banks-chi-tung-bank-5-yuan-nd-1937-p-j115s1-specimen-pmg-uncirculated-60?utm_source=coinweek 기동은행 동전들 : https://www.sohu.com/a/579406180_121124789 기동은행 본점사진 :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8419024 기동은행 1942년 자료 : https://dl.ndl.go.jp/pid/1711946/1/71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⑯ 중국의 항전심리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중국의 항전심리 (中國の抗戰心理) *이는 왕선생이 쇼와15 (1940)년 10월 30일, 일본의 신문기자들에게 발표한 담화의 내용으로, 중국의 항전심리를 설명하고 또한 난징 환도와 현재 중국민중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담화속에는 왕선생이 화평운동, 청년운동에 어떻게 한다면 적극적인 열정과 고매한 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려하고, 대아시아주의의 구체적 발전으로서 이미 광둥과 베이핑에 전개된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펼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나는 전면 화평을 이루는 것을, 그것도 빠르게 실현시키는 것을 충정으로 희망하고 있다. 현재 중일간의 전면화평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여러 가지 상당한 장애물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먼저 국내적인 두가지 요소를 예로 들려고 한다. 그중 하나는 현재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켜 버리려 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항일을 하든 친일을 하든 이는 결국 일본에 의해 중국이 망하게 하는 것이 되니 차라리 항전을 하여 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스며들고 있다. 이렇기에 이들은 화평의 밝은면에 대해서도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방식은 중국항전을 심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일본이 노력해 동아신질서를 주장해도 중국민중으로 하여금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의 이러한 심리상태를 바꾸려 노력하고 있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중국민중의 이러한 종류의 심리가 가지는 오류를 수정하는 것은 화평운동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소는 중국공산당의 문제이다. 그들은 일본에 멸망당하는 것보다는 소련에 멸망당하는 것이 낫다고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첫 번째 요소,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는 시정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요소, 공산주의는 단순히 선전과 계몽만으로는 시정하기 어렵다. 왜냐면 공산주의는 주의와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자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역량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의 두가지는 화평장애의 국내적 요소이지만, 국제적으로도 일독이삼국동맹에 의해 영미의 충칭원조가 한층 명료하게 강화되고 있고, 일소국교조정에도 소련은 아직까지 불분명한 태도를 계속 보이고 있기에 오늘날 충칭에 화평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 나는 솔직히 말해, 국민정부가 올해 3월 난징으로 환도한 이후, 아무런 좋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인민은 나의 정부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전면 화평의 성공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동아신질서’라 부르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아시아주의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불어넣고,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여 하나의 신앙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왜냐면 운동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열정과 고매한 이상이 혼연히 합치되기에 이를 신앙수준으로 높이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의 화평운동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동지 청년들은 화평의 신념을 몸에 새기고 그 정신을 민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고단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국민정부 난징환도 이후에도, 중국민중들의 고통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고 있지 않다. 쌀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 30위안이었던 것은 지금은 60위안에 달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일례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정부 밑에서의 민중들은 극도의 곤경과 고난에 노출되어 있다. 나의 소망은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중국민중을 구하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 그것뿐이다. 나의 이러한 간절한 소망은 단지 난징국민정부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전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모든 중국민중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도 교전상태에 있다. 일본은 전선에서 희생을 이어가고 있고, 충칭도 막대한 손실을 겪고 있다. 이러한 교전상태에 있어서는, 일본측은 바로 철병을 할 수없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문제를 일본측의 군사적 필요와 중국의 자유라는 두 가지 즉면을 모두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민수와 군수의 식량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듭 이야기했지만, 나의 소망은 중국민중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고 생활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에 있다. 그리고 화평의 신정부 하에서 생활의 안정을 보증하는 것이 일반 중국민중으로 하여금 화평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하는 효과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옷을 만들 경우 바느질의 상태나 천의 샘플을 보여주는 것처럼 화평이 좋다는 구체적인 사실, 즉 샘플을 보여주면 화평건국의 기초도 스스로 강화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 단계의 국민정부에는 비관적인 요소와 낙관적인 요소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기의 나의 염원은 이러한 낙관적인 요소를 더욱더 늘려가는 것과 동시에 비관적인 요소를 더욱더 줄여나가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정세가 우리에게 극히 곤란하다 할지라도, 나는 장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전면화평을 위해 매진할 결심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⑰ 패탱 원수의 교훈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패탱 원수의 교훈 (ペタン元帥の敎訓) *이는 쇼와15 (1940)년 11월 4일, 왕선생을 에워싼 중국신문기자단과의 일문일답의 내용이다. 난징 환도이후 국민정부의 향후 방침과 내정, 외교, 경제, 군사 각 방면에 걸쳐 문답이 이루어졌다. Q : 일본은 이미 신정치체제를 추진하고 있는데, 선생께서는 중국의 신체제운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A : 중국의 신체제운동과 일본의 신체제운동은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하지만 중국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 수단은 매우 다르다. 중국은 민국16 (1927)년부터 민국26년 (1937) 년까지의 기간동안 일종의 절반의 상태지만, 민주주의 국가였다. 진정한 전체주의 국가는 반드시 민중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군권에 의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 어느쪽도 군권에 의해 정권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니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때는 겨우 4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히틀러의 베를린 점령 또한 한 두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는 민중의 옹호에 의해 정권을 취득한 것이지 군권에 의한 것이 아님이 명확해진다. 중국이 어떻게 절반뿐인 현 상황을 형성했는가 하면 이것은 바로 항일의 결과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정신단결, 공가국난(‘국난극복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라는 뜻으로, 1932년 개봉한 항일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며, 공산당에서 제2차 국공합작을 제안하며 사용한 용어이기도 하다.) ’의 슬로건은 전국 전당을 강하게 압박했다. 민중의 기초를 공고히하여 중심세력을 결성해 집권의 목적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의 우리는 다시 이전의 수단, 즉 강압을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중국 신체제의 전야다. 우리는 모름지기 각 당파의 연합에 의하여 민중들과 함께 중심세력을 건립해야지, 이전처럼 민중을 강하게 압박해서는 안된다. Q : 개조 환도이후, 국민정부의 외교방침은 무엇인가? A : 현재의 외교는 대내적으로는 민중을 단결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맹방을 구해야 하며, 반독일-이탈리아와 영미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히 반대한다. 현재 일본과 소련은 타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 외교방침의 주요 목표는 동아에 중국과 일본의 중심축을 건설하는 것이다. 전쟁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전에 동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중심축개념을 이미 만들어 냈다,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Q : 환도 이후 국민정부의 재정정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국민경제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A : 옛말에 “정치의 핵심은 식량을 충족시키는 것, 병기를 충분하게 하는 것, 백성이 믿게하는 것” (논어 안연 편의 ‘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民信之矣’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국민정부의 국민정부의 재정과 국민경제에 대한 기본 원칙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공고한 재정의 기초는 중점주의를 채택하고 절약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에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시급히 전면화평을 실현하는 것에 있다. 전면화평이 실현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되게 되고 충칭은 더더욱 붕괴의 길을 향해가겠지만, 신정부 또한 고난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전면화평의 실현문제는 프랑스국의 예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패탱원수가 의연하게 독일과 화평을 맺은 것은 가장 위대한 애국애민의 정신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Q : 신중앙정부의 건군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A : 건군과정은 3가지 방면에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완전히 새로운 군대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 둘째는 귀순하려는 항전부대의 수용하는 것, 셋째는 지방의 잡군을 받아드려 재편성하는 것이다. 현재 지방의 잡군들은 재편성을 일단 중지하고 지방의 치안유지에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게 했다. Q : 국민대회의 소집문제(1940년 9월 12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1941년 1월 1일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41년 1월 개최도 늦다는 반응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1941년 1월 1일에 국민대회는 개최되지도 못했다.)는 어떤지. A : 헌정실시위원회(1940년 7월 20일 설립된 왕징웨이정권의 조직.)의 제1차 헌정위원 선정이후 헌정위원회의 전문위원회 및 중앙각부차장 책임장관은 현재 서로 협동하여 적극적이되 신중하게, 헌정초안의 심의와 수정공작을 실시하고 있다. 헌정초안과 수정안을 완성하는 과정 속 선거법의 심의와 수정이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가 있는데 이가 국민대표대회 선거사무소가 조속히 성립되지 않은 원인이다. 이 밖에도, 전시의 교통상태 속 각 성과 시의 대표들이 기일대로 출석할 수 있는지 여부 또한 고려한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⑮ 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全面和平未だ實現せず) *쇼와 15(1940) 년 10월 10일, 쌍십절을 기념하여 왕 선생은 ‘국경일 감상’이라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고난의 길을 끝까지 전진해나가는 왕 선생의 심정에는 깊은 감동이 느껴진다. 국경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위업과 호국선열의 애국심을 추모하고 기념하고 경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건국의 대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민족은 위급하여 존망의 위기에 있음을 생각해보면, 본인을 비롯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들의 책무가 중대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전면화평은 아직실현되지 않았고 국가의 어려움, 민생의 초췌함을 생각해보면 감정이 북받쳐 축하의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일의 신관계조정은 이미 완성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일의 신관계조정은 중일민족의 불행인 이번 전쟁 중 서로 반성을 통해 이 분규를 근본적으로 일소하고 미래 상생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고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중국의 건국대업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중산 선생이 품으려했던 대아시아주의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이 광명있는 앞길에 쏟으며 우리는 이 국경일에 무한한 의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일독이 삼국동맹의 성립은 실로 동아를 제국주의의 해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중국으로 하여금 반식민지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지금 우리들은 깊이 노력하고, 신속하게 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면화평을 획득하고, 나아가 전후의 회복과 건설에 힘쓴다면 반드시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반성하고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다른이의 도움을 얻지 못함을 깨달아 최선의 힘을 다해 성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삼가 금년 국경일의 정신으로 삼고 싶다. 바라컨대 동지들이여, 우리 동지들이여, 힘을 합쳐 광명있는 앞기를 향해 용왕정진하여 장엄찬 중화민국의 건설을 위해 힘쓰라! (이 담화는 10월 10일 오전 10시, 난징국민정부 대예당에서 개최된 축하행사에서 발표된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⑭ 영광의 앞길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영광의 앞길 (光榮ある前途) *일화조약 (일화기본조약을 의미) 체결에 관한 회의는 쇼와 15 (1940)년 7월 5일부터 16번에 걸친 교섭을 거듭해 같은 해 8월 31일 원만한 타결에 이르렀다. 이날 왕 선생은 인사말에서 전면 평화 실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화평을 실현하겠다고 강하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협약 교섭의 최고목적은 향후 양국의 친선관계를 확립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 있다. 양국의 교섭위원들은 이 점에 대해 항상 동지로서의 정신을 가지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 내부를 돌아봤을 때 일부 인사들은 아직 이러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이 목적을 위반하고 교섭을 계속하자는 자들도 있다. 그렇기에 아직 신속하게 전면적 화평을 실현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눈앞의 사실을 고려하고 또한 미래의 영광스러운 앞길에 방해물이 생기지 않게 요구해야 한다. 양국 협상위원들은 이점에 대해 가장 고심을 거듭했지만 중국측은 앞으로 더욱 그 사명의 어려움과 중대함을 자각하고 전력을 다해 신속히 전면적 화평을 초래하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베 대사가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중국에 온지 2개월 동안 교섭의 진행에 대해 지도를 해준 노고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⑬ 화평파와 항전파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화평파와 항전파 (和平派と抗戰派) *왕 선생은 사변이 루거우차오에서 상하이로 전선이 확대된 8.13 기념일인 쇼와 15 (1940)년 8월 13일, 전면화평과 화평조건에 관한 흥미로운 담화를 발표했다. 이담화에서 화평파를 이끄는 왕 선생의 강한 신념이 돋보인다. 어떤 이가 나에게 “중국의 항전파와 화평파는 언제가 되어야 합칠 수 있는가? 또 전면적인 화평은 언제가 되어야 실현될 수 있는 것 인가?”라고 물은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중국에는 당파라는 것이 없고 오직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과 더불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과 생존을 요구하는 하나의 공동적 의견이 있을 뿐이다. 단지 공산당이 이 공동의견을 배척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라고. “그렇기에 이들 공산당은 중국인이 아니게 된지 오래이기에 당연히 중국인이라는 개념에서 제외해야한다.”고. 그렇다면 공동의견이란 무엇인가? 바로 좋은 화평조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중일양국 모두에게 유익한것이고, 동아에 있어서도 유익한 화평조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좋은 화평조건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중국에는 다시 ‘항전파’라는 불리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만약에 좋은 화평조건을 얻지 못한다면 이름바 ‘화평파’는 실패한 것이 되지만, 이러한 실패는 눈앞의 실패에 불과할 뿐, 영구적인 실패는 아니다. 왜냐하면 중일 양국은 서로 중일합작, 동아부흥이라는 하나의 큰 길을 향해 언젠가는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전면적 화평의 실현 여부는 좋은 화평조건의 획득 여부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화평조건의 획득이 빠르면 빠를수록, 전면적인 평화의 실현도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는가? 좋은 화평조건은 대체로 많은 중국인들이 함께 원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좋은 화평조건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중국인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두가지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을 열거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단독으로 일본과 화해하면 쉽게 좋은 화평조건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타국을 끌어들여야 비로소 타당한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타산은 가장 나쁜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바 중일합작, 동아부흥은 일종의 말뿐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진실성 있는 주장이며 일종의 권모술수가 아니라, 일종의 절대성이 있는 신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중일 양국이 성의껏 상대방을 대하지 못하고 수단만을 동원해 외교상의 효과를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본래의 목적에 반해 결국에는 역효과를 초래할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째는 일본이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것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중국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전쟁을 계속 연장시켜 더욱 좋은 화평조건을 획득하자는 생각으로, 이러한 가벼운 타산은 좋지 않은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소모가 많고 따라서 보상의 필요도 점점 커져갈 뿐으로 이는 평화조건을 나쁘게 만들면 나쁘게 만들었지 좋게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상의 두가지 생각은 천박할 뿐만아니라 가당찮은 생각이다. 그러나 충칭방면에서는 계속하여 이런 논조가 주창되고 있다. 이를 태연하게 여기고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나는 좋은 화평조건이 과연 획득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고, 하나는 좋은 화평조건이 획득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와 두려움의 원인은 곧 동아부흥의 의의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가지지 않고 이를 일종의 말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권모술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리들은 현재의 세계에서 고립주의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가 매우 적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약국뿐만 아니라 강대국도 고립되어서는 살아갈 수 없다. 본디 국가를 위해 생각한다면 무작정 다른나라와 연대관계를 맺어 이 때문에 행동의 자유를 견제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만 지리, 인종과 같은 자연관계 혹은 도덕관념이나 경제조건과 같은 인위관계 속에서 2~3개의 국가가 연합하여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지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에 일본은 선린우호와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원칙아래 중국과 합작하여 동아의 부흥을 꾀하는 것이 전쟁을 고집하여 중국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중국이 만약 이 점을 이해한다면 회의감을 가질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중국이 전폭적인 정신속에서 내가 4월 26일에 강연한 ‘나를 죄하는 정신’ (왕징웨이가 발표한 논문 제목, 이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으로 더욱 노력하고 일본에게 중국이 동아부흥의 최선의 반려자임을 깨닫게 한다면 화평조건이 결코 나빠질 리 없다. 왜냐면 소위 좋은 조건이라는 것은 중국에게만 좋을 뿐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도, 나아가 동아에 있어서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