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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⑫ 중국 청년의 새로운 책임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중국 청년의 새로운 책임 (中國靑年の新しき責任) *사변 3주년인 쇼와 15 (1940) 년 7월 7일, 왕 주석은 사변 3주년 즈음에 이 담화를 발표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청년들에게 강력히 호소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중문 본문은 '對於事變三週年之感想及期望' 이라는 제목으로, 본책에서의 일어 번역문과 내용차이가 존재하나 본질적인 내용은 거의 같다.) 루거우차오 사건 발생 이전에 방지할 수 있었던 사변의 발생은, 발생의 이후에도 이 사변을 신속하게 종결시키지 못하고 3년이 헛되이 지나가며 전국은 점점 전화에 시달리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국제관례에 의하면 양국이 불행히도 화평을 상실하고 전쟁에 이르게 되면 화평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정전협정과 강화조약 뿐이게 된다. 이 경우 전승국은 항상 가혹하기 짝이 없는 조건을 전쟁패국에 가하게되고, 이렇게되면 패전국은 항상 때를 기다리다음의 보복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일본은 의연한 결의속 이 관례를 타파하고 스스로를 전승국이라 일컫지 않으며 선진국으로서의 도리로써 동아 각국가민족이 나아가야할 길을 지시하고 각자가 자주독립의 입장에 기초하여 새롭게 친애와 화목의 관계를 건설하게 하고, 아울러 동아부흥의 책임을 지게 하고 있다. 일본은 패전의 책임을 중국에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은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중국에 부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큰 책임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동아를 부흥시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 동아부흥의 책임을 부담할 능력을 얻게하기 위해 위에서처럼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거나 중국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바로 중국을 원조하고 독립국가로서 구비해야할 조건들을 완전히 보유하게 하려 하고 있다. 이는 역량을 증가시켜 그 발전을 촉진하여 동아 부흥의 책임을 능히 분담하는 능력을 갖추기 하게 위함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현재 이루려 하는 화평의 회복은 절대 굴욕으로서 화평의 댓가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일조의 활발한 진취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의는 청년일수록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년의 정신과 신체는 모두 활발하여 진취적이기에 이 의의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전국의 청년들은 이제 모두 하나가 되어 일어나 이 동아부흥이라는 새로운 책임을 함께 지고 이를 위한 새로운 노력에 공헌해야할 시기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러한 시기에도 주저하고 관망하려는 것인가? 가장 큰 원인은 동아부흥의 의의에 대해 아직 충분한 인식과 이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년의 경제침략의 해로움에 대해서는 손중산 선생이 이미 ‘민족주의’, ‘대아시아주의’, ‘중국의 존망문제’ 에서 이미 통절하게 이를 설명한 바가 있다. 중국이 만약 경제침략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중국이 영국이 영구히 식민지적 지위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청년 대다수는 영미의 학풍에 미혹되어 손중산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는 것에 대해서는 구시심비(말로는 옳다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르게 여김.) 하고 있는 것이다. 20여년전 손중산 선생의 시절에는 공산주의의 해로움을 볼 수 없었으나, 이후의 청년들은 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의미하는 것)의 선전에 미혹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중일관계가 암흑에서 광명으로 전환되면, 청년들도 옛 열강의 경제침략과 공산주의의 해로움을 깨닫고 눈뜨게 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중국에는 화평에 대한 열렬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길에 있어 의심을 갖고 있기에 형세를 관망하고 모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선전에만 의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사실로 만들어 내어 그들에게 하나의 견본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과 선전은 상호 인과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선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형세를 바라보며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만약 그들이 이대로 머뭇거리다가는 국가와 민족 전체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일의 공존, 동아의 부흥이라는 아득히 먼 이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의를 가지지 않으나 눈 앞에서 한 두가지 일의 실현이 뜻대로 되지 않기에 그만 낙심하고 심히 잘못된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전면적 화평의 도래가 가능하다 할지라도, 항상 그 뜻과 같은 사실이 존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여의치 않은 사실을 알고 조금이라도 노력을 가해야 하나, 이를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리 조급하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뜻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하고 심지어 자포자기 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원대한 이상에 반하는 일이고 본래의 불충분한 것이 되는 것으로, 이는 화평, 반공, 건국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정신과 기력을 집중하고 시시각각 부족한 것을 바로잡아 용맹매진하여 화평, 반공, 건국 운동의 마지막 성공을 이뤄야 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 일만화공동선언 (日滿華共同宣言) 1940.11.30

    일만화공동선언 ( 日滿華共同宣言 ) , 1940년 11월 29일 작성, 30일 발표 일만화 (일본제국, 만주국,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3국이 서로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동아에 도덕에 기초한 실질서를 건설한다는 공동이념에서 좋은 이웃이 되어 긴밀히 협력하여 동아의 영구적 평화를 실현하고 이를 핵심으로 삼아 전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希望三國互相尊重其原然之特質,於東亞建設以道義為基礎之新秩序之共同理想下,互為善鄰,緊密提攜,俾形成東亞永久和平之軸心,並希望以此為核心,而貢獻於世界全體之和平。為此宣言如下:) 1.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와 일본과 만주국은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 一 中華民國、日本國及滿洲國互相尊重其主權及領土。 2.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은 호혜주의에 기초한 3국간의 일반적 지원, 특히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적 지원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채택한다. 二 中華民國、日本國及滿洲國,講求各項必要之一切手段,俾三國間以互惠為基調之一般提攜,尤其善鄰友好,共同防共,經濟提攜,得收實效。 3. 중화민국, 일본 , 만주국은 이 선언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가능한 조속히 협정을 체결한다. 三 中華民國、日本國及滿洲國,根據本宣言之旨趣,速行締結協定。 중화민국(中華民國) 29년 11월 30일 쇼와 (昭和) 15년 11월 30일 강덕 (康德) 7년 11월 30일 중화민국 난징. 참고로 이 조약을 왕징웨이 측에서는 "중일만"공동선언이라 하였다. (만주국에서는 "만화일(滿華日) 공동선언이라 하였다.) [원문 출처] https://zh.wikipedia.org/zh-hant/%E6%97%A5%E6%BB%BF%E8%8F%AF%E5%85%B1%E5%90%8C%E5%AE%A3%E8%A8%80

  • 왕징웨이의 일본방문 (1941.6.13~6.28)

    왕징웨이가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거친 과정들. 왕징웨이는 비행기, 배, 기차, 자동차까지 모두 탑승하며 난징에서 출발한지 거의 "90시간" 만에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1941년 6월 13일부터 방일 일정을 시작해 16일간의 일정을 가지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왕징웨이는 하노이 탈출이후 도쿄를 방문한 적 있었지만, 왕징웨이정권 출범 이후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적으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렇기에 일본에서도 거는 기대가 컸고, 왕징웨이 또한 방일에서 기대하는 것이 컸다. 심지어 만주국에서도 이번 방문을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1940년 말부터 일본을 방문하기를 원했으나. 일본측이 이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지속된 요구에 일본측은 1941년 4월 17일에야 왕징웨이의 일본방문을 허락했다. 이는 일본측의 생각이 왕징웨이 측에 긍정적으로 바뀐 결과였다. 총 16일의 긴 일정이지만,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의 절반가량을 이동에 사용했기에 실질적인 방일기간, 도쿄에서 왕징웨이가 업무를 보았던 시기는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번 포스트에는 신문자료가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에서 당시 발행되던 3대신문과 동시에, 왕징웨이정권에서 발행하던 중화일보까지 이용하여 글을 작성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941년 6월 13일 (金), 날씨 맑음 - 출발일 난징의 왕징웨이 공관, (現 중국대륙 난징시 구러우구 신화로 38, 당시주소로 난징특별시 제4구 신화로 34호 ) 이 건물은 왕징웨이의 처남이었던 추민이 (褚民誼)가 기부한 것이었다. 오후 2시 40분, 왕징웨이는 자신의 관원들을 데리고 자신의 공관에서 출발, 난징의 대교장기장(大校飛行場) 으로 이동했다. (약 15km, 약20분 소요.) 비행장에서는 왕징웨이에게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郎) 지나파견군총참모장을 비롯한 다양한 일본측 인사, 난징국민정부측 인사, 뤼롱위안(呂榮寰) 만주국 대사등 일본,만주국,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인사 약 500명이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의 방일 일정의 출발에 대해 환영했다. 인사들에게 환영을 받는 동시에, 국민정부 군악대는 환송곡을 연주했고, 이에 왕징웨이는 무언의 미소를 지으면서 비행기에 올랐고, 왕징웨이가 비행기에 오르자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왕징웨이의 관원들도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왕징웨이가 탑승했던 미쓰비시 MC-20 비행기. (사진은 다른 기체) 왕징웨이는 미쓰비시에서 만들었던 폭격기 Ki-21의 민수용인 MC-20을 탑승했다. 승무원까지 총 15명의 사람이 탑승할 수 있는 MC-20은 여러대가 당시 중국대륙에서 사용되었는데, 왕징웨이가 탑승한 기체는 C-5105 기체로, 福州號(복주호, 푸저우호) 라는 명칭이 붙은 비행기였다. 이 MC-20은 중화항공(지금 중화민국의 중화항공과는 상관없는 이전의 회사) 에서 약 10대가량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국적항공사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인사가 탑승하는 전용기로 임대하여 한대 마련하는 경우가 있듯이 이 경우 또한 중화항공에서 운용하던 MC-20 중 한대를 임대하여 왕징웨이를 비롯한 정부 고위인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푸저우호 (福州號) 에 탑승하는 왕징웨이. 오후 3시 10분, 비행기의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비행기는 이륙을 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당시 왕징웨이의 출발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왕주석 만세!" 를 연호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호속에서 비행기는 이륙했고, 상하이로 향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천궁보(당시 입법원장), 쉬량(당시 외교부장), 린바이셩 (당시 선전부 장관) , 저우포하이(당시 재무부장) 등을 데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오후 4시 10분, 왕징웨이의 푸저우호가 상하이 홍커우 비행장에 착륙했다. 난징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하이 홍커우 비행장에는 당시 상하이특별시 시장과 오오타 타이시(太田 泰治) 흥아원 화중연락부장관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왕징웨이는 이들의 환영을 받은 뒤 숙소로 향해 그곳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1941년 6월 14일 (土) 오전 10시, 왕징웨이는 관원들과 함께 숙소를 나와 후이산부두로 향했다. 후이산 부두 (匯山碼頭)의 모습, 이름은 조계를 처음 지을 시절, 대충 지었던 Wayside wharf (길가의 부두) 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후이산 부두(匯山碼頭, 현재 중국대륙 상하이시 홍커우구 양수푸루(양수포로) 18호 , 虹口區楊樹浦路18號)에는 야와타마루 (八幡丸) 라는 일본의 화객선 (화물과 승객을 모두 태우는 배) 가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일본공사를 따라 왕징웨이는 배에 승선했다. 딩모춘과 당시 상하이시장을 비롯한 난징국민정부 인사들은 배까지 따라와 왕징웨이를 배웅하였고, 왕징웨이는 이들의 배웅과 환영을 받은 뒤 특별실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야와타마루(八幡丸), 1940년에 건조된 당시로는 최신 상선이었다. 하지만 1942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자 징발되어 항공모함 운요(雲鷹)로 개조되게 된다. 그리고 운요는 1944년 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오후 12시 30분, 왕징웨이는 관원들과 함께 갑판에 올라가 관원들과 함께 건배를 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축복했다. 이때 배 옆 항구에서 국민정부 군악대가 다시한번 환송가를 연주하였다. 그리고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郎) 지나방면함대 사령장관과 만나 축복을 기하는 건배를 하였다. 오후 1시 30분, 야와타마루는 드디어 출발을 시작해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 배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17명의 난징국민정부 인사가 함께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마다 시게타로 (嶋田繁太郎) 지나방면함대 사령장관과 건배하는 왕징웨이. - 경성일보, 1941년 6월 15일 당시 야와타마루에는 왕징웨이와 그의 관원들, 정부인사들 뿐만 아니라 왕징웨이의 기념적인 첫 방일일정을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징웨이가 배에서 한 행동들은 바로 전보를 통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지역으로 바로 바로 전달되었다. 이때 이 배에 함께 탑승했던 기자들은 기사를 시작할때 난징발, 도쿄발, 이렇게 기사가 작성된 곳을 작성할때 이들은 "야와타마루 발 (八幡丸 發)" 이라고 쓰기도 했다. 왕징웨이를 태운 야와타마루가 일본으로 가고 있는동안, 일본에서는 쇼와 덴노(히로히토) 가 왕징웨이의 방문에 대해 "황실의 손님으로 대하라" 라고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가 도쿄에 와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숙소로 황실이 보유하고 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有栖川宮邸)의, 외국의 국빈이나 왕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제공했던 카스미가세키별궁 (霞関離宮) 을 숙소로 제공하라 지시를 내렸다. 이 소식은 배에 타고 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일행에게도 전달되었는데, 이에 대해 왕징웨이를 비롯한 일행들은 감사인사를 표했다고 한다. 왕징웨이가 도쿄에서 머물렀던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별궁 (霞関離宮, 霞ケ関離宮), 일본 치요다구 가스미가세키에 있었다. 1945년 도쿄대공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또한 궁내청에서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난징국민정부 인사를 접대할 인원을 선출하고, 왕징웨이의 일본도착에 맞추어 환영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16일 (月) 오전 8시, 야와타마루의 마스트(돛대) 에 청천백일만지홍기 (물론 왕징웨이의 그것) 이 게양되었다. 즉, 야와타마루는 도착 당시에는 배에 일장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베시에서는 왕징웨이를 환영하기 위한 주요인사들이 준비를 시작했고, 고베시청 앞의 국기게양대에는 일장기와 함께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었다. 오전 9시, 당시 일본에 중화민국대사로 있었던 추민이(褚民誼)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따로 작은 배를 타고 고베로 다가오고 있는 야와타마루로 접근해 먼저 왕징웨이를 만났다. 이때 당시 안개가 끼어었으나, 이를 뚫고 왕징웨이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추민이는 이때 왕징웨이와 악수도 나누었다. 야와타마루에서의 왕징웨이. (옆의 인물은 선전장관이었던 린바이셩) - 매일신보, 1941년 6월 17일 오전 9시 30분, 이 시점에서 왕징웨이의 야와타마루가 도착하기로한 고베항 4번부두에는 이미 외무성 동아국장, 카츠타 킨지로(勝田銀次郎) 고베시장을 비롯한 일본 인사들이 왕징웨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약 천명의 사람들이 왕징웨이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는데, 350명 가량은 주요인사들, 600명 가량은 고베의 중화동문학교(中華同文学校)의 학생들이었다. 이때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전 주중화민국 일본대사도 시간이 된다고 하여 참가했다.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그 아베가 맞다.) 오전 10시, 왕징웨이가 탑승한 야와타마루는 드디어 고베항에 도착했다. 미리 고베항에 모여있던 인파들은 왕징웨이 일행의 도착에 환호했다. 오전 10시 30분, 하선준비를 마친 야와타마루는 계단을 내리고 하선을 시작했다. 이때 빨간 레드카펫이 함께 깔렸으며, 왕징웨이가 카펫을 따라 배에서 내려오자 외무성 동아국장이 총리를 대신하여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인사와 장시간 여행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음을 이야기하고, 이후 다른 인사들도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말을 건냈다. 이와 동시에 효고현 현립상공학교의 밴드가 중국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국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왕징웨이가 선두에 서고, 쉬량과 저우포하이, 린바이셩이 왕징웨이를 따라 부두를 따라 걸어 나갔다. 이때 왕징웨이는 쓰고 있던 실크햇을 벗어 인파들에게 흔들면서 감사를 표했다. 이때 왕징웨이와 함께 했던 기자단은 일본의 도착한 왕징웨이의 눈이 빛나고 있었으며, 가슴에는 감개무량함이 보이는 것 같다고 기록했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부두에서 나와 효고 현에서 준비한 차량 20대에 나누어 탑승하였다. 이날 일본방송협회 오사카 라디오 (JOBK)에서는 야와타마루의 도착에 맞추어 야와타마루 안에다가 마이크를 설치해 왕징웨이의 일본도착을 실황중계하였다고 한다.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차량행렬과 이를 환영하는 고베시민들의 모습.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20대의 차량행렬은 고베의 한신가도(阪神街道) 를 달려 고시엔(甲子園) 호텔로 향했다. 이때, 학생단체들, 재향군인단체들, 부인단체들 등 약 4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일장기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면서 왕징웨이를 환영하고 환호를 보냈다. 왕징웨이가 고베에서 머물렀던 숙소인 고시엔 호텔. (한신타이거즈의 고시엔 야구장이 있는 그 고시엔이 맞다) 오전 11시, 왕징웨이와 일행이 탄 차량행렬은 고시엔 호텔(현 무코가와 여자대학 고시엔회관) 에 도착했다. 이 때 고시엔 호텔에는 일본의 일장기와 난징국민정부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크게 게양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왕징웨이는 롯코산을 비롯한 고베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3층의 양식&일본식이 결합된 방에서 묵었다고 한다. 오후 12시,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왕징웨이는 호텔 정원의 연못앞에서 호텔 지배인이 준비한 일본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식사 이후 왕징웨이는 방으로 돌아가 계속 쉬었는데, 이는 이날 밤 다시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일본 궁내청과 6월 17~18일간 도쿄에서 일정을 잡은 만큼, 일정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후 8시 50분, 호텔에서 어느정도 쉰 왕징웨이는 고베역에서 도쿄로가는 급행특별열차에 탑승했다. 이때도 고베역에는 왕징웨이의 도쿄행을 환영하는 인파들이 왕징웨이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상, 고베에서 도쿄까지 가는데에는 12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기에 왕징웨이와 일행은 기차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941년 6월 17일 (火) 오전 8시 45분,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도쿄역에 도착했다. 전날 오후 8시 50분에 출발했으니 거의 12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역에는 일본과 난징국민정부의 깃발이 크게 걸려있었고, 고노에 일본총리와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육군대신, 마츠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 외무대신, 오이카와 코시로(及川古志郎) 해군대신, 만주국대사등 일본 정부의 주요인사와 인파가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왕징웨이는 가장 먼저 고노에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왕징웨이와 일행은 역에서 나와 외무부에서 준비한 차들에 탑승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1호차에, 저우포하이는 2호차에 탔다고 전해진다. 도쿄역을 떠나는 왕징웨이와 일행의 차량행렬 오전 9시 5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고베와 마찬가지로 환영인파의 환대를 받으며 도로를 달려 도쿄 아자부구(麻布区, 현재 도쿄 미나토구, 롯본기근처) 에 있는 주일중화민국대사관에 도착한다. (당시 중화민국 대사관이 있던 자리는 현재 외무성 이쿠라공관 (外務省 飯倉公館) 이 되었다.) 대사관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 왕주석각하 (歡迎 汪主席閣下)" 와 같은 현수막을 걸고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대사관에 왕징웨이가 들어오자 대사관 직원을 비롯한 현장에 있던 2백명의 인원이 "왕선생 만세!" 를 외쳤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대사관에서 대사관 직원들과 회견하며 대사관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이후 대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 왕징웨이 일행의 차량행렬이 대사관으로 들어가고 있고 인파들은 깃발을 흔들며 이를 환영하고 있다. 오전 11시, 왕징웨이는 혼다 쿠마다로(本多熊太郎) 주 중화민국 일본대사와 함께 가벼운 간담회를 가지고, 추민이와 함께 3명이서 식사시간을 가졌다. 이때 요리는 대사관의 자체 요리사가 간단하게 중국요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를 포함한 3명은 식사를 하면서 1시간이 넘도록 여러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렇게 식사와 간담회를 마치고, 왕징웨이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는 대사관에서 나와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으로 향했다. 카스미가세키 별궁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거실과 푸른색 발코니가 있고, 사계절을 나타낸 일본도가 그려진 가장 큰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의 숙소 카스미가세키별궁의 대회당에서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쉬량, 린바이셩을 포함한 왕징웨이측 일행과 일본측 인사들이 비공식적인 만찬회를 가쳤다. 1941년 6월 18일 (水) 아침 (정확한시간이 적혀있지 않음) , 왕징웨이의 숙소 카스미가세키 별궁 앞에는 이미 오노데라 마코토(小野寺信) 가 이끄는 1개 의장대 중대와 군악대가 도착해 도열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이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이후 아침식사를 하였다. 오전 10시 33분,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린바이셩을 비롯한 일행들은 궁내청에서 보낸 자동차에 나누어 탑승해 궁성( 현재 황거, 고쿄,皇居)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차량이 출발하면서 앞에서 도열하고 있던 군악대는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하였다. 궁성(宮城)의 이중교(二重橋)를 지나는 왕징웨이 일행의 차량행렬 오전 10시 40분, 왕징웨이 일행이 탑승한 차량행렬이 이중교를 통과해 궁성 내부로 들어갔다. 궁성 내부로 들어간 차량행렬은 메이지궁전 (明治宮殿, 1945년 미국의 폭격으로 소실됨)의 현관으로 향했다. 궁성의 메이지궁전의 현관 (車寄せ, 자동차를 댈수 있는 현관), 쇼와 덴노은 직접 이곳까지 나와 왕징웨이를 만났다. 히로히토는 직접 현관까지 행차하여 왕징웨이의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맞이하였다. 히로히토는 왕징웨이와 악수와 함께 짧은 말을 건네며 왕징웨이를 환영하였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마츠다이라 요시타미(松平慶民) 궁내성 무부장관의 안내를 받아 마츠다이라를 따라 봉황간(鳳凰間, 호우오우노마) 로 향했다. 봉황간에서는 고준 황후가 왕징웨이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로히토는 왕징웨이를 봉황간의 정석으로 모시고 공식적인 회견을 시작했다. 회견에 앞서, 왕징웨이는 히로히토 부부에게 중국식 4곡짜리 오래된 병풍을 선물했다. 왕징웨이와 쇼와 부부가 회견을 진행했던 메이지궁전의 봉황간(鳳凰間) 의 모습. 메이지궁전이 전쟁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고쿄에는 이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봉황간의 옆방에서는 궁내성의 인원들과 왕징웨이의 일행들이 대기를 하며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왕징웨이는 이러한 황실의 깊은 친절에 감사를 표했고, 히로히토 부부도 통역을 이용해 왕징웨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징웨이는 또한 추민이 대사를 히로히토 부부에게 소개시켜 추민이 대사와 히로히토 부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추민이는 히로히토부부에게 또다른 선물을 전달했다. (선물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다.) 왕징웨이와 쇼와부부가 봉황간 에서 자리를 옮겨 이동한 천종간(千種間) 오후 12시, 히로히토 부부와 왕징웨이는 자리를 천종간(千種間) 으로 옮겼다. 히로히토 부부도 왕징웨이에게 궁내성의 직원들을 소개시켜주고, 고노에 총리를 비롯한 일본내각의 고위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는 자리를 풍명전(豊明殿) 으로 옮겼다. 풍명전(豊明殿), 가장넓은 공간이며, 연회를 비롯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풍명전으로 옮겨 히로히토 부부와 왕징웨이는 점심 만찬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가장 상석에 앉고, 고준황후는 이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으며, 왕징웨이는 고준황후의 오른쪽에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만찬에는 일본 황족들, 고노에 총리, 궁내대신, 마츠오카 외무대신, 도조 육군대신, 오이카와 해군대신, 당시 흥아원 부총재, 혼다 대사, 추민이, 저우포하이, 그리고 왕징웨이의 관원들 7명, 그리고 쇼와 덴노의 측근과 궁내청 직원들이 함께 만찬을 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는 모단간(牡丹間)로 가서 함께 차를 마셨다. 이때 히로히토 부부도 왕징웨이에게 선물을 전달하였다. 왕징웨이도 히로히토 부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의 만찬, 자료에 따르면 이렇게 3명의 핵심적인 자리가 정해졌고, 이 주변을 고노에총리를 비롯한 인원들이 채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후 1시 20분, 왕징웨이는 궁성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별궁으로 향했다. 히로히토는은 왕징웨이가 가는 길에도 현관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고 한다. 오후 1시 30분, 왕징웨이가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 별궁으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다키히토 (三笠宮崇仁) 친왕이 왕징웨이가 있던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을 방문했다. 왕징웨이와 다키히토는 1층의 응접실에서 짧은 회견을 가졌다. 오후 4시, 휴식을 취한 왕징웨이는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을 나와 전날 방문했던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오후 5시, 왕징웨이는 중화민국대사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일본어 통역은 저우포하이가 맡았다.) 이번 방일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쿄의 중화민국대사관에서 담화문을 발표하는 왕징웨이. 왕징웨이의 방일담화 (1941.6.18, 주일중화민국대사관, 도쿄) 이번에 내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 것은 우리를 지지해주는 일본 귀국의 호의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과 동시에 양국간에 있어 협력해야 할 여러가지 근본적 문제를 일본정부와 논의하기 위함이다. 오늘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으로서 일본 천황황후를 만나 친히 우리정부와 우리국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정부와 동아의 장래를 친히 염려해주시고 격려해준 일본 천황에게 감사를 표할 뿐이다. 내일부터는 귀국정부당국을 방문해 우리정부의 충정(衷情)을 피력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일본국민 여러분들의 굳은 결심속에서 고노에 총리대신이 작년 발표한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3원칙의 실현을 위하여 깊은 노력을 해 작년의 중일기본조약과 중일만공동선언을 완전히 실현시켜 전면화평을 완성하고, 또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이에 마땅한 책임을 다해 영원한 동아의 화평을 수립하고 나아가 세계의 화평에 매진하려는 나의 의지는 절때로 꺼지지 않을것을 단언할 수 있다. 고베 도착이후 귀국으로 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있는데, 천황께서 보여준 특별한 대우와 일본국민 여러분이 보여준 정성은 내 인생에 있어 잊힐 수 없는 감격으로 남을 것이다. 이에 삼가 깊은 사의(謝意)를 표한다. (중일만공동선언,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같은 시간, 린바이셩도 대사관에서 일본기자들과 회견을 하며 담화문을 낭송했다. 이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오후 8시 30분, 왕징웨이의 방문을 기념하여,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는 도쿄방송국관현악단이 『동아민족진행곡』 을 연주했다. 1941년 6월 19일 (木) , 날씨는 비가 조금 내림 18일로서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났고 , 이때부터는 행정과 관련된 비공식적 일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중화민국 대사관을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추민이를 비롯한 일행을 데리고 오오야 마사오(大谷正男) 를 통해 지방의 인사들과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오전 9시 45분, 오오야 마사오가 직접 도쿄의 중화민국대사관에 찾아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오전 10시 30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메이지신사를 방문했다. 이날은 가볍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왕징웨이는 자갈을 밟으며 메이지신궁의 내부로 향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다마구시(玉串) 대금을 봉납했다. 다마구시(玉串) 10시 35분, 왕징웨이는 메이지신궁에서 기도를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왕징웨이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왕징웨이의 모습을 취재하던 기자는 이러한 왕징웨이의 모습이 동아부흥의 희망에 불타고 있는것 같다고 묘사했다. 메이지 신궁을 참배하는 왕징웨이와 일행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날아침에는 비가와서 우산을 쓰고 있다. 오전 11시 45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로 향했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의 기념관을 방문하여 방명록을 남기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오후 12시 20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왕징웨이 일행은 점심식사를 한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1시 30분, 린바이셩 선전장관이 대정익찬회의 중앙협력회의를 참관하였다. 오후 2시 20분, 왕징웨이는 이때부터 고노에 수상을 비롯한 일본 고위인사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순서는 마츠다이라 궁내대신 → 고노에 총리 → 마쓰오카 외무대신 → 도조 육군대신 → 오이카와 해군대신 → 스기야마 참모총장 → 나가노 군령부총장 → 카와다 대장(大蔵)대신 → 하라 추밀원 의장 였다. 이때 왕징웨이는 각 인물을 만날때마다 감사의 선물을 전하였는데, 예를 들어 오이카와 해군대신에게는 백옥색의 여의봉을 선물하였고, 마쓰오카 외무대신에게는 고전풍 꽃병을 선물하였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과 회견하는 왕징웨이. 오후 (시간이 적혀있지 않음) ,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의 (中央協力會議) 에서 전원일치로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환영사를 가결시켰다. 汪主席閣下歡迎辞 (왕주석각하환영사) 今回中華民國國民政府主席行政長官汪精衛閣下來訪に當り大政翼贊會中央協力會議は衷心より歡迎の意を披瀝し閣下の始終變らざる和平建國の努力に對し滿腔の敬意を表す 이번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행정장관 왕징웨이 각하 내방에 즈음하여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의는 충심으로 환영의 뜻을 피력하고 각하의 시종 변함없는 평화건국의 노력에 대하여 만강의 경의를 표한다. 이 환영사는 미츠기(未次) 의장이 왕징웨이에게 전달하였다. 오후 7시, 왕징웨이는 총리관저에서 고노에 총리가 주최하는 만찬회에 참가하였다. 왕징웨이쪽에서는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추민이와 린바이셩과 관원들이 참가했고, 일본측에서는 고노에를 비롯한 여러 고위급 정부인사가 참가한 것은 당연했으나, 이번에는 그 인사의 폭이 늘어 일본은행 총재, 도쿄 도지사, 대정익찬회의 인원들, 도쿄시장 등도 참가하여 약 100명의 인사가 만찬회에 참가했다. 만찬에선, 고노에수상이 먼저 인사를 하고, 이에 왕징웨이가 답사를 발표하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만찬은 7시부터 시작되어 9시쯤 끝이났다. 오후 9시 20분, 만찬을 끝낸뒤, 왕징웨이와 고노에총리, 마쓰오카 외무대신 3명은 남아서 추가로 약 30분간 회담을 하였다. 1941년 6월 20일 (金) 오전 6시 40분,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왕주석의 방문에 즘하여" 라는 방문을 약 20분간 진행했다. 오전 10시 30분, 일본 해군은 왕징웨이정부측에 수송기 한대를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왕징웨이는 이 비행기에 海鶼號(해겸, 하이지엔)호 라는 이름을 붙혔다. 이 비행기는 왕징웨이의 전용기로 사용되게 된다. 방일전까지만 해도 왕징웨이는 비행기를 빌려서 사용해야하는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는 이미 이전부터 일본측에 자신을 위한 전용기를 주문했었다. 이에 일본해군측이 방일에 대한 감사보상으로 비행기를 한대 제공하면서 이제 제대로된 비행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신문에서는 왕징웨이에게 준 전용기의 기종에 대해서는 적어두지 않았지만, 우리는 왕징웨이가 이때 받은 비행기의 기종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1942년 12월 방일할 당시에 는 이번 방일과 달리 하이지엔호를 이용해 비행기로 난징에서 도쿄로 바로 왔기 때문이다. (물론 후쿠오카에서 연료를 재보급하기는 했다.) 일본뉴스 133호에는 하네다공항에 도착하는 왕징웨이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따라서 우리는 일본뉴스 133호에서 왕징웨이가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가 해겸호 임을 알 수 있다. 일본뉴스 133호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왕징웨이의 하이지엔호과 똑같은 기종인 96식육상수송기 11형 (L3Y1)의 모습 왕징웨이가 일본 해군에게 받은 기종은 해군에서 운용하던 G3M (96식육상공격기, 九六式陸上攻撃機) 폭격기에서 무장을 제외하고 10명가량이 들어갈 수 있는 좌석을 설치한 수송기 버전의 L3Y (96식육상수송기) 의 11형 (L3Y1) 이다. 글의 처음에서 보았듯 푸저우호의 기반이었던 미쓰비시 MC-20의 경우 항속거리가 3,000km 밖에 되지 않는데에 반해 L3Y는 45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한계로으로 인해 장거리비행이 어려웠던 이번 방일과정에서 난징-도쿄가 90시간 가까이 걸렸던 반면,해겸호를 이용함으로서 27시간만에 난징에서 도쿄까지 갈 수 있었다. (심지어 이것도 왕징웨이가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묵었기에 이런것으로 무리하였다면 하루안에 도쿄까지 갈수도 있었다.) 그리고 L3Y의 원본기종이었던 G3M은 이미 태평양전쟁시작 전부터 한계를 들어내고 있었던 구형기종이었다. 해군측에서 이기종을 선택했던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해겸호(海鶼號) 의 재현도. 일본뉴스 133호의 영상을 토대로 재현한 해겸호의 모습을 보면, 콕핏쪽에 왕징웨이정권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그리고 콕핏 밑의 부분은 해겸(海鶼) 이라는 이름이 적혀있고, 중화항공 (中華航空股份有限公司)의 로고와 사명이 적힌것으로 "추정"된다. (로고부분이 특히 확실하지 못하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해겸호에는, 청천백일문양이 아닌, 일본 항공기에 쓰이는 히노마루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오후 12시 30분, 왕징웨이는 도조의 육군대신 관저에서 도조 육군대신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주최하는 점심식사에 참가했다. 이자리에는 왕징웨이 일행과 일본 육군인사들이 참가한 행사로, 행사에서는 도조가 먼저 인삿말을 건냈고, 이에 왕징웨이도 답을 보내고 축배를 들었다. 도조는 인삿말에서 국공결렬이후 20년가까이 반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왕징웨이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충칭정부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식사가 끝난뒤 왕징웨이와 스기야마, 도조와 그들의 부하까지 합쳐 총 6명이서 별실에서 추가적으로 회견을 진행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와 함께 일본에온 쉬여 외무부장은 일본 도쿄의 만주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쉬여는 만주국대사에게, 도쿄방문때 마중을 나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고, 20분가량 회담을 가졌다. 오후 9시, 린바이셩이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자신의 감상을 약 30분간 이야기했다. 1941년 6월 21일 (土) 오전 7시 30분,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와 함께 오기쿠보(荻窪)의 고노에 수상의 사택으로 가서, 사택을 함께 방문한 마쓰오카 외무대신과 함께 4명이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4명은 중일제휴에 대한 회담을 1오전 10시 반까지 진행하였다. 오후 11시 25분, 왕징웨이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平沼騏一郎) 내무대신의 관저를 방문, 회담을 진행했다. 히라누마 내무대신은, 자신의 총리였던 시기 (1939.1~1939.8) 를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에게 자신의 총리를 했던 시기처럼 그대로 노력해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에게 "일본의 협력을 얻어 전력을 기울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했다. 왕징웨이와 히라누마의 회담은 25분만에 끝이 났다.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수교사(水交社, 지금의 도쿄타워 근처) 에서 오이카와 해군대신과 오찬을 가졌다. 이 오찬에는 왕징웨이측 일행과 일본해군측 인사들을 포함해 70명가량이 참가하여 2시까지 오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2시에 오찬이 끝난 후 오이카와 해군대신과 왕징웨이는 따로 30분가량 회담을 더 진행하였다. 왕징웨이와 함께 수교사에서 걷는 오이카와 해군대신 (가장왼쪽) 오후 3시, 왕징웨이는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일본 외무성 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기자단이 질문을 종합해 질문을하면, 왕징웨이가 이에 대해 답을하는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치뤄졌다. 이 기자회견은 약 1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오후 5시, 도쿄의 8개의 여학교의 여학생 7천명이 히비야공원에 모여 왕징웨이를 환영하기로 하였다. 여학생들은 환영왕주석각하(歡迎汪主席閣下) 라고 적힌 팻말을 선두로, 4열종대로 "애국행진곡"의 멜로디에 맞추어 일장기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면서 왕징웨이가 있는 제국호텔로 행진했다. (이는 물론 관제행사였다.) 오후 5시반, 제국호텔에서 추민이의 주도로 각계인사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열었다. 이 다과회는 마쓰오카 외무대신, 나가노 군령부총장, 스기야마 참모총장, 대정익찬회의 인사들, 신문기자들, 문학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까지, 600명가량이 참가하는 대형행사였다. 왕징웨이는 행사에 참석하고 있던 중, 위의 여학생들이 제국호텔앞에 도착하여 외치는 "왕주석만세!" 소리를 듣고, 호텔의 발코니에 올라가 환호를 보내준 여학생들에게 손을 3번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건냈다. (이때 왕징웨이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 20분정도가 지나고 왕징웨이가 발코니에서 내려가자, 저우포하이와 린바이셩이 계속하여 이 여학생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발코니에서 내려가 요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호텔안의 연극장에서 단풍놀이(紅葉狩) 를 비롯한 7종류의 일본무용을 감상하였다. 공연은 7시에 끝이났다. 제국호텔 안의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단풍놀이(紅葉狩)의 장면, 이 사진은 실제 왕징웨이의 방일기념사진첩에 있던 사진이다. 오후 7시 30분, 왕징웨이는 다과회를 마치고 차를타고 달려 정치가 도야마 미츠루(頭山満)의 사택에서 그 를 만났다. 이자리에는 이시와타 소타로(石渡荘太郎) 대정익찬회 사무총장, 아키타 키요시 (秋田清) 척무대신을 비롯한 주요 정계 인사들이 이미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도야마를 만났던 이유는 왕징웨이 스스로가 아시아주의자였기에 (정확히는 쑨원의 아시아주의를 따르는) , 쑨원의 아시아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도야마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 10시 30분, 3시간가량 진행된 도야마를 비롯한 요인들과의 대화를 끝내고, 왕징웨이는 숙소인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왕징웨이와 이야기하는 도야마의 모습. (왕징웨이의 왼쪽이 도야마.) (시간을 알수없음, ) 왕징웨이는 흥아서도전(興亞書道展)의 상품으로 난징의 유명한 붓과 먹 10세트를 기증하였다. 이 행사에는 일본, 만주국, 왕징웨이정권의 서예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이 중에는 고노에 일본총리, 왕징웨이, 만주국의 장징후이를 비롯하여 일본측에서 작품 3천개, 만주와 중국측에서 합쳐서 약 1천개가량의 작품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22일 (日) 이날은 많은 신문속에서 왕징웨이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날이었기에 거의 모든 신문은 이에 대한 소식을 담기 바뻤고, 이로인해 이날 왕징웨이의 행적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일본과 조선의 신문뿐만 아니라 심지어 난징정부에서 만들었던 신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린바이셩을 대리로 육군 제1병원으로 보내, 부상병들을 격려했다. 이후 군의관학교도 방문하여, 군의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오전중 (시간알수없음), 왕징웨이는 추민이와 함께 시나가와의 카미오사키에 있는 이네나가 유키치(岩永裕吉) 전 동맹통신사장의 사택을 방문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8시,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고노에 총리와 왕징웨이가 이번 방일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8시 정각부터 8시 15분까지, 고노에 총리가 먼저 이야기를한뒤, 이를 중국말로 번역하고, 8시 30분부터 저우롱샹(周隆庠)의 지원을 받아 왕징웨이가 15분동안 방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1941년 6월 23일 (月)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카와다 대장대신의 관저에서 카와다 대장대신과 회담을 가졌다. 이행사는 주로 일본측의 재계인사들이 참가했었다. 일본은행, 조선은행, 대만은행 총재등이 자리에 참가했었다. 왕징웨이는 감사의 인사를 올린뒤 카와다 대장대신도 이에 답으로 인사를 올렸다. 이후 회담이 진행되었고 회담은 오후 1시 30분까지 진행되었다. 1시 30분 모임은 끝났지만, 왕징웨이와 카와다는 남아서 조금더 이야기를 진행했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는 고노에 수상관저에서 '고노에-왕징웨이 공동선언' 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노에총리대신-왕징웨이행정원장 공동성명 (近衛總理大臣-汪行政院長 共同聲明) 나와 왕징웨이씨는 지금의 지나사변을 속히 처리하고, 이것을 계기로하여 일화(日華)양국의 영원한 관계를 확립하고, 공존공영(共存共榮), 동아부흥(東亞復興) 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매진하고, 이전에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를 내용으로하는 동아신질서건설에 관한 각각의 선언(고노에성명을 의미) 을 한바가 있었는데 이는 지난해 11월 30일 성립된 일화기본조약, 일만화공동선언이 같은 취지속에서 만들어져 그 뜻이 계속되었다. 무릇 동아신질서 건설의 의미는, 동아 고유의 도의적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동아에서 침략주의, 공산주의의 독을 제거하고 상호제휴, 공존공영의 나라를 건설하는데에있다. 중국 민중들 중에는 중국과 일본의 합작에 의한 동아의 번영을 희망하면서도 과연 이 희망이 실현될수 있을지에 대해 아직 자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연히 이를 머뭇머리며 그저 관망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않다. 동아부흥의 위대한 사업은 지금의 단계에서도 될수 있는한 그 뜻을 최대한 뚜렷하게 나타내어 많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전면화평의 실현에 매진함으로서 비로소 이를 달성할 수 있는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회담한 결과, 일화 양국정부는 위의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정치상, 경제상, 군사상, 문화상의 일화제휴협력의 구체적 실현을 제공하고, 민중들로 하여금 일화합작, 동아부흥이 일본과 중국 양국민 공동의 사명임을 알리는데에 힘쓰고, 일본제국 정부는 이에 대하여 최대의 협조를 하여 국민정부가 속히 독립자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동아신질서의 책임을 분담시키려 노력한다. 쇼와 16(1941)년 6월 23일 近 衛 文 麿 汪 兆 銘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저우포하이 성명은 중국어로는 저우포하이가, 일본어로는 정보국총재였던 이토 노부후미(伊藤述史)가 낭독하였다. 오후 7시, 성명을 발표한 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제국호텔의 환영회에 참가하였다. 대정익찬회 측이 주최한 이행사에는 왕징웨이 인사들, 대정익찬회 인사들, 민간인사 일부가 참여하여 약 70명 가량이 참가하였다. 고노에 총리는 참가하지 못하고 대신 축하문을 보내어 자리에 있던 대정익찬회 부총재가 이를 대신 읽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모임은 8시에 끝이 났다. 1941년 6월 24일 (火)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방일과정에서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고노에 총리를 비롯한 주요인사들을 중화민국대사관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약 50명가량이 참가한 이 오찬은 1시까지 진행되었다. 오후 3시, 왕징웨이는 궁성으로 들어가 남유간(南溜間)에서 마츠다이라 궁내부 무부장관을 만나 내일 도쿄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했다. 왕징웨이는 일본 황실이 방일과정에서 보여준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는 귀족원-추밀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다과회에 참가하였다. 행사는 국회의사당에서 마츠다이라 요리나가 (松平頼寿) 귀족원 의장을 중심으로 ,도조 육군대신, 오이카와 해군대신, 오가와 고다로(小川 郷太郎) 철도대신이 내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약 600명의 귀족원-추밀원 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마츠다이라 귀족원 의장이 감사인사를 건냈고 왕징웨이도 답문을 읽어 보답했다. 4시반까지 다과회는 진행되었다가, 4시반부터 추밀원 의원들과 따로 이어서 다과회를 계속하였다. 라디오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고노에와 왕징웨이의 모습 - 경성일보 1941년 6월 25일자 오후 8시 10분, 모임을 끝낸 왕징웨이와 고노에총리는 JOAK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송은 8시 40분까지 진행되었다. 일본국가와 중화민국의 연주가 있은 후, 고노에가 먼저 "왕주석각하를 환영하며" 라는 제목의 방송을 하였고, 이후 왕징웨이가 "우방일본을 방문하며" 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다. 1941년 6월 25일 (水) - 귀국일정 오전 8시 40분, 왕징웨이는 방일일정을 끝내고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나와 도쿄역으로 향했다. 이때 차량은 외무성에서 제공되었다. 도쿄역으로 가는길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길가에서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며 왕징웨이를 맞이했다. 왕징웨이의 난징행에 도쿄역에 마중을 나온 고노에와 일본주요인사들. 180cm가 넘는 고노에의 키는 분명 당시기준으로도 키가 큰 편이었던 왕징웨이보다 돋보이게 한다. 오전 9시, 왕징웨이는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쿄역에는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크게 게양되어있었다. 도쿄역의 8번 플랫폼에는 고노에 총리와 도조, 요우카이, 마츠다이라를 비롯한 방일과정에서 함께했던 주요인사들이 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쓰오카 외무대신의 안내를 받아 플랫폼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마중을 나온 인사들 한사람 한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마쓰오카와 고노에와 악수를 하였다. 승차시간이 되자 업무처리를 위해 일본에 남게된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일부 관원들을 제외하고, 왕징웨이와 일행은 특급열차 "츠바메 (燕,제비)" 호에 올랐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맨 끝칸의 전망차 (展望車) 에 탑승하였다 왕징웨이와 일행이 탑승했던 츠바메(燕) 의 맨마지막칸 관람차의 모습. (1936년 촬영.) 오후 5시, 왕징웨이가 탄 특급 '츠바메'호가 오사카역에 도착했다. 오사카역에는 이미 고베총영사, 오사카 시장, 오사카부 지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마중을나와 왕징웨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도착하자 이들은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내었고 귀빈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오사카역 또한 도쿄와 마찬가지로 대형의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어있었고, 오사카부에서 준비한 차량 20대에 나누어 탑승하였다. 왕징웨이는 차에 걸려있는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보고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에 고베에서, 도쿄에서처럼 수많은 인파들이 왕징웨이의 오사카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오사카내의 중국학교의 학생들은 "환영왕주석" 이라는 팻말을 걸고 왕징웨이를 환영했고, 이밖에도 오사카 내의 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이 깃발을 흔들며 약 3만명가량의 인파가 왕징웨이를 환영하고 있었다. 오후 5시 30분, 왕징웨이는 일본에 도착했을때 묵었던 숙소이자 이번에도 숙소로 쓰이게 된 고시엔 호텔에 도착하였다. 왕징웨이는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왕징웨이는 오사카와 고베의 신문기자단과 함께 가벼운 회견을 진행하였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는 고시엔호텔을 나와 차량을 타고 오사카의 '신오사카호텔'에 방문했다. 왕징웨이는 신 오사카호텔에서 오사카부 - 오사카시에서 공동으로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가했다. 400명의 여러 분야의 여러 인사들이 자리에 참가했지만, 이자리에는 특히 우리에게는 '영친왕' 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대한제국의 최후의 황태자 이은이 함께하였다. 환영회에서는 오사카부 지사였던 미나베 쵸우시 (三辺長治)가 환영사를 낭독했고, 이에 왕징웨이도 답사를 낭독하였다. 이후 만찬을 함께한 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별실에서 관원들과 자신만의 자리를 가진뒤 9시 45분, 숙소인 고시엔 호텔로 돌아갔다. 오후 10시이후 (왕징웨이가 숙소로 돌아온이후로, 시간은 표기되어있지않음) , 왕징웨이는 고시엔 호텔의 1층 로비에서 각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저우롱샹의 통역을 받으며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린바이셩은 동맹통신 본사로 전신을 통해 담화문을 전달하였고, 이 담화문은 그다음날 발표되었다. 1941년 6월 26일 (木) - 날씨 비 고베마루에서 깃발을 흔들며 마중을 나와준 인파에 감사인사를 보내는 왕징웨이. 오전 11시, 왕징웨이는 효고 현에서 준비해준 차량에 나누어 탑승해 고베항으로 향했다. 이날 아침에 비가왔음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에 깃발을 흔들고 환영하였다고 한다. 오전 11시 15분, 왕징웨이는 고베항에서 고베마루(神戸丸) 에 탑승하였다. 이때 고베시장, 효고현지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와서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1등실에 탑승하고 데크에서 마중나와준 인파들에게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일장기를 양손에 들고 흔들며 감사인사를 보냈다. 동시에 고베시 밴드가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파는 비속에서도 "왕주석만세" 를 외쳤고 중화민국 국가가 연주되고 인파들이 환호를 보내는 가운데, 고베마루는 출발, 난징을 향해 나아갔다. 왕징웨이가 난징으로 돌아가는 길에 탔던 고베마루 (神戸丸), 1940년 만들어진 이 여객선은 1942년 11월 사고로 침몰한다. 1941년 6월 28일 (土) 오후 4시, 왕징웨이의 고베마루가 상하이에 도착했다. 오후 5시 30분, 왕징웨이는 앞에서 언급한 해겸호에 처음탑승하여 상하이에서 난징을 향해 날아갔다. 왕징웨이의 해겸호는 한시간후 난징비행장에 착륙했다. 착륙과 동시에 중화민국 국가가 연주되었고 정부인사들로부터 환영인사를 받고 공관으로 돌아갔다. 공관으로 가는길에 난징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돌아온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왕징웨이의 상징적인 첫 방일을 기념하여 일본측에서도, 왕징웨이정권측에서도 (중화전영)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사진첩도 발행되었다. (이 덕에 본 포스트에 풍부한 사진을 실을 수 있었다.) [출처] 매일신보 1941년 6월 12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경성일보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조선신문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search_keyword=%E7%A5%9E%E6%88%B8 중화일보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https://archive.org/search?query=subject%3A%22%E4%B8%AD%E8%8F%AF%E6%97%A5%E5%A0%B1%22 방일사진첩 ① : https://kknews.cc/history/lnayrp9.html 방일사진첩 ② : https://read01.com/7xe4Na.html 푸저우호 관련자료 / 중화항공 관련자료 : http://cwlam2000.epizy.com/new_page_2.htm?i=2 구 궁성 사진자료 :https://tanken.com/meijikyuden.html 고베마루, 츠바메호 , 왕징웨이 공관 사진자료 : 위키피디아 각 문서 방일일정지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5/East_Asia_area_blank_CJK.svg/1280px-East_Asia_area_blank_CJK.svg.png 야와타마루 사진 : http://www.mdc.idv.tw/pwm/shippicout/yawata.jpg 고시엔 호텔 사진 : https://www.u-presscenter.jp/assets_c/2022/09/ce3ab1889fffe4727c263d6d8baf8608-thumb-1258x660-57471.png 후이산 부두사진 : https://live.staticflickr.com/7397/9535550830_373e0e0f93_b.jpg G3M 관련 사진 : https://1.bp.blogspot.com/-1noL2r6AmAo/YLUaKDlVz1I/AAAAAAAAEgM/HEpF17UqQrMnsMCgQp2e5dcpQ8GoFBOnwCLcBGAsYHQ/s1424/Mitsubishi%2BG3M%2B-%2BJAP3%2BCHC%2BINO.png https://www.aviastar.org/pictures/japan/yokosuka_l3y.jpg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⑪ 전면 화평에 회의를 가지지 말라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 화평에 회의를 가지지 말라 (全面和平を懷疑する勿れ) *일화조약(1940년 11월 30일에 체결된 일화기본조약(日華基本条約)을 의미하는 것) 체결회의는 쇼와15 (1940)년 7월 5일부터 국민정부의 난징에서 아베(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베는 당시 왕징웨이의 난징정부에 파견된 일본 특파 대사였다.)와 왕 주석(원문에는 ‘임시 전권위임대표’ 라는 말이 추가로 서술되어있다. 왕징웨이가 주석직에 올랐지만 초기 충칭정부의 린썬을 포섭하기 위해 임시직을 표방했음을 반영한 것이다.) 사이에 개시되었다. 이날 왕 선생은 일화의 교섭은 전면 화평의 표본이라고 그 특질을 강조하여 말했다. 이번 중일조약 (일화기본조약을 왕징웨이측에서는 ‘중일기본조약’ 이라 표기했었다.)  체결회의에서 중일 양국은 과거의 시기를 일소하고 현재 및 장래에 있어서의 친선관계를 확립하고, 정치상으로는 상호독립과 자유를 존중하며, 경제상으로는 호혜를 기조로 제휴를 실천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력하여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고,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침투군을 격탕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백년넘게 지속된 옛 경제적 제국주의의 악을 숙청해야함을 서로 인식했다. 쌍방 모두가 이러한 공동의 목적이 있기에 교섭은 항상 성심성의껏 이루어졌고, 대세를 생각하여 교섭을 진행한 결과 본 조약을 통해 중일 신관계에 있어서 영구적인 초석을 마련하고 동시에 중일 신관계의 표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 중일조약 체결회의는 전면적인 정전 후에 교섭이 개시된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아직 철저한 항전 을 주장하고 있기에 전국 내에서 아직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교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번 중일교섭의 하나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평의 길이 열린 지금, 항전은 즉시 정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목숨을 걸고 노력해 화평의 초석이 될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통해 전면 화평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여 그들의 의심을 해소시킴으로서 전면적 화평을 촉구하려 하는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전면 화평을 위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초석도 마련되고 본보기도 마련되었으니 우리는 이로써 일치 협력에 더욱 노력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⑩ 자신을 벌하는 정신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자신을 벌하는 정신 (己を罪するの精神) *국민정부 개편와 환도경축식을 맞이하여, 국민정부 주석대리인 왕 선생은 쇼와15(1940)년 4월 26일, 이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 내용은 중국 전역을 향해 방송 되었다. 이하는 전문으로, 왕 선생의 논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논문의 전문에는 ‘왕징웨이주의(왕징웨이이즘)’라고도 할 수 있을 왕 선생의 높은 기품이 나와있다. 어떻게 해야 화평방공건국의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를 한 구절로 요약하면, “스스로를 벌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화평운동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열렬하게 요구하는 것은 주권의 회수, 국가의 독립과 자유의 완성이다. 이는 진실로 필요한 것이며 이는 이번 화평운동의 진실한 의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요구는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이를 한 구절로 요약하면, “스스로를 벌하는 정신”이 있으면 이를 달성할 수 있다. 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벌하는 정신과 오만함은 같지 않고, 비굴함과도 물론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만함과는 같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최근 충칭방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있다. “ 이번 전쟁에서 일본은 침략자이고, 중국은 피침략자다. 그렇기에 고로 일본이 철병하면 일체의 전쟁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철두철미 오만한 정신을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중국측은 완전히 책임이 없는가? “중국은 피침략자” 인 것일까, 중국은 무엇 때문에 침략당하게 된 것인가. 이는 중국이 장기간에 걸쳐 퇴세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중국은 무엇 때문에 퇴세를 쌓아왔는가. 이는 중국 내에 군벌이 횡행하고 공비가 창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무엇 때문에 군벌이 횡행하고 공비가 창궐하게 되었는가. 중국의 정치가 공명하지 않고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인데, 중국은 과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은 오만 때문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금 만약 오만의 정신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아마도 나라는 망하고 절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비굴함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중국은 전쟁에서 지고 있고, 갑자기 항전을 한다고 할지라도 도저히 최후의 승리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부득이 화평을 추구하여 국가민족의 생명을 연장해야한다.” 라고. 이는 비굴한 정신이다. 이런 종류의 비굴한 정신은 나약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이러한 나약하고 일시적인 비굴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절때 화평반공건국의 책임을 질수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벌하는 정신이라는 어떤 것인가. 나는 다음 두가지 점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깊은 반성심이 있어야한다. 우리가 만약 손 선생의 대아시아주의를 세심하게 연구한다면, 중일 양국은 서로를 친구로 삼아야하지, 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변이후 일본의 동아신질서 건설 주장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일본정부가 선포한 국책 및 일본 전국의 여론을 하나하나 검토해본다면, 일본이 중일 양국의 이전의 분규를 배제하고 새롭게 장래의 친선관계를 건설하여 공존공영, 동아부흥의 대결심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3원칙을 세심하게 연구한다면, 이들의 원칙에 입각하여 합리적 방안을 정하고 중일 쌍방에 유리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종류의 연구를 거쳐 그 뜻을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이전에는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화를 일으켜 백성들을 도탄을 빠트리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고인들이 이야기하는 “이전에 어떤일이 일어났든 오늘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오늘부터의 일은 어떤일이 일어나도 중요한일이 된다" (요범사훈의 입명지학에 등장하는 문구. 원문은 “從前種種,譬如昨日死;從後種種,譬如今日生”) 의 정신을 본받아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한다. 둘 째,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하나의 주장을 실행할때에도, 여러 가지 방해물과 어려움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특히 지금처럼 전면적화평에 도달하려 할때는 여러 가지 방해물과 여러 가지 어려움은 더더욱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깊은 반성을 거쳐 먼저 자신을 책망한 이후에야 남을 책망해야 한다. 가령 주권의 회수와 같이 일본은 여러번 성명을 통해, 중국이 동아건설의 책임을 분담할 수 있다면 일본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지원하여 독립자주국가의 필수적 조건을 완성하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권 회수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중국은 단순히 일본에 반환을 원하는데에 그쳐선 안되고, 중국은 어떻게 하면 일본이 부담없이 반환할 수 있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일본이 즐거운 마음으로 반환할 수 있게 할 건지를 알아야 한다. 중국의 각 개인이 전폭적인 정신을 발휘해 매순간에 중일 양국의 관계개선, 동아부흥을 생각하여 매순간 일종의 신정신을 나타낼 수 있다면, 이 신정신은 중일 양국으로 하여금 지극히 빠르게, 그리고 지극히 견고하게 공존공영의 길을 걷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은 안심하고 기꺼히 주권을 반환을 할 것이다. 이것이 주권 회수의 제1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중국은 반드시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을 꾸짖기를 무겁고 빈틈없이 하고” 그리고 또 말하기를 “무겁고 빈틈없이 꾸짖을 때 이를 게흘리 하지말라” 라고 했다. 이는 도리 있는 명언이며 우리는 이를 간절히 실천해야 한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우리가 전국 민중의 국민정부 환도를 경축하고 화평을 옹호하고 있는 이날에 “스스로를 벌한다”는 슬로건을 제출한데에는 자신을 따금하게 나무라고 서로를 따끔하게 나무라기 위함이다. 예전에는 양국의 전쟁에서 패전국이 배상금과 영토할양의 의무를 지고, 이는 수두상기(垂頭喪氣)로 이어지며 생활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혹은 부심절치(腐心切齒) 하여 보복을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부담하려는 것은 이러한 의무가 아니라, 다른 의무다. 이 의무는 등한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의무는 곧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동아의 부흥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듣곤 한다. “중일협력”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에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초조할 뿐이다. 우리의 정치력, 문화력, 군사력은 일본과 협력할 만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부끄러움도 쓸모없는 것이고, 초조함도 쓸모없다. 우리는 오직 스스로를 편달하여 노력을 배로 하고, 덧없는 진보를 추구하며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이 동아부흥의 최선의 동료이자 부족할 수 없는 동료임을 일깨워 줘야 한다. 이렇게 하면 중일 양국은 서로 생명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공존공영의 기초는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러면 3년간 양국이 전쟁으로 입은 희생에 대해서도 막대한 댓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는 화평반공건국에 종사하는 각 동지들이 시시각각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충칭 방면에서 화평운동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그 앞잡이를 제외하고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화평에 반대하는 이유는 화평의 가능성에 회의를 가지고 중일 양국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같이 죽자”라는 것이 그들의 일체 정치 군사적 전략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만약 중국이 공존할 수 있다면 “같이 죽는”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38년 1월 16일, 일본은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성명했다(1차 고노에성명). 같은해 11월 3일, 일본은 진정으로 희망하는 바는 중국의 멸망이 아니라, 중국의 부흥에 있으며, 일본과 함께 동아건설의 책임을 분담하는 것에 있다고 성명하였다.(2차 고노에성명) 만약 국민정부가 항일용공정책을 포기하고 인사를 경질한다면 일본은 재건을 막지 않을 것이라도고 성명을 하였다. 지금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여 선언을 발표하고 정책을 천명한 후, 일본정부의 사절과 국민정부의 사절들은 즉시 척척 이를 위해 진행해 오고 있다. 이는 화평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반대되며, 화평의 첫걸음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사실로서 표현한 것이다. 들어라, 다시는 화평을 방해하려 하지 마라. 전면적인화평을 그대들의 반대와 회의에 멈추게 하려 하지 마라. 화평의 실현은 나뿐만 아니라 전국민중의 노력에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노력한다면 화평의 방안은 더 좋아질 것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화평의 방안은 빈말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국민정부의 환도를 축하하고 화평을 옹호하는 반면, 특히 그대들을 생각하여, 그대들과 공동노력하여 화평반공건국의 광명있는 대도를 향해 용왕매진하려는 것이다.

  • 대동아공동선언 (大東亞共同宣言, 1943.11.6)

    대동아회의의 둘째날, 대동아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도조 히데키 (일본뉴스 제176호) 대동아회의의 둘째날인 1943년 11월 6일, 회의 참가국들의 논의끝에 대동아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일본이 주도로 작성한 원안에 태국의 완 와이타야콘 대표는 수정안을 제안했으나, 이는 받아드려지지 않고, 원안에서 일부분만 수정한채 발표가 되었다. 이 대동아공동선언은 참가국의 특정상 일본어 (일본), 중국어 (만주국, 왕징웨이정권), 영어(필리핀 제2공화국, 버마국),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쇼와 18(1943)년 11월 5일 및 6일 양일 도쿄에서 대동아회의가 개최되었고 회의의 참석각국대표는 다음과 같다. 昭和十八年十一月五日及六日ノ兩日東京ニ於テ大東亞會議ヲ開催セリ同會議ニ出席ノ各國代表者左ノ通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각하 중화민국 국민정부 행정원원장 왕징웨이 각하 타이 왕국 내각총리대신 완 와이타야콘 각하 만주국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 각하 필리핀 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 각하 버마국 내각총리대신 바모 각하 본 회의에서는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침에 대해 각국대표들은 심의깊은 협의를 이루어 전원일치로 다음과 같은 선언을 채택하였다. 同會議ニ於テハ大東亞戰爭完遂ト大東亞建設ノ方針トニ關シ各國代表ハ隔意ナキ協議ヲ遂ケタル處全會一致ヲ以テ左ノ共同宣言ヲ採擇セリ 본래 세계 각국에게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고 서로 의지하고 돕고 모든 국가가 함께 번성하는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은 세계평화 확립의 근본이다. 그러나 미영은 자국의 번영을 위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억압하고, 특히 대동아에 대해서는 질리지 않는 침략과 착취를 하고, 대동아를 예속화하려는 생각을 버리지않고, 마침내 대동아의 안정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버리려고 했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抑々世界各國ガ各其ノ所ヲ得相倚リ相扶ケテ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世界平和確立ノ根本要義ナリ 然ルニ米英ハ自國ノ繁榮ノ爲ニハ他國家他民族ヲ抑壓シ特ニ大東亞ニ對シテハ飽クナキ侵略搾取ヲ行ヒ大東亞隷屬化ノ野望ヲ逞シウシ遂ニハ大東亞ノ安定ヲ根柢ヨリ覆サントセリ大東亞戰爭ノ原因ココニ存ス 대동아각국은 대동아를 미국과 영국의 족쇄에서 해방시키고 대동아전쟁을 완수하며 자존자위를 완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한다. 세계 평화 구축을 위한 대동아 건설의 기본 지침은 다음과 같다. 大東亞各國ハ相提携シテ大東亞戰爭ヲ完遂シ大東亞ヲ米英ノ桎梏ヨリ解放シテ其ノ自存自衞ヲ全ウシ左ノ綱領ニ基キ大東亞ヲ建設シ以テ世界平和ノ確立ニ寄與センコトヲ期ス 1. 대동아 각국은 협동하여 대동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도의에 근거한 공존공영의 질서를 건설한다. (一、大東亞各國ハ協同シテ大東亞ノ安定ヲ確保シ道義ニ基ク共存共榮ノ秩序ヲ建設ス) 1. 대동아 국가들은 서로의 자주와 독립을 존중하고 서로 조화롭게 협력하며 대동아에 친밀감, 화합, 화합을 구축한다. (一、大東亞各國ハ相互ニ自主獨立ヲ尊重シ互助敦睦ノ實ヲ擧ゲ大東亞ノ親和ヲ確立ス) 1. 대동아 각국은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고, 각 민족의 창조성을 늘려 대동아 문화의 기치를 높힌다 (一、大東亞各國ハ相互ニ其ノ傳統ヲ尊重シ各民族ノ創造性ヲ伸暢シ大東亞ノ文化ヲ昂揚ス) 1. 대동아 국가들은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대동아의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긴밀히 협력한다. (一、大東亞各國ハ互惠ノ下緊密ニ提携シ其ノ經濟發展ヲ圖リ大東亞ノ繁榮ヲ增進ス) 1. 대동아 각국은 모든 나라와의 교류를 깊게 하고,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널리 문화를 교류하고, 널리 자원을 개방해 세계의 발전에 공헌한다. (一、大東亞各國ハ萬邦トノ交誼ヲ篤ウシ人種的差別ヲ撤廢シ普ク文化ヲ交流シ進ンデ資源ヲ開放シ以テ世界ノ進運ニ貢獻ス) 도조가 이를 직접읽었고 이는 녹음본으로도 남아있다. (여기를 클릭) 선언을 작성하는 가운데, 버마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마지막 항의 '인종차별' 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와 다르게 두번째 항의 '자주와 독립을 존중' 이라는 항목에 주목하였다. 본래 이 항은 두번째 항보다 밑에 적히게 될 예정이었으나, 왕징웨이가 이가 중요함을 두번이나 강조하면서 이 항이 두번째로 올라오게 되었다. [출처] 도조의 사진 (일본뉴스176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64_00000 표지 사진 : https://image.space.rakuten.co.jp/d/strg/ctrl/9/c508c68cee915cb077534e76c37ee54ea34482e5.63.2.9.2.jpeg 원문 (일어) : https://ja.wikisource.org/wiki/%E5%A4%A7%E6%9D%B1%E4%BA%9C%E5%85%B1%E5%90%8C%E5%AE%A3%E8%A8%80 원문 (일/중/불/영) : https://www.jacar.archives.go.jp/das/meta/B13090817500 (日 아시아문화자료센터)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⑨ 난징 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함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난징 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함 (南京還都に際し日本に謝す) *국민정부의 난징 환도를 기념하여 쇼와15(1940)년 3월 30일 밤, 일본과의 교환방송이 열리게되어, 왕 선생은 난징에서 일본의 동정과 원조에 대해 깊은 사의를 표했다. 오늘은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한 날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저는 삼가 국민정부를 대표하여 만강의 성의를 가지고 일본의 국민제군 여러분에게 한 마디를 하고 싶습니다. 중일 양국은 이제 과거의 분쟁을 일소하고 미래의 친선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일은 재작년 11월 21일 귀국의 내각총리대신인 고노에 공작이 이미 성명(1938년 11월 21일 체결된 일화협의기록 (정식명칭은 일화협의기록 및 동양해사항과 일화비밀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及同諒解事項竝日華祕密協議記錄)을 의미하는 것이다.)을 낸 것이고, 또한 금년 3월 13일에도 현 내각총리대신인 요나이 대장이 말씀한 것(1940년 3월 13일, 요나이 총리가 발표한 담화 정식명칭은 '지나신정부에 대한 제국정부의 중대성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주장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고, 또한 귀국의 여론도 하나가되어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위 동아신질서 건설의 지도정신은 동아의 여러민족으로 하여금 각각의 자유와 독립의 입장에 입각하여 인애평화의 합작을 위한 일을 하게 하는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귀국은 이번의 사변에 있어서도 의연하게 전승자임에도 사치를 부리지않고,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가 중일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이 되어야함을 논의할 수 있음과 동시에 중국에 대해 영토를 요구하지 않으며, 전쟁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중국의 주권을 존중할 뿐만이 아니라 자진하여 우리나라를 원조하여 독립국가에 필요한 치외법권의 철폐, 조계의 반환을 고려하는데에 인색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짐작하건데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갈망하고 있는 바는 우리나라가 신속하게 근대국가 건설을 완성시켜, 평화의 책임을 분담하는데 이르는 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야만 중일 양국은 비로서 공존공영할 수 있고, 동아의 화평과 질서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은 이러한 귀국 국민들의 훌륭한 주장을 들으며 중일약국이 동양의 도의적 정신에 기초하여 양국의 인종상, 지리상, 역사상, 문화상의 여러관계에 기초하여 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하여 나아가게 하는데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유지는 깊은 반성속에 얻은 지극히 굳은 결의로 종래의 용공항일 정책을 철저히 포기하고, 새롭게 화평반공건국 정책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게 하는데에 있습니다. 나는 국민당의 동지로서 국민정부의 관직에 봉사하고 있던 사람이었으나, 이러한 사변을 전후하여 충칭을 탈출하여 사변 이후 전국 각지에서 부단하게 성립된 재야 각 당파의 유능한 이들과 연락하고 협력하여 중앙정치회의를 조직하고 이 회의에서 국민정부를 난징으로 환도시켜 전국의 화평반공운동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진행 기간동안 귀국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열렬한 동정과 원조를 받아 마침내 오늘의 새로운 단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저는 삼가 중국의 앞길을 위해 지지를 보내주는 귀국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저와 국민정부의 동지들은 앞으로 더더욱 고군분투하여 화평건국운동을 하여 이를 전국에 퍼져나가게 할것이며, 저는 이 운동이 성공한 신새벽에는 중국의 국가민족은 해방되고, 중일 양국의 관계는 조정되어 공존공영하고, 동아의 화평과 질서는 영원히 그 견고한 기초를 뿌리내리게 될 것임을 확신하며,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중일 양국의 공동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기회를 통해 만강의 성의를 다하여 귀국 국민여러분의 건승을 축복하는 바입니다. 이 내용은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정권 수립일) 오후 7시 30분, 요나이 日수상과 왕징웨이의 교환방송의 왕징웨이 부분이다. 이 내용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신문들에도 소개되어있으나, 일부분만 소개되어 있고 전문은 공개되어있지 않다. (참고 : 여기를 클릭)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⑧ 화평인가 항전인가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화평인가 항전인가 (和平か 抗戰か)- 대 장제스 통전 (對蔣通電) *왕선생은 중앙정권의 수립을 앞두고 쇼와15(1940)년 1월 16일, 상하이에서 충칭의 장제스에게 거듭하여 전보를 보내어 자신의 성의를 피력하고, 정성을 다해 항전이라는 죄를 깨닫게 하여 전면화평으로의 길에 대해 설명하고 장제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작년 12월 29일, 일본의 고노에 성명에 기초해 중일관계를 조정하여, 동아의 영원한 화평을 확립한다는 취지의 나의 건의는 불행히도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연재 2편, '장제스 총재에게 고함'을 참고 [보기] ) . 그러나 나는 동지들과 함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의 사람(연재 4편의 쩡중밍을 의미 [보기]) 은 떠나갔지만 후자로서 그의 뜻을 이어 화평운동에 노력함과 동시에 일본 국민들에게 성의를 피력하여 화평의 방안을 논의하고, 일년 이래 심혈을 기울여 과거의 분규를 일소하고, 장래의 광명을 실현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속에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화평의 만족스러운 방안을 얻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은 나부터 알고 있는 바이지만, 다행히도 중일 쌍방 모두 동아의 앞날을 생각하고 서로 양해하고 서로 양보하여 화평방안의 기초는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므로 중국이 얻는 바는 망국의 조건이 아니며, 이 방안에 따라 노력하면 중국의 독립과 자유는 확보되고, 삼민주의의 건설도 완성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욱 성의를 가지고 심사숙고하여 선생(장제스를 의미)에게 한마디를 드리려 한다. 이제 국내정세 및 국제적 환경을 보았을 때 항전을 계속해도 도저히 최후의 승리를 얻을 희망이 없음은 선생도 이미 알고 있는 바 다른 군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또한 전국의 인민이 화평을 희망하고 있다는 점 또한 선생은 이미 알고 있으니 내가 더욱 수다스러운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화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일치의 태세로 시작해야 신속하고 두루 널리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철병문제에 대해 중국인민은 본래부터 일본군의 신속한 철군을 희망하고 있고, 일본도 이대로 영원히 병사들이 국외에서 노역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의 주장을 따라 만약 계속 항전을 주장한다면 철명 문제의 해결은 어디서부터 그 단서를 찾아야 하는가? 특히 경제건설 방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국민은 이미 궁핍하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미 탕진했다고 할 지라도 지금의 시기에 정전강화를 하게 된다면 국민들의 민력 회복은 더더욱 쉬워질 것이다. 만약 이대로 소모를 계속하게 된다면 민력은 완전히 소실되게 되고 국력은 쪼그라들어 경제건설과 같은 것 역시 손 쓸 수 없게 된다. 나는 구국에 대해서는 일찍히 결심을 하였다. 만약 선생이 시종일관 이러한 뜻을 거절할 생각이라면 나의 뜻을 다시한번 고려해보길 바란다. 선생이 만약 국민의 민생을 중요히 여겨 의연하게 뜻을 결정하여 일본과 정전, 강화하고 고노에 성명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의 구체적 실현을 요구한다면, 자오밍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동지들이 반드시 선생과 일심 협력하여 전국의 평화를 실현시키려 할 것이다. 이는 따지고보면 국가민족의 존망과 화복에 실로 연결되는 것이다. 선생은 지금 충칭에서 대권을 한몸에 가지고 있고, 선생의 대계는 한마디로 이를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 선생에게 책망하는 바가 무겁기에 선생에게 바라는 것도 두텁다. 길을 나아가는 것을 감히 피하지 말고 심복을 베풀어라. 이를 헤아릴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⑦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日本の朝野に望む) *중앙정권 수립의 길에 매진하기로 결의한 왕 선생은 쇼와15(1940)년 1월 1일, 신년의 소감으로서 일본의 국민들에게 솔찍한 한마디를 담은 짧은 글을 발표했다. 이 짧은 말 속에서 무한한 깊은 뜻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화평구국운동을 시작한 이래 두 번째 새해를 맞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중국과 일본의 공동생존, 공동발전이라는 큰 꿈을 안고 깊은 결심을 가지고 충칭을 떠나 열흘만에 (왕징웨이는 본래 12월 10일에 탈출을 목표로 했으나 이가 늦어져 12월 18일에 충칭을 탈출, 12월 20일에 하노이에 도착했다. 열흘은 이 시간을 의미하는 것. ) 온 하노이에서 맞이한 작년 새해를 떠올려보니 일찍이도 찾아온 올해를 생각해보면 지난 한해가 여간 분주하게 지나가 버린 아쉬움이 깊은 것이다. 고노에 성명의 고매한 정신에 대한 신뢰로 일어나게 된 자신은 그동안 경애하는 동지제군들과 함께 오로지 소기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길을, 모든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매진해 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동아신질서 건설의 중대한 서곡이라고 할만한 중국측의 구체적 환경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고노에 성명과 자신의 평화구국운동에 대해 완고한 지지를 보내주고 있는 일본의 국민들에게 아직 부응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도 유감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조금도 나의 앞길을 비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소신은 더욱 단단해지고 희망은 더욱 커지고 있다. 내가 적극적으로 화평구국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나의 많은 친구들은 이에 대해 찬성의, 혹은 반대의 여러 가지 충언을 해주었다. 나 자신도 그 실행방법에 대해서는 실제로 여러 고민을 하고 있었다. 동아의 안정과 화평, 나아가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중일 공동의 대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권의 밖에 있는 나는 화평구국을 외치면서 항일일색으로 칠해져 있는 현 정권의 변화를 목표로 해야할지, 신정부를 수립하더라도 먼저 지방정권으로 있다가 이를 점차 확대하여 중앙정권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또는 처음부터 중앙정권으로 삼아야할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 형태는 많았다. 그렇지만, 비교해 보면 결국 가장 솔직하고 대담한 모습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미래의 발전성이 풍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자신은 맨 마지막의 중앙정권 수립이라는 방안에 매진하기로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는 정말로 충분히 준비과정을 거치어 신정권탄생의 전야라고 말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나는 일본의 국민들에게 솔찍한 한마디를 하고 싶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임무를 분담하기를 바라는 일본이 다시한번, 고노에성명의 진실된 정신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를 공정하게 구체화시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멸망의 위기에 빠진 중국을 구하고 재건할수 있는 방법임을 확실히 인식하기를 바란다. 중국을 멸망으로부터 구하고 올바른 중국을 건설하는 것은 곧 동아신질서 건설의 첫걸음이며, 일본이 건전한 발전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을 인식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을 망각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충분한 자유를 주지않음으로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관계에 중국과 일본 양국이 놓이게 된다면, 이에는 슬프게도 중일항쟁의 씨앗이 새롭게 뿌려지게 되는것이며, 이렇게 뿌려진 씨앗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일본도, 중국도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해는 사실 청년 일본과 청년 중국이 영구적으로 따뜻한 악수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한 해이다. 중일양국의 장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전승국인 일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은 고노에 성명의 고매한 정신을 본받고 일본의 선견과 관용과 용기를 신뢰하기에 이 새로운 해에 큰 희망을 품고 중국과 일본의 공동생존, 공동발전이라는 위대한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⑥ 중국국민당전국대표대회의 역사적 의미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의 역사적의미 (中國國民黨全國代表大會の歷史的意義)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쇼와 14(1939)년 8월 상하이에서 열렸다. 왕선생은 같은해 12월 25일 상하이의 중앙육군군관훈련단에게 동 대회의 선언문을 설명하고,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동 대회 선언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했다. 동지 제군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 선언문의 내용이다. 중국국민당은 지금까지 총 7번의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해왔다. 제1회부터 제6회까지 오는 과정에서 한번의 임시대회가 있었다. 매번 대표대회를 할때마다 선언이 있었다. 나는 솔찍히 여러분에게 이에 대해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7번의 전국대표대회 중에서 내가 4번의 대회에 기초를 마련했기에 대회선언의 전후에 대해서는 내가 비율적으로도 확실히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초를 마련한 사람의 이야기가 반드시 긍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초는 혼자서 할 수 있다하더라도 결국 대화의 통과를 거쳤기 때문에 대회의 공공적 의사인 것이지 기초자 개인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초자의 의지를 해석할 수 있다변 이는 반드시 여러분 동지들에게 참고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먼저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민국 13(1924)년 1월 광저우에서 개최되었다. 이때는 손 총리가 친히 지도하여 대회 이전에 4명의 기초자를 지정했다. 한 사람은 후한민(胡漢民) 선생, 한명은 랴오중카이(廖仲凱) 선생, 한명은 다이지타오(戴季陶) 선생, 그리고 한사람은 나로, 4사람이 논의한 후 내가 종합하여 기초하였다. 그 때의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는 먼저 당시의 환경을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선, 국민혁명의 목적은 시종일관 하나로서 변경할 수 없는 것임을 명료하게 알아야 하지만, 때때로 바뀌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때때로 다른 일시적 전진방침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당시의 환경을 명료하게 알아야 그 때의 방침이 어떻게 정해졌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민국13(1924)년 1월, 당시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그때는 국제적으로 워싱턴회의가 민국10(1921)년 폐막되었기에 사람들은 세계가 잠정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 때문에 중국의 북양군벌들은 이 국제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수명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시기 혁명은 어떤가 하면, 혁명의 뿌리를 둔 땅은 광저우 한곳 뿐이었고, 광저우 밖 동강(東江)은 천중밍(陳炯明)에게 속해있었고, 남쪽은 천중밍의 부하 덩번인(鄧本殷)에게 속해있었다. 게다가 북쪽으로는 북양군벌이 장시성에서 계속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의 근거지는 오직 광저우라는 한지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때 무게를 두었던 것은 곧 혁명 동지의 단결, 혁명 정서의 고양이었다. 이러한 국내 환경을 타파하기 위해 전폭적인 정신을 이용해 제국주의의 미몽과 북양군벌의 악세력을 몰아내고 혁명의 세력을 신장하고자 했던것이다. 광저우라는 혁명의 기지에서 혁명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것이다. 이 1차 전국대표대회의 방침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1차대회의) 선언은 즉, 이 방침에 기초하여 당대의 환경을 밝히고, 당시의 태도를 설명하여 우리들이 이 작은 혁명의 근거지인 광저우서 전국의 반혁명을 타파할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곧 제1차 전국대표대회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의의였다. 제2차 전국대표대회는 어떤가 이야기하면, 제2차 전국대표대회는 민국15(1926)년 1월에 열렸고, 당시 회의 기초자로 내가 지정되었다. 그때 당시의 환경은 어떠했냐면 민국14(1925)년 3월 12일, 손 총리가 서거하셨고, 광저우와 광저우 부근에서는 계속하여 반혁명 토벌과 숙청이 이루어졌다. 민국14년 겨울에는 광동이 평정되었고 동시에 광시의 리쭝런(李宗仁), 바이충시, 황샤오슝(黄紹雄) 이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고, 후난의 탕성즈도 뜻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때의 환경은 1924년 1차 전국대표대회를 할 때보다 조금 더 좋았던 것이다. 2년의 숙성을 거치면서 혁명의 목적은 모두에게 알려져 혁명의 선전도 비교적으로 확대되었고, 동시에 혁명의 뿌리는 드디어 광저우라는 작은 지역에서 광둥, 광시라는 양대성으로 확대 된 것이다. 당시의 유일한 목적을 말하자면 이는 바로 혁명세력을 신장하여 북벌을 준비하는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국 15년 1월의 환경이었다. 이 환경에 기초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을 결정하여 우리들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의 일의 기초를 다지고, 이러한 목적에서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은 전부 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계승한 것이기에 조금도 고칠 점이 없었다. 이는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은 손 총리가 스스로 우리를 지도한 결과였기 때문이었고, 총리가 서거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았기에 소정의 방침을 고치기보다는, 이전의 방침에 따라 그대로 전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당시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한번 보라! 여러분은 그것이 제1차 대표대회선언을 잇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혁명세력의 기초가 단단해지고, 점차 전국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제2차 대표대회 선언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어떠한 때에 열리게 되었는가? 민국18(1929)년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은 자극히 위험했던 것이었다. 왜인가? 1924년에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고, 그 2년후인 1926년에 제2차 대표대회가 열렸다. 그렇다면 제 3차 대표대회는 1928년에 열려야 했거늘 어째서 1년 늦은 1929년에 열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이 이전에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당이 난징과 우한으로 분열함으로서 결국에는 당의 분열이 초래되고 만 것이다.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난징에서 열렸다. 열리기 전에 당내의 분쟁이 숙성되고 결국에는 이가 터지면서 광시를 쳐야한다, 후베이를 쳐야한다, 북방의 각성을 쳐야한다면서 각 방면에서 내란이 마침내 발생한 형국이었다.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은 누가 기초를 만들었는가? 나는 알수 없다. 이는 내가 난징의 불법적 소집에 의한 제3차 대표대회에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법률상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내가 이를 반대했던 것은 장제스가 개인독재의 관념을 가지고 당내의 분쟁을 발생시키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러분이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완전히 당내분열의 한 현상이다. 이점에 대해 나는 당시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많은 비평을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은 당내분쟁을 위해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는 언제 열리게 되었냐 하면 민국20(1931)년 (원문에서는 민국12(1923)년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아마도 十二와 二十을 헷갈려 잘못적은 것이라 추측된다. ) 12월 말(이는 통합된 제4차전국대표대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는 장제스 세력, 쑨커 세력, 왕징웨이세력이 이미 각자 이전에 대회를 시작한 바가 있었으나 이후 통합하여 하나의 제4차 전국대표대회를 열게되었다.) 에 열렸다. 역시 난징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때는 9.18 사변(만주사변을 의미) 이후에 전국의 정성의 단결, 전당 동지의 합작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4차 전국대표대회는 곧 1929년 이후의 당내분쟁 국면을 끝내고 모두가 정성으로 단결하여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함에 있었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은 누가 초안을 작성했는지는 모른다. 이는 내가 당시 상하이에 있었고 난징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제4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은 당시의 환경에 적합하게 만들어 진 것임을 알고 있다. 당시 나라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기에 전국은 정성단결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당 전체도 마찬가지로 정성단결을 강구해야 했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은 이러한 목적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하면, 모두가 은연자중하며 국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정신은 제4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제4차 전국대표대회 이후에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제5차 전국대표대회는 민국24(1935)년 12월에 열렸다. 제 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체될 당시 나는 부상으로 (나는 11월 1일 부상을 입었었다.)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제5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기초한 사람이 다이지타오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선언에서 중요한 것은 화평이 완전히 희망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결코 화평을 포기하지 않으며, 희생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결코 경쾌하게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는 구절이었다. 이러한 뜻은 어디서 나오게 된 것인가, 우리는 당시의 환경을 명료하게 보아야 한다. 1931년 9월 18일 국난이 발생한 이래, 5년이 지났지만 모두는 방법을 생각하여 인욕자중(忍辱自重)의 정신에 입각해 국가의 생명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는 지둥방공자치정부가 독립하여 전국이 매우 위급한 시기에 처해있을 때였다. 제 5차 전국대표대회는 역시 제4차 전국대표대회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일본과는 결렬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째서 인가, 이는 아직까지 국가가 아직 견고하지 않고 국력이 아직 충실하지 않아 과감하게 국가를 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앞의 몇구절의 말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곧 제5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의 가장 중요한 뜻이면서, 당시의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1935년 12월에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고, 1936년 1월에는 이 방침에 따라서 일이 진행되게 되었다. 1936년에 열린 많은 중앙집행위원 전체회의를 보면 이를 바로 알 수 있다. 민국 26(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변이 발생한 후 민국 27(1938)년 4월 우한에서 임시 전국대표대회를 열게 되었는데, 이때 임시라는 이름을 붙힌 이유는, 이 대회가 열려서는 안되는 대회라는 것이 아니라, 1935년 말에 대회를 열었으니 1937년 연말, 1938년 연초에 대회를 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의 전쟁을 위한 시간 사정상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열게 된 것이다. 이 임시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에 내가 기초했던 대회선언은 어떠했는가 하면, 이는 즉 1935년, 제5차 전국대표대회의 방침에 따라서 우리가 어째서 항전하는가에 대한 그 원인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평화에 대한 희망과 화평의 조건에 대해 설명하고, 만약 화평에 희망이 있음을 알게된다면 우리는 평화를 회복하지만, 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 전국대표대회 선언의 제1단부더 제 3단까지 확실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정, 외교, 교육의 각종 문제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던 것이다. 그때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1937년 12월 난징이 함락되고 1938년 4월 쉬저우는 급박한 국면에 이르렀기에 모두는 위급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알고 우한을 사수하기로 각오하였으나, 국력만 각종 관계에서 작년 루거우차오에서의 전쟁은 참으로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이로서 이 항전의 목적과 화평의 조건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견지하여 양보를 할 수 있는 것은 양보를 하되,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한 것이다. 모두가 임시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을 보면 당시의 선언은 당시의 환경에 적응시켜 방침을 정했음을 분명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어떠한가? 이는 올해 (1939년) 8월 상하이에서 열렸다. 어째서 상하이에서 열리게 되었는가? 당장(黨章) (중국국민당당장(中國國民黨黨章)을 의미한다. )에서는 수도의 소재지에서 대회를 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평시에는 그렇지만, 비상시기에는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임시전국대표대회 또한 우한에서 열렸지만, 당시 수도는 충칭에 있었고, 이는 1937년 12월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후였다. 이는 천도가 아니며 지방을 바꾸어 공무를 이어나는 것일 뿐이며, 전쟁시의 국가수도는 어떤지방에 있는지는 일정하지 않다. 이는 평시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점은 법률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언의 내용이 어떤지 볼 필요가 있다. 내용은 임시대표대회를 계승하는 것으로, 즉 앞에서 말했듯이 평화조건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항전을 계속하지만, 만약 평화조건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작년 임시대회와 같은 선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선언문을 잘 살펴보라, 이 선언은 앞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지, 중간에 끊기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제2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이 1차 대표대회선언과 같았던 것과 같다. 형식까지도 같다. 첫째로 항전의 목적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화평조건의 도달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삼민주의와 내정, 외교, 교육을 열거한 것은 전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임시전국대표대회 때는 아직 화평을 위한 조건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항전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평화 조건에 도달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곧 대표대회의 선언이 둘 다 모순적이 아님을 이야기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연속적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어느쪽이 임시 전국대표대회에서 정해진 방침을 위반하고 있는 것인가?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임시 전국대표대회를 잇는 것으로, 여러분들이 이 두 개의 선언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본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총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중국국민당에는 7번의 전국대표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3차대회를 제외하면, 제1차, 제2차, 제4차, 제5차, 제6차는 모두 일관되게 하되, 모두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진행방침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방침은 국민혁명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기초하여 일치하게, 연결되게 시대의 수요와 환경의 수요에 맞게 정한 것이다. 그러니 동지들은 역대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따라서 일치된 노력으로 일관된 방침으로 용맹매진해라.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⑤ 충칭 탈출의 진상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구 데헷넷) 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충칭 탈출의 진상 (重慶脫出の眞相) *화평건설의 길을 따라 하노이에서 홍콩으로, 다시 상하이로 전진한 왕 선생은, 쇼와 14(1939)년 7월 9일 상하이에서 전 중국 민중을 향해 “우리들의 중일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과 전진목표” 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여, 충칭탈출의 진상을 밝히고 동지들과 화평전진의 결의를 표명했다. 그리고 또한 이 방송의 내용은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중화일보에 게재되었다. 중화일보 1939년 7월 10일자에 나온 왕징웨이의 방송내용을 다룬 글, 본래 이글은 《我對於中日關係之根本觀念及前進目標, 중일관계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관념과 전진 목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 충칭 탈출의 진상이라는 이글은 신문의 《我對於中日關係之根本觀念及前進目標》을 그대로 다루었다. 총리 손선생은 우리에게 “중국혁명의 성공은 일본의 양해에 기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말의 의의는 중대한 것이다. 일본은 동아의 일대 강국으로서 경제에, 군사에, 문화에 착착 진보를 이루어 최근 수십년의 상황은, 일본이 없으면 곧 동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은 매사에 뒤쳐져 있었지만, 동아의 큰 국토속에서 인구도 많고, 많은 역사를 가진 하나의 국가이다. 만약 중국이 강성해지게 된다면, 일본은 반드시 중국이 강성해지는 것이 일본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일본에 유리할지 유해할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일본은 당연히 중국이 강성해지기를 희망하고 중국을 친구로 삼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일본에 해롭다면, 일본은 반드시 중국이 강성을 이루려는 것을 분쇄하고, 중국을 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지금, 일어서려는 중국이 강성한 일본을 적으로 삼는 것은 정말로 알로서 돌을 공격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패망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혁명의 성공이 일본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권모술책이 아니라 성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중국혁명을 일본에 유리하게 할수 있을까. 이는 중국과 일본의 외교방침을 일치시키고, 군사방침을 일치시키고, 나아가 평등호혜의 원칙에 기초하여 경제합작을 꾀한다면 중국의 강성은 곧 일본에 유리하고 무해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반대로 중국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국가와 이해를 함께하기 위해 결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주권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것은 제3국의 정당한 권익을 해치는 것인가라고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과 일본의 결합은 공동의 생존과 발전을 헤아리기 위한 것으로 결코 제3국의 정당한 권익을 배척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국 13(1924)년, 손 선생이 광둥에서 손으로 국민정부 건국대강을 작성한 당시,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방침에 따라 일을 진행했다. 민국 14(1925)년 손 선생이 서거하자, 나는 그 의지를 계승하여 국민정부를 주지하고 위의 방침을 지키며, 전전긍긍 하면서 감히 이를 변경하려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민국 17년(1928)년 에 이르러 사태는 변화했고, 지난 사건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원수의 끈은 처음부터 묶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이때 최대한 인내하여 최대한의 의지로 소통을 꾀하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악화되기보다 호전되게 되돌렸어야 했다. 불행히도 당시의 국민정부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중일관계의 악화의 일로를 나아가, 9.18사변 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당시의 국민정부의 이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명의 국민당원이며 동시에 한명의 국민정부와 관련이 있는 자이므로 이러한 착오에 마땅히 책임을 분담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당시 나는 한명의 망명자였으며, 또한 국민정부의 체포령에 따라 해외에서 유랑할 수 밖에 없던 자에 불과하였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932년 1월 28일 나는 난징으로 돌아와 행정원장이 되었고, 이후 다시 외교부장을 겸하기에 이르자 이름바‘일면저항 일면교섭’을 제창해서, 당시의 ‘직접교섭반대’여론을 바꾸고, 직접 내손으로 상하이 정전협정, 탕구정전협정을 각각 체결하였는데, 당시 나의 생각은 여전히 원수의 끈은 풀어야한다는 신념에 기초해 국부적 일시적 안정을 도모해 나아가 전국적 영구적 평화를 도모해야한다는데 있었다. 나의 주장은 4년동안 결국 실현시키지 못한채 끝났으나, 나는 비뚤어져 남을 탓하지 않으며, 단지 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의 뜻이 달라져버림을 탄식할 뿐이다. 다만 나는 시종일관 반대해온 일종의 논조가 있다. 이 논조란 당시 소위 주전파의 논조이다. 시도와 관계없이 이제야 일어나려는 중국이 강대국 일본을 적으로 삼는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과연 어떠하겠는가, 실로 국가와 민족으로을 가지고 어린애 장난을 하는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나는 장개석 선생이 처음에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민국 20년(1932년, 쇼와6년) 12월 장선생이 국민정부 주석직을 사퇴한 후 발표한 한편의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읽고, 나와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하여 성심성의껏 장 선생과 합작을 결의하였는데, 4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비로서 그 의견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민국 24년(1935년) 11월 1일 큰 시련의 후, 몸의 3개의 상처를 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밖에 없었고, 1936년은 1년간 멀리 타향에서 쉬었지만 시안사변이 발생하면서 급히 귀국하면서 사태는 더욱 큰 변화를 거듭하였다. 나는 당시 초공작전은 결코 중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면 공산당은 오직 코민테른이 있음을 알고 중국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코민테른의 비밀명령을 받아 계급전쟁의 간판을 내리고 ‘항일’이라는 간판을 새롭게 내걸고 중국의 민족의식을 이용해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도발하고 있음으로 결코 이러한 속임수에 걸려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당시 말과 주장의 방침이 대체로 이러한 점에 중점을 둔 것임을 독자들은 당시를 돌아보면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 발생후 나는 국민정부가 중일전쟁에 대해 처음부터 이를 저지할 방법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한순간도 전환의 길을 생각하지 않고, 또한 공산당의 음모에는 한시라도 이를 제압하고 폭로할 필요를 느끼지 않자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1938년 12월 18일 충칭을 떠나 29일에는 평화의 건의를 발표하게 이르게 된 것이다. 나의 평화 건의는 일본의 고노에성명에 찬동한 것이다. 어째서 찬동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전부터 일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신념하에 일본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고 원수를 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년반을 싸운 결과 일본이 보여주고자 하는 국력과 중국이 보여주고자 하는 민족의식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일본은 이미 중국에 대해 침략적 야심이 없음을 천명하고 손을 내밀어 공동의 목적 아래에서 친밀한 합작을 꾀할 것을 요구하는데 반해 중국은 왜 손을 뻗지 못하는가? 흡사 형제 둘이 한번 싸운 뒤 억울하게 울고나서 다시 화해하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마음이 울컥해지고 동시에 기쁜일인가. 만약에 장 선생이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이미 새로운 시기에 도달 할 수 있음을 알고 의연히 이 성명에 동참했다면 중일평화의 길은 금방 열리고 나아가 소위 3원칙에 따라 각종 구체적 조건을 상의해 서로 그 이익을 받을 수 있게 했다면, 동아의 영구적 평화의 기초는 확립되는 것이고, 이후 공동의 생존과 공동의 발전은 차례차례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장개석은 이를 채택하지 않고 오히려 거절의 태도로 일본의 제의에 대항하고, 극단적인 압박적 태도로 일본의 제의에 대항하며 극단적인 압박적 수단을 이용해 국내 및 당내 일체의 평화 건의에 대항하고, 이로 인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대국은 날로 악화되어 수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실로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3항의 원칙은 처음 고노에 성명에서 그 윤곽을 밝힌 것이지만, 수년 이전에 일본은 이미 이를 제안한 바가 있었다. 민국 24(1935)년 11월 20일 일본의 아라요시 대사 가장 총재와 만났을 때, 3원칙으로 하여금 중일관게 개선의 기초를 제안했고, 장 총재는 이에 찬동을 표히고 또 별도의 대안이 없음을 표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후 금방 입장을 번복했다. 그 이유로 첫째로 당시로는 군사위원장으로서 행정위원장이 아니었기에 이를 위한 담화를 거론할 수 없다는 이유였고, 둘째로는 당시 개인의 자격으로 말하는 것으로 공식적 담화가 아니었다는 이유이고, 셋째로는 찬성한다는 것은 3원칙을 의논하는 것을 찬성하는거지, 3원칙 자체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며, 넷째로 별도로 대안이 없다는 것은 3원칙의 실시에 관한 것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찬동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후 민국 25(1936)년 꼬박 1년이 걸렸던 중국과 일본의 교섭은 결국 정지되기에 이르러 결국 이는 민국26(1937)년의 중일충돌이 마침내 폭발하는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당대의 외교담화기록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탄식을 했었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월에 걸쳐 독일 트라우트만 대사가 사변 조정을 시도할 때, 그때 일본이 요구한 조건도 이 3원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전에 나열한 “하나의 예”를 다루는 글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으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고노에 성명이라는 것은 종래 일본이 보여왔던 일관적인 주장에 기초해 계통적인 서술을 시도하고, 또한 우리나라로 하여금 고려해야할 점에 대해 부단히 각각 설명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동방공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에 이를 위해 군사내정에 간섭하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고, 일독이방공협정의 정신으로 일지방공협정을 체결할 것임을 천명하고, 경제제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이에 따라 정치적 분규를 해결할 수 있게 고려하고, 중국의 주권 및 행정의 완전독립을 존중할 것임을 천명하고, 또한 중국에서의 경제적인 이익을 독점할 의사가 없음을 이야기하고 제3국의 이익 또한 제한하는 것은 어긋남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정중하고 명백한 성명인 이상, 3원칙의 실행은 결코 중국의 자유독립을 해칠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름바 공동방공과 경제제휴의 주요목적은 공산주의의 교란행위와 경제침략이라는 2대 해악을 동아의 천지에서 뿌리 뽑으려는 것으로서 그 책임은 실로 중대한 것이다. 일본이 이미 중국에 대해 책임의 분담을 요망하고 있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중국에 충분한 자유와 독립으로서 비로소 이 중대한 책임을 분담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성명에 찬동하는 것은 결코 하루동안 겨우 편안함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동아백년대계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즉, 우리들이 이러한 성명에 대해 문을 닫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겠는가? 장제스의 통제하에 있는 충칭의 선전은 일본은 모든 힘을 다해 중국을 멸망시키려 들고 있고 이름바 3원칙이라는 것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전은 실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일본이 만약 중국을 멸망시킬 심산이라면 전력을 다해 작전을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실을 마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고노에 성명의 3원칙은 이미 수년전부터 제출된 것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했듯이 알 수 있을 것이고, 고노에 성명 이후에는 이를 한층 명확하게 해 국책으로 정하고 전국의 여론도 이미 일치하고 있다. 왜 이를 구실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셋째로, 만약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노력할 목표가 없다면 이해의 충돌을 초래할 것이며, 반드시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 물과 불은 서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의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반대로 공동으로 노력해야할 하나의 목표가 있으면 이해가 일치하니 충돌이 발생할 틈은 없다. 이러한 중대한 관계로 보았을 때도 어찌 이를 단순한 구실이라고 하는 것인가. 넷 째로, 수년동안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가능한것이었으나 날로 악화되는 이유는 일종의 순환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중국의 배일정책이 9.18사변의 원인라고 이야기하고, 중국은 일본의 침략이 배일정책의 원인이라고 하고, 일본은 중국이 이이제이의 정책을 포기하면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다고 설명하는. 이러한 언변은 대체로 상대방에게 요구와 비난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지금부터 하나의 목표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함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를 시작하고, 먼저 자신에게 요구하고, 먼저 자신을 탓하고, 이후에 다른이를 탓하게 된다면 그 진보는 반드시 신속하게 용이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중국과 일본은 과거의 분규를 청산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비극을 결속으로서 이를 끝내고 속죄하고 보상할수 있게, 나아가 미래의 공동생존과 공동발달이라는 큰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화의를 거부하고 계속 항전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인가? 우리들도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항전 이래 군대도, 인민도 이미 충분히 민족의식이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표명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또 알아야 한다. 이제 이 민족의식이 완전히 이제 공산당이 이용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민족의식을 이용해 민족의식을 지킨다라는 말로 민족을 멸망시키고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공작은 공산당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소위 민족, 국가가 있음을 모르고, 오직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아 중국을 희생시켜야 함을 알 뿐이므로, 희생의 지역이 점점 커지면 더욱 좋고, 희생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 더욱 좋고, 희생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은 하나도 빠짐없이 희생되고, 일본도 상당한 손실을 입는 것을 피할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코민테른에게 있어서는 진정으로 일석이조인 것이며, 하물며 장제스를 간판으로 삼으며 국공결렬 이후 초공작전에서의 한을 마음 것 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충분한 원한을 풀고나면 그들은 고향 코민테른으로 돌아가 아무런 마음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번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오로지 항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중국은 이제 영원히 평화를 추구할 수 없고, 결국에는 코민테른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공산당의 죄악은 이전의 의화단보다 심한 것이고, 공산당에게 이용되는 죄악은 강의제인(剛毅諸人) 보다 위이며, 비록 지금 충성스럽고 용감한 군대가 있고 충성스러운 인민이 있지만 이들은 최대한 섭사성(聶士成)과 마찬가지로 근소하게 보국의 심정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켤코 눈앞의 액운을 만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유곤일(劉坤一), 장지동(張之洞)이 동남을 보장하고 이홍장(李鴻章)이 몸을 바쳐 베이징으로 들어가 8국연합군의 총검아래에 화의를 성립시켰던 것보다 못한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에게 두가지 길이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제스를 따라 게속 항전을 이어나가는 길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일본에 저항하기에 부족하고 공산당을 제압할 수도 없다. 또한 장제스의 지금 심경으로는 공산당을 따르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온 민족이 장제스를 공산당으로 따르게 되는 희생만이 있을 뿐이다. 국가민족을 향해 국가민족의 희생을 공산당의 희생으로 삼게 되는 것 뿐이게 된다. 또 다른 한길은 장제스와의 관계를 단념하고, 총리 손선생의 유지를 다시 한번 천명하고, 나아가 이를 실행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적대관계를 풀고, 적대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의의에 기초하여 적을 바꾸어 친구로 삼으려 노력하여, 첫걸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평화를 회복하고, 두 번째 걸음으로 동아의 평화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의 길 중에서 전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종족을 멸하게 하는 길이며, 후자의 길은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키게 하는 길이다. 나는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키는 길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있다. 나는 동지들과 단결하고 전국의 각 당파 및 무당무파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단결해 이길을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 이글은 중문 원문판을 위키문헌에서도 볼 수 있다. 보려면 이곳을 클릭 ] 신문 원문 출처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39.07.10/mode/2up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③ 충칭 최고국방회의에 제안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데헷넷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충칭 최고국방회의에 제안 (重慶最高國防會議に提議す) *항전 충칭에 대해 통전을 보내며 평화를 제안한 왕선생은, 쇼와14년 (1939년) 1월 8일, 홍콩에서 충칭의 최고국방회의에 다시 한번 평화해결을 제의했다. 이 서한에서는 난징 함락 이전부터 이미 기존에 있었던 화평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앞의 화평문제에 대한 당시 중국 측의 낌새도 처음으로 공표되었다. 1938년 12월 9일, 나는 장제스에게, 지금의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은 “어떻게 전쟁을 지속 시킬 것인가?”이고, 지금의 일본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은 “어떻게 종결을 종식 시킬 것 인가?” 라고 한 바 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자신의 어려움을 알고 있고 동시에 상대방의 어려움도 알고 있다. 따라서 화평이라는 것은 결코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화평문제는 대외관계에서 볼때도, 우리는 영국, 미국 각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암묵적 승인, 독일과 이탈리아의 불간섭, 특히 일본의 각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일본이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동아에서 절대적 패권을 확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평화는 중국에 결국에는 찾아오게 될 것이다. 나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던 동지 제군들은 모두 함께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38년 12월 22일, 일본정부에서 발표된 성명(제 3차 고노에성명)을 본다면, 일본이 지금까지 중국에 보여왔던 태도랑 비교해보았을 때, 반성한 바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상기하건대 작년 12월 초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독일대사가 장제스를 만나 이야기한 일본 측의 조건(트라우트만 공작을 의미)은 이번의 고노에 성명처럼 명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에 비해 훨씬 가혹했지만, 장제스는 시국을 고려하여 이 조건으로 화평을 맺는데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이후 일본은 시일을 미루어 난징 함락후 다시 조건을 제출하였지만, 그 범위가 너무나 광대해 논의는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은 이번의 고노에 성명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반성하고 각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이에 마땅히 답을 하는 성명을 내고, 이를 통해 평화교섭의 기초로서 교섭에 노력하고, 이렇게 하여 구체적인 안을 취하여 상당한 문제의 해결에 도달하게 된다면,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고 동아는 안정의 국면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회는 실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것이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는 점점 구체화되고 있지만, 이러한 원조는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강구하는데에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할 뿐 결코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끼쳐 군사방면으로 하여금 우리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모두가 아는 바이며,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정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협력을 얻지 않고는, 소련도 중국을 돕기 위해 독립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음은 분명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도 우리가 평화의 확립에 나서게 된다면 우리와 흔쾌히 협력할 것이다. 국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공산당과 중국의 멸망, 국민당의 붕괴를 원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평화 해결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점을 심사숙고하여 중앙에 평화해결을 제의하는 것이니 동지들(충칭 최고국방회의의 인원들을 지칭)은 정성으로 이를 판단해 따로 글을 적어 장 총재에게 의견을 피력하거나 따로 의견을 피력해 이에 찬동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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