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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① 왕징웨이와 나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데헷넷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왕징웨이와 나 (汪兆銘氏と私) 여기서 "나" 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일본수상을 이야기한다. 나는 왕징웨이씨를 자유의 집 (일본의 공영권을 의미) 으로 부르며 약 3년 반동안 의견을 교환했다. 나는 지나어를 할 줄 모르고, 왕징웨이씨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에 우리는 나름대로 한문을 이용해 필담을 주고받았다. 이를 입으로 말하면 한 시간 정도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장래에도 공표할 성격은 아니지만, 나는 고노에성명(近衛聲明) 에 대해 당시의 책임자로서 결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한다. 일로전쟁(러일전쟁) 후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이 공개되어 우리 국민들의 불만이 손 쓸수 없을 정도가 되어 도쿄에 소토사건 (燒討, 1905년의 히비야 방화폭동사건을 의미한다. ) 을 야기되고 있던 때, 왕징웨이씨는 자신이 유학생으로 도쿄에 있을 때 이 사건을 봤다라고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이번의 사변에 대해서도 오래된 관념에서 본다면 영토분할과 전비배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강화조건이 될 것이다. 우리 국민중에는 이만큼의 전과, 이만큼의 희생을 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도 영토의 분할도, 전비의 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도의적인 요구에 그치는 것이니 우리가 우려하는 사태가 야기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한없이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무릅쓰고 고노에성명을 충실히 지키겠다 결의한 것의 뒤에는 비장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상상해 보았으면 한다. 그런데, 고노에 성명이 발표된 이래로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국민전체가 이번의 사변은 국민들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알고, 이 사명의 도의성을 국민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위해 거룩한 봉사를 할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 국민에게 이러한 의식이 있다면 고노에 성명이 완전히 이행될 것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이야기했는데, 왕징웨이 씨는 이에 깊게 감명한 것처럼 보였다. 왕징웨이 씨는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어가야할 국민당의 최장로이며, 장제스의 선배이기도 하다. 몇 번이고 해외로 망명할 정도로 가시의 길을 걸어온 과거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화하고 좋은 신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이 30년전에는 청조의 섭정왕 재풍(載灃, 선통제의 아버지였던 순친왕 아이신교로 자이펑를 의미한다. 왕징웨이는 1910년 그를 죽이려 했으나 폭탄이 사전이 발각되어 실패했다. )을 죽이려고 폭탄을 들고 노리는 열혈한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풍채였다. 옛 진시황제에게 철퇴를 던지려고 했던 장량(張良)의 용모가 여자처럼 아름다웠다고 하니, 왕징웨이 씨가 장량의 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곰곰이 이 정치가를 바라보기도 한 적이 있다. 화평을 이야기하는 자는 곧 한간으로 취급받는 충칭에서 왕징웨이 씨는 이미 화평을 설파하고 있었다. 하노이에 머물며 자객에게 둘러쌓이면서도 왕징웨이 씨는 제 2차, 제3차 화평권고 성명을 발표했다. 가장 아끼던 협력자 쩐중밍(曾仲鳴, 하노이에서 왕징웨이 대신 암살을 당했던 사람의 이름. )씨가 총탄에 쓰러지자 “나 또한 쩐중밍 선생의 뒤를 따라 가게 될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화평공작을 계속하여 힘을 쏟은 것이 왕징웨이 씨였다. 이러한 대용기가 어떻게 저 하얀얼굴에서, 단신에서 나오는 것일까.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진흙속에 묻어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장제스 일파를 비판하면서 뺨에 마음에 사무쳐 뜨거운 눈물을 흘릴정도의 열정이 57세의 지금도 가슴속에 끓고 있는 왕징웨이 씨였다. 영원한 청년이라고 부르고싶은 매력이, 이 혁명정치가를 신지나의 지도자답게 만든 것이다. 나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왕징웨이 씨를 만족시킨 것처럼 보였고, 왕징웨이 씨의 의견 또한 나를 납득 시킬 수 있었다. 왕징웨이 씨는 동경에서의 회담 (1939년 6월 도쿄에서 고노에와 왕징웨이가 가진 회담을 이야기한다. )을 통해 신지나건설에 한층 확신을 얻고 돌아간 것으로 믿고 있다. 본디 왕징웨이 씨는 명쾌하게 고노에 성명에 다시한번 확신을 가지고, 일지제휴(日支提携)로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협력하도록 지나국민들을 설득하였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이 지금의 왕징웨이씨의 생각을 받아드리고 협력하고 있는지는 측정하기가 어렵지만 필연적인 몰락의 길이 가까워진 충징정부를 보고 전 지나 국민이 왕징웨이 씨에게 지도를 받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왕징웨이 씨의 책무이며 동시에 또한 우리에게는 지나 국민제군들이 솔직하게 고노에 성명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것이야 말로 지나 국민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왕징웨이 씨는 8월 말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 (1939년 8월 28일의 중국국민당 6차전국대표대회를 의미 )를 열고 반공친일(反共親日), 일당전제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하는 순정(純正) 국민당을 조직하여 국공합작으로 왜곡되었던 삼민주의를 이전 손중산 선생의 것으로 되돌리려 순정 삼민주의를 제창하였다. 신지나의 경영이 순정 국민당의 조직과 순정 삼민주의의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나라에도 국민당이나 삼민주의에 무조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국민당이든 삼민주의든 이를 통해 일어나는 폐해는 당이나 주의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를 가지고 국내통일의 도구로 삼고 동시에 일본을 적국이라 하여 지나 전 국민을 항일전선에 동원하려고 하는 것처럼, 민생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각 계급의 협력을 배격하여 계급투쟁을 유도하는 것 모두 국공합작으로 삼민주의가 왜곡된 결과라 하겠다. 삼민주의를 왜곡이 아닌 순정한 수단으로 이를 실천한다면 우려할 바가 없을 것이다. 왕징웨이 씨 등이 중앙정권을 확립하고 고노에 성명을 신뢰하며 우리와 제휴하게 된 이상, 대강(大綱) 에 대해서는 장래에 화근이 생기지 않도록 충분히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세세한 일에 대해서는 지나에는 지나의 전통과 관습이 있으니 이를 존중해야 한다. 특히 자치는 그들의 장점으로 하는 바이므로 대부분 지나 국민의 책임에 맡겨도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닌가. 간섭하는 것 같은 행동은 최대한 주의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견실한 걸음을 함께 하며 10년, 20년의 장래의 결실의 가을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역사적 일대 사업이 단시간에 완성될 것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대륙의 정신에 동조시킬 정도의 각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일본국민 서로서로는 특히 이러한 점에 주의를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이글은 고노에 성명의 고노에공(公)과 고노에성명에 응해 충칭을 탈출한 왕 선생과의 역사적 회담후에 쓰여진 것으로, 쇼와 14년 10월 10일 (1939.10.10. 중국의 쌍십절)에 발표되었다.

  • 신민회 (新民會, 1937~1945)

    신민회의 깃발(1차).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본것같은 깃발인데..? 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특히 일본의 대륙괴뢰정권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우선 신민회의 깃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시작을 하려한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중일전쟁시기 일본이 중국대륙에 세운 괴뢰정권에 대해서 가볍게 들어보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민회의 깃발에서 무언가가 연상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여러분의 생각은 틀린것이 아니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실제로 이와 너무나도 비슷한 깃발이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과 쑤시원 (蘇錫文,소석문) 이 1937년 말에 상하이에 세웠던 상하이대도정부 (上海市大道政府) 의 깃발과 신민회의 깃발. 사용되었던 색깔과 너무나도 유사해보이는 태극무늬까지, 두 깃발은 판박이처럼 닮았다. 상하이시 다다오정부 (상해다도정부) 를 세운 쑤시원은 본래 불교와 도교의 융합에 관심이 있던 자였다. 그는 불교를 상징하는 노랑색을 배경에두고, 도교를 상징하는 태극무늬를 넣음으로서 자신의 시각을 들어냈다. (또한 대도(大道) 라는 이름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되었다.) 신민회 회무수지(新民會會務須知) 에서 묘사된 신민회 깃발(1차) 주목해야 할 부분은 두 깃발이 만들어진 시기가 단 19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친일행동을 한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으나, 두 조직은 정체성이 크게 달랐다. 상하이대도정부는 도교와 불교를 융합한 이데올로기를 도입했고, 중지나방면군의 지배를 받았는데, 신민회는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유교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북지나방면군의 지배를 받고있었다. 이토록 두 조직은 속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토록 비슷한 깃발을 비슷한 시기에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민회는 무엇인가?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일본은 전쟁초기 빠른 속도로 점령지를 확대에 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광대한 중국대륙이라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점령지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중국인구와 그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게릴라들을 일본은 단순한 군사지배로는 제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일본은 이미 중일전쟁 이전부터 화북분리공작(華北分離工作) 을 통해 화북지역을 장제스의 국민정부로 부터 이탈시켜 일본의 괴뢰정부를 옹립해 일본의 경제권으로 편입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가지 필요성에서 당시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은 화북지역에 새로운 친일신정부를 옹립하여 화북을 좀더 용이하게 통제하고 제어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였다. 화북을 점령하고 통제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은 정부 수립을 위해 과거 북양정부 시절 중화민국 재정총장을 지냈던 왕커민(王克敏, 왕극민) 에게 접근했다. 이전부터 친일성향이 있었던 그에게 접근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을 맡게 했다. 그리고 이전에 수립했던 괴뢰정권이었던 기동방공자치정부(冀東防共自治政府) 또한 임시정부로 통합시키게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임시정부의 운영과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친일이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지원할 수 있는 범대중적 조직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성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부터 10일이 지난 1937년 12월 24일에 설립되었다. 신민회는 명목상으로는 청년들의 훈련, 농촌의 구제를 목표를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친일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민중의 반대를 무마하고, 친일사상을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신민회라는, 앞에서 이야기한 친일이자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지지하는 범대중적 조직을 건설한다는 개념은 임시정부의 수립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었다. 북지나방면군 특무부는 정부 수립 이전부터 "새로운 정권을 지지할 단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시작부터 이미 일본의 손안에 있었던 것이다. 신민회는 임시정부가 운영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북지나방면군 특무부 총무과의 지휘를 받았고, 흥아원(興亞院) 화북연락사무소 정무국의 통제를 받았다. 신민회의 직원 900명중 400명이 일본인이었다는것은 신민회의 성격을 더더욱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민회에서 발행했던 선전잡지 우방대일본 (友邦大日本) 잡지의 뒷면. 일본의 일장기, 만주국의 신오색기,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오색기, 그리고 신민회의 깃발이 그려져있다. (필자도 처음에 이 깃발을 위의 상해대도정부와 착각한 바 있다.) 특무부는 새로이 만들어질 조직의 모토를 옆의 만주국의 만주국 협화회(滿洲國協和會)에서 가져왔다. 만주국에서 일종의 유일정당이자 유일한 정치단체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고, 문화와 교육등을 통해 국민들을 개조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춘 만주국 협화회는 북지나방면군 입장에서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중국민중들이 다수이며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게릴라의 활동은 멈추지 않는등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의 점령이후 발생한 혼란이 계속되는 화북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었다. 실제로 만주국 협화회 설립을 주도했던 오자와 가이사쿠(小沢開作) 를 비롯한 여러 협화회 설립인사들이 신민회의 구성에 참가했었다. 따라서 신민회는 협화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북지나방면군은 신민회를 임시정부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만들어 화북에서 이전에 화북을 지배하고 있던 국민정부의 국민당을 자신들이 대체하려 했다. 점령이후에도 남아있는 국민당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민중들에게 신민회를 국민당의 대체지지세력으로 인식하게 하면서 민중들이 신민회를 통해 단결해 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내주기를 바랬다. 베이징에서 열린 신민회의 발회식 (1937.12.24) 1937년 12월 24일 오전11시 , 베이징 중난하이의 회인당(懷仁堂) 에서 성대한 발회식 행사가 열리면서 신민회는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폭죽이 울려퍼지고 베이징에는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아닌 오색기가 다시 걸리게 되었다. "신민회 만세!" 와 같은 구호와 함께 발회식은 끝이났다. 놀라운 것은 신민회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회장자리가 공석이었다. 신문의 기록에 따르면 신민회가 만들어진 12월 24일 시점에서는 회장자리가 비어있었다. 이렇게 회장자리를 임시로 비운 상태에서 장옌칭(張燕卿,장연경)이 회장을 보좌하는 부회장자리에 올라 임시적으로 수장이 되었다. 해가 지나고 1938년 1월 6일, 신민회는 주요 인사들을 결정하고 발표했지만, 이시점에서도 회장자리는 공석으로 비어있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수반 왕커민이 신민회 회장에 앉게 되는데 이는 신민회 결성으로 부터 3년이 거의 다 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1939년 12월 2일) 장옌칭 (張燕卿) , 그는 만주국의 외무장관이었으나, 신민회가 생기기전에 사임하고 신민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이때 일본은 조선에도 신민회와 임시정부의 활동을 위해 압박을 가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임시정부가 생겼던 시점에서도 한성을 비롯한 조선의 각지역에 존재하는 중화민국 (물론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의미) 영사관에 압박을 가하여 직원들로 하여금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아닌 왕커민의 임시정부를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일부 영사관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 내의 화교사회와 중화민국 영사관은 모두 일본과 왕커민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민회 또한 황해도와 평양을 비롯한 조선의 곳곳에 지부를 설치했다. (이 조선내 영사관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자세하게 한번 다루려고한다) 일본이 이러한 행동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 라는 제1차 고노에성명 바로 직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민회는 신민주의 (新民主義) 라는 개념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신민주의는 중국 전통의 유교적 보수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중국 전통의 봉건사상과 일본산 파시즘이 혼합된 결과물이었다. 신민주의라는 이름은 신민회가 국민정부의 삼민주의 (三民主義) 를 "악의 근원" 이라 비난하면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로 생각된다. (신민회라는 이름도 있고) 신민회는 신민회강령(新民會綱領) 을 가지고 있었는데, 강령은 다음과 같다 : 신민회강령 (新民會綱領) 1. 신정권을 옹호하고 민의의 창달(거침없이 쑥쑥 뻗어 발달함)을 도모한다. 擁護新政權,以圖暢達民意 2. 산업을 발달시키고 민생을 편하게 한다. 開發產業,以安民生 3. 동양의 문화도덕을 펼쳐 일으킨다. 發揚東方之文化道德 4. 초공멸당 (공산당을 금지하고 국민당을 멸한다) 의 기치 아래 반공전선에 참가한다. 於剿共滅黨旗幟下, 參加反共戰線 5. 우방과의 연맹의 실현을 촉진시켜 인류화평에 공헌한다. 促進友邦聯盟之實現,以貢獻人類和平 강령에서는 동양의 문화도덕을 펼쳐 일으킨다라면서 유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초공멸당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신민회는 공산당에도 국민당에도 모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진 중국에서 일종의 3지대론을 꺼내든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마지막 항에서 볼 수 있듯이 우방 (즉 일본) 과의 친선이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 친일적 성향을 확실하게 들어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친일적이고 친일적인 이 신민회의 강령은 사실 일본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신민회에서는 신민주의를 창조한 사람이 머우빈 (繆斌,무빈) 이라는 자가 이를 작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머우빈은 이후 1939년에 신민회 부회장을 맡은 그는 실제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저서 《무덕론(武徳論)》 의 내용을 조금 수정하여 《신민주의 (新民主義)》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출판했지만, 그 기본틀이 이미 일본 북지납방면군에 의해 짜여져있었다는 점에서 신민주의 또한 사실은 일본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한편 머우빈은 조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신민주의를 세계로 확산시키겠다" 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으니 하니 머우빈은 자기의 사상 (일본이 함께 만든) 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신민회는 활동을 시작하고 난 이후 각 성, 각 도시, 각 고을에 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 직업분회까지 설치하는 등 수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본래 국민정부시절에도 직업분회는 존재했었다. 공회(工會) 와 직업공회(職業公會) 라는 정부와 국민당, 그리고 각분야의 노동자들이 결합한 직업조직이 존재했었으나 이 조직들에는 노동자들만 참여하고 경영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민회는 직업분회를 설치하면서 기존 국민정부시절의 직업조직들을 해체하고, 새 직업분회에는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가 참가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 직업분회에는 총 16개의 직종에서 약 4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가입해있었는데, 이중에서 맥주직업분회 (啤酒職業分會) 가 가장 먼저 생겼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음악계, 인쇄계, 자동차산업계, 연극계, 미술계등 다양한 직업분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교육의 경우 신민학원 (新民學院, 대학급) 과 신민학교 (新民學校), 신민청년훈련소 (新民靑年訓練所) 를 비롯한 여러 교육시설을 설치해 신민회와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일본에서 "지나말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 라고 하자 중국어를 가르칠 교원을 양성하여 일본으로 보낸것도 신민회였다. 그리고 신민청소년단(新民靑小年團), 신민청년단(新民靑年團) 과 같은 유소년 조직을 구성해 운영하기도 했다. 전 포스트에서 이야기했던 왕징웨이랑 똑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민국28년 (1939) 신민학원동학회 탕산분회 설립기념 사진 (新民学院同学会唐山分会) . 일본군인의 모습이 보인다. 학생들은 신민회가 만든 교육시설 (특히 청년훈련소)에서 신민주의에 대해 배우고, 공산주의와 삼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일본어교육과 농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군사교육도 받았다. 항일 게릴라가 활동하고 있는 화북에서 치안의 유지를 위해 신민회의 교육을 받는 청년들은 농촌의 사상선도자가 되어 농촌의 민중들을 교화하고, 민중들에게 농업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농업을 공비를 비롯한 "적" 으로 부터 지켜낼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신민회의 군사교육은 어디까지나 자위 (自衛) 를 위한 것으로, 이 청년들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전장에 투입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러한 군사교육과정을 통해서 화북의 청년들과 일본군의 관계가 가까워 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의 청년들은 "일본이 우리를 군사교육을 시켜서 전선에 끌고가려한다!" 와 같은 공포심속에 훈련에서 도망쳐서 오히려 공산당이나 국민당지배지역으로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일본군과 관계자들이 나서서 이런 전선투입설을 부정했지만 (애초에 임시정부는 이미 자체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청년들은 이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일본에 대한 공포심을 공산당과 국민당은 역으로 이용해 화북의 청년들이 자신의 구역으로 오게 하기도 하였다. 신민회의 청소년조직,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모은 (청소년여단훈련대青少年女團訓練隊) 의 체조시간. 뒤에 일장기와 오색기가 휘날린다. 하지만 이후 1942년 이후 전황이 악화되면서 신민회는 이렇게 군사교육을 받는 청년들을 실제로 무장시키고 공산당 소탕과 같은 전투에 참가시켰다. 청년들이 우려했던 것이 결국에는 사실이었던 셈이다. 신민회 내부에서는 "청년들을 무장시키는게 과연 옳은가? " 에 대한 논쟁이 오고갔으나 결론적으로 "늘어나는 공비의 침입을 막기위해서는 어쩔수 없다" 라는 답을 내고 청년들을 무장시키고 향촌에서 전투를 하게 했다. 신민회청소년단의 행진에 나치식 경례를 하는 나치독일의 사절단 (1939.5) 일본은 청년들에게 신민회에서의 군사교육을 비롯한 신민회의 교육과정을 통하면 취업을 비롯한 여러부분에서 이익이 있다고 선전했다. 이들 대다수가 취업과 같은 목적을 위해 신민회 청년훈련소를 비롯한 시설에서 교육을 받았고 적어도 2만명 이상의 청년들이 이를 거쳤다. 일본측은 신민회에서의 교육을 통해 향촌과 지방의 친일협력자를 양성하기를 바랬지만 중국 청년들은 "취직하기 편하니까 가는거죠" 와 같은 반응으로 청년은 응했다. 즉, 신민회는 본래 의도하고자 했던 것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이런 신민회에서의 교육을 이수한 청년들은 신민회의 중앙간부나 지방간부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출세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은 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교육을 모두 마쳤음에도) 추가적인 교육을 계속 이수해야했고 심지어 사상 검증도 이루어졌다. 항일전쟁승리 이후 신민회 출신들은 한간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이 청년들은 어땠는지 알기 어렵다. 언론의 경우 신민보 (新民報) 라는 자체 신문을 발행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선전하고, 앞에서 보았듯 우방대일본(友邦大日本) 과 같은 여러 잡지들을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지역에는 신민열람실(新民閲覧室) 과 신민차관(新民茶館) 과 같은 시설을 설립하여 도시의 도서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런 선전물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차를 제공하여 사람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선전물을 읽게 장려했다. 이조차도 어려운 곳은 자동차에 선전물을 실은뒤 이동식 도서관처럼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러 선전 활동을 펼쳤는데, 그중에는 한국이 군사독재시절 불온도서를 신고하고 불온도서를 불태우는 행위를 해왔듯 항일서적을 신고하게 하고 태우는 행사도 진행되기도 했다. 신민회는 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과 조선에 톈진특별시체육협회(天津特別市體育協會) 베이징시교육국(北京市敎育局)과 함께 농구대표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북지(北支)" 대표팀으로 출정한 임시정부 농구팀은 일본에서 두번의 경기를, 조선에서 1번의 경기를 치뤘다고 하는데 일본에서의 두경기는 모두 패배하고 조선 경성에서 열린 경기에서는 승리를 거두는데 승리했다고 한다. 정치의 경우 1938년 11월 16일 반장구국중앙대회(反蔣救國中央大會) 를 개최하고 각지역마다 반장구국대회 (反蔣救國大會) 를 개최하게 했다. (이 행사는 톈진과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지역에서 이뤄졌다) 또한 영국조계가 검역조치를 강화하자 영국조계를 비롯한 연합국 조계 근처에서 반연합국 시위를 이어나갔고, 이후 조치의 완화, 나아가 조계의 환수를 주장하는 신민회도시부준비위원회(新民會都時部準備委員會) 를 구성해 신민회도시부위원회(新民會都時部委員會) 를 만들어 톈진과 상하이를 비롯한 영국조계가 있는 곳에서 반영시위를 이어나갔다. 또한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왕커민에 대한 선전활동에 나서면서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정부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행하기도 했다. "경축 왕커민 위원장이 신민회 회장으로 임명되다!" 1939년 12월쯤의 포스터로, 신민회에서 왕커민의 신민회회장 취임을 환영하는 포스터 신민회는 대외적으로 여러 활동을 했는데, 난징에 세워진 또다른 괴뢰정부였던 유신정부와의 여러 협력은 물론 결성 1주년을 기념해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에게 감사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신민회에서는 조선에 "사과나무를 보내달라" 라고 요청한 바가 있다. 이 또한 선전을 위한것이었는데,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 북지(화북) 은 평화를 찾아가고 있어 그 평화를 상징하는 사과나무를 심으려고한다. 근데 알아보니까 "조선 평안남도의 사과나무가 제일 좋으니 그걸로 보내달라" 라고 주문을 넣기도 했다. 이런 외에도 더 많은 분야에서 신민회는 수많은 선전과 계도활동을 이어나갔다. 국민정부를 "국민당의 나라" 라고 하듯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신민회의 나라" 라고 말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신민회는 모든 예산을 임시정부의 국고에서 받아 쓰고 있었으며, 이 비용은 '임시정부 행정위원회'의 예산보다 많았다고 할 정도이니, 신민회가 임시정부에 끼치는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신민회는 임시정부와 한몸이되어 신민회가 임시정부 그 자체라고 할만큼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8년 12월 18일, 신민회는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것이다. 사실 본래 임시정부는 유신정부와 함께 1938년 9월 22일부터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하고 통합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두 정부 모두 유교에 입각하고 국민당에 반대하고 있기에 오히려 이 두정부의 통합논의는 큰 문제가 없이 점점 진행을 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시점에서 이미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두정부는 이미 통합을 위한 제 3차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탈출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두정부가 한몸이 되다." -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성립 기념포스터, 1938년 9월 화북이라는 영토속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신민회는 왕징웨이의 탈출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자신들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기도 했고 게다가 일본은 왕징웨이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의 신정부가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통합하는 통합신정권이 되어야한다고 이야기를 나눴으며 왕징웨이측도 중광당회담 (重光堂會談, 1938.11.12) 에서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해체하고 왕징웨이의 중앙신정부로 통합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바가 있었다. 만약 왕징웨이의 생각대로 모두 이루어진다면 화북에서 독자적이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신민회는, 심지어 "국민당을 멸해야 한다" 라고 까지 이야기했던 신민회에게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커민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중앙신정권 구상에 반대했다. 왕징웨이가 생각했던 '신중앙정권 구상' .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물론, 몽강과 기타 정치세력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신중앙정권을 왕징웨이는 구상하고 있었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내몽골부터 광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왕징웨이의 중앙정권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징웨이는 만주국도 자신의 정권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중앙정권에서는 화북,화중,화남의 주요산업은 물론 수많은 인구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촉나라땅만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장제스의 충칭정부에 비하면 엄청난 경제력과 인구를 가질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또한 이러한 거대한 통합신정권을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 수 있어야 민중들에게 화평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시킬수 있으니 새롭게 구성되는 정권에서 왕징웨이는 독보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싶어했다. 이러한 생각을 왕징웨이 뿐만 아니라 일본내에서 왕징웨이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 개편이 이루어진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의 모습. 화북은 물론 몽강도 명목상으로는 편입되었으나 왕징웨이는 이지역에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이후 1939년 6월 부터 통합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왕징웨이는 중앙신정부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임시정부의 왕커민을 1939년 6월 27일 만나 이야기했지만, 왕커민과 왕징웨이는 "통합된 중앙정부가 필요하긴 필요하다" 라는 동의를 얻어내어 겉으로는 꽤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커민은 사실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유신정부의 지도자 량홍즈는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왕징웨이는 왕커민을 만난 후 량홍즈를 만나러 갔으나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왕징웨이와 그의 세력이 신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확실한 거부를 보였다. 왕커민과 달리 신중앙정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지나방면군 또한 생각이 달랐다. 지나방면군에게 난징을 비롯한 화중지역은 괜찮지만, 당시 중국의 주요철도가 지나가고 수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화북지역만은 자신들의 강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진행해왔던 이들에게 다시 화북을 넘겨준다는 일도 불가능했다. 이렇듯 위의 포스터에서는 두 정부가 평화롭게 웃으면서 새정부구성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대륙의 주도권을 뺏기기 싫다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존재했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1939년 6월 6일에 '수립신중앙정부적방침(樹立新中央政府的方針)" 을 통해서 이미 화북지역을 특수지역으로 만들어 왕징웨이의 새로운 신중앙정권과 분리하기로 결정을 지었던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의 희망사항은 더더욱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1939년 7월 열린 제5차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회의를 거치면서 다행히도 두정부가 왕징웨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변화하게 된다. 두 정부는 왕징웨이의 뜻에 동의하기로 결정하고 원만하게 합의에 나서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합의가 가능했던것은 임시-유신 양정부보다는 일본과 왕징웨이로 인해 가능했는데, 왕징웨이는 결국 화북에서의 특수권을 인정했고, 일본도 임시-유신측에 신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일종의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임시정부는 왕커민 위원장을 위시하여, 유신정부는 나와 내 및의 모든 사람은 왕(왕징웨이) 선생이 신속한 공작을 펼쳐 중앙정부를 속히 실현시켜주기를 바라는 점에는 모두가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 유신정부 량홍즈 , 1939년 9월 21일 일본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불과 3개월전에 결사 반대를 했던 량홍즈가 3달만에 의견히 변하게 된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39년 10월 시점에서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에 대한 방침이 사실상 확정이 되었다. (이후 이 통합과정을 다른 포스트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겠다.) 완전하지 않은 왕징웨이 정권의 모습은 사실 일본과 왕징웨이의 타협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 39년 7월이후 원만한 합의가 시작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이과정에서 크게 합의된것은 다음과 같은데, 1) 유신정부는 해체, 하지만 인사들은 고용 2) 임시정부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정부조직만 존속, 실권을 유지한채 중앙정권에 편입 3) 화북에서의 일본의 특권을 인정 4) 몽강의 경우 신중앙정권으로 편입하나 그 실권은 유지 이러한 합의의 결과 겉보기상으로는 왕징웨이의 중앙신정부가 모두를 통합한것 처럼 보이지만, 구 임시정부지역과 몽강자치정부 지역은 그 실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말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신민회는 지금까지 이어왔던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민회는 더이상 이전과는 같이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즉, 바뀐 시대에 변화를 해야했다는 것이다. 이로서 왕징웨이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지만, 신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속 화북정무위원회에서 행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친일에 "국민당을 멸한다" 라고 이야기하던 신민회는 더이상 과거와는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없었다. 신민회의 2대 깃발, 오색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1940년 2월 29일, 신민회는 기구 개혁을 발표했다. 기구에 대한 통합과, 왕징웨이정권의 출범에 맞게 개조가 이루어질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북지나방면군 특무부에 있었던 정보조직이었던 선무반을 신민회에 통합시키고, 북지나방면군과 신민회에서 역할이 겹치는 조직에 대한 통합등이 이루어질 것임을 이야기했다. 1940년 3월 30일로 왕징웨이 정권이 출범했을때, 평양의 신민회조직은 왕징웨이정권 출범에 축하인사를 보냈다. 고작 2~3년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을 멸해라라고 이야기했던 조직이 "국민당 만세" 를 외치게 된것이다. 신민회는 왕징웨이 정권 출범이후 강령을 수정했다 신민주의라는 기본 이념은 변화가 없었지만 . 특히 "초공멸당" 이라는 반 국민당적구호가 "실시반공(實施反共)" 이라는 구호로 대체되었다. 신민회 내의 보수파들은 이에 반발했으나 변화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 출범이후 신민회는 자신들의 깃발을 앞의 노란깃발에서 임시정부를 상징했던 오색기로 바꾸었다 (진짜 단체깃발이 그냥 옛 북양정부 깃발) 일종의 임시정부에대한 전통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기상으로는 신민회는 5월에는 대대적인 개조를 거치면서 친 국민당이자 친 왕징웨이 조직이 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민회와 왕징웨이측은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왕징웨이정권의 정치운동과 주변관계.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신민회는 존속되었고 개조가 되었음에도 왕징웨이 정권과 국민당의 행동에 반대와 견제를 해왔다. 신민회와 왕징웨이는 1940년 12월부터 다시 갈등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둘이 갈등을 벌인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왕징웨이정권이후 신민회는 국민정부를 용인하는 등 여러 개조를 거쳤으나, 결과적으로 신민회는 왕정권 이후 북지나방면군을 비롯한 일본측에서 완전히 장악되었다.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왕징웨이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일본 세력이 주가 된 것이었다. 따라서 신민회 조직의 구성은 왕징웨이 정권 이전과 이후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신민회는 이때부터 왕징웨이의 국민당을 용인은하지만 더욱더 철저한 친일조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신민회에서는 이탈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신민주의의 이론을 작성한 (일단은) 머우빈은 왕징웨이정권의 동아연맹운동에 감탄하여 신민회에서 나와 동아연맹운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트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려고 계획중) 머우빈은 동아연맹운동에서 "신민주의와 삼민주의는 같은것" , "삼민주의는 서양사상이아닌 동양 전통사상을 가져온것" , "삼민주의는 서양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 과 같이 머우빈은 자신이 신민주의 사상을 만들고 신민회의 주요 간부였음에도 왕징웨이의 동아연맹쪽으로 선회해버렸다. 신민회에서는 머우빈 외도 여러 인물들이 동아연맹쪽으로 선회했으며, 이렇게되며 신민회에는 보수적이고 국민당에 강경한 세력만 더더욱 남게 된 것이다. 동아연맹 중국동지회 (동아연맹의 난징지부)에서 발행한 잡지 "대아주주의 (大亞州主義, 대아시아주의)" 이번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 다루기만 하겠지만, 동아연맹운동은 1938년부터 시작되어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가 30년대 초반 초석을 닦고 여러 인물들이 더더욱 참가하면서 1938년 쯤에는 동아연맹의 완전한 이론이 완성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관심을 보였던 부분은 "정치의 독립" 이었다. 즉 (일본편이 된다는 가정아래에)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주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에서, 동등한 수준의 연맹을 제안했다는 소식에 중국인들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동아연맹운동은 빠르게 중국으로도 확산되었고, 이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는 물론이요, 친일 세력이었던 신민회가 있던 임시정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앞에서 보았던 머우빈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것있었는데, 머우빈은 "중국의 자유독립" 과 "동아신질서" 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머우빈을 비롯한 동아연맹운동 세력들은 1940년 초중반에 중국 곳곳에 동아연맹운동 지부를 세웠고, 왕징웨이도 일본으로 부터 자신의 정권 영향력을 높히기 위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렸다. 1940년 12월의 국민당(왕징웨이) 3중전대이후 부터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동아연맹운동을 주도해서 이끌게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의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했다. "동아연맹은 동아 각 민족이 각기 자유독립의 입장에서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며, 그 조건은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융합이다" - 왕징웨이, 1940년 11월 동아연맹중국동지회 결성식에서. (본래 정치독립은 동아연맹론에서 가장마지막에 언급되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제일 처음에 언급했다. 이를 통해 왕징웨이가 추구하고자 했던 바를 알수 있다.) 화북정무위원회 정문의 모습, 왕징웨이정권의 깃발이 그대로 걸려있다. 게다가 왕징웨이 정권의 지배에 있고 왕징웨이 정권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화북정무위원회에서는 그대로 사용했으나, 속에서는 왕징웨이정권에 반대하고 있었다. 화북정무위원회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일본 세력과 친일세력은 점차 일본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동아연맹운동이 점점 왕징웨이 정권 내에서 확산되면서 동아연맹운동 또한 화북에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신민회는 화북지역의 유일한 정치단체였다. 하지만 동아연맹운동이 화북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더이상 신민회는 화북지역의 완전한 지배자가 아니게 되었다.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은 동아연맹운동을 이용해 국민당을 화북에 확산시키길 원했다. 그렇기에 신민회 측에서는 화북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아연맹운동과 이와 함께 성장하는 왕징웨이의 국민당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일본에 대한 완전한 종속을 기본전제로 했던 신민회에게 "정치적 독립" 을 이야기하는 동아연맹운동과 국민당은 반가울 수 없었다. 심지어 동아연맹운동측에서는 "신민회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 라면서 신민회를 동아연맹운동에 흡수 시켜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신민회측과 더더욱 날을 세웠다. 이런 환경속에서 신민회는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동아연맹운동에 더더욱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신민회도 가만히 있지않고 1941년 12월에는 화북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寧次) 북지나방면군 총사령관은 "신민회육성대강 (新民會育成大綱)" 을 발표한다. 신민회 육성대강에는 "국민당과 동아연맹은 어디까지나 동지익우(同地益友)로서 사상과 정신을 함께하지만, 신민회와 국민당은 어디까지나 동등한관계이지 종속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라면서 국민당과 동아연맹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또한 "현재 국민당이 화북에 진출하려는 것은 자신의 본분인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을 소홀히 하는 것이며 이는 결코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라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화북에 진출할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왕징웨이의 국민당은 화중과 화남지방으로 충분하다면서 화북에서 신민회의 권위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다. 이후로도 신민회와 왕징웨이측은 계속 신경전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견제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1942년 10월 27일에는 "신민회 신강령 (新民會 新綱領)" 을 발표하게 되는데, 신강령은 다음과 같다: 신민회 신강령 (新民會 新綱領) 1.신민정신을 발전시킨다. 2.화평반공을 실현한다. 3.국민조직을 완성한다. 4.동아민족을 단결시킨다. 5.동아신질서를 건설한다. 일단 구호가 굉장히 간단해진것이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화평반공을 실현한다" 와 같은 구호에서 국민당과 왕징웨이 정권을 용인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동아신질서를 건설한다" 라는 구호와 "신민정신 (삼민주의가아닌) 을 발전시킨다" 와 같은 구호는 아직까지 신민회가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거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신강령을 소개하는 기사에도 "제 5조는 일본과 중국이 한몸이 되어 신세계를 건설한다라는 의미" 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신민회의 3대째이자 마지막 깃발. 亞를 형상화한 글자가 중앙에 들어가있다. (1943년부터 사용) . 1943년 3월 3일, 신민회는 새로운 깃발을 공개했다. 이는 3대째 사용된 깃발로서 해체시까지 사용되었다. 이 깃발 이전에 이를 위한 과도기적 깃발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 과도기적 깃발이 언제사용되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좀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3세대와 비슷한 형태를 띄지만 다른 글자가 적혀있는 신민회 깃발의 모습. 1943년에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국가는 전시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지난 포스트에서도 이야기했듯 1943년은 신국민운동 (新國民運動) 이 가장 강력하게 진행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신국민운동에 대해 궁금하다면 : 여기를 클릭) 지난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은 이 신국민운동의 실천을 자신의 영향력이 약한 신민회를 제어할수 있는 또다른 기회로 보았다. 신민회가 아무리 국민당에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앞에서 오카무라 야스지가 이야기했듯 결국은 동지익우 (同志益友) 관계에 있었기에 신민회도 어쩔 수 없이 신국민운동의 노선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왕징웨이쪽의 정책을 실행할 수 밖에 없게 된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번에도 신민회를 제대로 자신의 영향권으로 편입할 수 없었다. 일본군을 비롯한 기존의 강경한 신민회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국민당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신민회측에서 더더욱 손을 썼는데, 이는 바로 "왕징웨이를 신민회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기" 였다. 신민회는 1943년 4월 2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참전하면서 중지(中支)와 북지(北支)의 일체화는 이제 필수조건이 되었다면서 두 지역의 통합을 위해 왕징웨이를 신민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왕징웨이가 이를 받아드림으로서 이 시점에서 신민회는 이제 완전한 왕징웨이의 조직이 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직은 명예회장으로서 큰 역할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왕징웨이가 신민회 명예회장으로 임명되고 왕징웨이가 이를 받아드림으로서 "신민회의 존재이유가 정당화" 되어버리는 역효과를 낳아버리면서, 결과적으로 왕징웨이는 이번에도 겉으로만 주도권을 장악한것 처럼 되어버렸다. 신민회에서 발급한 신분증명서, 1945년 6월에 만든것으로 전쟁말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후 1943년이 끝나갈 무렵, 왕징웨이가 주도했던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가 쓰러지고, 전황이 나날히 악화되면서 힘을잃고 그의 국민당과 정부가 동시에 힘을 잃었듯 신민회 역시 일본의 패배가 점점 확실시 되면서 약화 되어갔다. 신민회 또한 이후 세를 불리지못한 채 점점 축소되어갔다가 일본이 패망하면서 신민회도 함께 사라졌다. 참고로, 신민회의 중요간부였다가 동아연맹의 주요간부였던 머우빈은 1945년 3월 자신은 1943년 다시 변절하여 장제스 충칭정권과 연락하고 있고 장제스의 밀명을 받고왔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측에 중국과의 종전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이 협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아직까지도 머우빈이 실제로 장제스 정권측으로 다시 변절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신민회의 성격을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했었던 것은 신민회는 왕징웨이 정권 이전에도, 이후에도 화북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되지 않는 조직이었다. 오늘 포스트에서 신민회가 행한 여러 활동들에 대해서 소개했지만, 이는 극히 일부분으로, 기록을 찾기 어려운 활동들도 훨씬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신민회가 어떤조직이었는가, 어떤특징을가지고 있는가를 알기에는 이정도 서술이어도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오늘의 서술속에서,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권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지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이름바 "가짜정권" 으로 불리는 조그만한 정권속에서도 치열한 정치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후에 왕징웨이정권 내에서의 치열한 정치싸움을 더 이야기해보고싶다.) 또한 신민회는 왕징웨이에게 맞설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조직이었다. 동시에 여러가지 흥미로운점을 제공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왕징웨이 정권 수립이후 더더욱 진행된 보수화, 왕징웨이 정권의 동아연맹운동의 등장으로 발생한 조직내의 이탈등 왕징웨이와 신민회의 견제관계는 근 3년간 지속되었다. 충칭입장에서는 가짜정권에서 가짜조직끼리 싸우면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는 이 모습을 어떻게 봐라봤을까. [출처] 윤형진, 「점령지 통치와 주민조직 - 북경(北京)의 신민회(新民會) 직업분회를 중심으로 -」, 『史叢 93』 , 2018 菊地俊介, 「日本占領下華北における新民会の青年政策」, 『現代中国研究 第 26 号』, 2015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2009 鞆谷純一, 日中戦争下 北京における抗日図書の接収 -中華民国新民会の活動中心に」, 『図書館史中国 第 57 号 』, 2006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매일신보 1942년 10월 27일자 / 1943년 4월 3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대아주주의 : https://archive.org/details/dayazhouyuyi-1942.4-2 왕커민 포스터 : https://www.kosho.or.jp/products/detail.php?product_id=430462189 신분증명서 : https://asiamedals.info/threads/1943-new-peoples-society-of-the-republic-of-china-shinminkai-commemorative-badge.26464/ 청소년조직관련사진 :http://codh.rois.ac.jp/north-china-railway/search/metadata?text=%E6%96%B0%E6%B0%91%E4%BC%9A 신민회 회수무지 :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title=File:NLC416-11jh002500-56942_%E6%96%B0%E6%B0%91%E6%9C%83%E6%9C%83%E5%8B%99%E9%A0%88%E7%9F%A5.pdf&page=5 신민회 발기식사진 : https://wapbaike.baidu.com/tashuo/browse/content?id=15c17d144184600ca9410f95 화북정무위원회 사진 : https://kknews.cc/zh-mo/history/xjevyqq.html 정부연합위원회 사진 : https://digitalcommons.chapman.edu/japanese_propaganda_posters/6/ 오색기 / 장옌칭 : 위키피디아 중문판 각각의 문서

  • 동아신문기자대회 (東亞新聞記者大會) 1941. 8.4~8.7

    광저우 중산기념당에서 개최된 동아신문기자대회의 개회식 모습, 만주국, 난징국민정부, 일본의 깃발이 보인다. 동아신문기자대회 (혹은 동아기자대회) 는 1941년 8월 4일부터 8월 7일까지 3일간 중화민국 광동성 광저우시 중산기념당 (現 중국대륙 광동성 광저우시 중산기념당) 에서 개최된 일본-만주국-중화민국 국민정부 (왕징웨이정권) 3국의 기자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대회를 주최한 것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로, 린바이셩 (林伯生, 임백성) 선전장관이 단장을 맡고 광동성 정부가 함께 주가 되어 만주국 측과 일본측을 초대하는 형태로 이루어 졌다. 대회는 1941년 6월에 처음으로 대회를 할것임을 이야기하고 계획을 세워 선전부와 광동성이 함께 준비위원회를 꾸려 대회를 준비했다. 린바이셩 (林伯生) , 그는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장관이자 중국청소년단 (中國靑少年團) 의 위원을 맡기도 했다. 동아신문기자대회의 목적은 동아의 5억 5천민중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서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필요성을 동아의 민중들이 인식하고 각성하게 하는 이치를 전달하는 기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일본-중국-만주간의 언론들이 마치 하나처럼, 통일된 규범을 가지고 통일된 보도와 선전이 필요했기에 이를 위해 이를 논의하고 협의하는 것이 필요했다. 즉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일본-만주-중국(왕징웨이)의 기자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동아기자대회에는 총 108명의 기자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의 국적은 다음과 같다. 보다싶이 개최국인 왕징웨이 정권이 79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했고,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은 22명, ( 만주국은 7명이 참가했다. 조선에서는 당시 매일신보 (每日新報) 의 주필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서춘(徐椿, 1894~1944) 와 그의 자매, 경성일보의 사무국장까지 3명이 참가했다. 서춘은 자신의 삼천리 제13권 제11호에서 쓴 동아기자대회 기행문에서 경성에서 출발하여 대만으로 거쳐 광동으로 가는 과정에서 "중국해안에 떠다니는 배는 모두 일본배" 라면서 일본제국 해군의 제해권 장악능력에 감탄을 표하고 광동에는 "빈민이 너무나도 많다" 와 같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동아신문기자대회 1일차 (1941.8.4) 오전 8시 30분, 기자들이 중산기념당에 모여있는 가운데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두가 기립해 일본제국, 만주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삼국의 국가를 제창하고 (이때, 개최국인 중화민국의 국가가 제일 먼저 연주되었다.) 삼국의 국기게양식을 거친다음 행사의 단장을 맡았던 린바이셩이 개회사를 말하면서 대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 난징국민정부의 광동성주석이었던 천야오주 (陳耀祖, 1892~1944, 진요조) 가 환영사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왕징웨이가 직접 훈사를 맡았다. 훈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번 일만화(日滿華) 삼국의 언론계의 많은 권위자들이 광동에 모이는 기회를 얻게 된것은 신동아건설의 길에 있어 의미가 깊은 일입니다. 모두가 잘 알다싶이, 광동은 손중산의 고향이자 국민혁명군의 발상지입니다. 손중산 선생의 시종일관적인 혁명에 관한 주된 방침은 구주(유럽)의 동아침략정책과 중국의 위기를 인정하고 중일양국은 연합하여 한몸이 됨으로서 동아의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그렇기에 이번 대회야말로 삼국에게 있어 실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아의 동포다' 라는 말 속에는 슬픔, 비극, 고통, 고난을 함께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 속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국가를 사랑함과 동시에 친구의 국가도 사랑하고, 동아전체에 경애의 마음을 표하면서 의의를 가져야합니다. " 왕징웨이를 이어 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 군사령관, 소지마 다이스케 (副島大助) 해군사령관, 타카쓰 토미오(高津富雄) 광동일본총영사관 영사, 독일영사, 이탈리아 영사가 축사를 발표했다. 오후가 되어서는 삼국의 대표가 각각 각국의 언론상황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1일차 일정을 마무리했다. 동아신문기자대회 2일차 (1941.8.5) 2일차 일정은 8월 5일 오전 9시부터 중산기념당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날에는 동아기자단협회(東亞記者團協會) 설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를 위해 각국에서 5명의 추진위원을 발족했다. 또한 삼국대표의 공동제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 제안이 무엇인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후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해서 정치, 경제, 문화 3분야에 관해서 좌담회를 시작했다. 각 분야당 3시간의 시간동안 좌담회가 진행되었는데 이 좌담회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정치분야 (일본측이 대표를 맡음) 대동아공영권에는 화평이 전제 되기에 화평문제가 우선시된다. 중국의 전면적인 화평을 펼치기 위해서는 일본측의 아낌없는 협력이 필요하고 중국(왕징웨이) 는 용기와 결의를 가지고서 이에 임할 필요가 있다. 경제분야 (만주측이 대표를 맡음) 중국 경제의 부흥을 위해서는 중국 점령지 내의 치안의 확립과 교통의 발전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측은 전쟁의 수행과 동시에 중국의 경제부흥을 위해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또한 화폐 문제를 해결해야하고 동아경제를 확립해야 한다. 문화분야 (국민정부측이 대표를 맡음) 기자들인 만큼 문화분야에 있어서 많은 논의가 오고갔는데, 그중에서는 동아신문협회 (東亞新聞協會) 의 활동을 확대해야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의제중의 하나였다. (동아신문협회는 1940년 6월 난징에서 설립되어 이미 이전부터 일본과 중화민국국민정부 양국의 기자들이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동아신문협회를 만주국으로 확대하고 더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가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삼국의 기자들은 몇가지 공통된 의견을 모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언어로 인한 불편 (상호간의 소통불가, 글을 읽지못함 등) 을 해소하기 위해서 각국가의 언어를 학교필수과목으로 할 필요가 있다. - 일본의 한자제한을 최소한 3천자 까지 할 필요가 있다. - 삼국의 실정을 소개하기 위해서 상호간에 견찰단을 파견- 교환하고 이를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다. 동아신문기자대회 대회장에서 촬영된 기념사진의 모습. 2일차 일정에는 동아신문기자선언 (東亞新聞記者宣言)이 이루어졌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신문기자선언 (東亞新聞記者宣言) 유럽 추축각국은 유럽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벌써 착착 전진하고 있고 동아각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그 최대의 노력을 가하고 있다. 이 신질서 건설의 반향(反響)으로서 동아민족이 해방을 쟁취하기에 때마침 주어진 이 기회에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만민의 단결하여 협력공존하는 것으로서 제1의 요지로 하기위해 이 원칙에 의거하여 정치상에 있어서는 상호간의 독립을 존중하고 구조적으로 단결한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유무상통(有無相通) 하여 장단상보(長短相補) 함으로서 평등한 상호간의 경제제휴를 확립한다. 군사상에 있어서는 공작을 분합함으로서 공통의 안위를 위한 공동방위를 도모한다. 문화상에 있어서는 동아본체의 문화적 입장에 입각하여 자신과 다른 문화의 문화적 융합을 기도함으로써 세계에 동아문화의 발전을 보여준다. 신문은 사상과 정보의 선구(先驅) 로서 우리는 동아신문계를 동원하여 전력을 다해 동아신질서 건설의 사상을 선전하여 구질서 압제자와 싸우려 한다. 동아신문계의 모든 무기를 동원해 동아문화의 융합과 창조를 위해 최대의 노력을 가한다. 신문은 선전보도의 선봉이다, 우리는 동아신문계의 전 투사를 동원하여 동아의 안전에 힘을 다해 나아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려 한다. 구질서의 붕괴는 코앞에 있으며 신질서의 영광은 이미 목전에 있는 오늘, 우리는 뜻을 하나로 하고 이를 위한 발걸음을 함께하며 공동의 장래를 위하여 함께 분투한다. 이자리서 이를 선언한다. 동아신문기자대회 3일차 (1941.8.6) 3일차부터는 2일차에 이미 중요일정이 끝난 상황으로, 논의보다는 시찰에 가까운 일정으로 구성되었기에 신문을 비롯한 자료에서도 자료가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3일차 일정으로는 오전에는 신해 혁명 이전의 중국동맹회의 공화봉기를 기념하는 황화강72열사릉(黃花崗七十二烈士墓) 을 방문해 참배하고, 육해장병들이 치료하고 있는 병원을 방문하여 이들을 격려했다. 오후에는 동아연맹(東亞聯盟)의 각 현 대표들을 만나 동아연맹운동에 대한 실정을 보고받았다. 동아신문기자대회 4일차 (1941.8.7) 마지막날인 4일차에는 폐막식 행사를 가졌고, 폐막식에서 삼국대표들은 이 행사를 주최할 수 있게 해준 왕징웨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2일차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안을 전보로 일본의 고노에 수상에게 발송했다. 이후 이렇게 3일간의 광저우에서의 동아신문기자대회는 막을 내렸다. 놀랍게도, 이 동아신문기자대회는 광동에서의 대회로 부터 1년이 지난 다음해인 1942년 8월 4일에 제 3차 대회가 열리게 된다. 3차대회라는 것은 이번대회가 2차대회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1차대회는 언제 개최된 것일까? 1차대회는 1940년 2월 8일 일본 도쿄시가 주최하여 개최된 동아문필가/조고자 대회 (東亞文筆家/操觚者大會) 를 의미하는 것으로, 동아신문기자대회와 비슷하게 일만화 삼국의 신문기자들을 초청하여 언론에 관한 논의를 하는 대회였다. 3차대회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에서 이루어졌다. 놀라운점은 대회를 소개하는 기사에서도 신징에서 이루어지는 대회가 이번글의 주제인 광저우에서의 동아신문기자대회를 2대로 보고 이를 계승한 3대 대회임을 이야기하지만, 대회의 명칭은 "동아신문인대회 (東亞新聞人大會)" 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징에서 진행된 2차대회에서는 일본에서 38명(조선포함), 난징국민정부에서 19명, 몽강에서 4명,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4명, 태국에서 5명, 만주국에서 30명이 참가하면서 광저우에서의 대회보다 참가국이 증가했다.) 이런식으로 공영권 내에서의 기자들간의 교류는 1943년의 대동아신문대회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전황의 악화로 대회는 이후로는 개최되지 못하고 일본은 패전을 맞이했다. 동아문필가/조고자대회부터 대동아신문대회까지 이어지는 네차례의 공영권 내의 기자들간의 교류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이루어졌던 대동아문학자대회(大東亞文學者大會) 와 같은 공영권 내의 지식인 교류행사 중 하나였다. 대동아신문기자대회를 보도하는 일본뉴스 제 63호 (영상)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448_00000 [출처] 매일신보 1941년 7월 20일자 / 1941년 8월 6일~7일자 / 조선신보 1941년 8월 8일자 / 부산일보 1940년 2월 8일자 등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한국근대잡지자료 - 삼천리 제 13권 11호 : https://db.history.go.kr/id/ma_016_0870_0120 한국민족대백과사전 - 서춘 / 동아신문기자대회 사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238 린바이셩 자료 : Wang Jingwei and Lin Baisheng Photograph collection / https://exhibits.stanford.edu/wangjingwei/catalog/dp130sv2563 상단의 사진 : https://kknews.cc/culture/6ox96e3.html

  • 유광렬 (柳光烈)의 왕징웨이와의 회견 (1940.4.1)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언론인 유광렬의 보도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유광렬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유광렬 (柳光烈, 1899~1981) , 태평양전쟁 시기 친일 행위를 하여 지금까지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아있는 그는 1940년 3월,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편집국장으로 난징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왕징웨이 정권의 환도식전과 왕징웨이와 인터뷰를 하게된다. 유광렬 (柳光烈, 1899~1981) 은 파주에서 태어나 1919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每日新報) 에서 기자로서 언론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동아일보의 창간에 합류하여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1940년 그는 자신이 청음으로 기자활동을 하였던 매일신보로 돌아와 그곳의 편집부장이 되었고, 편집부장인 그는 1940년 3월 30일의 난징국민정부 환도식전에 참가하여 이를 취재하게 된다. 그는 이후 매일신보에 자신의 난징취재기를 연재하였는데, 이는 4월 3일자 매일신보 1면의 [重慶側의 迷夢打開 全面的和平에 邁進-南總督, 中村軍司令官 메시지에 感謝-柳本社特派員, 汪氏와 會見] (중경측의 미몽타개, 전면적화평에 만진 - 미나미 총독, 나카무라 군사령관 메시지에 감사- 유 본사 특파원, 왕씨와 회견) 이라는 기사에서 자신을 비롯한 기자단과 왕씨의 회견내용을 수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는 같은 날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다른 조선의 신문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는데, 이는 유광렬이 난징에 파견된 "유일한 조선인 기자" 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매일신보는 이러한 유광렬의 취재기를 단독으로 보도 할 수 있었다. (매일신보를 제외한 여러 조선의 언론이 이를 보도하러 난징에 왔지만, 이들은 유광렬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기자였다.) 또한 그는 1940년 4월 15일에 그는 태평통 부민관 (경성부민관을 의미) 에서 열리는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에 직접 참가하여 자신이 난징에서 취재한 바를 강연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임광렬의 《국민정부 환도식전 참관의 관상 》 이라는 강연제목을 볼 수 있다. 또한 4월 18~19일자 매일신보 1면에서 그는 자신의 환도식전 취재기록을 다시 한번 연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유일한 조선인 기자였던 임광렬이 난징에서 겪었던 일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조선인 기자의 임광렬의 취재기를 토대로 왕징웨이 정권 성립 당시를 묘사해보려 한다. ( 행사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제가 이전에 작성하신 글을 보고 오시면 더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B%82%A8%EA%B2%BD%ED%99%98%EB%8F%84%EA%B9%8C%EC%A7%80%EC%9D%98-%EC%9D%BC%EC%A3%BC%EC%9D%BC-%EB%AC%B4%EC%8A%A8%EC%9D%BC%EC%9D%B4-%EC%9E%88%EC%97%88%EB%82%98-1940-03-23~03-30 )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일행은 28일 이전에 난징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확한 도착날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27일 혹은 26일로 생각된다. 임광렬을 비롯한 일행은 난징의 수도반점(首都飯店) 을 숙소로 이용했다. 임광렬의 글에서 일본과 각국의 기자단들 또한 수도반점을 숙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아, 일본 혹은 왕징웨이정권측에서 수도반점을 일종의 프레스센터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8일 (木)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일행은 중산북로에 있는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도주의사항에 대해 들은후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를 회견하고 계림호(鷄林號)를 타고 이미 27일 난징에 도착했던 신용옥 (愼鏞鈺) 신항공사사업사장 과 함께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사장,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니시오 사령관은 이를 일일이 신중히 읽으면서 ,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미나미 지로 총독각하와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 각하로 부터 이런 간곡한 말씀을 주시다니 감사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또한 매일신보 사장으로부터 격려의 말씀을 주시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욱 반도민중의 총후봉공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라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이후 유광렬과 신용옥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후 신용옥의 계림호는 상하이로 향했다. 임광렬은 자신의 글에서 자신도 함께 상하이로 동행하고 싶었으나, 다음날 있을 국민정부환도식전의 취재준비가 미비할 것을 우려하여 함께 가지 않았다. 3월 29일 (金) 이 시점에서 이미 프레스센터 수도반점은 임광렬을 비롯한 기자단 뿐만 아니라 중국 현지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기자단들이 대거 모여있었다. 이 시점에서 임광렬은 걱정을 했는데, 총사령부 보도국에서 왕징웨이의 환도식전에 참가할 인원을 300명으로 제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230명의 기자가 이를 보도할 수 있었다. 일본언론 (조선포함) 100명, 중국 60명, 기타국가 70명이 배정되었다.) 보도국에 따르면 각 언론사에서 1명정도는 대체로 수용이 될 것이라고 했으나, 문제는 보도국에서 3월 22일의 중앙정치위원회 회의를 참관한 언론에 우선권을 부여하기로 결정되었고 또한 100명으로 제한된 일본언론의 참가권의 대다수가 이미 일본 국내의 대형언론의 고정으로 할당됨에 따라 남아있는 참가권은 단 4장. 이로 인해 일본 국내기자들도 대다수가 참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라고 하니 조선에서 출발했으며 중앙정치위원회 회의 이후 난징에 도착한 임광렬을 포함한 매일신보 기자단은 이를 취재하지 못할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에서부터 모처럼 먼길을 오신 조선기자들에게 편의를 드리겠다" 다행히도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언론들의 사정을 들은, 특히 유광렬이라는 조선인 기자가 취재를 왔다는 이야기에 보도국에서는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언론의 기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고. 이로인해 유광렬과 다른 기자단은 무사히 내일 있을 환도식전을 참관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30일 (土), 국민정부 환도식전 당일날 보도국에서 8시 반까지 난징 계림사(鷄林寺) 안의 고시원 (考試院) 앞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임광렬과 기자단은 자동차를 몰아 계림사로 향했다. 이날 아침에는 봄비가 내렸는데,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미 계림사에는 수많은 기자단의 차량들이 모여있었다고 한다. 계림사 안에서는 친위대들이 도열을 하며 기자단들을 환영하고 있었고, 기자단들은 계림사의 "천하위공 (天下爲公)" 이라는 쑨원의 필체가 적힌 고시원 정문을 통과하여 행사장으로 향했다. 실제 계림사 고시원의 정문모습. 천하위공 (天下爲公) 이라는 쑨원의 필체가 세겨져 있다. 오전 9시가 되자 현장에서는 3발의 큰 폭죽이 터졌고, 군함 하이스이 (海綏) 에서 예포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왕징웨이가 고시원 정문 뒤 광장에 도착했다. 왕징웨이와 요인들은 새로운 왕징웨이의 화평반공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 (和平反共建國靑川白日萬地紅旗)의 국기게양식을 가지고, 임광렬을 비롯한 현장의 모두가 중화민국의 국가를 제창했다. (이때 어떤 버전의 노래가 사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에서는 기존의 괴뢰정부들이 사용하던 경운가 (卿雲歌) 가 울려퍼졌다고 서술했는데, 국민정부의 계승을 이야기했던 왕징웨이 정권이 이러한 경운가를 사용했다고는 생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정부의 국가 (삼민주의가) 혹은 국기게양시에 사용하는 (국기가) 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광렬은 이때 자신의 글에서 왕징웨이가 이때만 하더라도 긴장을 많이 했는 모양인지 왕징웨이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서술했다. 이후 쑨원의 묘가 있는 중산릉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왕징웨이 정권의 각 부원장의 임명식을 가졌다. 그리고 행사 일동은 바로옆의 신설된 난징 국민대회당의 중앙강당에서 오전 10시 연설을 시작했다. 이가 바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환도선언" 이었다. [환도선언에 관한 내용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A%B5%AD%EB%AF%BC%EC%A0%95%EB%B6%80-%ED%99%98%EB%8F%84%EC%84%A0%EC%96%B8-%E5%9C%8B%E6%B0%91%E6%94%BF%E5%BA%9C-%E9%82%84%E9%83%BD%E5%AE%A3%E8%A8%80-1940-03-30 ] 그의 서술에 의하면 환도선언을 읽을 때 왕징웨이는 이전의 국기게양식을 비롯한 식전행사보다 더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인사들은 대회당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가졌다. 이때의 분위기를 임광렬은 "매화꽃이 만개했으며, 두마리의 비둘기가 화평을 환영하듯 날아갔다." 라고 묘사했다. 국민대회당에서의 환도선언 발표가 끝나고 11시부터 별관에서 왕징웨이와 기자단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때 200명의 기자가 기자회견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유광렬도 앞에서 이야기했듯 보도국의 배려로 이곳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통역은 저우포하이가 맡았다.) 왕징웨이는 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정부 경제정책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이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 중일 양국이 이로부터 협력하여 동아의 신기원(新紀元) 을 짓게 되었음은 (기자) 여러분들이 이미 본 바이며, 신중국의 탄생도 이미 여러분들이 본바이다. " - 왕징웨이와 기자단의 회견 中 임광렬은 이러한 기자회견에서 왕징웨이의 버릇을 하나 찾아냈는데, 환도식전을 읽을 때도 안경을 쓰지 않았던 왕징웨이가 기자회견에서는 안경을 쓰고 나와선 계속 말을 하는 중에 안경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임광렬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행동을 그의 버릇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임광렬과 기자단은 숙소로 돌아와 조선의 신문사 본부에 보낼 전보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서술에 따르면 이때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을 축하하는 거리행렬이 그의 숙소 근처를 지나갔다고 한다. 임광렬은 창문을 넘어 이러한 행렬을 봤는데, 이 행인들의 수가 실로 수만은 되는 것 같으며 끝이 없어 보인다고 서술했다. 4월 1일 (月) 임광렬과 매일신보 기자단은 4월 1일에 추가로 진행된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번 30일의 회견보다는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후 4시, 임광렬과 기자단은 30일 기자회견을 했던 별관에 도착했다. 건물안의 정원을 지나 방에 도착했는데, 이방에는 여러개의 그림이 있었고, 왕징웨이가 앉을 중앙의 테이블에는 아직 피지 않은 복숭아꽃이 도자기속에 있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기자대표가 기원 2600년 (1940년) 을 기념하는 축주를 전달했고, 이후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했다. 이후 여러 언론의 기자단이 모여있던 큰 방에서의 회견은 끝이나고 각각의 언론이 각각의 축전을 전달했고 이후 왕징웨이는 매일신보의 기자단을 조용히 별관의 식당으로 초대했다. 왕징웨이가 일본의 거대언론도 아닌 조선의 언론을 초대한데에는 매일신보 기자단이 먼 곳에서 온 것에 대한 감사인사로 생각된다. 또한 임광렬이라는 조선인 기자가 있었다는 특징도 있었다. 왕징웨이는 식당에서 임광렬을 포함한 매일신보 기자단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권했다. 임광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징웨이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의 왕징웨이를 세기적 위인(偉人) 이라 평가했고 이러한 위인 과 가까이 할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했다고 자신의 서술에서 밝혔다. 왕징웨이는 이자리에서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에 대한 감사를 기자단앞에서 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들께서 직접 보신바와 같이 국민정부의 환도는 선언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선언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전면 화평을 실현하여 중경측으로 하여금 용공항일 (容共抗日) 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 "나는 우선 우리의 노력이 미치는 구역에서 화평을 실현하여 "화평건국" 이 가능하다는 나의 굳센 신념을 보여주려 합니다. 우리의 화평건국과 중경측의 민족보전은 다른말같지만 사실 같은 말입니다. 이제부터 나와 정부직원들은 이를 위해 전력을 다해 집중할것입니다. " "일본의 흥아론이 정당한 이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한것은 저의 일생에 있어 잊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국민정부의 환도에 대하여 정중한 축전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도 직원일동과 함께 일치협력 (一致協力) 하여 여러분들의 뜻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자리가 준비는 변변치 않지만 다같이 정답게 가슴속에 품어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왕징웨이는 기자단에게 이렇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기자단과 함께 만찬에 참가했던 신용옥을 소개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왕징웨이는 이렇게 물었다.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하자 신용옥은 편도로 비행할시 다섯시간 이면 갈 수 있다고 회답했다. 이후 유광렬이 직접 왕징웨이에게 직접 자신이 환도식전의 연설에서 감동받은 부분을 이야기했다. "각하께서 삼민주의의 민생주의(民生主義) 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공자의 대동주의 (大同主義) 라는 말에 대하여 조선의 청년들은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이전부터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기에 각하의 말에 더더욱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노력에 힘입어 대동주의는 동양에 더더욱 확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에 왕징웨이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민생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동양에는 동양고유의 정신이 있습니다. 조선의 청년들이 이러한 옛 정신을 존중한다는 이야기에 기쁜 마음을 금할수가 없군요. 이러한 혼란의 세계 속에서 도의(道義) 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광렬은 자신의 서술에서 왕징웨이의 이런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왕징웨이를 눈빛은 총명하며, 목소리는 힘이있고, 열정이 있는 모습이 중국의 오억인구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다웠다고 평가했다. 그날의 점심 메뉴는 "샌드위치" 였다. 왕징웨이는 직접 큰 접시의 샌드위치들을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광렬은 이러한 샌드위치를 나누어주는 왕징웨이의 손을 보며 "몸은 그렇게 가는 사람이 손가락은 왜이리 굵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샌드위치를 먹고 차를 마시고 난후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를 직접 유광렬에게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광렬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식찬을 마무리 하면서 기자단의 마츠모토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선은 합병이후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조선과 일본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흥아정신에 불타고 있다" 라는 말에 왕징웨이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왕징웨이가 이러한 기자의 말에 답변이나 맞장구를 치지 않고 단순히 끄덕거린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이렇게 25분의 사실 다과회에 가까운 식사시간이 끝나면서 매일신보 기자단의 회견은 끝이 났다. 왕징웨이는 별관 정문 앞까지 나와 고개까지 숙이면서 친절히 기자단을 배웅하였다고 한다. 임광렬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친절을 높이 평가하고 왕징웨이와의 만남을 "일생 뼈속까지 감격한 일" 이라고 서술했다. 임광렬은 해방이후 자신의 과거 친일행적을 숨기기 위해 자신은 1940년 매일신보에서 미움을 보여 "해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일본기자들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면담시간을 가진 것에 대해 일본기자들의 미움을 샀고, 이로 인해 해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행적을 1면에 당당하게 특집으로 게재 했다는 점, 친일행각으로 보이는 행동이 오히려 1940년 매일신보를 떠난이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임광렬이 1940년 매일신보를 떠나야했던 것은 압박으로 인한 해임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사정, 더욱 발전된 친일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광렬의 이러한 취재와 면담은 일종의 친일행위였지만, 식민지 조선과 왕징웨이 정권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몇되지 않는 연결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광렬의 서술이 親日, 親 왕징웨이정권적으로 고의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광렬의 취재기가 다른 언론의 왕징웨이정권 환도식전을 다루는 기사와 크게 다른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신뢰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4월 3일자 / 4월 18~19일자 https://nl.go.kr/newspaper/index.do 유광렬의 사진 http://dongne.donga.com/2018/09/28/%E6%9D%B1%E4%BA%9E-100%EB%85%84-%E6%9D%B1%E5%8F%8B-100%EC%9D%B8-%EC%9C%A0%EA%B4%91%EB%A0%AC/ 계림사 정문의 사진 - Wang Jingwei and Lin Baisheng Photograph collection https://exhibits.stanford.edu/wangjingwei/browse/lin-baisheng-410541fb-2e47-4020-9ae1-8057c4ddb318

  • 구축함 하이스이 (海绥)

    구축함 하이스이의 일생, 48년 퇴역전까지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청은 이미 이전부터 하이륭급 (海龍級)의 구축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이 의화단 운동에서 서양열강의 연합국에게 패배하면서 이 하이륭급 구축함 4척은 대영제국,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프랑스에게 나포, 그들의 해군에 편입되어 잃게 되면서 청 정부는 1909년 새로운 구축함을 갖추기 위한 계획에 나서게 되었다. 청 정부는 새로운 구축함의 급명을 창펑급 (長風級) 이라 정하고 독일제국의 시하우-베르케 조선소에 390톤급의 구축함 3척을 주문하게 된다. (본래 1척을 계획했으나 1911년 2척이 추가되었다. ) 그리고 이야기해볼 2번함인 푸보(伏波)를 비롯해 1번함에는 창펑(長風), 3번함에는 페이운(飛雲) 라는 이름을 붙혔다. 하지만 이 창펑급 구축함 3척은 모두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한 뒤에 중국으로 인도되었다. (1번함이었던 창펑은 청 멸망이전에 완성되었으나, 인도가 늦어져 인도가 이루어진 것은 중화민국 수립이후였다.) 그렇기에 청을 이은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이들을 그대로 인수하여 그대로 운용하게 되었다. 푸보를 포함한 창펑급 구축함 3척은 1912년 11월 7일 정식으로 중화민국 해군에 편입되었는데, 편입 당시에는 푸보를 비롯한 3척의 구축함 모두 청대 계획되었던 이름을 유지하려 했으나 당시 같은 이름의 배들이 존재해 중복되어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3척의 구축함 모두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할 2번함 푸보는 지엔캉 (建康,건강) 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배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배의 사진이야기부터 하고 시작을 하고싶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중문판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진을 푸보의 사진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中國新海軍插圖 (중국신해군삽도) 의 자료로서 푸보를 묘사했다는 사진, 인터넷상에서는 이 사진이 유일하게 푸보를 비롯한 창펑급 구축함의 유일한 사진 자료인데, 필자는 이사진에는 의문을 표하고 싶다. 이는 중국신해군삽도가 1948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것, 또한 이시대에 이미 푸보는 지엔캉(建康)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이후라는것, 또한 동시대에 실제 푸보라는 배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푸보의 사진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청나라 말기의 창펑급 구축함 2번함 푸보가 아닌, 2차대전 승전이후 중화민국에 편입된 푸보라는 배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이다. 1947년 중화미국 해군에게 인도된 영국해군의 H.M.S.Petunia. 그리고 이배는 중화민국 해군에 인도된뒤 푸보(伏波) 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연돌을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위의 사진과 유사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점 때문의 중문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 푸보(창펑급 구축함 2번함의) 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은 이 1947년의 푸보의 사진이 잘못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음 사진을 보자. 1929년 촬영된 창펑급 구축함 3번함 퉁안(同安) 의 모습. 위의 두 사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모습이 실제 푸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이 사진이 오히려 푸보의 모습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작하기 전에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시작하고 싶었다. 아무튼, 1912년 지엔캉(建康) 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푸보는 계속하여 중화민국 해군에서 활동하게 된다. 쑨원의 호법정부가 탄생하면서 북양정부가 분열된 시점에서 지엔캉은 쑨원의 호법정부가 아닌 북양정부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북벌의 과정에서 지엔캉은 북양정부에서 탈출하여 국민정부의 국민혁명군에 합류했다. 이후에는 구축함의 역할보다는 어뢰를 주로 사용하는 어뢰유격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지엔캉을 비롯한 창펑급 구축함들은 이미 노후화 되어 구식으로 취급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지엔캉 역시 일본과의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다루었듯 이미 이전부터 지엔캉을 비롯한 창펑급 구축함은 크기도 작고 속도도 20노트밖에 나오지 않는 구식함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1937년 9월 25일, 지엔캉은 장인전투에 참가했다. 1번함이었던 창펑은 1932년 이미 사고로 침몰했고, 3번함이었던 퉁안은 중일전쟁 발발당시 칭다오에 있었기에 지엔캉 만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장인전투에서 지엔캉은 일본 항공기의 폭격으로 침몰하고 있는 순양함 이셴( 逸仙) 에 접근하여 이셴의 승무원들을 구조했다. 하지만 구조를 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지엔캉 역시 일본 항공기의 폭격을 받게 되었다. 지엔캉은 대공포조차 없는 구식 함선이었기에 가지고 있던 75mm 함포를 고각으로 사격하고 함 내에 구비되어있던 소총들까지 동원하여 일본 항공기에 대공사격을 가했지만, 안타깝게도 일본항공기의 공격으로 4발의 폭탄과 기총사격으로 침수되어 장강에 좌초되었다. 장인에서 일본 항공모함 카가(加賀) 의 공격을 받고 좌초된 중화민국 해군의 순양함 이셴 (逸仙). 지엔캉은 이셴의 승무원을 구조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일본 항공기의 공격으로 침수되어 좌초되었다. 이후 1938년, 일본은 수리함 아사히(朝日) 를 이용해 좌초된 지엔캉을 다시 인양하여 수리한다음1938년 7월 13일 수리를 끝내고 翆(야마세미) 라는 이름으로 일본해군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939년 12월 21일, 일본은 이 야마세미를 다시 유신정부측에게 제공하였다. 유신정부에서는 이배의 이름을 일본의 협조로 (協助) 바다를 (海) 평정한다 (绥靖) 라는 이유로 하이스이(海绥) 라는 이름을 붙혀 사용했다. 그리고 하이스이는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면서 이름을 유지한 채 그대로 다른 군함들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의 해군에 편입되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일이자, 중화민국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수도환도식전에 참가하게 된다. (수도환도식전에 관한 내용은 여기 와 여기 와 이곳을 참조) 3월 30일 오전 9시, 식전의 시작과 함께 폭죽 3발이 터지자, 하이스이는 환도식전이 열리는 난징 국민대회당 근처의 장강에서 정박하면서 축포를 21발 발포 했다. ( 일반적으로 국가원수를 대우할 때 21발을 발포한다. 국가원수였던 왕징웨이를 예우하기 위한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21발의 축포가 발사됨과 동시에, 식전 행사장에서는 군악대의 연주속에 왕징웨이 정권의 새로운 깃발인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 를 게양하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국기게양식 이후에는 왕징웨이의 환도선언이 발표되면서 정식으로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는 수립되었다. 즉, 하이스이는 왕징웨이정권의 시작을 끊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이스이는 이후 왕징웨이정권의 해군에서 몇 되지 않는 군함으로 활동하며 난징에 배치되어서 양쯔강 중하류를 경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위의 사진이자 중일전쟁당시 칭다오에 있던 3번함 퉁안도 좌초되었다가 일본에 노획되었다가 퉁춘(同春)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왕징웨이 정권의 해군에게 제공되었다. 결과적으로 창펑급 구축함 모두 왕징웨이 정권에게 제공된 것이다. 하지만 퉁춘은 왕징웨이 정권의 말기였던 1944년 11월 정도길(鄭道吉) 가 이끄는 항일 게릴라에 의해 파괴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끝나는 시점에서 살아남은 창펑급 구축함은 하이스이만이 남게 되었다. 이후 하이스이는 다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에게 반환되고 이전 국민정부시절의 이름 지엔캉(建康) 이라는 이름도 되찾았지만, 이시점에서 지엔캉은 너무나도 노후화가 된 함선이었다. 무장도, 엔진도 너무나 노후화 되었고 작점범위도 좁은 지엔캉은 결국 1947년 7월 퇴역하였다. 청나라의 구축함으로 설계되었으나 청나라를 겪지못하고, 일본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일본에 노획되어 본래의 이름도 잃은 채 괴뢰의 해군으로 활동하며 괴뢰정권의 시작을 알리고, 승리 이후 본래 이름을 되찾았으나 이미 너무나도 노후화되어버려 결국은 사라져야 했던 안타까운 함생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 중문판 위키피디아 伏波號驅逐艦, 長風級驅逐艦, 飛雲號驅逐艦 항목 (https://zh.wikipedia.org/zh-tw/%E4%BC%8F%E6%B3%A2%E8%99%9F%E9%A9%85%E9%80%90%E8%89%A6) 네이버 신문라이브러리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B6%95%ED%8F%AC%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3-01%22%2C%22endDate%22%3A%221940-03-31%22%7D) 퉁안호 사진 : https://kknews.cc/zh-hk/military/3yqo438.html 2대 푸보호 정보 : http://homepage.ntu.edu.tw/~yingshao/de0fupo.htm 2대 푸보호의 원본함 H.M.S.Petunia의 사진 : https://leithbuiltships.blogspot.com/2010/05/hms-petunia.html

  • 일화공동선언 (日華共同宣言, 1943.1.9)

    정식 명칭은 "전쟁완수 협력에 관한 일화공동선언 (戰爭完遂ニ付テノ協力ニ 關スル日華共同宣言)" 난징국민정부가 미영에 선전포고한지 한시간이 지난 시점인 1943년 1월 9일 11시, 일본과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난징정부가 공동으로 선언한것이었다. 선언문은 일본어와 중국어 두 언어로 작성되었다. (본 포스트에서는 일문 원어를 서술) 선언문은 일본측에서는 시게미츠 아오이 (重光 葵) 특명전권대사가 읽었고 난징국민정부측에서는 왕징웨이가 직접 읽었다. 전쟁완수 협력에 관한 일화공동선언 (戰爭完遂ニ付テノ協力ニ 關スル日華共同宣言) 대일본제국과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긴밀히 협력하여 大日本帝國政府及中華民國國民政府ハ兩國緊密ニ協力シ 미•영 양국에 대한 공동의 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에 米英両國ニ對スル共同ノ戰爭ヲ完遂シ大東亞ニ於 도의에 기반한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전반에 공정한 신질서를 道義ニ基ク新秩序ヲ建設シ惹テ世界全般ノ公正ナル新秩序ノ 초래하는 것에 공헌할것을 희망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招來ニ貢獻センコトヲ期シ左ノ通宣言ス: 대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공동의 전쟁을 완수하기 위해 大日本帝國及中華民國ハ米國及英國ニ対スル共同ノ戰爭ヲ完遂スル爲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신념으로 군사상, 정치상, 경제상 완전한 협력을 한다 不動ノ決意ト信念トヲ以テ軍事上、政治上及経済上完全ナル協力ヲ爲ス 昭和十八年一月九日即チ中華民國三十二年一月九日南京ニ於テ (쇼와 18년 1월 9일, 중화민국 32년 1월 9일 남경에서) 大日本帝國特命全權大使 重光 葵 대일본제국특명전권대사 시게미츠 아오이 中華民國國民政府行政院院長 汪 兆銘 중화민국국민정부행정위원장 왕 징웨이 (왕 자오밍)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는 이 일화공동선언을 토대로 租界還付及治外法権撤廃等に関する日本国中華民国間協定(조계반환과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 ) 으로 일본이 점령한 조계지를 반환받고 최외법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난징국민정부의 대 영미 선전포고는 이에 대한 댓가였다. 왕징웨이정권의 대영미 선전포고문은 여기로 : [출처] 일화공동선언 일문 원문 : http://gauss0.livedoor.blog/archives/12688211.html 『매일신보』, 1943년 1월 9일자, 1면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1943.1.9)

    상하이공동조계 반환을 기념하여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서 발행한 우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이 협정을 근간으로 중국내의 조계지를 환수하고, 치외법권을 폐지할 수 있었다.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租界還付及治外法權撤廢等ニ關スル日本國中華民國間協定) 대일본제국정부 및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금일 발인한 '전쟁완수 협력에 관한 일화공동선언' 에 따라 중화민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취지에 기초하여 일화(日華)양국간의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고자 다음과 같이 협정한다. 제 1장 전관조계 (専管租界) 제 1조 일본국 정부는 현재 일본국이 중화민국에 소유하고 있는 조계행정권을 중화민국정부에 반환한다. 제 2조 양국 정부는 각각 동수의 위원을 임명하여 전조 (1조의 내용을 말함) 에 관한 상세항목을 협의하여 결정한다. 제 3조 중화민국정부는 전조 (2조의 내용을 말함) 에 의한 조계반환 실시후 해당 지역의 시정 등에 대하여 일본국 신민의 거주 , 영업 , 복지에 관해서는 적어도 이전의 정도를 유지한다. 제 2장 공동조계 및 공사관구역 (共同租界及公使館區域) 제 4조 일본국 정부는 따로 협의 · 결정하는 바에 따라 중화민국정부가 최대한 속히 상하이공동조계행정권 및 샤먼 구랑위 공동조계행정권을 회수하는 것을 승인한다. 제 5조 일본국 정부는 중화민국정부가 북경(북평) 공사관구역 행정권을 속히 회수하는 것을 승인한다. 제 3장 치외법권 (治外法權) 제 6조 일본국 정부는 현재 일본국이 중화민국에서 가지고 있는 치외법권을 속히 철폐하는 것을 결의하고 양국정부는 이에 관한 구체적인 안을 심의 · 작성하는 목적으로 (양국정부가 동수로) 전문위원회를 설치한다. 제 7조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국의 치외법권 철폐에 따라 자국영토를 일본국 신민의 거주, 영업을 위해 개방하고, 일본국 신민에 대해서는 중화민국 국민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전조 (6조의 내용을 말함) 의 전문위원회는 이에 관한 (7조의 내용을 말함) 구체적인 안도 같이 연구하도록 한다. 제 8조 본 협정은 서명한 날로터 실시한다. 우증거(右證據)로서 하명(下名)은 각본국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고 본 협정에 서명, 조인함. 쇼와 18년 1월 9일 중화민국 32년 1월 9일 난징에서 일어와 중국어로서 본문 두통을 작성함. 대일본제국 특명전권대사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 중화민국 국민정부 행정원 원장 왕징웨이 (汪兆銘) 왕징웨이 정권은 이를 근간으로 상하이공동조계를 비롯한 중국내의 조계를 반환받았다. (대부분의 조계가 일본의 동맹국이거나, 이미 일본의 점령상태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치외법권 철폐는 명목상의 요소로서 거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출처] 원문(일어) : https://ja.wikisource.org/wiki/%E7%A7%9F%E7%95%8C%E9%82%84%E4%BB%98%E5%8F%8A%E6%B2%BB%E5%A4%96%E6%B3%95%E6%AC%8A%E6%92%A4%E5%BB%A2%E7%AD%89%E3%83%8B%E9%97%9C%E3%82%B9%E3%83%AB%E6%97%A5%E6%9C%AC%E5%9C%8B%E4%B8%AD%E8%8F%AF%E6%B0%91%E5%9C%8B%E9%96%93%E5%8D%94%E5%AE%9A 매일신보 1943년 1월 10일자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 남경환도까지의 일주일, 무슨일이 있었나? (1940.03.23~03.30)

    한국-일본의 신문 조사를 통해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1940년 3월 30일까지 일주일간, 중국을 비롯한 한-중-일 삼국에서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과 관련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해보았습니다. 계림호가 가지고간 미나미 지로의 축전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B%AF%B8%EB%82%98%EB%AF%B8-%EC%A7%80%EB%A1%9C-%E5%8D%97%E6%AC%A1%E9%83%8E-%EC%A1%B0%EC%84%A0%EC%B4%9D%EB%8F%85%EC%9D%98-%EC%99%95%EC%A7%95%EC%9B%A8%EC%9D%B4%EC%A0%95%EA%B6%8C-%EC%88%98%EB%A6%BD-%EC%B6%95%EC%A0%84-1940-03-30 계림호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A%B3%84%EB%A6%BC%ED%98%B8-%E9%B7%84%E6%9E%97%E8%99%9F-%EC%9D%B4%EC%95%BC%EA%B8%B0 구축함 하이스이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 (예정) 환도선언과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국민정부-환도선언-國民政府-還都宣言-1940-03-30 조선의 유광렬 매일신보기자 - 왕징웨이 대담문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C%9C%A0%EA%B4%91%EB%A0%AC-%EF%A7%89%E5%85%89%E7%83%88-%EC%9D%98-%EC%99%95%EC%A7%95%EC%9B%A8%EC%9D%B4%EC%99%80%EC%9D%98-%ED%9A%8C%EA%B2%AC-1940-4-1 이날 10시에 발표된 10대정강은 여기서 : https://dahatchan.wixsite.com/dahat/post/%EC%99%95%EC%A7%95%EC%9B%A8%EC%9D%B4%EC%A0%95%EA%B6%8C%EC%9D%98-10%EB%8C%80%EC%A0%95%EA%B0%95-1940-3-30 요나이- 왕징웨이 일화 교환방송의 내용은 여기서 : (예정) [출처] : 만선일보 (滿鮮日報) / 조선신문 (朝鮮新聞) / 부산일보 (釜山日報) / 매일신보 (每日新報) 1940년 3월 25일자 ~ 1940년 4월 1일자 / https://nl.go.kr/newspaper/ 조선일보 (朝鮮日報) / 동아일보 (東亞日報) 1940년 3월 25일자 ~ 1940년 4월 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삼천리 제12권 5호 - 南京 新政府 盛典 參禮記 (1940.5.1)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a_016_0750_013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9%82%84%E9%83%BD%E5%BC%8F%E5%85%B8&searchKeywordConjunction=AND

  • 계림호 (鷄林號) 이야기

    *본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명인 신용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신용욱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자료 서술을 위함임을 밝힙니다. 신용욱 (愼鏞寅, 1901~1961) , 그는 안창남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비행분야를 개척한 이중 한명이었다. 신용욱은 식민지 조선에서 항공분야를 개척한 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 아브로식 제 504호 K형 타이거호) 그는 1927년 여의도에 그의 비행기를 이끌고 착륙하여 아직 '비행' 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조선 민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최초의 비행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에 안창남이 1922년 비행을 한바 있다.) 그는 1930년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경성을 구경하는 유람비행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36년, 조선 최초의 민간항공사 신항공사업사 (愼航空事業社) 를 설립해 상업적 비행 운행을 시작했다. 즉 그는 조선 최초의 항공기 비행사는 아니었지만, 조선 최초의 항공기의 상업화를 이뤄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항공사업사는 해방이후 대한국민항공사를 거쳐 대한항공 (大韓航空) 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곳곳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자신의 항공기를 이용해 운행을 게시했다. 우편이나 화물, 승객까지 가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제국의 거대 항공사들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만이 운영하고 있던 항공사업에 조선인도 참가하게 되었다는데에 의미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그의 회사와 비행기 또한 전쟁에 동원되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전쟁을 위해 협력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한국 항공사업의 시초이자 해방이후 한국 항공사업에 성장에 기여한 바는 무시할 수 없으나, 그가 일제 시절 그의 회사와 비행기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였기에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신용욱은 1940년 왕징웨이 (汪精衛) 가 이끄는 신중앙정부 (왕징웨이정권) 이 설립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비행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항공기들은 조선반도 밖으로 비행을 한 경험이 없었다. 즉 단거리 비행경험만 존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미 일본의 거대항공사들은 도쿄와 난징같은 장거리를 연결하는 노선을 이미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H6K와 같은 거대 비행정을 이용해 일본과 남방을 연결하는 노선까지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용욱의 신항공사업사는 아직 조선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축하비행은 왕징웨이의 신정권 수립을 축하함과 동시에 조선의 항공업계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길지 않았기에 일본의 대형항공사들 처럼 한번에 난징까지 날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만주-중국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번의 착륙과 정비, 주유 과정을 겪어야 했다. 계림호의 비행기록, 앞에서 서술하였듯 그는 비행기의 한계로 여러지역을 경유하는 일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기 (愛機) 인 비치크래프트 B-17 (Beechcraft Model 17) 모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사용한 비치크래프트 모델 17 B는 항속거리가 1,078km에 불과한 모델이었지만, 당시 제대로 된 항공기 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높은 성능의 항공기였다. 이 4인승의 이 항공기를 신용욱 본인과, 항공기를 정비할 고준식 (高準植) 이 동행하여 두명이 탑승하여 가기로 결정되었다. 신항공사업사의 비치크래프트 B-17 기체, 이 J-BAOI 이라는 식별명이 붙은 이 기체가 이후 계림호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같은 비치크래프트 기체고 , 밑의 계림호 사진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1940년 3월 16일 신용욱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축하비행 계획을 밝히고, 조선총독부에 이를 위한 비행허가를 요청했다. 다음날 총독부에서는 그에게 허가를 내려주었고, 23일에는 미나미 지로 (南次郎) 조선 총독에게 이 축하비행에 사용될 기체의 이름도 하사받았다. 미나미 총독은 이 비행기의 이름을 과거 신라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일본에서 조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용어중 하나였던 계림 (鷄林)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계림호의 모습을 재현해보려 했다 , 도장은 녹색이었던것으로 추측된다. 계림 밑의 글자는 세글자로 추정되는데 한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출발 하루전인 24일에는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의 안전을 위한 비행안전기원제까지 개최되었다. 당시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의 주요 신문에서 다루어졌음을 보면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계림호의 출발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음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3월 25일 오전 9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많은 인사들의 환영속에 계림호는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첫 목적지였던 봉천(奉天) 으로 향했다. 이날 계림호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성립 축하를 위한 축전이 함께 실려서 난징으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30분이 되지 않아 개성을 지났고, 한시간이 되지 않아 평양을 지나 서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륙으로 부터 3시간이 안되는 오전 11시 55분, 계림호는 첫 목적지였던 봉천(펑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림호의 이동경로, 항속거리의 한계로 만주를 통해 중국대륙으로 들어가야 했다. 봉천에 도착한 계림호는 만주국협화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환영을 받고 환영식에 참가했다. 이후 신용욱은 봉천 마로만 (馬路灣) 육군 병원을 방문해 입원중인 병사들을 위로 했다. 이렇게 행사를 마무리하고 그는 금주(진저우) 로 가서 첫 째 날을 마무리 하려 했으나 진저우 비행장의 문제로 인해 이루지 못하고 봉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봉천에서 바로 북경(베이징) 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둘째날 (3월 26일) 오전 9시 계림호는 봉천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5시간 가량이 지난 오후 1시 45분이었다. 북경에서도 그는 계류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제남(지난)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난징에 도착한 계림호와 신용욱 일행, 계림호의 실제모습을 알 수 있는몇안되는 사진 자료이다. 셋째날인 3월 27일 오전 10시 계림호는 제남으로 향했다. 제남은 그들의 경로에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기름을 재보급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시쯤 제남에 도착한 제남호는 20분가량 이곳에서 가솔린을 주유하고 , 오후 1시 다시 난징으로 향했다. 난징으로 향하는 길에 쉬저우 상공을 잠시 선회한 뒤 마침내 출발 55시간만에 계림호는 신정권의 수도 난징에 도착했다. 3월 27일 오후 4시 10분 경 계림호는 난징 상공에서 선회비행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고 4시 40분 난징에 착륙하면서 계림호의 축하비행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난징시민들의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환도식전 방문객들을 위한 난징의 수도반점 (首都飯店) 으로 향했다. 이 북경-남경 비행 과정에서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기를, 자신이 북경을 떠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일본 언론사들의 비행기들도 비슷한 시간 북경에서 이륙해 난징을 향해가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용욱측이 당시 바람의 방향이 불리했음에도 일본측보다 더 빨리 난징에 도착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일본과 조선의 첫 항공레이스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곳에서 신용욱은 조선의 언론인 유광렬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신용욱측이 27일, 유광렬 측이 28일에 난징에 도착함에 따라 신용욱 측이 하루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신용욱은 유광렬을 비롯한 조선의 기자단 일행과 함께 28일 오전 난징 중산북로의 지나파견군 총사령부를 방문해 니시오 도시조 (西尾 寿造) 지나파견군 사령관을 회견하고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의 축전과 매일신보, 나카무라 조선군 사령관의 축전을 전달했다. [유광렬의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이후 숙소로 돌아온 신용욱은 환도식전 준비를 하는 유광렬을 두고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이때 유광렬의 회고에서는 "나도 가고싶었는데 식전준비때문에 못가 아쉬웠다" 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유광렬을 두고 28일 오후 2시 난징에서 이륙해 30분뒤 상하이에 착륙했다. 이때 상하이에 거류하고 있는 조선인협회약 600명 가량이 그를 마중나왔다고 한다. 조선인협회를 비롯한 대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상하이에 도착한 신용욱은 조선인협회장에게 꽃다발을 전달받고, 아스트호텔 (The Astor House Hotel, 현재 푸장반점, 浦江饭店) 의 환영식에 참가했다. 신용욱이 묵었던 아스트 호텔, 현재도 푸장반점이라는 호텔이 위치해있다. 다음날인 29일 신용욱은 다시 비행기를 몰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인 3월 30일의 왕징웨이 정권의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신용욱은 유광렬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난징환도 기념식전에 참가했다. [ 환도식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 환도식전에서 왕징웨이의 선언문인 '환도선언'은 여기서 : ] 환도식전을 끝내고, 신용욱은 4월 1일, 유광렬과 함께 왕징웨이와의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임광렬과 함께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유일한 조선인 기자' 라는 유광렬의 존재를 흥미롭게 여겨 유광렬을 비롯한 기자단은 일본 기자단도 가지지 못한 왕징웨이와의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왕징웨이와의 식사에 신용욱 또한 참가했다. [ 미나미지로 총독의 축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 ] 왕징웨이는 "조선에서 온 비행사" 였던 신용욱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오신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가 누구인가요?" 이에 기자단은 비행사 신용욱을 소개했고, 왕징웨이는 그에게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말을 건냈다고 전해진다. 왕징웨이의 신용욱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어 "경성에서 난징까지는 비행기로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질문하자 신용욱은 웃으면서 " 편도로 날면 다섯시간 정도 걸립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대일본항공회사 (大日本航空會社)의 팜플렛에 따르면 경성과 거리가 조금더 만 후쿠오카에서 난징까지의 비행을 6시간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이와 비슷하거나 더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난징 직행 항공편은 없었기에 신용욱 본인도 잘 알지 못 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 이광렬과 왕징웨이 + 신용옥의 식사시간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서 :] 이렇게 왕징웨이와의 회담을 마치고, 신용옥은 이틀이 지난 4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다시 조선을 향해 이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국과정에서는 그의 계림호가 4인승이었던 만큼, 조선의 기자 유광렬과 다른 기자를 포함해 4명을 채워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돌아오는 과정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여의도 비행장에 계림호가 돌아온 것은 출발한지 8일이 지난 4월 11일이었다. 가는데에는 3일만에 갔지만 돌아오는 과정에는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복귀가 지연되면서 8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신용욱 일행은 이렇게 환영속에 조선에 돌아왔고, 이후 일행은 미나미 지로 총독을 독대하여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4월 14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신국민정부환도 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 영화대회' 에 참가 하게 된다. 매일신보 4월 14일자 3면에 붙은 "신국민정부환도식전참가보고 경축강연과영화대회 (新國民政府還都式典參觀報告 慶祝講演과 映畵大會" 광고, 강연에서 신용옥의 《경축황군위문비행의인상》강연을 볼 수 있다. 신용욱은 매일신보에 유광렬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행기를 신문에 연재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황사로 인한 먼지라고 이야기하고,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육십이 다되어 가는 나이인데도, 그 눈매는 초롱하다고 하고, 중원에서 큰인물이 난다던데, 왕 주석이 그렇다라고 왕주석에 대해 극찬했다. 이 기록은 앞에서 소개드린 유광렬의 기록과도 상당 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해 이런 왕징웨이와 조선인 인사들과의 교류 기록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1940년 4월 1일 왕징웨이에게 미나미 지로의 축전을 전달하는 신용욱, 이후 그는 왕징웨이와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후 신용욱은 축하비행을 통해 조선과 왕징웨이정권의 교류, 조선 항공산업에 기여했다는 공여를 인정받아 총통부 체신국과 방호과로 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신용욱은 지난번 소개한 임광렬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과 식민지 조선의 인사들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뜻 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인물의 기록을 통해 임광렬의 친일활동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듯, 신용욱 또한 친일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다루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태평양전쟁시기 항공기를 이용한 친일협력만 부각되지 이렇게 태평양전쟁 이전의 보였던 친일활동은 부각하지 않았다. 대한항공도 자신들의 시초를 신항공사업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지만 이러한 활동은 부각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지 않았던 신용욱의 새로운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매일신보 1940년 3월 15일~6월 11일자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012299&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40년 3월 17일자 ~ 4월 1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17%22%2C%22officeId%22%3A%2200023%22%2C%22page%22%3A1%2C%22fevt%22%3A8936%7D 왕징웨이와 신용욱의 악수 사진 / 계림호 사진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026506&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신용욱의 사진 (朝鮮日報)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02/18/EKSA2JGKZVHPNFUUGI6YF2OLA4/ 계림호로 추정되는 기체의 사진 https://richardmin.com/%ED%95%9C%EA%B5%AD%EB%B0%94%ED%96%89%EC%97%AD%EC%82%AC-%EC%99%80-%EC%8B%A0%EC%9A%A9%EC%9A%B1-%EB%B9%84%ED%96%89%EC%82%AC-korean-version/

  • 국민정부 환도선언 (國民政府 還都宣言, 1940.03.30 )

    국민정부 환도선언 (國民政府 還都宣言) 국민정부는 중앙정치회의의 결의에 의해 남경으로 환도하였음으로, 이에 삼가 성의를 피력하여 동포들에게 고한다. 화평실현 (和平實現) 과 헌정실현 (憲政實現) 이라는 2대방침은 중앙정치회에서 정중히 결의한 바로서 국민정부는 이러한 방침을 견지하고 맹세하며 이를 실행하려 한다. 소위 화평실현이라는 것은 일본과 협력하여 선린우호 (善隣友好),공동방공 (共同防共) 과 경제제휴 (經濟提携)의 원칙에 의하여 과거의 분규를 일소하고 장래의 친선관계를 확립하여 과거의 취한 정책 혹은 법력으로 이러한 방침에 반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폐지하거나 수정하여 주권의 독립자유와 행정의완정을 보전하고, 또한 경제상의 호혜평등합작 (互蕙平等合作) 을 실현하여 공존공영의 기초를 확립하려는데에 있다. 1940년 3월 30일 오전 10시, 난징 국민대회당에서 환도선언을 발표하는 왕징웨이. (同盟寫眞部, 1940.03.30) 중일양국은 원래 형제와 같았다. 불행히 서로를 간과하고 전쟁까지 하게 되었으나 이번 국교 조정을 이룬 이후는 평화를유지하여 함께 동아를 안정시키고 동시에 일절우방인 일본에 대해 화평외교방침에 의거해 신의를 지키고 신뢰를 두터히하여 우호관계를 촉진시킬 것이다. 소위 헌정의 실시라는것은 중국국민당 제5차급 제6차 전국대표회의 선언에서 이미 명확하게 규정되고 또한 전국의 능력있는 지사들이 일찍이 함께 참여한 결과이다. 전후 각지역의 파괴된 시설들이 이제 부흥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에 전국의 동포들은 물심양면(物心兩面)의 힘을 집중하여 용맹매진(勇猛邁進) 하여 현대국가의 건설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 개인의 독재는 전국인원의 정성단결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음으로 이를 혁명정치로서 제거되어야 한다. 또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도발하고 독립을 이룬 민족들의 대적이니 반들이 이를 근절시켜 그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한다. 각급 민의기관의 설치, 지방제도의 실시, 국민대회의 소집, 헌법제정의 발포등등은 모두 오늘을 기하여 실행에 옮겨 전국 인민의 여망에 부할것이다. 화평의 실현과 헌정의 실시는 국민정부의 준봉한 최대방침인 동시에 국민정부가 부담해야할 최대의 임무다. 이에 국민정부는 환도와 함께 이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 인민들, 화평운동을 위해 희생된 선열에 대해 무언의 애도와 경의의 예를 표한다. 국민정부가 제일로 자신의 책임을 지각하는 바는 실로 전후의 인민을 무휼하고 생명, 자산, 자유로 하여금 국가법률의 보증을 받을 수 있게하고 기업들이 안심하고 경제산업의 부흥과 문화의 발전에 종사하게 허는 것이다. 국민정부는 삼가 벗들인 다른민족들을 청렴하고 용감하게 이끌고, 이로인해 원망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를 꺼리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무고한 인민과 동고동락을 함께하고 생사를 같이하며 국가민족의 부흥을 기도할 것이다. 현재 충칭을 비롯한 각지에 복무중인 공무원과 일반 군인들에데 대하여 경의로서 포고한다. 신고를 하는 인원에 대해서는그 확실한 표명이 있은 후 모두 원급원봉으로서 이를 임용할것이며 공무인원인 자도 포고가 있은후 속히 난징으로 귀환하여 신고하라. 충성이념을 가지고 있고 , 그 지역에 응해 알선운동에 고심하고 공헌한 바 있는 자는 특히 우대하여 임용할 것이다. 이 포고가 있은 이후 반드시 명령을 준수하고 즉시 정전하여 후의 명령을 기다리라. 정규군이 아닌 각지에서 산재하며 유격을 담임하는 유격대도 또한 명령에 복종하여 활동을 정지하고 속히 점검을 받아 (왕징웨이 군으로) 수용되기를 기대한다. 이는 화평건국의 이상으로서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바이다. 국민정부의 이번 환도는 전국을 통일하고 화평 실현과 헌정 실시의 큰 길을 향해 용맹전진하는 것으로서, 전국내 이로서 유일의 합법적 중앙정부인것이다. 따라서 충칭측에서 만약 전국내의 대한 법령을 발포하고 외국에 대해 조약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모두 무효인것이 당연하다. 충칭측도 기존의 관계를 벗어 던지고 신속의 국면의 수습을 함과 동시에 간난을 구하기를 기대한다. 사변이래 임시정부, 유신정부등의 정권은 전후 성립되었으나 모두 국맥을 보전하고 민명(民命)을 유지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국궁진췌 (鞠躬盡萃) 하고 노고를 겪어왔다. 이제 이미 이들은 뜻을 같이해 국민정부에 통일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이에 변한 사항에 대해서는 잠시 그 현상을 유지하고 모두 대세의 방침에 의해 속히 조정을 할것이다. 그러한 후 전국은 통일적 지도하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전후의 상처로 부터 회복하고 장래의 발전을 그릴 수 있게 될것이다. 이는 실로 국가민족의 부흥과 동아의 화평에 관련되는바 심대한바로 촉망하여 마지 않는바이다. 1940년 3월 30일 오전 10시 난징 국민대회당,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정치위원회 주석 왕징웨이 (汪精衛). [출처] : 동아일보 / 조선일보 1940년 3월 31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003310023910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0-03-31&officeId=00023&pageNo=1&printNo=6791&publishType=00010 왕징웨이의 연설사진 : https://www2.i-repository.net/il/meta_pub/G0000002chosakai_F01_1940_0331(0)11876

  •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총독의 왕징웨이정권 수립 축전 (1940.03.30)

    미나미 지로 (南次郎) 7대 조선총독, 1936~1942 재임 미나미 지로의 왕징웨이 정권 설립 축전 (1940.03.30) 미나미 조선 총독 (南朝鮮總督) 남경 중화민국 정부 왕주석 각하 (南京中華民國政府 汪主席 閣下) 금일 귀국 중앙정부수립의 소식에 삼가 심후한 경의를 표합니다. 생각컨데, 동야인의 동양을 건설하고 항구적평화를 확보함은 귀국과 우리의 부동의 국시로서 실로 세계 평화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현은 오직 일화양국의 제휴흥융에 의하여야 가능할 것입니다. (왕징웨이 각하께서) 앞장서서 화평구국의 대업에 마땅한 천지인의 삼화(三和)를 득한바, 귀 정부의 전도는 혁혁한 광명에 차고 공동흥아의 성업은 기대되는 바입니다. 이에 귀국의 융창과 양국의 돈의를 축복하고 왕징웨이 각하와 귀 정부 각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1940년 3월 30일 ,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출처]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7B%22mode%22%3A3%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20%2C%22date%22%3A%221940-03-30%22%2C%22page%22%3A1%2C%22officeId%22%3A%2200023%22%2C%22fevt%22%3A8077%7D (조선일보 1940년 3월 30일자)

  • 중화민국이 국제연합에서 퇴출된것에 대해 총통이 전국 동포들에게 고함 (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1.10.26)

    중화민국은 1944년 국제연합 (UN) 의 창설과정부터 기여했던 UN 생성당시의 핵심국가이자,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다. 하지만 1971년 10월 25일, 유엔총회 제2758회 결정에서는 UN에서의 중국대륙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켰고, 이름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민국의 권리는 박탈되게 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은 반발하여 UN에서 탈퇴하게 된다. 중화민국이 국제연합에서 퇴출된것에 대해 총통이 전국 동포들에게 고함 (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1.10.26) 제26차 유엔 총회 (1971년 10월 25일의 유엔총회 제2758호 결정,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합법적 권리의 회복결정을 의미 ) 는 국제연합헌장을 위반하고 알바니아와 기타 도적 국가의 제안을 통과시켜 마오주의 비적을 이끌고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화민국의 자리를 훔치도록 했다. 우리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이라는 본래 가치를 지켜왔다. 나는 표결이 있은 후에 중국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연합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인민 전체가 이번 총회에서 통과된 헌장 규정을 위반한 이 불법적인 결의가 유효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마오와 공산주의 도적단들은 중화민국의 반란군이며 내부적으로는 인민에 대한 범죄의 집합체이다.전 중국 인민, 특히 본토의 7억 동포의 공공의 적이며 통치하는 침략자이다. 유엔의 무자비한 전복과 침략에 대해. 비록 본토가 현재 마오주의 도적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대만, 펑후, 진마에 기반을 둔 중화민국 정부는 본토에 있는 7억 중국인의 진정한 대표자로서 공통의 의지와 고통의 외침을 대표하며, 그리고 그들에게 마오주의 공산당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제공해왔다. 따라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 인도주의 , 자연법칙, 특히 중국 인민의 일반의지와 상관없이 마오주의 공산주의 비적이 국제연합에서 중화민국의 안전보장위원회의 지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것이다. 1944년 우리나라는 덤바턴오스크 회의에 참가하여 국제연합 선언문에 서명하고, LA연합국국제기구회의에 참가하여 헌장을 작성하였다. 국제연합과 우리는 인류가 이 세대에 겪은 두번의 전쟁의 참화로부터 미래세대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헌장을 공동으로 지켜왔다. 하지만 이번 유엔총회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무너트리고,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부끄럽게도 악에 굴복하고 폭력에 비겁하게 굴복하면서 우리나라가 참여해 열심히 만든 국제연합은 오늘날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중화민국의 국제연합 탈퇴 선언이 사실상 국제연합 파괴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문화전통은 정의를 수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것이며 비록 우리가 참가하여 창설한 국제연합에서 비록 우리가 탈퇴하였지만 국제연합이 앞으로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척도가 되어서 국제사회를 수호하고 세계의 정의와 평화 안전을 위해 용감히 싸우길 바란다. 나는 지난 반세기동안 이 세상에서 두번의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제 1차 세계대전의 큰 고통을 겪은 후 다시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모두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국제연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일부국가는 침략자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악에 굴복하고 폭력에 무릎을 꿇는것이 굴욕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생각했고 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일부 민주주의 국가는 비적을 옹호하고 마오주의 비적과 함께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법적 지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고 그들의 사상과 관행은 1차 세계대전에서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직전의 역사적 사실은 정의를 수호하는 도덕적 용기가 세계안보와 평화를 위한 가장 견고한 토대이고 , 거꾸로 권력정치에서 헤게모니 사용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라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동포들이여, 우리 국가의 운명은 국제연합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국부 손중산선생도 말하셨다. "존재의 기원은 국가와 인민의 불굴의 독립 정신에 있다. 국가는 이익에 유혹되거나 빼앗길 수 없으며 그래야만 새계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라고 말하셨다. "Strongly Oppose Red Chinese Entry into United Nations!" (공산중국이 유엔에 들어가는걸 강력히 반대한다!) - 1971년, 중화민국 타이난역의 문구 , 중화민국의 UN속출로 부터 1달전. 오늘날 우리의 혁명기지(대만) 는 이 두세력, 특히 대륙의 7억 반공인민과 해외 반공화교의 애국주의를 뒷받침할 인적자원, 경제력, 군사력,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중화민국은 결코 타인에게 조종당하고 배신당할 수 있는 나약한 국가가 아니며, 더욱이 우리는 세계의 힘의 균형을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른 국가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만약 우리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세계에 정말 큰 변혁를 만들 수 있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매우 위험하나 우리가 계속하여 자기개선을 위해 분투하는 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흔들수 없고, 우리가 용기를 내는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인내하고 끝까지 싸우면 우리는 결국 성공할 것이다. 본래 혁명의 승리적 성과는 모두 대변혁에서 착상되고 생산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야할 것이다. 특히 현재 세계 정세의 변화는 중국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중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전 세계 인류의 운명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변혁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우리의 투쟁의 성패는 세계의 안전과 인류의 운명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세계 정세의 변화를 좌시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고 변화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분투하여 적보다 기회를 먼저 잡아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비적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으며 최근의 격화되는 투쟁은 마오주의 도적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 체제가 완전히 파산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들을 포함한 본토인들은 실망에서 저항으로 돌아섰고, 그들의 발밑에 있는 반공 화산이 곧 폭발할 것을 보고 마오주의 공산당 도적은 그것을 진압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비적은 '반소비에트 수정주의', '반미제국주의', '반만능 반동'이라는 목표를 결코 바꿀수 없다. 따라서 대외전략의 변화는 비적들은 이데올로기 노선과 정책노선에서 설 자리를 잃게 했고, 더욱 심각한 이견과 혼돈을 야기했고, 더욱 치열한 권력투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자신감을 강화하고 힘을 강화하며 전투 태세를 강화하여 신속하게 행동하고 본토에서 반마오, 반공 혁명 투쟁을 가속화해야 한다. 동포 여러분, 반공투쟁의 행로는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 배를 항해하는 것과 같으니 반공의 근본사정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한 순간의 변화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함께 일하고, 불행과 행복에 의지하지않고 화를 나누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니 느슨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 교만않고 폭풍우가 닥쳐도 소심함과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기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상황이 더 위험할수록 우리는 더 강하고 굳세진다. 열심히 일하면 우리는 곧 받드시 대륙의 동포를 구하고 본토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10월 26일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蒋中正) 이글은 중화민국의 UN탈퇴 그 다음날 배포되었고, 사진의 책자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중화민국 국민들에게 배포되었다. 출처 (中文 원문) : https://zh.wikisource.org/wiki/%E4%B8%AD%E8%8F%AF%E6%B0%91%E5%9C%8B%E9%80%80%E5%87%BA%E8%81%AF%E5%90%88%E5%9C%8B%E5%91%8A%E5%85%A8%E5%9C%8B%E5%90%8C%E8%83%9E%E6%9B%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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