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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② 몽강은행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 - 몽강은행(蒙疆銀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도였던 장자커우에 위치한 몽강은행 본점의 모습. 몽강은행의 전신, 찰남은행 몽강은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몽강은행의 전신이 되는 찰남은행(察南銀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은 차하얼(察哈尔)성, 쑤이위안(绥遠)성을 비롯 장자커우를 비롯한 내몽고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내몽고 지역에 친일성격을 띄는 자치정부들을 성립하게 된다. 1937년 8월 27일 장자커우를 점령하고 장자커우에 9월 4일에 찰남자치정부(察南自治政府) 를, 9월 13일에는 다퉁을 점령하고 10월 15일에는 진북자치정부(晋北自治政府) 를 설치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행정구역도 (1942). 진북정청 (晉北政廳) 과 찰남정청 (察南政廳) 은 옛 진북자치정부와 찰남자치정부가 자리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찰남자치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차하얼성의 상업전국을 장악하고, 이 상업전국을 개편하여 1937년 9월 27일 찰남은행 (察南銀行) 이라는 은행을 세웠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주도로 100만 위안(圓)의 자본을 가지고 설립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점령한 찰남을 비롯한 내몽고지역에서 국민정부의 법폐 & 공산당의 지폐에다가 일본이 점령하면서 조선은행, 만주중앙은행등에서 새로이 들어온 일본계열의 지폐 등등 무려 9개은행의 지폐들이 유통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중앙은행으로서, 1937년 10월 10일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찰남은행은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현지역에서 발행되고 있던 화폐를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찰남은행의 경우, 신 지폐를 발행하려 했으나, 그 여력이 부족해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미 한번 재사용과정을 거친,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다시한번' 재사용 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삼성관은호 1원 지폐 (원본) → 만주중앙은행이 임시사용함 (1차 재사용)→ 만주중앙은행에서 이걸 찰남은행에 주어 사용하게 함 (2차 재사용) . 맨처음동삼성관은호에 밑줄을 긋고 만주중앙은행 도장을 찍었고 거기에 또 밑줄을 긋고 찰남은행이 사용한 모습이다. 이 동삼성관은호 지폐는 중화민국 18년 (1929년) 에 처음만들어져서 사용되다가 만주중앙은행을 거쳐 (1932년) 찰남은행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1937년) 어떻게 보면 기구한 운명의 지폐라 할 수 있겠다. 찰남은행 생산지폐 (*는 실제발행되지는 못함) 동삼성관은호 / 만주중앙은행임시권 → 찰남은행 1원(圓) / 10원 차하얼상업전국권 → 찰남은행 1원(圓)* / 20원* 차하얼상업전국의 지폐를 재활용한 찰남은행 지폐. 견본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것으로 보아 이 지폐를 발행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 발행되지는 못했다. 《북지경제도설 쇼와15년 판(北支経済図説 昭和15年版) 》에 따르면, 찰남은행에서는 위의 사진처럼 다른 지폐도 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여력이 되지 않아 만주은행으로 부터 구 동삼성관은호 지폐를 개조한 지폐들만이 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찰남은행은 개업과 동시에, 찰남을 비롯한 몽강지역에서의 일본은행권 / 만주중앙은행권 / 찰남은행권을 제외한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긴급통화방위령(緊急通貨防衛令) 을 공포해 '20일'이라는 기간동안 그동안 사용하던 지폐들을 교환 / 회수하게 했다. 일본과 찰남측이 이러한 교환조치를 서두른데에는 당시 이지역에서 추산 천만 위안가량의 법폐, 공산당 지폐, 옛 군벌지폐등등 지폐가 너무나 남발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너무나 많이 유통되고 있는 지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교환 / 회수조치를 통해 이지역의 금융질서를 장악하고자 했다. 찰남은행은 찰남자치정부의 수도인 장자커우, 그리고 진북자치정부의 다퉁, 그리고 몽골연맹자치정부의 후흐허트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북자치정부에서는 옛 산서성지폐에 정부도장을 찍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찰남은행권 또한 유통이 되고 있었다. 1937년 12월, 몽골연맹자치정부가 출범하고 진북-찰남-몽골연맹정부가 통합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찰남은행은 진북-찰남-몽골연맹지역 모두를 포괄할수 있게 '몽강은행'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확대 개편되게 되었다. 찰남은행이 개업 2달도 되지 않아 후에 서술하게 될 몽강은행으로 확대개편되버리면서 이 시기 만들어진 임시 찰남은행권은 발행 수도 많지 않을 분더러 대부분 회수과정을 거쳤기에 현재 찰남은행권은 아주 작은 수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다.) 이렇게 찰남은행은 2달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찰남은행권은 몽강은행이 생긴 이후에도 약 4달가량 더 사용되다가, 1938년 4월 몽강은행에서 신지폐 발행이 완료되면서 유통이 정지된다. 몽강은행의 설립, 몽강은행권(몽강권) 의 제작 몽강은행의 성립과정. 몽강은행은 일본과 그 괴뢰정부들의 작품이었다. 몽강은행은 일본과 괴뢰정부의 작품에 가까웠다. 기존의 찰남은행에다가 1937년 11월 11일 결성된 몽골연합위원회를 구성하는 몽골연맹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가 각각 4천만 위안씩, 총 1억 2천만 위안을 모으고, 여기에 일본에서 출자된 600만 위안을 합쳐 1937년 11월 23일 설립되었다. 또한 당시 지역에서 영업중이던 찰남풍업은행(察南豊業銀行), 수원성은행의 몽강지점, 기동은행의 몽강지점을 통합해 1937년 12월 1일 장저커우의 고루서가(鼓楼西街) 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다퉁, 후흐허트등 몽강지역 뿐만 아니라 톈진이나 베이핑지역까지 주재원을 파견했다. 이후에는 이 지역들에 지점들을 건설하고, 도쿄에도 사무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초기 총재는 바오웨칭 (包悦慶,포열경) 이라는 이가 맡았고, 부총재는 일본인 야마다 모지(山田茂二) 가 맡았다. 하지만 1942년부터는 총재도 일본인이 하게 되는 등, 몽강은행은 완전한 일본의 지배 속에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몽강은행은 설립 초기 약 한달가량은 이전의 찰남은행권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1938년 1월부터 새로운화폐가 발행되고 4월에 발행이 완전히 완료되면서 이전의 찰남은행권은 사용이 중지되고 회수가 되었다. 몽강은행은 초기 지폐 4종류 (1원, 5원, 10원, 100원) 과 동전4종류 (5각, 1각,5분, 1분) 를 발행했다. 지폐는 일본에서 인쇄가 이루어졌고, 동전의 경우 초기에는 만주중앙은행에서 발행한 동전을 공급받아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후 1938년 8월 16일, 5각 동전은 커우베이 조화창 (口北造貨倉) 에서 자체 제작해 사용한다. 몽강은행의 첫 화폐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의 경우 한번 도안이 바뀌었고, 동전의 경우 5각짜리를 제외하면 만주중앙은행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가장 고액권이었던 100원권의 경우, 한번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처음에 발행된 100원의 경우, 임시권의 성격이 강해 종이의 품질이 좋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특징으로는 '몽강' 인 만큼 만주국과 달리 몽골문자가 처음부터 혼용되었다는 것이다. 유목지역인 만큼 낙타나 양같이 유목지역을 상징하는 동물들이 많이 그려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동전에서는 '중화민국 27년' 처럼 중화민국의 기년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자체 화폐를 발행함과 동시에 한가지 조치를 실시했는데, 이는 뒤에서 소개할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연은권(聯銀券)의 사용을 금지한 것이었다. 민간에서 몽강권이 아닌 연은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괴뢰정부 지역끼리의 화폐가 혼용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일본에서는 일본돈이, 만주에선 만주돈이, 임시정부에선 임시정부 돈이, 몽강돈이 사용되길 기대했다. 또한 찰남은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몽강은행도 몽강에서의 사용가능한 화폐를 몽강은행 지폐와 일본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으로 제한했다. 이는 일본의 지배를 용이하게 위한 것이기도 했고, 당시 만주국 원이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던 것처럼, 몽강권 또한 일본 엔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행 1엔 = 만주중앙은행 1원 = 몽강은행 1원 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42년 발행된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에 따르면 이런 금지조치에도, 민간 내에서는 연은권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처럼 완전한 통화의 장악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40년에는, 1원짜리 지폐를 새롭게 공개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만주중앙은행에서 공급받아 사용하고 있던 5각, 1각,5분 짜리도 지폐로 만들게 된다. 1940년 7월 1일에는 5분, 1각짜리 지폐가, 1940년 8월 10일에는 5각짜리 지폐가 등장했다. (중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8월 15일 발행되었다고 하지만, 《지나중앙은행론(支那中央銀行論)》 에서는 8월 10일을 제시한다.여기서는 당대기록인 지나중앙은행론을 따랐다. ) 5각, 1각, 5분도 지폐로 발행된데에는 자원문제가 가장 컸다. 동전으로 제작하지 않은 이유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 자원부족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작은 단위의 화폐도 지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몽강은행은 이렇게 지폐로 5각, 1각, 1분을 발행함과 동시에 자원확보를 위해 시장에 유통되어 있었던 만주산 동전들을 회수하기 시작했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이시기 몽강에 공급되었던 만주동전은 제작에 용이한 알루미늄 동전도 아니었기에 더욱 회수가 중요했었다. 몽강권의 현실과 한계 몽강은 왕징웨이정권의 일부가 되었지만, 몽강은행과 몽강은행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0년 이 시기 몽강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세워지면서, 명목상으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몽강은 '몽강자치구' 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정부조직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본과 덕왕을 비롯한 기존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편과 같이 일부조직에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몽강의 경우, 1941년 1월, 왕징웨이정권의 중앙은행 중앙저비은행이 설립되었음에도, 몽강은행권의 유통과 사용은 계속되게 된다. 중앙저비은행의 저비권은 몽강에서 오히려 연은권보다 낮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왕징웨이가 세운 중앙저비은행은 몽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몽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강화했다. 몽강은행은 몽강의 자원을 수탈하는 일본 기업에 투자와 대출을 제공했고, 일본의 국채, 공채를 몽강은행이 구매함으로서 일본의 몽강개발을 가속화하고 일본내의 재정압박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예로, 전쟁이 계속되고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1941년에 일본은 전비마련을 위해 몽강은행에 일본국채 구매를 종용한다. 몽강은행은 일본 국채 1억 원(위안) 을 구매하면서 몽강은행은 가지고 있던 금 보유고를 대부분 지출해야 했고, 이 때문이 몽강은행은 운용자금이 부족해지며 부실해지게 되었고, 이에 화폐를 남발 하게되면서 몽강지역의 물가는 급상승하게 된다. 1938년 말 대비 1941년 말에는 화폐 발행이 300% 증가했고, 이로 인해 물가상승으로 몽강의 주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즉, 일본은 몽강은행을 이용해 자국의 물가안정과 전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몽강은행을 일본이 수탈하면서 그 부작용은 모두 몽강의 주민들이 책임지게 된 셈이었다. 북지경제도감(北支經濟圖鑑, 1942) 에 표기된 몽강은행권의 발행액수, 중일전쟁이 지속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발행액수가 크게 늘었다. 같은 책에 표기된 몽강자치연합정부의 수도 장자커우의 물가. 쇼와13 (1938년) 에 비해 쇼와 16 (1941년) 말에는 3배 넘게 올랐다. 같은 시기, 도쿄의 물가가 10%가량 오른것에 비하면 아주큰 상승이다. 1942년에는, 새로운 동전시리즈가 등장하게 된다. 이전 1940년에 모두 지폐로 대체되었던 1각, 5각이 만주와 마찬가지로 그나마 마련하기 쉬웠던 알루미늄 동전으로 대체되었고, 지폐에서는 없었던 1분 짜리가 새롭게 동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가장 큰 단위인 5각은 동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5각의 경우 동전이 아닌 지폐로 계속 발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동전에서는, 이전 1938년의 동전과 달리 발행년도에서 중화민국의 민국기년이 아닌,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성기(成紀) 기년법이 사용되었다. (사진의 성기738년은 1943년을 의미.) 성기기년법은 징기즈 칸의 제위인 1206년을 기원으로 하는 기년법으로, 몽골제국의 부활을 이야기하던 몽강연합자치정부에서 사용되었던 연호였다. 이렇게 성기기원을 사용한것은 이제 몽강이 중화민국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것이었다. 몽강이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의 일원임에도 이런 움직임을 보였다라는 것은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몽강에는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시기에는 기존의 종이시리즈도 혼용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몽강은행 몽강은행의 마지막 지폐들. 만주와 마찬가지로 지폐생산과정에서 드는 자원을 절약하려 재질이나 잉크면에서 품질이 나빠졌다. 1944년에는, 10원권과 5각을 새롭게 발행했다. 하지만 이때 발행된 5각의 경우 발행량이 아주 적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100원이 새롭게 발행되었다. 만주가 그랬듯, 몽강도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며 자원부족으로 인해 지폐의 질도 이전보다 나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몽강연합자치정부 붕괴 이후 몽강은행과 몽강권의 운명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몽강연합자치정부 또한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몽강은행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만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몽강권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붕괴 이후에도 일정기간 통용되었다. 몽강지역에서 사실상 유일한 화폐로 취급되고 있었던 몽강권을 쉽게 대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만주와 다르게 중일전쟁이후, 몽강의 경우 국민당과 공산당 둘다 몽강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점령지는 중국공산당의 밑에 있었다.) 이렇기에 국민정부와 공산당 모두 몽강권에 대한 교환작업을 실시하게 된다. 국민정부의 점령지역의 경우를 보면, 국민정부는 몽강은행을 중화민국 중앙은행에 합병하고 중화민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1947년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몽강은행돈을 1:0.4의 비율로 다시 법폐로 교환하게 했다.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중화민국 법폐 4각 (1:0.4) 하지만, 국공내전의 혼란속 이러한 교환사실은 몽강의 도서지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3개월이라는 짧은 교환기간 속에서 많은 이들이 다시 법폐로 돈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이결과 외딴지역에서는 많은 몽강권이 교환되지도 못한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몽강권 교환의 실패는 국공내전에서 많지도 않았던 몽강 국민당 점령지역이 국민당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이유중 하나기도 했다. 반면, 옛 몽강연합자치정부 지역 일부를 점령한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의 승리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1946년 4월부터 자신들이 소유한 섬강녕변구은행 (陝甘寧邊口銀行)의 지폐로 바꿀 수 있게 했다. 교환과정에서 교환 한도는 없었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였으나,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몽강은행 몽강권 1원 = 섬강녕변구은행 5원 (1:5) 의 비율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공산당의 교환기간은 7월까지로 3달이라는 짧은기간이었던 중앙은행 법폐로의 교환과 큰차이가 있지 않지만, 법폐로 이루어진 교환과 달리 이 교환과정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서 공산당 점령지에서는 많은 이들이 돈을 바꾸는데에 성공했다. 이는 대부분의 구 몽강자치연합정부 지역이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었기 떄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몽강권 회수성공은 국민정부에 비해 몽강에서 공산당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출처] 몽강은행 사진 : https://zh.wikipedia.org/wiki/%E8%92%99%E7%96%86%E9%93%B6%E8%A1%8C 찰남은행 1원권 사진 : https://www.google.com/search?q=%E5%AF%9F%E5%8D%97%E9%8A%80%E8%A1%8C&tbm=isch&ved=2ahUKEwitsamixfuDAxUE1jQHHd1VCAUQ2-cCegQIABAA&oq=%E5%AF%9F%E5%8D%97%E9%8A%80%E8%A1%8C&gs_lcp=CgNpbWcQA1AAWABg1QVoAHAAeACAAcMCiAHDApIBAzMtMZgBAKABAaoBC2d3cy13aXotaW1nwAEB&sclient=img&ei=yeazZe2oJ4Ss0-kP3auhKA&bih=919&biw=1920&client=firefox-b-d&hl=ko#imgrc=EpOn4jkSGTmUWM 찰남은행 1원권 (차하얼성 견본판) : http://www.yangmingauction.com/goodsdetail.html?auctionid=B15063&code=1006&page=7 북지경제도설 쇼와 15년판 : https://dl.ndl.go.jp/pid/1281686/1/31 북지경제도설 쇼와 17년판 :https://dl.ndl.go.jp/pid/1461376/1/35 지나중앙은행론 : https://dl.ndl.go.jp/pid/1276552 몽강권 사진 : https://en.numista.com/catalogue/chine_japon-1.html#c_meng_chiang1108 몽강권 사진2: https://zh.wikipedia.org/wiki/%E8%92%99%E7%96%86%E9%93%B6%E8%A1%8C 중문판 / 일문판 몽강은행 위키백과 문서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① 만주중앙은행 (만주국)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만주국 - 만주중앙은행(滿洲中央銀行) 신징의 만주중앙은행 신 본점 건물이 그려진 엽서. 이 건물은 1938년 3월, 만주국의 수도 신징의 대동광장 앞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지상 4층, 지하 2층로, 건물 정면의 10개의 그리스식 기둥이 특징이다. (현재 이자리에는 중국인민은행 장춘시 지점이 위치해있다.) 만주중앙은행 건물은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정동궈 (鄭洞國, 정동국 ) 국민당군 사령관이 장춘 전투에서 공산당에게 투항한 곳이기도 하다. 만주중앙은행은, 1932년 7월 1일 설립된 만주국의 중앙은행이다. 만주국이 관동군의 작품이었듯, 만주중앙은행 역시 만주국의 몸통이었던 관동군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정부수립으로 부터 얼마되지 않은 1932년 3월 15일, 관동군은 만주중앙은행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만주중앙은행 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국 총무장관이었던 코무이 도쿠조 (駒井徳三) 는 일본의 자본출자와 이전부터 만주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구 봉천군벌 자본이었던 동3성관은호(東三省官銀號), 변업은행(邊業銀行), 흑룡강관은호(黑龍江官銀號), 길림영형관은전호(吉林永衡官銀銭號)까지 4개의 은행을 합쳐서 만주중앙은행을 설립하려 했다. 만주중앙은행 초기에 사용되었던 본점건물. (옛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 1932년 6월 11일 만주중앙은행법(滿洲中央銀行法, 大同元年6月11日教令第26號 대동 원년 6월11일교령제26호) 과 만주중앙은행조직변법 (滿洲中央銀行組織辦法) 을 공포하여 만주중앙은행은 만주국의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출자된 3천만엔을 초기자금으로 하여 주식을 발행했다. 그리고 1932년 7월 1일, 개업과 동시에 동3성관은호, 변업은행, 흑룡강관은호, 길림영형관은전호를 통합하고 이곳의 자본까지 통합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8천만엔의 초기자본금을 가진 상태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은행의 본관은 수도 신경 북대로에 있는 길림영형관은전호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개업과 동시에 128개의 지점도 동시에 영업을 시작했다. 만주국이 성립된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만주중앙은행은 일본과 중국대륙에도 지점을 설치하며 점점 성장하게 된다. 만주중앙은행의 성립과정. 만주중앙은행은 일본자본과 일본이 점령한 구 봉천군벌의 자본의 결과물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혼란스럽게 유통되고 있는 이전 중화민국 / 봉천군벌의 화폐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법폐개혁 전이었기에 만주에서는 1. 봉천군벌소유 은행 '들' 이 발행한 화폐. 2. 기타지역은행'들'에서 발행한 화폐 3. 청, 중화민국 시기 발행된 은동전 (銀圓) 들 등 너무나 많은 종류의 화폐가 화폐가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이러한 화폐들의 남발을 막기 위해 구화폐정리변법(舊貨幣整理辦法) 을 통해 이전에 만주지역에서 봉천군벌의 은행들이 유통하고 있던 은행들을 회수, 교환하게 했다. 교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1934년의 시점에서는 93%, 교환이 종료되던 1935년의 시점에는 97%가 회수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 이뤄진 구화폐 → 만주국 원으로의 교환. 화폐종류가 너무나 많이 혼용되고 있었기에 각 화폐마다 교환비율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초기에는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만주중앙은행은 자신들의 만주국 원과 중화민국에서 주로 통용되던 은동전 은원(銀圓)과 1:1의 교환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1934년, 미국정부에서 은 매입법이 통과되면서 세계 은값이 급상승하게 되자, 만주중앙은행은 은본위제도를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의 법폐개혁이 이루어진 원인중 하나도 이 미국의 은구매법이었다.) 만주국은 이에 1935년 4월,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금본위제도를 도입하려하며,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일만 환율 등가 유지에 관한 성명 (満日為替相場等価維持に関する声明)'을 11월 4일에 발표하면서 만주국 원과 일본엔은 동가가 되었다. 즉 만주국 1원 = 일본 1엔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중앙은행이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주중앙은행은 세계최초로 '통화 스왑' 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만주국의 만주국 원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은행의 지폐와 조선은행의 조선은행권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1935년 11월 4일부로 관리통화제도(금본위제도와 일본엔과의 환율등가)를 도입하면서 조선은행권이 퇴출되게 되면서 조선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은 예금협정을 맺고 만주중앙은행은 조선은행권을 회수한 만큼 조선은행 앞의 예금을 늘리고, 조선은행은 만주중앙은행 예금액만큼 화폐발행액을 줄였다. 거래의 목적은 현재의 통화스왑과는 달랐지만 두 중앙은행의 계약으로 자산과 부채가 연동되어 움직였다는 점은 현재의 통화 스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주중앙은행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바로 전날이었던 1935년 11월 3일,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은본위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중앙은행의 화폐는 초기에는 일본의 조폐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만주국의 조폐공장에서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만주국 말기의 일이었다. 동전의 경우 옛 봉천성 조폐창을 이용하려했으나, 설비가 오래되고 이조차도 만주사변 과정에서 방치되면서 만주국은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신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1932년 6월 만들어진 '화폐법'에 따르면 만주국 원은 4가지의 단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1원(圓) = 10각(角) = 100분 (分) = 1,000리 (厘) 원/각/분/리 라는 현재 중국대륙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십진법 체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화폐법에 따르면 화폐의 종류는 9종류로 규정이 되어있다. 100원 / 10원 / 5원 / 1원 / 5각 = 지폐 1각 / 5분 = 백동 동전 1분 / 5리 = 청동 동전 5종의 지폐, 4종의 동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전의 경우 백동과 청동을 사용하는 동전을 구분하였다. 만주중앙은행의 첫 화폐 시리즈. 종류는 9가지지만, 여러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처음으로 등장한 화폐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요소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오색기와 모란꽃, 푸이의 집무실이었던 근민루 (勤民樓)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5원을 제외하면 지폐의 색도 파란색으로 모두 똑같았다.) 이 시기 발행된 화폐는 일본의 화폐 보다는 중국 화폐의 느낌을 살리려 했는데, 이는 의도된 것으로 만주국 = 일본의 꼭두각시 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행시기를 생각해보면, 화폐법 제정 (1932.6) 으로 부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난이후에 화폐가 발행되었다. 가장 늦게 나온 1분짜리 동전이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1년 2개월, 가장 빠른 5각짜리 지폐가 화폐법 제정으로 부터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발행이 되었다. 그렇다면 화폐법 제정 - 신화폐 발행 사이에 적어도 3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이 기간에는 어떻게 화폐를 처리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이전에 사용되던 동삼성관은호 지폐에 '만주중앙은행' 이라는 도장을 찍어 사용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국가들이 전시에 우표나 지폐에 도장을 찍어 임시적으로 사용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전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에다가 '만주중앙은행' 이라고 적혀있다. 동삼성관은호의 1원짜리 지폐는 만주국에서 발행될 1원짜리 화폐와 가치도 완전히 동일했고 발행량도 많았기에 임시지폐로 선정되었다. 만주국 측에서는 동삼성관은호의 지폐를 이용해 1원권, 5원권, 10원권 이렇게 3종류의 지폐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원과 10원 두개 종류만 만들어지고 5원권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2차, 3차시리즈의 등장 이른바 '乙시리즈' 라 불리는 만주중앙은행 2차발행권. (이시기 동전은 1차 발행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35년 부터는 일본 본토의 지폐의 형태와 비슷해진 새로운 2차 발행권들이 등장했다. 1차발행권이 모두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다양성이 커졌다. 공자, 맹자, 그리고 중화권에서 재물의 신으로 취급되는 조공명처럼 중화권의 고전시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만주국의 국장을 지폐의 전면에 배치했다. 뒷면 또한 이전의 화폐법 내용만 고작 적혀있던 모습에서 만주중앙은행의 인장과 함께 만주국 국무원, 만주중앙은행 건물등 주요 건물들이나 풍경을 배치하는등 이전과 차이를 두었다. 하지만 화폐법과 관련된 내용은 이전처럼 계속 존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고액권인 100원짜리의 뒷면에는 양떼들이 그려져있는데, 이때문에 당대 만주국에서는 돈이 많다라는 뜻으로 "양을 많이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1원짜리와 5각짜리의 장원과 문방은, 어디의 장원과 문방을 가져온것인지 알기 어렵다. (일본과 중화권 인터넷에서도 이 두곳이 어디인지 의문을 가지는 글들이 있었다. 장원의 경우 신징의 만주국 황궁의 장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1940년에는 새로운 동전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 일본과 만주국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속 자원부족이 시작되면서 동전의 재료가 달라지게 된다. 1939년, 화폐법을 개정하여 '동전의 재료 규정'을 삭제하여 이전의 백동 / 청동이 아니라도 동전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자원부족속에서 동전들은 새로운 재료들로 제작되었다. 1각 : 백동 → 백동(2차) → 알루미늄 5분 : 백동 → 알루미늄 1분 : 청동 → 알루미늄 5리 : 청동 → 제작중지 (알루미늄 동전이 계획되었었음) 모든 동전이 제조가 용이하고 단가가 저렴한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금액이 큰 1각 동전의 경우 2대 동전이 초기에는 이전과 같이 백동으로 발행되었으나, 8개월만에 새로운 도안과 함께 알루미늄으로 대체되었다. 5리 동전의 경우 본래 청동버전과 이를 대체할 알루미늄버전이 계획되었으나 발행이 되지 않고, 5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만주국의 2차 발행 동전들. 재료가 모두 알루미늄으로 바뀌었고 1각짜리 동전은 백동화가 등장했다가 알루미늄화로 바뀌었고 5리 동전은 사라졌다. 동전까지 신동전으로 바뀐 이후, 5각 지폐가 1941년 1차례 변화한 것 말고는 (이것도 도안의 변화가 아닌 인쇄색의 변경에 가까웠다) 1944년까지 계속하여 쓰이게 된다. 1944년에는 동전과 지폐가 모두 바뀌게 되어 3차 변화를 겪게 된다. 동전의 경우, 동전의 두께가 이전보다 얇아졌는데 (예로 1각 동전의 두께는 40%가 줄어들었다) , 이는 1944년 시점에서 태평양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일본에게 있어 알루미늄도 이제는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3차발행권 '丙시리즈' 의 모습. 1각(角) 지폐가 추가되었다. 3차 발행권에서는 지폐의 경우 전면의 경우에는 거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면의 경우 인쇄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후면의 그림이나 글씨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1각짜리 지폐가 추가되었다. 이는 1각짜리 동전에 발행되는 알루미늄을 절약하려 한 것으로, 1각짜리 지폐가 1944년 9월 발행되면서 1각짜리 동전은 발행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폐가 일본이 아닌 만주에서 직접 생산되기 시작했다. 본래는 일본에서 지폐를 발행하고 이를 선박을 통해 만주로 수송하였는데 (이 수송과정에서 부관연락선도 사용되었다.) 이 선박들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만주의 화폐를 더이상 일본에서 생산하는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각짜리 지폐만 만주에서 생산되었으나, 이후 생산이 확대되어 지폐에는 도안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쓰이며 이전처럼 "일본제조" 라고 적혀있으나 생산은 모두 만주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시점부터 만주에서 만들어진 지폐에는 특별한 기술이 숨어있는데, 또한 전쟁이 격화되면서, 연합국 충칭정부와 미국또한 만주국과 일본을 혼란시키기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 연합군은 중국연합준비은행과 만주중앙은행의 지폐를 위조해 항공기를 통해 일본 점령지에 살포했다. 만주국측에서는 이러한 위조지폐 살포를 통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내몽고에서만 생산되는 특별한 염료를 지폐에 사용해 이를 방지하려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만주중앙은행 태평양전쟁의 말기 1945년에 들어오면서, 만주국은 극심한 자원난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문에 화폐 발행에도 많은 변화가 등장하게 된다. 첫 째는 잉크- 용지의 변화다. 1945년에는 3차 시리즈와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른 잉크와 저품질 용지를 사용해 화폐를 제작했다. 이를 丙시리즈의 개조판이라고 하여 45년에 발행된 화폐들을 丙改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주중앙은행 1000원권. (실제로 발행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고액권의 발행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전시경제체제가 붕괴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고액권의 발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1000원권을 계획하고 실제 도안도 완성이 되었으나, 유통은 이뤄지지 못했다. 셋째는 동전에서 사용되는 알루미늄의 대체였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만주국은 1940년부터 동전에서 자원절감을 위해 알루미늄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1944년과 45년 시점에서는 이 알루미늄도 부족하게 되었다. (사실은 일본의 알루미늄 필요에 의해 만주국 또한 알루미늄을 공출해야했던 상황에 더 가깝다.) 이로 인해, 만주국에서는 동전 발행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루미늄을 대체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주국에서는 이를 위한 두가지 방법이 병행되었는데, 첫째는 지폐의 발행이다. 5분(分) 짜리 지폐를 새롭게 도입함으로서 동전 제조에 사용되는 자원을 아끼려 했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1. 동전을 대체할 지폐를 발행하기 (지폐는 1각 지폐와 마찬가지로 만주제국인쇄창에서 만들어졌다.) 둘째는 신소재를 이용한 동전의 발행이었다. 만주중앙은행에서는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운 5분, 1분짜리 동전을 발행하게 된다. 도안은 1944년에 만들어진 3차 동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문제는 마그네사이트가 동전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그네사이트는 금속중에서도 매우 약한 금속이었기에 쉽게 부서지거나 형태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시기 마그네사이트로 만들어진 동전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전쟁 말기 부족한 환경속에서 부족한 기술속에서 이루어진 금속 제련의 결과, 더더욱 동전의 품질은 나빠졌다. 동전이 부서지는건 기본이요, 몇번만 부딪쳐도 글씨가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5분(分) 동전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 2. 새로운 재질로 동전을 만들기. 만주중앙은행은 마그네사이트를 이용해 새로이 동전을 만들었다. 당대 만주에서는 이 동전을 보고 도자기에 쓰이는 흙 도토(陶土)와 비슷한 색이나는 것을 보고 "흙으로 동전을 만든건가?"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만주중앙은행은 여기서 더나아가 실제로 "도자기 동전" 을 기획하기도 했다. 세라믹으로 코팅된, 마치 주방의 접시와 같은 재질의 동전을 기획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약해 이는 실제로 발행되진 못했다. (시제품을 중국대륙 지린성의 당안관 (檔案館)의 만주관련자료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5분 동전의 경우 백동에서 알루미늄으로, 알루미늄에서 마그네사이트로, 마그네사이트에서 지폐로, 혹은 도자기로, 기구한 운명을 겪은 셈이다. 만주국 붕괴 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의 운명 1945년 8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만주작전을 통해 관동군이 붕괴되면서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도 그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만주국 붕괴이후 만주중앙은행과 만주국 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 8월 20일, 소련군은 만주중앙은행을 장악했다. 그리고 1945년 9월 30일, 연합군이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조서'를 공표하면서 만주중앙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만주중앙은행이 사라진 소련군 치하에서도 만주국 원의 발행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가장 신용할 수 있는 화폐가 아이러니하게도 만주국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가 해방되면서 만주에는 다시 많은 화폐가 유입되었다. 국민정부의 법폐도 돌아왔고, 공산당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도, 소련군이 만주에서 자체발행한 군표도 만주에서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 절대다수가 이전까지 사용하고 있던 만주국 원에 비해서는 신용도가 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동북은행지방유통권 (동북은행의 동북지역유통권) 과 만주중앙은행 원을 1:1 비율로 등가 교환하게 했다. 이후 만주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이에 자신이 소유한 동북은행을 통해 만주국 원을 자신들의 화폐로 교환을 추진했다. 1946년 3월, 중국공산당은 만주국 원 : 동북은행지방유통권 원 을 1:1 비율로 교환하게 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도 만주국 원은 계속 유통되었는데, 이는 국민정부가 공산당이 동북은행권을 통해 만주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이전까지 만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국 원을 통해 동북은행권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이러한 만주국 원의 유지시도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국 원의 평가절하, 기간내 사용정책을 이용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만주국 원을 빨리 교환하게 해 대다수가 동북은행권으로 옛 만주국돈을 바꾸어버리면서, 국민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1947년 1월 15일부터 만주국 원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면서, 만주국 원은 발행 15년만에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출처] 김성진, 김상옥 「만주국의 지폐 변천과 지폐 도안의 특징」, 『통권 7호』, 2019 만주중앙은행 초대건물 사진 : https://weibo.com/ttarticle/p/show?id=2309404670405347770834 만주중앙건물 후대건물 사진 : https://www.gakushuin.ac.jp/univ/geore/research/2015a/sinkyo-manchuriancentralbank.html 만주국 원 사진 1 : https://ja.wikipedia.org/wiki/%E6%BA%80%E6%B4%B2%E5%9B%BD%E5%9C%93# 만주국 원 사진2 : https://en.numista.com/catalogue/manchoukuo-1.html 만주중앙은행10년사 : https://dl.ndl.go.jp/pid/1276581 만주중앙은행 강덕4년판 : https://dl.ndl.go.jp/pid/1463670/1/11 만주중앙은행연혁사 별편부록(満洲中央銀行沿革史 別冊附録) : https://dl.ndl.go.jp/pid/1449899/1/10 만주국 원 - 만주중앙은행 일문판 / 중문판 위키피디아
- 대륙내 일본괴뢰정부 통화체제 - ③ 기동은행 (기동방공자치정부)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대륙에 설립한 은행들과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들. (이 표에는 만주흥업은행과 같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던 일반은행들은 제외되었다.) 1931년의 9.18사변 (만주사변) 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본은 중국내에서 계속하여 점령지를 늘려갔고, 그 과정속에서 만주국과 몽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와 같은 친일 괴뢰정권들을 차례 차례 옹립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괴뢰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이런 괴뢰정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정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의 설립이었다.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중국대륙에 설치한 괴뢰정부의 은행에서 발행된 화폐와 이와 관련된 통화정책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전, 중화민국은 1935년 이름바 법폐개혁을 통해 법폐(法幣)로 이전 군벌시대에 각 지역에서 남발되었던 화폐를 통합하게 되었다. 법폐개혁속에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가지고 있었던 통화발행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하게 되면서 국민정부는 이전보다 더 국가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중국 통화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되며 법폐속에서 중국경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법폐는 중앙은행 한곳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닌, 現 홍콩처럼 중앙은행 (現 중화민국 중앙은행), 교통은행 (現 중국대륙 교통은행), 중국은행 (現 중국대륙 중국은행) , 농민은행 (現 중국대륙 농업은행) 4곳에서 발행되는 화폐였다. 하지만 법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를 빠르게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성립한 신정권의 경제적 성장과 경제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적국의 화폐인 법폐를 공격하고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정권이 수립되었음에도 계속 통용되고 있는 이전 법폐의 존재를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중국 대륙 각 지역에 괴뢰 정부를 성립하면서, 동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점령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점령지에서 법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기동방공자치정부- 기동은행(冀東銀行) 퉁저우(通州)의 기동방공자치정부 청사의 정문.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을 통해 획득한 산해관이북의 비무장지대를 기동사변을 통해 장악하고 괴뢰정부를 옹립했다. 계획보다 늦은 은행의 설립 1933년 5월 31일 체결된 당고정전협정을 통해 일본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산해관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설립하게 했다. 본래 이 비무장지대에는 일본도, 중국도 병사를 주둔해서는 안되었지만, 이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를 원했던 일본은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을 일으켜 이지역에 인루겅(殷汝耕,은여경) 을 옹립해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만들고 수도를 퉁저우로 하는 기동방공자치정부를 설립했다. 기동은행의 설립에는 두가지 날짜가 제시되는데, 지나경제연보 쇼와11년판 (支那経済年報 昭11年版) 에서는 1935년 12월 4일, 기동은행을 설립하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최신지나요람 쇼와11년 9월간(最新支那要覧 昭和11年9月刊)에 따르면, 1935년 12월 26일에 기동은행을 설립하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되어있다. 이렇게 같은 은행의 날짜의 설립에 두가지 날짜가 언급되고 있어 그 진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날짜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이 두날짜는 모두 '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 한 것이지 '은행 설립' 의 날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동정부의 수립으로 부터 멀지않은 기간에 은행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퉁저우 기동은행 본점의 모습. 실제 은행의 설립은 이보다 훨씬 늦게 이루어졌는데, 은행 설립의 결정으로 부터 6개월이 지난 1936년 6월 11일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한 500만 위안가량의 주식을 발행, 1936년 7월 1일에 정식으로 영업을 하려 했으나, 실제 기동은행이 개업된 것은 한참 늦은 1936년 11월 1일이었다. 기동은행은 퉁저우에 본점을 두었고 본래 탕산(唐山), 창리(昌黎), 친황다오 (泰皇島) 3곳에 지점이 있었으나, 1937년 이후로는 지점을 확대해 베이징, 펑톈등 기동방공자치정부의 22개 현과 외부지역에 총 15개의 지점을 설립했다. 기동은행의 로고. 22개의 별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22개현을 나타내고, 왼쪽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오색기를 표현했다 (위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않지만) 당시 기동방공자치정부 지역에서도 여러 화폐가 혼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동은행의 경우, 만주중앙은행과 몽강은행에 보였던 것처럼 지역에서 구 화폐의 교환을 강행하지 않았다. 기동은행의 화폐는 1937년 3월 10일부터 발행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 기동은행의 화폐는 기동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중 하나로 취급을 받았지, 유일한 화폐로서 위치하지 않았다. 기동은행권을 강제하지 않은 이유로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던 기동정부에 굳이 중일전쟁도 발발하지 않은 상황에 굳이 기동이라는 좁은 지역을 위해 화폐를 강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동권의 등장과 실패 기동은행은 4종류 (5각, 1원, 5원, 10원) 의 지폐와 5종류의 동전 (2각, 1각, 5분, 1분, 5리)을 만들었다. 지폐는 일본 조폐국에서 만들어졌고, 동전의 경우도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되었고, 2각, 1각, 5분의 경우 백동으로, 1분과 5리의 경우 구리로 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2단위의 화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기동은행의 화폐들, 1937년 3월 10일, 5각짜리와 10원짜리 지폐를 시작으로 여러종류의 화폐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 (기동권) 은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앞에서 보았듯 기동은행권이 기동방공자치정부에서 유일하게 쓰이는 지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동권의 발행에도 여전히 중국의 다른은행의 화폐들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중 하나에 불과했던 기동은행의 기동권은 큰 점유율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중일전쟁이후 일본 폭격기가 기동방공자치정부 지역을 오폭하면서 발생한 퉁저우사건 (通州事件) 에서 분노한 기동방공자치정부 보안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군대역할을 했었다) 와 민중들이 퉁저우 기동은행 본점도 공격해버리고 기동은행권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해버리면서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민중들은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낮아진 기동은행권의 가치로, 일본계 은행들은 기동은행권을 취급중지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사태가 수습되면서 일본계은행들의 취급중지는 종료되었으나, 이러한 타격의 영향은 계속되게 된다. 1937년 9월의 북지경제독본(北支經濟讀本)에서는 기동은행을 두고 " 貧弱でとるに足らない (빈약하여 보잘것없다.)" 라고 기동은행을 평가하는 등,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은 기동정부의 중앙정부이자 중앙은행권임에도 힘을 쓰기 어려워지면서 실패로 남게되었다. 기동은행과 기동은행권 (기동권)의 결말 도안까지 준비되었지만 발행되지 못한 기동은행의 100원(圓) 권. (이때문에 이 견본 지폐의 경우 24,000달러가 넘는 고액에 거래되기도 했다.) 기동은행이 이렇게 성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1937년 12월 14일에는 베이핑(징) 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맞설 수 있는 기동방공자치정부보다 더 큰 규모의 정부의 성립이었다. 그리고 기동방공자치정부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1938년 1월 30일, 기동방공자치정부의 지도자 치쭝모(池宗墨)와 임시정부의 지도자 왕커민(王克敏)의 합의로 1938년 2월 1일로 중화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게 되었다. 기동방공자치정부가 임시정부로 통합되고, 다음으로 이야기할 임시정부의 중앙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中國聯合準備銀行)이 1938년 3월 10일 설립되었다. '연합' 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은행의 통합과정을 통해 탄생한 은행이었다. 그리고 이과정에 기동은행도 참가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다루지 않고 바로 다음의 중국연합준비은행 이야기를 할때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성립되면서, 기동은행은 중국연합준비은행 산하의 일반은행이 되며 임시정부에서 역사를 이어나가게 된다. 기동은행권은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성립된 3월 10일부로 지폐 생산을 종료했다. 하지만 기동은행권은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된 다음날인 3월 11일 공표된 "구통화관리방법 (舊通貨整理辨法)"에서는 일정기간동안 임시적으로 이전에 사용되던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구통화관리변법 (舊通貨整理辨法) - 1938.3.11 중국연합준비은행 하북성은행(河北省銀行) / 기동은행(冀東銀行) 의 화폐 / 교통은행(交通銀行) 산동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산동권 → 1939년 3월 10일까지사용가능 (1년) 교통은행(交通銀行) 남방권 / 중국은행(中國銀行) 남방권 / 중앙은행 (中央銀行)중국실업은행(中國實業銀行) / 북양보상은행 (北洋保商銀行) / 중국간업은행 (中國墾業銀行) / 절강흥업은행 (浙江興業銀行) / 대중은행 (大中銀行) / 변업은행 (邊業銀行) / 중국농공은행 (中國農工銀行) / 중남은행 (中南銀行) / 중국통상은행 (中國通商銀行) / 농상은행 (農商銀行) / 사명은행 (四明銀行) / 중국농민은행 (中國農民銀行) 의 화폐 → 1938년 6월 10일까지 사용가능 (3개월) (이후에는 연은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용불가) 구통화관리변법에서는 기동권을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된 후로부터 1년이 되는 1939년 3월 10일까지 사용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옛 기동권에 연은권과 1:1의 가치를 부여해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기동은행 동전의 경우, 실제로는 이 1년이라는 유예기간보다 더 긴 기간동안 사용되어 왕징웨이정권이 세워지고 1년이 넘게 지난 '1941년 5월 31일'까지 사용되게 된다. 이는 왕징웨이정권에서 화북지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화북정무위원회가 내린 조치 때문에 가능했다. (기동은행의 동전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의 소액 동전도 이때까지 사용된다.) 찰동은행에서 발행한 임명장. 민국32년 (1943년) 3월 24일자. 톈진 지점의 직원에게 주어졌던 임명장이다. 문서의 빨간 동그라미 로고는 중국연합준비은행의 로고로, 찰동은행이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산하 은행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임시정부의 일반은행이 된 기동은행은 이렇게 임시정부, 이후 임시정부를 사실상 계승한 화북정무위원회에서도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산하 은행으로 계속 존속하게 된다. (1942년 5월 15일부터 7월말까지 2년만기, 연 이율 3%을 주는 예금 / 적금 모집을 한 자료도 남아있다.) 이후 중국연합준비은행이 해체되는 1945년 9월 30일을 통해 기동은행도 함께 해체되게 된다. [출처] 최신지나요람 쇼와11년 9월간 (1936.9) : https://dl.ndl.go.jp/pid/1277835 지나경제연보 쇼와 11년 (1936.11) : https://dl.ndl.go.jp/pid/1452156 기동정권의 정체 (冀東政権の正体, 1937.4) : https://dl.ndl.go.jp/pid/1281558 신지나현세요람(新支那現勢要覧,1938) : https://dl.ndl.go.jp/pid/1269917 기동은행의 로고 : https://www.sohu.com/a/579406180_121124789 기동은행 1원, 10원, 100원 권 : 웨이보 기동은행 5원 권 : https://auctions.stacksbowers.com/lots/view/3-Q9FBB/china-puppet-banks-chi-tung-bank-5-yuan-nd-1937-p-j115s1-specimen-pmg-uncirculated-60?utm_source=coinweek 기동은행 동전들 : https://www.sohu.com/a/579406180_121124789 기동은행 본점사진 :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8419024 기동은행 1942년 자료 : https://dl.ndl.go.jp/pid/1711946/1/71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⑯ 중국의 항전심리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중국의 항전심리 (中國の抗戰心理) *이는 왕선생이 쇼와15 (1940)년 10월 30일, 일본의 신문기자들에게 발표한 담화의 내용으로, 중국의 항전심리를 설명하고 또한 난징 환도와 현재 중국민중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담화속에는 왕선생이 화평운동, 청년운동에 어떻게 한다면 적극적인 열정과 고매한 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려하고, 대아시아주의의 구체적 발전으로서 이미 광둥과 베이핑에 전개된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펼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나는 전면 화평을 이루는 것을, 그것도 빠르게 실현시키는 것을 충정으로 희망하고 있다. 현재 중일간의 전면화평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여러 가지 상당한 장애물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먼저 국내적인 두가지 요소를 예로 들려고 한다. 그중 하나는 현재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켜 버리려 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항일을 하든 친일을 하든 이는 결국 일본에 의해 중국이 망하게 하는 것이 되니 차라리 항전을 하여 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스며들고 있다. 이렇기에 이들은 화평의 밝은면에 대해서도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방식은 중국항전을 심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일본이 노력해 동아신질서를 주장해도 중국민중으로 하여금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의 이러한 심리상태를 바꾸려 노력하고 있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중국민중의 이러한 종류의 심리가 가지는 오류를 수정하는 것은 화평운동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소는 중국공산당의 문제이다. 그들은 일본에 멸망당하는 것보다는 소련에 멸망당하는 것이 낫다고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첫 번째 요소,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는 시정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요소, 공산주의는 단순히 선전과 계몽만으로는 시정하기 어렵다. 왜냐면 공산주의는 주의와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자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역량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의 두가지는 화평장애의 국내적 요소이지만, 국제적으로도 일독이삼국동맹에 의해 영미의 충칭원조가 한층 명료하게 강화되고 있고, 일소국교조정에도 소련은 아직까지 불분명한 태도를 계속 보이고 있기에 오늘날 충칭에 화평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 나는 솔직히 말해, 국민정부가 올해 3월 난징으로 환도한 이후, 아무런 좋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인민은 나의 정부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전면 화평의 성공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동아신질서’라 부르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아시아주의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불어넣고,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여 하나의 신앙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왜냐면 운동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열정과 고매한 이상이 혼연히 합치되기에 이를 신앙수준으로 높이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의 화평운동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동지 청년들은 화평의 신념을 몸에 새기고 그 정신을 민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고단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국민정부 난징환도 이후에도, 중국민중들의 고통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고 있지 않다. 쌀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 30위안이었던 것은 지금은 60위안에 달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일례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정부 밑에서의 민중들은 극도의 곤경과 고난에 노출되어 있다. 나의 소망은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중국민중을 구하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 그것뿐이다. 나의 이러한 간절한 소망은 단지 난징국민정부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전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모든 중국민중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도 교전상태에 있다. 일본은 전선에서 희생을 이어가고 있고, 충칭도 막대한 손실을 겪고 있다. 이러한 교전상태에 있어서는, 일본측은 바로 철병을 할 수없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문제를 일본측의 군사적 필요와 중국의 자유라는 두 가지 즉면을 모두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민수와 군수의 식량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듭 이야기했지만, 나의 소망은 중국민중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고 생활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에 있다. 그리고 화평의 신정부 하에서 생활의 안정을 보증하는 것이 일반 중국민중으로 하여금 화평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하는 효과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옷을 만들 경우 바느질의 상태나 천의 샘플을 보여주는 것처럼 화평이 좋다는 구체적인 사실, 즉 샘플을 보여주면 화평건국의 기초도 스스로 강화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 단계의 국민정부에는 비관적인 요소와 낙관적인 요소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기의 나의 염원은 이러한 낙관적인 요소를 더욱더 늘려가는 것과 동시에 비관적인 요소를 더욱더 줄여나가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정세가 우리에게 극히 곤란하다 할지라도, 나는 장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전면화평을 위해 매진할 결심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⑰ 패탱 원수의 교훈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으로의 길 (全面和平への路)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1. 왕징웨이와 나 2. 장제스 총재에게 고한다 / 염전 3.충칭최고국방회의에 제안하다 4.동지 쩡중밍 선생의 죽음에 맹세하다 5.충칭 탈출의 진상 6.중국국민당전국대표회의의 역사적의미 7. 일본 국민들에게 바란다 8.화평인가 항전인가 (대 장제스통전) 9.난징환도에 대해 일본에 감사를 표하다 10.자신을 벌하는 정신 11.전면화평에 회의감을 가지지말라 12.중국청년의 새로운 책임 13.화평파와 항전파 14.영광의 앞길 15.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6. 중국의 항전심리 17.페탱 원수의 교훈 패탱 원수의 교훈 (ペタン元帥の敎訓) *이는 쇼와15 (1940)년 11월 4일, 왕선생을 에워싼 중국신문기자단과의 일문일답의 내용이다. 난징 환도이후 국민정부의 향후 방침과 내정, 외교, 경제, 군사 각 방면에 걸쳐 문답이 이루어졌다. Q : 일본은 이미 신정치체제를 추진하고 있는데, 선생께서는 중국의 신체제운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A : 중국의 신체제운동과 일본의 신체제운동은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하지만 중국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 수단은 매우 다르다. 중국은 민국16 (1927)년부터 민국26년 (1937) 년까지의 기간동안 일종의 절반의 상태지만, 민주주의 국가였다. 진정한 전체주의 국가는 반드시 민중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군권에 의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 어느쪽도 군권에 의해 정권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니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때는 겨우 4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히틀러의 베를린 점령 또한 한 두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는 민중의 옹호에 의해 정권을 취득한 것이지 군권에 의한 것이 아님이 명확해진다. 중국이 어떻게 절반뿐인 현 상황을 형성했는가 하면 이것은 바로 항일의 결과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정신단결, 공가국난(‘국난극복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라는 뜻으로, 1932년 개봉한 항일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며, 공산당에서 제2차 국공합작을 제안하며 사용한 용어이기도 하다.) ’의 슬로건은 전국 전당을 강하게 압박했다. 민중의 기초를 공고히하여 중심세력을 결성해 집권의 목적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의 우리는 다시 이전의 수단, 즉 강압을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중국 신체제의 전야다. 우리는 모름지기 각 당파의 연합에 의하여 민중들과 함께 중심세력을 건립해야지, 이전처럼 민중을 강하게 압박해서는 안된다. Q : 개조 환도이후, 국민정부의 외교방침은 무엇인가? A : 현재의 외교는 대내적으로는 민중을 단결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맹방을 구해야 하며, 반독일-이탈리아와 영미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히 반대한다. 현재 일본과 소련은 타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 외교방침의 주요 목표는 동아에 중국과 일본의 중심축을 건설하는 것이다. 전쟁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전에 동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중심축개념을 이미 만들어 냈다,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Q : 환도 이후 국민정부의 재정정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국민경제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A : 옛말에 “정치의 핵심은 식량을 충족시키는 것, 병기를 충분하게 하는 것, 백성이 믿게하는 것” (논어 안연 편의 ‘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民信之矣’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국민정부의 국민정부의 재정과 국민경제에 대한 기본 원칙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공고한 재정의 기초는 중점주의를 채택하고 절약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에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시급히 전면화평을 실현하는 것에 있다. 전면화평이 실현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되게 되고 충칭은 더더욱 붕괴의 길을 향해가겠지만, 신정부 또한 고난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전면화평의 실현문제는 프랑스국의 예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패탱원수가 의연하게 독일과 화평을 맺은 것은 가장 위대한 애국애민의 정신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Q : 신중앙정부의 건군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A : 건군과정은 3가지 방면에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완전히 새로운 군대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 둘째는 귀순하려는 항전부대의 수용하는 것, 셋째는 지방의 잡군을 받아드려 재편성하는 것이다. 현재 지방의 잡군들은 재편성을 일단 중지하고 지방의 치안유지에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게 했다. Q : 국민대회의 소집문제(1940년 9월 12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1941년 1월 1일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41년 1월 개최도 늦다는 반응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1941년 1월 1일에 국민대회는 개최되지도 못했다.)는 어떤지. A : 헌정실시위원회(1940년 7월 20일 설립된 왕징웨이정권의 조직.)의 제1차 헌정위원 선정이후 헌정위원회의 전문위원회 및 중앙각부차장 책임장관은 현재 서로 협동하여 적극적이되 신중하게, 헌정초안의 심의와 수정공작을 실시하고 있다. 헌정초안과 수정안을 완성하는 과정 속 선거법의 심의와 수정이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가 있는데 이가 국민대표대회 선거사무소가 조속히 성립되지 않은 원인이다. 이 밖에도, 전시의 교통상태 속 각 성과 시의 대표들이 기일대로 출석할 수 있는지 여부 또한 고려한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⑮ 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화평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全面和平未だ實現せず) *쇼와 15(1940) 년 10월 10일, 쌍십절을 기념하여 왕 선생은 ‘국경일 감상’이라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고난의 길을 끝까지 전진해나가는 왕 선생의 심정에는 깊은 감동이 느껴진다. 국경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위업과 호국선열의 애국심을 추모하고 기념하고 경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건국의 대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민족은 위급하여 존망의 위기에 있음을 생각해보면, 본인을 비롯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들의 책무가 중대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전면화평은 아직실현되지 않았고 국가의 어려움, 민생의 초췌함을 생각해보면 감정이 북받쳐 축하의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일의 신관계조정은 이미 완성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일의 신관계조정은 중일민족의 불행인 이번 전쟁 중 서로 반성을 통해 이 분규를 근본적으로 일소하고 미래 상생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고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중국의 건국대업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중산 선생이 품으려했던 대아시아주의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이 광명있는 앞길에 쏟으며 우리는 이 국경일에 무한한 의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일독이 삼국동맹의 성립은 실로 동아를 제국주의의 해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중국으로 하여금 반식민지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지금 우리들은 깊이 노력하고, 신속하게 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면화평을 획득하고, 나아가 전후의 회복과 건설에 힘쓴다면 반드시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반성하고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다른이의 도움을 얻지 못함을 깨달아 최선의 힘을 다해 성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삼가 금년 국경일의 정신으로 삼고 싶다. 바라컨대 동지들이여, 우리 동지들이여, 힘을 합쳐 광명있는 앞기를 향해 용왕정진하여 장엄찬 중화민국의 건설을 위해 힘쓰라! (이 담화는 10월 10일 오전 10시, 난징국민정부 대예당에서 개최된 축하행사에서 발표된 것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⑭ 영광의 앞길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영광의 앞길 (光榮ある前途) *일화조약 (일화기본조약을 의미) 체결에 관한 회의는 쇼와 15 (1940)년 7월 5일부터 16번에 걸친 교섭을 거듭해 같은 해 8월 31일 원만한 타결에 이르렀다. 이날 왕 선생은 인사말에서 전면 평화 실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화평을 실현하겠다고 강하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협약 교섭의 최고목적은 향후 양국의 친선관계를 확립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 있다. 양국의 교섭위원들은 이 점에 대해 항상 동지로서의 정신을 가지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 내부를 돌아봤을 때 일부 인사들은 아직 이러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이 목적을 위반하고 교섭을 계속하자는 자들도 있다. 그렇기에 아직 신속하게 전면적 화평을 실현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눈앞의 사실을 고려하고 또한 미래의 영광스러운 앞길에 방해물이 생기지 않게 요구해야 한다. 양국 협상위원들은 이점에 대해 가장 고심을 거듭했지만 중국측은 앞으로 더욱 그 사명의 어려움과 중대함을 자각하고 전력을 다해 신속히 전면적 화평을 초래하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베 대사가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중국에 온지 2개월 동안 교섭의 진행에 대해 지도를 해준 노고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⑬ 화평파와 항전파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화평파와 항전파 (和平派と抗戰派) *왕 선생은 사변이 루거우차오에서 상하이로 전선이 확대된 8.13 기념일인 쇼와 15 (1940)년 8월 13일, 전면화평과 화평조건에 관한 흥미로운 담화를 발표했다. 이담화에서 화평파를 이끄는 왕 선생의 강한 신념이 돋보인다. 어떤 이가 나에게 “중국의 항전파와 화평파는 언제가 되어야 합칠 수 있는가? 또 전면적인 화평은 언제가 되어야 실현될 수 있는 것 인가?”라고 물은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중국에는 당파라는 것이 없고 오직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과 더불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과 생존을 요구하는 하나의 공동적 의견이 있을 뿐이다. 단지 공산당이 이 공동의견을 배척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라고. “그렇기에 이들 공산당은 중국인이 아니게 된지 오래이기에 당연히 중국인이라는 개념에서 제외해야한다.”고. 그렇다면 공동의견이란 무엇인가? 바로 좋은 화평조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중일양국 모두에게 유익한것이고, 동아에 있어서도 유익한 화평조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좋은 화평조건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중국에는 다시 ‘항전파’라는 불리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만약에 좋은 화평조건을 얻지 못한다면 이름바 ‘화평파’는 실패한 것이 되지만, 이러한 실패는 눈앞의 실패에 불과할 뿐, 영구적인 실패는 아니다. 왜냐하면 중일 양국은 서로 중일합작, 동아부흥이라는 하나의 큰 길을 향해 언젠가는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전면적 화평의 실현 여부는 좋은 화평조건의 획득 여부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화평조건의 획득이 빠르면 빠를수록, 전면적인 평화의 실현도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는가? 좋은 화평조건은 대체로 많은 중국인들이 함께 원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좋은 화평조건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중국인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두가지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을 열거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단독으로 일본과 화해하면 쉽게 좋은 화평조건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타국을 끌어들여야 비로소 타당한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타산은 가장 나쁜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바 중일합작, 동아부흥은 일종의 말뿐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진실성 있는 주장이며 일종의 권모술수가 아니라, 일종의 절대성이 있는 신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중일 양국이 성의껏 상대방을 대하지 못하고 수단만을 동원해 외교상의 효과를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본래의 목적에 반해 결국에는 역효과를 초래할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째는 일본이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것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중국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전쟁을 계속 연장시켜 더욱 좋은 화평조건을 획득하자는 생각으로, 이러한 가벼운 타산은 좋지 않은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소모가 많고 따라서 보상의 필요도 점점 커져갈 뿐으로 이는 평화조건을 나쁘게 만들면 나쁘게 만들었지 좋게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상의 두가지 생각은 천박할 뿐만아니라 가당찮은 생각이다. 그러나 충칭방면에서는 계속하여 이런 논조가 주창되고 있다. 이를 태연하게 여기고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나는 좋은 화평조건이 과연 획득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고, 하나는 좋은 화평조건이 획득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와 두려움의 원인은 곧 동아부흥의 의의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가지지 않고 이를 일종의 말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권모술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리들은 현재의 세계에서 고립주의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가 매우 적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약국뿐만 아니라 강대국도 고립되어서는 살아갈 수 없다. 본디 국가를 위해 생각한다면 무작정 다른나라와 연대관계를 맺어 이 때문에 행동의 자유를 견제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만 지리, 인종과 같은 자연관계 혹은 도덕관념이나 경제조건과 같은 인위관계 속에서 2~3개의 국가가 연합하여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지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에 일본은 선린우호와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원칙아래 중국과 합작하여 동아의 부흥을 꾀하는 것이 전쟁을 고집하여 중국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중국이 만약 이 점을 이해한다면 회의감을 가질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중국이 전폭적인 정신속에서 내가 4월 26일에 강연한 ‘나를 죄하는 정신’ (왕징웨이가 발표한 논문 제목, 이에 대해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으로 더욱 노력하고 일본에게 중국이 동아부흥의 최선의 반려자임을 깨닫게 한다면 화평조건이 결코 나빠질 리 없다. 왜냐면 소위 좋은 조건이라는 것은 중국에게만 좋을 뿐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도, 나아가 동아에 있어서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⑫ 중국 청년의 새로운 책임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중국 청년의 새로운 책임 (中國靑年の新しき責任) *사변 3주년인 쇼와 15 (1940) 년 7월 7일, 왕 주석은 사변 3주년 즈음에 이 담화를 발표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청년들에게 강력히 호소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중문 본문은 '對於事變三週年之感想及期望' 이라는 제목으로, 본책에서의 일어 번역문과 내용차이가 존재하나 본질적인 내용은 거의 같다.) 루거우차오 사건 발생 이전에 방지할 수 있었던 사변의 발생은, 발생의 이후에도 이 사변을 신속하게 종결시키지 못하고 3년이 헛되이 지나가며 전국은 점점 전화에 시달리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국제관례에 의하면 양국이 불행히도 화평을 상실하고 전쟁에 이르게 되면 화평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정전협정과 강화조약 뿐이게 된다. 이 경우 전승국은 항상 가혹하기 짝이 없는 조건을 전쟁패국에 가하게되고, 이렇게되면 패전국은 항상 때를 기다리다음의 보복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일본은 의연한 결의속 이 관례를 타파하고 스스로를 전승국이라 일컫지 않으며 선진국으로서의 도리로써 동아 각국가민족이 나아가야할 길을 지시하고 각자가 자주독립의 입장에 기초하여 새롭게 친애와 화목의 관계를 건설하게 하고, 아울러 동아부흥의 책임을 지게 하고 있다. 일본은 패전의 책임을 중국에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은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중국에 부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큰 책임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동아를 부흥시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 동아부흥의 책임을 부담할 능력을 얻게하기 위해 위에서처럼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거나 중국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바로 중국을 원조하고 독립국가로서 구비해야할 조건들을 완전히 보유하게 하려 하고 있다. 이는 역량을 증가시켜 그 발전을 촉진하여 동아 부흥의 책임을 능히 분담하는 능력을 갖추기 하게 위함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현재 이루려 하는 화평의 회복은 절대 굴욕으로서 화평의 댓가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일조의 활발한 진취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의는 청년일수록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년의 정신과 신체는 모두 활발하여 진취적이기에 이 의의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전국의 청년들은 이제 모두 하나가 되어 일어나 이 동아부흥이라는 새로운 책임을 함께 지고 이를 위한 새로운 노력에 공헌해야할 시기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러한 시기에도 주저하고 관망하려는 것인가? 가장 큰 원인은 동아부흥의 의의에 대해 아직 충분한 인식과 이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년의 경제침략의 해로움에 대해서는 손중산 선생이 이미 ‘민족주의’, ‘대아시아주의’, ‘중국의 존망문제’ 에서 이미 통절하게 이를 설명한 바가 있다. 중국이 만약 경제침략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중국이 영국이 영구히 식민지적 지위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청년 대다수는 영미의 학풍에 미혹되어 손중산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는 것에 대해서는 구시심비(말로는 옳다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르게 여김.) 하고 있는 것이다. 20여년전 손중산 선생의 시절에는 공산주의의 해로움을 볼 수 없었으나, 이후의 청년들은 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의미하는 것)의 선전에 미혹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중일관계가 암흑에서 광명으로 전환되면, 청년들도 옛 열강의 경제침략과 공산주의의 해로움을 깨닫고 눈뜨게 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중국에는 화평에 대한 열렬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길에 있어 의심을 갖고 있기에 형세를 관망하고 모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선전에만 의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사실로 만들어 내어 그들에게 하나의 견본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과 선전은 상호 인과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선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형세를 바라보며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만약 그들이 이대로 머뭇거리다가는 국가와 민족 전체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일의 공존, 동아의 부흥이라는 아득히 먼 이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의를 가지지 않으나 눈 앞에서 한 두가지 일의 실현이 뜻대로 되지 않기에 그만 낙심하고 심히 잘못된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전면적 화평의 도래가 가능하다 할지라도, 항상 그 뜻과 같은 사실이 존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여의치 않은 사실을 알고 조금이라도 노력을 가해야 하나, 이를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리 조급하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뜻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하고 심지어 자포자기 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원대한 이상에 반하는 일이고 본래의 불충분한 것이 되는 것으로, 이는 화평, 반공, 건국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정신과 기력을 집중하고 시시각각 부족한 것을 바로잡아 용맹매진하여 화평, 반공, 건국 운동의 마지막 성공을 이뤄야 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 일만화공동선언 (日滿華共同宣言) 1940.11.30
일만화공동선언 ( 日滿華共同宣言 ) , 1940년 11월 29일 작성, 30일 발표 일만화 (일본제국, 만주국,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3국이 서로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동아에 도덕에 기초한 실질서를 건설한다는 공동이념에서 좋은 이웃이 되어 긴밀히 협력하여 동아의 영구적 평화를 실현하고 이를 핵심으로 삼아 전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希望三國互相尊重其原然之特質,於東亞建設以道義為基礎之新秩序之共同理想下,互為善鄰,緊密提攜,俾形成東亞永久和平之軸心,並希望以此為核心,而貢獻於世界全體之和平。為此宣言如下:) 1.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와 일본과 만주국은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 一 中華民國、日本國及滿洲國互相尊重其主權及領土。 2.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은 호혜주의에 기초한 3국간의 일반적 지원, 특히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적 지원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채택한다. 二 中華民國、日本國及滿洲國,講求各項必要之一切手段,俾三國間以互惠為基調之一般提攜,尤其善鄰友好,共同防共,經濟提攜,得收實效。 3. 중화민국, 일본 , 만주국은 이 선언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가능한 조속히 협정을 체결한다. 三 中華民國、日本國及滿洲國,根據本宣言之旨趣,速行締結協定。 중화민국(中華民國) 29년 11월 30일 쇼와 (昭和) 15년 11월 30일 강덕 (康德) 7년 11월 30일 중화민국 난징. 참고로 이 조약을 왕징웨이 측에서는 "중일만"공동선언이라 하였다. (만주국에서는 "만화일(滿華日) 공동선언이라 하였다.) [원문 출처] https://zh.wikipedia.org/zh-hant/%E6%97%A5%E6%BB%BF%E8%8F%AF%E5%85%B1%E5%90%8C%E5%AE%A3%E8%A8%80
- 왕징웨이의 일본방문 (1941.6.13~6.28)
왕징웨이가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거친 과정들. 왕징웨이는 비행기, 배, 기차, 자동차까지 모두 탑승하며 난징에서 출발한지 거의 "90시간" 만에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1941년 6월 13일부터 방일 일정을 시작해 16일간의 일정을 가지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왕징웨이는 하노이 탈출이후 도쿄를 방문한 적 있었지만, 왕징웨이정권 출범 이후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적으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렇기에 일본에서도 거는 기대가 컸고, 왕징웨이 또한 방일에서 기대하는 것이 컸다. 심지어 만주국에서도 이번 방문을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1940년 말부터 일본을 방문하기를 원했으나. 일본측이 이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지속된 요구에 일본측은 1941년 4월 17일에야 왕징웨이의 일본방문을 허락했다. 이는 일본측의 생각이 왕징웨이 측에 긍정적으로 바뀐 결과였다. 총 16일의 긴 일정이지만,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의 절반가량을 이동에 사용했기에 실질적인 방일기간, 도쿄에서 왕징웨이가 업무를 보았던 시기는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번 포스트에는 신문자료가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에서 당시 발행되던 3대신문과 동시에, 왕징웨이정권에서 발행하던 중화일보까지 이용하여 글을 작성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941년 6월 13일 (金), 날씨 맑음 - 출발일 난징의 왕징웨이 공관, (現 중국대륙 난징시 구러우구 신화로 38, 당시주소로 난징특별시 제4구 신화로 34호 ) 이 건물은 왕징웨이의 처남이었던 추민이 (褚民誼)가 기부한 것이었다. 오후 2시 40분, 왕징웨이는 자신의 관원들을 데리고 자신의 공관에서 출발, 난징의 대교장기장(大校飛行場) 으로 이동했다. (약 15km, 약20분 소요.) 비행장에서는 왕징웨이에게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郎) 지나파견군총참모장을 비롯한 다양한 일본측 인사, 난징국민정부측 인사, 뤼롱위안(呂榮寰) 만주국 대사등 일본,만주국,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인사 약 500명이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의 방일 일정의 출발에 대해 환영했다. 인사들에게 환영을 받는 동시에, 국민정부 군악대는 환송곡을 연주했고, 이에 왕징웨이는 무언의 미소를 지으면서 비행기에 올랐고, 왕징웨이가 비행기에 오르자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왕징웨이의 관원들도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왕징웨이가 탑승했던 미쓰비시 MC-20 비행기. (사진은 다른 기체) 왕징웨이는 미쓰비시에서 만들었던 폭격기 Ki-21의 민수용인 MC-20을 탑승했다. 승무원까지 총 15명의 사람이 탑승할 수 있는 MC-20은 여러대가 당시 중국대륙에서 사용되었는데, 왕징웨이가 탑승한 기체는 C-5105 기체로, 福州號(복주호, 푸저우호) 라는 명칭이 붙은 비행기였다. 이 MC-20은 중화항공(지금 중화민국의 중화항공과는 상관없는 이전의 회사) 에서 약 10대가량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국적항공사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인사가 탑승하는 전용기로 임대하여 한대 마련하는 경우가 있듯이 이 경우 또한 중화항공에서 운용하던 MC-20 중 한대를 임대하여 왕징웨이를 비롯한 정부 고위인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푸저우호 (福州號) 에 탑승하는 왕징웨이. 오후 3시 10분, 비행기의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비행기는 이륙을 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당시 왕징웨이의 출발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왕주석 만세!" 를 연호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호속에서 비행기는 이륙했고, 상하이로 향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천궁보(당시 입법원장), 쉬량(당시 외교부장), 린바이셩 (당시 선전부 장관) , 저우포하이(당시 재무부장) 등을 데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오후 4시 10분, 왕징웨이의 푸저우호가 상하이 홍커우 비행장에 착륙했다. 난징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하이 홍커우 비행장에는 당시 상하이특별시 시장과 오오타 타이시(太田 泰治) 흥아원 화중연락부장관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왕징웨이는 이들의 환영을 받은 뒤 숙소로 향해 그곳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1941년 6월 14일 (土) 오전 10시, 왕징웨이는 관원들과 함께 숙소를 나와 후이산부두로 향했다. 후이산 부두 (匯山碼頭)의 모습, 이름은 조계를 처음 지을 시절, 대충 지었던 Wayside wharf (길가의 부두) 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후이산 부두(匯山碼頭, 현재 중국대륙 상하이시 홍커우구 양수푸루(양수포로) 18호 , 虹口區楊樹浦路18號)에는 야와타마루 (八幡丸) 라는 일본의 화객선 (화물과 승객을 모두 태우는 배) 가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일본공사를 따라 왕징웨이는 배에 승선했다. 딩모춘과 당시 상하이시장을 비롯한 난징국민정부 인사들은 배까지 따라와 왕징웨이를 배웅하였고, 왕징웨이는 이들의 배웅과 환영을 받은 뒤 특별실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야와타마루(八幡丸), 1940년에 건조된 당시로는 최신 상선이었다. 하지만 1942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자 징발되어 항공모함 운요(雲鷹)로 개조되게 된다. 그리고 운요는 1944년 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오후 12시 30분, 왕징웨이는 관원들과 함께 갑판에 올라가 관원들과 함께 건배를 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축복했다. 이때 배 옆 항구에서 국민정부 군악대가 다시한번 환송가를 연주하였다. 그리고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郎) 지나방면함대 사령장관과 만나 축복을 기하는 건배를 하였다. 오후 1시 30분, 야와타마루는 드디어 출발을 시작해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 배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17명의 난징국민정부 인사가 함께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마다 시게타로 (嶋田繁太郎) 지나방면함대 사령장관과 건배하는 왕징웨이. - 경성일보, 1941년 6월 15일 당시 야와타마루에는 왕징웨이와 그의 관원들, 정부인사들 뿐만 아니라 왕징웨이의 기념적인 첫 방일일정을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징웨이가 배에서 한 행동들은 바로 전보를 통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공영권 내의 지역으로 바로 바로 전달되었다. 이때 이 배에 함께 탑승했던 기자들은 기사를 시작할때 난징발, 도쿄발, 이렇게 기사가 작성된 곳을 작성할때 이들은 "야와타마루 발 (八幡丸 發)" 이라고 쓰기도 했다. 왕징웨이를 태운 야와타마루가 일본으로 가고 있는동안, 일본에서는 쇼와 덴노(히로히토) 가 왕징웨이의 방문에 대해 "황실의 손님으로 대하라" 라고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가 도쿄에 와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숙소로 황실이 보유하고 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有栖川宮邸)의, 외국의 국빈이나 왕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제공했던 카스미가세키별궁 (霞関離宮) 을 숙소로 제공하라 지시를 내렸다. 이 소식은 배에 타고 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일행에게도 전달되었는데, 이에 대해 왕징웨이를 비롯한 일행들은 감사인사를 표했다고 한다. 왕징웨이가 도쿄에서 머물렀던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별궁 (霞関離宮, 霞ケ関離宮), 일본 치요다구 가스미가세키에 있었다. 1945년 도쿄대공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또한 궁내청에서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난징국민정부 인사를 접대할 인원을 선출하고, 왕징웨이의 일본도착에 맞추어 환영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16일 (月) 오전 8시, 야와타마루의 마스트(돛대) 에 청천백일만지홍기 (물론 왕징웨이의 그것) 이 게양되었다. 즉, 야와타마루는 도착 당시에는 배에 일장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베시에서는 왕징웨이를 환영하기 위한 주요인사들이 준비를 시작했고, 고베시청 앞의 국기게양대에는 일장기와 함께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었다. 오전 9시, 당시 일본에 중화민국대사로 있었던 추민이(褚民誼)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따로 작은 배를 타고 고베로 다가오고 있는 야와타마루로 접근해 먼저 왕징웨이를 만났다. 이때 당시 안개가 끼어었으나, 이를 뚫고 왕징웨이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추민이는 이때 왕징웨이와 악수도 나누었다. 야와타마루에서의 왕징웨이. (옆의 인물은 선전장관이었던 린바이셩) - 매일신보, 1941년 6월 17일 오전 9시 30분, 이 시점에서 왕징웨이의 야와타마루가 도착하기로한 고베항 4번부두에는 이미 외무성 동아국장, 카츠타 킨지로(勝田銀次郎) 고베시장을 비롯한 일본 인사들이 왕징웨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약 천명의 사람들이 왕징웨이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는데, 350명 가량은 주요인사들, 600명 가량은 고베의 중화동문학교(中華同文学校)의 학생들이었다. 이때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전 주중화민국 일본대사도 시간이 된다고 하여 참가했다.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그 아베가 맞다.) 오전 10시, 왕징웨이가 탑승한 야와타마루는 드디어 고베항에 도착했다. 미리 고베항에 모여있던 인파들은 왕징웨이 일행의 도착에 환호했다. 오전 10시 30분, 하선준비를 마친 야와타마루는 계단을 내리고 하선을 시작했다. 이때 빨간 레드카펫이 함께 깔렸으며, 왕징웨이가 카펫을 따라 배에서 내려오자 외무성 동아국장이 총리를 대신하여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인사와 장시간 여행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음을 이야기하고, 이후 다른 인사들도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말을 건냈다. 이와 동시에 효고현 현립상공학교의 밴드가 중국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국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왕징웨이가 선두에 서고, 쉬량과 저우포하이, 린바이셩이 왕징웨이를 따라 부두를 따라 걸어 나갔다. 이때 왕징웨이는 쓰고 있던 실크햇을 벗어 인파들에게 흔들면서 감사를 표했다. 이때 왕징웨이와 함께 했던 기자단은 일본의 도착한 왕징웨이의 눈이 빛나고 있었으며, 가슴에는 감개무량함이 보이는 것 같다고 기록했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부두에서 나와 효고 현에서 준비한 차량 20대에 나누어 탑승하였다. 이날 일본방송협회 오사카 라디오 (JOBK)에서는 야와타마루의 도착에 맞추어 야와타마루 안에다가 마이크를 설치해 왕징웨이의 일본도착을 실황중계하였다고 한다.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차량행렬과 이를 환영하는 고베시민들의 모습.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20대의 차량행렬은 고베의 한신가도(阪神街道) 를 달려 고시엔(甲子園) 호텔로 향했다. 이때, 학생단체들, 재향군인단체들, 부인단체들 등 약 4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일장기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면서 왕징웨이를 환영하고 환호를 보냈다. 왕징웨이가 고베에서 머물렀던 숙소인 고시엔 호텔. (한신타이거즈의 고시엔 야구장이 있는 그 고시엔이 맞다) 오전 11시, 왕징웨이와 일행이 탄 차량행렬은 고시엔 호텔(현 무코가와 여자대학 고시엔회관) 에 도착했다. 이 때 고시엔 호텔에는 일본의 일장기와 난징국민정부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크게 게양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왕징웨이는 롯코산을 비롯한 고베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3층의 양식&일본식이 결합된 방에서 묵었다고 한다. 오후 12시,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왕징웨이는 호텔 정원의 연못앞에서 호텔 지배인이 준비한 일본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식사 이후 왕징웨이는 방으로 돌아가 계속 쉬었는데, 이는 이날 밤 다시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일본 궁내청과 6월 17~18일간 도쿄에서 일정을 잡은 만큼, 일정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후 8시 50분, 호텔에서 어느정도 쉰 왕징웨이는 고베역에서 도쿄로가는 급행특별열차에 탑승했다. 이때도 고베역에는 왕징웨이의 도쿄행을 환영하는 인파들이 왕징웨이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상, 고베에서 도쿄까지 가는데에는 12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기에 왕징웨이와 일행은 기차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941년 6월 17일 (火) 오전 8시 45분, 왕징웨이와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도쿄역에 도착했다. 전날 오후 8시 50분에 출발했으니 거의 12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역에는 일본과 난징국민정부의 깃발이 크게 걸려있었고, 고노에 일본총리와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육군대신, 마츠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 외무대신, 오이카와 코시로(及川古志郎) 해군대신, 만주국대사등 일본 정부의 주요인사와 인파가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왕징웨이는 가장 먼저 고노에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왕징웨이와 일행은 역에서 나와 외무부에서 준비한 차들에 탑승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1호차에, 저우포하이는 2호차에 탔다고 전해진다. 도쿄역을 떠나는 왕징웨이와 일행의 차량행렬 오전 9시 5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고베와 마찬가지로 환영인파의 환대를 받으며 도로를 달려 도쿄 아자부구(麻布区, 현재 도쿄 미나토구, 롯본기근처) 에 있는 주일중화민국대사관에 도착한다. (당시 중화민국 대사관이 있던 자리는 현재 외무성 이쿠라공관 (外務省 飯倉公館) 이 되었다.) 대사관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 왕주석각하 (歡迎 汪主席閣下)" 와 같은 현수막을 걸고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대사관에 왕징웨이가 들어오자 대사관 직원을 비롯한 현장에 있던 2백명의 인원이 "왕선생 만세!" 를 외쳤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대사관에서 대사관 직원들과 회견하며 대사관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이후 대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 왕징웨이 일행의 차량행렬이 대사관으로 들어가고 있고 인파들은 깃발을 흔들며 이를 환영하고 있다. 오전 11시, 왕징웨이는 혼다 쿠마다로(本多熊太郎) 주 중화민국 일본대사와 함께 가벼운 간담회를 가지고, 추민이와 함께 3명이서 식사시간을 가졌다. 이때 요리는 대사관의 자체 요리사가 간단하게 중국요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를 포함한 3명은 식사를 하면서 1시간이 넘도록 여러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렇게 식사와 간담회를 마치고, 왕징웨이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는 대사관에서 나와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으로 향했다. 카스미가세키 별궁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거실과 푸른색 발코니가 있고, 사계절을 나타낸 일본도가 그려진 가장 큰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의 숙소 카스미가세키별궁의 대회당에서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쉬량, 린바이셩을 포함한 왕징웨이측 일행과 일본측 인사들이 비공식적인 만찬회를 가쳤다. 1941년 6월 18일 (水) 아침 (정확한시간이 적혀있지 않음) , 왕징웨이의 숙소 카스미가세키 별궁 앞에는 이미 오노데라 마코토(小野寺信) 가 이끄는 1개 의장대 중대와 군악대가 도착해 도열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이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이후 아침식사를 하였다. 오전 10시 33분,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린바이셩을 비롯한 일행들은 궁내청에서 보낸 자동차에 나누어 탑승해 궁성( 현재 황거, 고쿄,皇居)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차량이 출발하면서 앞에서 도열하고 있던 군악대는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하였다. 궁성(宮城)의 이중교(二重橋)를 지나는 왕징웨이 일행의 차량행렬 오전 10시 40분, 왕징웨이 일행이 탑승한 차량행렬이 이중교를 통과해 궁성 내부로 들어갔다. 궁성 내부로 들어간 차량행렬은 메이지궁전 (明治宮殿, 1945년 미국의 폭격으로 소실됨)의 현관으로 향했다. 궁성의 메이지궁전의 현관 (車寄せ, 자동차를 댈수 있는 현관), 쇼와 덴노은 직접 이곳까지 나와 왕징웨이를 만났다. 히로히토는 직접 현관까지 행차하여 왕징웨이의 마중을 나와 왕징웨이를 맞이하였다. 히로히토는 왕징웨이와 악수와 함께 짧은 말을 건네며 왕징웨이를 환영하였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마츠다이라 요시타미(松平慶民) 궁내성 무부장관의 안내를 받아 마츠다이라를 따라 봉황간(鳳凰間, 호우오우노마) 로 향했다. 봉황간에서는 고준 황후가 왕징웨이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로히토는 왕징웨이를 봉황간의 정석으로 모시고 공식적인 회견을 시작했다. 회견에 앞서, 왕징웨이는 히로히토 부부에게 중국식 4곡짜리 오래된 병풍을 선물했다. 왕징웨이와 쇼와 부부가 회견을 진행했던 메이지궁전의 봉황간(鳳凰間) 의 모습. 메이지궁전이 전쟁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고쿄에는 이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봉황간의 옆방에서는 궁내성의 인원들과 왕징웨이의 일행들이 대기를 하며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왕징웨이는 이러한 황실의 깊은 친절에 감사를 표했고, 히로히토 부부도 통역을 이용해 왕징웨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징웨이는 또한 추민이 대사를 히로히토 부부에게 소개시켜 추민이 대사와 히로히토 부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추민이는 히로히토부부에게 또다른 선물을 전달했다. (선물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다.) 왕징웨이와 쇼와부부가 봉황간 에서 자리를 옮겨 이동한 천종간(千種間) 오후 12시, 히로히토 부부와 왕징웨이는 자리를 천종간(千種間) 으로 옮겼다. 히로히토 부부도 왕징웨이에게 궁내성의 직원들을 소개시켜주고, 고노에 총리를 비롯한 일본내각의 고위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는 자리를 풍명전(豊明殿) 으로 옮겼다. 풍명전(豊明殿), 가장넓은 공간이며, 연회를 비롯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풍명전으로 옮겨 히로히토 부부와 왕징웨이는 점심 만찬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가장 상석에 앉고, 고준황후는 이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으며, 왕징웨이는 고준황후의 오른쪽에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만찬에는 일본 황족들, 고노에 총리, 궁내대신, 마츠오카 외무대신, 도조 육군대신, 오이카와 해군대신, 당시 흥아원 부총재, 혼다 대사, 추민이, 저우포하이, 그리고 왕징웨이의 관원들 7명, 그리고 쇼와 덴노의 측근과 궁내청 직원들이 함께 만찬을 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는 모단간(牡丹間)로 가서 함께 차를 마셨다. 이때 히로히토 부부도 왕징웨이에게 선물을 전달하였다. 왕징웨이도 히로히토 부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징웨이와 히로히토 부부의 만찬, 자료에 따르면 이렇게 3명의 핵심적인 자리가 정해졌고, 이 주변을 고노에총리를 비롯한 인원들이 채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후 1시 20분, 왕징웨이는 궁성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별궁으로 향했다. 히로히토는은 왕징웨이가 가는 길에도 현관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고 한다. 오후 1시 30분, 왕징웨이가 숙소였던 카스미가세키 별궁으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다키히토 (三笠宮崇仁) 친왕이 왕징웨이가 있던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을 방문했다. 왕징웨이와 다키히토는 1층의 응접실에서 짧은 회견을 가졌다. 오후 4시, 휴식을 취한 왕징웨이는 숙소인 카스미가세키 별궁을 나와 전날 방문했던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오후 5시, 왕징웨이는 중화민국대사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일본어 통역은 저우포하이가 맡았다.) 이번 방일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쿄의 중화민국대사관에서 담화문을 발표하는 왕징웨이. 왕징웨이의 방일담화 (1941.6.18, 주일중화민국대사관, 도쿄) 이번에 내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 것은 우리를 지지해주는 일본 귀국의 호의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과 동시에 양국간에 있어 협력해야 할 여러가지 근본적 문제를 일본정부와 논의하기 위함이다. 오늘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으로서 일본 천황황후를 만나 친히 우리정부와 우리국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정부와 동아의 장래를 친히 염려해주시고 격려해준 일본 천황에게 감사를 표할 뿐이다. 내일부터는 귀국정부당국을 방문해 우리정부의 충정(衷情)을 피력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일본국민 여러분들의 굳은 결심속에서 고노에 총리대신이 작년 발표한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3원칙의 실현을 위하여 깊은 노력을 해 작년의 중일기본조약과 중일만공동선언을 완전히 실현시켜 전면화평을 완성하고, 또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이에 마땅한 책임을 다해 영원한 동아의 화평을 수립하고 나아가 세계의 화평에 매진하려는 나의 의지는 절때로 꺼지지 않을것을 단언할 수 있다. 고베 도착이후 귀국으로 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있는데, 천황께서 보여준 특별한 대우와 일본국민 여러분이 보여준 정성은 내 인생에 있어 잊힐 수 없는 감격으로 남을 것이다. 이에 삼가 깊은 사의(謝意)를 표한다. (중일만공동선언,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같은 시간, 린바이셩도 대사관에서 일본기자들과 회견을 하며 담화문을 낭송했다. 이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오후 8시 30분, 왕징웨이의 방문을 기념하여,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는 도쿄방송국관현악단이 『동아민족진행곡』 을 연주했다. 1941년 6월 19일 (木) , 날씨는 비가 조금 내림 18일로서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났고 , 이때부터는 행정과 관련된 비공식적 일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중화민국 대사관을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추민이를 비롯한 일행을 데리고 오오야 마사오(大谷正男) 를 통해 지방의 인사들과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오전 9시 45분, 오오야 마사오가 직접 도쿄의 중화민국대사관에 찾아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오전 10시 30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메이지신사를 방문했다. 이날은 가볍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왕징웨이는 자갈을 밟으며 메이지신궁의 내부로 향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다마구시(玉串) 대금을 봉납했다. 다마구시(玉串) 10시 35분, 왕징웨이는 메이지신궁에서 기도를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왕징웨이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왕징웨이의 모습을 취재하던 기자는 이러한 왕징웨이의 모습이 동아부흥의 희망에 불타고 있는것 같다고 묘사했다. 메이지 신궁을 참배하는 왕징웨이와 일행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날아침에는 비가와서 우산을 쓰고 있다. 오전 11시 45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로 향했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의 기념관을 방문하여 방명록을 남기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오후 12시 20분, 왕징웨이와 일행은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왕징웨이 일행은 점심식사를 한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1시 30분, 린바이셩 선전장관이 대정익찬회의 중앙협력회의를 참관하였다. 오후 2시 20분, 왕징웨이는 이때부터 고노에 수상을 비롯한 일본 고위인사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순서는 마츠다이라 궁내대신 → 고노에 총리 → 마쓰오카 외무대신 → 도조 육군대신 → 오이카와 해군대신 → 스기야마 참모총장 → 나가노 군령부총장 → 카와다 대장(大蔵)대신 → 하라 추밀원 의장 였다. 이때 왕징웨이는 각 인물을 만날때마다 감사의 선물을 전하였는데, 예를 들어 오이카와 해군대신에게는 백옥색의 여의봉을 선물하였고, 마쓰오카 외무대신에게는 고전풍 꽃병을 선물하였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과 회견하는 왕징웨이. 오후 (시간이 적혀있지 않음) ,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의 (中央協力會議) 에서 전원일치로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환영사를 가결시켰다. 汪主席閣下歡迎辞 (왕주석각하환영사) 今回中華民國國民政府主席行政長官汪精衛閣下來訪に當り大政翼贊會中央協力會議は衷心より歡迎の意を披瀝し閣下の始終變らざる和平建國の努力に對し滿腔の敬意を表す 이번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행정장관 왕징웨이 각하 내방에 즈음하여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의는 충심으로 환영의 뜻을 피력하고 각하의 시종 변함없는 평화건국의 노력에 대하여 만강의 경의를 표한다. 이 환영사는 미츠기(未次) 의장이 왕징웨이에게 전달하였다. 오후 7시, 왕징웨이는 총리관저에서 고노에 총리가 주최하는 만찬회에 참가하였다. 왕징웨이쪽에서는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추민이와 린바이셩과 관원들이 참가했고, 일본측에서는 고노에를 비롯한 여러 고위급 정부인사가 참가한 것은 당연했으나, 이번에는 그 인사의 폭이 늘어 일본은행 총재, 도쿄 도지사, 대정익찬회의 인원들, 도쿄시장 등도 참가하여 약 100명의 인사가 만찬회에 참가했다. 만찬에선, 고노에수상이 먼저 인사를 하고, 이에 왕징웨이가 답사를 발표하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만찬은 7시부터 시작되어 9시쯤 끝이났다. 오후 9시 20분, 만찬을 끝낸뒤, 왕징웨이와 고노에총리, 마쓰오카 외무대신 3명은 남아서 추가로 약 30분간 회담을 하였다. 1941년 6월 20일 (金) 오전 6시 40분,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왕주석의 방문에 즘하여" 라는 방문을 약 20분간 진행했다. 오전 10시 30분, 일본 해군은 왕징웨이정부측에 수송기 한대를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왕징웨이는 이 비행기에 海鶼號(해겸, 하이지엔)호 라는 이름을 붙혔다. 이 비행기는 왕징웨이의 전용기로 사용되게 된다. 방일전까지만 해도 왕징웨이는 비행기를 빌려서 사용해야하는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는 이미 이전부터 일본측에 자신을 위한 전용기를 주문했었다. 이에 일본해군측이 방일에 대한 감사보상으로 비행기를 한대 제공하면서 이제 제대로된 비행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신문에서는 왕징웨이에게 준 전용기의 기종에 대해서는 적어두지 않았지만, 우리는 왕징웨이가 이때 받은 비행기의 기종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1942년 12월 방일할 당시에 는 이번 방일과 달리 하이지엔호를 이용해 비행기로 난징에서 도쿄로 바로 왔기 때문이다. (물론 후쿠오카에서 연료를 재보급하기는 했다.) 일본뉴스 133호에는 하네다공항에 도착하는 왕징웨이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따라서 우리는 일본뉴스 133호에서 왕징웨이가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가 해겸호 임을 알 수 있다. 일본뉴스 133호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왕징웨이의 하이지엔호과 똑같은 기종인 96식육상수송기 11형 (L3Y1)의 모습 왕징웨이가 일본 해군에게 받은 기종은 해군에서 운용하던 G3M (96식육상공격기, 九六式陸上攻撃機) 폭격기에서 무장을 제외하고 10명가량이 들어갈 수 있는 좌석을 설치한 수송기 버전의 L3Y (96식육상수송기) 의 11형 (L3Y1) 이다. 글의 처음에서 보았듯 푸저우호의 기반이었던 미쓰비시 MC-20의 경우 항속거리가 3,000km 밖에 되지 않는데에 반해 L3Y는 45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한계로으로 인해 장거리비행이 어려웠던 이번 방일과정에서 난징-도쿄가 90시간 가까이 걸렸던 반면,해겸호를 이용함으로서 27시간만에 난징에서 도쿄까지 갈 수 있었다. (심지어 이것도 왕징웨이가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묵었기에 이런것으로 무리하였다면 하루안에 도쿄까지 갈수도 있었다.) 그리고 L3Y의 원본기종이었던 G3M은 이미 태평양전쟁시작 전부터 한계를 들어내고 있었던 구형기종이었다. 해군측에서 이기종을 선택했던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해겸호(海鶼號) 의 재현도. 일본뉴스 133호의 영상을 토대로 재현한 해겸호의 모습을 보면, 콕핏쪽에 왕징웨이정권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그리고 콕핏 밑의 부분은 해겸(海鶼) 이라는 이름이 적혀있고, 중화항공 (中華航空股份有限公司)의 로고와 사명이 적힌것으로 "추정"된다. (로고부분이 특히 확실하지 못하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해겸호에는, 청천백일문양이 아닌, 일본 항공기에 쓰이는 히노마루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오후 12시 30분, 왕징웨이는 도조의 육군대신 관저에서 도조 육군대신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주최하는 점심식사에 참가했다. 이자리에는 왕징웨이 일행과 일본 육군인사들이 참가한 행사로, 행사에서는 도조가 먼저 인삿말을 건냈고, 이에 왕징웨이도 답을 보내고 축배를 들었다. 도조는 인삿말에서 국공결렬이후 20년가까이 반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왕징웨이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충칭정부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식사가 끝난뒤 왕징웨이와 스기야마, 도조와 그들의 부하까지 합쳐 총 6명이서 별실에서 추가적으로 회견을 진행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와 함께 일본에온 쉬여 외무부장은 일본 도쿄의 만주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쉬여는 만주국대사에게, 도쿄방문때 마중을 나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고, 20분가량 회담을 가졌다. 오후 9시, 린바이셩이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자신의 감상을 약 30분간 이야기했다. 1941년 6월 21일 (土) 오전 7시 30분,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와 함께 오기쿠보(荻窪)의 고노에 수상의 사택으로 가서, 사택을 함께 방문한 마쓰오카 외무대신과 함께 4명이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4명은 중일제휴에 대한 회담을 1오전 10시 반까지 진행하였다. 오후 11시 25분, 왕징웨이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平沼騏一郎) 내무대신의 관저를 방문, 회담을 진행했다. 히라누마 내무대신은, 자신의 총리였던 시기 (1939.1~1939.8) 를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에게 자신의 총리를 했던 시기처럼 그대로 노력해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왕징웨이에게 "일본의 협력을 얻어 전력을 기울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했다. 왕징웨이와 히라누마의 회담은 25분만에 끝이 났다.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수교사(水交社, 지금의 도쿄타워 근처) 에서 오이카와 해군대신과 오찬을 가졌다. 이 오찬에는 왕징웨이측 일행과 일본해군측 인사들을 포함해 70명가량이 참가하여 2시까지 오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2시에 오찬이 끝난 후 오이카와 해군대신과 왕징웨이는 따로 30분가량 회담을 더 진행하였다. 왕징웨이와 함께 수교사에서 걷는 오이카와 해군대신 (가장왼쪽) 오후 3시, 왕징웨이는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일본 외무성 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기자단이 질문을 종합해 질문을하면, 왕징웨이가 이에 대해 답을하는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치뤄졌다. 이 기자회견은 약 1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오후 5시, 도쿄의 8개의 여학교의 여학생 7천명이 히비야공원에 모여 왕징웨이를 환영하기로 하였다. 여학생들은 환영왕주석각하(歡迎汪主席閣下) 라고 적힌 팻말을 선두로, 4열종대로 "애국행진곡"의 멜로디에 맞추어 일장기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면서 왕징웨이가 있는 제국호텔로 행진했다. (이는 물론 관제행사였다.) 오후 5시반, 제국호텔에서 추민이의 주도로 각계인사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열었다. 이 다과회는 마쓰오카 외무대신, 나가노 군령부총장, 스기야마 참모총장, 대정익찬회의 인사들, 신문기자들, 문학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까지, 600명가량이 참가하는 대형행사였다. 왕징웨이는 행사에 참석하고 있던 중, 위의 여학생들이 제국호텔앞에 도착하여 외치는 "왕주석만세!" 소리를 듣고, 호텔의 발코니에 올라가 환호를 보내준 여학생들에게 손을 3번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건냈다. (이때 왕징웨이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 20분정도가 지나고 왕징웨이가 발코니에서 내려가자, 저우포하이와 린바이셩이 계속하여 이 여학생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발코니에서 내려가 요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호텔안의 연극장에서 단풍놀이(紅葉狩) 를 비롯한 7종류의 일본무용을 감상하였다. 공연은 7시에 끝이났다. 제국호텔 안의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단풍놀이(紅葉狩)의 장면, 이 사진은 실제 왕징웨이의 방일기념사진첩에 있던 사진이다. 오후 7시 30분, 왕징웨이는 다과회를 마치고 차를타고 달려 정치가 도야마 미츠루(頭山満)의 사택에서 그 를 만났다. 이자리에는 이시와타 소타로(石渡荘太郎) 대정익찬회 사무총장, 아키타 키요시 (秋田清) 척무대신을 비롯한 주요 정계 인사들이 이미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도야마를 만났던 이유는 왕징웨이 스스로가 아시아주의자였기에 (정확히는 쑨원의 아시아주의를 따르는) , 쑨원의 아시아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도야마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 10시 30분, 3시간가량 진행된 도야마를 비롯한 요인들과의 대화를 끝내고, 왕징웨이는 숙소인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왕징웨이와 이야기하는 도야마의 모습. (왕징웨이의 왼쪽이 도야마.) (시간을 알수없음, ) 왕징웨이는 흥아서도전(興亞書道展)의 상품으로 난징의 유명한 붓과 먹 10세트를 기증하였다. 이 행사에는 일본, 만주국, 왕징웨이정권의 서예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이 중에는 고노에 일본총리, 왕징웨이, 만주국의 장징후이를 비롯하여 일본측에서 작품 3천개, 만주와 중국측에서 합쳐서 약 1천개가량의 작품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22일 (日) 이날은 많은 신문속에서 왕징웨이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날이었기에 거의 모든 신문은 이에 대한 소식을 담기 바뻤고, 이로인해 이날 왕징웨이의 행적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일본과 조선의 신문뿐만 아니라 심지어 난징정부에서 만들었던 신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린바이셩을 대리로 육군 제1병원으로 보내, 부상병들을 격려했다. 이후 군의관학교도 방문하여, 군의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오전중 (시간알수없음), 왕징웨이는 추민이와 함께 시나가와의 카미오사키에 있는 이네나가 유키치(岩永裕吉) 전 동맹통신사장의 사택을 방문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8시, 일본방송협회 도쿄방송국 (JOAK) 에서 고노에 총리와 왕징웨이가 이번 방일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8시 정각부터 8시 15분까지, 고노에 총리가 먼저 이야기를한뒤, 이를 중국말로 번역하고, 8시 30분부터 저우롱샹(周隆庠)의 지원을 받아 왕징웨이가 15분동안 방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1941년 6월 23일 (月)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카와다 대장대신의 관저에서 카와다 대장대신과 회담을 가졌다. 이행사는 주로 일본측의 재계인사들이 참가했었다. 일본은행, 조선은행, 대만은행 총재등이 자리에 참가했었다. 왕징웨이는 감사의 인사를 올린뒤 카와다 대장대신도 이에 답으로 인사를 올렸다. 이후 회담이 진행되었고 회담은 오후 1시 30분까지 진행되었다. 1시 30분 모임은 끝났지만, 왕징웨이와 카와다는 남아서 조금더 이야기를 진행했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는 고노에 수상관저에서 '고노에-왕징웨이 공동선언' 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노에총리대신-왕징웨이행정원장 공동성명 (近衛總理大臣-汪行政院長 共同聲明) 나와 왕징웨이씨는 지금의 지나사변을 속히 처리하고, 이것을 계기로하여 일화(日華)양국의 영원한 관계를 확립하고, 공존공영(共存共榮), 동아부흥(東亞復興) 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매진하고, 이전에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를 내용으로하는 동아신질서건설에 관한 각각의 선언(고노에성명을 의미) 을 한바가 있었는데 이는 지난해 11월 30일 성립된 일화기본조약, 일만화공동선언이 같은 취지속에서 만들어져 그 뜻이 계속되었다. 무릇 동아신질서 건설의 의미는, 동아 고유의 도의적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동아에서 침략주의, 공산주의의 독을 제거하고 상호제휴, 공존공영의 나라를 건설하는데에있다. 중국 민중들 중에는 중국과 일본의 합작에 의한 동아의 번영을 희망하면서도 과연 이 희망이 실현될수 있을지에 대해 아직 자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연히 이를 머뭇머리며 그저 관망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않다. 동아부흥의 위대한 사업은 지금의 단계에서도 될수 있는한 그 뜻을 최대한 뚜렷하게 나타내어 많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전면화평의 실현에 매진함으로서 비로소 이를 달성할 수 있는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회담한 결과, 일화 양국정부는 위의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정치상, 경제상, 군사상, 문화상의 일화제휴협력의 구체적 실현을 제공하고, 민중들로 하여금 일화합작, 동아부흥이 일본과 중국 양국민 공동의 사명임을 알리는데에 힘쓰고, 일본제국 정부는 이에 대하여 최대의 협조를 하여 국민정부가 속히 독립자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동아신질서의 책임을 분담시키려 노력한다. 쇼와 16(1941)년 6월 23일 近 衛 文 麿 汪 兆 銘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저우포하이 성명은 중국어로는 저우포하이가, 일본어로는 정보국총재였던 이토 노부후미(伊藤述史)가 낭독하였다. 오후 7시, 성명을 발표한 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제국호텔의 환영회에 참가하였다. 대정익찬회 측이 주최한 이행사에는 왕징웨이 인사들, 대정익찬회 인사들, 민간인사 일부가 참여하여 약 70명 가량이 참가하였다. 고노에 총리는 참가하지 못하고 대신 축하문을 보내어 자리에 있던 대정익찬회 부총재가 이를 대신 읽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모임은 8시에 끝이 났다. 1941년 6월 24일 (火) 오후 12시, 왕징웨이는 방일과정에서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고노에 총리를 비롯한 주요인사들을 중화민국대사관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약 50명가량이 참가한 이 오찬은 1시까지 진행되었다. 오후 3시, 왕징웨이는 궁성으로 들어가 남유간(南溜間)에서 마츠다이라 궁내부 무부장관을 만나 내일 도쿄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했다. 왕징웨이는 일본 황실이 방일과정에서 보여준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오후 4시, 왕징웨이는 귀족원-추밀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다과회에 참가하였다. 행사는 국회의사당에서 마츠다이라 요리나가 (松平頼寿) 귀족원 의장을 중심으로 ,도조 육군대신, 오이카와 해군대신, 오가와 고다로(小川 郷太郎) 철도대신이 내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약 600명의 귀족원-추밀원 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마츠다이라 귀족원 의장이 감사인사를 건냈고 왕징웨이도 답문을 읽어 보답했다. 4시반까지 다과회는 진행되었다가, 4시반부터 추밀원 의원들과 따로 이어서 다과회를 계속하였다. 라디오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고노에와 왕징웨이의 모습 - 경성일보 1941년 6월 25일자 오후 8시 10분, 모임을 끝낸 왕징웨이와 고노에총리는 JOAK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송은 8시 40분까지 진행되었다. 일본국가와 중화민국의 연주가 있은 후, 고노에가 먼저 "왕주석각하를 환영하며" 라는 제목의 방송을 하였고, 이후 왕징웨이가 "우방일본을 방문하며" 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다. 1941년 6월 25일 (水) - 귀국일정 오전 8시 40분, 왕징웨이는 방일일정을 끝내고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의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나와 도쿄역으로 향했다. 이때 차량은 외무성에서 제공되었다. 도쿄역으로 가는길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길가에서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며 왕징웨이를 맞이했다. 왕징웨이의 난징행에 도쿄역에 마중을 나온 고노에와 일본주요인사들. 180cm가 넘는 고노에의 키는 분명 당시기준으로도 키가 큰 편이었던 왕징웨이보다 돋보이게 한다. 오전 9시, 왕징웨이는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쿄역에는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크게 게양되어있었다. 도쿄역의 8번 플랫폼에는 고노에 총리와 도조, 요우카이, 마츠다이라를 비롯한 방일과정에서 함께했던 주요인사들이 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쓰오카 외무대신의 안내를 받아 플랫폼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마중을 나온 인사들 한사람 한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마쓰오카와 고노에와 악수를 하였다. 승차시간이 되자 업무처리를 위해 일본에 남게된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일부 관원들을 제외하고, 왕징웨이와 일행은 특급열차 "츠바메 (燕,제비)" 호에 올랐다. 왕징웨이와 일행은 맨 끝칸의 전망차 (展望車) 에 탑승하였다 왕징웨이와 일행이 탑승했던 츠바메(燕) 의 맨마지막칸 관람차의 모습. (1936년 촬영.) 오후 5시, 왕징웨이가 탄 특급 '츠바메'호가 오사카역에 도착했다. 오사카역에는 이미 고베총영사, 오사카 시장, 오사카부 지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마중을나와 왕징웨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도착하자 이들은 왕징웨이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내었고 귀빈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오사카역 또한 도쿄와 마찬가지로 대형의 일장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어있었고, 오사카부에서 준비한 차량 20대에 나누어 탑승하였다. 왕징웨이는 차에 걸려있는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보고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에 고베에서, 도쿄에서처럼 수많은 인파들이 왕징웨이의 오사카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오사카내의 중국학교의 학생들은 "환영왕주석" 이라는 팻말을 걸고 왕징웨이를 환영했고, 이밖에도 오사카 내의 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이 깃발을 흔들며 약 3만명가량의 인파가 왕징웨이를 환영하고 있었다. 오후 5시 30분, 왕징웨이는 일본에 도착했을때 묵었던 숙소이자 이번에도 숙소로 쓰이게 된 고시엔 호텔에 도착하였다. 왕징웨이는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왕징웨이는 오사카와 고베의 신문기자단과 함께 가벼운 회견을 진행하였다. 오후 6시 30분, 왕징웨이는 고시엔호텔을 나와 차량을 타고 오사카의 '신오사카호텔'에 방문했다. 왕징웨이는 신 오사카호텔에서 오사카부 - 오사카시에서 공동으로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가했다. 400명의 여러 분야의 여러 인사들이 자리에 참가했지만, 이자리에는 특히 우리에게는 '영친왕' 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대한제국의 최후의 황태자 이은이 함께하였다. 환영회에서는 오사카부 지사였던 미나베 쵸우시 (三辺長治)가 환영사를 낭독했고, 이에 왕징웨이도 답사를 낭독하였다. 이후 만찬을 함께한 후, 왕징웨이와 일행은 별실에서 관원들과 자신만의 자리를 가진뒤 9시 45분, 숙소인 고시엔 호텔로 돌아갔다. 오후 10시이후 (왕징웨이가 숙소로 돌아온이후로, 시간은 표기되어있지않음) , 왕징웨이는 고시엔 호텔의 1층 로비에서 각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저우롱샹의 통역을 받으며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린바이셩은 동맹통신 본사로 전신을 통해 담화문을 전달하였고, 이 담화문은 그다음날 발표되었다. 1941년 6월 26일 (木) - 날씨 비 고베마루에서 깃발을 흔들며 마중을 나와준 인파에 감사인사를 보내는 왕징웨이. 오전 11시, 왕징웨이는 효고 현에서 준비해준 차량에 나누어 탑승해 고베항으로 향했다. 이날 아침에 비가왔음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왕징웨이의 차량행렬에 깃발을 흔들고 환영하였다고 한다. 오전 11시 15분, 왕징웨이는 고베항에서 고베마루(神戸丸) 에 탑승하였다. 이때 고베시장, 효고현지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와서 왕징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1등실에 탑승하고 데크에서 마중나와준 인파들에게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일장기를 양손에 들고 흔들며 감사인사를 보냈다. 동시에 고베시 밴드가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파는 비속에서도 "왕주석만세" 를 외쳤고 중화민국 국가가 연주되고 인파들이 환호를 보내는 가운데, 고베마루는 출발, 난징을 향해 나아갔다. 왕징웨이가 난징으로 돌아가는 길에 탔던 고베마루 (神戸丸), 1940년 만들어진 이 여객선은 1942년 11월 사고로 침몰한다. 1941년 6월 28일 (土) 오후 4시, 왕징웨이의 고베마루가 상하이에 도착했다. 오후 5시 30분, 왕징웨이는 앞에서 언급한 해겸호에 처음탑승하여 상하이에서 난징을 향해 날아갔다. 왕징웨이의 해겸호는 한시간후 난징비행장에 착륙했다. 착륙과 동시에 중화민국 국가가 연주되었고 정부인사들로부터 환영인사를 받고 공관으로 돌아갔다. 공관으로 가는길에 난징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돌아온 왕징웨이를 환영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왕징웨이의 상징적인 첫 방일을 기념하여 일본측에서도, 왕징웨이정권측에서도 (중화전영)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사진첩도 발행되었다. (이 덕에 본 포스트에 풍부한 사진을 실을 수 있었다.) [출처] 매일신보 1941년 6월 12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경성일보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조선신문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search_keyword=%E7%A5%9E%E6%88%B8 중화일보 1941년 6월 13일호~ 6월 30일호 / 1942년 12월 21일~23일호 https://archive.org/search?query=subject%3A%22%E4%B8%AD%E8%8F%AF%E6%97%A5%E5%A0%B1%22 방일사진첩 ① : https://kknews.cc/history/lnayrp9.html 방일사진첩 ② : https://read01.com/7xe4Na.html 푸저우호 관련자료 / 중화항공 관련자료 : http://cwlam2000.epizy.com/new_page_2.htm?i=2 구 궁성 사진자료 :https://tanken.com/meijikyuden.html 고베마루, 츠바메호 , 왕징웨이 공관 사진자료 : 위키피디아 각 문서 방일일정지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5/East_Asia_area_blank_CJK.svg/1280px-East_Asia_area_blank_CJK.svg.png 야와타마루 사진 : http://www.mdc.idv.tw/pwm/shippicout/yawata.jpg 고시엔 호텔 사진 : https://www.u-presscenter.jp/assets_c/2022/09/ce3ab1889fffe4727c263d6d8baf8608-thumb-1258x660-57471.png 후이산 부두사진 : https://live.staticflickr.com/7397/9535550830_373e0e0f93_b.jpg G3M 관련 사진 : https://1.bp.blogspot.com/-1noL2r6AmAo/YLUaKDlVz1I/AAAAAAAAEgM/HEpF17UqQrMnsMCgQp2e5dcpQ8GoFBOnwCLcBGAsYHQ/s1424/Mitsubishi%2BG3M%2B-%2BJAP3%2BCHC%2BINO.png https://www.aviastar.org/pictures/japan/yokosuka_l3y.jpg
- [연재] 전면화평으로의 길 - ⑪ 전면 화평에 회의를 가지지 말라
이번기회에 왕징웨이가 쓴 전면화평으로의 길(全面和平への路, 1941) 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조금씩 번역한 내용을 정리해 저조구락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전면 화평에 회의를 가지지 말라 (全面和平を懷疑する勿れ) *일화조약(1940년 11월 30일에 체결된 일화기본조약(日華基本条約)을 의미하는 것) 체결회의는 쇼와15 (1940)년 7월 5일부터 국민정부의 난징에서 아베(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베는 당시 왕징웨이의 난징정부에 파견된 일본 특파 대사였다.)와 왕 주석(원문에는 ‘임시 전권위임대표’ 라는 말이 추가로 서술되어있다. 왕징웨이가 주석직에 올랐지만 초기 충칭정부의 린썬을 포섭하기 위해 임시직을 표방했음을 반영한 것이다.) 사이에 개시되었다. 이날 왕 선생은 일화의 교섭은 전면 화평의 표본이라고 그 특질을 강조하여 말했다. 이번 중일조약 (일화기본조약을 왕징웨이측에서는 ‘중일기본조약’ 이라 표기했었다.) 체결회의에서 중일 양국은 과거의 시기를 일소하고 현재 및 장래에 있어서의 친선관계를 확립하고, 정치상으로는 상호독립과 자유를 존중하며, 경제상으로는 호혜를 기조로 제휴를 실천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력하여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고,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침투군을 격탕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백년넘게 지속된 옛 경제적 제국주의의 악을 숙청해야함을 서로 인식했다. 쌍방 모두가 이러한 공동의 목적이 있기에 교섭은 항상 성심성의껏 이루어졌고, 대세를 생각하여 교섭을 진행한 결과 본 조약을 통해 중일 신관계에 있어서 영구적인 초석을 마련하고 동시에 중일 신관계의 표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 중일조약 체결회의는 전면적인 정전 후에 교섭이 개시된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아직 철저한 항전 을 주장하고 있기에 전국 내에서 아직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교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번 중일교섭의 하나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평의 길이 열린 지금, 항전은 즉시 정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목숨을 걸고 노력해 화평의 초석이 될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통해 전면 화평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여 그들의 의심을 해소시킴으로서 전면적 화평을 촉구하려 하는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전면 화평을 위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초석도 마련되고 본보기도 마련되었으니 우리는 이로써 일치 협력에 더욱 노력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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