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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 모군의 편지에 답하다 (覆華僑某君書 / 1939.3.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화교 모군의 편지에 답하다 (覆華僑某君書) 모 군(某 君)! 그대가 3월 14일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나는 매우 감동했다! 그대는 내가 가진 대의를 매우 믿고 있으나 , 이를 위한 나의 결정에 대해서는 아직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대의 믿음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만큼, 그대가 가지고 있는 의구심 을 해소 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만약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화평의 조건을 이미 내걸었고, 그 조건이 망국의 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면 어째서 화평을 이야기할 수 없는가? 우리의 오랜 친구 천자겅 선생은 “화평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한간” 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왜 화평을 말하는 것이 한간인가? 헌법에서는 국가의 강화의 대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럼 국가는 한간 행위를 할 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충효인애신의 화평 (忠孝仁愛信義和平)’ (쑨원이 삼민주의의 민족주의에서 제창한 8가지의 덕, 이름바 팔덕(八德) 으로, 중화민국에서 미덕으로 여겨지며 여러 관공서의 현판에 사용되었다.) 의 현판 글자를 ‘충효인애신의 한간 (忠孝仁愛信義漢奸)’으로 바꿔야 하는가? 이러한 말들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대가 의심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대는 내게 “유럽이 곧 싸우게 될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국면은 전쟁준비와 전쟁회피라는 두 개의 저울이 여전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유럽 정부 당국도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대는 이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유럽전쟁에 급급하고, 미국도 마찬가지로 중일전쟁보다 유럽전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유럽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중일전쟁에 대한 각국의 관심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대는 유럽전쟁이 터져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건가? 그리고 최근의 전쟁은 당사자들끼리 속전속결을 꾀하지만, 여러 사정이 겹치게 되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럽의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난다 치자, 어느쪽이 승리할지 그대는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는가? 게다가 그대가 생각한 쪽이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국제관계는 복잡하여 국가간의 이해충돌이 이렇게 변덕스럽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유럽전쟁에서의 승리가 우리 중국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럽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영불러 와 독일 이 대결하게 될것이며, 미국이 영불러 쪽에 가담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독일은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영미불러가 전쟁에서 이기면 군대를 일본에 보낼 것이기에 일본은 반드시 굴복하고 멸망할 수 밖에 없다 는 막연한 낙관론 을 꺼내고 있다. 이러한 막연한 낙관론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항전을 계속하기 위한 책략인가? 그대는 또한 내게 “지금 항전의 상황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대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래 인민은 힘을 다해 한마디 불평없이 견뎌왔고, 장병들은 용감하게 희생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의 원기이자 중화민국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일본이 화평조건을 내민 것도 이를 통해 중국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화평운동이 성공한다면 그 공은 모두 항전 민중과 장병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전의 힘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대평가하게 되면 이미 발휘되고 있는 힘을 헛되이 낭비하게 되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헛되이 잃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지금 항전 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어떻게 나날이 좋아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전 이후 잃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고 그 시간이 짧아서 송나라의 멸망에서도, 명나라의 멸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례가 없는 일 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송나라와 명나라는 망하려 할 때 조정은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잘못된 장수들은 파면하고 벌해왔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한 감찰위원이 “땅을 잃고도 백성들의 슬픔을 듣지 않으니, 군사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그는 바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뒤로 조정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부는 많은 중요한 도시들을 잃으면서 “거점을 옮긴다”,“전략을 변경하는 것이다”,“이미 전략상으로 가치가 없는 곳이다”, “이미 적에게 타격을 주었고 전략적 목적이 이미 달성되어 이곳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와 같은 말을 하면서, 하나도 괴로워보이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의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항전이 나날이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송나라와 명나라가 망하려 할 때 조정 은 싸우고 (戰) 지킨다 (守) 라는 두 글자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불행히도 전쟁에서 져 어쩔 수 없이 이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조정은 두 글자를 바꾼 듯하다. 하나는 잃어버리다 (丟), 하나는 태우다 (燒) 로 말이다. ‘진지를 옮긴다’ 와 같은 말은 ‘잃어버리다’ 를 상징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태우다’ 를 상징하는 문장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광저우는 가장 이를 잘 설명하는 사례일 것이며, 창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잃어버리는 것’과 ‘태우는 것’이 점점 커지고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땅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이 두 글자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의 이 두 글자 와 공산당의 소위 유격전 이 합쳐지며 잃어버리고 불타지 않은 지역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대도 역사를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산당이 말하는 유격전은 도적떼의 변명 에 불과한 것이다. 인민은 벼, 유격대는 메뚜기와 같다. 가는 곳마다 태워버리지 않는 곳이 없다. 예전 사람들은 도적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놀라곤 했는데, 지금 공산당은 똑같은 단어에 문맥을 붙여 항전의 비결로 여기게끔 하고 있다. 그들의 문장 은 미사여구 일 뿐으로, 사실과는 다르다. 그대가 해외에서 본 것은 이러한 ‘문장’ 이다. 문장에서는 이렇게 끝까지 항전할 수 있는 비결이 있으니 자연스레 항전의 상황이 나날이 좋아진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제 내륙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전부터 민중은 군사력의 일부라고 하였고 지금도 정규군을 도울 수 있는 수많은 민중이 있는데 이들이 공산당의 유격전에 휘둘리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그대가 아는 바인가? 작년 11월, 나는 충칭에서 ‘전면전쟁’ 과 같은 글을 몇편 발표 한적 있는데, 공산당은 한 글자 한 글자 욕을 퍼부었다. 그대는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한마디로, 항전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고 이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항전이 나날이 어려워지는 것을 알고 항전을 지속할 수 밖에 없다면, 항전 기간동안 드러난 결점을 뼈아프게 고쳐나가야 한다. 당국 이 국민을 속이는 것을 막아내야 하고, 공산당 이 이틈을 타 국민들을 겁탈하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 이를 고치지 않는 것은 질병이 있는데도 숨기지 않고 치료를 기피하는 것과 같으며, 병을 더욱 악화시켜 화근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항전이 이대로 가게 된다면, 항전의 승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항전 외의 화평의 길 이 있다면, 그 화평의 조건이 망국의 조건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전의 결의와 용기를 가지고 화평을 해야 한다. 항전 이래 이미 발휘된 힘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얻을 수 있는 결과를 헛되이 보내선 안된다. 전쟁에서 화평 이라는 글자는 보통 사람들이 듣기 싫어 한다. 화평의 결과는 정복의 결과가 아니기에 빠르고 쉽게 찾아오기 때문 이다. 오늘날 일반 민중들은 일본의 침략을 싫어하고 일본을 완전히 멸망시켜야만 통쾌함을 느낀다. 그리고 화평이라는 이야기에는 자연스레 불편함을 느낀다. 일반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나, 정부가 나서서 일반인들이 이런 생각과 말을 하게 해선 안된다. 정부는 일반 민중들에게 적들에 대한 인식을 고무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부는 스스로 자신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인들이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정부는 현실을 파악하여야한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싸우고, 화평할 수 있다면 화평해야 하며 시시각각 나라가 살 길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일반인들보다 더 강렬히 주장을 하고 있고 이를 위해 날마다 양심을 속이고 허풍을 떨고 있는데 일반 민중들이 무슨 고생을 하려 이를 지지하고 협력하려 하겠는가? 하물며 정부 내에서 바른 소리를 하려 해도 입만 열면 한간 이라 손가락질 받는 지금, 누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인 사람의 시선에서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다같이 망할 판국이라는 걸 알지만 이 사실을 말하는 순간 한간의 악명을 혼자 떠맡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이 때문에 말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이유이자 망국의 원인이다. 그대는 내가 충칭에 있을때의 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를 놓았고, 똑똑한 수십 명의 경비원이 있기에 나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적기가 다가오면 나는 지하실로 들어가면 되었다. 충칭이 난징과 우한처럼 된다 할지라도 나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중국국민당의 부총재이자 국방최고회의의 부주석으로, 최고 권력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내 말을 들어준다면 다행인 것이고, 내 말을 듣지 않아도 죄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라가 불행이 닥치고 대붕괴가 찾아왔을 때 “명분이 정당하면 말도 이치에 맞는다” 라 생각하며 이를 수습하려 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될 것이었며 평생을 편안히 살다 죽은 뒤에도 영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가 나 대신 생각해보라, 이러한 상황에 있는데 어떻게 충칭을 떠날 수 있었겠는가? 그대도 알다 싶이, 나는 20대에 혁명에 뛰어든 이래로 나 자신을 위한 계획을 한 적이 없다. 하물며 지금은 이미 50대가 넘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할 한가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나는 항전이 시작된 이래 중국이 어쩔수 없이 항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항전을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에 생각하며 동시에 어떻게 해야 화평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생각해왔다. 나는 회의에서 화평을 구해야 함을 몇 번을 이야기 했는지 모른다. 광저우를 잃고, 창사가 불탄 이후에 내 의견은 더욱 단호해지고 실현되기를 기대해왔다. 나는 작년 12월 9일 격렬한 토론 끝에 나의 의견이 회의에서 채택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18일에 충칭을 떠났으며, 이 의견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충칭의 모든 사람들이 반성할 것을 것을 촉구해왔다. 내가 이때 설마 이후에 처하게 될 어려움과 위험을 몰랐겠는가? 만약 항전을 계속한다면, 우리 화평의 주장은 물과 불처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비록 결말이 화평으로 끝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화평의 동기에 대해 분명 적지 않은 악의나 사적인 추측을 가할 것이며, 그 중심에 있는 내가 어찌 화를 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이러한 어려움과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염전을 발표한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번의 문답을 했을 뿐이다. 이 문답을 남화일보 (南華日報) 에 실은 후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충칭의 반성을 기다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충칭에서 온 이들에게 나는 충칭이 나의 주장을 받아드리면 나는 개인적으로 언제든 재야의 자격으로 옆에서 협조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그대는 생각해보라, 내가 이것 외에 내 뜻을 표명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 '문답' 은 여기를 클릭 : ) 이상의 이야기는 나 개인의 이야기로, 본래는 말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대의 편지에 은근 생각이 들어 몇 마디 덧붙혔다. 이제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다시 이야기 하자면, 나의 견해는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아도, 양국은 서로 화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며, 주관적인 조건으로 보아도 양국 당국은 모두 화평의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주장이 아예 채택되지 않는 것 을 걱정하기 보다, 그 주장이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닌 중일 양국 간의 원한 때문에 제대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 을 우려하고 있다. 항전이 시작된 이래 이러저러한 원한은 날로 깊어져 원한을 풀고 마음을 열고 협력하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20개월간의 교전을 통해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중국을 함부로 침탈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고, 이에 양국 정부와 인민은 장병들의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고 인민들의 고통과 그 대가가 헛되이 희생되지 않게 할 비교적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작년 12월 22일의 고노에 성명과 29일 발표된 나의 염전은 모두 이 점에 착안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가엾은 충칭 은 고노에 성명 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나의 건의 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욕설만 낭자할 뿐, 하나도 이성적인 말투를 볼 수 없었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화평을 희망하는 표현을 보였지만, 그 진행방식은 여전히 만주사변 이후 반복되었던, 직접적인 협상을 기피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그들이 양국의 미래에 대해 비교적인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들이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야 말로 실로 국가의 복이다. 이상 말한 것은 모두 그대의 편지에 대한 답으로 발송한 것으로, 3월 21일 이후 나는 “예를 하나 들다 (舉一個例)” 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다루지 않고 여기에 함께 첨부한다. ( '예를 하나들다' 는 여기를 클릭 : ) 이에 나날이 생활이 평안하길 바란다. 왕자오밍 씀.
- 답문 (答問 / 1939. 1.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답문 ( 答問 ) (이는 1939년 1월 30일 남화일보와의 인터뷰내용으로, 1938년 8월 발표된 답문 1-2시리즈와는 다른글이다.) Q : 왕 선생께선 왜 화평을 제창하셨습니까? A : 전쟁을 선포하는 것, 강화를 맺는 것은 국가의 대권이다. 국가는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수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싸워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싸우고 , 강화를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강화를 해야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의 말만 듣고 전쟁을 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알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화평에 대해 들으면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들은 강화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이를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완전한 해답을 찾긴 어렵다. Q : 지금의 강화제의가 국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진 않을지. A : 나는 오히려 이렇게 화평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은 ‘항일이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항일은 왜 모든 것이 되었으며 왜 항일을 하는가? 이는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다. 즉, 나라의 생존과 독립을 보위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항일은 수단에 불과했던 재작년 7월. 우리는 왜 항전을 주장했는가? 이는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화의를 주장하는가? 이는 이제는 그렇지 해야만 국가의 생존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항전은 본래 이상적이고 충용적인 것으로, 화의도 무작정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가지고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랬던 항전이 국민들의 마음을 혼돈시키고 군대의 사기를 흔들게 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오히려 ‘항일이 모든 것’ 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항일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없게 하여, ‘항일은 통일을 위한 것’,‘항일은 국공합작을 위한 것’ 과 같은 말을 하여 정부내의 반공파벌을 숙청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한다. 이런 언행이 오히려 국민과 군대를 흔들고 항전에 손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Q : 염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짜로 국가의 생존과 독립에는 손해가 없을 것인지. A : 나는 손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Q : 염전은 전보라서 다루는 게 너무 얇은 것 같은데. A : 염전에서는 원칙을 다루었다. 이 원칙을 토대로 협상을 진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조건을 얻을 수 있다. Q : 공산당원들은 어째서 화평에 반대하는가? A : 공산당원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첫 째 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이 매일이 편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중일 전쟁은 계속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째 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중국 국민이 가난해지고 재물이 바닥나게 되면 공산당원들은 이득이기 때문이다. Q : 다른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A : 내가 보기에는 이는 일본을 밎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고 항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에 화의라는 단어를 듣고 위험하다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일본에에겐 중국을 멸망시키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답은 일본이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찾을 수 있다. 1년 7개월간의 항전은 중국을 쉽게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는 길 말고, 두 번째 길 이 있음을, 그리고 그 두 번째 길 을 가야함을 알게 했다. 이 두 번째 길 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중일합작 이다. 중일합작 이란, 선린, 방공, 경제합작을 기초로 하여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간의 합작을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렇게 될 수 있으면 수년간 만들어진 원한을 없앨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의 의심도 쉽게 풀리게 될 것이다. 이는 동아의 평화 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길은 중일 쌍방이 힘을 합쳐야한다. 따라서 일본이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일본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중국은 생존과 독립을 지키고 현대적 국가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 청향공작의 의의 (清鄉工作之意義 / 1941.5.11) / 화평의 모범을 세우고 동아보위에 협력하자 (樹立和平模範協力保衛東亞 / 1942.6.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청향공작의 의의 (清鄉工作之意義) 치안확립과 경제생활의 개선은 국민정부의 최근 양대방침이다. 나는 이를 올해 신년에도, 환도 기념 훈시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다. 이둘 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경제활동을 개선하면 국민이 편안히 생활하여 치안이 자연스레 확립되고, 치안이 확립되면 경제건설도 자연스레 힘을 얻을수 있다. 청향 (淸鄕,농촌지역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농촌지역에서의 공산당원을 색출하고 난징국민정부의 완전한 영향력을 해당지역에서 확보하는 것에 주요목적이 있었다.) 위원회 의 직책은 치안을 확립하고 경제생활을 개선하는 것에 있으며 이 책임과 사명이 막중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청향(淸鄕)을 위해서는 정치력과 군사력이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여 공비들을 축출하고 공산당으로부터 지역을 지켜낼 필요가 있다. 때문에 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 및 행정원 및 관계부처가 함께 청향위원회를 특별 구성하여 독립적인 권한과 연락기능을 부여하였다. 정치력과 군사력을 집중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농촌을 안정시키고 경작지를 확보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교통의 회복과 실업의 진흥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큰 규모를 바라지 않고 착실하게, 작은지역부터 차근차근 나아가 한곳에서 명확하게 먼저 화평을 확립한 후에 다른 지방으로 나아가 화평을 개척하려 한다. 이를 통해 전면화평은 촉진될 뿐만 아니라 자치를 함양하고 헌정을 실시하게 하는 토대로 마련될 것이다. 나는 이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의 동지들, 그리고 동포들과 함께 계속하여 이를 관철시켜 나갈 것이다. 화평의 모범을 세우고 동아보위에 협력하자 (樹立和平模範協力保衛東亞) (청향공작 1주년 기념담화) 지난 해 7월, 국민정부는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모아 장쑤성에 구역을 설정하여 청향운동을 시작하였다. 1~2기 향촌지역에서 시작해 3기에는 도시로도 확장되었다. 오늘날 청향지역은 강소성 북쪽 철도지역에서 남쪽 철도지역까지 확장되어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1년 동안 청향운동이 완성된 모든 곳에서 치안이 확립되고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물가가 안정되고 민생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사실이다. 나는 우리 청향 일꾼들의 노고와 청향지역 주민들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다. 게다가 우방국인 일본 은 대동아전쟁 발발이후에도 여전히 중국부흥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가지고 원조를 계속하고 있어 더욱 감격스럽다. 매번 청향운동이 진행될 때마다 나는 청향구를 시찰하며 청향구의 아이부터 노인까지 힘을 아끼지 않고 청향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으며, 청향 일꾼들을 격려하며 청향의 임무를 완수해왔다. 오늘은 그 1주년을 기념하여 몇마디를 더해 우리 향촌지역의 형제들과 전국 동포들을 위해 이야기하고 싶다. 청향의 목적은 이름 그대로 향촌에서 비적을 제거하고 민중을 재난에서 구하는 것 에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작업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정도 수준은 군대와 경찰 한 부대만 있으면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이룰 수 있다. 청향의 진정한 의미 는 공비 를 축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비를 근절하여 공비가 다시 향촌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에 있다. 또한 청향 의 의의는 치안을 확립하는 것 뿐만 아니라, 민생을 개선하는 것 에 있다. 공비 들은 치안의 적이며 민생을 훔치는 도둑이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또한 지 역에서 활동하는 악덕토호 들과 공비들과 한통속인, 공비나 다름없는 불량배 들도 모두 제거해야한다. 탐관오리들 , 무능력한 군대와 교만한 장수들 또한 민중에게 심각한 폐를 끼치는 존재인 만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민중의 힘도 있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가져야만 선의를 발산하고 악의 흔적을 지울 수 있다. “청향을 위해서는 맑은 마음이 필요하다 (清鄉先要清心)” 라는 말은 모두 이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나는 신국민운동을 시작할 때 우선 지역에서부터 열심히 노력해야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이 말 또한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생각한다. 청향 운동은 기술이 필요한 만큼, 이를 분할 추진하여 일정한 지역에서 치안을 확립하고 민생을 개선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결코 그 지역과 그 지역의 인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청향 운동은 지역에서의 정치 운용에 있어 화평의 모범을 세움으로써 이를 통해 국민정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전면적인 화평을 정착시키는 큰 과업의 일부 라고 할 수 있다. 청향구 밖의 민중들은 청향구의 현 모습을 보고 질문할 것이다. 왜 이곳에는 더 이상 공비가 없나요? 왜 이곳에는 더 이상 유격대의 초토화 참상이 나타나지 않나요? 왜 이곳은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이 발달하며 물가가 안정되나요? 이는 청향구는 이제 유격대가 활동하는 지대 가 아닌 화평세력이 통치하는 곳 이 되어 화평의 모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향구의 장병과 민중들은 서로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향토를 위해 나라를 위해 협력하고 있고, 청향구에서는 중국군과 중국민중이 우방국 군대와 우방인사들과 서로 의심하기 보다 동고동락하며 굳은 의지속에서 함께 손을 잡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함께 전진하고 있다. 청향구 민중들은 환경과 생활이 개선된 것을 보며 한 가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개선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 자기 고향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한 향을, 한 현을, 한 성을 나라 전체를 위한 일이다. 우리는 마땅히 국가와 민족에 있어 한 가정의, 한 고을이 가지는 책임이 크다는 것을, 우리가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향촌의 치안과 경제 상황은 물론 청향구 지역이 훨씬 낫지만, 왜 아직도 남아있는 많은 문제와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하지 못했는가? 이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전면적인 화평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청향구 외에도 무수한 병든 지역들이 우리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고, 또한 무수한 가난한 동포들이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음을. 청향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우방인 일본은 여러 가지 협조를 해왔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끊임없이 지원을 해왔다. 이는 서로가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방인 일본 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우방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 은 중일협력으로 동아를 보위하는 것 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방의 요구에 응하는 방법은 중일협력을 통해 동아를 보위하는 것 밖에 없다. 온 세계가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 중일 양국의 안위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동아라는 둥지가 무너져버리면, 중일이라는 그곳의 알들은 부서질 수 밖에 없다. 동아는 해방되지 못할 것이고, 중국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가 존재하지 못하면 고향도, 가정도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몸과 마음으로 가정을 사랑해야하고, 고향을 사랑해야 하고, 동아를 사랑해야 한다. 현재 대동아전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으며 100년간 영미가 안겨준 모욕과 침략은 모두 남김없이 소탕하였고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보위하기 위한 기초를 세우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에 더욱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고동락의 정신에 입각하여 후방의 큰 책임을 다하여 모든 것을 함꼐하여 전후 공영권 건설에 공헌하는 것은 청향운동의 또 하나의 의의라 할 수 있다. 지난 1년간 진행된 청향 운동의 성과와 7개월 동안 진행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화평반공 이 중국을 부흥시키는 유일한 길이자 동아를 보위하는 유일한 길 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그러나 충칭의 집요하게 항전에 집착하는 소수의 이 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백성의 적이되어 그들의 원기를 통해 기꺼이 영미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수차례 경고를 해왔으나, 그들에게서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을 바라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격려할 뿐이며, 각지의 동지들, 전국 동포들과 함께 청향운동을 통해 청향운동이 성공을 거두는날, 즉 화평통일이 되는 날이자 대동아전쟁 승리의 날, 중국이 동아의 공영부흥을 이루는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청향구에서 분투하고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1년동안의 노고와 국가민족의 해방을 도모하는 열정과 노력에 정중히 감사를 표한다. 또한 한마음 한뜻으로 적극적인 협력정신을 보여준 전국 민중과 우방 장병들이 보여준 우의와 힘에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청향운동의 순조로운 진행, 전면화평의 신속실현, 대동아전쟁승리, 중국부흥, 동아해방 의 구호를 크게 외쳐보는 바다.
-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1942.8.29)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조직 중 하나였던 중화민족반영미협회 (中華民族反英美協会) 에서 만든 아편전쟁사화 (鴉片戰爭史畫) 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려진 난징조약의 모습. 조약의 체결에 영국인은 크게 웃고있다. 1842년 8월 29일, 제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은 결국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난징조약을 통해 청은 항구를 개방하게 되었으며,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홍콩 섬을 영국에게 넘겨줘야 했고 관세자주권 또한 상실하게 되었다. 난징조약의 체결은 동시에 서양세력의 중국침략 신호탄이기도 했다.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중국은 수많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았고, 수 많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며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서양 세력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세력의 침략, 불평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난징조약 체결로 부터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민에게 난징조약으로부터 이러한 불평등해결까지 이어지는 백 여년의 세월은 수치스러운 백 년이었고 동시에 중국인민이 이러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백 년이기도 했다. 1942년 8월 29일은 난징조약의 체결로 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왕징웨이 정권은 아직 정식적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과 영국과 싸우는 일본의 동맹국이었고, 왕징웨이 정권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영미의 식민주의를 비판해왔다.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던 왕징웨이 정권에게 이러한 근대 중국침략의 상징과 같은 아편전쟁의 난징조약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1942년 8월부터, 각 지역으로 하여금 아편전쟁의 해악과, 이로 인해 체결된 난징조약의 해악에 대해 선전을 해왔다. 예를 들어 호북성에서는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아편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거리에서는 아편전쟁에 관한 연극, 영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연극이 이루어졌고, 지역 라디오 방송국은 아편전쟁사를 비롯한 영국의 중국침략사를 다루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수도 난징에서는 8월 29일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를 개최하기로 했다.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가 개최되었던 난징의 국민대회당. 아편전쟁 100년기념 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는 1942년 8월 29일 난징의 국민대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왕징웨이 정권 인사를 비롯한 5천여명의 대중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오후 3시, 대회의 개막이 선언된 후, 국가 제창을 비롯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후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였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날 왕징웨이의 훈시는 40분 가량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대회장에 배치된 대회의 로고모습. (아래는 재현도) 중앙에는 청천백일문양이 그려져있고, 그 주변으로 아편전쟁100년반영흥아대회라고 표시되어있다. 그리고 문양 위에는 3개의 화평반공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從不平等做到平等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오늘 우리는 난징에서 백년전의 소위 난징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먼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이를 왜 기념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이는 원수를 갚거나 원한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원수나 원한을 염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를 기념하는 것은 중국이 걸어나가야 할 하나의 대도 를 밝히기 위함에 있다. 중국이 걸어나가야 할 대도를 지적한 이는 이전에도 있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은 이미 이를 지적한 바가 있었다. 만약 우리 중국인 모두가 손중산 선생이 지적한 바 를 따랐다면 중국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기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은 유언에서, “나는 4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라고 말했다. 중국은 어째서 자유평등을 얻지 못했는가? 이는 중국이 불평등조약의 속박 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평등조약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이는 분명하게 우리가 오늘 기념하고 있는, 100년 전 오늘, 난징 조약 이 체결되었을 때부터이다. 난징조약은 어째서 체결되었는가? 이는 영국이 인도에서 만든 아편을 억지로 중국에 팔아먹으려 했고, 중국인은 그 과정에서 셀수 없이 많은 돈을 빼앗겼고 동시에 아편이라는 독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아편을 중국은 받아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꺾고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았을 뿐만 아니라, 광동,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의 개항을 얻어냈다. 이 다섯 항구의 개항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중국을 하나의 신체 로 생각해보자. 여기서 이 다 섯 항구의 개항 은 마치 몸에 상처 5개를 낸 다음 그곳에서 혈액을 계속 빼내게 하고, 동시에 아편과 같은 독극물을 계속 받아드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개의 개항은 어떻게 이렇게 큰 해악이 되었는가 , 이는 난징조약의 부속조약에서 영국인의 중국에서의 치외법권 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본래 치외법권은 공사와 같은 외교관에게만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일반 영국인은 모두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영국의 영토가 중국으로 연장되는 것과 같은 것 으로 이는 정치상으로는 치외법권이 존재하고, 군사상으로는 군함의 정박, 군대수송의 근거지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외법권이라는 보장속에서 경제침략은 이루어졌고, 영국인들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난징조약 체결일은 곧 중국이 차식민지의 지위로 떨어진 날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영국은 여러 조약의 체결과 최혜국 대우 를 적용시키며 타국이 어떠한 권한을 중국에서 획득 했을 때 이를 자신에게도 줄 것을 이야기했고, 이는 영국의 권한을 한층 더 확대하는 요소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난징조약 은 요컨대 모든 불평등조약의 근간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조약은 그 근간 위에서 성립된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손중산 선생은 유촉에서 국민혁명의 목적이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것에 있음을 지적하고, 최대한 빠르게 이러한 불평등조약을 폐기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는 원한을 갚고 한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중국을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만들기 위한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실현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민중에 호소하여 민중을 궐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 이다. 난징조약이 서기 1842년에 체결 된후 8년이 지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의 난이 1864년 끝난 후 2년이 지난 서기 1866년, 손중산 선생이 탄생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확실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손중산 선생의 탄생 1년 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있었다. 영국은 당시 침략을 중국에서 이어나가고 있었고, 동시에 일본에서도 이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고, 28년이 지난 1894년에는 불평등조약을 폐지했다. 중국은 어떠했는가? 손중산 선생은 중불전쟁에서 중국이 패전한 해 (1885년을 의미.) 청조를 멸하고 민국을 창건할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이를 중요하게 받아드리는이가 없었고 대부분이 이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손중산 선생은 여러곳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했고, 청일전쟁에서의 패전 이후에야 호놀룰루에 중흥회를 창립하고, 1911년이 되어서야 1차혁명을 광동에서 일으킬 수 있었다. 중일양국이 선진과 낙오로 갈리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손중산 선생이 혁명을 일으키자 일본의 동지들은 이를 원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손중산 선생은 청일전쟁의 패배라는 환경속에서도 어째서 이러한 일본동지들의 원조를 받은 것일까? 일본의 동지들은 어째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이러한 중국의 혁명을 지원했는가?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삼국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촉의 유비는 오가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죽인 것에 분격하여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백제성에서 분개하며 죽었다.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이어 나라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오와 화친을 맺는 것 이었다. 이는 오늘날 충칭방면의 인사들이 본다면 절대 받아드릴 수 없는 일 이었을 것이다. 촉은 사천과 관중만을 얻고, 호북과 호남을 잃었다. 영토는 반토막이 난 것이다. 게다가 유비가 아꼈던 관우는 오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조조에게 갔다. 유비는 이러한 부끄러움 속에 설욕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나라와 화친을 한 제갈량의 모습 은 충칭 방면의 인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뿌리 깊은 한간 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제갈공명은 이러한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갈량은 천하의 재앙이 위에 있는 것이지 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위를 거부하는 오와는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하여 오와 촉이 원수 관계에 있으면 천하를 통일하기는커녕, 결국에는 양쪽 모두가 멸망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를 알았기 때문에 의연하게 오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었고, 이 덕에 남만을 정벌하고 북벌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이을 사람이 없어 결국 촉은 망했지만, 그가 살아있었을 때 촉은 매우 약했는데도 강적인 위와 맞설 수 있었다. 위나라가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 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대회식장의 모습. 영국은 인도를 병탄하고 남양을 석권한 뒤, 그 욕심을 키워 동아 전체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중일 양국은 어떠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형제애로써 서로 굳게 걸어 잠군 문을 열고 함께 외부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했다. 일본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대적을 막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중국은 비록 낙후되었지만, 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오와 촉이 대업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악연을 잊고, 새로이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이 일본의 원조를 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고, 일본의 동지들이 손중산 선생을 도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중산 선생의 이러한 의지는 매우 확고하여 아무리 좌절해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손중산 선생의 의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민국 6 (1917) 년 저술된 《중국존망문제 (中國存亡問題) 》 라 할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은 이책에서 영국은 인도가 없으면 그저 3등국에 불과하다는 것, 영국은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영국은 자신과 대립하는 강대국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점, 영국은 자신과 대립하는 모든 국가들을 포섭하고 선동하여 서로 싸우게 하고 자신은 이들 사이서 편안하게 앉아서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따라서 손중산 선생의 결론은 영제국이 타도되지 않으면 세계는 평화의 소망을 이룰 수 없고, 중국의 자유평등도 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손중산 선생은 “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존망과 안위를 함께 하는 관계로, 일본이 없으면 중국이 없고, 중국이 없으면 또 일본이 없다다는 것 을 알아야한다. 양국이 백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국 사이에 조금도 거리를 두어선 안된다. ” 라고 목소리를 높혀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때가 당시 소위 21개조 요구로부터 2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있었고, 당시 일본 상품 배척을 제창해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손중산 선생은 의연하게 이러한 주장을 하며, 중국이 가야할 길을 이야기했다. 이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이며, 이는 중국이 나아가야할 유일한 대도다. 손중산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면, 국민혁명군에 힘을 다할 때부터, 돌아가시기 직전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강연하기 까지 40년간, 동아에 대한 방침, 중일관계에 대한 방침은 시종일관 같았고, 그 주장에는 모두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40년간 중일간의 분규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손중산 선생은 이러한 분규에 늘 심통으로 우려해왔던 것이다. 또한 항상 중일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했고, 결코 이를 역전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남은 일생을 국민혁명에 대한 충성과 국부 손중산 선생에 대한 충성을 근본으로 하여 살아가려 한다.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곡해하여 이용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중산 선생은 동아신질서 건설이 제창되기 전에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동아신질서 건설의 구호의 등장은 이전 중국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를 일본도 제창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이상이 점차 실현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년 전 오늘 체결된 소위 난징조약은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폐지되어 이미 그 효력이 멈추게 되었지만, 오늘 우리들은 이것이 누구에 의해 멈추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과연 중국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일본의 육해공군 없이는 난징조약의 효력은 여전히 중국의 머리 위를 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오늘 이를 아주 크게 반성해야한다. 중국은 오늘부터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며 왜 일본과 협력해야하는지 , 어째서 대동아전쟁을 완수해야하는 지 를 스스로 반성해야한다. 물질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정신력에 대해 논해보자. 중국에는 4억의 아직도 무너지지 않은 정신, 4800년의 역사속에서 만들어진 정신력과 가장 풍부한 인적 자원이 있다. 중국은 이전처럼 교만해져서는 안되고, 지금과 같이 자포자기 해서도 안된다. 중국은 동아 건설의 책임을 분담하여 중국을 구하고, 동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 말로 중국이 가야할 길이며, 유일한 대도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세력은 이제 이전과 같이 동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영국의 세력이 영원히 동아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인도의 독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자유평등과 인도의 독립은 감정상, 이해상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지사들은 지금도 동포들로 하여금 독립을 지도하고 분투하고 있고 영국은 이를 막으려 흉악한 본심과 수단을 모두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충칭방면의 인사들은 항상 영국에 의존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이 인도에 대해 압력을 완전히 줄 수 없는 현 상황을 알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커다란 모순이며 동시에 우스운 꼴이라 할 수 있다. 어째서 동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일본과 협력하고, 동아를 보위하여 스스로를 구하고 인도를 구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인가? 충칭의 이들은 손중산 선생을 망각하고 있지 않다면 진심으로써 손중산 선생께서 지시한 일대 노선 을 향해 돌진해 나가야 한다. 이는 중국이 진정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대 노선이며 유일한 대도이기 때문이다. 일본뉴스 119호에 묘사된 하얀색 정장을 입고 연설하는 왕징웨이의 모습. 왕징웨이는 그의 스승 쑨원과 그의 라이벌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표준중국어에 서툴어 방언투가 나는 어색한 모습으로 연설을 하였고, 이때문에 이를 잘 이해 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현대 중국인조차도) 일본 뉴스 119호 (1942.9.15) 에서는 왕징웨이의 본 대회에서의 연설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는 왕징웨이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과, 공개된 훈시의 내용이 전체적인 내용면에서는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문자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알아야하는 것은, 이는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기념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기념의 의미는, 바로 중국이 지금 따라야할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기념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정무에서는 대아시아주의를 마땅히 받아드려야하고, 이는 우리의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마음으로 단결한다면, 손중산 선생이 지시한 노선을 따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건설할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중화를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동아를 보위할 수 있을 것이다! ""所以今天紀念的意思,真正要明白的,就不是什麼報仇雪恨。今天紀念的意思是什麼呢?紀念的意思呢,就是指示出一條,中國現在應該走的道路,這個才是紀念性意思。應見到是,在政務,應該以大亞洲主義為事,這個就是我們的真自由。現在所怕的,我們人人一心,不肯一條心。如果大家集中一條心,往孫先生所指定的路來走,我們一定能夠建立大東亞戰爭!我們一定能夠興復中華!我們一定能夠保衛東亞!" -일본뉴스 119호에서의 왕징웨이 연설 원문 왕징웨이의 실제 연설과 위에서 공개된 훈시의 내용은 이처럼 일정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왕징웨이의 실제 연설과 공보를 비롯한 대외에 게시되는 내용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징웨이의 연설은 위에서 이야기 한것 처럼 방언으로 이루어졌고, 앞에서 본것 처럼 40분이나 연설이 진행된 만큼, 내용 또한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왕징웨이 정권측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연설을 대외에 공개되는 과정에서 최대한 연설을 한 왕징웨이의 취지는 살리되, 일반 민중들이 읽기 쉽도록 일종의 정제과정을 거쳤다. 즉, 공문의 내용과 실제 연설의 내용은 그 내용과 취지는 사실상 같으나, 문자상의 표현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의 훈시 내용은 왕징웨이 정권의 외교공문 (外交公文) 72호를 반영한것으로, 본 훈시의 내용을 담은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과 1942년 8월 30일, 대회 다음날 발행된 중화일보(中華日報) 나 중보 (中報) 와 같은신문언론보도에서도 이때문에 외교공문측의 정제된 발언을 담았지, 위와 같은 연설 원문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러한 왕징웨이의 연설을 보도했던 일본뉴스도, 이러한 공문에 기반한 내용을 자막으로 써넣었지, 연설 원문의 내용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따라서 위의 나타난 영상과 같이 특수하게 드러나는 일부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위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연설 원문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왕징웨이의 글에는 이러한 특징이 있음을 알고 읽을 필요가 있다. 왕징웨이의 연설이 끝난 이후에는 린바이셩 ( 林柏生 ) 선전부장은 대회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편전쟁 100년기념 반영흥아대회 대회선언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大會宣言) 본 대회는 난징조약 100주년이라는 침통한 기념일에 청년학생들, 청년군인들, 청년학도들, 청년농민들, 청년공인들, 청년 상인들 및 각 기관 각 단체의 공작인원들은 우엄하고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영도자의 연설을 경청하고, 중국의 부흥, 동아보위의 대계 및 우리 동포, 우리 동아민족이 가하고 있는 노력에 대해 적절한 논의를 독려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백년 이래 동아가 혼란스러운 이유, 중국이 차식민지로 전락한 이유가 첫째로는 영미제국주의의 침략, 둘째는 중국의 내정이 불완전했기 때문, 셋째는 동아민족이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 임을 알게 되었다. 중일합작과 동아의 공동보위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국민혁명의 근본방침으로 직접 정한 것으로, 과거에는 여러 결절로 인해 중단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중일 양대민족은 전쟁이라는 피를 흘리는 경험을 통해 깨닫고 다시 손을 잡았다. 우리 영도자가 제창한 화평반공건국운동을 통해 국민혁명의 기본적 근본은 회복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영미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를 통해 동아해방은 다시 전개되었고, 민족공존이라는 광명스러운 대도는 작년 봄의 동아연맹운동의 발전, 이번 새해의 신국민운동요강의 반포를 통해 대내외의 역량 쇄신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중화의 부흥, 동아보위라는 중대한 임무를 위해 우리는 침통한 마음으로 100년전의 난징조약을 기념한다. 우리는 모든 마음을 다하여 충성하여 국부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받들고 영도자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분투하여 대동아전쟁에 헌신해 중국의 건설사명을 완수하고 동아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 부흥시켜야 하고, 우리는 동아의 화평을 수호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모두 일어나주십시오) 다음과 같이 크게 외치고자 한다 : 영미침략주의를 타도하자! 打倒英美侵略主義! 대동아전쟁에 협력하자! 協力大東亞戰爭! 중화를 부흥시키자! 興復中華! 동아를 보위하자! 保衛東亞! 영도자 만세! 領袖萬歲! 중화민국 만세! 中華民國萬歲! 동아연맹 만세! 만세! 만세! 東亞聯盟萬歲! 萬歲! 萬歲! ( 볼드체로 표기된 부분은 일본뉴스 119호에서 린바이셩이 읽은 부분이다. 괄호는 원문에는 없고 린바이셩이 바로 밑의 구호를 외치기 위해 추가적으로 언급한 내용이다.) 중화민국 만세! 를 외치고 있는 린바이셩의 모습. 여기서도 일본뉴스는 실제 린바이셩의 발언과는 다른 자막을 넣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첫구호인 '영미침략주의를 타도하자' 라는 린바이셩의 말에 일본뉴스는 '대동아정신을 발전시키자' 라는 자막을 넣었다. 연설에서 왕징웨이는 이 대회의 '기념' 목적이 영국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나, 영국에게 쌓인 원한을 푸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본 대회의 '기념' 목적이 이러한 치욕을 기억함으로써 자유평등, 불평등조약의 폐지를 위해 중국이 나아가야할 길은 역시 중일합작을 통한 화평의 건설과 이를 통한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있음을 다시 한번 알게하는 것 에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연설에서는 , 직접적으로 영국을 비난하기보다, 여러 이유를 제시하며 영국제국주의가 나쁜이유, 영국 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불평등조약 폐지 시도는 영국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등을 찾기 위한 '당연한' 시도라 이야기했다. 연설에서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정권 을 촉과 제갈량의 모습 으로, 유비 를 쑨원 에 비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동맹을 맺은 일본 을 오나라 에, 영국제국주의와 여기에 함께하는 충칭 을 '재앙' 과 같은 위나라 의 모습에 비유했다. 이러한 삼국지까지 동원한 왕징웨이측의 시도는, 자신과 자신의 정권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시도였다. 또한 왕징웨이는 연설에서 "누가 난징조약을 없앨 수 있게 했는가?" 를 생각해보라 이야기하면서 일본과 동맹하고 있는 자신의 정권이 한 선택이 합당함을 정당화 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왕징웨이는 연설에서 "쑨원의 뜻을 왜곡할 생각은 전혀없다" 라고 이야기했지만, 대중들은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와 일본의 동아신질서, 대동아공영권 을 연결시키려는 왕징웨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왕징웨이가 같지 않은 것을 억지로 연결시켜 오히려 왕징웨이가 쑨원의 뜻을 왜곡하고 있다 생각했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사상과 민중들의 생각은 괴리가 존재했었고, 이런 기본 사상에서 부터 괴리가 존재했기에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민중들로 부터 제대로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출처] 일본뉴스 제 119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04_00000&chapter=003 중화일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2.08.30/mode/2up 중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bao-nanjing-1942.08.30 매일신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아편전쟁사화 (鴉片戰爭史畫)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NLC416-02jh005019-14774_%E4%B8%AD%E8%8B%B1%E7%BE%8E%E9%97%9C%E4%BF%82%E7%95%A5%E5%8F%B2.pdf 왕징웨이의 연설원문내용 : https://ek21.com/news/life/5457/ 중화민국 국가문화기억고 : https://tcmb.culture.tw/zh-tw/detail?indexCode=drnh&id=118-030200-0001-006
- 환도 4주년 기념훈사 (國府還都四週年紀念大會訓詞 / 1944.3.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국민정부 환도 4주년 기념대회 훈사 (國府還都四週年紀念大會訓詞) 배의 노력을 통해 분발하여 전진하자 (加倍努力奮發前進) 국민정부가 민국 29 (1940) 년 3월 30일 이래 환도 한지도 4년이 되었다. 지난 4년동안 우린 스스로 부단한 노력을 해왔고 동맹국 일본이 진심 어린 협조를 가하면서 우리는 본래 예상했던 것 보다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여전히 우리가 계속 노력해야할 것도 적지 않다. 나는 우리나라가 한마음 한 뜻이 되기를 바란다. 일관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착실하게, 두배로 노력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고 분발하여 전진하자. 중국은 언젠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며, 동아에도 언젠가 반드시 광명이 찾아올 것이다. 지난 4년동안 우리는 중일관계의 조정만으로도 매우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특히 최근 1년동안 중일 양국은 동아를 지키기 위한 최전선에서 생사를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어 더욱 긴밀히 협력해왔다. 나는 일찍이 중일양국이 정신적으로 결합을 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 이는 결코 공허한 상상 이 아니며, 지금 그 이상이 이미 눈 앞에 놓여져 있다. 이전에 일부 사람들은 일본이 중국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다, 중국을 멸망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라고 의심했지만, 이러한 의심은 이제 차근차근 해소되었다. 지난 1년 동안 일본은 중국 내의 일본 조계를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국민정부와 협력하여 중국 내 다른 나라들의 조계도 차례로 반환되게하고 동시에 치외법권도 철폐하였다. 또한 작년 10월 30일에는 일본은 새로운 대중국 정책에 따라 중일기본조약 을 폐지하고 완전한 동방 도의의 정신 으로 우리와 중일동맹조약 을 체결했다. 이런 평등 호혜의 맹약 은 동아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중일동맹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기존의 중일기본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중일동맹조약에서는 교전상태가 중지되면 일본은 즉시 군대를 철수할 것을 분명히 약속하였고, 게다가 이전 조약에서 규정했던 주둔권마저 포기하였다. 이러한 성의를 생각해보면, 맹방인 일본 은 중국을 멸망시킬 의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부흥을 지원하려는 결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이 동아의 번영을 함께 도모해야 할 존재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중일양국이 정부뿐만 아니라 인민 모두가 이 노선을 인지하고 이를 따라 나아갈 수 있다면 양국의 정신적 결합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고, 영구적인 화평도 어렵지 않게 성공시킬 수 있다. 중일 우호는 이와 같은 도의의 기초를 다져 놓았을 뿐만 아니라 대동아 각민족간의 관계에도 획기적인 약진을 가져왔다. 작년 대동아회의 의 개최, 대동아공동선언 의 발표, 동아민족의 우호 증진, 동아민족의 의지단결, 동아민족의 공동행동은 이미 일반적인 사실이 되었다.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에서의 발언은 여기 와 여기 를 클릭 : ) 국부 손중산 선생 이 당시 대아시아주의 를 주창하면서 동아민족이 연합하여 아시아가 번영하는 신천지가 되기를 바랬던 원대한 이상을 예전에는 쉽게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사람들이 여겼지만, 이제는 그들도 함께 동아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 4년간의 국내외 정세를 종합해보면,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으며, 동맹국이 가한 협조도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러한 성취를 깊이 자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중국은 동아의 일환이고, 동아는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은 이미 결전의 단계에 들어섰다. 중국 전체의 자유독립해방은 대동아전쟁 승리의 결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의연한 참전은 스스로가 생존을 도모하고 함께 생존하려는 것이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당연한 길을 걷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전쟁 승리라는 결과는 결코 요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확고한 신념으로 방침에 따라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며, 구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만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고 중국의 자유독립해방을 성공시킬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 새해 첫날, 나는 이미 이를 설명한 바 있다. 첫 째 는 사상의 숙정 , 둘째 는 치안의 보장 , 셋째 는 생산의 증대 이다. 올해는 총력전 의 해다. 소위 총력전은 전국의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여 전쟁의 성과를 거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산의 증대가 올해 3대 사업에서 중요 중점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몇 마디를 더 붙이자면, 우리는 생산을 늘리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작업이라고만 생각하지, 농민과 노동자의 책임이라는 인식은 근본적으로 미비하다. 하지만 생산을 늘리는 것은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농민과 노동자에게 달린 것도 아니다. 이는 국민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해야할 책임이고 해야할 일인 것이다. (왕징웨이의 1944년 신년담화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예를 들어, 지식인 학생들 은 노동 복무중에 생산량 증가를 보조할 수 있고, 휴식과 여가시간을 사용하여 민간에서 생산량 증가를 선전하고 지도할 수 있으며, 농업 기술의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상인들 은 가능한 자신의 재력을 바쳐 투자를 통해 농장을 개척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필요한 물자의 증산에 종사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사업에 있어 생산의 증산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도 있다. 병사들 은 도적과 강도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방의 치안을 확보하여 농민들이 농사에 안주할 수 있게 하고, 수륙 교통을 유지하여 수송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할 수 있으며, 둔간사업에도 종사할 수 있다. 부녀자들 은 공장 생산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가내 수공업에 종사할 수 있고, 농촌에 나가 농사를 도울 수도 있다. 이는 지극히 알기 쉬운 이치로, 생산을 늘리는 것은 노인과 아이를 불문하고, 직업을 불문하고 지혜를 모아 함께 이루어야 할 국민운동이다. 전시의 국가에서는 물자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이러한 상황에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일 은 실제로는 보탬이 되지 못한다. 속히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증산을 위해 힘쓸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생산을 늘리는 것은 일상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전쟁에 있어 충분한 공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전쟁시 대량의 물자를 국방에 최대한 응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국민 생활의 고달픔은 피할 수 없는 만큼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 한다. 정부는 올해 증산회의를 개최하여 증산에 관한 근본 방책을 토의하였으며, 나아가 유동자금, 전쟁필수품의 생산, 사재기 금지, 물가관리를 실시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인민들을 위해 석탄채굴 방안을 마련하여 인민들이 이에 자발적으로 투자하고 개발할 수 있게 장려하고 있으며 각종조치가 정해진 계획에 따라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전 국민이 하나되어 책임지고 모두가 착실하게 일해야 하는 일인 만큼, 우리는 국민의 체력을 함양하고 국민정신을 함양하고 사회의 악을 청결하고, 전시 생활을 개선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아편 금지 를 실행한 취지도 여기에 있다. 아편 흡연의 해로움이 국민들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은 부녀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며, 100년동안 영국 제국주의의 악한 세력이 동아에 도사리고 있었던 만큼, 이런 아편으로 인한 해로움은 거의 중국 전역에 퍼져있다. 아편이 죽인 국민의 수는 정말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민국 24 (1935) 년 국민정부는 일찍이 6개년 아편 금지 계획 을 반포하여 집행, 꽤 효과를 거두었으나 (1935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실시한 6개년 금연계획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금연실시판법 (禁煙實施辦法) 등이 제정되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면서 계획은 멈춰버리게 되었다. 현재 정부는 과거의 아편 금지 계획을 계속하여 3년내에 아편을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아편을 재배하지 못하게 하고, 아편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 3가지 방침을 동시에 진행하여 아편으로 인한 해로움을 하루 빨리 씻어내려 한다. 이속에서 민족 건강의 회복, 국민의 체력증진, 정신과 생활의 숙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왕징웨이가 아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여기를 클릭 : ) 생산 증대의 가장 큰 목적은 대동아전쟁의 완수에 협조하는 것이며, 중국의 경제부흥에 힘을 쏟는 것이다. 정부가 이를 위해 세심하게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만큼, 국민들도 힘을 합쳐 이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정부에서는 모든 관리들이 솔선수범을 보여야하고, 사회의 민중들은 모두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패한 관리 에게는 절때로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며, 금융을 어지럽히는 이 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를 타락시키는 악균과 민생을 파괴하는 범죄자 는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전시에는 반드시 제거 해야 한다. 횡령은 하루빨리 처벌하지 않으면 청렴한 제도를 세울수 없게 되고, 악덕 상인들은 하루 빨리 처벌하지 않으면 국민의 생계가 개선되기 어렵다. 정부는 부정부패를 엄중히 처벌하고 악덕 상인을 단속하기 위해 이미 최대의 결의를 가지고 있다. 이후로부터 횡령, 배임을 한 정부관리나 무법한 무리들은 절대 감싸지 않을 것이며, 민중도 이를 철저히 고발하여 밝혀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 일은 위에서 말한 것 이상이 존재하지만, 이 일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서둘러 끝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온 국민이 정부의 동지들과 함께 큰 다짐을 가지고 일치되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바다.
- 아세아의 여명 (1941)
* 본 글에서는 박태원의 '아세아의 여명 (亞細亞의 黎明, 1941) 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글은 한국근대소설단편대계 (1988,이주형,권영민, 정호웅) 에서 수집된 1941년 당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박태원 (朴泰遠, 1909~1986). 소설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그는 1941년 왕징웨이에 관한 소설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아세아의 여명' 이다. 본자료는 한국근대소설단편대계 (1988) 에서 수집된 1941년 2월 『조광』 의 원문을 가져와 옮긴 것입니다. 서술과정에서는 편의성을 위해 한자표기를 한글로 바꾸어 표기합니다. (단 옆에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했습니다.) 본 자료작성의 목적은 역사적자료 공유에 있습니다. 만약 이 자료가 법 상으로 문제가 된다면 알려주시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亞細亞의 黎明 (아세아의 여명) 풍운 가득한 아세아대륙에 오래간만에 새벽은 찾아왔다. 화평구국의 큰뜻(雄志) 을 품은 왕징웨이(汪精衛), 저우포하이 (周佛海), 쩐중밍 (曾仲鳴) 등 애국 선혈 지사는 드디어 궐기하였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한날 우매한 장제스의 괴뢰는 아니었다. 한시를 빼지않고 그림자 같이 뒤를 떠보며 오로지 목숨을 노리는 자객의 물결을 헤치고 용약하게 공포의 도시 「충칭(重慶) 」 을 탈출하여 백절밸굴 일로만진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신정부를 수립하기 까지의 유혈사 (流血史) 구전기 (舊戰記) ! (소개글) 목차 화평 · 항전 - 312 밀사 - 324 탈출 - 334 동지 - 347 낭패 - 351 성명 - 354 제3처장 - 357 제2처장 - 363 회유 - 378 희생 - 394 (본 목차는 조광 (1941.2)의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화평(和平) · 항전(抗戰) 충칭의 하늘은 오늘도 잔뜩 흐렸다. 일년 삼백육십일에 해를 구경하는 날이 대체 며칠이 되느냐? 늘 그날이 그날로 충칭의 하늘은 흐리다. 그렇기에 옛말에 촉견(蜀犬)은 해를 보면 짖는다 하였다. 중화민국 27년 12월 9일, 가뜩이나 흐린 겨울날씨에 또 가릉강(嘉陵江) 을 건너 불어드는 바람이 치는 날, 충칭중앙은행(重慶中央銀行) 귀빈실에, 국민당의 요인들이 모여있었다. 왕칭후이(王寵惠), 바이충시 (白崇禧), 쉬모(徐謨), 구주퉁(顧祝同), 천부레이(陳布雷), 쩐중밍 (曾仲鳴), 이러한 무리들과 주석 장제스, 부주석 왕징웨이 … 난징이 함락된 뒤, 우한삼진(武漢三鎭)이 일본군의 수중에 돌아가고,창사가 한줌의 재로 되어버린 이제도, 오히려 초토항전을 부르짖는 무리들 앞에, 마침내 비통한 빛을 띠우고 부주석 왕징웨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늘도 이자리에서 다시한번 제군들에게 괴로운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왕징웨이는 좌중을 둘러보고 엄숙히 입을 열었다. "최후의 승리가 과연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이라면 물론, 철저한 항전도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공연한 흥분을 버리고, 좀 냉정하게 현재의 정세를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일이라, 제가 구테어 이자리에서 말씀 안하여도 좋을지 모르나, 우리들의 반성을 위하여 굳이 한말씀 합니다. 바로 두달전, 쌍십절 수일 전에, 일본군이 바이아스만(灣) 의 상륙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내외의 신문이 모두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동군 당국(廣東軍 當局)은 염체도 좋게 일본군에게는 광동을 공약할 역량도, 용기도 없으니 각계의 민중은 결코 요언을 경신(輕信) 하여 소요함과 같은 일이 있지 말라고 고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이미 바이아스 만에 상륙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광저우시를 향하여 급한 형세로 직격하여 오고있고 있음을 알자, 군정당국은 즉시 정부의 이동을 개시하고, 그뿐 아니라 철거와 도시에 온갖 상점민가에 불을 질러 버렸던 것입니다." 왕징웨이는 잠깐 말을 끊었으나, 쉬융창(徐永昌)이, 상반신을 앞으로 내어밀며 "그러나ㅡ" 하고 무슨 말을 이으려 할떄, 그는 그편은 돌아보지도 않고, 장제스의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은 얼굴만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최고군부는 이미 무한의 방기를 결정하고 있었음에도, 그래도 모든 사실을 감추고, 후베이(湖北), 장시(江西)의 성 변경지대에서는 연전연승하여 일본군 4개사단 이상을 전멸시켰고, 따라서 우한 지방은 반석(盤石)의 편안함을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지우장(九江)등의 지방도 머지 않아 이를 회복할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정부의 기관지만이 그렇게 보도한것이 아닙니다. 군사최고당국이 주석의 위로전보에 대해 보낸 답보속에도 그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수일이 못되어 우한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충칭시민은 이를 알턱이 없었습니다. 신문의 보도대로 우리의 승전을 믿고, 상점과 민가가 모두 축첩(祝捷)의 붉은 종이를 대문마다 붙이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온 거리를 뒤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손으로 창사를 불질러 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이는 본래 러시아인 고문의 계획으로, 우리군대가 부득이 퇴각을 하여야할 경우에, 하나의 물건도 일본군에게 이용당하게 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일본군은 아직도 창사로부터 수백킬로밖에 머무르고 있었음에도, 창사의 경비사령부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경솔하게 믿고 곧 시가지를 파괴하는 실행명령을 내려버렸습니다. 불길은 닷세를 연달아 하늘을 찌르고, 만명에 가까운 무고한 백성이 이 불로 하여 죽고 또 다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결코 과신(過信)해서는 못씁니다.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상의 세가지 사건에 비추어 확실히 인식하여야 할것입니다. 내부가 이처럼 부패하고, 암흑한 까닭에, 국력을 충실하게 없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국력을 크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끝끝내는 국력의 원천을 고갈시키고야 말것입니다." "무엇을 국력의 원천이라 하는것일까요? 그것은 인민의 의력(意力)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지금 말씀한 세가지 사건을 가지고 보더라도, 군사최고당국은 인민의 생명재산을 조금도 안중에 두고 안중에 두고 있는것입니까? 없는것입니까? 인민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안중에 있는것입니까? 없는것입니까? 인민의 생명을 이렇게까지 낭비하여 버린다는 것은 물론, 뼈아픈 사실이겠으나, 인민의 자유 또한 그 손발을 결박을 당해버렸고, 그 눈과 귀도 가려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전선에서는 연일연야의 포연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시체는 산같이 쌓이고 있고, 피는 흘러 강을 이루며 대지도 또한 그 형상이 변하게 되고, 인가는 폐허로 불타버리고 있는데, 충칭의 국민들은 이를 모르고, 전승 축하를 위하여 집집마다 붉은 종이를 불태우고 폭죽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부모의 시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자식은 이를 모르고 무당을 불러다가 부모가 장수하기를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왕징웨이의 얼굴은 점차 흥분한 빛을 띠어 갔다. 그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의 언사가 항전파들앞에서 너무 과격하다는 것은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장부가 두려워할 바가 아니었고, 국민당 부총재로서, 국민정부의 부주석으로서 자기의 책무는 무겁기 태산이었다. 그러나 흥분하고 있는것은 왕징웨이 뿐만이 아니었다. 왕칭후이, 쉬융창, 천부레이등 항전파의 무리들도 그리하였거니와, 왕파(汪派) 라 은근히 지목을 받고 있는 바이충시도 빛을 잃었고, 왕의 비서 쩐중밍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지웨이가 공석, 사석을 들나들며 장제스에게 화평을 권고한 것이 오늘까지 사십 여차례에 이르는 것이지만, 오늘 이자리처럼 그 언사가 격월했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항전파의 무리들은 얼굴이 붉어지거나 혹은 푸르러져 각자 뜻모를 소리를 입안에 중얼거리며, 일제히 장제스 쪽을 바랍오싸다. 그들은 주석이 이러한 화평론자에게 대하여 무슨 조처가 곧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장제스는 의연히 표정없는 얼굴로 생각난듯이 담배에 또 새로히 불을 붙혔다. 아무리 마음은 격동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굳이 감추고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최후에 자기의 결심만을 발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이 장제스가 회의석상에서 항상 취하는 태도였다. 왕징웨이는 여전히 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군이 광저우에 들어서며 발표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중간에 한번도 우리 군대의 공격을 받은 일이 없었고, 오직 모기가 많아 약간 고생을 하였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군대의 이른바 진지작전(陣地作戰) 이란 일본군으로서 보았을떄 그 효력이 모기만도 못하였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정부는 또 게릴자전술에 대하여 선전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게릴라전으로 척촌(尺寸)의 실지(失地)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정당한 전쟁을 할 수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오직 지방을 소요하게 하고 인민을 살해하였을 뿐입니다. 지방은 그 병화로 말미암아 공업은 이야기할 것도 없고, 상업과 같은것도, 자리에만 앉아있으면 곧 유격대가 강제의금을 중수하려 오는 상황입니다. 이밖에도 무고한 백성을 혹은 불모로도 잡아다 가는등, 그 행악(行惡)은 가히 쌍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행상의 무리들은 또 어떻습니까? 길에서 유격대를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사라는 미명아래 금전과 상품등, 몸에 지닌 것은 물론이오, 입은 옷조차도 빼앗기고 만다고 합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에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700원의 은을 가지고 스치(石岐, 현 광저우성 중산시) 에서 마카오로 길을 떠나자, 유격대를 만나 700원을 고대로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사람은 하는 수 없이 자기도 유격대들의 하는짓을 흉내내어,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그가 가진 것을 강탈하여 가며 여행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중간에도 다시 몇차례 유격대에가 붙잡혔으나 다른 여객에게 여러차례 금품을 강탈하였기에 결국 마카오에 도착했을 때는 그는 본래의 700원 말고도 300원의 이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웃을 일이겠습니까? "이어 농민들의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손바닥만한 땅이 있을 뿐인데, 경작을 할때면 꼭 유격대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유격대는 물론 그들을 도와 농사를 지어주려 온것이 아닙니다. 한 이랑에도 강제징수를 하기위해서 입니다. 신고를 무릅쓰고 농사를 짓는것도 비참한 일인데, 또 그들은 이처럼 유격대에게 까닭모를 돈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인민은 궁하고 재물은 다하여 그 결과로는 국가와 민족이 다 함꼐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사상으로 볼때도, 동진(東晉)은 불행히도 외족의 침범을 받았지만 그래도 오히려 백여년의 편안을 얻을수 있었으나, 명말 (明末)의 홍광(弘光), 영림(永曆)에는 그나마도 간천을 보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동진, 송말시대에는 이러한 유격대, 즉 유구(流寇) 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오, 설익고 더러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정부가 능히 이것들을 박멸할 수 있었기에 민력은 아주 소모되지 않고 국가도 또한 이에 힘입어 멸망을 면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조 말년에는 유구가 한번 생기자 적지천리(赤地千里)로 민력은 완전히 소모되어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 해도 이를 막을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를 명조 말년에 비하여 볼떄 오히려 더욱 어려운바가 있습니다. 공산당의 무리들이 유구주의 (流寇主義) 를 제창한 이래 토비 (土匪) 도 유격대에 편입이 되었고 지방보안대도 유격대에 편입이 되었고 정규군에서도 조차 점차 유격대에 편입되고 있는 자가 있어 우리는 항전의 계속을 이자들에게 맡기고 최후의 승리를 이자들에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말로 말하자면 우리 국가와 민족은 멸망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항전력이 부족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누가 마땅히 져야 옳지 않겠습니까? 유격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는 공산당도 물론 책임의 일부를 져야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우리 모든 군사위원에게 과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 참석한 우리 모든 위원, 그리고 참석한 모든 위원들 모두 죄가 적지 않다고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말을 잠시 끊고 왕징웨이는 군사위원장인 장제스의 입을 바라보았다. 좌중의 공기가 더욱 긴장되고 더욱 험악하여진 이제 아무리 장제스라 할지라도 그 얼굴에 표정이 없을수 없었다. 그래도 약간 얼굴빛이 홀쭉 해졌을 뿐 여전히 말 없는 입으로는 담배 연기말을 토할 뿐이었다. 항전파의 안색이 지치고 숨소리가 험악해지는 것을 느끼며 중앙정치회의 부비서장 쩐중밍은 불안속 마음을 조이면서 왕징웨이를 향하여 몇번인가 눈짓을 하였다. 그는 딴말없이 직언을 하는 그의 언사가 마침내는 그의 신변에 어떤 위협을 초래하지 않을까 애를 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두려움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힘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항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도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물론 거리에 나가보았을때, 누구 한사람도 화평을 입에 올려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특무공작대(特務工作隊)의 이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사람만 모이면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진심으로 화평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또 한사람이 끼게되면 그들은 서로 못믿고 도리어 어조를 높이어 항전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는 오직 일반 인민들에게만 한정된 일일까요? 화평을 바라는 것은 과연 그들 인민들 뿐일까요? 나는 굳게 아니라 하겠습니다. 시종일시 항전을 주장하고 계신 제군들도 화평을 바라기는 마찬가지라고 믿겠습니다. 바로 작년 이맘때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씨가 본국정부의 훈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화평에 대한 의사가 있으면 독일은 이를 거중조정(居中調停) 을 할 용의가 있노라 말하였을때 우리는 일본정부가 제시하였다는 수개조항을 검토하여 보고는 그만한 조건이면 화평에 응해도 좋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 계신 분으로 구주퉁 위원도 그때 계셨습니다. 바이충시 위원도 그때 계셨습니다. 쉬융창 위원도 그때 계셨던걸로 기억합니다. 위원장께서 세분께 의견을 구하셨을 때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고 위원장꼐서도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당시의 독일대사가 전달하여온 화평조건을 지난 11월 3일 일본정부의 성명과 비교하여 볼떄, 우리는 당시의 일본측의 조건이 이번처럼 명확하지 않았고 또 이번 성명에 비하여 가혹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위원장 이하 모든 위원은 대국을 고려하시어 당시의 조건을 가지고 화평담판의 기초를 삼을 것을 승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독일대사의 제안은 화평담판의 기초로 삼으려 하시면서, 이번 일본정부의 성명은 그 기초로 삼을 수 없다 하시는 것입니까?" "1년전 독일대사가 조정에 분주하였을 때는 우리의 수도 난징이 아직 함락도 되기 전이었는데 그당시에 벌써 화평론이 대두하였던 것입니다. 고노에(近衛) 수상이 성명을 말한 이제는, 난징, 지난, 쉬저우, 카이펑, 안칭, 지우장, 광둥, 우한, 모두 연달하 함락되고 창사는 우리손에 의하여 초토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화평담판에 나아가는 것을 불가하다 하시는 것은 어떠한 까닭입니까? 저는 감히 제군들의 의견들을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왕징웨이는 비로소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좌중은 다시 소란하였으나 감히 일어서서 한마디의 반박을 가할 이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논리정연한 왕의 논설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항할 항전의 이론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깐 있다 쉬융창이 일어나 입을 열어, "기왕에 화평을 말하고 이제와서 항전을 주장하는것이 알수 없는 일이라 하시지만, 부주석께서도 원래는 주전론자가 아니셨습니까? 이제와서 화평을 논하시는 것은 역시 이치에 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빠른 어조로 말하고 입가에 비웃은 웃음을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왕징웨이는 다시 조용히 자리에 일어나 그말에 대해 대답했다.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국가의 목적은 생존과 독립에 있고 화평과 전쟁은 다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싸우는 것오, 화평하기에 이르러 화평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으로서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화평할 수 없는 것이고 만약 국가의 독립과 생존을 저해하지 않는것이라면 마땅히 화평할 것입니다. "그만하면 망국적 조건은 아니다" 라고 모두들 말하셨으면서 어찌하여 저의 화평주장을 불가하다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쉬융창 편을 보지않고 눈은 의연히 장제스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미쳐 다시 자리에 앉기도 전에, 쉬모가 그대로 앉은채로 한마디 하였다. "우리 민국은 이번 항전에 의하야 통일이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만약 이제 화평을 주장해버리면 힘들게 통일되었던 것이 다시 분열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왕징웨이는 그의 편을 잠깐 바라보았으나, 다시 고개를 장제스에게 돌리어 말하였다. "그 말씀에는 절대로 반대입니다. 예부터 이제 이르기까지 국가에 대하여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국내를 평정할것이오, 결코 국내를 평정하기 위하여 외적을 물리칠 것이 아닙니다. 대외전쟁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대내통일의 수단에 이를 이용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항전은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서만 할 것이오 대내통일의 수단으로 이용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 말씀에 반대임을 이 자리에서 거듭 천명합니다. 더구나 오늘 형세로 볼때, 화평을 주장하는 것이 국가의 통일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였을떄 좌중에서 " 지금 화평을 주장하는 것은 공산당에게 교란의 기회를 주는것에 지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 말하는 이가 있었다. 돌아보니 왕칭후이였다. 왕징웨이는 앉으려던 몸을 다시 일으켜 이에 대답했다. "비록 말씀은 그러하오안 공산당의 교란정책은 저들의 본성으로 화평과 전쟁 어느경우를 막론하고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화평을 제창할 때에 공산당의 책모(策謨)가 표면화 된다고 할지라도, 이를 현재와 같이 뒤로 가만히 돌아 도발이간(挑發離間) 만을 꾀하고 있는것과 비교하여 보자면 오히려 사태는 좋아질 언정 더욱 악화될리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왕은 대답을 마치자 곧 자리 장제스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듣기 괴로우실 것을 무릅쓰고 저는 주석꼐 다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강화 (講和)의 결과로 우리가 얻는 것이 망국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면 물론 그 강화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합작 (經濟合作)과 같은 것이 과연 망국적 조건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일본이 혹은 공동방공, 경제합작의 이름을 빌어 우리 중국의 군사적 경제적 독립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려 한다고 생각해 영토를 떼어주지 않더라도 떼어주는 것보다 심하고 배상을 묻지 않더라도 배상하는 것보다 심하다 말할지 모르나 이는 당치 않은 말입니다. 공동방공, 경제합작에는 내용과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에 우리는 강화조약을 체결할때 그 내용과 범위를 확정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 "또 누구는 '일본이 만약 성의(誠意)를 가지고 화평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어찌 우선 철병을 하지 않는것이냐, 적어도 루거우차오 사건 이전의 상태에까지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 않는 이상 어떠한 화평조건도 모두 허위다 ㅡ ' 이렇게 말하나 이는 더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본래 두나라가 교전을 하는 경우에 정전이 있은 뒤에 강화를 하고, 강화가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철병이 이루어지는것이 정론입니다. 이것은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제 의연히 항전계속을 강조하고 있고 따라서 교전상태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 상태에서 철병을 이야기할 도리는 없는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여 볼것은 돌아가신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말씀입니다." 왕징웨이는 말을 하담라고 머리를 들어 저편 벽에 걸리어 있는 손중산의 초상화를 우러러 보았다. 우러러보대 그 감개는 은근히 새로운바가 있어, 눈꺼풀이 저절로 더워짐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대아세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 관한 선생의 말씀으로, 선생의 전생에 있어 최후의 연설인것 입니다. 저는 일본 고베(神戶)에서 직접 이 연설을 들었거니와, 그것은 손선생 생애의 포부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중산전서(中山全書)에도 물론 수록되어 있으니 읽지 않으신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은, 이 강연록을 읽어보면 우리 아세아의 위기가 얼마나 중대한가, 아세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일양국은 어찌하여 서로 벗이 되어야 하는지, 어찌하여 서로가 적이 되면 안되는것인가? 그것은 서로 우호관계를 맺어야 비로소 서로 그 중대책임을 부담할 수가 있고 따라서 그 중대위기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나라가 적이 된다면 서로 저편의 힘을 죽이려 들게 되고 그 결과는 반드시 타국에는 기회를 주어 함께 국운이 피폐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중일양국이 벗이 되어야하고 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까닭은 이 중대한 의의를 그 기초로 함고 있는 것입니다. 설혹 일시의 암운으로 하여 이 중대의 위기가 가리워지기는 하였으나 저는 이제도 오히려 시기가 늦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징웨이의 말에는 어느틈엔가 울음조차 섞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국과 아세아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하여 그는 통곡도 하고 싶었다. 장내가 다시 수선스러워지려 하였을 때, 장제스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거의 창백하였다. 그도 역시 크게 흥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도 능히 알수 있었다.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중국항전의 전도에는 점차로 광명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각전선에서 우리 군대는 산지(山地)로 물러가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있으며 지형(地形)도 더욱 유리한 것입니다. 이번 사변과 왕년의 시안사건을 비교하여 본다면 이번은 정부와 민중의 태도가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능히 일체의 곤란을 극복하여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것이라 믿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어디까지든 항전을 계속하여 전국의 통일을 피하고 성의로서 국가민족을 단결시키기만 하면 어떠한 강적이라도 족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일 것이니 두고 보십시다." 이말에 왕징웨이는 크게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끝없는 적의(敵意)마저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감추지 않으며 장제스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저는 결코 그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주석 자신도 아마도 그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든간에 국가와 민족을 오늘날 멸망에 직면하게 한것은 국민당의 책임입니다. 우리들은 하루 바삐 연몌사직(連袂辭職) 하여 죄값을 치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 창백한 얼굴에 냉소하는 빛을 띄우며 "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사직을 하면 대체 누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까? " 그리고 그는 곧 분연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저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혼자 서재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안락의자 위에 피로한 몸을 의지하였다. (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길은 오직 하나였다. 장제스와 인연을 끊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화평구국운동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몸이 충칭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절대로 불가능 한일이었다. 이제까지도 화평파로 지목을 받아 온 몸이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오늘 자신은 항전파와 완전히 대립이 되고 만것이다. 국민당의 부총재, 국민정부의 부주석인 자기가 초토항전을 부르짖는 부내에서 완전히 대립된 주장을 표명해버린 이상, 이제는 그 신변에 위험조차 느끼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 ( "특무공작대들은 이제부터 나의 행동을 감시하려 들것이겠지..." ) 왕징웨이는 지금 윈난성 쿤밍(昆明) 에서 자기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을 동지 저우포하이와 아내 천비쥔(陳璧君)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들은 수일전에 용하게 충칭을 탈출하여 나갔던 것이다. ( " 나도 그들과 함께 떠나버릴 걸 그랬나...") 물론 그것은 저우포하이가 그날 권하여 마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한번만 더 장제스에게 화평을 권하여 보고 싶었다. 충칭을 탈출하는 것은 그 뒤라고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모든것이 허사였다. 장제스는 결코 자신의 말을 들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지성으로 일깨어 준 모든 말은 오직 항전파들의미움을 샀을 뿐이다. 미움을 산것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으나, 이제 더욱이 그들의 경계가 심하여 충칭 탈출이 곤란해진것이 사뭇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곤란한 일이 있다할지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동포드를 도탄속에서 건져내는 성(聖) 스러운 사업에 착수하여만 한다. 하지만 억지로 이곳을 벗어나 나가려 할때, 장제스는 자신의 자유는 물론이오, 생명까지도 빼앗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가벼운 깃털과 같은 것이었다. ( "어떻게든 기회를 타서 이곳을 탈출하여야만..." ) 왕징웨이는 고개를 번쩍들어보았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 서가의 벽에 걸려있는 액자속의 손중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왕징웨이는 이윽히 '혁명의 아버지'를 우러러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 " 선생님! 저는 제가옳다고 믿는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부디 제게 힘을 주십시오..." ) 밀사 (密使) 그로서 이틀이 지나 21일 저녁때, 위난성 주석 룽윈(龍雲)에게서 전보가 왔다. 그에게 강연차로 쿤밍까지 와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자리에 있던 쩐중밍과 더불어 그는 일을 상의하였다. "쩐중밍군, 이 전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왕징웨이는 전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며 젊은 동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구요?" 쩐중밍은 자기가 외경(畏敬)하는 이 선배의 얼굴을 빠안히 쳐다 보며 되물었다. "응, 단순히 강연을 청하는 전보라 생각하느냐 이말이다." 왕징웨이도 전보에서 고개를 들고 사랑하는 후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글쎄요, 저의 생각같아서는 현재 아내분이랑 저우포하이씨가 쿤밍에 체류하고 계신것과 이 전보는 필연 관련이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 "나도 같은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것은 주군이 나더러 곧 충칭을 빠져나오라는 뜻 같네" 나에게 쿤밍행의 구실을 만들어 주기 위해 룽윈에게 이 전보를 치게 한것같네." "하지만 이 전보 한장으로 선생님께서 용이하게 충칭을 떠나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역시 어렵겠지. 위원장에게 고지식하게 전보를 보여주며 말한다고 나같은 위험인물을 그가 쉽사리 내어 보낼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럼 부단히..." "역시 그럴수 밖에 없겠지. 그러나 이러한 정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겠지. 만약에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 하나의 구실은 만들어 주는것이니..." "쩐중밍군, 그렇게 기운을 떨어트릴 것도 없네.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무슨 좋은 기회가 있을것이야." "암요 있지요, 꼭 있지요. 천도 (天道)는 길고 무심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4억의 동포가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우선 선생님께서 먼저 자유를 얻으실 수 있을 것는 저는 믿습니다." " 고맙네." 왕징웨이는 진심으로 제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나 불란서창(佛蘭西窓,마루면까지 안으로 열리는 커다란 쌍여닫이 창) 으로 걸어갔다. 화항(花港, 항저우의 지명) 에 있는 어느 술집에서 부터 인듯싶은 남국의 음곡(音曲)이 들려온다. 하늘은 오늘도 역시 흐렸다. 그 흐린 하늘을 여윽히 창 넘어로 쳐다보고 있다가 그는 그대로 서 있는 채 쩐중밍에게 말하였다. "어찌될지, 언제 쓸지 모르니 좌석표나 준비하여 둡세" "네, 역시 팽군 (彭君) 에게 부탁을 하는것이 좋겠죠?" "그럴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일이라도 가서 두어장 ㅡ" 그러나 왕징웨이는 말을 하다말고 곧 자리로 돌아와 다시 앉으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부인과 이야기는 어찌할 생각인가? 쩐중밍군..." 쩐중밍은 잠깐동안 대답을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얼굴은 약간 붉히면서도, 분명한 말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선생님을 모시고 이제 큰뜻을 천하에 펴려 하는데 어찌 구구히 처자를 돌보아 마땅할 것이겠습니까?" ...... 그러나 저는 차마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행복과 자유와 광과 희망을 가져보지 못하는 체, 이대로 음울한 충칭의 하늘 아래서 그들의 생애를 마치게 할 순 없습니다. 좋은 기회가 있어 그들도 함께 이곳을 탈출 할 수 있다면 저는 기어코 그들도 데리고 떠날까 합니다. 그러나 동반하여 선생님의 충칭 탈출이 털끝만이라도 지장을 받게 된다면 물론 그들의 생명과 자유 같은것은 개의하여 볼것이 못됩니다." 왕징웨이는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말하였다. "우리들이 모두 무사히 충칭을 벗어날수 있을 , 어떤 좋은 기회가 이제 필연코 있을 것이네, 끈기 좋게 기다려보세, 좌석표는 아주 넉넉하게 얻어 두기로 하세. 그리고 명의는 팽군것으로 하면 되지않겠는가? "그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곧 전화로 알아보고 찾아가 보겠습니다." "내일해도 괜찮을 듯한데..." "아닙니다. 별로 볼일도 없는데 빠르게 표를 얻어두자구요." "그럼 그렇게 하게." 쩐중밍은 즉시 수화기를 뗴어들고 교통부차장 펑쉐페이(彭學沛)를 불러내었다. 무슨일로 그러느냐 묻는 것을, 쩐중밍은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하며 끊고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는 염려할 것이 없었다. 펑쉐페이는 이를테면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화평파의 한사람이다. 왕징웨이가 쓰겠다는 것이라면 그는 두말않고 좌석표를 얻어 줄것이 틀림 없었다. ( " 허나 정작 탈출할 기회가?......." ) 그러나 그것은 이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짝 소용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왕징웨이는 서가 앞으로 가서 한권 서적을 꺼내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육방옹(陸放翁)의 시 ㅡ 그것은 그의 선친이 그가 10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매일같이 이삼 수(首)씩 써 보고 외우게 했던 그리운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두시간이 지나 펑쉐페이 명의의 비행기표6장을 들고 쩐중명이 돌아올 때까지 모든 시름을 잊고 육방옹의 시를 한편, 두편, 낮은 음성으로 읊고 있었다...... 좌석권은 이렇게 쉽사리 수중에 넣었지만, 정작 탈출할 기회는 용이하게 오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에 장제스는 그에게 항상 자기 좌우에 있어 주기를 요구하였고, 또 그의 일거일동은 차차 알고 보니 수 명의 특무공작대원에게 감시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역시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난성 주석 룽윈에게 갈때 가더라도 아직은 간다 안간다 말을 하여 두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어서, 아직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룽윈보다도 아내 천비쥔과 또 딸과 동지 저우포하이가 궁금하여 할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충칭탈출이 성공될 때까지, 그는 모든 일에 세심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얼마전까지도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히 알아오던 저우포하이에게까지도 요즘에 이르러서는 장제스는 그 신임하는 것이 전만 못한 것 같다. 저우포하이가 충칭을 탈출하여 쿤밍으로 달려 간 것은 장제스가 마침 국민당의 청년위원들을 모아 놓고 훈화를 하는 짧은 동안의 일이었다. 표면에 내세운 명목은 '선전공작시찰(宣傳工作視察)' 이라는 것으로 전 같으면 장제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저우포하이가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충칭을 나갔다는 것을 알자 곧 천부레이에게 명하여 그에게 즉시 충칭으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치게했다. 전보를 받고 저우포하이가 은근히 불안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칭에 앉아서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기들의 모든 게획이 탄로 될것이 아닐까ㅡ? 하고까지 염려를 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염려가 비록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기회를 타서 쿤밍까지 빠져나온 몸이 다시 충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쩐중밍이 알아온 바에 의하면, 천부레이에게 온 저우포하이의 답전에는 아직도 시찰이 끝나지 않았기에 수일 더 머물러 그것을 마치고 돌아가겠노라 하였다고 한다. 그 수일이라는 것도 이제 일주일이 넘었다. 날은 자꾸 가고, 정작 자신은 오지 않고... 저우포하이는 천비쥔과 더불어 얼마나 초조하여 궁금하여 할 것인가? ㅡ 왕징웨이는 은근이 애가 쓰이지 않을수 없었다. ( " 쿤밍에 있긴 한걸까......" ) 그러나 생각하여 보면 그것은 또 알수 없는 일이었다. 저우포하이와 자신의 아내가 쿤밍을 향해 떠난것도 이달 초엿셋날의 일 ㅡ,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들보다 삼일 뒤늦어 왕징웨이 자신도 충칭을 탈출하여 쿤밍에서 모여 가지고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佛領印度支那)의 수도, 하노이(河內)로 벌써 지금쯤은 가있어야 했을 일이었다. ( " 어쩌면 내가 졸연히 못나올 것을 눈치채고, 그들만 먼저 하노이로 떠나지나 않았을까..." ) 정말 그렇게나 하였으면 오히려 좋겠다고 생각도 된다. 즉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도 그처럼 오랫동안 쿤밍에 머물러 있을 때, 장제스는 저우포하이의 태도에 문득 의혹을 품고 있었기에 이제 무슨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 " 나는 나대로 어떻게든 갈것이니, 어서 저들이나 떠나주었으면... " ) 탁자 위에 놓인 분에 심은 납매(臘梅) 를 바라보며, 왕징웨이가 생각을 멀리 쿤밍의 하늘로 보내고 있을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후 쩐중밍이 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손님이 왔습니다." 그는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의자에 앉기도 전에 그러한 말부터 하였다. "손님이? 누구신가?" 왕징웨이는 그의 약한 흥분한 빛을 띠운 얼굴을 보마 저모르게 상반신을 앞으로 내어 밀며 물었다. "쿤밍에서요, 저우포하이씨가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쩐중밍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왕징웨이의 맞은편에 앉았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한통의 편지를 꺼내어 탁자위에다 놓으며 말하였다. "그사람은 어디있는가?" 왕징웨이는 분명히 저우포하이 필적의 편지를 집어들며 물었다. "향화다관 (香花茶館) 에서 만나 이야기 하고 싶ㅡ" "향화다관?" "네, 아마 선생님께서는 모르실만도 합니다. 부두에 있는 조그만한 다관입니다. 거기서 만나서 이야기 하고, 다시 내일 만나기로 하고서는 즉시 해어졌습니다." "거기는 또 왜 간건가?" "아침에 집을 나서려니까, 어떤 사나이 하나가 앞으로 와서 담뱃불을 청하더니 불을 붙이고 나자 '오후7시, 향화다관, 주 선생 대리입니다.' 그런 말을 남이 보기에는 불을 빌려주는 사례나 하듯이 말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렸습니다. 주선생이란 저우포하이 씨를 가르키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쨋든 시간에 맞춰서 저는 그곳까지 가보았습니다." 쩐중밍의 이야기를 들으며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의 편지를 두번 읽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하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오시지도 않고 또 아무 기별도 없으시어 궁금합니다. 저는 이미 21일의 하노이행 비행기표를 예약하여 놓았습니다. 그때까지 안오시면 단독이라도 탈출을 결행할 결심입니다. 그러나 다만 제가 하노이로 떠나감으로 하여 선생께 어떠한 위해가 없을런지, 그것이 염려됩니다. 부인께서는 영애와 더불어 당분간 선생의 도착을 기다리시며 쿤밍에 머물러 계시겠다 합니다. 편지를 가지고 간이는 신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두로든 서신으로든 즉시 회답을 내려주십시오." 대개 그런 뜻이 적혀있었다. ( " 중간에 특무공작대에게 수상하게나 보여 몸뒤짐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서신을 주어 보냈는가..?" ) 아무리 하여도 좀 경솔한 것이었다고 왕징웨이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로만 본다면아무튼 서신이 이렇게 무사히 자신의 수중에게까지 들어왔고, 우선 이역만리 그들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매우 대견하여 그는 아무말 하지 않고, "서신만 전하던가? 무슨 다른말은 없었나? " 하고 쩐중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기회 있으신대로 지체 마시고 쿤밍으로 오시라구요. 쿤밍에서 하노이행은 선생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윈난성 주석이 비행기를 얻어주겠다 한다구요." 쩐중밍은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하였다. "그사이 홍콩과 연락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하루 바삐 선생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홍콩에서?" 왕징웨이는 한마디 묻고, 다음에 눈을 가만히 감았다. 린바이셩(林柏生), 메이쓰핑 (梅思平) 은 얼마전에 중앙선전특파원의 자격으로 공공연하게 충칭을 떠나 현재 홍콩에 머므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왕징웨이의 수족같은 사람들이었다. 초토항전파와 대립하여 화평구국의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는 그들은 사실 왕징웨이의 궐기를 청하여 온지 오래였다. 그들을 생각하니 한시 바삐 그들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한시 바삐 달려가서 자신의 기관지 남화일보 (南華日報)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싶었다. "그래, 회답은? " 왕징웨이는 다시 눈을 뜨고 쩐중밍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장소는?" "태평문(太平門) 에서 저기문(楮寄門) 사이입니다." "자세히 이야기 해보라." "내일 아침 저는 자동차로 9시 정각에 태평문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그도 꼭 정각에 맞추어 그 곳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다관에서 헤어지기 전에 서로 시계를 맞춰두었습니다. 제가 자동차를 잠깐 멈추면 그사람은 곧 올라 탈겁니다. 우리는 다시 차를 달리며 차속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저기문에서 그를 내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서신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필요까지도 없겠지마는 ㅡ " 쩐중밍은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눈을 크게 뜨고 "회답은 물론 구두로 하시겠지요?" "물론이지" 왕징웨이는 말하고, 다시 "잘했네" 하고 덧붙혔다. "나의 일은 염려말고, 예정대로 하노이라 떠나라 이르게, 그가 떠났다고 나의 몸에 위해가 미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아직은 주(周) 군과 나 사이에 표면적으로 들어난 관계라는 것은 없으니까, 장 위원장도 내게완전히 의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ㅡ 그리고 내 아내에게는 그대로 더 쿤밍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니 주 군과 함께 하노이로 가던지 단독으로 홍콩으로 가라고 하게. 가서 하포파(荷包派) 를 지휘하라 하게 ㅡ " 그리고 이어서 한마디 했다 . " 물론 기회가 오는대로 우리도 충칭을 하루 바삐 떠날 결심이라고 ㅡ " 저우포하이가 보낸 사람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 다음에, 왕징웨이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 "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대체 기회는 언제 돌아온단 말인가...? " ) 탈출 (脫出) 기회는 그러나 의외로 일찍히 찾아왔다. 저우포하이의 밀사가 돌아간 것이 12월 16일 ㅡ 바로 다음날인 17일 장제스는 갑자기 내일 군무를 가지고 간쑤성 란저우 (蘭州)로 갔다가 20일에 돌아올 뜻을 발표 했던 것이다. 그날 밤 왕징웨이는 자기 서재에서 쩐중밍과 더불어 상의하였다. "장위원장이 란저우로 떠나는 것이 오전 9시,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는 9시반. 그사이 삼십분의 여유가 있을 뿐이네, 좀 촉박하지만 그가 떠나는 것만 보고 우리도 쿤밍으로 향하세." 왕징웨이는 긴장한 얼굴로 쩐중밍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럼 장 위원장이 비행장을 떠날 때 비행장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 쩐중밍은 약간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왕징웨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장 위원장이 같이 나가자는 말이 없더라도 나갈 생각이네, 우리의 신변은 특무공작대의 감시를 박고 있네, 그렇기에 비행장으로 나가면 그들의 의심을 안살수 없는것이네, 그렇다고 그들의 눈을 피하여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믿네 ."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배웅간다고 빙자하고 공공연하게 비행장으로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그곳에는 물론 다른사람도 나올것이고... 또 30분밖에 시간의 여유는 없고..." "나도 그것이 염려되네, 장 위원장이 란저우로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우리들만 남의 의심을 사지 않고 남아있다가 비행기로 탈출하기에는 30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네, 더구나 장위원장이 출발을 좀 늦게라도 하게 되면 계획은 그만 틀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찌됬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는 내일 떠나시긴 하셔야합니다." "물론이지, 내일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이곳을 벗어날지 모른다. 20일에 돌아온다고 하니까 모래라도 가려면 갈수는 있겠지만, 일정을 변경하고 즉시 돌아올지 누가 알겠소? 더구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사람을 시켜 우리를 좀더 경계할 수도 있는 일이니 , 어떻게든 일은 내일 결행해야한다." "네...... 그러나 저의 생각 같아서는 시간의 여유는 좀ㅈ더 만들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팽 군에게 부탁하여 무슨 구실을 지어서든 30분이나 한시간 쯤 쿤밍행을 늦게 출발시키면 될 것이니까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ㅡ " "경우에 따라서는? " "역시 팽 군에게 부탁하여 달리 한대를 비밀리에 준비시키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어림도 없는 말 말게, 장제스의 명령없이는 군용기든 민용기든 아무나 함부로 사용을 금하고 있는것을 자네는 잊어버렸나?" "하지만 팽군이, 주선만 하면 될것입니다. 팽 군은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들ㄹ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어느 일과도 다르니까 ㅡ, 만약 나중에라도 그것이 탄로가 난다면 팽 군은 그 지위 뿐만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을 느끼기 쉬워지게 된다." "그렇지만 팽 군은 그 위협을 무릅쓰고 힘써 주리라 생각합니다. 위험하기는 여객기를 이용하시는 경우라도 마찬가집니다. 팽 군 명의의 비행기표를 이용한신것을 알면 그를 그대로 두진 않을 겁니다. " 왕징웨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펑쉐페이는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를 이처럼 희생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쩐중밍도 잠시 말이 없다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이렇게 하시지요. 내일 아침에 비행장으로 나가서 장제스가 떠나는대로 우리도 쿤밍으로 가기로 하되, 팽 군에게 부탁하여 30분 내지 한시간만 여객기를 늦게 출발 시키게 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 보는 데서 한차레 성내로 들어왔다가 즉시, 팽 군의 자동차로 팽 군과 함께 비행장으로 다시 나가기로. 팽군은 그만한 의기와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징웨이는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물었다. "부인과 애기들은 어쩔려고 그러나?" 쩐중밍은 대답하기 거북한듯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하였다. "저의 욕심같아서는 팽 군에게 말하고 팽군의 가족인듯이 구미고서 아주 팽 군의 자동차로 우리보다 한걸음 먼저 비행장으로 나가 있게 할까 합니다만은ㅡ " 왕징웨이는 눈을 감은채 다시 물었다. " 내일 비행장에 나올만한 사람으로 부인이나 애기와 안면이 있는 이가 있는가? " "바이충시 씨와 안면이 있습니다만은, 비행장에서 보더라도 그는 모르는체 해줄듯싶습니다. 근데 천부레이가......" 왕징웨이는 약간 미간을 찌프렸다. 쩐중밍은 자기도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띠우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선생님, 저는 역시 처자를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다. 선생님의 크나크신 일이 저의 아녀자 같은 애정으로 하여 패를 보셔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왕징웨이는 말 없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가 마침내 눈을 고요히 뜨며 말했다. "장위원장이 다른 때나 마찬가지로 내일도 시간에 엄격하기만 하여 준다면, 그가 떠나는 것이 아홉시 정각ㅡ, 보내고 즉시 사람들이 되돌아 들어가면 아옵시 30분 출발의 쿤밍행에 오르실 부인을 천부레이는 볼수가 없을 것이네. 그러나 장위원장 출발이 만약에 늦어진다면......" "......."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십중팔구 없을 것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때에는 또 쿤밍행에 오르는 여객에게서 천부레이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할수도 있을 것이네." "그러면 우리는요?" "만약 30분이나 한시간 쿤밍행 여객기의 출발을 늦추어도 장 위원장이 안떠나는 경우에는, 우리는 부인과 애기들만 먼저 보내고 뒤에 따로 팽 군에게 힘을 빌리기로 하세" "그럼 아주 처음부터 여객기를 이용할 필용 없이 처음부터 다른 비행기를 한대 주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 ㅡ 나는 팽 군이 나중에 장제스에게 받을 형벌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해주고 싶네." 왕징웨이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주 팽 군도 우리와 같이 가기로 하면 어떨까? 그렇게만 되면 모든 일이 좋겠구만서도...." 그러나 쩐중밍은 대답을 하였다. " 그러나 그것은 팽 군이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병상에 누운 칠순이 넘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이 때 전화의 종이 울렸다. 왕징웨이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드는 쩐중밍을 한손으로 제지하고, 자기가 모소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천부레이에게서 온 것으로, 장제스가 그에게 곧 관저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장 위원장이?" 역시 쩐중밍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상의하고 있던 문제가 문제라, 불안한 빛은 순간에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입가에 미소조차 띄우고 말하였다. "별 염려는 없을듯하네, 아마 자기없는 사이에 내게다 무엇 부탁할 말이 있어 그러는게지" "자네는 내가 다녀올 동안 팽 군에게 우리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겠나? " 그리고 왕징웨이는 즉시 자동차를 달리어 장제스에게로 갔다. 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기가 비록 충칭에 있지않더라도 일양일내로 긴급히 처리하여야 할 몇가지 정무에 관하여 그와 상의하려고 이 밤에 왕징웨이를 부른 것이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밝은 날은 바로 민국27년 12월 18일ㅡ, 이날도 날은 잔뜩 흐리고 비행장 넓은 마당에는 음산한 바람이 언 땅을 휩쓸고 있었다. 란저우로 떠나는 장개석과 그를 바래는 왕징웨이 이하의 일행이 자동차를 몰아 비행장에 이른 것은 예상한 시각보다 늦어 9시 15분ㅡ, 왕징웨이의 은근한 염려가 드디어 사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비록 교통부 차장 펑쉐페이가 최대한도 한시간 늦게 출발을 시키기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을 왕징웨이가 이용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용을 하게 되고 못되고 간에, 장제스나 어서 한시라도 충칭을 떠나주었으면 ㅡ 하고 왕징웨이와 쩐중밍은 은근히 바랬다. 자기들의 계획이 계획인만큼 그들도 조금이라도 장제스와 오래 자리를 가지고 있기가 거북하였다. 장제스는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마음속을 알리가 없다. 알턱은 없으면서도 예정하였던 시간보다 늦은것이 자신 스스로도 유쾌하지는 못하여 비행장에 도착하자 즉시, 비행복으로 갈아입고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군용기 앞으로 갔다. 9시 25분이었다. 보내는 사람과 두어마디 말이 있은 뒤에 장제스는 문득 왕징웨이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왕선생,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신색이 좋지 못한것 같은데..." 왕징웨이는 간밤에 역시 흥분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부족하였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호젓하게 웃고 말하였다. "수삼일 전부터 몸이 좀 불편합니다. 심장병이 재발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제스는 딱한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말하였다.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어제 말씀한 것은 천부레이군에게 일임하고 왕 선생은 댁에서 며칠 쉬시지요." "감사합니다. 쉴 정도 까진 아닌것 같습니다." "그래도 쉬시는게 좋겠습니다." 장제스는 옆에 서있는 처부레이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 부주석께서는 몸이 불편하신듯 하니 자네가 맡도록 하게, 정 모를 일이 있으면 부주석께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ㅡ "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천부레이 옆에 있는 쩐중밍을 바라보고, " 참, 증군, 천부레이 군을 좀 거들어 주시게, 뭐 대단한 일은 아니야." 장제스는 그렇게 당부하기를 마치고 나서, 문득 저편에 우편물을 싣고 있는 여객기가 눈에 띠자, 왕징웨이는 펑쉐페이를 보고 물었다. "저게 어디가는 여객기인가?" 펑쉐페이는 "쿤밍으로 가는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몇시 출발하는 비행긴가?" 펑쉐페이는 약간 지체한 뒤에 말하였다. "9시 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9시반?" "시간이 되었는데 웬일인구?" 펑쉐페이는 곧 말하였다. "준비가 아직 덜된거겠지요, 곧 출발할 것입니다. 가서 알아볼까요?" "그럴필요는 없지." 장제스는 마침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펑쉐페이와 쩐중밍, 그리고 왕징웨이도 자신도모르게 한숨을 가만히 쉬었을 때, 문득 동남편 하늘에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며 한대의 비행기가 나타났다. 장제스는 잠시 쳐다보다가 펑쉐페이를 바라보고 물었다. "지금 어디서 들어올 비행기가 있는가?" 펑쉐페이는 차츰 차츰 비행장 상공을 향하여 가까워지는 더글러스 비행기를 지켜보며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 프로펠러는 이미 돌기시작하였으나, 장제스는 비행사에게 손짓을 하고 자기는 그대로 하늘을 쳐다았다. 마침내 더글러스 비행기는 비행장 한가운데 착륙하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일신에 집중시키고 그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의외로도 공산당의 거물, 저우언라이( 周恩來) 였다. 그는 막 출발을 하려고 하고 있는 군용기 위에 장제스의 모습을 발견하자, 황망히 손짓을 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 있는 아무와도 인사를 할 시간없이 바로 장제스 옆으로 가서 "주석, 어디를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저기 란저우에 잠깐... 그래, 무슨일로 돌아오셨소?" "여쭐 말씀이 있어서......" "무슨 말씀이오?" 장제스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묻는 말에 저우언라이는 옆에 서있는 왕징웨이 와 몇사람을 흘낏 둘러보고는 "주석께만 잠깐 말씀 하고 싶은데" 하고 대답하였다. 장제스는 말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저편 주임실을 향하여 걸어갔다. " 대체 무슨 이야길까?" 쉬모가 천부레이에게 물었다. " 글쎄 ㅡ 아무튼 무슨 긴급한 일이 생긴것만은 틀림없겠지." 천부레이는 지금 막 주임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멀리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처럼 입밖에 내어 말은 아니하나,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좀더 궁금하고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왕징웨이와 쩐중밍, 그리고 펑쉐페이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금 전선으로부터 돌아온 저우언라이의 용무를 기어코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의외의 중대한 사항이어서 장제스가 출발을 중지하거나 연기할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왕징웨이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이미 10시 5분이었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회견은 25분이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여러사람들이 모여 서있는 곳에서 혼자 떨어져 단장을 가볍게 휘두르며 그 건방을 거닐었다. ( "란저우 행을 중지하려는 것은 아니곘지...... 설혹 기어코 오늘 출발을 한다 하더라도 이미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는 우리가 여객기를 이용하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책을 취해야 좋을까? ㅡ " ) 하고 잠시 그가 생각에 잠기었을때, 어느틈엔가 쩐중밍이 그의 옆에와서 서서 "팽 군이 여객기를 출발시키겠다고 합니다. 이이상 출발을 유예할 떄는 혹은 장 위원장의 의혹을 살지도 모르겠다면서요." 하고 극히 낮은 어조로 말하였다. "그 대신 장 위원장만 떠난 뒤에는 어떻게든 쿤밍까지 가시도록 주선을 하시겠다고 팽 군이 말했습니다." 왕징웨이는 여객기가 나래를 쉬고 있는 방향과는 정반대편 산을 바라보며 역시 적은 소리로 물었다. "부인과 애기들은 어떻게 할려고?" 쩐중밍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며 말하였다. "여객기에 태워 먼저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천부레이 옆으로 가서 서면 팽 군이 저의 가족을 이끌고 휴게실에서 나오기로 되었습니다." 왕징웨이는 "그럼 어서 가보게." 말을 남기고 자기는 아까처럼 다시 그 근방을 거닐며 은근히 휴게소 편을 보았다. 저편 휴게소에서 쿤밍가는 여객들이 나와 여객기 앞으로 걸아갔다. 여섯사람째에 펑쉐페이가 나타나고 다음에 쩐중밍의 부인이 한아이를 안고 한아이는 걸으며 뒤를 따랐다. 왕징웨이는 재빨리 천부레이 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휴개소 편을 멀리 등지고 서서 무엇인지 한참 쩐중밍과 이야기가 바빴다. 왕징웨이는 눈을 감고 그곳에가 잠깐 우둑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프로펠러 소리가 웅장히 일어나고, 마침내 쿤밍행 여객기는 비행장을 떠나, 왕징웨이가 잠깐 뒤에 눈을 떠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는 이미 기수를 동남쪽으로 향하고 한참 흐린 충칭의 상공에서 그림자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천천히 걸어 천부레이와 쩐중밍이 서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마침 장제스와 저우언라이가 주임실에서 나왔다. 10시 15분, 장제스는 다시 한차례 배웅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침내 그가 탄 군용기는 북쪽하늘을 바라보고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잠깐 바라보고 있다가 왕징웨이는 모든 사람과 함께 자동차 세워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가지런히 한 쩐증밍은 낮고 빠른 어조로 말하였다. "천부레이가 저와 함께 주석관저로 들어가자고 합닌다. 의심을 살까 승낙을 하였습니다. 저우언라이도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떠나기는 불가능하겠습니다. 오히려 선생님 한분이나 안전하시도록 저는 남아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에 누구인지 발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자 그는 황망히 말을 이었다. "팽 군의 준비는 다 되었답니다. 쌍-루이 병원 뒷문에서 팽 군이 기다리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곧장 병원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는 극히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보았다. 뒤 쫓아온 사람은 천부레이다. 그는 왕징웨이 곁까지 오자 그와 발을 맞추어 말하였다. "아까 주석 말씀도 있으시고 하니 부주석께서는 바로 사저로 돌아가십시오, 어제 주석과 결정하신 일은 제가 증 군과 함께 하겠습니다. " 왕징웨이가 그말에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어느틈엔가 저우언라이가 옆으로 와서 서서 말하였다. "부주석, 어디 편찮으시다구요?" 왕징웨이는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심장병이 재발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닥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은......" 그리고 다시 천부레이를 향해 물었다. " 지금 바로 관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왕징웨이는 다시 저우언라이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저우언라이는 말했다. "진 선생, 증 선생과 함께 주석 관저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 ㅡ " 하고 왕징웨이는 자신의 자동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하였다. "제 차로 같이 가십시다." 천부레이가 물었다. "부주석께서도 같이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아아니, 나는 가는 길에 병원을 들러야해서...." 쩐중밍, 천부레이, 저우언라이와 왕징웨이는 한차에 올랐다. 차가 비행장을 나설 때 왕징웨이는 운전수에게 명하였다. "쌍 - 루이 병원ㅡ" 쌍 - 루이 병원은 성내를 들어 서서 얼마 안되는 곳에 있었다. 차가 병원 문앞에 이르렀을 때, 왕징웨이는 스톱을 명하고 돌 기둥 앞에 내려섰다. "그럼 세분은 어서 주석관저로 가보시죠." 그리고 왕징웨이가 모자를 벗어 들자 천부레이가 물었다. "차는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나중에 택시라도 부르기로 하고 오늘은 종일 내차를 빌려 드리리다. 나의 크라이슬러가 충칭 제일의 휼륭한 차라는 것만 아시오." 라고 말하고 나자 왕징웨이의 입가에는 호젓한 웃음이 떠올랐다. 세 사람을 태운 차는 병원의 길 돌담을 끼고 달려갔다. 그 모양을 잠깐 바라보고 있다가 왕징웨이는 곧장 병원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현관으로 향하지 않고, 곧장 병사 (病舍)를 바른편으로 끼고 ㄷ자로 돌아 뒷문으로 나섰다. (원문에도 ㄷ자라 표시되어있음, 오타 x) 병원 뒷골목은 언제든 행인이 드물다. 그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펑쉐페이의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펑쉐페이는 왕징웨이를 보며 말했다. "증 군은 역시 못빠져 나오게 되었습니까?" 왕징웨이는 말 없이 가만히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펑쉐페이는 추연한 기색으로 창밖만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듯이 외투주머니에 손을 넣고, "참 ㅡ, 이걸ㅡ" 하고는 검은 안경을 꺼내며 "증 군이 아까 부탁을 하더군요, 누가 볼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은 그래도 쓰고 계시지요." 왕징웨이는 입가에 쓴웃음을 띠웠으나 그래도 말 없이 안경을 받아 썼다. 차는 막 성문을 나서려 하고 속력을 약간 늦춘다. 왕징웨이는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사나이를 발견하고 곧 외면을 하였다. 그 사나이는 장제스의 특무공작대 제2처장 다이리(戴笠)였던 것이다. 차가 그의 옆을 지날때, 다이리는 차안을 홀낏 들여다 보았다. 펑쉐페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망히 목례를 하고, 다음에 다시 뒷창으로 돌아다 보려 하였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그의 무릎에 손을 얹어 그것을 제지하였다. ( " 펑쉐페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나, 왕징웨이라는것을 알아버린건 아닐까......?" ) 물론 약간의 불안이 그에게도 없을수는 없었으나,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여,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호젓한 웃음을 띄었다. 믈런 그가 펑쉐페이와 함께 비행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다이리가 알았다 할지라도, 장제스에게서 무슨 지령이라도 받아두지 않은이상 국민당 부총재이자 국민정부 부주석인 자기를 당장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 " 하지만 혹시 위원장이 무엇 일러둔 말이라도 있다면.......?" ) 그러나 그리하여 이제 충칭탈출에 실패에 돌아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왕징웨이가 다시 호젓한 웃음을 지어보였을 때, 그들이 탄 자동차는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교통부차장 펑쉐피이는 곧 주임실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와 격납고로 달려갔다. 왕징웨이는 자동차안에 그대로 안자 있는체, 문득 쩐중밍을 생각하고 마음이 아팠다. ( " 만약 그가 영영 충칭을 탈출 할수 없다고 하면......" ) 이제 자신의 충칭탈출이 바로 탄로가 나게되면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그의 자유와 생명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와ㅇ징웨이는 그가 몇일전 밤에 하던 말을 생각하여 참말 천도(天道)가 무심하지 않기를 내심 빌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의 몸도 아직 완전히 위험지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내에서 나올 때 지나친 다이를 생각하고, 자신이 탈 비행기가 격납고에서 비행장으로 끌려나오는 결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초조하게 보냈다. 윈난성 주석에게서 강연을 청한 전보는, 만일의 준비로 항상 몸에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바로 15분 전에 의사 진찰을 받겠노라고 병원 문앞에서 천부레이와 저우언라이와 인사를 나눈 자신이다. 이제 누구에게든 비행기를 타려는 현장을 발견당한다면 그까진 전보는 아무짝의 소용이 없을 것이다...... "팽 군의 은혜를 내 갚을 길이 없구려." 펑쉐페이는 호젓하게 웃고 말하였다. "미미한 수고로서 수고를 이야기할것이 못됩니다. 부디 먼길 가시는동안 평안하십시오. 선생님의 진력으로 하루라도 일찍이 동아의 화평이 이뤄지기를 빕니다." "부디 증 군의 편의도 보아주시기 바라오." " 당부 안하신다고 잊을리 있겠습니까?" "위원장이 돌아와서 내가 떠난 것을 알고 말이 있거든, 모든 것을 다 내탓으로 미루시오." 그러나 그답에는 답을 하지 않고, " 일로평안 (一路平安) 하시기만을 빕니다." 라 말했다. 다시한번 인사를 마치고 펑쉐페이는 비행기 옆에서 물러섰다. 프로펠러가 돌고 활주를 시작해, 마침내 이륙하자, 비행장 상공을 한바퀴 선회하고 다음에 기수를 동남으로 향하여 '라이트 싸이크론 750마력' 2기를 장비한 커티스 라이트-콘도르 형 (型) 수송기는 음울한 충칭의 하늘을 떠나 일로 쿤밍을 향해 시속 240km 로 얼마동안 양쯔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쿤밍의 하늘은 맑았다. 말게 개인 날은 겨울에도 겹옷이 더운 쿤밍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심호흡을 두어번 하였으나, 마침 쏜살같이 비행장으로 안으로 달려온 한대의 링컨 자동차에서 뜻밖에 그의 아내 천비쥔과 그의 딸과 동지 저우포하이, 그리고 윈난성 주석 룽윈이 뛰어온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셨소?" 그는 저우포하이가 내미는 손을 덥썩 잡고 진정으로 반갑게 흔들었다. "전보를 보고 나왔는데.... 당신이 친것 아니었나요?" 아내 천비쥔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럼 팽 군이 쳤나보군, 아니면 증 군이 친건가? 왕징웨이가 그렇게 말하고 비로소 룽윈을 향하여 인사를 하려 돌아섰을 때, 그는 어느틈엔가 그의 등뒤에 서있는 쩐증밍의 부인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 두렵기나 한듯 그는 아무런 말이 없이 왕징웨이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저우포하이가 대신하여 물었다. "선생님, 쩐중밍 군은...?" 왕징웨이는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 하고 대답하였다. "증 군은 이번에 같이 오지 못했소," 자세한 말은 들어가서 하십시다. "그래도 잘하면ㅡ " 그는 자신이 없는 것을 그래도 힘있게, "그래도 잘하면, 수일 있다가 뒤쫓아 오게 될 것이오." 쩐중밍 부인의 입술이 가만히 경련하였다. 그의 안면에는 울음을 참으려는 필사의 노력이 나타나 있었다. 왕징웨이의 마음이 그와 마찬가지로 암담하였을 떄, 윈난성 주석이 말하였다. "아무튼 빨리 들어가십시다. " 왕징웨이는 곧 그의 뒤를 따라 그가 안내하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성내로 들어가서 도독부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의 바로 다른 고장의 여름철 모양으로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거침없이 불어드는 표고 (標高) 1960m 고원의 바람이 맑고, 또 시원하였으나 역시 왕징웨이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도 잠깐 뒤에 그는 불길한 생각이라도 쫓으려는듯이 머리를 한번 흔들고, 곁에 앉은 룽윈을 돌아보고 말했다. "폐를 끼치게 되어 불안스럽습니다만은, 하노이까지 비행기를 한대 주선하여 주십시오." " 그 말씀은 저우포하이 선생에게 이미 들었습니다. 언제가 좋으십니까?" "내일 바로 떠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안으로 주선해두겠습니다." 왕징웨이는 정중하게 "감사합니다" 라 사례를 하고 다시 별 말이 없었다. 동지 (同志) 중화민국 27년 12월 21일 오후 6시 ㅡ, 홍콩 빅토리아 스트리트 일각 (一角) 에 있는 남화일보사 삼층 주필실안에 린바이셩과 메이쓰핑 두 사람이 조금전에 들어온 '왕징웨이 충칭을 탈출하여 하노이에 도피' 라 적힌 로이터 충칭보도 기사를 손에들고 지금 이야기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하였든 왕 선생님께서 충칭을 탈출하신 것 만은 사실일 것이오. " 메이쓰핑은 아까부터 몇번인가 한 말을 또 되풀이하였다. "그렇다면 좋기나 하겠소, 그러나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구료." 린바이셩도 아까부터 몇번인가 한 말을 또 되풀이 하였다. "예정대로 하노이로 가셨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충칭을 탈출하신 것만은 사실이라고 믿소, 로이터 통신이 이렇게 중대한 뉴스를 확실한 근거 없이 발표할 까닭이 없소." 메이쓰핑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찌하여 아무 기별이 없으시오? 선생님부인과 저우포하이씨가 쿤밍에 계시니 선생님이 충칭을 탈출하셨다면 분명 쿤밍에 한번 가셨을 것이리다. 그러면 저우포하이씨로 부터 무슨 정보가 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린바이셩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저간에 무슨 사정이 있어, 우리에게 아직은 통지를 안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 "그러면 그런걸로 칩시다. 그러나 그 통제기구가 거의 완전한 충칭에서 선생님이 무사히 탈출하여 하노이까지 오셨으리라고는 도무지 믿을수가 없어 그러오." "아무리 믿을 수 없더라도 사실이라면 하는 수 없지 않소? 아무리 장 위원장이 감시를 엄중히 한다 하더라도, 선생님께는 선생님을 도와드릴 동지가 하나 또 있지 않소? 나는 어떻든간에 선생님께서 드디어 충칭을 탈출하시는데 성공하셨다고만 믿소. " 메이쓰핑이 두뺨을 붉혀가며까지 자기의 설 (說) 을 고집하는 것을, 린바이셩은 더이상 반대하지 않고, 잠깐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충칭을 나오신것이 사실이라 하고 나는 이번 일에는 그 배후에 위원장의 암묵적 양해가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되오." "위원장의 암묵의 양해라니?" "즉, 선생님을 장위원장이 이용하여 선생님의 화평운동을 가지고 일본의 공격을 막아놓고, 그 사이에 위원장은 군대를 재편성하고 항전체계를 다시 정비한다음, 시기를 엿보아 공세로 나아가려는 것이나ㅡ " 린바이셩이 말을 맺기전에 메이쓰핑은 " 노, 노" 라고 손조차 내저으며 " 그게 될법이나 한 말이요? 선생님께서 장 위원장에게 이용을 당하시다니...." "아니, 이용을 당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장 위원장편에서 선생님을 이용하려고 선생님의 충칭탈출을 모른체 하고 있었던것이 아닌가 그말이오. 그렇게라도 해석할수 밖에, 선생님의 충칭탈출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 글쎄ㅡ " 메이쓰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을 이윽고 보고 있다가 린바이셩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당치 않은 말이라면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하오. 입으로는 비록 항전을 부르짖으나, 속으로는 장 위원장도 화평을 희구 (希求)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오. 작년에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이 화평조정을 나서겠다 말했을 때 그는 우선 귀가 솔깃했었고, 그 뒤 금년들어 와서도 가오쭝우 (高宗武)를 도쿄에 까지 보내지 않았소?" "그것은 저우포하이씨가 주장하여 보냈다고 봐야하지 않소? " "비록 주장은 주 씨가 하였다 할지라도 그말을 들은 것으로 보아 위원장도 조건만 어지간하면 화평을 하려든다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소. 자기도 화평을 바라기는 하나 아무렇기로 이제와서 자기 입으로 그말을 차마 할 수 있겠소? 그러니까 이제까지 화평을 주장하여 오셨고, 또 일본인에게도 신용이 있으신 선생님께 정작 운동은하시게 하고 그 운동의 결과 국민들의 동향이 달라지기를 기다리어 자기 일신 (一身)의 안전도 도모하여 놓고, 중일 양국의 화평을 실행하려는 것이 아닐까 말이오 나는 이 둘중에 하나라고 믿소. " 이번에도 메이쓰핑은 " 글쎄ㅡ"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좀더 기다려봅시다 그려." 린바이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앞으로 갔다. 창밖은 곧 바다요, 바다건너 구룡반도에는 폭풍우신호소의 회색건물이 석양을 띠고 서 있었다. "아무튼 수일내로 또 무슨 좀더 확실한 정보가 있겠지."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 다른 정보가 없다. 린바이셩, 메이쓰핑이 한참 애를 태울 떄, 나흘 되는날 저녁에 표연히 남화일보사 편집국에 거짓말같이 저우포하이가 나타났다. "아! 주선생! " 린바이셩과 메이쓰핑은 각기 그의 한손씩을 잡고 곧 주필실로 이끌어 들였다. "대체 어찌된일이오? 선생님께서 충칭을 탈출하셨다는 것이 사실이오?" "사실이오, 지금 선생님께서는 하노이에 계시오. 나는 그곳에서 오는 길이오. " " 선생 부인께서도 함께 계시오? " " 부인도 계시고 쩐중밍씨의 아내도 있고." "그럼 모두 함께 오셨소?" "아니, 쩐중밍은 이틀 뒤 늦어서... 그래 충칭서는 다시 아무 지령이 없었소?" " 예추캉 (葉楚傖) 에게 그만 돌아오라고 두번이나 전보가 있었소. 그러나 일이 아직 남았다 하고 답전을 처버렀소. 그래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이리 오시겠답니까?" "아직은 미정이시오. 얼마동안 하노이에서 계시면서 정세를 좀 관망하시겠다 하십니다." "어찌 이리로 오시지 않고....." "선생님께서는 아직은 오시지 않지만 수일내로 선생님의 성명 (聲明)이 나올 것이오. 선생님의 성명, 화평통전 (和平通電)을 어떻게 대대적으로 취급할 것인가 하는것이 우리 목전의 중대한 임무이오." 린바이셩은 그의 말에 적지않은 활기를 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그것은 차차 상의하기로 하고, 우선 어디가서 축배를 듭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밤에 한잠도 자지 못할것만 같소." 두사람은 곧 동의하고, 함께 신문사를 나와 해안통 (海岸通) 을 향해 걸어갔다. 낭패 (狼狽) 예정보다 하루 늦어 21일에 란저우에서 충칭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돌아오자 즉시 왕징웨이와 쩐중밍이 충칭이 탈출한 것을 알고 사뭇 당황하여 하였다. 그는 특무공작대에 명하여 비밀히 그들의 탈출 경로를 탐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왕징웨이는 바로 자기가 란저우로 떠나던날 ㅡ, 즉 18일에 쿤밍으로 가서 그 이틑날 그의 아내와 저우포하이를 동반하여 하노이로 간 것이 판명되고, 쩐중밍은 그들보다 이틀 뒤늦어 20일에 역시 쿤밍을 경유하여 그곳에 날아 기다리고 있는 처자와 함께 하노이로 탈출하여 버린 것이 명백하여 졌다. 두번이 모두 교통부차장 펑쉐페이가 편의를보아준것이 틀림 없어, 장제스는 괘씸하기가 이를때 없었으나, 민심이 소요할 것이 두려워 아직은 아무처분도 내리지 않기로 하였다. 물론 사실을 안 항전파들은 왕징웨이를 한간 (漢奸) 이라 부르며 비난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것을 도리어 억압하려 애썼다. 그는 어떻게든지 하여 왕징웨이로 하여금 생각을 고치고 다시 충칭으로 돌아오게 하려 은근한 노력을 하였다. 그는 12월12월 26일, 국민당 기념일 석상에서도 왕징웨이의 출국이유를 고질의 심장병이 재발하여 명의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하노이로 간것으로, 결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충칭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ㅡ 아무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대한 충절을 다음과 같이 말을 극진히 하여 칭찬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부총재 왕징웨이씨의 행동이 언제든 지극히 진지하였다는 것은 주지 (周知) 의 사실입니다. 최근 수년래로 그가 구국항전을 위하여 분골쇄신, 일신을 들어 국사에 처하여 온 것은 중앙당국이 깊이 인정하는 바 로, 동시에 불초중정으로 감격하여 마지않는 바 입니다. 다만 이번에 왕징웨이씨가 우연한 사정으로 하여 쓰촨을 나갔기 떄문에 적진에 요언(搖言) 을 살포할 기회를 준 것은 유감입니다. " "왕징웨이씨와 중앙당인, 그리고 왕징웨이씨와 나는 이제까지 간난 (艱難) 를 함께 하여온 깊은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언제고, 또 무슨 일이고, 한번도 숨긴 적이 없이 서로 협의를 해 왔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무슨 의견이 있을 때면, 반드시 이를 당중앙과 토의를 하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와 서로 무릎을 맞대며 의논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러한 국가존망의 대사에 관하여 중앙당인과 또 나에게 의논하지 않았다는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애국의 지성에 불타고 국난에 나아가는 성심은 반드시 항전의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 인물일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외간에 전하는 것과 같은 소문에 대해서는, 국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소문이야 말로 일소 (一笑)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이 대체 얼마만한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 ㅡ 하고 생각할 때, 그는 저모르게 한숨을 쉬고 안타까워하기를 마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있든 왕징웨이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떄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노이에 가 있는 왕징웨이와 그 일파의 동정을 은근히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국 27년 12월 29일, 마침내 왕징웨이는 그의 소신을 중외 (中外)에 성명하고 말았다. 그 성명은 다음과 같았다. 『 지난 4월 개최되었던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발표된 중국 현재의 항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1934년 탕구정전협정 후 온갖 굴욕을 참으면서 일본과의 교섭에 응해왔던 것은, 하나는 군사행동을 피하고, 다음의 두 사업을 평화적인 법에 따라 수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업들은, 첫째는 북지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동북 4성의 현안을 합리적인 해결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요건은, 우리나라에서의 외국권익 불침해, 독립의 보장, 영토보전에 있으며, 한편 경제적으로는 우리의 지도는 호혜주의와 평등에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의 발발로 중국은 상기했던 평화적 해결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무기를 들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지난 12월 22일의 성명에서 일지(日支) 국교 조정에 관한 일본 정부의 근본 방침을 천명했다. 이 방침에서 첫 째로 강조된 것은 선린우호였다. 즉, 이 방침에 의하면, 일본은 중국에 대해 영토도, 배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본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지만, 그러나 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실행된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인이 중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하고 상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일본은 중국에 대해 조계를 반환하고, 또한 지나에 대한 치외법권 철폐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이와 관련된 선언을 엄숙하게 발표한 이상, 우리는 평화적 수단으로서 북지 각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번 사변의 과정에서 상실된 영토도 회복할 수 있고, 중국의 영토주권, 행정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회의 선언에 따라 북지 4성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조치를 취해야한다. 이 문제는 지난 수년에 걸쳐 일본정부에 의해 계속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두 번째 요점은 공동방공이다. 이는 과거 수개년을 두고 일본정부가 누차 제의하여온 바이나, 우리는 그것이 중국의 군정과 내정에의 간섭에까지 미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믿지 않아왔다. 우리는 일본과의 방공협정이 중국의 군사적, 정치적 문제에 간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해왔지만, 일본은 일지방공협정은 일독이(日獨利)방공협정과 같은 정신으로 체결되어야 한다는 매우 솔직한 언명을 한 이상, 이에 대한 의혹은 이제 철회되어도 될 것이다. 방공협정의 목적이 공산당의 국제음모를 방지하고 전복하기 위한 것인 이상, 이 이유 때문에 이 협정이 중국의 '소련'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은 이미 삼민주의를 따르기로 서약한 이상, 공산당으로서는 당조직의 선전활동을 멈추고, 그 변경정부를 폐지하는 동시에, 그 특별군사조직을 폐지하고 중화민국 정부의 법률제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삼민주의란 중국 국민의 근본주의이며, 조국을 방위하는 우리들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삼민주의에 배치되는 모든 조직이라던가 선전 따위를 탄압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요점은 경제제휴이다. 이 사안도 마찬가지로 과거 수 년전부터 일본정부로부터 자주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정치적 혼란이 미해결된 채 남아있는 한, 경제제휴와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져왔다. 일본 정부는 이제 엄숙하게 중국의 주권, 정치적 독립, 영토를 존중한다고 천명하고, 일본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나에 대한 제삼국의 권익을 제한하는 것을 요구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간의 경제적 협력을 위한 평등주의를 만드는 것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이를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그 기초 속에서 각종 구체적 조건을 제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신중한 고려속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한다. 국민정부는 앞의 세가지 요점(선린우호-공동방공-경제제휴)의 기초 위에 신속하게 평화의 회복을 위해 일본정부와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지난 11월 3일의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1월 16일의 성명에서 태도를 바꾸었음을 상기해야한다. 따라서 국민정부가 위의 세가지를 평화 토의의 기초로 한다면 협의로의 길은 열리게 될 것이다. 중국이 무력저항하는 목적은 국가의 존재와 독립을 학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미 1년 이상에 이르는 지금의 전쟁 속에서 우리나라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만약 우리가 정의에 따라 평화를 재건할 수 있다면 국가의 존속과 독립은 유지되고,이로서 무력저항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위의 세가지 요점은 평화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나아가 평화의 조건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그 조건의 안정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신중한 고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일본군의 중국 철병의 모든 과정이 빠르고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한된 일지방공협정의 존속기간 중 일본군이 주둔은, 이름 바 특정 지구의, 내몽골 부근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이 군대의 주둔은 중국의 주권과 정치적 독립,정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나, 중국은 이렇게 주둔의 제한을 둠으로서 비로서 전후의 부흥과 재건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양국의 근린관계에 비추어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선린과 우호관계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지금의 상태는 철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일본과 중국 이 함께 이에 대한 상호 책임을 규명해야한다. 일본과 중국간의 영구적 평화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교육정책을 선린주의와 상호모순되지 않게 하고, 일본 또한 중국에 대해 전통적인 멸시의 태도와 정복사상을 포기하고 대신에 친중국적 교육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동아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할 바인 것이다. 동시에 태평양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들은 국제친선과 상호의 이익증진이라는 공통된 대의를 위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각국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앞에서 언급한 제안들을 이루고 또한 이 외의 제안이 받아드려지기를 충정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 민국27년 12월 29일 왕 조 명 (汪 兆 銘) 제3처장 (第三處長)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이 그의 기관지 홍콩의 남화일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12월 30일 ㅡ , 그로서 이틀지난 1월 1일 정오 가까이, 한 사나이가 상하이 공관마로 (公館馬路) 의 넓은 길을 황포강 (黃浦江) 강변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이날 상하이 기온이 영하 2도 ㅡ, 영하2도면 이 도시로서는 무섭게 추운날이라고 할수 없으나, 그래도 도수만 가지고 따지자면 역시 단지 영하2도에 지나지 않는 추위인것을 그 사나이는 외투깃을 빳빳이 세워 두뺨과 코 아래를 감추고, 푸욱 눌러 쓴 회색 중절모 앞 챙에 이마와 눈썹을 가리고는 두손은 또 외투 주머니에 깊숙히 꽃아 무척이나 추위를 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는 남에게 자기의 얼굴을 들어 내놓고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밖에 들어난 살이라고는 도무지 코와 두눈 뿐이라 꼭 장담은 못하겠으나, 이는 35세 가량, 키가 호리호리 크고 마른데다 그 눈이 총기를 띄고 있는 것이, 모자나 외투나 구두가 다 낡은 것이기는 하였어도 결코 상스러운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얼마동안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앞만 바라보며 걸었던 것이나, 강변까지 거의 다 나와 프랑스 영사관 앞을 지날 때였다. 마침 세차게 불어드는 강바람에 모자 앞챙이 휘뜩 뒤로 제쳐지는 것에 놀라 무심코 든 눈이 그곳 길 모퉁이에서 승합차를 기다리고 서있는 두명의 중년신사를 보았을때, 그는 모르게 걸음을 딱 멈추었다. ( " 회색모자는 틀림 없는 푸시서 (傅式設)이다. 그러나 나이 제법 더 먹은 저 사람은 누구인가...? " ) 그 사나이가 이렇게 생각하며 오십은 되어보이는 검정모자 쓴 신사를 눈여겨 볼때, 그가 푸시서이라 말한 회색 모자 쓴 신사도 우연히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갑자기 당황하여 좀더 승합차를 기다려 보려 안하고 마침 옆을 지나가는 빈 택시 하나에 손을 들어 세우고, 의아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나이 먹은 신사를 팔을 이끌어 차에 태우고, 다음순간 그들은 강을 끼고 황포탄로 (黃浦灘路) 를 달려갔다. 보고있던 남자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편을 향하여 두어간통 달려가며 분주히 주위를 둘러 택시를 찾는 모양이었으나, 정작 저편에서 빈 택시가 달려 왔을 때는 도리어 그쪽은 보려고도 안하고 픽 ㅡ, 스스로를 비웃는 웃음을 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이 사나이는 장개석의 비밀경찰인 특무공작대 제3처장 딩모춘 (丁默邨) 이다. 그는 대장 천궈푸 (陳果夫) 의 밀명을 받고 대원을 인솔하고 몇달전부터 상하이로 잠입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원래가 인텔리 출신인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명에 대하여 늘 회의감을 가지고 오던 터인데, 바로 어제 남화일보에 게재된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을 읽이에 미쳐,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제스의 초토항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무공작대라는 그의 소임은 누구보다도 민심, 민정에 대하여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백성들은 일부 항전파를 제외해 놓고는 누구나 화평을 희구하고 있고, 또 그들이 화평을 희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도탄의 괴로움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이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준 순간, 그는 이제 다시 화평파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계획을 밀탐하고,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생명과 자유를 뺏기조차 하는 자신의 직업이 부끄럽고 한심스러워졌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한심스럽고 부끄러운 활동으로 말미암아, 화평파의 운동이 조금이라도 미약해지고 거기에 4억 동포가 좀더 오래 불행 속에 빠져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고도 한편으론 슬펐다. ( "이제 다시는 장제스의 인형으로 그러한 우습고 막한 소임을 하지는 않으리라...." ) 그는 황포탄로에 있는 바에서, 오늘 또 진삼(陳三) 에게 정보를 듣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것에는 이제 혐오조차 느끼고 걸어가던 중에, 문득 일즉부터 상하이에 있어 화평운동의 지하공작을 하고 있다하여 은근히 그의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여 온 부식설을 보자, 오랫동안의 습관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 보려 하였던 것이나, 그 즉시 그러한 제자신에 증오조차 느끼고 ( " 이제는 장제스와의 일체의 과거관계를 청산해 버리리라...." ) 하고 굳게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 " 관계를 끊어 버린 이상, 이제 진삼이를 만날 필요도 없다...." ) 그는 강변에 걸음을 멈추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얼마동안 강위로 왕래하는 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시 마음에 뜻한 바가 있는듯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탄력 있는 걸음걸이로,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의 조그마한 바를 찾아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한번 그안을 둘러보고, 저 편 구석 탁자에 흡사 불량청년으로 보이는 진삼이를 발견하자, 그의 탁자로 갔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 진삼이는 불평을 하는듯 손목시게를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응, 좀 생각하는 일이 있어, 차를 안타고 걸어 오느라고 그랬네, 그래 무슨 ㅡ " 하다가 뒤에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자 돌아다 보지도 않고 " 위스키 ㅡ!" 하고 명한 마음에 그 발소리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는 것을 들은 다음에, "그래, 그 뒤 무슨 정보가 있었나? " 하고 은근히 물었다. "별 정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주칭라이 (諸靑來)가 펠리스 호텔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어제밤에 곧장 가보았으나, 이미 이틀전에 어디로 인지 떠난뒤 였습니다. 주칭라이는 지금 푸시서와 왕푸옌 (汪馥炎) 두사람과 함께 잡지를 창간하려고 운동중인 모양입니다. " "왕푸옌이라면 우창 중산대학의 헌법교수였던...? " "네, 그사람이 중일화평을 꾀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증가가 있습니다." "잠시만, 그사람 나이 한 오십되었지?" "네" 딩모춘은, ( " 그럼 아까 부시서와 함께 차를 타고 간 신사가 왕푸옌일지도 모르겠군.. " )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 그밖에 다른 정보는 없는가? " 하고 물었다. 위스키가 도착했다. 딩모춘과 진삼이는 잔에 한잔 따라주고 자기는 스스로 석잔이나 마시었다. "별 정보가 없습니다. 이건 우리쪽 이야기입니다만은, 제2처 (第二處) 의 애들이 몇명 하노이로가 왕징웨이의 동정을 탐지하러 갔답니다. " "그건 알고 있는 거고..." "그러나 아직까지도 왕징웨이가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답니다. " "그것도 알고 있는 거고..." "저 제2처장이 홍콩으로 수일내에 곧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 "제2처장, 다이리가?" " 네" "흐으음......." 딩모춘은 탁자위로 쑥 내밀고 있던 상반신을 의자등에다 기대고 눈을 감으며 잠깐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듯 하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내 자네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네. " 하고 잠깐 주위를 둘러본 뒤에 상반신을 부척 진삼이에게 내밀었다. 제2처장 (第二處長) 왕징웨이의 화평통전이 남화일보를 통하여 발표되자, 홍콩안은 발칵 뒤집혔다. 그 흥분이 아직도 새로운 1월 1일 오후, 남화일보사로 두장의 비전 (秘電)이 들어왔다. 한장은 충칭정부 선전부장 예추캉이, 또 한장은 장제스의 비서 천부레이에서 온것으로 수신인은 두장 모두 린바이셩으로 되어있었다. 오직 발신인만 다를 뿐, 내용은 두장 모두 같은것으로, 저우포하이가 지금 어디 있느냐ㅡ ? 하고 묻는 힐문 (詰問) 이었다. 왕징웨이의 성명이 얼마나 충칭정부를 당황하게 놓았는지는 이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린바이셩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주 선생이 계신 곳을 내가 알 턱이 있오?" 라는 뜻으로 답전을 치고는, 곧 단장을 들고 신문사를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해안통에 있는 '아즈마야 료칸 (吾妻旅館)' 이라는 일본여관이었다. 2층, 그중 구석진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메이쓰핑은 방 한가운데 다다미위에 거북하게 앉아서 중산전서를 뒤적거리고 있었고 저우포하이는 창에다 바짝 붙혀놓은 책상앞에가 단정하게 앉아서 남화일보에 실릴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사흘전부터 이 여관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쓰핑은 호텔을 주장하였으나, 여관이 남의 이목을 더 안끌수 있다고 저우포하이가 고집하여 그들은 이곳으로 숙소를 결정한 것이다. 저우포하이는 일본 유학생으로, 일직이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일본말도 능하거니와 일본적인 생활에도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메이쓰핑은 베이징대학 출신으로 일본도 외국도 모르는 사람이다. 순수한 중국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에게는 다다미방이란 거처하기에 심히 거부함을 느꼈고, 일본음식이란 도무지 입에가 맞이 않았다. 그래도 그는 한번 그렇게 숙소를 정한 뒤 입밖에 내어서는 한번도 불평도 말하지 않았다. "무슨일이시오? 벌써 나오는 길이시오?" 린바이셩을 보자 메이쓰핑은 우선 방석부터 그에게 권하며 물었다. "벌써 나오기는 , 처음부터 안나온 사람도 있는데....." 린바이셩은 비꼬는듯 한마디 하고, 그가 내어 놓은 방석 위에 앉았다. "사에는 안나가더라도 이렇게 원고만 쓰면 그만아니오?" 저우포하이가 한손에 만년필을 잡은채 책상앞에서 물러 앉으며 말하였다. "그래 주선생은 원고라도 쓰고 계시니.... 매 선생은 대체 무얼 하고 계신거요? " 린바이셩은 웃고 다시 메이스핑에게 고개를 돌려 또 한마디 하였으나, 그는 그말에는 대답을 않고 "무슨 뉴스라도 있소? " 하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있다 마다, 기절 요절할 소식이...." 린바이셩은 주머니에서 바로 조금전에 받은 두장의 전보를 꺼내어 그들 앞에다 놓았다. "뭐? 저우포하이가 어디있느냐? 하 하 하 ....." 저우포하이는 호걸 웃음을 웃고 물었다. "그래 답전을 췄소? " "응" " 뭐라고?" "뭐라기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였지, 어떻든 주 선생이 그들에게는 괘씸하게 생각되었던걸꺼요. 다른 사람 이야기는 묻지않고 주선생 주소만 물으니..." "두분은 하도 죄가 커서 그들이 어이가 없어 모른체 하고 있나 보오" " 우리가 무슨 죄가 있소? " "중앙선전부 특파원으로서 선생님의 화평통전을 발표하고 위원장이하 항전파 공격만하니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있겠소? " 세사람은 잠깐동안 명랑하게 웃었다. 한바탕 웃고 다시 입을 연 것은 저우포하이였다. "하지만 차차 정신들을 차려야 하오. 우리들의 태도가 이만치 선명해진 이상, 쟤들이 가만 있을리가 있겠소?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운동을 방해하려 들 것이오. 물론 우리들의 신변도 위험할것이고 ㅡ " "그것은 벌써 ㅡ " 하고 린바이셩은 대수롭지 않은듯 말하였다. "우리들이 이 운동을 시작하리라 결심한 때에 이미 각오한 바가 아니오, 이제 새삼스레 말할 것이 무엇이오?" "그야 물론 각오야 하고 있지, 하지만 우리의 운동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우리 목숨이 소중한게 아니겠소? 그러니까 아무리 술이 먹고싶더라도 사호주가 (思豪酒家) 와 같은 술집에는 발을 들여놓지말라는 것이오 " "사호주가? 어떤 집이지?" "나도 아직 가본 적은 없소, 해안통 바로 근처 어디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술집이 왜?" "요 수일동안에 특무공작대가 한 7~8명이나 모여 들었다합니다." "그 정보는 어디서 들어온 것이오? " " 내가 이곳에 온뒤로 간첩 (間諜)을 매수한 것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시구료? " 린바이셩은 잠깐 못믿어운듯이 저우포하이를 바라보다가 메이쓰핑을 보고 물었다. "정말이오? " 매사평은 대답하였다. " 정말이오, 수히 다이리도 온다고 합니다" "다이리가?" 린바이셩은 다이리 라는 말에 순간 전신에 피가 끓어올르는 것을 느꼈다. "그 암살단의 두목이? " 그는 증오가 가득한 어조로 씹어 뱉듯이 말하였다. 저우포하이가 매수한 간첩의 보고는 역시 사실이었다. 제2처 특무공작대원 몇명이 홍콩에 들어와 사호주가를 중심으로 암약을 하여 오더니 1월 4일 밤에는 마침내 제2처랑 다이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그는 뒷문으로 들어서자 마주방에서 내다보는 요리사를 보고 턱으로 천정을 가리키며 "주인장 계시나? " 하고 물었다. 젊은 요리사는 처음보든 인상 좋지 않은 사나이가 뒷문으로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데, 또 그는 "해라." 라는 말투를 계속 붙였고 이에 꼴이 나서 "계신다. 대체 너는 누구야" 하였더니 "아 이놈, 말버릇 좋다! " 하고 무서운 눈으로 홀기더니, 흥 ㅡ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구석의 좁고 또 급한 층게로 발소리를 유난스럽게 쿵쿵거리며 올라갔다. "누구냐ㅡ?" 하고 불 멘소리가 물었다. "나다" 하고 문을 홱 열고 들어서자, 오십이 넘은 사호주가의 주인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눈이 금시에 수박처럼 커져서는 "아 처장님아니세요? 수염을 깎으셔서 얼른못알아 보았습니다." 하고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몇번씩 허리를 꾸벅거리며 "오실줄은 알았습니다만 이처럼 일찍 오시리라고는 생각안했습니다." 하고 그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안락의자를 권하고, 저편에 놓인 나무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맞은편에다가 놓고 또 방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얘야ㅡ" 하고 요리사를 부른마음, "오가피주 한병이랑 안주 몇가지 얼른 가져오너라. " 그렇게 명하고 손을 연신 부비며 제자리로 돌아와 "숙소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직 안정했네, 자네만 귀찮아 하지않는다면, 이방을 좀 쓰고도 싶다만은....." 하고 주머니에서 마도로스 파이프를 꺼내들었다. "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ㅡ? 누추하고 비좁은 것만 참아주신다면야 저야 그 밖에 더 좋을것이 없겠습니다. 처장님께서 여기 계셔주시면 저야 일도 편하지요. " 다이리는 그가 하는 말을 귓가로 흘홀려들으며 골통에다 불을 붙이고나서는 "그 뒤에 하노이에서는 무슨 정확한 정보가 있었는가? "하고 맞은편 벽에 걸리어 있는 서양미인의 나체화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주인은 마침 계집 하나가 운반하여 올리는 술과 안주를 식탁 위에 벌려놓고 내려가게 한 뒤에 저편 책상 서랍을 열쇠로 열고 서너장의 종이쪽을 꺼내어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다이리는 아랫입술을 삐죽이 빼물고, 한손에는 술잔을 들고 그것들을 차레로 읽었다. 첫장에는, '왕징웨이는 확실히 부인을 동반, 하노이에 있다. 빠니에가 42번자 중국인 보석상의 주선으로 시내 어느 병원에 신분을 감추고 입원중.' 둘째 종이에는 ' 왕징웨이는 하이폰교로 부터 22km 떨어진 곳에 있다.' 읽고 나자 다이리는 종이를 꼬깃꼬깃 뭉쳐 주인의 앞에 던지고 "미친 녀석들! " 하고 술을 한숨에 들이 마셨다. 주인은 자기가 꾸지람을 들은듯싶게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조심 조심 종이뭉치를 집어 한장한장 구김을 다시펴서 차곡차곡 접어서는 바로 소중한것처럼 다시 책상 서랍에다 가져다 넣고, 자물쇠를 채운뒤에 제자로 돌아왔다. '미친 녀석들! " 다이리는 다시 중얼거렸다. "왕징웨이는 한 10명 되는줄 아나? 그래 두달이 되도록 그저 그자가 숨어있는곳을 못찾아냈다고?" 다이리는 하는수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한번치고 또 술잔을 들었다. "저어ㅡ, 있는데만 알면 ㅡ " 하고 주인은 조심조심 다이리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즉시 처치해 버리나요 ?" "뭐?" 하고 다이리는 성미급한 사람처럼 우선 소리를 한번 꽥 지르고 말하였다. "그렇게나 되었으면 속이 시원하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그냥 곱게 내버려 두라는 거라네" "그냥 두면 뭘해요? " "뭘하는지 내가 아나? 그냥 두라니까 그냥 둘수 밖에........" "저어, 그럼 여기 남화일보 패들도...?" "그것두 아직은 가만 두라지만, 내 얼마 있다가 혼구녕이라도 내주고 말걸세" 그리고 다이리는 생각난듯이 물었다. "그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다 알고 있겠지? " "남화일보사로 가면 다 만날 수 있지요." "아니 누가 신문사로 가나? 사처말이지" "네, 저기 린바이셩은 지사관저앞 우드박사 옆집에 세들어있고, " "또?ㅡ" "저우포하이하고 메이쓰핑은 바로 요 위 아즈마야 여관이라는 일본여관에 묵고 있습니다." "또ㅡ?" "그밖에 별로 감시할 사람이ㅡ" "없단말이지? 있네, 또 있지." "......." "천궁보 (陳公博) 가 있지 않은가? 센츠가오 (沈次高) 가 있지 않은가? 타오시성 (陶希聖)이 있지 않은가? 대체 자네들은 뭘 하고 있는건가...? "그래도 그자들 왔단말은 못들었는데요. "누가 자네들 알라고 광고치고 다닌다던가? 모두 수일전에 이리로 들어 왔다고 나는 벌써 알고 오는 길일세." 수일동안 다이리는 사호주가 2층 주인의 방에 머물러 앉아 각처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보며, 무료한 그날그날을 술로 보냈다. 신통한 정보도 없었거니와 충칭에서 그뒤에 직접 행동을 취하라는 지령도 없었기 에 그는 도무지 못마땅하여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제3처장 딩모춘이 인텔리 출신인거에 비해, 다이리는 장제스가 그를 자기 수하에 걷어들이기전까지 한낱 시정의 파락호 (破落戶) 였던 것이다. 그날도 그는 사호주가에서 반나절을 보냈는데 하노이에서 부하 하나가 보낸 정보는, 이번에야 말로 정확하게 왕징웨이가 은거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왕징웨이가 탐다오의 호텔 더 라 카스카드 다르쟝에 있는것은 확실하다 ㅡ 탐다오의 호텔로부터 그 본점 하노이의 메트로폴리스 호텔로 침구6인분, 신량과 기타등등을 주문. ' 일찍이 하노이에 가본적이 있는 다이리는 탐다오의 더 라 카스타드 다르쟝이라는 호텔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피서객 전문의 호텔이다. 겨울에 가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이를 폐쇄하여 버린다. 왕징웨이는 이곳을 찾아 본점인 하노이의 메트로 호텔로 침구와 식량을 주문한것이 틀림없다고 다이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 " 왕징웨이가 숨어있는 곳이 판명된 이상, 정부에서는 어쩌면 날더러 곧 가서 처치하여 버리라고 할지도 모르는일이다....." )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술잔을 기울일때, 상하이에 있던 부하 하나가 주인의 안내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오 너 왔느냐, 그래, 상하이에는 별 일이 없는가? " 다이리는 그를 자기 옆자리로 불러다 앉히고, 자기가 마시려던 술잔을 물려주며 물었다. "별일 없습니다. " 부하는 대답하고 잔을 받아 한숨에 술을 마시었다. "딩모춘이 그녀석은 여전히, 상하이바닥을 해매돌고 있느냐?" "네.아 아뇨.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지요. 상하이에서 제가 떠날 때 정녕코 한배를 타는 것을 본듯한데, 뱃속을 찾아봐도 없고 내릴 때 봐도 없었단 말입니다. " "어휴 미친놈, 내가 여기 있는데 정부에서 그놈을 뭣하러 또 이리로 가라고 했겠냔 말이다. 네가 잘못본거지?" 한마디로 물리쳐버리고 다이리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듯 하더니, 은근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내가 요새 심심해 죽겠다. 너 내일 남화일보사좀 갔다 오련?" 그리고 음협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심심풀이로 어디 이놈들을 혼꾸녕이나 내볼까?" 그러한말을 하며 취하면 하는 버릇으로 팔을 걷어 올렸다. 1월 5일 정오, 남화일보사 편집국에 천궁보, 저우포하이, 타오시성, 메이쓰핑, 린바이셩등..... 화평파의 쟁쟁한 무리들이 모여 이야기가 한참이었을 때, 직원이 들어와 특무공작대 제2처장 대이리에게서 사람이 왔다고 하였다. 천궁보는 군자는 위태로운 곳에 가까이히 가지 않는법이라 하여 말렸고, 저우포하이, 메이쓰핑은 만나기는 하더라도 단독으로는 재미 적다고 했지만 린바이셩은 깔깔 웃으며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장주석의 정부부문에 있는 한도 내에서 저들과 우리는 동지가 아니요? 우리는 조금도 저들을 두려워 할 까닭이 없소." 그리곤 그는 응접실로 혼자 내려갔다. 말을 전하러 온 것은 상하이에엇서 어제 이곳으로 건너온 대원이었다. "임 선생이십니까? 다이리 선생이 좀 만나뵙고 싶다 하십니다. " 린바이셩은 웃고 대답하였다. "좋은말이오, 시간과 장소를 정하시오." "장소는 '사호주가' 입니다. 아시겠지요? 해안통에 있는... 그리고 시일은 추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았소, 그럼 기다리고 있으리다. " 린바이셩이 편집국으로 돌아가 그말을 하자, 모두들 너무 무모한 짓이라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비평에는 좀더 기울이려 하지 않고, 지금 바로 아래층에 나갔다가 받아가지고 온 서신을 뜯어보더니, 반가운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부석실에서 편지가 왔소. 원기 왕성하다고ㅡ, 이번에 왕푸옌씨와 주칭라이씨와 셋이서 잡지 심성주간 (心聲週刊) 을 발행하여 상하이 문하계에 있어서 화평의 제일성 (第一聲)을 높게 부르짖겠다고 ㅡ " 그가 편지사연을 발표하자 모두들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 하고는 기뻐하는 빛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났으나, 천궁보만은 다이리의 일이 마음에 꺼림직한지, 하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여 가지고 린바이셩에게 몇번이든 그말을 되풀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다이리에게서는 아무 다른 말이 없었다. 천궁보는 그제야 비로서 ( " 저들이..... 사호주가니 뭐니 한것이 그러면 단순히 위협이었던걸까.....?" ) 하고 마음을 놓으려 들었던 것이나 위협은 좀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신변에 절박하여 왔다. 1월 10일 밤에, 그들은 마침 달도 보름이 가까워 식후 산책을 겸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빅토리아 산을 올라기기로 말들을 하였다. 그러나 신문사에 모여 그들이 막 출발하려 할때, 직원이 한장의 종이를 들고 와 린바이셩에게 주었다. "다이리의 무리가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오늘밤의 산책은 중지하십시오. " 서두도 서명도 없는 그 기괴한 형식의 서신에는 이와 같이 써있었던 것이다. 린바이셩은 곧 직원에게 물었다. "이것을 누가 가져다 주던가?" 직원이 대답했다. "어떤 아이가 가지고 와서 임선생에게 가져다 드리라 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갔습니다." 린바이셩은 잠깐 생각하다가 탁자위에 놓인 모자를 집어들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서들 나갑시다. " 타오시성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나가다니?" 린바이셩이 말했다. "빅토리아 산으로 달구경 가잔 말이지." 저우포하이가 말하였다. "누구짓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이러한 경고가 있는 이상, 구태어 나갈 필요가 없소. " 그러나 린바이셩은 말하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편지를 써보낸 이가 바로 다이리 자신이 아닌가 하오. 실상은 우리를 해칠 생각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이러한 장난으로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뒤에 숨어 우리들을 비웃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이 되오. " 메이쓰핑이 말하였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밤에 꼭 달구경을 나가야할 만한 까닭도 없는것이니 가지말기로 합시다. " 모든사람이 그렇게 말하여 린바이셩도 더 고집하지 않았는데, 저우포하이와 메이쓰핑은 이틑날 밤 빅토리아가 어느 요리점에서 약간의 술과 반찬을 먹고서 막 그곳을 나오려 할때, 그전날과 똑같은 필적의 경고장을 소년에게서 받았다. "누가 주던? " "어떤 아이가 들고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을 물어보려니까 곧 달아나버렸습니다. " 저우포하이와 메이쓰핑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나서 한번 그 기괴한 서신을 읽어보았다. "대립의 무리가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꼭 자동차를 타시고 큰길로 돌아가십시오. " 만약 린바이셩의 추측이 가당치 않은 것이라 하면, 대체 누가 이처럼 자기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인지, 또 그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다이리 무리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는것인지 ㅡ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의혹은 의혹대로 두고, 그들은 무명의 이름으로 경고하여주는대로 그곳에서 여관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았으나, 즉시 소년에게 시켜 차를 부르라 하여 큰거리로만 돌아서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이야기를 그들은 이틑날 린바이셩을 보고 하였으나, 그는 역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려 마지 않았다. "나는 역시 그놈들이 우리를 놀릴려고 그러는줄만 믿소, 공공연히 종이쪽에 몇줄 긁적거려 보낸걸 그대로 믿고 불안해서, 그냥 갈것도 저리 돌아서 가는 꼴을 숨어서 보고는, 배들을 움켜 쥐고 웃으려고 그러는것이 틀리지 않소? 참말이지, 공연히겁을 낼게 없습니다. "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마냥 웃으며 말할수 없게 하는 일이 바로 또 그 이틑날 뒤에 생기자 그는 비로소 그 경고장이 확실히 근거가 있는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의 홍콩의 인심은 사뭇 흉흉한바가 있어 화평운동의 기치를 선명히 하고 있는 남화일보사에 대하여 장제스가 파견한 특무공작대는 이미 선전을 포고하였다고, "곧 남화일보사를 불질러 버릴 것이다 " "홍콩에 있는 화평파들은 앞으로 사흘안에 모조리 암살을 당하고 말것이다" 혹은 " 화평파들을 도아 남화일보의 일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죄는 마찬가지다. 그 신변이 극히 위험하다. " 와 같은 유언비어가 빈번하게 돌아다녔고 그중에서도 맨나중 풍설은 사실로 나타나 남화일보사에서 식자 (植字) 와 문선을 맡아보는 직공 몇이 회사에서 돌아가는 길에 분명히 다이리의 부하라 추정이 되는 무리들에게 곤봉으로 난타를 당하여 중상을 입은 일이 있은 뒤로는 어쩌면 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화평사를 모조리 암살한다는 것도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시민들은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절때로 귀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린바이셩은 흥 ! 하고 코웃음을 치고난 뒤에 소년을 향하여 물었다. "너 이편지를 누구에게 부탁받았니?" 소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갖다 두라니까 가지고 왔지. " "그러니까 어떤사람이 갖다 두랬느냐 그말이야. " "깜깜해서 누가 아나요? 더군다나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외투깃을 바짝 치켜새세워 나는 코밖에 안보였어요." "그래, 처음보는사람이야?" " 글쎄 모르는 사람이래두...." "대체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니?" "바로 옆골목에서 ㅡ , 그 골목이 펍 어둡죠?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사람이 ㅡ " 하고 이제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저우포하이가 나서서 물었다. '얼굴은 어두워서 그럼 못봤다 하더라도 키가 큰가 적은가정도는 봤으니 알겠지?" "네, 키는 큽니다요" "키는 크다? 그래, 뚱뚱한 사람이던 마른사람이던?" "말랐는진 몰라두 뚱뚱하진 않어요" 그리고 소년은 도망갈 기회라도 엿보드는듯 싶게 눈치만 보며 "인제 다 이야기했수 " 하고는 갑자기 몸을 삐쳐 방에서 뛰어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곁에 서있던 직원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왜그래요? 내가 뭐 죄라도 졌어요? 왜이러는거에요?" 소년은 직원에게 꽉 붓ㅌ잡힌 덜미를 뿌리치려 애쓰며 거의 울보가 되어 소리치는 것을 린바이셩이 나서서 " 너 한마디만 더 이야기를 하면 집에가게 해주지,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너를 주던?" 소년은 대답하였다. "이걸 가지구 신문사러 들어가서 거기있는 사람들에게 주라고 ㅡ, 그리고는 뭣이라 물어보든 암말두 말고 곧 도망을 해나오라고 ㅡ 뭐 나쁜일 같지도 않구 또 돈을 벌려고 심부름을 했지 정말이지 난 아무것도 몰라요. " 소년이 덜미 잡힌것을 또 뿌리치려고 애쓰는것을 보고 린바이셩은 "그만 놔주어라" 하고 직원에게 이른 다음에 "나도 돈을 주마" 하고 은전 한잎을 꺼내주니 소년은 받기는 하면서도 " 그사람은 두푼을 주는데..." 하고 말하여 그는 웃으며 다시 한푼을 꺼내 주었다. 소년이 호주머니에 은전 네잎을 짤랑거리며 뛰어나간뒤에 잠깐 침묵이 있다가 저우포하이가 린바이셩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다이리의 짓이라고 주장하시겠죠?" 린바이셩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럼 누구짓이란 말씀이요? 많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돈을 써가며 누가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고 나서겠단 말이요? 다이리놈이 공연히 심심하니까 그러는게지. " 그러나 저우포하이는 다시 말하였다. "내 마음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해서든 내 추측이 맞나 안맞나 알아보겠소? 나는 그사람이 꼭 우리편인것만 같소. 따라서 그가 보내는 경고장은 우리가 그의 충고를 따라야만 옳은줄로 믿소. " 린바이셩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충고를 쫓고 안쫓고... 오늘밤은 여기서 꼬박 세우게 될 모양이니 고집을 세우고 싶어도 오늘은 못하겠구려. " 그리고 세 사람은 공장으로 들어가 문성공을 모아서 활자를 고르기에 바빠 그 경고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질 수도 없었는데, 자정이 넘어 지사관저로 들어가는 어두운 옆 골목에서 한사나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지사관저 근처면 바로 린바이셩이 사처가 있는 동네이다,. 세사람은 기약하지 않고 4~5시간 전에 받았던 그 경고장을 생각하고 그것과 이 살인사이에 필연코 무슨 관련이 있는듯만 생각이 들었다. 같이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있던 젊은 탐방기자를 곧 검찰청으로 보내 보았더니 50분뒤에 돌아와 하는 말이 시체는 지사관저 근처라기보다는 바로 린바이셩의 집 옆집 우드 박사의 저택 돌담 옆에서 발견된 것으로 몸에 3방 탄환을 맞았는데 후두부를 맞힌것이 치명상이 되었다하는데 그것보다 꼭 생각을 하여 보여야 할것은 피해자의 연령과 몸체와 그 보다도 용모가 바로 린바이셩과 비슷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에는 아무리 린바이셩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 치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 저녁에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경고장은 결코 아무리의 장난도 아니었던 것으로, 그 불운한 사나이는 모든것이 너무나 린바이셩과 같았기 때문에 다이리의 무리에게 잘못 죽임을 당한것이 분명하다. 세사람은 잠깐 말없이 있다가 린바이셩이 입을 열었다. "경고장에 대해서는 나의 이제까지의 고집을 버리기로 했소. 그러나 다이리가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히 사실이라 알았고 또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데 우리에게 경고장을 보내주는 인물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아는 도리가 없구료. 대체 누가 그들의 음모를 그렇게 신속하게 또 그렇게 정확하게 알아가지고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인지.... 참 이상한 일이요 . " 메이쓰핑이 답했다. "아마 우리와 우리의 운동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 린바이셩이 다시 말하였다. "물론 그 호의야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다이리의 계획을 그처럼 잘 알고 있느냐 ㅡ 그것이 의문이란 말이오. " 메이쓰핑이 그말에는 대답을 못하고 있을때, 저우포하이가 말했다. "가령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상상하여 볼수가 있지 않소? 즉, 다이리의 무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은근히 호의를 가지고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ㅡ " 린바이셩은 갑자기 저우포하이를 돌아보고 물었다. "참 아까도 마음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소? 주선생. 그게 누구란 말씀이오?" 그러나 저우포하이는 역시 언명하기를 피하고 말하였다. "십중팔구는 내 생각이 맞을듯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추측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추측이라는 것이 무슨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이를테면 나의 육감이라고나 할까...? 증거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 메이쓰핑이 말했다. "그것은 물론 천천히 알아도 그만이지만 어떻게든 이제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정녕한 사실인 이상 우리는 한층 더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 린바이셩이 말했다. "호신용으로 무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저우포하이가 말했다. "밝거든 홍콩정청으로 가서 자세하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검찰청에다가 말을 해서 권총을 한자루씩 얻어달라고 그럽시다. " 두사람은 즉시 그말에 찬동을 하였으나 저우포하이가 다시 " 아무튼 그일은 그일이고 지금은 조간 발행이 당장 급하니...." 하고 공장쪽으로 발길을 옮기려 할때 메이쓰핑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였다. "나는 하노이가 걱정이 되오. " " 하노이?" 저우포하이와 린바이셩은 기약하지 않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왕선생?" 메이쓰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들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을 때 하노이에 계신 왕선생의 신변에 위험이 절박하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을 안할수가 없지 않소? " 두사람은 침퉁한 표정으로 잠시 얼굴들만 마주 바라보았다. 조금있다가 메이쓰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왕 선생에게 곧 말씀을 드리기로 합시다. 한군데 오래 계신것이 좋지 않으시니 호텔에서는 그만 나오셔서 어디 좀더 은밀하고 안전한곳에 숨으시도록......" 저우포하이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린바이셩은 침퉁한 어조로 "그럽시다. 곧 그말을 올리기로 합시다. " 하고 말하였다. 회유 (懷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와 87km 떨어진 탐다오에 있는 호텔 더 라 카스타드 다르쟝 2층의 방에서 왕징웨이는 부인 처비쥔과 함께 일체 외출을 중지하고 표면으로는 무사평온한듯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가장 다사 (多事) 하고 격렬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쩐중밍 부부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통로 옆 의 맞은편 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징웨이처럼 언제든 자기방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홍콩과 상하이등지에 있는 동지들과의 연락이며 충칭으로부터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는 빈번하게 하노이로도 들어갔다가 하이퐁으로도 나갔다. 그래 그는 하노이에 있는 매트로 호텔 3층에 방하나를 빌려놓고 하노이 - 탐다오 간을 왕래했던 것이다. 충칭에서의 정보에 의하면 장제스는 처음에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대한 과거의 공적과 충절을 칭찬하여 그의 뜻을 돌리게 하려 했던 것이나, 드디어 그의 화평통전을 받게 되자 장제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왕징웨이와 연연락을 할 가능성이 있는 요인들의 신변에 경계망을 치고 또 왕징웨이와 내통할 염려가 있는 군벌에 대해서는 탄압과 회유의 변통자재 (變通自在)한 방법으로 그들이 왕징웨이와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막기로 방침을 세운 모양이라고 한다. 충칭으로의 정보가 분명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자세히는 아는 도리가 없었으나 미루어 생각컨대, 장제스는 우선 각 장군 에 대해 왕징웨이문제를 제시하고 제군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ㅡ 하고 의견을 구하는 한편으로 자기 직계의 군사와 특무기구를 잠입시켜 그 압력을 차츰차츰 늘려 온전히 자신과 국민정부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구하려 한 모양이다. 이리하여 각 장군들은 더러 내심으로는 왕징웨이의 화평제의에 찬의를 표하면서도, 역시 함부로 그것을 표명하지 못하고 도리어 장제스 이하 항전파들에게 혐의를 살것이 두려워 항전파와 공산당의 무리들이 각지에서 띄운 왕징웨이 반대 (汪兆銘反對), 항전계속(抗戰繼續)의 통전(通電)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고 일제히 서명을 하여 장제스를 지지하기로 맹세지은 모양이다. 이리하여 대세는 결정이 되고 말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왕징웨이에게 호응하여 일어나려던 모든 장군들은 그 행동의 자유를 잃고 말았다. 윈난성 주석 룽윈 같은이도 왕징웨이의 화평구국운동이 하루빨리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있기는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나 하는수 없이 남들 모양으로 항전계속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장제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광서파 (廣西派) 를 엄중하게 경게하였다. 광서파는 왕징웨이와 원래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나 오랫동안 장제스에게 대하여 완연하게 일개의 적을 이루고 있었 까닭이다. 그래, 장제스는 광서파의 두목 리쭝런 (李宗仁)과 바이충시가 서로 긴밀한 연락이 있을 것을 두려워 분리책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지린에 있는 바이충시의 진영에 대하여 갑자기 물질적 원조를 더하고 다시 충칭으로 부터 자기 직계의 참모단을 파견하여 그곳에 배치시키는 등의 방법을 취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왕징웨이에게 여비와 비행기표를 자기사람에게 주어 멀리 하노이까지 찾아가게 했다. 물론 왕징웨이는 그것을 단번에 거절하여 버렸다. 그래도 장제스는 용이하게 단념하지 않고 두번 세번 거듭 보내고 네번째에는 자신의 고굉 (股肱) 인 중앙헌병사령 구정룬 (谷正倫)을 시켜 하노이로 파견하였다. 왕징웨이는 호텔 자기방에서 그와 만났다. 인사가 끝난뒤에 구정룬은 곧 장제스의 뜻을 전하여 "주석께서는 왕선생이 즉시 운동을 포기하시고 유럽으로 외유하실것을 희망하고 계십니다. " "......." 왕징웨이가 잠깐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말이 없을때, 구정룬은 다시 입을 열어 "바른대로 말씀드리자면 희망이 아니라 명령이십니다. " 하고 사뭇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 왕징웨이는 그대로 그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구정룬은 다시 어조를 높히어 "왕선생께서 주석의 명령에 복종하시지 않는 때에는 정부는 중대한 결의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여 둡니다." 하고 이번에는 거의 노골적인 위협을 했다. 왕징웨이는 비로소 입을 열어 조 용히 말하였다. "내가 충칭을 떠나온 것은 그러지 않고서는 통전을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위급존망지추 (危急存亡之秋)를 당하여 충칭을 떠나는 것도 사뭇 마음이 괴로운 노릇이었다. 하물며 나라를 온전히 떠나 외유라니 무슨 말인가?" 왕징웨이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들리는바에 의하면 국민정부는 국제조정촉진 (國際調停促進)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이것은 나로서도 반대하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제조정과 직접 교섭을 동시에 병행하려는 것이라면 나도 재야의 몸이기는 하나 측면으로부터 협력원조를 아끼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닌것이다. " 왕징웨이는 다시 말을 끊어 그가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ㅡ 반응을 본다음 "가서 나의 뜻을 부디 주석께 전달해주시게." 하고 그를 홀까지 바래다 주었다. 구정룬이 돌아간 뒤 그는 홀로 방안에 앉아 앞으로 자기가 취할 에정행동에 대하여 검토를 거듭하고 있을때, 어제 하노이로 들어갔다 온 쩐중밍과 천비쥔이 한차를 타고 돌아왔다. "충칭에서 또 사람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오는 길입니다. " 하고 쩐중밍은 좀 황당한 어조로 "아직 안온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왕징웨이는 호쾌하게 웃고 대답했다. "벌써 다녀갔네." "네? 벌써요? 대체 이번에는 누가 왔었습니까?" "구정룬." "구정룬이요? 구정강 (谷正綱) 의 형되는 사람말씀입니까?" "그렇다네. " "아우만 못한 형같으니 ㅡ 정강은 그처럼 우리 운동을 돕고 있건만...... 그래 또 외유랍니까?" "그렇지, 그러나 이번은 아마 일종의 최후통첩 같네 . 내가 듣지 않으면 중대한 결의가 있을거라더군. " 왕징웨이는 잠깐 고개를 들어 장식용 선반 위에 걸려있는 손중산선생의 초상을 우러러 보다가 "곧 장소를 옮겨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네" "장소를요?" 쩐중밍은 한마디 더해서 " 그게 옳습니다. 홍콩서도 벌써 여러차례나 권해왔거니와 도무지 선생님께서 저의 말을 들으시지 않으시는데 다이리가 무리라도 보내 무슨 불손한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라서요. " "제가 곧 얻어보겠습니다." 하고, 조금전에 벗어 놓았을 뿐인 모자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런것은 장 (張) 에게 맡겨도 좋지 않을까?" "역시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 그리고 그는 자기방으로 잠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와 자동차를 몰아 하노이 방면으로 향하여 사라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 왕징웨이 일행은 탐다오를 떠나 하노이 시내로 들어갔다. 새로 얻은 집은 코론가 27번지 ㅡ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삼층 건물과 역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원에 사면에 1미터 70센치 가량의 높이 철책이 둘러쌓여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언제까지든 안전한 곳은 아니어서 옮긴지 일주일이 넘지 못해 집 근처에 수상한 인물이 배회하고 있는 것을 쩐중밍은 알았다. 그는 자기가 출입할 때마다 자기의 뒤를 은근히 미행하는 특무공작대원이 있는 것을 깨달았으나 일일히 그러한 것에 신경을 써가지지고는 아무일도 못할것이라 생각하고 길가의 개새끼들보다 더 무관심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 원문에도 '개색기' 라고 표기되어있음. ) 그러나 며칠 안되어 그는 충칭으로부터 놀랍고도 슬픈 정보를 받았다. 교통부차장 펑쉐페이가 총살을 당한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쩐중밍과 왕징웨이는 마주 앉아 얼마동안 말이 없었다. 물론 총살을 당한것 같다고 하였지, 정녕 총살을 당했다고는 써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자신들의 충칭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고, 그가 장제스의 손에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아무리 싫어도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 "그의 병든 어머님은 지금 어찌 되었을꼬....." ) 그 늙고 병든 어머니 하나로 하여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감히 자신을 따라 충칭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펑쉐페이가 그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무참히 죽임을 당했을때 과연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ㅡ 하고 생각해 보니 왕징웨이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 싶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일찍이 자기가 충칭을 탈출하던 날 펑쉐페이가 쓰라고 준 검은 안경을 꺼냈다. 그 안경은 그가 바로 왕징웨이의 안전을 위해 준비하였던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왕징웨이가 무사하기를 비느라 그는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희생(犧牲) 며칠 지나 홍콩에 있는 저우포하이에게서 소식이 있었다. 남화일보사를 거점으로 하고 자신들의 화평구국운동의 전개에 대하여 소상한 말이 있은 뒤 다이리가 그 수하들을 하노이로 향하여 더 보낸 형적이 있고 자기도 수일내로 떠나려는 눈치가 보이니 될 수 있으면 집을 또 옮기고 사람을 사서 경계를 더 엄중히 하라는 부탁이 있었다. 쩐중밍은 자기자신은 그다지 특무공작대에 대해 겁을 먹고 있지는 않았으나, 왕징웨이의 신변을 염려하여 그 정보를 보고 다시 집을 옮기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옮기고 또 옮기더라도 저들의 눈을 완전히 피할수는 없는 일이라 여겨 오히려 한곳에 있는 것이 나을듯 싶다고 왕징웨이는 그 의견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쩐중밍은 더 권해 볼것을 난념하고 4~5명의 현지인들을 사들여 집 안밖의 경계를 엄중히 서게 했다. 홍콩에서는 다시 정보가 있었다. 그것은 쩐중밍이나 왕징웨이에게 있어 참으로 의외이면서 또 유쾌한 소식이었다. 즉 특무공작대 제3처장 딩모춘이 장제스와 완전히 절연을 선언하고 화평파의 진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저우포하이는 다이리의 음모를 폭로하는 석장의 경고문을 받았을떄 그것을 전하러 왔다 붙잡힌 소년의 입에서 편지를 준 사나이가 키가 크고 말랐다는 말만 듣고도 막연하게나 혹시 그것이 딩모춘이 아닐까 ㅡ 하고 생각이 들었었다. 그것은 그때 보면 너무나 엉뚱한 상상인듯도 싶었으나 그는 자기가 사용하는 간첩의 입에서 제3처장이 홍콩에 나타났는데 제2처장 다이리와 그 부하 대원에게 는 일체 연락이 안된다는 말을 그 전에 들었었고, 또 그처럼 다이리의 무리들의 음모를 신속히 또 정확히 알아낸다는 것은 외부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랴. 그러고 보니 딩모춘이 인텔리 출신으로서 항상 자기가 받고 있는 사명에 대해 회의적인 까닭에 부내에서 은근히 비난을 받고 있다던 소문도 기억속에 살아나 저우포하이는 그것이 혹시 딩모춘의 짓이 아닐까? ㅡ 추측을 했던 것이다. 그는 간첩에게 명하여 딩모춘이 숨어있는 처소를 발견하게 하고 다음에 그의 행동을 감시하게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의 간첩은 딩모춘이 8번째의 경고장을 길가의 소년에게 부탁하는 현장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틑날 저우포하이는 간첩이 알려준데로 중국인 마을로 딩모춘을 찾으러 갔다. 딩모춘은 물론 구태어 화평파들에게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 하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 장제스의 괴뢰로 그들의 운동을 방해해온 몸이 이제 새삼스래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 전날 잘못을 사죄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우포하이에게 그 정체가 발각된 이제 그는 이전처럼 본색을 감추려하지 않고 그와 함꼐 남화일보사로 가서 천궁보, 메이쓰핑, 린바이셩과 만났다. 그는 자기가 현재 홍콩으로 데리고 오기는 진삼이라는 부하 하나이지만, 상하이에 남겨두고 온 수십명의 대원 이제는 이미 장제스의 사람이 아닌 실로 '왕선생' 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리들이라는 것을 밝혀 모든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실례의 말씀이오만은 ㅡ " 하고 천궁보가 그에게 물었다. "이처럼 장제스를 버리고 우리와 일을 함께 하고자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소? " 딩모춘은 약간 얼굴을 붉히고 잠깐 주저하다가 대답하였다. " 남화일보에 발표된 왕 선생의 화평통전을 읽고서 입니다. " 그말에 일동은 선전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지 새삼스레 느꼈던 것이다...... 그로서 다시 이틀 지나 저우포하이에게서 다이리가 드디어 홍콩을 떠나 하노이로 향하였다고 한층 경계를 엄중히 할것과 딩모춘을 곧 보내기로 했으니 그리 알리는 소식이 왔다. 그는 그날로 왕징웨이를 어디 좀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긴박한 시기에 적당한 처소가 발견될리 없다. "천천히 구해보게나. " 하고 왕징웨이는 말하였으나 쩐중밍은 이제까지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오늘안으로 그를 어디 안전한곳으로 옮겨 가게 하지 않으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갑자기 속으로 생각한 바가 있어 분주히 방으로 뛰어나가 곧 자동차를 몰아 일본총영사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나본 사람은 도쿄 어느 신문사의 하노이특파원 두명과 시내에서 면포상을 경영하며 은근히 왕징웨이 일파의 화평운동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기시모토 (岸本) 씨 그리고 또 두명의 일본인이었다. 이야기는 한시간 10분이나 계속되었다. 오후 8시 15분, 쩐중밍은 지극히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차를 몰아 코론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왕징웨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는 의자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고 "선생님, 오늘만은 그저 모든일을 제가 하자는대로 하셔야만 합니다. " 하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왕징웨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의 이상하게도 흥분된 모양을 얼마동안 의아스럽게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인가? " 쩐중밍은 그래도 다시한번 되풀이 했다. "무슨 말이든 꼭 제가 하자고 하는대로만 하셔야 합니다. " 왕징웨이는 그의 태도에 어딘지 알수없는 결사적 기백조차 느껴지는 것에 놀라면서 "그래 알겠네, 말해보게" 라고 말했다. 그러나 쩐중밍은 그말에 대해 "감사합니다. " 하고 사례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뿐으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중요서류를 손가방에 모조리 넣은 다음에 "곧 외출하실 준비를 하십시오 " 하고 거의 명령적으로 말하였다. 왕징웨이는 다시 한번 그의 열을 띤 눈을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8시 30분, 검은 안경을 쓴 왕징웨이와 쩐중밍은 현지인 호위 두사람과 함께 자동차로 하노이 교외 태호산 (太湖山) 산책도로로 향했다. 금방 비가 쏟아질듯 잔뜩 찌푸린 밤이었다. 쩐중밍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왕징웨이도 물으려 하지 않았다. 두명의 호위도, 운전수도 말이 있을 턱 없이 완전한 침묵을 그안에 실고 차차 야자나무, 벵골보리수, 보리수 나무가 심어진 길을 어둠을 뚫고 달려갔다. 교외로 나서며 쩐중밍은 고개를 돌려 뒷창으로 어둠속을 내다 보았다. 300미터 뒤로 한대의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두개의 괴물눈처럼 번뜩이며 쫓아오고 있었다. 쩐중밍의 입가에 처창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차가 태호에 이르자 저편으로에서 한대의 자동차가 역시 어둠을 뚫고 나타나며 차안에서 불빛이 세번 켜지고 세번 꺼졌다. 쩐중밍이 운전수에게 한마디 하자 차는 서고 저쪽차가 서자 마주 바라보며 오던차도 약 50미터 간격을 두고 섰다. 그리고 두 자동차에서 탔던이들이 모두 나란히 서로 접근해 갔다. 모든일은 어둠 속에 말이없이 거행되었다. 일분 30초 뒤에 사람들은 다시 각자 차에 오르고, 저 편에서 오며 불빛 신호를 하던 자동차가 먼저 움직여 그대로 하노이 시내를 향해 달려갔다. 왕징웨이의 차를 추적하여 와서 그곳에 잠시 멈춰섰던 수상한 자동차 옆을 지날 때 그차의 끄지 않은 헤드라이트에 차안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이 일순간 환하게 떠올랐다. 면포상 기시모토씨만 보이지않고 나머지는 오늘 저녁때 쩐중밍이 일본총영사관에서 만난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수상한 자동차의 수상한 사나이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다음순간 150미터 앞에 서있던 왕징웨이의 자동차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자 그들도 곧 다시 추적을 계속하여 갔다. 두차는 서로 앞뒤로 호숫가 한바퀴를 돌았다. 두차의 간격이 50미터.. 10미터... 20미터... 자꾸 다가갔다. 호수를 한바퀴 돌고 났을 때는 그 거리가 실로 70미터 에 불과하였다. 헤드라이트가 앞차를 어둠속에 뚜렷이 그려내는 한순간 ㅡ , 두명의 호위사이에 끼어 뒷자석 한가운데 앉아있던 검은안경을 쓴 왕징웨이의 놀라고 겁먹은 얼굴이 홀깃 뒤를 돌아다 보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어 운전수에게 무슨 말이 있는듯 싶더니 갑자기 앞차는 속력을 높이어 질풍과 같이 시내를 향해 달려갔다. 뒤를 쫓는 차도 좀더 속력을 내어서 갔다. 마침내 코론가 27번지 앞에 이르러서는 왕징웨이의 차는 섰고 뒷차가 속력을 늦추었을때 두 호위에게 좌우로 부축을 하게 하여 빠르게 차에서 내린 왕징웨이는 분주히 문을 열고 들어서서 현관안으로 사라졌다. 그뒤로 쩐중밍이 서류 든 손가방을 옆에 꼭 끼고 역시 좀 당황한 걸음걸이로 쫓아 들어갔다. 이때 수상한 사나이들을 태운 자동차는 저택앞을 지나 30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사나이가 모두 다섯명으로, 언뜻 보기에도 두목격인 사나이는 바로 얼마전까지도 홍콩 해안통 사호주가의 2층에 묵고 있던 다이리가 분명하였다. 다이리가 대원들에게 몇마디 말을 이르자 그들은 곧 어둠속에 흩어졌다. 다이리는 잠깐 주위를 살핀뒤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가만한 헛기침이 들렸다.다이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별 이상없었나? " "없었습니다. 다만 왕징웨이가 나간후 조금있다 천비쥔이 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어디로 데리고 가든? " "폴 베엘가 시립대극장이요. " "극장?" 다이리는 흥! 하고 코웃음치고 말했다. "새벽 3시에 결행한다!" 그리고 그는 옆골목을 돌아 왕징웨이의 저택 뒤로 갔다. 어둠속에서 다시 가만한 헛기침이 들렸다. 다이리는 또한번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지금, 왕징웨이의 방에 불이 켜졌습니다. " 다이리는 커텐을 내린 삼층의 서쪽방을 쳐다보고 눈을 다시 동쪽방으로 돌렸다. 그방에는 쩐중밍 부부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다. "새벽 3시에 결행이다!" 다이리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좀 급한 걸음걸이로 자동차를 세워두었던 곳까지 돌아와 차안으로 들어가갔고 차는 그대로 어디인지 전속력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보다 조금전, 태호산 호숫가에서 어둠속에 자동차를 바꾸어타고 4명의 일본인과 함께 다이리의 눈을 피해 매트로 호텔로 들어간 왕징웨이는 334호실에서 그보다 조금전에 그곳에 와있던 부인과 경호원과 함께 모였다. "대체 어떻게 된일이오? " 왕징웨이는 부인 천비쥔에게 물었다. "증 선생 단독의 게획입니다. 증 선생은 다이리가 하노이에 잠입하였다고 기어코 오늘밤으로 코론가에서 옮기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 경호원이 말했다. "만약 오늘밤이 위험하다면 증군도 그곳에 있으면 위험한것 아닌가? " "그래도 증선생은 자기마저 빠져나오려 들면 선생님이 안계신것이 들통날지도 모른다고 해 그냥 있겠다고 했습니다. " "그럼 날 대신하여 코론가로 돌아간 사람은 누군가? " "기시모토라는 일본인입니다." "그사람의 몸에 위해가 있으면 어찌하려고?" "그사람은 잠깐 있다가 그곳을 나와 자기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 왕징웨이는 더 묻기를 그치고 안락의자로 자리를 옮겨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두말말고 자기 하자는대로만 하라고 다른말 없이 그렇게 하자고만 하던 쩐중밍의 한껏 흥분된 얼굴이 망막 위에 떠올랐다. ( " 과연 무슨 일이 있으려나?......") 생각을 하려니까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길한 예감이 떠오른다. ( " 다이리 무리는 오늘밤에 정말 나를 습격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증군의 신변도 위험해지는것은 당연한것인데....." ) 사랑하는 동지를 위하여 불안은 갈수록 더해졌지만 당장은 아무런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가만히 눈을 뜨고 옆에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여 가지고 앉아있는 딸을 보더니 조용히 말하였다. "남화일보를 가져오라고 해라. " 신문이 오자 그는 안락의자 위에 몸을 비스듬이 하여 우선 사설을 읽어보았다. 손중산선생의 대아세아주의를 들어 중국은 일본과 손을 맞잡고 신동아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논문은 분명히 저우포하이의 손으로 써진듯 싶었다. 자기나자기와 마찬가지로 화평구국의 대신념에 불타고 있는 동지의 글은 그의 마음에 조금전까지 깃들었던 불안을 잊게 해주었다. ( " 나도 이제 나서야.....가오쭝우가 도쿄에서 돌아오는 대로 그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도 가까운 시기에 도쿄를 한번 다녀와야만.... " ) 왕징웨이는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얼마뒤에 부인과 딸이 옆방으로 물러가고 자기도 침실로 들어갔을 떄, 그는 역시 코론가에 남아있는 쩐중밍 때문에 불안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날밤이 미쳐 새기저느, 오전 3시에 코론가 27번지 저택 뒷길에 다이리가 지휘하는 특무공작대원 5명이 나타나 철책을 소리없이 뛰어넘었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주위의 동정을 살펴 보았으나 식구들은 든잠이 아직도 깊은 모양이었다. 다이리가 손짓을 하자 그들은 곧 주방의 뒷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물론 굳게 안으로 잠겨 있다고 다이리가 신호를 하자 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날이 시퍼런 한자루의 도끼였다. 타ㅡ악 타ㅡ악 ! 쥐죽은듯한 주위의 적막을 깨트리고, 나무쪽 문위에 도끼날이 두번 부딪히자, 그들의 앞에는 다시 막히는 것이 없었다. 다이리가 권총을 들고 앞장을 서서 주방으로 뛰어들자 수하 다섯명의 부하들은 각기 권총과 곤봉을 들고 뒤를 따랐다. 문이 깨지는 소리와 다음에 들리는 여러무리의 발소리에 놀래어 아랫층 구석방에서 자던 호위 3명이 자잠옷바람으로 뛰어나왔으나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곤봉으로 맞아 그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들은 그대로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다시 3층으로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올라갔다. 3층으로 올라가자, 다이리는 두명의 부하와 함께 왕징웨이의 방으로, 나머지 두명은 쩐중밍의 방으로 잠긴 문을 깨부수고 뛰어 들어갔다. 뛰어들며 다이리는 침대가 놓여 있는 방향을 향하여 우선 한발 쏘았던 것이나 다음순간 그는 그것이 한개의 빈방이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내가 속았구나! " 한마디 중얼거렸을떄 쩐중밍의 방에서 여자의 지르는 비명이 들리며 십 여발의 총소리가 뒤이어 방안에 울려퍼졌다. 어둠속에 부딛딪히는 소리 무엇이 방바닥에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중에 부하 두명은 쩐중밍의 방에서 다시 뛰어나왔다. "쩐중밍 가족은 있던? " "네 분명히 해치웠습니다. 왕은?" "벌써 어디로 피하고 없더라. " 다이리는 그대로 다시 앞을 앞장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왕징웨이가 이 변을 알게 된 것은 그밤도 다 밝은 새벽 6시였다. 쩐중밍은 복부에 3방 발꿈치에 한방을 맞았고 그 부인도 대퇴부에 총상을 입어 함께 시립병원에 수용이 되어있었다. 물론 부인은 경상이었다. 그러나 쩐중밍은 도저히 생명을 건질 도리가 없는 중상이었다. 그래도 지극한 고통속에도 명료한 의식은 왕징웨이에게 자신의 재난을 알릴것을 금하였다. 흉한에게 곤봉을 맞은 한명 호위의 급보에 의해 시각을 지체 않고 달려온 경관들의 손에 4명의 범인을 잡았다고 하지만 분명히 그들을 지휘하였으리라 믿는 다이리는 용하게 자취를 감춘 모양이었다. 섯불리 왕징웨이에게 알려 혹시나 그가 병원으로 찾아오는 그 기회를 노려 다이리가 다시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 까닭이다. 까닭에 왕징웨이가 사랑하는 동지의 조난을 알게 된것은 오전 여섯시 ㅡ , 간밤에 자기를 자동차에 태워 호텔까지 바래다준 사람중의 한명인 모리 (森) 라는 도쿄 어느 신문사의 하노이특파원으로의 전화로 알게 된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곧 부인과 함께 자동차를 달려 시립병원을 찾아갔다. 그들이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급보를 받고 달려온 기시모토씨 이하 3명의 일본인의 표정으로 이미 희망은 끊어지고 만것을 짐작하였다. 쩐중밍은 그 괴로운 중에도 자리위에 상반신을 일으켜 자기가 맡아 가지고 있던 5만 2천 피아스터의 소절수 (小切手) 에다 서명을 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침통한 얼굴로 병상 옆에 다가서자 그는 힘없이 펜을 자리 위에 떨어트리고 바로 누으며 이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 눈을 들어 왕징웨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 선생님." 눈에는 순간에 눈물이 맺혔으나 입가에는 가만한 미소가 떠오르고 그 어음은 분명하였다. "저는 그놈들에게서 이겼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안전하게 모셨습니다. " 진정으로 그는 기쁜듯이 말했다. 그의 입가에 도는 가만한 미소에는 자신의 꾀로 하여 ' 왕선생' 의 귀중한 생명을 구할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듯 싶은 일종의 득이양양함 조차 느껴졌다. 왕징웨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이자리에서 이 동무에게 자기는 입을 열어 대체 무슨 말을 할것인가? 말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이 어린 눈을 들어 죽어가는 이의 얼굴을 지켜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쩐중밍의 눈이 힘없이 감겨졌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약해져 갔다. 의사는 눈으로 그의 임종이 가까워 졌음을 말했다. 방안의 모든 사람이 도무지 말이 없었다. 밤은 완전히 밝았으나 흐린 날씨에 창밖은 그저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무겁고 괴로운 몇분이 또 지나자 쩐중밍은 다시 힘없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간신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국사는 왕선생이 있고, 가사는 내 아내가 있으니, 이제 나는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다.” 한마디 말을 남기고 입가에는 그대로 가만한 미소를 띄운채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이날 호텔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부인과 딸도 옆방으로 물러가게 하고 홀로 방안에 들어앉아 소리없는 울음을 울었다. 쩐중밍 ㅡ 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해온 동지였다. 참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동포를 생각하고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자기와 함께 온갖 곤란과 장애와 싸워왔고 또 싸우려는 그 ㅡ 아직도 많은 춘추 (春秋) 를 남기고 그 큰뜻을 영구히 펴볼 시간도 없이 이렇게 하루아침 흉탄에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할 때 왕징웨이는 창자가 끊어지는듯 하였다. 쩐중밍은 그의 사랑하는 처자로 하여금 차마 영원히 행복과 자유와 관명과 희망을 가져보지 못한채 그대로 음울한 충칭의 하늘아래서 그들의 생애를 마치게 할 수 없다 하여 또는 위험을 무릎쓰고 그들을 이끌어 멀리 이곳 하노이 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바라던 행복과 자유와 광명과 희망을 제 자신이 먼저 보지 못한채로 돌아오지 못할길을 떠났다. 천도는 결코 무심하지 않습니다 라고 부르짖던 그에게 이다지도 하늘의 뜻은 무정 하더냐? “국사는 왕선생이 있고, 가사는 내 아내가 있으니, 이제 나는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다.” 그가 남겨놓고 간 이 한마디의 말을 다시 생각해 내었을 떄 왕징웨이의 주먹 쥔 손은 부르르 떨리고 누ㄴ물은 걷잡을사이 없이 그의 두뺨에 줄줄 흘러내렸다. ( " 증군! 내 반드시 더욱 분발하여 하루라도 일찍이 동아 천지에 화평을 가져오고 증군을 대신하여 부인과 애기들에게 행복과 자유과 광명과 희망을 내 꼭 주도록 하겠네 .... " ) 속으로 맹세하기를 마치자 그는 눈물을 걷고 책상으로 가 붓을 잡았다. 내심으로는 화평을 바라마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의연히 초토항전을 부르짖고 참말로 나라와 동포를 생각하여 화평을 제창하는 이를 한간이라 부르고 마침내는 가히 국가의 주석 (柱石) 이라할 쩐중밍의 목숨을 빼앗은 장제스와 그의 정부에 대하여 그는 이제 그 모순된 내정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같은 운명이 언제 어디서 기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자기 몸의 한조각 불타는 우국충정을 천히 피력하려는 것이었다... (끝)
- 한층 더 노력하자 (更進一步的努力 / 1944.1.1)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한층 더 노력하자 (更進一步的努力) 오늘 우리는 중일동맹조약, 대동아공동선언 이후의 민국 33년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일우호관계의 증진은 더욱 광명의 전도를 밟게 되었으며, 대동아 각 국가민족의 동맹은 더욱 명확한 준칙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대동아전쟁 결전의 승리는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의 독립, 동아의 해방은 더욱 확실한 보장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 빛나는 앞날의 광명에 대해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상숙정’ ,‘치안보장’,‘생산증대’ 이 3가지 과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결전을 최우선으로’를 목표로 대동아전쟁의 목적을 완수하고, 대동아 공영의 적극적인 발전을 도모하며, 이로써 중국을 부흥시켜 동아를 보위하는 두가지 중대 사명을 완수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 노력할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사상의 숙정에 대해서는, 영미의 해로운 사상을 일소하고 잔존해 있는 봉건적 관념을 타파하는 것이 현 단계의 사상전이 가지는 두가지 목적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구호를 내세운 선전을 통하여 조직적이고 규율적인 실천이 이루어지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제 아래 올 한해는 사상전에 모든 인력과 물자를 결집하여 신시대의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문화조직을 더욱 보편적이고 깊게 해야하며, 문화사업을 더욱 건전하고 향상시켜 민의를 더욱 활발하고 단결시켜 더욱 엄숙하게 격려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의 동포들, 즉 정부관리뿐만 아니라 군대와 사농공상까지 모두 신국민운동의 실천사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인민 모두는 스스로 숙고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동아전쟁은 동아민족의 흥망성쇠, 즉 중국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결전의지의 함양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횡령과 배임, 정치를 타락시키는 병균들, 매점매석과 민생을 좀먹는 해충, 갈취, 사회를 교란시키는 화근들, 퇴폐와 방탕, 민족을 약화시키는 것 등등 이런 모든 해로운 현상들은 전시생활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민족의 생존에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은 금년 한 해 동안 모두 소탕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며, 정부는 이에 따라 부패를 엄벌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제도를 확립하며, 민중은 이에 더 분발하여 청렴결백하고 소박한 풍조를 제창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민중의 협력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야 비로소 국가민족의 신생명을 세울수 있는 것이며, 그래야 비로소 총력결전과 부흥건설의 책임을 질수 있는 것이다. 치안보장에 관해서는. 치안을 보장하는 것은 군대의 책임인 동시에 민중의 책임이기도 하다. 올 한해는 예정되었던 군사계획을 명확히 추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민중의 자위력을 더욱 강화해야한다. 여기에는 이를 위한 명확한 두가지 중점이 있다. 첫 번째는 건군으로, 건군에서는 질과 양을 동시에 중시하고, 정신교육과 군사장비, 군사기술이 모두 병행되어야 하며, 향후 군의 편성은 이에 반드시 유의하여야 한다. 둘째로는 국부가 이야기한 ”무력을 민중과 결합시켜 치안을 보장하게 하라“ 라는 것으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중을 지켜 판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며, 특히 생산 민중을 지켜 생산사업을 안전하게 발달시키게 하여 생산역량을 양성, 확충하여 군대의 역량강화를 도모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나아가 민중과 군대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민중 스스로가 알아야 군대가 역량을 키우고 기량을 발휘하여 국방에 종사할 수 있다. 요컨대 민중은 국력은 기초이며, 무력의 원천이다. 민중이 발전하지 않고 군대가 충실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사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인민의 자위력을 강화하여 이 두가지 힘을 굳걷히 결부시켜 치안보장의 뿌리가 될 수 있게 해야하며 나아가 국방의 뿌리가 되게 하여 생산력을 늘려야 한다. 올 한해는 생산력 증산을 총동원하는 해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여 대동아전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생산을 늘리고 물자를 넉넉히 공급하며, 이를 통해 물가를 조절하고 민생을 개선하여야한다. 우리는 현재의 인력과 물자를 낭비해서도 안되고, 보충하지 않아서도 안된다. 우리는 성장의 결과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려선 안되며, 우리는 이를 대중과 국가, 나아가 동아를 위해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생산력을 지키고, 생산력을 높이고, 이를 다른 분야에서 재생산할 수 있게 해야하고, 재생산의 비율을 확대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이 증산이라는 두글자가 진실되고 귀중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현재 국가경제와 민생에 있어 가장 절실한 요구는 의복과 식량의 확보인만큼, 증산사업은 반드시 농업과 경공업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농업방면, 특히 식량과 면화의 증산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경공업 방면에서는 밀가루와 방직 공업의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비록 현재의 힘으로는 충분한 의복과 식량을 논할 수 없지만, 정부와 인민은 전력을 다하여 의식 문제를 합리적이고 가능한 방법으로 해결하여 일반 민중, 특히 생산 민중들이 전쟁기간 동안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정부도 낭비를 혁파하고 실질적인 방안을 내놓고 침착하게 대응해나가야 한다. 민중도 더 이상 수수방관하며 고개를 저을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현실적으로 일을 할 필요가 있다. 생산증대에 사용되어야 할 인력은 생산증대에 사용되어야 하며, 여가 시간은 반드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과분한 무의미한 소비는 하지않아야하며, 일상용품과 산업에서 비롯되는 폐기물도 모아서 증산과 재생산을 위해 재활용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증산 운동과 절약운동, 그리고 재활용운동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저축과 절약을 하지 않으면 증산에 필요한 재력과 물자를 모을 수 없으며, 증산으로 얻은 결과 또한 헛되이 소모될 수 밖에 없다! 재활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재활용이 할 수 없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헛수고와 같다. 이렇듯 올해의 우리가 실행해야할 중점은 간단하다. 그러니 모두 이를 적어서 전국 동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행동해 나가기를 바란다.
- 어떻게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할것인가? (怎樣建設新上海? / 1943.8.1)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어떻게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할것인가? (상해공공조계환수기념방송) (怎樣建設新上海?) 오늘은 상하이가 완전히 다시 중국의 것이 된 기념일이다. 상하이 조계 가 생긴 이후 중국의 영토는 분열되었고, 중국의 주권은 완전해지지 못했다. 올해 1월 9일, 우방인 국민정부와 협정을 체결하여 조계를 조기 반환하고 치외법권을 철폐하기로 하였다. (1943년 1월 9일체결된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1943년 1월 9일 발표된 일화공동선언 (중일공동선언) 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톈진과 한커우의 조계반환을 시작으로, 지난 7월 30일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도 반환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상하이 공공조계도 반환되었다. 전국적으로 이제 백년전부터 오늘날까지 존재했던 이 조계라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의 톈진조계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으로, 9월에 톈진 이탈리아 조계가 반환되며 중국에서의 조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전국 교통의 중심지인 상하이는 오늘로써 완전히 중국의 주권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치외법권의 철폐도 우방인 일본과 국민정부가 합의하여 어제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1943년 7월 31일 체결된 중화민국에서 일본국신민에 대한 과세에 관한 일본국- 중화민국간 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그대들은 조계 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국제법에서는 이를 나라속의 나라 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대들은 치외법권 의 정의에 대해 알고 있는가? 국제법에서는 이를 해외 영토의 연장 으로 규정하고 있다. 모든 외국인들은 중국에 와서 중국 주권의 지배가 아닌 외국 주권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치외법권은 외국의 영토를 중국으로 연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조계가 치외법권이 존재하는 이상, 중국의 영토주권은 완전할 수 없고, 모든 정치는 이 나라 속의 나라의 영향을 받아 곳곳에서 제약을 받게 되며, 모든 경제도 외국인과 정당하게 경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외국인은 치외법권의 보장을 받기 때문이다. 외국인들 이 중국 내에서 엄연한 특권 계급 을 보유하고 있는데 어찌 중국인들이 그들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수십 년동안 중국의 상공업이 부진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이러한 불평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이제 치외법권과 조계는 동시에 소멸되었고, 중국의 영토주권은 완전해졌으며, 중국의 경제상황도 갱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방인 일본 은 어째서 이렇게 전력을 다해 중국을 원조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해야할 뿐만 아니라, 원조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 민중들이 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우방인 일본의 성의를 저버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현재와 앞으로 노력해야할 방향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이래, 국민정부는 엄중히 성명을 발표하여 우방인 일본과 동고동락할 것을 다짐하였고, 올해 1월 9일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同生共死) 의 각오로 대동아전쟁에 참전할 것을 정중히 선언하였다. 동생공사 라는 이 4글자는 그저 시의 구절도,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이 실로 마땅히 가져야 할 전국적인 일치된 결심이다. 왜냐하면 대동아전쟁은 전 동아 민족의 생사존망의 고비이기 때문이다. 백 여년 동안 세계를 휩쓸던 영미 세력은 동아에 와서 우방인 일본에게 잠시 격퇴당했고, 일본은 이들과 이제 최후의 승부를 펼치려 하고 있다. (왕징웨이정권의 태평양전쟁 발발당시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정권의 대영미 선전포고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우리는 대동아전쟁에서 반드시 이길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동아민족이 단결해야만이 이길수 있다고 믿는다. 일본이 이미 최전선에 서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만큼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함께 끝까지 노력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동생공사 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함께 죽을 각오로 함께 사는 것 으로, 함께 사는 것 은 동아 온 민족이 공유하는 염원 이라 할 수 있고, 함께 죽을 각오 라는 것은 그 염원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 라 할 수 있다. 동생공사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전쟁 이전에는 중일 양국이 외교, 군사에서 방침이 달랐던 것 이 이번 전쟁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일 양국이 함께 한 전선에 서있다. 일본은 중국을 전우로 여기고 중국이 힘있는 전우가 되길 바라고 있다. 중국의 영토주권을 완전하게 하고 힘으로써 원조하고, 중국 경제와 어려운 난민들의 생계에 대해서도 힘써 원조하며, 중국을 전우인 만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을 힘있는 전우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일본이 가하는 원조의 뜻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방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스스로 분발하여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전쟁은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 대동아전쟁의 경우, 파괴 는 영미의 침략세력을 분쇄하고 영미가 심어놓은 폐해를 제거하는 것 이고, 건설 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이 주창한 동아신질서의 건설로, 이 신질서라는 것은 이름만 거창한 빈 것이 아니며 최근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의 주창으로 그 내용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동아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동아의 공존공영을 이룩하는 것은 대동아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새로운 상하이 건설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영미 세력은 이제 완전히 제거되었고, 그 이후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만큼, 상하이 시민들에게 바라는 3가지 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영미의 세력 뿐만 아니라, 영미가 세워놓은 정체성을 타파하여 일소할 필요가 있다. 나는 상하이 시민들이 모두 신국민운동강요 를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적극적으로 실행하길 희망한다. 삼민주의의 민족주의 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아시아주의 를, 민권주의 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민권제도 를, 민생주의 를 실현하기 위해선 국가자본을 발달시켜야 함 은 모두 신국민운동강요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강령을 사상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쉽게하고, 행동에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자연스럽게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고 성공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신국민운동의 하계 2기 집단훈련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강조된 것은 조계의 환수와 이를 통해 시민들의 생각을 환기시켜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훈련은 공무원과 청소년에게 한정된 것이었으나, 이제 그 영향과 범위를 일반인에게로 확대 보급할 필요가 있다. (신국민운동강요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둘째, 상하이에는 5백 만명들의 시민들이 있다. 하지만 환경과 시민들의 직업, 특히 상공업은 조계지 때문에 곳곳에서 영미의 견제를 받아왔고, 이 견제상황이 오래되면서 상공업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농업은 상하이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상하이 시민들의 식량은 본토에 의존하고 있고 본토에서 공급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대량의 외국에서 쌀을 가져올 수 있어 근심 걱정없이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산업 및 상업, 원자재 측면도 그렇다. 면화를 예를 들면 본토에서 생산되는 면화는 공급이 부족하지만, 대량의, 가격도 좋고 품질도 좋은 면화를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지속적으로 수입할 수 있다. 따라서 원자재 부족에 대한 공포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세계전쟁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쌀의 수입은 어려워졌고 면화도 수입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런 만큼 상하이 시민들은 상하이도 어디까지나 본토와 불가분한 존재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상하이는 조계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란 시기 피난처가 되어 수십 년 동안 내륙이 병화를 겪고 있던 동안 호황을 누려왔는데 , 이는 옳지 않은 현상이다. 국민의 대의 는 나 혼자 살겠다며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국난이 닥쳤을 때는 일어나 함께 일어나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하였던 상하이의 모습은 대동아전쟁 이후 소멸되었다.옛말에 이르기를 ”산의 도적은 무찌르기 쉬우나, 마음속의 도적은 무찌르기 힘들다“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왕양명의 양명전서의 구절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상하이는 환경적으로 이런 예전의 폐습을 없애야 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이러한 예전의 폐습을 없애야 한다. 오늘날 상하이는 전체가 내륙과 다름없이 되었고 상하이 시민과 내륙 민중들은 서로가 동고동락하기를 바라고 있다. 상하이 시민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다. 이는 내륙 민중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다. 전시경제의 제1 요건 은 계획경제를 실행 하고 국가와 민족의 전반적인 이익을 고려하는 것 이다. 특히 전쟁의 승리를 위해야 한다. 전시에는 소모가 큰 만큼 생산도 커야 하기에 장기전에 대비하여 생산을 늘려야 한다. 정부는 여기서 생산자를 어떻게 지켜 생산을 계속 보장할 수 있게 할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생산을 증가시킬 것인지를 책임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민중들은 생산을 위해 힘쓰고, 국가민족에 공헌하여 전쟁을 승리하게할 책임이 있다. 나는 상하이 시민들이 그 상공업의 경험으로 여기에 힘써주길 바란다. 다시한번 이야기 하지만, 생산자를 지키는 것은 생산자들은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고 전쟁에 승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으로, 나는 이들 생산자를 지킴으로써 그들이 비용을 아끼고 생산을 이어나가며, 생산을 늘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투기 행위, 사재기행위 와 같은 것은 국가 민족에 해가 되는 것이며, 전쟁 승리의 적이며, 이는 지켜줄 것이 아니라 제재를 가해야 하는 것이다. 폭리는 언뜻 보면 생산을 자극할 수 있을 것같지만, 이는 사실 각성제를 복용하여 강건함을 도모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결국은 생산의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제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상하이 시민들이 소비를 절약하고 저축을 장려하는데에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한마디로, 개인을 위하는 것은 적어야하고, 국가민족을 위하는 것은 많아야 한다는 것 이다. 특히 이러한 전시 상황에서는 대동아전쟁에 협조하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데에 모든 것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나는 상하이 시민들이 예전 상하이의 중요성은 교통에 있기에 교통이 막힌 지금은 그 중요성이 상실되었다는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관론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교통이 두절되는 것은 전쟁기간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앞에서 나는 전쟁은 파괴이자 동시에 건설이라 이야기 하였다. 현재 대동아의 공영건설은 이미 시작되었고, 버마는 우방인 일본의 원조를 받아 자주독립을 이루었고, 필리핀 또한 곧 자주독립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영미 그리고 네덜란드의 식민지도 스스로 일어서려하고 있다. 일본은 동아민족을 단결시켜 공영을 실현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 대동아전쟁의 전쟁목적이 완성되면 동쪽으로는 필리핀 , 서쪽으로는 버마 , 남쪽으로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이 가진 모든 자원, 그중에서도 특히 쌀, 설탕, 휘발유과 같은 자원 들은 상호보완의 원칙에 따라 거래될 것 이며, 이러한 거래의 실시는 공영의 기초가 되어 공영권의 경제관계는 밀접하고 더욱 발달해질 것 이며, 공영권의 지역들은 경제발달로 날로 번영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기간동안 상하이 시민들은 상공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상하이가 완전무결하게 중국에 다시 속하게된 기념일이다. 우리는 이를 마땅히 축하해야하지만 단지 이를 축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의 중요한 사명을 받아드려야한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해야 하고 이를 신중국 건설의 기점 으로 삼아야한다. 우리는 중국을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힘있는 국가로 만들어야 하고 , 상하이 가 그 관문이 될 수 있게 해야한다.
- 신국민운동 (新國民運動, 1941.11)
신생활운동 (新生活運動) 과 신국민운동 ( 新國民運動 ). 두 운동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두 운동 모두 국민계몽을 위해 작동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가진다. 이번 글에서는 왕징웨이 정권에서 행해졌던 국민계몽운동이었던 신국민운동에 대해 소개하면서, 동시에 이전에 장제스의 국민정부에서 행해졌던 , 마찬가지로 국민계몽운동이었던 신생활운동에 대해 소개하면서 신생활운동과 신국민운동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신생활운동 (新生活運動) 1928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베이징 (이후 베이핑) 에 입성했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성공하며 장쭤린(張作霖,장작림) 의 북양정부는 무너졌고, 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동북역치 (東北易幟) 의 과정을 통해 장제스에 저항하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봉천군벌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편견회의에서 군벌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이에 반대하던 세력들과의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0년대에 들어오며 중국대륙의 사실상 유일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초공작전이 5차에 이르러 효과를 보면서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떠나며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며 1934년의 시점에서 중국대륙 내에서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비록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잃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부의 대항세력들을 완전히 평정하는데 성공하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장제스는 이러한 안정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중국의 위기가 중국사회속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제창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확실한것은 신생활운동을 통해 그는 낙후된 중국사회를 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중국사회는 민국이 수립되었음에도 수립이후 지속된 혼란속에서 민중들은 알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지하고, 관리들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며, 혼란속에서 서구사회와 같은 선진적인 모습이 아닌 낙후된 모습을 계속 이어왔다. 장제스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왕징웨이 조차 중국사회를 흡연, 병, 도박, 오물, 귀신, 나태 로 묘사하기도 했다 . "현재 일반 중국인의 생활은 한마디로 야만적이고 불합리한 생활입니다. 보십시오. 밥 먹을 때 음식이나 식기가 더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도 벽이나 문에 기대어 먹으며, 어떤이는 앉아서 먹고 어떤 이는 무릎 꿇고 먹고 어떤 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먹고 어떤 이는 문밖에 서서 먹습니다. 다 먹은 후에는 밥그릇과 국그릇은 아무 데나 어질러놓아 집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한 번 물어봅시다. 이런 식사 습관의 어디에 인간이 식사하는 모습이있습니까? 이게 바로 야만적 생활 아닙니까? (중략) 소, 말, 돼지, 양이 사료를 먹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돼지우리, 고양이 밥그릇, 마구간이나 개집도 이렇게 더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 장제스의 "신생활의 의미와 목적(新生活的意義和目的)" 강연에서 또한 수많은 정부와 군벌이 난립하는 상황속에서 중국사회와 민중들은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와 국민들의 단결력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이러한 사회 전반에 퍼진 문제점들을 해결하여 국민들의 공산당에 선전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국민정부에 대한 전 국민적 충성을 확보하여 다가오는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국민과 정부의 단결로 이를 막아내려 했다. 所謂革命者,即依據一種進步的新思想,以人力徹底改進各個人以至整個國家之生活形態之謂。簡言之,革命即生活形態之改進也。吾國革命之所以迄今尚未成功,即在於全國國民之生活形態始終無所改進。 (소위 혁명가들은 진보적인 새로운 사상에 기초하여 인간의 힘을 이용해 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개선하려합니다 . 간단히 말하자면 혁명은 삶의 형태가 개선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혁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전국 인민들의 생활조건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 1934년 2월 장제스의 연설 신생활운동을 총괄했던 신생활운동촉진총회 (新生活運動促進總會) 의 로고 1934년 시작된 신생활운동은 유교와 기독교적 신념속에서 "삶의 혁명" 이라 부르는 삶의 질 개선을 통해 개선된 높은 생활수준 속에서 국민들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의 도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갖출수 있기를 바랬다. 신생활운동은 사유(四維, 예절(禮)과 청렴(廉), 의리(義)와 부끄러움((恥)을 아는것) 와 삼화(三化, 예술적, 생산적, 군인적 삶을 사는 것) 이라는 두가지 축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파리를 퇴치하고, 위생을 개선하고, 보다 청결한 삶을 살게 함으로서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고 , 노인공경과 아이들에 대한 보호, 예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국민들의 도덕성을 확립시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확립하고 국산품 사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절약운동등을 통해서 국가의 소중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을 확립 하려 하며 유교와 기독교의 청교도적 특징이 섞인 일종의 완전한 질서를 전국에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오래전의 유교가 20세기 공화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쑨원이 삼민주의에서 " 옛것은 버릴 필요가 없다 " 라며 옛 문화가 아직까지 통용될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적 가치의 경우 장제스 본인이 기독교 교도였고 쑹메이링을 비롯한 여러 기독교도에게 영향을 받았고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이를 통해 민중들이 이전의 낙후된 습관에서 벗어나고 국민들이 "아버지 (국가)에 충성하는 자식들(국민들)" 이 되기를 바랬다. 또한 이를 통해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견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생각과 달리 신생활운동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지만 국민들은 가부장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신생활 운동에 완전한 지지를 가지지 않았다. 특히 사회개혁과 항일을 이야기하던 젊은 세대 또한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가장 서양문물에 능하고 서양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젊은 세대에게 신생활운동은 '댄스홀 출입금지' 와 같은 신생활운동의 계획은 구시대적으로 받아드려졌다. 또한 신생활운동을 강요하는 남의사의 폭력적 행태는 국민들로 하여금 신생활운동에 더더욱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升降國旗要敬禮 (국기에 대해 경례) 라고 적힌 신생활운동촉진총회의 포스터 , 신생활운동의 주요목적중 하나는 중국국민들이 정부에 충성하게 하는데에 있었다. 신생활운동은 중일전쟁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장기항전을 위해 난징에서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또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함께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생활운동은 오히려 충칭에서 장제스 국민정부가 장기항전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신생활운동은 중국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국민적 전국 네트워크망에 가까웠다. 전시상황속의 총동원체제에 가장 적합한 단체였던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의 위상을 생각 할 수 있을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망을 이용해 충칭정부가 전쟁을 지속할수 있도록 빠르게 지원을 하기 용이했다. 이들은 성금을 모집하고, 공습으로 무너진 도시속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난민들을 구호하고, 부상병에 대한 지원등의 활동을 하면서 충칭정부의 장기항전을 지원하는 가장 중요한 단체 중 하나로 작동하면서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충칭이전 이후 겪었던 혼란을 최소화하고 충칭정부를 안정화 시켜 장기항전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장제스는 신생활운동의 사유를 "모든 이익을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 이라 해석하면서 신생활운동의 이념을 일종의 장기항전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 이전의 신생활운동의 목표가 국민들의 도덕,생활등의 개선에 있었다면 전시의 신생활운동은 전쟁을 향한 지원을 목표로 했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또한 다시 난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전투가 격화되면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못해 제대로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국민당의 패색이 깊어지던 1949년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촉진총회의 총장이었던 황런린(黃仁霖, 황인림) 에게 활동중지를 명하면서 신생활운동은 15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8년이라는 항전과 전후의 혼란속에서 본래와 다른 역할을 맡거나 제대로된 활동을 하지 못하면서 장제스가 추구했던 본래의 목표는 15년의 기간중 겨우 3년동안만 작동한 셈이다. 신생활운동에 대한 평가는 항일과 중국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부터 오히려 장제스 1인독재체제를 확립하기 위한것, 일종의 파시즘적 모습을 중국사회에 적용하려했다는 평가등 여러 평가가 존재하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는 두고 신생활운동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마치려고 한다. 신국민운동 (新國民運動) 신국민운동은 1941년 11월 12일, 왕징웨이가 중국국민당(왕징웨이정권) 제6기중앙집행위원회 4중전대(四中全會)에서 제안한것으로, 이는 화평반공건국(和平反共建國) 이라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의 대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중국국민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속에서 비롯되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 매주 1번씩 각 부처의 부장들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전반에 걸쳐 수십차례 토론을 하면서 진중한 협의과정을 거처 이 신국민운동이라는 안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안을 4중전대에서 소개하면서 신국민운동을 "사변(중일전쟁) 이전 장제스 국민정부가 행해왔던 신생활운동에서 일보전진하여, 신중국의 건설에 매진할 수 있게 전 중국국민당원과 전국민을 포괄할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뻗치는 대국민운동" 이라 소개하였다. 왕징웨이는 이 신국민운동에는 "자신에게 벌을준다" 라는 자신의 철학이 담겨있음을 이야기 했다. 이러한 모습은 왕징웨이가 어떤 생각으로 화평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왕징웨이의 안에는 크게 두가지 정강이 존재했는데, 그 두가지 정강은 다음과 같다. 1. 중국국민당원의 용기를 고무(鼓舞) 한다. 2. 전 중국국민의 용왕매진(勇往邁進, 거리낌없이 용감하게 나아감) 을 촉구한다. 그리고는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이 국민의 생활은 생각하지않고 국민정신에만 치중해버린 결과 실패하게 되었다고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정치와 민생의 혼연일체의 열매를 배양해 새로운 사상으로 중국 국민들을 새롭게 탄생시켜 "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된 신중국 " 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유래된것으로 생각된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국민운동이 신생활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하려 했다. 이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충칭에서의 신생활운동은 충칭정부의 일종의 이데올로기처럼 작동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장제스에 대적하는 왕징웨이의 난징정부는 이에 맞서 자신을 지지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충칭정부의 신생활운동에 대적할수 있는 새로운 범국민적 운동이 필요했다. 그리고 충칭정권과 전쟁 (이후 태평양전쟁) 이라는 환경속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총동원을 위한 단체가 필요했다. 이런 요구속에서 등장한것이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이었다. 하지만 신국민운동의 구상은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왕징웨이의 측근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진행이 되고 있었다. 이후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의 부단장를 맡게 되는 자이잉푸(載英夫, 재영부) 조차도 신국민운동의 구상을 왕징웨이가 직접 안을 발표하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고 하면서 신국민운동 구상이 왕징웨이와 측근 위주로 준비가 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이후 신국민운동은 1941년 12월 31일, 중국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제 76차 회의를 통해 《신국민운동강요(新國民運動綱要)》 를 통과시키고 다음날인 1942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이를 반포했다. 1942년 신년사에서 "신국민운동 만세!" 를 외치는 왕징웨이 : https://www.youtube.com/watch?v=9UblJCgZsK0 1942년 1월 1일자 중보(中報, 당시 中報는 난징정부와 충칭정부 모두에서 발행되었는데 위의 신문은 난징쪽의 중보이다) 에서 이야기하는 신국민운동강요의 내용. 전날 76차 회의에서 결정되었음도 이야기한다. 신국민운동강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신국민운동요강에는, 8개의 항으로 구분되는 '문장'만이 적혀있다. 즉 각 항을 상징하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1943년 중국국민당 난징지부가 이에 제목을 붙혔다. 여기서는 중국국민당 난징지부가 붙힌 제목과 원문을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신국민운동강요 (新國民運動綱要) 戰爭是國民的總檢閱, 詳細些說是一國民精神力的總檢問. 在四年有餘的痛苦環境裏, 我們同胞的優點, 以及缺點, 都盡情暴露來出一些不留遮蓋, 優點應該發揮光大, 缺點應當補救. 現在四年有餘的中日事變,巳一轉而爲保衛東亞的大戰爭, 在這新關頭, 沒有新精神, 怎樣能担負這新責任, 完成這新使命? 所謂新精神, 不完全指創造, 只要能去其舊染之汚,也是自新之一. 換句話說, 要有勇氣來承認缺點, 矯正缺點, 尤其是劣點更要有勇氣來掃蕩廓淸, 新國民運動, 就是着重於此. 전쟁은 국민에 대한 검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정신력의 검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년동안의 고통스러운 시간속에서 우리동포들의 장점과 약점 모두가 적나라하게 공개가 되었다. 우리는 이를 감추려 해서는 안된다. 좋은점은 빛을 발휘해야하고, 나쁜점은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 이제 4년간의 걸친 중일사변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한 대전쟁이 되었다. 이 새롭고 중요한 시점에서 새로운 정신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 새로운 책임을 지고 이 새로운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신정신이라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창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래되고 부정적인것을 새롭게 만드는 정신을 가르킬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 특히 약점을 쓸어낼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신국민운동이 강조하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新國民運動,不另標主義. 因爲我們原有三民主義, 以爲建設中華民國之根本, 我們現在所要問的是三民主義爲什麽不能實現, 這不是由於我們推行力不够, 就是由於我們研究力不够總而言之, 是我們精神力不够. 新國民運動務須對於此等缺點, 有對症下藥的決心與辦法,茲舉其綱要如左: 신국민운동은 특별한 별도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중화민국 건설의 근본이 되는 삼민주의가 있고 그것이 목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묻고 싶은 것은 삼민주의가 왜 실현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추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연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의 정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국민운동은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결단과 방법을 갖추어야 하며, 그 강요는 다음과 같다. 1. 대아시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동아국가의 상호 단결을 도모하고 동아를 공동보위한다. 我們爲什麽不能 實現民族主義呢? 因爲我們忘記了大亞洲主義. 「中國若不能得到自由平等,不能分担建設東亞的責擊,而中國自由平等之完全得到,必有待於東亞之解放」, 這幾句話,直到和平運動開始,方糧覺醒過. 來其實大亞洲主義裏早已諄諄啓示了. 爲什麽我們忘記了,至於把中國糟蹋到這般田地? 從今以後,把愛中國愛東亞的心打成一片. 東亞諸國, 互相親愛, 團結起來, 保衛東亞, 這是民族主義. 우리는 어째서 민족주의 (삼민주의의 구성요소중 하나) 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대아시아주의(대아주주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 중국이 자유와 평등을 얻지 못하면 동아 건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할 수 없다. 또한 중국의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획득된다면, 반드시 동아의 해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말들은 화평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각성하지 못했다. 사실 대아주주의는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시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이를 잊어버리고 중국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버린것인가? 이제부터는 중국을 사랑하고 동아시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한다. 동아의 모든국가가, 서로를 사랑하고 단결하여 일어나 동아를 보위하는것, 그것이 민족주의다. 2. 민주민권제도를 확립하고, 단체를 조직화하고, 행동을 규율화한다. 我們爲什麽不能實行民權主義呢? 因我們忽略了民主集權的制度. 所以表面上崇拜民治實際上造成個人獨裁. 從今以後, 我們的團體要組織化, 行動要紀律化. 一件大事, 未決以前充分的研究. 既決以後, 一致的實行. 時時想著知難行易, 勇猛的實行, 即是忠實的求知之要著, 這是民權主義的著重點. 우리는 어째서 민권주의 (삼민주의의 구성요소중 하나) 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민주 집권 제도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만 보이는 민치 (민주주의) 는 사실상 개인독재를 초래해버린다. 이제부터 우리의 단체들은 조직화가 필요하며, 행동의 기율화가 필요하다. 하나의 큰일이 있을때, 결정을 내리기전에는 충분한 연구를 해야하고, 결정을 내린 후에는 어긋남이 없게 이를 실행해야 한다. 항상 지난행역 (알기는 어렵고 행동하기는 쉽다, 知難行易, 쑨원의 말) 을 염두하면서 용맹하게 실행하는 것은 바로 충실한 지식 탐구의 요지이며, 민권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3. 생산을 증진하고, 소비를 절약하고, 국가 자본을 발달시킨다. 我們爲什麽不能實行民生主義呢? 因爲我們忽略了發達國家資本. 我們如能著重於此點,則國家資本發達, 私人資本自然歸於節制.共匪則無所藉口以鼓吹階級圖爭,英美之經濟侵略亦無所施其技. 何致演成共匪與英美侵略互相呼應左右夾攻的現象? 從今以後,我們要以銖積寸累的精神,來發達國家資本. 這是民生主義的著重點. 우리는 어째서 민생주의 (삼민주의의 구성요소중 하나) 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국가 자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이를 중요시여긴다면, 국가자본은 발달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민간자본은 절제될 것이다. 공산주의 비적들은 계급투쟁을 옹호할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며, 영국과 미국의 경제 침략이라는 재능을 부리는 것도 불가능 하게 된다. 어찌하여 공비와 영미의 침략이 서로 호응하여 좌우로 협공하는 현상을 연출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수적촌루 (銖積寸累, 조금식 조금식 모으다) 의 정신으로 국가자본을 발달시켜야 하며, 이가 민생주의의 중심이라 할수 있다. 4. 멸사봉공 (滅私奉公 ,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하여 힘써 일하다) 三個重點着手, 我們如要從以上則不可不增加我們的精神力 ,以推行一切,研究一切, 因此我們首先要倡導公而忘 私的精神,個人對於國家, 貢獻要多,享受要少,平日嗇一己以裕國家,臨難財 牲一已以救國家。 (위의) 3가지 중점을 시작할때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력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추진하고 모든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공리망사(公而忘私,공적인 일을 위하여 사사로운 일을 잊다) 의 정신을 제창해야 한다. 5. 선을 즐기고 , 악을 부끄러워하며, 남을 겸양있게 대우하고, 일을 명쾌하게 처리한다. 人與人的相處是國家民族力量團結的樞紐. 我們對於人與人相處,要牢記以下數項, 說話要老實,心事要光明, 善善要能用,惡惡要能去並要有聞人善則喜,聞人過則悲的精神,使人樂於爲善 ,恥於爲惡,至於同事間之 相處,尤其要同甘苦,均勞逸, 撵誕美, 勿掠美, 冉任過, 勿諉過, 不這樣, 不配說精誠團結.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은 국가민족역량단결의 중추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다음과 같은 항목을 명심해야 한다. 정직하게 말하고, 생각이 밝아야 하며, 친절을 베풀 수 있어야 하고, 나쁜 일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좋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 기뻐하고, 나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슬퍼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이를 즐겁게 하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할때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데 있어서는 동고동락하고, 일과 휴식을 함께 하며, 미의 탄생을 쫓아야하고, 미을 빼앗아선 안된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실수를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된다. 이러한것이 없다면 정성단결(精誠團結,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함 ) 이라 할 수 없다. 6. 부화천박 (浮華浅薄, 겉만 건지르르하고 천박함) 을 경계하고 충실히 지식을 추구한다. 浮囂淺薄是斷送國家民族的根由, 我們知道我們缺固多而行動不能紀律化,知識不能科學化是缺點之最大者. 從今以後, 紀律要由個人以及於全體, 科學不但要普及尤其要深造. 천박하게 떠드는것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적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점이 많아서 행동을 규율할 수 없고, 지식을 과학화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부터 규율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과학은 단순히 보급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7. 물자를 아끼고 절약을 실행한다. 中國大多數人, 都是赤貧,說不上節約,所以增加生產最爲當務之急. 然卽就節約來說 ,用之得當, 於民生國計兩有裨益. 如多種雜糧,替 代稻米,便是一個極顯的例至於極少數人厲行節約, 不只是經濟上的原因,而且是道德上的原因, 就經濟來說,消極的把無益的消耗節約起來,積極的可用之於更有效的方面. 就道德來說, 目擊大多數人如此貧困,不節約,在良心上說不過去。 중국의 수많은 민중들은 극도로 가난하기에 "절약" 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절약의 용도가 적당하다면 이는 민중들에게도, 국가경제에도 이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잡곡으로 쌀을 대체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예가 될 수 있을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이유도 있는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쓸데없는 소비를 절약하고, 이를 보다 효과적인 측면으로 활용될 수 있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극도로 가난한 모습을 목격했는데도 절약을 하지 않는것은 양심상 말이 되지 않는다. 8. 청렴결백으로 약빈(弱貧, 약하고 가난함) 을 절멸시킨다 從政治社會做起在最短期間,必須做到弊絕風清. 每一個公務員,每一個軍人, 固應該得到生活上的保障, 但絕不能藉口於生活上不滿足, 而有貪污瀆職的行爲. 我們要本着"一家哭何如一路哭的精神, 對於每一個貪汚職的人,要像對於蝗虫一樣, 毫不留情的予以滅絕。 정치사회를 시작으로 최단기간 내에 폐단을 없애고 풍속을 깨끗하게 해야하며 모든 공무원, 모든 군인은 반드시 생활상의 보장을 받아야 하지만, 생활상의 만족을 구실로 하여 횡령과 배임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어찌 같으랴 ( 一家哭, 何如一路哭 , 북송의 학자 범중엄의 말)" 에 입각해 부패한 공직자들을 모두 메뚜기 떼처럼 무자비하게 절멸시켜야 한다. 以上所舉,包括精神方面的總動員及物質方面的經濟建設,雖然卑無高論, 然而我們要救中國, 要保東亞, 舍此無可由之道. 所以發起新國民運動,以之自勉,亦以之共勉,至於各項條目, 根據綱要, 隨時議訂, 隨時頒布施行.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신적인 측면의 총동원 및 물질적인 측면의 경제건설은 비록 미약하나 그러나 우리는 중국을 구해야하고, 동아를 보위해야하기에 이 길 외에 다른길은 없다. 그러므로 신국민운동을 발기하여, 이에 자력과 상호 격려를 위한 신국민운동이 발기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요강에 따라 수시로 논의되고 공포되어 시행될 것이다.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강요에서 삼민주의가 이전의 체제 (장제스 체제) 에서 실현될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며 충칭의 장제스정권을 공격했다 (특히 장제스가 헌정을 약속해놓고 끝까지 실현하지 않고 독재를 이어나가는 점 등) 또한 삼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국민운동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과 국가가 하나가되는 일종의 총동원체제가 완성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후 1942년 2월 1일에 왕징웨이는 직접 라디오에서 "대동아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총체적 정신적 동원의 실시" 를 이야기 하면서 신국민운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3월에는 난징에서는 신민족운동의 발전을 도모하고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댄스홀 출입을 금지하고 여교사들의 머리 파마를 금지했다. 댄스홀 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이라니, 어디서 본 것같지 않은가? 그렇다. 앞에서 소개한 신생활운동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하지만 신생활운동에서는 어디까지나 댄스홀 출입을 금지해야한다는 제안이었으나, 신국민운동에서는 실제로 행해졌다.) 1942년 6월 2일,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조직규정(新國民運動促進委員會組織規程)" 을 통과시키고 신국민운동을 더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조직을 확대했다. 그리고 이 규정에서는 신국민운동의 일일 기획, 홍보, 조직 및 훈련 신 중국동자군 (中國童子軍) 의 결성, 지도 및 훈련 신 중국청년단 (中國青年團)의 결성, 지도 및 훈련 이 규정되었다. 여기서 "신" 중국동자군 (한국의 보이스카우트에 대응) "신" 중국청년동맹 (중국국민당 청년조직)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이미 충칭정부에 이와 같은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중국보이스카우트" 라는 이름을 쓰는 조직이 두개가 있게 된것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국동자군 (中國童子軍). 겉으로는 다른국가의 보이스카우트 활동과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뉴스 제 63호에서 "대동아신문기자대회 ( 자세한건 여기서 ) 를 보도하면서 등장하는 중국동자군의 행진 , 동자군마크가 보인다. 여기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두개의 청년조직의 단장은 왕징웨이가, 선전장관이었던 린바이셩( 林柏生 ,임백성, 린바이셩은 이런사람 ) 이 사무총장을 맡고, 저우포하이와 이전 유신정부의 요인이자 행정원 내무부장 이었던 첸쿤( 陳群) 이 상무위원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된 두개의 청년조직은 일반적인 보이스카우트와 청년조직의 개념보다는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두개의 청년조직은 왕징웨이에 충성을 하고, 왕징웨이 정권의 사상으로 무장한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중국동자군과 중국청년단은 1943년 3월 "중국청소년단" 으로 통합된다. (사진은 국민정부 환도3주년 기념행사에서 행진하는 중국청소년단 여성단원들. 앞의 단원이 들고 있는 청천백일문양에 화살이 3개 꽃인 저 문양이 중국청소년단의 로고로 추측된다.) 1943년은 신국가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해였다. 1943년 1월 9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 했다. (왕징웨이정권의 대영미 선전포고에 관해서는 이곳을 클릭 또한 이로 인한 영향에 대해 관해서는 이곳 과 이곳 을 클릭) 이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게는 새로운 변환점이 되었다. 국가가 이전의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전시상황에 돌입하게 되었고, 또한 난징정부의 참전으로 인해 일본이 난징정부에 가하는 정책과 시선도 바뀌게 되었다. 난징정부의 선전포고로 부터 4일이 지난 1943년 1월 13일, 난징에서 신국민운동촉진대회 (新國民運動促進會議) 에서 왕징웨이는 "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은) 이것은 장기전이고 전면전이다. 우리는 동고동락과 동생공사의 정신으로 대동아전쟁를 전력으로 지원하여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얻어내야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중국의 평등과 동아의 공동번영을 실현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신국민운동을 대동아전쟁을 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날의 촉진대회에서는 물적, 인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한 실현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제안되기도 했는데, 그 제안들은 다음과 같다 국민 생활시간 규정 중요기술의 발명을 위한 유인책마련, 자원절약을 위한 대체재 및 폐기물 활용, 중국동자군과 중국청년단의 일원화 , ( 위에서 보았듯 2월 25일에 중국청소년단으로 일원화 ) 농업생산증대운동 전개 국민정신 총동원 강화 초·중학교 교육과정 개편, 춘절 연휴 취소 및 교직원 동원, 학생들의 조림운동 민족정신수련반을 개설 이렇듯 왕징웨이의 난징정부는 신국민운동을 지렛대 삼아 전쟁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 같은날 제1차 최고국방회의에서 행정조직개편안을 발표했고, 신국민운동과 이를 수행하는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는 정부직속 기구로 편입시키면서 신국민운동의 영향력을 높히려 했다. 그렇다면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어떤 이유로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이는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 정권을 작동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3대 운동 (신국민운동, 동아연맹운동, 청향운동)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요 3대운동이 보여주는 관계성. 표에서 볼 수 있듯 청향운동과 신국민운동,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을 작동하게 하는 중요운동이자 주변국,단체와의 관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 ( 차후 포스트에서 서술 ) 을 자신의 난징정부의 대외 이데올로기로, 신국민운동을 대내 이데올로기로서 작동시키기를 원했다. 또한 이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 ,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중국내에서 왕징웨이를 지지하는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청향운동 ( 차후 포스트에서 서술 ) 을 실시했다. 또한 표에서 볼 수 있듯 3개의 운동은 서로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받는다. 청향운동의 성공으로 더많은 지역과 국민이 왕징웨이 정권을 지지 → 신국민운동의 지지도가 높아지면서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민들이 왕징웨이 정권을 더더욱 지지 → 왕징웨이 정권의 대동아전쟁 수행이 더더욱 원활해짐, 또한 일본의 전쟁협력도 유리해지게됨 → 왕징웨이와 동아연맹은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일본측에 더많은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됨 → 일본이 더많은 권리를 왕징웨이 정권에 부여하면서 충칭정부를 비롯한 대륙의 민중들이 왕징웨이 정권을 지지할 수 있게 됨 → 반복 이와 같이 3개의 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이 작동하게 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서 왕징웨이정권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일본으로 부터 더 많은 권리와 평등을 얻어내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또한 신민회( 차후 포스트에서 서술 ) 와 같이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같지만, 화북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지키려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 신민회는 이후 표면상으로 신국민운동을 수용했고, 신민회의 지도자는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을 이용해 신민회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두려는 시도는 일본과 북지나파견군, 신민회의 반대와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연 그렇다면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을까?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이 초기에 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처럼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 또한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국민들은 신국민운동을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해왔음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942년 8월 항저우에서 보내온 보고서에서는 "일반 대중은 이 운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으며 절반이 강압을 받고 있다" 라면서 신국민운동의 효과가 의심스럽다고 적기도 했다. 또한 국민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동아연맹운동이랑 신국민운동이랑 뭐가 다른거지?" 라면서 두 운동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동일시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신국민운동은 점점 지지세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던 3개의 운동의 사이클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신국민운동을 강화하면 오히려 동아연맹운동은 약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다. 왕징웨이는 두 운동이 동등하게 존재하면서 긍정적인 사이클을 계속 이어주기를 원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왕징웨이는 큰 야심을 가지고 신국가운동을 추진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주기 위해 이를 지원하고 홍보를 아끼지 않았으나 민중들은 이미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왕징웨이의 완전하지 않은 국민계몽운동이었던 신국민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1943년 9월, 청향운동을 이끌던 리시췬(李士群, 이사군) 이 일본군에 의해 암살되면서 난징정부의 3대운동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동아연맹운동과 신국민운동은 거의 지지를 얻지못하는 것은 물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두 운동이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청향운동으로 확보된 안전지대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신국민운동은 더더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말 신국가운동의 제안자이자 책임자였던 왕징웨이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난징정권에 위기가 찾아왔고 이 시점에서 신국민운동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왕징웨이를 이어 집권한 천궁보 체제에서도 신국민운동은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다가 왕징웨이의 사망이후 신국민운동은 더더욱 의미를 잃었고 결국 1945년 6월, 왕징웨이 정권 말기에 다시 정부의 직속부서에서 왕징웨이 국민당 소속으로 개편되면서 그 의미는 더더욱 축소되었다가 일본이 항복하고 왕징웨이 정권이 해체되면서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장제스의 신생활운동과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을 비교해보자면, 다른점도 많이 존재하지만, 생각보다 공통되는 분모가 여럿 존재한다. 첫째로 두운동 모두 중국의 전통적 유교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운동 모두 "반공 (反共)" 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사점은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이 일정부분은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애초에 왕징웨이는 충칭의 신생활운동을 의식했고 이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신국민운동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앞에서 이야기 한바도 있다. 또한 조직에 있어서도 충칭쪽은 " 신생활운동촉진총회 " , 난징쪽은 "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 " 두 조직 모두 "신운회 (新運會)" 라는 약칭을 공유한다는 데에도 공통점을 가진다. 두 운동이 보이는 유사점들, (댄스홀 출입문제까지) 여러 공통분모를 보유하고 있다. 이렇듯 장제스의 신생활운동과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은 다른 운동으로 구분되고 성격도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속에서는 여러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국민계몽운동들이었다. 마지막으로, " 윤함구견문록 (淪陥区見聞録, 윤함구는 충칭쪽이나 공산당쪽에서 왕징웨이의 난징정부 지배지역을 "타락한 지역" 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멸칭이었다. ) " 를 살펴보고 오늘의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이는 왕징웨이 정권 속에서 활동하던 비밀충칭 세력이 난징정부를 돌아보고 쓴 글로, 이글에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짜정부(왕징웨이 난징정권을 지칭) 은 중앙정권 (장제스의 충칭정권을 지칭) 보다 더욱 취약하다. 우리(충칭)에게 신생활운동 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신국민운동 이 있다. 우리에게 청년단 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청소년단 이 있다. 우리에게 중앙훈련단, 간훈단 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공무원의 합숙훈련 이 있다. 왕징웨이의 일체행동은 장 위원장을 모방하고 있다 . 왕징웨이는 스스로 '군사위원회위원장" 이라 이름을 붙히고 육군 대원수의 옷을 입고 그의 가짜 군대를 열병하고 있다. 장제스가 이끄는 충칭국민정부와 거의 유사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평을 남긴 것일 것이다. 너무나도 똑같으나 너무나도 다른 충칭과 난징의 대비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왕징웨이 정권의 가장 큰 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정문상, 「1930년대 중반 상해(上海) 대학생의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과 군사문화(軍事文化)의 확산 」,『중국학보 55집』 , 2018 문명기, 「근대 중국의 국민 창출 담론과 실천 - 梁啓超의 『新民說』과 蔣介石의 新生活運動을 중심으로 - 」,『중국근현대사연구 95집』 , 2023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民の衆動員工作 「新国民運動の展開」 」,『中国研究月報 723号』 , 2008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 2009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権下、新国民運動の理念と組織をめぐる相剋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 2008, p. 151-162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매일신보 1941년 11월 14일자 / 1942년 7월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중화일보 1942년 1월 1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2.01.01/page/n9/mode/2up 중국청소년단 사진 : https://exhibits.stanford.edu/wangjingwei/catalog/jb752xp1210 중국동자군 (왕징웨이) 사진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25_00000 신생활운동 포스터 /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로고 사진 : https://ccposters.com/tw/poster/when-raising-or-lowering-the-national-flag-one-should-salute/
- 국민정부주석취임통전 - 주석 취임후 전 관원에 대해 훈시를 선포하다 (就任國民政府主席通電 - 宣示就職國民政府主席後對全體官員訓詞 /1940.11.2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주석취임선서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국민정부주석취임통전 (就任國民政府主席通電) 전국 각 성시 정부 및 각 기관, 각 부대, 각 단체는 모두 이를 잘 살펴 들어라. 나 왕자오밍은 중앙정치위원회의 결의로 오늘 국민정부 주석직에 취임하였다. 나는 국민정부 환도 이후, 동지들과 함께 짧은 기간 동안에 억울한 자의 죄를 사면하고, 중일 관계의 조속한 조정과 전면적인 화평을 하루빨리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대내외 정책들을 점진적으로 실시해왔다. 수개월 동안 중일 쌍방의 전권 대표들은 조약 교섭에서 상호 양보의 정신으로 정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그 내실을 다져왔다. 조약의 근본정신 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는 중일공영, 동아부흥 이라는 공동의 목적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상호간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되, 군사와 경제, 문화는 친밀하게 협력하는 것 으로 합리적인 발달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실로 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 것 으로 마땅히 함께 힘 써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칭 은 지금도 계속하여 항전을 계속 부르짖으며 미래는 생각하지 않은 채 방해를 이어나가고 있다. 나와 나의 동지들은 끊임 없는 노력을 통해 전면적 화평을 조속히 실현 하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들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인민의 고통을 점차 해소 시키고 사회의 치안을 회복 시켜 전면적인 화평의 앞길을 열어 전면적 화평의 실현을 촉진시켜야 한다. 중일전쟁으로 3년 동안 나라의 명이 위독해지고 백성들은 날로 곤궁해졌고 나 또한 위난을 당하였지만, 나는 우매함을 버리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의 구원을 도모할 것을 맹세하였다. 정부 동지들과 전국 동지들이 함께 부지런히 맡은 바를 다하여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기를 삼가 성의를 다하여 바라는 바다. 주석 취임후 전 관원에 대해 훈시를 선포하다 (宣示就職國民政府主席後對全體官員訓詞) 올해 3월,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국제적 지위 확립과 내실있는 국가 건설의 완성이라는 요구에 따라, 수개월 동안 나와 정부 동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여 함께 국가를 어려움에서 구제하려 노력해왔다. 어제 중앙정부위원회에서 나를 국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하고 주석 대리 명의를 해제하기로 의결한 것 은 바로 이러한 책임을 지겠단 뜻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 이며, 국가의 우환이 아직 끝나지 않은 만큼, 감히 “능력이 부족하여“ 라는 핑계는 대지 않을 것이다. 전면적 화평 은 항전의 맹목적인 추종자 들의 방해를 받고 있다. 따라서 만약 빠른 시간 내에 화평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노력해야할 것은 더욱 무겁고 커질 것이다. 외교 방면에선 7월 초부터 이미 절충을 시작하여 쌍방의 정중한 심의를 거쳐 오늘 이미 모든 조약의 내용을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여 입법원에 심의를 제출하였다. 외교와 내정은 겉과 속과 같은 것으로, 내정은 바꾸지 않고 오직 외교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번 중일조약의 완성은 중일관계의 신기원이자 우리의 전면적 화평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노력의 시작이다. 하지만 외교 외에도, 우리는 내정 방면에서 마땅히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국가의 통일을 완성하고 인민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 오늘날 비록 항전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 국민정부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을 생각해본다면, 국민정부는 국내의 중요한 도시들을 통치하고 있을뿐더러, 국민정부가 통치가 닿는 곳에 대하여 의연한 주장을 가지고 정해진 국책을 펼쳐 최선을 다한다면 화평반공건국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 전국에 보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두 가지 일 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 는 인민의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지방의 치안을 보장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오르게 된 만큼, 스스로느끼는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니 정부 동지들, 전국의 모든 동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 칭다오회담 (青島會談, 1940. 1. 24~ 1.26)
1940년 1월 23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왕징웨이 (중앙),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 (왼쪽),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오른쪽) 1938년 봄부터 일본측과 접하면서 화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왕징웨이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신정권을 수립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당시 화북에는 왕커민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1937.12.24) 와 난징 량홍즈의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8.3.28) 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일본측에게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중앙정부로 통합해야한다" 라고 주장하며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임시정부, 유신정부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정부로 통합되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일본과의 논의끝에 1938년 11월 12일,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이 성립되었고, 여기서는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부를 옹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왕징웨이는 1938년 12월 18일 충칭을 탈출, 화평운동을 시작하며 자신의 신정권 수립을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왕징웨이가 생각했던 신중앙정권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을 비롯한 기존 정권들을 흡수하기를 희망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汪)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을 성립시키기를 희망하고 있었다.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뿐만 아니라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비롯한 다른 정권 & 세력들도 모두 흡수하기를 희망했다. 이는 왕징웨이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화평운동은 자신을 중심으로한 거대한 통합신정권에서만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독보적인 주도권을 자신이 확립해야 '일본의 꼭두각시' 라는 비판을 최대한 피할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내몽골부터 광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왕징웨이의 중앙정권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징웨이는 만주국도 자신의 정권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중앙정권에서는 화북,화중,화남의 주요산업은 물론 수많은 인구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촉나라땅만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장제스의 충칭정부 에 비하면 엄청난 경제력과 인구를 가질 수 있었다. 실제 이루어진 통합의 행태. 왕징웨이는 자신이 생각하던 구상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계획은 왕징웨이의 화평파와 일본 내의 왕징웨이 지지세력으로 부터 지지를 받아왔으나, 왕징웨이의 구상은 여러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 째는 기존에 구성되었던 괴뢰정권 자체들에서 비롯된 반대였다. 임시정부의 왕커민과 유신정부의 량홍즈는 이미 1938년 9월 22일부터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 독자적으로 정부통합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두 정부 모두 유교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에, 통합에 대한 논의는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왕징웨이의 등장은 이러한 통합논의를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왕징웨이에 등장에, 기존 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왕징웨이의 구상에 대해 반대를 가했다. 특히,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왕커민은 왕징웨이의 구상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를 표했다. 1939년 6월 27일 왕징웨이는 왕커민과 만나 정부통합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왕커민은 " 통합된 중앙정부가 필요하긴 필요하다 " 라는 동의를 얻어내어 겉으로는 꽤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커민은 사실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유신정부의 지도자 량홍즈는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왕징웨이는 왕커민을 만난 후 량홍즈를 만나러 갔으나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왕징웨이와 그의 세력이 신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확실한 거부를 보였다. 왕커민과 달리 신중앙정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둘 째는 일본의 반대였다. 일본은 스스로 일화협의기록의 작성과정에서 왕징웨이측의 중앙정권 필요성을 인지했지만, 왕징웨이가 생각한것처럼 거대한 중앙정권을 구성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본은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가 유신정부-임시정부보다 조금 확대된 수준에 그치는 정부를 구성하길 희망했다. 지나방면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나방면군에게 난징을 비롯한 화중지역은 괜찮지만, 당시 중국의 주요철도가 지나가고 수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화북지역만은 자신들의 강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진행해왔던 이들에게 다시 화북을 넘겨준다는 일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1939년 6월 6일에 '수립신중앙정부적방침(樹立新中央政府的方針)" 을 통해서 이미 화북지역을 특수지역으로 만들어 왕징웨이의 새로운 신중앙정권과 분리하기로 결정을 지었던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의 희망사항은 더더욱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1939년 7월 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는 다시 긍정적으로 진행되게 된다. 첫째는 유신정부측의 호응이다. 이전 대민회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유신정부의 구성원들은 임시정부의 구성원들과 달라 왕징웨이측에 조금더 호의적이었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 본인은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의 일반적 구성원들은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안을 받아드릴 수 있었기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둘째는 왕징웨이측의 타협이다. 자신의 제안이 작동하기 어렵다는 걸 알자 왕징웨이는 결국 신정부에서 기존 두 정부의 지분을 인정해줄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앞에서 보았듯 기존 두 정부세력이 완전히 자신에게 흡수되는 것을 희망했지만 기존 정부의 지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요구했던 화북-몽강 지역의 특수성도 사실상 인정해버리면서, 자신의 구상에 반대하는 일본측과 기존 두 정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협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셋 째는 일본측의 압박이다. 왕징웨이의 막대한 중앙정부계획에는 반대를 표했던 일본이지만, 일단은 중앙정부를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수립하기로 약속한 만큼, 그리고 왕징웨이의 구상이 타협과정을 거치며 약화된 만큼, 정부 수립에 있어 충분히 자신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생각한 일본은 이제 왕징웨이측의 중앙정권 구상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에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호의를 보였던 유신정부 외의 임시정부, 몽강측도 결국 통합과정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타협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위가 인정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1939년 9월 19~20일 난징에서 개최된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는,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가 모두 참여하여 아닌 왕징웨이의 중앙정부 성립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왕징웨이가 왕커민, 량홍즈와 각자 만나 논의를 한바는 있었으나, 이 9월의 만남은 3명이 처음으로 만난 회의가 되었다. 1939년 12월 15일 진행된 제 7차회의에서는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통합논의기구인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를 해산하고 왕징웨이측의 신중앙정부 성립에 매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과정에서 왕징웨이가 추진하는 중앙정치회의에 보낼 양측 인사의 선정과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논의에서는 새롭게 수립될 정부를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구성으로 언제 설립할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부 성립을 위한 다음단계를 위한 논의와 회담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칭다오 회담이다. 본 회의는 1940년 1월에 개최되었지만, 회의에 대한 언급은 이미 11월 즈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11월 2일의 보도에서 "왕(汪), 왕(王), 량(梁)" 3인의 2차회담으로 칭다오 회담이 멀지않았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왕커민은 1939년 11월 24일, 도쿄를 방문하여 진행한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중앙정권 수립문제에 관해) " 칭다오 회담과 같은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진행은 생각보다 빠를지 모른다" 라고 이야기하며 칭다오 회담이라는 가능성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1939년 12월 30일 일화신관계조정요강 (日華新關係調整綱要) 이 서명되고, (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이 얼마나 불평등한 것이었는가는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1940년 1월 8일 일본 정부는 신정부수립의 기본방침을 확정짓고 왕징웨이의 신정권수립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1940년 1월 15일, 임시정부의 왕커민, 유신정부의 량홍즈, 그리고 몽강의 덕왕에게 회담초정장을 보냈다. 왕징웨이측은 왕(汪), 왕(王), 양(梁) 셋의 만남으로는 부족하며 여기에 몽강까지 참가하는 넷의 만남이 되어야함을 주장했다. 이는 자신이 구상하는 신중앙정권에 미온했던 몽강측이 적극적으로 임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은 초대장을 발송했다. "작년 9월 말 난징에서 회담하였을 때 여러 가르침을 받고 여러 의견을 교환한 것에 대해 감명을 그치기가 어렵다. 그후 수개월 간 각 사항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절충과정을 거치며 성숙해졌기에 이제 중앙정치회의를 조직하여 화평을 촉진하고 헌정을 실현하는 건에 대해서 한걸음 더 진보하는 것을 검토를 가하여 실행을 기하려 한다. 이에 금월 하순 칭다오에서 회담을 하여 협의를 하길 희망한다. " 이에 임시정부의 왕커민, 유신정부의 량홍즈가 응했고, 왕징웨이의 기대와 달리 몽강측은 응하긴 했으나 수장 덕왕이 아닌 리서우신 (李守信) 국가부주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몽강과 일본측에 의해 다분 의도된 것으로, 왕징웨이측으로 흡수되기로 스스로 결정한 유신정부와 겉모습의 형태라도 통합의 형태를 띄기로 했던 임시정부와 달리 이미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로부터 구분되는 특별지위를 이미 약속을 받은 상황인데다 일본이 몽강을 신중앙정부 체제속 '중화민국'과 구분되는 '제2의 만주' 로 만드려는 의도를 의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본 회의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본회담을 "3거두 (三巨頭)" 의 회담이라 칭했다. 여기서 3거두는 각각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이시점에선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고, 왕커민과 량홍즈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칭다오를 회담지로 선정한 것은 여러 이유가 존재했는데, 첫째, 칭다오는 당시 상하이에 있던 왕징웨이도, 화북의 왕커민도, 난징의 량홍즈도, 몽강의 리서우신도 모두 접근하기 편리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칭다오는 4명의 대표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난징이나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면 이는 한쪽에게 치우친 개최라고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셋째, 칭다오는 중일전쟁에서도 큰 파괴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칭다오가 명확한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칭다오는 일본 & 일본의 괴뢰정권 영향이 확실히 미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칭다오는 일본에게도, 일본의 괴뢰정권에게도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칭다오 회담이 개최된 칭다오 영빈관 (青島迎賓館) , 이곳은 1905년 과거 칭다오가 독일 조차지였던 시절, 독일 총독의 관저로 지어졌다. 주최측은 경호상의 편의를 위해 칭다오의 영빈관 (구 독일총독관저) 를 선택했다. 영빈관의 1층에는 회의장을, 2층에는 왕징웨이측이 머물게 했다. 왕커민과 량홍즈, 리서우신이 묵었던 칭다오 태평로의 칭다오 호텔일대 사진. (과거 프린스 호텔 (Hotel Prinz Heinrich) 자리 ) 현재는 보이는 4개 건물중 왼쪽에서 두번째 건물만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왕커민과 리서우신, 량홍즈는 칭다오 영빈관에서 가까운 태평로의 칭다오호텔에 묵게했다. 칭다오는 경찰과 주둔해 있는 일본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들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회의장에는 35대의 차량이 동원되었으며, 일본은 영빈관의 직원들과 흥아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모두 흥아원에서 준 興(흥, 흥아의 약칭) 이라는 약장을 차게 하였으며, 신문기자들은 칭다오 호텔에서 대기하다가 필요시에만 영빈관을 방문할 수 있게 했다. 충칭측은 이러한 칭다오회담의 개최소식을 듣고 칭다오에 파견되어 있던 군통 푸성란 (傅勝蘭, 부승란) 요원으로 하여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왕징웨이 일행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으나, 오히려 푸성란의 상관이었던 군통의 왕티안무(王天木, 왕목천, 1891~1995)가 전향하여 왕징웨이가 칭다오에 도착하기 전 이를 일본측에 알리게 되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푸성란은 체포된뒤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결국 76호측에 의해 포섭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인사가 되게된다. 푸성란은 왕징웨이 정권아래 무려 항저우 시장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국민정부에 의해 처형당하게 된다.) 1940년 1월 21일 (일) 대련기선 (大連汽船) 의 호텐마루 (奉天丸) . 이 여객선은 쇼와 3 (1928) 년 건조되어 일만연락선으로 사용되다가, 쇼와 13 (1938) 년 부터 상하이-칭다오 구간은 운항했다. 왕징웨이 일행과 량홍즈 일행은 배편을 통해 칭다오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징웨이와 량홍즈는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전 9시, 둘과 일행은 상하이에서 칭다오로 향하는 대련기선의 호텐마루(奉天丸) 에 탑승하였다.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메이쓰핑, 츄민이, 린바이셩 등을 데리고 왔고, 량홍즈 또한 자신의 관원을 함께 데리고 왔다. 21일 오후, 왕커민이 가장 먼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관원들을 데리고 칭다오에 도착했다. 왕커민은 도착과 함께 바로 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같은날, 이탈리아 왕국의 치아노 외무상은 스테파니 통신 (Agenzia Stefani) 를 통해 왕징웨이에게 "왕징웨이씨의 신중앙정부수립에 대하여 이탈리아 왕국은 왕정위씨의 친우(親友) 로써 어떠한 지원도 망설이지 않겠다" 라는 전보를 보냈다. 왕징웨이도 회담이후 답보를 보냈다. 1940년 1월 22일 (월) 22일 오전 3시 30분, 몽강의 리서우신도 비행기를 타고 칭다오 창커우 비행장 (滄口飛行場, 현재는 군용비행장) 에 도착했다. 리서우신도 도착과 함께 칭다오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왕징웨이와 량홍즈 둘과 일행을 실은 호텐마루는 22일 새벽 4시에 칭다오에 도착했고, 도착후 왕징웨이 일행은 영빈관으로, 량홍즈 일행은 칭다오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한후 왕징웨이는 일본군 칭다오 사령관이었던 오오시마 켄이치 (大島健一) 사령관을 만나 감사인사를 전했다. 영빈관에서 기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하는 왕징웨이. 오후 5시, 영빈관에서 왕징웨이는 국내외 기자단 약 70 여명과 접견하여 '화평운동의 진의' 라는 이름의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평운동의 진의 (和平運動之眞義) 나는 화평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화평운동은 첫째 , 동아의 대국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중일 양국의 공존공영은 화평 없이는 할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따라서 이는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구차하게 평온하게 지내려하는 것이 아니다. 화평운동은 둘째 , 중일 양국의 백년대계이자 공존공영의 기초를 심는 것이지, 일시적인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화평운동은 셋째 , 일종의 사상, 일종의 신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는 중일 양국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전쟁은 양국을 모두 해치나 화평은 공존공영을 이뤄낼 수 있기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지, 권모술수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여러 해 동안 가지고 있어왔다. 그리고 이는 고노에 성명 이후 일본 국민들의 공통된 입장이 되었다. 일본은 동아보위의 책임을 가지고 중국이 이 책임을 분담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동지들과 함께 화평운동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중국이 패배하게 된다면 어떤 힘에도, 어떠한 세력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진실되고 영구적인 화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사상과 열정적인 신념을 가져야 한다 확실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신념에서 비롯된 세력은 진정한 세력으로서 화평운동의 기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국 민중, 특히 뜻있는 청년들의 공통적 이해과 공통적 책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화평운동은 이렇게 기초가 확립되어야만 중간에 변질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으며, 무력과 다른 세력의 건설은 그 기초 이후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야만 화평운동이 권모술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상과 신념이 화평운동의 점진적인 진전으로 이어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이 우리가 맡은 사명을 완전히 달성하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깊게 믿는 바다. 이후 기자회견이 진행되었고, 이자리에서 린바이셩은 왕징웨이의 화평사상이 위대한 사상임을 이야기하며 기자들에게 화평사상의 위대함을 자랑했다. 1940년 1월 23일 (화) 오전 10시, 본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 회담이 개최되었다. 추운날이었던 이날, 리서우신이 가장 먼저 영빈관에 도착하여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몽강의 리서우신을 만나 회담을 진행하였다. 리서우신은 중일전쟁의 발발이후 내몽골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외몽골과 신강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당의 항일운동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고, 저우포하이는 중앙정치회의의 성립 방침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서우신은 저우포하이는 화평과 반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에 있어 의견을 모았고, 리서우신은 저우포하이에게 몽강도 중앙정치회의에 참가할 것을 이야기 했다. 저우포하이도 몽강측이 신중앙정부 아래에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분리될 것임을 이야기했다. 같은 시간, 왕징웨이는 왕커민과 량홍즈와 만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내일 열리게 될 본회담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간단했던 예비회담이 11시 종료된 후, 왕징웨이는 직접 리서우신을 만났다. 왕징웨이는 몽강지역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빈번하다 지적하며 몽강측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덕왕과 리서우신의 몽강 통치를 극찬했다. 점심시간, 왕징웨이는 왕커민, 량홍즈, 리서우신과 함께 만찬을 같이하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영빈관에서 칭다오 시장이 주최하는 연회가 개최되었다. 이자리에는 왕징웨이와 왕커민, 량홍즈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주요인사들이 참가했다. 1940년 1월 24일 (수) 회담 장면. 왕징웨이의 왼쪽에 썬글라스와 같은 안경을 쓴이가 왕커민, 왕징웨이와 대화하고 있는 오른쪽의 인물이 량홍즈다. 왕커민 쪽에는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량홍즈 쪽에는 유신정부의 인사들이 앉았다. 이날은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며 눈이 펑펑내리는 날이었다. 이날 새벽, 리서우신은 일본의 군용기를 타고 다시 몽강으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제 1차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진행은 왕징웨이가 맡았다. 왕징웨이는 회의를 시작하며, 삼민주의의 진제 (眞諦, 진리, 제일의 진리) 라는 이야기를 회의장에서 진행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민주의의 진제 (三民主義之眞諦) 삼민주의는 구국주의로, 중국을 차식민지 지위에서 해방시키고 국가의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민족해방은 정치해방은 민권주의, 경제해방은 민생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삼민주의는 민족을 구하는 구국주의이지만, 동아주의, 세계주의와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삼민주의는 기본정신을 중국 고유의 도덕에 두어 화평을 신조로 하고 침략을 능사로 하지 않는 패도가 아닌 왕도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반드시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동아의 일원이자 세계의 일원으로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을 이룰 것이다, 손중산 선생의 죽음 이후, 그의 도당들은 삼민주의에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삼민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사상의 유행에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당 외부에서는 삼민주의에 대한 ‘오해’를 하지만, 이는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원이 하고 있는 ‘곡해’는 심각한 것이다. 따라서 삼민주의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는 편협한 국가주의가 아니며, 민권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아니며, 민생주의는 맑스의 공산주의와 다른 것으로 양립할수 없다는 것을 삼민주의를 믿는 이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기에 이번 회의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왕징웨이의 말이 끝난 후, 회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신중앙정부의 수립방법, 정치와 강령등에 대해서 논의 되었다. 가장 먼저 논의된것은 신중앙정부수립대강 (新中央政府樹立大綱) 으로, 여기서 신중앙정부를 친일, 화평, 반공을 신중앙정부의 근본적 방책으로 삼고, 신중앙정부의 구성은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 조직과 기존의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과 기타 정치세력과 정치인사들을 모두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만약 충칭측이 화평을 선택한다면 이를 포용하기로도 결정했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중앙정치회의는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 뿐만 아니라 여러 당파, 여러 인사들이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왕(汪), 왕(王), 량(梁)은 그리고 새롭게 수립될 신중앙정부가 이전 국민정부의 법통을 잇기로 결정하며 명칭을 '국민정부 (國民政府)' 로 하고, 수도를 난징 에 두기로 합의, 결정했다. 그리고 새롭게 수립될 국민정부의 깃발은 이전의 청천백일기를 다시 사용하되, 구분을 위해 노란색 삼각천을 위에 달고 '화평반공건국' 혹은 '화평건국' 의 구호를 달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일본측과는 이전부터 논의가 끝난 것이었으나, 왕커민, 량홍즈을 비롯한 기존 정권 구성자들과는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 또한 신중앙정부의 수립시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여기서 왕커민과 량홍즈는 왕징웨이측의 방침에 따라 신정부를 설립, 그리고 기존의 유신정부를 해체, 임시정부는 개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오후에는 다소 특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는 회의 바로 직전이었던 1월 22일, (당시 왕징웨이는 칭다오로 이동중이었기에, 왕징웨이가 이소식을 접한 것은 칭다오에 도착한 후였다. ) 가오쫑우와 타오시성이 홍콩으로 탈출,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가 체결한 일화신관계조정요강 (日華新關係調整綱要) 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임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셋은 갑작스러운 이러한 폭로에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이 셋은 회의를 거쳐 오후, 왕징웨이는 로이터 통신과 UP (United Press, 미국의 언론사) 를 비롯한 대내외 기자들을 모아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가오쫑우와 타오시성의 주장이 '허위' 임을 주장했다. 고도(高陶) 사건에 대해 타오시성, 가오쭝우는 모두 화평운동의 시작부터 참가한 이들 이었으나, 작년 3월 21일 쩡중밍 동지가 하노이에서 암살 당한 이후, 두 사람은 비겁한 모습을 보여왔다. 내가 하노이에 있을 때 나는 가오쭝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그가 홍콩으로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타오시성은 우유부단하고 흔들리며 방향을 잃어 가오쭝우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처음부터 함께 해온 동지였던 만큼, 이들을 관대하게 대해왔다. 지난 해 11월, 나는 그들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작년 11월 5일, 중국에 있던 일본인의 일부 시험계획서들을 훔치기도 했다. 그들은 이를 진귀한 것으로 여겼고 이는 충칭과 결탁한 것이다. 이는 비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짓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온갖 유혹에 빠져 인격을 상실한 모습은 정말 비열하고 매우 원망스러운 것이다. 다만 어떤 운동에서든 이런 패륜아들에게 벌을 억지로 줄 필요는 없다. 이러한 무뢰한 행동의 결과는 자신을 도태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대국 자체에는 큰 손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충칭이 공산당의 의 음모에 빠져 있을 때 화평운동에 종사해왔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고, 오늘날 중국에는 화평 이외에 다른 자구책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화평운동은 나날히 발전하며 성공을 이루고 있다. 나라가 찢어지고 가족이 무너지고 있는 이 때에,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항전에 실패하면 항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화평에 실패하면 화평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서양단(首鼠兩端) 의 행태는 잘못된 길로 나아갈 뿐이다. 이제 나와 나의 동지들은 모두 맹렬하게 전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중간에 변절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절자들은 오랫동안 변절에 대한 마음을 품어왔던 만큼, 이들이 사라진다면 화평운동의 순수함과 광명은 더욱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화평방안은 최근 중일 쌍방이 양국의 백년대계 및 동아의 장래를 위해 서로 양해하고 양보하여 중국의 부흥기반을 마련하고, 그 능력으로 동아의 화평과 신질서의 책임을 분담하게 하는 것이지,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이 조작하여 발표한 문서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담화에서는 가오쭝우와 타오시셩에 대한 인격적 비판과 함께, 폭로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의 조작에 의한 것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내용이 진짜임이 밝혀지게 된다.) 회담이 끝난 후, 왕징웨이는 '법통 문제 (法統 問題)' 라는 담화를 발표, 왕징웨이와 왕커민, 량홍즈가 어째서 국민정부의 법통을 잇기로 결정하였는지, 어떻게 그 법통을 이을 것이며 자신들이 구성하게될 새로운 '국민정부'는 어떤 모습인지,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는 어째서 법통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법통문제 (法統問題) 중일전쟁은 점차 진정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전국의 역량을 집중시켜 중앙정부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법통 문제다. 중국이 통일된 중앙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낡은 법통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통을 세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혁명의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시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쟁은 과거 국민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국민정부의 정치체제가 잘못되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시국을 수습하는 목적은 대외적인 화평을 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대내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책은 마땅히 수정되어야하고, 정치제도나 법에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적당한 수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의 법통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필요는 없다. 이는 혼란만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존의 법통을 계승하되,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과거 국민정부의 법 제도가 비난받았던 이유는 전국의 정치를 추진하는 중앙정치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오직 중국국민당의 중앙위원으로 제한되며 당 외의 인사들이 참석하지 못해 외부로부터 독재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년에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을 때, 이를 개선하기로 결의하여 대회 선언에서 이 취지를 표명한 바 있다. 앞으로 중앙정치위원회는 국민당 오직 1개 당만이 독점하지 않게 될 것이며, 모든 합법적 정당과 전국의 유능한 인사는 법에 따라 이에 참여하여 정치를 논하고 함꼐 협력할 수 있다. 이것은 헌정 실시의 첫걸음이며, 동시에 과거의 잘못된 법 제도를 교정하는 것이다. 충칭 정권은 현재 공산당의 압박을 받아 자유로이 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따라서 우리가 중앙정치회의의 의결에 따라 법을 개편하되, 기존의 정무를 그대로 집행하며 화평에 관한 논의를 끝마칠 수 있다면 법통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는 최단기간 내에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할 것이다. 이렇게 헌정을 실시할 수 있다면, 가벼운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가는 것처럼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른 정치 개혁과 달리 분규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방법이 어찌 계책이 아니겠는가? 1940년 1월 25일 (목) 영빈관의 정원을 구경하는 3인방. 이날도 눈이 내렸다. 오전 10시, 2일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본 회의에서는 전날의 회의보다 더욱 상세하고 복잡한 내용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왕징웨이는 우선 일본과 비밀리에 체결한 일화신관계조정요강 의 내용을 왕커민과 량홍즈에게 설명하고, 이후 일본과의 협상은 왕징웨이가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전날과 달리 빠른 합의가 이끌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이날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이 "그렇다면 정부를 '진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신중앙정부를 자신이 중심이 되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하려 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왕징웨이는 실제로는 그러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그랬기에 일종의 타협과정을 거쳐 현재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통합' 은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인가? 이날 회의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중앙정부의 조직구성에 대해 긴 시간동안 지속된 논의 끝에, 왕(汪), 왕(王), 량 (梁) 은 다음과 같은 합의를 도출해냈다. 1) 유신정부는 해체, 하지만 인사들은 고용 2) 임시정부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정부조직만 존속, 실권을 유지한채 중앙정권에 편입 3) 화북에서의 일본의 특권을 인정 4) 몽강의 경우 신중앙정권으로 편입하나 그 실권은 유지 5) 충칭의 린썬을 명목상 주석으로, 왕징웨이를 주석대리로 (만약 린썬이 전향하지 않으면 왕징웨이를 주석으로) 그리고 신중앙정부, 즉 난징에 세워지게 되는 국민정부에 행정, 입법, 사법, 감사, 고시의 5권헌법에 의거한 부서를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여러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는 이전 국민정부의 조직, 그리고 충칭 국민정부의 조직을 모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중앙정부의 내각에 참가할 인원을 내정하였다. 행정원 원장 겸 주석대리 : 왕징웨이 행정원 부원장 : 추민이 입법원장 : 천궁보 사법원장 : 원종야오 감찰원장 : 량홍즈 고시원장: 왕이탕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 : 왕커민 부주석 겸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 저우포하이 등등 여러 인원이 각자의 직을 받게 되었다. 인원 내정의 과정에서 3인방은 서로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서로는 자신과 자신의 인물을 요직에 내정하려 했고, 이 때문에 회의장에서는 과함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날의 완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를 대체하게될 조직인 화북정무위원회의 조직구성, 대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왕커민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혔고, 이때문에 왕커민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중앙정치회의의 요강및 규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중앙정치위원회의 규정에 대한 논의, 국민대회의 개최시기, 헌정의 실시시기에 대한 논의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중앙정치회의의 요강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 논의는 간단한 개괄적인 범위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3인방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중앙정치회의 개최 이후 결정하기로 결정했다. 저우포하이는 이후 자신의 기록에서 이런 회의의 모습을, 마작을 두는 이들의 모습에 비유했다. 마작패 (왕왕량3인방)들이 치열하게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이 마작패들의 운명은 모두 마작을 두는 이 (일본) 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1940년 1월 26일 (목) 회담의 마지막 날이었던 26일 오전에는, 왕징웨이가 10시 왕커민을, 11시에는 량홍즈를 각각 만나 중앙정치회의의 구성과 각 정권의 중앙정치회의 대표로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리고 3월 중으로 중앙정치회의와 신중앙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전날 중요한 내용이 많이 논의되고, 대부분의 상세한 사항은 차후 중앙정치회의에서 결정하길 합의한 만큼, 이날은 많은 논의가 오가진 않았다. 오후에는 왕(汪), 왕(王), 량(梁) 3인은 영빈관 1층의 중앙현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본 회의의 성과, 의의에 대해 발표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칭다오회담의 의의 (青島會談之意義) 작년 9월 말, 나는 일찍이 난징에 가서 왕 위원장과 량 위원장과 회담하면서 시국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고 모두가 화평의 실시, 그리고 헌정의 실시에 중점을 두었다. 제 1차 회담을 통해 시국 해결에 대한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오늘의 제 2차 회담을 통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으며 중앙정치회의의 조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중앙정치회의는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각 정당과 전국의 헌명한 인사들이 연합, 공동으로 조직하여 과거의 간극에서 생기는 폐해를 일소하고, 일치단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책임을 져 화평 정착을 위한 헌정 실시라는 원칙을 결정함으로서 새롭게 세워질 중앙정부가 이에 근거하여 성립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전국인민이 필시 한마음 한뜻으로 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전진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대외적으로는 중일의 친선관계 수립에 힘쓰고, 각우방과 국교를 돈목하게 하며, 대내적으로는 전후 건설에 힘쓰고 정치를 개편하여 인민의 고통을 해소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칭다오 회담은 실로 화평운동의 큰 발전이자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발표를 끝으로 칭다오회담은 마무리되었고, 다음날인 27일 오전 왕(汪), 왕(王), 양(梁)이 이별하여 비행기를 통해 각자의 장소로 다시 돌아감에 따라 칭다오회담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칭다오회담은,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즉 난징국민정부의 성립이 완전히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왕징웨이와 일본측은 신중앙정권 수립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해왔지만, '정부를 수립한다' 정도의 합의가 된 것이었지, 언제, 어떻게 정권을 구성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완전히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기에 왕징웨이측은 칭다오회담을 통해 확실하게 정권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 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동시에 왕커민과 량홍즈로 하여금 신중앙정권이 기존 왕커민과 량홍즈가 보였던 것과 다른, 국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국민정부' 일것이며, 그 신중앙정권의 수장은 자신임을 인정하게 하면서 신중앙정권이 왕징웨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될 것임을 확인했다. 즉, 칭다오 회담은 왕(汪), 왕(王), 량(梁) 3명의 꼭두각시가 모여 왕(汪) 이라는 꼭두각시가 가장 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왕(王)과 량(梁) 은 왕(汪)이 자신의 위에 서는것을 받아드리기 힘들었지만,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다. 회의는 완전히 왕징웨이의 주도에 의해 운영되었고, 일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분이 왕징웨이의 뜻대로 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앞에서 보았듯 일본측이 회담 이전부터 왕징웨이가 신중앙정권의 중심이 되어야함을 인식하고 양측에 대해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이렇듯 칭다오회담을 통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권, 즉 난징국민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과정 중 하나를 성공시켰다. 물론 자신이 완전히 바라던 바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 정부를 통합하여, 국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국민정부' 의 형태로 성립되는 '중앙정부' 를 세운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이 완전하지 못했던 성과의 결과는, 이후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이후 해체시기까지 평생 왕징웨이 정권의 약점으로 작동했다. [출처]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萬仁元, 『汪精衛與汪偽政府』, 1994 马庚存 , 「 汪伪青岛会谈述评 」, 『 历史教学 』, 2007 吕温泉 , 「 汪伪政权的出笼与“青岛会谈” 」, 『 春秋 1995年第4期 』 , 1995 青岛日报, 「 汉奸三巨头青岛会谈的幕后 」, 2015 회담 관련 사진 : https://www.sohu.com/a/289729832_120074111 영빈관 / 칭다오 호텔 사진 : 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문서 호텐마루 사진 : https://page.auctions.yahoo.co.jp/jp/auction/m149387788 호텐마루 정보 : http://www.tokusetsukansen.jpn.org/J/A501/AIC_5047.htm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9년 11월 ~ 1940년 1월 27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2%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9%95%EC%A0%95%EC%9C%84%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9%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 더 큰 노력으로 승리를 거두자 (以更大之努力獲致勝利 / 1944.1.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더 큰 노력으로 승리를 거두자 (대동아전쟁참전1주년기념방송) (以更大之努力獲致勝利) 오늘은 중국의 대동아전쟁 참전 1주년 기념일이다. 우리들은 이 기념일을 맞이하여 더욱 큰 노력을 가해 금년 최후의 결전에 공헌하고자 한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이래 영미의 침략세력은 이미 우방인 일본에 의해 산산조각났지만, 그 야심은 죽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짖어대며 반격해오고 있다. 하지만 영미가 1년동안 펼쳐온 소위 반격으로 인해 인력과 물자의 소모는 증가했을지 몰라도, 대동아의 전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에 맹방 일본의 육해군 장병들의 충직한 투쟁과 희생의 정신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다. 맹방인 일본은 군사적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 각 민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단결하게 하여 정치 방면에서, 경제 방면에서, 문화 방면에서 독립과 발전, 그리고 공동번영의 건설을 완성하려 하고 있다. 중일동맹조약이 체결된 후 중일 양국은 이미 영구적인 우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대동아선언의 발표 이후 대동아각국은 함께 전진하고 함께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잉는 맹자가 소위 이야기하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3가지를 모두 얻은것이라 할 수 있다. 최후 결전의 한해인 올해, 대동아 국가들은 충분한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도 오늘부터 더욱 분투하여 사상의 숙정, 치안의 확보, 생산의 증가라는 3대 요강을 기반으로 맹렬하게 노력하여 중국의 책임을 다하고, 대동아의 의무를 분담할 것이다. 충칭쪽에 대해 우리는 일찍히 여러 차례 충고를 해왔다. 카이로 회담 이후, 충칭은 점점 더 영미의 속임수에 빠져들며 더욱 잘못된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이는 우리에게 정말 유감인 일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단언하건데, 충칭이 영미에 가까워질수록, 전국의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최근 충칭이 스스로 항전하는 이유가 중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미를 위해 항전하고 있음을 전국 민중에게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칭은 영미의 동아침략, 나아가 영미가 뻗치고 있는 전 세계 지배의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미의 끄나풀을 자처하여 영미를 끌어들여 중국대륙을 전투기들의 폭격의 무대로 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아가 중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죽이고 중국인과 동아인이 서로 죽이게 하는 동종 자해의 역행을 행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를 전국 민중들은 반드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일동맹조약과 대동아선언의 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과 협력하고 대동아전쟁을 완수하며, 충칭의 허위 선전에 대해 승리로 보답하고, 충칭의 붕괴 이후 방황하게 될 민중을 포용할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