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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할것인가? (怎樣建設新上海? / 1943.8.1)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어떻게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할것인가? (상해공공조계환수기념방송) (怎樣建設新上海?) 오늘은 상하이가 완전히 다시 중국의 것이 된 기념일이다. 상하이 조계 가 생긴 이후 중국의 영토는 분열되었고, 중국의 주권은 완전해지지 못했다. 올해 1월 9일, 우방인 국민정부와 협정을 체결하여 조계를 조기 반환하고 치외법권을 철폐하기로 하였다. (1943년 1월 9일체결된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1943년 1월 9일 발표된 일화공동선언 (중일공동선언) 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톈진과 한커우의 조계반환을 시작으로, 지난 7월 30일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도 반환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상하이 공공조계도 반환되었다. 전국적으로 이제 백년전부터 오늘날까지 존재했던 이 조계라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의 톈진조계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으로, 9월에 톈진 이탈리아 조계가 반환되며 중국에서의 조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전국 교통의 중심지인 상하이는 오늘로써 완전히 중국의 주권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치외법권의 철폐도 우방인 일본과 국민정부가 합의하여 어제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1943년 7월 31일 체결된 중화민국에서 일본국신민에 대한 과세에 관한 일본국- 중화민국간 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그대들은 조계 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국제법에서는 이를 나라속의 나라 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대들은 치외법권 의 정의에 대해 알고 있는가? 국제법에서는 이를 해외 영토의 연장 으로 규정하고 있다. 모든 외국인들은 중국에 와서 중국 주권의 지배가 아닌 외국 주권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치외법권은 외국의 영토를 중국으로 연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조계가 치외법권이 존재하는 이상, 중국의 영토주권은 완전할 수 없고, 모든 정치는 이 나라 속의 나라의 영향을 받아 곳곳에서 제약을 받게 되며, 모든 경제도 외국인과 정당하게 경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외국인은 치외법권의 보장을 받기 때문이다. 외국인들 이 중국 내에서 엄연한 특권 계급 을 보유하고 있는데 어찌 중국인들이 그들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수십 년동안 중국의 상공업이 부진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이러한 불평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이제 치외법권과 조계는 동시에 소멸되었고, 중국의 영토주권은 완전해졌으며, 중국의 경제상황도 갱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방인 일본 은 어째서 이렇게 전력을 다해 중국을 원조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해야할 뿐만 아니라, 원조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 민중들이 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우방인 일본의 성의를 저버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현재와 앞으로 노력해야할 방향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이래, 국민정부는 엄중히 성명을 발표하여 우방인 일본과 동고동락할 것을 다짐하였고, 올해 1월 9일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同生共死) 의 각오로 대동아전쟁에 참전할 것을 정중히 선언하였다. 동생공사 라는 이 4글자는 그저 시의 구절도,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이 실로 마땅히 가져야 할 전국적인 일치된 결심이다. 왜냐하면 대동아전쟁은 전 동아 민족의 생사존망의 고비이기 때문이다. 백 여년 동안 세계를 휩쓸던 영미 세력은 동아에 와서 우방인 일본에게 잠시 격퇴당했고, 일본은 이들과 이제 최후의 승부를 펼치려 하고 있다. (왕징웨이정권의 태평양전쟁 발발당시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정권의 대영미 선전포고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우리는 대동아전쟁에서 반드시 이길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동아민족이 단결해야만이 이길수 있다고 믿는다. 일본이 이미 최전선에 서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만큼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함께 끝까지 노력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동생공사 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함께 죽을 각오로 함께 사는 것 으로, 함께 사는 것 은 동아 온 민족이 공유하는 염원 이라 할 수 있고, 함께 죽을 각오 라는 것은 그 염원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 라 할 수 있다. 동생공사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전쟁 이전에는 중일 양국이 외교, 군사에서 방침이 달랐던 것 이 이번 전쟁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일 양국이 함께 한 전선에 서있다. 일본은 중국을 전우로 여기고 중국이 힘있는 전우가 되길 바라고 있다. 중국의 영토주권을 완전하게 하고 힘으로써 원조하고, 중국 경제와 어려운 난민들의 생계에 대해서도 힘써 원조하며, 중국을 전우인 만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을 힘있는 전우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일본이 가하는 원조의 뜻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방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스스로 분발하여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전쟁은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 대동아전쟁의 경우, 파괴 는 영미의 침략세력을 분쇄하고 영미가 심어놓은 폐해를 제거하는 것 이고, 건설 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이 주창한 동아신질서의 건설로, 이 신질서라는 것은 이름만 거창한 빈 것이 아니며 최근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의 주창으로 그 내용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동아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동아의 공존공영을 이룩하는 것은 대동아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새로운 상하이 건설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영미 세력은 이제 완전히 제거되었고, 그 이후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만큼, 상하이 시민들에게 바라는 3가지 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영미의 세력 뿐만 아니라, 영미가 세워놓은 정체성을 타파하여 일소할 필요가 있다. 나는 상하이 시민들이 모두 신국민운동강요 를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적극적으로 실행하길 희망한다. 삼민주의의 민족주의 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아시아주의 를, 민권주의 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민권제도 를, 민생주의 를 실현하기 위해선 국가자본을 발달시켜야 함 은 모두 신국민운동강요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강령을 사상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쉽게하고, 행동에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자연스럽게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고 성공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신국민운동의 하계 2기 집단훈련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강조된 것은 조계의 환수와 이를 통해 시민들의 생각을 환기시켜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훈련은 공무원과 청소년에게 한정된 것이었으나, 이제 그 영향과 범위를 일반인에게로 확대 보급할 필요가 있다. (신국민운동강요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둘째, 상하이에는 5백 만명들의 시민들이 있다. 하지만 환경과 시민들의 직업, 특히 상공업은 조계지 때문에 곳곳에서 영미의 견제를 받아왔고, 이 견제상황이 오래되면서 상공업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농업은 상하이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상하이 시민들의 식량은 본토에 의존하고 있고 본토에서 공급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대량의 외국에서 쌀을 가져올 수 있어 근심 걱정없이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산업 및 상업, 원자재 측면도 그렇다. 면화를 예를 들면 본토에서 생산되는 면화는 공급이 부족하지만, 대량의, 가격도 좋고 품질도 좋은 면화를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지속적으로 수입할 수 있다. 따라서 원자재 부족에 대한 공포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세계전쟁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쌀의 수입은 어려워졌고 면화도 수입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런 만큼 상하이 시민들은 상하이도 어디까지나 본토와 불가분한 존재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상하이는 조계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란 시기 피난처가 되어 수십 년 동안 내륙이 병화를 겪고 있던 동안 호황을 누려왔는데 , 이는 옳지 않은 현상이다. 국민의 대의 는 나 혼자 살겠다며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국난이 닥쳤을 때는 일어나 함께 일어나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하였던 상하이의 모습은 대동아전쟁 이후 소멸되었다.옛말에 이르기를 ”산의 도적은 무찌르기 쉬우나, 마음속의 도적은 무찌르기 힘들다“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왕양명의 양명전서의 구절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상하이는 환경적으로 이런 예전의 폐습을 없애야 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이러한 예전의 폐습을 없애야 한다. 오늘날 상하이는 전체가 내륙과 다름없이 되었고 상하이 시민과 내륙 민중들은 서로가 동고동락하기를 바라고 있다. 상하이 시민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다. 이는 내륙 민중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다. 전시경제의 제1 요건 은 계획경제를 실행 하고 국가와 민족의 전반적인 이익을 고려하는 것 이다. 특히 전쟁의 승리를 위해야 한다. 전시에는 소모가 큰 만큼 생산도 커야 하기에 장기전에 대비하여 생산을 늘려야 한다. 정부는 여기서 생산자를 어떻게 지켜 생산을 계속 보장할 수 있게 할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생산을 증가시킬 것인지를 책임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민중들은 생산을 위해 힘쓰고, 국가민족에 공헌하여 전쟁을 승리하게할 책임이 있다. 나는 상하이 시민들이 그 상공업의 경험으로 여기에 힘써주길 바란다. 다시한번 이야기 하지만, 생산자를 지키는 것은 생산자들은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고 전쟁에 승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으로, 나는 이들 생산자를 지킴으로써 그들이 비용을 아끼고 생산을 이어나가며, 생산을 늘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투기 행위, 사재기행위 와 같은 것은 국가 민족에 해가 되는 것이며, 전쟁 승리의 적이며, 이는 지켜줄 것이 아니라 제재를 가해야 하는 것이다. 폭리는 언뜻 보면 생산을 자극할 수 있을 것같지만, 이는 사실 각성제를 복용하여 강건함을 도모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결국은 생산의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제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상하이 시민들이 소비를 절약하고 저축을 장려하는데에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한마디로, 개인을 위하는 것은 적어야하고, 국가민족을 위하는 것은 많아야 한다는 것 이다. 특히 이러한 전시 상황에서는 대동아전쟁에 협조하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데에 모든 것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나는 상하이 시민들이 예전 상하이의 중요성은 교통에 있기에 교통이 막힌 지금은 그 중요성이 상실되었다는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관론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교통이 두절되는 것은 전쟁기간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앞에서 나는 전쟁은 파괴이자 동시에 건설이라 이야기 하였다. 현재 대동아의 공영건설은 이미 시작되었고, 버마는 우방인 일본의 원조를 받아 자주독립을 이루었고, 필리핀 또한 곧 자주독립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영미 그리고 네덜란드의 식민지도 스스로 일어서려하고 있다. 일본은 동아민족을 단결시켜 공영을 실현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 대동아전쟁의 전쟁목적이 완성되면 동쪽으로는 필리핀 , 서쪽으로는 버마 , 남쪽으로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이 가진 모든 자원, 그중에서도 특히 쌀, 설탕, 휘발유과 같은 자원 들은 상호보완의 원칙에 따라 거래될 것 이며, 이러한 거래의 실시는 공영의 기초가 되어 공영권의 경제관계는 밀접하고 더욱 발달해질 것 이며, 공영권의 지역들은 경제발달로 날로 번영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기간동안 상하이 시민들은 상공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상하이가 완전무결하게 중국에 다시 속하게된 기념일이다. 우리는 이를 마땅히 축하해야하지만 단지 이를 축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의 중요한 사명을 받아드려야한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새로운 상하이를 건설해야 하고 이를 신중국 건설의 기점 으로 삼아야한다. 우리는 중국을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힘있는 국가로 만들어야 하고 , 상하이 가 그 관문이 될 수 있게 해야한다.
- 신국민운동 (新國民運動, 1941.11)
신생활운동 (新生活運動) 과 신국민운동 ( 新國民運動 ). 두 운동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두 운동 모두 국민계몽을 위해 작동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가진다. 이번 글에서는 왕징웨이 정권에서 행해졌던 국민계몽운동이었던 신국민운동에 대해 소개하면서, 동시에 이전에 장제스의 국민정부에서 행해졌던 , 마찬가지로 국민계몽운동이었던 신생활운동에 대해 소개하면서 신생활운동과 신국민운동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신생활운동 (新生活運動) 1928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베이징 (이후 베이핑) 에 입성했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성공하며 장쭤린(張作霖,장작림) 의 북양정부는 무너졌고, 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동북역치 (東北易幟) 의 과정을 통해 장제스에 저항하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봉천군벌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편견회의에서 군벌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이에 반대하던 세력들과의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0년대에 들어오며 중국대륙의 사실상 유일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초공작전이 5차에 이르러 효과를 보면서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떠나며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며 1934년의 시점에서 중국대륙 내에서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비록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잃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부의 대항세력들을 완전히 평정하는데 성공하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장제스는 이러한 안정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중국의 위기가 중국사회속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제창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확실한것은 신생활운동을 통해 그는 낙후된 중국사회를 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중국사회는 민국이 수립되었음에도 수립이후 지속된 혼란속에서 민중들은 알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지하고, 관리들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며, 혼란속에서 서구사회와 같은 선진적인 모습이 아닌 낙후된 모습을 계속 이어왔다. 장제스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왕징웨이 조차 중국사회를 흡연, 병, 도박, 오물, 귀신, 나태 로 묘사하기도 했다 . "현재 일반 중국인의 생활은 한마디로 야만적이고 불합리한 생활입니다. 보십시오. 밥 먹을 때 음식이나 식기가 더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도 벽이나 문에 기대어 먹으며, 어떤이는 앉아서 먹고 어떤 이는 무릎 꿇고 먹고 어떤 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먹고 어떤 이는 문밖에 서서 먹습니다. 다 먹은 후에는 밥그릇과 국그릇은 아무 데나 어질러놓아 집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한 번 물어봅시다. 이런 식사 습관의 어디에 인간이 식사하는 모습이있습니까? 이게 바로 야만적 생활 아닙니까? (중략) 소, 말, 돼지, 양이 사료를 먹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돼지우리, 고양이 밥그릇, 마구간이나 개집도 이렇게 더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 장제스의 "신생활의 의미와 목적(新生活的意義和目的)" 강연에서 또한 수많은 정부와 군벌이 난립하는 상황속에서 중국사회와 민중들은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와 국민들의 단결력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이러한 사회 전반에 퍼진 문제점들을 해결하여 국민들의 공산당에 선전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국민정부에 대한 전 국민적 충성을 확보하여 다가오는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국민과 정부의 단결로 이를 막아내려 했다. 所謂革命者,即依據一種進步的新思想,以人力徹底改進各個人以至整個國家之生活形態之謂。簡言之,革命即生活形態之改進也。吾國革命之所以迄今尚未成功,即在於全國國民之生活形態始終無所改進。 (소위 혁명가들은 진보적인 새로운 사상에 기초하여 인간의 힘을 이용해 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개선하려합니다 . 간단히 말하자면 혁명은 삶의 형태가 개선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혁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전국 인민들의 생활조건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 1934년 2월 장제스의 연설 신생활운동을 총괄했던 신생활운동촉진총회 (新生活運動促進總會) 의 로고 1934년 시작된 신생활운동은 유교와 기독교적 신념속에서 "삶의 혁명" 이라 부르는 삶의 질 개선을 통해 개선된 높은 생활수준 속에서 국민들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의 도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갖출수 있기를 바랬다. 신생활운동은 사유(四維, 예절(禮)과 청렴(廉), 의리(義)와 부끄러움((恥)을 아는것) 와 삼화(三化, 예술적, 생산적, 군인적 삶을 사는 것) 이라는 두가지 축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파리를 퇴치하고, 위생을 개선하고, 보다 청결한 삶을 살게 함으로서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고 , 노인공경과 아이들에 대한 보호, 예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국민들의 도덕성을 확립시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확립하고 국산품 사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절약운동등을 통해서 국가의 소중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을 확립 하려 하며 유교와 기독교의 청교도적 특징이 섞인 일종의 완전한 질서를 전국에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오래전의 유교가 20세기 공화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쑨원이 삼민주의에서 " 옛것은 버릴 필요가 없다 " 라며 옛 문화가 아직까지 통용될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적 가치의 경우 장제스 본인이 기독교 교도였고 쑹메이링을 비롯한 여러 기독교도에게 영향을 받았고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이를 통해 민중들이 이전의 낙후된 습관에서 벗어나고 국민들이 "아버지 (국가)에 충성하는 자식들(국민들)" 이 되기를 바랬다. 또한 이를 통해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견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생각과 달리 신생활운동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지만 국민들은 가부장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신생활 운동에 완전한 지지를 가지지 않았다. 특히 사회개혁과 항일을 이야기하던 젊은 세대 또한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가장 서양문물에 능하고 서양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젊은 세대에게 신생활운동은 '댄스홀 출입금지' 와 같은 신생활운동의 계획은 구시대적으로 받아드려졌다. 또한 신생활운동을 강요하는 남의사의 폭력적 행태는 국민들로 하여금 신생활운동에 더더욱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升降國旗要敬禮 (국기에 대해 경례) 라고 적힌 신생활운동촉진총회의 포스터 , 신생활운동의 주요목적중 하나는 중국국민들이 정부에 충성하게 하는데에 있었다. 신생활운동은 중일전쟁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장기항전을 위해 난징에서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또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함께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생활운동은 오히려 충칭에서 장제스 국민정부가 장기항전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신생활운동은 중국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국민적 전국 네트워크망에 가까웠다. 전시상황속의 총동원체제에 가장 적합한 단체였던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의 위상을 생각 할 수 있을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망을 이용해 충칭정부가 전쟁을 지속할수 있도록 빠르게 지원을 하기 용이했다. 이들은 성금을 모집하고, 공습으로 무너진 도시속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난민들을 구호하고, 부상병에 대한 지원등의 활동을 하면서 충칭정부의 장기항전을 지원하는 가장 중요한 단체 중 하나로 작동하면서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충칭이전 이후 겪었던 혼란을 최소화하고 충칭정부를 안정화 시켜 장기항전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장제스는 신생활운동의 사유를 "모든 이익을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 이라 해석하면서 신생활운동의 이념을 일종의 장기항전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 이전의 신생활운동의 목표가 국민들의 도덕,생활등의 개선에 있었다면 전시의 신생활운동은 전쟁을 향한 지원을 목표로 했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또한 다시 난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전투가 격화되면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못해 제대로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국민당의 패색이 깊어지던 1949년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촉진총회의 총장이었던 황런린(黃仁霖, 황인림) 에게 활동중지를 명하면서 신생활운동은 15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8년이라는 항전과 전후의 혼란속에서 본래와 다른 역할을 맡거나 제대로된 활동을 하지 못하면서 장제스가 추구했던 본래의 목표는 15년의 기간중 겨우 3년동안만 작동한 셈이다. 신생활운동에 대한 평가는 항일과 중국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부터 오히려 장제스 1인독재체제를 확립하기 위한것, 일종의 파시즘적 모습을 중국사회에 적용하려했다는 평가등 여러 평가가 존재하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는 두고 신생활운동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마치려고 한다. 신국민운동 (新國民運動) 신국민운동은 1941년 11월 12일, 왕징웨이가 중국국민당(왕징웨이정권) 제6기중앙집행위원회 4중전대(四中全會)에서 제안한것으로, 이는 화평반공건국(和平反共建國) 이라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의 대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중국국민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속에서 비롯되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 매주 1번씩 각 부처의 부장들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전반에 걸쳐 수십차례 토론을 하면서 진중한 협의과정을 거처 이 신국민운동이라는 안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안을 4중전대에서 소개하면서 신국민운동을 "사변(중일전쟁) 이전 장제스 국민정부가 행해왔던 신생활운동에서 일보전진하여, 신중국의 건설에 매진할 수 있게 전 중국국민당원과 전국민을 포괄할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뻗치는 대국민운동" 이라 소개하였다. 왕징웨이는 이 신국민운동에는 "자신에게 벌을준다" 라는 자신의 철학이 담겨있음을 이야기 했다. 이러한 모습은 왕징웨이가 어떤 생각으로 화평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왕징웨이의 안에는 크게 두가지 정강이 존재했는데, 그 두가지 정강은 다음과 같다. 1. 중국국민당원의 용기를 고무(鼓舞) 한다. 2. 전 중국국민의 용왕매진(勇往邁進, 거리낌없이 용감하게 나아감) 을 촉구한다. 그리고는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이 국민의 생활은 생각하지않고 국민정신에만 치중해버린 결과 실패하게 되었다고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정치와 민생의 혼연일체의 열매를 배양해 새로운 사상으로 중국 국민들을 새롭게 탄생시켜 "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된 신중국 " 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유래된것으로 생각된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국민운동이 신생활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하려 했다. 이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충칭에서의 신생활운동은 충칭정부의 일종의 이데올로기처럼 작동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장제스에 대적하는 왕징웨이의 난징정부는 이에 맞서 자신을 지지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충칭정부의 신생활운동에 대적할수 있는 새로운 범국민적 운동이 필요했다. 그리고 충칭정권과 전쟁 (이후 태평양전쟁) 이라는 환경속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총동원을 위한 단체가 필요했다. 이런 요구속에서 등장한것이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이었다. 하지만 신국민운동의 구상은 저우포하이를 비롯한 왕징웨이의 측근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진행이 되고 있었다. 이후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의 부단장를 맡게 되는 자이잉푸(載英夫, 재영부) 조차도 신국민운동의 구상을 왕징웨이가 직접 안을 발표하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고 하면서 신국민운동 구상이 왕징웨이와 측근 위주로 준비가 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이후 신국민운동은 1941년 12월 31일, 중국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제 76차 회의를 통해 《신국민운동강요(新國民運動綱要)》 를 통과시키고 다음날인 1942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이를 반포했다. 1942년 신년사에서 "신국민운동 만세!" 를 외치는 왕징웨이 : https://www.youtube.com/watch?v=9UblJCgZsK0 1942년 1월 1일자 중보(中報, 당시 中報는 난징정부와 충칭정부 모두에서 발행되었는데 위의 신문은 난징쪽의 중보이다) 에서 이야기하는 신국민운동강요의 내용. 전날 76차 회의에서 결정되었음도 이야기한다. 신국민운동강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신국민운동요강에는, 8개의 항으로 구분되는 '문장'만이 적혀있다. 즉 각 항을 상징하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1943년 중국국민당 난징지부가 이에 제목을 붙혔다. 여기서는 중국국민당 난징지부가 붙힌 제목과 원문을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신국민운동강요 (新國民運動綱要) 戰爭是國民的總檢閱, 詳細些說是一國民精神力的總檢問. 在四年有餘的痛苦環境裏, 我們同胞的優點, 以及缺點, 都盡情暴露來出一些不留遮蓋, 優點應該發揮光大, 缺點應當補救. 現在四年有餘的中日事變,巳一轉而爲保衛東亞的大戰爭, 在這新關頭, 沒有新精神, 怎樣能担負這新責任, 完成這新使命? 所謂新精神, 不完全指創造, 只要能去其舊染之汚,也是自新之一. 換句話說, 要有勇氣來承認缺點, 矯正缺點, 尤其是劣點更要有勇氣來掃蕩廓淸, 新國民運動, 就是着重於此. 전쟁은 국민에 대한 검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정신력의 검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년동안의 고통스러운 시간속에서 우리동포들의 장점과 약점 모두가 적나라하게 공개가 되었다. 우리는 이를 감추려 해서는 안된다. 좋은점은 빛을 발휘해야하고, 나쁜점은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 이제 4년간의 걸친 중일사변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한 대전쟁이 되었다. 이 새롭고 중요한 시점에서 새로운 정신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 새로운 책임을 지고 이 새로운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신정신이라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창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래되고 부정적인것을 새롭게 만드는 정신을 가르킬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 특히 약점을 쓸어낼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신국민운동이 강조하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新國民運動,不另標主義. 因爲我們原有三民主義, 以爲建設中華民國之根本, 我們現在所要問的是三民主義爲什麽不能實現, 這不是由於我們推行力不够, 就是由於我們研究力不够總而言之, 是我們精神力不够. 新國民運動務須對於此等缺點, 有對症下藥的決心與辦法,茲舉其綱要如左: 신국민운동은 특별한 별도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중화민국 건설의 근본이 되는 삼민주의가 있고 그것이 목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묻고 싶은 것은 삼민주의가 왜 실현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추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연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의 정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국민운동은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결단과 방법을 갖추어야 하며, 그 강요는 다음과 같다. 1. 대아시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동아국가의 상호 단결을 도모하고 동아를 공동보위한다. 我們爲什麽不能 實現民族主義呢? 因爲我們忘記了大亞洲主義. 「中國若不能得到自由平等,不能分担建設東亞的責擊,而中國自由平等之完全得到,必有待於東亞之解放」, 這幾句話,直到和平運動開始,方糧覺醒過. 來其實大亞洲主義裏早已諄諄啓示了. 爲什麽我們忘記了,至於把中國糟蹋到這般田地? 從今以後,把愛中國愛東亞的心打成一片. 東亞諸國, 互相親愛, 團結起來, 保衛東亞, 這是民族主義. 우리는 어째서 민족주의 (삼민주의의 구성요소중 하나) 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대아시아주의(대아주주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 중국이 자유와 평등을 얻지 못하면 동아 건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할 수 없다. 또한 중국의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획득된다면, 반드시 동아의 해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말들은 화평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각성하지 못했다. 사실 대아주주의는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시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이를 잊어버리고 중국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버린것인가? 이제부터는 중국을 사랑하고 동아시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한다. 동아의 모든국가가, 서로를 사랑하고 단결하여 일어나 동아를 보위하는것, 그것이 민족주의다. 2. 민주민권제도를 확립하고, 단체를 조직화하고, 행동을 규율화한다. 我們爲什麽不能實行民權主義呢? 因我們忽略了民主集權的制度. 所以表面上崇拜民治實際上造成個人獨裁. 從今以後, 我們的團體要組織化, 行動要紀律化. 一件大事, 未決以前充分的研究. 既決以後, 一致的實行. 時時想著知難行易, 勇猛的實行, 即是忠實的求知之要著, 這是民權主義的著重點. 우리는 어째서 민권주의 (삼민주의의 구성요소중 하나) 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민주 집권 제도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만 보이는 민치 (민주주의) 는 사실상 개인독재를 초래해버린다. 이제부터 우리의 단체들은 조직화가 필요하며, 행동의 기율화가 필요하다. 하나의 큰일이 있을때, 결정을 내리기전에는 충분한 연구를 해야하고, 결정을 내린 후에는 어긋남이 없게 이를 실행해야 한다. 항상 지난행역 (알기는 어렵고 행동하기는 쉽다, 知難行易, 쑨원의 말) 을 염두하면서 용맹하게 실행하는 것은 바로 충실한 지식 탐구의 요지이며, 민권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3. 생산을 증진하고, 소비를 절약하고, 국가 자본을 발달시킨다. 我們爲什麽不能實行民生主義呢? 因爲我們忽略了發達國家資本. 我們如能著重於此點,則國家資本發達, 私人資本自然歸於節制.共匪則無所藉口以鼓吹階級圖爭,英美之經濟侵略亦無所施其技. 何致演成共匪與英美侵略互相呼應左右夾攻的現象? 從今以後,我們要以銖積寸累的精神,來發達國家資本. 這是民生主義的著重點. 우리는 어째서 민생주의 (삼민주의의 구성요소중 하나) 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국가 자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이를 중요시여긴다면, 국가자본은 발달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민간자본은 절제될 것이다. 공산주의 비적들은 계급투쟁을 옹호할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며, 영국과 미국의 경제 침략이라는 재능을 부리는 것도 불가능 하게 된다. 어찌하여 공비와 영미의 침략이 서로 호응하여 좌우로 협공하는 현상을 연출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수적촌루 (銖積寸累, 조금식 조금식 모으다) 의 정신으로 국가자본을 발달시켜야 하며, 이가 민생주의의 중심이라 할수 있다. 4. 멸사봉공 (滅私奉公 ,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하여 힘써 일하다) 三個重點着手, 我們如要從以上則不可不增加我們的精神力 ,以推行一切,研究一切, 因此我們首先要倡導公而忘 私的精神,個人對於國家, 貢獻要多,享受要少,平日嗇一己以裕國家,臨難財 牲一已以救國家。 (위의) 3가지 중점을 시작할때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력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추진하고 모든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공리망사(公而忘私,공적인 일을 위하여 사사로운 일을 잊다) 의 정신을 제창해야 한다. 5. 선을 즐기고 , 악을 부끄러워하며, 남을 겸양있게 대우하고, 일을 명쾌하게 처리한다. 人與人的相處是國家民族力量團結的樞紐. 我們對於人與人相處,要牢記以下數項, 說話要老實,心事要光明, 善善要能用,惡惡要能去並要有聞人善則喜,聞人過則悲的精神,使人樂於爲善 ,恥於爲惡,至於同事間之 相處,尤其要同甘苦,均勞逸, 撵誕美, 勿掠美, 冉任過, 勿諉過, 不這樣, 不配說精誠團結.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은 국가민족역량단결의 중추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다음과 같은 항목을 명심해야 한다. 정직하게 말하고, 생각이 밝아야 하며, 친절을 베풀 수 있어야 하고, 나쁜 일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좋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 기뻐하고, 나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슬퍼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이를 즐겁게 하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할때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데 있어서는 동고동락하고, 일과 휴식을 함께 하며, 미의 탄생을 쫓아야하고, 미을 빼앗아선 안된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실수를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된다. 이러한것이 없다면 정성단결(精誠團結,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함 ) 이라 할 수 없다. 6. 부화천박 (浮華浅薄, 겉만 건지르르하고 천박함) 을 경계하고 충실히 지식을 추구한다. 浮囂淺薄是斷送國家民族的根由, 我們知道我們缺固多而行動不能紀律化,知識不能科學化是缺點之最大者. 從今以後, 紀律要由個人以及於全體, 科學不但要普及尤其要深造. 천박하게 떠드는것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적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점이 많아서 행동을 규율할 수 없고, 지식을 과학화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부터 규율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과학은 단순히 보급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7. 물자를 아끼고 절약을 실행한다. 中國大多數人, 都是赤貧,說不上節約,所以增加生產最爲當務之急. 然卽就節約來說 ,用之得當, 於民生國計兩有裨益. 如多種雜糧,替 代稻米,便是一個極顯的例至於極少數人厲行節約, 不只是經濟上的原因,而且是道德上的原因, 就經濟來說,消極的把無益的消耗節約起來,積極的可用之於更有效的方面. 就道德來說, 目擊大多數人如此貧困,不節約,在良心上說不過去。 중국의 수많은 민중들은 극도로 가난하기에 "절약" 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절약의 용도가 적당하다면 이는 민중들에게도, 국가경제에도 이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잡곡으로 쌀을 대체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예가 될 수 있을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이유도 있는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쓸데없는 소비를 절약하고, 이를 보다 효과적인 측면으로 활용될 수 있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극도로 가난한 모습을 목격했는데도 절약을 하지 않는것은 양심상 말이 되지 않는다. 8. 청렴결백으로 약빈(弱貧, 약하고 가난함) 을 절멸시킨다 從政治社會做起在最短期間,必須做到弊絕風清. 每一個公務員,每一個軍人, 固應該得到生活上的保障, 但絕不能藉口於生活上不滿足, 而有貪污瀆職的行爲. 我們要本着"一家哭何如一路哭的精神, 對於每一個貪汚職的人,要像對於蝗虫一樣, 毫不留情的予以滅絕。 정치사회를 시작으로 최단기간 내에 폐단을 없애고 풍속을 깨끗하게 해야하며 모든 공무원, 모든 군인은 반드시 생활상의 보장을 받아야 하지만, 생활상의 만족을 구실로 하여 횡령과 배임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어찌 같으랴 ( 一家哭, 何如一路哭 , 북송의 학자 범중엄의 말)" 에 입각해 부패한 공직자들을 모두 메뚜기 떼처럼 무자비하게 절멸시켜야 한다. 以上所舉,包括精神方面的總動員及物質方面的經濟建設,雖然卑無高論, 然而我們要救中國, 要保東亞, 舍此無可由之道. 所以發起新國民運動,以之自勉,亦以之共勉,至於各項條目, 根據綱要, 隨時議訂, 隨時頒布施行.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신적인 측면의 총동원 및 물질적인 측면의 경제건설은 비록 미약하나 그러나 우리는 중국을 구해야하고, 동아를 보위해야하기에 이 길 외에 다른길은 없다. 그러므로 신국민운동을 발기하여, 이에 자력과 상호 격려를 위한 신국민운동이 발기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요강에 따라 수시로 논의되고 공포되어 시행될 것이다.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강요에서 삼민주의가 이전의 체제 (장제스 체제) 에서 실현될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며 충칭의 장제스정권을 공격했다 (특히 장제스가 헌정을 약속해놓고 끝까지 실현하지 않고 독재를 이어나가는 점 등) 또한 삼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국민운동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과 국가가 하나가되는 일종의 총동원체제가 완성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후 1942년 2월 1일에 왕징웨이는 직접 라디오에서 "대동아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총체적 정신적 동원의 실시" 를 이야기 하면서 신국민운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3월에는 난징에서는 신민족운동의 발전을 도모하고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댄스홀 출입을 금지하고 여교사들의 머리 파마를 금지했다. 댄스홀 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이라니, 어디서 본 것같지 않은가? 그렇다. 앞에서 소개한 신생활운동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하지만 신생활운동에서는 어디까지나 댄스홀 출입을 금지해야한다는 제안이었으나, 신국민운동에서는 실제로 행해졌다.) 1942년 6월 2일,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조직규정(新國民運動促進委員會組織規程)" 을 통과시키고 신국민운동을 더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조직을 확대했다. 그리고 이 규정에서는 신국민운동의 일일 기획, 홍보, 조직 및 훈련 신 중국동자군 (中國童子軍) 의 결성, 지도 및 훈련 신 중국청년단 (中國青年團)의 결성, 지도 및 훈련 이 규정되었다. 여기서 "신" 중국동자군 (한국의 보이스카우트에 대응) "신" 중국청년동맹 (중국국민당 청년조직)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이미 충칭정부에 이와 같은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중국보이스카우트" 라는 이름을 쓰는 조직이 두개가 있게 된것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국동자군 (中國童子軍). 겉으로는 다른국가의 보이스카우트 활동과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뉴스 제 63호에서 "대동아신문기자대회 ( 자세한건 여기서 ) 를 보도하면서 등장하는 중국동자군의 행진 , 동자군마크가 보인다. 여기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두개의 청년조직의 단장은 왕징웨이가, 선전장관이었던 린바이셩( 林柏生 ,임백성, 린바이셩은 이런사람 ) 이 사무총장을 맡고, 저우포하이와 이전 유신정부의 요인이자 행정원 내무부장 이었던 첸쿤( 陳群) 이 상무위원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된 두개의 청년조직은 일반적인 보이스카우트와 청년조직의 개념보다는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두개의 청년조직은 왕징웨이에 충성을 하고, 왕징웨이 정권의 사상으로 무장한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중국동자군과 중국청년단은 1943년 3월 "중국청소년단" 으로 통합된다. (사진은 국민정부 환도3주년 기념행사에서 행진하는 중국청소년단 여성단원들. 앞의 단원이 들고 있는 청천백일문양에 화살이 3개 꽃인 저 문양이 중국청소년단의 로고로 추측된다.) 1943년은 신국가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해였다. 1943년 1월 9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 했다. (왕징웨이정권의 대영미 선전포고에 관해서는 이곳을 클릭 또한 이로 인한 영향에 대해 관해서는 이곳 과 이곳 을 클릭) 이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에게는 새로운 변환점이 되었다. 국가가 이전의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전시상황에 돌입하게 되었고, 또한 난징정부의 참전으로 인해 일본이 난징정부에 가하는 정책과 시선도 바뀌게 되었다. 난징정부의 선전포고로 부터 4일이 지난 1943년 1월 13일, 난징에서 신국민운동촉진대회 (新國民運動促進會議) 에서 왕징웨이는 "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은) 이것은 장기전이고 전면전이다. 우리는 동고동락과 동생공사의 정신으로 대동아전쟁를 전력으로 지원하여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얻어내야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중국의 평등과 동아의 공동번영을 실현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신국민운동을 대동아전쟁을 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날의 촉진대회에서는 물적, 인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한 실현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제안되기도 했는데, 그 제안들은 다음과 같다 국민 생활시간 규정 중요기술의 발명을 위한 유인책마련, 자원절약을 위한 대체재 및 폐기물 활용, 중국동자군과 중국청년단의 일원화 , ( 위에서 보았듯 2월 25일에 중국청소년단으로 일원화 ) 농업생산증대운동 전개 국민정신 총동원 강화 초·중학교 교육과정 개편, 춘절 연휴 취소 및 교직원 동원, 학생들의 조림운동 민족정신수련반을 개설 이렇듯 왕징웨이의 난징정부는 신국민운동을 지렛대 삼아 전쟁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 같은날 제1차 최고국방회의에서 행정조직개편안을 발표했고, 신국민운동과 이를 수행하는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는 정부직속 기구로 편입시키면서 신국민운동의 영향력을 높히려 했다. 그렇다면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어떤 이유로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이는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 정권을 작동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3대 운동 (신국민운동, 동아연맹운동, 청향운동)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요 3대운동이 보여주는 관계성. 표에서 볼 수 있듯 청향운동과 신국민운동,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을 작동하게 하는 중요운동이자 주변국,단체와의 관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 ( 차후 포스트에서 서술 ) 을 자신의 난징정부의 대외 이데올로기로, 신국민운동을 대내 이데올로기로서 작동시키기를 원했다. 또한 이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 ,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중국내에서 왕징웨이를 지지하는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청향운동 ( 차후 포스트에서 서술 ) 을 실시했다. 또한 표에서 볼 수 있듯 3개의 운동은 서로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받는다. 청향운동의 성공으로 더많은 지역과 국민이 왕징웨이 정권을 지지 → 신국민운동의 지지도가 높아지면서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민들이 왕징웨이 정권을 더더욱 지지 → 왕징웨이 정권의 대동아전쟁 수행이 더더욱 원활해짐, 또한 일본의 전쟁협력도 유리해지게됨 → 왕징웨이와 동아연맹은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일본측에 더많은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됨 → 일본이 더많은 권리를 왕징웨이 정권에 부여하면서 충칭정부를 비롯한 대륙의 민중들이 왕징웨이 정권을 지지할 수 있게 됨 → 반복 이와 같이 3개의 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이 작동하게 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서 왕징웨이정권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일본으로 부터 더 많은 권리와 평등을 얻어내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또한 신민회( 차후 포스트에서 서술 ) 와 같이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같지만, 화북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지키려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 신민회는 이후 표면상으로 신국민운동을 수용했고, 신민회의 지도자는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을 이용해 신민회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두려는 시도는 일본과 북지나파견군, 신민회의 반대와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연 그렇다면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을까?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이 초기에 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처럼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 또한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국민들은 신국민운동을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해왔음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942년 8월 항저우에서 보내온 보고서에서는 "일반 대중은 이 운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으며 절반이 강압을 받고 있다" 라면서 신국민운동의 효과가 의심스럽다고 적기도 했다. 또한 국민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동아연맹운동이랑 신국민운동이랑 뭐가 다른거지?" 라면서 두 운동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동일시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신국민운동은 점점 지지세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던 3개의 운동의 사이클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신국민운동을 강화하면 오히려 동아연맹운동은 약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다. 왕징웨이는 두 운동이 동등하게 존재하면서 긍정적인 사이클을 계속 이어주기를 원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왕징웨이는 큰 야심을 가지고 신국가운동을 추진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주기 위해 이를 지원하고 홍보를 아끼지 않았으나 민중들은 이미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왕징웨이의 완전하지 않은 국민계몽운동이었던 신국민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1943년 9월, 청향운동을 이끌던 리시췬(李士群, 이사군) 이 일본군에 의해 암살되면서 난징정부의 3대운동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동아연맹운동과 신국민운동은 거의 지지를 얻지못하는 것은 물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두 운동이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청향운동으로 확보된 안전지대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신국민운동은 더더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말 신국가운동의 제안자이자 책임자였던 왕징웨이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난징정권에 위기가 찾아왔고 이 시점에서 신국민운동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왕징웨이를 이어 집권한 천궁보 체제에서도 신국민운동은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다가 왕징웨이의 사망이후 신국민운동은 더더욱 의미를 잃었고 결국 1945년 6월, 왕징웨이 정권 말기에 다시 정부의 직속부서에서 왕징웨이 국민당 소속으로 개편되면서 그 의미는 더더욱 축소되었다가 일본이 항복하고 왕징웨이 정권이 해체되면서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장제스의 신생활운동과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을 비교해보자면, 다른점도 많이 존재하지만, 생각보다 공통되는 분모가 여럿 존재한다. 첫째로 두운동 모두 중국의 전통적 유교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운동 모두 "반공 (反共)" 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사점은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이 일정부분은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애초에 왕징웨이는 충칭의 신생활운동을 의식했고 이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신국민운동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앞에서 이야기 한바도 있다. 또한 조직에 있어서도 충칭쪽은 " 신생활운동촉진총회 " , 난징쪽은 " 신국민운동촉진위원회 " 두 조직 모두 "신운회 (新運會)" 라는 약칭을 공유한다는 데에도 공통점을 가진다. 두 운동이 보이는 유사점들, (댄스홀 출입문제까지) 여러 공통분모를 보유하고 있다. 이렇듯 장제스의 신생활운동과 왕징웨이의 신국민운동은 다른 운동으로 구분되고 성격도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속에서는 여러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국민계몽운동들이었다. 마지막으로, " 윤함구견문록 (淪陥区見聞録, 윤함구는 충칭쪽이나 공산당쪽에서 왕징웨이의 난징정부 지배지역을 "타락한 지역" 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멸칭이었다. ) " 를 살펴보고 오늘의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이는 왕징웨이 정권 속에서 활동하던 비밀충칭 세력이 난징정부를 돌아보고 쓴 글로, 이글에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짜정부(왕징웨이 난징정권을 지칭) 은 중앙정권 (장제스의 충칭정권을 지칭) 보다 더욱 취약하다. 우리(충칭)에게 신생활운동 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신국민운동 이 있다. 우리에게 청년단 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청소년단 이 있다. 우리에게 중앙훈련단, 간훈단 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공무원의 합숙훈련 이 있다. 왕징웨이의 일체행동은 장 위원장을 모방하고 있다 . 왕징웨이는 스스로 '군사위원회위원장" 이라 이름을 붙히고 육군 대원수의 옷을 입고 그의 가짜 군대를 열병하고 있다. 장제스가 이끄는 충칭국민정부와 거의 유사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평을 남긴 것일 것이다. 너무나도 똑같으나 너무나도 다른 충칭과 난징의 대비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왕징웨이 정권의 가장 큰 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정문상, 「1930년대 중반 상해(上海) 대학생의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과 군사문화(軍事文化)의 확산 」,『중국학보 55집』 , 2018 문명기, 「근대 중국의 국민 창출 담론과 실천 - 梁啓超의 『新民說』과 蔣介石의 新生活運動을 중심으로 - 」,『중국근현대사연구 95집』 , 2023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民の衆動員工作 「新国民運動の展開」 」,『中国研究月報 723号』 , 2008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 2009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権下、新国民運動の理念と組織をめぐる相剋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 2008, p. 151-162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매일신보 1941년 11월 14일자 / 1942년 7월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중화일보 1942년 1월 1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2.01.01/page/n9/mode/2up 중국청소년단 사진 : https://exhibits.stanford.edu/wangjingwei/catalog/jb752xp1210 중국동자군 (왕징웨이) 사진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25_00000 신생활운동 포스터 /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로고 사진 : https://ccposters.com/tw/poster/when-raising-or-lowering-the-national-flag-one-should-salute/
- 국민정부주석취임통전 - 주석 취임후 전 관원에 대해 훈시를 선포하다 (就任國民政府主席通電 - 宣示就職國民政府主席後對全體官員訓詞 /1940.11.2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주석취임선서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국민정부주석취임통전 (就任國民政府主席通電) 전국 각 성시 정부 및 각 기관, 각 부대, 각 단체는 모두 이를 잘 살펴 들어라. 나 왕자오밍은 중앙정치위원회의 결의로 오늘 국민정부 주석직에 취임하였다. 나는 국민정부 환도 이후, 동지들과 함께 짧은 기간 동안에 억울한 자의 죄를 사면하고, 중일 관계의 조속한 조정과 전면적인 화평을 하루빨리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대내외 정책들을 점진적으로 실시해왔다. 수개월 동안 중일 쌍방의 전권 대표들은 조약 교섭에서 상호 양보의 정신으로 정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그 내실을 다져왔다. 조약의 근본정신 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는 중일공영, 동아부흥 이라는 공동의 목적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상호간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되, 군사와 경제, 문화는 친밀하게 협력하는 것 으로 합리적인 발달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실로 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 것 으로 마땅히 함께 힘 써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칭 은 지금도 계속하여 항전을 계속 부르짖으며 미래는 생각하지 않은 채 방해를 이어나가고 있다. 나와 나의 동지들은 끊임 없는 노력을 통해 전면적 화평을 조속히 실현 하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들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인민의 고통을 점차 해소 시키고 사회의 치안을 회복 시켜 전면적인 화평의 앞길을 열어 전면적 화평의 실현을 촉진시켜야 한다. 중일전쟁으로 3년 동안 나라의 명이 위독해지고 백성들은 날로 곤궁해졌고 나 또한 위난을 당하였지만, 나는 우매함을 버리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의 구원을 도모할 것을 맹세하였다. 정부 동지들과 전국 동지들이 함께 부지런히 맡은 바를 다하여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기를 삼가 성의를 다하여 바라는 바다. 주석 취임후 전 관원에 대해 훈시를 선포하다 (宣示就職國民政府主席後對全體官員訓詞) 올해 3월,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국제적 지위 확립과 내실있는 국가 건설의 완성이라는 요구에 따라, 수개월 동안 나와 정부 동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여 함께 국가를 어려움에서 구제하려 노력해왔다. 어제 중앙정부위원회에서 나를 국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하고 주석 대리 명의를 해제하기로 의결한 것 은 바로 이러한 책임을 지겠단 뜻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 이며, 국가의 우환이 아직 끝나지 않은 만큼, 감히 “능력이 부족하여“ 라는 핑계는 대지 않을 것이다. 전면적 화평 은 항전의 맹목적인 추종자 들의 방해를 받고 있다. 따라서 만약 빠른 시간 내에 화평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노력해야할 것은 더욱 무겁고 커질 것이다. 외교 방면에선 7월 초부터 이미 절충을 시작하여 쌍방의 정중한 심의를 거쳐 오늘 이미 모든 조약의 내용을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여 입법원에 심의를 제출하였다. 외교와 내정은 겉과 속과 같은 것으로, 내정은 바꾸지 않고 오직 외교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번 중일조약의 완성은 중일관계의 신기원이자 우리의 전면적 화평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노력의 시작이다. 하지만 외교 외에도, 우리는 내정 방면에서 마땅히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국가의 통일을 완성하고 인민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 오늘날 비록 항전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 국민정부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을 생각해본다면, 국민정부는 국내의 중요한 도시들을 통치하고 있을뿐더러, 국민정부가 통치가 닿는 곳에 대하여 의연한 주장을 가지고 정해진 국책을 펼쳐 최선을 다한다면 화평반공건국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 전국에 보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두 가지 일 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 는 인민의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지방의 치안을 보장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오르게 된 만큼, 스스로느끼는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니 정부 동지들, 전국의 모든 동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 칭다오회담 (青島會談, 1940. 1. 24~ 1.26)
1940년 1월 23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왕징웨이 (중앙),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 (왼쪽),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오른쪽) 1938년 봄부터 일본측과 접하면서 화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왕징웨이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신정권을 수립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당시 화북에는 왕커민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1937.12.24) 와 난징 량홍즈의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8.3.28) 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일본측에게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난징의 유신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중앙정부로 통합해야한다" 라고 주장하며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임시정부, 유신정부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정부로 통합되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일본과의 논의끝에 1938년 11월 12일,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이 성립되었고, 여기서는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부를 옹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왕징웨이는 1938년 12월 18일 충칭을 탈출, 화평운동을 시작하며 자신의 신정권 수립을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왕징웨이가 생각했던 신중앙정권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을 비롯한 기존 정권들을 흡수하기를 희망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중국국민당(汪)을 중심으로 한 신중앙정권을 성립시키기를 희망하고 있었다.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권이 기존의 임시정부, 유신정부 뿐만 아니라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비롯한 다른 정권 & 세력들도 모두 흡수하기를 희망했다. 이는 왕징웨이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화평운동은 자신을 중심으로한 거대한 통합신정권에서만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독보적인 주도권을 자신이 확립해야 '일본의 꼭두각시' 라는 비판을 최대한 피할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내몽골부터 광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왕징웨이의 중앙정권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징웨이는 만주국도 자신의 정권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중앙정권에서는 화북,화중,화남의 주요산업은 물론 수많은 인구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촉나라땅만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장제스의 충칭정부 에 비하면 엄청난 경제력과 인구를 가질 수 있었다. 실제 이루어진 통합의 행태. 왕징웨이는 자신이 생각하던 구상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계획은 왕징웨이의 화평파와 일본 내의 왕징웨이 지지세력으로 부터 지지를 받아왔으나, 왕징웨이의 구상은 여러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 째는 기존에 구성되었던 괴뢰정권 자체들에서 비롯된 반대였다. 임시정부의 왕커민과 유신정부의 량홍즈는 이미 1938년 9월 22일부터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中華民國政府聯合委員會) 를 구성, 독자적으로 정부통합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두 정부 모두 유교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에, 통합에 대한 논의는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왕징웨이의 등장은 이러한 통합논의를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왕징웨이에 등장에, 기존 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왕징웨이의 구상에 대해 반대를 가했다. 특히,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왕커민은 왕징웨이의 구상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를 표했다. 1939년 6월 27일 왕징웨이는 왕커민과 만나 정부통합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왕커민은 " 통합된 중앙정부가 필요하긴 필요하다 " 라는 동의를 얻어내어 겉으로는 꽤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커민은 사실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유신정부의 지도자 량홍즈는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왕징웨이는 왕커민을 만난 후 량홍즈를 만나러 갔으나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왕징웨이와 그의 세력이 신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확실한 거부를 보였다. 왕커민과 달리 신중앙정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둘 째는 일본의 반대였다. 일본은 스스로 일화협의기록의 작성과정에서 왕징웨이측의 중앙정권 필요성을 인지했지만, 왕징웨이가 생각한것처럼 거대한 중앙정권을 구성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본은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가 유신정부-임시정부보다 조금 확대된 수준에 그치는 정부를 구성하길 희망했다. 지나방면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나방면군에게 난징을 비롯한 화중지역은 괜찮지만, 당시 중국의 주요철도가 지나가고 수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화북지역만은 자신들의 강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진행해왔던 이들에게 다시 화북을 넘겨준다는 일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1939년 6월 6일에 '수립신중앙정부적방침(樹立新中央政府的方針)" 을 통해서 이미 화북지역을 특수지역으로 만들어 왕징웨이의 새로운 신중앙정권과 분리하기로 결정을 지었던 상황이었기에 왕징웨이의 희망사항은 더더욱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1939년 7월 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는 다시 긍정적으로 진행되게 된다. 첫째는 유신정부측의 호응이다. 이전 대민회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유신정부의 구성원들은 임시정부의 구성원들과 달라 왕징웨이측에 조금더 호의적이었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 본인은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의 일반적 구성원들은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안을 받아드릴 수 있었기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둘째는 왕징웨이측의 타협이다. 자신의 제안이 작동하기 어렵다는 걸 알자 왕징웨이는 결국 신정부에서 기존 두 정부의 지분을 인정해줄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앞에서 보았듯 기존 두 정부세력이 완전히 자신에게 흡수되는 것을 희망했지만 기존 정부의 지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요구했던 화북-몽강 지역의 특수성도 사실상 인정해버리면서, 자신의 구상에 반대하는 일본측과 기존 두 정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협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셋 째는 일본측의 압박이다. 왕징웨이의 막대한 중앙정부계획에는 반대를 표했던 일본이지만, 일단은 중앙정부를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수립하기로 약속한 만큼, 그리고 왕징웨이의 구상이 타협과정을 거치며 약화된 만큼, 정부 수립에 있어 충분히 자신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생각한 일본은 이제 왕징웨이측의 중앙정권 구상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임시정부와 유신정부에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호의를 보였던 유신정부 외의 임시정부, 몽강측도 결국 통합과정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타협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위가 인정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1939년 9월 19~20일 난징에서 개최된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는,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가 모두 참여하여 아닌 왕징웨이의 중앙정부 성립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왕징웨이가 왕커민, 량홍즈와 각자 만나 논의를 한바는 있었으나, 이 9월의 만남은 3명이 처음으로 만난 회의가 되었다. 1939년 12월 15일 진행된 제 7차회의에서는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통합논의기구인 중화민국정부연합위원회를 해산하고 왕징웨이측의 신중앙정부 성립에 매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과정에서 왕징웨이가 추진하는 중앙정치회의에 보낼 양측 인사의 선정과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논의에서는 새롭게 수립될 정부를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구성으로 언제 설립할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부 성립을 위한 다음단계를 위한 논의와 회담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칭다오 회담이다. 본 회의는 1940년 1월에 개최되었지만, 회의에 대한 언급은 이미 11월 즈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11월 2일의 보도에서 "왕(汪), 왕(王), 량(梁)" 3인의 2차회담으로 칭다오 회담이 멀지않았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왕커민은 1939년 11월 24일, 도쿄를 방문하여 진행한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중앙정권 수립문제에 관해) " 칭다오 회담과 같은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진행은 생각보다 빠를지 모른다" 라고 이야기하며 칭다오 회담이라는 가능성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1939년 12월 30일 일화신관계조정요강 (日華新關係調整綱要) 이 서명되고, (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이 얼마나 불평등한 것이었는가는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1940년 1월 8일 일본 정부는 신정부수립의 기본방침을 확정짓고 왕징웨이의 신정권수립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1940년 1월 15일, 임시정부의 왕커민, 유신정부의 량홍즈, 그리고 몽강의 덕왕에게 회담초정장을 보냈다. 왕징웨이측은 왕(汪), 왕(王), 양(梁) 셋의 만남으로는 부족하며 여기에 몽강까지 참가하는 넷의 만남이 되어야함을 주장했다. 이는 자신이 구상하는 신중앙정권에 미온했던 몽강측이 적극적으로 임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은 초대장을 발송했다. "작년 9월 말 난징에서 회담하였을 때 여러 가르침을 받고 여러 의견을 교환한 것에 대해 감명을 그치기가 어렵다. 그후 수개월 간 각 사항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절충과정을 거치며 성숙해졌기에 이제 중앙정치회의를 조직하여 화평을 촉진하고 헌정을 실현하는 건에 대해서 한걸음 더 진보하는 것을 검토를 가하여 실행을 기하려 한다. 이에 금월 하순 칭다오에서 회담을 하여 협의를 하길 희망한다. " 이에 임시정부의 왕커민, 유신정부의 량홍즈가 응했고, 왕징웨이의 기대와 달리 몽강측은 응하긴 했으나 수장 덕왕이 아닌 리서우신 (李守信) 국가부주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몽강과 일본측에 의해 다분 의도된 것으로, 왕징웨이측으로 흡수되기로 스스로 결정한 유신정부와 겉모습의 형태라도 통합의 형태를 띄기로 했던 임시정부와 달리 이미 왕징웨이의 신중앙정부로부터 구분되는 특별지위를 이미 약속을 받은 상황인데다 일본이 몽강을 신중앙정부 체제속 '중화민국'과 구분되는 '제2의 만주' 로 만드려는 의도를 의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본 회의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본회담을 "3거두 (三巨頭)" 의 회담이라 칭했다. 여기서 3거두는 각각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이시점에선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고, 왕커민과 량홍즈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칭다오를 회담지로 선정한 것은 여러 이유가 존재했는데, 첫째, 칭다오는 당시 상하이에 있던 왕징웨이도, 화북의 왕커민도, 난징의 량홍즈도, 몽강의 리서우신도 모두 접근하기 편리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칭다오는 4명의 대표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난징이나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면 이는 한쪽에게 치우친 개최라고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셋째, 칭다오는 중일전쟁에서도 큰 파괴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칭다오가 명확한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칭다오는 일본 & 일본의 괴뢰정권 영향이 확실히 미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칭다오는 일본에게도, 일본의 괴뢰정권에게도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칭다오 회담이 개최된 칭다오 영빈관 (青島迎賓館) , 이곳은 1905년 과거 칭다오가 독일 조차지였던 시절, 독일 총독의 관저로 지어졌다. 주최측은 경호상의 편의를 위해 칭다오의 영빈관 (구 독일총독관저) 를 선택했다. 영빈관의 1층에는 회의장을, 2층에는 왕징웨이측이 머물게 했다. 왕커민과 량홍즈, 리서우신이 묵었던 칭다오 태평로의 칭다오 호텔일대 사진. (과거 프린스 호텔 (Hotel Prinz Heinrich) 자리 ) 현재는 보이는 4개 건물중 왼쪽에서 두번째 건물만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왕커민과 리서우신, 량홍즈는 칭다오 영빈관에서 가까운 태평로의 칭다오호텔에 묵게했다. 칭다오는 경찰과 주둔해 있는 일본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들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회의장에는 35대의 차량이 동원되었으며, 일본은 영빈관의 직원들과 흥아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모두 흥아원에서 준 興(흥, 흥아의 약칭) 이라는 약장을 차게 하였으며, 신문기자들은 칭다오 호텔에서 대기하다가 필요시에만 영빈관을 방문할 수 있게 했다. 충칭측은 이러한 칭다오회담의 개최소식을 듣고 칭다오에 파견되어 있던 군통 푸성란 (傅勝蘭, 부승란) 요원으로 하여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왕징웨이 일행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으나, 오히려 푸성란의 상관이었던 군통의 왕티안무(王天木, 왕목천, 1891~1995)가 전향하여 왕징웨이가 칭다오에 도착하기 전 이를 일본측에 알리게 되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푸성란은 체포된뒤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결국 76호측에 의해 포섭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인사가 되게된다. 푸성란은 왕징웨이 정권아래 무려 항저우 시장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국민정부에 의해 처형당하게 된다.) 1940년 1월 21일 (일) 대련기선 (大連汽船) 의 호텐마루 (奉天丸) . 이 여객선은 쇼와 3 (1928) 년 건조되어 일만연락선으로 사용되다가, 쇼와 13 (1938) 년 부터 상하이-칭다오 구간은 운항했다. 왕징웨이 일행과 량홍즈 일행은 배편을 통해 칭다오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징웨이와 량홍즈는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전 9시, 둘과 일행은 상하이에서 칭다오로 향하는 대련기선의 호텐마루(奉天丸) 에 탑승하였다.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메이쓰핑, 츄민이, 린바이셩 등을 데리고 왔고, 량홍즈 또한 자신의 관원을 함께 데리고 왔다. 21일 오후, 왕커민이 가장 먼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관원들을 데리고 칭다오에 도착했다. 왕커민은 도착과 함께 바로 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같은날, 이탈리아 왕국의 치아노 외무상은 스테파니 통신 (Agenzia Stefani) 를 통해 왕징웨이에게 "왕징웨이씨의 신중앙정부수립에 대하여 이탈리아 왕국은 왕정위씨의 친우(親友) 로써 어떠한 지원도 망설이지 않겠다" 라는 전보를 보냈다. 왕징웨이도 회담이후 답보를 보냈다. 1940년 1월 22일 (월) 22일 오전 3시 30분, 몽강의 리서우신도 비행기를 타고 칭다오 창커우 비행장 (滄口飛行場, 현재는 군용비행장) 에 도착했다. 리서우신도 도착과 함께 칭다오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왕징웨이와 량홍즈 둘과 일행을 실은 호텐마루는 22일 새벽 4시에 칭다오에 도착했고, 도착후 왕징웨이 일행은 영빈관으로, 량홍즈 일행은 칭다오호텔로 가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한후 왕징웨이는 일본군 칭다오 사령관이었던 오오시마 켄이치 (大島健一) 사령관을 만나 감사인사를 전했다. 영빈관에서 기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하는 왕징웨이. 오후 5시, 영빈관에서 왕징웨이는 국내외 기자단 약 70 여명과 접견하여 '화평운동의 진의' 라는 이름의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평운동의 진의 (和平運動之眞義) 나는 화평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화평운동은 첫째 , 동아의 대국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중일 양국의 공존공영은 화평 없이는 할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따라서 이는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구차하게 평온하게 지내려하는 것이 아니다. 화평운동은 둘째 , 중일 양국의 백년대계이자 공존공영의 기초를 심는 것이지, 일시적인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화평운동은 셋째 , 일종의 사상, 일종의 신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는 중일 양국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전쟁은 양국을 모두 해치나 화평은 공존공영을 이뤄낼 수 있기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지, 권모술수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여러 해 동안 가지고 있어왔다. 그리고 이는 고노에 성명 이후 일본 국민들의 공통된 입장이 되었다. 일본은 동아보위의 책임을 가지고 중국이 이 책임을 분담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동지들과 함께 화평운동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중국이 패배하게 된다면 어떤 힘에도, 어떠한 세력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진실되고 영구적인 화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사상과 열정적인 신념을 가져야 한다 확실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신념에서 비롯된 세력은 진정한 세력으로서 화평운동의 기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국 민중, 특히 뜻있는 청년들의 공통적 이해과 공통적 책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화평운동은 이렇게 기초가 확립되어야만 중간에 변질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으며, 무력과 다른 세력의 건설은 그 기초 이후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야만 화평운동이 권모술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상과 신념이 화평운동의 점진적인 진전으로 이어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이 우리가 맡은 사명을 완전히 달성하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깊게 믿는 바다. 이후 기자회견이 진행되었고, 이자리에서 린바이셩은 왕징웨이의 화평사상이 위대한 사상임을 이야기하며 기자들에게 화평사상의 위대함을 자랑했다. 1940년 1월 23일 (화) 오전 10시, 본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 회담이 개최되었다. 추운날이었던 이날, 리서우신이 가장 먼저 영빈관에 도착하여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몽강의 리서우신을 만나 회담을 진행하였다. 리서우신은 중일전쟁의 발발이후 내몽골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외몽골과 신강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당의 항일운동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고, 저우포하이는 중앙정치회의의 성립 방침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서우신은 저우포하이는 화평과 반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에 있어 의견을 모았고, 리서우신은 저우포하이에게 몽강도 중앙정치회의에 참가할 것을 이야기 했다. 저우포하이도 몽강측이 신중앙정부 아래에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분리될 것임을 이야기했다. 같은 시간, 왕징웨이는 왕커민과 량홍즈와 만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내일 열리게 될 본회담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간단했던 예비회담이 11시 종료된 후, 왕징웨이는 직접 리서우신을 만났다. 왕징웨이는 몽강지역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빈번하다 지적하며 몽강측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덕왕과 리서우신의 몽강 통치를 극찬했다. 점심시간, 왕징웨이는 왕커민, 량홍즈, 리서우신과 함께 만찬을 같이하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영빈관에서 칭다오 시장이 주최하는 연회가 개최되었다. 이자리에는 왕징웨이와 왕커민, 량홍즈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주요인사들이 참가했다. 1940년 1월 24일 (수) 회담 장면. 왕징웨이의 왼쪽에 썬글라스와 같은 안경을 쓴이가 왕커민, 왕징웨이와 대화하고 있는 오른쪽의 인물이 량홍즈다. 왕커민 쪽에는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량홍즈 쪽에는 유신정부의 인사들이 앉았다. 이날은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며 눈이 펑펑내리는 날이었다. 이날 새벽, 리서우신은 일본의 군용기를 타고 다시 몽강으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제 1차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진행은 왕징웨이가 맡았다. 왕징웨이는 회의를 시작하며, 삼민주의의 진제 (眞諦, 진리, 제일의 진리) 라는 이야기를 회의장에서 진행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민주의의 진제 (三民主義之眞諦) 삼민주의는 구국주의로, 중국을 차식민지 지위에서 해방시키고 국가의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민족해방은 정치해방은 민권주의, 경제해방은 민생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삼민주의는 민족을 구하는 구국주의이지만, 동아주의, 세계주의와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삼민주의는 기본정신을 중국 고유의 도덕에 두어 화평을 신조로 하고 침략을 능사로 하지 않는 패도가 아닌 왕도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반드시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동아의 일원이자 세계의 일원으로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을 이룰 것이다, 손중산 선생의 죽음 이후, 그의 도당들은 삼민주의에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삼민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사상의 유행에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당 외부에서는 삼민주의에 대한 ‘오해’를 하지만, 이는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원이 하고 있는 ‘곡해’는 심각한 것이다. 따라서 삼민주의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는 편협한 국가주의가 아니며, 민권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아니며, 민생주의는 맑스의 공산주의와 다른 것으로 양립할수 없다는 것을 삼민주의를 믿는 이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기에 이번 회의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왕징웨이의 말이 끝난 후, 회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신중앙정부의 수립방법, 정치와 강령등에 대해서 논의 되었다. 가장 먼저 논의된것은 신중앙정부수립대강 (新中央政府樹立大綱) 으로, 여기서 신중앙정부를 친일, 화평, 반공을 신중앙정부의 근본적 방책으로 삼고, 신중앙정부의 구성은 왕징웨이와 그의 국민당 조직과 기존의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과 기타 정치세력과 정치인사들을 모두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만약 충칭측이 화평을 선택한다면 이를 포용하기로도 결정했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중앙정치회의는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 뿐만 아니라 여러 당파, 여러 인사들이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왕(汪), 왕(王), 량(梁)은 그리고 새롭게 수립될 신중앙정부가 이전 국민정부의 법통을 잇기로 결정하며 명칭을 '국민정부 (國民政府)' 로 하고, 수도를 난징 에 두기로 합의, 결정했다. 그리고 새롭게 수립될 국민정부의 깃발은 이전의 청천백일기를 다시 사용하되, 구분을 위해 노란색 삼각천을 위에 달고 '화평반공건국' 혹은 '화평건국' 의 구호를 달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일본측과는 이전부터 논의가 끝난 것이었으나, 왕커민, 량홍즈을 비롯한 기존 정권 구성자들과는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 또한 신중앙정부의 수립시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여기서 왕커민과 량홍즈는 왕징웨이측의 방침에 따라 신정부를 설립, 그리고 기존의 유신정부를 해체, 임시정부는 개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오후에는 다소 특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는 회의 바로 직전이었던 1월 22일, (당시 왕징웨이는 칭다오로 이동중이었기에, 왕징웨이가 이소식을 접한 것은 칭다오에 도착한 후였다. ) 가오쫑우와 타오시성이 홍콩으로 탈출,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가 체결한 일화신관계조정요강 (日華新關係調整綱要) 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임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셋은 갑작스러운 이러한 폭로에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이 셋은 회의를 거쳐 오후, 왕징웨이는 로이터 통신과 UP (United Press, 미국의 언론사) 를 비롯한 대내외 기자들을 모아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가오쫑우와 타오시성의 주장이 '허위' 임을 주장했다. 고도(高陶) 사건에 대해 타오시성, 가오쭝우는 모두 화평운동의 시작부터 참가한 이들 이었으나, 작년 3월 21일 쩡중밍 동지가 하노이에서 암살 당한 이후, 두 사람은 비겁한 모습을 보여왔다. 내가 하노이에 있을 때 나는 가오쭝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그가 홍콩으로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타오시성은 우유부단하고 흔들리며 방향을 잃어 가오쭝우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처음부터 함께 해온 동지였던 만큼, 이들을 관대하게 대해왔다. 지난 해 11월, 나는 그들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작년 11월 5일, 중국에 있던 일본인의 일부 시험계획서들을 훔치기도 했다. 그들은 이를 진귀한 것으로 여겼고 이는 충칭과 결탁한 것이다. 이는 비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짓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온갖 유혹에 빠져 인격을 상실한 모습은 정말 비열하고 매우 원망스러운 것이다. 다만 어떤 운동에서든 이런 패륜아들에게 벌을 억지로 줄 필요는 없다. 이러한 무뢰한 행동의 결과는 자신을 도태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대국 자체에는 큰 손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충칭이 공산당의 의 음모에 빠져 있을 때 화평운동에 종사해왔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고, 오늘날 중국에는 화평 이외에 다른 자구책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화평운동은 나날히 발전하며 성공을 이루고 있다. 나라가 찢어지고 가족이 무너지고 있는 이 때에,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항전에 실패하면 항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화평에 실패하면 화평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서양단(首鼠兩端) 의 행태는 잘못된 길로 나아갈 뿐이다. 이제 나와 나의 동지들은 모두 맹렬하게 전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중간에 변절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절자들은 오랫동안 변절에 대한 마음을 품어왔던 만큼, 이들이 사라진다면 화평운동의 순수함과 광명은 더욱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화평방안은 최근 중일 쌍방이 양국의 백년대계 및 동아의 장래를 위해 서로 양해하고 양보하여 중국의 부흥기반을 마련하고, 그 능력으로 동아의 화평과 신질서의 책임을 분담하게 하는 것이지,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이 조작하여 발표한 문서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담화에서는 가오쭝우와 타오시셩에 대한 인격적 비판과 함께, 폭로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의 조작에 의한 것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내용이 진짜임이 밝혀지게 된다.) 회담이 끝난 후, 왕징웨이는 '법통 문제 (法統 問題)' 라는 담화를 발표, 왕징웨이와 왕커민, 량홍즈가 어째서 국민정부의 법통을 잇기로 결정하였는지, 어떻게 그 법통을 이을 것이며 자신들이 구성하게될 새로운 '국민정부'는 어떤 모습인지,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는 어째서 법통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법통문제 (法統問題) 중일전쟁은 점차 진정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전국의 역량을 집중시켜 중앙정부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법통 문제다. 중국이 통일된 중앙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낡은 법통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통을 세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혁명의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시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쟁은 과거 국민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국민정부의 정치체제가 잘못되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시국을 수습하는 목적은 대외적인 화평을 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대내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책은 마땅히 수정되어야하고, 정치제도나 법에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적당한 수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의 법통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필요는 없다. 이는 혼란만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존의 법통을 계승하되,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과거 국민정부의 법 제도가 비난받았던 이유는 전국의 정치를 추진하는 중앙정치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오직 중국국민당의 중앙위원으로 제한되며 당 외의 인사들이 참석하지 못해 외부로부터 독재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년에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을 때, 이를 개선하기로 결의하여 대회 선언에서 이 취지를 표명한 바 있다. 앞으로 중앙정치위원회는 국민당 오직 1개 당만이 독점하지 않게 될 것이며, 모든 합법적 정당과 전국의 유능한 인사는 법에 따라 이에 참여하여 정치를 논하고 함꼐 협력할 수 있다. 이것은 헌정 실시의 첫걸음이며, 동시에 과거의 잘못된 법 제도를 교정하는 것이다. 충칭 정권은 현재 공산당의 압박을 받아 자유로이 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따라서 우리가 중앙정치회의의 의결에 따라 법을 개편하되, 기존의 정무를 그대로 집행하며 화평에 관한 논의를 끝마칠 수 있다면 법통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는 최단기간 내에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할 것이다. 이렇게 헌정을 실시할 수 있다면, 가벼운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가는 것처럼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른 정치 개혁과 달리 분규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방법이 어찌 계책이 아니겠는가? 1940년 1월 25일 (목) 영빈관의 정원을 구경하는 3인방. 이날도 눈이 내렸다. 오전 10시, 2일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본 회의에서는 전날의 회의보다 더욱 상세하고 복잡한 내용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왕징웨이는 우선 일본과 비밀리에 체결한 일화신관계조정요강 의 내용을 왕커민과 량홍즈에게 설명하고, 이후 일본과의 협상은 왕징웨이가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전날과 달리 빠른 합의가 이끌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이날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이 "그렇다면 정부를 '진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신중앙정부를 자신이 중심이 되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하려 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왕징웨이는 실제로는 그러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그랬기에 일종의 타협과정을 거쳐 현재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통합' 은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인가? 이날 회의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중앙정부의 조직구성에 대해 긴 시간동안 지속된 논의 끝에, 왕(汪), 왕(王), 량 (梁) 은 다음과 같은 합의를 도출해냈다. 1) 유신정부는 해체, 하지만 인사들은 고용 2) 임시정부는 "화북정무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정부조직만 존속, 실권을 유지한채 중앙정권에 편입 3) 화북에서의 일본의 특권을 인정 4) 몽강의 경우 신중앙정권으로 편입하나 그 실권은 유지 5) 충칭의 린썬을 명목상 주석으로, 왕징웨이를 주석대리로 (만약 린썬이 전향하지 않으면 왕징웨이를 주석으로) 그리고 신중앙정부, 즉 난징에 세워지게 되는 국민정부에 행정, 입법, 사법, 감사, 고시의 5권헌법에 의거한 부서를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여러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는 이전 국민정부의 조직, 그리고 충칭 국민정부의 조직을 모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중앙정부의 내각에 참가할 인원을 내정하였다. 행정원 원장 겸 주석대리 : 왕징웨이 행정원 부원장 : 추민이 입법원장 : 천궁보 사법원장 : 원종야오 감찰원장 : 량홍즈 고시원장: 왕이탕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 : 왕커민 부주석 겸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 저우포하이 등등 여러 인원이 각자의 직을 받게 되었다. 인원 내정의 과정에서 3인방은 서로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서로는 자신과 자신의 인물을 요직에 내정하려 했고, 이 때문에 회의장에서는 과함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날의 완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를 대체하게될 조직인 화북정무위원회의 조직구성, 대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왕커민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혔고, 이때문에 왕커민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중앙정치회의의 요강및 규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중앙정치위원회의 규정에 대한 논의, 국민대회의 개최시기, 헌정의 실시시기에 대한 논의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중앙정치회의의 요강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 논의는 간단한 개괄적인 범위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3인방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중앙정치회의 개최 이후 결정하기로 결정했다. 저우포하이는 이후 자신의 기록에서 이런 회의의 모습을, 마작을 두는 이들의 모습에 비유했다. 마작패 (왕왕량3인방)들이 치열하게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이 마작패들의 운명은 모두 마작을 두는 이 (일본) 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1940년 1월 26일 (목) 회담의 마지막 날이었던 26일 오전에는, 왕징웨이가 10시 왕커민을, 11시에는 량홍즈를 각각 만나 중앙정치회의의 구성과 각 정권의 중앙정치회의 대표로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리고 3월 중으로 중앙정치회의와 신중앙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전날 중요한 내용이 많이 논의되고, 대부분의 상세한 사항은 차후 중앙정치회의에서 결정하길 합의한 만큼, 이날은 많은 논의가 오가진 않았다. 오후에는 왕(汪), 왕(王), 량(梁) 3인은 영빈관 1층의 중앙현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본 회의의 성과, 의의에 대해 발표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칭다오회담의 의의 (青島會談之意義) 작년 9월 말, 나는 일찍이 난징에 가서 왕 위원장과 량 위원장과 회담하면서 시국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고 모두가 화평의 실시, 그리고 헌정의 실시에 중점을 두었다. 제 1차 회담을 통해 시국 해결에 대한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오늘의 제 2차 회담을 통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으며 중앙정치회의의 조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중앙정치회의는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각 정당과 전국의 헌명한 인사들이 연합, 공동으로 조직하여 과거의 간극에서 생기는 폐해를 일소하고, 일치단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책임을 져 화평 정착을 위한 헌정 실시라는 원칙을 결정함으로서 새롭게 세워질 중앙정부가 이에 근거하여 성립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전국인민이 필시 한마음 한뜻으로 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전진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대외적으로는 중일의 친선관계 수립에 힘쓰고, 각우방과 국교를 돈목하게 하며, 대내적으로는 전후 건설에 힘쓰고 정치를 개편하여 인민의 고통을 해소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칭다오 회담은 실로 화평운동의 큰 발전이자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발표를 끝으로 칭다오회담은 마무리되었고, 다음날인 27일 오전 왕(汪), 왕(王), 양(梁)이 이별하여 비행기를 통해 각자의 장소로 다시 돌아감에 따라 칭다오회담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칭다오회담은,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즉 난징국민정부의 성립이 완전히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왕징웨이와 일본측은 신중앙정권 수립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해왔지만, '정부를 수립한다' 정도의 합의가 된 것이었지, 언제, 어떻게 정권을 구성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완전히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기에 왕징웨이측은 칭다오회담을 통해 확실하게 정권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 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동시에 왕커민과 량홍즈로 하여금 신중앙정권이 기존 왕커민과 량홍즈가 보였던 것과 다른, 국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국민정부' 일것이며, 그 신중앙정권의 수장은 자신임을 인정하게 하면서 신중앙정권이 왕징웨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될 것임을 확인했다. 즉, 칭다오 회담은 왕(汪), 왕(王), 량(梁) 3명의 꼭두각시가 모여 왕(汪) 이라는 꼭두각시가 가장 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왕(王)과 량(梁) 은 왕(汪)이 자신의 위에 서는것을 받아드리기 힘들었지만,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다. 회의는 완전히 왕징웨이의 주도에 의해 운영되었고, 일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분이 왕징웨이의 뜻대로 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앞에서 보았듯 일본측이 회담 이전부터 왕징웨이가 신중앙정권의 중심이 되어야함을 인식하고 양측에 대해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이렇듯 칭다오회담을 통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신중앙정권, 즉 난징국민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과정 중 하나를 성공시켰다. 물론 자신이 완전히 바라던 바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 정부를 통합하여, 국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국민정부' 의 형태로 성립되는 '중앙정부' 를 세운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이 완전하지 못했던 성과의 결과는, 이후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이후 해체시기까지 평생 왕징웨이 정권의 약점으로 작동했다. [출처]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萬仁元, 『汪精衛與汪偽政府』, 1994 马庚存 , 「 汪伪青岛会谈述评 」, 『 历史教学 』, 2007 吕温泉 , 「 汪伪政权的出笼与“青岛会谈” 」, 『 春秋 1995年第4期 』 , 1995 青岛日报, 「 汉奸三巨头青岛会谈的幕后 」, 2015 회담 관련 사진 : https://www.sohu.com/a/289729832_120074111 영빈관 / 칭다오 호텔 사진 : 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문서 호텐마루 사진 : https://page.auctions.yahoo.co.jp/jp/auction/m149387788 호텐마루 정보 : http://www.tokusetsukansen.jpn.org/J/A501/AIC_5047.htm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9년 11월 ~ 1940년 1월 27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2%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9%95%EC%A0%95%EC%9C%84%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9%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 더 큰 노력으로 승리를 거두자 (以更大之努力獲致勝利 / 1944.1.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더 큰 노력으로 승리를 거두자 (대동아전쟁참전1주년기념방송) (以更大之努力獲致勝利) 오늘은 중국의 대동아전쟁 참전 1주년 기념일이다. 우리들은 이 기념일을 맞이하여 더욱 큰 노력을 가해 금년 최후의 결전에 공헌하고자 한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이래 영미의 침략세력은 이미 우방인 일본에 의해 산산조각났지만, 그 야심은 죽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짖어대며 반격해오고 있다. 하지만 영미가 1년동안 펼쳐온 소위 반격으로 인해 인력과 물자의 소모는 증가했을지 몰라도, 대동아의 전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에 맹방 일본의 육해군 장병들의 충직한 투쟁과 희생의 정신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다. 맹방인 일본은 군사적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 각 민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단결하게 하여 정치 방면에서, 경제 방면에서, 문화 방면에서 독립과 발전, 그리고 공동번영의 건설을 완성하려 하고 있다. 중일동맹조약이 체결된 후 중일 양국은 이미 영구적인 우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대동아선언의 발표 이후 대동아각국은 함께 전진하고 함께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잉는 맹자가 소위 이야기하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3가지를 모두 얻은것이라 할 수 있다. 최후 결전의 한해인 올해, 대동아 국가들은 충분한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도 오늘부터 더욱 분투하여 사상의 숙정, 치안의 확보, 생산의 증가라는 3대 요강을 기반으로 맹렬하게 노력하여 중국의 책임을 다하고, 대동아의 의무를 분담할 것이다. 충칭쪽에 대해 우리는 일찍히 여러 차례 충고를 해왔다. 카이로 회담 이후, 충칭은 점점 더 영미의 속임수에 빠져들며 더욱 잘못된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이는 우리에게 정말 유감인 일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단언하건데, 충칭이 영미에 가까워질수록, 전국의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최근 충칭이 스스로 항전하는 이유가 중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미를 위해 항전하고 있음을 전국 민중에게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칭은 영미의 동아침략, 나아가 영미가 뻗치고 있는 전 세계 지배의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미의 끄나풀을 자처하여 영미를 끌어들여 중국대륙을 전투기들의 폭격의 무대로 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아가 중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죽이고 중국인과 동아인이 서로 죽이게 하는 동종 자해의 역행을 행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를 전국 민중들은 반드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일동맹조약과 대동아선언의 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과 협력하고 대동아전쟁을 완수하며, 충칭의 허위 선전에 대해 승리로 보답하고, 충칭의 붕괴 이후 방황하게 될 민중을 포용할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
-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 1941.2.1)
경축동아연맹중국총회2주년특간 (慶祝東亞聯盟中國總會成立二週年紀念特刊, 1943) 에 묘사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깃발. 파란배경에 흰색 4개의 직선은 평등,호혜,자유,건설을 의미하고, 노란원은 황인종의 공영권을, 원안의 파란직선 3개는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을 의미하며 상하의 적색은 영광과 성공을 의미한다. *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창립총회는 쇼와 16 (1941) 년 2월 1일 오후 4시, 난징시의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에서 거행되어 왕 주석을 비롯하여 중앙당 수뇌부, 각 대표등 수백여명이 참석하였고, 여기에는 왕 부인, 고 쩡중밍 선생의 유가족 등도 참석하여 엄숙히 행사를 진행하였다. 총회는 만장일치로 왕주석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고, 왕 주석 또한 이를 허락하여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날 고노에 수상은 다음과 같은 축전을 보내 중국의 동지들을 감격시켰다. 형제의 분투로써 귀국의 동아연맹운동이 전국적 통일, 발전을 이루게 된것은 동아의 해방의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며, 아울러 중국동아연맹의 성대한 성립식을 진심으로 경배함과 동시에 솔선수범해 동아연맹을 제창하여 동아의 영원한 평화와 동아보위에 분발하는 형제에게 진심으로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총 리 대 신 고노에 후미마로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을 도모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각각 자유독립의 입장에 입각하여, 최근에 발표된 공동선언 (1940년 11월 30일 발표된 일만화공동선언을 의미.) 의 정신에 의거하여, 도의에 기초한 신질서를 건설하여 상호 그 주권 및 영토의 존중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있어서의 상호돈목의 수단을 강구하고 공존공영, 동아부흥이라는 공동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이와 같이 본회를 창립하고, 명칭을 동아연맹중국총회로 정한다.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동아연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 정치독립 (政治獨立) 2 : 경제합작 (經濟合作) 3 : 군사동맹 (軍事同盟) 4 : 문화구통 (文化溝通) 제2조 : 동아연맹중국총회 (이하 본회로 약칭) 은 동아연맹의 실현 및 강령의 실행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제3조 : 중화민국 국민으로서 본회에 참가,가입을 청구하여 본회의 허가를 거친 이는 성별을 불문하고 본회의 회원으로 삼는다. 제4조 : 본회는 회장 1인을 두고 이를 창립총회에서 지정한다. 제5조 : 본회는 회장 밑에 이사회를 설치하여 집행기관으로 삼고, 감사회를 설치하여 감찰기관으로 삼는다. 제6조 : 이사회에는 상무이사 및 이사를 두고, 이사로 36명에서 48명을, 그중 7명에서 9명 가량을 상무이사로 한다. 이들의 임명은 회장이 창립대회에서 제출하여 결정한다. 이후 인원의 증대와 같은 경우가 발생하면 회장과 이사회에 이를 제출하여 결정하게 한다. 제7조 : 본회는 수도에 설치하고, 각성시의 실제수요에 따라 분회를 설치한다. 제8조 : 본회 이사회 및에 비서처 및 다음과 같은 위원회를 둔다. 1. 비서처 2. 지도위원회 3. 선전위원회 4. 문화위원회 5. 사회복리위원회 제9조 : 본회는 사무의 확대시 이를 회장을 통해 이사회에 제출하고, 의사회의 의결에 따라 위원회를 증설한다. 제10조 : 비서처에는 비서장 1명, 부비서장 2명을 두고, 각 위원회에는 주임위원 1명, 부주임위원 2명, 위원 7명 ~11명을 둔다. 회장이 지명하는 비서장 및 각 위원회 주임위원을 상무이사로 두고, 부비서장 및 각 위원회 부주임위원을 이사로 둔다. 제11조 : 감사회에 상무 및 감사를 두고, 감사로 35~47명을, 그중에서 5명 내지 7명을 상무로 하고, 이는 창립총회에서 제출, 결정하고 감사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과 같은 경우에는 회장 및 감사회에 이를 제출하여 결정하게 한다. 제12조 : 감사회에 비서장 1명 및 부비서장 2명을 두고, 회장이 지명하는 비서장을 상무로, 부비서장을 감사로 삼는다. 제13조 : 이사회 및 감사회, 이사회 소속 각 위원회 조직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4조 : 각성시 분회에 이사와 감사를 일부 두고, 그중 5명 내지 7명을 상무이사로, 그중 3명 내지 5명을 상무감사로 삼는다. 이는 회장의 명령을 받아 이사회가 지명한다. 제15조 : 분회의 조직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6조 : 분회 이하의 지방조직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7조 : 본회는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한다. 제18조 : 본 회장(會章)은 창립총회에서의 통과에 의해 실행한다. (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왕징웨이의 동아연맹중국총회 창설기념 훈시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동아연맹운동 (東亞聯盟運動)
동아연맹운동의 이론을 확립한 이시하라 간지 (石原莞爾). 그는 자신이 주장하던 "세계최종전쟁" 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비롯한 동아연맹을 계획했던 인물이었다. 동아연맹운동은 이시하라 간지 ( 石原莞爾 )가 입안하고 그가 중심이되어 시작한 것으로, 1939년 10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동아연맹협회 ( 東亞聯盟協會) 이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동아연맹은 이시하라와 그의 뜻에 동참하는 동지들 수십명으로 시작되었던 아주 작은 단체에 불과했으나 단체가 조직된지 2년이 되지 않아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전국은 물론,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당시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던 동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시하라 간지는 어떠한 이유로 동아연맹이라는 운동을 창안했고 이 동아연맹운동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 곳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일까? 또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 이시하라 간지는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사실 이전부터 일본에서 만주의 중요성은 이미 인식되고 있었다. 중국대륙으로 나아가고, 소련의 극동아시아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리적 중점을 제외하고도 만주의 수많은 자원과 광활한 농지등 만주의 많은 요소들은 일본에게 중요한 것이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이 이전부터 남만주지역에서의 팽창과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던 봉천군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시하라에게 있어 만주는 또다른 의미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만주는 기필코, 무조건 일본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시하라는 어떠한 이유로 만주가 일본에게 기필코 필요한 필수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시하라는 1927년 이미 자신이 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일본의 국방(現在及び将来に於ける日本の国防)》 에서 만주와 내몽골지역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본이 만주와 몽골 (이름바 만몽) 을 점령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1928년 《관동군 만몽영유계획 (關東軍 滿蒙領有計劃)》 를 통해 일본이 만몽을 점령함으로서 제국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앞에서 보았듯 만주는 경제적, 지리적 여러 이점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대공황때 일본은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엔(円) 블록을 결성해 세계대공황에 대처할 수 있었고,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대륙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던 만주는 전쟁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이러한 이유외에도, "진정한 목적" 을 위해 만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시하라에게 만주가 그렇게 중요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가 작성한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이시하라는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세계최종전쟁론(世界最終戰論)》 이라는 책을 서술한다. 이시하라는 만주가 이 "세계최종전쟁" 을 위해 일본에게 필요했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최종전쟁이 무엇이길래, 이시하라는 만주가 일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를 위해 그의 세계최종전쟁론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시하라의 세계최종전쟁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시하라가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 . 이시하라는 세계최종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 보았으나, 이를 위해서는 많은 선행조건이 준비가 되어야 했다. 만주는 그중 하나였다. 이시하라는 두차례의 걸친 세계전쟁으로 세계가 하나로 통일된다고 보았다. 이시하라는 세계가 점점 일종의 연합체로 합쳐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이는 소련,유럽,미국,동아 4개로, 동아는 일본이 주도하는 연합체였다. 이시하라는 세계최종전쟁에서는 "한발이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폭탄" 이 등장할것이라면서 미래의 무기기술에 대한 일정부분 예측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여러 존재했다. 이시하라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가 세계최종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지만, 이시하라는 지금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만주였다. 이시하라는 만주의 자원과 인구를 보면서 만주가 무궁무진한 발전을 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5개년 경제개발 계획과 같은 경제개발,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중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발전의 촉진은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이시하라는 만주를 점령한 뒤 만주에서 발전을 진행함과 함께, 중국을 비롯한 동아국가들을 일본의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한 이론이 바로 동아연맹론(東亞聯盟論) 이었다. 일본과 만주, 중국을 연결하는 하나의 (일본중심이고 일본이 주도하는) 경제적, 군사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동아연맹론의 당시 핵심이었다. 이시하라는 중국을 이러한 동아공동체에 끌어들이기를 희망했다. 그렇다면 중국을 어떻게 이 공동체에 편입시킬 것인가? 처음에는 전쟁이 그 답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정부도, 군부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고 이시하라도 전쟁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국은 이시하라의 구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을 포섭하려던 이시하라의 계획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물거품이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이시하라는 이전부터 만약 일본이 제대로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이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며, 20년이고 30년이고 전쟁을하게되는 장기전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따라서 이시하라의 관점에서 1937년의 일본은 아직까지 중국과의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다리에서의 충돌을 시작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중국과 전쟁을, 그것도 전면전을 시행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었다. 또한 이시하라가 우려했던 것처럼 중국에서의 전쟁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의 길로 향해가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이상, 이시하라가 구상했던 것처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하여 공동체를 구상하는 것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이 공동체를 구상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이시하라가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시하라에게는, 최대한 빠르게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을 일본중심의 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징웨이가 화평교섭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 중국 내에도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시하라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1938년 중엽에는, 이시하라의 동아연맹론은 일부분 변화하여 3개의 핵심요소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경제의 일체화 어느 국가군에도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급자족 경제블록을 구축하는것. 국방의 공동화 세나라 (일본,만주,중화민국) 이 통일된 방침아래 군대를 만들고 운영하는 체제를 만드는것 정치적 독립 공동체의 가맹국들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정치적 독립" 이었다. 이는 일본정부나 이전의 동아연맹론이 주장해오던 일방적인 중국침략정책에 비하면 온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의 완전한 복속도 아닌, 트라우트만 공작에서 보였던것과 같은 굴욕적인 협상도 아닌 동아연맹론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당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데, "제국정부는 난징공략이후 지나국민정부에 반성의 최후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오늘에 이르렀으나, 국민정부는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만연히 항전을 도모하여 국민도탄의 쓴맛을 헤아리지 못하고 동아전국의 평화를 돌아볼 바가 없음으로 제국정부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을 만한 신흥지나정권 성립과 이의 발전을 기대하고 , 이와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신지나 건설에 협력하기로 한다. 본래 제국이 지나의 영토주권을 존중한다는 방침에는 조금도변화가 없으며, 이제 동아평화에 대한 제국의 책임이 막중하기에 정부는 국민들이 이러한 중대한 임무수행을 위해 한층 분발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바다. " - 1938년 1월 16일, 제 1차 고노에 성명 (쇼와13년 1월 16일 제국성명) 제 1차 고노에 성명을 통해 일본정부가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일본국민정부와 일본과의 대화루트가 중단된 상황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해야한다는 일본의 요구사항을 해결할 필요가 있는 화평파에게 이러한 동아연맹론의 "정치적 독립" 이라는 조건은 화평파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에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역할로 작동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독립은 일본의 지도하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한계점은 있었다 . 하지만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들은 이러한 동아연맹론을 근거로하여 화평을 위해 세우게되는 새로운 정권이 일본의 괴뢰가 아니라 이전과 같은 정치적인 독립, 즉 주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동아연맹론의 변화는 마치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의 화평시도에 맞추어 응답하는 모양새를 보였는데, 이는 사실 다분 의도된 것으로,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화평파들을 이끌어내어 충칭쪽을 굴복시켜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킬 수 있기를 일본과 이시하라는 기대했던 것이다. 동아연맹론의 주장은 겉보기상으로 당시 너무나도 가혹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일본의 이전의 요구사항보다 많이 완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하라와 그의 동아연맹론은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들의 화평공작이 진행되고, 실제로 그 성과를 점점 거두기 시작하면서 일본에서도 주요한 정치적 주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동방회 (東方會) 라는 정치단체 출신으로 의원이 되었던 기무라 다케오 (木村武雄)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일본농민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더더욱 확대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에서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시하라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동아연맹론을 더더욱 확대시키고 쟁점화 시켜 동아연맹론을 일본국민들에게도 보급함과 동시에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동아연맹론의 본질을 인식시키게 할 필요성을 인식했고, 이를 위해 동아연맹론을 주장하는 정치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성 속에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동아연맹협회(東亞聯盟協會) 다. 동아연맹운동이 더더욱 힘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12월 22일, 왕징웨이의 충칭탈출 이후 발표되었으며, 앞으로 세워지게될 왕징웨이의 신정권과 일본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인가, 왕징웨이의 신정권에 대해 일본은 어떠한 방침을 세울 것인가를 규명하는 제 3차 고노에 성명이 발표되면서다. 제 3차 고노에 성명에서는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제휴(經濟提携) 라는 3대원칙이 결정되었는데, 이 3대원칙이 동아연맹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공동의 군사체제, 공동의 경제체제를 만든다는 동아연맹론의 구상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제3차 고노에 성명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동아연맹측에서는 이 3대 원칙이 자신들의 동아연맹론이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청년장교그룹이 제3차 고노에 성명의 작성에 크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실제로 동아연맹론이 고노에 성명에 영향을 끼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제 3차 고노에성명을 통해 이제 동아연맹론의 주장 (즉, 중국을 무작정 복속시키게 할것이 아니라 중국의 권리도 일정부분 지키면서 중국을 일본의 편으로 포섭한다) 은 이제 실질적인 국가의 대중국방침이 되었다. 일본동아연맹협회에서 발행한 《동아연맹(東亞聯盟)》창간호. 이렇게 영향력을 확대한 동아연맹운동은 1938년 가을부터 동아연맹협회의 창설준비에 들어갔고, 여러 준비과정을 거친 끝에 1939년 10월 8일, 도쿄에서 동아연맹협회 사무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동아연맹협회가 설립된 이후 동아연맹운동은 빠르게 확대되었다. 동아연맹협회는 일본 각지에서 강연을 함과 동시에 협회의 기관지 《동아연맹(東亞聯盟)》을 발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대외로 알리는데 노력했다. 동아연맹운동의 확대는 단순하게 일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연맹론이 더더욱 중요한 이론으로 작동했던 중국대륙에서도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동아연맹운동이 시작된지 1년도 되지 않아 중국내의 일본점령지에 확산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에 집중하려 한다. 중국대륙에서 전개된 동아연맹운동. 베이징을 시작으로 광저우, 난징까지 확산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동아연맹운동이 전파된 곳은 베이징이었다. 전쟁초기부터 점령되어 점령지 지배체제가 갖추어진 곳이기도 했고, 이시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日 아사히신문의 기자 다무라 신사쿠 (田村 眞作)은 당시 화북지역에서 선전을 비롯한 여러 중요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신민회 (신민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의 머우빈(繆斌,무빈) 이라는 자에게 접근해 동아연맹론을 설파했다. 본래 머우빈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친일주의자로, 신민회의 근간이자 사상을 만들었던 자였다. 하지만 머우빈은 동아연맹론에 대해 서술한 《동아연맹론》 책을 읽고 이에 감명받아 신민회에 있으면서도 동아연맹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동아신질서와 중국의 자유독립은 일치할 수 있다" - 머우빈 당시 화북지역, 즉 중화민국 임시정부(1937) 의 강역에서 일종의 유일한 정치단체였던 신민회를 제외하고 임시정부에서 정치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연맹운동 뿐이었다. 머우빈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민중들이 동아연맹운동을 지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민회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화북에서 이런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동아연맹운동이 중국내의 일본점령지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음과 동시에 완전한 친일성향 신민회에게는 골칫거리가 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권 (난징국민정부) 가 설립되었다. 왕징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난징정부가 전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중화민국의 정통정부임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정부가 일본측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가 아닌 완전한 독립된 주권을 가진 정부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필요 가 있었다. 정치적독립 을 이야기하는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부의 입지를 내외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좋은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왕징웨이 또한 동아연맹운동에 찬성하고 지지를 표했다. 이런 왕징웨이의 지지속에서 1940년 5월, 베이징 에서 중국내 첫 동아연맹운동 조직인 중국동아연맹협회 (中國東亞聯盟協會) 가 베이징에서 설립되었다. 회장은 머우빈이 맡았다. 일본내에서 가장 친일성향을 띄는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최대한 중국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참가하게 된 셈이다. 중국동아연맹협회는 6월부터 《동아연맹(東亞聯盟, 일본동아연맹운동의 잡지와는 이름만 같음) 》 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중국동아연맹협회 에서 발행한《동아연맹(東亞聯盟)》. 중국대륙 내 동아연맹운동의 확산은 베이징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0년 9월에는 광동성 광저우 중산기념당에서 중화동아연맹협회 (中華東亞聯盟協會) 가 설립되었다. 광저우에서 동아연맹운동은 준비과정에서만 8,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등, 빠르게 세를 불려나갔다. (전성기 때는 80,000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중화동아연맹협회는 《동아연맹월간(東亞聯盟月刊) 》 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베이징과 광저우보다 늦은 1940년 11월에 동아연맹운동 조직이 설립되었다. 동아연맹운동 자체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난징에서 추진되고 있었지만 조직의 수립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저우포하이를 중심으로 난징에서 동아연맹운동 잡지를 발행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아연맹운동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미 난징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징 에서의 동아연맹운동조직은 동아연맹중국동지회(東亞聯盟中國同志會)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아연맹중국동지회에서도 《대아주주의(大亞洲主義) 》 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난징의 동아연맹운동조직이었던 동아연맹운동중국동지회에서 발행했던 대아주주의 (大亞洲主義, 대아시아주의) 잡지의 표지. 그리고 이 조직은 왕징웨이가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중국동지회의 창설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동아연맹은 동아 각 민족이 각기 자유독립의 입장에서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며, 그 조건은 정치독립 ,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융합이다" - 왕징웨이, 1940년 11월 동아연맹중국동지회 결성식에서. 본래 동아연맹론에서 정치적독립은 가장 마지막에 서술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최우선순위로 언급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권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 물론 왕징웨이만이 정치적독립을 최우선 순위로 둔 것은 아니었다. 베이징의 머우빈도, 광저우도 정치적독립을 가장 우선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1940년 11월, 난징의 동아연맹중국동지회가 창설되는 시점에서는 광저우든 베이징이든 난징이든 동아연맹운동에서 정지적 중립을 가장 중요시 했었다.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했던 인물들의 성격은 다양했지만, 정치적 독립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한 이시점부터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의 중요 이데올로기이자, 중요 범국민적 운동중 하나로 작동했다. 왕징웨이는 1940년 12월의 국민당(왕징웨이) 3중전회에서 동아연맹운동을 이제 정부차원에서, 국민당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왕징웨이에서 추진되었던 주요 정치운동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통해 일본측으로 부터 정치적 독립을 비롯한 최대한 중국의 권리를 얻어내려고 했다.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을 움직이게 하는 3대 축중 하나로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의 대외용 이데올로기 로 작동했다. 신국민운동 (신국민운동에 대해 알고싶다면 여기를 : ) 이 대내용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 국민들의 단결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면,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이 일본으로부터 최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동아연맹운동을 토대로 언젠가는 일본과 중국(왕징웨이)가 동등한 관계에 도달해야하며, 일본은 중국에 최대한 권리를 보장해주어야하고, 일본은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의 정치적독립을 존중하여 왕징웨이의 중앙정부가 꼭두각시가 아님을 증명시켜 왕징웨이의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내 동아연맹운동은 동시에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연대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왕징웨이 정권에 대해 지지와 권한확대를 일본 국민과 일본 지도부에 타진했다.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정권의 주요정치운동이 됨에 따라, 지역별로 분리되어있던 조직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왕징웨이 정권에서는 베이징과 난징, 광저우의 동아연맹조직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니, 이가 바로 동아연맹중국총회 (東亞聯盟中國總會) 였다. 통합된 중국의 동아연맹조직들. 하지만 이들은 이전에 발행하고 있었던 잡지는 계속 발행하기도 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는 1941년 2월 1일, 난징의 중국국민당 중앙당사에서 오후 4시에서 발기식을 가졌다. 발기식에는 왕징웨이는 물론, 그의 부인 천비쥔과 정부의 주요인사들, 일본 영사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발기식에서 왕징웨이를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초대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이었던 고노에 후미다로는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성립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형제의 분투로써 귀국의 동아연맹운동이 전국적 통일, 발전을 이루게 된것은 동아의 해방의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며, 아울러 중국동아연맹의 성대한 성립식을 진심으로 경배함과 동시에 솔선수범해 동아연맹을 제창하여 동아의 영원한 평화와 동아보위에 분발하는 형제에게 진심으로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 고노에 후미다로 경축동아연맹중국총회2주년특간 (慶祝東亞聯盟中國總會成立二週年紀念特刊, 1943) 에 묘사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깃발. 파란배경에 흰색 4개의 직선은 평등,호혜,자유,건설을 의미하고, 노란원은 황인종의 공영권을, 원안의 파란직선 3개는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을 의미하며 상하의 적색은 영광과 성공을 의미한다. 수도 난징에 설립된 동아연맹중국총회는 구성면에서 왕징웨이정권이 이 운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애초에 발기식이 열렸던 곳이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의 중앙당사였으며, 천궁보(陳公博,진공보)와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 ( 陳璧君, 진벽군) 을 비롯한 왕징웨이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참가함은 물론이요, 머우빈을 비롯한 기존의 조직간부들까지 참가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이제 왕징웨이정권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동아연맹중국총회는 난징을 중심으로 타 지역의 조직들을 중국총회의 지부로 재편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베이징의 중국동아연맹협회는 지부로 포함되지 못했는데, 이는 동아연맹운동의 확대를 우려하던 일본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화북에서만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겠다며 화북정무위원회를 세우던 북지나방면군이 왕징웨이정권에 펼쳤던 간섭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아연맹중국총회로 통합되면서 조직은 더더욱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연맹운동은 상하이와 산터우, 후베이 성에도 지부를 설치하면서 조직을 더더욱 확대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 상하이지부는 《중국과동아(中國與東亞) 》라는 잡지를 별도로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각 지부에는 청년조직을 비롯한 여러 단체조직을 결성하고, 심지어 유럽에 연락소를 설치해 유학생도 동아연맹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 상해분회의 뱃지. 동아연맹중국총회는 조직의 요강인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의 1장에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중요목표를 4가지로 삼았다. 정치독립 (政治獨立), 경제합작(經濟合作), 군사동맹(軍事同盟), 문화구통(文化 溝 通 ) 왕징웨이가 이전부터 동아연맹운동에서 정치적독립을 최우선시, 중요시했던 것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리고 여기는 중-일간의 문화교류에 관한 문화구통이라는 4번째 항목이 추가되었다. 문화구통이라는 구호는 본래 일본동아연맹운동측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호였다. 하지만 중국측에서 일본과 중국이 공유하는 문화 (특히 유교적 전통) 가 많음을 이유로 중일간의 문화교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추가하자 일본측에서 이를 받아드렸다. (참고로 2장부터는 동아연맹중국총회 조직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있다.) 중일기본조약 (1940.11.30)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프로파간다.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구통 이라는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중요구호들이 적혀있다. 물론 정치적독립은 맨위에 위치했다. 왕징웨이는 이 동아연맹운동을 대외적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동시에, 정권 내부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반대세력에 영향력을 끼치는데에도 사용했다. 대표적인 곳이 신민회로,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화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사용했다. 동아연맹운동측에서는 "신민회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 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화북의 신민회를 비난하면서 화북에서 동아연맹운동과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신민회를 견제하고, 장차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국민당과 동아연맹은 어디까지나 동지익우(同地益友)로서 사상과 정신을 함께하지만, 신민회와 국민당은 어디까지나 동등한관계이지 종속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신민회와 일본에서는 이를 비난하고 왕징웨이를 견제하면서 이러한 왕징웨이의 노력은 일본과 신민회측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렇다면, 왕징웨이가 이토록 중요시했던, "정치적 독립" 을 쟁취하겠다는 왕징웨이의 의지가 보였던 동아연맹운동에 화평파나 정치가나 군인이 아닌, 당시의 민중들 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왕징웨이가 중요시했던 동아연맹운동은 민중들에게는 큰 지지를 얻지못했다. 민중들이 동아연맹운동에 큰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인데, 우선 동아연맹운동은 조직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본래 부터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일본동아연맹운동측의 지시를 받는 쪽에 더더욱 가까웠으며 , 상하이를 비롯한 여러 지부를 설립하는데 일본에 관여했었다. 동아연맹건설강령 《(東亞聯盟建設綱領) 》에서는 중국의 동아연맹이 조직이나 운영 모두 중국인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함을 이야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측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애초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은, 일본동아연맹협회의 대륙지부에 불과했다. 1941년 4월의 일본동아연맹의 조직표에는 도쿄부터 아오모리까지 일본 내 27개 지역에서 지부가 설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본동아연맹협회는 일본내의 동아연맹운동만을 관할하지 않았다. 일본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하고 있었던 남양군도에 설치된 지부 (지부는 팔라우에 존재했다) 와 함께, 대륙내에 설치되었던 동아연맹협회 조직들 또한 일본동아연맹협회의 지배를 받았다. 조직표에서는 대륙내에서 설치한 동아연맹협회를 두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대륙동아연맹협회 (大陸東亞聯盟協會) 로, 이들은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권 내에 존재하는 동아연맹조직이지만 화북정무위원회와 신민회처럼 일본군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지역의 조직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두번째가 왕징웨이가 이끄는 동아연맹중국총회였다. 1941년 4월기준 (동아연맹중국총회 조직은 그이후의 조직까지 표시가 되어있다.) 일본동아연맹협회의 조직도. 중국동아연맹운동조직들이 모두 이들의 산하에 있었다. 문제는 왕징웨이가 이끄는 동아연맹중국총회를 비롯한 중국측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이 이러한 구조를 받아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동아연맹측의 영도(領導)를 인정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정권내에서 이를 주도했지만, 이 운동은 애초부터 일본에 결속된 운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지역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측이 아닌 일본군측이 제어하게 되어버리면서,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권 강역내에서도 완전한 동아연맹운동을 이끌 수도 없었다. 두 번째는, 왕징웨이 정권 스스로가 내세우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와 동아연맹운동 의 충돌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국가의 공식적 이념으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내걸었다. 앞에서 보았던 난징의 동아연맹중국동지회가 발행하던 잡지이름이 "대아주주의" 인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이 대아시아주의를 통해 일본과 중국이 연합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 대아시아주의는 일본과 협력관계에 있는 왕징웨이정권을 정당화 함과 동시에, 일본과 중국이 동등한 연합을 맺어야한다 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동아연맹론이나 동아신질서와 같은 일본중심의 동아세력구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론들이 가지는 불평등성을, 즉 쑨원이 이야기했던 중국과 일본의 동등한 연합 이 아닌 일 본 우위의 연합 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또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계승함으로서, 왕징웨이 자신이 진정한 쑨원의 후계자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존재했다. 이렇듯, 왕징웨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이용해 일본측과 협력하고 있는 자신들을 정당화했고, 쑨원을 잇는 정통정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동시에 일본중심의 구상에도 반대를 던질 수 있었다. 그런데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의 입장에서는, 동아연맹운동은 중일의 동등한 연합이 아닌, 불평등한 연합이기에 비판받아야 마땅한 요소였다. 하지만 문제는 왕징웨이 정권은 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아연맹운동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쑨원을 계승했다는 왕징웨이 정권이 이런 일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에 더더욱 그 정당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 . 거꾸로 대아시아주의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현재 자신들의 정권의 위치가 현실적으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 사이에서 당시 선전부장을 맡고 있던 린바이셩은 1942년부터는 결국 대아시아주의는 차츰 사라지고 동아연맹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민중들은 동아연맹운동으로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한들, 이는 일본의 허락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애초부터 동아연맹운동이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손선생은 13년 1월에 열린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이 선언을 발표한 이후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동지들에게 맡기려 했던것 같았다. 은인이 자필로 건국강령을 쓰고 삼인제를 받아 피로를 풀었고, 정오가 되자 군서적을 읽을 틈도 없이 8월말이 되어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 나는 대아시아에 관한 연설을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일본 고베를 특별히 방문했는데 이것이 손선생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었다. 중국에서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손 선생이 오래전 말했듯이 동아의 해방이 있어야 합니다. 대아시아주의는 동아연맹의 근본원칙이고, 동아연맹은 대아시아주의의 구체적 실현이다 ...(중략) - 동아연맹중국동지회 창설식에서 왕징웨이의 연설 中. 또한, 신국민운동의 존재가 있었다.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국민들을 결집시키는 국내용 수단으로, 동아연맹운동을 대외용 수단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내의 이 민중들은 이 두 운동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신국민운동을 소개할때도 이야기했지만, 신국민운동을 강조하면 동아연맹운동이 약화되어버리고, 동아연맹운동을 강조하면 신국민운동이 약화되어버리는 두운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왕징웨이는 두 운동이 서로 균형을 맞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동아연맹운동의 실패에는 대외적 요인도 존재했는데, 이는 바로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연맹운동 내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만큼, 자신들의 동아연맹운동을 더이상 중국과 만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새롭게 점령된 일본의 점령지들에 전파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때 동아연맹중국총회에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참전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반려되고 후방에서의 지원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문제는,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부는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동아연맹운동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위해 일본의 종속국과 점령지가 모두 총동원체제 속에서 일본을 지원을 해도 모자랄판에, 이들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일본과 중국의 유교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연맹운동은 전쟁수행이 시작된지 얼마안된 시점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받아드리기 힘들었다. (실제 일본이 남방을 비롯한 태평양전쟁 점령지대의 운영방법을 바꾼 시점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지 2년이 다되어가는 시점인 1943년의 중반에야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동아연맹협회는 흥아원(興亞院) 아래에서 아시아주의 단체를 규합한 대일본흥아동맹(大日本興亞同盟) 에 포함되게 된다. 1942년, 동아연맹동지회(東亞聯盟同志會) 라는 이름으로 바꿔 활동을지속했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이전과는 너무 낮아진 후였다. 반면 일본동아연맹이 대일본흥아동맹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동아연맹조직들은 이전과 같은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정익찬회, 대일본흥아동맹, 일본방송협회가 발표했던 음반 《아시아의 힘(アジアの力)》 문제는 일본동아연맹협회가 사실상 영향력을 소멸해버리면서, 중국내의 동아연맹조직들 또한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일본 외교관이었던 이와이 히데이치(岩井英一)는 그의 글에서, 1942년 8월 시점에서 광저우의 동아연맹운동이 사실상 개점휴업상태 에 들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이 2년만에 위축되어 광명을 잃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 일본의 양해속에서 정치적 독립을 얻어내야하는 운동이 진작 일본내에서는 힘을 잃은 상황에서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었겠는가? 1943년에 이르러 동아연맹중국총회는 한커우 분회를 후베이분회에 통합시키는 등 조직의 축소과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각 지부마다 발행하고 있던 잡지들 또한 통합의 과정을 거쳤다. 잡지 《대아주주의 (大亞洲主義)》 와 《동아연맹월간 (東亞聯盟月刊)》 은 《대아주주의와 동아연맹 (大亞洲主義與東亞聯盟)》 이라는 잡지로 통합과정을 거쳤고, 이마저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잉크를 비롯한 물자부족으로 1944년 4월부터는 흑백만을 이용해 축소된 출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1943년에 들어 대동아회의등 다시 아시아주의는 주목을 받았지만, 이미 이시점에서 동아연맹운동은 그 주목에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의 사망이후 개점휴업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동아연맹운동 또한 왕징웨이가 사망하면서 더더욱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왕징웨이가 죽은 이후 개점휴업 상태를 유지하다가, 일본이 항복하면서 동아연맹운동도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런 점속에서도 주목해야할 부분은,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사실상 그 명맥을 잊지못했던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달리,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은 1944년까지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왕징웨이가 동아연맹운동속에서 "정치적 독립" 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노력을 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동아연맹협회 (좌) 와 동아연맹중국총회(우) 의 로고. 완전한 버전을 찾을수는 없어 아쉬웠다. 그렇다면 동아연맹운동은 무엇이었는가? 동아연맹운동을 행해왔던 것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국가였다. 하지만 두 국가는 같은 운동속에서도 일종의 동상이몽을 걷고 있었다. 이시하라를 비롯한 일본측은 운동속에서 중국의 일본공동체의 참가를 원했지만, 왕징웨이를 비롯한 중국측은 이 운동을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시하라도, 왕징웨이도 본래 자신이 추구했던 목표를 운동속에서 달성하진 못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진행했음에도 결국은 꼭두각시 지도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이시하라는 자신이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요건을 완성하지 못했다.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가 조계회수운동, 치외법권폐지운동, 산업회수운동 등 일본지배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중 하나로 평가된다. 오늘의 서술을 통해 왕징웨이라는 인물이 벗어날수 없는 협력정권이라는 한계속에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어떻게든 이 한계를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음을, 그것이 문제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고 과연 그것이 좋은것이라고 할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는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동아연맹운동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동아연맹중국총회를 비롯한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은 경성에 조직을 설치하기도 했지만,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동아연맹운동이 조선에 전파되면 조선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킬까 우려했다. 그러한 이유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쪽의) 조선에서 금지당했다고 봐도 무관했다. 또한 이미 이시점에서 조선인들은 왕징웨이정권의 수립과정을 지켜보면서 동아연맹론을 비롯한 일본의 논리가 이미 '허상' 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 또한 조선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참조 : 여기 ) [출처] 嵯峨 隆, 「東亜連盟運動と中国」, 『法學研究 : 法律・政治・社会 第 88 号』, 2015 内村 琢也, 「準宗教運動としての東亜連盟運動-東亜連盟協会の事例を中心に」, 『 創価大学大学院紀要 』, 1992 内村 琢也, 「 東亜連盟論の基本的性格 」, 『アジア研究 第 22 券 1 号』, 1975 桂川, 光正, 「<研究ノート>東亜連盟論の成立と展開」, 1980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 2009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民の衆動員工作 「新国民運動の展開」 」,『中国研究月報 723号』 , 2008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34. 이시하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汪兆銘, 『 全面和平への路 』, p. 172-175 대아주주의 : https://archive.org/details/dayazhouyuyi-1942.4-2 아시아의 힘 : https://fusensha.ocnk.net/product/2034 동아연맹 (일) 잡지 : https://www.kosho.or.jp/products/detail.php?product_id=235333872 동아연맹 (중) 잡지 : https://aucfree.com/items/d479007012 중일기본조약 1주년 포스터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0/Propaganda_leaflet_of_the_first_anniversary_of_Sino-Japanese_Basic_Treaty.jpg 동아연맹 상해지부 뱃지 : https://image.baidu.com/search/detail?ct=503316480&z=&tn=baiduimagedetail&ipn=d&word=%E4%B8%9C%E4%BA%9A%E8%81%94%E7%9B%9F%E4%B8%AD%E5%9B%BD%E6%80%BB%E4%BC%9A&step_word=&ie=utf-8&in=&cl=2&lm=-1&st=-1&hd=&latest=©right=&cs=2486087958,1752389300&os=13908403,3959471195&simid=3546575695,343430361&pn=0&rn=1&di=7249025186408693761&ln=307&fr=&fmq=1694724468816_R&ic=0&s=undefined&se=&sme=&tab=0&width=&height=&face=undefined&is=0,0&istype=2&ist=&jit=&bdtype=15&spn=0&pi=0&gsm=1e&objurl=https%3A%2F%2Fpic13.997788.com%2F_pic_auction%2F00%2F03%2F10%2F72%2F3107206.jpg&rpstart=0&rpnum=0&adpicid=0&nojc=undefined&dyTabStr=MTEsMCw0LDUsMSw2LDMsNyw4LDIsOQ%3D%3D 이시하라 사진 : 일문판 위키피디아의 이시하라문서
- 제 1·2·3차 고노에 성명 (第1~3次近衛聲明 / 1938)
* 본 글에서는 1~3차 고노에 성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번역에서 지나(支那) 와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원문 그대로의 번역을 보이기 위함으로, 어떠한 모욕할 의도가 없음을 알립니다.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1891~1945). 1938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그는 3차례의 성명을 발표하여 중일전쟁을 타개하려 했다. 제 1차 고노에성명 (1938. 1. 16) (쇼와 13년 1월 16일 제국정부 성명 / 昭和十三年一月十六日帝國政府聲明) 제국 정부는 난징 공략 후에도 지나 국민정부의 반성의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국민정부는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항전을 꾀하여 안으로는 인민 도탄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밖으로는 동아 전체의 화평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에 제국정부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하기에 충분한 신흥 지나정권의 성립과 발전을 기대하며 이와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 신 지나의 건설에 협력하기로 한다. 물론 제국이 본래부터 지나의 영토 및 주권 및 관련국의 권익을 존중한다는 방침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며, 동아화평에 대한 책임이 더욱 막중해진 지금, 정부는 국민이 이 중대한 임무수행을 위해 더욱더 분발하기을 염원하는 바이다. *본 성명의 발표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일본간의 소통통로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이로 인해 왕징웨이 측은 예문연구회라는 별도의 통로를 통해 일본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제 2차 고노에성명 (1938. 11. 3) (동아신질서건설의 성명 / 東亞新秩序建設ノ聲明) 바야흐로, 페하의 위세에 의해 제국 육해군은 능히 광동, 우한삼진을 공략하여 지나의 요충지를 평정하였다. 국민정부는 이미 지방의 한 정권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정부가 항일용공을 고집하고 있는 한, 이러한 것이 궤멸을 볼 때까지 제국은 결코 창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희구하는 바는 동아의 영원한 안정을 확보하여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이번 정전(征戰)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기에 있다. 이 신질서 건설은 일만지(日滿支) 3국이 정치, 문화, 경제등 여러분야에 걸쳐 상호간에 호조(互助)와 연환(連環) 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 을 근간으로 하며, 동아에서의 국제정의의 확립, 공동방공의 달성, 신문화의 창조, 경제결합의 실현을 기하는 것에 있다. 이는 실로 동아를 안정시키고 세계의 진운에 기여하는 것이다. 제국이 지나에게 바라는 바는 이 동아신질서 건설 의 임무 를 분담하는 것이다. 제국은 지나 국민이 능히 우리의 진의를 이해하고 제국의 협력에 응하기를 기대한다. 더구나 국민정부라고 할지라도, 종래의 지도정책을 일소하고, 그 인적 구성을 개조하여 갱생의 열매를 맺어 신질서 건설에 임하게 된다면, 이를 감히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은 다른 국가들도 제국의 의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동아의 신정세에 적응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맹방 국가들이 보여준 두터운 우호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를 표하는 바다. 생각 컨대 동아에서의 신질서 건설은, 우리 건국의 정신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이것을 완성하는 것은 현대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무다. 제국은 필요한 국내의 여러 부분에 대해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 총력 확충을 도모하고 만난을 물리치고 본 임무의 달성을 위해 매진할 것이다. 이에 정부는 제국부동의 방침과 결의를 성명한다. *제 2차 고노에 성명 발표 이후 왕징웨이는 충칭을 탈출한다. (1938. 12.18) , 그리고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여 하노이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1938.12.20) 제3차 고노에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는 왕징웨이측에서 일본측에게 자신에 호응하는 성명을 발표해주길 바란 결과였다.) 제 3차 고노에성명 (1938. 12. 22) (일지국교조정방침에 관한 성명 / 日支國交調整方針ニ關スル聲明) 정부는 올해 재차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종일관 항일 국민정부의 철저한 무력 소탕을 기할 것임과 동시에 지나의 동우(同憂) 동지 지사들 과 협력하여 동아신질서 건설을 향해 만진하려 한다. 바야흐로 지나 각지에서 갱생의 세력이 팽배해지고 있고, 건설의 기운 또한 점점 고조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갱생 신 지나와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근본 방침을 안팎으로 천명하고, 이로써 제국의 진의를 철저히 기하려 한다. 일만지(日滿支) 삼국은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공동의 목적으로 하여 결합하여, 상호가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제휴(經濟提攜) 의 결실을 거두고자 한다. 지나는 먼저 무엇보다도 이전의 편협한 관념을 청산하고 항일이라는 어리석은 실수와 만주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일소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본은 나아가 지나가 만주국과 완전한 국교를 수립할 것 을 거짓없이 요망한다. 다음으로, 동아의 천지(天地) 에는 코민테른 세력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일본은 일독이(日獨伊) 방공협정의 정신에 따라, 일지방공협정의 체결 을 일지 국교조정의 매우 중대한 요건으로 하려한다. 그리고 현재의 실정에 비추어 이 방공의 목적에 대한 충분한 보장을 거론하기 위해 동 협정의 지속 기간동안 특정지점에 일본군의 방공주둔을 인정할 것 및 내몽고 지방을 특수 방공지역으로 할 것 을 요구하는 바이다. 일지경제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은 조금도 지나에서 경제적 독점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며, 일본은 신동아를 이해하고 이에 즉응하여 행동하려는 선의를 가진 제3국의 이익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것을 지나에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일지의 제휴와 합작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기하려는 것이다. 즉, 일지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지나는 제국신민에게 지나 내지에서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용인 하여 일지 양 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촉진하게 하고, 또한 일지 간의 역사적 경제적 관계에 비추어 특히 북지(北支), 내몽고 지역에서는 그 자원의 개발 이용에 대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편의를 제공할 것 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이 지나에 요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영토가 아니며, 전비의 배상이 아님은 절로 분명해지는 것이다. 일본은 실로 지나가 신질서 건설의 분담자로서의 직능을 필요한 최소한의 보장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일본은 지나의 주권을 존중하고, 나아가 지나의 독립완성을 위해 필요한 치외법권을 철폐하고 또한 조계의 반환에 대해 적극적인 고려를 하고 있다. *제3차 고노에 성명의 발표 이후, 왕징웨이는 염전 (艶電, 1938.12.29)를 발표한다. (염전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 : )
- 답문 1 (答問(一)/ 1939.8.15)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답문 (1) ( 答問(一) ) 이달 9일, 광저우에서 연설을 한 후 많은 편지를 받았다. 받은 편지 중 이러한 질문이 있었다. “선생의 말씀은 정전에만 치중하고, 철군에는 치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철군은 어려운 일입니까?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평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이미 답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이러한 편지를 통해 질문을 받았으니, 나는 다시 몇 마디 간략하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9일, 광저우에서 했던 연설은 여기를 참조 : ) 일반적으로 양국이 전쟁 상태에서 화평 상태로 나아가는 절차는 첫 번째 단계 는 휴전, 두 번째 는 화평 협상 , 세 번째 단계 가 철군 이다. 즉, 철군은 화평의 최종 결과이지 화평의 선결조건이 아니다. 화평 조약에서는 철군 이전에는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함을 명시하기도 하고, 특정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다시 군대를 배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철병을 화평의 선결조건으로 삼는 것은 천자겅 (陳嘉庚) 선생과 같은 이들 뿐일 것이다. 그는 국민참정회 제2차 회의에 전보로 “일본군이 중국 경내에서 완전히 철군하기 전에는 화평을 논할수 없다” 라고 제의한 바 있다. 하지만 화평을 하게되면 일본군의 철군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인데 이를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중국인은 화평은 철군이 따르지 않고서는 얻을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것은 “어떻게 철군을 할 수 있게 하는가? ” 에 있다. 이는 “어떻게 화평을 이룰 수 있게 하는가?” 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따라서 철병 없이는 화평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은, 화평이 없으면 화평을 논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으로, 이는 의미 없는 말이며 문자 상으로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화평을 거부하고 그 진행을 막으려는 속셈은 논박할 가치도 없다. 우리는 화평을 이루기위해 현실과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화평의 실현을 위해 현실에 집중한다면, 그 첫걸음은 역시 휴전 이다. 양국은 교전을 하게되면 한쪽은 이기게되고, 한쪽은 지게되는 것을 피할수 없음을 알아야 하며, 이에 따르는 휴전 조건은 종종 가혹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 전쟁 당시 협상국들은 독일의 휴전 조건에 대해 완전한 무장 해제를 제시한 바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이 “중국군이 화평반공의 뜻만 보인다면 휴전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승자를 자처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는 국민의 환기가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 일본이 “일본군이 이미 점유하고 있는 곳, 모든 치안과 경비 등 행정 경제를 일본군의 손에서 차차 중국에 반환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일본이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하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는 빈말이 아니다. 따라서 국민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행정당국과 병사들이 화평반공을 표방하게 된다면, 이는 그 관할 구역 내의 공산당만 불행해지는 일에 불과하다. 왜냐면 이렇게 되면 공산당은 더 이상 게릴라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속이고 갈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당 외에는 모두 화평반공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지방을 계속하여 일본군 점령의 연속 상태가 되지 않게 할것이다. 현재 점령된 곳도 치안과 경비, 그리고 행정과 경제가 차차 환수되면 화평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화평의 최종적 결과는 철병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첫 번째 단계가 수행되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도 순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장제스 가 만약 화평반공에 찬성한다면 전국적으로 교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휴전이 이루어지고, 전국적으로 화평 협상을 하게 된다면 전국적으로 철병을 이루게 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럽게 되고 훨씬 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장제스의 화평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먼저 부분적으로부터 화평을 시작하여 전국으로 옮기는 것이 오늘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 만주국 방문 담화 (訪滿在新京對記者談話 / 1942.5.8)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만주국 방문 담화 (訪滿在新京對記者談話) 재작년 11월 30일 , 귀국과 우리는 우방 일본과 공동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의 축심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작년 6월 21일 에는 우방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신문기자들과 만나 국제정세에 대해 이야기 했고 , 여기서 나는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든 동아의 축심은 영원히 변치않을 것 이라 대답한 바 있다. (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왕징웨이의 1941년 방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작년 12월 8일 ,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우방들은 전력을 다해 동아신질서 건설의 장애를 제거하고 공존공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협력할 것임을 표명 하였고, 우리 국민정부 또한 동고동락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앞으로 동아의 축심은 더욱 공고해질 뿐만 아니라, 더욱 확장될 것이다. ( 왕징웨이의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담화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이번 대동아전쟁은 한 민족, 한 국가의 존망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동아의 한사람인 우리는 모두 운명을 자각하고 합심하여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대동아전쟁에서 동고동락하며 가장 깊은 연대감을 공유하고, 안전과 안보를 함께 해왔다. 그리고 그 노력을 더욱 분발시키기 위해 나는 이번에 귀국의 국민을 만나러 온 것이다. 신징 에 도착한 이후 황제폐하 를 뵙고, 예의를 갖추고 황제폐하의 숭고한 말을 들으며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고, 귀국의 정부 인사 및 민중들과 만나고, 신흥 신징의 기상을 보고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특히 열정적인 신징의 환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국민정부와 만주국, 그리고 우방 일본 3국의 영원한 우호와 공동의 부흥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중일기본조약 과 중일만공동선언 이 동시에 발표된 후, 상호간의 국교가 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의 축심도 함께 확립되어 서로의 관계는 신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본연의 우호관계를 증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중화민국 과 만주국 의 수만 동포들이 다시 손을 잡고, 동아의 해방전선에 함께 서게 되었다. ( 중일기본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대동아전쟁의 발발 후 선진국인 일본은 전국의 힘을 모아 선두를 맡았고, 이를 통해 동아 해방의 전선은 무한한 광명을 가지게 되었다. 만주국 동포들은 동아 전체의 신 단결을 만들어 내었고, 만주국이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여 동아신질서 구축에 진전을 이루기를 바라지 않는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귀국에 오게 된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만주국을 직접 방문하여 만주국이 지난 10년간 이룬 각종 건설 성과를 보았고, 귀국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대동아전쟁을 위해 모두가 동고동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더욱이 여러국가들이 만주국의 건설에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보며 나는 가슴 가득한 기대와 무한한 위로를 받으며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기회를 빌어 두가지 의견을 나의 사랑하는 만주국 국민 제군들에게 전하고 싶다. 첫째, 흔히들 만주를 동양의 발칸으로, 아시아의 화약고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내가 볼 때 만주가 과거에 받아왔던 우여곡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 앞으로의 만주국이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온갖 우환 속에 있었던 만주지만, 귀국 국민들의 노력과 우방 일본의 협력으로, 만주는 10년 동안 이전에 남아있던 부서진 잔해와 부스러기를 하나하나 제거,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화약기운이 가득한 이 만주를 동아를 지키는 요새로 개조하여 신동아의 한 기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대동아 전쟁이 일어난후, 우리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우방인 일본과 동고동락하기로 하였고, 귀국 또한 단호하게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을 표명하였다. 비롯 우리 양국은 군사적으로 우방을 위해 힘쓰기는 어렵지만,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동아의 대륙국가인 우리와 선진국가인 일본이 존망안위를 함께하는 관계라는 것은 이번 대동아 전쟁을 통해 더욱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닌 우리는 이에 더욱 노력하여 양국 본연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고, 양국간 협력 정신을 더욱 강화하여 중만 양국은 일본과 동거동락, 공동안위를 위해 협력의 태세를 갖춰야한다. 만주국은 동아 대륙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고, 광대한 인력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대외 국방과 대내의 부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만주국 국민 제군들은 자신의 지위를 소중히 여기고, 자발적인 정신으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만주국의 발전, 더불어 동아 민족 전체의 공존공영을 확고하게 하는데 이바지 해주기 바란다. 둘째, 귀국의 10년 건국의 성과를 통해 우리는 귀국 국민들의 고달픈 노력, 우방 일본의 노력, 동아의 앞날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내가 큰소리로 제군들과 전 동아의 인사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에서 비롯된 일종의 동아인의 ‘자신감’ 이다. 우리는 동아의 역사가 길고, 동아의 문화는 초월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수 천년간 그 문화와 역사를 이어왔다. 이것이 바로 자신감이다. 2세기 동안 우리는 침략자의 폭풍우를 막아내었고, 100년 전 아편전쟁과 흑선 사건을 시작으로 영미가 동아를 포위하고 중국을 침략하며 일본을 압박해왔지만,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 무자비한 굴레를 깨트린 것, 이것은 동아인의 자신감의 첫 표현 이다. 수십년 동안 중국의 국민혁명 이 좌절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전진해온 것, 이 또한 동아인의 자신감의 표현 이다. 지금 만주국이 10년간 키워온 새로운 기상을 보면서 동아인의 자신감은 동아인의 피속에 스며들어 동아의 모든 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이는 동아에서 지울 수 없는 징조이며, 동아 부흥의 필연적 징조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지금의 대동아전쟁이 더욱 생각난다. 대동아 전쟁 이전 영미의 침략자들은 A.B.C.D 포위망 (A (America, 미국) , B (British, 영국), C (China, 장제스의 중화민국 충칭정부), D (Dutch, 네덜란드) 의 약자로, 일본은 이들이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포위망을 형성했다 보았다.) 을 큰소리로 외치며 동아 여러 민족의 악감정을 도발하는 음모를 멈춘 날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는 아편전쟁과 흑선사건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영미는 동아에 대해 이러한 음모를 다시한번 격렬하게 되풀이 해왔다. 우방인 일본 은 동아인의 자신감을 총동원하여 메이지 유신 이래 축적된 군사, 경제, 문화의 힘을 가지고 용감하게 일어나 영미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왔다. 일본은 모든 방향에서 싸워 모든 곳에서 승리했다. 영미 침략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이는 동아인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성과다. 중화민국과 만주국 은 모두 동아의 축심의 일환으로서, 중만은 일본과 동시에 동고동락의 입장을 고수하고 동아의 해방을 함께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실질적으로 대동아전쟁에 함께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동아인들이 공유하는 자신감을 어떻게 발휘하여 단결시키고 협력시켜 침략자들이 전쟁의 불길을 진압할 수 있는가 에 달려있다. 우리는 여기서 고작 2~3일을 만나고 또 헤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함께일 것이고, 우리의 노력도 언제나 함께 일 것이다. 우리는 동아를 보위하고 최종의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수백년간 동아침략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그 수치를 함께 씻어낼 것이다. 우리는 합심하여 동아 화평의 축을 공고히 하고 , 합심하여 동아 민족이 대대로 공존공영할 수 있는 신천지 를 창조할 것이다. 나는 귀국의 국운이 융성하기를 기원하며, 여러분들의 전진과 대동아전쟁의 승리, 그리고 중일만 3국의 영원한 협력을 기원하는 바다.
- 미국기자에게 국민정부의 시정요강을 천명하다 (1940. 8.25)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미국기자에게 국민정부의 시정요강을 천명하다 (向美記者闡明國府之施政綱要) *미국 언론인 이바녜스 (Ibanez,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름으로 보아 에스파냐계로 추측된다.) 여사는 민국 29 (1940) 년 8월 25일 오후 4시, 왕 주석을 만나 국민정부의 시정방침과 중미일 3국의 우호관계 확립에 대해 왕주석과 간담회를 가지고 간절한 문답을 나누었다. Q : 선생께서 실현하시고자 하는 이상은 무엇인가? 선생은 독특한 위치에 있는 만큼, 선생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기꺼이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A :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과 일본의 영원한 화평을 정착시켜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삼민주의의 중화민국을 완성하는 것이다. 중일 양국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인종이 같고 문화가 통하는 만큼, 상호간의 화평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이 화평에 힘쓰고 있다라는 것은 중일 양국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최후승리는 기약하기 어렵고, 일본의 중국을 병탄하려는 목적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은 쌍방 모두를 해치는 일이며, 화평은 쌍방이 공존공영하는 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평등호혜와 상호 주권존중의 원칙에 입각하여 화평을 실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삼민주의의 실행은, 민족의 독립, 민권의 발달, 민생의 개선으로 하여금 국가권력이 민주라는 올바른 궤도에 따라 확립될 수 있도록 하여 독재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으로, 이는 특히 중국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Q : 선생은 어떤 강령으로 이 이상을 실현할 것인가? A : 국민정부의 시정방침은 올해 3월 공포된 정강에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각 우방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고, 그 관계를 조정하며, 우방과의 결속을 통해 코민테른의 음모를 방지하고, 국방군을 창설하고, 독재제도를 타파하고, 헌정을 실시하고, 산업을 발달시키고, 금융을 안정시키고 농촌을 부흥시키며 화평반공건국을 교육방침으로 삼아 과학교육을 제고하고 과거의 잘못된 학풍을 제거하는 것 등이다. Q : 이러한 강령을 실시에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A : 위에서 이야기한 정강을 실현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선 평등호폐, 상호존중의 원칙에 근거하여 일본과 국교를 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인사들은 우리들의 태평양의 화평 확립을 위한 노력을 존중하고 양해해주기 바란다. 손중산 선생은 일생을 중일의 우의증진에 힘써왔고, 나아가 이를 통해 미일의 관계 개선을 간절히 바래왔다. 중일 양국의 우호관계는 중일미 3국 우호의 선결조건이 될 것이며, 중일의 우호와 협력이 하나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미중, 그리고 미일 우호는 제대로 기반을 다질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Q : 민주주의의 관념을 가진 미국인을 대하는데 있어 우리가 선생을 어떻게 도을 수 있겠는가? 중국을 지지하고 식견이 있는 미국 인사들에게 선생은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가? A : 확실히 미국 국민들은 확실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만큼, 미국 국민들은 동아의 항구적 평화를 확립하는 원칙과 우리가 열망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화평운동의 원칙을 인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의 비서관이 말했다. “유럽, 미주, 아시아는 각자 연합하여 기본적인 영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라고. 이는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며 손중산 선생은 이가 태평양의 영원한 화평을 보장하는 유일한 기반이라 보았다. 나는 미국의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과 타인을 존중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미국의 평화가 먼로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었듯이, 동아의 화평 또한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이 인정한 것이고, 고노에 성명은 그 증명이라 할 수 있다.
- 중국 공군의 신사명 (中國空軍的新使命 / 1942.10.12)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중국 공군의 신사명 (中國空軍的新使命) 공군 장병들이여, 오늘 본 위원장은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쁨이 크다. 국부 손중산 선생께서는 공군이 나라를 구한다고 하였는데, 2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공군이 싹을 피우게 되었으니 위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도하다. 만약 우리가 이 21년동안 계속 노력했다면 공군은 오늘처럼 겨우 싹만 틔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공군이 나라를 구한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그 슬픔은 정말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과거의 공군은 크게 두가지의 잘못된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목표의 오류이다. 여러분들은 과거에 공군 교습을 받은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 공군의 힘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에는 안타까운 사건과 모습들이 여러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공군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는 육군도, 해군도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이전의 육해공군 군인훈조에서도 분명히 이야기했다. 1조에서는 ‘충성과 믿음을 국가에 바치는 것’으로 군인은 모름지기 충(忠) 과 신(信) 두글자를 중요하게 여겨 스스로의 생명과 모든 것을 국가에 기여하는데 중점을 두어야한다. 4조에서는 지혜(智), 인(仁), 용기(勇), 엄격함(儼)을 자신의 기본으로 삼아야함을 이야기 했다. 이 두가지는 군인의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다. 제5조 (국민을 사랑하고 물자를 소중히 여기며 국가사회의 정기를 기른다.) 또한 이 기본정신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와 3조에서는 군인들의 목표에 대해 표기했다. 제 2조에서는 중국을 회복하고 동아부흥을 위해 삼민주의 및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해야함을 이야기 했고, 제3조에서는 공비의 해로움은 중국의 입국정신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이 두가지는 일반 군인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사명과 실제 시대적 흐름는 완전히 같지 않다. 국가의 생명은 수억 수만년까지 이어지는 것이고, 우리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은 이미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수억 수만년은 지속될 것이지만, 우리 개인의 생명은 한정되어있다. 학습의 시작부터 은퇴의 시기까지, 개인이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사오십 여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수십년동안 우리는 정신력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모든 것을 국가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이전의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하며 세워온 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훈조 제2조는 동아에 관한 것이고, 제3조는 반공에 관한 것이다. 이 두가지는 화평반공의 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화평은 중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동아를 부흥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이를 위해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 반공은 공산주의의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훈조의 1조와 4조를 통해 육해공군의 인격을 수양하는 도덕의 기초를 갖추었고, 제2조를 통해 군인들의 시대적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며 공군의 한 목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동아전쟁의 발발이후 동아의 상황은 급변하여 예전에는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은 이상적인 것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구체화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우방 일본의 육해공군 장병들은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으며, 대동아전쟁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 전국민이 후방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동아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동아의 동지이며, 하나는 동아의 반역자다. 무릇 동아의 동지들은 중국이 부흥하지 못하고 중국이 완성되지 못하면 동아를 보위할 책임을 질수 없음을 알고 있다. 동아와 중국이 부흥하지 못하면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하고 중국은 여전히 영미의 차식민지 지위에 머물게 되고 승리하게 되면 동거동락속 미래의 동지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때문에 현재 대동아전쟁에 협력하여 동아 동지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바라본 바, 우리 공군의 작은 싹을 돋게 해준 비행기들 마저 우방인 일본이 선물한 것인데, 일본은 전력을 다해 대동아전쟁을 대비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 비행기를 우리에게 보냈겠는가? 이는 우리가 중화를 부흥시킬 수 있게 하는 기반을 갖추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동아를 보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다. 우방은 우리 중국의 육해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우리가 동아의 동지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동아의 동지는 동아의 장래 부흥을 도모하고, 동아의 반역자는 중국을 비롯 동아를 단숨에 영미에게 넘기려 하기 때문에, 대동아전쟁 이후 훈조 제2조의 의의는 더욱 중요해졌다. 나는 공군 장병들이 합심하여 우리 공군의 진보, 중국 방공의 진보, 대동아 방공의 공고화를 도모해주길 바란다. 목표는 이제 명확해졌지만, 시대의 사명이 이처럼 막중한 만큼 우리는 막중한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예전의 공군은 목표적 오류 뿐만 아니라 수많은 파벌이 존재하여 절강과 광동의 파벌 뿐만 아니라 모든 파벌이 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육해공군 군인훈조를 통해 우리의 공동 단련과 수양을 함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아부흥을 우리 모두의 목표로 만들어 부흥시킬 수 있다. 따라서 과거의 이기적인 파벌 관념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가 ‘각고내로, (고난을 참고 노고를 견디다.) 용맹정진 ’ 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보위할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반드시 정해야 한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파벌과 잘못된 습관을 깨끗이 제거하여 공군의 건전한 사람이 되어 신시대 공군의 새로운 책임을 다해야한다. 나는 아까 앞에서 슬프지만 동시에 위안도 된다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지금의 공군은 이것밖에 없어 매우 슬프지만, 이제 싹을 틔웠으니 지금은 작으나 장래에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지금은 양을 논할 때가 아닌, 질을 먼저 논해야할 때이다. 비록 지금 우리의 공군은 양은 적지만 공군의 질이 아주 좋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확대될 수 있다면, 우리의 공군은 진정한 공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은 어떻게 높일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야하고, 동아의 동지관계에 입각하여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둘째는 각고내로 하고 용맹정진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 중국은 매우 고달프다. 동아도, 전세계도 지금 모두 고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대국적으로 바라보면, 이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세계전쟁에서 추축국은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도 동아에선 우방 일본은 반드시 승리한다.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국민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화평반공건국 정책은 매우 정확하다. 그리고 이는 미래에 반드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군 장병들이 ‘각고내로, 용맹정진’하는 정신으로 공군의 미래를 진보시키고, 좋은 자질을 가지게 된다면 양의 문제 또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공군 장병들이여, 중국의 방공과 동아의 방공을 위해 힘써 주기를 바란다. 이상의 말을 통해 그대들이 언제든지 자신을 단련하고 서로를 단련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대들의 건강과 공군의 발전을 기원하며, 육해공군 군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훈조를 실행하고,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보위할 책임을 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