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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 1941.2.1)

    경축동아연맹중국총회2주년특간 (慶祝東亞聯盟中國總會成立二週年紀念特刊, 1943) 에 묘사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깃발. 파란배경에 흰색 4개의 직선은 평등,호혜,자유,건설을 의미하고, 노란원은 황인종의 공영권을, 원안의 파란직선 3개는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을 의미하며 상하의 적색은 영광과 성공을 의미한다. *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창립총회는 쇼와 16 (1941) 년 2월 1일 오후 4시, 난징시의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에서 거행되어 왕 주석을 비롯하여 중앙당 수뇌부, 각 대표등 수백여명이 참석하였고, 여기에는 왕 부인, 고 쩡중밍 선생의 유가족 등도 참석하여 엄숙히 행사를 진행하였다. 총회는 만장일치로 왕주석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고, 왕 주석 또한 이를 허락하여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날 고노에 수상은 다음과 같은 축전을 보내 중국의 동지들을 감격시켰다.       형제의 분투로써 귀국의 동아연맹운동이 전국적 통일, 발전을 이루게 된것은 동아의 해방의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며, 아울러 중국동아연맹의 성대한 성립식을 진심으로 경배함과 동시에 솔선수범해 동아연맹을 제창하여 동아의 영원한 평화와 동아보위에 분발하는 형제에게 진심으로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총 리 대 신 고노에 후미마로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을 도모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각각 자유독립의 입장에 입각하여, 최근에 발표된 공동선언 (1940년 11월 30일 발표된 일만화공동선언을 의미.) 의 정신에 의거하여, 도의에 기초한 신질서를 건설하여 상호 그 주권 및 영토의 존중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있어서의 상호돈목의 수단을 강구하고 공존공영, 동아부흥이라는 공동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이와 같이 본회를 창립하고, 명칭을 동아연맹중국총회로 정한다.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동아연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 정치독립 (政治獨立)  2 : 경제합작 (經濟合作)  3 : 군사동맹 (軍事同盟)  4 : 문화구통 (文化溝通)       제2조 : 동아연맹중국총회 (이하 본회로 약칭) 은 동아연맹의 실현 및 강령의 실행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제3조 : 중화민국 국민으로서 본회에 참가,가입을 청구하여 본회의 허가를 거친 이는 성별을 불문하고 본회의 회원으로 삼는다.       제4조 : 본회는 회장 1인을 두고 이를 창립총회에서 지정한다.       제5조 : 본회는 회장 밑에 이사회를 설치하여 집행기관으로 삼고, 감사회를 설치하여 감찰기관으로 삼는다.       제6조 : 이사회에는 상무이사 및 이사를 두고, 이사로 36명에서 48명을, 그중 7명에서 9명 가량을 상무이사로 한다. 이들의 임명은 회장이 창립대회에서 제출하여 결정한다. 이후 인원의 증대와 같은 경우가 발생하면 회장과 이사회에 이를 제출하여 결정하게 한다.       제7조 : 본회는 수도에 설치하고, 각성시의 실제수요에 따라 분회를 설치한다.       제8조 : 본회 이사회 및에 비서처 및 다음과 같은 위원회를 둔다.  1. 비서처  2. 지도위원회  3. 선전위원회  4. 문화위원회  5. 사회복리위원회       제9조 : 본회는 사무의 확대시 이를 회장을 통해 이사회에 제출하고, 의사회의 의결에 따라 위원회를 증설한다.            제10조 : 비서처에는 비서장 1명, 부비서장 2명을 두고, 각 위원회에는 주임위원 1명, 부주임위원 2명, 위원 7명 ~11명을 둔다. 회장이 지명하는 비서장 및 각 위원회 주임위원을 상무이사로 두고, 부비서장 및 각 위원회 부주임위원을 이사로 둔다.       제11조 : 감사회에 상무 및 감사를 두고, 감사로 35~47명을, 그중에서 5명 내지 7명을 상무로 하고, 이는 창립총회에서 제출, 결정하고 감사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과 같은 경우에는 회장 및 감사회에 이를 제출하여 결정하게 한다.       제12조 : 감사회에 비서장 1명 및 부비서장 2명을 두고, 회장이 지명하는 비서장을 상무로, 부비서장을 감사로 삼는다.       제13조 : 이사회 및 감사회, 이사회 소속 각 위원회 조직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4조 : 각성시 분회에 이사와 감사를 일부 두고, 그중 5명 내지 7명을 상무이사로, 그중 3명 내지 5명을 상무감사로 삼는다. 이는 회장의 명령을 받아 이사회가 지명한다.       제15조 : 분회의 조직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6조 : 분회 이하의 지방조직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7조 : 본회는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한다.       제18조 : 본 회장(會章)은 창립총회에서의 통과에 의해 실행한다.   (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왕징웨이의 동아연맹중국총회 창설기념 훈시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동아연맹운동 (東亞聯盟運動)

    동아연맹운동의 이론을 확립한 이시하라 간지 (石原莞爾). 그는 자신이 주장하던 "세계최종전쟁" 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비롯한 동아연맹을 계획했던 인물이었다. 동아연맹운동은 이시하라 간지 ( 石原莞爾 )가 입안하고 그가 중심이되어 시작한 것으로, 1939년 10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동아연맹협회 ( 東亞聯盟協會) 이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동아연맹은 이시하라와 그의 뜻에 동참하는 동지들 수십명으로 시작되었던 아주 작은 단체에 불과했으나 단체가 조직된지 2년이 되지 않아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전국은 물론,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당시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던 동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시하라 간지는 어떠한 이유로 동아연맹이라는 운동을 창안했고 이 동아연맹운동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 곳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일까? 또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 이시하라 간지는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사실 이전부터 일본에서 만주의 중요성은 이미 인식되고 있었다. 중국대륙으로 나아가고, 소련의 극동아시아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리적 중점을 제외하고도 만주의 수많은 자원과 광활한 농지등 만주의 많은 요소들은 일본에게 중요한 것이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이 이전부터 남만주지역에서의 팽창과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던 봉천군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시하라에게 있어 만주는 또다른 의미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만주는 기필코, 무조건 일본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시하라는 어떠한 이유로 만주가 일본에게 기필코 필요한 필수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시하라는 1927년 이미 자신이 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일본의 국방(現在及び将来に於ける日本の国防)》 에서 만주와 내몽골지역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본이 만주와 몽골 (이름바 만몽) 을 점령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1928년 《관동군 만몽영유계획 (關東軍 滿蒙領有計劃)》 를 통해 일본이 만몽을 점령함으로서 제국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앞에서 보았듯 만주는 경제적, 지리적 여러 이점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대공황때 일본은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엔(円) 블록을 결성해 세계대공황에 대처할 수 있었고,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대륙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던 만주는 전쟁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이러한 이유외에도, "진정한 목적" 을 위해 만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시하라에게 만주가 그렇게 중요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가 작성한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이시하라는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세계최종전쟁론(世界最終戰論)》 이라는 책을 서술한다. 이시하라는 만주가 이 "세계최종전쟁" 을 위해 일본에게 필요했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최종전쟁이 무엇이길래, 이시하라는 만주가 일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를 위해 그의 세계최종전쟁론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시하라의 세계최종전쟁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시하라가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 . 이시하라는 세계최종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 보았으나, 이를 위해서는 많은 선행조건이 준비가 되어야 했다. 만주는 그중 하나였다. 이시하라는 두차례의 걸친 세계전쟁으로 세계가 하나로 통일된다고 보았다. 이시하라는 세계가 점점 일종의 연합체로 합쳐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이는 소련,유럽,미국,동아 4개로, 동아는 일본이 주도하는 연합체였다. 이시하라는 세계최종전쟁에서는 "한발이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폭탄" 이 등장할것이라면서 미래의 무기기술에 대한 일정부분 예측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여러 존재했다. 이시하라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가 세계최종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지만, 이시하라는 지금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만주였다. 이시하라는 만주의 자원과 인구를 보면서 만주가 무궁무진한 발전을 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5개년 경제개발 계획과 같은 경제개발,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중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발전의 촉진은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이시하라는 만주를 점령한 뒤 만주에서 발전을 진행함과 함께, 중국을 비롯한 동아국가들을 일본의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한 이론이 바로 동아연맹론(東亞聯盟論) 이었다. 일본과 만주, 중국을 연결하는 하나의 (일본중심이고 일본이 주도하는) 경제적, 군사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동아연맹론의 당시 핵심이었다. 이시하라는 중국을 이러한 동아공동체에 끌어들이기를 희망했다. 그렇다면 중국을 어떻게 이 공동체에 편입시킬 것인가? 처음에는 전쟁이 그 답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정부도, 군부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고 이시하라도 전쟁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국은 이시하라의 구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을 포섭하려던 이시하라의 계획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물거품이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이시하라는 이전부터 만약 일본이 제대로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이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며, 20년이고 30년이고 전쟁을하게되는 장기전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따라서 이시하라의 관점에서 1937년의 일본은 아직까지 중국과의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다리에서의 충돌을 시작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중국과 전쟁을, 그것도 전면전을 시행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었다. 또한 이시하라가 우려했던 것처럼 중국에서의 전쟁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의 길로 향해가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이상, 이시하라가 구상했던 것처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하여 공동체를 구상하는 것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이 공동체를 구상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이시하라가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시하라에게는, 최대한 빠르게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을 일본중심의 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징웨이가 화평교섭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 중국 내에도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시하라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1938년 중엽에는, 이시하라의 동아연맹론은 일부분 변화하여 3개의 핵심요소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경제의 일체화 어느 국가군에도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급자족 경제블록을 구축하는것. 국방의 공동화 세나라 (일본,만주,중화민국) 이 통일된 방침아래 군대를 만들고 운영하는 체제를 만드는것 정치적 독립 공동체의 가맹국들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정치적 독립" 이었다. 이는 일본정부나 이전의 동아연맹론이 주장해오던 일방적인 중국침략정책에 비하면 온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의 완전한 복속도 아닌, 트라우트만 공작에서 보였던것과 같은 굴욕적인 협상도 아닌 동아연맹론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당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데, "제국정부는 난징공략이후 지나국민정부에 반성의 최후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오늘에 이르렀으나, 국민정부는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만연히 항전을 도모하여 국민도탄의 쓴맛을 헤아리지 못하고 동아전국의 평화를 돌아볼 바가 없음으로 제국정부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을 만한 신흥지나정권 성립과 이의 발전을 기대하고 , 이와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신지나 건설에 협력하기로 한다. 본래 제국이 지나의 영토주권을 존중한다는 방침에는 조금도변화가 없으며, 이제 동아평화에 대한 제국의 책임이 막중하기에 정부는 국민들이 이러한 중대한 임무수행을 위해 한층 분발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바다. " - 1938년 1월 16일, 제 1차 고노에 성명 (쇼와13년 1월 16일 제국성명) 제 1차 고노에 성명을 통해 일본정부가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일본국민정부와 일본과의 대화루트가 중단된 상황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해야한다는 일본의 요구사항을 해결할 필요가 있는 화평파에게 이러한 동아연맹론의 "정치적 독립" 이라는 조건은 화평파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에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역할로 작동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독립은 일본의 지도하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한계점은 있었다 . 하지만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들은 이러한 동아연맹론을 근거로하여 화평을 위해 세우게되는 새로운 정권이 일본의 괴뢰가 아니라 이전과 같은 정치적인 독립, 즉 주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동아연맹론의 변화는 마치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의 화평시도에 맞추어 응답하는 모양새를 보였는데, 이는 사실 다분 의도된 것으로,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화평파들을 이끌어내어 충칭쪽을 굴복시켜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킬 수 있기를 일본과 이시하라는 기대했던 것이다. 동아연맹론의 주장은 겉보기상으로 당시 너무나도 가혹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일본의 이전의 요구사항보다 많이 완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하라와 그의 동아연맹론은 왕징웨이를 비롯한 화평파들의 화평공작이 진행되고, 실제로 그 성과를 점점 거두기 시작하면서 일본에서도 주요한 정치적 주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동방회 (東方會) 라는 정치단체 출신으로 의원이 되었던 기무라 다케오 (木村武雄)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일본농민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더더욱 확대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에서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시하라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동아연맹론을 더더욱 확대시키고 쟁점화 시켜 동아연맹론을 일본국민들에게도 보급함과 동시에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동아연맹론의 본질을 인식시키게 할 필요성을 인식했고, 이를 위해 동아연맹론을 주장하는 정치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성 속에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동아연맹협회(東亞聯盟協會) 다. 동아연맹운동이 더더욱 힘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12월 22일, 왕징웨이의 충칭탈출 이후 발표되었으며, 앞으로 세워지게될 왕징웨이의 신정권과 일본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인가, 왕징웨이의 신정권에 대해 일본은 어떠한 방침을 세울 것인가를 규명하는 제 3차 고노에 성명이 발표되면서다. 제 3차 고노에 성명에서는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제휴(經濟提携) 라는 3대원칙이 결정되었는데, 이 3대원칙이 동아연맹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공동의 군사체제, 공동의 경제체제를 만든다는 동아연맹론의 구상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제3차 고노에 성명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동아연맹측에서는 이 3대 원칙이 자신들의 동아연맹론이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청년장교그룹이 제3차 고노에 성명의 작성에 크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실제로 동아연맹론이 고노에 성명에 영향을 끼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제 3차 고노에성명을 통해 이제 동아연맹론의 주장 (즉, 중국을 무작정 복속시키게 할것이 아니라 중국의 권리도 일정부분 지키면서 중국을 일본의 편으로 포섭한다) 은 이제 실질적인 국가의 대중국방침이 되었다. 일본동아연맹협회에서 발행한 《동아연맹(東亞聯盟)》창간호. 이렇게 영향력을 확대한 동아연맹운동은 1938년 가을부터 동아연맹협회의 창설준비에 들어갔고, 여러 준비과정을 거친 끝에 1939년 10월 8일, 도쿄에서 동아연맹협회 사무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동아연맹협회가 설립된 이후 동아연맹운동은 빠르게 확대되었다. 동아연맹협회는 일본 각지에서 강연을 함과 동시에 협회의 기관지 《동아연맹(東亞聯盟)》을 발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대외로 알리는데 노력했다. 동아연맹운동의 확대는 단순하게 일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연맹론이 더더욱 중요한 이론으로 작동했던 중국대륙에서도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동아연맹운동이 시작된지 1년도 되지 않아 중국내의 일본점령지에 확산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에 집중하려 한다. 중국대륙에서 전개된 동아연맹운동. 베이징을 시작으로 광저우, 난징까지 확산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동아연맹운동이 전파된 곳은 베이징이었다. 전쟁초기부터 점령되어 점령지 지배체제가 갖추어진 곳이기도 했고, 이시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日 아사히신문의 기자 다무라 신사쿠 (田村 眞作)은 당시 화북지역에서 선전을 비롯한 여러 중요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신민회 (신민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 ) 의 머우빈(繆斌,무빈) 이라는 자에게 접근해 동아연맹론을 설파했다. 본래 머우빈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친일주의자로, 신민회의 근간이자 사상을 만들었던 자였다. 하지만 머우빈은 동아연맹론에 대해 서술한 《동아연맹론》 책을 읽고 이에 감명받아 신민회에 있으면서도 동아연맹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동아신질서와 중국의 자유독립은 일치할 수 있다" - 머우빈 당시 화북지역, 즉 중화민국 임시정부(1937) 의 강역에서 일종의 유일한 정치단체였던 신민회를 제외하고 임시정부에서 정치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연맹운동 뿐이었다. 머우빈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민중들이 동아연맹운동을 지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민회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화북에서 이런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동아연맹운동이 중국내의 일본점령지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음과 동시에 완전한 친일성향 신민회에게는 골칫거리가 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중앙정권 (난징국민정부) 가 설립되었다. 왕징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난징정부가 전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중화민국의 정통정부임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정부가 일본측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가 아닌 완전한 독립된 주권을 가진 정부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필요 가 있었다. 정치적독립 을 이야기하는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부의 입지를 내외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좋은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왕징웨이 또한 동아연맹운동에 찬성하고 지지를 표했다. 이런 왕징웨이의 지지속에서 1940년 5월, 베이징 에서 중국내 첫 동아연맹운동 조직인 중국동아연맹협회 (中國東亞聯盟協會) 가 베이징에서 설립되었다. 회장은 머우빈이 맡았다. 일본내에서 가장 친일성향을 띄는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최대한 중국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참가하게 된 셈이다. 중국동아연맹협회는 6월부터 《동아연맹(東亞聯盟, 일본동아연맹운동의 잡지와는 이름만 같음) 》 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중국동아연맹협회 에서 발행한《동아연맹(東亞聯盟)》. 중국대륙 내 동아연맹운동의 확산은 베이징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0년 9월에는 광동성 광저우 중산기념당에서 중화동아연맹협회 (中華東亞聯盟協會) 가 설립되었다. 광저우에서 동아연맹운동은 준비과정에서만 8,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등, 빠르게 세를 불려나갔다. (전성기 때는 80,000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중화동아연맹협회는 《동아연맹월간(東亞聯盟月刊) 》 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베이징과 광저우보다 늦은 1940년 11월에 동아연맹운동 조직이 설립되었다. 동아연맹운동 자체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난징에서 추진되고 있었지만 조직의 수립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저우포하이를 중심으로 난징에서 동아연맹운동 잡지를 발행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아연맹운동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미 난징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징 에서의 동아연맹운동조직은 동아연맹중국동지회(東亞聯盟中國同志會)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아연맹중국동지회에서도 《대아주주의(大亞洲主義) 》 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난징의 동아연맹운동조직이었던 동아연맹운동중국동지회에서 발행했던 대아주주의 (大亞洲主義, 대아시아주의) 잡지의 표지. 그리고 이 조직은 왕징웨이가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중국동지회의 창설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동아연맹은 동아 각 민족이 각기 자유독립의 입장에서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며, 그 조건은 정치독립 ,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융합이다" - 왕징웨이, 1940년 11월 동아연맹중국동지회 결성식에서. 본래 동아연맹론에서 정치적독립은 가장 마지막에 서술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최우선순위로 언급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권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 물론 왕징웨이만이 정치적독립을 최우선 순위로 둔 것은 아니었다. 베이징의 머우빈도, 광저우도 정치적독립을 가장 우선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1940년 11월, 난징의 동아연맹중국동지회가 창설되는 시점에서는 광저우든 베이징이든 난징이든 동아연맹운동에서 정지적 중립을 가장 중요시 했었다. 동아연맹운동에 참가했던 인물들의 성격은 다양했지만, 정치적 독립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한 이시점부터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 정권의 중요 이데올로기이자, 중요 범국민적 운동중 하나로 작동했다. 왕징웨이는 1940년 12월의 국민당(왕징웨이) 3중전회에서 동아연맹운동을 이제 정부차원에서, 국민당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왕징웨이에서 추진되었던 주요 정치운동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통해 일본측으로 부터 정치적 독립을 비롯한 최대한 중국의 권리를 얻어내려고 했다.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을 움직이게 하는 3대 축중 하나로서,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의 대외용 이데올로기 로 작동했다. 신국민운동 (신국민운동에 대해 알고싶다면 여기를 : ) 이 대내용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 국민들의 단결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면,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정권이 일본으로부터 최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동아연맹운동을 토대로 언젠가는 일본과 중국(왕징웨이)가 동등한 관계에 도달해야하며, 일본은 중국에 최대한 권리를 보장해주어야하고, 일본은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의 정치적독립을 존중하여 왕징웨이의 중앙정부가 꼭두각시가 아님을 증명시켜 왕징웨이의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내 동아연맹운동은 동시에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연대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왕징웨이 정권에 대해 지지와 권한확대를 일본 국민과 일본 지도부에 타진했다.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정권의 주요정치운동이 됨에 따라, 지역별로 분리되어있던 조직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왕징웨이 정권에서는 베이징과 난징, 광저우의 동아연맹조직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니, 이가 바로 동아연맹중국총회 (東亞聯盟中國總會) 였다. 통합된 중국의 동아연맹조직들. 하지만 이들은 이전에 발행하고 있었던 잡지는 계속 발행하기도 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는 1941년 2월 1일, 난징의 중국국민당 중앙당사에서 오후 4시에서 발기식을 가졌다. 발기식에는 왕징웨이는 물론, 그의 부인 천비쥔과 정부의 주요인사들, 일본 영사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발기식에서 왕징웨이를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초대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이었던 고노에 후미다로는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성립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형제의 분투로써 귀국의 동아연맹운동이 전국적 통일, 발전을 이루게 된것은 동아의 해방의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며, 아울러 중국동아연맹의 성대한 성립식을 진심으로 경배함과 동시에 솔선수범해 동아연맹을 제창하여 동아의 영원한 평화와 동아보위에 분발하는 형제에게 진심으로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 고노에 후미다로 경축동아연맹중국총회2주년특간 (慶祝東亞聯盟中國總會成立二週年紀念特刊, 1943) 에 묘사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깃발. 파란배경에 흰색 4개의 직선은 평등,호혜,자유,건설을 의미하고, 노란원은 황인종의 공영권을, 원안의 파란직선 3개는 중화민국, 일본, 만주국을 의미하며 상하의 적색은 영광과 성공을 의미한다. 수도 난징에 설립된 동아연맹중국총회는 구성면에서 왕징웨이정권이 이 운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애초에 발기식이 열렸던 곳이 왕징웨이의 중국국민당의 중앙당사였으며, 천궁보(陳公博,진공보)와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 ( 陳璧君, 진벽군) 을 비롯한 왕징웨이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참가함은 물론이요, 머우빈을 비롯한 기존의 조직간부들까지 참가하면서 동아연맹운동은 이제 왕징웨이정권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동아연맹중국총회는 난징을 중심으로 타 지역의 조직들을 중국총회의 지부로 재편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베이징의 중국동아연맹협회는 지부로 포함되지 못했는데, 이는 동아연맹운동의 확대를 우려하던 일본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화북에서만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겠다며 화북정무위원회를 세우던 북지나방면군이 왕징웨이정권에 펼쳤던 간섭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아연맹중국총회로 통합되면서 조직은 더더욱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연맹운동은 상하이와 산터우, 후베이 성에도 지부를 설치하면서 조직을 더더욱 확대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 상하이지부는 《중국과동아(中國與東亞) 》라는 잡지를 별도로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각 지부에는 청년조직을 비롯한 여러 단체조직을 결성하고, 심지어 유럽에 연락소를 설치해 유학생도 동아연맹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동아연맹중국총회 상해분회의 뱃지. 동아연맹중국총회는 조직의 요강인 동아연맹중국총회회장 (東亞聯盟中國總會會章) 의 1장에서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중요목표를 4가지로 삼았다. 정치독립 (政治獨立), 경제합작(經濟合作), 군사동맹(軍事同盟), 문화구통(文化 溝 通 ) 왕징웨이가 이전부터 동아연맹운동에서 정치적독립을 최우선시, 중요시했던 것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리고 여기는 중-일간의 문화교류에 관한 문화구통이라는 4번째 항목이 추가되었다. 문화구통이라는 구호는 본래 일본동아연맹운동측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호였다. 하지만 중국측에서 일본과 중국이 공유하는 문화 (특히 유교적 전통) 가 많음을 이유로 중일간의 문화교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추가하자 일본측에서 이를 받아드렸다. (참고로 2장부터는 동아연맹중국총회 조직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있다.) 중일기본조약 (1940.11.30)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프로파간다. 정치독립, 경제합작, 군사동맹, 문화구통 이라는 동아연맹중국총회의 중요구호들이 적혀있다. 물론 정치적독립은 맨위에 위치했다. 왕징웨이는 이 동아연맹운동을 대외적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동시에, 정권 내부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반대세력에 영향력을 끼치는데에도 사용했다. 대표적인 곳이 신민회로,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화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사용했다. 동아연맹운동측에서는 "신민회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 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화북의 신민회를 비난하면서 화북에서 동아연맹운동과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신민회를 견제하고, 장차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국민당과 동아연맹은 어디까지나 동지익우(同地益友)로서 사상과 정신을 함께하지만, 신민회와 국민당은 어디까지나 동등한관계이지 종속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신민회와 일본에서는 이를 비난하고 왕징웨이를 견제하면서 이러한 왕징웨이의 노력은 일본과 신민회측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렇다면, 왕징웨이가 이토록 중요시했던, "정치적 독립" 을 쟁취하겠다는 왕징웨이의 의지가 보였던 동아연맹운동에 화평파나 정치가나 군인이 아닌, 당시의 민중들 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왕징웨이가 중요시했던 동아연맹운동은 민중들에게는 큰 지지를 얻지못했다. 민중들이 동아연맹운동에 큰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인데, 우선 동아연맹운동은 조직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본래 부터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일본동아연맹운동측의 지시를 받는 쪽에 더더욱 가까웠으며 , 상하이를 비롯한 여러 지부를 설립하는데 일본에 관여했었다. 동아연맹건설강령 《(東亞聯盟建設綱領) 》에서는 중국의 동아연맹이 조직이나 운영 모두 중국인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함을 이야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측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은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애초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은, 일본동아연맹협회의 대륙지부에 불과했다. 1941년 4월의 일본동아연맹의 조직표에는 도쿄부터 아오모리까지 일본 내 27개 지역에서 지부가 설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본동아연맹협회는 일본내의 동아연맹운동만을 관할하지 않았다. 일본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하고 있었던 남양군도에 설치된 지부 (지부는 팔라우에 존재했다) 와 함께, 대륙내에 설치되었던 동아연맹협회 조직들 또한 일본동아연맹협회의 지배를 받았다. 조직표에서는 대륙내에서 설치한 동아연맹협회를 두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대륙동아연맹협회 (大陸東亞聯盟協會) 로, 이들은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권 내에 존재하는 동아연맹조직이지만 화북정무위원회와 신민회처럼 일본군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지역의 조직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두번째가 왕징웨이가 이끄는 동아연맹중국총회였다. 1941년 4월기준 (동아연맹중국총회 조직은 그이후의 조직까지 표시가 되어있다.) 일본동아연맹협회의 조직도. 중국동아연맹운동조직들이 모두 이들의 산하에 있었다. 문제는 왕징웨이가 이끄는 동아연맹중국총회를 비롯한 중국측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이 이러한 구조를 받아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동아연맹측의 영도(領導)를 인정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동아연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정권내에서 이를 주도했지만, 이 운동은 애초부터 일본에 결속된 운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지역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측이 아닌 일본군측이 제어하게 되어버리면서,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권 강역내에서도 완전한 동아연맹운동을 이끌 수도 없었다. 두 번째는, 왕징웨이 정권 스스로가 내세우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와 동아연맹운동 의 충돌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국가의 공식적 이념으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내걸었다. 앞에서 보았던 난징의 동아연맹중국동지회가 발행하던 잡지이름이 "대아주주의" 인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이 대아시아주의를 통해 일본과 중국이 연합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 대아시아주의는 일본과 협력관계에 있는 왕징웨이정권을 정당화 함과 동시에, 일본과 중국이 동등한 연합을 맺어야한다 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동아연맹론이나 동아신질서와 같은 일본중심의 동아세력구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론들이 가지는 불평등성을, 즉 쑨원이 이야기했던 중국과 일본의 동등한 연합 이 아닌 일 본 우위의 연합 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또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계승함으로서, 왕징웨이 자신이 진정한 쑨원의 후계자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존재했다. 이렇듯, 왕징웨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이용해 일본측과 협력하고 있는 자신들을 정당화했고, 쑨원을 잇는 정통정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동시에 일본중심의 구상에도 반대를 던질 수 있었다. 그런데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의 입장에서는, 동아연맹운동은 중일의 동등한 연합이 아닌, 불평등한 연합이기에 비판받아야 마땅한 요소였다. 하지만 문제는 왕징웨이 정권은 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아연맹운동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쑨원을 계승했다는 왕징웨이 정권이 이런 일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에 더더욱 그 정당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 . 거꾸로 대아시아주의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현재 자신들의 정권의 위치가 현실적으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 사이에서 당시 선전부장을 맡고 있던 린바이셩은 1942년부터는 결국 대아시아주의는 차츰 사라지고 동아연맹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민중들은 동아연맹운동으로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한들, 이는 일본의 허락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애초부터 동아연맹운동이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손선생은 13년 1월에 열린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이 선언을 발표한 이후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동지들에게 맡기려 했던것 같았다. 은인이 자필로 건국강령을 쓰고 삼인제를 받아 피로를 풀었고, 정오가 되자 군서적을 읽을 틈도 없이 8월말이 되어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 나는 대아시아에 관한 연설을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일본 고베를 특별히 방문했는데 이것이 손선생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었다. 중국에서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손 선생이 오래전 말했듯이 동아의 해방이 있어야 합니다. 대아시아주의는 동아연맹의 근본원칙이고, 동아연맹은 대아시아주의의 구체적 실현이다 ...(중략) - 동아연맹중국동지회 창설식에서 왕징웨이의 연설 中. 또한, 신국민운동의 존재가 있었다. 왕징웨이는 신국민운동을 국민들을 결집시키는 국내용 수단으로, 동아연맹운동을 대외용 수단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내의 이 민중들은 이 두 운동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신국민운동을 소개할때도 이야기했지만, 신국민운동을 강조하면 동아연맹운동이 약화되어버리고, 동아연맹운동을 강조하면 신국민운동이 약화되어버리는 두운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왕징웨이는 두 운동이 서로 균형을 맞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동아연맹운동의 실패에는 대외적 요인도 존재했는데, 이는 바로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연맹운동 내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만큼, 자신들의 동아연맹운동을 더이상 중국과 만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새롭게 점령된 일본의 점령지들에 전파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때 동아연맹중국총회에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참전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반려되고 후방에서의 지원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문제는,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부는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동아연맹운동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위해 일본의 종속국과 점령지가 모두 총동원체제 속에서 일본을 지원을 해도 모자랄판에, 이들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일본과 중국의 유교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연맹운동은 전쟁수행이 시작된지 얼마안된 시점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받아드리기 힘들었다. (실제 일본이 남방을 비롯한 태평양전쟁 점령지대의 운영방법을 바꾼 시점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지 2년이 다되어가는 시점인 1943년의 중반에야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동아연맹협회는 흥아원(興亞院) 아래에서 아시아주의 단체를 규합한 대일본흥아동맹(大日本興亞同盟) 에 포함되게 된다. 1942년, 동아연맹동지회(東亞聯盟同志會) 라는 이름으로 바꿔 활동을지속했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이전과는 너무 낮아진 후였다. 반면 일본동아연맹이 대일본흥아동맹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동아연맹조직들은 이전과 같은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정익찬회, 대일본흥아동맹, 일본방송협회가 발표했던 음반 《아시아의 힘(アジアの力)》 문제는 일본동아연맹협회가 사실상 영향력을 소멸해버리면서, 중국내의 동아연맹조직들 또한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일본 외교관이었던 이와이 히데이치(岩井英一)는 그의 글에서, 1942년 8월 시점에서 광저우의 동아연맹운동이 사실상 개점휴업상태 에 들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이 2년만에 위축되어 광명을 잃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 일본의 양해속에서 정치적 독립을 얻어내야하는 운동이 진작 일본내에서는 힘을 잃은 상황에서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었겠는가? 1943년에 이르러 동아연맹중국총회는 한커우 분회를 후베이분회에 통합시키는 등 조직의 축소과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각 지부마다 발행하고 있던 잡지들 또한 통합의 과정을 거쳤다. 잡지 《대아주주의 (大亞洲主義)》 와 《동아연맹월간 (東亞聯盟月刊)》 은 《대아주주의와 동아연맹 (大亞洲主義與東亞聯盟)》 이라는 잡지로 통합과정을 거쳤고, 이마저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잉크를 비롯한 물자부족으로 1944년 4월부터는 흑백만을 이용해 축소된 출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1943년에 들어 대동아회의등 다시 아시아주의는 주목을 받았지만, 이미 이시점에서 동아연맹운동은 그 주목에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신국민운동이 왕징웨이의 사망이후 개점휴업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동아연맹운동 또한 왕징웨이가 사망하면서 더더욱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왕징웨이가 죽은 이후 개점휴업 상태를 유지하다가, 일본이 항복하면서 동아연맹운동도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런 점속에서도 주목해야할 부분은,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사실상 그 명맥을 잊지못했던 일본의 동아연맹운동과 달리, 중국대륙에서의 동아연맹운동은 1944년까지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왕징웨이가 동아연맹운동속에서 "정치적 독립" 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노력을 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동아연맹협회 (좌) 와 동아연맹중국총회(우) 의 로고. 완전한 버전을 찾을수는 없어 아쉬웠다. 그렇다면 동아연맹운동은 무엇이었는가? 동아연맹운동을 행해왔던 것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국가였다. 하지만 두 국가는 같은 운동속에서도 일종의 동상이몽을 걷고 있었다. 이시하라를 비롯한 일본측은 운동속에서 중국의 일본공동체의 참가를 원했지만, 왕징웨이를 비롯한 중국측은 이 운동을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시하라도, 왕징웨이도 본래 자신이 추구했던 목표를 운동속에서 달성하진 못했다. 왕징웨이는 동아연맹운동을 진행했음에도 결국은 꼭두각시 지도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이시하라는 자신이 생각했던 세계최종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요건을 완성하지 못했다. 동아연맹운동은 왕징웨이가 조계회수운동, 치외법권폐지운동, 산업회수운동 등 일본지배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중 하나로 평가된다. 오늘의 서술을 통해 왕징웨이라는 인물이 벗어날수 없는 협력정권이라는 한계속에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어떻게든 이 한계를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음을, 그것이 문제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고 과연 그것이 좋은것이라고 할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는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동아연맹운동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동아연맹중국총회를 비롯한 중국의 동아연맹운동조직들은 경성에 조직을 설치하기도 했지만,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동아연맹운동이 조선에 전파되면 조선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킬까 우려했다. 그러한 이유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쪽의) 조선에서 금지당했다고 봐도 무관했다. 또한 이미 이시점에서 조선인들은 왕징웨이정권의 수립과정을 지켜보면서 동아연맹론을 비롯한 일본의 논리가 이미 '허상' 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 또한 조선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참조 : 여기 ) [출처] 嵯峨 隆, 「東亜連盟運動と中国」, 『法學研究 : 法律・政治・社会 第 88 号』, 2015 内村 琢也, 「準宗教運動としての東亜連盟運動-東亜連盟協会の事例を中心に」, 『 創価大学大学院紀要 』, 1992 内村 琢也, 「 東亜連盟論の基本的性格 」, 『アジア研究 第 22 券 1 号』, 1975 桂川, 光正, 「<研究ノート>東亜連盟論の成立と展開」, 1980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的“新國民運動”的發展與失敗 」,『 中日學者抗戰文史研究論文集 』 , 2009 堀井弘一郎, 「汪精衛政權下民の衆動員工作 「新国民運動の展開」 」,『中国研究月報 723号』 , 2008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34. 이시하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汪兆銘, 『 全面和平への路 』, p. 172-175 대아주주의 : https://archive.org/details/dayazhouyuyi-1942.4-2 아시아의 힘 : https://fusensha.ocnk.net/product/2034 동아연맹 (일) 잡지 : https://www.kosho.or.jp/products/detail.php?product_id=235333872 동아연맹 (중) 잡지 : https://aucfree.com/items/d479007012 중일기본조약 1주년 포스터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0/Propaganda_leaflet_of_the_first_anniversary_of_Sino-Japanese_Basic_Treaty.jpg 동아연맹 상해지부 뱃지 : https://image.baidu.com/search/detail?ct=503316480&z=&tn=baiduimagedetail&ipn=d&word=%E4%B8%9C%E4%BA%9A%E8%81%94%E7%9B%9F%E4%B8%AD%E5%9B%BD%E6%80%BB%E4%BC%9A&step_word=&ie=utf-8&in=&cl=2&lm=-1&st=-1&hd=&latest=&copyright=&cs=2486087958,1752389300&os=13908403,3959471195&simid=3546575695,343430361&pn=0&rn=1&di=7249025186408693761&ln=307&fr=&fmq=1694724468816_R&ic=0&s=undefined&se=&sme=&tab=0&width=&height=&face=undefined&is=0,0&istype=2&ist=&jit=&bdtype=15&spn=0&pi=0&gsm=1e&objurl=https%3A%2F%2Fpic13.997788.com%2F_pic_auction%2F00%2F03%2F10%2F72%2F3107206.jpg&rpstart=0&rpnum=0&adpicid=0&nojc=undefined&dyTabStr=MTEsMCw0LDUsMSw2LDMsNyw4LDIsOQ%3D%3D 이시하라 사진 : 일문판 위키피디아의 이시하라문서

  • 제 1·2·3차 고노에 성명 (第1~3次近衛聲明 / 1938)

    * 본 글에서는 1~3차 고노에 성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번역에서 지나(支那) 와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원문 그대로의 번역을 보이기 위함으로, 어떠한 모욕할 의도가 없음을 알립니다.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1891~1945). 1938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그는 3차례의 성명을 발표하여 중일전쟁을 타개하려 했다. 제 1차 고노에성명 (1938. 1. 16) (쇼와 13년 1월 16일 제국정부 성명 / 昭和十三年一月十六日帝國政府聲明)       제국 정부는 난징 공략 후에도 지나 국민정부의 반성의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국민정부는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항전을 꾀하여 안으로는 인민 도탄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밖으로는 동아 전체의 화평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에 제국정부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하기에 충분한 신흥 지나정권의 성립과 발전을 기대하며 이와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 신 지나의 건설에 협력하기로 한다.       물론 제국이 본래부터 지나의 영토 및 주권 및 관련국의 권익을 존중한다는 방침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며, 동아화평에 대한 책임이 더욱 막중해진 지금, 정부는 국민이 이 중대한 임무수행을 위해 더욱더 분발하기을 염원하는 바이다.             *본 성명의 발표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일본간의 소통통로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이로 인해 왕징웨이 측은 예문연구회라는 별도의 통로를 통해 일본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제 2차 고노에성명 (1938. 11. 3) (동아신질서건설의 성명 / 東亞新秩序建設ノ聲明)       바야흐로, 페하의 위세에 의해 제국 육해군은 능히 광동, 우한삼진을 공략하여 지나의 요충지를 평정하였다. 국민정부는 이미 지방의 한 정권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정부가 항일용공을 고집하고 있는 한, 이러한 것이 궤멸을 볼 때까지 제국은 결코 창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희구하는 바는 동아의 영원한 안정을 확보하여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이번 정전(征戰)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기에 있다.       이 신질서 건설은 일만지(日滿支) 3국이 정치, 문화, 경제등 여러분야에 걸쳐 상호간에 호조(互助)와 연환(連環) 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 을 근간으로 하며, 동아에서의 국제정의의 확립, 공동방공의 달성, 신문화의 창조, 경제결합의 실현을 기하는 것에 있다. 이는 실로 동아를 안정시키고 세계의 진운에 기여하는 것이다.       제국이 지나에게 바라는 바는 이 동아신질서 건설 의 임무 를 분담하는 것이다. 제국은 지나 국민이 능히 우리의 진의를 이해하고 제국의 협력에 응하기를 기대한다. 더구나 국민정부라고 할지라도, 종래의 지도정책을 일소하고, 그 인적 구성을 개조하여 갱생의 열매를 맺어 신질서 건설에 임하게 된다면, 이를 감히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은 다른 국가들도 제국의 의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동아의 신정세에 적응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맹방 국가들이 보여준 두터운 우호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를 표하는 바다.       생각 컨대 동아에서의 신질서 건설은, 우리 건국의 정신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이것을 완성하는 것은 현대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무다. 제국은 필요한 국내의 여러 부분에 대해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 총력 확충을 도모하고 만난을 물리치고 본 임무의 달성을 위해 매진할 것이다.       이에 정부는 제국부동의 방침과 결의를 성명한다.            *제 2차 고노에 성명 발표 이후 왕징웨이는 충칭을 탈출한다. (1938. 12.18) , 그리고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여 하노이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1938.12.20) 제3차 고노에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는 왕징웨이측에서 일본측에게 자신에 호응하는 성명을 발표해주길 바란 결과였다.)       제 3차 고노에성명 (1938. 12. 22) (일지국교조정방침에 관한 성명 / 日支國交調整方針ニ關スル聲明)       정부는 올해 재차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종일관 항일 국민정부의 철저한 무력 소탕을 기할 것임과 동시에 지나의 동우(同憂) 동지 지사들 과 협력하여 동아신질서 건설을 향해 만진하려 한다.       바야흐로 지나 각지에서 갱생의 세력이 팽배해지고 있고, 건설의 기운 또한 점점 고조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갱생 신 지나와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근본 방침을 안팎으로 천명하고, 이로써 제국의 진의를 철저히 기하려 한다.       일만지(日滿支) 삼국은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공동의 목적으로 하여 결합하여, 상호가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제휴(經濟提攜) 의 결실을 거두고자 한다. 지나는 먼저 무엇보다도 이전의 편협한 관념을 청산하고 항일이라는 어리석은 실수와 만주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일소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본은 나아가 지나가 만주국과 완전한 국교를 수립할 것 을 거짓없이 요망한다.       다음으로, 동아의 천지(天地) 에는 코민테른 세력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일본은 일독이(日獨伊) 방공협정의 정신에 따라, 일지방공협정의 체결 을 일지 국교조정의 매우 중대한 요건으로 하려한다. 그리고 현재의 실정에 비추어 이 방공의 목적에 대한 충분한 보장을 거론하기 위해 동 협정의 지속 기간동안 특정지점에 일본군의 방공주둔을 인정할 것 및 내몽고 지방을 특수 방공지역으로 할 것 을 요구하는 바이다.       일지경제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은 조금도 지나에서 경제적 독점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며, 일본은 신동아를 이해하고 이에 즉응하여 행동하려는 선의를 가진 제3국의 이익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것을 지나에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일지의 제휴와 합작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기하려는 것이다.       즉, 일지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지나는 제국신민에게 지나 내지에서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용인 하여 일지 양 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촉진하게 하고, 또한 일지 간의 역사적 경제적 관계에 비추어 특히 북지(北支), 내몽고 지역에서는 그 자원의 개발 이용에 대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편의를 제공할 것 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이 지나에 요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영토가 아니며, 전비의 배상이 아님은 절로 분명해지는 것이다. 일본은 실로 지나가 신질서 건설의 분담자로서의 직능을 필요한 최소한의 보장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일본은 지나의 주권을 존중하고, 나아가 지나의 독립완성을 위해 필요한 치외법권을 철폐하고 또한 조계의 반환에 대해 적극적인 고려를 하고 있다.       *제3차 고노에 성명의 발표 이후, 왕징웨이는 염전 (艶電, 1938.12.29)를 발표한다. (염전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 : )

  • 답문 1 (答問(一)/ 1939.8.15)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답문 (1) ( 答問(一) ) 이달 9일, 광저우에서 연설을 한 후 많은 편지를 받았다. 받은 편지 중 이러한 질문이 있었다. “선생의 말씀은 정전에만 치중하고, 철군에는 치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철군은 어려운 일입니까?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평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이미 답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이러한 편지를 통해 질문을 받았으니, 나는 다시 몇 마디 간략하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9일, 광저우에서 했던 연설은 여기를 참조 : )       일반적으로 양국이 전쟁 상태에서 화평 상태로 나아가는 절차는 첫 번째 단계 는 휴전, 두 번째 는 화평 협상 , 세 번째 단계 가 철군 이다. 즉, 철군은 화평의 최종 결과이지 화평의 선결조건이 아니다. 화평 조약에서는 철군 이전에는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함을 명시하기도 하고, 특정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다시 군대를 배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철병을 화평의 선결조건으로 삼는 것은 천자겅 (陳嘉庚) 선생과 같은 이들 뿐일 것이다. 그는 국민참정회 제2차 회의에 전보로 “일본군이 중국 경내에서 완전히 철군하기 전에는 화평을 논할수 없다” 라고 제의한 바 있다. 하지만 화평을 하게되면 일본군의 철군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인데 이를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중국인은 화평은 철군이 따르지 않고서는 얻을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것은 “어떻게 철군을 할 수 있게 하는가? ” 에 있다. 이는 “어떻게 화평을 이룰 수 있게 하는가?” 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따라서 철병 없이는 화평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은, 화평이 없으면 화평을 논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으로, 이는 의미 없는 말이며 문자 상으로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화평을 거부하고 그 진행을 막으려는 속셈은 논박할 가치도 없다. 우리는 화평을 이루기위해 현실과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화평의 실현을 위해 현실에 집중한다면, 그 첫걸음은 역시 휴전 이다. 양국은 교전을 하게되면 한쪽은 이기게되고, 한쪽은 지게되는 것을 피할수 없음을 알아야 하며, 이에 따르는 휴전 조건은 종종 가혹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 전쟁 당시 협상국들은 독일의 휴전 조건에 대해 완전한 무장 해제를 제시한 바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이 “중국군이 화평반공의 뜻만 보인다면 휴전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승자를 자처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는 국민의 환기가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 일본이 “일본군이 이미 점유하고 있는 곳, 모든 치안과 경비 등 행정 경제를 일본군의 손에서 차차 중국에 반환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일본이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하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는 빈말이 아니다. 따라서 국민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행정당국과 병사들이 화평반공을 표방하게 된다면, 이는 그 관할 구역 내의 공산당만 불행해지는 일에 불과하다. 왜냐면 이렇게 되면 공산당은 더 이상 게릴라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속이고 갈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당 외에는 모두 화평반공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지방을 계속하여 일본군 점령의 연속 상태가 되지 않게 할것이다. 현재 점령된 곳도 치안과 경비, 그리고 행정과 경제가 차차 환수되면 화평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화평의 최종적 결과는 철병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첫 번째 단계가 수행되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도 순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장제스 가 만약 화평반공에 찬성한다면 전국적으로 교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휴전이 이루어지고, 전국적으로 화평 협상을 하게 된다면 전국적으로 철병을 이루게 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럽게 되고 훨씬 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장제스의 화평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먼저 부분적으로부터 화평을 시작하여 전국으로 옮기는 것이 오늘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 만주국 방문 담화 (訪滿在新京對記者談話 / 1942.5.8)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만주국 방문 담화 (訪滿在新京對記者談話) 재작년 11월 30일 , 귀국과 우리는 우방 일본과 공동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의 축심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작년 6월 21일 에는 우방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신문기자들과 만나 국제정세에 대해 이야기 했고 , 여기서 나는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든 동아의 축심은 영원히 변치않을 것 이라 대답한 바 있다. ( 일만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왕징웨이의 1941년 방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작년 12월 8일 ,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우방들은 전력을 다해 동아신질서 건설의 장애를 제거하고 공존공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협력할 것임을 표명 하였고, 우리 국민정부 또한 동고동락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앞으로 동아의 축심은 더욱 공고해질 뿐만 아니라, 더욱 확장될 것이다. ( 왕징웨이의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담화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이번 대동아전쟁은 한 민족, 한 국가의 존망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동아의 한사람인 우리는 모두 운명을 자각하고 합심하여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대동아전쟁에서 동고동락하며 가장 깊은 연대감을 공유하고, 안전과 안보를 함께 해왔다. 그리고 그 노력을 더욱 분발시키기 위해 나는 이번에 귀국의 국민을 만나러 온 것이다.       신징 에 도착한 이후 황제폐하 를 뵙고, 예의를 갖추고 황제폐하의 숭고한 말을 들으며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고, 귀국의 정부 인사 및 민중들과 만나고, 신흥 신징의 기상을 보고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특히 열정적인 신징의 환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국민정부와 만주국, 그리고 우방 일본 3국의 영원한 우호와 공동의 부흥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중일기본조약 과 중일만공동선언 이 동시에 발표된 후, 상호간의 국교가 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의 축심도 함께 확립되어 서로의 관계는 신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본연의 우호관계를 증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중화민국 과 만주국 의 수만 동포들이 다시 손을 잡고, 동아의 해방전선에 함께 서게 되었다.       ( 중일기본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대동아전쟁의 발발 후 선진국인 일본은 전국의 힘을 모아 선두를 맡았고, 이를 통해 동아 해방의 전선은 무한한 광명을 가지게 되었다. 만주국 동포들은 동아 전체의 신 단결을 만들어 내었고, 만주국이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여 동아신질서 구축에 진전을 이루기를 바라지 않는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귀국에 오게 된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만주국을 직접 방문하여 만주국이 지난 10년간 이룬 각종 건설 성과를 보았고, 귀국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대동아전쟁을 위해 모두가 동고동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더욱이 여러국가들이 만주국의 건설에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보며 나는 가슴 가득한 기대와 무한한 위로를 받으며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기회를 빌어 두가지 의견을 나의 사랑하는 만주국 국민 제군들에게 전하고 싶다.       첫째, 흔히들 만주를 동양의 발칸으로, 아시아의 화약고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내가 볼 때 만주가 과거에 받아왔던 우여곡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 앞으로의 만주국이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온갖 우환 속에 있었던 만주지만, 귀국 국민들의 노력과 우방 일본의 협력으로, 만주는 10년 동안 이전에 남아있던 부서진 잔해와 부스러기를 하나하나 제거,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화약기운이 가득한 이 만주를 동아를 지키는 요새로 개조하여 신동아의 한 기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대동아 전쟁이 일어난후, 우리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우방인 일본과 동고동락하기로 하였고, 귀국 또한 단호하게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을 표명하였다. 비롯 우리 양국은 군사적으로 우방을 위해 힘쓰기는 어렵지만,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동아의 대륙국가인 우리와 선진국가인 일본이 존망안위를 함께하는 관계라는 것은 이번 대동아 전쟁을 통해 더욱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닌 우리는 이에 더욱 노력하여 양국 본연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고, 양국간 협력 정신을 더욱 강화하여 중만 양국은 일본과 동거동락, 공동안위를 위해 협력의 태세를 갖춰야한다.       만주국은 동아 대륙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고, 광대한 인력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대외 국방과 대내의 부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만주국 국민 제군들은 자신의 지위를 소중히 여기고, 자발적인 정신으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만주국의 발전, 더불어 동아 민족 전체의 공존공영을 확고하게 하는데 이바지 해주기 바란다.       둘째, 귀국의 10년 건국의 성과를 통해 우리는 귀국 국민들의 고달픈 노력, 우방 일본의 노력, 동아의 앞날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내가 큰소리로 제군들과 전 동아의 인사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에서 비롯된 일종의 동아인의 ‘자신감’ 이다.       우리는 동아의 역사가 길고, 동아의 문화는 초월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수 천년간 그 문화와 역사를 이어왔다. 이것이 바로 자신감이다. 2세기 동안 우리는 침략자의 폭풍우를 막아내었고, 100년 전 아편전쟁과 흑선 사건을 시작으로 영미가 동아를 포위하고 중국을 침략하며 일본을 압박해왔지만,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 무자비한 굴레를 깨트린 것, 이것은 동아인의 자신감의 첫 표현 이다.       수십년 동안 중국의 국민혁명 이 좌절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전진해온 것, 이 또한 동아인의 자신감의 표현 이다. 지금 만주국이 10년간 키워온 새로운 기상을 보면서 동아인의 자신감은 동아인의 피속에 스며들어 동아의 모든 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이는 동아에서 지울 수 없는 징조이며, 동아 부흥의 필연적 징조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지금의 대동아전쟁이 더욱 생각난다. 대동아 전쟁 이전 영미의 침략자들은 A.B.C.D 포위망 (A (America, 미국) , B (British, 영국), C (China, 장제스의 중화민국 충칭정부), D (Dutch, 네덜란드) 의 약자로, 일본은 이들이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포위망을 형성했다 보았다.) 을 큰소리로 외치며 동아 여러 민족의 악감정을 도발하는 음모를 멈춘 날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는 아편전쟁과 흑선사건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영미는 동아에 대해 이러한 음모를 다시한번 격렬하게 되풀이 해왔다.       우방인 일본 은 동아인의 자신감을 총동원하여 메이지 유신 이래 축적된 군사, 경제, 문화의 힘을 가지고 용감하게 일어나 영미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왔다. 일본은 모든 방향에서 싸워 모든 곳에서 승리했다. 영미 침략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이는 동아인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성과다.       중화민국과 만주국 은 모두 동아의 축심의 일환으로서, 중만은 일본과 동시에 동고동락의 입장을 고수하고 동아의 해방을 함께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실질적으로 대동아전쟁에 함께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동아인들이 공유하는 자신감을 어떻게 발휘하여 단결시키고 협력시켜 침략자들이 전쟁의 불길을 진압할 수 있는가 에 달려있다.           우리는 여기서 고작 2~3일을 만나고 또 헤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함께일 것이고, 우리의 노력도 언제나 함께 일 것이다. 우리는 동아를 보위하고 최종의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수백년간 동아침략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그 수치를 함께 씻어낼 것이다.       우리는 합심하여 동아 화평의 축을 공고히 하고 , 합심하여 동아 민족이 대대로 공존공영할 수 있는 신천지 를 창조할 것이다. 나는 귀국의 국운이 융성하기를 기원하며, 여러분들의 전진과 대동아전쟁의 승리, 그리고 중일만 3국의 영원한 협력을 기원하는 바다.

  • 미국기자에게 국민정부의 시정요강을 천명하다 (1940. 8.25)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미국기자에게 국민정부의 시정요강을 천명하다 (向美記者闡明國府之施政綱要) *미국 언론인 이바녜스 (Ibanez,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름으로 보아 에스파냐계로 추측된다.) 여사는 민국 29 (1940) 년 8월 25일 오후 4시, 왕 주석을 만나 국민정부의 시정방침과 중미일 3국의 우호관계 확립에 대해 왕주석과 간담회를 가지고 간절한 문답을 나누었다.       Q : 선생께서 실현하시고자 하는 이상은 무엇인가? 선생은 독특한 위치에 있는 만큼, 선생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기꺼이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A :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과 일본의 영원한 화평을 정착시켜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삼민주의의 중화민국을 완성하는 것이다. 중일 양국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인종이 같고 문화가 통하는 만큼, 상호간의 화평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이 화평에 힘쓰고 있다라는 것은 중일 양국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최후승리는 기약하기 어렵고, 일본의 중국을 병탄하려는 목적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은 쌍방 모두를 해치는 일이며, 화평은 쌍방이 공존공영하는 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평등호혜와 상호 주권존중의 원칙에 입각하여 화평을 실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삼민주의의 실행은, 민족의 독립, 민권의 발달, 민생의 개선으로 하여금 국가권력이 민주라는 올바른 궤도에 따라 확립될 수 있도록 하여 독재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으로, 이는 특히 중국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Q : 선생은 어떤 강령으로 이 이상을 실현할 것인가?       A : 국민정부의 시정방침은 올해 3월 공포된 정강에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각 우방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고, 그 관계를 조정하며, 우방과의 결속을 통해 코민테른의 음모를 방지하고, 국방군을 창설하고, 독재제도를 타파하고, 헌정을 실시하고, 산업을 발달시키고, 금융을 안정시키고 농촌을 부흥시키며 화평반공건국을 교육방침으로 삼아 과학교육을 제고하고 과거의 잘못된 학풍을 제거하는 것 등이다.       Q : 이러한 강령을 실시에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A : 위에서 이야기한 정강을 실현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선 평등호폐, 상호존중의 원칙에 근거하여 일본과 국교를 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인사들은 우리들의 태평양의 화평 확립을 위한 노력을 존중하고 양해해주기 바란다.       손중산 선생은 일생을 중일의 우의증진에 힘써왔고, 나아가 이를 통해 미일의 관계 개선을 간절히 바래왔다. 중일 양국의 우호관계는 중일미 3국 우호의 선결조건이 될 것이며, 중일의 우호와 협력이 하나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미중, 그리고 미일 우호는 제대로 기반을 다질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Q : 민주주의의 관념을 가진 미국인을 대하는데 있어 우리가 선생을 어떻게 도을 수 있겠는가? 중국을 지지하고 식견이 있는 미국 인사들에게 선생은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가?       A : 확실히 미국 국민들은 확실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만큼, 미국 국민들은 동아의 항구적 평화를 확립하는 원칙과 우리가 열망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화평운동의 원칙을 인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의 비서관이 말했다. “유럽, 미주, 아시아는 각자 연합하여 기본적인 영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라고. 이는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며 손중산 선생은 이가 태평양의 영원한 화평을 보장하는 유일한 기반이라 보았다.       나는 미국의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과 타인을 존중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미국의 평화가 먼로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었듯이, 동아의 화평 또한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이 인정한 것이고, 고노에 성명은 그 증명이라 할 수 있다.

  • 중국 공군의 신사명 (中國空軍的新使命 / 1942.10.12)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중국 공군의 신사명 (中國空軍的新使命) 공군 장병들이여, 오늘 본 위원장은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쁨이 크다. 국부 손중산 선생께서는 공군이 나라를 구한다고 하였는데, 2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공군이 싹을 피우게 되었으니 위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도하다. 만약 우리가 이 21년동안 계속 노력했다면 공군은 오늘처럼 겨우 싹만 틔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공군이 나라를 구한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그 슬픔은 정말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과거의 공군은 크게 두가지의 잘못된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목표의 오류이다. 여러분들은 과거에 공군 교습을 받은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 공군의 힘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에는 안타까운 사건과 모습들이 여러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공군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는 육군도, 해군도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이전의 육해공군 군인훈조에서도 분명히 이야기했다. 1조에서는 ‘충성과 믿음을 국가에 바치는 것’으로 군인은 모름지기 충(忠) 과 신(信) 두글자를 중요하게 여겨 스스로의 생명과 모든 것을 국가에 기여하는데 중점을 두어야한다. 4조에서는 지혜(智), 인(仁), 용기(勇), 엄격함(儼)을 자신의 기본으로 삼아야함을 이야기 했다. 이 두가지는 군인의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다. 제5조 (국민을 사랑하고 물자를 소중히 여기며 국가사회의 정기를 기른다.) 또한 이 기본정신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와 3조에서는 군인들의 목표에 대해 표기했다. 제 2조에서는 중국을 회복하고 동아부흥을 위해 삼민주의 및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해야함을 이야기 했고, 제3조에서는 공비의 해로움은 중국의 입국정신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이 두가지는 일반 군인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사명과 실제 시대적 흐름는 완전히 같지 않다. 국가의 생명은 수억 수만년까지 이어지는 것이고, 우리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은 이미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수억 수만년은 지속될 것이지만, 우리 개인의 생명은 한정되어있다. 학습의 시작부터 은퇴의 시기까지, 개인이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사오십 여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수십년동안 우리는 정신력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모든 것을 국가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이전의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하며 세워온 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훈조 제2조는 동아에 관한 것이고, 제3조는 반공에 관한 것이다. 이 두가지는 화평반공의 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화평은 중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동아를 부흥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이를 위해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 반공은 공산주의의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훈조의 1조와 4조를 통해 육해공군의 인격을 수양하는 도덕의 기초를 갖추었고, 제2조를 통해 군인들의 시대적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며 공군의 한 목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동아전쟁의 발발이후 동아의 상황은 급변하여 예전에는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은 이상적인 것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구체화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우방 일본의 육해공군 장병들은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으며, 대동아전쟁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 전국민이 후방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동아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동아의 동지이며, 하나는 동아의 반역자다. 무릇 동아의 동지들은 중국이 부흥하지 못하고 중국이 완성되지 못하면 동아를 보위할 책임을 질수 없음을 알고 있다. 동아와 중국이 부흥하지 못하면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하고 중국은 여전히 영미의 차식민지 지위에 머물게 되고 승리하게 되면 동거동락속 미래의 동지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때문에 현재 대동아전쟁에 협력하여 동아 동지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바라본 바, 우리 공군의 작은 싹을 돋게 해준 비행기들 마저 우방인 일본이 선물한 것인데, 일본은 전력을 다해 대동아전쟁을 대비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 비행기를 우리에게 보냈겠는가? 이는 우리가 중화를 부흥시킬 수 있게 하는 기반을 갖추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동아를 보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다. 우방은 우리 중국의 육해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우리가 동아의 동지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동아의 동지는 동아의 장래 부흥을 도모하고, 동아의 반역자는 중국을 비롯 동아를 단숨에 영미에게 넘기려 하기 때문에, 대동아전쟁 이후 훈조 제2조의 의의는 더욱 중요해졌다. 나는 공군 장병들이 합심하여 우리 공군의 진보, 중국 방공의 진보, 대동아 방공의 공고화를 도모해주길 바란다. 목표는 이제 명확해졌지만, 시대의 사명이 이처럼 막중한 만큼 우리는 막중한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예전의 공군은 목표적 오류 뿐만 아니라 수많은 파벌이 존재하여 절강과 광동의 파벌 뿐만 아니라 모든 파벌이 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육해공군 군인훈조를 통해 우리의 공동 단련과 수양을 함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아부흥을 우리 모두의 목표로 만들어 부흥시킬 수 있다. 따라서 과거의 이기적인 파벌 관념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가 ‘각고내로, (고난을 참고 노고를 견디다.) 용맹정진 ’ 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보위할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반드시 정해야 한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파벌과 잘못된 습관을 깨끗이 제거하여 공군의 건전한 사람이 되어 신시대 공군의 새로운 책임을 다해야한다. 나는 아까 앞에서 슬프지만 동시에 위안도 된다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지금의 공군은 이것밖에 없어 매우 슬프지만, 이제 싹을 틔웠으니 지금은 작으나 장래에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지금은 양을 논할 때가 아닌, 질을 먼저 논해야할 때이다. 비록 지금 우리의 공군은 양은 적지만 공군의 질이 아주 좋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확대될 수 있다면, 우리의 공군은 진정한 공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은 어떻게 높일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야하고, 동아의 동지관계에 입각하여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둘째는 각고내로 하고 용맹정진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 중국은 매우 고달프다. 동아도, 전세계도 지금 모두 고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대국적으로 바라보면, 이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세계전쟁에서 추축국은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도 동아에선 우방 일본은 반드시 승리한다.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국민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화평반공건국 정책은 매우 정확하다. 그리고 이는 미래에 반드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군 장병들이 ‘각고내로, 용맹정진’하는 정신으로 공군의 미래를 진보시키고, 좋은 자질을 가지게 된다면 양의 문제 또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공군 장병들이여, 중국의 방공과 동아의 방공을 위해 힘써 주기를 바란다. 이상의 말을 통해 그대들이 언제든지 자신을 단련하고 서로를 단련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대들의 건강과 공군의 발전을 기원하며, 육해공군 군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훈조를 실행하고,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보위할 책임을 지기를 바란다.

  • 육해공군 군인훈조 (陸海空軍 軍人訓條 / 1941.5.21)

    육해공군 군인훈조 (陸海空軍 軍人訓條), 1941년 5월 21일 발표된 군인훈조는 왕징웨이의 군대인 화평건국군의 육해공군 모두에서 통용되었다. 충성과 믿음을 국가에 바쳐 국가에 공헌한다. 矢忠矢信,貢獻一切於國家 2.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시하여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킨다 實行三民主義及大亞洲主義,以復興中國,復興東亞 3. 현재의 국가적 위기를 인정하고, 공비의 창궐로 인민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고 공산주의를 근절하여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다. 認定當前國家危機,人民痛苦,在共匪之猖獗,應竭盡心力,根絕赤禍,以救國救民 4. 지혜(智), 인(仁), 용기(勇), 엄격함(儼)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는다. 以智、仁、勇、嚴、爲立身行己之本 5. 국민을 사랑하고 물자를 소중히 여기며 국가사회의 정기를 기른다 愛護人民,珍惜物力,以培養國家社會之元氣 6. 지휘관에게는 복종하고, 동료와 화목하게 지내고 부하를 아끼어 정성으로 단결한다 對長官服從,對同僚和衷,對部屬愛護,以精誠團結之實 7. 결백하게 공무에 임하고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 潔己奉公,刻苦耐勞 8. 학문의 연구와 정진을 추구한다. 研究學術,務求精進 9.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훈련을 실시한다 嚴守紀律,點行訓練 10. 직책을 받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奉行職責,視死如歸 11. 무기를 군인의 제2생명으로 여기고, 평시에도 소중히 여기며 위기에 처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視武器爲軍人第二生命,平時愛惜,雖遇危難,絕不放棄 12. 장비를 잘 정리하고, 예절을 지키며, 위생을 중시하여 완전히 건전한 군인이 된다. 整飭軍容,恪盡禮節,注重衛生,勉成健全之軍人

  • 함께 광명의 대도로 전진하자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연설 (1943.11.7)

    대동아결집대회는 대동아대회가 끝난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왕징웨이도 도조 히데키를 이어 두번째로 연설을 했다. 나는 오늘 맹방인 일본의 성대한 국민대회에 참석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중일양국은 이미 중일동맹조약 체결로 양국의 영속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대동아회의는 성황리에 폐막하였고, 대동아공동선언은 이미 세계에 발표되었다. 중국은 대동아 각국과 서로 협력하여 광명의 대도로 함께 나아가기로 결의하였다. 대동아의 사업은 오직 동아인 자신이 해야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백년간 동아를 침략해온 영미는 그 야망과 폭력으로 전 세계를 삼키려 했고, 이를 일본은 앞장서서 이들의 야망과 폭력을 막아내었고 이는 일본 국민의 독립투쟁 결과로써 참으로 감복할 일이라 할 것이다.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국력을 강화하여 동아에서의 영미의 폭력을 격파하고, 동아를 다시 동아인에게 돌려주고 동아의 일은 동아 모두가 스스로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고, 모두가 함께 투쟁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공존공영하기로 하였다. 무릇 동아인, 특히 중국인은 이러한 일본의 정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는 마음과 더불어 대동아전쟁을 관철시키고 대동아건설을 실현하여 일본국민 제군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영미의 멸시와 속박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는 나는 계속 노력하여 이 동포들이 빨리 깨닫고 영미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와 같은 잊방에 설 수 있도록 촉구합니다. 국민대회 제군 여러분,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민정부는 일본과 동거동락하기를 바래왔다. 그리고 지금, 국민정부는 일본과 그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결의와 의지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 / 감상 / 담화 / 기념방송 (1943.11.6~7)

    난징국민정부의 신문중 하나였던 중화일보의 출판사 중화일보사출판(中華日報社出版) 에서 출판한 '대동아회의' 표지. 본글에서는 중화일보의 출판사 중화일보사출판(中華日報社出版) 에서 출판한 '대동아회의' 의 자료를 통해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 중국의 언론사와 나누었던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 도쿄에서 진행된 대동아회의 기념방송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대동아회의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행적 전체를 파악하는데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모든 발언 / 연설 내용을 정리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차후 기회가 되면 대동아회의 &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행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려 한다.) 1943년 11월 5일 개최된 대동아회의는 5일 1일차 일정에서 각 국가대표들의 연설이 있었고 , 이전 글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왕징웨이는 여기서 두번째로 연설을 했다. (11월 5일,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연설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1943년 11월 6일, 2일차 일정에서 대동아회의의 결과물인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이 발표되었고, 대회는 폐막되었다. (11월 6일,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대회를 마무리 지으며, 대회의 폐막사가 있었다. 대회의 폐막사를 진행한 것은 두 명이었는데, 한명은 대회를 개최한 일본측 대표인 도조 히데키였고, 나머지 한명은 일본을 제외한 참가자들을 대표한 중화민국 대표 왕징웨이였다. 두명밖에 참가하지 않은 폐막사에서 왕징웨이가 폐막사를 담당하게 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본문에서 등장하겠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자신의 폐막사를 회의 참가국으로 부터 지지를 받아 진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는 다음과 같다.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 (1943.11.6) 의장 각하 및 각 대표 각하 여러분, 나는 중화민국 대표로서 여러분의 허락을 받아 한마디 하려 합니다. 이번 대동아회의는 이틀에 걸친 도조 총리대신 의장 각하의 지도와 각 대표 여러분의 협력에 따라 아무런 막힘없이 마무리되었고, 이속에서 절대적인 성과를 얻게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너무나도 기뻐 중화민국 대표인 저는 여러분의 앞에서 말을 잇기가 힘듭니다. 대동아공동선언은 이제 세계에 공표되었습니다. 이 선언의 가장 큰 특징은, 동아의 도의 정신을 분명하게 선언에 명시하고 구미의 이기주의적 견해를 일소한 것에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이야기해보자면, 미영의 끊임없는 약탈과 착취를 전통으로 여기는 정책을 뿌리부터 일소하여 새롭게하고, 공존공영에 기초한 동아의 신천지를 개척하여 동아 각국로 하여금 각국의 독립 자주를 확보하고, 서로의 독립자주를 존중하고, 문화적으로는 각국의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고 존중함과 동시에 긴밀한 협력속에 문화의 융합과 창조를 위해 노력하며, 경제적으로는 호혜를 기초로 하여 각자가 가진 장단점을 보완하여 유무상통을 실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동아 각국은 필시 그 단결을 공고히 하고,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은 한층 더 증진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세계 평화 역시 필시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동아의 도의 정신은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조금도 서로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지 않으며, 세계의 평화는 이에 따라 그 기초와 방도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영과 같이 인종적 편견을 가진 자에게서는 전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중화민국 대표로서 이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이 성대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감격할 따름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은 다만, 각국 국민을 영도하고, 선진국 일본을 본받아, 일본과 함께 우방적 관계에 있는 타이 왕국, 만주국, 신흥 버마국, 필리핀 공화국과 자유인도정부와 동심협력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을 이행하고 대동아공영의 건설을 실현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 또한 아직 중국의 통일을 보지못한만큼, 하루 빨리 중국을 통일하여 하루 빨리 전국의 정신력, 물력을 집결하여 대동아의 책임을 분담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오로지 모든 힘을 다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도조 의장 각하의 지도와 각국 대표 각하분들의 협력에 대해 감사드리며, 아울러 대동아전쟁의 필승과 대동아건설의 성공을 축복하는 바입니다. 대동아회의가 진행되는 모습. 대회를 마치고, 왕징웨이는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을 질문하는 난징국민정부의 국영매체인 중앙전신사 (中央通訊社) 측과의 인터뷰에 응하여 자신의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중앙전신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 - 중앙전신사 인터뷰 (1943.11.6) 대동아전쟁은 공영주의대 식민주의의 전쟁으로, 왕도 대 패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전쟁의 의의는 파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작게는 동아의 영미 침략세력을 소탕하는 것에 있고, 크게는 대동아공영주의를 확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아 민족이 성의로 인치단결하여 호혜를 도모하고 동거동락하여 생사를 함께하게 된 것에 있다 할 수 있다. 이번에 개최된 대동아회의는 동아의 도의정신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아 각국을 하나로 묶어 영미 식민주의의 억압과 수탈 정책을 타파하고 동아 각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독립과 자주속 애국심을 충실히 가지게 하고 공존공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동아 각국이 근본정신을 도의정신에 두어 단결하게 된다면 대동아전쟁은 반드시 승리하고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수년간, 나는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동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고, 이제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에 대해 무한한 감회를 느낀다. 나는 열성을 다하여 대회의 성공을 축하하며, 최대의 노력으로 중국의 전국민을 이끌고,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를 실천하여 화평운동을 관철하고, 중국의 독립을 구하고, 동아의 해방을 실현하고, 대동아전쟁의 완성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동아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11월 7일,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서의 왕징웨이 연설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대동아회의의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에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있었고, 각국 대표들은 기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했다. 왕징웨이도 마찬가지로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일본 NHK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동아회의의 의의와 대동아회의에 참가하게 된 감상을 연설했다. 왕징웨이의 기자담화 '겸' 라디오방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는 본질적으로 기자담화문과 라디오방송내용이 거의 100%에 가까운 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위에서 보았던 중화일보사 도서에서 잘못 서술한것이라 생각했으나, 대동아회의 시기를 다루는 신문들 (新中國報와 같은 왕징웨이측 신문들) 을 보아도, 이 두 글의 내용은 사실상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일치성이 난징국민정부 선전부 측에서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따라서 기자담화문의 내용 = 라디오방송 내용 이라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기에, 같은 내용을 중복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생각하여 따로 서술하지 않았다. ) 각자가, 모두가 노력하면 동아는 해방될 수 있다 (1943.11.7 / 대동아회의 이후 기자담화 및 라디오방송내용) 나는 이번 세계사에서 위대한 의의를 가진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내심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회의를 통해 일본 도조 수상의 위대한 이론을 경청하고, 각국 대표들의 위대한 이론을 직접 접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복스럽다.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영미 양국은 제멋대로 침략과 착취정책을 자행해왔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세계 지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세력은 그 야망을 처음에는 남양, 그 다음에는 중국으로 확장시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미국도 태평양을 넘어 동아를 침공하여 영국과 연합하여 협공지세를 형성하였다. 당시 동아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으나, 다행히 일본은 홀로 일어서는데 성공하여 영미의 야망을 막아내고 영미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그 야심은 변하지 않아 계속하여 동아 민족을 이간질 시키고 서로 싸우게 하여 동아는 평안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어 영미 양국의 세력이 동아에서 무너지고, 영미 침략이 착취해왔던 소득과 시도는 모두 일본에 의해 무너졌다. 그렇기에 대동아의 모든 민족은 일본이 동아를 지켜낸 공적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영미 양국이 동아를 해치고 동아의 침략 정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여 영미세력을 격퇴하고, 나아가 이들이 펼쳤던 정책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즉, 공존의 구호를 통해 침략의 구호를 바꾸고, 공존을 통해 착취를 끝내고, 동아민족이 각각 자주독립할 수 있게 하고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문화방면에서는 그 창의력과 조화력을 발휘하게 하며, 경제방면에서는 호혜를 실행하고, 장단점을 서로보완하여 유무상통하게 했다. 이러한 기본방침은 영미의 기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동양의 도의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서양의 이기적인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이번 대동아회의는 일본이 주최하여 동아의 각국가들과 연합하여 단결의 힘으로 도의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위대한 공헌으로, 대동아 각국가들의 영원한 우호의 토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원한 화평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일본의 유신이 동아의 기회가 될 것" 이라한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다.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는 일본이 중국의 불평등 철폐에 협조하는 것도 소망해왔는데, 이 또한 이제는 구체화되었다. 나는 몇일 전 주중 일본대사와 중일동맹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오늘 중화민국을 대표하여 대동아회의에 참석하여 대동아공동선언에 서명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도 모두 같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반드시 관철될 것이고 대동아의 건설도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목적과 임무를 완수, 달성하는 것은 동아 각 민족의 노력, 그리고 동아 공동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선진국인 일본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우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부흥하길 희망하고 대동아전쟁을 관철시켜 대동아 건설완성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동아의 광명대업은 대동아 각 국가민족이 스스로 노력하고, 함께 노력해야 완성할 수 있다. 영미가 예전에 행해오던 침략과 약탈의 정책은 이미 무너졌고, 영미가 행해왔던 이간질도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앞으로는 어떠한 정책을 펼치든, 어떠한 감언이설을 펼쳐 우리를 유인하거나 이간질을 하더라도, 우리의 신념은 이제 흔들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억압을 받지 않고 속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대동아 각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대동아를 해방시키고 대동아의 광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일동맹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연간기념일 목록 /中華民國 南京國民政府 (汪) 年間紀念日目錄

    본 자료는 1941년의 國立中央大學要覽 (1941) / 中國國民黨紀念日史略 (1942) / 我國重要紀念節日 (1945) 참조 왕징웨이 정권의 기념일들. 충칭국민정부와 공유하는 것도 있고, 왕징웨이만의 독특한 기념일들도 존재한다. 국정기념일의 경우, 1940년에 작성되어 1942년에 수정과정을 거쳤다.

  • 공자 기념의 의의 (紀念孔子的意義 / 1940.8.27)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공자 기념의 의의 (紀念孔子的意義) 국민정부가 선사(先師) 공자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왜 당연한 것인가?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 건설 이래,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공자에 대한 두가지 관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서양의 기독교에서 교주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이를 따라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를 교주로 삼고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특징이 현실 세계 외의 천국이라는 이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유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도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 "(未能事人,焉能事鬼,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라고 하였다.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未知生,焉知死,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라 하였다. 이를 통해 유교는 현실세계를 중시함을 알 수 있다. 유교에는 제사가 있지만, 그 의의는 은혜를 갚는것에 있다. 예를 들어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제를 올리시되 반드시 공경히 하셨다”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구절이다.)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습으로서 이어지고 있다. 유교에서의 교(敎)라는 것은 종교의 교가 아닌 가르침의 교라 할 수 있다. 중국은 공자를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이지, 공자를 교주로써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중국민족의 도덕적 지혜를 계도하는 만세의 스승인것이지, 상제의 화신(化身)이 아니다. 이렇듯 공자는 실로 중국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세계주의, 국제주의 주장을 받아드리며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여 유교를 함부로 헐뜯고, 공자를 헐뜯는 터무니 없는 모습이다. 세상의 어떠한 문화도 시대에 따라 진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후대의 어리석인 이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지 않고, 선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다고 책망하니, 정말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過則勿憚改, 논어 자한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 ’진실로 하루 새로워졌거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한다’ (苟日新,日日新,又日新, 대학 2장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라 말하며 진덕(進德)을 이야기하며 성찰하지 않으면 발전할수 없음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들은 "조상의 죄악이 심하고 이것이 무너지지 않아 자손들에게 화를 입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논조든 개관적인 자긍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미에 아부하고, 자기 나라 민족을 타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가 기승을 부려 웬만한 청년들은 배은망덕해졌고, 그 결과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말들에 따르면, 이들은 구미를 모방하여 본래의 것을 잊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 민족은 배은망덕하고 짐승만도 못한 것이된다. 국민정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사 공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만드는 법을 발표했다. 성탄절의 화려함은 없지만 중국 민족을 일깨우는 자각을 위해서 이는 절실한 것이다. 선구자 공자는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쳤다. 그리고 방법은 ‘날마다 새로워 지고 날로 새로워 지는 것 (日日新、又日新) '에 있으며, 이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仁) 이라는 글자는 인생에서 가장 고상하고 광대한 도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수 있고, 이를 소극적으로 하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이야 말로 불변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지혜로 백성을 인도하는 것 말고도, 우리는 중국의 모든 법률과 문화유산이 우리 조상인 공자에게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자가 없었다면 중국 문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승 공자의 탄생을 기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로 하여금 용맹정진의 결심을 하게 해야한다. 시국에 대해 말해보자. 자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는 "식량을 충족시키는 것, 병기를 충분하게 하는 것, 백성이 믿게하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자공이 "반드시 부득이하게 하나를 버려야한다면 이 세가지중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라고 하자 공자는 “병사를 버려라”라고 하였다. 자공이 다시 한번 “반드시 부득이하게 두가지중 한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식량을 버려라, 예로부터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것이나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논어 안연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화평운동을 하는 이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화평운동을 하는 것은 화평을 통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지, 구차하게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평운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화평운동을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삶도 바라는 것이요, 의(義)도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두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가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하고 싶은 것이 삶보다 더 한 것이 있으니, 그렇기에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죽음 또한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환란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만약 사람이 원하는 것 중에 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면, 삶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 무슨 방법인들 쓰지 않겠으며, 만약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에 죽는 것 보다 싫어하는 것이 없다면, 환난을 피할수 있는 경우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살수 있어도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며, 환난을 피할 수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 (맹자집주 고자장구 상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라 하였다. 이러한 ’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것이나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라는 정신은 유교의 참된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어야 비로서 경제와 군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화평운동을 하는 이들은 선구자 공자의 탄생을 기념할 때 더욱 용맹정진하여 그 깨우침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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