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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해공군 군인훈조 (陸海空軍 軍人訓條 / 1941.5.21)

    육해공군 군인훈조 (陸海空軍 軍人訓條), 1941년 5월 21일 발표된 군인훈조는 왕징웨이의 군대인 화평건국군의 육해공군 모두에서 통용되었다. 충성과 믿음을 국가에 바쳐 국가에 공헌한다. 矢忠矢信,貢獻一切於國家 2.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시하여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킨다 實行三民主義及大亞洲主義,以復興中國,復興東亞 3. 현재의 국가적 위기를 인정하고, 공비의 창궐로 인민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고 공산주의를 근절하여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다. 認定當前國家危機,人民痛苦,在共匪之猖獗,應竭盡心力,根絕赤禍,以救國救民 4. 지혜(智), 인(仁), 용기(勇), 엄격함(儼)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는다. 以智、仁、勇、嚴、爲立身行己之本 5. 국민을 사랑하고 물자를 소중히 여기며 국가사회의 정기를 기른다 愛護人民,珍惜物力,以培養國家社會之元氣 6. 지휘관에게는 복종하고, 동료와 화목하게 지내고 부하를 아끼어 정성으로 단결한다 對長官服從,對同僚和衷,對部屬愛護,以精誠團結之實 7. 결백하게 공무에 임하고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 潔己奉公,刻苦耐勞 8. 학문의 연구와 정진을 추구한다. 研究學術,務求精進 9.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훈련을 실시한다 嚴守紀律,點行訓練 10. 직책을 받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奉行職責,視死如歸 11. 무기를 군인의 제2생명으로 여기고, 평시에도 소중히 여기며 위기에 처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視武器爲軍人第二生命,平時愛惜,雖遇危難,絕不放棄 12. 장비를 잘 정리하고, 예절을 지키며, 위생을 중시하여 완전히 건전한 군인이 된다. 整飭軍容,恪盡禮節,注重衛生,勉成健全之軍人

  • 함께 광명의 대도로 전진하자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연설 (1943.11.7)

    대동아결집대회는 대동아대회가 끝난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왕징웨이도 도조 히데키를 이어 두번째로 연설을 했다. 나는 오늘 맹방인 일본의 성대한 국민대회에 참석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중일양국은 이미 중일동맹조약 체결로 양국의 영속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대동아회의는 성황리에 폐막하였고, 대동아공동선언은 이미 세계에 발표되었다. 중국은 대동아 각국과 서로 협력하여 광명의 대도로 함께 나아가기로 결의하였다. 대동아의 사업은 오직 동아인 자신이 해야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백년간 동아를 침략해온 영미는 그 야망과 폭력으로 전 세계를 삼키려 했고, 이를 일본은 앞장서서 이들의 야망과 폭력을 막아내었고 이는 일본 국민의 독립투쟁 결과로써 참으로 감복할 일이라 할 것이다.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국력을 강화하여 동아에서의 영미의 폭력을 격파하고, 동아를 다시 동아인에게 돌려주고 동아의 일은 동아 모두가 스스로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고, 모두가 함께 투쟁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공존공영하기로 하였다. 무릇 동아인, 특히 중국인은 이러한 일본의 정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는 마음과 더불어 대동아전쟁을 관철시키고 대동아건설을 실현하여 일본국민 제군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영미의 멸시와 속박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는 나는 계속 노력하여 이 동포들이 빨리 깨닫고 영미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와 같은 잊방에 설 수 있도록 촉구합니다. 국민대회 제군 여러분,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민정부는 일본과 동거동락하기를 바래왔다. 그리고 지금, 국민정부는 일본과 그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결의와 의지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 / 감상 / 담화 / 기념방송 (1943.11.6~7)

    난징국민정부의 신문중 하나였던 중화일보의 출판사 중화일보사출판(中華日報社出版) 에서 출판한 '대동아회의' 표지. 본글에서는 중화일보의 출판사 중화일보사출판(中華日報社出版) 에서 출판한 '대동아회의' 의 자료를 통해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 중국의 언론사와 나누었던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 도쿄에서 진행된 대동아회의 기념방송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대동아회의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행적 전체를 파악하는데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모든 발언 / 연설 내용을 정리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차후 기회가 되면 대동아회의 &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행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려 한다.) 1943년 11월 5일 개최된 대동아회의는 5일 1일차 일정에서 각 국가대표들의 연설이 있었고 , 이전 글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왕징웨이는 여기서 두번째로 연설을 했다. (11월 5일,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의 연설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1943년 11월 6일, 2일차 일정에서 대동아회의의 결과물인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이 발표되었고, 대회는 폐막되었다. (11월 6일,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대회를 마무리 지으며, 대회의 폐막사가 있었다. 대회의 폐막사를 진행한 것은 두 명이었는데, 한명은 대회를 개최한 일본측 대표인 도조 히데키였고, 나머지 한명은 일본을 제외한 참가자들을 대표한 중화민국 대표 왕징웨이였다. 두명밖에 참가하지 않은 폐막사에서 왕징웨이가 폐막사를 담당하게 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본문에서 등장하겠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자신의 폐막사를 회의 참가국으로 부터 지지를 받아 진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는 다음과 같다. 왕징웨이의 대동아회의 폐막사 (1943.11.6) 의장 각하 및 각 대표 각하 여러분, 나는 중화민국 대표로서 여러분의 허락을 받아 한마디 하려 합니다. 이번 대동아회의는 이틀에 걸친 도조 총리대신 의장 각하의 지도와 각 대표 여러분의 협력에 따라 아무런 막힘없이 마무리되었고, 이속에서 절대적인 성과를 얻게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너무나도 기뻐 중화민국 대표인 저는 여러분의 앞에서 말을 잇기가 힘듭니다. 대동아공동선언은 이제 세계에 공표되었습니다. 이 선언의 가장 큰 특징은, 동아의 도의 정신을 분명하게 선언에 명시하고 구미의 이기주의적 견해를 일소한 것에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이야기해보자면, 미영의 끊임없는 약탈과 착취를 전통으로 여기는 정책을 뿌리부터 일소하여 새롭게하고, 공존공영에 기초한 동아의 신천지를 개척하여 동아 각국로 하여금 각국의 독립 자주를 확보하고, 서로의 독립자주를 존중하고, 문화적으로는 각국의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고 존중함과 동시에 긴밀한 협력속에 문화의 융합과 창조를 위해 노력하며, 경제적으로는 호혜를 기초로 하여 각자가 가진 장단점을 보완하여 유무상통을 실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동아 각국은 필시 그 단결을 공고히 하고,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은 한층 더 증진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세계 평화 역시 필시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동아의 도의 정신은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조금도 서로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지 않으며, 세계의 평화는 이에 따라 그 기초와 방도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영과 같이 인종적 편견을 가진 자에게서는 전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중화민국 대표로서 이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이 성대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감격할 따름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은 다만, 각국 국민을 영도하고, 선진국 일본을 본받아, 일본과 함께 우방적 관계에 있는 타이 왕국, 만주국, 신흥 버마국, 필리핀 공화국과 자유인도정부와 동심협력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을 이행하고 대동아공영의 건설을 실현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 또한 아직 중국의 통일을 보지못한만큼, 하루 빨리 중국을 통일하여 하루 빨리 전국의 정신력, 물력을 집결하여 대동아의 책임을 분담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오로지 모든 힘을 다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도조 의장 각하의 지도와 각국 대표 각하분들의 협력에 대해 감사드리며, 아울러 대동아전쟁의 필승과 대동아건설의 성공을 축복하는 바입니다. 대동아회의가 진행되는 모습. 대회를 마치고, 왕징웨이는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을 질문하는 난징국민정부의 국영매체인 중앙전신사 (中央通訊社) 측과의 인터뷰에 응하여 자신의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중앙전신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대동아회의에 대한 감상 - 중앙전신사 인터뷰 (1943.11.6) 대동아전쟁은 공영주의대 식민주의의 전쟁으로, 왕도 대 패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전쟁의 의의는 파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작게는 동아의 영미 침략세력을 소탕하는 것에 있고, 크게는 대동아공영주의를 확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아 민족이 성의로 인치단결하여 호혜를 도모하고 동거동락하여 생사를 함께하게 된 것에 있다 할 수 있다. 이번에 개최된 대동아회의는 동아의 도의정신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아 각국을 하나로 묶어 영미 식민주의의 억압과 수탈 정책을 타파하고 동아 각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독립과 자주속 애국심을 충실히 가지게 하고 공존공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동아 각국이 근본정신을 도의정신에 두어 단결하게 된다면 대동아전쟁은 반드시 승리하고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수년간, 나는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동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고, 이제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에 대해 무한한 감회를 느낀다. 나는 열성을 다하여 대회의 성공을 축하하며, 최대의 노력으로 중국의 전국민을 이끌고,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를 실천하여 화평운동을 관철하고, 중국의 독립을 구하고, 동아의 해방을 실현하고, 대동아전쟁의 완성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동아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11월 7일,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서의 왕징웨이 연설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대동아회의의 다음날인 1943년 11월 7일에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있었고, 각국 대표들은 기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했다. 왕징웨이도 마찬가지로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일본 NHK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동아회의의 의의와 대동아회의에 참가하게 된 감상을 연설했다. 왕징웨이의 기자담화 '겸' 라디오방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는 본질적으로 기자담화문과 라디오방송내용이 거의 100%에 가까운 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위에서 보았던 중화일보사 도서에서 잘못 서술한것이라 생각했으나, 대동아회의 시기를 다루는 신문들 (新中國報와 같은 왕징웨이측 신문들) 을 보아도, 이 두 글의 내용은 사실상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일치성이 난징국민정부 선전부 측에서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따라서 기자담화문의 내용 = 라디오방송 내용 이라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기에, 같은 내용을 중복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생각하여 따로 서술하지 않았다. ) 각자가, 모두가 노력하면 동아는 해방될 수 있다 (1943.11.7 / 대동아회의 이후 기자담화 및 라디오방송내용) 나는 이번 세계사에서 위대한 의의를 가진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내심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회의를 통해 일본 도조 수상의 위대한 이론을 경청하고, 각국 대표들의 위대한 이론을 직접 접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복스럽다.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영미 양국은 제멋대로 침략과 착취정책을 자행해왔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세계 지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세력은 그 야망을 처음에는 남양, 그 다음에는 중국으로 확장시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미국도 태평양을 넘어 동아를 침공하여 영국과 연합하여 협공지세를 형성하였다. 당시 동아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으나, 다행히 일본은 홀로 일어서는데 성공하여 영미의 야망을 막아내고 영미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그 야심은 변하지 않아 계속하여 동아 민족을 이간질 시키고 서로 싸우게 하여 동아는 평안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어 영미 양국의 세력이 동아에서 무너지고, 영미 침략이 착취해왔던 소득과 시도는 모두 일본에 의해 무너졌다. 그렇기에 대동아의 모든 민족은 일본이 동아를 지켜낸 공적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영미 양국이 동아를 해치고 동아의 침략 정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여 영미세력을 격퇴하고, 나아가 이들이 펼쳤던 정책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즉, 공존의 구호를 통해 침략의 구호를 바꾸고, 공존을 통해 착취를 끝내고, 동아민족이 각각 자주독립할 수 있게 하고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문화방면에서는 그 창의력과 조화력을 발휘하게 하며, 경제방면에서는 호혜를 실행하고, 장단점을 서로보완하여 유무상통하게 했다. 이러한 기본방침은 영미의 기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동양의 도의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서양의 이기적인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이번 대동아회의는 일본이 주최하여 동아의 각국가들과 연합하여 단결의 힘으로 도의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위대한 공헌으로, 대동아 각국가들의 영원한 우호의 토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원한 화평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일본의 유신이 동아의 기회가 될 것" 이라한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다.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는 일본이 중국의 불평등 철폐에 협조하는 것도 소망해왔는데, 이 또한 이제는 구체화되었다. 나는 몇일 전 주중 일본대사와 중일동맹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오늘 중화민국을 대표하여 대동아회의에 참석하여 대동아공동선언에 서명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도 모두 같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반드시 관철될 것이고 대동아의 건설도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목적과 임무를 완수, 달성하는 것은 동아 각 민족의 노력, 그리고 동아 공동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선진국인 일본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우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부흥하길 희망하고 대동아전쟁을 관철시켜 대동아 건설완성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동아의 광명대업은 대동아 각 국가민족이 스스로 노력하고, 함께 노력해야 완성할 수 있다. 영미가 예전에 행해오던 침략과 약탈의 정책은 이미 무너졌고, 영미가 행해왔던 이간질도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앞으로는 어떠한 정책을 펼치든, 어떠한 감언이설을 펼쳐 우리를 유인하거나 이간질을 하더라도, 우리의 신념은 이제 흔들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억압을 받지 않고 속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대동아 각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대동아를 해방시키고 대동아의 광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일동맹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연간기념일 목록 /中華民國 南京國民政府 (汪) 年間紀念日目錄

    본 자료는 1941년의 國立中央大學要覽 (1941) / 中國國民黨紀念日史略 (1942) / 我國重要紀念節日 (1945) 참조 왕징웨이 정권의 기념일들. 충칭국민정부와 공유하는 것도 있고, 왕징웨이만의 독특한 기념일들도 존재한다. 국정기념일의 경우, 1940년에 작성되어 1942년에 수정과정을 거쳤다.

  • 공자 기념의 의의 (紀念孔子的意義 / 1940.8.27)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공자 기념의 의의 (紀念孔子的意義) 국민정부가 선사(先師) 공자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왜 당연한 것인가?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 건설 이래,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공자에 대한 두가지 관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서양의 기독교에서 교주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이를 따라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를 교주로 삼고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특징이 현실 세계 외의 천국이라는 이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유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도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 "(未能事人,焉能事鬼,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라고 하였다.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未知生,焉知死,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라 하였다. 이를 통해 유교는 현실세계를 중시함을 알 수 있다. 유교에는 제사가 있지만, 그 의의는 은혜를 갚는것에 있다. 예를 들어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제를 올리시되 반드시 공경히 하셨다”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구절이다.)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습으로서 이어지고 있다. 유교에서의 교(敎)라는 것은 종교의 교가 아닌 가르침의 교라 할 수 있다. 중국은 공자를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이지, 공자를 교주로써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중국민족의 도덕적 지혜를 계도하는 만세의 스승인것이지, 상제의 화신(化身)이 아니다. 이렇듯 공자는 실로 중국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세계주의, 국제주의 주장을 받아드리며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여 유교를 함부로 헐뜯고, 공자를 헐뜯는 터무니 없는 모습이다. 세상의 어떠한 문화도 시대에 따라 진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후대의 어리석인 이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지 않고, 선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다고 책망하니, 정말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過則勿憚改, 논어 자한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 ’진실로 하루 새로워졌거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한다’ (苟日新,日日新,又日新, 대학 2장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라 말하며 진덕(進德)을 이야기하며 성찰하지 않으면 발전할수 없음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들은 "조상의 죄악이 심하고 이것이 무너지지 않아 자손들에게 화를 입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논조든 개관적인 자긍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미에 아부하고, 자기 나라 민족을 타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가 기승을 부려 웬만한 청년들은 배은망덕해졌고, 그 결과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말들에 따르면, 이들은 구미를 모방하여 본래의 것을 잊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 민족은 배은망덕하고 짐승만도 못한 것이된다. 국민정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사 공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만드는 법을 발표했다. 성탄절의 화려함은 없지만 중국 민족을 일깨우는 자각을 위해서 이는 절실한 것이다. 선구자 공자는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쳤다. 그리고 방법은 ‘날마다 새로워 지고 날로 새로워 지는 것 (日日新、又日新) '에 있으며, 이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仁) 이라는 글자는 인생에서 가장 고상하고 광대한 도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수 있고, 이를 소극적으로 하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이야 말로 불변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지혜로 백성을 인도하는 것 말고도, 우리는 중국의 모든 법률과 문화유산이 우리 조상인 공자에게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자가 없었다면 중국 문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승 공자의 탄생을 기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로 하여금 용맹정진의 결심을 하게 해야한다. 시국에 대해 말해보자. 자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는 "식량을 충족시키는 것, 병기를 충분하게 하는 것, 백성이 믿게하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자공이 "반드시 부득이하게 하나를 버려야한다면 이 세가지중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라고 하자 공자는 “병사를 버려라”라고 하였다. 자공이 다시 한번 “반드시 부득이하게 두가지중 한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식량을 버려라, 예로부터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것이나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논어 안연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화평운동을 하는 이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화평운동을 하는 것은 화평을 통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지, 구차하게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평운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화평운동을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삶도 바라는 것이요, 의(義)도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두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가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하고 싶은 것이 삶보다 더 한 것이 있으니, 그렇기에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죽음 또한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환란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만약 사람이 원하는 것 중에 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면, 삶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 무슨 방법인들 쓰지 않겠으며, 만약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에 죽는 것 보다 싫어하는 것이 없다면, 환난을 피할수 있는 경우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살수 있어도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며, 환난을 피할 수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 (맹자집주 고자장구 상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라 하였다. 이러한 ’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것이나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라는 정신은 유교의 참된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어야 비로서 경제와 군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화평운동을 하는 이들은 선구자 공자의 탄생을 기념할 때 더욱 용맹정진하여 그 깨우침을 알 필요가 있다.

  • 화평선언 (和平宣言 / 1940.3.12)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화평선언 (和平宣言) ”중일 양국은 어떠하더라도 손을 맞잡고 양국의 장래 발전을 도모해야한다.“ . ”중일양국은 아시아 민족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어야한다. “ 이말은 중화민국 국부 손중산 선생의 말씀이다. 동포 동지들은 이를 마땅히 함께 깨달아야 한다. 불행하게도 중일 양국의 관계는 수년에 걸쳐 조성되지 못했고,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혼란이 시작되었다. 재작년 11월 3일 (제 2차 고노에 성명의 발표일) , 일본 고노에 내각은 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이 중국에 바라는 것은 동아신질서 건설의 임무를 부담하는 것에 있다.“ 라고 하였다. 또한 고노에 내각은 방송을 통해 ”일본이 바라는 것은 중국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부흥시키는 것이다. 중국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협력하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민족적 열정을 인식하고, 중국의 독립국가 건설 완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12월 22일 (제 3차 고노에 성명의 발표일.) 의 성명을 통해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라는 원칙을 통해 일본이 중국의 주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계를 반환하고, 중국의 독립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치외법권을 폐지할 것을 고려하였다. 일본정부의 이 성명들이 있은후, 중국측은 항전을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되며, 화평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특히 중일 양국은 현재의 전쟁이라는 재앙뿐만 아니라, 과거의 분쟁이 되어왔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미래의 친선관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화평운동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지난해 8월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는 항전의 구호에서 ’화평건국‘의 구호로, 반공을 화평건국에 필요한 필수사업으로 정했다. 개인의 독재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지금, 헌정의 실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최단 기간에 훈정을 끝내고 헌정을 시작하여,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의결된 내용을 확실하게 관철시켜야 한다. 중국국민당 제 6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우리는 수개월동안 일본정부와 일본 국민들과 함께 성의를 보여왔고,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원칙을 통해 이를 구체화해 양국이 이익을 나누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내 정당과 정치단체들, 그리고 현명한 인사들이 이미 시국을 수습하는 방법을 세심하고 있고, 이들은 일치된 결의로 공동의 노력을 하기 위해 중앙정치회의에 조직하려 하고 있으며 중앙정부도 이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 이제부터 전국 인민은 통일되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영도하에 대외적으로는 국교를 조정하고, 대내적으로는 헌정을 실시하여 수년간의 분쟁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화평과 행복의 신천지를 실현시킬 것이다. 헌정의 실시에 대해, 우리는 이미 시대에 적합한 정치강령과 정책을 수립하여 최단기간에 이 사명을 완수할 필요가 있다. 대외국교조정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정한 각종 구체적인 방안은 모두 공개하고 방법에 있어서는 고유의 방법을 쓰되, 우리는 이러한 방안이 결코 고노에 성명의 범위에 벗어나게, 저촉되게 않게 해야할 필요가 있다. 즉. 중국의 독립생존에 전혀 해가 없고, 제3국이 가지고 있는 중국의 정당한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고, 중국의 화평회복을 발전시킬 수 있는 외교를 해야한다. 그리고 중국이 화평을 회복한 후에는 일본과 경제제휴를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건국방략의 실업계획에 근거하여 각국의 기술과 자본을 수용하여 중국의 건설을 완성하고 동아의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아의 번영은 화평운동에 있어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중일의 이익, 나아가 세계의 이익이 될 수 있다. 나라를 위하는 자라면 우리들의 화평운동에 대해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마땅히 논의해야한다. 전쟁 발발이후 북평, 옛 수도인 난징이 잇달아 함락되었고, 그 뿐만 아니라 톈진, 상하이, 칭다오의 3개의 특별시 그리고 하북성, 산서성, 하남성,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강서성, 호북성, 광동성, 광서성 13개의 성이 함락되어 장백 수백만이 사망했고, 수천만 인민들은 직간접적으로 난민신세가 되었다. 항일전쟁 이후 2년 반동안 거점을 계속 잃으면 잃었지, 회복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홀로 남은 인민은 나날이 무너져 내리고 있고,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은 몸이 부서지고 뼈가 부서지는 상황에서 국가 인민을 제대로 대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고,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일본과 정전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조건을 받아드려 아직 소진되지 않은 국력을 보존하고,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부흥을 도모하는 것은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의 동지들에게 당연한 책무다. 권세를 장악하고 민의를 위협하여 매일 끝까지 항전해야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만 이야기하며 스스로 남을 속이고 국토를 더욱 축소시키고 국력을 더욱 소모시켜선 구원받을 수 없다. 이는 근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멀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번 화평운동은 단지 현재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원인을 깊이 찾고, 과거의 악연을 풀고, 장래의 기둥을 다시 세워 중일양국이 공존공영의 대로를 향하여 함께 전진하도록 해야한다. 중일 양국을 동아의 주춧돌이 되고, 양국간의 상호안전은 동아의 화평을 보장하며, 세계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시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민족을 멸망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기에, 우리들은 충칭에서 가하는 치욕을 참으며 화평운동에 종사해야 하며 대국적으로 중국과 동아에 부흥을 가져다 줘야하며, 우리들은 마땅히 화평운동에 종사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한다. 나 왕자오밍은 국민정부를 섬기고 중국국민당의 한 사람으로 과거에 많은 힘든 일을 겪어 불행하게도 전쟁을 예방하지 못했고, 전쟁이 일어난 초기에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하루하루가 지나도록 충칭의 동지들에게 호소해왔다. 하지만 나 왕자오밍은 오늘 날 전 국민이 모두 화평을 원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화평에 대해 회의하는 자는 화평 그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화평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이미 성립된 정당들과 현지의 현명한 인재들과 연합하여 화평운동의 책임을 지고, 전 국민이 바라는 화평이 하나씩 실현될 수 있도록 힘을 합칠 것이다. 이에 중앙정치회의를 조직하여 화평운동의 참뜻과 화평운동의 방안과 요지를 마련할 것이다.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린다. 이제 국민정부는 반드시 실력으로 화평방안의 실현을 도모하여 화평운동의 성공을 도모할 것이다. 전국동포들은 이를 함께 깨닫고 일심동체가 되어 이 대업을 함께하고, 충칭측은 선입견을 버리고 즉시 정전하여 화평방안을 보다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실행해주기바란다. 국내외 동포들이여, 민족을 구하고 부흥을 위하는 방법은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이를 정성을 가지고 충직하게 생각해주기 바란다.

  • 국민정부 환도의 중대사명 (國民政府還都的重大使命 / 1940.3.23)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국민정부 환도의 중대사명 (國民政府還都的重大使命) 동포들이여, 오늘은 우리 동지들이 난징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날이다. 이야기를 할 때 마음속에는 끝없는 슬픔이있었다. 과거를 떠올리고 현재를 생각해보면 마음속으로 끝없는 슬픔을 느끼며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에 대한 무한한 광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용기를 내어 이 광명을 더욱 펼쳐나가야한다. 이렇게 해야만이 이전의 슬픔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동지들에게 이야기할 주제는 ’국민정부 환도의 중대 사명‘ 이다. 이번에 국민정부는 어떠한 필요성에 의해 환도하게 되었는가? 중앙정치회의에서의 의결이 있은후, 예전부터 각지에서 펼쳐지던 화평운동은 이제 하나로 통일되게 되었다. 화평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바로 화평의 정착과 헌정의 실시다. 이 두가지 큰 방침은 화평운동의 가장 큰 목표이자 국민정부 환도의 최대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화평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를 이야기 위해 3월 13일에 선언문을 적어 신문에 실었다. (1940년 3월 13일 발표된 화평선언 (和平宣言)을 의미. 다음글에서 이를 다룰 예정 ) 선언문에서는 중일관계를 일본의 고노에 성명의 원칙,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원칙에 따라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또한 나는 우리의 모든 화평안이 고노에 성명의 범위를 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선언하였다. 같은 날 밤, 일본의 요나이 내각총리대신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성명에서 이야기한 것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고노에 성명을 중일 국교조정의 기초로 삼겠다는 것이다. 동포들이여, 그대들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년 동안 일본측이 중일의 화평운동에 대해 일관되게 논의를 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재작년 12월 29일의 염전, 최근 3월 13일의 선언을 보면 우리 중국 또한 중일의 화평운동에 변함없이 일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길이 분명한 만큼, 우리는 이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길이 있다고 한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지금 국민정부는 왜 환도하는가? 이는 화평을 이루자는 주장에서 이야기한 길,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함이다. 이는 화평의 주장이 이제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평‘ 이라는 단어 한 글자 한 글자를 실천하는 단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헌정실시에 대해 중앙정치회의는 이미 결의를 끝냈다. 국민정부는 환도 이후 최단시간 내에 헌정실시위원회를 설치하여 최대한 빠르게 국민대회를 소집, 헌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국민정부의 환도는 화평을 정착시키는 것이고, 헌정을 실현하는 것이며, 중일관계의 조정을 도모하는 것이며, 동아의 화평과 질서건설을 도모하는 것이며, 중화민국의 건설을 완성하는 것이다. 화평의 정착과 헌정의 실시 아 두가지 일은 이러한 이유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민정부는 앞으로 대내외 정책을 이 두가지 큰 방침에 의해 해나갈 것이다. 국민정부가 환도하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몇 년간 인민들이 겪어온 고통과 국가의 위험을 신속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화평과 헌정을 실시하여야 한다. 화평적 헌정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국민정부의 동지들은 전국의 우리 동포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고 있다. 화평의 실현과 헌정의 실현, 이 두가지 큰 방침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많이 이야기한 만큼, 오늘은 이렇게 간단하게 동포들에게 고하는 바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오늘부터 화평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이전에는 화평운동은 각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로 통일되어 국민정부 아래의 영도를 받게되는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화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결하게 되고, 화평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만 남게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화평에 반대하는 이들도 하루빨리 화평운동에 합류하기를 바란다. 나와 동지들은 매일 이를 기다려 왔고, 그들을 합류하게 할 방법을 생각하고 해왔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오해를 가지고 있고, 어떤 곡해를 하고 있고, 심지어 우리를 경멸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신경쓰지 않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동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일찍 우리에게 합류한다면, 전면적 화평은 일찍 실현될 것이다. 일본군이 아직 철수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정부를 구성하는 일에 대해 이가 소용없고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이들의 반대논조는 맞는 것 같지만, 실은 틀린 말이다. 우리는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화평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있다. 화평의 실현 여부는 우리가 화평운동에 힘을 쓸 수 있는지, 중일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지, 모두가 새로운 광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부를 조직하여 화평을 실현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평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에 반드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고, 우리의 뜻대로 반드시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 시련을 안겨다 주는 이는 누구인가? 이는 바로 우리의 화평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화평운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국민정부의 명령을 제대로 받든다면 전면적인 화평은 저절로 실현될 수 있다. 현재의 전면적인 화평은 완전히 그들의 방해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면적인 화평이 실현되지 않은 지금, 화평운동을 하지 않겠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는 말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운동을 해야 전면적인 화평을 이룰 수 있다. 화평운동은 전면적인 화평의 전에 하는 것이지 후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칭쪽에서 큰소리 치는 사람들은 이를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심성의껏 전국의 화평운동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화평을 반대하는 이들이 생각을 바꾸어주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를 기다릴 순 없다. 그들이 화평에 찬성을 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화평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동포들이 화평을 이해하고 찬성할 수 있게 그 이론을 명료하게 작성할 필요가 있고, 또한 동포들이 실제로 화평이 실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이의 실현에도 힘써야 한다. 그러면 화평운동은 반드시 발전하고 보편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국민정부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국민정부의 고민은 국민의 고민이며, 국민이 바라는 것은 국민정부 또한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이 바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국민정부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화평운동을 이해하는 자는 더 노력해야하고, 이론을 더 확충하고, 더욱 실천해야 한다. 또한 화평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마음을 바꿔 화평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화평의 회복과 헌정의 실현은 국민정부의 사명인 만큼, 국민정부는 정부조직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를 해왔다. 우리는 린 주석 (충칭국민정부의 국가주석 린썬 (林森)을 의미한다. 명목상으로는 린썬은 국민정부의 최고지도자였지만, 그 실권은 장제스에게 있었다.) 이 하루 빨리 난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난징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중앙정치회의의 결과에 따라 힘 쓸 수 밖에 없다. 국민정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이전과 큰 차이는 없다. 행정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이미 조직의 구성내용을 발표한 바가 있다. 또한 각 방면의 인재를 수용하기 위해, 이번에는 이전보다 부속기관이 좀더 많아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게 많아진 것도 아니다. 두가지 예를 들자면 선전부, 사회부가 있는데, 사회부는 이전의 민중훈련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노동자, 농민, 상인, 학생, 여성 및 각조 민중의 훈련에 관장하는 곳을 사회부라 하였다. 이러한 부처는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두 기관을 추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알다 싶이 이러한 부처들은 이미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민중훈련부와 선전부 두 부처는 이전에는 중국국민당 중앙당 본부에 있었으나 이번에 행정원으로 옮기게 된 것 뿐인 것이다. 따라서 두 기관은 새로 설치된 것이라 보긴 어렵다. 또한 선전부를 행정원으로 옮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전국 인민들이 정책을 이해하고,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대중들을 훈련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예전에는 중앙당에 배치하는 것이 일리가 있었으나, 그 당시에도 백성들은 조금 불편함을 느껴왔다. 예를 들어, 인민들은 훈련하는 일은 당사에 있었기 때문에, 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조직들은 당과 정부 모두와 접촉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는 마치 하나의 벽을 더 만든 것과 같았다. 지금은 정부가 직접 이를 하기에 편리해졌다. 벽이 두 개인것 보다 한 개인 것이 더욱 편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또다른 이유는 중국국민당은 이제 일당독재를 포기하였는다. 하지만 국가 선전을 담당하는 선전부를 아직 당에 둔다면 어떻게 이를 일당독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우리는 선전부와 사회부를 행정원에 두고, 이를 통해 두 정부라는 장벽을 없애게 하고, 한편으로는 일당독재에 대한 의심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예는 과거에는 각종 위원회, 교무위원회, 진무위원회, 변강위원회 등이 존재했는데 이번에는 수리위원회를 새롭게 추가하였다. 수리위원회의 설립은 하지만 기관들을 늘리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기관을 생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전에는 국가는 직속인 황화위원회가 있었고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완전히 닫지 않았던 광동성의 수리위원회는 이전에 재정부에 속하기도 했다. 수자원 관리에 대해 생각해보면, 황허 지역, 장강 지역, 광동의 주강지역, 그리고 회수 지역이 있다. 하지만 이처럼 관리 기관들이 뿔뿔히 흩어져 있게 되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과거이는 이러한 각종 인사, 기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조합하여 국가직속의 수리위원회로 합칠 수 있었다. 이렇듯 수리위원회의 설치는 기관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관을 줄이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싶이, 지금은 수해가 매우 심각하다. 따라서 수리기관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 질문할 수 있다. 왜 수리’부‘라고 하지 않고 수리’위원회‘라고 부르는가? 이는 전국적으로 처리해야할 수해가 너무나 많기에 공동으로 업무를 맡을 위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위원회의 형태를 꾸렸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앞으로 인원들을 더욱 배정하여 이를 처리하게 하려 한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여러개로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의 조직 속에서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선전부, 사회부, 수리위원회의 예를 생각해보면, 많은 기관들이 새로이 생겨난 것같지만 실제로는 추가가 아니며, 오히려 간소화되기도 했다. 또 하나, 우리는 기관을 설립한 후 기관의 경비는 절약하게 하고, 사업비는 늘리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재를 모집하고 사업은 추진해야 하지만 모든 일상 경비는 절약할 수 있는 만큼 절약해야 한다. 국가에 군더더기 기관이 생기고 기관내에서 과도한 경비를 지출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것이다. 지금 나라가 이렇게 위급하고 가난하고, 지방이 분열되고 국민들이 떠돌아다니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시점에 이러한 행동은 받아드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나와 우리는 모든 국민정부의 사람이 청렴하고 용감한 정신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은 첫째, 전국적인 화평을 건설하는 것이고, 둘째, 중화민국 건설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중대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청렴하고 용감하며 힘든일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타개해야 한다. 만약 아무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맡아야 하는 것이고, 인원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더 나은 인재가 있다면 우리는 즉시 물러서서 그가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않을 때 우리는 나서서 책임을 지며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나은 인재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를 받아드리고 이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해군은 너무나 부실하지만, 중국은 해군을 부흥시키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이러한 상황에서도 해군부를 만들었다. 또한 해군부장의 인선은, 일시적으로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임무를 진행하기 위해 각 내각의 예를 본따 내각의 총리가 대행하게 했다. 하지만 인선이 확정되면, 후에 헌명하고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면 유능한 이로 바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우리 동지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 동지들이 감히 말하컨대, 이번 국민정부에서 복무하는 사람 중 그렇지 않은 이는 없다. 예를 들어 군정부 참모본부, 군사삼원 군사훈련부를 현재 맡고 있는 이들은 그 자격과 능력은 모두 적임자이지만, 차차 또 부차적인 지위로 이를 대리하길 바란다. 이는 한편으로는 책임감을 표시하는 일이며, 한편으로는 직위를 능력자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으로 이는 우리 국민정부 요인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또한 사회와 생활이 이렇게 팍팍하여 서민들이 쌀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모든 사업은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또한 국민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솔찍히 말해,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연회와 같은 공식적인 행사를 진행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공식적인 연회를 제외하면 연회를 최대한 적게 가져야 한다. 모두를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선 이런 연회를 가지지 못하더라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지만 정직해질 수 있고, 정직함을 키워야만 용감해질 수 있다.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정직할 수 없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용감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 정부의 동지들은 시시각각 스스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함께 격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국민정부 환도의 중대한 사명을 이룰 수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째는 국민정부 환도의 사명은 화평의 실현과 헌정실시라는 것이다. 둘 째는 우리는 이 화평이 빨리 전국에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셋 째는 기관을 조직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이러한 기관이 있어야만 우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청렴하고 용감하게 일하고 불평하지 않고 백성과 동고동락, 동생공사 하는 정신을 가져야만 국민정부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염전서후 (艷電書後 / 1939.12.2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염전서후 (艷電書後) 염전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작년 오늘, 나는 염전을 발표했고 오늘로 꼭 1년이 되었다. 나는 작년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염전을 다시 읽어보았다. 염전의 중점은 마지막 몇마디에 있다. ”중일 양국의 근린관계에 비추어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선린과 우호관계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지금의 상태는 철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일본과 중국 이 함께 이에 대한 상호 책임을 규명해야한다. “ 중일양국은 수십년간 분쟁을 겪어왔고, 오늘날의 전쟁에 이르게 되었다. 만약 전쟁의 원인이 한편에서는 일본 침략주의에 의한것이고, 한편에서는 중국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에 의한것이라 한다면, 이는 전쟁의 원인이 불분명 해지는 것이고, 이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하는 것이고, 차후의 방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중일 양국이 그 이유를 깊히 생각하여, 각자의 책임을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러한 분쟁과 전쟁상태가 ‘동아의 행복’ 과 ‘태평양의 안전과 질서’ 그리고 ‘세계의 평화보장’에 모두 해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악감정을 해소하고 ‘동아의 행복’ 과 ‘태평양의 안전과 질서’그리고 ‘세계의 평화보장’를 향해 함께 노력하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 말로 중일 양국이 선택해야할 백년의 대계다. 화평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점에 대해 깊이 인식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평운동을 할 수 없다. 화평운동의 의의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를 참고하고, 지난 1년간 중일 양측의 여론에 대해 살펴보자.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중일관계를 재검토하여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고노에 성명 이후 전국의 여론은 더욱 일치되고 있다. 동아협동체란, 그 정의와 방법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고노에 성명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본은 중국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임무를 분담하기를 바란다 “ 라고 밝힌 것처럼, 중국은 능력이 있어야만 그 임무를 분담할 수 있기에, 일본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독립을 지원하여 그 임무를 분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라는 기본적 의미는 일본정부의 성명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잡지나 신문에서 이에 대해 여러 표현을 사용하지만 대체로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 여론이 이렇게 된 것은 화평운동의 큰 진전이다. 중국측에서는 일부에서 끝까지 항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어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이는 압력에 의해 어쩔수 없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압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진실된 여론이 나왔다. 이들은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 정신의 진면목을 근본적으로 보아 중국은 반드시 일본과 손을 잡아야만 내적으론 중화민국의 건설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고, 외적으론 동아의 보장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화평운동의 큰진전이 아닐 수 없다. 이상의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화평운동의 이론이 이미 성숙되었다고 열렬하게 믿는다. 화평운동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오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화평원칙을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화평안은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 이러한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감과 상호신뢰의 각오로 충분히 용기를 내어 진행한다면 모든 어려움을 뚫고 모든 가시밭길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끝까지 항전하여 승리를 쟁취하자는 제군들에게 할 말이 몇마디 있다. 제군들의 이런 말은 솔찍하지 않고, 최후의 승리는 막막하다는 것은 제군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먼저 국제정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제군들은 예전에 전선론의 말을 믿고, 반침략연합전선은 필연적으로 결전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결전하면 반침략연합전선은 필연적으로 승리하고, 승리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중국을 돕고 일본을 막게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중국이 끝까지 항전하기만 하면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막연한 논거는 우리는 일년 전에 이를 몇 번이나 반박했는지 모른다. 유럽전쟁이 발생할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사실로 증명되었으니, 더 이상 우리는 이에 반박팔 필요가 없다. 제군들에게 반침략연합전선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소련은 이미 제군들에게 침략 전선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독일과 연합하여 폴란드를 협공하였고, 소련은 핀란드를 향해 진격하였다. 제군들이 가정한 침략전선 대 반침략전선이라는 개념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공허해진 것이다. 이때 유럽의 교전국들은 모두 자신을 위하고 다른 국가를 돕지 않았다. 유럽의 교전국들과 관련해 중일전쟁은, 일본이 유럽전쟁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달려있다. 만약 일본이 자신들 (유럽의 교전국들) 에게로 기운다면, 이들은 당연히 일찌감치 화해를 하여 일본이 자신들의의 적을 물리칠 수 있게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아직 결정짓지 못하거나 한다면? 중일의 병사들이 연달아 싸우게 하고 일본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 자신들의 적 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속셈은 분명하다. 본래 각자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제군들이 이야기하는 ‘원조’라는 것은 또 허무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유럽전쟁에서는 누가 이기게 될 것인가? 장래의 패자는 누구인가? 지금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확실하다 할 수 있는가? 양측의 군사력, 해군력, 잠수함 능력, 공군력, 경제력에 대해 논하는 것, 어떤 방면이 오래갈 수 있을 것이고 어떤 방면이 오래갈 수 없을 것인가에 논하는 건 가능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순 없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독일 혁명은 역사적 추세로 미루어 그 가능성을 단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 발생하는지, 그것이 반드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군들이 가정한 승자는 막막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제군들의 가정대로 장래의 승자가 제군들이 바람대로 된다 한들, 과연 그들이 중국을 원조할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원조가 효과가 있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이뤄진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 중국은 얼마나 실망했던가? 워싱턴회의와 그 속에서 만들어진 체제는 만주사변 문제 해결에 어떠한 해결을 했는가? 중국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제군들이 가정한 원조라는 것 또한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제군들은 항전을 통해 최후승리를 하고, 이후 국제원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막연한 생각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군들은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나라를 충실하게 도모하는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국내 정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년동안 또 얼마나 많은 사단을 잃었고 얼마나 많은 땅을 잃었던가? 물론 이는 슬퍼해야할 일이지만, 가장 슬픈 일은 작은 승리를 과장하여 대패를 감추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작은 승리는 결정적인 승리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를 장황하게 과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러한 행동이 인민을 속이기 위한 것에 있다면, 이러한 마음은 더더욱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규모 반격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고, 초토전, 게릴라전은 효과적이긴 커녕 소란을 피울 뿐이다. 그대들은 이러한 전략이 효과는 적고 소모하는 것이 많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국력은 백성의 힘에서 비롯되고 백성의 힘은 소진되면 국력도 함께 소진된다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백성과 국력을 소진하는 이러한 방법이 어떻게 끝까지 항전하는 전법인가? 이런 전략속에선 최후의 승리는 불가능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제군들 중 일부는 심지어 민족자살정책을 가지고 있으며, 나라가 망할 것이라 확신하면 차라리 동귀어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라의 상태가 만약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제군도 죽기보다는 나라를 구하는 것을 우선시 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오늘 구국을 위해 죽어야하지, 순국만을 위해 죽어선 안된다! 위의 국내외 정세는 내가 염전에서도 지적한 바로, 이는 오늘에 이르러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중국은 이제 화평 이외의 길은 존재하지 않고, 화평원칙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화평안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의 문제만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많은 이들이 화평은 원하지만 화평원칙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평안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사람 중에는, 화평의 원칙이 실현되고 화평안이 완성된다면 그때 와서 화평에 찬성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전국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신해혁명 이전에는,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서야 혁명에 찬성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혁명에 한성한 이들 중 10명 중 9명은 혁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화평이 성공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화평에 찬성해도 늦지않다고 주장하는 이는 화평을 방해하려는 파양자로 예단할 수 있다. 어째서인가? 이는 혁명에 비해 화평이 가지는 중대성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은 국내 개혁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화평운동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과 일본이 반드시 손을 잡은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일본과 손을 잡아야만 내부적으로는 중화민국의 건설 완성을, 외부적으로는 동아보장의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는 신해혁명보다 더 큰 대업인 것이다. 우리는 화평만이 필요하고 가능하다 인정한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걸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분투해 나가야한다. 비록 잠시 넘어지거나 실패하더라도, 오늘의 실패와 실수는 미래의 성공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이는 나에게 ”당신은 구체적인 화평조건을 얻어야만 화평운동을 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면 구체적인 화평조건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나, 구체적인 화평조건을 얻는 것은 그 전제로 화평운동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평조건을 얻은 후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화평운동은 필요한 것이다. 특정한 화평조건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화평운동이 용감하게 전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는 국가의 축복이 될 것이다. 이는 순간순간 실패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미래의 화평을 위한 씨앗을 남기는 일이 된다. 왜냐면 중일양국은 공존공영하기 위해서는 결국엔 이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한다. ”항전을 위해 죽으면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질 것이고, 화평을 위해 죽으면 악명만 남게 될 것“ 이라고. 이는 참으로 한가로운 소리라 할 것이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몇천몇백만 동포들의 시체가 이곳에 쌓여있는 이 현실을 보라,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한가하게 자신을 위한 생각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나는 옛 일을 기억한다. 내가 경수년 3월 (왕징웨이가 순친왕 재풍(載灃)을 암살하려 했던 1910년 3월을 의미한다.), 베이징에서 체포되었을 때, 경찰은 내몸에서 ‘혁명의 결심’ 이라는 글을 찾았고, 이에 대해 내게 ”이런 글을 가지고 뭘 하려 하느냐? “ 라고 물었다. 이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글은 이전에는 잉크로 썼는데 이제는 피로 쓰고 싶을 뿐입니다. “ 라고 . 나는 오늘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충칭을 떠난 쩡중밍 동지와 나에게 먼저 충칭을 떠나라고 이야기한 선쑹(沈崧) 동지가 생각난다. 앞서 떠나간 동지들을 생각하니 아직도 인간세상에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앞으로 나의 남은 열정을 모두 화평운동에 공헌할 것을 맹세한다! 염전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중일전쟁 5주년의 감상 (七七五週年感想 / 1942.7.7)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중일전쟁 5주년의 감상 (七七五週年感想) 대동아전쟁이 일어난지 반년이 넘었다. 하지만 전면적인 화평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일본은 대동아전쟁 이전에 이미 동아신질서 건설의 의미를 설명하여 공산주의의 방지와 영미의 경제침략 배제에 기여하였다. 충칭쪽은 이가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대동아전쟁의 발발이후 이는 이미 사실이 되었다. 충칭은 이를 반성해야하지 않겠는가? 동아 전체에서, 국민정부와 만주국은 이미 일본과 협력하고 있고, 태국과 일본은 작전을 함께 수행하며 싸우고 있고, 이를 통해 동쪽에서는 필리핀이, 남쪽에서는 영국과 호주의 속주들이, 서쪽에서는 버마까지, 각 민족은 영미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도 독립의 기세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정부는 나아가 인도의 독립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보았을 때 동아 전체는 어떤 면에서 보아도 대동아전쟁 협성(協成), 대동아전쟁 완수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충칭은 이러한 흐름속 구석에서 어찌 혼자 있으려고 하는 것인가? 최근의 충칭의 신문들을 보면, 이들도 이미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화평구역의 치안과 민생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이를 받아드리지 않고 있을 뿐이다. 물론 화평구역 안에서도 치안확립과 민생의 개선은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나날이 개선되고 있다. 이는 충칭측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치안과 민생이 확립되지 못한 것은 모두 전면화평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면화평을 방해하는 자들로 인해 국가와 인민의 고통은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해소하려면 전면적인 화평의 방해요소를 제거해야한다. 나는 7.7사변 5주년을 맞아 특별히 다음과 같이 몇가지 사안을 정중하게 제안하는 바다. 첫째 :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 유촉을 근본정신으로 확립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대동아전쟁, 즉 대아시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해야한다. 둘째 : 우리는 대동아전쟁에 협력해야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는 빈말로 그쳐선 안된다. 우리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정신력과 물자로서 대동아전쟁에 공헌해야 하고, 농공업에 있어서 계획적인 생산정책을 실시하여 우리의 국력과 민력을 나날이 증진시켜야한다. 우리는 협력을 통해 대동아전쟁을 순조롭게 수행할 수 있게 해야하고, 우리 국가민족이 대동아전쟁의 승리로 해방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셋째 : 우리는 전면적인 화평을 실현하는 것이 대동아전쟁의 협력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한다. 충칭방면에서도 소수의 반동분자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화평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들과 이심전심하여 그 억압의 속박과 고통을 해소하고 화평진영에 적극 참가할 수 있도록 하며 전국적으로 물자와 정신력을 집중하여 대아시아주의의 실천에 종사할 수 있게 해야한다. 민국 27 (1938) 년 12월 29일, 내가 보낸 염전이 충칭측에서 받아드려졌더라면, 민국 28 (1939) 년 9월 유럽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일 양국은 같은 걸음으로써 세계전쟁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 속에서 일본은 순조롭게 발전하고, 중국도 원기를 회복하여 더욱 발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충칭은 나라의 원기를 착취하고 또 착취하고, 인민의 생활을 질식시키고, 또 질식시키고 있으니, 이제 거의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만약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게된다면, 아마 다시는 회복할 희망을 얻을수 없게 될 것이다. 충칭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 신속한 반성을 할 것을 촉구한다.

  • " 화평, 분투, 중국을 구하자!" 의 정신을 키우자 (1940.3.12)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화평, 분투, 중국을 구하자!" 의 정신을 키우자 (「和平奮鬥救中國」的心理建設) ”화평, 분투, 중국을 구하라!“ 손중산 선생 서거때의 외침이다. 이 외침은 영원히 우리의 귀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그리고 손중산 선생의 서거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손중산 선생의 마지막 외침은 더욱 울려퍼지고 있다. 손중산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의 환경은 어땠는가? 우선 우리는 당시의 국제환경을 생각해보자. 국제연맹은 민국 9 (1921) 년 설립되었고, 9국 공약 (九國公約) 은 민국 11년 (1923) 년 성립되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세계 평화, 특히 동아의 평화가 충분하다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손중산 선생은 만족스럽기는커녕, 절때로 믿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손중산 선생은 국민혁명의 목적을 설명하고 , 국민혁명의 목적이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구하는 것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중국이 차식민지 지위에 있음을 지적하며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손중산 선생께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소정책을 펼쳤고, 연소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단해 일본과도 함께 공동노력을 펼치려 했다. 손중산 선생은 북상할 때 특히 일본을 들러 ‘대아시아주의’를 설파하고, 일본 국민과 중국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동아민족의 부흥을 도모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기를 희망했다. 당시의 국내환경을 보면, 온 나라가 군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광동은 혁명의 근거지였으나 광동의 동쪽, 서쪽, 북쪽 모두 반혁명세력의 근거지가 있었다. 광저우의 입장에서 볼 때, 광저우 밖은 물론 광저우 내에도 반동분자들이 반혁명세력들과 호응하고 있었으니,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손중산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북상하여 국민회의 개최를 부르짖으며 모든 군벌세력, 반혁명세력과 맞서 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화평, 분투, 중국을 구하라!“ 임종때의 이 외침은 손중산 선생의 평생 포부와 무궁무진한 열정, 용기를 나타낸다. 무릇 동지가 되려는 이라면 이러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중국의 국제환경과 국내환경은 손중산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와 비교하면 더욱 어려운 ‘신주육심 (神州陸沈) (나라가 침략을 받아 망함.) , 생민구허 (生民丘墟)’ (민생이 폐허가 되어버림.)의 상황에 있다. 하늘의 영이 되어버린 손중산 선생은 이러한 중국의 상황을 보고 얼마나 비통해하겠는가? 어찌 비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야기한다. ”지금 손중산 선생이 살아게셨다면 대아시아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중일 양국이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는 지금 대아시아주의라니, 이는 꿈같은 소리다.“ 라고. 하지만 나는 손중산 선생의 가르침과 유훈에 대해 찾아보며,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가 지울 수 없는 진리라고 느꼈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일본이 없으면 동아가 없고, 중국은 비록 낙후되었으나 나라의 위상과 민족성을 고려했을 때 중국또한 마찬가지로 없으면 동아가 없게된다.. 따라서 두나라는 평화롭게 공존공영해야하는 것이지, 전쟁으로 싸우게 되면 양쪽 모두가 망하게 된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진리다. 전쟁이 없을 때도 이를 이야기해야하고, 전쟁이 있을 때는 특히 이를 이야기 해야한다. 이는 일시적인 싸구려 술책이 아니다. 불멸의 진리다. 우리는 오직 진리에 따라야만 무궁무진한 열정과 용기를 내어 이 책임을 질 수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물론 안심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민국 13 (1924) 년 11월 손중산 선생이 일본 고베를 돌며 대아시아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많다. ‘중국의 독립과 자유를 돕는 국가건설’, ‘동아부흥’ 등의 구호는 전쟁중의 일본에서 먼저 외쳤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권모술수이며, 설탕발린 독과 같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일본쪽에서 먼저 그러한 외침이 나온 이상, 우리 중국쪽에서도 이에 공감하는 자세를 보여야한다. 함께 힘을 모아 함께 나가면 전쟁의 불운을 없애고 화평,공존,공영의 낙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의 앞길에 가로놓인 장애는 없는가? 아쉽지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손중산 선생이 그날 국민회의를 제창한 정신으로 이러한 장애를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어둠속에서는, 오직 공명정대한 정신과 수단만이 이러한 장애를 몰아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을 기리며, 손중산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 ”화평! 분투! 중국을 구하자!“

  • 어떻게 화평을 실현할것인가? (怎樣實現和平? / 1939.8.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어떻게 화평을 실현할것인가? (怎樣實現和平?) 동포 여러분, 지금 나는 광저우에서 그대들을 위해 방송하고 있다. 비록 내 눈에는 당신들이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그대들과 함께 있다. 이제는 몸도 그대들과 함께다. 이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벅차오르고, 말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는 것이다! 7월 9일, 나는 일찍이 《중일 관계에 대한 나의 근본 관념 및 전진 목표》라는 제목의 방송을 한번 한적이 있다. 당시 나는 방송을 한 장소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가 일본 점령지에서 자유를 잃었을 것이라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작년 12월 29일, 통전을 발표한 이후 하노이를 한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장제스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여 나의 건의를 받아드리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나는 몇 개월을 기다렸으나 그 바램은 이제 헛수고였음을 알고 나라와 민족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동하면서, 나는 남의사에게 내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려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그 때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왜 나는 일본 점령지에 가면 안되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 중에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하나는 전방, 후방, 점령지, 외국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두가지의 선택지가 더 존재한다. 하나는 상하이, 톈진과 같은 조계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노이, 홍콩과 같은 외국의 식민지다. 나는 결코 이 두 곳에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 곳으로 온 이의 목적과 그의 행동과 발언만을 신경쓰면 된다고 보았다. 만약 그의 목적이 전방과 후방, 그리고 점령지의 민중을 시시각각 구출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의 노력은 조금도 비판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가 외국 제국주의 세력 아래서 찬물을 끼얹는 말을 가한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경멸할 것이다. 전방, 후방의 민심은 어떠한가? 화평은 희망이 없으면 함께 망하는 것이다. 화평에 대한 희망이 있고, 화평의 조건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에 해가 없다면 왜 화평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장제스와 공산당의 압박 아래서 “화평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간” 이 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이러한 압제 아래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어나갈 때까지 휘둘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를 해결하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 전방과 후방의 민중을 해방시킬 수 밖에 없다. 점령지의 민중은 어떠한가? 그들의 마음은 전방, 후방의 민중들의 마음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마음도 그렇고 몸도 그렇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화평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란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화평이 희망적이라면, 화평의 조건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에 해롭지 않다면 당연히 화평을 말하고, 어떻게 화평을 이룰것인지에 대해 열렬히 이야기한다. 광저우의 경우, 작년 10월 전까지 당국은 인민들을 안심시킨다는 이유로 절때로 일본군이 광저우에 올 수 없음을 이야기했다. 이는 10월 초순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었을 때, 당국은 군대를 이끌고 먼저 철수하고, 함께 피난가려는 민중들을 내쫓았다. 또한 떠날 때는 불을 질러 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는 광저우 사람들이 후방이라는, 전방이라는 위치에서 겪었던 일이다. 남겨지고 화재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관해 당국은 그저 그들이 완전히 죽지 않거나 완전히 불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며 미워할 뿐이었다. 비적들은 또한 끊임없이 사주하여 유격이라는 명목으로 약탈과 공작을 계속하였다. 이는 광저우 민중이 점령지의 위치에 있을 때 겪은 고통이다. 당국은 왜 그랬을까? 이는 장제스의 명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왜 그랬을까? 공산당의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생에 대한 대가는 없었는가? 처음 불태웠을 때는 일본군이 오는 걸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탄 이후에는, 일본군이 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인민을 불태워 죽게하고, 인민의 생명이 달린 재산을 파괴한 것 뿐인 이 불태우는 행위가 도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광저우만 불타버린 것이 아니었다. 당국은 우한을 떠날때도 똑같이 불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명령을 받드는 이들이 차마 완전히 태우지 못해 우한은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국은 창사를 버리기 전에 미리 완전히 태워버렸고, 이는 미래의 충칭과 청두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규모 소각행위와 더불어, 비적들의 유격대를 동원하여 단편적으로 행해지는 소규모 소각행위들은 전국의 기와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화평이 희망이 없어 죽게 된다면, 이에 대해 할말은 없다. 하지만 화평에 희망이 있고, 그 조건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째서 민중을 계속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가? 이러한 외침은 전방과 후방의 민중은 입을 다문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지만, 점령지의 민중들에서는 이미 나왔다. 내가 왜 일본점령지까지 갔는가? 나는 이러한 외침에 응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침을 전방, 후방의 외치고 싶지만 막힌 채 터져나오지 못하는 외침과 합치려 하는 것이다! 내가 두 번째 묻고 싶은 것은, 내가 점령지에 가면 왜 내가 자유를 잃게 될것이라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도 일본은 나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지 않다. 나는 결심을 하고 이곳까지 왔다. 혹시 “삼군을 통솔하는 장수라도 포획하여 탈취할 수 있지만, 필부라 해도 그 의지를 뺏을 수는 없다 ”라는 말을 모르는 것인가? 나는 죽어도 단지 죽을 뿐이지 결코 자유를 잃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항상 나의 목숨과 동포의 생명을 바꾸고, 나의 자유와 동포의 자유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질문은 끝이났으니, 이제 화평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같지만, 사실은 매우 간단한 문제다. 장제스가 국가와 민족을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손중산 선생의 ‘대아시아주의’유촉을 지키고, 일본의 화평성명을 받아드리기만 한다면, 전국적인 화평은 즉시 실현될 수 있고, 화평 협상은 바로 시작될 수 있다. 화평회담에서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협력등 각종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원칙에 따라 구체적인 조건을 모색하는 절충과정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것이기에, 전국이 갈망하는 철군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보다 크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코민테른의 국제적 지휘를 받는 공산당에 국익과 민족의 이익을 바치고 시안사변을 그저 자신을 구하고 자신을 구호하는 보상품과 같이 믿고 있다. 화평에 희망이있고, 화평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에 무해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는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 화평 실현에 큰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평의 거대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방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간단한 것이다. 전방과 후방의 행정당국과 군대를 거느린 자들은 화평에 희망이 생겼고 그것이 독립과 자유에 무해하다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의 기만과 선전을 타파하고 장제스의 탄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첫째, 공개적으로 화평에 찬성하고, 자신의 힘이 닫는 곳에서 공산당의 모든 음모를 분쇄하고, 지방의 치안을 보위하며, 인민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전하고 있다. 둘째, 화평연대에 찬성하여 공개적으로 장제스가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하고 화평을 저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화평의 실현은 단기간에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다. 화평의 실현으로 독립과 자유가 회복되고, 독립과 자유가 회복되면 공동의 생존과 공동의 발달 토대가 마련할 수 있다.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부흥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이렇게 화평의 뜻을 표했는데, 일본군이 공격하게 되면 화평은 물거품이 되고, 이를 행하려는 군심도, 인심도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전방, 후방의 행정당국, 그리고 군대를 거느린자들이 화평 찬성, 반공에 대해 의사를 명확하게 표시한다면 일본군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의 정중하고 분명한 답변이다. 일본정부는 이미 중국으로 하여금 중국의 부흥과 동아의 부흥이라는 책임을 분담하는 동지가 되어 시국을 수습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군은 결코 우리의 화평반공의 장소와 군대를 향해 공격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광저우에서 안도 (안도 류키치 (安藤利吉) 제21군 사령관을 의미, 이후 안안도 류키치는 남지나방면군사령관이 된다.)  최고지휘관과 만나 어떻게 화평을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결과로, 만약 광동쪽의 중국군이 화평반공의 표시를 한다면, 안도 최고지휘관은 반드시 우호적인 고려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일을 성취할 수 있게 하겠다고 확언했다. 군대에 대해 공격을 즉각 중단하는 것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곳과 모든 치안 경비, 행정과 경제를 일본군으로부터 중국측으로 차례차례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용기를 내어 공개적으로 광동측의 행정당국과 군대가 나의 화평주장에 찬성해주길 바란다. 광동측이 화평에 나서게 되면, 나는 반드시 최고지휘관의 동의를 얻어 광동에서 먼저 일부 화평을 시작하고, 이후 이를 전국으로 확장시켜 전국의 화평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특히 광저우의 경우, 최단 기간 내에 광저우시를 다시 광저우 시민들의 손에 돌려줄 수 있게 될 것이며, 광저우시를 작년 10월  보다 더 질서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대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동포들이여, 이 방송을 들은 후엔 내가 이야기한 화평이 실현될 수 있으며, 화평의 조건은 국가의 독립과 자유에 무해하다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언젠가는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그저 함락된 지방의 민중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그대들은 이전 전방과 후방의 책임을 다했고 많은 고통과 희생을 견뎌내었다. 장제스는 그대들을 잃은 후에도, 그대들에게 온갖 악명을 붙여 그대들이 죽지도 않고 다 불타버리지도 않은 것에 대해 미워하여 게속하여 그대들을 불태우려 하고, 계속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장제스는 일본의 적이 아니라, 중화민국의 적이요, 중화민국 민중의 적이다! 장제스는 오늘날 화평의 유일한 장애물이 되었다. 이 장애물을 제거해야지만 온갖 악명을 씻고 중국 부흥의 주춧돌, 동아부흥의 주춧돌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동포들이여, 내가 이 담화를 방송한 뒤, 장제스가 필연적으로 각 전방, 후방의 행정당국과 군대를 이끌고 있는 이들을 압박하여 연명으로 전보를 쳐서 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믿는다, 화평의 조건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에 무해하고 부흥의 기초가 될 수 있는한, 나는 그 누구도 화평의 실현을 방해할 수 없다고!

  • 중일동맹조약 / 일화동맹조약 (中日同盟條約 / 日華同盟條約 , 1943. 10.30 )

    난징 국민정부 대례당에서중일동맹조약에 서명하는 왕징웨이. (1943.10.30) 일화동맹조약 (왕징웨이측에서는 중일동맹조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은 1943년 10월 30일 일본제국와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정식명칭은 '일본국-중화민국간동맹조약 (日本國中華民國間同盟條約)' 이다. 우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조약의 목적이다. 일화동맹조약의 목적은 1940년 11월 30일 체결된 일화기본조약 (日華基本條約) 를 대체하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과 왕징웨이측은 이 중일기본조약을 대체하려고 했을까? 일화기본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이전에 이야기 했지만, 일화기본조약의 내용은, 1940년 새롭게 수립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일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일화기본조약의 체결로부터 3년가량이 지난 1943년, 양측은 이 일화기본조약을 대체할 신조약, 즉 신관계를 규정하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이는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1940년의 난징국민정부와 1943년의 난징국민정부가 처해있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고, 둘째는 1940년 일본의 對 난징국민정부 정책과 1943년의 對 난징국민정부 정책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왕징웨이의 정권의 위치가 향상되고, 일본의 정책이 변화한 결과였다. 일화기본조약을 서술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일화기본조약의 틀은 왕징웨이정권의 이전부터 사실 구상되어 있었다. 일본은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수립 이전부터 일본과 새롭게 세워질 국민정부가 수동적인 관계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조약의 체결을 재촉했던 쪽은 일본이 아닌 왕징웨이측이었다. 이는 당시 새롭게 수립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는 일본의 지지라도 얻어내야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정권이 정통 국민정부임을 표방했지만, 경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단이 아직 일본군의 수중에 있는 상황이었고, 또한 일본 조차 아직 자신의 정권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하면 왕징웨이는 지지도, 정부의 운영도 곤란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관계를 빠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으로 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중앙정권' 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완전한 국가대 국가의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경제 및 수단들을 다시 되찾아 자신의 국민정부를 제대로 작동시키려 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징웨이측에서는 일화기본조약이 자신의 구상과는 일치하지 않는 면이 많다고 할지라도, 이를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다. 본래 왕징웨이측은 일본과 자신의 난징국민정부의 관계를 구상하면서, 자신의 정부에 포함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화북의 화북정무위원회와 몽강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또한 동시에 만주국 문제도 해결하여, 만주국을 최대한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정의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이러한 왕징웨이측의 조건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왕징웨이는 이러한 일본의 모습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43년의 난징국민정부와 일본은 이전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일화기본조약 체결 후 시간이 지나며 정부가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아가면서 꾸준히 여러방면에서 영향력을 높히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러한 결과는 산업, 군사를 비롯한 여러 시설의 반환, 군사를 비롯한 여러 장비의 지원, 경제부분에서의 불평등 일부 해소로 이어졌고, 신국민운동의 실시를 통한 내부적 이데올로기운동의 실시, 동아연맹운동이라는 대외적 이데올로기의 생성, 동아신문기자대회와 같은 공영권 내에서의 국제대회 개최경험은 난징국민정부의 국력상승, 공영권 내에서의 영향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전쟁을 지속해야하는 일본에게 있어 국민정부는 중국대륙이라는 가장 큰 자원공급처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국민정부의 중요성은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 1943년의 시점에서 난징국민정부는 이제 1940년의 왕징웨이 자신이 원했던 명실상부한 중국의 유일한 '중앙정권' 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주도의 공영권 안에서라는 한계는 존재하지만) 신국민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동아신문기자대회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1943년 1월 9일,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정식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 난징국민정부의 참전은 왕징웨이측이 재촉한 것이 아니라, 일본측에서 재촉한 것이었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전쟁에 끌어드리기 위해 1942년 12월 21일 '대동아전쟁완수를 위한 대지나처리근본방침 (大東亞戰爭完遂ノ爲ノ對支處理根本方針) ' 를 설정했다. 이 방침에서는 조계의 회수를 비롯하여 치외법권의 폐지등 이전 존재 했던 여러 불평등요소를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참전으로 이끌어 내려면 이제 이전과 같은 불평등요소를 유지한 채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이러한 불평등요소의 존속은 충칭과의 경쟁을 하고 있는 난징을 지원하고 있는 일본에게도 있어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즉, 난징국민정부가 태평양전쟁에 정식으로 참전하게된 이상, 일본은 이제 전쟁을 함께하는 공영권 내의 가장 큰 동맹국중 하나인 난징국민정부를 이전의 그저 점령지정권으로 바라보던 것과 같은 대우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난징국민정부의 참전과 동시에 이루어졌던 일화공동선언 (日華共同宣言) 과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 (租界還付及治外法權撤廢等ニ關スル日本國中華民國間協定) 과 같은 조치들은 이러한 일본의 왕징웨이 정권에 대한 인식과 정책 변화에서 나타난 조치였다. 일화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조계환부및 치외법권 철폐등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 간 협정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나아가 일본은 1943년 4월 새롭게 취임한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 葵) 외무대신은 이름바 '대동아정책' 에 대한 정책 대전환을 꾀하면서, 이전과 다른 점령지 & 협력정권 정책을 취하려고 했다. 이전의 점령지 & 협력정권 정책이 일화기본조약에서도 언급되었던 '수동적' 위치를 가지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정책은 공영권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을 일정 부분 존중하고 이전보다 높은 차원의, 어느정도의 자유를 부여하는 모습을 띄게 했다. 이러한 정책 대전환은 전세가 역전되어 불리한 상황에 처한 상황에서 대서양선언과 같은 연합국의 사상공세에 맞서 진정한 '대동아공영권' 의 형태를 띄게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1943년, 급박하게 '대동아공영권' 의 형태를 갖추려 움직이기 시작한다. 1943년 5월 29일 '대동아정략약지도대강(大東亜政略指導大綱)' 를 통해 군정 상태에 있었던 필리핀, 버마(미얀마) 가 독립할 수 있게 한 것, 대동아회의 (大東亞會議) 를 개최한 것도 이러한 정책 변화의 일환이었다. (일화동맹조약의 체결과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일주일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 이러한 정책변환의 대상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3년 7월 31일, 일본과 난징국민정부는 '중화민국에서 일본국신민에 대한 과세에 관한 일본국중화민국간 조약 (中華民國ニ於ケル日本國臣民ニ對スル課税ニ關スル日本國中華民國間條約) ' 을 체결하며 난징국민정부의 관세를 비롯한 과세자주권을 회복하게 한 바 있다. 중화민국에서 일본국신민에 대한 과세에 관한 일본국- 중화민국간 조약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이렇듯 일화동맹조약은 왕징웨이 정권의 위치 향상과 일본의 정책변환이 맞물린 결과였다. 왕징웨이측은 자신의 정권이 이전보다 역량도 성장했고 태평양전쟁에 참전까지 하게된 만큼 이전과 다른 대우를 받기를 원했고, 일본측도 난징국민정부의 참전을 얻어내고, 충칭과의 경쟁에서 난징이 우위에 서게 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은 불평등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이제는 전쟁의 동맹국이 된 중일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충칭과의 경쟁에도 유리하다 생각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이전과는 다른 틀에서 바라보기를 희망한 결과였다. 일화동맹조약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일화동맹조약 체결의 목적은 일화기본조약을 대체하는 것에 있었다. 1943년 3월 15일,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난징을 방문했다. 난징국민정부의 대영미 선전포고에 대한 답례이자, 1942년 12월, 왕징웨이가 태평양전쟁 발발 1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례였다. 이 자리에서 왕징웨이는 도조에게 화북정무위원회의 해체, 화평건국군에 대한 지원등을 비롯한 여러 불평등조치의 해소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했다. 1943년 4월에는,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천궁보도난징국민정부가 참전한만큼,  화북으로부터의 철병이나 일화기본조약의 폐지 등도 이를 계기로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3년 4월 14일,   당시 국민정부 대사였던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 葵) 는 '기본조약에 관한 문제 (基本条約ニ関スル問題) '를 작성하여 이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 문서에서 시게미쓰는 지금의 국민정부는 단순한 정부가 아니라 일본이 승인한 자주와 독립의 정부이자 전우라며 난징국민정부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고 여러 불평등 조치를 해제하고 있는 만큼, 기존의 일화기본조약도 폐지하고 이를 대체할 신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4월 18일, 이러한 구상을 토대로 시게미쓰는 '일화동맹조약' 을 제안했고, 4월 20일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시게미쓰는 5월 13일, 취임 후 첫 천황 알현과정에서 자신의 이러한 일화동맹조약 구상을 쇼와 천황에게 설명했고, 쇼와는 이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천황의 찬성속에서, 시게미쓰는 일화동맹조약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대동아정략약지도대강(大東亜政略指導大綱)의 논의과정에서도 시게미쓰는 일화동맹조약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5월 21일부터 시게미쓰와 일본 외무성은 일화동맹조약의 구체적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난징국민정부측의 요구와 이를 반영하려는 듯한 일본 정부의 움직임에 당시 수많은 병사를 중국대륙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 육군은 반발이 컸다. 육군은 정부가 난징국민정부에 이전과 다른 사실상의 평등을 부여해버리게 되면, 자신들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6년동안 흘린 피는 그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앞에서 보았던 이유등으로 조약의 체결만이 오히려 수렁에 빠진 중일전쟁의 해결책이 될것이라며, 충칭측이 항전을 포기하게 하거나 일본측과 협상을 할 수 있게 하는 카드가 될 수 있다 보았다. 이러한 육군의 반대속에서도 도조 히데키는 결국 시게미쓰 마모루의 주장을 받아드려, 일화동맹조약의 체결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8월 6일에는, 외무성, 육군성, 해군성, 대동아성 4개성은 일화동맹조약의 구체적 안을 논의하기 위해 공동연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과정에서도 지나방면군을 비롯한 육군측은 논의 과정에서 반대의 뜻을 여러번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서 도조가 일화동맹조약의 제정에 찬성을 표한만큼, 육군 중앙은 이러한 조약체결에 어쩔수 없이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조약 체결에 반대를 표한 쪽은 지나파견군을 비롯한 육군 중앙이 아닌 현지 사령부측이었다. 해군측도 이러한 일화동맹조약에 대해 미지근한 측면을 보였지만, 육군보다는 덜한 모습이었다. 반면 대동아성은 이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러한 공동연구의 끝에, 1943년 8월 28일에는 4개성은 '일화기본조약개정요강안 (日華基本條約改訂要綱案)' 을 도출해낸다. 이는 본래공동연구 과정에서는 9월 15일 쯤에 끝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더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연구의 결과인 일화기본조약개정요강안을 시게미쓰는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4성의 연구결과로 도출해낸 안이 난징국민정부가 받아드리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불평등의 요소가 아직 남아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았듯 군부측은 이러한 일화동맹조약안에 대해 완전한 동의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은 자꾸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시게미쓰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조약안이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철병과 관련된 내용이 육해군측에 유리하게, 기존의 것과 거의 다름 없게 서술되었다. 이에 시게미쓰는 이 4성의 연구결과로 도출된 일화기본조약개정요강안을 각하한다. 시게미쓰는 이에 '일본국-중화민국간 동맹조약 (日本國中華民國間同盟條約)' 이라는 일화동맹조약의 새로운 안을 제안했다. 시게미쓰의 안에서는 4성이 공동으로 제출한 안보다 더욱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고 더욱 적극적으로 불평등을 폐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시게미쓰의 움직임에 공동연구를 했던 4개성, 특히 육군, 해군은 반발이 컸다. 이에 1943년 9월 18일 개최된 연락회의에서 도조는 육군성, 해군성, 외무성, 대동아성의 의견일치가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대동아성도, 육군도 해군도 이러한 시게미쓰의 모습에 반대를 표했지만, 정부는 시게미쓰의 편을 다시 한번 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화기본조약개정조약체결요강 (日華基本條約改訂條約締結要綱)' 을 을 결정하여, 신조약에서는 일화기본조약에서 언급되었던 일본군의 주둔, 철병과 관련된 부분등은 신조약에서 새로운 조항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화북 문제처리에 대해서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기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43년 9월 20일의 연락회의에서 도조 내각은 시게미쓰의 안을 정식으로 채택하여 시게미쓰의 일본국-중화민국간 동맹조약 (日本國中華民國間同盟條約) 안을 토대로 하는 일화동맹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왕징웨이 측의 신문 용보(庸報, 톈진의 신문) 에 중일동맹조약의 체결을 축하나는 문구. 이러한 일화동맹조약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난징국민정부측은, 이의 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화기초조약의 모습이, 왕징웨이측이 조약의 체결을 일본측에 '구걸' 하는 행태의 모습이 보였다면, 일화동맹조약의 경우, 그 반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일화동맹조약의 경우, 왕징웨이측이 일본에 조약의 체결을 '압박'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당시 일본이 놓여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이라는 수렁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943년의 시점에서부터는, 중일전쟁에서의 전선유지로 인해 부담이 너무나 커졌고, 이때문에 태평양방면에서의 전쟁이 어려워질 정도였다. 따라서 이렇게 대륙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게 된다면, 일본측의 전쟁 수행은 더더욱 어려워 지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수 있는 어떤 선택지가 남아있는가? 첫 째, 전쟁 초기 있었던 트라우트만 공작과 같은 제3국을 통해 중일전쟁을 마무리 짓는 일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태평양으로까지 확산되어 말 그대로 전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태평양으로 확산 시킨 일본을 위해 이러한 평화교섭을 하려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둘 째는 일본이 장제스측과 직접적으로 교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38년 1월, 제1차 고노에성명을 통해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 라고 한 일본이었고, 동 공작을 비롯한 이후의 비밀 공작도 이미 실패했으며, 위에서 보았던  '대동아전쟁완수를 위한 대지나처리근본방침 (大東亞戰爭完遂ノ爲ノ對支處理根本方針) ' 에서는 충칭측과 직접적인 교섭을 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결정한 상황에서 일본이 장제스와 직접 교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측이 충칭의 장제스측과 직접 교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패망이 확정난 1944~1945년에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셋 째는 군사력의 우월을 통해 물리적으로 충칭을 굴복시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를 구체화 했던 1944년의 이치고 작전도 충칭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이렇듯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일본에게 불가능 한 것이었다. 게다가 장제스의 충칭국민정부가 항전을 부르짖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이러한 교섭과 군사작전이 작동할 가능성은 더더욱 낮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측에게는 4번째 옵션만이 남아있었다. 이는 바로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충칭의 것과 대등한 것으로 만들어, 충칭측으로 하여금 일본을 믿고 항전을 포기해 전쟁을 끝낼수 있게하는, 즉 전쟁의 종결을 상대방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위에서 보았던 1943년의 왕징웨이 정권에 대해 이루어졌던 우호적인 조치는 일본의 정책변환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4번째 옵션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이 4번째 옵션을 선택한 이상, 일본측에서 유일한 중일전쟁의 해결 수단을 가지게 된 왕징웨이측은 이제 더이상 이전과 같은 을(乙) 의 위치에 있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일본측에게 요구를 가할 수 있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4번째 옵션의 선택은, 일본이 화평에 있어 난징국민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실제 왕징웨이측은 정권수립이후 독자적으로 계속하여 충칭 장제스측의 요인들과 계속 접촉하며 화평에 대한 논의를 해왔다. 이러한 일은 일본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중일전쟁의 화평 주도권은 일본도, 독일도 아닌 난징에게 있게 된 것이다. 1943년 7월, 왕징웨이는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하타 슌로쿠 (畑 俊六) 와의 회담에서 경제제휴 및 철병의 문제가 조약개정의 중점임을 일본측에 확실히 표명했고, 심지어 기존의 일화기본조약이" 가장 굴욕적"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왕징웨이측의 태도는 난징국민정부 참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8월 아오키 카즈오(靑木一男) 대동아성 대신이 왕징웨이정권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왕징웨이는 철병을 비롯한 평등에 근거한 기본조약의 대체가 중요함을 이야기했다. 1943년 9월의 방일 전, 왕징웨이와 천궁보를 비롯한 주요인사들과 당시 일본대사였던 타니 마사유키 (谷正之) 와 회담을 가진적이 있다. 여기서 왕징웨이는 "나는 대륙을 발견하러 온 탐험가인데, (대륙을) 발견하지 못하면 충칭은 반드시 손뼉을 치며 웃을것이고, 발견하게 되면 중국 전역의 국민대중들이 고마워할 것이다.” (我是一個探險家來發見大陸,如果不能發見,重慶一定拍手笑我,如果能夠發見,全中國的民衆會感謝。) 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대륙은 일본과 충칭의 완만한 전쟁문제 해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징웨이에게 있어 대륙을 발견한다는 것은, 난징이 충칭과 일본사이의 교두보로써 중일전쟁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뜻에서 이문장을 다시한번 해석해보면, "나는 대륙 (충칭과 일본의 화평) 을 발견하러 온 탐험가 (충칭과 일본의 화평을 이끌어 낼 수 있는)인데, 대륙을 발견하지 못하면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충칭은 반드시 손뼉을 치며 웃을것이고 (점점 일본에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계속 항전을 지속하여, 승리할수도 있기 때문에) , 발견하게 되면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면) 중국 전역의 국민대중들이 고마워할 것이다.” 정도의 뜻이 된다. 또한 왕징웨이는 "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철병의 문제다. 만약 장제스가 (항전의 조건으로) 영미와의 관계를 끊을 것이니, 일본도 철병하라, 라고 한다면 일본은 이에 응할 것인가? " (最關心的是撤兵問題,如果蔣提出與英美切斷關係,希望日本也撤兵時,日本是否肯答應?) 라며 일본측의 (신 조약 체결을 비롯한 불평등해소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요구했다. 또한 조약의 체결 1달전인 9월 29일, 저우포하이는 자신의 저택에서 지나파견군의 참모중 하나였던 도고 키타루 (都甲徠) 를 만나 "충칭이 두려워하는 것은 영미가 이탈하는 것이며, 일본이 (왕징웨이 정권의 불평등을 없애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충칭이 일본을 신용할 수 있도록, 어떻게 확실하게 보장할 수 할것인지를 일본은 반성하고 방법을 세워야 한다" (重慶所懼者,脫離英、美后,而日本不履行條約也。故如何能有切實保證,使重慶信用日本,此日本必須反省及設法者也。) 라고 이야기 하면서 일본측에 조약의 체결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일본이 불리한 전세 속 이전과 다른 실질적인 '대동아공영권'을 성급하게 완성하려는 심정,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를 이용해 충칭의 항전포기를 이끌어 내려는 심정을 이용해 일본이 왕징웨이 측에게 더 많은 양보를 가하게 하려 한 모습을 보여준다. 왕징웨이측은 일본이 갑작스러운 태도변화를 보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조는 1943년 9월 24일, 왕징웨이가 다시 한번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쟁이 끝나면 군대를 모두 철수 시키겠다, 또한 지역의 특수성을 해결하고 국민정부의 힘을 키우겠다" 와 같이 이야기하며 이러한 왕징웨이측의 요구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43년 10월 9일부터, 일본측은 일화동맹조약의 체결을 위해 공식적으로 난징국민정부와 교섭을 시작한다. 난징국민정부는 일화동맹조약의 '동맹' 이라는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징측은 '동맹' 이라는 명칭보다는 '영구적 우호관계'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난징측은 이외에도 만주국과 화북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 등 여러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일본측에 조약의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측은, 난징측에 신조약이 지난 1월 9일 체결된 일화공동선언, 그리고 치외법권 폐지사항과 같은 정신을 보유하고 있으니 일본측을 신뢰해주기를 요망한다며, 난징측의 불안을 최대한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은 이러한 난징국민정부측의 수정안 요구를 받아드리지 않으며 시게미쓰의 원안을 거의 그대로 타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난징의 반발에 일부분 수정을 가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일본의 이익보전이라는 최후의 선은 지켜야한다는 생각 속에서 특정부분에서 일본은 왕징웨이측에 더이상의 수정과 양보는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난징측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고 결국 난징측은 한발 물러서 10월 19일 수정요구를 철회했다. 일화동맹조약이 체결된 난징국민정부 청사. 1940년 일화기본조약도 같은 곳에서 체결되었다. (사진은 정부수립 당시의 모습.)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43년 10월 30일, 난징의 국민정부 대례당에서 일화동맹조약이 조인되었다. 오전 9시 50분, 일본의 전권대사인 타니 마사유키 (谷正之) 를 비롯한 일본측 인사를 태운 차량들이 난징국민정부 청사로 들어왔고, 10시 정각, 대예당에서 일본측 대표 타나 마사유키와 난징국민정부 대표 왕징웨이는 각자에 자리에 앉아 조약의 내용을 읽어보고 이에 서명하면서 조약은 성립되었다. 사진주보(寫眞週報) 298호에 실린 일화동맹조약에 서명하는 양측의 모습. 조약의 성립과 함께 양측은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조인식은 10시 40분에 끝났다. 日本國中華民國間同盟條約 (일본국-중화민국간동맹조약) 쇼와 18 (1943) 년 10월 30일 난징에서 서명 昭和一八年(一九四三年)一〇月三〇日南京ニ於テ署名 쇼와 18 (1943) 년 10월 30일부터 실시 昭和一八年(一九四三年)一〇月三〇日ヨリ實施 쇼와 18 (1943) 년 10월 31일 (동일 부관호 호외) 공표 昭和一八年(一九四三年)一〇月三一日(同日附官報號外)公布 대일본제국 정부 와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양국간 상호선린으로써 그 자주독립을 존중하면서 긴밀히 협력하여 도의에 입각한 대동아를 건설하여 세계전반의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이에 장애가 되는 일체의 화근을 일소한다는 확고부동한 결의로써 다음과 같이 협정한다. 大日本帝國政府及中華民國國民政府ハ兩國相互ニ善隣トシテ其ノ自主獨立ヲ尊重シツツ緊密ニ協力シテ道義ニ基ク大東亞ヲ建設シ以テ世界全般ノ平和ニ貢獻センコトヲ期シ之カ障害タル一切ノ禍根ヲ芟除スルノ確乎不動ノ決意ヲ以テ左ノ通協定セリ 제 1조 : 일본국 및 중화민국은 양국간에 영구히 선린우호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호 그 주권 및 영토를 존중하면서 제반에 걸쳐 상조 돈목의 수단을 강구한다. 日本國及中華民國ハ兩國間ニ永久ニ善隣友好ノ關係ヲ維持スル爲相互ニ其ノ主權及領土ヲ尊重シツツ各般ニ亙リ互助敦睦ノ手段ヲ講スヘシ 제 2조 : 일본국 및 중화민국은 대동아의 건설 및 안정의 확보를 위해 상호 긴밀히 협력하여 모든 원조를 한다. 日本國及中華民國ハ大東亞ノ建設及安定確保ノ爲相互ニ緊密ニ協力シ有ラユル援助ヲ爲スヘシ 제 3조 : 일본국 및 중화민국은 호혜를 기조로 하는 양국간의 긴밀한 경제 제휴를 실시한다. 日本國及中華民國ハ互惠ヲ基調トスル兩國間ノ緊密ナル經濟提携ヲ行フヘシ 제 4조: 본 조약의 실시를 위해 필요한 세부항목은 양국 해당 관헌간에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 本條約ノ實施ノ爲必要ナル細目ハ兩國當該官憲間ニ協議決定セラルヘシ 제 5조 : 쇼와 15년 11월 30일 즉, 중화민국 29년 11월 30일 조인한 일본국 중화민국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은 그 일체의 부속문서와 함께 본 조약 실시일로부터 효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한다. 昭和十五年十一月三十日卽チ中華民國二十九年十一月三十日調印ノ日本國中華民國間基本關係ニ關スル條約ハ其ノ一切ノ附屬文書ト共ニ本條約實施ノ日ヨリ效力ヲ失フモノトス 제 6조 : 본 조약은 서명일로부터 실시한다. 그리고 이 증거로서 아래의 이름을 본국 정부로부터 정당한 책임을 받고 본 조약을 서명하고 조인한다. 本條約ハ署名ノ日ヨリ實施セラルヘシ, 右證據トシテ下名ハ各本國政府ヨリ正當ノ委任ヲ受ケ本條約ニ署名調印セリ 쇼와 18년 10월 30일 / 중화민국 32년 10월 30일, 난징에서 일본어, 중국어로 본 조약 두통을 작성함. 昭和十八年十月三十日卽チ中華民國三十二年十月三十日南京ニ於テ日本文及漢文ヲ以テ本書各二通ヲ作成ス 대일본제국특명전권대사 타 니 마 사 유 키 (谷 正之) 중화민국국민정부행정원원장 왕 자 오 밍 (汪 兆銘) 日本國中華民國間同盟條約附屬議定書 (일본국-중화민국간동맹조약 부속의정서) 오늘 일본 중화민국간 동맹 조약에 서명함에 있어 양국 전권위원은 다음과 같이 협정한다. 本日日本國中華民國間同盟條約ニ署名スルニ當リ兩國全權委員ハ左ノ通協定セリ 제 1조 : 일본국은 양국간의 전반적 평화가 만들어지고 전쟁상태가 극복된 때에는 중화민국 영역 내에 파견된 일본국 군대를 철군시킬 것을 약속한다. 日本國ハ兩國間ノ全般的平和克復シ戰爭狀態終了シタルトキハ中華民國領域內ニ派遣セラレタル日本國軍隊ヲ撤去スヘキコトヲ約ス 일본국은 북청사변 (의화단 운동을 의미) 에 의한 신축조약 및 관계 서류에 기초한 군사주둔권을 포기한다. 日本國ハ北淸事變ニ關スル北京議定書及關係書類ニ基ク駐兵權ヲ抛棄ス 제 2조 : 본 협정은 조약과 동시에 실시하게 한다. 그리고 증거로서 양국의 전권위원은 본 협정에 서명하고 조인한다. 本協定ハ條約ト同時ニ實施セラルヘシ 右證據トシテ兩國全權委員ハ本協定ニ署名調印セリ 쇼와 18년 10월 30일 / 중화민국 32년 10월 30일, 난징에서 이를 작성함. 昭和十八年十月三十日卽チ中華民國三十二年十月三十日南京ニ於テ日本文及漢文ヲ以テ本書各二通ヲ作成ス 대일본제국특명전권대사 타 니 마 사 유 키 (谷 正之) 중화민국국민정부행정원원장 왕 자 오 밍 (汪 兆銘) 난징특별시정부에서 발행한 책자에 묘사된 난징의 국민대회당. 이 건물은 1936년, 중일전쟁 이전에 지어진 것이었다. 조약이 체결후 오전 11시,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공식적으로 일화동맹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행사를 마친 왕징웨이는 국민대회당 (당시는 임시라는 명칭이 붙었다. ) 에서 열리는 '수도 민중 및 청소년 경축 중일동맹대회 (首都民衆及靑少年慶祝中日同盟大會) ' 에 참가하여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本平等互惠入場共建東亞 (평등호혜의 입장에서 함께 동아를 건설하자) 일화동맹조약이 오늘 조인되었다. 이는 중일관계에 있어 신기원을 여는 것이며, 동아에 있어서도 신기원을 여는 것이다. 중일 양국은 이후 완전한 평등호혜의 입장에서, 영구적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공동으로 대동아건설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가적, 민족적 관계는 이미 2천년 간 진행되어왔다. 이 2천년간 때로 충돌하긴 했지만, 이러한 충돌은 대부분 단기간이었고, 이렇게 충돌한 기간은 수년 내지 십수년에 불과한 것이었다. 즉, 중일이 충돌했던 기간은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이며, 나머지 100분의 99의 기간동안 중일은 모두 우호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과 같이 완전한 동방의 도의정신에 입각하여 양국의 우호관계를 규정한 조약은 최초이며, 이를 통해 백년간 중국을 속박해왔던 불평등조약의 질곡은 일소되어 동아 동포들의 본래 면목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다. 이제부터 중일의 우호관계는 공고해질 것이며,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은 드디어 완전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번 중일동맹조약과 민국 29 (1940) 년 11월 30일 체결된 중일기본조약을 비교해본다면, 큰틀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대한 변화가 두가지 있다. 첫 째는 중일기본조약 3조 3항 (일본은 양국이 공동으로 방공을 실행하도록 요구되거나 필요한 기간중 양국간에 따로 협의결정된 바에 따라서 필요한군대를 몽강, 화북의 일정지역에 주둔시킨다. ) 의 방공을 이유로한 군대의 주둔과, 제 4조의 ( 양국정부는 중화민국에 파견된 일본제국 군대가 따로 규정된 바에 의해 철군을 완료함에 이르기까지 공동으로 치안유지를 위해 긴밀히 협력한다. ) 의 치안을 이유로한 군대의 주둔, 그리고 5조의 함선부대 주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이 종전의 관례에 기초하여 양국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기간 중에는 따로 협의된 바에 따라 일본제국군의 함대부대를 중화민국 영역 내에 있어서의 특정지역에 주둔하는 것을 용인한다. ) 에 관한 내용이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 조약의 부속의정서 제1조 2항에서는 "의화단의 난 에 의한 신축조약 및 관계 서류에 기초한 군사주둔권을 포기한다. " 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이 주둔권이 특별한 규정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특별히 이를 부속의정서에서 다루었다. 또한 중일기본조약 부속의정서 제3조에는 "일본국 군대는 금일 서명된 중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에 따라, 중화민국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고, 양국간에 전면화평이 회복되고 전쟁상태가 종료되면 철병을 개시하여, 치안확립이 보장되는 조건 속 2년내에 철병을 완료한다. " 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의 부속의정서 제 1조 1항에서는 "일본국은 양국간의 전반적 평화가 만들어지고 전쟁상태가 극복된 때에는 중화민국 영역 내에 파견된 일본국 군대를 철군시킬 것을 약속한다. " 라고 규정하여 철병에 있어서 기간과 부차적 조건들을 철회했다. 둘 째로, 중일기본조약 제6조 2항에는 화북 과 몽강에 관한 문구가 있고, (중화민국정부는 화북과 몽강에서의 특정자원, 그 중에서도 국방상 필요한 매장자원에 관하여 양국은 긴밀히 협력하여 이를 개발할것을 협약한다, 중화민국 정부는 기타지역에서의 국방에 필요한 특정 자원의 개발에 관하여 일본과 일본신민에 대해 필요한 편의를 제공한다. ) 제 4항에는 장강 하류와 관련된 문구가 있는데 (양국정부는 일반 통상을 진흥하고 또한 양국간의 물자수요를 편리하게하고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양국정부는 양쯔강 하류지역에서의 통상교역의 증진과 일본과 몽강, 화북간에 있어서의 물자수급에 관해서 긴밀히 협력한다.) 이는 마치 중국의 영역내에 특수지대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이는 경제방면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밑 각 방면에서도 이처럼 통일을 분열시키는 위험이 생길 우려가 느껴지게 했다. 그런데 이번 동맹조약 제3조는 이들 특수지대에 관한 의구심을 완전히 일소했다. 상술한 첫 째는 중국의 자유와 관계가 있는 것이며, 두번 째는 중국의 통일과 관계 있는 것으로, 이는 모두 중요한 것이다. 그외에 중요한것은, 동맹조약의 5조에서 " 쇼와 15년 11월 30일 즉, 중화민국 29년 11월 30일 조인한 일본국 중화민국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은 그 일체의 부속문서와 함께 본 조약 실시일로부터 효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한다. " 라고 규정한 것이다. 기존의 중일기본조약이 소위 밀약과 같은 것이며, 밀약과 같은 존재이기에 부속문서를 비롯한 모든 것을 발표하지 못하는 것이라 의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 이 중일동맹조약의 5개 규정을 보면, 이러한 모든 의혹은 사라지는 것이며, 게다가 이번에는 부속의정서를 비롯한 교환공문 등 모든 부분이 공개되어 더욱 공명정대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번 교환공문에 공개된 정보들을 보아도, 이는 기본조약 때의 것에 비하면 그 의의가 한층 명료하고 주도면밀한하다. 기본조약의 부속의정서 제1조에는 소위 특수사태라는 것이 존재하여 애매한 측면이 남아있었고, 제 2조에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이전 정권의 요소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후 3년간 일본정부는 수시로 국민정부와 성의를 가지고 협의하여 가능한 한 조정을 가해왔고, 신정책 실시 후 일본이 중국의 자유독립 완성을 원조하기 위해 더욱 과감히 이것을 추진하고, 수많은 조정을 이룰 것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서, 이번 교환공문에서는 더욱 그 결의를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 모든 조정은 전면화평이 회복되고 전쟁상태가 종료되었을 때 비로서 실시할 수 있는 것이나, 현재와 같이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상황이 허락하는 한 수시로 양국간에 협의하여 조정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렇듯 이번 동맹조약을 통해 국민정부는 그 취지 속에서 국민정부를 더욱 강화시키고, 중국의 독립자유를 더욱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측의 호의는 참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로 설명해야 할 것은, 중일동맹조약 제4조의 내용으로, 4조에서는 "본 조약의 실시를 위해 필요한 세부항목은 양국 해당 관헌간에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 " 이라 규정되었다. 국내절차에 따르면, 대외교섭은 중앙정부가 주관하고 , 지방관헌이 대외교섭을 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반드시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 처리를 해야하고, 특정한 사항은 중앙정부라 할지라도 반드시 중앙위원회 및 입법원의 입법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국내법 규정 상 당연한 것이며,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나, 또 오해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기에 설명을 부차적으로 덧붙였다. 중일기본조약 당시 나는 국민들이 중일기본조약의 체결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점에 대해 상세하게 해석을 가하여, 조약은 규정은 많고 탄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적용은 우리의 노력이 어떠한가 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우리가 노력하면 이것을 좋은 방면으로 향하게 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이는 나쁜 방면으로 기울게 된다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병력 주둔의 기간, 수, 장소 등은 모두 아직 협의되지 않은 것으로, 만약 우리가 노력하여 전면화평을 실현시키고 치안을 확립하고 국방의 완벽을 가한다면, 병력 주둔의 기간은 줄어들 것이고, 주둔 병력수와 장소는 줄어 들것이지만,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병력 주둔기간은 연장될 것이며, 그 수와 장소는 더늘어날 것이다. 이는 병력주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현상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들이 노력하여 정확한 경제방침을 세워 경제방면의 인재를 모아 경제와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경제제휴는 반드시 합리적이게, 현저히 호혜의 목적으로 다가 올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못하면 단지 대실패의 길을 갈뿐이다. 나는 이와 같이 말했지만, 나는 아직 나의 말에 설명에 오류가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들은 조약을 체결한 이상 이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방법 위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조약개정의 근본적 결의는 일본정부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번 동맹조약, 동 부속의정서 및 교환공문의 원안 또한 일본정부로 부터 제출된 것이며, 일본은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특권에 대해서는 일점의 보류조치 없이 이를 포기했고, 동시에 중국측이 우려하는 요소들은 철저히 이를 일소했다. 나는 오늘 공공연하게 전국의 동포에게 고하고자 한다. 이번 조약은 완전히 일본정부 및 일본 국민의 호의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이번 조약을 통해 중일 양국의 영구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대동아의 공영을 도모하기 위해 도의적 정과 동포적 감정에 기초하여 이와 같이 공명정대한 주장을 제출했음을, 이번 조약의 목적이 중국에 대해 기사회생의 힘을 부여하여, 중일 양국의 영구우호를 위한 기둥을 세우고, 동아를 위해 올바른 화평을 열기 위한 것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동포들에게 나아가 한마디 더하고자 한다. 일본은 왜 이번과 같은 결의를 하고 이를 실행했는가? 이는 선린우호의 관념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고노에 성명에도 나타나 있다. 또한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이는 일소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미의 침략세력은 여전히 중국내에 존재해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각 방면을 그물처럼 조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군사주둔과 같은 것은 아편전쟁이후 체결된 난징조약에서 시작되어, 의화단의 난 이후 더욱 가중되었다. 일본이 이전의 모습에서 벗어나 이러한 불평등을 폐지하기 위해 단독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속박 속에 있는 중국을 구원하기 위한 것 뿐만이 아니라 동아에서의 영미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것도 있다. 이는 군사주둔뿐만 아니라 경제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일기본조약을 체결할 당시에도 일본은 이 때문에 합당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의해 중국에서 영미세력은 여지없이 격멸되었고, 이에 이러한 고려와 조치는 필요없게 되었다. 올해 1월 9일 조계반환 및 치외법권 철폐에 관한 협정의 체결부터 이번의 근본적 조약 개정에 이르기까지 그 이념은 이렇듯 일관된 것이다. 전국의 동포들이여,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중일전쟁 발발 당시, 대다수 동포들은 '항전을 해도 망하게 될 것이고, 항전을 하지 않아도 망하게 될 것' 이라 비관적인 인식속 항전에 종사하였고, 화평운동 개시 당시 대다수 동포들은 중일의 제휴는 희망이 없다 인식하며 이를 비관적으로 인식하고 화평을 거부하였다. 수년간 화평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여러 사실로 증명되었지만, 이를 부정하는 사실 또한 적지 않았기에, 화평을 향한 결심과 행동은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국부 손중산 선생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는 이미 이론의 단계를 넘어 실행으로 나아가고 있고, 국민정부가 희망하는 불평등조약의 폐지, 중국에 대한 원조도 이미 사실이 되어 국부 손중산 선생의 유촉에도 있었던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여 불평등조약을 폐지하라 " 라는 말도 관철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중일동맹조약에 의거하여 대동아전쟁에서 동감동고(同甘共苦), 동생공사(同生共死) 정신으로 단결하여 국민의 총력을 결집시켜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의 완성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여 중국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굳건한 보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충칭측에서는 전쟁의 발발이후 지금까지 공공연하게 "루거우차오 이전의 상태를 회복해야 비로서 화평을 실현할 수 있다. " 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오늘의 우리는 루거우차오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얻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루거우차오 이전 중국에는 조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반환되었다. 또한 루거우차오 이전에는 중국에 치외법권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모두 철폐되었다. 그리고 루거우차오전 중국은 차식민지의 상태에 있었지만, 지금은 영미의 침략 세력이 모두 궤멸되어 백년간 중국을 속박해왔던 불평등조약은 진작에 사라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루거우차오 이전에는 중일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수와 같은 관계였으나, 지금은 방침이 일치되어 영구우호의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제 지금 필요한 것은 충칭이 항전을 포기하고 화평을 회복하게 하는 것 그것 뿐이다. 이는 중국 자신에게도 유리한 것이고, 동아에게도 유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화평이 이루어지면, 일본은 철병할 것이고, 중국의 전쟁상태는 끝나게 될 것이며, 화평 이후의 각종 재건사업이 제때 실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대동아전쟁에서 후방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은 정예군대를 전선으로 보내어 얼마든지 우방 일본장병들의 노고를 덜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치안을 확립하고 생활과 생산을 개선시키는 것은 후방에 있어 한층 급선무인 일이다. 중국은 이를 통해 대동아전쟁 후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후의 각종 사업의 부흥과 개선을 자극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원기 회복 및 국력과 민력증진에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충칭측은 이제 항전을 포기하고 화평을 회복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충칭의 소위 항전은 중국을 위한 항전이 아니고, 영미를 위한 항전이기 때문이다. 자국의 영토를 영미에 제공하여 영미의 공군이 활동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되게하고, 이를 통해 영미가 자국의 동포들을 공격하게 하여 본래 안거낙업 (安居樂業) 이었던 땅을 영미의 도살장으로 만들고, 동시에 대다수의 군대를 버마 방면으로 수송해 영미의 주구가 되어 동아서 독립의 맹아를 나타내려는 가진 국가에 칼을 들이 미는 것은 중국의 죄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바라컨대 충칭의 장병 및 민중들은 명백하게 이를 인식하고 신속하게 자신의 길을 결정해주기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가 늦어질 수록 그 늦어진 하루를 후회하게 될것이다. 내가 소수의 동지들을 거느리고 맨주먹으로 충칭을 나와 화평운동에 분주한지도 5년이 다되어 간다. 부덕 하고 부족했었지만, 결국엔 이와 같은 일본의 원조를 통해 중국으로 하여금 그 독립 자유를 획득할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삼가 일본정부 및 국민들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동시에 충칭측의 옛 동료들이 아직도 돌아 올수 없는 환경에 있음을 상기하며 무한한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삼가 국부의 영혼이 편히 쉬게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의 통일을 재촉하여 그 이전까지 이를 이루지 못한 진심으로 나의 잘못을 갚으려 한다. 우리들은 맹세코 용맹전진(勇猛精進) , 각고내로 (覺苦耐勞) 의 정신으로 중화부흥, 동아보위의 사명을 완성해야하는 것이다. 일화동맹조약의 체결을 기념하는 수도 민중 및 청소년 경축 중일동맹대회 (首都民衆及靑少年慶祝中日同盟大會) 의 행진 모습. 왕징웨이의 훈시전부터 난징의 국민대례당 앞에서 수도 민중 및 청소년 경축 중일동맹대회 (首都民衆及靑少年慶祝中日同盟大會) 의 행사는 거행되고 있었다. 난징국민정부의 주요 요인들과 학생들, 군인들, 사관학교 생도, 상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까지 총 만 여명이 모인 행사 식장에는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일장기 양국의 국기가 게양되었고, "중일동맹조약을 옹호하고 정의로운 화평을 실현하자 (擁護中日同盟條約實現正義的和平) " , " 중일동맹조약을 실천하고 대동아전쟁을 완수하자 (實踐中日同盟條約完遂大東亞戰爭) " 와 같은 구호가 게시되었고, 구호를 외치는 난징시민들의 소리가 울려펴졌다. 대회가 시작되고 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국가를 부르고, 이후 행사 주최측은 중일동맹조약의 원문을 집결한 난징 시민들앞에서 읽었고, 난징시민들은 이에 대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11시, 왕징웨이가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행사장에 도착했고, 대회에 참가한 이들은 왕징웨이를 함성으로 환영하며 "왕주석만세! (汪主席萬歲!) " 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대회에 참가한 이들은 위의 왕징웨이의 훈시를 경청했다. 대회의 마지막에서 당시 난징 시장이었던 저우쉐창(周學昌)은 "위대한 영도자 만세! 중일동맹조약을 옹호하자! 정의로운 화평을 실현하자! 도의로운 동맹을 공고히 하자! 전국통일을 이뤄내자! 대동아전쟁을 완수하자! 중일동맹만세! 동아해방 만세! 중화민국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 라 크게 외치며 구호를 선창했고, 이를 난징 시민들이 따랐다. 이후 대회 참가자들은 국민정부 군악대와 난징의 경찰차들로 이루어진 대오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국민당 난징특별시위원회 당원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추가되면서 약 2만명 가량의 난징시민들이 일화동맹조약의 체결을 기념하여 행진했다. 국민대회당에서 시작된 이 행진은 난징항 (南京港) 까지 이어졌다. 이 행진에서도, '동아해방만세, 중일동맹만세, 중화민국 만세' 와 같은 구호는 열창되었다. 일화동맹조약이 체결된 날, 일본은 또한 제국성명을 발표하여 조약의 체결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보였고, 도조 히데키 수상, 하타 슌로쿠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정보부, 그리고 이 일화동맹조약의 구상을 만든 시게마쓰도 축전을 보냈다. 선전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위한 특별방송을 오후 9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조약과 이를 다루는 왕징웨이의 훈시에서도 볼 수 있듯, 일화동맹조약은 이전의 일화기본조약보다 많은 부분에서 진전을 이루었다. 애매한 철병을 명확하게 규정했고, 동시에 이전의 지역의 특수성, 군대 주둔과 같은 불평등한 요소들이 존재했던 일화기본조약의 내용을 무효화하게 함으로써, 왕징웨이 정권은 이전보다 더 많은 평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측에게 일화공동선언은 1943년 시작된 일본의 평등조치를 공고화하게 하는 마지막 확인조치와도 같았다. 1943년 1월 9일의 일화공동선언과 조계반환, 치외법권 폐지조약에서 약속된 것이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일화공동선언과 조계반환, 치외법권 폐지조약체결 직후 이루어졌던 군수공장과 공업시설의 반환 , 7월의 조세를 비롯한 과세자주권의 반환, 톈진부터 구랑위, 상해공동조계까지 이어지는 조계의 반환을 이어 지정된 일화동맹조약은 이러한 일본의 평등조치가 진실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종지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왕징웨이의 훈시에서 일화기본조약보다 이전보다 당당하게 조약의 체결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일화기본조약에 대해 서술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일화기본조약 떄는 왕징웨이 본인도 이 조약이 과연 맞는것인가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많은 것이 개선된 일화동맹조약은 왕징웨이 본인에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었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에서 발행한 '중일동맹조약과 중일기본조약의 비교 (中日同盟條約與中日基本條約與之比較) ' 책자. 왕징웨이측은 일화동맹조약이 이전의 일화기본조약과 다름을 강조했다. 물론 이러한 진보가 있었음에도, 일화동맹조약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우선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화동맹조약은 왕징웨이측의 수정요구사항이 거의 받아드려지지 않은, 이전의 일화기본조약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준비하고 일본이 안을 만들고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조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양측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조약을 만들어내는데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왕징웨이측은 조약 3조의 '호혜' 라는 단어가 부족하기에 '평등호혜' 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주장했다. 이는 중일기본조약에는 '평등호혜' 라는 단어가 적혀있는데 동맹조약에서 이것이 삭제되면 국민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측은 4조에서 '양국 해당 관헌간에 협의를 통해' 라는 단어도 '양국 정부간의 협의를 통해' 라는 단어로 바꾸길 희망했다. 관헌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해버리면, 왕징웨이의 중앙정부가 아닌, 화북정무위원회를 비롯한 지방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고, 이는 또 중국을 간섭하는 모습이 되어비리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측은 이러한 단어하나하나가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 수정을 요구했으나 하지만 일본측은 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가 자신의 훈시에서 4조에 관한 설명을 한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또한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신조약을 통해 화북문제 해결을 비롯한 지역의 특수성이 존재하는 현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왕징웨이는 신조약이 미래의 인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인민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야한다면서, 화북문제를 비롯한 문제들의 구체적 해결방안을 신조약에 제시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이를 거부했다. 왕징웨이는 이러한 일본에 태도에 불만을 들어냈으며, 특히 저우포하이는 일본측의 억지는 난징 정부의 육성 강화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역효과를 낼수도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왕징웨이측이 이 과정에서 얻어낸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화동맹조약의 5조는 본래 "일화기본조약의 내용은 금일 조약의 체결이후, 본 조약의 내용으로 대체한다.' 였다. 하지만 왕징웨이측은 이를 "일화기본조약의 내용은 금일 조약의 체결이후 폐지한다." 로 바꾸길 희망했다. 일본측은 이에 거부의 뜻을 보였으나, 왕징웨이측의 요구에 결국 타협으로 본 조약의  "일화기본조약의 내용은 금일 조약의 체결이후 효력을 상실한다." 라는 문구를 쓰기로 결정했다. 또한 부속의정서 1조 1항 원안의 "중화민국에 파견된" 이라는 단어도 왕징웨이측의 요구에 따라 "중화민국 영역 내에 파견된" 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 외에 일본측은 대부분 원안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화동맹조약은 조약에서 규정되고 있는 철병을 비롯한 대부분의 평등조치는, '전쟁 이후에'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일화동맹조약에서, 진정으로 일본측이 국민정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를 원한다면 현재의 중국국민들도 화평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화북의 특수성 개선을 위한 구체적 단계방안을 넣어 중국국민들이 '지금' 화평이 이루어지고 있구나를 믿을수 있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측과 시게미쓰는 이러한 왕징웨이의 요구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일화동맹조약에서 조약이 체결된 이후엔 어떠한 조치가 이루어지는지, 어떠한 조치를 할것인지와 같은 '지금' 을 다루는 문구는 없고, '전쟁후엔 철병을 약속한다' 와 같이 미래만 이야기하는 문구만 포함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시게미쓰를 비롯한 일본측은 전쟁이후의 왕징웨이정권을 평등하게 대우할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현재' 의 상황에서는 이를 실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내에서는 시게미쓰를 제외하면, 이렇게 난징국민정부측에 호의적인 인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육군도, 해군도, 심지어 대동아성도 시게미쓰의 이러한 모습에 완전한 지지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금 당장 왕징웨이정권에게 평등을 부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나마 왕징웨이측에 호의적이었던 그도 '지금은' 평등을 줄수 없고, '전쟁 이후에도 일정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평등을 줄수 없다 라고 이야기했던 일화기본조약을 '지금은' 평등을 줄수 없고, '전쟁이후에는' 평등을 줄수 있다. 로 밖에 바꾸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측 대표로 조약을 체결했던 타니 마사유키도 조약 체결후 "일화동맹조약을 통해 이전 일화기본조약보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진전을 거뒀으나,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 이를 해결하는 것이 다음과제ㅡ. " 라고 글을 남기며 조약이 부족한 부분이 많음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한계성 때문에 일화동맹조약은 이전의 일화기본조약에 비해 많은 진전을 거두었고,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성립 당시의 불평등성을 일부 상쇄했다는데서 의의를 가지지만, 중국 국민들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왕징웨이정권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는 되지 못했다. 국민들은 이러한 개선에도 왕징웨이의 정권을 여전히 꼭두각시로 바라보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바뀌지 못했다. [출처] : 李 仁哲, 「戦時期日中関係の変容 : 日華基本条約から日華同盟条約へ」, 『波大学博士(学術)学位請求論文』, 2014 支那派遣軍総司令部報道部, 『同生共死 : 専管租界還付より大東亜宣言まで 続 (時局参考資料 ; 第26輯) 』 , 1943 中央電訊社出版委員會, 『汪主席和平開國言論選集 』 , 1944 아세아문제연구소 HK사업단, 『초국가적 공간과 공동체로서의 동북아시아 』 , 2018 중보 (난징국민정부) 1943년 10월 31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bao-nanjing-1943.10.31/page/n1/mode/2up 매일신보 1943년 10월 31일자~ 11월 1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search_keyword=%E7%A5%9E%E6%88%B8 조약 전문 : https://worldjpn.net/documents/texts/pw/19431030.O1J.html 조약 체결 사진 1 : http://read.nlc.cn/allSearch/searchDetail?searchType=all&showType=1&indexName=data_531&fid=LS0000KZA4133 사진주보 298호 : https://www.digital.archives.go.jp/das/image/M2006070421131957747 국민대례당 사진 : http://read.nlc.cn/allSearch/searchDetail?searchType=all&showType=1&indexName=data_416&fid=11jh009618 中日同盟條約與中日基本條約與之比較 : http://read.nlc.cn/allSearch/searchDetail?searchType=all&showType=1&indexName=data_416&fid=11jh000850 왕징웨이의 조약 체결전 발언들 : https://www.163.com/dy/article/IUR90FK20556636A.html 용보 사진 : https://archive.org/details/yongbao-194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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