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란으로 159개 검색됨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은 명목상으로는 대동아회의의 결과물로서 도출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대동아회의의 개최 이전부터 이미 일본이 계획하고 있던 것이었다. 일본은 대동아성과 외무성을 중심으로 대동아공동선언의 안을 제작하고 있었고 회의의 개최 이전에 이미 최종안이 완성된 상태였다. (현재로서는 외무성측에서 제출한 안에 대해서는 대부분 자료가 공개되었으나 대동아성의 안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대동아성의 안의 작성과정에는 국책연구회, 니시다 키타로, 오카와 슈메이등 여러 인물과 단체가 참가했다는 것이다.) 대동아 또는 태평양헌장안 (안도 요시로(安東義良) 사안(私案)) ( * 1943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 대동아 각국 주민들의 안정과 번영을 확보하고 진정한 세계평화와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하여 대동아 각국 정부는 대동아질서의 강령에 대한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한 후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동아 각국은 ‘아시아’외의 타국의 간섭, 지배, 독점 및 착취로부터 대동아를 영구히 해방 시키고 그 향상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 전민중의 생존과 향상, 발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상호간에 자주독립 및 영토를 존중하고 평등호혜의 원칙하에 선린협력의 관계를 확립 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개입을 척결 하고, 각국을 향한 압박과 위협은 공통의 압박과 위협이 됨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여 공동방위 의 책무를 다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 전민중의 생활의 안정 및 복지를 확보하고 증진시켜 공존공영의 경제관계를 확립하여 통상간의 호혜협력관계를 설정 하고 동시에 호혜협력의 원칙 아래에서 자원의 발전 및 이용을 세계에 개방하여 세계 경제의 발달과 세계 평화의 유지에 기여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가 본래 심원(深遠)한 문화를 가지고 인류 문화의 받달에 기여한 바가 큼을 생각하여 대동아 여러민족의 전통적 문화를 배양하고 문화의 교류 및 융합, 발전을 도모 하여 대동아 문화를 융성하게 하여 인류의 향상 및 복지에 기여한다. 대동아 각국은 세계 각국이 각자 소속된 지역에 정의와 공정에 기초한 공통의 질서를 수립하여 폭력에 의한 제패를 배제하고 각국간 및 타지역에 대한 불위협, 불침략을 위한 군비 수준을 유지하고 세계 평화의 유지에 협력하고 일절의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한다. 대동아선안안 (7.23 국제법학회특별문제위원회 연구안) 대동아제국(諸國)은 만방이 각자의 자리를 얻어 그 국민이 그 속에서 안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항구적인 평화의 근본적 도리라는 것을 인정하며 미영 양국이 다년간 만든 질곡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켜 대동아 민족의 자주적 발전과 공존공영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도의에 기초한 신질서를 건설하고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여러 국가와 협력하여 세계의 평화 유지 및 인류의 복지 증진에 공헌하기 위한 대동아신질서의 강령에 대한 격의없는 의견의 교환 결과 완전한 합의에 이르게 되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대동아 민족을 영구히 해방하고 자주적 향상 및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도의에 기초한 신질서를 건설, 유지 하는데 협력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영구적인 선린우호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호간의 자주독립 및 영토를 존중 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대동아 전체의 안전과 공통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연대하여 상호 협력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대동아 한 국가에 대한 대동아 밖의 일체의 압박 및 위협은 대동아 전체에 대한 압박 및 위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분을 다하여 대응하고 서로 협력하여 공동방위 의 책무 를 다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대동아 각지방의 특장점을 증진시키고 장단상보(長短相補), 유무상통(有無相通) 하여 일체로서의 긴밀한 경제제휴 를 통하여 대동아 전민중의 생활 안정 및 복지를 확보, 증진시킨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대동아지역에서의 자원개발 및 이용에 대하여 형평의 원칙 하에 세계에 이를 개방 하고 또한 세계 각국 사이에 통상상의 호혜협력관계를 구축 하여 세계 경제의 발달 및 번영에 공헌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대동아문화의 본연의 특질을 존중하고 긴밀한 협력하에 문화 융합 및 발전에 힘써 대동아문화의 고양을 도모하고 나아가 세계문□ (글자가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다. 문맥상 ‘문화(文化)’ 혹은 ‘문명(文明)’ 으로 추정된다.) 의 진전에 기여한다. 대동아 제국(諸國)은 뜻을 같이하는 세계 각국과 상호 협력하여 각자가 소속된 지역에서 정의와 공정에 기초한 신질서를 수립 하여 상호불위협, 불침략의 원칙을 존중하고 평화와 협력에 의한 국제관계 처리를 통하여 세계의 평화유지 및 복지증진에 헌신한다. *주) 6항의 경우 자원의 개방, 통상간의 호혜관계 설정과 같은 원칙에 대해서는 각 위원간의 의견일치가 되지 않았으나 참고용으로 그대로 수록하였음. 대동아공영권의 정치체제 (8.23 전쟁목적연구소 정무과 2과 연구안) 대동아공영권의 이념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은 (1) 대동아 각국이 (가) 상호의 주권독립 및 자주적 발전을 존중하는 것, (나) 영미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에서 탈피하여 각자의 정치적, 경제적 자율 및 안정을 확보하여 공동의 이익 및 책임을 바탕으로 상호 협력하여 공동사업인 대동아의 평화와 안정의 유지 및 방위, 그리고 대동아의 흥륭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2) 세계 전반에서 위와 같은 정치적, 경제적 평화 및 안정을 우선 대동아지역에 확립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방법에 의한 지향을 함께 하는 공영권 밖의 여러 국가와 협력하면서 전세계에 유사한 공정한 평화를 초래하게 하는 것에 있다. 공영권의 정치구성 - 1. 구성분자 대동아의 각 독립국으로 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제3국의 속령에 대해서는 마땅히 준구성분자로서 취급한다. - 2. 각국의 지위 및 상호간의 관계 (가) 각국은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국제법상 평등하다. (나) 각국의 자주독립은 상호존중하며 공영권을 구성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공동의 이익과 책임감에 기초하여 협동행동의 관념을 가진다. 이와 같은 원칙에 따른 각국의 정치 관계 예시는 다음과 같다 : A : 법률적으로는 평등하나 사실상의 지위 및 실질적인 능력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이를 법률적 내지는 규약적으로 명확히 규정한다. B: 다만 지도국의 관념과 같은 개념을 법적 내지는 규약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피한다. C: 공영권의 구조는 일본을 축심으로 하여 각국을 연결하여 결집시키는 것 이나 추축국 이외의 각국간의 직접간의 연계는 희박하다는 주장도 있는 민큼 이를 법적 내지는 규약적으로 명확히 정하는 것은 피할 필요가 있다. D : 각국은 독립국가로서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외교를 행하기로 한다. E : 각국은 공영권 내의 안녕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에 대한 방위에 관한 협정에 따라 특정한 의무를 부담하고 내지는 공동행동에 나서기로 한다. 공영권과 외부의 정치관계 공영권과 외부의 정치관계에서 특기(特記) 할 점은 다음과 같다. (가) 공영권은 정치적으로, 지리적으로 근접한 대동아 각국간의 평화안정을 위한 기구로서, 이는 지역적,부분적 평화를 확보하여 세계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착실하고 현실적인 평화를 위한 기구를 건설한다는 표현으로 (이는 먼로주의 혹은 미국의 사상와 가까운 국제연맹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쇄국적, 배외적 도전적 사상에 반대한다. (나) 공영권과 외부와의 정치관계는 특히 공영권 각국간의 규약등에 있어서 명시된 사항 (평화와 안정의 유지, 공동방위 및 공동의 경제건설에 관한 특정 사항에 관하여 협의를 필요로 하는 것) 을 제외하면 공영권과 외부의 관계는 통상의 국가간의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단 이는 공영권내 규약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진행한다. 또한 공영권으로서 외부에 대한 행동을 위한 방법으로서는 공영권의 대표가 대리기관을 설치하지 않고 지도국이 권내 국가를 대신하여 외부와 교섭하거나 협정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공영권 각국은 어디까지나 자주적으로 외부 각국과 외교 사절을 교환하되, 규약에 의해 제한되는 범주에 있어서는 그 외교를 내용적으로 제한한다. 공영권의 구성과 대동아회의의 관계에 대하여 (가) 앞에서 서술한대로 공영권의 구상은 이를 어느 정도 성문화하기로 한바,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A : 일본과 각국간의 조약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축심을 구성하는 방법 B : 다자 조약에 의해 일거에 이를 구성하는 방법 C : 정책의 선언을 통하여 하는 방법 (공동선언을 통한 방법, 혹은 한 국가의 선언에 대하여 타국이 찬의를 표명하는 경우도 포함)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국내의 이론이 존재하는 바 반드시 적절한 방법을 강구할 것, 또한 대동아회의의 개최를 전제로 하는 경우 가장 실질적인 방법은 대동아회의의 결과로서 공동선언을 도출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음. (나): 따라서 대동아회의에서 이러한 공동선언을 제안하고 탐색하여 공영권의 구상에 맞게 공영권 각국의 관계 및 공영권 일부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천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됨. (다): 대동아회의를 개최하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음. A : 선언의 내용은 영미 격파에 관한 결의 표명과 대동아 건설에 관한 정책의 천명이라는 2가지의 요소를 다루되 이를 별개의 선언으로 분리할지 하나의 선언으로 통합할지 연구를 할 필요가 있음. B : 의제에 관해서는 사전 협의를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편 , 일본측의 제안으로서 무엇을 제안할 것인지, 또한 회의의 성격을 각국의 발언 및 제안을 상당히 자유롭게 하는 회의로 할 것인지, 혹은 선언안을 중심으로 해당 내용에 대한 토의를 중점으로 하여 구체적 성과를 기대하는 회의로 할 것인지의 연구가 필요함. C : 의사진행에 대해서는 이와 관련된 표결제도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음. D : 향후의 회의에 관한 사항으로, 선언과도 관련되는 부분으로 대동아회의를 정기적으로 수시로 개최하는 것 과 이를 규약에 병기하는 것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 대동아선언경제원칙 (8.25 전쟁목적연구소 연구안) ( *전쟁목적연구소 통상국안인 대동아선언(경제부문) , 전쟁목적연구소 정무국안인 대동아공영권의 정치체제, 외무성이 외주를 준 국제법학회특별문제연구회의 안인 대동아선언안 및 안도 요시로의 사안까지 초기 작성되었던 안들을 정리한 것이다. ) 경제적 안정이 있는 국가 또는 국가군을 형성한다. 현재 전쟁은 영국, 미국, 네덜란드의 경제 압박에 대항하고 자존자위를 위한 것으로 세계평화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 및 국가군을 형성하지 않으면 이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근대 경제생활의 발달과 복잡화, 근대 전쟁의 거대성과 다양성은 합중국(合衆國), 소련과 같은 대국가 사이에서만 비롯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동아 여러 국가로 하여금 하나의 경제단위를 결성할 필요성을 가지게 한다. 권내 각국은 독립, 평등, 상조(相助)의 대원칙에 근거하여 안정된 국가군을 결성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동아 여러 국가는 경제적 안정감이 허락한 한 권내 자원을 독점할 의사를 가질수 있다. 착취 없는 세계의 현실화 지금의 전쟁은 동아민족을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며 영미란(英米蘭) 이 동아민족의 착취를 통한 자신의 번영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의 여러 국가는 타 국가 또는 타 민족을 착취하려 해서는 안된다. 생활수준의 향상 동아민족의 생활 수준은 매우 낮은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민족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각국 각민족으로 하여금 각각의 생활을 안정시키게 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전잰목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의 영원한 평화 초래 앞의 3가지 조건을 달성함으로서 영원한 평화가 보장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 동아 국가의 전쟁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3가지 조건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형태로서 만족하는 바로, 이를 위한 본질적 조건으로 국제법 또는 조약의 보장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세계에 있어서 경제의 각 분야에서 자유,평등,호혜의 원칙이 진실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자원의 개방, 무역의 자유, 조약의 신성함과 같은 표어는 공염불 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의 경제체제 (8.31 전쟁목적연구소 통상국 연구안) (* 8월 25일의 대동아공동선언경제원칙을 보완한 것으로, 이를 토대로 9월 11일 전쟁목적연구소의 최종안이 대동아선언안이 작성되게 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본 안과 9월 11일의 대동아선언안은 내용에 있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알려졌다.) 대동아공영권의 경제적 본질 (가) : 대동아공영권을 세계경제진보의 과정 에서 보았을 때는 근대 경제 생활의 발달과 복잡화, 특히 근대전쟁의 거대성과 다양성등의 요구에 응하기 위한 필연적인 결집체제라고 할 수 있다. (나) : 대동아공영권을 발생의 과정 에서 보았을 때는 영, 미, 네덜란드의 경제적 압박에 대항하여 이들의 착취로부터 이탈하려는 대동아 각국의 자위(自衛)를 위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다) : 대동아공영권을 그 목적 에서 보았을 때는 국가생활의 안전 확보를 직접적인 공동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나아가 전세계에 유사한 형태의 국가 및 국가군을 구성하여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초래하는 것을 최종적 목표로 하는 대동아 각국의 협력체제라고 할 수 있다. (라) : 대동아공영권을 그 구성 에서 보았을 때는 공동의 목적하에 결집할 수 있는 독립 경제 단위의 집합체제이며, 따라서 공동목적에 관해서는 공영권 밖의 국가들과는 다른 특수한 경제적 의존 관계를 가지며 그 범위에 있어서 경제적 활동에 있어 부가적으로 필요한 통제와 제약을 받더라도 그 외의 분야에서는 경제적으로 자주독립의 표면을 유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 : 대동아공영권을 세계적 성격 에서 보았을 때는 폐쇄적 내지는 비협조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협력적이고 발전적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의 경제적 특징 (가) :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 대륙부터 태평양 도서지역까지를 포함하는 일본해, 황해, 동남지나해 (東南支那海) 등을 내해로 하는 국가군 으로서, 그 경제적 성격은 대륙적 성격을 가지는 해양국가군이라 할 수 있다. (나) : 대동아공영권은 한 대부터 열대까지 아우르는 국가군이나 그 경제적 특징은 오히려 열대 내지는 아열대적 성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 대동아공영권은 자원적으로는 국방기초자원 및 민생근간 물자에 있어서 대부분 자급이 가능할뿐더러 수십종의 특징있는 세계적 자원을 가진 자급적 발전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라) : 대동아공영권의 인적자원은 세계 인구의 약 4할을 차지하며 풍부한 인구는 저렴한 노동단가를 제공 한다는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마) : 대동아공영권은 자본, 교통수단, 기술등의 분야에 있어서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 열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 경제정책기조 대동아공영권의 경제정책은 당연히 그 이념, 목적, 경제적 특징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 권내경제정책 A : 권내경제에서는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에서는 일정한 종합적 기획에 근거한 계획 경제 또는 협력체제를 구성한다. 이외의 분야에 있어서는 공동목적의 달성에 지장이 없는 한 자주경제를 그 기조로 한다. B : 계획경제 및 협력체제는 실질적으로는 지도국의 지도하에 일정한 종합적 계획에 의거하는 것이나, 형식적으로는 각 구성분자간의 합의방식에 의하는 것으로 한다. C : 종합적 경제계획은 목표는 골자만 작성하는 것으로 하되, 수단적 방면은 각 구성분자의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한다. D : 계획경제를 행하거나 종합적 협력을 요하는 경제분야의 주요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D-1 : 중요국방자원 및 민생근간물자의 생산 및 배분 D-2 : 중요교통로의 유지 및 수송계획 및 중요국방자원 및 민생근간 물자 수송 D-3 : 노무(勞務)의 유효한 사용 D-4 : 엔(圓)을 중심으로 하는 화폐 교환제도의 원활한 운용 및 권내 자금의 유효한 이용 D-5 : 국방 및 민생에 중요한 관계에 있는 기술의 사용 (나) 공영권 외 경제 정책 공영권 밖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전술한 것처럼 경제계획 및 협력체제의 수행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제약을 하고 그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각국에 자주에 맡긴다. 단, (1) 실질상의 관계에 교환 운용에 대해서는 제한한다. (2) 필요시 공영권 외의 경제적 공격조치에 대해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협력조치를 취한다. 공영권 외 경제활동에 있어 지도국이 대표하여 행동하는 등의 방식은 피하고 각 구성분자로 하여금 일정한 종합 계획에 의거하여 행하게 한다. 교역 (A): 국방 및 민생에 중요한 관계가 있는 물자의 수출입 및 특수한 목적을 가진 수출입등은 일정한 종합계획에 의거하여 실시한다. 교통 (B) : 공영권 외의 중요 교통로에 대한 참가, 권내 교통로에 대한 개방등은 종합적 게획에 의거하여 실시한다. 금융 (C) : 공영권 외의 환율 정책, 공영권 외 투자 및 외자 유도 정책등은 이전의 것을 유지한다. 기술 교류 (D) : 국방 및 민생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는 기술의 교류는 계획적으로 이를 조장한다. 대동아공동선언안 (10.4 외무성 연구안) (* 전쟁목적연구소의 안을 토대로 외무성에서 작성한 안이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시게미츠 마모루의 사상이 크게 반영되었다.) 대동아를 대동아외 국가의 침략 및 식민지적 착취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고 도의에 바탕을 둔 대동아를 건설하여 만방공영의 세계를 건설하고 인류의 평화적 발전에 기여하고자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대동아 각국 정부대표는 공동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를 영원히 해방시키고 대동아 각 민족의 자주적 향상 및 발전을 기초로 하여 대동아 전체의 공존공영과 안정을 확보하는 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협동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자주독립 및 영토를 존중함과 동시에 선린우호, 상호협력의 관계를 확립한다. 대동아 각국은 외부로부터의 외협과 침략에 대해 협동하여 대동아를 보위한다. 대동아 각국은 민생향상과 상호경제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경제상으로 서로 긴밀히 제휴,협력하고 동시에 형평호혜(衡平互惠)의 원칙 아래 널리 세계에 자원을 개방하고 교역을 증진시키며 세계 경제의 발달 및 번영에 협력한다. 대동아 각국은 서로 각 민족의 문화의 본연의 특질을 존중하고‘아시아’문화의 고양을 도모하여 세계인문의 발달에 기여한다. 종교의 자유 원칙은 대동아 각국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대동아공동선언안 (10.18 외무성 연구안 수정안) (* 시게미츠 마모루가 다시 한번 수정한 안이다.) 대동아를 타국의 침략 및 착취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고 도의에 기초하여 대동아로 하여금 화친의 관계를 건설하고 나아가 만방공영의 세계를 건설하고 인류의 평화적 발전에 기여하고자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대동아 각국 정부대표는 공동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를 영원히 해방시키고 대동아 각 민족의 자주적 향상 및 발전을 기초로 하여 대동아 전체의 공존공영과 안정을 확보하는 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협동한다.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를 영원히 해방시키고 대동아 각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기초로 하여 대동아 전체의 안정보장과 공존공영을 확보하기 위하여 굳은 결의를 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자주독립 및 영토보전을 존중함과 동시에 선린속에서 평등과 상호 우호관계를 확립한다. 대동아 각국은 민생의 향상을 촉진하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형평호혜(衡平互惠) 의 원칙하에 긴밀한 경제제휴를 실행함으로서 대동아 전체의 경제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형평호혜의 원칙하에 널리 세계에 자원을 개방하여 교역을 증진시키고 나아가 국제교통에 대한 장애를 제거하여 세계 경제의 발전 및 번영에 협력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 고유의 전통, 종교, 문화를 존중하고 나아가 ‘아시아’본래의 정신적 문명의 고양을 도모함과 동시에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세계 인문의 발달에 기여한다. 이를 위하여 위와 같이 선언한다. *주) 대신이 작성한 초고를 다시 대신이 수정한 것. 대동아공동선언안 (10.20 외무성안-대동아성안 조정안) (* 외무성안과 대동아성안을 합쳐서 정부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성된 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외무성안의 형태를 사용하되, 대동아성의 요구가 크게 반영되는 모습을 보였다.) 본래 세계 각국에게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고 서로 의지하고 돕고 모든 국가가 함께 번성하는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은 세계평화 확립의 근본이다. 그리고 인근 국가들이 모여 공존공영의 질서를 건설하고 다른 지역 국가들과 협화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세계 평화 획립의 가장 유효하고 실질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영미는 자국의 번영을 위하여 타 국가, 타 민족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고 그 향상과 발전을 억압하고 있다. 특히 대동아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침략과 착취를 행하여 정당한 국민적 요망을 유린하고 상투수단으로서 분할지배를 모의하여 대동아 국가와 민족의 친화를 저지하며 대동아 예속화라는 야망을 꿋꿋히 세우고 마침내 대동아의 존립을 뿌리부터 뒤집어 놓으려 하고 있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대동아 각국은 이와 같은 원인에 의해 발생한 대동아전쟁의 본질을 인식하고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존자위를 완수하여 부흥과 흥륭을 도모하고 널리 여러 국가와 함께 세계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 각국의 공동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대동아가 협동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도의에 기초한 신질서를 대동아에 건설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에 공헌하기 위해 대동아 각국은 대동아건설의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동아 각국은 협력하여 대동아의 보전(保全)을 확보하고 각국이 자주적 향상 발전을 이루게 하여 공존공영을 확호하기 위한 신질서를 건설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주권, 독립 및 영토보전을 존중 하면서 선린으로서 상조돈목의 열매를 맺어 동아 전체의 친화를 확립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전통, 종교, 문화를 존중 하여 대동아 본연의 정신문명을 발양하고 각민족의 창조성을 신장하여 널리 문화교류를 도모하여 세계인문의 발달에 기여한다. 대동아 각국은 민생의 향상과 그 경제적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호혜의 원칙 아래 긴밀한 경제제휴를 실시하여 공동으로 대동아 전체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널리 세계에 자원을 개방하여 교역을 증진하고 세계경제의 발달 및 번영에 협력한다. 대동아공동선언안 (10.21 대본영정부연락회의안) (*20일의 안이 대동아성, 외무성 모두에게 비판을 받게 되면서 새로운 수정안이 등장하게 되었다.) 본래 세계 각국에게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고 서로 의지하고 돕고 모든 국가가 함께 번성하는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은 세계평화 확립의 근본이다. 그러나 영미는 자국의 번영을 위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억압하고, 특히 대동아에 대해서는 질리지 않는 침략과 착취를 하고, 대동아를 예속화하려는 생각을 버리지않고, 마침내 대동아의 안정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버리려고 했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제휴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존자위를 완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강령에 근거하여 신질서를 대동아에 건설하여 세계 평화에 확립에 기여하기로 한다. 따라서 대동아각국은 대동아건설의 원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동아 각국은 협동하여 대동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도의에 근거한 공존공영의 신질서 를 건설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여 상조돈목의 열매를 맺어 대동아의 친화를 확립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 민족간의 편견을 불식시키고 그 전통을 존중 하며 대동아 본연의 문화를 고양시킨다. 대동아 각국은 호혜속에서 긴밀히 제휴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대동아의 번영을 증진시킨다. 대동아 각국은 만방과의 교의를 돈독히 하고 널리 문화를 교류하고 나아가 자원을 개방하여 세계의 진보에 공헌한다. 대동아공동선언안 (10.30 최종안) (*21일의 수정안에서 일부 수정을 거쳤다. 1항의 '신질서'는 '질서'로, 5항에는 해군측의 의견을 반영하여 '인종적 차별을 철폐하며' 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본 안에서는 위의 수정안에 대한 각국 대표들의 의견 역시 일부 반영되었으며 이렇게 작성된 최종안이 대동아회의에서 논의되었고 이가 사실상 그대로 반영되었다.) 본래 세계 각국에게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고 서로 의지하고 돕고 모든 국가가 함께 번성하는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은 세계평화 확립의 근본이다. 그러나 영미는 자국의 번영을 위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억압하고, 특히 대동아에 대해서는 질리지 않는 침략과 착취를 하고, 대동아를 예속화하려는 생각을 버리지않고, 마침내 대동아의 안정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버리려고 했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제휴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존자위를 완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강령에 근거하여 대동아를 건설하고 세계평화의 확립에 기여하기로 한다. 대동아 각국은 협동하여 대동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도의에 근거한 공존공영의 질서 를 건설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여 상조돈목의 열매를 맺어 대동아의 친화를 확립한다. 대동아 각국은 상호간의 전통을 존중하며 각민족의 창조성을 함양하여 대동아의 문화를 고양시킨다. 대동아 각국은 호혜속에서 긴밀히 제휴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대동아의 번영을 증진시킨다. 대동아 각국은 만방과의 교의를 돈독히 하고 인종적 차별을 철폐하며 널리 문화를 교류하고 나아가 자원을 개방하여 세계의 진보에 공헌한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따른 각국의 반응 (1943.10)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대동아회의의 개최에 대한 각국 정부의 승인 취득 방법 훈령 쇼와 18 (1943)년 10월 4일 아오키 카즈오(青木一男) 대동아대신이 만주국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대사, 중화민국 타니 마사유키 (谷正之) 대사 외 각국 대사에게 전보 발송. 10월 4일 발송 / 합제 201호 (관장부호급(館長符號扱), 긴급) 이번에 제국은 요령 (1943년 5월 31일 결정된 대동아정략지도요강을 의미.) 에 따라 대동아회의 개최의 방침을 결정한 바 , 별도로 전달한 요령과 여러 사항을 인지하여 시급하게 현재 역임하고 있는 정부에 대하여 본건, 회의 개최에 관한 우리측의 내의(內意)를 통보하고 회의 참가에 대한 상대방의 내락(內諾) (비공식적으로 우선 승낙함.) 취득을 기대하고 있음. 하루 빨리 정식으로 초청장을 발부하고 조금이라도 개최 기일 및 준비 관계를 용이하게 위하여 이번달 중순까지는 (늦어도 이번달 10일까지) 상대방의 내락을 획득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임. 1) 본회의의 목적에 관하여 본 회의의 개최 목적은 우리쪽의 정략목적을 획득하기 위한 것 으로, 우리쪽은 물론 상대편 역시 이러한 목적을 획득할 수 있음을 이야기할 것. 본 회의의 개최 취지에 관한 설명은 본회의 의제와 관련된 것으로, 대동아 각국의 정부 수뇌가 회합하여 전쟁 완수와 대동아 각국의 공영을 취지로 하는 자주적 발전 및 대동아 흥륭을 위한 공동건설의 방침에 대하여 격의없는 의견교환을 완수하고 그 협의 결과를 합당한 형식에 의해 대내외에 천명하는 것. 이는 각국 스스로를 위해서도 대동아 전체를 위해서도 지극히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된다는 취지로 설명할 수 있음. 2) 참가국 대표의 구성에 대하여 참가국 및 대표의 구성에 관해서는 별도로 전달한 요령1 및 요령2에 따라, 참가 대표에 있어서는 본건 회의의 개최 의의 및 중요성에 비추어 정부수뇌 본인이 스스로 참석하는 것을 특별히 중시 하고 있음. 이점을 유의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최대한 힘을 쏟을 것. 제국측은 주최적인 관계로 대표인 총리대신 외에도 대동아대신 및 외무대신을 참석시킬 것. 수행원에 대해서는 제반 편의상 최소한으로 하는 취지이나 구체적인 인원수에 대해서는 각국 각각의 사정을 배려하여 각국이 적절히 인원수를 조절할 수 있게 할 것. 하지만 준비의 사정을 위하여 인원 수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통보하기를 희망함. 인도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경우, 그 수반을 참가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참가 각국 대표와 동일한 자격으로 참가시키는 것은 현재 고려중임. 회의의 의안채택 과정을 비롯한 회의의 종반부 단계에서 현재 도쿄에 있는 추축국 외교 대표자의 배석을 고려하고 있음. 3) 회의의 개최일에 대하여 회의 개최일은 회의의 취지에 비추어 신중한 고려 결과 11월 5일부터 이틀간 하기로 결정되었음. 물론 참가 각국의 각각 사정을 비롯한 여러 사정이 존재할 수 있는 만큼, 우리로서는 위의 개최일은 변경될 수 있음. 이를 포함하여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낼 것. 4) 의제에 대하여 의제에 관해서는 별도로 전달한 요령 5의 내용대로 의안에 대한 탐색, 내용 및 형식 (공동성명 등) 에 대해서는 추후 우리측의 초안을 사전에 각국측에 전달 하여 각국 측의 의견을 구하고 회의전에 구체적인 안을 준비할 의향임. 다만 조약의 체결은 예상되지 않음. (따라서 각국 대표의 전권 위임장의 소지를 필요로 함) 의제에 관한 각국 대표의 소견에 관해서는 그 내용의 번역, 개진 시간등 회의 개최전에 서로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사전에 연락을 하여 협의할 것. 5) 회의의 비공개 원칙에 대하여 회의는 원칙적으로 공개하기로 하나 심의 종료 후 최후 의안 채택의 경우에는 일정한 제한 아래 공개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음. 6) 석차(席次) 에 대하여 석차에 대해서는 별도로 전달한 요령 6의 4항에 따라 국가명을 ‘이로하’ 순으로 표기하기로 하였음. 본래 구미등에서 국제회의에 사용되었던 ‘알파벳’를 대신하여 ‘이로하’순으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인정되는 바, 이에 대한 상대방의 양해를 얻을 수 있도록 적당히 설명할 것. 7) 기밀 유지에 관하여 본 회의에 대한 적측의 방해적 개입을 고려하여 엄격하게 비밀리에 진행할 필요가 있음에 따라 기밀유지에 대해서는 특히 주의해줄 것, 그 외에 사항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추가적으로 별도로 전보를 전송할 것. 예비교섭경과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따른 각국의 반응) 1) 중화민국 중화민국 정부에 대해서는 난징의 제국대사가 10월 7일 오후 왕 주석과 회견하여 제국정부의 훈령 요지에 대해 설명하여 본 회의에 대한 참가 여부를 물었고 왕 주석은 전부 이를 요해(了解)하고 참석할 것 이라 밝혔음. 2) 타이 왕국 (가) 주 타이왕국 대사는 10월 6일 오후 피분 총리 (외무부 장관 루앙 위칫와타칸 (Luang Wichitwathakan 도 함께 배석.) 와 2시간에 걸쳐 회담하여 제국정부의 훈령 취지를 설명하고 회의에 출석할 것을 설득하는데 노력하였음. 하지만 피분 총리는 회의의 중요성이 충분함을 알고 있으나 자신의 건강상황으로는 일본의 장거리 여행은 도저히 견디기 어렵다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몸은 겉모습은 굳건해보여도 현재의 총리의 업무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아내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이야기 하며 자신은 총리이자 동시에 최고 군수통자임으로 책임도 충분히 다한 만큼 이전부터 사직을 생각해오고 있었던 참으로, 이번에 이렇게 일본이 끝까지 총리의 출석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사직 후 후계자와 결정 을 합의하여 그 총리를 회의에 참석시키는 것이 어떻겠냐 이야기하였음. 이에 위칫와타칸 장관도 거들어 치분 총리는 일본에 대해 협력하며 노력해왔으나 총리 자신이 말한대로 건강 상태가 이렇게 좋지 않으니 향후의 타이 왕국-일본 협력을 고려하여 총리가 신임하는 경력이 충분한 인물을 대리로 하여 일본을 방문하게 하는게 어떠한가 라고 요청함. 또한 동시에 장관은 참석한 다른 나라들은 일본의 원조에 의해 건설 혹은 독립을 얻게된데에 반해, 타이 왕국은 예전부터 독립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과 동시에 일본과 동맹하여 공동의 작전에도 함께 노력하고 있는 국가로서 다른 국가와는 스스로 다른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은 이에 대해 타이 왕국에 대한 다른 어떠한 대우를 할 용의가 있는가 질문하였고 제국대사는 이에 대해 일본은 타이 왕국의 역사적 입장,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등을 충분히 고려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으며 도조 총리가 7월에 타이 왕국을 방문한 만큼 (도조 히데키는 1943년 7월 3일, 5월 필리핀 방문을 잇는 두 번째 남방 시찰에서 타이 왕국의 수도 방콕을 방문하여 피분 총리와 회담을 하였다. 그리고 이 타이 왕국 방문에서 도조는 타이 왕국에게 북부 말레이 4주 및 샨 2주의 태국 영토 편입을 제안하였다.) 피분 총리도 이에 대한 답례로서 방문을 다시 한번 고려해줄 것을 요청하며 타이 왕국의 지위에 대해서는 모든 방법을 가지고 경의를 표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출석국의 석차는 일본어 이로하에 따른 국명순인 만큼 양해를 부탁한다고 하였으나 타이 왕국은 타이 왕국이 제2순위가 되어야한다고 응수 하는 모습을 보였음. (나) 따라서 피분 총리는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함. 도조 수상의 방문에 대한 답례의 의미를 강조하여도 방문의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음. 총리는 본 회의 출석을 우려스러운 처안이라 생각하며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상당히 굳건한 의사를 가지고 본 회의의 출석을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 이러한 피분의 심경의 이유에 대해서 타이 왕국 주제 제국대사는 피분 총리가 건강을 이유로 일본 방문이 불가능함을 고집하고 있지만 대사 파견 직전 이별 인사차 총리를 방문한 이시이(石井) 참사관에 따르면 피분 총리는 지극히 명랑한 태도로 최근 방콕이 좋은 계절을 맞이한 만큼 매일 테니스 를 즐기고 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 만큼 건강을 사유로 일본에 방문할 수 없다는 것은 진정한 사유로 보기 어렵다 고 생각됨. 쁠랙 피분송크람 (Plaek Phibunsongkhram) 당시 타이 왕국 총리. 그는 자신의 대동아회의 참가를 강하게 거부했다. (다) 피분 총리가 이러한 행보를 보이는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됨. (1) 최근의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고 있는점, 그리고 이에 편승하여 적의 대 타이왕국 선전 모략이 일반 타이인으로 확대된 점. (2) 버마에 대하여 적측의 반격이 다가오고 있는점, 이에 따라 방콕이 대규모 공습의 위협을 받게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는 점. (3) 위의 두가지 요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해외를 방문하게 되면 정적의 쿠테타 음모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점. (4) 방일하게 될 경우 일본에 의한 강요로 방일하게 되었다고 적측은 비난할 것이기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불리해질 수 있다는 점. (5) 피분 자신은 물론 그 부인도 이에 대해 심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점. 또한 피분과 부인 모두 비행기를 타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 (6) 타이 왕국이 다른 국가와 비교하여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입장상 다른 출석국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타이 왕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점. 이러한 이유를 제쳐두고라도 피분 총리는 본 회의에 확고하게 출석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있음. 위칫와타칸 외무부 장관이 제국 대사에게 극비사항을 귀띔해준 바에 따르면 7일 오후 피분은 임시 비밀회의를 열어 그 석상에서 위칫와타칸 장관과 30분에 걸쳐 대화하면서 피분은 일본을 방문하지 않을것이며 피분은 절대로 일본측의 방문요청을 수락하지 않을것임을 밝히며 자신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면 지극히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될것이라는 뜻을 밝힘. 또한 피분은 매우 기분 나쁜 투로 자신이 일본 방문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압박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였음. 이에 위칫와타칸은 일본은 반드시 무력을 사용하든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일본 방문을 하게 하려 할 것 이라고 하였고 피분은 자신은 그럼에도 가지않겠다 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이후 회의는 종료되었음. (라) 타이 제국의 대사는 나카무라 사령관 ( 나카무라 아케토(中村明人)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타이 왕국 주둔군 사령관.) 과 함께 8일 오후에 피분 총리를 만나 약 2시간에 걸쳐 설득하려 노력하였지만 피분 총리의 의사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였음. 결국 제국정부는 이를 수습할 조치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여 타이 왕국측으로 하여금 절충할 수 있도록 제국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음. (1) 피분 총리가 본 회의에 출석하는 것이 우리측으로는 가장 희망하는 것이나 건강을 이유로 계속하여 출석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이상 어쩔수 없음, 따라서 대리자의 파견을 인정할 것. (2) 본회의의 중요성에 비추어 대리자는 명실공연하게 타이 왕국을 대표하기에 충분한 관록을 가진 거물 인사여야 할 것. (3) 대리자는 본 회의에 출석하는 이유로서 도조 총리의 방문에 대한 타이 왕국의 답례의 의미를 포함시키게 할 것. (마) 피분 총리의 대리인에 대해서는 그후 주 타이왕국 주재 제국대사와 타이측과 절충을 거듭한 결과 타이 왕국 측은 완 와이타야콘 친왕을 파견하는 취지의 제안을 전달 하였고 이를 우리측이 받아들여 완 와이타야콘을 피분 총리의 대리로서 출석시키기로 의견의 일치 를 보았음. 완 와이타야콘은 황족인 관계상 타이 왕국의 헌법에 근거하여 각료가 될 수 없다는 결점이 있다는 점이 있어 이를 타이 왕국측에 확인해본 바 위칫와타칸 장관은 타이 왕국 헌법상 황족의 정치적 지위 취임 불가능이라는 원칙은 단적으로 내정상의 관계에 그치는 것으로, 대외적으로 국가 내지 정부를 대표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며 이에 따라 이번에는 완 와야타야콘을 총리 대리로서 파견할 의향이라고 서술하였음. 이에 제국정부는 타이 왕국이 완 와이타야콘이 피분 총리를 대리하게 되어도 그 지위나 책임에 있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상 완 와이타야콘을 타이 왕국 대표로 출석시키기로 결정하였음. 3) 만주국 만주국 정부에 대해서는 만주국 제국대사가 10월 8일 장징후이 국무총리와의 회견을 진행하였고 여기서 장징후이 국무총리는 회의에 참석할 것 이라 밝혔음. 4) 필리핀 공화국 필리핀은 올해 10월 14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제국은 당일 이를 승인하였음. 또한 사전의 연락을 통한 필리핀 제국대사와 필리핀측의 회견결과 10월 15일 본 훈령에 찬의를 표하고 회의에 참석할 것 이라 밝혔음. 5) 버마국 10월 8일 동인도 제국 대사가 바모 총리를 방문하여 제국정부의 훈령 취지를 바탕으로 대동아회의의 개최에 관한 우리들의 내의를 전달하고 회의 참가에 관한 뜻을 구하니 바모 총리는 즉시 흔연히 본회의에 참가한다 는 뜻을 회답하였음. 또한 석차에 따라서 바모 총리는 버마국이 필리핀보다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이러한 일본의 결정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며 누차 석차 변경을 요구하는 등의 고충을 서술 하였음. 이에 제국 대사는 이는 본건은 여러 관계 각국이 관여된 문제로 변경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의견을 제국정부에 전달은 하겠다고 응수하였음. (공식적으로 초대장은 10월 15일 발송되었음.)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회의 에 관한 건 (1943.10.2)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大東亞會議ニ關スル件) . 일본은 이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대동아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뒤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동아회의는 처음부터 일본에 의해, 치밀하게 만들어진 '연극' 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쇼와 18 (1943)년 10월 2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요해) 대동아전쟁의 완수를 위하여 제국을 중심으로 하여 대동아의 각 국가 각 민족을 결집시켜 정략적 태세를 정비, 강화하는 초석으로 삼아 정략적 태세의 정비, 강화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대동아회의를 개최한다. 1. 참가국가 제국 (일본) 만주국 중화민국 타이 왕국 버마국 필리핀 공화국 (인도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경우, 대표자를 배석자로 하여 참가시키는 것으로 한다.) 2. 참가국가의 대표구성 제국 : 내각총리대신 (대동아성 대신 및 외무대신 열석) 만주국 : 국무총리 중화민국 : 행정원장 타이 왕국 : 총리대신 버마국 : 총리대신 (행정부 수장이 국가를 대표) 필리핀 공화국 : 대통령 (행정부 수장이 국가를 대표) 각국 대표는 각국의 전권위임장을 가진다. 각국 대표의 수행원은 필요시 최소한으로 구성한다. 3. 시기 쇼와 18 (1943) 년 11월 5일부터 이틀간 진행하는 것으로 한다. 4. 장소 도쿄 5. 의제 전쟁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안에 관한 건 (회의에서 이를 순서대로 의논하여 견고한 전쟁완수의 결의와 대동아공영권 확립의 방안에 대하여 대내외에 표명한다) 본안에서 일응 본국은 안건 도출 과정에서 사전에 각국 측의 의견을 사전에 충분히 반영하여 제안한다. ◎ 의제의 표명은 공동선언등의 형식을 취한다. 6. 의사일정 및 기타 1) 의사일정 제1일 제국총리대신 인사 의제에 관한 각국 대표들의 소견 발표 제2일 회의 안건에 대한 논의, 안건 채택 제국총리대신 인사 2) 용어 일본어를 정식언어로 하되 , 각국 대표들의 연설과정에서는 필요한 경우는 통역을 사용한다. 3) 의사진행, 의결과정 의장은 전 회의과정에서 일본 대표가 담당한다 . 의결은 만장일치로 진행한다. 4) 석차 (席次) 국명에 따라 배열하며, 국명은 이로하 순으로 한다. 회의와 관련있는 행사 역시 이와 같이 행한다. ◎ 유럽국가 등에 공개되는 자료에는 알파벳 순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한다. 5) 회의에 관한 발표 의사진행 과정은 발표하기로 한다. 의사진행 과정의 공개는 회의의 종료와 함께 신속히 진행하기로 한다. ◎ 의사진행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 (안건 논의과정 등)의 경우 제한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고려한다. 6) 초청장 초청장은 10월 중순에 발송하는 것으로 한다. 다만 사전에 비공식적으로 이에 초청에 관한 의견 을 전달하기로 한다. 위의 초청장에는 의제로써 ‘전쟁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안에 관한 건 ’ 을 함께 첨부하여 이를 각국 주재 대사에게 설명한다. 7) 기밀유지 발표 전까지는 이에 관한 사항을 기밀로 하며, 특별히 보안에 신경 쓸 것.
- 대동아공동선언 (大東亞共同宣言, 1943.11.6)
대동아회의의 둘째날, 대동아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도조 히데키 (일본뉴스 제176호) 대동아회의의 둘째날인 1943년 11월 6일, 회의 참가국들의 논의끝에 대동아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일본이 주도로 작성한 원안에 태국의 완 와이타야콘 대표는 수정안을 제안했으나, 이는 받아드려지지 않고, 원안에서 일부분만 수정한채 발표가 되었다. 이 대동아공동선언은 참가국의 특정상 일본어 (일본), 중국어 (만주국, 왕징웨이정권), 영어 (필리핀 제2공화국, 버마국), 프랑스어 로 작성되었다. 대동아공동선언(大東亞共同宣言) 쇼와 18(1943)년 11월 5일 및 6일 양일 도쿄에서 대동아회의가 개최되었고 회의의 참석각국대표는 다음과 같다. 昭和十八年十一月五日及六日ノ兩日東京ニ於テ大東亞會議ヲ開催セリ同會議ニ出席ノ各國代表者左ノ通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각하 중화민국 국민정부 행정원원장 왕징웨이 각하 타이 왕국 내각총리대신 완 와이타야콘 각하 만주국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 각하 필리핀 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 각하 버마국 내각총리대신 바모 각하 본 회의에서는 대동아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의 방침에 대해 각국대표들은 심의깊은 협의를 이루어 전원일치로 다음과 같은 선언을 채택하였다. 同會議ニ於テハ大東亞戰爭完遂ト大東亞建設ノ方針トニ關シ各國代表ハ隔意ナキ協議ヲ遂ケタル處全會一致ヲ以テ左ノ共同宣言ヲ採擇セリ 본래 세계 각국에게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고 서로 의지하고 돕고 모든 국가가 함께 번성하는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은 세계평화 확립의 근본이다. 그러나 미영은 자국의 번영을 위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억압하고, 특히 대동아에 대해서는 질리지 않는 침략과 착취를 하고, 대동아를 예속화하려는 생각을 버리지않고, 마침내 대동아의 안정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버리려고 했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抑々世界各國ガ各其ノ所ヲ得相倚リ相扶ケテ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世界平和確立ノ根本要義ナリ 然ルニ米英ハ自國ノ繁榮ノ爲ニハ他國家他民族ヲ抑壓シ特ニ大東亞ニ對シテハ飽クナキ侵略搾取ヲ行ヒ大東亞隷屬化ノ野望ヲ逞シウシ遂ニハ大東亞ノ安定ヲ根柢ヨリ覆サントセリ大東亞戰爭ノ原因ココニ存 ス 대동아 각국은 상호제휴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존자위를 완수하려 다음과 같은 강령에 근거하여 대동아를 건설하고 세계평화의 확립에 기여하기로 한다. 大東亞各國ハ相提携シテ大東亞戰爭ヲ完遂シ大東亞ヲ米英ノ桎梏ヨリ解放シテ其ノ自存自衞ヲ全ウシ左ノ綱領ニ基キ大東亞ヲ建設シ以テ世界平和ノ確立ニ寄與センコトヲ期ス 1. 대동아 각국은 협동하여 대동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도의에 근거한 공존공영의 질서를 건설한다. ( 一、大東亞各國ハ協同シテ大東亞ノ安定ヲ確保シ道義ニ基ク共存共榮ノ秩序ヲ建設ス) 1. 대동아 국가들은 서로의 자주와 독립을 존중하고 서로 조화롭게 협력하며 대동아에 친밀감, 화합, 화합을 구축한다. ( 一、大東亞各國ハ相互ニ自主獨立ヲ尊重シ互助敦睦ノ實ヲ擧ゲ大東亞ノ親和ヲ確立ス) 1. 대동아 각국은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고, 각 민족의 창조성을 늘려 대동아 문화의 기치를 높힌다 ( 一、大東亞各國ハ相互ニ其ノ傳統ヲ尊重シ各民族ノ創造性ヲ伸暢シ大東亞ノ文化ヲ昂揚ス) 1. 대동아 국가들은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대동아의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긴밀히 협력한다. ( 一、大東亞各國ハ互惠ノ下緊密ニ提携シ其ノ經濟發展ヲ圖リ大東亞ノ繁榮ヲ增進ス) 1. 대동아 각국은 모든 나라와의 교류를 깊게 하고,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널리 문화를 교류하고, 널리 자원을 개방해 세계의 발전에 공헌한다. ( 一、大東亞各國ハ萬邦トノ交誼ヲ篤ウシ人種的差別ヲ撤廢シ普ク文化ヲ交流シ進ンデ資源ヲ開放シ以テ世界ノ進運ニ貢獻ス) 도조가 이를 직접읽었고 이는 녹음본으로도 남아있다. ( 여기를 클릭 ) 선언을 작성하는 가운데, 버마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 들은 마지막 항의 '인종차별' 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왕징웨이 는 이와 다르게 두번째 항의 '자주와 독립을 존중' 이라는 항목에 주목하였다. 본래 이 항은 두번째 항보다 밑에 적히게 될 예정이었으나, 왕징웨이가 이가 중요함을 두번이나 강조하면서 이 항이 두번째로 올라오게 되었다. [출처] 도조의 사진 (일본뉴스176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64_00000 표지 사진 : https://image.space.rakuten.co.jp/d/strg/ctrl/9/c508c68cee915cb077534e76c37ee54ea34482e5.63.2.9.2.jpeg 원문 (일어) : https://ja.wikisource.org/wiki/%E5%A4%A7%E6%9D%B1%E4%BA%9C%E5%85%B1%E5%90%8C%E5%AE%A3%E8%A8%80 원문 (일/중/불/영) : https://www.jacar.archives.go.jp/das/meta/B13090817500 (日 아시아문화자료센터)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정략지도요강(大東亞政略指導大綱, 1943.5.29)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4~10.15)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공동선언의 완성 과정 (1943.7~1943.10) 0. 대동아공동선언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1943.10)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1943.10) 0. 대동아회의 개최에 대한 선전 실시요강 (1943.10.3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 대동아회의 및 대동아공동선언에 관한 선전 실시 개황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1943년 5월 27일 작성된 대동아정략지도요강안. 이를 통하여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확립이라는 명목아래 점령지 정책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본 안에서 처음으로 '대동아회의' 가 언급되었다. 27일의 안은 초안으로, 본 안이 여러번의 수정을 거친 끝에 31일 최종안이 만들어지게 된다. 본 글에서는 그 과정을 따라가보자 한다. 대동아정략지도요강안 쇼와 18 (1943) 년 5월 27일 1.방침 (方針) 1. 제국은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제국을 중핵으로 하는 대동아의 여러 국가 및 민족을 결집시키기 위한 정략적 태세를 더욱 정비 강화하여 전쟁 지도의 주도성을 견지하고 세계 정세의 변화에 대처한다. 정략 태세의 정비 강화는 늦어도 11월 경 까지 달성한다. 2. 정략태세의 정비는 제국에 대한 여러 국가 및 여러 민족의 전쟁 협력 강화 를 주 안으로 하며, 특히 지나 문제의 해결에 중점을 둔다. 2. 요령 (要領) 1. 대 만화(滿華)정책 : 제국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국 – 중화민국 간의 결합을 더욱 강화한다. 대 만주국 정책 : 기존 정책을 유지한다. 대 중화민국 정책 :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지나문제 처리 근본방침’ 의 철저 구현을 실현하기 위해 방침의 내용에서 정한 것과 같이 일화기본조약을 일화동맹조약으로 개정 하는 것을 빠르게 준비하여 정리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민정부로 하여금 대 충칭 정치공작의 실시를 지도한다. 2. 대 타이왕국 정책 : 기존 방침에 따라 상호협력을 강화하고 ‘ 말레이 (현재 말레이시아의 Sirat Malai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이 왕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이지역을 자국으로 편입시켰다.) ’ 의 실지 회복 , 경제협력을 가속화한다. 샨 지역의 일부를 타이 왕국령으로 편입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버마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결정한다. 3. 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책 : 기존의 정책을 강화한다. 4. 대 버마 정책 : 기존의 요강을 실행한다. 5. 대 필리핀 정책 : 기정 방침에 따라 빠른 시기에 독립시킨다 , 독립 시기는 올해 9~10월 즈음으로 예정하고, 최대한 준비를 촉진한다. 6. 기타 점령 지역에 대한 방책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단 6-2 이외의 부분은 대내외에 당분간 발표하지 않는다.) ‘말레이’,‘수마트라’,‘자와’.‘보르네오’.‘세레베스’는 제국령으로 결정 하고 중요자원의 공급원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개발하고 민심의 파악에 힘쓴다. 앞에서 언급한 지역은 원주민의 민도 발전에 부응하여 원주민을 정치에 참가 시킨다. 뉴기니 및 6-1에서 언급한 지역 이외의 점령지에 대한 정책은 차후 별도로 결정한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에서 현재로서는 당분간 군정을 유지한다. 7. 대동아회의 : 이상의 방책을 구현하기 위하여 올해 10월 하순경 (필리핀의 독립후) 대동아 각국의 지도자를 도쿄에 참집시켜 견고한 전쟁 완수의 결의와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대외에 천명한다. 대동아정략지도요강의 원안이 제안된 이후, 정부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논의하였다. 그 논의과정이 '대동아정략지도요강에 대한 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는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의 관계 설정 및 남방 점령지 문제가 논의되었다. 대동아정략지도요강에 대한 건 쇼와 18 (1943) 년 5월 27일 5월 26일 대본영연락회의에 대한 의견교환에 기초하여 다음날 27일 오전에 관련성(省) 사무연락회의가 있었으며 그 결과 27일 오후에 서기관장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 내각서기관장을 의미.) 주최하에 육군, 해군 군무국장, 외무성 정무국장, 대동아 총무국장 및 스즈키 총재 (국무대신 겸 기획원 총재 스즈키 테이이치(鈴木貞一)를 의미.) 가 출석하여 원안에 대하여 심의하였음. (사무국 회의에는 대동아성은 출석하지 않았으며 서기관장 회의에서 처음으로 의견을 개진하였음.) 대동아정략지도요강 원안 (위의 대동아정략지도요강안을 의미.) 에 대하여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가) : 일화기본조약을 일화동맹조약으로 개정하는 건 다케우치 총무국장 (대동아성 총무국장이었던 타케우치 신페이(竹内新平)를 의미.) 은 일화기본조약 중에는 여러 복잡한 규정이 존재하며 폐지할 수 있는 부분도 여러 존재하지만 유지해야할 규정도 필요하며, 게다가 북지(北支) 및 몽강(蒙彊)의 특수성 및 해군 등 군사기지 문제에 대한 곤란한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곤란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이를 철폐하는 것이라면 대동아성은 일화기본조약을 동맹조약으로 개정하는 것에 의의가 없음. 만약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러한 문제를 동맹조약에서 유지시킬 생각이라면 반대를 표명하였음. 스즈키 총재는 이에 대해 북지, 만몽(滿蒙) 의 특수성과 같은 이제 이를 철폐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충칭에 대한 공작도 할 수 없음을 밝힘. 또한 본안이 추구하는 일지(日支) 의 일체화라는 이상 역시 실현할수 없게 되는 만큼 당연히 이를 해소해야한다고 주장하였음. 다만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면 이 때는 동맹조약 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저 기본조약에 대한 일부 개정 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함. 오카 (오카 타카즈미(岡 敬純) 해군 군무국장을 의미.) , 사토 (사토 켄료우(佐藤賢了) 육군 군무국장을 의미.) 육해군 군무국장도 기술적으로 기본조약을 동맹조약으로 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게 아닌 이상 반대하지 않으며 ,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요체도 진행된 만큼 개인적으로는 ‘가능하면 동맹조약으로’의 방향으로 진행하기를 추구하되, 동시에 여유를 취하는 작성법으로서 ‘일화기본조약을 개정하여 필요한 경우 일화동맹조약을 체결한다’ 라고 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의견을 서술하였음. (나) 국민정부로 하여금 대충칭 정치공작을 실시하도록 지도하는 것에 대한 건 이에 대해서는 카미무라 (카미무라 신이치 (上村伸一) 외무성 정무국장을 의미.) 로부터 26일의 연락회의에서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 지적이 있었으며 연락회의에서는 ‘국민정부가 대충칭 정치공작을 하는 것은 막는다’ 라고 정리되었음을 지적하였음. 이에 대하여 스즈키와 호시노(星野) 모두 불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본 대강은 일본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인 만큼 난징의 행동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결정은 결국 일본이 무엇이든 이를 강요한다는 인상을 남길수 있어 우리측의 이러한 행동은 조금도 난징에 통하지 않을 것 임을 이야기 하며 따라서 우리측의 지도에 따라서 공작을 수행할 수 있게 하자라고 주장하였음. 하지만 우리의 이런 행동이 난징을 공격하기 위한 의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만큼, 특히 국민정부에 대한 지도는 난징에 주재하고 있는 제국 대사로 하여금 행하게 하고 그 외에는 난징에 접촉하여 본대강 결정안에 대하여 대사를 귀국시켜 직접 우리측의 의향을 설명하고 이에 따라 대사로 하여금 적절히 난징에 이를 설명, 지도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음. 물론 이러한 지도는 해당 문구의 해석을 비롯한 부차적으로 여러 귀찮은 논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나 이는 이를 집행하는 대사의 재량에 달려있다고 하였음. 더구나 대충칭 정치공작의 노림수는 충칭을 무너트리기 위한 것으로, 전면화평의 전망이 거의 없다고 하여 전명화평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되며 , 만약 전면화평이 성공하고 장제스가 난징에 올 경우 장제스로 하여금 대영미 선전포고를 하게 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면 반드시 대영미 선전포고를 강요할 필요 없이 어디까지나 지나에서의 영미세력의 배제 정도만을 엄수하게 하면서 형식적으로는 중립의 입장을 취하게 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현재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조급한 감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호시노, 스즈키의 의견 개진이 있었음. (다) 대 타이왕국 정책 연락회의에서의 의견교환의 결과에 기초하여 ‘샨’ 지방의 일부를 타이 왕국령으로 편입하는 원칙을 결정 하였음. 단, 실시 시기를 별도로 고려하되 타이 왕국으로 하여금 우려하지 않게 할 것. (라) 대 필리핀 정책 원안에는 독립시기를 대략 9~10월 중으로 예정하였으나 독립 준비를 위해서는 상당한 일수가 필요하다는 논의도 존재한다. 따라서 10월 중으로 예정하는 것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음. 단, 사토로부터 육군측은 하루라도 빠르게 이를 실행하기를 희망하는 만큼 9~10월 중이라는 문구를 10월 중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음. 하지만 이를 임시회의 등에서 설명하는 경우 독립시기를 ‘올해 안’으로 하는 하는것에 대한 양해를 성립하였음. (마) 제6항과 관련된 건 제 6항에 대해서는 약소한 문구의 수정이나 실질적인 변화가 불필요하다고 생각됨. 본 대강안의 결정은 연락회의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되지 않고 어전회의의 결정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나왔음. 제6항의 ‘말레이’,‘수마트라’등 광대한 지역을 제국 영토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국민정부로 하여금 대충칭 정치공작을 하게 하는 것도 대충칭 화평공약을 강요한다는 취지가 되는 만큼 이를 결정하기 어려운 만큼 어전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를 변경 혹은 유지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음. 이점을 고려하여 이번의 대강은 어전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본 대강안은 29일 (토요일)의 연락회의에서 부의(附議) 하기로 하였음. 이후 대동아정략지도대강안은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 올려져 논의되게 된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서는 앞의 회의에서 화두가 되었던 중화민국과의 관계, 남방점령지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 경과 쇼와 18 (1943) 년 5월 29일 사토 육군 군무국장으로부터 의제인 대동아정략지도대강에 대한 설명이 있었음. 이 설명에서는 (1) 대화(華)방책에 대해서는 일화기본조약의 개정을 장래 동맹조약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에 대하여 기술적으로 연구의 여지가 있음. 따라서 본 제안에 서는 어느 것도 확정되지 않은 표현인 ‘일화기본조약을 개정하여 필요하다면 일화동맹조약을 체결한다’ 라고 하거나, 종래의 연구에 따라 가능하면 일화동맹조약의 체결로 생각하고 나아갈 것을 고려하고 있음. (2) 대충칭 공작에 대해서는 대충칭 공작을 난징의 국내문제로 삼게한다라는 취지로서 대화정책의 말단 부분에 있는 본건의 실행은 어전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나와 본 연락회의에서 결정할 것을 추구하고 있음. (3) 필리핀 독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됨, 다만 속히 실행하고 싶은 생각 속에서 올해 10월경으로 예정하고 있음. 다만 외부에 말하는 경우에는 ‘올해 중’ 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됨. (4) 대동아회의의 소집은 독립국으로 한정하고, 따라서 ‘대동아 각국’으로 표기하려 함. (5) 제6항의 6-2 이외의 부분을 당분간 발표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는 ‘당분간 발표않는다’ 보다는 ‘적당한 시기에 발표한다’ 라는 표현의 사용에 대한 고려가 존재함. 다만 이 둘 표현 모두 당분간은 발표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음. (이에 대하여 외무대신으로부터 ‘당분간’이라는 용어는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음.) (도조 총리는 ‘말레이’등의 영토편의 점은 국제적 관계도 있고 발표될 수 있다고 생각. 따라서 일절 말할수 없다는 것은 주의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였음.) (6) 본안의 기초조약의 개정 문제, 대충칭공작 문제, 말레이등의 영토편입, 필리핀의 독립문제, 대동아회의 개최등 중요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어전회의에서 결정하고 싶다 주장 하였음. 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었음. 이에 대하여 ● 스기야마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杉山 元) 참모총장을 의미.) 은 본항 제6항에는 특히‘뉴기니’라는 이름이 서술되어있는데, 현재 뉴기니에서의 작전은 1년 내내 특별한 진척이 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진척될 전망도 부족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뉴기니’라는 이름을 강조, 게재하는 것은 장래의 작전을 구속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참모본부로서는 찬성하기 어렵다고 하였음. ‘뉴기니’를 별도로 표기할 필요 없이 그저 기타지역으로 분류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며 군무국장은 이에 전쟁을 구속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와 같은 취지의 질문이 있었음. 하지만 시마다 해군대신 (시마다 시게다로 (嶋田繁太郎) 해군대신을 의미. ) 은 ‘뉴기니’는 해군 군정하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으로 군정 책임의 입장에서 특히 서술을 희망하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하였음. 이후 참모차장도 ‘뉴기니’ 의 문구 삭제 방법에 대한 의견개진 역시 이와 같았음. ● 군령부 차장으로부터 대충칭 공작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이 제출되었음. 이에 도조 총리는 제국이 화평공작을 막는 취지의 결정을 하게 되면 이후의 상황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움을 이야기 하며 동시에 난징정부는 본래부터 화평정권으로서 성립되어 화평문제는 국내문제가 되었는데 이러한 정치공작을 막는 것은 간섭으로 보일 수 있으며 , 정치공작에 화평공작을 포함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를 긍정할 수 있으며 물론 난징의 공작이 진척된 경우에는 제국 역시 외교적으로 손을 써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 주장하며 이러한 국민정부의 정치공작이 대충칭 외교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설명이 있었음. ●카야 대장대신 (카야 오키노리(賀屋興宣) 대장대신을 의미.) 은 국제정세가 추축국에 유리해지면 이러한 충칭공작을 진행하는 것은 우리측의 약점으로 비추어질 우려가 있으며, 이러한 충칭공작의 운용에는 낭인을 비롯한 이들이 날뛰는 것을 막도록 주의해야한다고 이야기하며 외무대신으로 하여금 운용의 진중한 수단을 요구함. 한편 난징측에서는 대충칭공작에 대해 저우포하이(周佛海), 천궁보(陳公博) 는 찬성하고 있으나 왕징웨이 본인은 반대의 의향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 하며 충칭의 움직임도 고려해야 하는 만큼 난징과의 연락 수단은 난징 주재 제국대사 한사람으로 일원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전달함. ● 참모총장 역시 대충칭공작은 일본과 중국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따라서 대사만을 거쳐 난징과 연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였음. 단, 군의 입장에서는 작전과 여러 공작을 행하기 위해서 난징 주재 제국대사 및 지나파견군 사령관과 긴밀한 연락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하여 향후 관계 방면에 관한 연락 방법을 긴밀히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음. ● 도조 총리로부터 일화기본조약의 개정만으로 충분한가 질문 이 있었고 이에 대해 시게미츠 외상은 자신은 동맹조약으로 전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 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점에 대해서 어느쪽이든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고 고려해주기를 요청하였음. 요컨대 지나와의 관계는 어느방면에서도 현재 비난을 받고 있는 상태로 이번의 대정책으로 다시 지나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게 된 만큼 이번에는 마음을 담아야한다고 하였음. 오늘날은 이러한 정책의 대 전환을 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하며 또한 세계로 하여금 우리의 정책을 견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동맹조약으로 해야한다고 하였음. ● 도조 총리 역시 전쟁지도상 오늘날은 큰 정책의 변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더구나 본안에는 ‘요컨대 동맹조약을 체결한다’ 라고 되어있는 만큼 동맹조약의 체결 역시 고려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며 지금은 본안과 같은 큰 변환을 줘야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며 대지방침을 불철저하게 하면 이는 우스운 것이라 생각하며, 대지정책은 대세계정책의 근본이 되는 큰 정책으로, 충칭에 큰 영향을 줄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정책은 장제스로 하여금 투항할 수 있게 하는 정정당당한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하였음. ● 아오키 대동아대신은 자신은 기본조약 내에 포함된 북지, 몽강 등 기타지역이라는 ‘혹’ 을 잘라낼 의향이 있다면 동맹조약으로 전환하는것에 찬성 한다고 하면서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본조약을 폐지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있다고 하였음. ● 도조 총리는 이에 대해 본건을 사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 정책은 전체적으로 큰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전시 중 필요한 요소는 군사협정등의 별도의 방법을 강구할 수 있으니 따라서 큰 정치적 목적을 고려하여 동맹조약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말하였음. ● 카야 대장대신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경제총력의 결집도 필요로 하는 만큼, 일본의 의사에 따라 각국이 움직이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하며 군사적으로도 이를 필요로 하는 만큼 기본조약을 폐기하는 것이 이러한 기저를 상실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말함. ● 스즈키 총재는 전쟁수행중 군사 정치 및 각 방면에 걸쳐서 특수한 구속을 받는 것은 지나측도 당연히 각오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면서도, 지나측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전쟁 종료 후에도 이와 같은 구속을 받는것이라는 점 에서 전쟁중에는 특별한 구속이 있어도, 평시가 되면 이를 모두 전부 해제할 수 있다는 취지 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되며 따라서 오늘날 예전처럼 북지, 하이난(海南)의 문제를 논하지 않으려 것은 오늘날 지나 민심이 가장 추구하는 내용의 파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를 서술함. 대략 이정도로 토론을 끝내고, 별첨과 같이 수정하기로 결정하였음. 또한 본건에 관한 어전회의는 31일 오후 2시에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설명은 총리, 외무대신, 대동아대신이 담당하는 안이 제의되었으나, 외무대신으로부터 설명은 총리 혼자서 충분할 것 같다는 취지의 의견 개진이 있어 총리 혼자 설명하기로 결정하였음. 어전회의에서의 총리설명안은 30일 관계자 및 사무국 등의 연구를 통하여 31일 새벽 서기관장 주최, 간사회의 (관계 성 국장이 참가) 하여 이를 결정, 제출하였음. 또한 하라 (하라 요시미치(原嘉道) 당시 추밀원 의장을 의미.) 추밀원 의장으로부터 질문도 예상되는 만큼 이에 대한 답변안도 심의하였음. 연락회의에서 결정된 수정사항 제4항의 ‘기존의 요강을 실행한다.’ 를 ‘쇼와 18 (1943) 년 3월 10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 따라 결정된 버마 독립 지도 요강을 기초로 하여 시책한다. ’ 로 변경. 제5항의 ‘기정 방침에 따라 빠른 시기에 독립시킨다,’ 에서 ‘기정 방침에 따라’ 를 삭제. 대본영정부연락회의 속에서 한차례 수정을 거친 대동아정략지도요강안은 어전회의에서 논의되게 되었고, 어전회의 속에서 최종안이 확정되었다. 제 10회 어전회의 내각총리대신 설명 쇼와 18 (1943) 년 5월 31일 지금부터 개회를 선언합니다. 앞에서 허락하신 바에 따라 오늘의 의사진행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먼저 오늘의 의제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제국의 정략 지도를 위해서는 독일-이탈리아와의 긴밀한 제휴와 대동아 여러민족의 결집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전에도 이를 견지하며 여러 가지 노력해왔습니다만, 세계 전국(戰局)의 추이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정략 태세를 더욱 정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이탈리아와의 제휴 강화에 대해서는 연락관을 파견하여 베를린 및 로마에서 육해군 무관을 보좌하게 하는 것을 독일-이탈리아측과 연락, 협의하고 있습니다. 대동아 여러 국가 및 민족의 결집에 대해서는 현재 만주국을 비롯하여 각국 및 각 민족이 대동아전쟁의 수행에 동조, 협력하고 있습니다만, 더욱더 그 결집을 강화하기 위하는 것이 필요하여 본 의제의 심의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우선 의제를 낭송하겠습니다. (의안 낭독) (1) 방침 대동아 국가 민족의 결집은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하여 각국 각 민족의 전쟁 협력강화를 위한 것으로, 특히 이 과정에서 지나 문제의 해결에 이바지하려 합니다. 세계 정세를 생각해보면, 독소전쟁이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상당한 변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러한 변화는 약 11월 경에 나타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영미의 반격 역시 치열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빠르게 대동아의 정략 태세를 정비, 강화하고 세계정세의 추이에 구애받지 않고, 제국은 대동아의 단결을 통하여 의연하게 전쟁주도의 주동성을 견지하려 합니다. 1-1) 대만화 정책 (가) 대 만주국 정책 만주국은 그 건국의 정신에 있어 제국과 일덕일심의 관계에 있으며, 건국 이후 10년이 지나 이상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동아전쟁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물심양면에 걸쳐 전력을 다하여 제국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의 조서와 관련하여 제가 만주국 방문 당시 배알을 허락받았을 때 폐하의 말씀에서도 이러한 깊은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바입니다.요컨대 만주국은 제국을 친방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일만관계는 이미 동맹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으며 거리낌이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나) 대 중화민국 정책 이전에 결정된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지나문제 처리 근본방침’ 에는 국민정부의 강화 및 대일협력의 구현 등에 조응하여 적절한 시기에 일화기본조약의 수정을 고려해야한다는 내용이 서술되어있습니다. 국민정부는 대동아전쟁 발발 계속하여 자강의 길을 강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고 대동아전쟁의 완수를 위하여 협력하고 있는 만큼, 제국은 ‘지나문제 처리 근본방침’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기 위하여 지나문제 처리 근본방침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일화기본조약 을 개정하여 일화동맹조약 을 체결하려 합니다. 또한 지나문제 처리근본 방침에서는 ‘제국은 충칭에 대항하여 이를 상대로 하는 일체의 화평공작을 행하여 상황을 변화시킨다. 화평공작을 행하는 경우에는 이를 별도로 결정한다. 그리고 국민정부도 이러한 제국의 태도에 순응한다.’ 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러한 근본방침에 기초한 시책의 결과는 순차적으로 침투하여 충칭측에도 상당한 동요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팡빙쉰(龐炳勳) (팡빙쉰은 1943년 5월 왕징웨이측으로 전향하였다.) 의 국민정부 참가는 이러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칭은 경제적으로도 점점 곤궁해지고 있는 만큼 앞에서 서술한 대 중화민국 정책의 진전에 조응하여 적절한 시기에 국민정부도 대충칭 정치공작을 실시하도록 지도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충칭의 항전진영의 중추가 국민정부의 정치공작에 지금 당장 응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기를 그르치게 되면 오히려 그로 인한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기에 관해서는 정부 통수부 사이에서 협의 결정하려 합니다. 1-2) 대 타이 왕국 정책 타이 왕국에 대해서는 타이 왕국은 독립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대동아전쟁의 수행에 충심 협력하고 제국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만, 국민 전반은 전쟁에 의한 생활의 불편을 피분 정권의 친일 정책 및 일본군 주둔 정책에서 유래한다는 생각을 품고 적성 국가의 일본-타이 왕국 이간질 정책, 반정부 분자의 책동과 맞물려 일반적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은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제국으로서는 피분 정권의 곤란한 입장과 타이 왕국 국민의 심리적 동향에 비추어 일본-타이 동맹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 점령지대인 ‘말레이’ 의 실지 회복을 도모하는 것과 동시에 경제 협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샨’ 지방의 일부를 이를 타이 왕국령으로 편입하는 것과 이를 실시하는 것에 관해서는 ‘버마국’에 주는 영향등도 헤아리며 그 시기와 지역등을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1-3) 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책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해서는 제국의 대동아전쟁 수행에 실질적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그 안정을 유지하고, 적측의 책모를 물리치고 제국에 대한 제반 협력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시책 중 오늘날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당국의 대일협력에는 상당한 것이 있습니다만, 이를 위해선 세계정세를 반영해야하고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측이 영미충칭측의 집요한 선전등에 동조하는 태도를 아직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는 만큼 여러 가지 전술한 방침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본국에서 이탈시키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시책은 대동아전쟁의 현단계에서는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1-4) 대 버마 정책 버마 방면으로는 쇼와 18년 3월 10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서 결정된 ‘버마독립지도요강’을 따라 실행하고 있으며 5월 8일 독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6월 말쯤 준비가 완료될 수 있도록 준비를 촉진 하고 있습니다. 1-5) 대 필리핀 정책 필리핀에 대해서는 제 81회 제국의회 (1943.1~6)에서 필리핀을 독립시키기로 재확인한 제국정부의 성명에 따라 대일 신뢰의 정도를 높혀 행정부장관 이하가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고 있으며 치안의 숙정, 행정의 침투를 위하여 노력하며 대동아공영권의 일원으로서 갱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현지에 가서 직접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제국은 위의 성명에 기초한 독립을 촉진 시키기로 하고 그 시기는 아직 치안이 완성되지 못했지만 전쟁지도상의 요청과 필리핀측의 자발적 협력 촉진, 견지하기 위하여 대체로 올해 10월 경 예정 하여 준비를 촉진하기로 하였습니다. 1-6) 기타 점령지 정책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세레베스는 민도가 낮아 독립의 능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동아방위를 위한 제국이 확보해야할 중요 요충지로서 이들은 제국의 영토로 결정하여 군이 필요로 하는 자원의 공급원으로서 극력 개발하고 민심의 파악에 노력할 생각입니다. 이들 지역에서는 당분간 여전히 군정을 계속하지만 원주민의 민도 발전시 원주민을 정치에 참여시킬 방침 이며, 실제로 정치참여를 요망하고 있는 자바에 대해서 이러한 정치참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령으로의 귀속 결정과 같은 내용은 적측의 선전과 자원 제공 차질등의 우려가 있는 만큼 당분간 발표를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 정치참여에 관해서는 적절한 시기 이를 발표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뉴기니등 앞에서 서술한 이외의 지역의 처리에 대해서는 기존의 것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1-7) 대동아회의 이상의 각 방책을 구현하기 위하여 올해 10월 하순 (적어도 필리핀 독립후) 대동아 각국의 지도자를 참가시켜 전쟁의 완수와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공고한 결의를 천명하여 전쟁의 완수에 맨진하고자 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5월 31일의 어전회의를 통하여 대동아정략지도요강의 최종안이 만들어졌고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대동아정략지도요강 쇼와 18 (1943) 년 5월 31일 어전회의 결정 (1) 방침 (方針) 1. 제국은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제국을 중핵으로 하는 대동아의 여러 국가 및 민족을 결집시키기 위한 정략적 태세를 더욱 정비 강화하여 전쟁 지도의 주도성을 견지하고 세계 정세의 변화에 대처한다. 정략 태세의 정비 강화는 늦어도 11월 경 까지 달성한다. 2. 정략태세의 정비는 제국에 대한 여러 국가 및 여러 민족의 전쟁 협력 강화 를 주 안으로 하며, 특히 지나 문제의 해결에 중점을 둔다. (2) 요령 (要領) 1. 대 만화(滿華)정책 :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국 – 중화민국 간의 결합을 더욱 강화한다. 대 만주국 정책 : 기존 정책을 유지한다. 대 중화민국 정책 :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지나문제 처리 근본방침’ 의 철저 구현을 실현하기 위해 방침의 내용에서 정한 것과 같이 일화기본조약을 개정하여 일화동맹조약을 체결 하는 것을 빠르게 준비하여 정리한다. 2. 대 타이왕국 정책 : 기존 방침에 따라 상호협력을 강화하고 ‘ 말레이 ’ 의 실지 회복 , 경제협력을 가속화한다. 샨 지역의 일부를 타이 왕국령으로 편입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버마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결정한다. 3. 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책 : 기존의 정책을 강화한다. 4. 대 버마 정책 : 쇼와 18 (1943) 년 3월 10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 따라 결정된 버마 독립 지도 요강 을 기초로 하여 시책한다. 5. 대 필리핀 정책 : 빠른 시기에 독립시킨다 , 독립 시기는 올해 10월 즈음으로 예정하고, 최대한 준비를 촉진한다. 6. 기타 점령 지역에 대한 방책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단. 6-2, 6-3을 제외하고는 당분간 발표하지 않는는다.) ‘말레이’,‘수마트라’,‘자와’.‘보르네오’.‘세레베스’는 제국령으로 결정 하고 중요자원의 공급원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개발하고 민심의 파악에 힘쓴다. 앞에서 언급한 지역은 원주민의 민도 발전에 부응하여 원주민을 정치에 참가 시킨다. 뉴기니를 비롯한 6-1에서 언급한 지역 이외의 지역에 대한 정책은 차후 별도로 결정한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에서 현재로서는 당분간 군정을 유지한다. 7. 대동아회의 : 이상의 방책을 구현하기 위하여 올해 10월 하순경 (필리핀의 독립후) 대동아 각국의 지도자를 도쿄에 참집시켜 견고한 전쟁 완수의 결의와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대외에 천명 한다. (참고)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지나문제 처리 근본방침 쇼와 17 (1942) 년 12월 21일 어전회의 결정 (1) 방침 (方針) 1. 제국은 국민정부의 참전을 일지관계의 국면 타개의 일대 전기로 삼아 일지제휴의 근본 정신에 입각하여 전 국민정부의 정치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충칭의 항일 근거가 되는 명목을 감소시키고 진정으로 갱생지나와의 일체 전쟁완수에 매진한다. 2. 세계 정세의 추이를 살펴보았을 때 미영측의 반격이 최고조에 달한바 이에 맞서 위항의 방침에 근거하여 지나에 여러 시설을 건설 하여 결실을 도모한다. (2) 요령 (要領) 1. 국민정부의 정치력 강화 제국은 국민정부에 대하여 최대한 간섭을 피하고 최대한 자발적 활동을 촉진한다. 점령 지역내의 지방적 특수성을 조정하여 국민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지도를 강화한다. 지나의 조계, 치외법권, 기타 특이한 기타 사태는 지나의 주권 및 영토 존중의 취지에 기초하여 속히 이를 폐지 혹은 조정을 도모 한다. 홍콩의 구룡 조차지 처리에 관해서는 홍콩과 아울러 이를 별도로 조정 한다. 국민정부로 하여금 부동의 신념과 결의로서 제반에 걸쳐 자강의 길을 강구하게 하여 민심을 획득하고, 특히 전쟁 완수를 위해 필요로 하는 생산의 증대, 전쟁목적을 보급하여 관민들의 인식을 강화하고 치안유지의 확실한 실현을 도모하여 전쟁협력을 철저히 한다. 제국은 장래 국민정부의 내실 강화와 그에 상응하는 대일 협력의 구현등에 조응하고, 적절한 시기에 일화기본조약 및 부속사항 에 대해 필요한 수정 을 가하는 것을 고려 한다. 2. 경제 정책 당면한 지나의 경제정책은, 전쟁 완수를 위해 필요한 물자 획득의 증대를 중심으로 하고 점령지 내에서의 긴요한 물자 취득과 개발을 도모하는 동시에 적측물자의 적극적 획득을 도모한다. 경제시책의 실행에 있어서는 최대한 일본측의 독점을 경계 함과 동시에 지나측 관민의 책임과 창의력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대일협력의 열매를 맺도록 한다. 3. 충칭 정책 제국은 충칭 에 대항하여 이를 상대로 하는 일체의 화평공작 을 행하여 상황을 변화시킨다. 화평공작을 행하는 경우에는 이를 별도로 결정한다. 국민정부 (여기서는 난징국민정부를 의미.) 로 하여금 위의 제국측의 이러한 태도에 순응하게 한다. 4. 전략 정책 제국의 대 지나 전략 방책은 기존의 정책을 유지한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⑲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의 담화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완 와이타야콘이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인 마에다 토시나리 (前田侯爵, 태평양전쟁 당시 보르네오 방어사령관을 담당했다. 하지만 1942년 9월 5일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토시나리의 사후 마에다의 가족은 전쟁의 격화속 본저를 떠났고, 때문에 대동아회의가 개최되고 있을 시기 저택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 의 저택. (현재 고마마 공원 일대.)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도쿄 메구로구(目黑區) 고마바쵸(駒場町) 마에다 토시나리 (前田侯爵)본저 응접실, 오전 9시) 완 와이타야콘의 담화문 (1943.11.7 오전 9시) (긴 의자에 앉아 원고를 들고, 유창한 영어로) 저는 2년전 타이왕국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적이 있습니다. 당시 타이왕국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문제는 일본 정부의 공정한 조정으로 완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진보하는 대동아공영권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대동아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이 펼치고 있는 대동아에서의 행동 은 대동아에 정의를 가져오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겠다는 일본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후 타이 왕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수립하였고 타이 왕국군은 막대한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일본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이속에서 타이 왕국 – 일본 관계는 나날히 친밀해졌고 협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일본은 또한 말라이 북부의 4개주와 샨 지역의 2개 주를 일본에 할양했으며 이에 대해 타이 왕국 정부와 국민은 이러한 일본의 성의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일본과 대동아 각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타이 양국이 참가한 이번 대동아회의는 이러한 대동아의 우호관계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대동아 건설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동아회의에서 채택된 대동아공동선언은 세계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공동선언의 5원칙은 세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근본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러한 일본 국민의 투쟁정신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귀국과 동시에 저는 이러한 일본 국민의 최후의 승리를 굳게 쟁취하겠다는 결심을 국민에게 전하려 합니다. 타이 왕국은 앞으로도 일본과 전면적으로 협력하여 공동의 목적을 완수할 것입니다. 기자단과 완 와이타야콘의 문답 Q : 대동아공동선언의 5개항 중 타이 왕국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A :현대에서 정치와 경제는 밀접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2항의 원칙과 4항의 원칙 은 밀접하게 맺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상호의 자주독립 존중 (2항의 내용) ’,‘호혜의 관계속 경제관계를 맺는 것 (4항의 내용) ’’ 이 다른 여러 원칙의 근본이 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Q : 타이 왕국-일본 양국은 대동아전쟁 발발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대동아회의 이후 타이 왕국 – 일본 관계를 발전시킬 구체적인 방안은. A : 타이 왕국 – 일본 양국의 협력관계는 이미 충분히 완전한 정도까지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이 왕국의 농산물, 원료품은 대량으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타이 왕국은 앞으로도 일본으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거나 가능하다면 필수 물자를 위한 제조공장도 도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 렇게 하면 타이 왕국의 경제력은 증가하고, 일본의 부담은 줄어 한층 더 경제적 협력을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Q :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타이 왕국의 결의와 대일 군사협력에 대한 방침은. A : 타이 왕국은 일본과 운명을 같이하며 일련탁생(一蓮託生)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이 왕국은 군사적 협력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끝까지 협력해 나가겠다는 단단한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Q : 타이 왕국은 인도의 독립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자유인도임시정부의 탄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아가 인도의 기근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 인도의 기근은 인도주의적 대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우리 타이 왕국을 비롯한 동아인들은 인도가 영국의 탄압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⑱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장징후이가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인 핫토리 겐조 (服部玄三, 일본의 시계 회사 세이코(SEIKO) 의 2대 사장, ) 의 저택. ( 세이코의 초대 사장이었던 핫토리 킨타로가 일본의 건축가 다카하시 사다타로(高橋貞太郎) 가 설계하여 1933년 건설했다. 일본의 항복 후 GHQ가 관리하다가 현재는 ‘핫토리 하우스’ 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싱가포르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 도쿄 시바구(芝區) 시로카네산코쵸(白金三光町) 핫토리 겐조 (服部玄三) 본저) 별저 응접실 / 오전 8시 40분) 장징후이의 담화문 (1943.11.7 오전 8시 40분) 저는 동아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번 대동아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하였고 저는 천황 폐하로부터 배알을 허락받고 대접을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천황 폐하의 은혜에 대해 황송하여 감격스러울 따름이며, 이러한 화목한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세계의 신질서는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얻고 서로를 도우며 공영을 얻어내야만 확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백년 동안 동아의 역사는 영미의 침략의 역사였습니다. 영미는 호시탐탐 교활한 방법으로 동아를 자신의 번영의 도구로만 삼고, 계속하여 동아를 잠식하고 끝없이 추구하며 해를 끼치며 대동아를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맹방 일본은 의연하게 궐기하였고, 영미가 수십년간 동아에서 떨쳐왔던 질곡을 한순간에 끊어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동아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 치열한 결전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대담하고 솔직하게 동아건설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조계와 적산(敵産)을 중국에 반환하였으며 최근에는 중일기본조약도 개정하였습니다. 타이 왕국 역시 말라이 4주를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버마와 필리핀도 오랜 숙원이었던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나아가 최근에는 자유인도임시정부의 승인을 앞장서서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동아의 부흥의 서광(曙光)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각국은 새로운 구상과 신념 아래 하나가 되어 대동아건설이 정비되고 있는 이 중요한 시기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회의에서 동아 각국 대표들은 대동아의 선언을 당당하게 대내외에 발표하여 서로 공존공영(共存共榮), 독립친화(獨立親和), 문화구통(文化溝通), 경제제휴(經濟提携) 하며 일절의 방해를 극복하고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혈맹들을 얻게 된 것은 정말로 감명스러운 일이며 동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대동아회의의 개최는 천황 폐하의 충렬한 일본 육해군 장병들의 용기와 살신성인하는 일본의 숭고한 정신, 그리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 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만주국은 10년 전 영미의 앞잡이였던 군벌 정권 을 타도하고 도의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하여 민족협화의 실현을 표방하여 동아 고유의 본색을 부흥시켜 왔습니다. 건국 이래 일본의 원조 속 내외의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오늘날의 흥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일만공동방위, 일만일덕일심(日滿一德一心) 의 대의 속에서 궁궐의 건설에 필요한 금속을 헌납하시는 등 누구보다도 일본의 전쟁에 앞장서서 협력의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주국의 4천만 국민은 관민을 막론하고 우리나라의 모든 구리, 철, 석탄, 곡물을 가지고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물자를 최대한 증강하고 앞장서서 건설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방정부는 신국민의 양성을 위하여 특별한 고려속에서 문화와 교육을 쇄신하고 근면정신을 함양하며 ‘제2기 건설’ 의 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만주국은 전시기간 동안 대동아건설의 거점이자 북쪽의 방벽으로서 노력하며 중대한 사명을 달성하려 하고 있으며 이를 원조해준 일본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현재 세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치열한 결전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전에서 넓은 국토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동아는 함께 준비되고 융합되어 필승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만큼 당당한 승리의 영광이 우리 동아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날 것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일본 방문을 맞이하여 일본 국민 여러분들의 친절에 대해 일행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며, 일본 국민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기자단과 장징후이의 문답 Q : 만주국은 일체화된 일만화(日滿華) 의 대동아전쟁의 병참기지로서 앞으로 어떠한 방책을 생각하고 있는지. A :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만주의 농산물을 증산시켜 일본과 북지(北支)의 식량보급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주국은 지금까지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 왔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증산을 위한 정책에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주국은 또한 동아의 북방을 수호하는 장벽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만큼, 만전의 조치와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Q : 전쟁의 진행에 있어, 일만(日滿) 제휴의 강화에 대해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A : 일만제휴는 더욱더 긴밀해지고 있으며 나아가 일만화(日滿華) 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지며 3년전에는 일만화공동선언을, 지금은 대동아공동선언을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소통하여 일본과 만주국의 일덕일심(一德一心)의 실현에 힘쓰겠습니다. Q : 충칭 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 충칭은 처음에는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 영미를 이용해 왔지만 이제는 거꾸로 충칭이 영미에게 부려지면서 일본의 세력을 공격하는 사냥꾼 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충칭은 지금 항일의 의의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우리 만주국은 국민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여 충칭을 제거하는 것이 중국민중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 이라 믿으며 중국의 부흥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일만화 삼국이 일체화된 체제를 확립하고 삼국관계를 완전히 조정할 수 있다면 대동아전쟁의 문제 대부분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 인도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 인도에는 독립을 위해 많은 지사분들이 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찬드라 보스씨가 이끄는 자유인도임시정부가 인도를 이끌어 장차 완전한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탁상에 있는 담배 한 개비를 집어들며)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⑰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바모는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로 사쿠라이 효고로 (櫻井兵五郞, (당시 15군 사령부 고문, 버마군정기관최고정치고문을 맡으며 버마의 종교적 유물을 일본으로 이송시키는 것을 감독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구류되었다가 1947년 석방되었다. 이후 1951년 사망.) 의 저택에서 묵었다. (아쉽게도 사진은 찾지 못했다.)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기자단과 바모의 문답 (도쿄 아자부구(麻布區) 히로오쵸 사쿠라이 효고로 (櫻井兵五郞) 본저 응접실 / 오전 8시 15분) Q : 인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지. A : 도조 총리 각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민족의 투쟁은 일차적으로는 그 민족에 의해 계획되어 실행되어야합니다. 버마로서는 인도 독립 투쟁에 공헌할 수 있다면 모든 방면에서 원조를 보내고 싶지만 중요한 점은 다음의 3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는 버마는 현재 분명한 인도 독립을 위한 작전기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는 버마의 도덕적, 정치적 반대적 지원은 인도국민군의 손에 지극한 강력한 무기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셋째 는 버마의 물자공급력과 버마가 가지고 있는 버마-인도 국경지역에 대한 지리 지식이 작전수행에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버마 국민은 그 외의 방면에서도 저 스스로가 찬드라 보스씨에게 약속한 것처럼 가능한 한 원조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Q : 인도의 식량기근에 대한 구체적인 구제 방안은 있는지. A : 나는 기근에 시달리는 인도 민중에 대해 진심어린 성의로 미곡을 공급할 것을 제안했지만 영국은 잔인하게도 이를 거부했습니다. 인도를 구제하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포로 교환 방법과 동일합니다. 첫 번째 는 우리가 운송선을 타고 식량을 지정된 중립국의 모 해항까지 운반하고 동시에 상대방이 같은 중립국의 해항으로 보낸 운송선에 화물을 실어 인도로 보내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는 영국이 거부했습니다 . 때문에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량을 가지고 직접 인도로 진격하여 인도 민중들에게 식량을 전달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구제방안을 인도 내 인도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 버마국은 적의 버마전선에서의 반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A : 전쟁협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무엇보다 큰 고려를 하고 있습니다. 군사협력의 의미는 광범하고 미치는 범위는 다방면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단호히 이겨야 합니다. 때문에 버마국 정부는 협력부(協力部) 라는 행정기구를 설치하여 승리를 목적으로 어떠한 행정상이 협력도 제공할 준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욱히 최전선에서 중요한 것은 생활필수품의 원활한 공급입니다. 때문에 식량, 의류, 주택을 비롯한 운수교통의 확보에 중점을 두고 총전선을 완비하고 전선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주와 관련된 4가지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면 전선과 후방 모두 전투력이 상승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⑯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야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야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호세 라우렐이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인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藤山愛一郞, 당시 일본상공회의소 의장. 전후 일본항공의 초대 사장, 외무대신, 중의원을 역임했다. ) 의 저택. (현재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 1~3초메 일대, 1979년 철거되어 현재는 쉐라톤 미야코 호텔 도쿄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도쿄 시바구(芝區) 시로카네이마자토쵸(白金今里町)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藤山愛一郞) 본저 응접실 / 오전 8시) 저는 지금까지 여러 국가를 여행하고 여러 회의에 참석해봤지만, 이번의 대동아회의 만큼 감명깊게 느낀 적은 없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동아에 찾아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상화의 모델인 상태로, 큰 몸짓으로) ( 도조 히데키는 호세 라우렐에게 초상화 한편을 선물하려 했다. 이에 후지타 쓰구하루 (藤田嗣治) 가 그의 초상화를 담당하게 되었다. 기자단이 라우렐을 방문했을 때는 초상화의 스케치가 진행중이던 때였다.) 호세 라우렐의 담화문 (1943.11.7 오전 8시) 대동아의 각 국가와 민족은 스스로를 지키고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서로 긴밀히 단결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동아의 각국가들은 서로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고 서로의 문화를 전통하고 서구의 공리주의에 흔들리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상호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동아 각국은 이미 모든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거부하고 타국과의 친교를 진심으로 도모하며 정의롭지 못했던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고뇌를 해결하고 세계 문화의 진보를 위하여 대동아공영권 내 각 국가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결하여 함께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필리핀을 비롯한 대동아 국가들은 다른 어떠한 나라에도 적의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확보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생활하고 우리와 우리 자손이 세계에서 마땅히 차지해야할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은 오직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부터 스스로의 힘으로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양 문명은 자신을 선진 국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상들이 유럽의 황야를 떠돌고 있을대 동양의 문명은 이미 성숙하게 발전한 상태 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을 일꾼 우리의 조상을 생각하며 열열한 신념과 용감한 정신 속에서 그들의 무한한 지혜와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개조해야 합니다. 필리핀 국민은 앞으로 대동아의 안전과 진보에 공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독립을 확보할 책임을 필리핀 스스로에게 있음을 자각 하고 전폭적으로 공존공영과 상호협력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리핀 국민은 지금의 고통을 참고 희생을 감내하며 일본이 신성한 사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기자단과 호세 라우렐의 문답 Q : 대동아공동선언의 5개항 중에서 필리핀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A : 필리핀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원칙은 2항의 독립친화(獨立親和)입니다. 미국은 항상 필리핀에게 일본은 침략국이며, 악인이라 선전해왔고 이러한 선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필리핀에게 완전한 독립을 주고 대동아공동선언의 원칙에 따라 대동아 각국의 독립과 주권이 인정받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은 필리핀 대통령으로서 귀국하여 당당하게 필리핀 국민들에게 보고할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주먹을 치켜들며) Q : 필리핀 독립에 대한 귀하의 포부는 어떠한지. A : 두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필리핀은 대동아의 여러민족과 정신적으로 단결해야 하며, 동아 각국은 각각의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고 아시아의 통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둘째, 필리핀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나아가 공영권의 여러 국가와 긴밀히 협력하며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을 도모하고 나아가 공영권의 경제 번영에 기여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상 존재하는 모든 민족의 차별적 편견을 없애고 서로 친목하고 문화적으로는 동아의 전통 철학을 최대한 발휘하여 동아 고유의 정신을 고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 경제 문제에 대한 소견이 있으신지. A : 필리핀의 경우 경제문제는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후 저는 기획원(企劃院)을 조직하여 농상부장관인 라파엘 알루난 1세 (Rafael Alunan Sr.) 의 지도하에 필리핀의 경제상황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리핀은 농업국가로서 식량면에서 자급자족의 지경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동시에 상공업의 부흥을 도모하며 경제안정을 확보하려 하고 있습니다. Q : 충칭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 충칭도 동양인이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영미와 손을 잡았던 것은 어리석은 선택 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 선언에 따라 더욱 동요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쟁은 미련할 뿐이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덧없는 가련한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쪽으로 와라!”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Q : 어떻게 하면 미국에 의존해왔던 필리핀 경제를 바꿀 수 있을지, 지금까지 대미 수출에 의존해온 필리핀 재계 인사들은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적응해 나갈 것인지. A : 미국 의존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대동아적 경제체제를 갖추는 것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쟁 전 미국의 필리핀 설탕 산업 투자는 5억 2천만 페소로, 그중 1억 페소 가량의 설탕을 미국에 수출하여 남부 설탕지대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필리핀의 경제는 약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수출할 수 없게 된) 설탕 과잉 문제를 처리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시장보다 더큰 1억 인구를 가진 일본 과 5억 인구를 가진 중국 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설탕 과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Q : 필리핀의 치안확보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은 어떠한지. A : 필리핀은 국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1만 명의 경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치안이 나쁜 지역등을 완전히 다스리기 위해서는 경찰대를 5만명 가량으로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국방부 및 국방군은 필요하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이를 논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일단은 이 경찰대의 확대부터 시작해 갈 생각입니다. Q : 칼리바피 ( 필리핀 일본 군정시기인 1942년 12월 창설된 정당 KALIBAPI, (Kapisanan sa Paglilingkod sa Bagong Pilipinas, 신 필리핀 봉사 협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칼리바피는 일본의 필리핀 점령시기 필리핀의 모든 정당을 대체하는 유일한 조직으로서, 일종의 필리핀판 대정익찬회 역할을 하였다. 칼리바피는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제2공화국이 세워진 후에도 제2공화국의 유일정당으로 작동했다.) 의 조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A : 필리핀인을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강력한 국민운동을 통한 청년들의 분발을 재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동아전쟁이라는 세계적 대전환기에서 독립을 맞이하는 우리는 칼리바피 운동 을 더욱더 지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칼리바피는 일본의 대정익찬회와 유사한 조직 으로, 군정 초기에 성립되었습니다. 필리핀은 40년간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물질만능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필리핀이 이러한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칼리바피와 같은 국민운동을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리바피의 임무는 국민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입니다. 현재 칼리바피의 총재는 대통령이지만 실제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부총재 겸 사무총장인 아키노씨입니다. 따라서 저는 귀국 후 아키노씨 (칼리바피의 창립자중 한명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 1세 (Benigno Aquino Sr.)를 의미한다.) 와 함께 이 운동을 더욱더 강화할 생각입니다.
- 대동아회의 일정표 (大東亞會議日程表, 1943.10.31~1943.11.25)
그림으로 보는 대동아회의 일정 (그림에는 8일까지의 일정까지만을 서술했다. 8일 이후의 일정을 지도에 표시하지 않은 것은 8일 이후의 일정은 각국 대표와 도조 히데키와의 회담뿐이기 때문) . 대부분의 일정이 도쿄 도심 (現 미나토구, 치요다구) 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일정을 위해 각국 대표 숙소 역시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도쿄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아회의 일정표 (大東亞會議日程表) (정확한 시간을 알수 없는 경우 '-'로 표기) 1943년 10월 31일 ( 일 )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입국. 1943년 11월 1일 (월) 오전 11시 20분 :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일본 방문을 기념하여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왕징웨이가 대동아회의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탑승한 것으로 추측되는 중화항공의 MC-20. 오후 3시 35분* : 왕징웨이과 중화민국 대표단을 태운 중화항공(中華航空)* MC-20* 항공기 착륙. (도조 히데키 총리내각대신, 시마다 시게다로(嶋田繁太郎) 해군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등이 마중을 나왔고 비행기에서 내린 왕징웨이는 이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1) 난징의 중보(中報) 에서는 3시 4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2) 현재 중화민국(대만) 의 중화항공과는 이름만 같은 회사로, 일본의 지원 아래 1938년 12월 설립된 항공회사. *3) 기체명은 추홍호(秋鴻號) 이라는 이름이 붙은 C-5130으로 추측된다. 왕징웨이는 1941년의 방일 때 일본으로부터 선물받은 자신의 전용기 해겸호(海鶼號, G3M 기반)이 있었음에도 대동아회의 때는 쓰이지 않았는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기록상으론 마지막으로 해겸호의 사용이 알려진 것은 1942년 12월의 대동아전쟁 발발 1주년 기념 방일 일정때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장징후이가 대동아회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 탑승한 만주항공의 MC-20. 오후 3시 45분* : 장징후이와 만주국 대표단을 태운 만주항공(滿洲航空) MC-20* 항공기 착륙. (왕징웨이를 태운 차량 행열이 빠져나간 이후 바로 착륙했다, 장징후이는 협화회(協和會) 복을 입었다고 전해지며 장징후이 역시 앞서 왕징웨이를 마중나온 일본 인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1) 난징의 중보(中報) 에서는 3시 50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2) 기체명은 M-611. 1943년 11월 2일 (화) 오후 2시 : 호세 라우렐과 필리핀 공화국 대표단을 태운 DC-3* 항공기 착륙. (도조 히데키 총리내각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등이 마중을 나왔고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호세 라우렐의 아들 마리아노 라우렐(Mariano Laurel) 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찬드라 보스와 일본 기자단간의 기자회견 *1)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1943년 11월 3일 (수) 일본 도쿄의 (구) 총리관저.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위치했었다) 오후 4시 : 총리 관저에서 다과회 개최. (다과회 장소에는 그 전날 설치해둔 국화꽃이 장식되어 있었고, 대형 일장기를 중심으로 각국 국기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다과회에서 각국 대표들은 처음으로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찬드라 보스 포함) 다과회에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하여 내각의 대신들, 각 성의 차관들, 중의원 의장, 도쿄도지사를 비롯한 다양한 내각의 인원이 참가했다. 또한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참모총장을 비롯한 다양한 군부측 인사도 참가했다. 밑에서 볼 수 있듯 타이 왕국의 완 와이타야콘과 버마국의 바모는 다과회 개최 이후에 도쿄에 도착하여 이들은 바로 다과회장으로 향했는데, 도조 히데키는 이들 대표단이 도착할 때마다 직접 정문까지가 이들을 맞이하였고 자신의 내각 각료 및 인원들을 각국 대표에게 일일이 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찬드라보스는 도조 히데키에게 본 다과회를 보고 “이는 (대동아라는) 한가족의 파티와 같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오후 4시 15분 : 완 와이타야콘과 타이 왕국 대표단을 태운 항공기 착륙.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주일 타이 왕국 대사등이 마중을 나왔고 당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완 와이타야콘의 아들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오후 4시 30분 : 바모와 버마국 대표단을 태운 항공기 착륙.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주일 버마국 대사등이 마중을 나왔고 당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바모의 7명의 자식중 1명(아들)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바모는 찬드라보스를 포함한 6개국 대표중 유일하게 군복차림이었다.) 오후 4시 50분 : 완 와이타야콘이 다과회에 도착. 오후 5시 : 바모가 다과회에 도착. (바모의 도착 이후 도조 히데키와 각국 대표들은 원형 탁상에 둘러앉아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오후 5시 30분 : 다과회 종료, 각국 대표들은 숙소로 복귀. *1) 난징의 중보(中報) 에서는 4시 3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43년 11월 4일 (목) 황거로 들어가는 대표단 차량행렬. (일본뉴스 179호) 오전 11시 50분 : 각국 대표들의 황거 방문, 쇼와 천황 접견. (황거앞에는 수많은 일본 시민들이 집결하여 일장기를 흔들며 황거로 들어가는 대표단의 차량 행렬을 환영했다. 각국 대표들은 황거를 방문하여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 궁내대신의 안내를 받아 쇼와 천황을 접견하였다. (순서는 왕징웨이가 가장 먼저였다.) 왕징웨이를 비롯한 각국 대표가 인사를 건네면 히로히토는 악수를 하며 말을 건넸다.) 오후 12시 30분 : 쇼와 천황 주최 오찬회. (오찬은 풍명전(豐明殿)에서 개최되었으며 오찬회에는 각국 대표 및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정부 인사들 및 각국 대사들이 참가하였다. 오찬회가 끝난 이후에는 모단간(牡丹間)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오후 2시 5분 : 각국 대표들의 궁성 일정 종료. 궁내성 발표 (1943.11.4.) 천황폐하께서는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중화민국 대표 왕징웨이 국민정부행정원장, 타이 왕국 대표 완 와이타야콘 총리대신대리, 만주국 대표 장징후이 국무총리대신, 필리핀 공화국 대표 호세 라우렐 대통령, 버마국 대표 바모 내각총리대신과 본월 4일 오후 12시 30분 오찬을 베푸시어 다카마쓰노미야 친왕 각하를 모시고 주일 만주국 대사, 중화민국 대사, 버마국 대사, 타이 왕국 대사 임시대리와 함께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과 함께 식사하시었다. 우에노의 도쿄도 미술관. (東京都 美術館) 오후 2시 30분 : 도쿄도 미술관에서 개최중이었던 제6회 문부성 미술전람회* (신문전 新文展)을 관람. (안내는 문부대신이었던 오카베 나가카게가 담당했다. (본 관람에는 찬드라보스도 함께했다.) 미술관에 도착한 대표단은 2층 귀빈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눈 뒤, 왕징웨이는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의 안내를 받아 일본화를 감상했고 장징후이는 야마구치 호슌(山口蓬春)의 안내를, 호세 라우렐이 마에다 세이손(前田靑邨)의 안내를, 바모는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 의 안내를 받아 작품을 감상했다. 오카베 나기카게 문부대신은 대표단의 작품 감상이후 대동아회의를 기념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각 대표에게 선물했다. 코무로 스이운은 《서창(瑞昌)》을, 아라키 짓포(荒木十畝)는 《국화(國華)》를, 야마시타 신타로(山下新太郞)는 《나라공원신록(奈良公園新綠)》을,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는 《홍후지(紅富士)》를 그려 전달했다. 찬드라 보스는 그림이 아닌 와타나베 카네나가(渡邊兼永)의 일본도를 선물받았다.) 왕징웨이가 받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의 《서창(瑞昌)》을 담은 엽서. 오른쪽에 '제6회 문부성 미술전람회 출품 작품' 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오후 7시 : 시게마츠 마모루 외무대신, 아오키 가즈오 대동아대신이 공동주최한 비공식 만찬회에 참석. (만찬회는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마이 케이쇼(今井慶松)를 비롯한 이들이 무용과 일본음악을 공연하였다.) *1) 1943년 10월 16일부터 11월 20일까지 개최되었다. (공익재단법인 일본미술원) 1943년 11월 5일 (금) / 대동아회의 1일차 오전 10시 6분 : 1일차 회의 시작. 오전 11시 20분 : 휴회 및 오찬. (본래 계획에서는 타이 왕국의 완 와이타야콘의 연설은 오후에 진행되어야 했으나 계획보다 일정이 빠르게 흐르며 오전에 완 와이타야콘까지 연설을 하게 되었다.) 오후 1시 1분 : 회의 재개. 오후 2시 45분 : 휴회. (본래 계획에서는 2시 30분에 휴회를 할 예정이었으나 필리핀 호세 라우렐의 연설이 길어지며 15분 가량 지연되었다.) 오후 3시 27분 : 회의 재개. (앞에서 휴회가 지연된 것도 있고 긴 연설 속의 피로로 본래 계획의 30분이 아닌 40분 휴회를 거쳤다.) 오후 4시 47분 : 1일차 회의 종료. -정보국 발표 (본 정보국 발표전까지는 대동아회의에 관한 사항은 기밀이었다.) 1943년 11월 6일 ( 토 ) / 대동아회의 2일차 오전 9시 58분 : 2일차 회의 시작. 오전 11시 56분 : 휴회 및 오찬. 오후 12시 45분 : 회의 재개. 오후 1시 즈음 : 대동아공동선언 채택 오후 3시 17분 : 회의 종료. 오후 3시 30분 : 신주쿠교엔(新宿御苑) 방문. (방문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高松宮宣仁親王),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 기도 고이치 (木戶幸一) 내대신부, 마츠다이라 츠네오 (松平恆雄) 궁내대신, 시마다 시게다로(嶋田繁太郎) 해군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등이 참가 했다.) 오후 4시 : 쇼텐페이(翔天亭) 에서의 다과회 참가. (신주쿠교엔 내부에 존재) 만찬회가 개최된 대동아회관 (大東亞會館, 현재 도쿄회관 본관자리) . 1940년부터 이곳을 대정익찬회가 쓰게 되면서 이름을 도쿄회관에서 대동아회관으로 바꾸었다. (전후 복귀) 오후 6시 : 대동아회관*에서 개최된 만찬회 참가. (대동아회관의 연회실 벽에는 대동아공영권의 지도가 모자이크 스타일로 그려져 있었는데, 일본의 세력범위를 붉게 칠해 돋보이게 그려두었다. 당시 대동아회관의 지배인이었던 미카미 료조 (三神良三)은 왕징웨이를 비롯한 각국 대표들이 마치 자신들을 속국 취급하는 것 같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묘사했다. 특히 만주국의 장징후이는 이 회의를 얕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고 전해진다.) -대동아회의 사무국 발표. (본 사무국의 발표로 대동아공동선언이 대내외에 공개되게 된다.) *1) 현재 도쿄회관(東京會館) 본관. 1943년 11월 7일 ( 일 )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오전 7시 30분: 각국 대표들과 기자단간의 담화. (각국 대표들의 숙소들은 서로 먼거리에 있지 않았던 만큼, 기자단은 왕징웨이를 시작으로 각국 대표의 숙소를 순회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오전 8시 : 황거앞에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 참가하는 인원들 집결, 행진 개시. (약 10만명이 참가했으며 여기에는 대정익찬회 장년단원 2만 5천명, 산업보국회, 농업보국회, 상업보국회, 해운보국회, 청소년단체, 대일본부인회, 국민 학교 교직원들, 종교교화단체, 각국 유학생등이 포함되어있었다. 일반 참가자의 경우 남성은 방공복장, 여성은 몸빼로 복장이 통일되었고 집결한 이들은 4열행진하여 대동아결집국민대회가 개최되는 히비야공원으로 향했다. ) 오전 9시 40분 : 히비야 공원에서 해군군악대가 연주를 개시, 황거앞에서 출발한 행진 도착. 대동아결집국민대회의 개최모습. 오전 10시 10분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개최. (행사의 시작후 참가자들은 궁성 참배를 행한후 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했다. 그리고 고토 후미오 국무상이 조서를 낭독하였다.) 오전 10시 30분 :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각국 대표 입장, 연설 시작. (아오키 대동아대신이 각국 대표를 소개 및 안내했다. 입장은 이로하순으로 이루어졌으며 맨 마지막에 슈타머 독일대사가 입장했다.) 오후 1시 : 대동아결집국민대회 종료. (행사의 종료는 바다에 가면(海行かば) 의 제창, 천황 폐하 만세 삼창, 참가 각국 만세 삼창으로 마무리되었다. 행사의 종료후에는 애국행진곡(愛國行進曲)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각국 대표를 비롯한 인원들의 퇴장이 시작되었다.) 오후 2시 30분 : 제14회 메이지신궁 국민연성대회 (十四回明治神宮國民鍊成大會) 참가. (대표단은 청년들이 그린 두루마리그림(繪卷物)를 관람하고, 동아 각지의 유학생 200명을 포함한 대동아청년 합동 체조 (大東亞靑年合同體操)를 관람했다.) 오후 8시 : 아오키 대동아대신 – 시게미츠 외무대신 공동초대 연극 관람. (연극은 긴자의 가부키자(歌舞伎座)에서 진행되었다.) 1943년 11월 8일 (월) 도쿄 아타고 산 (愛宕山) 의 중앙방송국. (현재 NHK방송박물관 자리) NHK의 전신인 JOAK의 글자가 보인다. 오전 10시 : 왕징웨이의 라디오 방송. (방송은 도쿄의 중앙방송국*에서 진행되었다.) 오전 10시 20분 : 바모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도조는 바모가 대동아회의의 연설에서 치안을 중요시한다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바모는 도조 히데키와의 회담에서도 치안 유지를 위한 전문가 파견등을 요청하는 등 버마국의 전쟁 수행 및 버마국의 행정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하였다. 바모는 버마의 평균 쌀 생산량이 400만 톤이었는데 전쟁 상황으로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을 이야기하면서 일본 측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오후* : 장징후이의 귀국, 신징 복귀. *1) 현재 도쿄 아타고(愛宕) NHK 방송박물관 일대. *2) 오후라고만 서술되어 있어 정확한 시간은 알수 없다. 1943년 11월 9일 (화) 오후 2시 : 장징후이, 만주국 기자단과 담화, 대동아회의의 성과를 보고. 오후 5시 30분 : 왕징웨이의 귀국, 난징 복귀. 1943년 11월 10일 (수) 오후 4시 15분 : 호세 라우렐과 도조 히데키의 회담. (호세 라우렐은 이 회담에서 자신의 귀국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일본이 필리핀에 여러 분야를 위한 전문지도관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비행기 1대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도조 히데키는 취임 1주년 행사에 맞추어 최대한 빠르게 비행기를 제공하겠다 밝혔다. 하지만 이즈음에는 필리핀 전투가 발발하여 실제 비행기 인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1월 12일 (금) 오후 4시 50분 : 완 와이타야콘의 도조 히데키와의 귀국인사. (완 와이타야콘은 도조 히데키에게 대동아회의 일정에서 편의를 제공해준 일본에 감사를 표하며 14일 귀국할 것임을 도조 히데키에게 밝혔다.) -호세 라우렐의 귀국. 1943년 11월 13일 ( 토 ) 오전 11시 : 찬드라 보스와 도조 히데키의 회담. (찬드라 보스는 이 회담에서 자신의 귀국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귀국할 것이며 하루 빨리 안다만-니코바르 제도를 방문할 것임을 이야기 했다. 또한 동시에 자유인도임시정부에는 자체 통화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일본 엔화를 사용하게 되면 적측에게 자유인도임시정부가 일본의 괴뢰정부로 보일 가능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활동을 위한 항공기를 요청하는 등 도조 히데키와 인도 독립과 관련된 다양한 사항을 논의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항공기를 제공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예산등 여러 문제로 민간기는 아닌 일본 육군이 관리하는 비행기 1대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1943년 11월 14일 ( 일 ) -완 와이타야콘 귀국. 1943년 11월 17일 (수) 오후 5시 : 찬드라 보스 난징 도착. (찬드라 보스는 복귀 과정에서 중화민국 난징, 마닐라, 싱가포르등을 경유하여 복귀하였다. 찬드라 보스의 방문에 왕징웨이도 직접 비행장에 마중을 나왔다. ) 1943년 11월 19일 (금) -바모 마닐라 도착. (바모 역시 복귀 과정에서 필리핀의 마닐라를 경유하는 일정을 선택했다. 바모는 19일 마닐라의 말라카냥궁(Palasyo ng Malakanyang)에서 필리핀-일본 기자단 앞에서 연설을 하였고 27일 버마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게 된다.) 1943년 11월 25일 (목) 오전 10시 30분 : 필리핀 국회에서 호세 라우렐 대통령이 대동아회의의 성과에 대해 보고. - 태국 인민의회의 정기회의에서 완 와이타야콘이 대동아회의의 성과를 보고. [출처]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호사카 마사야스, 페이퍼로드, 2022, 478쪽. 『大東亜共同宣言』, 情報局記者会, 新紀元社, 1943. 『大東亞會議』, 中華日報社, 中華日報社出版, 1943. 『中報』, 1943년 11월 1일자~11월 10일자 『新中國報』, 1943년 11월 1일자~11월 10일자 『每日新報』, 1943년 11월 1일자~11월 30일자 일본뉴스 179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64_00000&chapter=001 항공기 관련사진자료 : http://minhangji.com/index.php/zhhk/ http://cwlam2000.epizy.com/new_page_2.htm?i=2#%E7%AB%8B%E5%B7%9D_%EF%BC%88%E7%9F%B3%E5%B7%9D%E5%B3%B6%EF%BC%89%E9%99%B8%E8%BB%8D%E5%B0%8F%E5%9E%8B%E8%BC%95%E6%82%A3%E8%80%85%E8%BC%B8%E9%80%81%E6%A9%9F(KKY) 공익재단법인 일본미술원 : https://nihonbijutsuin.or.jp/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⑮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43.11.7)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이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27. 하인리히 게오르크 슈타머 (나치 독일) 의 연설 [부록] 28.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9.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30.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1. 대동아회의 일정표 왕징웨이가 대동아회의 기간 묵었던 숙소인 이와사키 고야타 (岩崎小弥太, 일본 재벌 미쓰비시의 4대 총수로, 1916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미쓰비시의 총수를 역임했다. ) 의 저택. (고야타의 별저는 고야타의 아버지이자 미쓰비시의 3대 총수였던 이와사키 야노스케(岩崎弥之助) 가 1908년 영국의 건축가 조시아 콘도르의 설계 아래 건설한 저택으로, 야스노케는 이 저택이 완성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여 고야타가 물려받게 되었으나 고야타는 해당 저택을 싫어하여 자신의 저택을 아타미(熱海) 에 별도로 건설했다. 현재 해당건물은 개동각(開東閣)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여전히 미쓰비시가 관리하고 있다.) *일본은 회의 참가국 대표마다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회의의 개최가 전반적으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점, 보안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호텔을 비롯한 일반적인 숙소보다는 일본 정부 및 관련 인사가 소유한 곳을 숙소로 제공하였다. 숙소에는 니혼바시의 미츠코시 백화점 앞에 있었던 오사와 국기점(大澤國旗店)에서 제작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자유인도임시정부 대표였던 찬드라 보스는 도쿄 시바구(芝區) 미타츠나마치 (三田綱町) 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아들 시부사와 케이조 (澁澤敬三) 의 저택을 숙소로 사용했다. 왕징웨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도쿄 시바구(芝區) 타나카와미나미쵸(高輪南町)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 별저 응접실 / 오전 7시 30분) 이제 대동아회의도 순조롭게 종료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자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웃으며, 옆의 저우포하이(周佛海)와 린바이셩(林柏生)도 함께 웃는다, 그리고 안주머니의 별갑(鼈甲) 안경을 꺼내쓰고 원고를 꺼내든다.) 왕징웨이의 담화문 (1943.11.7 오전 7시 30분) 저는 이번 세계사에서 위대한 의의를 가진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내심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의를 통해 일본 도조 수상의 위대한 이론을 경청하고, 각국 대표들의 위대한 이론을 직접 접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복하는 바입니다.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영미 양국 은 제멋대로 침략과 착취정책을 자행하며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세계 지배 야망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세력은 그 야망을 처음에는 남양 , 그 다음에는 중국 으로 확장시켜 아편전쟁 을 일으켰습니다. 미국 도 태평양을 넘어 동아를 침공하여 영국과 연합하여 협공지세를 형성하였습니다. 당시 동아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으나, 다행히 일본이 홀로 일어서는데 성공하여 영미의 야망을 막아내고 영미에게 타격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영미의 이러한 야심은 변하지 않아 계속하여 동아 민족을 이간질 시키고 서로 싸우게 하여 동아는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 이 시작되어 영미 양국의 세력이 동아에서 무너지고, 영미 침략이 착취해왔던 소득과 시도는 모두 일본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렇기에 대동아의 모든 민족은 일본이 동아를 지켜낸 공적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영미 양국이 동아를 해치고 동아의 침략 정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여 영미세력을 격퇴하고, 나아가 이들이 펼쳤던 정책을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즉, 공존의 구호 를 통해 침략의 구호 를 바꾸고, 공존 을 통해 착취 를 끝내고, 동아민족이 각각 자주독립할 수 있게 하고 상호간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문화방면에서는 그 창의력과 조화력을 발휘하게 하며, 경제방면에서는 호혜를 실행하고,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여 유무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방침은 영미의 기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동양의 도의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서양의 이기적인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대동아회의 는 일본이 주최하여 동아의 각국가들과 연합하여 단결의 힘으로 도의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위대한 공헌으로, 대동아 각국가들의 영원한 우호의 토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원한 화평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일본의 유신이 동아의 기회가 될 것" 이라 한 것은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손중산 선생 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 (쑨원이 제창한 개념으로, 쑨원은 이 대아시아주의를 통하여 중국과 일본의 연대를 추구했다. 그리고 일본과 협력하고 있었던 왕징웨이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길이라 주장했다.) 는 일본이 중국의 불평등 철폐에 협조하는 것도 소망해왔는데, 이 또한 이제는 구체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몇일 전 주중 일본대사와 중일동맹조약 을 체결한데 이어 오늘 중화민국을 대표하여 대동아회의에 참석하여 대동아공동선언 에 서명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분들도 모두 같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반드시 관철될 것이고 대동아의 건설도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위의 목적과 임무를 완수, 달성하는 것은 동아 각 민족의 노력, 그리고 동아 공동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우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부흥하길 희망하고 대동아전쟁을 관철시켜 대동아 건설완성의 책임을 분담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동아의 광명대업은 대동아 각 국가민족이 스스로 노력하고, 함께 노력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미가 예전에 행해오던 침략과 약탈의 정책은 이미 무너졌고, 영미가 행해왔던 이간질도 이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어떠한 정책을 펼치든, 어떠한 감언이설을 펼쳐 우리를 유인하거나 이간질을 하더라도, 우리의 신념은 이제 흔들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억압을 받지 않고 속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대동아 각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대동아를 해방시키고 대동아의 광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기자단과 왕징웨이의 문답 Q : 대동아공동선언의 중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A : 대동아공동선언 5항목 중에 어느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생각되는데, 대동아공동선언은 5가지 항목이 한데 모아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어떠한 항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대동아공동선언을 분석하여 설명하자면 제1항은 총론이라 할 수 있으며, 제2, 3, 4항은 이를 세세하게 다룬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2항의 독립자주의 존중이라는 것은 각국의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과 상대방의 국가를 사랑하고 동시에 동아를 협동체로서 사랑하는 것을 의무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제 3항은 문화의 융합, 제4항은 경제제휴를 강화해야 함을 강조하고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5항은 대동아공동선언은 미국의 먼로주의 와 같이 배타적인 것임이 아님을 세계에 천명한 것으로 중국에게는 어느 항목이든 똑같이 모두 중요하며 중국은 만강의 성의를 가지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Q : 인도를 원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있는지. 또한 중국은 현재 상태로는 인도의 독립에 대해 적은 원조를 할 수밖에 없지만, 인도의 독립에 관해서 중국은 인도와 성심성의껏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인도와 동고동락하고 싶습니다.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의 공존공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독립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영미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독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인도를 지원하겠다는 일본의 지원성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와 경복(敬服) 하는 바입니다. 인도의 기근에 대해서는 전시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생각하지만 영국은 이를 전혀 대처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도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이제 영국의 억압 대신 일본의 독립원조라는 밝은 희망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아직 간디 씨를 투옥시키고 있지만 (간디는 1942년 독립운동 중 체포되어 1944년이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일본은 인도의 다른 혁명가 찬드라 보스씨를 지원하여 인도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일화동맹조약이 어떠한 영향을 불러올것이라 보는지. A : 생각건대 전쟁이란 어느쪽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이 있을지라도 앞길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화평지구의 민중은 전쟁 발발 이래 계속하여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동맹조약이 체결되면서 민중은 밝은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동맹조약의 체결은 충칭측에 상상 이상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충칭의 선전 방침을 보면 ‘항전을 해도 망하고, 안해도 망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같은 죽음을 당할꺼면 철저히 항전하다 죽는 것이 낫다는 완전한 비관론 으로, 이러한 비관론을 통하여 민중이 화평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동맹조약 의 체결은 일본은 중국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중국의 자주독립을 완성시키려 한다는 것 을 증명하였습니다. 현재 충칭에는 화평에 반대하는 이 도 있고, 화평에 찬성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 도 있고, 어느 쪽도 좋다는 이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동맹조약을 신속하게 충칭의 각 방면에 철저히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충칭의 미몽을 분쇄 하고 충칭을 반성 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Q : 정치력 및 경제력 강화를 위한 방책은 무엇인지. 동맹조약은 국민정부의 정치력을 강화하고 경제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여기에는 3가지의 요점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사상의 숙정, 치안의 확보, 생산의 증강 입니다. 사상의 숙정 을 살펴보면, 과거 중국에는 영미의 사상, 즉 자유주의를 비롯한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철저히 숙정하려 합니다. 치안의 확보 에 대해 살펴보면, 중국은 대동아전쟁의 후방으로서 최전선에 있는 일본 장병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장래적으로는 중국군도 전선의 노고를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의 증가 에 대해 살펴보면, 중국은 현재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농업의 경우 잡곡류의 생산 증가를 목표로 하여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남중국 민중들에게 잡곡을 보다 많이 사용하게 하려 합니다. 또한 경공업은 먼저 면직업부터 착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Q : 물가문제 및 식량문제에 관해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지. 현재 중국 경제의 중대 문제인 물가 문제의 해결은 앞에서 보았던 면직물의 정부 매입이나 일본의 원조에 의해 착착 진척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전시상황에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면할 수 있는 고통은 최대한 없애고, 면할 수 없는 고통은 어디까지나 인내해 나가는 방침 을 취하고 있습니다. 면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은 물자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결핍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면할 수 있는 고통은 첫째, 중국과 일본의 협력과 조정을 통하여 영향을 최소화하고, 둘째, 통제의 방법을 통하여 고통을 경감시키고, 셋째,국민에게 청렴결백의 정신을 양성하여 민중의 수많은 고통을 최대한 줄여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⑭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1943.11.6)
*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은 1943년 작성된 대동아회의의사속기록(大東亞會議議事速記錄, 1943) 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는 하나다 (アジアは一つなり, 1943) 을 비롯한 당대 작성된 대동아회의의 회의내용을 다루는 서적들을 번역하여 대동아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동아회의 회의록 (大東亞會議會議錄) (1943.11.5~11.6) (각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회의 개최전 정보] 0. 대동아정략지도요강 (1943.5.29) 0. 대동아회의에 관한 건 (1943.10.2) 0. 준비위원회의 구성 (1943.10.21) 0. 대동아회의 회의장 도면 0. 대동아회의 참가자 명단 및 대동아회의 사무국 구성 (1943.11) [회의 1일차] (1943.11.5) 1. 대동아회의 개최와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3.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4.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5.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6. 바모 (버마국) 의 연설 [회의 2일차] (1943.11.6) 7.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제안 및 각국대표들의 의견 8. 장징후이 (만주국) 의 추가 의견 9. 바모 (버마국) 의 추가 의견 (자유인도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연설) 10.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11.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양도 연설 12. 도조 히데키 (일본) 의 폐회사 13.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폐회사 14.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3일차] (1943.11.7) 15. 왕징웨이의 기자들간의 담화 16. 호세 라우렐과 기자들간의 담화 17. 바모와 기자들간의 담화 18. 장징후이와 기자들간의 담화 19. 완 와이타이콘과 기자들간의 담화 [대동아결집국민대회 (大東亞結集國民大會)] (1943.11.7) 20. 도조 히데키 (일본) 의 연설 21.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연설 22. 완 와이타이콘 (타이왕국) 의 연설 23. 장징후이 (만주국) 의 연설 24. 호세 라우렐 (필리핀) 의 연설 25. 바모 (버마국) 의 연설 26.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 의 연설 [부록] 27. 대동아공동선언 전문 28.각국 대표의 소견 발표 29. 왕징웨이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의 회의후 감상 / 회견 / 기념방송 30. 대동아회의 일정표 1943년 11월 6일 오후 3시 17분, 이틀간 진행되었던 대동아회의는 종료되었다. 대동아회의가 종료된 후 회의에 참가했던 각국 대표는 회의장을 나오며 기자들에게 가벼운 소감에 가까운 성명을 발표했다. 회의 종료후 각국 대표들의 성명 발표 (1943.11.6) 왕징웨이의 성명 대동아전쟁이 개시되고 동아에서 영미 양국의 세력은 처음으로 붕괴를 고하게 되었고, 그들의 침략과 착취 기도는 완전히 일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동아를 보장하는 공적에 대해 대동아 여러 민족은 감사를 표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일방적 침략과 착취의 시대를 공존과 공영의 시대로 바꾸고 동아 각민족이 각자의 자주독립을 이루고 서로가 서로의 자주독립을 존중하고 문화에 있어서는 창조력과 조화력을 발전시키고 경제에 있어서는 호혜를 실행하여 장단상보(長短相補), 유무상통(有無相通) 하게 했습니다. 이는 동양이 본래 가지고 있던 도의적 정신으로, 서양의 공리적인 견해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선진국인 일본은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여 동아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비롯한 신흥국가로써 부흥을 도모하는 국가는 각각의 전력을 다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 완성의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완 와이타이콘의 성명 저는 약 3년전 타이 왕국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간의 국경 확정회의를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적이 있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영토문제는 일본정부의 중계로 정당하게 완만히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일본은 대동아 지역에 있어서 평화와 안정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정의가 행해지기를 요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은 이번 기회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대동아전쟁의 발발과 함께 타이 왕국은 곧바로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번에 관대하게도 타이 왕국이 영국에 의해 빼앗긴 북부 말라이의 4주와 샨 지방의 2주의 타이 왕국 편입을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타이 왕국에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친선 행위를 다른 대동아 국가들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에 도쿄에서 열리게 된 대동아회의는 공영권의 건설과 친선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회의는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번 회의의 결과로 발표된 대동아공동선언은 대동아 및 전 세계 역사의 신기원을 긋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본의 더욱 친밀한 벗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귀국 후에는 반드시 타이 왕국 국민들에게 일본 국민이 이 전쟁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음을 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타이 왕국은 일본 국민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동시에 최대의 협력을 할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장징후이의 성명 동아 각국이 역사상의 한 획을 긋게 되는 이번 대동아회의를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은 천황 폐하의 위세 아래 충렬한 일본 육해군 장병들이 용전하고 일본의 소위 살신성인(殺身成仁) 하는 숭고한 정신과 이를 행하기 위한 실천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충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지금 세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치열하고 심각한 결전의 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지대문박(地大物博)의 동아와 서양의 추축국이 융연(融然)하게 화합하여 혼연일체가 된다면 어떠한 틈도 생기지 않고 필승불패의 신념을 더욱 양양하여 당당한 총진군을 이루어 승리의 영광이 우리 앞에 있게 될것임을 저는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호세 라우렐의 성명 대동아 각국 및 각국 국민은 스스로를 보위하고 또한 세계의 평화 진전을 위해 이제 강고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열렬한 신념과 감위의 정신에 불타 수많은 문명을 낳아온 우리들의 조상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숨겨진 그 힘의 근원을 찾아 지혜와 경험의 무한한 저력 속에서 우리들의 생활을 개조하고 우리들의 동양에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패권을 형성하고 동양의 창조적 정신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후 각국 대표들은 신주쿠의 신주쿠교엔(新宿御苑) 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 高松宮宣仁親王),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 기도 고이치 (木戶幸一) 내대신부, 마츠다이라 츠네오 (松平恆雄) 궁내대신, 시마다 시게다로(嶋田繁太郎) 해군대신, 시게미츠 마모루 (重光葵) 외무대신, 아오키 가즈오 (青木一男) 대동아대신 등이 참가 했다) 신주쿠교엔에서 각국 대표와 일본 정부측 인사들은 쇼텐페이(翔天亭) 앞 피어있는 국화를 감상하며 4시 다과회를 가졌다. 이후 오후 6시, 총리 관저에서 개최된 만찬회에 참가하며 6일의 일정은 끝이났다.)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공동선언의 작성과정 (1943.7~ 10)](https://static.wixstatic.com/media/00f48f_89751653176c4911a446ec1de58202ea~mv2.png/v1/fit/w_176,h_124,q_85,usm_0.66_1.00_0.01,blur_3,enc_auto/00f48f_89751653176c4911a446ec1de58202ea~mv2.png)
![[연재] 대동아회의 회의록 - ⓪ 대동아회의 개최결정에 따른 각국의 반응 (1943.10)](https://static.wixstatic.com/media/00f48f_01ab40eb536847bba407cbf8a1589044~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00f48f_01ab40eb536847bba407cbf8a1589044~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