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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시기 잡지 한민 (韓民) 의 왕징웨이 관련 기록 (1940)
잡지 한민(韓民) 의 표지. 는 194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국민당 선전부의 엄항섭(嚴恒燮)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중국서 발간한 월간종합지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이 본 잡지에 참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하였다. 본 자료는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 의 자료 중에서 왕징웨이 정권 & 왕징웨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역적 왕징웨이 괴뢰조직의 죄상 석촌 (石村)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역적 왕징웨이 의 괴뢰조직은 지난달 30일 난징에서 왜적의 연출로 그 막을 올렸다. 이 천고의 추한 연극은 가물거리는 적의 ‘마지막 방패’임을 폭로하고 온 천하에 알려진 역적 왕징웨이의 죄상이 산송장의 짓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우리들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역적 왕징웨이가 일본과 내통하여 염전(艶電, 여기를 참조 )을 발표한 때는 이미 민족과 국가와는 절교한 것이다. 그는 황제(黃帝)의 자손이라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온갖 멸시를 당함이 마땅하다. 이 반역행위의 출현을 장(蔣)위원장은 “일왕밀약 (日汪密約, 1939년 12월 30일 체결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을 의미한다. 여기를 참조 ) 을 전국 군민(軍民)에게 알리는 글”에 명료하게 지적했다. “나는 몇개월 전 앞잡이 조직이 조만간 출현하리라 생각했다” 고 한 것이다. 이에 나는 통분한 나머지 비분에 떠는 열정으로 전심전력 적의 악랄한 정치음모를 분쇄하고 반역자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할 일이 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적이 왜 왕정위를 끌어들였겠는가?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항전에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연구한 이후에 비로소 정확하게 노력방향을 잡아야 하겠다. 왕징웨이의 무능함을 우리뿐만 아니라 적도 명백히 알고 있다. 적의 대변인실이 최근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들 역시 ‘왕정권( 汪政權) ’이 질서정연한 중앙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또한 4년에 걸치는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지 실제로 이 시국을 수습할 능력이 있는가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적은 이미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하리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공연히 골치거리를 하나 더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가? 왕징웨이가 말하는 평등호혜(平等互惠)·화평반공(和平反共)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적은 원래 기질이 교활하고 악랄하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적이 연출하는 꼭둑각시 연극을 볼 것 같으면 3가지 음모가 숨어 있다. 1. 자국민을 기만함 적이 그들 국민에게 한 거짓선전을 보자. “중국은 비옥한 땅과 광물이 무한정하다. 하지만 국방력이 미약하고 민족의식이 저하되어 중국을 정복하기만 하면 일본의 난국은 자연히 해결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용하고 아무리 취해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3개사단의 병력 정도로 3개월이면 중국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하여 민중의 침략심리를 조성했다. 루거우차오 이래 적은 많은 병력과 경비를 투입해서 연안 부근을 점령했다. 그러나 우리의 장기항전은 적을 한층 진흙 속으로 몰아넣어 전쟁의 종결이 요원한 것이다. 적의 국내 사정은 날로 더욱 심각해졌다. 물자는 결핍하고 생산은 저조하여 경제가 날로 무력해지니, 공채를 증발하고 세금이 과중해져 국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 졌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날로 많아지고 장정은 줄어들어 병력을 보충하기도 곤란해졌다. 이렇게 되자 그 국민들은 전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몽상임을 알게 되고 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니 반전운동은 점점 만연되었다. 이 때에 적은 ‘인심안정정책’으로 왕징웨이를 무대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자기국민을 기만함으로써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역적 왕정위의 괴뢰조직의 성립이 중국사건을 매듭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했다. 그러나 이 계산은 불가능한 것이다. 적의 전 수상 아베(阿部)는 일찌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신중앙정권의 성립이 사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240개 사단의 정규군과 수백만의 유격대가 있기 때문이다.” 적의 수뇌층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자기네 일본 국민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고 보는가? 기실 적의 운명은 우리 손아귀에 쥐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교묘한 재주를 피워도 일은 악화만 되어 가는 것이다. 2. 세계 각국을 위협 적의 대륙정책은 중국에, 정식이권을 획득한 제3국으로서의 위치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을 완전 독점하고 나아가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이다. 적이 발표한 성명을 볼 것 같으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건설’, 중국에서의 제3국의 권리 존중은 사탕발림의 말일 뿐으로, 이는 ‘일왕밀약(日汪密約)’을 통해 적의 악랄한 음모라는 것이 세계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그러므로 허무맹랑한 선전을 아무리 해보아도 한층 어긋날 뿐이다. 때문에 적은 역적 왕징웨이를 끌어들여 제3국의 권익을 존중하는 체함으로써 장강을 개방하고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각국과 접촉하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점령지역내에서 일어난 반영운동이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무모한 짓은 모두 적의 간교한 계책임을 잘 알고 있다. 결코 이것이 세계 여러 나라를 위협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도 당하고 있을 나라는 없는 것이다. 미 국무성은 왕정위의 괴뢰조직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영국의회는 충칭의 국민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세계여론을 보아도 적과 왕(汪)의 괴뢰조직의 음모는 명백한 것이다. 3월 3일자 워싱턴 ≪명성(明星-The Morning Star)≫지의 언급은 “도쿄측에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성립을 널리 선전하는 것은 중국을 중국에 되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는 이미 ‘자유중국’을 속일 수 없고, 또한 세계 각국도 속일 수 없다.” 고 했다. 1일자 상해대미(大美)석간도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대해서, “반드시 새로운 계략이 있을 것인데, 문제는 외국을 배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25일자 ≪진리 (眞理)≫지 논설은 “난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한 연극이다. 일본 내부의 형세가 날로 약해져 가는 것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고 왕의 괴뢰조직을 일축했다. 이상의 언급은 국제적으로 일본을 대신해서 조종(吊鍾)을 울려 준 것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또한 세계는 정의와 화평의 우방이며, 일본의 어리석은 위협은 절대 받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이화제화(以華制華) 정책 적은 중국을 침략하여 많은 괴뢰조직을 만들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임시정부’, ‘유신정부’로써 광주(廣州)·무한(武漢)·하문(厦門) 등지의 괴뢰조직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아직도 충분치 못했단 말인가? 적의 침략수법(手法)은 조금씩 먹어 들어가는 식이다. 피차 마찰을 피하면서 좋게 조금씩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중앙정권’ 이라고 하는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왜 내세워야만 했나? 역적 왕정위는 중국국민당과 국민 정부의 이름을 도용해서 새로운 그의 당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위 ‘화평운동’ 이니뭐니 하지만 이는 ‘중국영토의 주권존중’,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은 없음” 등의 구호가 사실인듯이 보이기 위한 적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도구인 것이다. 바로 이화제화(以華制華), 이당제당(以黨制黨)의 악랄한 술책이 그 목적하는 바이다. 장위원장은 ‘일왕밀약고전국군민서(日汪密約告全國軍民書)’에서 역적의 간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는 오늘 이후 반드시 국부적 화해로써 전체적 화해를 이루자”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화평운동’에 주력할 것이다. 그는 매수한 무리로 괴뢰정부를 조직해서 ‘일지관계조정강요’의 골자를 수행하려 할 것이다. 제3국이 괴뢰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더라도 복잡한 사건이 생기면 많은 국가가 그의 괴뢰정부와 실제로 거래가 있을 것이라 하고. 아마도 망상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부적 화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본군의 난징점령을 의미한다. 일본에 부분을 팔아버리고 다시 그 부분을 기초로해서, 적의 힘을 이용하여 항전하는 전군민, 망국의 노예됨을 원치 않는 이들을 없애면 전면적인 화평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망상할 것이다. 적의 야심을 따라 완전히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 그의 간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굳세게 항거하여 적의 음모를 분쇄하고 화평과의 타협반대만이 승리를 얻을수 있고 항전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역적의 말로를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황제(黃帝)의 자손됨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라고 말이다. 가. 중국 국민의 반역자를 보는 눈 왕징웨이는 역적으로, 도둑의 하수로 사회에 알려지기에 앞서, 국내외에 잠복하여 터무니 없는 ‘화평’ 를 선전했다. 일시적으로 생활이 곤란하고 환경이 나쁜 이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활한 유혹에 넘어가 항전에 회의를 갖는 자가 있으니, 이처럼 제 집을 도적질하는 무리는 막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숨은 걱정은 바로 이런 무리이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정치 무대에 나타났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망국의 노예됨을 원하지 않고 있고 그들을 역적이라고 보며, 같은 동포의 손을 끊는 자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유혹을 해도 국민은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적의 앞잡이를 제외한 4억 5천만 중국 동포 대부분이 순(順)과 반(反)의 행위를 엄격히 구별하며, 충(忠)과 간(奸)은 결코 병립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결코 적에 대한, 격렬한 원한과 분노로 가득찬 중국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저하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적 내부의 충돌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비록 일은 시작했지만 그 내부의 모순은 날로 커진다. 괴뢰 ‘임시정부’와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인 괴뢰 화북정무위원회(華北政務委員會)의 왕극민(王克敏), 왕읍, 무빈(繆斌) 등이 왕징웨이와 반목하고 있고, 표면상 취소된 ‘유신정부(維新政府)’의 양홍지(梁鴻志), 온종요(溫宗堯), 임원도 (任援道) 등도 마찬가지로 각처에서 왕징웨이를 견제하고 있다. 괴뢰 ‘몽강자치정부’의 이수신(李守信)과 괴뢰 ‘우한 정권’의 하패용(何佩瑢), 장인려, 석성천(石星川), 뇌수영(雷壽英) 등도 왕징웨이의 지배에 대한 항거가 공공연하게 또는 비밀리에 일고 있다. 이미 왕징웨이 자신의 조직에서도 진공박(陳公博), 저민의, 주불해(周不海) 등이 권리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갖 추태를 다 노출하고 있다. 적의 손아귀에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명리(名利)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의 환심을 사야한다. 따라서 당연히 서로 배척하고 견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앞잡이 조직 내부의 모순과 충돌은 점점 심해져서 결국엔 그들이 저지를 죄악을 감소시킨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적이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내세운 이유와 작용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장(蔣)위원장의 항전 2주년 기념사에서 지시한 바를 보자. “대체로 적에 유리하다고 인정되면 모두가 우리에겐 해로운 것이다. 때문에 적이 원하면 우리는 해주지 말아야 하고, 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해야 된다. 적이 좋다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것이고, 나쁘다고 하면 반드시 좋은 것이다. 적이 하는 일체의 언행은 모두 그 반대적 입장에서 관찰하여 받아들이고 뿌리쳐야 한다”고 했다. 적의 교묘한 계책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충실히 수행하고 용감하게 매진함으로써 적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한국인의 눈에 비친 역적 왕징웨이 일파(一波)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나는 한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말이 들리는 바에 대해 그렇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그가 소위 염전(艶電)을 발표하고 괴뢰정권을 만든 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이미 우리의 혁명동지가 아니며 일본의 앞잡이인 적이 된 것이다. 그는 적을 끌어 들여 수십만의 자기 동포를 죽였다. 그는 앞잡이가 되자 곧 우리 한국인과 가장 친한 전우인 중국인, 어떤 의미에서는 간접적으로 몇십만 명의 한국 동포를 죽인 것이다. 이 괴뢰조직이 목적하는 바가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다. 그의 간계가 성공한다고 할 때 한중 양국의 전도는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중국 항전의 최후 승리를 한층 촉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케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은 독립과 해방을 맞게 되니,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비단 관심을 가질 뿐이 아니라 또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씹지 않고서는 시원치않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에 “역적 왕징웨이의 계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길 바라고 또한 괴뢰조직의 원흉인 왕징웨이를 한국인이 능히 박살내 줄 것이며, 이는 결코 기회주의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믿어주기 바란다. 왜적의 조종을 받는 매국노의 죄악과 그 죄악이 초래하는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 중국 동지들보다는 아마도 한국인이 조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반역행위에 관한 한 매국노는 민족의 패륜아요, 인류의 저주받는 독충인 바 누구보다도 엄히 다스려져야 한다. 옛부터 우리 한국인들 중에는 의사(義士)들이 많았다. 박랑사중(博浪沙中)에서 진시황(秦始皇)을 격파한 창해 역사(滄海力士),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죽인 안중근 (安重根), 황포강(黃浦江)에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저격한 김익상 (金益相), 앵전문(櫻田門)에서 일본 천황 유인(裕仁)을 저격한 이봉창( 李奉昌),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白川義則)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尹奉吉)의사 등은 모두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한국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희망은 결코 몽상이 아니며 오래지 않아 반드시 실현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완용 (李完用)은 본래 그 조상들이 고위고관을 지낸 귀족의 후손으로 부유한 집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의지가 굳고 냉혹한 성질에 시기심이 많았다. 한국혁명의 여명기에 있어서 매우 열렬하게 수차의 정치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제법 민중의 호응도 얻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들어서자 곧 정권쟁탈에 급급하여 친러시아파의 영수가 되었다. 일본은 재빨리 이완용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그를 매수한 것이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매우 소심한 방법을 썼다. 일본의 힘을 이용할 뿐, 그들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정치 야욕에 어두운 이완용은 모르는 사이에 일본의 이용물이 되었다. 이미 발은 진흙땅에 빠져 들어가 끝내 헤어나질 못했다. 게다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이완용은 한국의 역적이라는 사실무근의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이 이러한 간계를 쓰는 목적은 2가지였다. 첫째는 이완용을 신뢰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의 언행을 의심하게 하므로써 장차 그의 사회적 신용을 완전히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고, 다음은 역적으로 몰린 이완용이 제2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여 완전한 한국의 역적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완용도 이런 일본의 간계를 몰랐으므로 자신은 종래의 애국자적인 입장에서 허무맹랑한 말로 민중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세가 나날히 약해짐을 통탄하며 친일로써 나라를 구하는게 옳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자신의 입으로 세상 소문이 사실임을 밝힌 셈이다. 민중은 이제 “이완용은 철저한 역적이다”라고 단정을 내리니 이완용 또한 민중과의 접촉을 피하게 되고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끝내 후회하지 않고, 반대로 오기가 나서 더욱 철저하게 나라와 국민을 해치고자 하였다. “일을 하지도 않고 억울하게 쉬지는 않겠다”하여 하등의 거리낄 바가 없었다. 이는 실로 뜻밖의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제일 관문이다. 그는 사리사욕을 위해 우두머리가 되고자 대담하게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러나 적의 앞잡이가 그 한사람은 아니었다. 송병준 (宋秉畯), 이용구 (李容九), 조중응 (趙重應) 등 아첨하는 무리는 각양각색으로 공을 다투었다. 그러므로 그는 “안했으면 몰라도 뛰어든 이상 남에게 뒤질 필요가 없다”고 결심했다. 이같이 하여 그는 가장 악질적인 앞잡이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둘째 관문이었다. 그는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한정없는 큰 죄를 범했다. 후에 이재명 (李在明)의 저격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 채찍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그 운명은 울고 웃을 수 있는 자유도 구속 받은 채 결국 조국을 팔아 넘겼으니 천추만대에 죄인이 된 것이다. 이제 역적 왕징웨이의 과거를 살펴보자! 그의 지나온 길이 이완용과 교묘하게 들어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흥미있는 문제이다. 역적 왕징웨이의 가계(家系)·가산(家產), 총명함·성질, 명예욕, 초기의 구국사업, 몽상적인 정권욕, 기회주의적인 친 러시아정책, 친일구국, 애국지사에게 저격당한 일 등 여러 반역의 무리[양홍지(梁鴻志)·왕극민(王克敏) 등]와 공을 다툰 일, 비밀리에 매국협정을 한 일, 이에 대한 왜적의 대우, 어느 한곳 이완용의 행로와 다른 것이 있는가? 역적 왕징웨이는 일찌기 이완용의 매국적인 궤도를 그대로 달렸는데 더구나 이완용이 철저한 매국노가 되게 한 마음의 제1, 제2 관문까지 그대로 겪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각처의 상황과 내포하고 있는 조건들이 30년 전의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도에는 광명이 있을 뿐, 결코 왕징웨이 때문에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와 이완용은 그 말로가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완용이 한국의 역적이 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히 알고 있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반역 목적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광적인 역적 왕징웨이가 민중을 속이려 한다면 제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누가 그를 당해 내겠는가? 만약 역적 왕징웨이가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면 이완용은 왜 한국을 구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완용은 한국의 스승을 따라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중일전쟁은 3년간에 걸쳐 그 전선이 4천킬로에 달하였다. 왜적은 현재 인적·물적·재정적인 힘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경제공황 속에 붕괴하려는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빨리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황은 더욱 확대되어 뜻하던 바와 같이 되지 않자 산궁수진(山窮水盡)한 왜적은 이때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다. 왕징웨이를 요직에 올려 난국을 적당히 대처하여 그 붕괴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소위 중국으로 중국을 제어하는 것인 바, 전쟁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하는 정책이다. 또한 적의 정부요인 요나이(米內)가 정책을 밝히기를, 군사적인 면에 덜 치중하고 힘을 분산시켜 정치 및 경제면으로 방향을 돌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역적 왕징웨이는 거의 죽어가는 왜적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키는 강심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장뇌작용을 할 수 있는지는 상관할 바 아니라도 사실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의 말은 모두 왜적이 지시하는 것들로서 왕징웨이는 무대위에서 꼭두각시역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거처는 왜적의 물샐틈 없는 감시하에 말과 행동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왜적이 그에게 준 수백만 원의 대가이다. 중국을 구하자는 그의 말은 바로 왜국을 구하자는 것이고, 그가 지껄이는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바로 노예주의인 것이다. 왜적이 중국을 침략한 목적은 바로 중국 4억 5천만 인구의 고혈을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화북(華北)·화중(華中)·화남(華南) 각 지역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화북 연락부 아래에 또 제1, 제2 경제국을 설치하고, 그 직할하에 무슨 ‘화북개발회사(華北開發會社)’·‘화중진흥회사(華中振興會社)’·‘ 중국연합준비은행( 中國 聯合準備銀行,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 화흥실업은행 (華興實業銀行,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이니 하는 등의 허수아비 경제금융기관을 조직했다. 또한 점령지역내의 곳곳에 크고 작은 수십개의 일본과의 공동경영이라는 허수아비 은행·스파이 은행 따위를 설치했다. 또한 무슨 전기회사·전신전화회사·운수회사·성냥회사·광업회사·제철회사·수산회사·기선회사·수도회사·잡사회사·제염(製鹽)회사·방직회사·제분소·정미소니 하는 등의 무려 수 백 가지에 손을 대었다. 그밖에 점령지역내의 철로와 도로를 완전히 정리하여 교통망을 확보했다. 그들은 이같이 많은 일을 벌려 놓았지만 그 중에서도 착취기관만은 아주 완벽하게 설치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붙들지 못했다. 이유는 재벌들이 모조리 모두 대륙으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민족의 자본을 끌어 들이려고 점령지역내에 들어갔지만, 일반 지주와 소상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일면 왕징웨이로 하여금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퍼뜨리게 하고, 또 일면으로는 서민들에게 작은 혜택을 베풀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았을 때 30년 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전후의 사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적이 처음 한국에 공격해 을 때 백성들은 모두 비분해 하고 두려워하여 일제히 심산궁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병합한 후, 곧 숨어버린 사람들을 끌어내는 방법을 쓴 것이다. 도시에 모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고 세금을 감해 주는 등, 작은 혜택을 베푸는 듯했다. 또한 미신을 장려하고 중대한 반일분자라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기 공작은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다.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몇몇 시골 노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온 후로 우리 사는게 전보다 좀 나아졌어” 라고.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1년도 되지 않아 시달림으로 날을 보내게 되었다. 2, 3년쯤 지나서는 재산·가옥·농지들이 모두 동양척식회사·금융조합 등 착취기관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가련한 이들은 대소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났다. 남부여대하여 동북쪽의 황야를 향해 유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매우 불행스러운 일이다. 30년 후인 현재 나는 충칭 거리에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옛날 한국에서 들었던 것과 아마도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이렇게들 말한다. “이곳은 물건이 너무 비쌉니다. 며칠 전 고향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곳은 살기가 아주 좋아졌다나 봅니다. 전처럼 영망은 아니라니 나도 이젠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읍니다. 여기서는 하루를 보내기도 힘이드니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옛날 우리의 처지가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앞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는 꼭 구해주려고 하겠지만 이 경우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나에게 매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어찌 할 것인가! 후방의 인심이 불안정하면 전방의 승리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후방 인심을 안정시키는 중요조건은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비록 전시에 있어서 물가의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현재 충칭 물가의 폭등은 단지 전시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조건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위적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정부를 도와주고 격려하므로 억제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적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의 물가 앙등은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본토의 2, 3배 이상이나 되는 중국영토를 점령하더라도 제일차대전 중의 독일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경제의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점령구내의 모든 물자를 바닥이 날 때까지 수탈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인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러는 것일까? 노동자·농부·상인·학자·정치가 할 것 없이 절대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 중국국민의 생활은 비교적 다른 교전국보다는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닥쳐올 많은 역경이 있지만 최후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광명된 앞길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투 노력해야 한다. 절대 굽히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국가 민족을 통일하기 위한 대계는 반드시 정부에 협조하고 최고 통수자를 옹호하며 다같이 국난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도중에 한 명이라도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안주(安住)하고 싶고 영원히 복을 누리고 싶다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만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그것을 타도하기에 앞서 먼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지만 역적 왕징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원한은 왜적보다는 역적 왕징웨이에게 더 사무치지 않은가 ! 왕징웨이는 중화민족의 패륜아일 뿐 아니라, 전인류의 독충(毒虫)이다. 일본과 그 도당을 제외한 전세계가 그에게 침을 뱉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독균박멸(毒菌撲滅)을 위해서는 강력한 소독약을 써야만 한다. 혹 이에 소홀하면 그 독성은 넓게 만연될 것이 아닌가 ! 우리의 구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하면 먼저 그들의 앞잡이 왕징웨이를 없애자” “중국이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장위원장의 항전을 옹호하자”. “동부아시아의 영원한 평화 수립을 위해선 혁명지도자 장제스 장군을 옹호하자.” 이완용과 왕징웨이 - 한민 (韓民) 제1기 제1호 지난날 한국을 망하게 한자는 이완용이고, 오늘날 중국을 팔아먹으려는 자는 왕징웨이다. 둘다 적을 아버지로 여기는 (認賊作父) 민족의 변절자이며 일제의 앞잡이 이기도 하다. 한중에게 불행이 있다면, 왕징웨이와 이완용이 비록 생은 다르지만 서로 하는 일마다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3.1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왜 총독부 당국은 조선의 앞잡이들에게 진압책을 구했다. 이완용은 가장 먼저 꼬리를 흔들며 3가지의 정책을 바쳤다. 1. 해산을 권고한다. 2. 군대를 보내어 무력시위를 한다. 3. 학살을 감행한다. 이는 지난 여름 중국 각 식문에 폭로된 왕징웨이의 친일적인 책동, 난창, 창사, 난닝 등지에 대해 진격을 권하고, 주요 도시를 폭격하게해 국민정부를 위협한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왕징웨이는 적이 곧 무너질때, 국가의 항전이 승리할 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의 생존을 돌보지 않고 있다. 동서남북을 모두 팔아먹고 자연과 자원을 팔아먹어 대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버린 '일왕밀약' 을 체결한 죄는 이완용보다 더 심하다. 적이 일왕밀약을 가볍게 승낙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 1939.12.30)
가오쭝우가 1940년 1월 22일자 홍콩의 대공보 (大公報) 에 폭로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 (가오쭝우는 비밀리에 일어로 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일본어판을 찍어 대공보에 폭로했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1939.12.30 왕징웨이측 : 저우포하이 (周佛海) , 메이쓰핑 (梅思平) , 린바이셩 (林柏生) , 저우룽샹 (周隆庠) 일본측 : 카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 스가 히코지로 (須賀彥次郎) , 야노 마사키 (矢野征記), 이누카이 다케루 (犬養健) 요령 (要領) 일지 양국 정부는 ‘부속 문서 1’에 기재된 새로운 일지신관계의 원칙을 준봉하여 양국 간의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한다. 사변 중 새로운 국교 관계 조정 이전 이미 존재해왔던 사실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태의 변화에 따라 전조의 원칙에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사변이 계속되는 동안 불가피하게 존속하고 있는 특수사태의 변화 및 해결, 나아가 사변의 해결은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위의 2개 항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 과정을 거친다. 부속문서 1 (일지신관계조정의 원칙) 일만지 삼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서로 선린하여 결합하고, 동아화평을 공동의 중추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한 기초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초로 한다. 일만지 3국의 일반적인 제휴 및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등의 원칙을 설정한다. 화북지역과 몽강을 국방 및 경제상의 일지강도결합지대로 설정하고, 몽강은 추가적으로 방공을 위하여 군사적, 정치적 특수지위를 특별히 설정한다. 장강 하류에 경제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에 특별지위를 설정한다. 위 열거된 항목의 구체적인 사항은 ‘부속 문서 2’에 기재된 주요 항목들을 기준으로 한다. 부속문서 2 (일지신관계조정요항) 친선우호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여 동아화평을 확보하며, 선린우호를 위해 상호보완과 우호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인정하고, 일본과 만주는 지나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3국은 국교를 성립한다. 일만지 3국 정부는 정치,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상호간의 우호를 훼손할만 한 조치와 원인을 차츰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실시하며, 제삼국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조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협력하여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기여 한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고문을 파견하여 신건설에 협력하게 하고, 특별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 중요기관에 고문 직원을 배치한다. 일본과 만주국과의 선린관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일본은 단계적으로 조계와 치외법권 등의 철폐를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방공에 협력하고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의 구역에서 공산당 분자와 조직을 척결하고, 방공을 위한 정보선전에 서로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공동방공의 실행과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군대를 화북과 몽골의 요충지에 주둔시킨다. 일지방공군사동맹을 별도로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체적, 국지적 정세에 따라 가능한 빨리 철수하되, 현재 화북 및 장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치안이 확립될 때까지 계속 주둔한다.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 함선 부대가 장강 연안의 특정지점과 화남의 특정 제도에 주둔하여 정박하는 것을 인정한다. 일본은 대체로 주둔 지역 내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항만과 수로에 대해 군사상의 요구권과 감독권을 유지한다. 중국은 일본 주둔 지역내의 경찰대 및 군부대 등 무장 단체의 배치 및 군사시설의 설치는 당분간 치안 및 국방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으로 하고, 일본은 중국 군대와 경찰대 건설에 대하여 고문 및 교관 파견, 무기 공급 등에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지속적인 연대와 공동방위를 실현하기 위해 산업, 경제 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상호보완의 취지를 바탕으로 공동호혜를 주 목적으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하여 위의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각각 필요한 협정을 체결한다. 화북과 몽강의 자원, 특히 몽강의 자원 개발과 이용해 대해서 중국은 공동방위 및 경제결합을 위하여 일본에 특별한 편리를 제공한다. 즉, 특정 자원의 개발과 이용에 관하여 경제경합지역에서 편익을 제공한다. 일반 산업에 대해 일본은 중국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생산량 증대와 농업에 관련하여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이의 개선을 지원한다. 중국의 재정, 경제 정책 수립과 관련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원을 한다. 교역에 관하여 적절한 관세와 세관 제도 등을 채택하여 일만지 간의 일반통상을 진흥시킴과 동시에 일만지간의, 특히 화북과의 물자 공급을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하게 해야 한다. 중국의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관하여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 협력을 하고, 전 중국의 항공 발달, 화북의 철도 (롱하이선 포함) , 일지간 및 중국 연안의 주요 해운 및 강의 수운, 장강 하류의 통신 발전을 일지교통 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본과 협력하여 신 상하이 건설을 추진한다. 비고 신중앙정부는 사변 이래 중국 내의 일본국 신민이 입은 권익의 손실을 배상한다. 신중앙정부는 일본과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하기 전에 일본과 관련문제에 대해 일본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부속문서 1. 임시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의미하는 화북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및 황하 북쪽의 허난성 일대 지역을 의미한다. 화북과 일본, 만주는 국방, 경제적으로 강도 높은 결합지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따라 일본-만주 지역과의 업무 처리를 위하여 화북정무위원회 (가칭, 이하 동일)을 설치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과 구성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협의하되, 중앙정부 수립전에 왕(王,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씨와 왕(汪, 왕징웨이) 씨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 구성은 일지신관계가 정상화 되는 시점에 아래에 기재된 항목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도로 하되, 그 이전에 상한선을 두고 순차적으로 정리한다.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화북정무위원회가 이를 실질적, 잠정적으로 승계하여 정무 이행의 원활을 도모하게 하고 사람들을 동요하지 않게 한다. 공동방위와 방공에 관해서는 (1) 일본군 주둔에 따른 사항을 처리한다. (2) 일지 방공,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3) 기타 일지 군사협력을 처리한다. 경제제휴, 특히 매장된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은 일본 – 만주국- 화북의 물 공급에 관한 것으로, (1) 일본의 매장자원 개발 및 이용에 관한 특별 편익 사항을 처리한다. (2)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물자 처리에 관한 합리적 사항을 처리한다. (3)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통화 협력에 관한 사항 처리한다. (4) 항공, 철도, 통신 및 주요 해운의 지원 협력 사항 처리한다. 일본인 고문 채용 및 직무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중앙정부는 연합준비은행제도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는 기간동안 필요한 지원을 한다. 4-1 화북정무위원회와 중앙정부간의 주요 사항을 일시적으로 규율한다. 화북정무위원회는 소요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한다. 이를 워해 관세, 염세 및 통원 세칙상 중앙세이나 관세 수입의 일정 비율과 염세 수입의 영어부분, 통세는 일시적으로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상술한 국세징수기관의 감독은 중앙정부가 화북정무위원회에 위임한다. 4-2 화북정무위원회는 각종 채권을 보유, 운영한다. 4-3 관유재산은 계속하여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차후 조정한다. 4-4 세관, 우편, 항공은 중앙정부의 관리하에 두되, 점진적으로 이를 실현하게 한다. 4-5 룽하이선의 관리 및 운영은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4-6 제삼국과의 외교교섭은 중앙정부가 하고, 일본 – 만주국간의 교섭 및 지방과의 교섭처리는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2. 유신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유신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유신정부를 동요시키는 것을 막되, 통합을 유도하여 중앙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된 후 유신정부는 양해하여 정무위원회 등을 설치하지 않는 만큼, 왕징웨이 측은 유신정부의 주요인물의 체면과 위상을 고려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되고 유신정부가 해산될 때 중앙정부는 유신정부 기존의 정무를 계승하여 정무를 원활하게 수행하여 관헌과 인민이 불안을 가지지 않게 한다. 장강 하류 지대에서 일지경제강도결합을 실현하기 위한 일본의 특별요구는 다음과 같다. 4-1. 신 상하이에 대하여 신 상하이 건설에 관한 사항에 협력한다. 신 상하이에서 일본군 주둔에 따른 조치사항을 처리한다. 신 상하이에서 항공 및 주요 해운인 장강의 민간 해운 및 통신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기타 일반 일지협력에 관하여 신 상하이에서 처리한 사항을 처리한다. 4-2. 위의 일본측의 요구를 용이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일지경제협의기관의 설치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3. 몽강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이야기하는 ‘몽강’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북쪽의 (만리장성 안쪽 지역도 포함) 의 지역을 의미한다. 몽강은 국방, 경제적으로 일만지 삼국의 강도결합지대로서 특수성을 고려하여 외교 이외의 행정, 입법, 사법, 군사, 대 몽강 교섭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자치를 인정하는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이다. 몽강연합자치정부와 신중앙정부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왕징웨이 또는 그의 대표자와 덕왕 및 그의 대표자와 회견을 통해 문서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한다. (1) 중앙정부는 몽강연합자치정부의 고도의 방공자치를 인정한다. (2) 두 정권의 관계 조정에 관하여 본 양해에 따라 신중앙정부 수립 후 별도의 협정을 체결한 4. 전항의 이해가 성립될 때 몽강연합자치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정치회의에 참석한다 5. 중앙정치회의에서는 제3항의 양해 범위를 벗어난 사안을 다루지 않는다. 4. 샤먼 왕징웨이 측은 샤먼을 특별행정구역으로 두는 것을 인정한다. 5. 화남 연안의 특정제도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 가운데 하이난 섬 지구의 중앙정부 직할의 행정조직 및 군사처리기관은 본 섬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바탕으로 좌기의 요구사항을 처리하도록 한다. 일본군의 주둔에 수반하여 발생한 사항 일본과의 군사 및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 국방상 필요한 특정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한 사항 항공, 통신, 해운에 관한 사항 비고 본 요령은 장래 일지간에 약속해야 할 사항들 및 지나 내정에서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항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가오쭝우의 폭로에 대한 왕징웨이의 반응은 여기를 클릭 : ) (중국연합준비은행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미 국무장관 성명 (1940.3.30)
코델 헐 (Cordell Hull) 제 47대 미합중국 국무장관.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무려 12년 가까이 수행하였다. 미 국무장관 성명 (왕 정권 성립에 관한 미합중국 국무장관 성명) Statement by the Secretary of State of the United State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Wang Government 1931년 이래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비추어 볼 때, 난징에 새 정권을 세우는 것은 한 나라가 이웃 나라에 군대를 통해 그 의지를 강요하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과 정상적인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차단하는 계획의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난징의) 성장은 ‘외부 권력’ 의 지도 아래 중국에서 기존에 설립된 다른 정권의 제도와 모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기능적으로 특히 외부 권력의 이익을 선호하고 미국과 다른 제삼국 국민들이 법적으로 정당한 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누리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외부 세력’ 의 고위 관계자들이 자국은 상대국의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의도가 있으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발전하면 이러한 의도가 증명될 것이라 말한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난징에서 새워진 새로운 정권의 모습을 보면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모두 그러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을 국가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의 입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극동 지역의 상황에 대한 미합중국의 태도와 입장은 여러 번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태도와 입장은 변함이 없다. 12년 전 미합중국 정부는 다른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현재 충칭의 정부가 대다수 중국 국민들의 충성과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라 믿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한 계속하여 충칭의 정부 를 정당한 중국 정부로 인식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명에 난징국민정부는 물론, 일본도 불쾌감을 들어내며 이에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마 야키치로 (須磨弥吉郎, (1892~1970) ) , 일본제국 내각 정보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1941년의 대미교섭에도 참가하였다. 일본 외무성 반박성명 (비공식) - 스마 야키치로 외무성 정보부장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현재 지나에 일어나고 있는 신동향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8년 12월 30일 미국 정부의 대일본통첩에서 스스로 말한 “미국 정부는 극동 사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에 완전 모순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일본군은 지나 전체의 4할가량을 점령하고 있다. 해관 수입의 약 95%는 왕징웨이씨를 수반으로 한 국민정부의 취득이며, 주요한 해항 정부는 모두 일본군에 수중에 있다. 현재의 이런 사실을 미국 정부는 결코 눈감을 수 없다. 헐 국무장관은 왕징웨이씨를 일본군이 추천하였다고 하나 왕징웨이씨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동아 화평을 위해 진췌하고 일지 양국과의 긴밀한 제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결심 아래 이번의 국민정부 성립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헐 장관은 일본이 지나를 경제적으로 봉쇄한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이는 전시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의 나타나게 될 경제적 성과 등을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미국이 본래 화평을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미국이 현재 일본과 싸우고 있는 충칭 정부에 대하여 불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노무라-그루 회담 (1939년 말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노무라 키치사부로 (野村吉三郎)와 주일미국대사 조지프 그루 (Joseph Grew) 의 회담을 이야기한다.) 이래 미국이 선결적 정신으로 일본과 토의하려 한 사실과도 모순된다. 요컨대 미국 정부의 이번 행위는 스팀슨 원칙 (헐 외무장관 바로 전의 외무장관인 헨리 L. 스팀슨 (Henry L. Stimson)을 의미한다. 스팀슨은 만주사변 후 무력에 의한 국제적 영토 변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의향과 스팀슨 일파의 일본침략불승인위원회 (American Committee for Non-Participation in Japanese Aggress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1938년에 설립되었다.) 가 최근 대일금수를 호소하고 충칭측에 원조를 하고 있는 사실은 동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려는 제국에 실로 불쾌한 사실이다. 중화일보 반박성명 중국은 대외적으로 문명국가로, 문명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문명국가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외국인의 중국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외국인의 소위 중국에 대한 특권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정부 환도 선언 및 국민정부의 정강, 그리고 왕 선생과 신문기자단의 담화 중에도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에 대해서도 이로서 답을 하려 한다. 국민정부가 부인하는 것은 부당한 중국에서의 특권뿐이다. 이러한 특권들은 불평등조약에서 비롯되거나 불공평, 부정당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중일전쟁을 이용하여 새로운 중국에서의 특권을 획득하여 영국을 대신하여 중국을 지배하려는 주인 역할을 하려 하고 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기도에 대해 미국의 만족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헐 국무장관에게 당당히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일화평을 위해 실현한 국민정부의 환도는 중국 국민이 3년 동안 일본과의 항쟁 결과 도달한 결론에 의한 것이다. 헐 장관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은 이미 대중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지난번 소련-핀란드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소련과 핀란드의 평화조약 ( 1940년 3월 12일 체결된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의미한다.) 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미국 금융계는 소련이 화약을 통해 획득한 것을 공연하게 승인해왔다. 실로 이는 미국의 국력에 의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본인도 빨리 미국이 이 평화조약을 승인하기를 바랬다.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책약은 먼저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의 중국 내 세력을 소멸시킨 후에 일본을 타도하여 중국을 제2의 라틴아메리카로 만들려는 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심리는 대중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며 대중들은 이를 아주 비판하고 있다.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가 12년 전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승인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하였고 이는 국민정부가 중국의 정통정부를 계승하였고 때문에 이를 승인하였다는 국민정부로 하여금 충분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헐 장관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미국이 승인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민정부를 승인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위협을 가해왔으나, 국민정부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였고 헐 장관은 예전과 같이 포효하고 있으나 역시 국민정부의 난징 환도 이후의 발전을 막을 순 없다. 미국의 각종 위협과 포효는 오직 미국 자신의 역사에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는 것에 불과하기 불과하기 때문이다.
- 중국의 주권 존중 원칙 실행에 관한 일본에 대한 희망 사항 (中國主權尊重原則實行に關し日本に對する希望 / 1939.6.15)
왕징웨이는 1939년 6월의 방일에서 (이때는 비밀리였다.) 자신의 신정권 성립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일본측에 제시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방일 전지나신중앙정권수립방침을 (여기를 클릭 : ) 세우면서 이러한 왕징웨이 측의 요구를 무시했다. 중국의 주권 존중 원칙 실행에 관한 일본에 대한 희망 사항 中國主權尊重原則實行に關し日本に對する希望 일본이 진정으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자 하는 성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방일하여 일본의 여러 요인들과 접촉하며 이를 직접 느끼고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현재 일본은 중앙정부 수립 공작에 전념하고 있으며 특히 인적요소 및 기초적 실력을 구비하게 하는데 전력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측의 성의는 설명을 받아도 추상적으로 생각되어 회의적 감정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없는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이에 한 걸음 나아가 구체적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특히 필요함을 통감하게 되었다. 이에 위의 목적을 위해 정치, 군사, 경제로 나누어 기술하여 일본이 양해해주었으면 하는 부분, 지켜줬으면 하는 부분을 서술하였다. 물론 세부적인 방법은 중앙정부 수립 이후 양국 정부가 중일조정원칙 및 정신을 기조로 신중하게 연구한 후에 결정할 수도 있다. 내정에 관하여 중국 내정의 독립 자주에 관해서는 일본이 여러 번 천명한 원칙인 만큼, 이에 근거하여 일본의 호의를 중국 국민들에게 증명하고 그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하의 중요한 요점들을 나열하여 일본 측의 실행을 갈망한다. 중국은 절대로 항일, 배일사상을 논하지 않을 것이며 친일적 국민교육을 철저히 장려할 것이다. 일본 측도 역으로 친중국, 친중국적 사상 내지 태도를 시정하고 친중국 교육을 실시해주길 바란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이 우리 내정에 대해 간섭한다는 의도가 있다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신중앙정부에 정치고문 및 유사한 명의의 직위를 설치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 일본과 상의를 필요로 하는 사항은 이들 고문이 아닌 모두 정당한 경로를 거쳐 중화민국 주재 일본대사와 행하게 해야 한다. 중앙정부 각 원, 각 부, 행정부처에 있어서 내정간섭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을 직원으로 임용하지 않는다. 일본 전문가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하는 것도 그 직역을 기술 방면으로 한정하여 일반행정에는 참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방침으로 한다. 따라서 해당 부 및 기술과 관련 있는 회의에는 주관 장관의 통지를 통해 참석할 수 있게 하지만, 일반 행정회의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또한 기술고민의 초빙에 있어서는 상급 관청의 인가를 받을 필요가 있으며, 기술고문에 관한 임용규정 및 복무규정은 중앙정부를 통해 공표한다. 각 성 정부 및 특별시 정부에서도 상술한 취지에 따라 정치고문 또는 유사한 명의를 가지는 직위를 설치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철병 이전까지는 해당 지방에 일본군과의 상의 및 일반 논의 사항에 관해 해당 성 정부 및 특별시 정부에 임시적으로 교섭 인원을 설치하게 한다. 성정부 소속의 각 청 및 특별시 정부 소속의 각국에서도 행정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정치고문 또는 유사한 직위를 설치하지 않는다. 단 자연과학 및 기술고문을 임용하는 경우에는 중앙정부의 방법을 따른다. 현(縣) 정부의 논의사항에 관해 교섭비서직을 설치하고 일본군의 철병 이전에 해당 지방현시 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 외교의 방식을 따르기로 하고, 명령식 문서 및 구두식 통지는 지양한다. 현재 작전중인 지역 이외의 각 현 선무반은 신속하게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각 지방정부의 신뢰도를 높이고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피하기 위해 철병 전에 일본 주둔군은 성시현 정부와 논의를 실시하기 위해선 전임 인원을 설정하여 맡겨야 한다. 재정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에 있는 일본의 어떠한 기관과 개인도 직간접적으로 각종 세수 기관을 점유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중국에서 일본군 및 일본 민간인이 중국인을 모욕하는 듯한 행동 및 태도가 보이지 않도록 시정하게 하고, 이와 같은 사소한 사고나 양국 민간의 친선의 장애를 이루는 요소는 철병 전에 특별한 주의를 가한다. 군사에 관하여 중일 양국의 국방방침이 일치하는 이상 우리의 군사시설은 반드시 일본과의 공동목표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중국의 유일 최고 군권의 독립을 위해서는 필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중앙의 최고 군사기관 (군사위원회 혹은 국방위원회처럼) 에는 고문단을 설치하되,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의 군사 전문가를 초빙하여 이를 조직하는 고문단 수는 일본이 절반, 독일-이탈리아가 절반을 차지하게 한다. 고문단장은 일본인이 담당하게 하며 국방계획 및 군사시설의 기획을 보좌하는 단장의 직권 및 범위의 규정은 중앙정부가 제정한다. 각종 군사교육기관에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군사전문가를 교관으로 초빙한다. 중국군을 감시 혹은 속박하는 것과 같은 의혹을 피하기 위해 각 부대내에선 여러 명의를 통하여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군사전문가를 임용하거나 초빙하여 직무를 담당하지 않게 한다 . 단, 중앙의 최고군사기관에서 파견한 고문으로서 부대를 시찰하는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찰은 인사 과정을 거칠 것을 요한다. 각종 병기제조공장은 필요한 경우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전문가를 기사로 임용하게 한다. 중앙정부 난징 환도 이후 중국군대가 신중앙정부로 전향하는 경우에는 협의하여 일본군은 일부 후퇴하여 그 구역을 해당 전향한 군대에 부여하거나 다른 지역을 주둔지로 부여해줄 것을 희망한다. 경제에 관하여 경제합작은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거하여 양국 인사들이 공인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원칙의 구체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시하길 요망한다. 중국의 일본 군사기관, 민간기관 혹은 개인이 점령하여 몰수한 중국의 공장 및 광산, 상점을 속히 중국측에 반환할 수 있도록 충분히 합당한 방법을 규정한다. 현재 합작이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고유자산을 평가하는 것은 객관적 표준에 의해 재평가한다 합자경영의 사업에 대하여 일본 측이 주식 등을 제공하여 실제 상의 출자를 하는 것은 부당하기에 시정해주기 바란다. 합자경영의 사업에서 일본측의 자본액은 과반 이상을 얻을 수 없다. 합자경영의 사업에서 최고 주권은 중국에 속하게 할 것을 요한다. 중앙정부의 난징 환도 전 군사점령기간 동안 허가받지 못한 계약은 재심사의 여지를 부여한다. (비고) 위의 4, 5항은 당연한 일로, 중국인의 복귀 및 투자를 신속하게 촉진시키기 위해 신중앙정부는 이를 선전의 한 방법으로서 일본 측이 한층 더 양해해주길 바란다.
- 일지신관계조정방침 (日支新關係調整方針 / 1938.11.30)
1938년 11월 30일, 일본 고노에 내각은 왕징웨이에 의해 새롭게 세워질 신정권과 일본의 관계를 규정하는 일지신관계조정방침을 세웠다. 이는 왕징웨이가 충칭탈출을 결심하게된 중광당회담의 결과인 일화협의기록에서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일지신관계조정방침 (日支新關係調整方針) 일만지 (日滿支) 3국은 동아에서 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상호선린으로서 결합하여 동양평화의 주축이 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는다. 이의 기초가 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조로 하는 일만지의 일반적 제휴와 선린우호, 공동방공, 공동방위, 경제제휴의 원칙을 제정한다. 북지나 및 몽강에서 국방상 경제상 (특히 자원의 개발 이용에 있어) 일지강도결합지대 (日支强度結合地帶)를 설정한다. 몽강지방은 전항외에 특히 방공을 위해 군사상 정치상 특수지위를 설정한다. 장강 하류지역에 경제상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남지나 연안 특정도서에 특수지위를 설정한다. 이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별도로 비준하게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項) 선린우호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상호의 특징을 존중하고 혼연상 제휴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선린우호의 열매가 맺을 수 있게 상호우호 촉진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 및 만주국은 지나의 영토 및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삼국은 국교관계를 새로이 수립한다. 일만지 3국은 정치, 외교, 교육, 선전, 교역 등 전반에 있어서 상호적인 호의를 파괴하는 조치 및 원인을 철폐하고 장래에 걸쳐 이를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행하고 이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제삼국과의 관계에서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협력한다. 신지나의 정치형태는 분치합작주의에 입각하여 시행한다. 몽강은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으로 하고 상하이, 칭다오, 샤먼은 각각 방침에 근거한 특정행정구역으로 둔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소수의 고문을 파견하여 신걸설에 협력하게 한다. 특히 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서 필요한 기관에 고문을 배치한다. 일만지선린관계의 구현에 따라 일본은 점차 조계, 치외법권 등의 반환을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협동하여 방공에 임함과 동시에 공통의 치안과 안녕의 유지에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 영역 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제거함과 동시에 방공에 관한 정보선전 등에 대해서 제휴, 협력한다. 일본과 중국은 협동하여 방공을 행한다. 이를 위해 일본은 필요한 군대를 북지 및 몽강의 주요지역에 주둔한다. 별도로 일지방공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반적인 정세의 수응하여 조기에 이를 철수시킨다. 단, 공동의 치안과 안녕의 유지를 위해 장강과 연안의 특정지점 및 남지나의 특정 도서와 제도에 관련된 지점에 약간의 함선부대를 주둔시킨다. 또한 장강 및 지나 연안에 있어서 함선의 정박을 자유로이 하게 한다. 지나는 앞항의 치안협력을 위한 일본의 주둔에 대해 재정적 협력의 의무를 가진다. 일본은 주둔지역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수로에 대한 군사상 요구권 및 감독권을 보류한다. 지나는 경찰대 및 군대를 개선, 정리함과 동시에 일본군 주둔지역의 군사시설은 당분간 치안 및 국방상 필요한 최소한으로 한다. 일본은 지나의 군대 및 경찰대 건설에 관한 고문을 파견하고 무기 공급등에 있어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 및 공동방위의 열매를 맺게 하기위해 산업 경제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유무상통의 취지에 기초하여 공동호혜를 취지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해 위의 취지에 따라 각자의 요지를 구현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한다. 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해서는, 북지와 몽강에서 일본과 만주국의 부족한 자원을 획득하고 매장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을 시책의 중심으로 삼고 지나는 공동방위 및 경제적 결합의 견지에서 이에 특별한 편익을 제공하고 그 외의 지역에서도 특정 자원의 개발에 관해 경제적 결합의 견지에서 필요한 편익을 공여한다. 일반 산업에서는 노력하여 지나측의 사업을 존중하고, 일본은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다. 농업에 관해서는 개량을 원조하여 지나 민생의 안정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일본의 필요 자원의 배양을 도모한다. 지나의 재정경제정책 확립에 관해 일본은 필요한 원조를 한다. 교역에 관해서는 타당한 관세 및 해관제도를 채용하여 일본과 만주국간의 일반통상을 진흥함과 동시에 일본과 만주국, 북지나간의 물자 수급을 편하고 합리적이게 한다. 지나에서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대해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는 협력을 한다. 지나 전국의 항공 발전, 북지나의 철도 (이는 룽하이선 (隴海線)을 포함한다.) , 지나 연안에서의 주요 해운, 장강에서의 수운 및 북지나와 장강 하류를 연결하는 통신은 일지교통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지협력을 통해 신 상하이를 건설한다. 부록 지나는 사변 발발 이후 지나의 일본 국민이 지니고 있던 권리에 대해 손해를 배상한다. 제삼국의 지나에서의 경제활동 및 권익은 일만지 경제제휴 강화를 위해 제한하는 것이 당연하나, 국방 및 국가 존립의 필요에 입각하는 범위가 아닌 제삼국의 활동 내지 권익을 부당하게 배제, 제한하진 않는다.
- 중국신정권수립방침 (支那新中央政府樹立方針 / 1939.6.6)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은 1939년 6월 6일, 왕징웨이의 방일전에 왕징웨이정권의 성립방침을 만들었다. 중국신정권수립방침 (支那新中央政府樹立方針 / 1939.6.6) 신중앙정부는 왕(汪)을 중심으로 하여 우페이푸, 이미 구성되어 있는 정권, 충칭의 전향한 이들을 구성요소로 하는 것으로 , 지나사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나측의 적절한 협력에 대한 의지를 수립하는 것이다. 신중앙정부는 일지신관계조정에 관한 원칙에 준거하여 일지의 국교를 정식으로 조정한다. 그리고 이 신정권에 참가하는 이들은 본 원칙을 수락하게 한다. 신중앙정부의 구성, 수립시기는 전국에 걸친 전쟁지도상의 단계에 응하고 자주적 견지에 근거해 통제할 수 있는 인적요소 및 기초적 실력의 구비를 요한다. 장래 지나의 정치형태는 그 역사 및 현실에 부응하는 분치합작주의 에 준거 하게 하고 그 내용에 관해서는 일지신관계조정방침에 준거하여 북지나를 국방 및 경제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日支强度結合地帶)로, 몽강을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으로 설정하고 양쯔강 하류 지역 남지나의 연안특정도서에 특수지위를 설정하는 것 외에는 내정문제로서 지나측에 위임하는 것을 본칙으로 하여 애써 간섭하는 것을 피한다. 특히 신중앙정부의 형태에 있어서는 지도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동시에 기존에 구성된 정권과 우리간의 특수관계를 고려하게 한다. 국민당 및 삼민주의에 관해서는 용공항일을 포기하게 하고 친일, 친만(親滿), 방공을 방침으로 수정하게 하면 그 존재를 인정한다. 충칭 측이 항일용공 정책을 포기하고 필요한 인사교체를 행하고 제1항,2항을 수용하면 굴복으로 간주하고 신중앙정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 1938.11.20)
이름바 '중광당 회담' 의 결과로 완성된 일화협의기록은 왕징웨이의 충칭탈출을 결정하는 배경이 되었다.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1938.11.20) 쇼와 13 (1938) 년 11월 20일, 일본 측 가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이마이 다케오 (今井武夫) 두 명은 중국 측 가오쭝우 (高宗武), 메이쓰핑(梅思平) 두 명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의를 성사시켰다. 1. 일화 양국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침략 세력으로부터 동아를 해방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이란 공동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호 공정한 관계에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관계를 조율하고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열매를 맺고 공고히 결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결정한다. 제1조 : 일화방공협정 을 체결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일독이(日獨伊) 방공협정에 준하는 것으로 하며, 상호협력을 이루고 또한 일본군의 방공주둔을 인정하며 내몽골 지방을 방공특수지역에 포함시킨다. 제2조 : 중국은 만주국을 승인한다. 제3조 : 중국은 일본인에게 중국 내륙에서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승인하고 일본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철폐한다. 또한 일본은 중국 내의 조계 반환도 고려한다. 제4조 : 일화경제제휴는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밀하게 경제합작의 결실을 추구하여 일본에 우선권을 인정하고 특히 화북의 자원 개발 이용에 대해서는 일본에 특별한 편의를 제공한다. 제5조 : 일본은 중국의 사변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 내 일본 거주민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나 전비의 배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제6조 : 협약 이외의 일본군은 일화의 평화회복 후 즉시 철수를 개시한다. 단, 중국 내지의 치안 회복이 이루어진 후 2년 이내에 완전히 철병을 완료한다. 또한 중국은 본 기간 동안 치안의 확립을 보장해야하며 주병지점은 상호합의를 통해 결정한다. 2. 일본 정부는 위와 같은 시국 해결 조건을 차후 발표하며 왕징웨이씨 등 중국 측 동지들은 곧 장제스 와의 절연을 천명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중일제휴 및 반공정책을 성명함과 동시에 기회를 보아 신정부를 수립한다. 쇼와 13 (1938) 년 11월 20일 일본 측 가게사 사다아키, 이마이 다케오 중국 측 가오쭝우, 메이쓰핑 일화협의기록 양해사항 日華協議記錄諒解事項 제1조의 방공주둔은 내몽골 및 연락선 확보를 위해 베이징과 톈진지역에 주병하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주병 기간은 일화방공협정이 유효하는 기간으로 한다. 제4조의 우선권이란, 타국과 동일조건에 있을 때 일본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한다. 일본은 사태를 위해 난민 구제에 협력한다. 일화비밀협의기록 日華秘密協議記錄 일화 양국은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고 선린으로 강하게 결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의 실행을 약속한다. 제1조 : 일화 양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상호 친일, 친화(親華) 교육 및 정책을 실시한다. 제2조 : 일화 양국은 소련에 대응하여 공동의 선전기관을 설치하고 또한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여 평시에는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내몽고 연락선 확보를 위하여 필요하다 생각되는 지역에는 일본군을, 신강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게 하여 협력하게 하고 전쟁시에는 공동작전을 실시한다. 제3조 : 일화 양국은 공동으로 동양의 반식민지적 지위를 점차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일본은 중국을 원조하여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제4조 : 일화 양국은 동양의 경제부흥을 목적으로 경제적으로 합작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따로 연구한다. 경제합작은 중국 이외 남양 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한다. 제5조 : 위 조항 실시를 위해 일화 양국은 필요한 위원을 둔다. 제6조 : 일화 양국은 아시아에서 일화 양국외에 다른 국가도 가능한 본 협정에 가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 전국 장병들에게 고하는 글 (告全國將士書 / 1943.1.1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전국 장병들에게 고하는 글 (告全國將士書) 올 해 1월 9일 오전 10시, 국민정부는 중일기본조약의 일관된 정신에 따라 대동아전쟁의 참가를 공식 선언하고 우방인 일본과 중일공동선언을 체결하여 영미와의 전쟁을 공동으로 완수하고, 공동의 적을 타도하기 위해 양국 정부는 부동의 결의와 신념으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협력하는 한편, 조계반환 및 치외법권 철폐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40년 동안 혁명에 종사해 온 국부께서 간절히 원하셨던 불평등 조약의 철폐는 오늘날 기쁘게도 실현되고 있다. 이제부터 중국은 자주독립, 완전자유의 입장에서 동아의 여러 이웃 국가들과, 세게의 여러 우방들과 합심하여 대동아전쟁을 보위하는 공동전선에 들어설 것이며, 그 의의는 매우 크다. 대동아전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우리 장병들의 임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막중한 것이다. 나는 우리 전우들에게 오늘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근래 백년 동안, 영미 제국주의자들은 흉악한 표정을 가지고 악랄한 손짓을 펼쳐 우리 동아민족에게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서의 침략을 가하며 교묘한 강탈의 역사를 세워왔다. 우리나라도 아편전쟁 이래 그 침해를 받아 각종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차식민지 지위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우방인 일본은 재작년 12월 8일, 동아 민족 전체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을 통감하고 대동아전쟁을 감행하여 동아에 도사리고 있는 영미의 잔학한 세력을 소탕하고 대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도모하였으며, 독일과 이탈리아가 축이 되는 유럽 신질서 건설에 호응하여 세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의 그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는 동방의 도의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며, 동방민족의 공존종영의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 서방의 만든 패도제국주의가 세계에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며 세계에서 강권을 없애고 공리를 얻게 하는 것이며, 피압박자가 압박자로부터 정의의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이 전쟁의 노력의 결과에 달려있다. 국부께서는 일찍이 우리들에게 중국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 바가 있다. 국부께서는 전부터 중국이 자유와 평등을 얻으려면 동아 민족 전체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었으며, 지금 국민정부는 의연하게 대동아전쟁 참전을 선포하여 국부께서 이야기하신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을 위해 열렬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실로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위대한 대사명인 것이다. 충칭 정권은 서쪽의 변경에서 국민정부 통치지역에 평화속에서 발전하는 것을 질시하고, 영미제국주의의 위협과 회유의 미몽에 현혹되어 이름바 영미전선에 참가하여 동아인이 동아인을 죽이는 잔학함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버마로 출병하고, 광저우, 우한 등의 지역을 적기로 하여금 폭격하게 하여 끊임 없이 공격하며 우리의 화평 건설을 방해하며 실로 동아 건설의 파괴자이자 동아 화평의 반역자가 되었다. 이러한 충칭이 아직까지 잔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영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화평을 조속히 실현하고 통일을 조속히 완성할 필요가 있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며 영미는 격파되어 동아침략세력은 파괴되었고, 충칭 정권은 스스로 궤멸하고 있다. 화평통일이란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도 우방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이래 불과 1년만에 이미 각지에서 전례없는 위대한 전과를 거두며 진전을 이루고 있다. 남태평양과 버마에서 모든 영미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특히 솔로몬 해전이 거듭되면서 영미는 큰 타격을 입었고, 반격능력은 더욱 떨어졌으며, 독일-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영미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북아프리카에서의 공세는 영미를 부진과 퇴세에 빠지게 하여 다시 반격할 수도 없게 하였다. 옛말에 “군사는 명분이 옳으면 힘이 쎄다” (師直爲壯, 曲爲老) ,춘추좌씨전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중화민족이 대외전쟁에 참가했던 여러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번 전쟁이 가장 명분 옳은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선현들이 소위 인의의 군대 (仁義之師, 정충악전에서 비롯된 말. 정의로운 군대를 의미)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우리 군대는 영미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할 것이다. 전국의 장병들이여! 이 나라 민족이 엄중한 고비를 맞아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보국하려는 이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근면하고 용감하게 충성을 다하여 적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울 것인지, 어떻게 우군과 동고동락하는 정신을 가지고 동생동사의 투쟁을 도모할 것인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 육해공군의 각 장교들은 모두 병력을 통솔하는 중책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군은 용맹스럽게 매진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우리 국군 모두가 정예병사가 되고 강군이 되어 지금의 신성하고 위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국가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적 영미의 기운을 빠르게 쓸어버리고,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나아가 동아의 공영 실현을 도모하고 세계평화의 완성을 도모하고 흥망성쇠를 이루는 이 일전을 함께 치루자. 그대들에게 큰 기대를 건다. 위원장 왕자오밍.
- 화교 모군의 편지에 답하다 (覆華僑某君書 / 1939.3.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화교 모군의 편지에 답하다 (覆華僑某君書) 모 군(某 君)! 그대가 3월 14일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나는 매우 감동했다! 그대는 내가 가진 대의를 매우 믿고 있으나 , 이를 위한 나의 결정에 대해서는 아직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대의 믿음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만큼, 그대가 가지고 있는 의구심 을 해소 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만약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화평의 조건을 이미 내걸었고, 그 조건이 망국의 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면 어째서 화평을 이야기할 수 없는가? 우리의 오랜 친구 천자겅 선생은 “화평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한간” 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왜 화평을 말하는 것이 한간인가? 헌법에서는 국가의 강화의 대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럼 국가는 한간 행위를 할 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충효인애신의 화평 (忠孝仁愛信義和平)’ (쑨원이 삼민주의의 민족주의에서 제창한 8가지의 덕, 이름바 팔덕(八德) 으로, 중화민국에서 미덕으로 여겨지며 여러 관공서의 현판에 사용되었다.) 의 현판 글자를 ‘충효인애신의 한간 (忠孝仁愛信義漢奸)’으로 바꿔야 하는가? 이러한 말들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대가 의심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대는 내게 “유럽이 곧 싸우게 될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국면은 전쟁준비와 전쟁회피라는 두 개의 저울이 여전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유럽 정부 당국도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대는 이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유럽전쟁에 급급하고, 미국도 마찬가지로 중일전쟁보다 유럽전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유럽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중일전쟁에 대한 각국의 관심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대는 유럽전쟁이 터져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건가? 그리고 최근의 전쟁은 당사자들끼리 속전속결을 꾀하지만, 여러 사정이 겹치게 되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럽의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난다 치자, 어느쪽이 승리할지 그대는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는가? 게다가 그대가 생각한 쪽이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국제관계는 복잡하여 국가간의 이해충돌이 이렇게 변덕스럽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유럽전쟁에서의 승리가 우리 중국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럽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영불러 와 독일 이 대결하게 될것이며, 미국이 영불러 쪽에 가담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독일은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영미불러가 전쟁에서 이기면 군대를 일본에 보낼 것이기에 일본은 반드시 굴복하고 멸망할 수 밖에 없다 는 막연한 낙관론 을 꺼내고 있다. 이러한 막연한 낙관론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항전을 계속하기 위한 책략인가? 그대는 또한 내게 “지금 항전의 상황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대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래 인민은 힘을 다해 한마디 불평없이 견뎌왔고, 장병들은 용감하게 희생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의 원기이자 중화민국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일본이 화평조건을 내민 것도 이를 통해 중국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화평운동이 성공한다면 그 공은 모두 항전 민중과 장병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전의 힘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대평가하게 되면 이미 발휘되고 있는 힘을 헛되이 낭비하게 되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헛되이 잃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지금 항전 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어떻게 나날이 좋아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전 이후 잃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고 그 시간이 짧아서 송나라의 멸망에서도, 명나라의 멸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례가 없는 일 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송나라와 명나라는 망하려 할 때 조정은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잘못된 장수들은 파면하고 벌해왔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한 감찰위원이 “땅을 잃고도 백성들의 슬픔을 듣지 않으니, 군사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그는 바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뒤로 조정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부는 많은 중요한 도시들을 잃으면서 “거점을 옮긴다”,“전략을 변경하는 것이다”,“이미 전략상으로 가치가 없는 곳이다”, “이미 적에게 타격을 주었고 전략적 목적이 이미 달성되어 이곳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와 같은 말을 하면서, 하나도 괴로워보이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의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항전이 나날이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송나라와 명나라가 망하려 할 때 조정 은 싸우고 (戰) 지킨다 (守) 라는 두 글자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불행히도 전쟁에서 져 어쩔 수 없이 이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조정은 두 글자를 바꾼 듯하다. 하나는 잃어버리다 (丟), 하나는 태우다 (燒) 로 말이다. ‘진지를 옮긴다’ 와 같은 말은 ‘잃어버리다’ 를 상징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태우다’ 를 상징하는 문장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광저우는 가장 이를 잘 설명하는 사례일 것이며, 창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잃어버리는 것’과 ‘태우는 것’이 점점 커지고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땅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이 두 글자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의 이 두 글자 와 공산당의 소위 유격전 이 합쳐지며 잃어버리고 불타지 않은 지역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대도 역사를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산당이 말하는 유격전은 도적떼의 변명 에 불과한 것이다. 인민은 벼, 유격대는 메뚜기와 같다. 가는 곳마다 태워버리지 않는 곳이 없다. 예전 사람들은 도적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놀라곤 했는데, 지금 공산당은 똑같은 단어에 문맥을 붙여 항전의 비결로 여기게끔 하고 있다. 그들의 문장 은 미사여구 일 뿐으로, 사실과는 다르다. 그대가 해외에서 본 것은 이러한 ‘문장’ 이다. 문장에서는 이렇게 끝까지 항전할 수 있는 비결이 있으니 자연스레 항전의 상황이 나날이 좋아진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제 내륙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전부터 민중은 군사력의 일부라고 하였고 지금도 정규군을 도울 수 있는 수많은 민중이 있는데 이들이 공산당의 유격전에 휘둘리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그대가 아는 바인가? 작년 11월, 나는 충칭에서 ‘전면전쟁’ 과 같은 글을 몇편 발표 한적 있는데, 공산당은 한 글자 한 글자 욕을 퍼부었다. 그대는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한마디로, 항전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고 이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항전이 나날이 어려워지는 것을 알고 항전을 지속할 수 밖에 없다면, 항전 기간동안 드러난 결점을 뼈아프게 고쳐나가야 한다. 당국 이 국민을 속이는 것을 막아내야 하고, 공산당 이 이틈을 타 국민들을 겁탈하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 이를 고치지 않는 것은 질병이 있는데도 숨기지 않고 치료를 기피하는 것과 같으며, 병을 더욱 악화시켜 화근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항전이 이대로 가게 된다면, 항전의 승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항전 외의 화평의 길 이 있다면, 그 화평의 조건이 망국의 조건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전의 결의와 용기를 가지고 화평을 해야 한다. 항전 이래 이미 발휘된 힘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얻을 수 있는 결과를 헛되이 보내선 안된다. 전쟁에서 화평 이라는 글자는 보통 사람들이 듣기 싫어 한다. 화평의 결과는 정복의 결과가 아니기에 빠르고 쉽게 찾아오기 때문 이다. 오늘날 일반 민중들은 일본의 침략을 싫어하고 일본을 완전히 멸망시켜야만 통쾌함을 느낀다. 그리고 화평이라는 이야기에는 자연스레 불편함을 느낀다. 일반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나, 정부가 나서서 일반인들이 이런 생각과 말을 하게 해선 안된다. 정부는 일반 민중들에게 적들에 대한 인식을 고무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부는 스스로 자신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인들이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정부는 현실을 파악하여야한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싸우고, 화평할 수 있다면 화평해야 하며 시시각각 나라가 살 길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일반인들보다 더 강렬히 주장을 하고 있고 이를 위해 날마다 양심을 속이고 허풍을 떨고 있는데 일반 민중들이 무슨 고생을 하려 이를 지지하고 협력하려 하겠는가? 하물며 정부 내에서 바른 소리를 하려 해도 입만 열면 한간 이라 손가락질 받는 지금, 누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인 사람의 시선에서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다같이 망할 판국이라는 걸 알지만 이 사실을 말하는 순간 한간의 악명을 혼자 떠맡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이 때문에 말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이유이자 망국의 원인이다. 그대는 내가 충칭에 있을때의 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를 놓았고, 똑똑한 수십 명의 경비원이 있기에 나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적기가 다가오면 나는 지하실로 들어가면 되었다. 충칭이 난징과 우한처럼 된다 할지라도 나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중국국민당의 부총재이자 국방최고회의의 부주석으로, 최고 권력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내 말을 들어준다면 다행인 것이고, 내 말을 듣지 않아도 죄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라가 불행이 닥치고 대붕괴가 찾아왔을 때 “명분이 정당하면 말도 이치에 맞는다” 라 생각하며 이를 수습하려 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될 것이었며 평생을 편안히 살다 죽은 뒤에도 영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가 나 대신 생각해보라, 이러한 상황에 있는데 어떻게 충칭을 떠날 수 있었겠는가? 그대도 알다 싶이, 나는 20대에 혁명에 뛰어든 이래로 나 자신을 위한 계획을 한 적이 없다. 하물며 지금은 이미 50대가 넘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할 한가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나는 항전이 시작된 이래 중국이 어쩔수 없이 항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항전을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에 생각하며 동시에 어떻게 해야 화평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생각해왔다. 나는 회의에서 화평을 구해야 함을 몇 번을 이야기 했는지 모른다. 광저우를 잃고, 창사가 불탄 이후에 내 의견은 더욱 단호해지고 실현되기를 기대해왔다. 나는 작년 12월 9일 격렬한 토론 끝에 나의 의견이 회의에서 채택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18일에 충칭을 떠났으며, 이 의견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충칭의 모든 사람들이 반성할 것을 것을 촉구해왔다. 내가 이때 설마 이후에 처하게 될 어려움과 위험을 몰랐겠는가? 만약 항전을 계속한다면, 우리 화평의 주장은 물과 불처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비록 결말이 화평으로 끝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화평의 동기에 대해 분명 적지 않은 악의나 사적인 추측을 가할 것이며, 그 중심에 있는 내가 어찌 화를 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이러한 어려움과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염전을 발표한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번의 문답을 했을 뿐이다. 이 문답을 남화일보 (南華日報) 에 실은 후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충칭의 반성을 기다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충칭에서 온 이들에게 나는 충칭이 나의 주장을 받아드리면 나는 개인적으로 언제든 재야의 자격으로 옆에서 협조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그대는 생각해보라, 내가 이것 외에 내 뜻을 표명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 '문답' 은 여기를 클릭 : ) 이상의 이야기는 나 개인의 이야기로, 본래는 말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대의 편지에 은근 생각이 들어 몇 마디 덧붙혔다. 이제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다시 이야기 하자면, 나의 견해는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아도, 양국은 서로 화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며, 주관적인 조건으로 보아도 양국 당국은 모두 화평의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주장이 아예 채택되지 않는 것 을 걱정하기 보다, 그 주장이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닌 중일 양국 간의 원한 때문에 제대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 을 우려하고 있다. 항전이 시작된 이래 이러저러한 원한은 날로 깊어져 원한을 풀고 마음을 열고 협력하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20개월간의 교전을 통해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중국을 함부로 침탈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고, 이에 양국 정부와 인민은 장병들의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고 인민들의 고통과 그 대가가 헛되이 희생되지 않게 할 비교적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작년 12월 22일의 고노에 성명과 29일 발표된 나의 염전은 모두 이 점에 착안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가엾은 충칭 은 고노에 성명 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나의 건의 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욕설만 낭자할 뿐, 하나도 이성적인 말투를 볼 수 없었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화평을 희망하는 표현을 보였지만, 그 진행방식은 여전히 만주사변 이후 반복되었던, 직접적인 협상을 기피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그들이 양국의 미래에 대해 비교적인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들이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야 말로 실로 국가의 복이다. 이상 말한 것은 모두 그대의 편지에 대한 답으로 발송한 것으로, 3월 21일 이후 나는 “예를 하나 들다 (舉一個例)” 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다루지 않고 여기에 함께 첨부한다. ( '예를 하나들다' 는 여기를 클릭 : ) 이에 나날이 생활이 평안하길 바란다. 왕자오밍 씀.
- 답문 (答問 / 1939. 1.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답문 ( 答問 ) (이는 1939년 1월 30일 남화일보와의 인터뷰내용으로, 1938년 8월 발표된 답문 1-2시리즈와는 다른글이다.) Q : 왕 선생께선 왜 화평을 제창하셨습니까? A : 전쟁을 선포하는 것, 강화를 맺는 것은 국가의 대권이다. 국가는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수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싸워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싸우고 , 강화를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강화를 해야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의 말만 듣고 전쟁을 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알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화평에 대해 들으면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들은 강화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이를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완전한 해답을 찾긴 어렵다. Q : 지금의 강화제의가 국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진 않을지. A : 나는 오히려 이렇게 화평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은 ‘항일이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항일은 왜 모든 것이 되었으며 왜 항일을 하는가? 이는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다. 즉, 나라의 생존과 독립을 보위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항일은 수단에 불과했던 재작년 7월. 우리는 왜 항전을 주장했는가? 이는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화의를 주장하는가? 이는 이제는 그렇지 해야만 국가의 생존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항전은 본래 이상적이고 충용적인 것으로, 화의도 무작정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가지고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랬던 항전이 국민들의 마음을 혼돈시키고 군대의 사기를 흔들게 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오히려 ‘항일이 모든 것’ 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항일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없게 하여, ‘항일은 통일을 위한 것’,‘항일은 국공합작을 위한 것’ 과 같은 말을 하여 정부내의 반공파벌을 숙청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한다. 이런 언행이 오히려 국민과 군대를 흔들고 항전에 손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Q : 염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짜로 국가의 생존과 독립에는 손해가 없을 것인지. A : 나는 손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Q : 염전은 전보라서 다루는 게 너무 얇은 것 같은데. A : 염전에서는 원칙을 다루었다. 이 원칙을 토대로 협상을 진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조건을 얻을 수 있다. Q : 공산당원들은 어째서 화평에 반대하는가? A : 공산당원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첫 째 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이 매일이 편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중일 전쟁은 계속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째 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중국 국민이 가난해지고 재물이 바닥나게 되면 공산당원들은 이득이기 때문이다. Q : 다른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A : 내가 보기에는 이는 일본을 밎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고 항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에 화의라는 단어를 듣고 위험하다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일본에에겐 중국을 멸망시키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답은 일본이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찾을 수 있다. 1년 7개월간의 항전은 중국을 쉽게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는 길 말고, 두 번째 길 이 있음을, 그리고 그 두 번째 길 을 가야함을 알게 했다. 이 두 번째 길 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중일합작 이다. 중일합작 이란, 선린, 방공, 경제합작을 기초로 하여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간의 합작을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렇게 될 수 있으면 수년간 만들어진 원한을 없앨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의 의심도 쉽게 풀리게 될 것이다. 이는 동아의 평화 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길은 중일 쌍방이 힘을 합쳐야한다. 따라서 일본이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일본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중국은 생존과 독립을 지키고 현대적 국가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 청향공작의 의의 (清鄉工作之意義 / 1941.5.11) / 화평의 모범을 세우고 동아보위에 협력하자 (樹立和平模範協力保衛東亞 / 1942.6.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청향공작의 의의 (清鄉工作之意義) 치안확립과 경제생활의 개선은 국민정부의 최근 양대방침이다. 나는 이를 올해 신년에도, 환도 기념 훈시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다. 이둘 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경제활동을 개선하면 국민이 편안히 생활하여 치안이 자연스레 확립되고, 치안이 확립되면 경제건설도 자연스레 힘을 얻을수 있다. 청향 (淸鄕,농촌지역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농촌지역에서의 공산당원을 색출하고 난징국민정부의 완전한 영향력을 해당지역에서 확보하는 것에 주요목적이 있었다.) 위원회 의 직책은 치안을 확립하고 경제생활을 개선하는 것에 있으며 이 책임과 사명이 막중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청향(淸鄕)을 위해서는 정치력과 군사력이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여 공비들을 축출하고 공산당으로부터 지역을 지켜낼 필요가 있다. 때문에 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 및 행정원 및 관계부처가 함께 청향위원회를 특별 구성하여 독립적인 권한과 연락기능을 부여하였다. 정치력과 군사력을 집중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농촌을 안정시키고 경작지를 확보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교통의 회복과 실업의 진흥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큰 규모를 바라지 않고 착실하게, 작은지역부터 차근차근 나아가 한곳에서 명확하게 먼저 화평을 확립한 후에 다른 지방으로 나아가 화평을 개척하려 한다. 이를 통해 전면화평은 촉진될 뿐만 아니라 자치를 함양하고 헌정을 실시하게 하는 토대로 마련될 것이다. 나는 이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의 동지들, 그리고 동포들과 함께 계속하여 이를 관철시켜 나갈 것이다. 화평의 모범을 세우고 동아보위에 협력하자 (樹立和平模範協力保衛東亞) (청향공작 1주년 기념담화) 지난 해 7월, 국민정부는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모아 장쑤성에 구역을 설정하여 청향운동을 시작하였다. 1~2기 향촌지역에서 시작해 3기에는 도시로도 확장되었다. 오늘날 청향지역은 강소성 북쪽 철도지역에서 남쪽 철도지역까지 확장되어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1년 동안 청향운동이 완성된 모든 곳에서 치안이 확립되고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물가가 안정되고 민생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사실이다. 나는 우리 청향 일꾼들의 노고와 청향지역 주민들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다. 게다가 우방국인 일본 은 대동아전쟁 발발이후에도 여전히 중국부흥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가지고 원조를 계속하고 있어 더욱 감격스럽다. 매번 청향운동이 진행될 때마다 나는 청향구를 시찰하며 청향구의 아이부터 노인까지 힘을 아끼지 않고 청향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으며, 청향 일꾼들을 격려하며 청향의 임무를 완수해왔다. 오늘은 그 1주년을 기념하여 몇마디를 더해 우리 향촌지역의 형제들과 전국 동포들을 위해 이야기하고 싶다. 청향의 목적은 이름 그대로 향촌에서 비적을 제거하고 민중을 재난에서 구하는 것 에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작업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정도 수준은 군대와 경찰 한 부대만 있으면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이룰 수 있다. 청향의 진정한 의미 는 공비 를 축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비를 근절하여 공비가 다시 향촌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에 있다. 또한 청향 의 의의는 치안을 확립하는 것 뿐만 아니라, 민생을 개선하는 것 에 있다. 공비 들은 치안의 적이며 민생을 훔치는 도둑이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또한 지 역에서 활동하는 악덕토호 들과 공비들과 한통속인, 공비나 다름없는 불량배 들도 모두 제거해야한다. 탐관오리들 , 무능력한 군대와 교만한 장수들 또한 민중에게 심각한 폐를 끼치는 존재인 만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민중의 힘도 있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가져야만 선의를 발산하고 악의 흔적을 지울 수 있다. “청향을 위해서는 맑은 마음이 필요하다 (清鄉先要清心)” 라는 말은 모두 이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나는 신국민운동을 시작할 때 우선 지역에서부터 열심히 노력해야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이 말 또한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생각한다. 청향 운동은 기술이 필요한 만큼, 이를 분할 추진하여 일정한 지역에서 치안을 확립하고 민생을 개선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결코 그 지역과 그 지역의 인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청향 운동은 지역에서의 정치 운용에 있어 화평의 모범을 세움으로써 이를 통해 국민정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전면적인 화평을 정착시키는 큰 과업의 일부 라고 할 수 있다. 청향구 밖의 민중들은 청향구의 현 모습을 보고 질문할 것이다. 왜 이곳에는 더 이상 공비가 없나요? 왜 이곳에는 더 이상 유격대의 초토화 참상이 나타나지 않나요? 왜 이곳은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이 발달하며 물가가 안정되나요? 이는 청향구는 이제 유격대가 활동하는 지대 가 아닌 화평세력이 통치하는 곳 이 되어 화평의 모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향구의 장병과 민중들은 서로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향토를 위해 나라를 위해 협력하고 있고, 청향구에서는 중국군과 중국민중이 우방국 군대와 우방인사들과 서로 의심하기 보다 동고동락하며 굳은 의지속에서 함께 손을 잡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동아를 보위하기 위해 함께 전진하고 있다. 청향구 민중들은 환경과 생활이 개선된 것을 보며 한 가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개선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 자기 고향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한 향을, 한 현을, 한 성을 나라 전체를 위한 일이다. 우리는 마땅히 국가와 민족에 있어 한 가정의, 한 고을이 가지는 책임이 크다는 것을, 우리가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향촌의 치안과 경제 상황은 물론 청향구 지역이 훨씬 낫지만, 왜 아직도 남아있는 많은 문제와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하지 못했는가? 이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전면적인 화평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청향구 외에도 무수한 병든 지역들이 우리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고, 또한 무수한 가난한 동포들이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음을. 청향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우방인 일본은 여러 가지 협조를 해왔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끊임없이 지원을 해왔다. 이는 서로가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방인 일본 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우방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 은 중일협력으로 동아를 보위하는 것 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방의 요구에 응하는 방법은 중일협력을 통해 동아를 보위하는 것 밖에 없다. 온 세계가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 중일 양국의 안위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동아라는 둥지가 무너져버리면, 중일이라는 그곳의 알들은 부서질 수 밖에 없다. 동아는 해방되지 못할 것이고, 중국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가 존재하지 못하면 고향도, 가정도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몸과 마음으로 가정을 사랑해야하고, 고향을 사랑해야 하고, 동아를 사랑해야 한다. 현재 대동아전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으며 100년간 영미가 안겨준 모욕과 침략은 모두 남김없이 소탕하였고 중국을 부흥시키고 동아를 보위하기 위한 기초를 세우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에 더욱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고동락의 정신에 입각하여 후방의 큰 책임을 다하여 모든 것을 함꼐하여 전후 공영권 건설에 공헌하는 것은 청향운동의 또 하나의 의의라 할 수 있다. 지난 1년간 진행된 청향 운동의 성과와 7개월 동안 진행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화평반공 이 중국을 부흥시키는 유일한 길이자 동아를 보위하는 유일한 길 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그러나 충칭의 집요하게 항전에 집착하는 소수의 이 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백성의 적이되어 그들의 원기를 통해 기꺼이 영미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수차례 경고를 해왔으나, 그들에게서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을 바라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격려할 뿐이며, 각지의 동지들, 전국 동포들과 함께 청향운동을 통해 청향운동이 성공을 거두는날, 즉 화평통일이 되는 날이자 대동아전쟁 승리의 날, 중국이 동아의 공영부흥을 이루는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청향구에서 분투하고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1년동안의 노고와 국가민족의 해방을 도모하는 열정과 노력에 정중히 감사를 표한다. 또한 한마음 한뜻으로 적극적인 협력정신을 보여준 전국 민중과 우방 장병들이 보여준 우의와 힘에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청향운동의 순조로운 진행, 전면화평의 신속실현, 대동아전쟁승리, 중국부흥, 동아해방 의 구호를 크게 외쳐보는 바다.
-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1942.8.29)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조직 중 하나였던 중화민족반영미협회 (中華民族反英美協会) 에서 만든 아편전쟁사화 (鴉片戰爭史畫) 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려진 난징조약의 모습. 조약의 체결에 영국인은 크게 웃고있다. 1842년 8월 29일, 제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은 결국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난징조약을 통해 청은 항구를 개방하게 되었으며,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홍콩 섬을 영국에게 넘겨줘야 했고 관세자주권 또한 상실하게 되었다. 난징조약의 체결은 동시에 서양세력의 중국침략 신호탄이기도 했다.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중국은 수많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았고, 수 많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며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서양 세력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세력의 침략, 불평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난징조약 체결로 부터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민에게 난징조약으로부터 이러한 불평등해결까지 이어지는 백 여년의 세월은 수치스러운 백 년이었고 동시에 중국인민이 이러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백 년이기도 했다. 1942년 8월 29일은 난징조약의 체결로 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왕징웨이 정권은 아직 정식적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과 영국과 싸우는 일본의 동맹국이었고, 왕징웨이 정권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영미의 식민주의를 비판해왔다.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던 왕징웨이 정권에게 이러한 근대 중국침략의 상징과 같은 아편전쟁의 난징조약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1942년 8월부터, 각 지역으로 하여금 아편전쟁의 해악과, 이로 인해 체결된 난징조약의 해악에 대해 선전을 해왔다. 예를 들어 호북성에서는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아편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거리에서는 아편전쟁에 관한 연극, 영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연극이 이루어졌고, 지역 라디오 방송국은 아편전쟁사를 비롯한 영국의 중국침략사를 다루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수도 난징에서는 8월 29일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를 개최하기로 했다. 아편전쟁100년기념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가 개최되었던 난징의 국민대회당. 아편전쟁 100년기념 반영흥아대회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는 1942년 8월 29일 난징의 국민대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왕징웨이 정권 인사를 비롯한 5천여명의 대중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오후 3시, 대회의 개막이 선언된 후, 국가 제창을 비롯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후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였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날 왕징웨이의 훈시는 40분 가량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대회장에 배치된 대회의 로고모습. (아래는 재현도) 중앙에는 청천백일문양이 그려져있고, 그 주변으로 아편전쟁100년반영흥아대회라고 표시되어있다. 그리고 문양 위에는 3개의 화평반공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從不平等做到平等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오늘 우리는 난징에서 백년전의 소위 난징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먼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이를 왜 기념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이는 원수를 갚거나 원한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원수나 원한을 염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를 기념하는 것은 중국이 걸어나가야 할 하나의 대도 를 밝히기 위함에 있다. 중국이 걸어나가야 할 대도를 지적한 이는 이전에도 있었다. 국부 손중산 선생은 이미 이를 지적한 바가 있었다. 만약 우리 중국인 모두가 손중산 선생이 지적한 바 를 따랐다면 중국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기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은 유언에서, “나는 4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라고 말했다. 중국은 어째서 자유평등을 얻지 못했는가? 이는 중국이 불평등조약의 속박 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평등조약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이는 분명하게 우리가 오늘 기념하고 있는, 100년 전 오늘, 난징 조약 이 체결되었을 때부터이다. 난징조약은 어째서 체결되었는가? 이는 영국이 인도에서 만든 아편을 억지로 중국에 팔아먹으려 했고, 중국인은 그 과정에서 셀수 없이 많은 돈을 빼앗겼고 동시에 아편이라는 독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아편을 중국은 받아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꺾고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았을 뿐만 아니라, 광동,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의 개항을 얻어냈다. 이 다섯 항구의 개항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중국을 하나의 신체 로 생각해보자. 여기서 이 다 섯 항구의 개항 은 마치 몸에 상처 5개를 낸 다음 그곳에서 혈액을 계속 빼내게 하고, 동시에 아편과 같은 독극물을 계속 받아드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개의 개항은 어떻게 이렇게 큰 해악이 되었는가 , 이는 난징조약의 부속조약에서 영국인의 중국에서의 치외법권 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본래 치외법권은 공사와 같은 외교관에게만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일반 영국인은 모두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영국의 영토가 중국으로 연장되는 것과 같은 것 으로 이는 정치상으로는 치외법권이 존재하고, 군사상으로는 군함의 정박, 군대수송의 근거지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외법권이라는 보장속에서 경제침략은 이루어졌고, 영국인들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난징조약 체결일은 곧 중국이 차식민지의 지위로 떨어진 날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영국은 여러 조약의 체결과 최혜국 대우 를 적용시키며 타국이 어떠한 권한을 중국에서 획득 했을 때 이를 자신에게도 줄 것을 이야기했고, 이는 영국의 권한을 한층 더 확대하는 요소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난징조약 은 요컨대 모든 불평등조약의 근간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조약은 그 근간 위에서 성립된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손중산 선생은 유촉에서 국민혁명의 목적이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것에 있음을 지적하고, 최대한 빠르게 이러한 불평등조약을 폐기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는 원한을 갚고 한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중국을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만들기 위한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실현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손중산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민중에 호소하여 민중을 궐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 이다. 난징조약이 서기 1842년에 체결 된후 8년이 지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의 난이 1864년 끝난 후 2년이 지난 서기 1866년, 손중산 선생이 탄생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확실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손중산 선생의 탄생 1년 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있었다. 영국은 당시 침략을 중국에서 이어나가고 있었고, 동시에 일본에서도 이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고, 28년이 지난 1894년에는 불평등조약을 폐지했다. 중국은 어떠했는가? 손중산 선생은 중불전쟁에서 중국이 패전한 해 (1885년을 의미.) 청조를 멸하고 민국을 창건할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이를 중요하게 받아드리는이가 없었고 대부분이 이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손중산 선생은 여러곳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했고, 청일전쟁에서의 패전 이후에야 호놀룰루에 중흥회를 창립하고, 1911년이 되어서야 1차혁명을 광동에서 일으킬 수 있었다. 중일양국이 선진과 낙오로 갈리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손중산 선생이 혁명을 일으키자 일본의 동지들은 이를 원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손중산 선생은 청일전쟁의 패배라는 환경속에서도 어째서 이러한 일본동지들의 원조를 받은 것일까? 일본의 동지들은 어째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이러한 중국의 혁명을 지원했는가?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삼국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촉의 유비는 오가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죽인 것에 분격하여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백제성에서 분개하며 죽었다.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이어 나라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오와 화친을 맺는 것 이었다. 이는 오늘날 충칭방면의 인사들이 본다면 절대 받아드릴 수 없는 일 이었을 것이다. 촉은 사천과 관중만을 얻고, 호북과 호남을 잃었다. 영토는 반토막이 난 것이다. 게다가 유비가 아꼈던 관우는 오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조조에게 갔다. 유비는 이러한 부끄러움 속에 설욕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나라와 화친을 한 제갈량의 모습 은 충칭 방면의 인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뿌리 깊은 한간 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제갈공명은 이러한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갈량은 천하의 재앙이 위에 있는 것이지 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위를 거부하는 오와는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하여 오와 촉이 원수 관계에 있으면 천하를 통일하기는커녕, 결국에는 양쪽 모두가 멸망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를 알았기 때문에 의연하게 오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었고, 이 덕에 남만을 정벌하고 북벌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이을 사람이 없어 결국 촉은 망했지만, 그가 살아있었을 때 촉은 매우 약했는데도 강적인 위와 맞설 수 있었다. 위나라가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 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대회식장의 모습. 영국은 인도를 병탄하고 남양을 석권한 뒤, 그 욕심을 키워 동아 전체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중일 양국은 어떠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형제애로써 서로 굳게 걸어 잠군 문을 열고 함께 외부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했다. 일본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대적을 막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중국은 비록 낙후되었지만, 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오와 촉이 대업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악연을 잊고, 새로이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이 일본의 원조를 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고, 일본의 동지들이 손중산 선생을 도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중산 선생의 이러한 의지는 매우 확고하여 아무리 좌절해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손중산 선생의 의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민국 6 (1917) 년 저술된 《중국존망문제 (中國存亡問題) 》 라 할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은 이책에서 영국은 인도가 없으면 그저 3등국에 불과하다는 것, 영국은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영국은 자신과 대립하는 강대국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점, 영국은 자신과 대립하는 모든 국가들을 포섭하고 선동하여 서로 싸우게 하고 자신은 이들 사이서 편안하게 앉아서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따라서 손중산 선생의 결론은 영제국이 타도되지 않으면 세계는 평화의 소망을 이룰 수 없고, 중국의 자유평등도 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손중산 선생은 “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존망과 안위를 함께 하는 관계로, 일본이 없으면 중국이 없고, 중국이 없으면 또 일본이 없다다는 것 을 알아야한다. 양국이 백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국 사이에 조금도 거리를 두어선 안된다. ” 라고 목소리를 높혀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때가 당시 소위 21개조 요구로부터 2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있었고, 당시 일본 상품 배척을 제창해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손중산 선생은 의연하게 이러한 주장을 하며, 중국이 가야할 길을 이야기했다. 이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이며, 이는 중국이 나아가야할 유일한 대도다. 손중산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면, 국민혁명군에 힘을 다할 때부터, 돌아가시기 직전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강연하기 까지 40년간, 동아에 대한 방침, 중일관계에 대한 방침은 시종일관 같았고, 그 주장에는 모두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40년간 중일간의 분규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손중산 선생은 이러한 분규에 늘 심통으로 우려해왔던 것이다. 또한 항상 중일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했고, 결코 이를 역전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남은 일생을 국민혁명에 대한 충성과 국부 손중산 선생에 대한 충성을 근본으로 하여 살아가려 한다.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곡해하여 이용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중산 선생은 동아신질서 건설이 제창되기 전에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동아신질서 건설의 구호의 등장은 이전 중국이 제창한 대아시아주의를 일본도 제창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이상이 점차 실현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년 전 오늘 체결된 소위 난징조약은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폐지되어 이미 그 효력이 멈추게 되었지만, 오늘 우리들은 이것이 누구에 의해 멈추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과연 중국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일본의 육해공군 없이는 난징조약의 효력은 여전히 중국의 머리 위를 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오늘 이를 아주 크게 반성해야한다. 중국은 오늘부터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며 왜 일본과 협력해야하는지 , 어째서 대동아전쟁을 완수해야하는 지 를 스스로 반성해야한다. 물질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정신력에 대해 논해보자. 중국에는 4억의 아직도 무너지지 않은 정신, 4800년의 역사속에서 만들어진 정신력과 가장 풍부한 인적 자원이 있다. 중국은 이전처럼 교만해져서는 안되고, 지금과 같이 자포자기 해서도 안된다. 중국은 동아 건설의 책임을 분담하여 중국을 구하고, 동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 말로 중국이 가야할 길이며, 유일한 대도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세력은 이제 이전과 같이 동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영국의 세력이 영원히 동아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인도의 독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자유평등과 인도의 독립은 감정상, 이해상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지사들은 지금도 동포들로 하여금 독립을 지도하고 분투하고 있고 영국은 이를 막으려 흉악한 본심과 수단을 모두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충칭방면의 인사들은 항상 영국에 의존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이 인도에 대해 압력을 완전히 줄 수 없는 현 상황을 알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커다란 모순이며 동시에 우스운 꼴이라 할 수 있다. 어째서 동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일본과 협력하고, 동아를 보위하여 스스로를 구하고 인도를 구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인가? 충칭의 이들은 손중산 선생을 망각하고 있지 않다면 진심으로써 손중산 선생께서 지시한 일대 노선 을 향해 돌진해 나가야 한다. 이는 중국이 진정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대 노선이며 유일한 대도이기 때문이다. 일본뉴스 119호에 묘사된 하얀색 정장을 입고 연설하는 왕징웨이의 모습. 왕징웨이는 그의 스승 쑨원과 그의 라이벌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표준중국어에 서툴어 방언투가 나는 어색한 모습으로 연설을 하였고, 이때문에 이를 잘 이해 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현대 중국인조차도) 일본 뉴스 119호 (1942.9.15) 에서는 왕징웨이의 본 대회에서의 연설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는 왕징웨이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과, 공개된 훈시의 내용이 전체적인 내용면에서는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문자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알아야하는 것은, 이는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기념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기념의 의미는, 바로 중국이 지금 따라야할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기념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정무에서는 대아시아주의를 마땅히 받아드려야하고, 이는 우리의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마음으로 단결한다면, 손중산 선생이 지시한 노선을 따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건설할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중화를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동아를 보위할 수 있을 것이다! ""所以今天紀念的意思,真正要明白的,就不是什麼報仇雪恨。今天紀念的意思是什麼呢?紀念的意思呢,就是指示出一條,中國現在應該走的道路,這個才是紀念性意思。應見到是,在政務,應該以大亞洲主義為事,這個就是我們的真自由。現在所怕的,我們人人一心,不肯一條心。如果大家集中一條心,往孫先生所指定的路來走,我們一定能夠建立大東亞戰爭!我們一定能夠興復中華!我們一定能夠保衛東亞!" -일본뉴스 119호에서의 왕징웨이 연설 원문 왕징웨이의 실제 연설과 위에서 공개된 훈시의 내용은 이처럼 일정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왕징웨이의 실제 연설과 공보를 비롯한 대외에 게시되는 내용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징웨이의 연설은 위에서 이야기 한것 처럼 방언으로 이루어졌고, 앞에서 본것 처럼 40분이나 연설이 진행된 만큼, 내용 또한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왕징웨이 정권측은 이러한 왕징웨이의 연설을 대외에 공개되는 과정에서 최대한 연설을 한 왕징웨이의 취지는 살리되, 일반 민중들이 읽기 쉽도록 일종의 정제과정을 거쳤다. 즉, 공문의 내용과 실제 연설의 내용은 그 내용과 취지는 사실상 같으나, 문자상의 표현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의 훈시 내용은 왕징웨이 정권의 외교공문 (外交公文) 72호를 반영한것으로, 본 훈시의 내용을 담은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과 1942년 8월 30일, 대회 다음날 발행된 중화일보(中華日報) 나 중보 (中報) 와 같은신문언론보도에서도 이때문에 외교공문측의 정제된 발언을 담았지, 위와 같은 연설 원문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러한 왕징웨이의 연설을 보도했던 일본뉴스도, 이러한 공문에 기반한 내용을 자막으로 써넣었지, 연설 원문의 내용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따라서 위의 나타난 영상과 같이 특수하게 드러나는 일부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위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연설 원문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왕징웨이의 글에는 이러한 특징이 있음을 알고 읽을 필요가 있다. 왕징웨이의 연설이 끝난 이후에는 린바이셩 ( 林柏生 ) 선전부장은 대회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편전쟁 100년기념 반영흥아대회 대회선언 (鴉片戰爭百年紀念反英興亞大會 大會宣言) 본 대회는 난징조약 100주년이라는 침통한 기념일에 청년학생들, 청년군인들, 청년학도들, 청년농민들, 청년공인들, 청년 상인들 및 각 기관 각 단체의 공작인원들은 우엄하고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영도자의 연설을 경청하고, 중국의 부흥, 동아보위의 대계 및 우리 동포, 우리 동아민족이 가하고 있는 노력에 대해 적절한 논의를 독려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백년 이래 동아가 혼란스러운 이유, 중국이 차식민지로 전락한 이유가 첫째로는 영미제국주의의 침략, 둘째는 중국의 내정이 불완전했기 때문, 셋째는 동아민족이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 임을 알게 되었다. 중일합작과 동아의 공동보위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국민혁명의 근본방침으로 직접 정한 것으로, 과거에는 여러 결절로 인해 중단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중일 양대민족은 전쟁이라는 피를 흘리는 경험을 통해 깨닫고 다시 손을 잡았다. 우리 영도자가 제창한 화평반공건국운동을 통해 국민혁명의 기본적 근본은 회복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영미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를 통해 동아해방은 다시 전개되었고, 민족공존이라는 광명스러운 대도는 작년 봄의 동아연맹운동의 발전, 이번 새해의 신국민운동요강의 반포를 통해 대내외의 역량 쇄신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중화의 부흥, 동아보위라는 중대한 임무를 위해 우리는 침통한 마음으로 100년전의 난징조약을 기념한다. 우리는 모든 마음을 다하여 충성하여 국부 손중산 선생의 유촉을 받들고 영도자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분투하여 대동아전쟁에 헌신해 중국의 건설사명을 완수하고 동아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 부흥시켜야 하고, 우리는 동아의 화평을 수호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모두 일어나주십시오) 다음과 같이 크게 외치고자 한다 : 영미침략주의를 타도하자! 打倒英美侵略主義! 대동아전쟁에 협력하자! 協力大東亞戰爭! 중화를 부흥시키자! 興復中華! 동아를 보위하자! 保衛東亞! 영도자 만세! 領袖萬歲! 중화민국 만세! 中華民國萬歲! 동아연맹 만세! 만세! 만세! 東亞聯盟萬歲! 萬歲! 萬歲! ( 볼드체로 표기된 부분은 일본뉴스 119호에서 린바이셩이 읽은 부분이다. 괄호는 원문에는 없고 린바이셩이 바로 밑의 구호를 외치기 위해 추가적으로 언급한 내용이다.) 중화민국 만세! 를 외치고 있는 린바이셩의 모습. 여기서도 일본뉴스는 실제 린바이셩의 발언과는 다른 자막을 넣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첫구호인 '영미침략주의를 타도하자' 라는 린바이셩의 말에 일본뉴스는 '대동아정신을 발전시키자' 라는 자막을 넣었다. 연설에서 왕징웨이는 이 대회의 '기념' 목적이 영국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나, 영국에게 쌓인 원한을 푸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본 대회의 '기념' 목적이 이러한 치욕을 기억함으로써 자유평등, 불평등조약의 폐지를 위해 중국이 나아가야할 길은 역시 중일합작을 통한 화평의 건설과 이를 통한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있음을 다시 한번 알게하는 것 에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연설에서는 , 직접적으로 영국을 비난하기보다, 여러 이유를 제시하며 영국제국주의가 나쁜이유, 영국 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불평등조약 폐지 시도는 영국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등을 찾기 위한 '당연한' 시도라 이야기했다. 연설에서 왕징웨이는 자신과 자신의 정권 을 촉과 제갈량의 모습 으로, 유비 를 쑨원 에 비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와 동맹을 맺은 일본 을 오나라 에, 영국제국주의와 여기에 함께하는 충칭 을 '재앙' 과 같은 위나라 의 모습에 비유했다. 이러한 삼국지까지 동원한 왕징웨이측의 시도는, 자신과 자신의 정권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시도였다. 또한 왕징웨이는 연설에서 "누가 난징조약을 없앨 수 있게 했는가?" 를 생각해보라 이야기하면서 일본과 동맹하고 있는 자신의 정권이 한 선택이 합당함을 정당화 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왕징웨이는 연설에서 "쑨원의 뜻을 왜곡할 생각은 전혀없다" 라고 이야기했지만, 대중들은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와 일본의 동아신질서, 대동아공영권 을 연결시키려는 왕징웨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왕징웨이가 같지 않은 것을 억지로 연결시켜 오히려 왕징웨이가 쑨원의 뜻을 왜곡하고 있다 생각했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사상과 민중들의 생각은 괴리가 존재했었고, 이런 기본 사상에서 부터 괴리가 존재했기에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민중들로 부터 제대로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출처] 일본뉴스 제 119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504_00000&chapter=003 중화일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hua-ribao-1942.08.30/mode/2up 중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zhongbao-nanjing-1942.08.30 매일신보 1942년 8월 30일자 : https://nl.go.kr/newspaper/publish_date.do 아편전쟁사화 (鴉片戰爭史畫)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NLC416-02jh005019-14774_%E4%B8%AD%E8%8B%B1%E7%BE%8E%E9%97%9C%E4%BF%82%E7%95%A5%E5%8F%B2.pdf 왕징웨이의 연설원문내용 : https://ek21.com/news/life/5457/ 중화민국 국가문화기억고 : https://tcmb.culture.tw/zh-tw/detail?indexCode=drnh&id=118-030200-000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