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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민회 (大民會, 1938~1940)
이글을 읽기전, 신민회 ( 여기를 클릭 ) 와 신국민운동 ( 여기를 클릭 ) 그리고 동아연맹운동 ( 여기를 클릭 ) 이전에 작성했던 3개의 포스트를 먼저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두 글중 특히 신민회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면 본글을 읽는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미리 적어둡니다. 擁護汪精衛先生 (왕징웨이 선생을 옹호하자) 라고 적힌 선전 문구벽화. 선전문구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야기해보려는 것은 이 선전구호 위에 보이는 이슬람 문양과도 같은 이 문양에 대해서다 . 이 사진은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왕징웨이 정권' 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사진이자. 동시에 영어로 'Wang jingwei Regime (왕징웨이정권)' 이라고 검색했을때 이미지 부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구글에 검색해보자, 이미지코너에서 쉽게 이 사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옹호왕정위선생(擁護汪精衛先生)" 이라는 구호가 가지는 의미또한 대단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통해 이 사진을 접했을때 질문하게 되었던 것은, 과연 사다리 근처에 있는 문양은 무엇인가? 에 대한것이었다 .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초승달과 별 문양과 같은 문양 (물론 이러한 것이 완전하지는 않다는것, 달의 방향은 반대방향을 하고 있지만 실제 초승달과 별은 북반부에서는 반대방향이라는 것... 과 같은 정보는 일단은 무시하고) 과 너무나도 유사한 이 문양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양이 이슬람의 문양과 닮은것으로 보아 혹시 중국대륙 내에서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있었던 지역에서 이러한 親 왕징웨이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었던 것이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回族) 과 같은 이슬람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이러한 행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했었다. 회족이 중국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왕징웨이정권과 일본의 점령지 중 회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이러한 행동을 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러한 이슬람문양과 비슷한 문양의 정체는 바로 1938년 설립된 대민회 (大民會) 라는 조직의 문양이었다. 대민회의 깃발 (재현, 글씨체와 색채도에 일정부분 차이는 존재한다.) 대민회의 문양. (재현) 심지어 색도 튀르키예와 비슷한 붉은색을 사용하면서 더더욱 이슬람문화권의 문양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깃발의 모습을 보면 앞의 사진에서 보았던 벽화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의 벽화가 대민회측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39년 작성된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 에서는 이 문양의 의미도 설명해두어 그 으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문양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는 이슬람문화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日 (태양, 붉은 동그라미) : 하늘에 빛나는 붉은 태양을 상징, 동아를 이끄는 일본 을 상징 月 (달, 초승달) : 갈고리처럼 하늘에서 빛나는 존재로서 중화민국 유신정부 를 상징 星 (별) :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처럼 유신정부와 중국인민의 빛나는 단결 을 상징 청색 (깃발의 배경) : 천지의 광대함, 밤의 순환, 우주의 맑음을 상징하며, 중일 협력이 동아의 평화와 번영을 건설하고 평화와 번영의 땅을 영원히 수호할 수 있다는 것 을 상징 본래라면 이제 대민회라는 조직에 대해 설명해야겠으나, 조직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이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더 이어나가려고 한다. 문양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계속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혼란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대민회측에서 사용되는 문양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이를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민회에서 만든 부채, 오색기와 함께 대민회기가 그려져있다. (여기서는 문양이 반대방향으로 그려져있다.) 이와 같이 문양이 반대로 그려진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반대된 문양이 등장하게 된것인가? 처음 추측으로는 두가지버전이 혼용되었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에서 발간한 서적들을 탐색해본 결과, 이 두가지버전은 혼용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반대로 문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민회가 창설된 1938년 이래 1938년 12월 대민회출판부에서 출판한 《大民會的任務 (대민회의 임무)》 를 비롯한 대민회가 창립되었던 1938년의 잡지와 출판물에서는 지금의 튀르키예의 월성과 같은 방향의 깃발이 사용되었다. 즉, 위의 부채에 사용되었던, 현재 튀르키예를 비롯한 이슬람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우리에게 친숙한 방향의 로고가 초기의 로고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러한 경향은 1939년에 와서도 이어졌다. 대민회가 1939년 2월 출판한 《大民會宣言 (대민회선언)》과 대민회가 1939년 2월부터 자신들의 라디오강연을 정리한 《播音演講集》 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거꾸로 사용되게 되었다. 1939년 6월 30일 에 대민회에서 발행되었던《中日同文同種考(중일동문동종고)》 에서는 문양이 본래대로 사용되었던 반면,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칠칠동아민족해방2주년집, 1939.7)》 를 비롯한 1939년 7월 부터 발간되는 출판물에서 문양이 거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대민회가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39년 6월과 7월에 대민회에서 출판한 서적의 문양차이. 중일동문동종고의 "6월 30일" 이라는 발행날짜는 더더욱 7월부터 문양이 바뀌었음에 확신을 주는 자료로 적용한다. 따라서 이번글을 읽으면서 두 문양을 다루는 자료가 등장할때 문양의 방향을 기준으로 1939년 7월 전인지 후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이번글을 읽으면서 이점에 미리 파악하고 읽는다면 본글을 읽으면서 무수히 등장하는 문양을 보고 시점을 파악할수 있음은 물론 본글을 이해하는데 더더욱 도움이 생각되리라 생각해 이러한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1939년 7월 이라는 날짜를 본격적으로 이글을 시작하기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대민회의 문양변화. "1939년 7월" 을 기점으로 대민회의 문양은 좌우가 반전되었다. 그렇다면 대민회라는 조직은 어떤조직인가?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초기 빠른속도로 점령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전쟁시작으로 부터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는 등 일본은 전쟁초기 고무적인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광대한 중국대륙이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점령지를 다스리기에 중국의 막대한 인구와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게릴라들은 일본의 강압적인 군사지배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괴뢰정부를 성립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법을 구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중일전쟁으로 부터 1년이 다되어가던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본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유신정부(中華民國 維新政府) 가 수립되었다.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성격을 가장 간단하게 규정하자면, 일본이 유신정부보다 3개월정도 앞서 설립한 1937년 12월 베이징에 세웠던 중화민국 임시정부 (中華民國 臨時政府) 의 2호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여기 를 클릭)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화북을 지배하고 있던 북지나방면군 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중화민국 유신정부는 화중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중지나방면군 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두개의 괴뢰정부의 형성과정에서는 동시에 특별한 과정을 하나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신정부의 운영과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친일이면서도, 신정부를 지지할 수 있는 범대중성 조직 의 구성이었다. 일본과 그들의 협력정부는 점령지 내의 민중들로 하여금 이전의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아닌, 자신들의 새로운 단체에 지지를 가하면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베이징의 임시정부에서는 신민회 (新民會) 라는 조직이 구성되었다. 신민회는 해당 신정부에서의 "유일선전조직" 으로 활동하고 여러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일종의 국민당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일본과 임시정부의 통치를 더더욱 용이하게 하는데에 기여했다. 유신정부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것이 대민회 (大民會) 라고 할 수 있겠다. 임시정부에는 신민회가, 유신정부에는 대민회라는 비슷한 선전조직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민회에 대해서는 여기 를 클릭)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해에서 설립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선전조직 이다.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도 신민회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데, 신민회는 본래 구성과정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또한 신민회를 구성한다라는 계획이 이미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부터 일본에 의해 계획되었다. 대민회 또한 구성과정에서 부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다는 점에서는 특징을 공유하지만, 형성과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대민회의 성립과정. 초창기부터 일본이 개입했던 신민회와는 조금 다른 과정을 보인다. 대민회의 뿌리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직후 상하이공동조계(상해에서 성립된 동아회(東亞會) 라는 조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아회가 형성된 시점은 중일전쟁 직후로, 상하이공동조계라는 국민정부와는 분리된 환경이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아회를 만든 인물들은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친일가문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도움속에서' 동아회를 만들 수 있었다. 전쟁 직후에는 왕징웨이를 비롯한 이후 화평파라고 불리는 인물들도 이때까지는 완전한 친일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동아회의 경우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이런 완전한 친일성향을 보이고 있다는데서 그 구성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중국과 악관계를 맺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상해공동조계측에서는 동아회에 탄압과 제재를 가하면서 상하이전투가 진행중이었던 1937년 10월시점에서 동아회는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다. 상하이가 일본에게 함락된 후, 1938년 1월, 동아회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다시한번 조직이 구성된다. 이름도 흥아회(興亞會) 로 바꾸고, 일본의 중지나방면군 특무부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를 비롯한 더더욱 많은 인원이 흥아회에 참가하게 된다. 1938년 4월의 시점에서 흥아회는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쑹장(松江) 을 중심으로 4천명 가까운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신정부측에서 흥아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동아회와 이를 계승한 흥아회 모두 친일조직이었으며, 일부 일본인들이 이에 참여하고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유신정부의 입장에서는 두 조직 모두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사(私) 조직이었다. 따라서 유신정부는 이러한 조직속에서 항일분자가 활동하거나, 일본과의 협력보다 단순한 기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활동하는 것을 경계했다 . 이런 차원에서 유신정부는 직접 이러한 조직 구성에 개입하여, 흥아회가 가지고 있었던 단점을 보완해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려 했다. 이가 바로 대민회였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대민회를 "유신정부의 유일선전조직" 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동아회에서 대민회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이제 완전한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이 된 것이다. 동아회에서 흥아회로 오면서 점점 조직은 확대되고, 더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신민회와 대민회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각자의 정부의 유일선전조직으로 성장했지만, 성립과정에서는 차이가 일정부분 존재했다. 신민회의 경우 결성전부터 일본과 북지나방면군 측에서 완전한 성립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대민회의 경우 기존의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이 이루어졌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성립 → 신민회 성립 (10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 대민회 성립 (65일) 두 조직을 구성하는데에 걸린 시간이 차이가 나는데에도 이러한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민회는 1938년 6월 1일 상하이에서 결성되었고, 7월 15일에는 난징으로 이동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공식적인 대민회의 활동 시작은 7월 15일로 규정되었는데 , 이는 대민회의 활동 1주년을 기념하는 발행물이었던 《大民會初週紀念特刊 (대민회초주기념특간)》에서 6월 1일이 아닌, 난징에서 활동을 시작한 7월 15일을 1주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존재했었다. 앞에서 보았듯, 일본은, 특히 화북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북지나방면군에서는 신민회를 화북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 이전의 국민당과 공산당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이유로 신민회는 많은 분야에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신민회의 활동예산은 임시정부의 행정위원회 조직보다 많은 책정을 받을 수 있었고, 신민회의 활동은 완전히 임시정부의 국고에서 수급이 되었다. 신민회는 선전활동을 위한 도서의 출판은 물론, 잡지의 출판, 신문의 출판과, 이를 보급하기 위한 보급망의 운영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전활동을 위한 교육시설과, 청소년들의 선전을 위한 청소년조직의 구성까지 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교류에서도, 예를 들어 스포츠와 같은 교류에서도 신민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직업들의 분회와 군사훈련을 위한 훈련소까지 존재했던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화북에서 유일한 선전단체이자 동시에 일종의 유일정체단체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화북에서는, 국민당의 나라 가 신민회의 나라 가 되었다고 봐도 무관했다. 大民會是我們民眾自己的集團 (대민회는 우리민중 스스로의 조직) 이라는 대민회의 구호, 대민회가 출판한 도서에서 이러한 구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민회 의 경우 신민회와 다르게 화중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물론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선전단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자적인 출판체계를 갖추고 발행물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대민회출판 (大民會出版) 에서 발행한 잡지 대중국(大中國). 1938년부터 발행되어 대민회가 사라지는 1940년 말까지 발행된다. 일본과 조선이 빨간색, 만주가 분홍색으로 칠해져 중국대륙과 분리되어 있다. 또한 신민회가 청소년조직을 운영했던 것 처럼 대민회 또한 대민청년단 (大民靑年團) 과 같은 청소년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민회의 행동은 이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신민회보다 큰 제약을 받아왔다. 이의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과 유신정부가 대민회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신정부와 일본은 대민회가 신민회처럼 수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아닌, '선전' 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다. 신민회가 단순한 선전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활동에도 매진하며 일종의 정당역할까지 했다면, 대민회는 정부차원에서 이러한 정치활동, 즉 대민회가 일종의 정당으로 보이게하는데에 반대를 표했다. 화중에서는 국민당의 나라 가 대민회의 나라 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본래부터 신민회가 구성전부터 어떠한 목적을 위해 구성된 단체였음이 분명했다면, 대민회는 구성과정에서부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민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하고 신민회의 구성을 집행했던 북지나방면군과 달리 대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지나방면군은 군 내에서도 대민회를 어떠한 조직으로 구성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이 존재하지 않았다. 흥아회라는 조직을 대민회라는 조직으로 개편하면서 정부의 관리체제 안에 두고싶었던 것은 맞으나,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고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민회의 이전조직이었던 흥민회는 물론 대민회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脇光雄(와키 미츠오) 소좌 또한 대민회를 만드는 과정이 신민회의 형성과정처럼 연구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며 "(대민회는) 사실 졸속주의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実は拙速主義の下に始めたもの。)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부족한 준비과정, 부족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사실상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었다. 대민회는 더더욱 문제점이 있었는데, 앞에서 나는 조선일보를 인용하면서 대민회가 "유신정부의 유일한 선전조직"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중지나방면군의 정치반과 선전반 은 대민회와 별도로 선전활동을 진행했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신문사들도 또한 별도의 선전활동을 유신정부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에서는 임시정부와 다르게 선전조직이 일원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대민회와 유신정부의 모습을보면서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의 丸山静雄 (마루야마 시즈오) 기자는 '화북에서 신민회가 만들어졌으니까 화중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번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앞에서 언급한 와키 미즈오 소좌를 비롯한 인원들이 신민회의 영향을 받아 대민회를 만든것으로 보인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민회 와 신민회 는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고 일정부분 유사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구성과정이나 그 역할과 권한과 영역에 있어 차이가 존재했기에 대민회와 신민회를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오히려 대민회는 신민회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민회가 신민회의 영향을 받았음을, 대민회가 신민회와 유사점을 보이는 부분에는 단체를 지탱하는 사상에도 나타난다. 신민회 는 신민주의(新民主義 ) 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신민주의에 대해서는 신민회를 다루는 포스트에서 더더욱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본 포스트에서는 간단하게만 서술하려한다. 신민주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 가 가지고 있는 삼민주의(三民主義) 를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신민회의 영향으로, 대민회 또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이가 바로 민덕주의(民德主義) 다. 민덕주의가 만들어진 이유 또한 화중에서 이전 국민정부의 삼민주의를 대체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민회는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민회강령(大民會綱領) 이라는 것으로, 이는 다음과 같다. 대민회의 "초대" 강령. 대민회의 성립부터 1940년 초까지 사용되었다. 대민회강령 ( 大民會綱領) 1. 민덕주의를 진흥하고 실천하여 신중국 국민정신을 확립한다. 振興實踐「民德主義」確立新中國國民精神 2. 정부의 가르침을 보급하고, 민중들의 정서를 상달(고양) 시킨다. 政敎普施,民情上達 3. 생활을 혁신하고, 민력 (국민들의 경제력)을 강화한다. 革新生活,強化民力 4. 중일제휴로 동아의 자주번영을 도모한다. 中日提攜, 以圖東亞之自主興隆 강령에서는 신민회의 강령과 유사한점도,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하는데, 우선 "경제의 중요성" 을 언급한다는 것, "중국과 일본의 협력(중일제휴)" 를 강조하는 부분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신민회의 강령과는 아주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바로 초공멸당 (剿共滅黨, 공산당을 금지하고, 국민당을 멸한다) 라는 反 국민당적 구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속에서 대민회의 강령은 신민회보다 강압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일정부분의 온건한 구호가 등장한 것은 당시의 상황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되는데 대민회는 앞에서 보았듯 신민회보다 완전한 장악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신민회처럼 대범한 움직임을 하기에 어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민회보다 조직도 미약하고, (신민회의 경우 조직이 기본 만명 단위였지만, 대민회의 경우 1939년 2월 기준으로 전체 7천명도 안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영향력도 약한 대민회가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하지 않았던 화북도 아닌, 2차북벌이후 완전한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던 화중지역에서 신민회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기는 어려움이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대민회가 신민회보다 온건한 이유는 뒤에서도 서술할 유신정부 자체의 특징이 존재했다. 1939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대민회의 연등. "유신정부만세 (維新政府萬歲)" 라고 적혀있고 , 측면에는 민국28년 3월 28일 (1939년 3월 28일) 이라고 적혀있다. 대민회와 신민회의 모습은 달랐지만, 신민회는 임시정부의 선전조직으로, 대민회는 유신정부의 선전조직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대민회 역시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8년 12월 18일,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한 것이다. 정부 통합과정에서 이렇게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는 이미 이전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두 정부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교' 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국민정부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두 정부는 통합과정을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통합논의가 1938년 후반기부터 진행되었음을 생각하면, 유신정부는 정부수립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통합논의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신정부는 자신들의 존재가 임시적이라는 것을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합된다면 베이징의 임시정부에게 흡수되는 모양새를 취할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저자세' 가 있었기에 두 정부의 통합과정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설득하기 위해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화평운동을 진행해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면 "신중앙정권 (新中央政權)" 을 건설해줄 것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해 임시정부,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신중앙정권' 이 만들어져야 화평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일본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이야기했었다. 이렇게 정부 통합과정에서 왕징웨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면서, 대민회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완전한 신중앙정권' 구상 하지만 이에 대해 임시정부측과 유신정부측은 표면적으로는 찬성하고 필요성에 동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를 표하고 있었다. 유신정부의 수장 량홍즈는 "유신정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라면서 신정권에서 왕징웨이가 주도권을 장악하는것에 반대를 표했고, 이로 인해 왕징웨이는 '통합신중앙정권' 이라는 구상을 량홍즈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구상을 일본측에서 찬성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왕징웨이의 구상에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극강한 반대가 존재했었기에, 새롭게 세워지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은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갖추게 되는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은 명목상으로는 통합되지만 독자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제 우리는 위의 표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임시정부도, 유신정부도, 몽강도 왕징웨이의 구상에 반대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유신정부는 결국에는 통합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이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는데, 첫째로, 유신정부가 가지고 있던 지리적 조건이 있었다. 유신정부는 중화민국의 옛수도 난징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난징은 수도인만큼 이전의 국민당과 그의 이데올로기 삼민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했던 장소중 하나였다. 이러한 난징의 환경때문에 유신정부는 국민당의 영향력이 완전히 작동하지 않았던 화북지역과 다르게 국민정부에 반대하는 모습은 똑같이 보이지만, 임시정부에서 보였던 것 만큼 급진적인 반대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또한 이 지역은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쿠테타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자본가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기에 반공주의의 영향력도 다른지역보다 크게 작용했다. 둘째로 , 첫째 사유의 영향으로,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 또한 임시정부와 큰 차이를 보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인원이 완전한 反장제스 反 국민당 성격을 띄는 친일 주의자가 많았다면, 유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전부터 쑨원과, 국민당과, 국민정부와 함께 한자들이 많았다. 유신정부에는 국민당과 국민정부 자체에 실망하고 반대하기 보다는 "국민당은 좋은데 장제스의 독재는 싫어" "국민당은 좋은데 공산당이랑 합작하는 건 아니야" 라는 이유로 유신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충칭의 장제스 국민정부는 "본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데 잘못 굴러가고 있는 것" 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를 해왔지만 거꾸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원들의 입장에서는 왕징웨이의 국민당은 받아드릴 수 있는 대안이었던 것이다. 셋 째로 , 유신정부의 구상과 왕징웨이가 구상하는 신정권의 구상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신정부는 정부를 설립하면서 '화평(和平)' , '반공(反共)' , '공화(共和)' 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왕징웨이의 화평(和平), 반공(反共), 건국(建國) 이라는 구호와 오히려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신정부는 장제스의 행하는 일이 독재라면서 비판하면서, 중화민국이 장제스 독재 이전의 훈정(訓政) 정치를 복원하고 민국 초기의 민주정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고 비슷한 정권으로 생각되었지만, 속에서는 신민회 와 대민회 가 차이가 보였던 것처럼 임시정부 와 유신정부 또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신정부는 화평이라는 목적도, 반공이라는 목적도 일치하고,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또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상극이었던 임시정부나 몽강보다는 원활한 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민회의 발행물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 "중일제휴 (中日提携) " 와 대민회라는 글자를 적어뒀다. (사실 귀여워서 넣음) 넷 째로, 일본은 화북지역에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했으나, 화중지역은 이러한 논의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화북의 특수성' 같은 이유를 들며 화북의 이권만은 지키려고 했으나, 일본의 입장에서도 화중지역정도는, 특히 국민정부로의 정통성을 중요시했던 왕징웨이에게 옛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밑에서 통합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실무자들은 왕징웨이와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통합작업을 진행하던 유신정부의 陳牽(천친, 진견, 유신정부에서 내정부장을 맡음) 과 伍澄宇(우청위, 우등우, 유신정부의 정강을 작성) 의 경우 신해혁명 전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웠으며, 유학과정에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참가하고, 중화민국 수립 이후에는 쑨원의 혁명활동을 도왔으나, 장제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공산당에는 반대하고, 화평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이었다. 과연 이들이 왕징웨이와 엄청난 차이를 가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오히려 왕징웨이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이들에게 왕징웨이와 그의 주장은 충분히 받아드려질 수 있는 주장이었다. 또한 협상과정에서 유신정권 출신의 신정부에서도 지분이 약속되면서 유신정부측 인사들에게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된것이다. 이는 동시에 유신정부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던 대민회에게도 왕징웨이의 신정권은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임을 의미했다. 이는 왕징웨이와 임시정부가,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신민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공존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견제와 경쟁, 반대를 일삼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장이었던 량홍즈는 반대했지만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와의 통합협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몽강이 반대와 반대로 일본의 설득으로 '독자성을 지키는' 방법까지 동원함으로서 겨우겨우 합의를 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9년 7월 에는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합의가 완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을 량홍즈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량홍즈 또한 초반에는 극한 반대를 표했지만, 협의가 7월부터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후 9월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완전찬성으로 의견이 돌아서게 된다. (신민회 포스트 참조) 대민회 이야기로 돌아와서, 통합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대민회와 신민회 모두 이제 왕징웨이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에 맞추어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삼민주의와 국민당이 다시 돌아오게 된 상황에서 삼민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두 단체의 사상과, 국민당에 반대하는 모습을 더이상은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민회는 이러한 왕징웨이 정권의 출범에 불만을 표하고 있었지만, 대민회는 그렇지 않았다. 신민회가 왕징웨이와의 공존에 불만을 표하고 공존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반면, 대민회는 이렇게 신정부 합의를 끝냄과 동시에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신정부는 이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대민회가 문양의 방향을 바꾼것은 놀랍게도 유신정부와 대민회가 왕징웨이의 구상에 동의하고 합의를 끝낸 시점과 일치한다. (둘다 1939년 7월) 대민회가 1939년 11월 발행한 "손중산선생탄생기념(孫中山先生誕生紀念) 발행물. 대민회는 문양이 좌우반전된 1939년 7월 부터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발행물의 주제가 기존의 주장에서 벗어나 쑨원, 왕징웨이에 대한 옹호가 시작되었고 , (이는 신민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1939년 7월 10일에는 왕징웨이의 라디오 방송에 축전을 보내는 등, 이 시점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을 이미 띄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선생의) "국가와 민중을 위한 분투정신은 감복할 수 밖에 없다.... (중략) 왕선생의 대성질타로 화평과 항전중 어느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충분히 명백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할 지를 충분히 알고있다. 일치협력하여 화평의 실현에 매진해야한다. 이것이 국가를 구하는 길이고 우리를 구하는 길이다. " - 1939년 7월 9일 왕징웨이가 한 라디오 방송에 대한 대민회 성명. 1939년 7월 (통합정부합의)~ 1940년 3월(왕징웨이정권수립) 이라는 이 6개월의 과정을 다루는 신문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등) 들을 분석해보면, 대민회 의 경우 이시점부터 왕징웨이에 대한 긍정적인 모양새를 많이 취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민회 의 경우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1939년 7월 15일, 대민회의 성립 1주년을 맞이하는 행사에서 대민회측은 왕징웨이에게 신중앙정권 수립을 위한 출마를 종용했고 동시에 왕징웨이의 신중앙정권수립에 동의한다는 통전(通電) 을 전달하기도 했다 . 대민회 성립 1주년 기념행사, 좌우반전된 신민회의 문양을 또한번 볼 수 있다. 이렇듯 대민회는 1939년 7월 이라는 이시점부터,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협상이 완만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이시점을 기준으로 성향이 친 왕징웨이 성향으로 변화해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함께 왕징웨이를 지지하고 이를 선전하는 단체로 변모하게 된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민회 문양의 좌우반전 은, 대민회의 성격또한 완전히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민회 문양이 좌우반전되기 전과 된 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신정부의 확실하지도 않은 선전단체 에서 親 왕징웨이 성향의 왕징웨이 선전단체 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좌우반전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40년이 되어서는 대민회는 완전한 왕징웨이의 국민정부를 선전하는 단체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우선 1940년 1월 30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신정부 출범에 맞추어 조직의 새로운 방침을 발표한다. 대민회의 신방침 (大民會的新方針) 1.쑨원의 삼민주의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충하여 왕 선생의 화평건국 정신에 의거하여 동아신질서의 건설의 매진한다. 2. 정당으로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까운 시기에 열리게될 중앙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3. 사업의 중심을 사회사업과 경제선전에 둔다. 신방침의 1항에서 볼 수 있듯이, 대민회는 이시점에서 이전의 민덕주의에서 벗어나 완전한 삼민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또한 왕징웨이에 대한 찬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대민회라는 단체가 이제는 완전한 왕징웨이를 위한 단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항에서는, 정당으로서의 입장을 취하지 않음을 선언하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과 충돌하지 않겠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민회가 깃발을 국민정부속에서도 오색기로 굳이 바꾸는 행위를 저지르고 "오히려 신민회가 국민당보다 선각자다" 라면서 국민당을 견제해왔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0년 3월, 왕징웨이의 정권이 출범하기 한달전에 대민회는 신정부옹호운동(新政府擁護運動) 을 진행한다. 3월 3일부터 5일까지 난징의 회화로(淮海路) 중앙대무대 (中央大舞臺, 현재 난징 친화이구 회화로, 총통부에서 2km 정도 거리가 있음) 에서 학생들 12,000명을 동원한 가두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서는 영화상영, 연극, 연등행렬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민회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난징환도를 위한 준비에 동참하기도 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 성립을 기념하는 난징거리의 행진행사에서 대민회의 모습. "화평문(和平門)" 이라는 모형을 들고 전진하고 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대민회는 왕징웨이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대민회의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1939년 2월 7천명에 약간 못미치던 대민회의 회원수는 1940년 8월 시점에는 거의 15만명에 이르게 되면서 1년 반사이 20배가 넘는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1939년 말만 하더라도 회원수가 2만명이 되지 못해 대민회측에서 아쉬워 한걸 생각하면 더더욱 큰 성과였다.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국민정부 성립이후 왕징웨이의 국민당쪽의 인사들이 무더기로 대민회에 가입한 결과였다.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을 선전하는 과정에서 대민회는 왕징웨이정권의 정책중 하나였던 청향운동 (淸鄕運動) 도 선전했다. 대민회에서 만든 청향운동 프로파간다. 철책을 경계로 왕징웨이의 화평건국청천백일만지홍기가 휘날리는 마을은 평화속에서 살아가지만 철책밖은 굶주림과 죽임만이 보일 뿐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민회가 발행하던 잡지 《 대중국 (大中國) 》에도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대중국 잡지는 본래 1938년 발행될 때부터 이름을 유지했는데,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면서 잡지 이름을 《 대민 (大民) 》으로 바꾸게 되었다. 잡지 《 신중국 (新中國) 》의 변화. 여기서도 문양의 좌우반전을 함께 볼 수 있다. 我們應在正統國民黨領袖 汪先生領導下, (우리는 정통 국민당의 영수 왕징웨이 선생의 영도아래) 協力向和平建國大道邁進。 (협력하여 화평건국의 길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적힌 대민회의 프로파간다문구. 이렇게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 정권의 초기 대민회는 정권의 공식 선전단체라는 칭호속에서 이룬 큰 성장속에서 일종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정기는 길지 않았다. 대민회 는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으로 부터 1년도 가지 못하고 왕징웨이의 국민당에 흡수되며 사라지게 된다. 대민회는 1940년 10월 10일, 난징 환도이후 처음맞이하는 쌍십절 행사에도 대민회는 참가하는 등 여러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런 행보속에서도 대민회는 흡수과정을 피할수 없었다. 이렇게 거대해진 선전조직을 두지않고 흡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동아연맹운동 (동아연맹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1940년부터 중국에서 확산된 동아연맹운동은 중국내에서도 (왕징웨이정권내에서도) 확산되었고, 여기에 왕징웨이 본인도 관심을 표하고 1940년 말부터는 동아연맹운동이 왕징웨이 정권의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동아연맹운동을 왕징웨이 정권이 직접 실시하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이를 선전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위해서는 독립된 조직이아닌, 왕징웨이의 국민당으로 대민회를 비롯한 다른 선전, 정치조직이 통합되어야함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이유로, 1940년 12월 17일, 대민회 를 비롯해 중국공화당 (中國共和黨), 중국흥건연맹 (中國興建聯盟) 라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내의 非 국민당 조직들이 국민당으로 통합하면서 "발전적 해소"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대민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대민회를 흡수하는 과정 (1940.12.17) 신민회라는 조직의 성격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듯, 대민회라는 조직의 성격 또한 단순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민회와 대민회 두조직은 비슷한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조직 모두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한 괴뢰정부의 괴뢰선전조직이었고,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가진 삼민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이를 선전하고, 왕징웨이가 새로운 정권을 수립함에 따라 두 조직 모두 변화를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두조직은 다른 모습도 보인다. 신민회 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유일하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여, 넓은 범위에서 행동하며 "일본"의 완전한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작동하게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대민회 는 성립과정도 치밀하지 못했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강력한 힘도 가질수 없었고, 행동의 범위도 제한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과 유신정부를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후에는 왕징웨이를 위해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두조직이 비슷한듯 다르게 작동한 이유로는, 화북과 화중이라는 지리적 환경의 차이 ,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라는 인물적, 사상적 차이, 왕징웨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의 차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의 차이 때문에, 왕징웨이정권이 수립되는 시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유신정부 와 그의 선전단체 대민회 는 왕징웨이를 수용할 수 있었다 . 그렇기에 그들은 왕징웨이와 대립할 필요도, 왕징웨이를 반대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화북정무위원회) 와 신민회 는 그러지 못했다 . 그렇기에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왕징웨이와 대립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겉으로는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이번 4부작의 목표는 이표를 왕징웨이 정권을 알지못하는 이에게 이해시키는데에 목표가 있었다. (청향운동은 넣지않았다. 청향운동은 오히려 하나의 글로 정리할 수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 요소가 적기에) 어쩌다 보니 신국민운동-신민회-동아연맹운동-대민회 로 이어지는 긴글 4부가 되게 되었다. 본래 신국민운동에 관한 글을 쓸때는 이러한 4부작이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4부작을 마무리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 4부작의 요소들은 서로 얽혀있어 하나의 글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 속에는 엄청난 속사정들이 존재하며, 이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설명을 잘했다고 한들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민회, 대민회를 이야기하면서 신국민운동, 화북정무위원회, 임시정부, 유신정부, 동아연맹운동등 여러가지를 함께 서술했던 , 해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긴 글이지만 4개의 요소를 모두 설명하면서 왕징웨이 정권의 모습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장대한 과정을 거쳐서 서술했지만, 이 서술또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민회 에 관련된 연구는 앞에서 글을쓴 신민회 , 동아연맹운동 , 신국민운동 에 비해 너무나 적다. 국내에서도, 일본에서도 신민회에 대한 연구는 꽤 진행되었으나 대민회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앞으로 이에관한 자료가 더욱 만들어지고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나긴 4부작을 끝내고자 한다. [출처] 土屋光芳, 「中華民国維新政府はなぜ平穏に在精衛政権に吸収されたか?」, 『政経論叢第 83巻第 3・4号』, 2015 堀井弘 一郎, 「大民会の成立と中華民国維新政府」, 『現代中国 第71号』, 1997 堀井弘 一郎, 「汪精衛政権下, 総動員体制の構築と民衆」,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2009 関智英, 「袁殊と興亜建国運動: 汪精衛政権成立前後の対日和平陣営の動き」, 『東洋学報 第 94巻 』, 2012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p. 214-251. 大民會總本部, 『大民會初週紀念特刊』 大民會總本部, 『大民会宣言』 大民會總本部, 『七七東亞民族解放二週紀念集』 大民會宣傳部編, 『中日同文同種考』 조선일보 - 동아일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B%8C%80%EB%AF%BC%ED%9A%8C%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0-01-01%22%2C%22endDate%22%3A%221940-12-31%22%7D 조선신문 - 매일신보 1939년 7월 1일~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keyword_search.do 조선신문 1940년 12월 18일자 :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125204931&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삼천리 제11권 제1호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a_016_0700_015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8C%80%EB%AF%BC%ED%9A%8C&searchKeywordConjunction=AND 대중국 1940년 1월-5월호 표지 : https://cotca.org/items/damin-cover-image-may-1940/ 손중산선생탄생기념 표지 : http://read.nlc.cn/advanceSearch/allRes?searchWord=%E5%A4%A7%E6%B0%91%E6%9C%83#hahaha 벽화사진 : 영문판 위키피디아 "Wang jingwei Regime" 문서 1938년판 신중국 표지, 프로파간다 문구, 청향운동 , 유신정부 성립 1주년 기념행사 , 대민회 부채자료 : 중국 바이두 웹참고
- 왕징웨이의 죽음 (1944.11.10)
본 글에서는 왕징웨이의 '죽음' 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왕징웨이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이유, 건강이 악화되었던 1943년 말부터 사망에 이르게 되는 1943년 11월까지의 과정, 왕징웨이의 죽음 직후 있었던 일과 이에 따른 여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935년의 저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왕징웨이. 사진은 천궈치 (陳國琦) 가 촬영했다. (이후 천궈치는 왕징웨이정권에 참가하여 왕징웨이정권의 국영보도국인 중앙전신사의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1942년에는 난징국민정부 행정원 비서직을 맡게 된다. ) 1935년 (민국 24년) 11월 1일, 이날은 중국국민당 제 4기 6중전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본래 6중전회는 9월 중으로 개최되어야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11월 1일이 되서야 개최될 수 있었다. 오전 7시, 당시 외교부장이자 행정원장이었던 왕징웨이를 비롯한 집행위원들은 중산릉을 방문하여 참배한 뒤, 오전 9시, 중앙당부 대강당에서 열리는 6중전대 개막식에 참가했다. 왕징웨이는 이 개막식에서 개막연설을 맡았고, 제 5차 초공작전의 진행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왕징웨이는 대강당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에 참가했다. 이때 장제스는 보안이 안전하지 않다는 측근들의 의견아래 강당에서 예추창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사진 촬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취재기자들 중 회색 대의를 입은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그의 정체는 신광통신사 (晨光通信社) 의 기자였던 쑨펑밍 (孫鳳鳴, 손봉명) 이었다. 쑨펑밍은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스페인제 권총을 꺼내 "타도 매국노! (打倒賣國賊!) " 라고 외치며 왕징웨이를 향해 두발을 쏘았다. 당시 장췬 (張群)이 총을 쏘려는 쑨펑밍을 보고 그를 밀쳐 넘어트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저우포하이는 폭죽소리가 난 줄 알고 뒤를 보았으나, 거기에는 총을 든 쑨펑밍의 모습이 보였고, 그리고 왕징웨이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쑨펑밍은 두발을 쏜 후에도 두발을 연이어 왕징웨이를 향해 쏘았다. 쑨펑밍은 이후 장쉐량을 비롯한 위원들이 달려들고 경비병들이 총을 쏘아 제압당하여 체포되었으나, 왕징웨이는 이미 3발의 총알을 맞은 상태였다. 총소리가 들리자 강당에 남아있던 장제스가 뛰쳐나와 왕징웨이를 직접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게 했고, 왕징웨이의 아내였던 천비쥔은 침착하게 왕징웨이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천비쥔과 천궁보의 도움으로 왕징웨이 부부는 빠르게 난징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으로 갈 수 있었다. 난징 중산동로의 중앙의원 (中央醫院) . 1929년 설립된 이곳은 장제스의 난징국민정부 시기 중앙의원으로 작동했다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점령되자 일본군이 점령하며 화학전 부대인 영1644 (榮1644) 부대가 사용하다가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의 중앙의원이 되게 된다. (기존 중앙의원 조직은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이전했다. ) 병원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10시 30분 중앙의원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바로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 총알의 위치를 파악했다. 왕징웨이는 각각 왼쪽 팔, 왼쪽 뺨 (맨 위의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 그리고 등을 맞았는데, 등의 총알은 다섯번째, 여섯번째 갈비뼈를 지나 허파를 뚫고 척추에 박혔다. 당시 왕징웨이의 의식은 명확했으나, 척추쪽에서 계속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눈 및은 계속하여 부어오르고 있었다. 왕징웨이와 그를 따라온 천비쥔은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중앙의원측은 이를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치명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11월 1일 오후 4시, 왕징웨이의 수술을 위해 상하이에서 급하게 뉴후이린 (牛惠霖, 우혜림) 이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왔다. 1935년 왕징웨이의 수술을 집도한 뉴후이린 (牛惠霖, 1889~1937) 의 모습. 가장 경미했던 왼쪽 팔의 총상은 간단한 봉합수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왼쪽 뺨의 총상의 경우 뼈가 관통되어 파편이 왼쪽 눈에 박힐 정도였지만, 이 또한 3차례의 수술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파편의 경우 완전히 처리 하지 못했다. ) 피습 다음날인 11월 2일 오전 10시, 중앙의원은 왕징웨이의 상태에 대해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가 진행된 이유중 하나는 ,국민정부는 11월 1일 오후 5시, 성명을 통해 왕징웨이가 피습당했음을 발표했으나 문제는 진작 왕징웨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일보에도 "왕씨가 피습을 당한것같다" 정도의 정보가 알려졌을 뿐이었다. ) 이미 소식은 퍼졌고 그속에서 정보의 불확실속 왕징웨이가 '사망' 했다는 유언비어도 퍼지기 시작한만큼, 국민정부측은 이러한 잘못된 유언비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1935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의 "왕씨절명설 (汪氏絶命說)" 보도. 동아일본은 왕징웨이가 11월 1일 오전 11시, 중앙의원에서 왕징웨이가 사망했다는 중국측 보도내용을 토대로 왕징웨이가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의원은 발표에서 왕징웨이의 상태가 양호하며, 2일 새벽부터는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이야기했다. 왕징웨이는 2일 오후 9시반에 잠들어 그다음날 오후 9시까지 긴시간동안 편안한 수면을 취했으며 체온도 37.4도라는 미열에 불과했다. (맥박도 80으로 양호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실제로 오히려 의사들이 말리는데도 신문을 읽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11월 3일에는 쇼와 천황이 왕징웨이의 비보를 듣고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인사들도 왕징웨이를 찾아 쾌차를 기원했다. 문제는 등에 박힌 총알이었다. 당시 이 등에 박힌 총알은 중국의 의학 기술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앙의원측은 등에 박힌 총알을 소독등의 임시방편적 치료만 하고, 총알 자체는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왕징웨이는 피습으로 부터 여러일이 지난 11월 20일, 당시 의학 선진국이었던 독일 의사들의 치료와 수술을 받기 위해 독일 의사들이 있는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했다. 11월 20일 오후 3시, 퇴원한 왕징웨이 부부는 야간열차를 통해 20일 밤 상하이로 향했다. 21일 오전 7시, 상하이에 도착함과 동시에 왕징웨이는 상하이의 중국홍십자회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에 입원하게 된다. 중국홍십자제1병원 (中國紅十字會第一醫院, 현재의 푸단대학부속 화산의원) 의 모습. 이곳에는 독일인 의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독일 의사들은 중앙의원에서 처리하지 못한 왼쪽 눈의 파편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의사들도 당시 기술로는 왕징웨이의 척추에 박힌 총알을 완전히 적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때 빼내지 못한 총알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난징중앙의원측에서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이 불편함을 줄수 있었도 목숨에 영향을 줄 만큼 큰 영향을 줄것이라 생각하진 않았고, 독일의사들도 그러했다. 왕징웨이는 병원에서 퇴원한뒤, 상하이의 자신의 사택에 머물며 요양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왕징웨이는 자신의 직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고, 그결과 왕파 (汪派) 라 불리는 왕징웨이의 인사들은 대거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습이후, 빼내지못했던 마지막 총알의 영향은 이때부터 끼치고 있었다. 당대 기사들을 보면, 상하이의 사택 관저로 돌아온 이후에도 왕징웨이는 계속 고통을 호소해 왔고, '중태' 라고 불릴만한 건강악화가 12월에만 3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5일, 12월 9일, 12월 23일) 12월 9일, 왕징웨이는 계속되는 고통과 피로감을 호소했고, 맥박도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띄기도 했다. 게다가 1936년 2월 2일에는 독감에 걸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왕징웨이는 결국 독일로의 요양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독일인 주치의가 권한 것이었고, 장제스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건강 회복을 위해 요양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가 독일로 가기 위해 탑승했던 나치독일의 SS 그나이제나우 (SS Gneisenau) 1936년 2월 19일 오후 4시, 왕징웨이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독일의 함부르크로 가는 SS 그나이제나우 여객선에 탑승했다. 이때 부인이었던 천비쥔과, 쩐중밍을 비롯한 수행비서들도 함께했다. 함부르크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베를린을 거쳐 1936년 4월 10일, 독일 남부의 도시인 바트나우하임 (Bad Nauheim) 에 도착했다. 베를린이 아닌 한적한 바트나우하임을 선택한것은 독일 주치의들의 권유였다. 왕징웨이는 1942년 발표한 성명에서 이러한 선택이 독일 주치의들이 권유였음을 이야기하며 이 때문에 히틀러를 비롯한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의 1942년 대 독일 성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왕징웨이는 바트나우하임의 칼튼 (Carlton) 요양원에 머무르며 온전욕을 즐겼다. 또한 이곳에서 시나 글을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중화민국 주독 대사 청톈팡 (程天放) 은 몇차례 바트나우하임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만나 회담을 했는데, 청폔팡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왕징웨이) 의 몸은 여러차례 치료하며 회복되었지만 (남은) 총알이 제거 되지 못해 심장이 쇠약해졌으며, 바트나우하임의 온천은 심장병에 약효가 좋다고 하여 온천욕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기치료도 받고 있다. " 라고 왕징웨이가 이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건강을 회복했음을 서술해두었다. 왕징웨이는 요양차 독일에 오게되고, 이과정에서 모든 직을 내려놓았지만, 국민당의 2인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만큼, 요양기간동안 앞에서 보았던 청톈팡 외에도 쿠웨이진 (顧維鈞) 주이탈리아 대사 등 유럽의 여러 중화민국 주재 대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1936년 6월까지 바트나우하임에서 요양하다가, 6월 9일 부인 천비쥔에게 전보를 보내 베를린으로 가 다시 진료를 받아보겠다고 하였다. 왕징웨이는 퀄른을 지나 6월 11일 베를린에 도착해 다시 한번 진료를 받은 후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온천도시인 칼스버드 (Karlsbad) 에서 머물며 요양을 계속했다. 이후로도 왕징웨이는 프라하, 베르흐테스가덴 (Berchtesgaden) 등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등지의 여러도시를 다니며 요양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요양을 지속하면서 이전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고, 왕징웨이는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왕징웨이는 부인 천비쥔에게 보내는 편지등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을 계속 이야기 해왔다. 왕징웨이는 "여행자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과 같다. (旅人如坐鍼氈)" 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측 인사들은 건강을 이유로 계속하여 왕징웨이의 중국행을 말렸다. 하지만 천비쥔을 비롯한 이들도 왕징웨이의 귀국 계획을 완전히 말릴 순 없었다. 흔히 1936년 12월 12일의 시안사변이 왕징웨이의 귀국 이유로 알려져 있지만, 귀국 계획 자체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왕징웨이는 시안사변 이전부터 중국 행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1월부터 왕징웨이는 영국 런던 (11월 1일), 프랑스 니스 (12월 4일), 독일 퀼른 (12월 8일) 등을 오가며 계속하여 전보로 복귀 계획을 논하고 있었다. 즉, 왕징웨이의 중국행은 그 이전부터 논의 되었고 시안사변은 그의 중국행을 결심하게 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왕징웨이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SS 포츠담호. (SS Potsdam) 이배는 위에서 보았던 그나이제나우의 자매함이었다. 시안사변 발발이후 왕징웨이는 14일의 전보에서 자신이 귀국할 결심을 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위에서 보았던 청톈팡, 쿠웨이진 등 유럽 주재 인사들과 현재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귀국을 결정하여 1936년 12월 22일,SS 포츠담 (SS Potsdam) 호를 타고 마지막으로 머물던 제노바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왕징웨이가 출발한 시점에서 시안사변은 이미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장제스가 다시 석방되었다는 전보는 왕징웨이가 탑승한 포츠담호가 수에즈 은하를 통과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왕징웨이는 이때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귀국을 통한 재기시도는 잘 알듯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역으로 왕징웨이는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이 원하던 중국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다시 국민정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요직에도 복귀하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건강을 되찾고 요직에 복귀하게 되면서, 1935년의 저격사건이 주었던 여파는 사라진듯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1937년 1월 14일 중국으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이후 다시 정계와 요직에 복귀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사진은 1939년의 모습) 1937년 1월 14일 왕징웨이는 중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활동을 재개해왔다. 1937~1943년이라는 6년의 세월 동안 왕징웨이는 제3차 장왕합작의 동반자부터, 항전 국민정부의 부총재, 국민당의 화평운동 지도자, 변절자이자 도망자, 난징국민정부의 행정원장 겸 주석 대리, 그리고 난징국민정부의 주석으로써 수많은 곳과 자리를 옮겨가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그에게 1935년의 상처가 다시 돌아온것은 1943년 8월 이었다. 8월부터 왕징웨이의 증세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거동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11월 5일, 대동아회의 시기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는 도조 히데키에게 자신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이에 일본은 당시 내과전문의였던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당시 도호쿠 대학 내과 교수와 그의 조수였던 마쓰나가 후지오 (松永藤雄) 를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돌보게 했다. 쿠로카와 토시오 (黑川利雄, 1897~1988), 그는 도조 히데키의 요청을 받아 난징으로 가 왕징웨이를 치료했다. 대동아회의가 끝난 1943년 11월 18일과 21일, 쿠로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일본 의료진들은 두번에 걸쳐 왕징웨이의 신체를 검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35년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8년이라는 세월동안 제거하지 못했던 총알의 상태를 확인하여 탄환이 뼈를 이미 뚫고 박혀있는 상황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일본 의료진들은 "빼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본 의료진들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는, 기술의 발전으로 왕징웨이의 등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것은 아니었으나,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왕징웨이의 몸에서 총탄을 억지로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이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외과수술은 , 특히 왕징웨이의 상태처럼 신경부분과도 연관된 수술은 가볍게는 마비, 크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점점 커져가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을 하루 빨리 제거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지나파견군 군의장 (軍醫長) 이었던 모모이 나오미 (桃井直幹) 중장을 만나 검사를 부탁했다. 모모이 나오미는 자신의 부하인 난징 제1육군병원장이었던 고토 료우에 (後藤鐐枝) 소장에게 자문을 구해 왕징웨이의 총알을 제거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모모이와 고토는 연구 끝에 제거가 가능할것 같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이러한 고통속에도 왕징웨이는 1943년 말까지 활발한 행동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활동인 중일동맹조약의 체결 (1943.10.30) 뿐만 아니라 대동아회의 (1943.11.5) , 대동아전쟁 3주년 담화(1943.12.8)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1943년 12월 11일의 중국국민당 당무대회였다. 그리고 그 사이 이전 등에 박힌 총알로 인한 통증은 더더욱 증세가 악화되어 1943년 12월 19일, 왕징웨이는 결국 난징 제1육군병원에서 탄환 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이시기 다리가 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1943년 12월 19일, 8년이 넘게 왕징웨이를 괴롭혀왔던 마지막 총탄은 겨우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수술은 19일 오전 11시부터 진행되어 20분만에 끝이 났다. 8년이 넘는 세월동안 왕징웨이의 몸에 있었던 총알은 검게 변했으며, 적출과정에서 심지어 두동강 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수술을 마치고 다음날 오전에 퇴원하여 베이지거 (北極閣,북극각) 라는 별칭이 있었던 쑹쯔원의 전 난징공관으로 향했다. 이곳을 선택했던 것은 공관의 별칭이 되었던 베이지거 지역은 난징의 외곽으로 요양에 적합했고, 동시에 건설당시 난방과 보온을 신경쓴 건물이었기에 겨울 요양을 해야 하는 왕징웨이에게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옛 쑹쯔원 (宋子文) 의 난징 공관. 북극각 (北極閣)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쑹쯔원이 장제스를 따라 충칭으로 가며 공관이 비게 되자 난징국민정부는 자신들이 이곳을 사용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가장큰 고통의 원인이라 생각했던 총알이 제거된 만큼, 왕징웨이가 빠르게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저오포하이도 수술다음날이자 공관으로 돌아온 12월 20일의 일기에서 "왕 선생은 어제 아침에 이미 총알을 꺼내어 오늘 아침에 퇴원하여 북극각으로 이주하였다. 경과가 양호하나 오후에는 여전히 열기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라고 쓰고 다음날의 일기에서도 "아홉시에 왕 선생이 일어났다..왕 선생에게 물어보니, 정신은 멀쩡하고, 정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의사가 말하길 7일 안에 입도 편하게 움직이게 될것이고, , 10일 안에 완치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만 왕(汪) 선생이 당뇨병이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하였다. " 라고 쓰는등 왕징웨이의 가족들과 측근들, 그리고 왕징웨이의 수술을 담당했던 일본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43년 12월 23일에는 수술의 실밥을 풀었고 이날 왕징웨이와 함께했던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회복이 잘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등 왕징웨이와 그의 주변인물들은 그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왕징웨이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23일 실밥을 풀은 이후, 왕징웨이의 상태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1일, 왕징웨이는 아픈몸을 이끌고 새해 연설을 끝냈다. 하지만 이 새해를 맞이한 이후 왕징웨이는 수술전처럼 걷기 힘들어하며, 더욱 피로를 느끼며 더욱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1944년 1월 9일, 국민정부의 참전 1주년을 맞이한 행사에 왕징웨이는 참가했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는동안 고열이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하타 슌로쿠 (畑俊六) 지나 파견군 사령관 및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과의 연회가 점심에 계획되어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취소하지 못하고 왕징웨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 다음날에도 고열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도 연회가 계획되어 있어 결국 이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왕징웨이의 주치의들은 이 고열이 수술시 제거되지 못했거나 새로이 발생한 고인 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모든 정무를 멈추고 다시 요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21일까지 왕징웨이는 잠을 자면서 발이 떨리는 증상이 있었고, 이 때문에 잠에서 여러번 깨어 앉아 다리를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드는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왕징웨이는 제대로된 수면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결국 1월 25일 시점에는 다리를 비롯한 하반신이 거의 마비되다 싶이하여 걸을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쿠로카와를 다시 난징으로 보내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하게 했다. 그리고 쿠로가와는 왕징웨이가 총알을 제거한 후 다리가 마비된 것이 척추가 신경을 압박하여 다발성 골수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나고야 제국병원으로 전보를 보내어 3월 1일에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신경외과 교수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가 난징을 방문하여 왕징웨이를 다시한번 진단했다. 사이토는 진단결과 쿠로가와가 진단한 것처럼 다발성 골수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하루 빨리 일본으로 가 치료를 받기를 권했다. 사이토는 일본의 병원에서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존재하나 열악한 난징의 병원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늦지않게 하루빨리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이에 왕징웨이측은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징웨이의 전용기 하이지엔호 (海鶼號), 이는 1941년 일본이 왕징웨이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1943년 3월 3일 오전 9시 30분, 왕징웨이는 구급차에 탑승하여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난징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중을 나온 저우포하이, 천궁보등 주요 인사들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왕징웨이는 일본으로 출발하기전, 친필로 글을 적어 " 공무는 천궁보, 저우포하이에게 맡겨라 (公務交由公博、佛海代理) " 라고 쓴후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천비쥔을 비롯한 가족과 수행원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출발했다. 이때 일본은 A6M 4대를 사용하여 왕징웨이가 탄 하이지엔호를 엄호하게 했다. 나고야에 도착하자 일본은 나고야 주둔 일본군으로 하여금 왕징웨이를 경호하게 했다. 왕징웨이는 나고야 제국병원의 4층 전체, 그리고 3층의 일부를 사용하게 했는데, 이는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수행원들이 머물 공간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던 매화 (梅花) 에서 따온 암호명인 매호(梅號) 라는 암호명을 부여하였다. 이는 왕징웨이의 보안과 왕징웨이의 소식이 함부로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왕징웨이를 담당하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나고야 제국병원 바로 근처의 숙소에서 생활하게 하며 왕징웨이가 위급해지면 바로 현장으로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매호, 즉 왕징웨이를 담당하는 의료진은 기존의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해왔던 쿠로가와와 사이토를 중심으로, 다카기 고지 (高木寬治) 도쿄 제국대학 의학교수, 나고야 제국병원장, 미야 야스오 (三矢晨雄) 교수를 비롯한 당대 일본 의료계의 최고 권위자를 모았다. 사이토 마코토 (齋藤真) , 그는 왕징웨이의 치료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로, 덩치가 커 간호사들은 항상 그를 무서워했다 전해진다. 특이한것은, 사이토는 수술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항상 나막신을 착용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온 다음날인 1944년 3월 4일, 사이토를 중심으로 한 의료진은 왕징웨이에게 추궁절제술 (椎弓切除術, 척추뼈를 일부 제거하여 척추의 종양, 통증등을 완화하기 위한 시술이다. ) 를 실시하였다. 4번~7번 흉골 일부를 절제한 이 수술은 1시간 20분가량 진행되었는데, 수술이 완료되자 왕징웨이는 하반신이 다시 반응하며 다시 걸을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의료진들에게 감사인사를 표했다. 수술과 동시에 왕징웨이의 총탄 근처의 조직에 대한 분석도 행해졌다. 조직 분석의 결과, 사이토와 쿠로가와가 우려했던대로 다발성 골수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종양의 모습은 악성종양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의료진측은 왕징웨이측이 걱정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알리지 않았다. 일본에 온 후 이루어진 첫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것 처럼 보였다. 왕징웨이는 수술후 첫주에 스스로 무릎을 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양발과 다리의 근육이 증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증세 호전에 왕징웨이와 그의 가족은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당뇨병도 앓고 있었던 만큼, 회복은 더욱 더뎠다. 천비쥔은 왕징웨이가 증세가 악화될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이에 직원들은 천비쥔을 데리고 주변으로 가 버섯을 캐오곤 했었다. 1944년 5월 4일, 왕징웨이는 병실에서 진갑 (進甲), 즉 61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생일날 왕징웨이는 미소를 보였으며 기운이 넘쳐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진갑에 만주국에서도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6월 5일에는 추민이가 병문안차 나고야를 방문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병실에서도 글을 작성하여 난징측에 전달하는등 이 시점까지 왕징웨이는 병세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더욱 일본측에 불리해져가고 있었고, 일본은 전투에서 계속패배하고 자원공급이 어려워지면서 자원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자원난은 왕징웨이가 있는 나고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에게 매일 닭고기, 돼지고기, 죽순, 시금치와 같은 식단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당뇨병이 있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진 왕징웨이의 식욕은 줄어들대로 줄어든 상태라 왕징웨이는 많은 식사를 하진 않았다. 또한 왕징웨이의 병은 섬세한 온도의 관리를 요구했다. 겨울철에는 자원난에도 불구, 석탄을 동원하여 왕징웨이의 병실을 24시간 난방을 시키는 한편, 더운 여름철에는 규슈에서 냉방기를 급수하여 냉방을 실시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오랜시간을 병실에서 보내며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 있었고,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병세는 완전히 호전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징웨이는 욕창이 발생했으며, 헤모글로빈 수치가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징웨이는 O형으로, 이 때문의 같은 혈액형을 가진 자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수혈을 받았지만, 수치는 2~3주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의료진측도 왕징웨이가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으며, 그 증세는 날이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왕징웨이측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8월 초가 되자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저우포하인은 1944년 8월 8일의 기록에서 "일본 대사가 왕선생의 병세가 심해 아마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급히 전했다. 라고 하였고, 이에 8월 9일 난징을 출발, 8월 10일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 왕징웨이를 만난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우포하이는 반년사이 병세가 악화된 왕징웨이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왕징웨이와 대화를 끝낸 후 저우포하이는 그의 아내인 천비쥔과도 대화를 나눴다. 저우포하이는 8월 10일의 기록에서 " (천비쥔은) 왕선생의 자리를 다른이가 대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것 같다" 라고 서술하며 천비쥔이 왕징웨이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음에도 왕징웨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완전히 놓아선 안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9~ 10월 사이 왕징웨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맥박수가 분당 90~110정도가 되어 불안정해졌고, 기침은 더더욱 심해졌다. 의료진들은 왕징웨이가 폐렴이나 심부전증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여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의 몸은 더욱 약해져갔다. 왕징웨이는 1944년 10월 10일 쌍십절 (중화민국 국경) 행사를 위한 훈시를 작성하여 전달했는데, 이는 왕징웨이가 행한 마지막 대외활동이 되었다. 왕징웨이는 말년에 《육십자술 (六十自述) 》 이라는 시를 지었다. 내용은 왕징웨이 자신이 지나온 60 평생을 회고 하는 내용이었다. (왕징웨이는 당시 61세였다. ) 六十年無一事成,不須悲慨不須驚 60년동안 하나 이룬게 없으나, 슬퍼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네 尙存一息人間在,種種還如今日生 아직 살아 세상에 있으니 온갖것이 아직 지금 살아있는 것만 같네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나고야. 미군의 공습은 왕징웨이가 있었던 나고야 제국병원도 위협했다. 1944년 11월 8일, 의료진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이날 나고야에는 미군의 공습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왕징웨이의 병실이 있던 나고야 제국병원 또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계속되는 공습에 의료진측은 결국 왕징웨이를 지하 방공호로 옮기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왕징웨이에게는 독으로 작용했다. 당시 나고야의 11월 날씨는 추웠으며 이는 왕징웨이 같은 환자들에게는 더욱 취약했다. 앞에서 보았듯 왕징웨이는 특별관리대상인만큼 일본으로 부터 석탄을 지원받아 난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지하방공호에는 이러한 난방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추위속 왕징웨이는 괴로워 했고 결국 왕징웨이는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또한 열이 40도까지 오르게 되면서 왕징웨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0일 오후, 왕징웨이는 몸을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천비쥔과 가족들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쿠로가와가 뛰어와 그를 진찰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이시점에서 왕징웨이는 누워있는것도 힘들어 일본이 특수틀을 제작하여 몸을 맞춘 상황이었다. 이틀전인 11월 8일,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일본측으로 부터 왕징웨이의 병세가 좋지않으니 하루 빨리 일본을 방문하기를 바란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11월 16일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측은 다시 전보를 보내 재촉했고, 그 결과 이들은 일정을 수정하여 11월 13일 왕징웨이를 보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이러한 동료들을 차마 보지 못한채,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야한다... (我要回中國....)" 라는 희미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병실에는 적막과 함께 슬픔이 가득했다. 천비쥔은 울부짖었고 함께 있던 쿠로가와 또한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나고야 비행장으로 옮기는 운구차 행렬. 왕징웨이의 유해는 사망 이후 방부 처리가 이루어졌고, 왕징웨이의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구차에 실렸다. 1944년 11월 12일 오전, 왕징웨이의 유해는 나고야 제국병원을 떠나 나고야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고야 비행장에는 도조 히데키와 고노에 전 총리대신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마중을 나와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DC-3 에 실리는 왕징웨이의 유해.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힌 그의 관이 일본의 히노마루가 그려진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은 왕징웨이와 그의 정권의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요소다. 왕징웨이의 유해는 중국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문양으로 덮혔다.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DC-3 수송기는 나고야를 출발, 1944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 청천백일문양이 보인다. 왕징웨이의 유해가 난징에 도착한 11월 12일은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쑨원의 탄생일이기도 했다. 1943년 11월 12일 오후,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의 유해가 도착했고, 난징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잠시동안 난징국민정부의 대예당에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다. 비행장에 내려서도 천비쥔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비행장에는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있었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하자 이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날 난징국민정부는 애전위원회 (哀典委員會)를 조직하여 앞으로 치루어질 왕징웨이의 장례식 행사 준비에 나섰으며, 동시에 국민정부 지역에 한달간 조기를 게양하게 하고 일주일간 주요 오락행사를 중지하게 했다. 이날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경성의 중화민국 영사관에서도 오후 1시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자리에 조선 총독은 직접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사람을 보내어 자신 대신 총독의 이름으로 행사에 참가하게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주요 요인들, 주요 경제계 인사들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 화교사회가 왕징웨이 정권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조선 화교사회도 모두 조기를 게양했다. "우리의 최고영도자 왕주석 서거" 왕징웨이 정권의 선전부에서 운영하던 언론이었던 신중국보 (新中國報) 의 1944년 11월 13일자 기사. 대중들에게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1944년 11월 13일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난징국민정부 선전부는 이날 공보를 발표하여 왕징웨이 주석이 사망했으며, 유해는 난징으로 돌아왔고 차후 애전위원회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당시 왕징웨이의 사망소식은 일본과 조선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필리핀 방어전과 본토폭격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화평운동과 1940년 정부수립, 1941년 방일 당시 일본-조선 신문들의 1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왕징웨이는 마지막에는 단신뉴스칸에서 그 존재감을 피력할 뿐이었다. 조기가 게양된 난징의 모습. 왕징웨이의 유해가 돌아온 다음날인 1944년 11월 13일, 왕징웨이의 유해를 임시봉안한 국민정부 대예당에서는 간단한 형식으로 왕징웨이의 후계자인 천궁보의 대예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천궁보를 중심으로 하여 왕징웨이의 납관식 (納棺式) 이 거행되었다. 국민정부 대예당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왕징웨이의 초상화가 배치되었고, 그 양옆으로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들 및 쇼와 천황을 비롯한 우방국들에서 보내온 조화들이 위치 해있었다. 천비쥔을 비롯한 왕징웨이의 가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천궁보는 행사를 진행했고 모두가 일어서 국가를 부른뒤 묵념을 통해 왕징웨이를 기렸다. 천궁보는 이후 조문을 읽고 왕징웨이의 유해를 새로운 관에 넣으면서 행사를 마무리 했다. 왕징웨이는 이를 통해 화려하게 꾸며진 새 관에 안장될수 있었다. 매화산 (梅花山). 중산릉과 명 효릉 사이 위치한 이 언덕에는 약 16,000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있다고 한다. 1944년 11월 14일, 난징국민정부는 국민정부명령 (國民政府命令) 을 통해 왕징웨이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진행할 것이며, 묘가 위치할 자리는 국부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릉과 명 효릉(明孝陵) 사이의 매화산(梅花山) 으로 결정했다. 매화산으로 결정한 이유는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매화가 가득 피어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전 왕징웨이가 좋아하던 장소였으며, 왕징웨이가 그렇게 존경하던 국부 쑨원이 있는 중산릉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1944년 11월 18일의 중앙정치위원회에서는 왕징웨이의 유해를 매화산에 가매장 (假埋葬)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 왕징웨이 정권이 처해있던 상황과 관련 있다. 본래 왕징웨이 정권측은 5000만 위안 가량 (저비 기준) 의 예산을 투입하여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하게, 여러 부대시설과 함께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자원난도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중산릉과 같은 대규모 건축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중앙정치위원회는 이때문에 동시에 왕징웨이가 염원하던 화평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후, 정식적으로 제대로된 국장을 다시 치뤄 제대로된 새로운 묘에 다시 모시기로 결정했다. 국부 쑨원도 처음에는 제대로 모셔지지 못했으나 이후 중산릉에 다시 모셔진것 처럼, 왕징웨이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43년 11월 22일에는 왕징웨이의 묘 건설이 거의 완성되어 유해를 옮길수 있는 환경이 되었고, 이에 1943년 11월 23일 오전 6시 30분, 난징국민정부의 주요인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국 대사들등 여러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운구식이 진행되었다. 국민대예당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10시 30분, 매화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징웨이의 운구행렬. 화평건국군 뿐만 아니라 난징시 경찰등 수많은 조직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매화산에 마련된 왕징웨이의 묘의 안장식 현장모습. 묘 예정지로 들어가는 왕징웨이의 유해. '왕주석의 묘 (汪主席之墓)' 라고 간판이 적혀있다. 관을 묻기전 왕징웨이의 관의 모습. 이는 왕징웨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0시 30분, 유해가 묘에 도착하자 마자 안장식 (安葬式) 이 거행되었고, 이어 11시에는 왕징웨이의 관을 정식으로 묘에 묻음으로서 왕징웨이의 장례식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왕징웨이의 묘 (뒤) 옆에 매화나무를 심고 있는 추민이 일행의 사진. 이 사진은 왕징웨이의 묘를 다룬 몇 안되는 사진중 하나이다. 왕징웨이의 묘 모습 (1945년 초). 웅장한 중산릉의 모습에 비하면 초라할 따름이다. 왕징웨이 묘의 비석에는 단순하게 '왕징웨이의 묘 (汪精衛的墓)' 라고만 새겨졌고, 묘비에는 그가 좋아하던 시 '매화(梅花)' 가 함께 실렸다. 梅花 매화 梅花有素心,雪月同一色 매화의 마음은 눈 위에 비취는 달빛처럼 새하얗네 照徹長夜中,遂令天下白 밤새도록 빛나니 마침내 천하를 밝히게 하네 앞에서 보았듯 난징국민정부는 본래 왕징웨이의 묘를 중산릉과 같이 거대한 규모로 건축하기를 희망했으나 현실적인 상황때문에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묘에는 묘와 조그만한 사당과 기둥들만이 건설되지 못하게 된다. 잘 알려졌듯이 , 왕징웨이의 묘 건설에는 약 5t 가량의 철근과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재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천비쥔이 중일전쟁 이후 자신의 남편인 왕징웨이의 묘를 훼손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달은 만큼 공습을 우려하여 이렇게 건설했다는 설이 혼재한다. 하지만 장제스와 사이가 나빴던 천비쥔이 이러한 튼튼한 무덤을 건설하기를 원했다는 점, 왕징웨이 본인도 이와 같은 건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욱 가능성 높은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천궁보가 이끌었던 난징국민정부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난징국민정부가 해산됨에 따라 왕징웨이의 묘도 확장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라이벌이자 민족의 반역자인 왕징웨이의 묘가 존재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항일전쟁 승리후 허잉친을 시켜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게 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이러한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을 당시 속으로 못마땅해 했지만, 1946년 1월, 충칭에서 다시 난징으로 돌아오기로 계획했던 장제스와 요인들이 중산릉을 참배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의 묘를 보게되었을 때 생길 파급을 막기 위해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허잉칭 자신도 왕징웨이의 묘를 없애는 것에 대한 완전한 찬성을 가하지 않았던 만큼, 다른이를 시켜 이를 처리하게 했다. 1946년 1월 15일, 허잉친은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74군의 구유달(邱維達), 당시 난징 시장이었던 마초준(馬超俊), 육군본부 공병지휘관 마숭육(馬崇六), 육군본부 참모장 소의숙(蕭毅肅) 등이 참가했다. 허잉친은 회의에서 "그대들이 한 가지 일을 협의해 달라. 다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 어디에든 새어나가서는 안된다. 위원장이 곧 '환도'할 것이다. 왕징웨이 이 대매국노의 분묘가 여전히 매화산에 있다. 손총리의 능묘와 나란히 있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만일 왕징웨이묘를 없애버리지 않고, 위원장이 '환도'했을 때 보게 된다면 반드시 진노할 것이다.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관심으로 골치아플 것이다. 여러분이 자세히 연구해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반드시 타당한 처리방법을 찾으라." 라고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소의숙은 이러한 허잉친의 뜻이 사실이며, 이는 충칭에서 이미 승인이 난 내용이며 10일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여 장제스가 오기전에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구유달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유달은 임무수행을 위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매화산 일대를 '포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매화산 근처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위한 것으로, 헌병사령부와 난징시정부도 이에 협력했다. 구유달은 자신의 공병부대를 통해 왕징웨이의 묘를 둘러본 후, 이 묘를 처리하기 위한방법은 '폭파' 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폭파 계획을 준비했다. 구유달은 묘의 폭파를 위해서는 150kg 가량의 TNT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이를 준비했다. 구유달은 폭파계획을 위하여 계획 3일전부터 주변의 출입을 엄금하고 음파장치를 준비하여 폭파시 나타나는 소리를 덮으려 준비하였다. 구유달은 두단계로 나누어 폭파의 준비를 하였다. 1단계는 밖을 덮고 있는 콘크리트 외벽을 제거하는 것이고, 2단계는 관 자체를 파괴하여 굳게 닫힌 관을 여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구유달은 의문을 가졌다. 허잉친은 분명 무덤을 '옮기라' 라고만 지시하였는데 어찌하여 죽은이의 관을 열려고 하는 것인가? 구유달은 허잉친의 '옮겨라' 라는 말은 수사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파괴하라'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왕징웨이 묘의 폭파전 모습. 20일, 구유달은 폭파를 계획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월 21일에야 폭파가 진행되었다. 폭파는 성공적이었다. 왕징웨이의 묘는 산산조각 났으며 왕징웨이의 관 또한 열리게 되었다. 관두껑을 열자, 왕정위의 시신은 청천백일기로 덮여 있었다. 시신은 난징국민정부의 문관예복이고, 청색장포마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예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수(大綏)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갈색에 흑반점이 있었다. 방부제를 사용한 만큼 시체를 거의 썩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관에서는 천비쥔이 적은 혼혜귀래(魂兮歸來 )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혼혜귀래는 혼이 장소를 잘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것으로 생각된다. 폭파를 함께 했던 마조춘, 마숭육등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살펴본뒤, 마숭육은 공병대장을 시켜 왕징웨이의 시신을 트럭에 실게 했다. 이들은 시신을 청량산 (淸凉山, 난징의 서쪽) 으로 옮겼고, 그날 새벽 은밀하게 왕징웨이의 시체와 관을 불태워 화장시켰다. 이로 인해 한때 민국의 2인자이자 쑨원의 후계자로 점쳐졌던 왕징웨이는 재도 남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구유달의 공병부대는 묘 잔해를 치우고 평탄화작업을 진행했고, 그결과 실제 장제스가 방문했을 때는 이곳이 자신의 라이벌이 묻혀 있던 묘라는 것도 알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옛 왕징웨이 묘 자리에 정자를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매화산의 관매헌 (觀梅軒) 이다. (관매헌은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겉으로만 보면 이곳이 왕징웨이의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긴 어렵다.) 왕징웨이의 묘자리에 세워진 관매헌 (觀梅軒)의 모습. 마무리하며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으로 취급받는, "1935년의 암살미수사건에서 제거하지 못한 총알이 독이되어 곪아아있다가 1943년 말 증상이 악화되었고, 총알을 제거했으나 다발성 골수종이 발생했고, 이 다발성 골수종이 악화되고 당뇨병등 기존의 지병등이 여기에 추가적인 악영향을 끼치며 건강이 악화되며 결국 사망했다. " 라는 이론을 다룬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 큰 논쟁은 왕징웨이를 사망으로 이끌게 한 1935년의 암살사건에 장제스가 개입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천비쥔이 저격사건 직후 장제스를 비난했다는 점, 장제스가 '우연히' 저격 현장에 없었다는 점등은 저격사건의 배후로 장제스를 지목하게 한다. 당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경쟁관계에 있었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것도 장제스 였으니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제스 배후설은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만큼,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죽였을 것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긴 어렵다. 애초에 장제스 본인은 앞장서서 1935년 당시 왕징웨이를 병문안을 갔으며, 매일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가게 하고 치료비 및 위문금을 보내려 했으며, 앞장서서 사건의 해결을 주도했던 이였다. 또한 역사적 맥락상으로도, 왕징웨이는 자신의 경쟁자일지언정 자신에게 불필요한 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죽일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서 " 정신적 충격은 총알이 폐에 박힌 것보다 몇 배나 더 고통스러운데, 이번 총알이 차라리 내 가슴에 박혔다면 내 마음의 편안함이 얼마나 빨랐을지." (精神之受打擊,其痛苦較甚於槍彈之入肺腑數倍,此次之彈如穿入於我心身,則我心安樂必比甚何等事快也。) 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받는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장제스 배후설은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그 가능은 낫다. 두번째로 존재하는 논쟁은 일본암설설 - 일본책임설이다. 이는 한국 작가 김형석 (1920~) 의 글 '고독이라는 병'에서도 나타난다. "태평양 전쟁이 격심했을 때, 장제스 총통과 갈라져 일본측과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애국자 왕징웨이는 이 새의 이름인 정위 (精衛) 를 자기의 아호로 삼았다. 그는 스무살 전후의 젊은 나이에 웅지를 품고 황제의 수례에 폭탄을 던져 사형을 언도 받은 바 있었으며, 일평생 민족을 위해 살다가 끝까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가 10억을 헤아리는 무지하고 불행한 중국 백성들에게 보람있는 봉사와 아낌없는 희생을 각오했을 때, 스스로를 이 전설의 산새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새의 약한 날개와 한두알의 작은 돌에 비하여 바다는 너무나도 넓고 깊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한 배경은 여러가진데 첫 번째는 위에서 보았던, 왕징웨이의 탄환 적출 수술을 집도하였던 모모이 나오미와 고토 료우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쿠로가와도, 독일의 의사들도 뺄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 했으나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강행해 왕징웨이의 죽음을 초래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중엔 모모이와 고토가 이를 의도적으로 진행했음을 증명할 서류는 존재하지 않고, 모모이와 고토 모두 태평양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의 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책임설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언급되는 것이 1944년 11월 8일의 왕징웨이를 지하방공호로 옮긴 선택이 왕징웨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것이 일본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또한 증명된 바 없고 위에서 보았듯 왕징웨이의 병세는 이미 그전부터 악화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습이라는 상황속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호행을 무작정 비판하기도 어렵다. 또한 왕징웨이의 몸에 박힌 총알이 몸에 영향을 끼치는 '납탄' 이 아니며 몸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 '금속탄'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여기선 총알은 애초에 왕징웨이의 죽음에 기여한 바가 적으며, 일본이 오히려 왕징웨이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주장이 있다. 천비쥔의 경우, 전후 일본이 양의학을 고집하는 바람에 왕징웨이가 죽었다고 주장한바가 있고, 왕징웨이의 가족들은 일본이 왕징웨이를 독살했으나 이를 다발성 골수종이란 이름으로 덮으려 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위에서 보았듯 의료진들은 치료초기 왕징웨이의 상태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바가 있고, 이러한 두루뭉실한 서술은 가족들로 하여금 오히려 의혹을 가지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왕징웨이의 죽음은 확실한 결론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글에서는 가장 정론을 다루었지만, 위와 같은 음모론의 내용을 서술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주장도 존재한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중간에 서술하지 않은 것은, 서술에 있어서는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라 할수 있다. 번외로, 천비쥔은 왕징웨이의 사망후 자신의 남편을 그동안 치료해준 나고야 제국병원측에 감사를 표하며 매화나무 3그루를 기증했다. 그리고 이중 2그루는 아직 나고야에 남아있다. 나고야대학 오유키 의료센터 (大幸医療センタ) 뒤에 위치한 '왕징웨이씨 기념의 매화 (汪兆銘紀念の梅) 의 모습. 본래 3그루가 있었으나 한그루는 시들어 현재남은건 2그루 뿐이다. 또한 왕징웨이의 묘는 폭파되어 중국대륙에서 사라졌지만, 일본 도쿄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는 묘비가 존재한다. 일본 도쿄 종태원 (宗泰院) 에 존재하는 왕징웨이의 묘. "애국자. 쑨원의 수제자, 동아의 위인 왕자오밍 선생 여기에 잠들다." 라고 적혀있다. 묘비 뒤에는 왕징웨이에 대한 설명과 자신이 1944년의, 이제는 이미 폭파되어 사라져버린 왕징웨이의 묘 조각을 발견하여 1988년 11월 10일 이곳에 묻어 기록한다라고 적혀있고, 묘비의 앞에는 중화민국의 국화이자 왕징웨이가 가장 좋아했던 매화가 새겨져 있다. 이 묘비를 건설한 일본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묘비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출처 :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2014 김형석, 『고독이라는 병 』, p 217 , 1960 蔡德金, 『汪精衛之死』, 1998 朱子家, 『汪政權的開場與收場』 , 2020 『中国文化』, 第39期, 2014 『僑協雜誌』, 第156期, 2016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https://www.koreanhistory.or.kr/totalSearch.do 일본뉴스 233호 / 236호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361_00000&chapter=004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300364_00000&chapter=001 신중국보 1944년 11월 13일자 : https://archive.org/details/xin-zhongguo-bao-1944.11.13 동아일보 / 조선일보 1935년 11월 ~1936년 3월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1%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9%95%EC%94%A8%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9%2C%22startDate%22%3A%221935-01-01%22%2C%22endDate%22%3A%221935-12-31%22%7D 추민이의 사진 : https://cotca.org/items/loc-0004/ 장제스의 일기 : https://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7073877 도쿄 왕징웨이의 묘 사진 : https://nkurashige.wordpress.com/2021/12/06/%E6%B1%AA%E5%85%86%E9%8A%98%E3%81%AE%E5%A2%93/ 왕징웨이의 매화 사진 : https://x.com/hironakaisseis1/status/1765602577008431530 나고야 공습 / 쑹쯔원 공관 / 그나이제라우 /포츠담 : 영문판-중문판 위키피디아 각 항목
- 대한민국 임시정부시기 잡지 한민 (韓民) 의 왕징웨이 관련 기록 (1940)
잡지 한민(韓民) 의 표지. 는 194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국민당 선전부의 엄항섭(嚴恒燮)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중국서 발간한 월간종합지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이 본 잡지에 참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하였다. 본 자료는 공훈전자사료관 (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 의 자료 중에서 왕징웨이 정권 & 왕징웨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역적 왕징웨이 괴뢰조직의 죄상 석촌 (石村)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역적 왕징웨이 의 괴뢰조직은 지난달 30일 난징에서 왜적의 연출로 그 막을 올렸다. 이 천고의 추한 연극은 가물거리는 적의 ‘마지막 방패’임을 폭로하고 온 천하에 알려진 역적 왕징웨이의 죄상이 산송장의 짓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우리들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역적 왕징웨이가 일본과 내통하여 염전(艶電, 여기를 참조 )을 발표한 때는 이미 민족과 국가와는 절교한 것이다. 그는 황제(黃帝)의 자손이라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온갖 멸시를 당함이 마땅하다. 이 반역행위의 출현을 장(蔣)위원장은 “일왕밀약 (日汪密約, 1939년 12월 30일 체결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을 의미한다. 여기를 참조 ) 을 전국 군민(軍民)에게 알리는 글”에 명료하게 지적했다. “나는 몇개월 전 앞잡이 조직이 조만간 출현하리라 생각했다” 고 한 것이다. 이에 나는 통분한 나머지 비분에 떠는 열정으로 전심전력 적의 악랄한 정치음모를 분쇄하고 반역자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할 일이 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적이 왜 왕정위를 끌어들였겠는가?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항전에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연구한 이후에 비로소 정확하게 노력방향을 잡아야 하겠다. 왕징웨이의 무능함을 우리뿐만 아니라 적도 명백히 알고 있다. 적의 대변인실이 최근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들 역시 ‘왕정권( 汪政權) ’이 질서정연한 중앙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또한 4년에 걸치는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지 실제로 이 시국을 수습할 능력이 있는가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적은 이미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하리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공연히 골치거리를 하나 더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가? 왕징웨이가 말하는 평등호혜(平等互惠)·화평반공(和平反共)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적은 원래 기질이 교활하고 악랄하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적이 연출하는 꼭둑각시 연극을 볼 것 같으면 3가지 음모가 숨어 있다. 1. 자국민을 기만함 적이 그들 국민에게 한 거짓선전을 보자. “중국은 비옥한 땅과 광물이 무한정하다. 하지만 국방력이 미약하고 민족의식이 저하되어 중국을 정복하기만 하면 일본의 난국은 자연히 해결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용하고 아무리 취해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3개사단의 병력 정도로 3개월이면 중국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하여 민중의 침략심리를 조성했다. 루거우차오 이래 적은 많은 병력과 경비를 투입해서 연안 부근을 점령했다. 그러나 우리의 장기항전은 적을 한층 진흙 속으로 몰아넣어 전쟁의 종결이 요원한 것이다. 적의 국내 사정은 날로 더욱 심각해졌다. 물자는 결핍하고 생산은 저조하여 경제가 날로 무력해지니, 공채를 증발하고 세금이 과중해져 국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 졌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날로 많아지고 장정은 줄어들어 병력을 보충하기도 곤란해졌다. 이렇게 되자 그 국민들은 전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몽상임을 알게 되고 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니 반전운동은 점점 만연되었다. 이 때에 적은 ‘인심안정정책’으로 왕징웨이를 무대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자기국민을 기만함으로써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역적 왕정위의 괴뢰조직의 성립이 중국사건을 매듭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했다. 그러나 이 계산은 불가능한 것이다. 적의 전 수상 아베(阿部)는 일찌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신중앙정권의 성립이 사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240개 사단의 정규군과 수백만의 유격대가 있기 때문이다.” 적의 수뇌층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자기네 일본 국민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고 보는가? 기실 적의 운명은 우리 손아귀에 쥐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교묘한 재주를 피워도 일은 악화만 되어 가는 것이다. 2. 세계 각국을 위협 적의 대륙정책은 중국에, 정식이권을 획득한 제3국으로서의 위치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을 완전 독점하고 나아가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이다. 적이 발표한 성명을 볼 것 같으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건설’, 중국에서의 제3국의 권리 존중은 사탕발림의 말일 뿐으로, 이는 ‘일왕밀약(日汪密約)’을 통해 적의 악랄한 음모라는 것이 세계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그러므로 허무맹랑한 선전을 아무리 해보아도 한층 어긋날 뿐이다. 때문에 적은 역적 왕징웨이를 끌어들여 제3국의 권익을 존중하는 체함으로써 장강을 개방하고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각국과 접촉하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점령지역내에서 일어난 반영운동이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무모한 짓은 모두 적의 간교한 계책임을 잘 알고 있다. 결코 이것이 세계 여러 나라를 위협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도 당하고 있을 나라는 없는 것이다. 미 국무성은 왕정위의 괴뢰조직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영국의회는 충칭의 국민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세계여론을 보아도 적과 왕(汪)의 괴뢰조직의 음모는 명백한 것이다. 3월 3일자 워싱턴 ≪명성(明星-The Morning Star)≫지의 언급은 “도쿄측에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성립을 널리 선전하는 것은 중국을 중국에 되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는 이미 ‘자유중국’을 속일 수 없고, 또한 세계 각국도 속일 수 없다.” 고 했다. 1일자 상해대미(大美)석간도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대해서, “반드시 새로운 계략이 있을 것인데, 문제는 외국을 배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25일자 ≪진리 (眞理)≫지 논설은 “난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한 연극이다. 일본 내부의 형세가 날로 약해져 가는 것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고 왕의 괴뢰조직을 일축했다. 이상의 언급은 국제적으로 일본을 대신해서 조종(吊鍾)을 울려 준 것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또한 세계는 정의와 화평의 우방이며, 일본의 어리석은 위협은 절대 받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이화제화(以華制華) 정책 적은 중국을 침략하여 많은 괴뢰조직을 만들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임시정부’, ‘유신정부’로써 광주(廣州)·무한(武漢)·하문(厦門) 등지의 괴뢰조직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아직도 충분치 못했단 말인가? 적의 침략수법(手法)은 조금씩 먹어 들어가는 식이다. 피차 마찰을 피하면서 좋게 조금씩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중앙정권’ 이라고 하는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왜 내세워야만 했나? 역적 왕정위는 중국국민당과 국민 정부의 이름을 도용해서 새로운 그의 당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위 ‘화평운동’ 이니뭐니 하지만 이는 ‘중국영토의 주권존중’,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은 없음” 등의 구호가 사실인듯이 보이기 위한 적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도구인 것이다. 바로 이화제화(以華制華), 이당제당(以黨制黨)의 악랄한 술책이 그 목적하는 바이다. 장위원장은 ‘일왕밀약고전국군민서(日汪密約告全國軍民書)’에서 역적의 간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는 오늘 이후 반드시 국부적 화해로써 전체적 화해를 이루자”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화평운동’에 주력할 것이다. 그는 매수한 무리로 괴뢰정부를 조직해서 ‘일지관계조정강요’의 골자를 수행하려 할 것이다. 제3국이 괴뢰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더라도 복잡한 사건이 생기면 많은 국가가 그의 괴뢰정부와 실제로 거래가 있을 것이라 하고. 아마도 망상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부적 화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본군의 난징점령을 의미한다. 일본에 부분을 팔아버리고 다시 그 부분을 기초로해서, 적의 힘을 이용하여 항전하는 전군민, 망국의 노예됨을 원치 않는 이들을 없애면 전면적인 화평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망상할 것이다. 적의 야심을 따라 완전히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 그의 간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굳세게 항거하여 적의 음모를 분쇄하고 화평과의 타협반대만이 승리를 얻을수 있고 항전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역적의 말로를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황제(黃帝)의 자손됨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라고 말이다. 가. 중국 국민의 반역자를 보는 눈 왕징웨이는 역적으로, 도둑의 하수로 사회에 알려지기에 앞서, 국내외에 잠복하여 터무니 없는 ‘화평’ 를 선전했다. 일시적으로 생활이 곤란하고 환경이 나쁜 이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활한 유혹에 넘어가 항전에 회의를 갖는 자가 있으니, 이처럼 제 집을 도적질하는 무리는 막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숨은 걱정은 바로 이런 무리이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정치 무대에 나타났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망국의 노예됨을 원하지 않고 있고 그들을 역적이라고 보며, 같은 동포의 손을 끊는 자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유혹을 해도 국민은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적의 앞잡이를 제외한 4억 5천만 중국 동포 대부분이 순(順)과 반(反)의 행위를 엄격히 구별하며, 충(忠)과 간(奸)은 결코 병립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결코 적에 대한, 격렬한 원한과 분노로 가득찬 중국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저하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적 내부의 충돌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이 비록 일은 시작했지만 그 내부의 모순은 날로 커진다. 괴뢰 ‘임시정부’와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인 괴뢰 화북정무위원회(華北政務委員會)의 왕극민(王克敏), 왕읍, 무빈(繆斌) 등이 왕징웨이와 반목하고 있고, 표면상 취소된 ‘유신정부(維新政府)’의 양홍지(梁鴻志), 온종요(溫宗堯), 임원도 (任援道) 등도 마찬가지로 각처에서 왕징웨이를 견제하고 있다. 괴뢰 ‘몽강자치정부’의 이수신(李守信)과 괴뢰 ‘우한 정권’의 하패용(何佩瑢), 장인려, 석성천(石星川), 뇌수영(雷壽英) 등도 왕징웨이의 지배에 대한 항거가 공공연하게 또는 비밀리에 일고 있다. 이미 왕징웨이 자신의 조직에서도 진공박(陳公博), 저민의, 주불해(周不海) 등이 권리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갖 추태를 다 노출하고 있다. 적의 손아귀에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명리(名利)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의 환심을 사야한다. 따라서 당연히 서로 배척하고 견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앞잡이 조직 내부의 모순과 충돌은 점점 심해져서 결국엔 그들이 저지를 죄악을 감소시킨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적이 역적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을 내세운 이유와 작용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장(蔣)위원장의 항전 2주년 기념사에서 지시한 바를 보자. “대체로 적에 유리하다고 인정되면 모두가 우리에겐 해로운 것이다. 때문에 적이 원하면 우리는 해주지 말아야 하고, 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해야 된다. 적이 좋다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것이고, 나쁘다고 하면 반드시 좋은 것이다. 적이 하는 일체의 언행은 모두 그 반대적 입장에서 관찰하여 받아들이고 뿌리쳐야 한다”고 했다. 적의 교묘한 계책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충실히 수행하고 용감하게 매진함으로써 적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한국인의 눈에 비친 역적 왕징웨이 일파(一波) - 한민 (韓民) 제1기 제2호 나는 한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말이 들리는 바에 대해 그렇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그가 소위 염전(艶電)을 발표하고 괴뢰정권을 만든 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이미 우리의 혁명동지가 아니며 일본의 앞잡이인 적이 된 것이다. 그는 적을 끌어 들여 수십만의 자기 동포를 죽였다. 그는 앞잡이가 되자 곧 우리 한국인과 가장 친한 전우인 중국인, 어떤 의미에서는 간접적으로 몇십만 명의 한국 동포를 죽인 것이다. 이 괴뢰조직이 목적하는 바가 나라를 팔아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다. 그의 간계가 성공한다고 할 때 한중 양국의 전도는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중국 항전의 최후 승리를 한층 촉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케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은 독립과 해방을 맞게 되니, 한국인으로서 왕징웨이의 괴뢰조직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비단 관심을 가질 뿐이 아니라 또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씹지 않고서는 시원치않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에 “역적 왕징웨이의 계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길 바라고 또한 괴뢰조직의 원흉인 왕징웨이를 한국인이 능히 박살내 줄 것이며, 이는 결코 기회주의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믿어주기 바란다. 왜적의 조종을 받는 매국노의 죄악과 그 죄악이 초래하는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 중국 동지들보다는 아마도 한국인이 조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반역행위에 관한 한 매국노는 민족의 패륜아요, 인류의 저주받는 독충인 바 누구보다도 엄히 다스려져야 한다. 옛부터 우리 한국인들 중에는 의사(義士)들이 많았다. 박랑사중(博浪沙中)에서 진시황(秦始皇)을 격파한 창해 역사(滄海力士),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죽인 안중근 (安重根), 황포강(黃浦江)에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저격한 김익상 (金益相), 앵전문(櫻田門)에서 일본 천황 유인(裕仁)을 저격한 이봉창( 李奉昌),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白川義則)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尹奉吉)의사 등은 모두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한국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희망은 결코 몽상이 아니며 오래지 않아 반드시 실현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완용 (李完用)은 본래 그 조상들이 고위고관을 지낸 귀족의 후손으로 부유한 집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의지가 굳고 냉혹한 성질에 시기심이 많았다. 한국혁명의 여명기에 있어서 매우 열렬하게 수차의 정치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제법 민중의 호응도 얻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들어서자 곧 정권쟁탈에 급급하여 친러시아파의 영수가 되었다. 일본은 재빨리 이완용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그를 매수한 것이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매우 소심한 방법을 썼다. 일본의 힘을 이용할 뿐, 그들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정치 야욕에 어두운 이완용은 모르는 사이에 일본의 이용물이 되었다. 이미 발은 진흙땅에 빠져 들어가 끝내 헤어나질 못했다. 게다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이완용은 한국의 역적이라는 사실무근의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이 이러한 간계를 쓰는 목적은 2가지였다. 첫째는 이완용을 신뢰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의 언행을 의심하게 하므로써 장차 그의 사회적 신용을 완전히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고, 다음은 역적으로 몰린 이완용이 제2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여 완전한 한국의 역적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완용도 이런 일본의 간계를 몰랐으므로 자신은 종래의 애국자적인 입장에서 허무맹랑한 말로 민중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세가 나날히 약해짐을 통탄하며 친일로써 나라를 구하는게 옳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자신의 입으로 세상 소문이 사실임을 밝힌 셈이다. 민중은 이제 “이완용은 철저한 역적이다”라고 단정을 내리니 이완용 또한 민중과의 접촉을 피하게 되고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끝내 후회하지 않고, 반대로 오기가 나서 더욱 철저하게 나라와 국민을 해치고자 하였다. “일을 하지도 않고 억울하게 쉬지는 않겠다”하여 하등의 거리낄 바가 없었다. 이는 실로 뜻밖의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제일 관문이다. 그는 사리사욕을 위해 우두머리가 되고자 대담하게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러나 적의 앞잡이가 그 한사람은 아니었다. 송병준 (宋秉畯), 이용구 (李容九), 조중응 (趙重應) 등 아첨하는 무리는 각양각색으로 공을 다투었다. 그러므로 그는 “안했으면 몰라도 뛰어든 이상 남에게 뒤질 필요가 없다”고 결심했다. 이같이 하여 그는 가장 악질적인 앞잡이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게 된 둘째 관문이었다. 그는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한정없는 큰 죄를 범했다. 후에 이재명 (李在明)의 저격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 채찍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그 운명은 울고 웃을 수 있는 자유도 구속 받은 채 결국 조국을 팔아 넘겼으니 천추만대에 죄인이 된 것이다. 이제 역적 왕징웨이의 과거를 살펴보자! 그의 지나온 길이 이완용과 교묘하게 들어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흥미있는 문제이다. 역적 왕징웨이의 가계(家系)·가산(家產), 총명함·성질, 명예욕, 초기의 구국사업, 몽상적인 정권욕, 기회주의적인 친 러시아정책, 친일구국, 애국지사에게 저격당한 일 등 여러 반역의 무리[양홍지(梁鴻志)·왕극민(王克敏) 등]와 공을 다툰 일, 비밀리에 매국협정을 한 일, 이에 대한 왜적의 대우, 어느 한곳 이완용의 행로와 다른 것이 있는가? 역적 왕징웨이는 일찌기 이완용의 매국적인 궤도를 그대로 달렸는데 더구나 이완용이 철저한 매국노가 되게 한 마음의 제1, 제2 관문까지 그대로 겪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각처의 상황과 내포하고 있는 조건들이 30년 전의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도에는 광명이 있을 뿐, 결코 왕징웨이 때문에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와 이완용은 그 말로가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완용이 한국의 역적이 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히 알고 있다. 따라서 왕징웨이의 반역 목적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광적인 역적 왕징웨이가 민중을 속이려 한다면 제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누가 그를 당해 내겠는가? 만약 역적 왕징웨이가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면 이완용은 왜 한국을 구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완용은 한국의 스승을 따라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중일전쟁은 3년간에 걸쳐 그 전선이 4천킬로에 달하였다. 왜적은 현재 인적·물적·재정적인 힘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경제공황 속에 붕괴하려는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빨리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황은 더욱 확대되어 뜻하던 바와 같이 되지 않자 산궁수진(山窮水盡)한 왜적은 이때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다. 왕징웨이를 요직에 올려 난국을 적당히 대처하여 그 붕괴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소위 중국으로 중국을 제어하는 것인 바, 전쟁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하는 정책이다. 또한 적의 정부요인 요나이(米內)가 정책을 밝히기를, 군사적인 면에 덜 치중하고 힘을 분산시켜 정치 및 경제면으로 방향을 돌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역적 왕징웨이는 거의 죽어가는 왜적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키는 강심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장뇌작용을 할 수 있는지는 상관할 바 아니라도 사실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의 말은 모두 왜적이 지시하는 것들로서 왕징웨이는 무대위에서 꼭두각시역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거처는 왜적의 물샐틈 없는 감시하에 말과 행동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왜적이 그에게 준 수백만 원의 대가이다. 중국을 구하자는 그의 말은 바로 왜국을 구하자는 것이고, 그가 지껄이는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바로 노예주의인 것이다. 왜적이 중국을 침략한 목적은 바로 중국 4억 5천만 인구의 고혈을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화북(華北)·화중(華中)·화남(華南) 각 지역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화북 연락부 아래에 또 제1, 제2 경제국을 설치하고, 그 직할하에 무슨 ‘화북개발회사(華北開發會社)’·‘화중진흥회사(華中振興會社)’·‘ 중국연합준비은행( 中國 聯合準備銀行,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 화흥실업은행 (華興實業銀行,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은행, 여기를 참조 )’이니 하는 등의 허수아비 경제금융기관을 조직했다. 또한 점령지역내의 곳곳에 크고 작은 수십개의 일본과의 공동경영이라는 허수아비 은행·스파이 은행 따위를 설치했다. 또한 무슨 전기회사·전신전화회사·운수회사·성냥회사·광업회사·제철회사·수산회사·기선회사·수도회사·잡사회사·제염(製鹽)회사·방직회사·제분소·정미소니 하는 등의 무려 수 백 가지에 손을 대었다. 그밖에 점령지역내의 철로와 도로를 완전히 정리하여 교통망을 확보했다. 그들은 이같이 많은 일을 벌려 놓았지만 그 중에서도 착취기관만은 아주 완벽하게 설치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붙들지 못했다. 이유는 재벌들이 모조리 모두 대륙으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민족의 자본을 끌어 들이려고 점령지역내에 들어갔지만, 일반 지주와 소상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일면 왕징웨이로 하여금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퍼뜨리게 하고, 또 일면으로는 서민들에게 작은 혜택을 베풀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았을 때 30년 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전후의 사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적이 처음 한국에 공격해 을 때 백성들은 모두 비분해 하고 두려워하여 일제히 심산궁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병합한 후, 곧 숨어버린 사람들을 끌어내는 방법을 쓴 것이다. 도시에 모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고 세금을 감해 주는 등, 작은 혜택을 베푸는 듯했다. 또한 미신을 장려하고 중대한 반일분자라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기 공작은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다.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몇몇 시골 노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온 후로 우리 사는게 전보다 좀 나아졌어” 라고.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1년도 되지 않아 시달림으로 날을 보내게 되었다. 2, 3년쯤 지나서는 재산·가옥·농지들이 모두 동양척식회사·금융조합 등 착취기관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가련한 이들은 대소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났다. 남부여대하여 동북쪽의 황야를 향해 유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매우 불행스러운 일이다. 30년 후인 현재 나는 충칭 거리에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옛날 한국에서 들었던 것과 아마도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이렇게들 말한다. “이곳은 물건이 너무 비쌉니다. 며칠 전 고향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곳은 살기가 아주 좋아졌다나 봅니다. 전처럼 영망은 아니라니 나도 이젠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읍니다. 여기서는 하루를 보내기도 힘이드니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옛날 우리의 처지가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앞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는 꼭 구해주려고 하겠지만 이 경우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나에게 매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어찌 할 것인가! 후방의 인심이 불안정하면 전방의 승리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후방 인심을 안정시키는 중요조건은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비록 전시에 있어서 물가의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현재 충칭 물가의 폭등은 단지 전시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조건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위적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정부를 도와주고 격려하므로 억제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적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의 물가 앙등은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본토의 2, 3배 이상이나 되는 중국영토를 점령하더라도 제일차대전 중의 독일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경제의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점령구내의 모든 물자를 바닥이 날 때까지 수탈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인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러는 것일까? 노동자·농부·상인·학자·정치가 할 것 없이 절대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 중국국민의 생활은 비교적 다른 교전국보다는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닥쳐올 많은 역경이 있지만 최후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광명된 앞길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투 노력해야 한다. 절대 굽히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국가 민족을 통일하기 위한 대계는 반드시 정부에 협조하고 최고 통수자를 옹호하며 다같이 국난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도중에 한 명이라도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안주(安住)하고 싶고 영원히 복을 누리고 싶다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만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그것을 타도하기에 앞서 먼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지만 역적 왕징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원한은 왜적보다는 역적 왕징웨이에게 더 사무치지 않은가 ! 왕징웨이는 중화민족의 패륜아일 뿐 아니라, 전인류의 독충(毒虫)이다. 일본과 그 도당을 제외한 전세계가 그에게 침을 뱉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독균박멸(毒菌撲滅)을 위해서는 강력한 소독약을 써야만 한다. 혹 이에 소홀하면 그 독성은 넓게 만연될 것이 아닌가 ! 우리의 구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하면 먼저 그들의 앞잡이 왕징웨이를 없애자” “중국이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장위원장의 항전을 옹호하자”. “동부아시아의 영원한 평화 수립을 위해선 혁명지도자 장제스 장군을 옹호하자.” 이완용과 왕징웨이 - 한민 (韓民) 제1기 제1호 지난날 한국을 망하게 한자는 이완용이고, 오늘날 중국을 팔아먹으려는 자는 왕징웨이다. 둘다 적을 아버지로 여기는 (認賊作父) 민족의 변절자이며 일제의 앞잡이 이기도 하다. 한중에게 불행이 있다면, 왕징웨이와 이완용이 비록 생은 다르지만 서로 하는 일마다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3.1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왜 총독부 당국은 조선의 앞잡이들에게 진압책을 구했다. 이완용은 가장 먼저 꼬리를 흔들며 3가지의 정책을 바쳤다. 1. 해산을 권고한다. 2. 군대를 보내어 무력시위를 한다. 3. 학살을 감행한다. 이는 지난 여름 중국 각 식문에 폭로된 왕징웨이의 친일적인 책동, 난창, 창사, 난닝 등지에 대해 진격을 권하고, 주요 도시를 폭격하게해 국민정부를 위협한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왕징웨이는 적이 곧 무너질때, 국가의 항전이 승리할 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의 생존을 돌보지 않고 있다. 동서남북을 모두 팔아먹고 자연과 자원을 팔아먹어 대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버린 '일왕밀약' 을 체결한 죄는 이완용보다 더 심하다. 적이 일왕밀약을 가볍게 승낙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 1939.12.30)
가오쭝우가 1940년 1월 22일자 홍콩의 대공보 (大公報) 에 폭로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 (가오쭝우는 비밀리에 일어로 된 일지신관계조정요강의 일본어판을 찍어 대공보에 폭로했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綱 1939.12.30 왕징웨이측 : 저우포하이 (周佛海) , 메이쓰핑 (梅思平) , 린바이셩 (林柏生) , 저우룽샹 (周隆庠) 일본측 : 카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 스가 히코지로 (須賀彥次郎) , 야노 마사키 (矢野征記), 이누카이 다케루 (犬養健) 요령 (要領) 일지 양국 정부는 ‘부속 문서 1’에 기재된 새로운 일지신관계의 원칙을 준봉하여 양국 간의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한다. 사변 중 새로운 국교 관계 조정 이전 이미 존재해왔던 사실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태의 변화에 따라 전조의 원칙에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사변이 계속되는 동안 불가피하게 존속하고 있는 특수사태의 변화 및 해결, 나아가 사변의 해결은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순차적으로 조정한다. 위의 2개 항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 과정을 거친다. 부속문서 1 (일지신관계조정의 원칙) 일만지 삼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서로 선린하여 결합하고, 동아화평을 공동의 중추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한 기초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초로 한다. 일만지 3국의 일반적인 제휴 및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 등의 원칙을 설정한다. 화북지역과 몽강을 국방 및 경제상의 일지강도결합지대로 설정하고, 몽강은 추가적으로 방공을 위하여 군사적, 정치적 특수지위를 특별히 설정한다. 장강 하류에 경제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에 특별지위를 설정한다. 위 열거된 항목의 구체적인 사항은 ‘부속 문서 2’에 기재된 주요 항목들을 기준으로 한다. 부속문서 2 (일지신관계조정요항) 친선우호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여 동아화평을 확보하며, 선린우호를 위해 상호보완과 우호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인정하고, 일본과 만주는 지나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3국은 국교를 성립한다. 일만지 3국 정부는 정치,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상호간의 우호를 훼손할만 한 조치와 원인을 차츰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실시하며, 제삼국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조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협력하여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기여 한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고문을 파견하여 신건설에 협력하게 하고, 특별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 중요기관에 고문 직원을 배치한다. 일본과 만주국과의 선린관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일본은 단계적으로 조계와 치외법권 등의 철폐를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방공에 협력하고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의 구역에서 공산당 분자와 조직을 척결하고, 방공을 위한 정보선전에 서로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공동방공의 실행과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군대를 화북과 몽골의 요충지에 주둔시킨다. 일지방공군사동맹을 별도로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체적, 국지적 정세에 따라 가능한 빨리 철수하되, 현재 화북 및 장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치안이 확립될 때까지 계속 주둔한다. 공동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 함선 부대가 장강 연안의 특정지점과 화남의 특정 제도에 주둔하여 정박하는 것을 인정한다. 일본은 대체로 주둔 지역 내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항만과 수로에 대해 군사상의 요구권과 감독권을 유지한다. 중국은 일본 주둔 지역내의 경찰대 및 군부대 등 무장 단체의 배치 및 군사시설의 설치는 당분간 치안 및 국방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으로 하고, 일본은 중국 군대와 경찰대 건설에 대하여 고문 및 교관 파견, 무기 공급 등에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지속적인 연대와 공동방위를 실현하기 위해 산업, 경제 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상호보완의 취지를 바탕으로 공동호혜를 주 목적으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하여 위의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각각 필요한 협정을 체결한다. 화북과 몽강의 자원, 특히 몽강의 자원 개발과 이용해 대해서 중국은 공동방위 및 경제결합을 위하여 일본에 특별한 편리를 제공한다. 즉, 특정 자원의 개발과 이용에 관하여 경제경합지역에서 편익을 제공한다. 일반 산업에 대해 일본은 중국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생산량 증대와 농업에 관련하여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이의 개선을 지원한다. 중국의 재정, 경제 정책 수립과 관련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원을 한다. 교역에 관하여 적절한 관세와 세관 제도 등을 채택하여 일만지 간의 일반통상을 진흥시킴과 동시에 일만지간의, 특히 화북과의 물자 공급을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하게 해야 한다. 중국의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관하여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 협력을 하고, 전 중국의 항공 발달, 화북의 철도 (롱하이선 포함) , 일지간 및 중국 연안의 주요 해운 및 강의 수운, 장강 하류의 통신 발전을 일지교통 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본과 협력하여 신 상하이 건설을 추진한다. 비고 신중앙정부는 사변 이래 중국 내의 일본국 신민이 입은 권익의 손실을 배상한다. 신중앙정부는 일본과 새로운 국교 관계를 조정하기 전에 일본과 관련문제에 대해 일본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부속문서 1. 임시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의미하는 화북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및 황하 북쪽의 허난성 일대 지역을 의미한다. 화북과 일본, 만주는 국방, 경제적으로 강도 높은 결합지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지신관계 조정의 원칙에 따라 일본-만주 지역과의 업무 처리를 위하여 화북정무위원회 (가칭, 이하 동일)을 설치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과 구성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중앙정치회의에서 협의하되, 중앙정부 수립전에 왕(王, 임시정부의 수장 왕커민) 씨와 왕(汪, 왕징웨이) 씨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화북정무위원회의 권한 구성은 일지신관계가 정상화 되는 시점에 아래에 기재된 항목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도로 하되, 그 이전에 상한선을 두고 순차적으로 정리한다.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화북정무위원회가 이를 실질적, 잠정적으로 승계하여 정무 이행의 원활을 도모하게 하고 사람들을 동요하지 않게 한다. 공동방위와 방공에 관해서는 (1) 일본군 주둔에 따른 사항을 처리한다. (2) 일지 방공,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3) 기타 일지 군사협력을 처리한다. 경제제휴, 특히 매장된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은 일본 – 만주국- 화북의 물 공급에 관한 것으로, (1) 일본의 매장자원 개발 및 이용에 관한 특별 편익 사항을 처리한다. (2)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물자 처리에 관한 합리적 사항을 처리한다. (3) 일본 – 만주국 – 몽강 및 화북간의 통화 협력에 관한 사항 처리한다. (4) 항공, 철도, 통신 및 주요 해운의 지원 협력 사항 처리한다. 일본인 고문 채용 및 직무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중앙정부는 연합준비은행제도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는 기간동안 필요한 지원을 한다. 4-1 화북정무위원회와 중앙정부간의 주요 사항을 일시적으로 규율한다. 화북정무위원회는 소요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한다. 이를 워해 관세, 염세 및 통원 세칙상 중앙세이나 관세 수입의 일정 비율과 염세 수입의 영어부분, 통세는 일시적으로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상술한 국세징수기관의 감독은 중앙정부가 화북정무위원회에 위임한다. 4-2 화북정무위원회는 각종 채권을 보유, 운영한다. 4-3 관유재산은 계속하여 화북정무위원회에 속하게 하며 차후 조정한다. 4-4 세관, 우편, 항공은 중앙정부의 관리하에 두되, 점진적으로 이를 실현하게 한다. 4-5 룽하이선의 관리 및 운영은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4-6 제삼국과의 외교교섭은 중앙정부가 하고, 일본 – 만주국간의 교섭 및 지방과의 교섭처리는 화북정무위원회가 한다. 2. 유신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유신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유신정부를 동요시키는 것을 막되, 통합을 유도하여 중앙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된 후 유신정부는 양해하여 정무위원회 등을 설치하지 않는 만큼, 왕징웨이 측은 유신정부의 주요인물의 체면과 위상을 고려한다. 중앙정부가 수립되고 유신정부가 해산될 때 중앙정부는 유신정부 기존의 정무를 계승하여 정무를 원활하게 수행하여 관헌과 인민이 불안을 가지지 않게 한다. 장강 하류 지대에서 일지경제강도결합을 실현하기 위한 일본의 특별요구는 다음과 같다. 4-1. 신 상하이에 대하여 신 상하이 건설에 관한 사항에 협력한다. 신 상하이에서 일본군 주둔에 따른 조치사항을 처리한다. 신 상하이에서 항공 및 주요 해운인 장강의 민간 해운 및 통신 협력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기타 일반 일지협력에 관하여 신 상하이에서 처리한 사항을 처리한다. 4-2. 위의 일본측의 요구를 용이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일지경제협의기관의 설치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3. 몽강정부와의 관계 조정요령 본 요령에서 이야기하는 ‘몽강’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 북쪽의 (만리장성 안쪽 지역도 포함) 의 지역을 의미한다. 몽강은 국방, 경제적으로 일만지 삼국의 강도결합지대로서 특수성을 고려하여 외교 이외의 행정, 입법, 사법, 군사, 대 몽강 교섭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자치를 인정하는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이다. 몽강연합자치정부와 신중앙정부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왕징웨이 또는 그의 대표자와 덕왕 및 그의 대표자와 회견을 통해 문서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한다. (1) 중앙정부는 몽강연합자치정부의 고도의 방공자치를 인정한다. (2) 두 정권의 관계 조정에 관하여 본 양해에 따라 신중앙정부 수립 후 별도의 협정을 체결한 4. 전항의 이해가 성립될 때 몽강연합자치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정치회의에 참석한다 5. 중앙정치회의에서는 제3항의 양해 범위를 벗어난 사안을 다루지 않는다. 4. 샤먼 왕징웨이 측은 샤먼을 특별행정구역으로 두는 것을 인정한다. 5. 화남 연안의 특정제도 화남 연안의 특정 제도 가운데 하이난 섬 지구의 중앙정부 직할의 행정조직 및 군사처리기관은 본 섬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바탕으로 좌기의 요구사항을 처리하도록 한다. 일본군의 주둔에 수반하여 발생한 사항 일본과의 군사 및 치안 협력에 관한 사항 국방상 필요한 특정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한 사항 항공, 통신, 해운에 관한 사항 비고 본 요령은 장래 일지간에 약속해야 할 사항들 및 지나 내정에서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항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가오쭝우의 폭로에 대한 왕징웨이의 반응은 여기를 클릭 : ) (중국연합준비은행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 )
- 미 국무장관 성명 (1940.3.30)
코델 헐 (Cordell Hull) 제 47대 미합중국 국무장관.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무려 12년 가까이 수행하였다. 미 국무장관 성명 (왕 정권 성립에 관한 미합중국 국무장관 성명) Statement by the Secretary of State of the United State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Wang Government 1931년 이래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비추어 볼 때, 난징에 새 정권을 세우는 것은 한 나라가 이웃 나라에 군대를 통해 그 의지를 강요하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과 정상적인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차단하는 계획의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난징의) 성장은 ‘외부 권력’ 의 지도 아래 중국에서 기존에 설립된 다른 정권의 제도와 모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기능적으로 특히 외부 권력의 이익을 선호하고 미국과 다른 제삼국 국민들이 법적으로 정당한 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누리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외부 세력’ 의 고위 관계자들이 자국은 상대국의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의도가 있으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발전하면 이러한 의도가 증명될 것이라 말한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난징에서 새워진 새로운 정권의 모습을 보면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모두 그러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을 국가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의 입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극동 지역의 상황에 대한 미합중국의 태도와 입장은 여러 번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태도와 입장은 변함이 없다. 12년 전 미합중국 정부는 다른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현재 충칭의 정부가 대다수 중국 국민들의 충성과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라 믿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한 계속하여 충칭의 정부 를 정당한 중국 정부로 인식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명에 난징국민정부는 물론, 일본도 불쾌감을 들어내며 이에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마 야키치로 (須磨弥吉郎, (1892~1970) ) , 일본제국 내각 정보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1941년의 대미교섭에도 참가하였다. 일본 외무성 반박성명 (비공식) - 스마 야키치로 외무성 정보부장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현재 지나에 일어나고 있는 신동향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8년 12월 30일 미국 정부의 대일본통첩에서 스스로 말한 “미국 정부는 극동 사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에 완전 모순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일본군은 지나 전체의 4할가량을 점령하고 있다. 해관 수입의 약 95%는 왕징웨이씨를 수반으로 한 국민정부의 취득이며, 주요한 해항 정부는 모두 일본군에 수중에 있다. 현재의 이런 사실을 미국 정부는 결코 눈감을 수 없다. 헐 국무장관은 왕징웨이씨를 일본군이 추천하였다고 하나 왕징웨이씨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동아 화평을 위해 진췌하고 일지 양국과의 긴밀한 제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결심 아래 이번의 국민정부 성립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헐 장관은 일본이 지나를 경제적으로 봉쇄한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이는 전시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의 나타나게 될 경제적 성과 등을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은 미국이 본래 화평을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미국이 현재 일본과 싸우고 있는 충칭 정부에 대하여 불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노무라-그루 회담 (1939년 말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노무라 키치사부로 (野村吉三郎)와 주일미국대사 조지프 그루 (Joseph Grew) 의 회담을 이야기한다.) 이래 미국이 선결적 정신으로 일본과 토의하려 한 사실과도 모순된다. 요컨대 미국 정부의 이번 행위는 스팀슨 원칙 (헐 외무장관 바로 전의 외무장관인 헨리 L. 스팀슨 (Henry L. Stimson)을 의미한다. 스팀슨은 만주사변 후 무력에 의한 국제적 영토 변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의향과 스팀슨 일파의 일본침략불승인위원회 (American Committee for Non-Participation in Japanese Aggress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1938년에 설립되었다.) 가 최근 대일금수를 호소하고 충칭측에 원조를 하고 있는 사실은 동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려는 제국에 실로 불쾌한 사실이다. 중화일보 반박성명 중국은 대외적으로 문명국가로, 문명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문명국가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외국인의 중국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외국인의 소위 중국에 대한 특권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정부 환도 선언 및 국민정부의 정강, 그리고 왕 선생과 신문기자단의 담화 중에도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헐 국무장관의 성명에 대해서도 이로서 답을 하려 한다. 국민정부가 부인하는 것은 부당한 중국에서의 특권뿐이다. 이러한 특권들은 불평등조약에서 비롯되거나 불공평, 부정당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중일전쟁을 이용하여 새로운 중국에서의 특권을 획득하여 영국을 대신하여 중국을 지배하려는 주인 역할을 하려 하고 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기도에 대해 미국의 만족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헐 국무장관에게 당당히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일화평을 위해 실현한 국민정부의 환도는 중국 국민이 3년 동안 일본과의 항쟁 결과 도달한 결론에 의한 것이다. 헐 장관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은 이미 대중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지난번 소련-핀란드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소련과 핀란드의 평화조약 ( 1940년 3월 12일 체결된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의미한다.) 은 무력으로 국책을 구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미국 금융계는 소련이 화약을 통해 획득한 것을 공연하게 승인해왔다. 실로 이는 미국의 국력에 의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본인도 빨리 미국이 이 평화조약을 승인하기를 바랬다.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책약은 먼저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의 중국 내 세력을 소멸시킨 후에 일본을 타도하여 중국을 제2의 라틴아메리카로 만들려는 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심리는 대중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며 대중들은 이를 아주 비판하고 있다.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가 12년 전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승인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하였고 이는 국민정부가 중국의 정통정부를 계승하였고 때문에 이를 승인하였다는 국민정부로 하여금 충분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헐 장관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미국이 승인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민정부를 승인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위협을 가해왔으나, 국민정부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였고 헐 장관은 예전과 같이 포효하고 있으나 역시 국민정부의 난징 환도 이후의 발전을 막을 순 없다. 미국의 각종 위협과 포효는 오직 미국 자신의 역사에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는 것에 불과하기 불과하기 때문이다.
- 중국의 주권 존중 원칙 실행에 관한 일본에 대한 희망 사항 (中國主權尊重原則實行に關し日本に對する希望 / 1939.6.15)
왕징웨이는 1939년 6월의 방일에서 (이때는 비밀리였다.) 자신의 신정권 성립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일본측에 제시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방일 전지나신중앙정권수립방침을 (여기를 클릭 : ) 세우면서 이러한 왕징웨이 측의 요구를 무시했다. 중국의 주권 존중 원칙 실행에 관한 일본에 대한 희망 사항 中國主權尊重原則實行に關し日本に對する希望 일본이 진정으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자 하는 성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방일하여 일본의 여러 요인들과 접촉하며 이를 직접 느끼고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현재 일본은 중앙정부 수립 공작에 전념하고 있으며 특히 인적요소 및 기초적 실력을 구비하게 하는데 전력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측의 성의는 설명을 받아도 추상적으로 생각되어 회의적 감정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없는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이에 한 걸음 나아가 구체적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특히 필요함을 통감하게 되었다. 이에 위의 목적을 위해 정치, 군사, 경제로 나누어 기술하여 일본이 양해해주었으면 하는 부분, 지켜줬으면 하는 부분을 서술하였다. 물론 세부적인 방법은 중앙정부 수립 이후 양국 정부가 중일조정원칙 및 정신을 기조로 신중하게 연구한 후에 결정할 수도 있다. 내정에 관하여 중국 내정의 독립 자주에 관해서는 일본이 여러 번 천명한 원칙인 만큼, 이에 근거하여 일본의 호의를 중국 국민들에게 증명하고 그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하의 중요한 요점들을 나열하여 일본 측의 실행을 갈망한다. 중국은 절대로 항일, 배일사상을 논하지 않을 것이며 친일적 국민교육을 철저히 장려할 것이다. 일본 측도 역으로 친중국, 친중국적 사상 내지 태도를 시정하고 친중국 교육을 실시해주길 바란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이 우리 내정에 대해 간섭한다는 의도가 있다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신중앙정부에 정치고문 및 유사한 명의의 직위를 설치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 일본과 상의를 필요로 하는 사항은 이들 고문이 아닌 모두 정당한 경로를 거쳐 중화민국 주재 일본대사와 행하게 해야 한다. 중앙정부 각 원, 각 부, 행정부처에 있어서 내정간섭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을 직원으로 임용하지 않는다. 일본 전문가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하는 것도 그 직역을 기술 방면으로 한정하여 일반행정에는 참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방침으로 한다. 따라서 해당 부 및 기술과 관련 있는 회의에는 주관 장관의 통지를 통해 참석할 수 있게 하지만, 일반 행정회의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또한 기술고민의 초빙에 있어서는 상급 관청의 인가를 받을 필요가 있으며, 기술고문에 관한 임용규정 및 복무규정은 중앙정부를 통해 공표한다. 각 성 정부 및 특별시 정부에서도 상술한 취지에 따라 정치고문 또는 유사한 명의를 가지는 직위를 설치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철병 이전까지는 해당 지방에 일본군과의 상의 및 일반 논의 사항에 관해 해당 성 정부 및 특별시 정부에 임시적으로 교섭 인원을 설치하게 한다. 성정부 소속의 각 청 및 특별시 정부 소속의 각국에서도 행정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정치고문 또는 유사한 직위를 설치하지 않는다. 단 자연과학 및 기술고문을 임용하는 경우에는 중앙정부의 방법을 따른다. 현(縣) 정부의 논의사항에 관해 교섭비서직을 설치하고 일본군의 철병 이전에 해당 지방현시 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 외교의 방식을 따르기로 하고, 명령식 문서 및 구두식 통지는 지양한다. 현재 작전중인 지역 이외의 각 현 선무반은 신속하게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각 지방정부의 신뢰도를 높이고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피하기 위해 철병 전에 일본 주둔군은 성시현 정부와 논의를 실시하기 위해선 전임 인원을 설정하여 맡겨야 한다. 재정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에 있는 일본의 어떠한 기관과 개인도 직간접적으로 각종 세수 기관을 점유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중국에서 일본군 및 일본 민간인이 중국인을 모욕하는 듯한 행동 및 태도가 보이지 않도록 시정하게 하고, 이와 같은 사소한 사고나 양국 민간의 친선의 장애를 이루는 요소는 철병 전에 특별한 주의를 가한다. 군사에 관하여 중일 양국의 국방방침이 일치하는 이상 우리의 군사시설은 반드시 일본과의 공동목표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중국의 유일 최고 군권의 독립을 위해서는 필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중앙의 최고 군사기관 (군사위원회 혹은 국방위원회처럼) 에는 고문단을 설치하되,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의 군사 전문가를 초빙하여 이를 조직하는 고문단 수는 일본이 절반, 독일-이탈리아가 절반을 차지하게 한다. 고문단장은 일본인이 담당하게 하며 국방계획 및 군사시설의 기획을 보좌하는 단장의 직권 및 범위의 규정은 중앙정부가 제정한다. 각종 군사교육기관에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군사전문가를 교관으로 초빙한다. 중국군을 감시 혹은 속박하는 것과 같은 의혹을 피하기 위해 각 부대내에선 여러 명의를 통하여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군사전문가를 임용하거나 초빙하여 직무를 담당하지 않게 한다 . 단, 중앙의 최고군사기관에서 파견한 고문으로서 부대를 시찰하는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찰은 인사 과정을 거칠 것을 요한다. 각종 병기제조공장은 필요한 경우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전문가를 기사로 임용하게 한다. 중앙정부 난징 환도 이후 중국군대가 신중앙정부로 전향하는 경우에는 협의하여 일본군은 일부 후퇴하여 그 구역을 해당 전향한 군대에 부여하거나 다른 지역을 주둔지로 부여해줄 것을 희망한다. 경제에 관하여 경제합작은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거하여 양국 인사들이 공인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원칙의 구체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시하길 요망한다. 중국의 일본 군사기관, 민간기관 혹은 개인이 점령하여 몰수한 중국의 공장 및 광산, 상점을 속히 중국측에 반환할 수 있도록 충분히 합당한 방법을 규정한다. 현재 합작이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고유자산을 평가하는 것은 객관적 표준에 의해 재평가한다 합자경영의 사업에 대하여 일본 측이 주식 등을 제공하여 실제 상의 출자를 하는 것은 부당하기에 시정해주기 바란다. 합자경영의 사업에서 일본측의 자본액은 과반 이상을 얻을 수 없다. 합자경영의 사업에서 최고 주권은 중국에 속하게 할 것을 요한다. 중앙정부의 난징 환도 전 군사점령기간 동안 허가받지 못한 계약은 재심사의 여지를 부여한다. (비고) 위의 4, 5항은 당연한 일로, 중국인의 복귀 및 투자를 신속하게 촉진시키기 위해 신중앙정부는 이를 선전의 한 방법으로서 일본 측이 한층 더 양해해주길 바란다.
- 일지신관계조정방침 (日支新關係調整方針 / 1938.11.30)
1938년 11월 30일, 일본 고노에 내각은 왕징웨이에 의해 새롭게 세워질 신정권과 일본의 관계를 규정하는 일지신관계조정방침을 세웠다. 이는 왕징웨이가 충칭탈출을 결심하게된 중광당회담의 결과인 일화협의기록에서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일지신관계조정방침 (日支新關係調整方針) 일만지 (日滿支) 3국은 동아에서 신질서 건설이라는 이상아래 상호선린으로서 결합하여 동양평화의 주축이 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는다. 이의 기초가 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호혜를 기조로 하는 일만지의 일반적 제휴와 선린우호, 공동방공, 공동방위, 경제제휴의 원칙을 제정한다. 북지나 및 몽강에서 국방상 경제상 (특히 자원의 개발 이용에 있어) 일지강도결합지대 (日支强度結合地帶)를 설정한다. 몽강지방은 전항외에 특히 방공을 위해 군사상 정치상 특수지위를 설정한다. 장강 하류지역에 경제상 일지강도결합지대를 설정한다. 남지나 연안 특정도서에 특수지위를 설정한다. 이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별도로 비준하게 한다. 일지신관계조정요강 (日支新關係調整要項) 선린우호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삼국은 상호의 특징을 존중하고 혼연상 제휴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선린우호의 열매가 맺을 수 있게 상호우호 촉진의 수단을 강구한다. 지나는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 및 만주국은 지나의 영토 및 주권을 존중하며 일만지 삼국은 국교관계를 새로이 수립한다. 일만지 3국은 정치, 외교, 교육, 선전, 교역 등 전반에 있어서 상호적인 호의를 파괴하는 조치 및 원인을 철폐하고 장래에 걸쳐 이를 제거한다.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를 기조로 하는 외교를 행하고 이에 반하는 일체의 조치를 제삼국과의 관계에서 취하지 않는다. 일만지 3국은 문화의 융합, 창조 및 발전에 협력한다. 신지나의 정치형태는 분치합작주의에 입각하여 시행한다. 몽강은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으로 하고 상하이, 칭다오, 샤먼은 각각 방침에 근거한 특정행정구역으로 둔다. 일본은 신중앙정부에 소수의 고문을 파견하여 신걸설에 협력하게 한다. 특히 강도결합지대 및 기타 특정 지역에서 필요한 기관에 고문을 배치한다. 일만지선린관계의 구현에 따라 일본은 점차 조계, 치외법권 등의 반환을 고려한다. 2. 공동방위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협동하여 방공에 임함과 동시에 공통의 치안과 안녕의 유지에 협력한다. 일만지 3국은 각각 영역 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제거함과 동시에 방공에 관한 정보선전 등에 대해서 제휴, 협력한다. 일본과 중국은 협동하여 방공을 행한다. 이를 위해 일본은 필요한 군대를 북지 및 몽강의 주요지역에 주둔한다. 별도로 일지방공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제2항 이외의 군대는 전반적인 정세의 수응하여 조기에 이를 철수시킨다. 단, 공동의 치안과 안녕의 유지를 위해 장강과 연안의 특정지점 및 남지나의 특정 도서와 제도에 관련된 지점에 약간의 함선부대를 주둔시킨다. 또한 장강 및 지나 연안에 있어서 함선의 정박을 자유로이 하게 한다. 지나는 앞항의 치안협력을 위한 일본의 주둔에 대해 재정적 협력의 의무를 가진다. 일본은 주둔지역에 존재하는 철도, 항공, 통신 및 주요 수로에 대한 군사상 요구권 및 감독권을 보류한다. 지나는 경찰대 및 군대를 개선, 정리함과 동시에 일본군 주둔지역의 군사시설은 당분간 치안 및 국방상 필요한 최소한으로 한다. 일본은 지나의 군대 및 경찰대 건설에 관한 고문을 파견하고 무기 공급등에 있어 협력한다. 3. 경제제휴의 원칙에 관한 사항 일만지 3국은 상호제휴 및 공동방위의 열매를 맺게 하기위해 산업 경제등에 관하여 장단상보, 유무상통의 취지에 기초하여 공동호혜를 취지로 한다. 일만지 3국은 자원의 개발, 관세, 교역, 항공, 교통, 통신, 기상, 측량 등에 관해 위의 취지에 따라 각자의 요지를 구현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한다. 자원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해서는, 북지와 몽강에서 일본과 만주국의 부족한 자원을 획득하고 매장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을 시책의 중심으로 삼고 지나는 공동방위 및 경제적 결합의 견지에서 이에 특별한 편익을 제공하고 그 외의 지역에서도 특정 자원의 개발에 관해 경제적 결합의 견지에서 필요한 편익을 공여한다. 일반 산업에서는 노력하여 지나측의 사업을 존중하고, 일본은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다. 농업에 관해서는 개량을 원조하여 지나 민생의 안정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일본의 필요 자원의 배양을 도모한다. 지나의 재정경제정책 확립에 관해 일본은 필요한 원조를 한다. 교역에 관해서는 타당한 관세 및 해관제도를 채용하여 일본과 만주국간의 일반통상을 진흥함과 동시에 일본과 만주국, 북지나간의 물자 수급을 편하고 합리적이게 한다. 지나에서 교통, 통신, 기상 및 측량의 발전에 대해 일본은 필요한 원조 내지는 협력을 한다. 지나 전국의 항공 발전, 북지나의 철도 (이는 룽하이선 (隴海線)을 포함한다.) , 지나 연안에서의 주요 해운, 장강에서의 수운 및 북지나와 장강 하류를 연결하는 통신은 일지교통협력의 중점으로 한다. 일지협력을 통해 신 상하이를 건설한다. 부록 지나는 사변 발발 이후 지나의 일본 국민이 지니고 있던 권리에 대해 손해를 배상한다. 제삼국의 지나에서의 경제활동 및 권익은 일만지 경제제휴 강화를 위해 제한하는 것이 당연하나, 국방 및 국가 존립의 필요에 입각하는 범위가 아닌 제삼국의 활동 내지 권익을 부당하게 배제, 제한하진 않는다.
- 중국신정권수립방침 (支那新中央政府樹立方針 / 1939.6.6)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은 1939년 6월 6일, 왕징웨이의 방일전에 왕징웨이정권의 성립방침을 만들었다. 중국신정권수립방침 (支那新中央政府樹立方針 / 1939.6.6) 신중앙정부는 왕(汪)을 중심으로 하여 우페이푸, 이미 구성되어 있는 정권, 충칭의 전향한 이들을 구성요소로 하는 것으로 , 지나사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나측의 적절한 협력에 대한 의지를 수립하는 것이다. 신중앙정부는 일지신관계조정에 관한 원칙에 준거하여 일지의 국교를 정식으로 조정한다. 그리고 이 신정권에 참가하는 이들은 본 원칙을 수락하게 한다. 신중앙정부의 구성, 수립시기는 전국에 걸친 전쟁지도상의 단계에 응하고 자주적 견지에 근거해 통제할 수 있는 인적요소 및 기초적 실력의 구비를 요한다. 장래 지나의 정치형태는 그 역사 및 현실에 부응하는 분치합작주의 에 준거 하게 하고 그 내용에 관해서는 일지신관계조정방침에 준거하여 북지나를 국방 및 경제상으로 일지강도결합지대(日支强度結合地帶)로, 몽강을 고도의 방공자치구역으로 설정하고 양쯔강 하류 지역 남지나의 연안특정도서에 특수지위를 설정하는 것 외에는 내정문제로서 지나측에 위임하는 것을 본칙으로 하여 애써 간섭하는 것을 피한다. 특히 신중앙정부의 형태에 있어서는 지도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동시에 기존에 구성된 정권과 우리간의 특수관계를 고려하게 한다. 국민당 및 삼민주의에 관해서는 용공항일을 포기하게 하고 친일, 친만(親滿), 방공을 방침으로 수정하게 하면 그 존재를 인정한다. 충칭 측이 항일용공 정책을 포기하고 필요한 인사교체를 행하고 제1항,2항을 수용하면 굴복으로 간주하고 신중앙정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 1938.11.20)
이름바 '중광당 회담' 의 결과로 완성된 일화협의기록은 왕징웨이의 충칭탈출을 결정하는 배경이 되었다. 일화협의기록 日華協議記錄 (1938.11.20) 쇼와 13 (1938) 년 11월 20일, 일본 측 가게사 사다아키 (影佐禎昭), 이마이 다케오 (今井武夫) 두 명은 중국 측 가오쭝우 (高宗武), 메이쓰핑(梅思平) 두 명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의를 성사시켰다. 1. 일화 양국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침략 세력으로부터 동아를 해방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이란 공동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호 공정한 관계에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관계를 조율하고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열매를 맺고 공고히 결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결정한다. 제1조 : 일화방공협정 을 체결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일독이(日獨伊) 방공협정에 준하는 것으로 하며, 상호협력을 이루고 또한 일본군의 방공주둔을 인정하며 내몽골 지방을 방공특수지역에 포함시킨다. 제2조 : 중국은 만주국을 승인한다. 제3조 : 중국은 일본인에게 중국 내륙에서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승인하고 일본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철폐한다. 또한 일본은 중국 내의 조계 반환도 고려한다. 제4조 : 일화경제제휴는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밀하게 경제합작의 결실을 추구하여 일본에 우선권을 인정하고 특히 화북의 자원 개발 이용에 대해서는 일본에 특별한 편의를 제공한다. 제5조 : 일본은 중국의 사변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 내 일본 거주민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나 전비의 배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제6조 : 협약 이외의 일본군은 일화의 평화회복 후 즉시 철수를 개시한다. 단, 중국 내지의 치안 회복이 이루어진 후 2년 이내에 완전히 철병을 완료한다. 또한 중국은 본 기간 동안 치안의 확립을 보장해야하며 주병지점은 상호합의를 통해 결정한다. 2. 일본 정부는 위와 같은 시국 해결 조건을 차후 발표하며 왕징웨이씨 등 중국 측 동지들은 곧 장제스 와의 절연을 천명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중일제휴 및 반공정책을 성명함과 동시에 기회를 보아 신정부를 수립한다. 쇼와 13 (1938) 년 11월 20일 일본 측 가게사 사다아키, 이마이 다케오 중국 측 가오쭝우, 메이쓰핑 일화협의기록 양해사항 日華協議記錄諒解事項 제1조의 방공주둔은 내몽골 및 연락선 확보를 위해 베이징과 톈진지역에 주병하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주병 기간은 일화방공협정이 유효하는 기간으로 한다. 제4조의 우선권이란, 타국과 동일조건에 있을 때 일본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한다. 일본은 사태를 위해 난민 구제에 협력한다. 일화비밀협의기록 日華秘密協議記錄 일화 양국은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고 선린으로 강하게 결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의 실행을 약속한다. 제1조 : 일화 양국은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상호 친일, 친화(親華) 교육 및 정책을 실시한다. 제2조 : 일화 양국은 소련에 대응하여 공동의 선전기관을 설치하고 또한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여 평시에는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내몽고 연락선 확보를 위하여 필요하다 생각되는 지역에는 일본군을, 신강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게 하여 협력하게 하고 전쟁시에는 공동작전을 실시한다. 제3조 : 일화 양국은 공동으로 동양의 반식민지적 지위를 점차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일본은 중국을 원조하여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 제4조 : 일화 양국은 동양의 경제부흥을 목적으로 경제적으로 합작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따로 연구한다. 경제합작은 중국 이외 남양 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한다. 제5조 : 위 조항 실시를 위해 일화 양국은 필요한 위원을 둔다. 제6조 : 일화 양국은 아시아에서 일화 양국외에 다른 국가도 가능한 본 협정에 가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 전국 장병들에게 고하는 글 (告全國將士書 / 1943.1.19)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전국 장병들에게 고하는 글 (告全國將士書) 올 해 1월 9일 오전 10시, 국민정부는 중일기본조약의 일관된 정신에 따라 대동아전쟁의 참가를 공식 선언하고 우방인 일본과 중일공동선언을 체결하여 영미와의 전쟁을 공동으로 완수하고, 공동의 적을 타도하기 위해 양국 정부는 부동의 결의와 신념으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협력하는 한편, 조계반환 및 치외법권 철폐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40년 동안 혁명에 종사해 온 국부께서 간절히 원하셨던 불평등 조약의 철폐는 오늘날 기쁘게도 실현되고 있다. 이제부터 중국은 자주독립, 완전자유의 입장에서 동아의 여러 이웃 국가들과, 세게의 여러 우방들과 합심하여 대동아전쟁을 보위하는 공동전선에 들어설 것이며, 그 의의는 매우 크다. 대동아전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우리 장병들의 임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막중한 것이다. 나는 우리 전우들에게 오늘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근래 백년 동안, 영미 제국주의자들은 흉악한 표정을 가지고 악랄한 손짓을 펼쳐 우리 동아민족에게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서의 침략을 가하며 교묘한 강탈의 역사를 세워왔다. 우리나라도 아편전쟁 이래 그 침해를 받아 각종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차식민지 지위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우방인 일본은 재작년 12월 8일, 동아 민족 전체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을 통감하고 대동아전쟁을 감행하여 동아에 도사리고 있는 영미의 잔학한 세력을 소탕하고 대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도모하였으며, 독일과 이탈리아가 축이 되는 유럽 신질서 건설에 호응하여 세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의 그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는 동방의 도의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며, 동방민족의 공존종영의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 서방의 만든 패도제국주의가 세계에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며 세계에서 강권을 없애고 공리를 얻게 하는 것이며, 피압박자가 압박자로부터 정의의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이 전쟁의 노력의 결과에 달려있다. 국부께서는 일찍이 우리들에게 중국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삼민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 바가 있다. 국부께서는 전부터 중국이 자유와 평등을 얻으려면 동아 민족 전체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었으며, 지금 국민정부는 의연하게 대동아전쟁 참전을 선포하여 국부께서 이야기하신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을 위해 열렬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실로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위대한 대사명인 것이다. 충칭 정권은 서쪽의 변경에서 국민정부 통치지역에 평화속에서 발전하는 것을 질시하고, 영미제국주의의 위협과 회유의 미몽에 현혹되어 이름바 영미전선에 참가하여 동아인이 동아인을 죽이는 잔학함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버마로 출병하고, 광저우, 우한 등의 지역을 적기로 하여금 폭격하게 하여 끊임 없이 공격하며 우리의 화평 건설을 방해하며 실로 동아 건설의 파괴자이자 동아 화평의 반역자가 되었다. 이러한 충칭이 아직까지 잔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영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화평을 조속히 실현하고 통일을 조속히 완성할 필요가 있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며 영미는 격파되어 동아침략세력은 파괴되었고, 충칭 정권은 스스로 궤멸하고 있다. 화평통일이란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도 우방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이래 불과 1년만에 이미 각지에서 전례없는 위대한 전과를 거두며 진전을 이루고 있다. 남태평양과 버마에서 모든 영미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특히 솔로몬 해전이 거듭되면서 영미는 큰 타격을 입었고, 반격능력은 더욱 떨어졌으며, 독일-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영미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북아프리카에서의 공세는 영미를 부진과 퇴세에 빠지게 하여 다시 반격할 수도 없게 하였다. 옛말에 “군사는 명분이 옳으면 힘이 쎄다” (師直爲壯, 曲爲老) ,춘추좌씨전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중화민족이 대외전쟁에 참가했던 여러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번 전쟁이 가장 명분 옳은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선현들이 소위 인의의 군대 (仁義之師, 정충악전에서 비롯된 말. 정의로운 군대를 의미)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우리 군대는 영미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할 것이다. 전국의 장병들이여! 이 나라 민족이 엄중한 고비를 맞아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보국하려는 이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근면하고 용감하게 충성을 다하여 적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울 것인지, 어떻게 우군과 동고동락하는 정신을 가지고 동생동사의 투쟁을 도모할 것인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 육해공군의 각 장교들은 모두 병력을 통솔하는 중책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군은 용맹스럽게 매진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우리 국군 모두가 정예병사가 되고 강군이 되어 지금의 신성하고 위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국가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적 영미의 기운을 빠르게 쓸어버리고,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나아가 동아의 공영 실현을 도모하고 세계평화의 완성을 도모하고 흥망성쇠를 이루는 이 일전을 함께 치루자. 그대들에게 큰 기대를 건다. 위원장 왕자오밍.
- 화교 모군의 편지에 답하다 (覆華僑某君書 / 1939.3.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화교 모군의 편지에 답하다 (覆華僑某君書) 모 군(某 君)! 그대가 3월 14일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나는 매우 감동했다! 그대는 내가 가진 대의를 매우 믿고 있으나 , 이를 위한 나의 결정에 대해서는 아직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대의 믿음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만큼, 그대가 가지고 있는 의구심 을 해소 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만약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화평의 조건을 이미 내걸었고, 그 조건이 망국의 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면 어째서 화평을 이야기할 수 없는가? 우리의 오랜 친구 천자겅 선생은 “화평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한간” 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왜 화평을 말하는 것이 한간인가? 헌법에서는 국가의 강화의 대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럼 국가는 한간 행위를 할 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충효인애신의 화평 (忠孝仁愛信義和平)’ (쑨원이 삼민주의의 민족주의에서 제창한 8가지의 덕, 이름바 팔덕(八德) 으로, 중화민국에서 미덕으로 여겨지며 여러 관공서의 현판에 사용되었다.) 의 현판 글자를 ‘충효인애신의 한간 (忠孝仁愛信義漢奸)’으로 바꿔야 하는가? 이러한 말들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대가 의심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대는 내게 “유럽이 곧 싸우게 될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국면은 전쟁준비와 전쟁회피라는 두 개의 저울이 여전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유럽 정부 당국도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대는 이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유럽전쟁에 급급하고, 미국도 마찬가지로 중일전쟁보다 유럽전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유럽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중일전쟁에 대한 각국의 관심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대는 유럽전쟁이 터져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건가? 그리고 최근의 전쟁은 당사자들끼리 속전속결을 꾀하지만, 여러 사정이 겹치게 되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럽의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난다 치자, 어느쪽이 승리할지 그대는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는가? 게다가 그대가 생각한 쪽이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국제관계는 복잡하여 국가간의 이해충돌이 이렇게 변덕스럽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유럽전쟁에서의 승리가 우리 중국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럽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영불러 와 독일 이 대결하게 될것이며, 미국이 영불러 쪽에 가담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독일은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영미불러가 전쟁에서 이기면 군대를 일본에 보낼 것이기에 일본은 반드시 굴복하고 멸망할 수 밖에 없다 는 막연한 낙관론 을 꺼내고 있다. 이러한 막연한 낙관론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항전을 계속하기 위한 책략인가? 그대는 또한 내게 “지금 항전의 상황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대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래 인민은 힘을 다해 한마디 불평없이 견뎌왔고, 장병들은 용감하게 희생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의 원기이자 중화민국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일본이 화평조건을 내민 것도 이를 통해 중국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화평운동이 성공한다면 그 공은 모두 항전 민중과 장병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전의 힘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대평가하게 되면 이미 발휘되고 있는 힘을 헛되이 낭비하게 되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헛되이 잃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지금 항전 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어떻게 나날이 좋아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전 이후 잃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고 그 시간이 짧아서 송나라의 멸망에서도, 명나라의 멸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례가 없는 일 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송나라와 명나라는 망하려 할 때 조정은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잘못된 장수들은 파면하고 벌해왔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한 감찰위원이 “땅을 잃고도 백성들의 슬픔을 듣지 않으니, 군사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그는 바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뒤로 조정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부는 많은 중요한 도시들을 잃으면서 “거점을 옮긴다”,“전략을 변경하는 것이다”,“이미 전략상으로 가치가 없는 곳이다”, “이미 적에게 타격을 주었고 전략적 목적이 이미 달성되어 이곳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와 같은 말을 하면서, 하나도 괴로워보이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의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항전이 나날이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송나라와 명나라가 망하려 할 때 조정 은 싸우고 (戰) 지킨다 (守) 라는 두 글자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불행히도 전쟁에서 져 어쩔 수 없이 이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조정은 두 글자를 바꾼 듯하다. 하나는 잃어버리다 (丟), 하나는 태우다 (燒) 로 말이다. ‘진지를 옮긴다’ 와 같은 말은 ‘잃어버리다’ 를 상징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태우다’ 를 상징하는 문장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광저우는 가장 이를 잘 설명하는 사례일 것이며, 창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잃어버리는 것’과 ‘태우는 것’이 점점 커지고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땅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이 두 글자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의 이 두 글자 와 공산당의 소위 유격전 이 합쳐지며 잃어버리고 불타지 않은 지역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대도 역사를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산당이 말하는 유격전은 도적떼의 변명 에 불과한 것이다. 인민은 벼, 유격대는 메뚜기와 같다. 가는 곳마다 태워버리지 않는 곳이 없다. 예전 사람들은 도적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놀라곤 했는데, 지금 공산당은 똑같은 단어에 문맥을 붙여 항전의 비결로 여기게끔 하고 있다. 그들의 문장 은 미사여구 일 뿐으로, 사실과는 다르다. 그대가 해외에서 본 것은 이러한 ‘문장’ 이다. 문장에서는 이렇게 끝까지 항전할 수 있는 비결이 있으니 자연스레 항전의 상황이 나날이 좋아진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제 내륙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전부터 민중은 군사력의 일부라고 하였고 지금도 정규군을 도울 수 있는 수많은 민중이 있는데 이들이 공산당의 유격전에 휘둘리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그대가 아는 바인가? 작년 11월, 나는 충칭에서 ‘전면전쟁’ 과 같은 글을 몇편 발표 한적 있는데, 공산당은 한 글자 한 글자 욕을 퍼부었다. 그대는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한마디로, 항전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고 이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항전이 나날이 어려워지는 것을 알고 항전을 지속할 수 밖에 없다면, 항전 기간동안 드러난 결점을 뼈아프게 고쳐나가야 한다. 당국 이 국민을 속이는 것을 막아내야 하고, 공산당 이 이틈을 타 국민들을 겁탈하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 이를 고치지 않는 것은 질병이 있는데도 숨기지 않고 치료를 기피하는 것과 같으며, 병을 더욱 악화시켜 화근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항전이 이대로 가게 된다면, 항전의 승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항전 외의 화평의 길 이 있다면, 그 화평의 조건이 망국의 조건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전의 결의와 용기를 가지고 화평을 해야 한다. 항전 이래 이미 발휘된 힘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얻을 수 있는 결과를 헛되이 보내선 안된다. 전쟁에서 화평 이라는 글자는 보통 사람들이 듣기 싫어 한다. 화평의 결과는 정복의 결과가 아니기에 빠르고 쉽게 찾아오기 때문 이다. 오늘날 일반 민중들은 일본의 침략을 싫어하고 일본을 완전히 멸망시켜야만 통쾌함을 느낀다. 그리고 화평이라는 이야기에는 자연스레 불편함을 느낀다. 일반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나, 정부가 나서서 일반인들이 이런 생각과 말을 하게 해선 안된다. 정부는 일반 민중들에게 적들에 대한 인식을 고무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부는 스스로 자신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인들이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정부는 현실을 파악하여야한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싸우고, 화평할 수 있다면 화평해야 하며 시시각각 나라가 살 길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일반인들보다 더 강렬히 주장을 하고 있고 이를 위해 날마다 양심을 속이고 허풍을 떨고 있는데 일반 민중들이 무슨 고생을 하려 이를 지지하고 협력하려 하겠는가? 하물며 정부 내에서 바른 소리를 하려 해도 입만 열면 한간 이라 손가락질 받는 지금, 누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인 사람의 시선에서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다같이 망할 판국이라는 걸 알지만 이 사실을 말하는 순간 한간의 악명을 혼자 떠맡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이 때문에 말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이유이자 망국의 원인이다. 그대는 내가 충칭에 있을때의 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를 놓았고, 똑똑한 수십 명의 경비원이 있기에 나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적기가 다가오면 나는 지하실로 들어가면 되었다. 충칭이 난징과 우한처럼 된다 할지라도 나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중국국민당의 부총재이자 국방최고회의의 부주석으로, 최고 권력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내 말을 들어준다면 다행인 것이고, 내 말을 듣지 않아도 죄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라가 불행이 닥치고 대붕괴가 찾아왔을 때 “명분이 정당하면 말도 이치에 맞는다” 라 생각하며 이를 수습하려 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될 것이었며 평생을 편안히 살다 죽은 뒤에도 영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가 나 대신 생각해보라, 이러한 상황에 있는데 어떻게 충칭을 떠날 수 있었겠는가? 그대도 알다 싶이, 나는 20대에 혁명에 뛰어든 이래로 나 자신을 위한 계획을 한 적이 없다. 하물며 지금은 이미 50대가 넘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할 한가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나는 항전이 시작된 이래 중국이 어쩔수 없이 항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항전을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에 생각하며 동시에 어떻게 해야 화평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생각해왔다. 나는 회의에서 화평을 구해야 함을 몇 번을 이야기 했는지 모른다. 광저우를 잃고, 창사가 불탄 이후에 내 의견은 더욱 단호해지고 실현되기를 기대해왔다. 나는 작년 12월 9일 격렬한 토론 끝에 나의 의견이 회의에서 채택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18일에 충칭을 떠났으며, 이 의견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충칭의 모든 사람들이 반성할 것을 것을 촉구해왔다. 내가 이때 설마 이후에 처하게 될 어려움과 위험을 몰랐겠는가? 만약 항전을 계속한다면, 우리 화평의 주장은 물과 불처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비록 결말이 화평으로 끝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화평의 동기에 대해 분명 적지 않은 악의나 사적인 추측을 가할 것이며, 그 중심에 있는 내가 어찌 화를 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이러한 어려움과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염전을 발표한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번의 문답을 했을 뿐이다. 이 문답을 남화일보 (南華日報) 에 실은 후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충칭의 반성을 기다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충칭에서 온 이들에게 나는 충칭이 나의 주장을 받아드리면 나는 개인적으로 언제든 재야의 자격으로 옆에서 협조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그대는 생각해보라, 내가 이것 외에 내 뜻을 표명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 '문답' 은 여기를 클릭 : ) 이상의 이야기는 나 개인의 이야기로, 본래는 말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대의 편지에 은근 생각이 들어 몇 마디 덧붙혔다. 이제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다시 이야기 하자면, 나의 견해는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아도, 양국은 서로 화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며, 주관적인 조건으로 보아도 양국 당국은 모두 화평의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주장이 아예 채택되지 않는 것 을 걱정하기 보다, 그 주장이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닌 중일 양국 간의 원한 때문에 제대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 을 우려하고 있다. 항전이 시작된 이래 이러저러한 원한은 날로 깊어져 원한을 풀고 마음을 열고 협력하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20개월간의 교전을 통해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중국을 함부로 침탈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고, 이에 양국 정부와 인민은 장병들의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고 인민들의 고통과 그 대가가 헛되이 희생되지 않게 할 비교적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작년 12월 22일의 고노에 성명과 29일 발표된 나의 염전은 모두 이 점에 착안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가엾은 충칭 은 고노에 성명 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나의 건의 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욕설만 낭자할 뿐, 하나도 이성적인 말투를 볼 수 없었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화평을 희망하는 표현을 보였지만, 그 진행방식은 여전히 만주사변 이후 반복되었던, 직접적인 협상을 기피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그들이 양국의 미래에 대해 비교적인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들이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야 말로 실로 국가의 복이다. 이상 말한 것은 모두 그대의 편지에 대한 답으로 발송한 것으로, 3월 21일 이후 나는 “예를 하나 들다 (舉一個例)” 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다루지 않고 여기에 함께 첨부한다. ( '예를 하나들다' 는 여기를 클릭 : ) 이에 나날이 생활이 평안하길 바란다. 왕자오밍 씀.
- 답문 (答問 / 1939. 1.30)
본 자료는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자료를 번역한 자료입니다. 왕주석화평건국언론선집 (汪主席和平建國言論選集, 1944) 의 표지. 이 책은 왕징웨이의 여러 발언 및 글을 정리한 책이다.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보도국 중앙전신사 (中央電訊社) 에서 출판되었다. 답문 ( 答問 ) (이는 1939년 1월 30일 남화일보와의 인터뷰내용으로, 1938년 8월 발표된 답문 1-2시리즈와는 다른글이다.) Q : 왕 선생께선 왜 화평을 제창하셨습니까? A : 전쟁을 선포하는 것, 강화를 맺는 것은 국가의 대권이다. 국가는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수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싸워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싸우고 , 강화를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강화를 해야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의 말만 듣고 전쟁을 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알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화평에 대해 들으면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들은 강화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이를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완전한 해답을 찾긴 어렵다. Q : 지금의 강화제의가 국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진 않을지. A : 나는 오히려 이렇게 화평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은 ‘항일이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항일은 왜 모든 것이 되었으며 왜 항일을 하는가? 이는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다. 즉, 나라의 생존과 독립을 보위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항일은 수단에 불과했던 재작년 7월. 우리는 왜 항전을 주장했는가? 이는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과 독립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화의를 주장하는가? 이는 이제는 그렇지 해야만 국가의 생존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항전은 본래 이상적이고 충용적인 것으로, 화의도 무작정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가지고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랬던 항전이 국민들의 마음을 혼돈시키고 군대의 사기를 흔들게 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오히려 ‘항일이 모든 것’ 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항일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없게 하여, ‘항일은 통일을 위한 것’,‘항일은 국공합작을 위한 것’ 과 같은 말을 하여 정부내의 반공파벌을 숙청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한다. 이런 언행이 오히려 국민과 군대를 흔들고 항전에 손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Q : 염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짜로 국가의 생존과 독립에는 손해가 없을 것인지. A : 나는 손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Q : 염전은 전보라서 다루는 게 너무 얇은 것 같은데. A : 염전에서는 원칙을 다루었다. 이 원칙을 토대로 협상을 진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조건을 얻을 수 있다. Q : 공산당원들은 어째서 화평에 반대하는가? A : 공산당원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첫 째 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이 매일이 편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중일 전쟁은 계속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째 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중국 국민이 가난해지고 재물이 바닥나게 되면 공산당원들은 이득이기 때문이다. Q : 다른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A : 내가 보기에는 이는 일본을 밎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고 항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에 화의라는 단어를 듣고 위험하다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일본에에겐 중국을 멸망시키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답은 일본이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찾을 수 있다. 1년 7개월간의 항전은 중국을 쉽게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는 길 말고, 두 번째 길 이 있음을, 그리고 그 두 번째 길 을 가야함을 알게 했다. 이 두 번째 길 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중일합작 이다. 중일합작 이란, 선린, 방공, 경제합작을 기초로 하여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간의 합작을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렇게 될 수 있으면 수년간 만들어진 원한을 없앨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의 의심도 쉽게 풀리게 될 것이다. 이는 동아의 평화 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길은 중일 쌍방이 힘을 합쳐야한다. 따라서 일본이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일본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중국은 생존과 독립을 지키고 현대적 국가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